제 5 장

교또의 회오리바람

7

 

이튿날 일행이 늘 정해온 그 시간에 아침을 치르고나서 정사, 부사, 종사관 이 세 행수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오늘 하루의 일정을 상론하던 도중에 사달이 났다.

일인즉은 별치 않은 문제로 해서 시작됐었다.

오팔이가 전날 마상재공연때에 넘어져 무릎을 상한지라 그를 대신하여 마광우의 견마잡이군인 하인을 며칠간만 쓰도록 의논을 하던중인데 주인인 마광우가 별안간에 역증을 내면서 제 하인을 죽어도 못 내놓겠다고 고아댔던것이다.

《사신으로 온 조정의 무관이 견마잡이군도 없이 말을 타고 거리에 나다니면 나라체면이 뭐가 되겠나 말이요? 원, 세상에 이런 언어도단이 또 어디 있소?》

뭘 잘못먹은 소경처럼 우둘쩍대는 마광우의 불손한 태도에 반감이 동한 계명이네도 신경질적으로 공연을 못하면 말았지 마광우와는 한패가 되지 않겠다며 나넘어졌다.

그러할 때에 주관이 되여 내 옳다 네 그르다 갑론을박하는 일행을 옳바로 틀어잡아 선을 세워줘야 할 손문욱참의가 량반의 견마잡이군을 떼내는건 대의명분을 흐리는짓이고 또 마상재를 하루이틀 안한다고 크게 잘못될것도 없다면서 어정쩡한 립장을 취하는통에 일은 흐지부지되여 오늘래일 이틀어간 오사까에서 하게 됐던 마상재공연은 종내 튀고 말았다.

복잡하던 공론이 유정의 탄식과 아울러 끝나버린 후 마광우는 이러다가 나중엔 중앙관청의 관료인 자기까지 말구종노릇을 시키려들겠다고 투덜거리면서 씽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북쑥도 삼밭에 가 자라면 삼같이 곧아진다건만 저 사람은 왜 늘쌍 저렇게 말썽만 부리는고? 그토록 신령스럽다는 애탕산의 귀신은 요즘 대체 무얼 하는고? 저 말썽꾸러기 종사관이나 콱 좀 물어갈거지.

이런 시선들이 제 뒤잔등을 살점뜯기우게 쏘는것도 모르고 곧장 제방으로 건너간 마광우는 오래도록 성이 풀리지 않아 울떡거리다가 애써 자중하고 벼루에 먹을 뻑뻑 갈았다.

래일이나 모레쯤에 정사의 명의로 바다건너 조국의 조정에다가 그지간의 활동정형을 보하는 장계를 띄우는데 그 인편으로 밀서를 보낼 작정을 한것이였다.

마광우는 용해빠진 정사를 뒤전으로 밀어치우고 만사를 주관하는 부사의 그릇된 망동에 대하여, 더우기는 로승 유정이 본신직임을 망각하고 유람이나 연회 같은 먹자판만을 일삼으면서 허송세월을 하는데 대해 낱낱이 아뢰이는 상소문을 써서 밀봉을 했다.

그것을 남의 눈에 띄우지 않게 건사한 다음 마광우는 근간에 심심풀이삼아 자습을 해오는 문장구사에 손을 댔다가 내친김에 5언절구 한수를 휘갈겨썼다.

 

    대월강두립 (솟는 달 맞아 강변에 그린듯 섰으니)

    고루석면부 (높은 다락집은 안개속에 잠겼도다)

    금회일군중 (여럿이 모인 이 자리에서)

    유오대장부 (대장부 나밖에 또 있으랴)

 

즉흥적으로 지어내긴 했으나 글귀가 맞아돌아가고 문맥이 용용히 통하는듯 한 시구를 한참 들여다보며 그 뜻을 음미하던 마광우는 절로 흡족하여 미소를 짓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밖으로 되나왔다.

대문가의 마구간앞에선 유정이네 호행원들이 정사와 종사관이 달고온 시종들가운데서 오륙놀림이나 꽤 할줄 아는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적들과 대항하는 격투훈련을 주고있었다. 요전날 하인배들이 거리에서 왜인불망나니들한테 매를 줘맞고 들어오는 사건이 있은 후부터 창해와 계명이가 각성이 되여 짬짬이 그런 훈련을 벌려온다.

한참 기진하도록 싸움법수를 익히다가는 조련주던 사람들과 조련받던 사람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와야야 떠들면서 발차기를 해대였다.

기장짚오래기를 감아 만든 공 여러개를 허공에 높이 매달아놓고 달려나가다가 뛰여오르면서 그것을 걷어차는 숙련인데 택견술의 중요기초동작이였다.

계명이와 홍창해는 원래 펄쩍 나는 택견군들이라 맵시있는 솜씨로 태가락까지 부려가며 공을 차대는데 하인배들은 한뉘 구실아치노릇이나 해온 막팀들이라 몸을 뚱기치며 헛다리질만 해댔다.

제 하인배들이 놀아대는 꼴을 눈살이 찌긋해서 지켜보던 마광우는 기가 막혀 혀를 끌렀다.

《하루삼시 더운 기장밥을 함지로 처먹는것들이 똥자루처럼 그게 무어냐? 새끼밴 암돼지보다도 못한 놈들 같으니.》

이러고는 요전날 골목길에서 유정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승패를 가르지 못한 계명이네와의 다툼질에 대한 화풀이삼아 휙 공전을 한고패 하고 뛰쳐나가다가 훌쩍 날아오르면서 쌍다리질로 공 두개를 동시에 튕겨놓았다.

그 솜씨가 여간이 아니여서 하인배들은 눈이 퀭해져서 젊은 종사관을 새삼스럽게 지켜보다가 환성을 올렸다.

한바탕 멋들어지게 시범을 해보이고나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 하인배들한테 뭐라뭐라 훈시질을 하는 마광우한테로 홍창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보오 종사관, 좀전의 그 언행 과히 어망처망하더군요. 옛적의 제 총섭님한테 버릇없이 그게 뭐요?》

이러던 홍창해는 마광우가 홱 돌아서서 눈을 흘기는 바람에 말을 중둥무이당했다.

마광우는 창해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떡떡 을러멨다.

《조정의 관료가 동냥중한테 그쯤한건 약과란 말이야.》

그 갑작스러운 세도와 기갈질에 반감이 돋쳤으나 홍창해는 요전날 유정스님에게서 당한 훈계가 되새겨져 자중하여 반상간의 례의를 차리였다.

《여긴 왜땅인데 같은 사신일행끼리 서로 량해하며 도와야지 않겠소.》

홍창해가 공순해서 리치를 납득시키려들자 마광우는 더한층 기고만장스러워졌다.

《같잖은 상민이 누구보고 해라야? 제기랄, 오늘은 아침부터 재수없는 일만 당하는군. 이러단 진짜 같잖은 말구종들과 한무리가 되고말겠군.》

이러며 침을 찍 내뱉고난 마광우는 제 하인배들한테 당장 상마준비를 하라고 호령했다.

《냉큼 청주집으로 가자. 귀국도 안하고 교또바닥에서 하는 일없이 건들거릴바에야 술이나 마시는게 낫지.》

말을 탄 마광우가 제 종들을 앞뒤에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로 나갈 때 안채의 상방에서는 유정이가 심각해서 손문욱참의와 마주앉았다.

《상공은 마상재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처럼 여기던데 그건 잘못된 관념이오다. 우리가 왜땅에 와서 벌리는 하나하나의 일들은 다 나라와 민족의 위세를 떨치는 대업임을 아옵소. 소승이 심히 유감스러운것은 상공이 사신행차를 거느리는 정사로서 만사를 옳바로 주관할 대신 전래의 악습에 사로잡혀 량반이요 상민이요 신분구별을 하면서 오히려 단합을 깨치고있는것이옵니다. 량반이건 상민이건 개인감정들을 죽이고 일심동체가 되여야만이 나라의 리익을 성취할수가 있다는걸 어째 모르오이까?》

유정이가 여느때없이 근엄한 태도로 마디마디 그루를 박으며 후려치는 그 충고가 속으로는 맞갖지 않았으나 손문욱은 전쟁때부터 그가 나라 위해 쌓아온 산같은 공적과 국왕에게서 수차에 걸쳐 직접 하사받은 당상관직을 잘 아는데다가 그의 호랑이같은 기개앞에서 은근히 위축되는지라 맞대놓고 욕설은 못하고 입만 쓰겁게 다셨다.

바로 그러할 때에 쇼궁의 군정보좌관이 부하 몇명과 마차 석대를 거느리고 객관에 나타났다.

군정보좌관은 웬일인가 해 어정쩡히 저를 맞아주는 유정에게 제먼저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 시원히 바람이나 쏘이면서 바다에 나가 물고기사냥놀이나 하옵시다.》

《허, 타국에서 수렵놀이라.》

유정은 막부 장관의 선심이 왜서인지 께름했으나 그 청을 거절할 하등의 리유가 없는데다가 또 마침 교또주변의 병력상태를 료해하려던 참인지라 선선히 응해나섰다.

그런데 정사인 손문욱이가 자기는 몸이 그닥 편치않아 동행을 못하겠다고 거절을 하는통에 분위기가 별나졌으나 군정보좌관자체가 이미전부터 조선사신행차의 진짜 총수노릇은 유정이가 한다는것을 알고있기에 부사신만이 응해나서는데 대해 별로 탓하지를 않고 흔연히 넘기여서 일은 무탈하게 되였다.

이날 마침 마상재를 못하게 된지라 계명이와 홍창해가 백손이와 함께 유정을 호행했다.

오팔이도 놈들이 혹시 총섭님을 외진 강가에 데리고가 무슨 나쁜짓이라도 할가 우려되여 상한 다리를 띠뚝거리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유정이와 그의 젊은 호행원들은 곧 길차비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절다마로 외마를 메우기도 하고 가라마와 홍사마로 쌍두를 메우기도 한 마차들은 오사까로 향한 랑화강변길을 따라 질주했다.

맨앞에서는 군정보좌관이 시종들과 가병들을 거느리고 탄 유개마차가 달리였고 그뒤로는 유정이네 일행이 탄 유개마차가 따르고 또 그뒤에서는 물고기사냥군들과 사냥도구들을 실은 두대의 무개마차가 따라 달리였다.

교외를 벗어나 반나절길을 내처 달려 물흐름이 완만해지면서 강폭이 널다랗게 퍼진 하류에 이르렀을 때 맨앞의 마차가 먼저 멈춰섰다.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마차에서 훌쩍 뛰여내린 군정보좌관이 일행을 향해 내리라고 손짓했다.

유정이네는 천천히 땅바닥에 내려서서 주변지세를 살펴보았다. 교또쪽에서 뱀의 꼬리처럼 가느다랗게 줄기쳐오다가 혹몽우리같이 뭉툭 봉우리를 솟군 산코숭이가 강변과 이마를 맞댔는데 그 나직한 등성이밑으로는 삼간초가들이 수십채나 널려져있었다. 촌락앞과 옆으로 아스라하니 무연하게 펼쳐진 갈밭끝으로는 한두해전에 쌓은듯 한 강안방파제가 성곽처럼 둘러쳐있었다.

물고기사냥군들이 사냥도구들을 부리워 지고 방파제너머 강가로 향할 때 군정보좌관이 문득 유정이한테 턱짓으로 촌락쪽을 가리키며 한마디 던졌다.

《조선이주민들이 사는 집단부락이옵니다.》

《?…》

《수년전에 조선에 건너갔던 일본원정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온 조선사람들이 산다 그 말이옵니다.》

제놈들이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랍치하여 끌어와가지고는 따라왔다고 내막을 역전시키는 후안무치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유정은 억이 막혔다.

그의 낯색을 살피던 군정보좌관이 넌지시 한마디 던지였다.

《동포들이 사는 형편도 볼겸 동네에 들렸다 가지 않겠소이까?》

《일본에 끌려온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있는지 알고싶소이다.》

유정은 쾌히 응하며 제먼저 동네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집들이 비여있었다.

군정보좌관이 유정이를 곁에 세우고 다니면서 직접 제 손으로 길탁에 나앉은 몇몇 초가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매 집마다 부엌에는 제법 배부른 쌀자루들이 놓여있고 아래방의 말코지마다에는 명주천과 모시천으로 계절에 맞게 지은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유정이네는 왜놈들이 저희네가 잘살겠다고 강제로 랍치해온 조선사람들한테 호사로운 생활을 시킨다는게 차마 믿어지지 않았으나 눈앞의 현실인지라 그저 그런가부다 하고 심상히 여길수밖에 없었다.

유정이네가 반신반의에 휩싸여 동네를 돌아보는데 어디선가 꽤액- 꽤액- 하고 돼지비명소리가 아츠럽게 들려왔다.

뾰족지붕을 해씌운 우물가에서 베수건을 눌러쓴 장정 서넛이 황소만한 수돼지를 깔고앉아 멱을 찌르고있었다. 조무래기 몇이 그 주변에 몰켜서서 손벽을 쳐대며 좋아하는게 보였다.

유정은 야릇한 호기심이 동해 우물가로 향했다.

돼지를 잡던 장정들은 왜서인지 유정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거리면서 그와 마주서기를 꺼려하는 기색이였다.

군정보좌관이 한 장정한테 주민들이 왜 안 보이는가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장정은 허리를 굽석거리며 조선말로 대답했다.

《오늘이 민속명절인지라 들놀이를 나갔지요.》

《들놀이? 허- 좋구만.》

군정보좌관은 벙싯 웃으며 유정을 돌아보았다.

《자원로동에 종사하는 조선이주민들한테 우린 보다싶이 혜택을 아끼지 않고있소이다. 자, 이젠 가서 사냥놀이나 합시다.》

군정보좌관은 서둘러 우물가를 떠나며 유정이네를 재촉했다.

유정은 군정보좌관의 뒤를 따라 수십행보쯤 걷다가 갈밭에서 멀찍이 떨어진 잡관목이 우거진 산기슭공지에서 섬벙거리고있는 수십명의 남정들과 아낙네들을 띄여보았다. 의복차림을 봐도 그렇고 도간도간 울려오는 말소리를 들어도 그렇고 분명 그들은 조선사람들이였다.

그런데 명절놀이를 벌린다는 사람들이 무슨 일때문인지 검은 도포를 걸치고 칼을 찬 어떤 왜인을 둘러싸고 벅작 떠들고있었다.

이마살을 찡그리던 군정보좌관이 저를 호행하던 사무라이한테 뜻모를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사무라이는 잠간새에 산기슭쪽으로 달려가 검은 도포차림의 왜인을 꽁무니에 달고 돌아왔다.

《웬 소동이냐?》

군정보좌관이 가시돋친 어조로 버럭 소리치자 검은 도포차림의 왜인은 외뿔머리를 갑삭거리며 아뢰이였다.

《고마인들이 일을 하겠다고 막 야단질이옵니다. 오늘 공치면 당장 먹을 식량이 떨어진다면서…》

왜인이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군정보좌관의 독살스러운 눈총이 상판을 꿰뚫을듯이 날아들었기때문이다.

뒤늦게야 막부장관과 동행하는 유정이네가 조선사신일행이라는것을 안 왜인은 기색이 질려가지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후에야 알았지만 그자는 이곳 랑화강하구와 바다가 합쳐지는 해변에서 황무지개간에 종사하는 조선사람들을 부려먹는 현장감독이였다.

유정은 비로소 깨달아지는바가 있어 쓰겁게 웃었다.

그는 몰숨을 내긋다가 제잡담 동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기들끼리 뭐라뭐라하며 법석 떠들던 사람들이 유정이가 나타나자 말소리를 죽이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던 사람들속에서 머리털이 하얗게 센 로인이 별안간에 유정이앞에 넙적 엎드리더니 곡성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송운대사님!- 어히유…》

《?!》

유정이 놀라와 잠간 걸음을 멈추는데 숨막힐듯 한 환성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승병대장님!》

《조선에서 승군장수님이 오셨다-》

피골이 상접해진 몸에 꿰진 베잠뱅이를 걸친 남정들과 얼굴에 병색짙은 아낙네들이 유정을 에워싸며 반가와 눈물을 흘렸다.

유정은 심정이 측은해져 그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었다.

《왜나라에 끌려와 정말 고생들이 많겠습니다.》

그러던 유정의 눈길은 한 처녀에게 못박혀버렸다. 열일곱살쯤 나보이는 애젊은 처녀인데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얼굴이 핼쑥 여위고 더덕더덕 기워입은 치마자락밑으로 드러난 장딴지는 회초리처럼 가늘고 연약했다.

유정은 가슴이 아파 처녀의 윤기없는 쌍태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어주었다.

《넌 고향이 어디냐?》

유정이 측은해서 물었으나 처녀는 아무 대척도 없었다.

유정은 재차 말을 걸었다.

《아마 임진왜란때 놈들한테 끌려온 모양인데… 한창 멋을 부리며 춘정을 즐겨야 할 때에 이게 뭐냐. 너희 부모들이 이 사실을 알면 아마…》

유정이 목이 꺽 메여와 말을 더 잇지 못하는데 입술을 씰룩이던 처녀가 《어… 어… 어…》 하고 별난 소리를 내다가 얼굴을 싸쥐며 울었다.

동네존위인듯 한 백발로인이 탄식조로 유정이한테 나직이 여쭈었다.

《그 앤 벙어리옵니다.》

《?!》

《왜놈령주가 제 노리개로 삼으려다가 말을 안 들으니까 칼로 혀를 끊어버렸소이다.》

안색을 흐리던 유정은 주변에 울레줄레 둘러서있는 남정들한테 민망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곁에 숱한 조선사내들이 있으면서 조선처녀가 왜놈한테 저 지경이 되도록 놔두었소?》

남정들과 유정이사이에 서있던 백발로인이 죄송하여 주름발투성이 얼굴을 붉히다가 서글픈 어조로 유정에게 여쭈었다.

《저 사람들도 다 불행을 당한 피해자올시다. 이곳 령주놈이 제 말에 고분거리지 않는다고 부하들을 시켜 한사람씩 끌어다가 모조리 생식기를 발가버렸소이다. 조선사람의 씨를 말리우겠다면서요. 하여 저 사람들은 모두 고자가 됐지요.》

《음-》

유정은 억이 막히고 절통하여 모진 신음을 내지르면서 장발수염을 후르르 떨었다.

그는 격분이 치받치여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목에 건 념주알을 오래동안 세여넘겼다.

그를 호행하던 계명이와 창해와 오팔이도 분개하여 주먹을 틀어쥐였다.

분노의 감정이 보복의 열기로 한창 타번질 때였다.

산속에서 흰 무명저고리와 검정치마차림에 중둥매끼를 동이고 흰 수건을 눌러쓴 젊은 녀인이 나물바구니를 안고 나왔다.

벙어리처녀가 녀인한테로 종종걸음쳐가 손으로 유정이네를 가리키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어… 어…》

《좋은 사람들이란 말이지. 응, 알겠다.》

벙어리처녀한테 웃으며 머리를 끄덕여보인 녀인은 바구니를 머리에 올려이고 조선사신일행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낯선 사람들인 유정이네를 호기심에 차서 살피면서 고운 걸음씨로 살짝살짝 걸어오던 그 젊은 녀인이 별안간 흠칫 몸을 떨며 멈춰서는것이였다. 깜짝 놀라면서 《아니?》 하고 신음인지 탄성인지 분간키 어려운 소리를 지르던 미모의 녀인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풀썩 주저앉더니 눈물만 좔좔 흘리는것이였다. 녀인이 눈물을 훔치려고 흰 명주수건을 풀자 검고 윤기나는 탐스러운 머리태가 어깨굽으로 솨르르 드리워졌다.

그 미모의 젊은 녀인은 다름아닌 윤옥비였다.

그날 달리는 마차에서 굴러떨어질 때 곤도놈은 돌부리에 대갈통을 직통 짓쪼아 대갈통이 박살나서 즉사했고 옥비는 다행히도 흙구뎅이안에 떨어지면서 허리와 다리를 상하고 의식을 잃었다가 관가에 소금짐을 실어다주고 돌아오던 조선인마차군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었다. 그이후 윤옥비는 몸이 완쾌되여 조선사신을 찾아 떠날 때까지 이 마을에 눌러앉아있기로 작정하고 벙어리처녀와 한집에서 숙식하며 황무지개간에 종사하는 마을사람들의 일손을 힘닿는껏 돕고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젊고 아릿다운 녀인이 별로 낯익어 눈여겨살피던 홍창해가 기절할듯이 크게 놀랐다.

《옥비! 옥비!》

얼빠진 사람처럼 한자리에 멍해 굳어져서 웅절거리며 몸통을 부르르 떨던 홍창해는 오팔이가 잔등을 쿡 줴박아서야 펄쩍 정신을 차려가지고 옥비한테로 허둥지둥 다가갔다.

창해는 흑흑 오열을 씹는 옥비를 손잡아 일으키면서 목갈린 음성으로 뇌였다.

《살아있었구려! 얼마나 애타게 찾았다구.》

그러자 옥비는 창해의 튼튼한 어깨팍에 고운 얼굴을 묻으며 종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콩콩 줴박았다.

《왜 인제야 왔나이까, 인제야.》

《날 용서하오. 내가 잘못했소. 내가 미리 왜땅에 건너와 곳곳을 다녀봤어야 하는건데. 난 옥비가 이 세상 어디엔가 꼭 살아있을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차마 이런데 끌려와서 노예생활을 강요당하고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댔소.》

《이런 날이 있을줄 알았어요. 거기서 언젠가는 꼭 날 찾으려고 왜땅에 건너오리라 믿었댔소이다.》

옥비는 줄곧 흐느끼며 하염없이 눈물만 쏟았다.

기쁨과 설음이 한데 뒤엉켜 물목이 터진듯이 울려나오는 그의 울음소리를 가슴아프게 듣던 창해는 사랑하는 녀인을 뜨겁게 그러안고 눈물을 훔쳐주며 예이제 변함없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그 얼굴을 정겹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이게 꿈은 아닌지 하며 제 팔등을 슬며시 꼬집어보고는 천만뜻밖에 드닥친 생시의 이 현실앞에서 왜 이제야 내가 왜땅엘 건너왔을가? 약혼녀가 이렇게 야수의 땅에서 고역살이를 치르고있는것도 모르고 시골향촌에나 들어박혀 극상해서 장장 줄근심이나 해온 내가 무슨 사내고 인간이란 말인가, 이런 뼈저린 자책에 시달리면서 옥비의 물결치는 어깨를 따뜻이 어루쓸었다.

그들의 눈물겨운 상봉을 곁에서 지켜보던 유정이와 계명이, 오팔이 모두는 심정이 아릿해져 눈시울을 슴벅이였다.

그때 계명이가 무릎을 탁 치더니 유정이곁에 다가붙으며 귀띔했다.

《스님, 저 녀자가 바로 임진년 봄에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오다가 왜놈들한테 붙들렸던 그 서울대감집 규수오이다. 우리가 구원해준 아씨 있지 않소이까.》

그 소리에 유정이도 수긍이 되여 턱을 주억거렸다.

유정은 자기가 한생 애중히 여겨오는 제자중의 한사람인 홍창해와 또한 잊지 못할 사람의 외동딸인 옥비와의 기연기봉스러운 상봉을 목격하고나니 극도로 기가 막히여 피절은 탄식을 꺼지도록 했다.

그러다가 결연히 몸을 돌려 먼발치에서 난처한 기색이 된채 어름거리고있는 군정보좌관에게로 육박하듯이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는 불찌가 벙긋벙긋 튕기는 눈으로 군정보좌관을 건너다보며 서리발돋친 말투로 뇌였다.

《우린 이쯤 동행하고 돌아가겠소.》

《도승께서 그러시면 우리의 성의가 뭐이 되겠나 말이요. 쇼궁께서 아시면 노염이 산같으리다.》

군정보좌관은 당황망조하여 두팔을 쩍 벌리며 량해를 구했다.

《소승이 직접 쇼궁을 만나겠소.》

유정은 군정보좌관을 다 파먹은 김치독처럼 쓰겁게 외면해버리고 계명이네한테 따라오라고 턱짓을 해보인 후 곧 마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향했다.

몇행보쯤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돌아서서 조선사람들한테로 가 《여러분, 조금만 참고 견디시오. 내 그네들을 꼭 조국으로 데려가겠소.》 이렇게 굳이 신심을 안겨주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백손이가 앞에서 길을 열며 나갔고 계명이와 오팔은 혹시 또 놈들이 뒤에서 스님한테 흉기라도 쓸가봐 우려되여 후위를 막으며 슬몃슬몃 유정을 뒤따랐다.

일행이 다 떠나자 홍창해는 차마 걸음이 떼여지지 않아 주저하다가 급급히 옥비한테로 다가가 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예 우리랑 함께 가기요. 이제 다신 그대와 헤여지지 않을테요.》

그러는 창해를 옥비가 가볍게 뿌리쳤다.

《나 혼자선 안 가겠나이다. 이곳의 동포들이랑 그리고 규슈에 있는 도자기터의 동포들이랑 다들 데려갈 때 같이 가겠어요.》

그 말이 가슴을 치는지라 창해는 더 고집을 세우지 못했다.

그는 이 험한 곳에 꿈같이 만난 약혼녀를 두고 가기가 싫었으나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는지라 후날 송운대사님을 따라 꼭 데리러 오겠다는 언약으로 옥비를 안심시키고나서 일행을 뒤쫓았다.

눈가루를 뽀얗게 풍겨놓고 떠나가는 조선사신을 실은 마차를 맹랑해서 지켜보던 군정보좌관은 저를 따라온 시종부하들한테 김빠진 소리로 줴쳤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자.》

그러고는 제먼저 마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가버렸다.

낯색이 표독해가지고 그 자리에 앙버티고있던 군정보좌관의 가병대장인 사무라이가 불시에 칼을 뽑아들더니 현장감독을 노려보았다.

《네 자식때문에 국사를 망쳤단 말이다.》

사무라이의 칼쥔 손이 휙 반원을 그리자 감독이 헤갈라진 배를 그러안고 밑둥잘린 나무처럼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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