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왜땅에 나타난 관음보살
11
어느날 날이 저물어가던무렵에 쇼궁의 군정보좌관이 직접 조선사신일행이 든 객관을 찾아나왔다. 군정보좌관은 요전날 사신일행이 불상서로운 화난을 겪은 일을 두고 참 미안하게 됐다고 량해를 구한 후 막부군사들을 시켜 야료를 부린자들을 잡아들여 초달을 하는 한편 부상당한 사신수행원들한테는 피해보상을 해주게끔 조치를 취했다면서 불안과 조급증에 시달리고있는 조선사신들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나서 사신전원을 대궐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청하는 쇼궁의 취지를 알리였다.
여러날전 후시미성안에서의 마상재공연때 얼핏 만난 후론 도꾸가와가 이즈막까지 꿈쩍 아무런 기미도 없는데다가 더구나 교또태수를 통해 조선사신행차를 속히 되돌려보내라는 막부의 선고까지 받고 까닭모를 위구심에 시달리며 어떻게 하나 막부거물들을 만나 형세를 돌변시켜야겠다고 작정해오던 유정이였으나 정작 막부의 장관이 온몸에 웃음기를 철철 휘두르고 불시에 찾아들어 쇼궁의 초청을 알리자 간사스러운 왜인들의 변덕이 꺼려져 한참 주저하다가 마음을 든든히 도사려먹고 일어났다.
유정이가 흔연히 차비를 하고나서자 손문욱참의와 마광우종사관도 급변한 정황에 되우 어정쩡해진 기색으로 따라나섰다.
반신반의하는 유정의 태도를 본 군정보좌관은 제켠에서 되려 사뭇 기분이 들떠가지고 즐거이 떠들어댔다.
《하하, 귀공자의 환생을 경축하느라 쇼궁께서 연회를 베푸셨소. 허, 글쎄 귀공자가 무서운 마귀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는 바람에 본국의 경향각처가 불상사에 접했드랬소. 그통에 막부는 정사를 파하기까지 했다오. 지금 생각하문사 우습긴 하오만 막부는 귀공자의 급살병을 조선사신이 달고온 액살로 여기고 에도로 되돌아갈 작정까지 했댔소. 헌데 오직 대의만을 위하는 쇼궁사마께서 막료들의 소협한 처사를 바로잡아주셨고 또한 다행스럽게도 일본의 한 녀의승이 귀공자를 호전시켜주어 막부는 국난에서 벗어나 정기가 발양되여 이웃나라 사신대접도 생각하게 된거요.》
요즘 바닥을 들썩하게 만든 귀공자의 환생이며 교또 후시미성에 혜성같이 나타나 단연 명성을 날리고있는 쯔시마의 녀의승에 대한 소문을 이미
얻어들은지라 유정은 심상해서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면서 쇼궁만은 조선과의 교류체결을 단념하지 않았을거라고 여겼던
옛날 태합 히데요시가 조정의 문무백관들을 량줄로 늘어세워놓고 조회를 하던 너렁청한 대청안에 연회상이 굉장스레 차려져있었다.
흰 보를 씌운 다리긴 상을 빙 둘러놓았는데 탁자우에는 소갈비찜, 통닭구이, 돼지발쪽료리 같은 육붙이들과 떡이나 경단 같은 쌀음식들 그리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각양각색의 단료리들과 기름에 튀기거나 초에 회치거나 가마에 찐 산해진미의 특산물들이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올랐다. 그야말로 주지육림이였다.
도꾸가와쇼궁이 틀스럽게 앉은 귀빈석을 중심으로 하여 첫 자리에 먹베장삼을 휘퍼지게 입은 한 나이지숙한 녀승이 앉고 그다음부터 대관,
조선사신들인 손문욱참의와 송운대사와 마광우종사관들은 쇼궁의 왼쪽켠으로 치우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정은 령험스럽기로 소문난 일본녀의승을 호기심이 동해 얼핏 쳐다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머리를 기웃거렸다. 녀의승이 무척 낯익어 보였기때문이다.
그때 도꾸가와가 신색이 환해가지고 일어나 막부의
그렇게 한동안이 지나 취흥이 도도해져 권커니작커니 할 때쯤에 유정은 속으로는 별로 달갑지 않았으나 형식상이나마 사신의 례를 차려야겠기에 하얀 사기잔에다가 홍차를 부어가지고 일어나 도꾸가와앞으로 걸어나갔다.
《쇼궁사마, 일본의 명운에 흥을 불러온 녀승에게 한잔 권하겠소이다.》
이러고는 도꾸가와곁에 머리를 다소곳하고 앉아있는 왜중차림의 녀의승에게로 돌아섰다.
《우리 서로 나라는 다르오나 자비를 구가하는 같은 승려이니 탓하지 마시고 받으옵소.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막심했겠소이다.》
유정이가 이렇게 일본말로 뇌이자 녀승이 일본 볼가의 풍속대로 검누런 수건으로 반쯤 가리운 얼굴을 들고 유정을 곧바로 마주보았다.
그찰나 유정은 손에서 하마트면 차잔을 떨굴번 하였다.
그 일본녀의승이 신통히도 송희령이를 방불케 했기때문이다.
그랬으나 유정은 자기가 지금 환각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장발수염을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억지로 그 직감을 부정했다. 송희령이가 바다건너 수천리밖인 이 살벌한 왜땅에까지 왜중차림으로 건너올 하등의 리유가 없었고 또 실지 내심으로는 그가 제발 이 살벌한 야수의 소굴에 찾아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때문이였다.
유정이가 얼나간듯이 굳어져서 차잔을 든 손을 후들후들 떨기만 하는데 그 녀의승이 생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차잔을 넘겨받으려고 손을 내미는것이였다.
《고맙나이다, 송운대사님!》
청아한 음성으로 이렇게 뇌이는 녀의승의 쌍까풀진 눈에 눈물이 가랑하니 내맺힐 때에야 유정은 옳거니, 분명코 이 내인은 희령이로다!-하고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곁에서 숱한 왜인들이 탁자를 두드리고 술잔을 짓쪼으면서 두 나라 도승의 상면을 지켜보기에 유정은 눈빛으로만 희령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감투끈이요? 왜서 이 험한 왜땅에 나타났소?)
그러자 희령이도 눈빛으로만 대꾸하는것이였다.
(왜 놀라소이까? 제가 못 올델 왔나이까?)
그다음부터 소리없는 대화가 서로의 시선을 통해 이어졌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그러오. 대체 무슨 용무로 왔소? 조정에서 띄웠소, 아니면 자유로 왔소?)
(내 자유로 왔어요. 대사님을 뵙고싶기도 하고 또 사신행차를 도울 생각도 나서요. )
(이 왜땅이 어떤데게 서뿔리 발을 들여짚었소?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로구만. )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면야 이 수천리 먼 타국에까지 온전히 왔겠나이까? 어쨌든간에 몸성하신 대사님을 뵈오니 기쁘오이다. )
(기쁘고 뭐고 날래 썩 돌아가기나 하오. 원참, 철두 없지. 저 왜인들이 어떤 놈들이라구 흔연히 어불려서 연회상을 받고있는가 말이요. 큰 변을 당하기 전에 어서 조선으로 돌아가오-)
유정은 차잔을 상탁에 되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고명한 도사인 조선사신이 저희네 일본 녀의승에게 참으로 축배를 부어 권한줄로 안 막부의
여기저기서 저희네 왜인족을 춰대는 지껄임소리가 란발했다.
《역시 쇼궁사마께선 하늘이 낸분이시오. 그러지 않으면사 귀인이 나타났을라구.》
《쯔시마도주가 이번에 큰일을 했거던. 어느 짬새에서 저런 절세가인의 녀의를 찾아냈는지 참 용하단 말일세.》
《용하기로 말하문 요시또모보다 저 녀승이 더해. 저런 세상으뜸인 용한 명의가 있다는건 우리 일본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거던.》
《본국의 스님들속에 천재적인 고명도사들이 많은걸 보니 이 나라가 흥할 징조임이 확실할지고.》
바로 그러할 때였다.
풍성한 주연속에 취흥이 도도해지고 화기 또한 애애해지는 장내를 담담한 시선으로 일별하던 송희령이가 섬찍한 소리를 왜말로 내뱉는것이였다.
《안됐소만 소승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사람이옵니다. 조선의 가야산에서 은거하는 청목이라는 불승이옵니다.》
그러자 이때껏 송희령을 저희네 일본중으로 알고 찬사를 아끼지 않던 왜인들이 경악을 하며 굳어졌다.
유정이도 막연하여 눈을 꽉 감았다가 번쩍 뜨고 태연한 기색을 지은채 태풍을 만난듯이 뒤설레는 왜인들을 휘둘러살피고있는 송희령을 민망스럽게 흘겨보았다.
(정신있소?- 저것들이 얼마나 야살찬 놈들이게 제 본색을 홀짝 드러내오. 차라리 왜중가면을 그냥 쓰고있는게 낫지. )
유정이 이러며 가슴을 조이는데 그와 눈이 마주친 희령이가 생긋이 미소를 보내온다.
(일없나이다. 이 땅에서 조선사신이 횡행하는데 뭘 두려울게 있나이까. 소승은 대사님만 곁에 있으면 하나도 무서운게 없나이다. )
송희령의 애틋한 시선에서 이런 속삭임을 읽은 유정은 기가 차서 더 어쩌지 못했다. 오후해가 기울무렵에야 객관으로 돌아온 유정은 심사가 별로 번잡해져 저녁식사때 밥을 몇숟가락 뜨는둥마는둥하다가 물러나앉았다.
저녁끼식을 치르고난 사신일행은 너렁청한 객관의 안채에 모여 신분구별을 두지 않고 널려앉아 얘기판을 펼쳤다. 왜인불망나니들의 행패에 몸을 상했던 일부 성원들이 요 며칠새에 어혈을 풀고 회복이 된데다가 막부의 화해로와진 태도로 하여 어지간히 기분이 들뜬 일행은 속에 있는 말까지도 꺼림없이 꺼내 펼쳤다.
왜국행차에 오르며 서로 만나 대여섯달나마 함께 지내며 고난도 같이 헤치고 기쁨도 함께 나누는 여가시간마다 말돌이를 하도 되풀이하다나니 이제는 뉘집에 숟가락이 몇개고 식구가 몇몇이고 어느 절간에서 어떤 기막힌 야사가 있었다는것까지 말짱 아는지라 얘기가 인차 싫증이 나하는것을 본 손문욱참의가 홍차지에게 피리나 한곡조 불라고 시켰다.
손문욱참의네 댁의 도차지로서 이번에 주인을 호행하느라 왜국행에 나선 사십대 초엽의 홍씨는 기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지라 피리를 기막히게 불어 일행을 심심치 않게 해주군 했었다.
아직 별도 여물지 못한 초밤이건만 그간 며칠새 별로 일거리가 없이 지내느라 무료감에 시달리던 사림들이 저저마다 권하는데 못이겨 홍차지는 짐보안에서 참대피리를 꺼내들더니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웅글고 탁한 소리가 짧게 두어번 나더니 제창 구성진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홍차지가 차츰 조화를 부리자 창호지밖에서 우수수 불어치던 하늬바람소리며 달달달 구르는 락엽소리며 지껄지껄 주고받는 행인들의 말소리며 여물을 찾는 말투레질소리며 부엌어멈의 설겆이소리며 하는 등등의 온갖 소음이 잦아들고 들리는것은 오직 피리소리뿐이였다.
구멍이 몇개밖에 없는 조그마한 참대통에서 어쩌면 그리도 웅장한 곡조가 흘러나오고 가냘픈 손가락의 움직임이 어쩌면 저런 굉장한 기세를 돋구는 소음을 만들어내는지 신비스럽기만 했다. 그 곡조, 그 기세를 더 헌감스럽게 형용하면 마치 큰 바람이 바다물을 뒤엎는듯 하고 큰 바위덩이를 아득한 높은 산에서 내리굴리는듯 하고 호걸남아가 큰칼을 비껴들고 십만진중에서 질풍처럼 횡행하는듯도 하였다. 형용은 그만두고 말할지라도 가히 대장부의 씩씩한 기상을 하늘같이 높게 해주는것만은 사실이라 한창혈기인 젊은이들이 어느새에 홍차지가까이로 조여앉았고 유정이와 손문욱은 채수염을 쑥쑥 쓰다듬었고 혹 놀기 좋아하는 축들은 벌써 팔도 휘젓고 혹 어깨도 으쓱거렸다.
그런데 별안간에 피리소리는 느린 곡조로 바뀌더니 아마 홍차지가 제나름의 기분에 빠져버렸는지 얼마 못 가 피리에서는 애절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그 애절한 곡조가 사람들의 마음을 처량하게 만들었다. 봄꿈같은 세상에 아침이슬같은 인생이고 시름도 첩첩하고 설음도 첩첩한 시절이라 그러한 만단사연을 피리로 풀어내리는듯 피리소리는 원한많은 이 세상을 원망하는것 같기도 했고 기구한 제 팔자를 한탄하는것 같기도 했고 인생살이의 애달픔을 하소연하는것 같기도 했다. 끊어질듯 간간한 소리는 목이 메여 울음이 나지 않는것 같고 호들갑스러운감이 없이 목미여지게 뿜어지는 된소리는 울음이 북받쳐 터지는것 같았다. 가만히 새겨보면 그것은 사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저세상의 혼백이 이승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호곡같았다.
그 변화무쌍한 피리소리에 제나름의 상념을 실으며 바위돌처럼 굳어졌던 사내들이 어언간에 해토기의 흙무지처럼 풀썩 자세가 흐트러지더니 구슬픈 낮색으로 변해갔다.
바로 그러할 때 유정이가 마른기침소리를 크게 냈다.
그제서야 자감상태에서 깨여난 사람들이 때없이 사신행차의 본분을 망각하고 왜땅에서 생활시름에 잠겨들었댔다는것을 알고는 황황히 태도들을 고치였다.
유정의 노염이 내돋친 눈총에 되게 찔리운 홍차지도 토질병을 앓다가 단명에 죽은 처자생각에 옴했던
했건만 유정은 침울한 기분이 좀처럼 가셔지질 않았다. 왜서인지 조짐이 불상스러워지며
그의 머리속에서는 오직 희령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그가 구름이라도 잡아타고 이곳 교또엘 왔단 말인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지 여기가 어디라고 친정집 나들이오듯 수월히도 행보한단 말인가. 이러다가 스스로 그 연고의 내막을 단정했다. 틀림없이 그는 우리 사신행차의 중대사를 돕기 위해 왜국행을 거행한것이다. 아아, 가상스러운 장거로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애오라지 나라일을 위해 과중하기 그지없는 험난고초를 헤치며 서슴없이 원쑤의 소굴에까지 찾아든 희령의 과감스러운 소행이 눈물겹도록 고맙고 대견했다. 그러하면서도 희령의 신변안전이 몹시 걱정되여 그가 빨리 떠나갔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대연회석상에서 막부의 거두들과 숱한 왜놈들앞에서 자기가 조선의 의승이라고 선고를 했으니 이제 사악스러운 왜놈들이 어떤 흉심을 먹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러한 변고가 생긴다면 그의 신상에 드닥치는 화난을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유정은 현재는 사신일행도 희령이도 막부의 환심을 사 귀빈대접을 받는다지만 도요또미 히데요리처럼 도꾸가와막부와 척을 진 사무라이들이 사처에서 득실거리고 또 원래 도꾸가와부터가 간교하고 변덕심한 왜놈족속인지라 금후에 조석으로 마음이 달라져 악행을 저지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이 놓여지지 않았다.
여하튼간에 유정은 어서빨리 련인을 만나보고싶었다. 애정스러운 녀인을 만나 그지간에 가슴속에 쌓였던 회포도 나누고 아울러 그의 귀한 육신이 상하지 않도록 안전대책도 취하고싶었다. 그러루한 감정의 급파로 해 유정은 이튿날 아침을 치르기 바쁘게 후시미성안에 들어가려고 차비를 하고 나서다가 갑자기 손문욱참의가 조정에 상보할 문서를 합의하여 꾸미자고 하고 또 타고을의 왜중들이 문장을 지어달라고 밀려드는 바람에 발목이 붙잡혀 되눌러앉았다.
하여 그는 하루해가 서산너머로 기울어 날이 가물가물해질 때야 사신호위를 위해 남아있던 백손이 하나만 데리고 후시미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