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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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희는 동서의 면회를 끝내고 돌아오자바람으로 내려갈 차비를 서둘렀다.
해산전에는 못 내려간다고 지청구를 하며 우악스럽게 붙들고 야단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친정집을 떠났다. 하경숙을 찾아 사연을 알려주고 평양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들이 렬차를 타고와서 집에 당도한것은 춘분이 지나 점점 낮시간을 길게 해주는 봄날의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 한창 붉은 노을을 펼치고있는 때였다. 남향받이 산기슭에 줄을 맞춰 들어앉은 군관살림집마을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저녁녘이여서 그런지 마을은 별로 조용하였다. 뜨락에 나와있는 녀인들이나 아이들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엇을 그리 많이 꿍져넣었는지 기차역에서부터 멀지 않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하경숙이와 짐을 엇바꾸어가며 지고 맞들고 했는데도 두번씩이나 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응희는 가지고온 배낭과 보짐들을 마루에 내려놓기 바쁘게 심한 갈증이 느껴져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고 정신없이 물을 두고뿌나 받아마셨다. 그제야 심신이 좀 거뜬해지는것 같았다.
부엌을 휘둘러보았다. 자기가 평양으로 올라가기 전에 손질해놓은 그대로였다.
불이 죽은 부뚜막은 싸늘하게 식었고 쌀함박이며 칼도마는 물기 한점없이 말라있었다. 늘 반짝반짝하던 늄가마도 그새 빛을 잃고있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한번도 미치지 못한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남편은 이 부엌에 들어서보지 못했다는것을 말해준다. 떠날 때 자기가 없는 동안의 식사랑 잠자리랑 걱정하자 남편은 흔연히 말하지 않았는가.
《나야 〈총각동맹〉에서 탈퇴한지 얼마된다구 그런 걱정을 다 하오? 부대에 나가면 내가 자던 침대, 내가 늘 마주앉던 식탁이 그대로 있소. 걱정 꽉 놓소.》
《그래두…》
응희는 떨어져있는 며칠동안에 자기들사이의 그 열렬하고 억척같은 정이 무르녹던 보금자리가 식어지고 빛을 잃지 않을가 하는 위구심이 생기며 가슴 한구석이 알찌근해났다. 응희의 그런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남편은 제꺽 말그루를 바꾸었다.
《걱정놓으라는데. 내 그럼 아무리 바빠두 하루 한번씩은 집에 들려보겠소. 당신없는 사이에 동자질련습이랑 좀 해보고… 그래야 당신 수고도 헤아리지?》
《아이, 누가 내 수고를 헤아려달래요? 그러다가 옆집 동무들이나 아주머니들의 눈에 띄면 어쩔려구…》
《보면 뭐라오?》
《그래두 안돼요. 날 욕하지요 뭐. 저 집에선 남편을, 그것도 비행사를 부엌간에 들게 한다고…》
《그럼 뭐 할수 없구만. 무슨 수가 있겠나? 그렇지, 문을 닫아걸구 해보는 수밖에…》
《그것두 안돼요.》
《그럼 부엌불이라도 죽이지 말아야지.》
《그건 허용합니다.》
응희는 팔을 들어 한번 흔드는척 하며 응했다.
했던것인데 부엌불은 죽어있다. 부뚜막이고 방안은 싸늘하다.
온기나 사람의 손길이 미친 흔적은 없지 않는가.
응희는 방안으로 올라와 살펴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문에는 자기가 떠날 때 쳐놓고간 가림천이 그대로 밖을 막고있다. 침대우에는 남편이 요구해서 그렇게 한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수놓은 베개잇을 낀 길다란 통베개에 두툼하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비단이불 한채가 포개놓은채로 있었다.
집으로 달려내려와 황혼이 깃드는 이때쯤이면 남편이 반겨맞아줄것이라고 생각했던 응희는 빛을 잃은듯 한 집안이며 고즈넉한 정적에 마음이 산란해져 가는 한숨을 내그었다.
그러다가 인차
(요즈음 정세가 몹시 긴장하다고 면회를 갔을 때 형님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부대에서 들어오지 못할수 있다. 일이 바쁜데 내가 없다는것을 알면서야 무엇때문에 빈집에 자주 나온단 말인가. 이제 저녁식사랑 준비해놓고 련락을 하면 내가 돌아왔다는것을 알고 아무리 바빠도 한달음에 달려올것이다!)
그는 집에서 입는 허드레옷을 갈아입은 다음 팔을 걷어붙이고 일에 달라붙었다. 응희는 처녀때 《괄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일손도 걸쌌다. 지금 그 솜씨가 되살아난것 같았다.
먼저 부엌에 불을 지폈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어보지 못하고 열을 내보지 못한 아궁에 마른 장작을 밀어넣고 불쏘시개를 앞에 놓은 다음 성냥을 득— 그어댔다. 불길이 확 피여오르는것과 함께 파르스름한 연기가 솟구치며 앞으로 밀려나왔다. 그랬다가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것처럼 조금 있더니 장작에 불이 당기고 후룩- 후룩- 소리를 내며 불길이고 연기고 끌려들어갔다.
갓 결혼하고 이 집에 들 때 불이 잘 들어야 방안이 아늑하고 가정주부가 공연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며 부대정치위원이 얼굴에 검댕이칠까지 해가며 손질해준 부엌이고 온돌이여서 불이 여간만 잘 들지 않았다.
먼저 부엌을 물걸레질하여 찬장이며 가마, 부뚜막의 윤기를 되찾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가 떠나올 때 꾸려준 짐들을 마루에서 끌어들여다가 풀었다.
훌쩍 떠나간다고 못마땅해하고 치원은 했지만 어머니사랑은 역시 다심하고 변함이 없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국수만 해도 청수랭면, 즉석국수 해서 몇가지나 되였다.
《얘, 네 남편은 지금도 국수라면 그렇게 오금을 못쓰니?》
평양에 올라간 첫날 저녁밥상에 마주앉았을 때 어머니가 불쑥 한 말이였다.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응희가 방금 밥 한숟가락을 크게 떠넣다말고 눈이 둥그래지며 물었다.
《아무러면 가시어머니가 제 사위 식성도 모를가. 장가가는 날 누가 볼가봐 두릿두릿 살피면서두 국수그릇은 들여보내는족족 말끔히 비우더구나. 네 몫까지두 다 빼앗아 축냈지?…》
《아이, 어머니두. 좀 모른척 하실거지. 말짱 다 들여다보았군요.》
그랬었는데 보짐안에 번쩍거리는 은지포장을 한 국수가 여러 봉지 되였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쉬는날 같은 때 집에서 눌러먹으라며 감자농마가루, 메밀가루까지 봉지봉지해서 여러 묶음 있었다.
배낭밑에 꽁꽁 싸서 넣은걸 펼쳐보니 참미역이였다.
(참, 어머니두…)
응희는 얼굴이 홀딱 붉어졌다. 곁에서 누가 엿보는 사람이 없는것이 다행이였다. 그건 분명 자기가 해산하고나서 먹으라고 보냈을것이다.
그밖에도 비닐로 진공포장한 왕새우튀기, 조개살, 낙지며 살찐 통닭, 통오리훈제 같은것도 있었다.
어머니가 정도이상으로 풍청대는것이 께름직하고 사위앞에서까지 그 무슨 위세를 뽐내려 하는것 같아 마음이 그닥 밝지 않았다. 하면서도 이 꾸려준
물건들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틋한 사랑도 깃들어있다는 생각으로
응희는 오늘 저녁은 어머니가 보내준것으로 한상 푸짐히 차리기로 했다. 남편이 들어오면 마주앉아서 《이것 맛보세요.》, 《요것도 들어보세요.》하며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밤새껏 오손도손 이야기하고싶었다.
다른 사람은 없고 자기들 둘뿐이여서 네모배기소반을 놓을가 하다가 아무래도 어머니가 보내준 갖가지것들을 골고루 맛보라고 다 올려놓자면 상이 작을것 같아 손님들이나 와야 쓰군 하는 둥그런 큰 상을 놓았다. 그랬는데도 자리가 모자라 어떤것들은 상우에서 내려지는 서운함을 당하였다.
(용서해라, 어찌겠니. 자리가 없는걸…)
응희는 제 혼자 중얼거리며 흥에 떠 돌아갔다. 이렇게 놓고 한번 보고 저렇게 놓고 또 한번 보기도 했다.
그리고나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남편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오늘 밤 전투근무는 아닐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소식이 없으면 몇집건너에 있는 하경숙이네 집에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꾸려준것을 거의나 같은 몫으로 함께 갔던 경숙이네 집에 보내려고 따로 갈라 싸놓았다. 평양에 친정어머니도, 밭은 친척도 없는 하경숙에게는 내려올 때 자기처럼 짐이 많지 않았던것이다. 각근하게 관심을 돌려준 사람이 별로 없은것 같았다.
응희는 차려놓은 상을 다시한번 눈여겨 살펴보면서 남편이 특별히 좋아하는것들을 그가 앉을 앞쪽에 또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상보를 씌워 벌써 따뜻해진 아래목에 밀어놓았다.
부엌에 다시 내려가 걸레와 소랭이에 맑은 물을 떠담아들고 올라왔다. 방안청소까지 말끔히 해놓으려는것이였다.
먼저 아래방을 구석구석까지 깐깐하게 닦아냈다. 새 물을 바꾸어가지고 이번에는 웃방으로 올라갔다. 소랭이를 한쪽에 놓고 걸레를 쥔채 벽 한쪽에 있는 책상우의 탁상등을 켰다.
제일먼저 눈에 띄우는것이 남편과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였다. 액틀속에서 두 청춘남녀가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고 힐책하면서도 무척 반기는것 같았다. 그 액틀을 들고 한참동안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정을 이룬 남편과 자기
이 사진은 약혼을 하기 전에 찍은것이였다. 우연이면 우연이라고 할가. 아니, 그것은 자기들사이의 결합은 필연적이라고 두 심장이 높뛰며 말없이 고백하던 그날에 찍은 사진이였다.
련애때는 소경이 된다고 한 어느 한 외국의 이름난 문필가의 격언의 뜻을 초월하여 이 땅에 사는 청춘남녀들의 사랑은 무엇을 위해 필요하고 어떻게 불타야 하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한생 변함없이 지켜가자고 언약한 바로 그날에 그들이 남긴것이였다.
그래서 약혼사진이나 결혼사진보다도 더 소중한지 몰랐다. 그래서 이 사진이 가정을 이룬 날부터 오늘까지도 책상우에서 떠나지 않고 자기들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상징처럼 자리잡고있는지 모른다. 두 청춘남녀의 얼굴은 분명 행복에 겨워있다. 그렇지만 활짝 웃음을 담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둘이 다 긴장해보이고 몸가짐이며 표정들이 굳어진듯한감을 주었다.
아직은 숫저어하고 두려워하는 부자연스러움뒤에 애틋하고 열렬한 무엇이 끓어번지고있었다.
사진사는 이런 청춘남녀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본 경험자인듯싶었다.
《자, 곧 신랑신부가 될 젊은이들같은데 자세들이 너무 꼿꼿합니다. 자, 날 보라요. 서로 고개들을 이렇게…》
사진사는 사진기를 든 왼손말고 오른손을 들어 가운데쪽으로 가리켰다. 그것으로 서로 고개를 안쪽으로 기울이라는것을 권고하였다.
《아니, 아니… 신부될이는 좋은데 신랑될이는 군인이여서 그런가요? 막대기처럼… 그렇지, 그렇지. 좋습니다. 그럼 찍습니다.》
당장 샤타를 누를것처럼 하던 사진사는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허리를 펴고 렌즈에서 눈을 뗐다.
《눈길을 서로 허둥거리지 말고 여기 좀 봅시다. 낯색이 너무 굳어요. 좀 웃으라요. 웃으라는데… 안되겠군. 내가 이제 하나, 둘, 셋 하면 이렇게 하라요. 그러면 저절로 웃는 표정이 됩니다.》
사진사는 제가 먼저 입까지 실룩하며 두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았다.
응희는 그 모양이 너무 우스워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틀었다.
《자, 자… 너무 좋아는 하지 마시고… 그럼 찍읍시다. 하나, 둘, 셋. 예, 좋습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였다.
지금도 응희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옥류교가까이에 있는 사진관과 제먼저 우습강스러운 표정을 짓던 늙수그레한 사진사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러면 마음이 봄날처럼 따뜻해지고 행복에 잠기군 한다. 그리고 그 사진관앞을 지날 때면 고개를 갸웃하고 창문안을 한참씩 들여다보군 한다.
그와 남편 유진혁이와의 교제와 결합은 응희가 우연히 던진 한마디의 롱담에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가?
아니, 롱담에는 언제나 심각한 목적이 숨어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응희로서는 사실 그때 무슨 특별한 목적을 두었거나 일이 그렇게까지 번져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처녀시절의 응희는 괄랭이라고 할 정도로 성격이 활달하고 주저하는것이 없었다. 손우로 두명씩이나 되는 오빠들속에 뒤섞여서 응석을 부리며 구김살을 모르고 자라서인지 말이건 행동이건 두려워하는것이 없고 거침없었다.
한날한시에 나온 손가락도 길고 짧은것이 있다더니 한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여난 그들 남매들도 성격이 각각이였다. 오히려 두 아들은 성품이 차분하고 말이 적었다. 학교에서나 집에 들어와서나 책밖에 몰랐다.
그러나 응희는 오빠들과 달랐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으로 가라는 부모의 요구에 자기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비바람을 이겨내는 들꽃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일찍부터 일을 배우고 단련해야 하는데 로동현장으로 나가야 한다는것이였다.
아버지가 나서서 어느 요란한 호텔의 상점판매원으로 주선해주었으나 자기가 말하는 로동현장이란 그런 곳이 아니라며 이번에는 제 혼자 뛰여다녔다. 그렇게 굳이 골라 생산기업소의 로동자가 되였다.
그렇지만 포부는 컸다. 대학은 통신으로 졸업하겠다고 했다.
맏오빠가 응희의 파격적인 행동에 어이가 없어하며 한마디 했다.
《너 같은 괄랭이를 이담에 어떤 총각이 얻어가겠는지…》
《오빠 말하는걸 좀 보라. 내가 무슨 물건짝이라구 얻어가구 말구 해? 얻으러 오는 사람이면 절대로 가지 않을래.》
《얘 얘, 너 같은 처녀한테 누가 장가들겠는가 하는게 걱정돼서 그래.…》
《오빠, 걱정 꽉 놓으시라요. 난 인민군대 군관한테 시집가자구 그래요. 이제 두고보지. 오빠보다 더 멋진 총각이 짝을 뭇게 해달라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지 않나. 그땐 오빠가 훼방이나 놀지 말라요.》
《야 야- 내 손들었다. 우리 집에 들어오는 매부는 아마 네 손탁에서 숨도 크게 못 쉬는 어리숙한
맏오빠는 그러며 녀동생의 방울코를 꼭 쥐였다놓았다.
《아야야- 오빠 그런 걱정은 말라는데… 호호호…》
그런 딸을 그의 부모들은 불안한 눈길로 살피였다. 일하는데서나 생활에서 더우기 이제 나이가 되여 대상자를 고르는데서 물덤벙술덤벙하여 실수하지 않을가 하는 위구심이 컸던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불러앉히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런 때면 응희는 눈을 살풋이 내려뜨고 얌전이가 된듯 앉아 《알겠어요, 어머니.》하고 공손히 받아들였다. 하면서도 《내가 뭐 어린앤가. 마음놓으시라요.》하는 제딴의 장담비슷한 꼬리를 꼭 달군 하였다. 과연 응희는 그후 자기가 한 말대로 일에서나 생활에서 남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기업소의 게시판에서는 늘 임무수행에서 모범인 그의 사진이 떠나본적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딸을 잘 두었다고 인사하였다.
그런데 대상자선정에서만은 부모들의 우려가 그대로 번져졌다.
어느해 모내기철이였다.
응희가 다니는 기업소에서는 평양에서 퍼그나 떨어진 벌방지대에 농촌지원을 나갔다. 처녀들이 많은 기업소여서 응희 말고도 같은 또래의 처녀들이 여러명 되였다.
철을 놓치지 말아야 할 모내기가 한창고비에 이른 어느날, 주둔지역에 있는 부대군인들이 논벌로 달려나왔다. 하늘색령장을 단 공군부대군인들이였다.
군인들이 나타나자 논벌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논뚝의 곳곳에 주런이 세운 붉은 기폭들이 바람에 기세차게 펄럭이고 방송선전차에서는 격동적인 선동과 힘찬 노래들이 논판을 들었다놓았다.
그날 모내기전투장에는 비행군관학교의 학생들까지 나타나 더욱 이채를 띠고 열의를 북돋아주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지금 여기 논벌로는 오늘 진행한 실습비행훈련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룩한 군인동지들도 달려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모내기실적은 시간이 다르게 더욱 높아가고있습니다. 〈조국보위도 사회주의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는 구호를 높이 들고 방금 저 푸르른 하늘에서 훌륭한 비행술을 보여준 유진혁, 차용세동무를 비롯한 군인들은 올해 사회주의건설의 주요전선의 하나인 농업전선에 용약 달려나와 모내기에서도 일당백의 군인정신을 높이 발휘하며 혁신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키고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옆 논배미에서는 멀리 평양에서 지원나온 ××기업소의 처녀모내기명수들이 푸른 주단을 펼쳐가고있습니다. 그 앞장에는 렴응희, 김향단, 서청옥동무들이 서있습니다.
군민의 단합된 힘, 군민의 뜨거운 정이 차넘치는 이 드넓은 논벌에 이제 가을이 오면 반드시 풍년의 황금나락이 설레일것입니다.
그럼 오늘의 모내기전투에서 모범을 보이고있는 이들을 축하해서 노래 한곡 보내드리겠습니다.》
방송선전차에서는 쉴새없이 새 소식이 전해지고 노래들이 울려나왔다.
《얘 응희야, 비행사들이 논벌에 나왔대.》
《나도 들었어. 방금 머리우에서 멋진 비행운을 펼치며 창공을 날던 군인들이겠지? 우리 이따가 한번 찾아가볼가?》
《누굴 말이냐?》
《미래의 군인비행사들을…》
《얘, 너 정신있니?》
《군인비행사들을 만나보자는데 정신은 무슨 정신…》
《응희, 넌 네 오빠말대루 괄랭인 괄랭이구나. 군인들을 찾아가선 어쩐다는거야?》
《미남자들인가 한번 보기두 하고 비행기에 좀 태워줄수 없는가고 청도 드려보지 뭐.…》
《호호호… 너 인민군대 군관한테 시집가겠다고 하더니 오늘 군인들이 나왔다니까 무척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구나.》
《청옥이 넌…》
《호호호…》
《호호호…》
모내는기계뒤에 앉아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며 두 처녀가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또 한배미가 푸르러갔다.
드넓은 벌이 방송선전차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 모내는기계의 발동소리, 전투원들의 웨침소리, 웃음소리로 끓어번졌다.
응희네 기계가 논뚝을 가까이 했는데 앞에서 누가 그들을 찾았다.
《자, 평양처녀동무들, 잠간 기계를 멈춰달라요.》
얼굴이 갱핏한 안경을 낀 중년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앞가슴에서 사진기가 데룽거렸다. 그는 급히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는 첨벙첨벙 논판에 들어섰다.
응희와 청옥이가 나란히 앉은 모내는기계뒤에 오더니 사진기를 내들었다.
《누구예요? 사진은 왜 찍어요?》
응희가 매몰스럽게 내쏘듯 물었다.
《하- 피차 바쁘다보니 자기소개를 미처 못했습니다. 농장의 직관원입니다. 미안합니다. 모내기명수들인 평양처녀들을 사진찍어 게시판
에 소개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잠간이면 됩니다. 자, 얼굴만 약간 들어주십시오.》
《우린 필요없어요. 저쪽에서 혁신하고있는 군인동지들을 찍어주세요.》
《예에- 다 생각이 있습니다. 잠간이면 됩니다. 군인들이건 평양처녀들이건 다 혁신자들이거던요.》
《우린 정말 안돼요.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사진을 찍는다구…》
옆에 앉은 청옥이가 울상이 되여 손까지 내저었다.
《사진이 필요없단 말이지요. 옷차림이 안됐단 말이지요. 일하는 모내기명수들의 차림이 어떻다구… 지금 차림이 더 진실하고 아름다와보이지요. 군인동지들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자, 잠간이면 됩니다.》
직관원은 제잡담 한참 너스레를 떠는척 하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구도를 잡아서 벌써 몇번이나 샤타를 눌렀다.
《자, 그럼 더 큰 성과를 바랍니다. 게시판에서 만납시다.》
그는 두 처녀에게 겁석 인사까지 하고는 아까처럼 첨벙거리며 논뚝으로 도로 나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참 재미나는 사람이다야. 그런데 우릴 찍긴 찍었을가?》
청옥이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필요없다고, 안 찍겠다고 매몰스럽게 대답했으니 사진사가 정말 찍지 않았거나 아무렇게나 찍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옥이는 락심천만한 얼굴로 사라지는 직관원의 뒤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얘, 빈포기 생기겠다. 어딜 그렇게 멍청히 쳐다보니? 찍든말든 상관치 말자. 게시판에 나붙으면 어떻구 못 나붙으면 어떻니?》
《얜 자기는 일년내내 기업소게시판 영예란에 사진이 나붙어있으니까…》
청옥은 입을 샐쭉하며 웃었다.
《얘 청옥아, 그러지 말고 우리 이제 쉴참에 아까 말하던대로 군인들을 보러 가자.》
《너 정말 이 머리가 어떻게 잘못된게 아니야? 난 망측하게 찍힌 사진이 나붙을가봐 그래.…》
청옥은 또 울상이 되였다.
《망칙하면 어떻고 화려하면 어떻다는거야. 우리가 생긴 그대로겠지. 별걱정을 다하구 앉았다야.》
응희는 방울코를 움씰움씰하며 곁에 앉은 청옥이에게 밉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들이 바둑판같이 네모반듯한 면적이 큰 논배미의 모내기를 끝내고 다른 배미로 기계를 옮겨놓았을 때 마침 휴식구령이 내렸다.
방송선전차에서는 벌써 흥겨운 군중무용곡이 울리고있었다. 군인들이 먼저 군중무용을 시작하고 농장원들과 지원자들 또한 춤판을 벌리였다.
휴식장이 된 좀 둔덕진 풀판에다는 게시판을 세우고 모내기에서 모범인 혁신자들을 소개하는 속보와 사진들을 주런이 내붙였다. 안경을 번쩍이며 목에 사진기를 건 농장직관원이 부지런히 뛰여다녔다. 손에는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등 여러가지 색갈을 찍었던 큰 붓들이 여러개 들려있었다. 귀밑으로 내돋은 땀방울이 해빛에 번쩍거렸다. 쉴참에 모든 사람들이 보게 대서특필하고 사진을 깨워 붙이느라고 어지간히 바삐 돌아친것 같았다.
숱한 사람들이 그앞에 모여서서 사진을 가리키기도 하고 속보의 글줄을 소리내여 읽기도 했다. 저들끼리 수군수군, 소곤소곤하는 축들도 많았다.
큰 게시판의 한쪽에는 군인들의 사진이, 다른 한쪽에는 지원나온 평양처녀들의 사진이 또 그옆으로는 농장원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 사진을 크게 잘 뽑았다.》
《사진을 잘 뽑았소? 원체 사람들이 잘생겼지. 다 미남, 미녀들이요.》
나이든 농장원들과 지원자들은 게시판앞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자기들의 모습이 망측할가봐 걱정하던 청옥이도 저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 처녀가 자기가 옳긴 옳나 하며 남이 볼세라 몇번이나 훔쳐보았다. 청옥은 한옆에서 붓을 든채 흐뭇해서 서있는 안경낀 직관원에게 머리를 다소곳이 숙여 인사까지 했다. 직관원은 마주 끄덕하며 알은체를 했다. 그는 자기 솜씨가 어떠냐는듯 묻기라도 하는것처럼 느슨한 미소까지 지었다.
그런데 이날 직관원이 찍은 사진을 붙이면서 우연히 그렇게 됐는지 아니면 우정 그랬는지 게시판의 맨 웃단의 유진혁의 사진과 렴응희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있었던것이다. 함께 사진을 보던 평양처녀들이 응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곤거렸다.
《응희야, 네 사진 왼쪽에 붙어있는 군인이 앞날의 비행사야. 이름이 유진혁이구나. 네 사진하구 나란히 붙어있다야. 어마나, 얼마나 멋있니. …》
《내 사진만 있니? 그옆에 청옥이 너도 있고 향단이, 수옥이 다 있잖니?》
《그래두 응희, 우린 다 이쪽에 외기러기처럼 따로 떨어져있지만 넌 비행사하고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있다야. 호호…》
《그게 어쨌다는거냐?》
《이젠 군인들을 만나보러 가지 않아두 되겠다야. 사진으로 상봉을 다 했으니. 야- 잘생겼다야. 저 눈섭이랑 어글어글한 눈이랑 코랑 좀 보려마.》
《비행사가 될 군인이 그럼 못생겼겠니?》
《비행사가 된다구 다 잘생겼을가?》
《난 저 군인이 미남인것두 좋지만 그보다는 비행훈련에서나 오늘의 모내기에서나 언제나 모범이구 앞장선다는게 더 맘에 들어.》
《그럼 한번 너와 맞세워볼가?》
청옥이가 응희를 중떠보았다.
《마주서기나 새나. 난 저런 군관이라면 선을 볼 필요도 없이 합격이야!》
《정말이야?!》
《정말 아니면.》
응희가 그 실팍한 한팔을 올려 흔들며 제 동무들앞에서 으시대기까지 했다.
《호호호…》
《호호호…》
평양처녀들은 저들끼리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아흔들면서 웃어댔다.
그러는데 머리우에서 좀 걸걸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처녀동무들! 이자 뭐라구요?》
《선을 안 보구두 합격이라구요?》
뜻밖의 남자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처녀들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입을 싸쥐였다.
《어마나, 이걸 어쩌니-》
처녀들은 어쩔줄 몰라하며 돌아갔다. 여러명의 군관들과 군인들이 등뒤에서 게시판의 사진을 올려다보다가 그들이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었던것이다.
《여 진혁동무, 진혁이 어데 갔어?》
누군가 목소리를 높여 응희사진 왼쪽에 나란히 붙어있는 사진의 주인공을 찾는것이였다. 그통에 더 바빠난 처녀들은 재재거리던 참새무리가 무엇에 쫓겨 포르릉 날아나듯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처럼 거침없고 대담하던 응희까지도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천방지축 들구뛰였다. 그렇지만 떨어진 손수건을 집느라고 어물거리던 뚱뚱보처녀 향단이가 군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평양에 있는 기업소명이며 응희네 집주소 그리고 방금 저들끼리 한 말까지 털어놓고서야 겨우 놓여나왔다.
군관들이 몰켜선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그칠줄 몰랐다.
이런 일이 있은 때로부터 두해가 지난 풍요한 가을 어느날.
아침출근을 서두르던 응희는 손기척소리에 문을 열었다. 체격이 미끈하고 눈이 억실억실한 한 공군군관이 복도에 서있었다. 그는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대뜸 《렴응희동무네 집이 맞지요?》 하였다.
응희는 가슴에서 돌덩이같은것이 쿵- 하고 떨어지는것 같았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뉘신지?…》
《농촌지원때 게시판에 사진이 나란히 붙었던 공군상위 유진혁입니다. 응희동무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할수 있겠는지 해서 찾아왔습니다.》
《어마나? ! 아이! 아이!…》
응희는 두손을 모두어 앞가슴에 잡았다가 얼굴을 싸쥐며 그 자리에 풀싹 주저앉았다.
그들의 첫 상봉은 이렇게 있었고 교제가 이루어졌으며 급류를 타고 또 한해후에는 한가정이라는 배에 탔다.
응희가 처녀때에 한 롱담은 진담으로 되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사랑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을가? 있기에 롱담에는 언제나 심각한 목적이 숨어있다는 격언도 생겨났지.… 지금 그 사진을 점도록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있는 응희의 눈앞으로는 그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액틀을 몇번씩 다시 쓸어보고 제자리에 도로 놓았다.
그러던 응희는 책상우에 네모나게 접어놓은 종이장을 발견하였다. 흠칫하였다.
(내가 왜 집에 돌아오자바람으로 이 사진이 놓여있는 책상부터 살피지 않았을가. 난 맹꽁이야. 아직도 처녀때처럼 덜퉁해.…)
황급히 그것을 들고 펼쳤다. 큼직큼직한 남편의 글씨가 눈에 확 안겨들었다.
《사랑하는 응희!
떠나보내놓고 급히 찾아서 안됐소. 며칠 되지 않았는데 당신이 보고싶고 알고있어야 할 일이 있기에 조카 철림이한테 전화를 하였소. 처가집에까지 전화를 하면 소동을 피운다고 할것 같아 그만두었소. 달리 생각마오.
돌아오면 집은 비여있을거요. 당신이 없는 동안 매일 우리의 보금자리에 들려보며 부엌불을 죽이지 않고 동자질련습을 하겠다고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미안하오.
중요한 임무를 받고 사랑하는 〈매〉와 함께 훈련을 떠나오. 대대비행사들중에서 용세동무와 내가 뽑혔소. 비행사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다 차례지지 않는 이처럼 큰 기대와 믿음을 절대로 잊지 않겠소. 꼭 보답하겠소!
어떤 일이 있어도 받은 전투임무를 기어이 수행하고 당의 품, 조국의 품에 안기겠소. 승리자가 되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겠소. 기다려주오!
응희! 혹시…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 입밖에 내자니 좀 별난 생각이 드오. 당신만 볼 글이니 용기를 내여 쓰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우리 둘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게 해줄 행복동이가 태여나면 어떻게 할가? 아직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수는 없고… 이름도 많이 생각해두었다가 돌아온 다음에 지읍시다.
그렇지만 하얀 종이에 귀염둥이의 고 깜찍스러운 손과 발만을 그려서 보내주오. 부대에서 일군들이 자주 다녀간다고 했소. 안녕히.
주체98(2009)년 3월 ×일 20시 20분 당신의 사랑하는 진혁》
응희는 몇번이나 그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눈을 감고 가슴에 그 종이장을 소중한 보물처럼 꼭 껴안았다.
(그래서 당신이 철림이한테 전화했군요. 우리 집에는 날, 날 놀래울가봐… 그런것도 모르고 순간이나마 당신을 섭섭하게 생각한 이 불민한 녀자를 용서해주세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는 응희의 두눈굽에서는 맑은것이 샘솟아 도르륵 뺨으로 굴러떨어졌다.
갑자기 지금까지 잠자고있던 새 생명이 요동치는듯싶었다.
글줄에 담겨진 남편의 심정이 아직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새 생명에게 가닿은것인가!
응희는 두손으로 배를 살그머니 눌러잡았다. 그지없이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심정이 엷은 구름처럼 피여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