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9)
어서 집으로 갈 마음뿐인 설경성은 쉬임없이 걸음을 재우쳤다.
점심먹을 시간마저 아까와 아침이면 하루밤을 묵은 주막에서 밥을 꾸려가지고 길을 나섰다.
허나 욕망뿐 난생처음 온종일 먼길을 걸었더니 사흘째부터는 길을 축낼수 없었다.
먼길에 단련이 부족한 다리도 아파나고 발바닥도 물집투성이인데 의술로도 어쩔수 없었다.
처음 이틀간은 하루 팔십리를 능히 축냈던 설경성은 조급해졌다.
《오늘 저녁은 봉주고을에서 묵자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서 벌장다리 놀리듯 해야 하니 래일까지도 봉주고을에 가낼것 같지 못했다.
중화에서 강화도로 가자면 황주를 거쳐 그 고을의 심원사앞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정방산줄기의 등허리를 가로지른 양신배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길이 서경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제일 큰 길이였다.
양신배고개를 넘으면 봉주(봉산군에 있었던 고려의 고을)가 나진다.
봉주고을을 지나면 서흥현이고 그다음 평주, 강음, 개경이 차례로 나진다.
그런데 아직도 양신배고개조차 넘지 못했으니 등이 달아올랐다.
길가에서 나무가지를 꺾어 지팽이를 만든 설경성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힘겹게 고개길로 들어섰다.
임금의 일행으로서 이 고개를 넘을 때에는 마차를 타고 즐거웁게 지나쳤는데 다리를 절룩거리며 가는 지금은 이곳이 험지로 보이였다,
비록 길폭이 넓을지라도 오불고불한 길 량켠으로는 천야만야한 산들이 솟구치여 금시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둑침침한 숲에서는 당장 범이 뛰쳐나올듯싶었다.
이따금 삼삼오오로 길손들이 오가는데 마주오는 사람은 많아도 봉주쪽으로 가는 사람은 적었다.
등골로 땀을 흘리며 고개를 절반쯤 올라섰는데 해는 벌써 하늘 한복판에 떠올라있었다.
이러다 해질 때까지 고개를 넘지 못하겠다는 불안감에 설경성이 중얼거렸다.
《에라, 점심을 건너뛰고 그냥 가야지.》
지팽이에 의지한 설경성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길옆으로 비켜서오.》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급하게 길옆으로 비켜서며 돌아다보았더니 소리를 질러댄 말탄 사람의 뒤로 화려한 수레 한대가 따르고있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복두를 쓰고 검은 관복을 입은 벼슬아치가 보였다.
화려한 수레를 탄것을 보아 큰 벼슬아치인 모양이였다.
저 사람의 신세를 지면 앉아서 가겠는데…
당장 길바닥에 주저앉을 형편에 누구인들 주저하랴.…
얼른 머리수건을 벗어든 설경성이 그것을 흔들며 웨쳤다.
《태워주소이다-》
어느새 뒤따라온 말탄 사내가 설경성에게 채찍을 휘둘러대며 욕을 퍼부었다.
《이 사람이 미치질 않았어?》
말채찍에 팔을 얻어맞은 설경성은 하마트면 넘어질번 하였다.
비칠대며 길가에 주저앉는 설경성을 구경거리인듯 수레안의 벼슬아치가 손가락질을 하며 웃어댔다.
그만에야 얼굴에 화로불을 뒤집어쓴듯 뜨거워난 설경성은 고개를 떨구었다.
내 무슨 망녕된 생각에 망신을 사서 하다니… 례의를 잃으면 이렇게 된다는걸 몰랐단 말이냐?!
흙먼지를 뒤집어씌우고 사라지는 수레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던 설경성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내발로…
진땀을 흘리며 애를 썼건만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무렵에야 겨우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한숨 돌리고싶었지만 인적없는 이곳을 빨리 떠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팽이를 내짚는데 여러명의 길손들이 벅적 떠들어대며 마주 올라오고있었다.
그들이 홀로 가는 설경성을 걱정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요즘 늙고 굶주린 범이 싸다닌다는데 조심하소.》
《몽둥이를 가지고 가소.》
《십리를 가면 인가가 있으니 빨리 가소.》
남을 걱정해주는 그들의 마음에 설경성은 눈굽이 축축해졌다.
그들이 멀어져가니 사위가 무덤속인듯 여겨졌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무섬증에 설경성은 걸음아 날 살려라 황황히 내달렸다.
고개길을 퍼그나 내린것 같은데 멀리 앞에서 불빛이 가물거렸다.
《마을이로구나!》
환성을 올리는데 한쌍의 시퍼런 불덩이가 앞에 나타났다.
이게 뭘가?…
한쌍의 불덩이가 다가오더니 따웅- 하고 벼락치듯 하는것이였다.
그 순간 설경성은 나무처럼 굳어졌다. 숨도 쉴수 없었고 손발도 놀려지지 않았다.
아, 끝내… 늙고 굶주린 범은 사람에게 사정없이 달려든다는데…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가 절망감에 사로잡힌 설경성의 고막을 쳤다.
제가 지른 비명소리에 정신이 펄쩍 든 설경성은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맥을 놓고 주저앉으면 범에게 먹히운다. 어떻게 하나 몸을 피해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재빨리 좌우를 살피였더니 제 량옆에 큰 나무가 없었다.
큰 나무가 있으면 그우에 기여오르려고 했던 설경성은 이를 사려물었다.
이제는 오로지 두주먹을 믿어야 했다.
지팽이를 추켜든 설경성이 한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놈, 길비켜라.》
했더니 길을 막았던 범이 따웅- 하며 달려들었다.
《받아라-》
지팽이가 범의 몸뚱이로 날아들었다.
《아뿔싸.》
지팽이가 범의 몸뚱이에서 두동강이 나고말았다.
설경성의 키를 날아넘은 범이 그의 뒤에서 따웅- 소리를 질렀다.
범을 향해 재빨리 돌아선 설경성이 길바닥을 발로 더듬어보았으나 돌이 걸려들지 않았다
오늘은 왜 운수가 꼬이기만 하는거냐?
두다리를 벌려짚은 설경성이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제발 길비켜라!-》
그게 우스웠던지 범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단김을 뿜으며 다가오던 범이 웃몸을 일으키며 앞발로 후려치려 하자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설경성은 무작정 그놈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그러나 아무리 늙고 굶주린 범인들 설경성이 무슨 힘으로 그놈을 당할수 있단 말인가.
범이 사람을 떼여버리려고 몸을 비틀며 껑충 뛰여오르는 바람에 설경성은 그만 땅바닥에 나딩굴었다.
그 순간 설경성은 절망에 빠져 부르짖었다.
《설경성이 여기서 죽는구나.》
그리고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설경성의 목숨이 어찌될는지…
설경성은 범이 자기를 물어뜯는 아픔에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도 사납게 날치던 범은 온데간데 없고 이부자리를 편 방만 보일뿐이다.
이럴수가?!… 그럼 내가 고개길에서 당한 호환은 꿈속에서 겪은것인가. 헌데 나는 어떻게 이 집에 와있을가?…
해빛이 흘러드는 방안을 아무리 둘러보아야 낯설기만 하였다. 이 집을 찾아온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힘장사같이 생긴 로인이 들어섰다.
《젊은이가 정신을 차렸군.》
로인은 뒤따라 들어서는 역시 힘군처럼 생긴 총각에게 일렀다
《력동아, 따끈하게 데운 술에 곰열을 타오렴.》
《알겠소이다,
좀 있어 력동이 사발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로인이 사발을 받아 설경성에게 내밀었다.
《범한테 온통 상했는데 이걸 마시고나면 거뿐해질거네. 다행히도 크게 물린데는 없고 몇군데 찢어지고 타박을 당했을뿐이니… 천행일세.》
사발을 받아든 설경성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럼 내가 진짜로 범과 맞다들렸단 말인가?!
《어서 마시게.》
로인의 재촉에 못이겨 설경성은 단숨에 약물을 마시였다.
곰열은 타박상으로 생기는 어혈을 풀뿐아니라 간과 신장을 보하고 산후탈과 속탈에도 명약이다.
이런 약을 난생 처음 먹고보니 고마움으로 눈길을 어데다 둘지 몰랐다.
《이런 값진 약을… 고맙소이다.》
로인이 둥근 눈을 슴벅거리며 말했다.
《무슨 인사가 그런가. 자네가 아니였다면 난 아직도 범을 잡지 못했을거네.》
설경성에게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말이였다.
《그럼 내가 참말 범과 맞다들렸댔소이까?》
력동이 설경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조금만 늦어갔어도 형님은 두번다시 이렇게 말을 할수 없었을것이오이다.》
로인이 력동이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무슨 말을 그리도 고약하게 하는거냐. 그런 소리나 하려면 물러가거라.》하더니 로인이 설경성에게 말했다.
《내 아들녀석의 말버르장머리가 고약한걸 용서해주게.》
《원 로인님도, 전 사내답게 시원시원한
로인이 방문을 가리켰다.
《저 밖에 황소같은 범이 자빠져있네.》
그 말에 설경성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허나 온몸이 쑤시는 아픔에 도로 주저앉고말았다.
《원 사람도, 아직은 어림도 없네. 그래도 한창때이니 그러지 십년만 더 나이가 있어도 일어나앉지도 못할거네. 한 며칠 꼼짝말고 몸조리를 해야 후환이 없을거네.》
그쯤한건 설경성이 모를바 없었다.
이런 때 조급하게 움직이면 사흘 앓고 일어설것을 열흘나마 고생해야 할것이였다.
《그런데 범을 어떻게 잡았소이까?》
로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놈은 사실 제명을 다 산 늙은 놈이라 맥을 추지 못했네. 그러나 그런 놈이 사람들에게 더 큰 우환단지일세.
범은 홀로 살기를 좋아하네. 그래서 넓은 땅을 서로끔 베여가지고 왕노롯을 하는데 늙어지면 젊은 놈한테 밀려나기 마련일세. 제땅을 노리고 쳐들어온 젊은 놈에게 밀려난 늙은 범을 가리켜 떠돌이범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굶어죽기는 싫어한단 말일세.》
산중의 왕에게 늙어지면 그런 고통이 있게 되는지 알지 못했던 설경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떠돌이범이 인가에 내려와 집짐승을 물어가고 때로는 사람까지도 해치는거네.
자네 덕으로 잡은 그놈은 덩지가 아주 큰 수범인데 올봄부터 우리 고장에 나타나 소도 물어가고 사람도 몇이나 해쳤네.
그때문에 마을들에서 젊은이들이 패를 지어 산을 누비였지만 얼마나 교활한지 종적을 찾을수 있을라구. 사냥으로 늙은 나도 며칠전에야 겨우 종적을 찾았다네.
그래서 그놈의 꽁무니를 바싹 물고 따르댔는데 어제저녁 임자에게 달려들지 않았겠나.
보아하니 자네 담이 여간 아닌것 같애. 그렇지 않았더라면 범과 맞설 엄두나 냈겠나. 떠돌이범이 자네를 물어메치느라 정신이 빠져있었기에 우리 부자가 그놈의 골통을 도끼로 찍을수 있은거네.
자네 덕에 우리 고장의 우환단지를 없애치웠으니 자네야말로 귀인일세.》
그 말에 감동된 설경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이다. 저에게는 의술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로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네, 알아. 자네가 헛소리를 치면서 자기는 어데 사는 누구이고 서경에는 왜 갔댔는지 다 말하더군. 마침일세. 며칠 몸조리를 하고는 우리 마을사람들의 병을 보아준다면 얼마나 고맙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