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8)
설경성은 인차 백운사를 나설수 없었다.
의술의 신비한 비방들을 배우는 그 재미도 그렇고 강포한 몽골과 맞서고있는 오늘날 나라와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도 무술을 닦아야 한다는 백운대사의 조언이 귀중한 일깨움으로 들리였기때문이였다.
언제 또다시 외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남아라면 응당 무술을 닦아야 하질 않겠는가.
전란이 터진다면 나도 전장에 나가 부상자들을 돌봐야 하니 군사들 못지 않게 싸울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고맙게도 무술을 배워주겠다는 귀인이 있는데야 어찌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며칠동안 무술을 배우고 떠나자.
아이적에 병서도 읽으며 병쟁기를 익힌바있어 무술의 생둥이는 아닌데다 사람몸의 360여개 침혈을 눈감고도 알뿐더러 그 침혈들이 인체에 미치는 생리를 꿰뚫고있는 설경성이 마음먹고 접어드니 무술솜씨가 다른 사람들이 미칠바가 아니였다.
무술을 닦는 재미에 설경성은 며칠간만 백운사에 머무르자고 했던 생각을 고쳐먹고 열심히 배웠다.
한달이 지나자 설경성을 제 방으로 불러들인 백운대사가 말했다.
《생각같아서는 시주님을 아예 절에 붙잡아두고싶다만… 천하에 고려의술을 떨치고싶어하는 시주님을 어떻게 더 지체시키겠소?
생각컨대 시주님이 고려의술의 경지를 이루려거든 남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 땅을 빠짐없이 다 밟아보는것이 좋을듯싶소.
이 나라 방방곡곡에는 조상들이 남겨놓은 비방들도 가득하고 새로이 얻어지는 비방도 많을것이요.
의술의 본도가 빈부귀천 차별없이 병자를 인정으로 구제하는 인술이라 바로 그들속에서 의술을 닦아야 명의로 될줄 아오.》
그 말이 설경성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어쩌면 백운대사도 나리의 할아버지나 휴휴선생처럼 꼭같은 말을 하는것일가. 한사람도 아니고 이들모두가 내 나라에서 배움을 찾으라고하는것은 바로 여기에 의원이 가야 할 진리가 있다는것이다. 이젠 알았다. 고려의술의 진보이자 우리 사람들의 몸에 맞는 비방들을 밝혀내는 일인데 무엇때문에 다른 나라에 가서 아까운 세월을 허비하겠는가.
그렇다. 내 나라, 내 겨레와 함께 숨을 쉬며 만병의 비방을 거두어들이는것이 나의 뜻으로 되여야 한다.
옳은 길로 등을 떠밀어주는 백운대사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백운대사는 멀리에까지 따라나와 설경성을 바래워주었다.
백운대사가 준 가라말을 타고 큰길로 접어든 설경성은 이제 가야 할 곳이 딱히 짚이지 않아 한숨을 내쉬였다.
몽골행을 그만두어야 하는것은 명명백백한 일이지만 집을 나설 때와 달리 목적지가 뚜렷하지 못하니 마음도 불안하고 정신도 산만했다.
하늘을 쳐다보니 기러기들이 군사마냥 렬을 짓고 북으로 날아가고있었다.
날새들도 제 갈 곳을 알고있는데…
쓸쓸한 기분으로 하늘을 쳐다보던 설경성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정녕 갈데가 없단 말인가. 뜻은 세웠으되 갈 곳이 없다니…
하늘길을 재촉하는 기러기떼를 바라보던 설경성은 백운대사의 당부가 생각나 중얼거렸다.
《방방곡곡을 밟으란 말이지.》
여기서 방방곡곡이란 사방의 모든 곳을 의미하는것인즉 그것은 곧 내 나라 강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 내 나라 고려의 방방곡곡을 하나도 빠짐없이 밟아보아야 한다는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밟다가는 아까운 세월이나 잃을수 있다.
《빈부귀천 가리지 말고 그들속에서 의술을 닦으란 말이지.…》하고 중얼거리던 설경성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그러안았다.
빈자이든 천한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그들속으로 들어가란 말이지. 백성의 다수는 가난하고 천하다.
사람이 많으면 길이 열린다고 바로 그들속에 들어가야 희한한 비방들을 찾아낼수 있을것이다.
그럼 먼저 어데로 간다?…
한동안 고개를 기웃거리던 설경성이 중얼거렸다.
《그럴것없이 백운대사와 같은 승의들을 찾아다니면 어떨가?!》
리상로를 명의로 키워준 스승도 승의였고 나에게 제가 아는 비방들을 서슴없이 물려준 사람도 불가의 스님이다.
금욕을 설교하는 불가에서는 의술을 밥벌이로 삼지 않으니 승의라면 배움을 허락해줄것이다.
이 나라에 사원도 많아 수백수천, 그 사원마다에 승의가 있을터이니 한사람에게서 몇개만 얻는다 해도 수천수만가지 비방을 모을수 있을것이요. 그것이면 그 어떤 병도 다스리게 될게 아닌가.
눈앞이 환해졌다.
《내 집이 있는 강화도에만도 숱한 사원이 있으니 우선은 그것들부터 돌아보는것이 좋을게다,》하고 힘주어 입을 열었던 설경성이 불쑥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생각이 짧은것 같구나. 백운대사님이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라고 한것은 바로 백성들을 념두에 둔것이 아닌가.
그러니 난 절간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을들을 찾아다녀야 할거란 말이다.)
고개를 젓던 설경성이
《옳거니 먼저 집에 들려
드디여 갈길을 정하고보니 어서 말을 달려 집으로 가고싶었다.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리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나리를
데리고가면
나리의 집으로 맡을 들이대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허나 막상 처녀를 찾아가자고 하니 얼굴이 뜨거웠다.
천하의 의술을 배워가지고 나리를 데려가자 했는데 불과 한달만에… 그게 무슨 사내대장부람?!
불현듯 가슴 그득히 차오르는 나리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버리려고 설경성은 소리쳤다.
《빨리 가자. 이랴 쩌!-》
가라말이 네굽을 안고달렸다. 기세좋게 달리는 가라말을 굽어보는 설경성은 기분이 붕 떴다.
백운대사가 이 말을 내주며 자기가 직접 엄지말에서 받아가지고 키웠고 길도 들인 손때묻은 말이라고 하여서인지 더 정이 가는것 같았다.
달리는 모양새도 바르고 어찌나 기운찬지 천금같은 보배로 여겨졌다.
한시급히 집으로 갈 마음이라 설경성은 언듯언듯 지나치는 마을들을 상쾌해서 바라보았다.
대동강은 배를 타고 건너가 말을 다그쳐 몰았더니 정오무렵에는 중화고을에 들어설수 있었다.
중화라는데가 아침에 서경에서 개경을 향해 떠나면 반드시 점심을 먹고가야 하는 고을이라 해서 그런 지명이 붙은 곳이다.
설경성도 마침이라는 생각에 말을 멈춰세웠다.
개경으로 가는 큰길옆으로 거리가 들어앉았는데 거기에 주막들이 있었다.
말에서 내려 들여다보니 주막마다 나그네들로 붐비였다. 조용한 주막에 들고싶어 조금 더 가니 버드나무가 우거진 골안이 나졌다. 알아보니 류화골이라는것이였다.
설경성이 주막이 있나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하는데 등뒤에서 어떤 사람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을 가진 젊은이, 나 좀 볼수 있겠나?》
분명 자기를 찾는것임을 안 설경성이 돌아서니 보통키의 중년사나이가 열살쯤 나보이는 계집애의 손을 잡고 쳐다보는것이였다.
《나를 만나자는것이오이까?》
중년사나이가 계집애를 가리켰다.
《미안한 부탁인데 이 앨 사지 않겠나? 내 딸인데 눈치도 빠르고 잔심부름도 곧잘한다우.》
펄쩍 놀란 설경성의 두눈이 둥그래졌다.
《딸을 팔겠다는것이오이까?》
《그렇네. 벌써 열흘나마 여기에 나와있는데 어디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지. 제발 우리 집사정을 봐주게나.》
《우리 집사정이란건 또 무슨 소리오이까?》
중년사나이가 한탄조로 대꾸했다.
《난 농사군인데 빚단련에 굶어죽게 되였네. 빚을 물지 않으면 땅도 집도 식솔들도 모두 빼앗아가겠다는거네.》
올해는 어데 가나 농사가 잘되였다는것을 아는 설경성이 그 말에 의문이 가득하였다.
《댁은 농사군이라면서 올해같이 농사가 잘된 해에 빚단련을 받는다는게 무슨 소리오이까?》
긴 한숨을 그은 중년이 대꾸했다.
《올농사야 보기 드물게 잘되였지. 우리 집도 땅이 꺼지게 풍년이 들었다네. 허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말일세. 글쎄 여러해동안 꾸어먹은 곡식을 리자까지 합쳐 몽땅 물라고 부자들이 야단을 치는데 그 성화에 어찌 견딜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사정 좀 봐주게.》
지금껏 이런 일을 목격한바 없는 설경성은 어느 책에서 본 풍년든 해의 피해는 흉년든 해의 피해보다 더 크다는 글귀의 의미를 깨달을수 있었다.
부자들은 어쩜 그리도 모질수 있을가. 농사군들이 죽든살든 아랑곳도 않고 제 리속만 채우려드니…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백성을 부모처럼 여기라, 보민이 왕도이다라는 말이나 외울줄 알았지 이런 악행을 바로잡지 않고있다.
격분이 끓어오른 설경성이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지금 이런 사람들에게는 약이 아니라 당장 구복을 달랠수 있는 쌀이 소용된다.
이들을 구제할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벼슬아치들뿐이다.
내가 벼슬아치라면 이런 때 악독한 부자들을 짓누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주련만…
《보아하니 젊은이는 마음이 착할것 같아.》
격분을 누르며 설경성이 물었다.
《얼마에 딸을 팔겠소이까?》
중년이 맥빠진 어조로 대꾸했다.
《좁쌀 세섬을 살 돈이면…》
《좁쌀 세섬이라…》하고 뇌이던 설경성은 허리에서 금장도를 끌러냈다.
설씨가문에서 물려오는 가보였다.
금장도를 서슴없이 계집애의 손에 들려준 설경성이 중년에게 일렀다.
《이것이면 흰쌀도 몇섬 살수 있을것이오이다.》
설경성은 어쩔줄 몰라하는 중년의 등을 떠밀었다.
《딸을 데리고 어서 집으로 가시오이다.》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라 자꾸만 돌아서는 그를 바래운 설경성은 또다시 주막을 찾아 걸음을 옮기였다.
인차 어떤 집의 마당에서 사람들이 서성대는것이 설경성의 눈길을 끌었다.
음식상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주막같지는 않았다.
끝내 조용한 주막을 찾지 못한 설경성은 그 집곁의 주막에 들어가 밥과 소내포국을 청했다.
안주인이 가져다준 밥상에 마주앉아 구수한 국을 떠먹는데 옆상에 둘러앉은 나그네들이 하는 말이 그의 심금을 울리였다.
《과시 여기 류화골 칼침의원이 속탈엔 명의요. 아침까지만 해도 도무지 밥맛이 없고 먹은것도 내려가지 않아 괴로왔는데 칼침 한차례에 이다지도 밥맛이 나니 이상하지 않수?》
《이보라구 젊은이, 그 칼침을 세차례만 맞으면 돌까지 삭일거네. 나도 십년속탈로 고생했는데 그 칼침 세차례에 뚝 떨어졌다네. 내 그래서 오늘 칼침의원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던거네.》
자기도 모르게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설경성이 물었다.
《칼침의원이란 무슨 말이오이까?》
칼침의원에게 인사를 하러왔다는 늙수그레한 사람이 대꾸했다.
《이 옆집에 칼을 시퍼렇게 갈아가지고 사람을 찔러 병을 고치는 기인이 산다네. 임자도 생각이 있으면 맞아보게. 칼침을 맞을 땐 무섭고 아프지만 맞고나면 효험이 신통하다네.》
칼로 찔러 병을 고친다는 말이 듣다 처음인 설경성은 간담이 서늘하였다.
이번에는 젊은 사람이 설경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깨나 아는 의원들이 칼침의원을 가리켜 글 모르는 무식쟁이가 무슨 의술인가고 비웃어대지만 우린 그 어른이야말로 진짜 명의라 생각하오이다. 식자의원들이 못 고치는 병을 고치면 명의이지 별게 명의겠수.》
설경성은 무식쟁이가 그런 의술을 가졌다는게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칼침의원이 그런 재간을 어데서 배웠다 하오이까?》
설경성의 질문에 늙수그레한 사람이 대꾸했다.
《전장에서 배웠다나보네. 본래 총명한 사람이라 글은 몰라도 배운 모양일세. 》
칼침의원에게 마음이 끌린 설경성은 서둘러 밥을 먹고 주막을 나섰다.
옆집의 뜨락에 들어서니 악- 악- 하는 비명소리가 방에서 울려나왔다.
금시 숨넘어갈듯싶은 비명소리가 어찌나 짜릿짜릿하게 들려오는지 가슴이 막 떨리였다.
뜨락의 한켠에 말을 매둔 설경성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전 병을 보이러 온게 아니고 이 집주인을 만나러 왔으니 먼저 들어간다고 나무람마소이다.》
병자들에게 량해를 구하고 문소리가 날세라 조심히 방문을 열고 들어선 설경성은 가슴이 활랑거렸다.
힘깨나 씀직한 체통 큰 사람이 웃통을 벗은 늙은이의 엉치를 타고앉아 야앗- 소리를 지르며 그의 잔등에 칼을 박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밑에 깔린 병자는 아이고 죽는다고 방안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듣던것보다 병자의 잔등에 박힌 칼이 더 크고 날카로왔다.
저런 끔찍한 칼로 병을 고치다니? ! …
여하튼 칼침의 비결을 알아내야겠기에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은 설경성이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앉았다.
인차 설경성은 눈을 비비지 않을수 없었다.
식칼만 한 칼이 박힌 병자의 잔등에서는 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저럴수가 있나? …
눈여겨보니 칼이 위탈을 다스리는 침혈만을 골라가며 지그시 내리누르는데 피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아 칼침의원이 어떤 기합술을 쓰는것 같았다.
그가 소리를 지르는것도 기합소리인것 같았다.
이윽고 칼침의원의 기합소리가 멎자 병자의 비명소리도 뚝 그치였다.
이로써 방안이 고요해졌다.
《로인님은 래일만 더 오면 되겠소이다.》하는 칼침의원의 갈린 목소리에 고맙다며 절을 한 병자가 일어서기도 전에 다음사람이 들어섰다. 중년의 사나이인데 여러번 왔었는듯 스스로 웃통을 벗고 드러눕는것이였다.
《어디 또 해볼가.》하더니 칼침의원이 그의 배에 칼을 들이대며 기합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병자도 악- 소리를 지르는데 방안은 또다시 떠나갈듯 소란스러웠다.
설경성의 눈길이 중완혈을 칼로 내리누르는 칼침의원의 두손에 그루를 박았다.
칼자루를 틀어쥔 칼침의원의 두손이 떨고있는데 기합을 넣느라 그러는듯싶었다.
의원도 병자도 그 모진 칼침에만 정신이 쏠려있으니 설경성의 존재를 알리 없었다.
그것이 설경성에게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되였다.
덕분에 설경성은 여유작작하게 칼침술을 엿볼수 있었다.
가만 보니 칼침술이자 침술인데 차이가 있다면 칼로 살가죽을 베지 않으면서도 가는 침보다 자극이 세기때문에 효험이 있는것 같았다.
눈에는 익어도 손에 설다고 그 칼침술을 습득하기가 대단히 헐치 않을것이였다.
가만, 내가 칼침술을 배우는게 어떨가. 그렇게 하자면 천민이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섬겨야 하는데 체면이 깎이는노릇이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설경성이 머리를 저었다.
옛적에 어떤 사람은 명문대가의 자식이였지만 종출신의 의원에게서 의술을 배우고 명의가 되였다질 않는가. 배우는 길에서는 체면치레를 생각지 말라고 했거늘…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고려의술이 고구려때처럼 세상을 앞서나가게 하자면 천한 사람이라고 해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야 한다.
해가 저물어 병자들이 다 돌아가고 초불을 켠 칼침의원은 그제서야 설경성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댄 누군고?》
설경성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지나가던 나그네 버릇없이 뛰여들어 칼침술을 넘겨본걸 용서해주소이다. 칼침술이 하도 신통하다기에 죄되는짓인줄 알면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칼침술을 배워준다면 스승으로 모시겠소이다.》
설경성이 자기의 소개를 하니 껄껄 웃고난 칼침의원이 그의 등을 두드리는것이였다.
《남다른 의술을 닦으러 집을 나섰다는 사내가 그게 무슨 죄라고 허리까지 굽신거린단 말인가. 나도 이젠 환갑고개라 슬하에 제자를 두려 했는데 때마침일세.》
《저… 이런 기이한 의술이야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될게 아니오이까?》
의아해하는 설경성을 바라보는 칼침의원의 두눈에 눈물이 고여올랐다.
《난 홀몸일세. 외적란에 부모처자가 모두 잘못되였네. 내가 군사로 나가있을 때 고향마을에 달려든 몽골놈들이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을 도륙냈네.
이 나라 사람치고 귀축같은 그놈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은이가 어데 있겠나. 아, 가슴이 터질 그런 말은 그만하세나.
오늘에야 내 재주를 물려받을 적임자를 만났은즉 이 어찌 복이 아닌가. 우선은 저녁요기를 하고보세.》
저녁을 먹자며 칼침의원이 이끄는 곳으로 가니 뜻밖에도 옆집의 주막이였다.
《난 바쁘다나니 이 집에서 끼식을 치른다네.》
그날 밤 칼침의원집에서는 초불이 꺼질줄 몰랐다.
무릎을 꿇고앉은 설경성은 칼침의원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온몸이 귀가 되였다.
《몽골놈들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 난 서경에서 군사로 있었네. 그때 칼침술을 배웠네. 나에게 칼침술을 배워준 스승도 나처럼 농사군출신의 군사였네. 그분은 변방고을태생이였지.
그분은 내가 눈썰미가 좋다면서 가문의 비술이라는 칼침술을 배워주었네.
원통하게도 나의 스승은 싸움에서 잘못되였네. 그분이 잘못된지도 벌써 삼십년이 되여오네. 스승이 잘못되지 않았더라면 칼침술을 말끔히 배웠을텐데… 외적때문에 속탈을 고치는 비술밖에 배우지 못했어. 아, 그 몹쓸 외적이 원쑤야.》
떠오르는 의문으로 설경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께서도 글을 배우지 못했소이까?》
《나처럼 까막눈이였네. 하지만 대대로 칼로 병을 고치는 비술을 물려오는 집에서 태여난 덕에 그 재주를 닦은것일세.
허참, 글 배운 의원들이 나를 보고 까막눈따위가 무슨 의술인가고 비웃으며 칼침술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걸 맞아본 사람들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이게 별일이 아닌가.
스승께서 이 재간을 배워주면서 당부하시기를 글은 몰라도 똑똑하고 정직한 젊은이가 있으면 그 재간을 물려주라 하셨네. 그런데 아직 그런 적임자를 만나지 못했네. 아니, 실은 생각지 않았다네.
그런데 오늘 자네가 나타나 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거던. 자네같이 의술을 아는 사람이 이 재간을 가진다면 스승께서도 기뻐하실거네. 그럼 시작해보세.》
칼침의원이 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칼침술을 배워주었다면 설경성은 제발 이밤이 열밤처럼 길어주기를 바라며 그 비결을 터득하는데 온 정신을 도사렸다·
칼침의원이 설경성의 몸에 칼을 들이대고 기합소리를 지르면 그에 놀란 그도 제김에 아우성을 치였다.
그때 칼로 침혈을 누르며 기합을 넣는 묘리는 말로는 표현할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설경성은 칼침의원의 훈시밑에 병자들을 칼로 찌르며 그 비술을 익혀나갔다.
침술에 능한 설경성이라 그 첫날에 벌써 효험을 부리니 칼침의원조차 혀를 둘렀다.
열흘만에 칼침의원이 이제 더는 배워줄것이 없노라 손을 들었다.
《자네같은 인재에게 스승노릇을 하겠다는 내가 어리석지.》
더없이 만족해진 칼침의원은 설경성의 등을 어루만지며 기뻐했다.
《자넨 타고난 의원일세.》
생각밖에 한다하는 의원들도 모르는 칼침술을 닦은 설경성은 크게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귀족출신의 의원인 민방과 칼침의원간이 하늘과 땅인듯 너무나도 차이나는 그 점이였다.
민방이 어떠했던가. 남다른 의술을 그 누구에게도 배워주지 않으려는 나쁜 마음에서 제자도 두지 않고 오로지 돈주머니나 불룩한 부자들만 치료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칼침의원은 남다른 칼침술을 가지였건만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없이 치료해주고 그 비술을 물려받을 제자를 두지 못해 오히려 안타까와했으니 민방이따위는 발뒤꿈치에도 따를수 없는 높은 덕행을 지니고있는 참사람이다.
이것이 진정 백성들의 참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백성들에게서 배우는것이 정녕 옳은 길이라고 할수 있구나. 난생처음 백성들속에 인재가 있음을 목격한 설경성은 혈혈단신이라는 칼침의원을 두고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부님, 집터를 잡는 묘리를 배워준 사람도 평생 스승으로 모시라 했는데… 전 사부님을 제 집으로 모셔가려 하오이다. 함께 가주시면 저의 복인줄 아오이다.》
칼침의원이 목메인 소리로 대꾸했다.
《고마우이. 자네같은 사람을 제자로 둔것만도 더없이 기쁘네. 후날 자네가 세운 뜻을 성취한다면 내 무얼 더 바라겠나.
그리고 여기 시골에서도 날 위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라구.》
눈물을 흘리며 설경성은 말고삐를 칼침의원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걸 제자의 성의라 아시고 제발 거절하지 마시오이다. 병자를 찾아다닐 때 이 말을 타시면서 이 제자를 생각해주소이다.》
설경성은 눈물속에 칼침의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