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야기

《찬성사벼슬을 받고 치사하여 일흔일곱살에 죽었다.》

(《고려사》권 제122렬전 제35에서)

(1)

 

무신년(1308)의 겨울바람은 고려의 도성인 개경에도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백발로인 설경성은 자기의 집으로 몇명의 제자들을 불러들이였다.

70평생 키운 제자가 수백명을 헤아리건만 그들을 한자리에 모여앉힐만큼 큰 방이 없으니 나이많은 제자들만 불러들인것이였다.

아래목에서 벽에 기대앉은 설경성은 수십년세월 함께 늙어오는 제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난 벼슬을 바치고 집으로 돌아왔네.》

그 말이 제자들에게 한결같은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설경성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명의로서 임금이 제일로 아끼는 신하였기때문이였다.

고려뿐아니라 력대 원나라임금들까지도 병이 나면 설경성을 청해가는것이 전례로 되여있었다.

설경성이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기력이 왕성하고 정신도 젊은이들 못지 않게 좋으며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골병도 능히 다스릴줄 아는데 그런 사람을 집으로 들여보냈다고 하니 믿을수가 없는 그들이였다.

허나 설경성이 빈말을 한게 아니였다.

한달전 세상을 떠난 임금으로 말하면 고려의 25대임금으로서 애젊은 시절에 걸린 중병으로 나이가 마흔살에 이르러서부터는 병상에 누워있는 날이 많았었다.

그때 의술이 제노라는 어의들도 임금의 병은 몇해를 더 살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것을 설경성이 그 고질병을 다스려 20여년을 정력에 넘쳐 더 오래 살게 한것이였다.

온 나라에 흩어져있는 의술의 비방들을 빠짐없이 모아들이는것이 설경성의 소원임을 잘 알던 임금은 숨을 거두면서 그 소원을 성취하라는 말을 남기였다.

임금의 장례를 치른 설경성은 26대 룡상에 등극한 임금에게 벼슬길에서 물러가겠다는 뜻을 아뢰였다.

어린 태자시절부터 설경성을 존경하며 따른 새 임금도 설경성의 소원을 잘 알고있었기에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설경성은 조정에서 몇손가락에 꼽히우는 찬성사의 높은 벼슬을 바치고 돌아온것이였다.

한사람, 한사람 제자들을 둘러보던 설경성의 눈길이 그들중에서 좌상격인 박력동에게서 멈춰섰다.

설경성이 20대 홍안시절에 첫 제자로 받아들인 력동이도 어느덧 일흔고개를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였다.

흰서리가 반나마 내리덮인 그의 머리를 보며 세월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야속함을 다시한번 느끼는 설경성이였다.

이윽고 설경성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자네에게 향도를 맡기네.》

설경성은 어리둥절해하는 제자들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일렀다.

《자네들모두가 박공을 받들어 향도의 일이 잘되도록 합심해주게.》

설경성의 눈길에 두번째로 받아들인 제자 조석견에게로 옮겨졌다.

태의감에서 두번째 가는 소감의 관직을 맡은 그는 지금 60고개를 바라보고있었다.

《난 성상페하께 이제부턴 자네에게 병을 보이도록 아뢰였네.》

설경성은 당황해하는 조석견에게 정겨운 시선을 주었다.

《자네의 의술이면 능히 감당해낼수 있으니 신심을 가지라구.》

이윽고 설경성의 눈길이 태의감 박사 김석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처남이기도 하였다.

《자네에겐 특별히 조정의 수석인 첨의중찬 최공이 앓지 않도록 그를 돌보는 일을 맡기려네.》

최공은 설경성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최유엄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그도 칠십고개를 바라보고있네. 지금 조정의 명재상으로는 그 한사람뿐이네. 그가 쓰러지면 나라에 큰 손실이라는것을 명심해두게.》

《명심하겠소이다.》

그다음 설경성의 눈길이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채홍철에게로 옮겨졌다.

《난 자네가 향도를 위해 기울인 공력을 생각하면 참말이지 무릎꿇고 큰절을 드리고싶네. 향도를 위해서 벼슬까지 바친…》

설경성은 목이 메여 더 말을 이을수 없었다.

채홍철은 향도를 위해 누구보다도 공을 세운 사람이였다.

설경성을 권세로 돕기 위해 벼슬길에도 제일먼저 뛰여든 사람도 그였고 제자를 더 많이 키웠으면 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제 집에 의생당을 내온 사람도 그였다.

의생당을 운영하자니 한창 승진의 일로를 걷던 40대나이에 장흥부사이던 벼슬을 바치고 의원의 길에 돌아와 10여년세월 후진을 키워온 채홍철이였다.

이 나날 제 집의 재물을 기울여 지은 약으로 가난한 병자들을 구제하였기에 사람들로부터 채홍철의 집이야말로 진짜 활인당이라는 칭찬을 모아왔었다.

채홍철이 벼슬길에 그냥 눌러있었더라면 당대의 명필이고 문장과 음률에도 밝은 그의 재주로써 얼마든지 크게 출세를 하였을것이였다.

격정을 가라앉힌 설경성이 눈굽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벼슬길에 다시 나서야 하겠네.》

설경성은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채홍철을 손을 들어 제지시키였다.

《인차 성상페하께서 자네를 부르실거네.》

며칠전 새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 설경성은 채홍철을 천거했다.

태자시절 활인당의 소행에 감동되여 채홍철을 찾아가 많은 상을 내린바도 있는 임금인지라 그를 크게 써줄것을 쾌히 약속하였다.

설경성이 채홍철을 벼슬길에 다시 내세우려고 하는것은 제자들중에 그보다 국사에 밝은 사람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국사에 환한 사람이라야 조정의 기둥으로 쓰일수 있는것이고 나라와 향도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을 해낼수 있는것이다.

력동이에게 눈길을 돌린 설경성이 그에게 말했다.

《박공이 무민이 하던 일을 겸해보도록 하게. 그리고 태의감과 혜민국의 의생방도 잘 돌보고…》

《알겠소이다.》

설경성은 맨뒤에 앉은 두사람의 중을 번갈아보았다.

이들은 다 40대로서 한사람은 홍법사의 승의 학선이고 다른 중은 복산이였다.

《자네들은 승의들을 더 잘 이끌어야겠네.》

가슴우에 두손을 모아쥔 그들이 대꾸했다.

《사부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소이다. 나무아미타불.》

다시한번 제자들을 한명한명 둘러보던 설경성의 눈길이 이 자리에서 처음 그러했듯 력동이에게서 먼저 멈춰섰다.

《자네가 보다 관심을 돌리고 힘써야 할것은 향도에 모아들인 의술의 비방들을 하나도 류실되지 않도록 더 잘 보존하고 또 모두가 써먹을수 있도록 이끌어주는것일세.》

력동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께서 애써 모아들인 비방들을 후세에 전해주는것이 저희들의 마땅한 도리임을 명심하겠소이다.》

설경성의 눈길이 승의 복산에게 옮겨갔다.

《자네는 칼침술에 특기가 있지. 칼침술에선 나보다 낫다니까. 그러니 그 장끼를 잘 살려가지고 사람들의 인기를 모아야겠네.》

《명심하겠소이다.》

복산에 이어 설경성의 눈길이 학선에게서 멈춰섰다.

《자네는 침구술뿐아니라 부항에도 조예가 있는데 그 비법을 더 깊이 파고들게.》

이렇게 제자들 매 사람들에게 특기를 어떻게 살리라고 훈시를 하던 설경성의 눈길이 김석에게로 옮겨졌다.

《자네는 약처방을 짓는 재간은 있는데 아직도 많은 약재들을 쓰려고 하는게 흠일세.

사람들에게 흔한 병일수록 한가지 약재로 약을 지어쓰는 묘술을 터득할 때라야 정녕 고려의술을 배웠다고 할걸세.》

김석이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이다.》

제자들을 믿음속에 둘러보며 설경성이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대들이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것은 우리 고려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비방은 바로 백성들속에 있다는거네. 백성이야말로 의술의 바다일세. 물론 다른 나라들에도 좋은 비방이 있다면 배워야 하네. 그러나 남의것만 쳐다보면서 의술의 바다를 외면한다면 훌륭한 의원이 될수 없네.》

백운대사와 칼침의원, 대중보 등 의술의 바다를 헤쳐오던 나날 한생 잊을수 없는 배움을 준 사람들을 그려보던 설경성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고려의술은 대대로 자기의 독특한 비방으로 천하의 의술을 선도해왔네. 그러니 우린 앞으로도 마땅히 고려의술로 세상을 앞서나가야 하네. 자네들에게 당부하고싶은건…》

설경성은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얼른 손을 눈굽에 가져갔다.

설경성이 마치도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처럼 처신하는 태도에 눈들이 둥그래진 제자들은 그 까닭을 알수 없어 저희들끼리 쳐다볼뿐이였다.

이윽고 설경성이 말을 이었다.

《난 래일 개경을 떠나자고 하네. 그래서 오늘 긴말을 아니할수 없는거네.》

일제히 놀란 눈길로 쳐다보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설경성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네들도 내가 처음부터 품었던 뜻이 무엇인지 알거네. 내 일찌기 내 나라의 방방곡곡에 묻혀있는 의술의 비방들을 전부 모아들이자고 마음을 먹었건만 벼슬길까지 걷다보니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네.》

채홍철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사부님의 결심이 지극히 옳은줄 아오이다. 하지만 사부님의 의술은 천하의 그 어떤 병도 고칠수 있으며 사부님의 비방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소이다. 이제 남아있다고 하는 비방이라야 시골의원들이나 매만질 시시한것뿐이라고 전 생각하오이다.》

한순간 어두웠던 설경성의 얼굴에 너그러운 웃음이 어리였다.

홍철이 십여년이나 초야에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간의 일을 다는 알수 없는것이다.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 비방의 진속을 순간에 알아낼수도 있고 한생을 다 바치여도 모를수 있다.

《그럼 자네에게 하나 묻겠네. 자네 낟알 한되박을 가지고 두되박을 쓴것만큼 술을 뽑을수 있겠나?》

억실억실한 두눈에 의혹이 가득한 채홍철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이거야말로 밥 반그릇을 먹고 한그릇을 먹은것처럼 배를 불려야 한다는것인데 세상에 그런 괴이한 비법이 어데 있단 말인가.

손짓으로 채홍철을 눌러앉힌 설경성이 말했다.

《십년전 그해 기근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네. 그때 병치료로 어느 집에 갔던 나는 아주 신기한 비법으로 뽑은 술을 먹어보았네.

안주인의 말이 찰벼짚과 붉나무껍질을 푹 달여낸 물로 술을 빚으면 쌀 한되로 두되를 쓴것만큼 술을 뽑을수 있다는거네. 물론 주정도 다를바 없고. 이처럼 백성들속에는 별의별 신기한 비법들이 있네. 이런 비법들은 조상대대로 물려오는것도 있고 새로 얻어내는것도 있네.》

이번에는 학선이 일어섰다.

《사부님의 소원이 정 그러하시다면 그 길로 우리 제자들이 걷도록 하여주소이다.》

그 말에 력동이 합세해나섰다.

《사부님, 저희들이 방방곡곡을 다 뒤지겠으니 사부님께서는 의서를 쓰시오이다. 사부님께서 의서를 써내시면 천하보물로 될것이오이다.》

감동된 설경성이 두눈을 슴벅이였다.

《나도 의서를 쓰고싶네. 그러나 아직 돌아보지 못한 고장들이 있는데 다 밟아보고 의서를 만들어도 늦지 않을걸세.

물론 자네들에게 고을들을 돌아보게 할수도 있네. 그러나 내 마음이 그걸 허락치 않네. 내가 살아있으면서 그 일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내맡길수가 있겠나. 그리고 자네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람마다 보는 눈도 각각, 듣는 귀도 각각이고 그 느낌도 각각이라 꼭 내가 돌아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걸 어찌한단 말인가. 내 그만 그 길에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을거네. 하지만 나에겐 자네들이 있으니 내가 없어도 의서를 써낼수 있을걸세.

이제부터 내 말을 더 명심해듣게. 백성구제를 수레에 비긴다면 그 수레를 움직여나가는 한쌍의 바퀴가 있네. 남아대장부로서 생의 자욱을 크게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바퀴가 되려고 해야 하네.

백성을 구제하는데는 두길이 있는데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 바른 정사로써 가난구제를 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의원이 되여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술의 길일세. 바로 이 두길을 가리켜 백성구제의 수레바퀴라고 하는거네.》

물론 이런 말은 설경성이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였다.

해마다 설날이면 세배를 하러 온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언인듯 느껴지는 설경성의 간절한 어조에 숨을 죽이였다.

《난 처음 의술길에 나서 수십년세월 사람은 그 한쌍의 수레바퀴에서 하나밖에 밀수 없다고 여겼네. 그러던중 뜻밖에도 임금의 은총으로 군부총랑이라는 중임을 맡고서야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그 한쌍의 수레바퀴를 동시에 밀수 있겠다고 생각했네.》

숨을 죽인 제자들은 온몸이 귀가 되였다.

설경성은 지금 자신의 한생을 총화짓는 심정이였다.

《내가 마음먹고 그 한쌍의 수레바퀴를 밀어오는지도 벌써 강산이 변했네그려. 오늘 돌이켜보니 의술을 배운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백성구제의 수레바퀴들을 밀수 있다는거네. 백성구제란 무엇이겠나, 그게 곧 부국강병을 이루는것이 아니겠나? 백성을 구제하면 민심이 좋아지고 민심이 좋아지면 군심도 좋아지기마련이니 그래서 나라가 강해지는거란 말일세. 이 두길을 가려는자는 그에 앞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것이 있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아껴주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의술이 뛰여나도 또 조정의 실권을 쥐였다고 해도 백성구제의 수레바퀴를 한치도 움직일수 없다는거네.

그대들속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향도에서 나가도 되네.》

한사람, 한사람 엄한 눈으로 제자들을 둘러보던 설경성이 힘주어 말을 이었다.

《허나 힘은 들어도 백성구제의 수레를 민 사람은 인생을 떳떳이 살았다고 할수 있네.

그대들은 후진을 키우는데서도 그들이 가슴속에 이런 마음을 간직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하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백성구제를 하자면 탐욕이 아니라 위국애민의 마음부터 가져야 하네.》

제자들에게 뒤일을 일일이 부탁한 설경성은 그날 밤 나리를 업고 방을 몇바퀴 돌았다.

외지에 나가있다가 집에 돌아온 날 밤이라야 안해를 업어주군 했던 습관을 처음으로 어긴 설경성이였다.

《나리, 내 생각이 짧았네그려. 이제부턴 집을 떠나기 전에도 임자를 꼭꼭 업어주겠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것 같네.》

설경성의 넓은 등에 업힌 나리는 격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였다.

천리에 떨어져 산대도 이렇게 위해주는 마음이 지극한 지아비인데야.…

설경성은 다음날 행장을 갖추고 방을 나섰다.

설경성이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는데 아들 문우가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전 아버님을 보내지 못하겠소이다.》

40대나이의 문우는 국학에서 두번째의 관직인 제주를 맡고있었다.

문우가 벼슬길에 나설 후진을 키우는 국학으로 가게 된것은 조정에서 취한 조치였다.

조정에서는 국학에서도 의술을 심도있게 가르치게 하려는 의도에서 문우를 그곳으로 보낸것이였다.

문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설경성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너만큼 아비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게다. 내가 벼슬길 20년에 더 애를 썼더라면 만가지 비방을 모아들여 지금쯤은 좋은 의서를 쓰게 되였을게다. 네가 진정 참된 효도를 하련다면 이 아비가 뜻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 네가 아비대신 가장이 되여 할머니와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자식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준다면 이 아비는 마음놓고 길을 갈수 있다.》

그래도 문우는 막무가내였다.

《늙으신 아버님을 한지에 내맡긴다면 그게 무슨 효도라 하겠소이까. 사람들모두가 날 불효자라고 꾸짖을것이오이다.》

그때 바느질을 하던 문우의 할머니 박씨가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는 문우에게 엄한 눈길을 겨누었다.

《네 생각이 짧으니라.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이 어찌 효자가 될수 있단 말이냐. 네 부친은 그 길을 가고싶어 가는것이고 또 열두번 쓰러진대도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말문이 막힌 문우에게 박씨가 엄하게 일렀다.

《어서 길을 비켜드리지 못할고?》

박씨의 엄한 질책에 문우는 아버지의 손에 말고삐를 돌려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럼 몇사람을 붙여드리겠으니 그들을 데리고 가시오이다.》

말고삐를 쥔 설경성이 고개를 저었다.

《병치료도 해야 하는데 시중군들을 달고다니면 도리여 지장이 된다. 나는 아무데 가서도 역마를 탈수도 있고 어느 고을에서나 객관에 들수 있다. 시중군이 소용되면 아무 관가에서나 빌려쓸수도 있고. 그럼 집을 부탁한다.》

온 식솔의 바래움속에 집을 나선 설경성은 말우에 올랐다.

동대문을 나선 설경성이 얼마쯤 갔는데 문득 앞을 막는 녀인이 있었다.

그가 유일한 녀제자인 을나임을 알아본 설경성이 말에서 내려섰다.

《자네가 어떻게? …》

을나는 제뒤의 말을 가리켰다.

《소녀도 사부님과 함께 가자고 말을 끌고 기다리던 참이오이다.》

《그럼 궁성일은 어떻게 하고?》

《소녀도 이젠 궁인이 아니오이다.》

며칠전 을나는 임금의 허락을 받고 궁을 떠나온것이였다.

이로써 20여년 임금과 왕후의 약시중을 들어온 그의 궁중살이도 끝이 났다.

사내들 못지 않게 결패가 센 을나는 혈혈단신이라 누구에게도 구속될바가 없었다.

《어데로 가시려 하나이까?》

말우에 올라앉은 설경성이 동쪽을 가리켰다.

《동주(고려시기 철원지역에 있던 고을)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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