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28)
무정하게도 세월은 류수와도 같이 흘러 무신년(1308)의 더위가 닥쳐들었다.
벼슬길에서 스무해라는 세월이 설경성을 70고령의 늙은이로 만들어버렸다.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설경성은 신효사의 별궁에서 병고에 시달리는 임금의 병시중을 들고있었다.
요즘은 침상에만 누워있던 임금이 맑게 개인 이날 아침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설경성이 내미는 약물을 받아 쭉 마시고난 임금이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은 비가 걷힌가본데 매미가 우는 밖에 나가 거닐고싶으이.》
임금은 부축하려는 궁녀들을 손짓으로 물러가게 하고는 설경성의 손을 부여잡았다.
《오늘은 오로지 그대하고만 있고싶으이.》
몹시 수척해진 임금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서는 설경성의 가슴은 쓰리였다.
내기 지닌 의술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자기 임금조차도 장수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명의란 말인가?!…
임금과 함께 그늘 좋은 후원으로 나서니 이 나무, 저 나무들에서 참매미들이 귀따갑게 울어대고있었다.
설경성에게 의지해서 힘겨웁게 걸음을 옮기던 임금이 멎어섰다.
그리고는 기대어린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이제 더는 군신간으로가 아니라 그저 어깨동갑의 친구로 지내세. 그래주지?》
얼마 더 살수 없는 병자의 청을 외면할수가 없기에 설경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했네. 이젠 속에 있는 말을 해보세나. 내 병이 무슨 병이지?》
설경성이 씩 웃었다.
그것을 알고싶어 어깨동갑친구라…
아무리 친구사이라도 그렇지 의원이란 사람이 여느 병도 아니고 지옥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그 무서운 병을 어떻게 대줄수 있단 말인가? !
임금이 입을 꾹 다물고있는 설경성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아무리 의술에 까막눈이라고 한들 한두해도 아니고 이십여년이나 천하명의와 함께 지내왔는데 나를 괴롭히는 병을 모르겠나. 그대가 지어주는 약을 보고 난 내가 위적(위암에 해당되는 병)에 걸렸다는걸 알았네.》
설경성은 임금의 눈길을 피해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임금은 20여년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벌써 적에 걸려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위적을 다스리는 약을 함께 써온것이였다.
적이 든 몸으로 이만큼 산것은 기적이였다.
《얼마를 더 살것 같나?》
임금의 질문에 설경성은 선뜻 입을 열수 없었다.
병자에게는 넉넉히 잡아 두달가량 생이 남아있었다.
임금이 눈을 흘기였다.
《자네 하루종일 겨울개구리마냥 입을 척 봉하고있을셈인가? 마음대로 하게. 제 죽는 날은 병자가 안다는 말 알겠지? 내 생각엔 기껏 한두달이야.》
그 말에 설경성은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생이 시시각각으로 꺼져가는 병자를 두고 속수무책이니 이런 불충이 어데 있는가.
임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설경성의 등을 두드렸다.
《진정하게, 자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이미 스무해전에 잘못되였을거네. 천하에서 으뜸가는 명의를 만나 스무해를 더 살았으니 정말 복을 받았네. 내 나이 일흔세살이라 고려임금들중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일세.》
그 말이 설경성에게는 더욱 아프게 들리였다.
《성상페하, 신이 불미스러워 왕후마마까지 잃게 했는데…》
타고난 질병으로 왕후는 10년전 세상을 하직하였다.
임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그대가 있었기에 왕후도 십년이상이나 산것이고 원나라임금도 오래 산게 아닌가.》
설경성은 후비라이를 약속했던대로 10년을 더 살게 해주었다. 그는 죽은 후 세조라는 시호를 받았다.
《천하에 제노라하는 명의들이 다 달라붙어가지고도 어쩌지 못했던 원나라임금의 병을 고쳐준 자네가 있어 고려의술이 빛을 낸게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자네가 아니였다면 지난해 잘못된 원나라 성종도 십여년을 더 못했을거네.》
원나라 성종은 후비라이를 이어 황제로 등극했던 태자 철목아였다.
그도 십여년전 중병에 들었었는데 원나라의술로는 고칠수 없었다.
그래서 성종은 급기야 설경성을 청해오게 하였고 그 덕에 십년은 더 산것이였다.
그러나 설경성은 자기의 의술을 인정할수 없었다.
《좌, 우중찬들이 한꺼번에 잘못된것을 생각하면 성상페하를 뵈올 면목이 없소이다.》
이태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던 홍자번과 한희유들이 온역에 걸려 불귀의 몸이 되고말았다.
그때 홍자번은 우중찬이고 한희유는 좌중찬이였다. 한꺼번에 조정의 두 기둥이 쓰러진것은 고려에 있어서 큰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여러번이나 조정의 수석을 지낸 홍자번이 개경을 지키고있었기에 임금이 마음놓고 도성을 멀리 떠나 서북면과 동북면에서 나라방비에 힘쓸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반란세력은 말할것도 없고 원나라조정도 더는 고려의 강토를 넘볼수 없었던것이다.
또 한희유가 있었기에 고려군이 능히 외적을 쳐부시고 강토를 지켜낸것이였다.
10여년전 고려의 산중으로 깊숙이 기여들었던 합단의 무리에는 천하용사라는 장수가 있었다.
적들의 맹공격에 고려군이 뒤로 밀리우고있을 때 한희유가 사람의 키를 세곱이나 넘는 긴 창을 휘두르며 적진속으로 말을 몰고들어가 그자의 목을 단번에 따옴으로써 형세를 급전시킬수 있었고 하여 놈들을 전멸시키는 대첩을 이루었던것이다.
임금이 한숨을 내그었다.
《그들을 잃은건 만회할수 없는 손실이였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여기 개경에 있었으니 어쩔수 없었네. 사람이 신선은 아닌 이상 어떻게 닥쳐들 불행을 속속이 앞질러 막을수 있겠나. 너무 마음쓰지 말게.
난 지금도 남의 나라에 가서 잘못된 홍자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잊을수가 없네.》
임금의 두눈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때 병석에서 홍자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의술의 힘이 그렇게 클줄은 몰랐다. 설경성이 일찌기 의술을 버리고 벼슬길을 탔더라면 어쩔번 했는가. 후비라이나 그를 이은 원나라황제들의 목숨을 거머쥔 천하명의 설경성이 있었기에 나같은 사람은 도저히 이룰수 없는 큰일을 해낼수 있은것이다. …
홍자번의 말대로 원나라가 압록강 이남의 강토를 되찾아가진 고려를 미워하면서도 감히 군사를 쓰지 못한데는 설경성의 몫도 적지 않았다.
오늘도 원나라조정은 설경성을 천하명의라고 떠받들며 구세주처럼 여기고있었다.
《홍자번의 칭찬은 과한게 아닐세. 나도 자네를 곁에 두고있었기에 이만큼 오래 살수 있은거네.》
그러나 설경성은 고개를 들수 없었다.
이웃나라에 가있던 홍자번은 그렇다치고 개경에 있던 충신들의 명을 지켜주지 못한 내 아닌가, 얼마나 많은 충신들이 떠나갔는가?!
정가신은 첨의중찬으로 등용된 그해에 잘못되였고 리익배, 리승휴, 오윤부도 이제는 이승사람이 아니다. …
임금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벼슬자리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고 어려운 일감은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이 자네를 두고 생겨난듯싶으이… 자네야말로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일세. 난 자네가 세운 공을 세상에 대고 자랑하고싶네. 자네가 없었다면 고려의술이 제일임을 세상에 떨치지 못했을것이고 나라의 의술도 진보시킬수 없었을거네. 아무렴!》
설경성이 벼슬길에서 해마다 놓치지 않은것이 의과였다. 그가 직접 의과를 열고 의술의 인재들을 선출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의원들을 키워냄으로써 의술을 맡아보는 관청들이 인재부족을 모르게 하였고 고을과 군진들에서도 의원이 모자라지 않게 되였다.
전해오는 의서들도 거듭 찍어내였다.
《정직한 인재라야 참사람을 귀히 여기고 악인을 미워한다는데 그댄 참으로 조정의 쇄신에도 큰 기여를 하였네.》
설경성이 임금의 곁에 있는 동안 불미한자들이 더는 날뛰지 못하였다.
친원의 거두였던 조인규는 제정신으로 살라고 충고하는 설경성이 두려워 움츠렸던 고개를 두번다시 쳐들지 못하였다.
친원의 세력이 부서짐으로써 원나라가 더는 고려의 내정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설경성을 해치려 했던 지난날의 죄의식때문에 몇해전 병석에 누워있던 조인규는 의원을 청해오지도 못하게 하고 숨을 거두었다.
《자넨 참 의리도 깊으이. 자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리승휴가 복직이란 꿈도 꾸지 못했을거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경성은 리승휴의 복직이 나라에 리롭다고 임금에게 간청하군 하였다.
하여 리승휴는 다시금 벼슬길에 올라 조정의 부국강병에 힘쓰고 백성을 돌보는 정사를 펼치도록 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 바치였다. 그리고 《내전록》, 《제왕운기》와 같은 책들을 집필하고 77살로 생을 마치였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할것은 자네가 원나라조정에게 있어서 은인과도 같은 존재로 된 덕에 그것들이 더는 우리가 수복한 강토를 넘보지 못하는 그것일세.》
원나라 성종의 병을 고치던 나날 설경성은 세조의 식솔들과 보다 친근한 사이로 되였다.
세조에 이어 성종까지도 설경성의 의술로 명을 누리니 그의 집안에서 그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하늘과도 같은 존재가 개경에 두팔을 벌리고있기에 그들은 고려가 되찾은 서북면과 동북면을 감히 다시 넘볼수 없었던것이다.
《옛말에 멍텅구리는 곁에 인재가 있어도 그가 인재인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면 나도 그리 암둔한 사람이라고는 할수가 없지. 아무리 뛰여난 군주일지라도 곁에 정직한 인재가 없으면 나라를 바른길로 이끌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나?》
임금이 익살을 부리니 설경성은 더욱 얼굴이 뜨거웠다.
얼굴을 붉히는 설경성을 바라보며 임금이 웃었다.
《허- 롱말도 못하겠군. 이렇게 지내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일거네.》
《?! …》
임금이 설경성에게 몸을 의지하며 말했다.
《난 자네를 통해서 천하명의는 능히 나라를 바로잡는다는것을 깨달았네. 나라를 바로잡는다는것이 무엇이겠나. 병고에 시달리는 군주를 구제하여 그가 건장한 정신으로 나라를 돌보게 하는것이 아니겠나. 자네는 나에게 너무도 큰걸 주었지만 난 별로 준것이 없네. 이게 가슴에 걸려.》
설경성이 울먹이며 대꾸했다.
《옛적에 천하명의 리상로도 정3품의 상서벼슬로 그치였지만 신은 그보다 높은 정2품의 찬성사에 올랐으니 분에 넘칠뿐이오이다.》
세상에 의원으로서 설경성이처럼 재상으로까지 출세한 사람은 아주 흔치 않을것이였다.
군부총랑에서 나라의 재정과 곡식을 맡아보는 삼사의 당상관인 삼사우사를 거쳐 밀직부사, 자정원부사, 동지밀직사사, 지도첨의사사를 력임하고 이해에는 찬성사로까지 되였지만 설경성이에게는 관직이 중요한것은 아니였다.
사실 그는 임금이 제일로 총애하고 제일로 의지한 그 한가지만으로도 나라의 정사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수 있었다.
실례로 임금은 무술년(1298)에 나라의 재물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조인규를 설경성이 심문하도록 하였었다.
그때 재상이였던 조인규가 태자의 가시아버지였다면 설경성의 관직은 3품관인 삼사우였다.
재상인 조인규가 그전에 자기를 해치려 했었지만 설경성은 공명정대하게 객관적인 사실자료들을 수집해서 사건을 파헤침으로써 그가 무근거한 혐의를 받고있다는것을 밝혀냈다.
《그대는 참말이지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네. 온 조정이 고구려를 이은 나라답게 제정신을 가지고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하나의 뜻으로 뭉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나.
그런 공신에게 내가 무엇을 주면 좋겠는지… 자네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주겠네.》
눈물이 글썽해진 설경성이 대꾸했다.
《소신은 이젠 너무 늙어서 벼슬을 내놓아야 할 나이가 되였소이다. 일흔살에는 벼슬을 마치는것이 나라의 법인데 신은 페하의 은총을 빌어 법을 어기고싶지 않소이다.
사람이 늙어지면 대를 물리기마련이니 신이 키운 제자들을 널리 써주었으면 하오이다. 그대신 신은 제자들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고을들을 돌아보고싶소이다.》
임금이 심드렁해서 쓸쓸해하는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저 벼슬길에서 물러가겠다고 하니… 섭섭하이.》
설경성이 절절하게 아뢰였다.
《황천길은 로소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신의 소견으로는 젊은이들이 병들어 죽는것은 얼마든지 막을수 있다는것이오이다. 나라에 흩어져있는 만가지 비방을 다 모아들인다면…》
임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네.》하더니 임금도 눈물이 글썽해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사실 밖으로 나가자고 한것은 오늘 자네와 헤여져야 하기때문일세. 자네도 이젠 백발의 늙은이일세. 더 늙기 전에 가라구. 이게 어깨동갑친구로서 내가 마지막으로나마 자넬 돕는 일로 될걸세.》
그만 격정이 북받친 설경성이 오열을 터치였다.
《난 이젠 죽은 사람이니 더는 지체말고 오늘로 떠나게.》
《성상페하!》
그러나 설경성은 숨져가는 임금을 두고 갈수가 없었다.
임금은 한달후 설경성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