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24)

 

설경성이 원나라에서 명의라 이름을 떨치고있을 때 개경의 집에서는 박씨와 나리가 그를 두고 걱정하고있었다.

벌써 집을 떠나간지도 한해가 되여오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애가 탈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설경성을 두고 몸은 어떠한지, 일은 잘되고있는지 걱정이던 박씨와 나리는 저녁상을 물리였지만 방안에서 여전히 일손을 잡고있었다.

박씨가 빨아말린 기저귀들을 차곡차곡 개여놓고있었다면 나리는 초불곁에서 두벌자식의 새옷을 짓느라 부지런히 바느질을 하고있었다.

한달전 이 집에 경사가 났다.

문우의 색시인 옥춘이 건너방에서 떡돌같은 아들을 낳은것이였다.

박씨에게는 세벌자식이요, 나리에게는 두벌자식이라 그들의 기쁨은 이만저만 아니였다.

증조할머니, 할머니가 된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설경성에게 전해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기저귀를 깨끗이 손질해놓은 박씨가 나리를 보며 한숨을 지었다.

나리가 이 집문턱을 넘어설 때가 엊그제 같은데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있으니 무정한 세월이 한스러웠다.

박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문우를 낳던 때가 생각나느냐?》

고개를 쳐든 나리가 싱긋 웃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일까지 잊겠는가.

몸을 풀던 그날 나리는 진통을 겪는 아픔보다도 녀인도 아닌 남편에게 몸을 드러내보이는것이 부끄러워 두눈을 꼭 감고말았다.

그때는 부끄러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즐거워지는 나리였다.

《전 지아비를 의원으로 둔걸 큰 복으로 여기오이다. 그런 복이 있기에 순산도 할수 있었고 병이 날세라 고쳐오는게 아니겠나이까.》

박씨도 싱긋 웃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구나. 아, 글쎄 문우 아범이 다른 녀인도 아니고 제 색시의 해산바라지를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고 막무가내로 네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는걸 내가 억지로 등을 떠밀어 들여보냈지.》

나리에게는 그런 말이 처음이였다.

《야 이녀석아, 의원이란게 제 색시의 몸풀이부터 봐야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남들의 해산바라지를 할수 있겠느냐 하고 욕을 해서야 문우를 받아낸것이였다네.》

지금껏 모르던 사연을 안 나리는 설경성이 더욱 그리워졌다.

(에그, 두벌자식이 태여난것도 모르고있으니. 참…)

박씨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네가 몸을 풀던 때가 어제 있은것 같은데 벌써 할머니가 되였구나.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난 문우 아범이 무릎걸음을 할 때 그 애 아비를…》

박씨는 손등을 눈가에 가져갔다.

그러는 박씨를 바라보는 나리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시어머니가 일찌기 초년과부가 되였으니 문우 할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울텐가.

눈물을 닦으며 박씨가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 어련하겠지만 지아비를 고깝게 생각지 말라는게다. 명색이 지아비라는게 제 집사람을 돌보기는커녕 늘 나가살고있으니…》

나리도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어머님마음을 알겠나이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문우가 아뢰였다.

《할머니, 어머니 탐라녀관이 찾아왔소이다.》

탐라녀관이란 을나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나리가 놀라서 일어섰다.

대궐에서 왕후마마의 약시중을 드느라 바쁜 사람이 이 밤중에 웬일일가?!

방문이 열리고 을나가 들어섰다.

깊숙히 허리굽혀 박씨에게 절을 하며 을나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기뻐하시오이다. 오늘 원나라사신들이 왔는데 사부님의 소식을 가져왔나이다.

사부님이 원나라임금도 그렇고 병으로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고 하오이다.

원나라가 사부님을 천하명의로 떠받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어디 래일까지 기다릴수가 있겠나이까.》

그 말에 박씨도 나리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병술년(1286)의 새해가 밝아왔다.

난생처음 타향만리 이국땅에서 설을 맞는 설경성은 어머니와 처자가 그리워 마음이 여간 쓸쓸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국에서는 먼 고장에 나가있다가도 설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온 식솔과 함께 즐겁게 설을 쇠군 하던 설경성이였다.

어머니는 앓지나 않는지…

나리를 그려보니 애처로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난 왜 부모처자를 위해주지 못하는지. …

자신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속에 설경성은 고개를 저었다.

난 내가 걷는 이 길을 탓해서는 안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려는자 어찌 제 한식솔에 머물러있겠는가? ! …

이렇게 생각하니 자부심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후비라이의 병을 고쳐주러 왔다가 뜻밖에도 나라에 큰 기여를 할줄이야… 후비라이가 곡주와 수안을 내놓겠다고 한것을 결코 빈말이 아닐것이다. 빈말로 끝이 난다면 그의 목숨도 끝장이니까.

사실상 후비라이는 설경성의 줌안에 들어있는 인질인셈이였다.

설을 쇠고난 설경성은 후비라이의 건강에 보다 각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설경성이 보건대 후비라이는 고려를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몽골귀족들의 집안싸움은 갈수록 격화되고있었다.

원나라는 건국의 시조 칭기스한을 태조, 2대 대한 오고타이를 태종, 3대 대한을 정종, 4대 대안인 후비라이의 형을 헌종이라고 불렀다.

헌종이 태종의 일족 수십명을 죽인 일로 오고타이한국의 군주 해도는 후비라이를 한하늘을 이고살수 없는 원쑤로 락인하고 그의 원나라를 무너뜨리려고 악을 쓰고있었다.

여기에 챠가타이한국과 깊챠크한국이 합세하여 해도를 대한으로 내세웠다.

이때문에 위구를 느낀 후비라이는 여러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여 화해를 청하였지만 그때마다 해도는 사신들을 죽여버리는것으로 자기의 뜻이 변함없음을 보여주는 한편 국경일대에 대군을 집결시켜놓고 원나라의 몽골귀족들에게 후비라이를 반대하여 들고일어나면 지체없이 쳐들어가겠다고 부추기고있었다.

해도가 원나라를 가지게 된다면 아비였던 오고타이처럼 고려에 전란을 들씌우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없었다.

…있을수 있는 전란을 막기 위해서도 후비라이를 하루라도 더 오래 살게 해야 한다.

내 손에 목숨이 들어있는 후비라이로서는 절대로 우리 고려를 해칠수 없으니까.

이런 생각으로 설경성은 후비라이가 먹는 음식까지도 검식하군 하였다.

설경성의 덕에 후비라이는 건강한 몸으로 국사를 돌볼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설경성은 후비라이와 한 약속대로 많은 원나라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고려의술을 배워주는 일도 벌려놓았다.

한편 고국에서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당부대로 제 맡은 일을 힘써 찾아하고있었다.

화창한 봄날 감찰자사 최유엄은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그는 지금 력동을 찾아가는중이였다.

역시 말을 탄 중년사나이가 최유엄의 뒤를 따르고있었다.

몇달전만해도 최유엄은 설경성을 내놓은 다른 의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늘 설경성이에게서 치료를 받아온 최유엄으로서는 그렇게 여길만도 하였다.

설경성이 원나라로 떠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유엄은 한쪽머리가 아파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몇달이 지나도 멎지 않고 오히려 더 아파났다.

어떤 날은 너무도 앞머리가 쏴서 정신을 차릴수 없는 형편이였다.

하는수없이 최유엄은 력동을 찾아갔다.

그런데 력동이 제법이였다.

척 맥을 보고는 편두통에 걸렸는데 우습게 볼 병이 아니라면서 생무우즙에 생룡뇌를 섞은 약물을 량쪽코에 넣어주었다.

력동의 말이 오른쪽머리가 아프면 왼쪽코구멍에 왼쪽머리가 아플 때에는 오른쪽코구멍 그리고 앞머리가 아픈 경우는 량쪽코구멍에 그 약물을 넣어주면 인차 멎는다는것이였다.

과연 얼마 안있어 머리아픔이 씻은듯 없어졌다.

최유엄이 기뻐하니 력동은 머리를 저었다.

《편두통에 쓰는 약비방은 많아도 신통하게 말을 잘 듣는 약은 별로 없소이다.

이제 얼마쯤 있으면 또다시 머리가 아플것이오이다. 그때마다 이 약을 코에 넣어주면서 도홍사물탕을 써야 하오이다.

약도 약이지만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지 말고 또 베개도 꼭꼭 베고 잠을 자되 베개높이는 주먹높이가 좋소이다.》

력동이 시킨대로 약도 쓰고 잠도 제때에 자고 베개도 베고 잤더니 보름후부터는 신통하게도 편두통이 사라져버렸다.

비로소 최유엄은 잠을 적게 자고 베개를 베지 않는것이 편두통을 불러들이는 재앙거리임을 알수 있었다.

최유엄은 밤늦게까지 책을 보고 베개도 베지 않고 자는 습관이 있었던것이였다.

그때에야 최유엄은 력동이의 의술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병자를 뒤에 달고 혜민국을 찾아가는 최유엄이였다.

혜민국에 당도하니 마침 뜨락에서 서성거리던 력동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뜨락의 느티나무에 말을 매여놓은 최유엄이 력동이에게 병자를 가리켰다.

《나와 함께 감찰사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네. 머리가 아픈지는 오래되였고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약을 썼는데 낫지 않아 그대에게 온것이네.》

병자의 안색을 보며 맥을 짚어보고난 력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차 안에 들어가 약을 지어오겠으니 여기서 기다리시오이다.》

그 말에 병자가 미간을 찌프렸다.

세상에 찾아온 병자를 밖에 그대로 세워두는 의원도 있다니?…

좀 있어 대접을 들고나온 력동이 그것을 병자에게 내밀었다.

《단숨에 약물을 쭉 마셔야 하오이다.》

병자는 불쾌한 마음이였지만 약사발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빈사발을 받아든 력동이 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토하는게 있겠는데 절대로 놀라지 마소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자가 억- 소리를 치며 토하기 시작했다.

피덩어리를 토하는것을 본 최유엄이 몸서리를 쳤다.

병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력동이 일렀다.

《이제 가슴도 후련해지고 머리도 깨끗해질것이오이다. 그러니 속에 있는걸 다 토해야 하오이다.》

이윽고 피덩어리들을 말끔히 토해버린 병자가 허리를 펴자 력동이 수건을 내밀었다.

《입을 닦으시오이다.》

력동이 몸서리를 치는 최유엄에게 눈길을 주었다.

《병자는 타박의 어혈로 몸에 나쁜 피가 쌓여 머리가 아팠던것이오이다. 이 경우 아무리 머리아픔에 좋은 약을 써도 병이 낫지 않소이다.》

가슴도 시원해지고 머리도 거뜬해진것이 이상해서 고개를 기웃거리던 병자가 력동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참말 신기하오. 이젠 날아갈것 같소. 그런데 이상한건 타박을 당한 일이 없는거요.》

력동이 웃었다.

《아니, 있소이다. 지난해쯤 분명 넘어진적 있소이다.》

병자가 벙글 웃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지난해 말을 타다가 등자를 헛디더 넘어진적 있소. 그런데 그때 별로 몸이 아프지는 않았소.》

《그게 바로 병의 근원이였소이다. 비록 몸이 아프지는 않았어도 그 타박으로 어혈이 생긴것이오이다.

그래서 난 우리 사부님의 처방대로 활혈탕에다 한두가지 약재를 더 넣어서 약을 써준것이오이다.》

감동된 최유엄이 력동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설형이 참으로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냈다는것을 오늘 똑똑히 알았소.》

이 일이 크게 소문이 나서 설경성의 제자들에게 병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날과 달이 거침없이 흘러 정해년(1287)이 왔다.

한해 더 남아있기로 했던 후비라이와의 언약을 지킨 설경성은 정월 어느날 대도를 나섰다.

그가 차리고나선 행장은 너무도 단출하였다. 원나라로 올 때 가지고온 물건외에 고국의 문둥병자들에게 줄 수백근의 태풍자가 전부였다.

후비라이는 눈물속에 설경성을 바래웠다. 그가 바래우며 하는 부탁은 해마다 꼭꼭 한번은 태도에 와서 자기의 몸상태를 보아달라는것이였다.

물론 설경성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쾌히 약속하였다.

나이와 신분, 국적을 초월하여 맺은 둘도 없는 벗을 떠나보내는 작별의 아픔은 무수한 주검들이 딩구는 전장에서 돌심장이 되여버렸던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로 하여 눈물을 걷잡지 못하는 후비라이였다.

후비라이에게 있어서 설경성은 두번씩이나 목숨을 건져준 은인중의 은인이였다.

설경성이 아니였다면 후비라이는 자객들의 손에 저승귀신이 되였을것이였다.

지난해 황태자 진금이 한밤중에 목숨을 잃는 참사를 당하였다.

설경성이 진상을 밝힌데 의하면 그가 먹은 간식에 독이 들어있었다.

설경성이 검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비라이도 그런 죽음을 당했을것이였다.

골육상쟁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는것을 바라지 않는 후비라이의 의도를 생각하여 설경성은 이 사건을 흑막속에 묻어버리도록 하였다.

후비라이와 헤여진 설경성의 일행을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황녀 망가대가 직접 호위를 맡아했다.

망가대가 설경성의 호위를 자청해나선것은 원나라에서 불치의 병이라던 유종을 고쳐준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고싶기도 하거니와 후비라이가 준 만금재물을 고스란히 놓아두고 자기 나라의 병자들을 위해 고려에 없는 약재만을 싸들고나선 설경성의 처사에 반해서였다.

신선같은 설경성을 집에까지 모시고가고싶은 마음에 망가대는 황궁의 군사들로 보란듯이 행차를 무었다.

대도를 나선 설경성은 련덕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아팠다.

얼마전 앞으로 꼭 만나리라고 믿었던 련덕신이 잘못되였다는 소식이 대도에 날아들었다. 후비라이의 동생이 된다는 변방장수의 병치료를 하던중 적들의 기습을 받아 잘못되였다는것이였다.

세상에는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 많은가.…

단출하게 가고싶어하는 설경성의 거듭되는 만류에 못이겨 망가대는 동경에서 멈춰섰다.

그대신 왕택소를 호위장수로 임명하고 설경성을 개경에까지 무사히 모시고 가라는 령을 내리였다.

의주를 마주한 압록강가에 이른 설경성은 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온 왕택소에게 몇사람만 남기고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아침 몇명의 일행만을 거느리고 의주에 들어선 설경성은 대뜸 두눈에 피발이 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강산은 변함이 없건만 주인노릇을 하는 원나라군사들의 더러운 꼴이 눈에 뜨이였기때문이였다.

쓸쓸한 마음을 안고 말을 달리는데 마을복판으로 나있는 큰길로 사람들이 허둥지둥 뛰여다니고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더니 누군가가 급병을 만나 죽어간다는것이였다.

고삐를 끄당겨 말을 멈춰세운 설경성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마을에 급한 병자가 있는가본데 그냥 지나쳐갈수가 없다.》

말에서 뛰여내린 설경성은 말고삐를 왕택소에게 들려주었다.

《정오가 되여오는데 이 마을에서 묵어가세. 자넨 먼저 촌장네 집을 찾아가 그곳에 거처를 잡게.》

설경성이 제자들을 뒤에 달고 병자가 있다는 집을 찾아가니 그가 의원이라는것을 안 집주인들이 두팔을 잡아끌었다.

안방에서 남산만 하게 불어난 배를 그러안은 녀인이 끙끙 앓음소리를 내고있었다.

로파가 설경성에게 우는소리를 하였다.

《래달이 막달이온데 갑자기 배가 아파 죽겠다질 않소.》

병자의 거동이며 안색에 이어 맥을 본 설경성은 긴숨을 들이켰다.

이거야말로 죽을수가 겹친게 아닌가.

급작스레 용을 쓰는 내옹(급성충수염)에 걸린 녀인의 배속에서 아기까지 거꾸로 자리를 잡고있었다.

이 경우 자칫하다가는 두 생명을 잃을수 있었다. 출로는 임신부부터 구원해야 할것이였다.

설경성은 제자들에게 행장에 꾸려넣은 약을 가져오게 하고 로파에게는 마늘을 청했다.

이윽고 설경성은 임신부가 제일 아파하는 오른쪽배의 압통점에 손바닥만 한 명주천을 놓고 거기에 망초를 섞어 짓이긴 마늘을 손가락두께로 폈다.

그다음 그우에 기름종이를 덮은 설경성이 별꽃과 현호색으로 지은 약을 로파에게 내주었다.

《이 약을 하루 한줌씩 달여가지고 세번에 나누어 먹이되 열흘간 써야 하오. 점심이 지나 다시 오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촌장네 집에 가서 점심을 치른 설경성은 대황가루를 초로 반죽해가지고 병자를 찾아왔다.

그것으로 마늘과 갈아붙인 설경성이 남은 약을 로파에게 주며 일렀다.

《자정무렵에 나머지 약으로 한번 더 갈아붙이오. 래일 아침 다시 오겠소.》

이튿날 설경성은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들을 보고 예견했던바 그대로 병자가 호전되였다는것을 알았다.

과연 안방문이 열리더니 혈색을 되찾은 병자가 절을 하는것이였다.

방에 들어선 설경성이 로파에게 당부했다.

《아직은 마음을 놓아선 안되오. 먹는 약은 그냥 먹이면서 오늘도 배에다 약을 붙여야 하오.

올해부터는 여름에 민들레와 쇠비름을 뜯어 말려두었다가 이렇게 배를 아파할 때면 하루 서너줌씩 열흘간 달여먹이면 아무 일도 없게 되오.》

병자를 모로 눕게 한 설경성은 그의 남편을 불러들였다.

《이 사람, 내가 하는것을 잘 봐두게.》

설경성은 먼저 병자의 허리를 주무르면서 뜬뜬하게 느껴지는 허리부위를 그것이 풀릴 때까지 계속 주물렀다.

이어 병자를 반듯하게 눕히고 그가 두다리를 동시에 모아세웠다 폈다 하도록 하였다. 했더니 한쪽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것이 알렸다.

그 다리의 넙적다리바깥부위를 만져보니 뜬뜬한것이 있었다.

그 다리의 발목을 움켜잡은 설경성이 병자에게 일렀다.

《발에 힘을 주지 마오.》

그 순간 발목을 안쪽으로 비틀면서 잡아당겼다.

이렇게 하기를 몇번, 그다음 설경성은 새끼발가락의 지음혈과 발목우의 삼음교혈에 뜸을 떴다.

병자의 남편을 대문밖으로 데리고나간 설경성이 그를 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네 색시의 배안에 있는 아이가 거꾸로 놓여있네.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큰일나지.

하지만 이젠 마음을 놓아도 돼. 내가 한것처럼 몸을 푸는 날까지 허리를 주물러주고 다리도 잡아당겨주고 뜸도 떠주면 순산하게 되네. 몸을 풀것 같으면 붉은 생팥을 열알정도 물로 삼키도록 하게. 그러면 진통이 잘 와서 아이를 쉽게 날수가 있네.》

코가 땅에 닿아라 절을 하는 그를 남겨두고 촌장의 집으로 돌아오니 안주인이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괴여오르는 콩깍지가 가득한 목함지를 안고나오는것이였다.

설경성은 무심히 물었다.

《말을 먹이자고 그러오이까?》

안주인이 성난 어조로 대꾸했다.

《말이라니요? 장을 담그자고 그러웨다.》

삶은 콩깍지를 밖에다 내다버리는 안주인을 바라보는 설경성에게는 그의 말이 리해되지 않았다.

머리털이 돋아 콩깍지로 장을 담근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였다.

공연히 의원에게 성을 냈다는 후회로 안주인이 나직이 말했다.

《의원님, 부엌으로 좀 오시오이다.》

설경성을 부엌으로 이끈 안주인이 가마를 가리켰다.

가마에는 밤빛갈의 물이 절반가량 차있었다.

《이게 콩깍지를 달인 물이오이다.》

설경성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신장을 보하는데 콩깍지를 달인 물이 아주 좋다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달여놓고 어쩌자는것일가?…

《여기다 소금을 치면 간장이 되오이다.》

안주인의 말이 설경성에게는 좀처럼 리해되지 않았다.

《간장이야 콩으로 쑨 메주로 담그는것인데 이걸 어떻게 간장이라고 할수 있소?》

《메주를 쓸 콩이 없으니 할수 있소이까? 이런 장이 요즘 우리네 백성들이 먹는 간장이오이다.》

설경성이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안주인을 바라보았다.

《메주를 쓸 콩이 없다는건 도대체 무슨 소리요? 그것도 촌장네 집에? …》

금시 두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해진 안주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우린 그래도 촌장덕에 죽물이나마…

다른 집들에서는 송기를 벗겨먹소이다. 원나라군사들이 집집을 뒤지며 저희가 지켜주는 대가라며 쌀이면 쌀, 짐승이면 짐승 눈에 뜨이는건 모조리 앗아가니 메주를 쓸 콩이 남아있을리 있나요.》

그 말에 설경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 내 너무도 이 고장의 백성살이를 모르고있었구나.

설경성을 지켜보던 촌장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의원님, 무식한 촌아낙네의 말에 마음쓰지 마소이다. 우리가 제 고향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이런 고생을 해도 싸지요.》

촌장의 길쑴한 얼굴을 건네다보며 설경성은 긴 한숨을 내그었다.

《사실 난 원나라것들이 이렇게까지 못되게 구는지는 몰랐소. 진작 알았더라면…》

진작 알았더라면 후비라이앞에서 가만있지 않았을것이였다.

왕택소를 부른 설경성이 성이 나서 말했다.

《알고보니 원나라군사들이 우리 고려사람들의 등가죽을 벗기고있네. 관가를 찾아가 바로잡지 않으면 떼죽음이 날것 같네. 나와 함께 관가에 가세.》

기분이 상한 설경성이 말을 때려몰았다.

마침 의주관가에 원나라조정에서 보낸 고을원이 너렁청한 방에서 술추렴을 하고있었다.

원나라장수차림의 왕택소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관가것들이 후닥닥 놀라 일어섰다.

왕택소가 설경성을 가리켰다.

《이 어른은 황제페하의 딱친구인 천하명의이시다. 이 어른의 령에 불복한다면 그대들의 목이 어깨우에 붙어있지 못한다는것을 명심하라.》

설경성이 몽골말로 물었다.

《누가 고을원인가?》

큰키에 광대뼈가 쑥 삐여져나온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꾸했다.

《소인인줄 아오이다.》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네가 받아써야겠다.》

고을원이 헤덤벼치며 붓을 찾아들었다.

《받아써라. <페하께 알리나이다. 의주고을에 들어서니 백성들이 당장 끓여먹을 쌀이 없어 나무껍질로 끼식을 에우니 그 광경을 어찌 눈뜨고 볼수 있겠소이까. 그게 다 관가에서 원나라군사들을 풀어놓아 집집들을 털어냈기때문이라고 하오니 페하께서 하사하신 재물을 백성구제에 쓰도록 하여주신다면 더 바랄것 없는줄 아오이다.>》

설경성은 정신없이 받아쓰는 고을원에게 일렀다.

《그아래에 고려사람 설경성이라는 이름을 써넣고 정월 아무 날이라는것을 쓰게. 다 썼으면 인즙을 내놓게.》

고을원이 내놓은 인즙에 엄지손가락을 묻힌 설경성은 글을 쓴 종이에 손도장을 꾹 눌렀다.

그리고 고을원에게 엄한 어조로 령을 내렸다.

《지금당장 날랜 말에 관속을 태워서 이 글월을 동경으로 가져가 거기에 나와있는 황녀에게 드려라. 이 글월이 제때에 가닿지 못하거나 또한 이제부터 그가 누구이든 고려사람들을 학대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리라는것을 명심하라.》

겁에 질린 고을원에게 왕택소가 을러멨다.

《알아들었는가?》

그의 호통에 고을원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설경성은 여러날동안 마을사람들의 병을 보아주고서야 또다시 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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