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23)

 

날과 달이 거침없이 흘러 이해의 마지막날인 섣달그믐날의 아침이 밝아오고있었다.

하지만 설경성은 여느날과 달리 자리에 그냥 누워있었다.

고단해서보다는 할일이 없기때문이였다.

요즘은 새해를 맞으며 병자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후비라이의 어명때문에 별궁이 조용하였다.

고국에서라면 하다못해 집일이라도 거들어주련만 남의 나라 구중궁궐속이라 조롱속에 갇힌 신세였다.

후비라이라도 불러오면 갑갑하지 않겠는데 요즘 그는 밀린 정사를 봉창한다며 나라일로 바삐 돌아가니 하루종일 너렁청한 별궁에서 제자들과 한담이나 해야 했다.

그래 이제는 여기에서 더 할일이 없으니 설이나 쇠고는 고국으로 가자.… 결심을 내린 설경성은 그제서야 일어나 세면을 하였다.

아침밥을 먹고났는데 뜻밖에도 내시가 찾아와 황제페하가 부른다는것이였다.

마침이다,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걸 알려야지.

내시가 안내해간 곳은 처음 보는 방이였다.

한벽에 굉장히 큰 지도가 걸려있는 방에 들어서니 웃음이 가득한 후비라이가 설경성을 지도앞으로 이끌었다.

《이게 천하도일세.》

후비라이가 막대기로 가리키는 지도는 별로 낯설지 않았다. 고국에서 본것보다 클뿐이였다.

후비라이가 지도에서 제일 꼭대기를 가리켰다.

《여기는 사시절 눈이 덮여있는 사람 못살 땅일세. 허나 이곳도 내가 다스리는 강토라고 할수 있네.》

후비라이는 막대기를 내려옮겨 지도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이곳에 세상에서 제일 높기로 알려진 삼천자장산(주물랑마봉)이 솟아있네. 우리의 강토는 이 산 남쪽 천축의 북부에 이르고…》

후비라이는 막대기를 옮겨 어느 한 강을 가리켰다.

《이게 적수(메콩강)인데 이 남쪽도 우리의 강토일세.》

후비라이는 지도에서 서쪽 한끝을 가리켰다.

《여기는 해가 지는 서역제국(유럽)일세. 우리 몽골사람들의 강토는 이 나라와 맞닿고있네. 서역제국의 강토란게 고작해서 천축국만하네.

그런즉 천하가 우리 몽골사람들의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그중에서도 나의 원나라가 강토로 보나 인구로 보나 천하제일일세.》

막대기를 내던진 후비라이는 방 한구석을 차지한 굉장히 큰 주전자를 가리켰다.

《한길이 넘는 저 주전자는 은으로 빛은걸세. 자네 저런 은주전자를 본 일 있나?》

설경성이 고개를 가로저으니 후비라이가 껄껄 웃었다.

《이게 바로 고려에서 준건데… 오고타이가 대한으로 있을 때 받은 례물일세. 그걸 내가 물려받았네. 무게가 무려 천팔십근이나 나가는 저런 큰 은주전자는 세상에 저 하나뿐일걸세. 저런 은주전자를 만든걸 보면 고려사람들이 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수가 있어. 자, 이젠 앉아서 이야기를 하세.》

설경성과 마주앉은 후비라이에게서는 웃음이 떠날줄 몰랐다.

《자네 3대의성이란 말을 들어보았나?》

후비라이는 고개를 젓는 설경성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나도 서역제국에서 온 그리스의원을 만나서야 그런걸 알았네. 그의 말이 서방에서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이븐시나를 가리켜 3대의성이라고 한다누만. 이븐시나(11세기 아라비아교주국의 의학자)는 아라비아의 태생인데 그 나라는 지금 없네. 우리 몽골사람들에게 먹히웠거던. 그 나라는 이르한국에 속해있네.

히포크라테스는 서방에서 선참으로 의학당을 세운 공으로 그리고 갈레노스는 인체해부에 대한 의서를 쓴 공으로, 이븐시나는 병이란 악귀때문이 아니라 체액의 변화로 오는것이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리론을 진보시켜 많은 의서를 썼기때문에 의성으로 떠받들린거네.》

설경성에게는 그 말이 례사롭게만 들리였다.

그 정도를 가지고 의성이라 한다면 그들보다 썩 전에 의원들을 키워내고 방대한 의서를 집필한 동방의 명의들은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하지만 난 진짜의성, 천하명의는 오직 한사람 고려사람 설경성이뿐이라고 생각하네.》

갑자기 그네를 태우는 그 말도 귀에 간지러웠지만 무엇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후비라이의 진속을 알수 없는 설경성이로서는 멀거니 그를 바라볼뿐이였다.

《서방이 자랑하는 3대의성은 죽는 사람이라고 제쳐놓은 병자들을 살린 공도 없고 생전에 구제한 병자도 많지 못하네.

그러나 자네는 나를 살려냈고 여기에서만도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네. 자네가 지금껏 구제한 병자는 얼마인가.

우리 몽골에는 산을 아름답게 하는것은 나무이고 나라를 아름답게 만드는것은 학식이 뛰여난 인재이다는 말이 있네.

자네가 없었더라면 나의 오늘도 없을거네. 은혜는 일생을 두고 갚으랬다고 나도 임자에게 성의를 보이자고 하네.

난 설을 맞으며 자네가 거처하는 별궁과 별궁의 녀인들, 재물을 다 신세갚음으로 주겠네. 황금으로 집을 지어달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겠네.》

설경성은 의심이 어린 눈길로 후비라이를 지켜보았다.

이 늙은이가 무슨 오그랑수를 쓰려고 이러는것일가?…

후비라이는 의심이 가득한 설경성을 손가락질하며 껄껄 웃었다.

《이 사람이 얼이 나갔군. 난 자네가 바란다면 승상의 관직도 주겠네. 자네의 재주이면 승상도 할수 있지. 하지만 의성이 그까짓 승상으로 만족해할텐가.

난 자네를 위해서 대도에다 세상에서 제일 큰 의학당을 세우고싶네. 자네가 거기에서 천하의 제자들도 키우고 터득한 비방으로는 의서도 쓰게.

의서를 쓴다면 수레 하나는 가득 싣고도 남을걸세. 인생은 짧아도 그가 남긴 업적은 길이 간다는 말이 있네. 이게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닐가?》

설경성은 가슴은 터져나갈듯 활랑거렸고 정신마저 아뜩해졌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설경성의 이름은 후세토록 동서방을 진감시킬것이였다.

《우리 조부께서는 새롭게 몽골문자를 만들어쓰게 하였네. 난 그대를 내세워가지고 우리 원나라도 고려처럼 의술의 나라로 떨치고싶네.》

설경성은 이 청만은 외면할수 없었다.

의원이라면 병고에 시달리는 천하의 모든 생명을 구제하는것이 도리일진대 남의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울타리를 쳐서야 되겠는가.

《전 황금으로 지은 집도, 미녀도, 천하의 의학당도 바라지 않소이다. 그러나 제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의술을 배우기 바라는 원나라사람들에게 우리 고려의술을 물려주겠소이다.》

어서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싶어하는 설경성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아는 후비라이는 그 정도의 대답만으로도 만족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럼 사람들을 모아줄테니 고려의술을 가르쳐주게.》

이윽고 후비라이는 간절한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내가 그대한테 바라는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 나에게 신선약, 장생약을 짓는 비결을 넘겨달라는 그뿐일세. 그래주지?》

너무도 욕심스러운 말에 설경성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말았다. 했더니 후비라이가 코를 불며 설경성을 흘겨보았다.

《흥, 아닌보살하는군. 나도 먼 옛적부터 고려사람들이 불로장생약을 만들어온다는것을 아네.

고구려때 태조대왕이 젊은이처럼 혈기왕성해가지고 백열살을 썩 넘어산것이 신선약의 덕이였다는데?!…》

그 말에는 설경성이 할말이 없었다.

고구려 태조대왕이 말년에 불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백열여덟살이 아니라 수십년은 더 살았을는지도 모른다.

설경성의 가문에는 장생약을 만드는 비방도 있었다. 고구려에서 전해진 비방이였다.

설씨집에서 그 비방만은 오로지 의술의 대를 이어가는 맏자식에게만, 그것도 말로나 물려주고 물려받게 하고있었다.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인재에게만 장생약을 써줄수 있으며 허나 그 누구에게도 비방의 내속을 알려줄수 없다는것이 설씨네 조상들이 정해놓은 가법이였다.

설경성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방과 의술의 바다속에서 얻어낸 비법을 합쳐 보다 우월한 장생약을 만들어냈던것이다.

《난 자네가 내가 먹는 약에 신비로운 장생약을 넣어주고있다는것을 알아냈네.

내 몸이 갱소년되긴 하였지만 얻어먹는 밥에는 배가 부르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설경성은 후비라이의 의뭉하고 능갈친 솜씨에 혀를 찼다.

이 늙은이가 귀신 한가지로구나!

설경성은 후비라이에게 장생약도 써주고있었다.

십여차례나 불에 달구었다가 식힌 금을 솔꽃가루처럼 만든 금가루는 고구려의 궁중에서 쓰인 장생약재의 하나였다.

여기에 인삼 그리고 날새의 골수와 날짐승의 태에서 짜낸 약을 섞어만든것이 젊음을 되살려주는 장생약인것이였다.

허나 그것을 만드는 비법이 복잡하고 까다로와 보통사람들은 장생약을 짓는 약재들을 안다고 해도 절대로 온전한 약을 얻을수 없었다.

설경성이 장생약을 써준 사람들로는 후비라이말고는 고려임금과 왕후 그리고 어머니뿐이였다.

이런 때는 진속을 털어놓아야 상대를 진정시킬수 있기에 설경성은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옳소이다. 전 페하께 장생약도 쓰고있소이다. 그런데 장생약을 짓는 약재들은 오로지 우리 고려에서만 나는것이고 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비법이 신묘하여 약에 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리해할수도 없소이다.

그리고 장생약 하나만으로는 절대로 효험을 볼수 없소이다. 이 약을 쓰려면 먼저 병자의 체질에 맞는 약으로 5장6부를 추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장생약에 욕심을 냈다가는 거꾸로 명을 재촉할수 있소이다.

보약도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페하, 고려는 엎디면 코닿을 곳인데 무얼 근심하겠소이까. 제 이미 페하의 명을 장담하였거늘 이제 귀국한다고 하여 돌아보지 않겠나이까?》

후비라이는 절벽과 마주한 심정이였다.

대바르고 정직한 인재는 감언리설로도 억지다짐으로도 굽히지 못할것이다.

설경성은 지금껏 묻어두었던 심중의 말을 꺼낼 때가 되였다고 생각했다.

《전 사실 우리 성상페하의 령을 받고 페하의 병을 고쳐드렸으니 며칠후 떠나려고 하였소이다. 하오나 우리 고려의술을 배우려고 하는 원나라사람들을 위해 얼마쯤 더 페하의 곁에 머물러있으려고 하오이다. 그대신 페하께서는 저의 소청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하오이다.》

후비라이는 호기심이 어린 눈길로 설경성을 지켜보았다.

《우리 황태조께서는 마헐탄을 고려의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시였소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경은 아직도 압록강가에서 머무르고있소이다.》

《마헐탄?…》

놀라와하는 후비라이에게 설경성은 주저없이 진속을 터놓았다.

《제 알기에 마헐탄은 발해가 당나라와 지경을 가른 료수 서쪽에 있는 강이오이다.

페하께서도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강토가 서쪽은 료수가로부터 동으로 바다에 이르렀다는것을 알지 않소이까.

그러니 그 땅을 우리 고려에 넘겨주는것이 진정 하늘의 뜻을 따르는것으로 되는것이 아니겠소이까?!…

전 페하께 그걸 바라고있소이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말벌에라도 쏘인듯 껑충 뛰여일어선 후비라이가 설경성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세상에 세치혀끝으로 만리강토를 후무려내려는 사람도 있다니… 그렇다고 쫓아낼수도 없으니… 이윽고 후비라이가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황제일지라도 땅만은 한치인들 제 마음대로 처분할수가 없네. 자네도 그걸 모르지 않을테니 다른걸 청하게.》

《그럼 그 말은 없었던것으로 치겠소이다. 하지만 원나라것이 아닌 우리 고려의 강토야 어찌 돌려주지 못하겠소이까?》

바로 이것을 바라고 성사도 되지 않을 요구를 들이댔던 설경성이였다.

설경성이 던진 낚시에 걸려든 후비라이는 당황해하였다. 백두산이 그러안은 남쪽의 강토야 예로부터 고려의 강토가 아닌가.

《제가 바라는것은 명실공히 고려의 강토인 서북면과 동북면에서 동녕부와 쌍성부를 해체하고 원나라군을 끌어내가달라는 그것이오이다.》

설경성의 눈길을 피해 후비라이는 얼굴을 외로 틀었다.

저희 군사가 없는 땅은 벌써 제땅이 아니다.

한참만에 후비라이는 설경성의 앞에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네 고려조정에서도 사신들이 올 때면 반드시 원나라군사들을 끌어내가라고 하고있네. 아, 자네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 땅에서 나의 군사를 불러내고싶네만… 이보라구, 그렇게 한다면 멸망한 송나라것들도 제땅을 돌려달라고 할걸세.

난 고려를 생각해서 동녕부와 쌍성부에서 자네네 조정이 조세를 거두어가는걸 모르는척 하고있네. 그런즉 그 땅이야 고려의것이 아니고 뭔가?》

설경성이 고개를 저었다.

《송나라는 우리와 사정이 다르오이다. 왜냐하면 송나라는 멸망했기때문이오이다.

그러나 우리 고려는 우뚝 살아있소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페하께서 동녕부와 쌍성부를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그로 하여 언제이건 반드시 전란이 터질것이오이다.

전란이 터지면 페하의 신상에도 리득이 될것은 없을것이오이다. 그틈에 페하의 조정을 넘보는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장담할수도 없지 않소이까?》

후비라이는 군력이 결코 약하지 않는 고려와는 싸움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설경성의 말대로 적수들이 반란을 일으킬수 있으니 그때문에 후비라이는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하여간 그것만은 아직은 덮어두자구.》

그러나 고려에서 친원세력이 득세하면 그 땅때문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후비라이는 곧 웃음을 지었다.

후비라이의 속심을 엿본 설경성이 준절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고려에서는 백성들까지도 우리의 강토를 당장 되찾아야 한다고 벼르고있소이다.

군심과 민심이 이러한데 그 누가 전란을 막아낼수 있소이까?》

말문이 막혀 입을 다시는 후비라이를 바라보며 설경성이 낚시줄을 바싹 당기였다.

《서북면과 동북면은 그렇다치고 무엇때문에 원나라군이 수안과 곡주에 기여들어와있소이까? 그 두 고을은 서북면이 아니라 서해도에 속해있소이다.》

귀뺨을 후려칠듯 열이 오른 설경성을 지켜보던 후비라이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자네 이제 보니 능구렝이 한가지일세그려. 그 말을 하자고 숨돌릴사이도 없이 나를 다불러댔구만. 좋아, 그 두 고을이 서해도에 속해있다니 그 고을들에서 군사를 철수시키도록 하겠네.》

의혹이 실려있는 설경성을 바라보며 후비라이가 웃음을 지었다.

《이젠 만족한가?》

설경성이 낮으나 불만에 서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페하의 룡체는 천리강토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섭섭하다는것이오이다.》

설경성의 손끝에 제 목숨이 달려있는 후비라이로서는 낮추붙을수밖에 없었다.

《내 좀 생각해보겠으니 성내지 말게. 자네의 나라에 손해되게는 하지 않겠으니 제발 내곁에 남아주게나, 응?》

설경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만이 서려있었다.

《우리 고려에 <자식의 키는 부모의 슬하에서 크지만 재주는 스승의 슬하에서 는다.> 는 말이 있소이다.

제가 이만한 의술을 닦을수 있은것은 백성을 스승이라 여겼기때문이오이다. 슬기로운 백성들이 사는 고려는 의술의 바다라고 할수 있소이다. 그런데 전 의술의 바다를 절반도 돌아보지 못했소이다. 저의 뜻은 그 어떤 병도 고칠수 있는 수만가지 비방을 의술의 바다에서 퍼내여 만사람의 병을 구제하자는것이오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만 오래 지체할수 없다는것이오이다.》

그만해도 다행인지라 후비라이는 감지덕지해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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