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7)

 

설경성을 향해 활과 칼을 겨누어든 원나라군사들이 다가오더니 불쑥 땅에 떨어져 아우성을 치는 텁석부리를 겨누는것이였다.

괴수임직한 군교가 텁석부리의 목을 칼로 겨누고 입을 여는데 뜻밖에도 고려말이 흘러나왔다.

《이보라구, 날 꽤 알아보겠나?》

그를 쳐다보던 텁석부리가 환성을 질렀다.

《아니, 이게 왕어르신이 아니오이까?》

코를 불며 《왕어른》이 성을 내였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줄 짐작이 가지 않는단 말이냐?》

하더니 그는 얼굴에 먹장구름이 가득한 설경성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설의원님, 아직도 절 모르겠소이까?》

말우에서 칼자루를 꽉 틀어쥐고있던 설경성은 고개를 저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안다고 할수 있단 말인가?

《그럼 몇해전 개경 광명사에서 원나라의 군교를 살려준 일은 생각나오이까?》

설경성은 조금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날마다 병을 보아준 그 많은 사람들을 어찌 다 기억해둘수 있단말인가.

《아… 그때 풀무질로 배속에다 바람을 불어넣어 살려준 사람이 있지 않소이까?》

그제서야 설경성의 얼굴에서 먹장구름이 걷혀지기 시작했다.

하루만 시간을 잃었어도 죽었을 사람을 살려준 그 일까지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제가 바로 그때 의원님이 풀무질로 살려준 원나라군교 왕택소이오이다.》

깊숙이 허리굽혀 절을 하는 왕택소를 대하고보니 감개무량하기는커녕 그가 이런 죽을 고비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의심이 앞서는 설경성이였다.

설경성의 심정을 엿본 왕택소가 텁석부리를 가리켰다.

《이놈은 조인규와 렴승익이 보낸 자객이오이다. 홍자번어른이 이놈을 고른 그날밤에 조가와 렴가에게 불리워가서 매수되였소이다.》

그가 여기에 나타나게 된 사연을 내리엮는데 설경성으로서는 꼭 옛말이야기를 듣는듯싶었다.

《보름전 의원님을 청하러 가던 원나라사신이 동경총관부에 들렸댔소이다. 골병에 걸려 다 죽어가는 가련한 꼴임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동경총관이랍시고 홍다구는 제놈이 누워있는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분부하기를 사신보다 한걸음 앞서가서 렴승익을 만나라고, 그러되 로상에서 의원님을 죽이면 형세가 좋아질거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소이다.》

렴승익이 흉악한 친원세력임을 다시한번 절감한 설경성이였다.

설경성의 마음을 알리 없는 왕택소가 텁석부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형세가 좋아질거라는 말은 의원님이 잘못된 죄를 홍자번에게 들씌워서 원나라와 엇서는 사람들을 조정에서 제거한다는 뜻이오이다.

홍다구가 나에게 또 이르기를 의원님을 죽이고 그 살인범을 황제에게 끌고가서 그놈이 자기는 황제가 병을 고칠수 없게 만들라는 홍자번의 령을 받은것으로 자복시키라고 하였소이다. 그러면 고려에서 조가와 렴가가 홍자번을 두 나라의 화친을 깨고 전란을 일으키려는 역적으로 몰아 그의 세력까지 모조리 죽일거라고 하였소이다.

홍자번이 고려조정의 기둥일지라도 이 일을 가지고 몰아댄다면 고려임금도 그를 지켜줄수 없다는것이오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설경성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졌다.

《그런데 그대는 치락이 이놈이 여기서 우릴 해치리라는것을 어떻게 알았소?》

설경성의 질문에 왕택소는 공손히 대꾸했다.

《전 원래 홍다구의 호위군사로서 그를 따라 고려에 가있었소이다.

그때 강윤소와도 사귀였소이다. 그후 동경으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령을 받은 홍다구를 따라와 고려를 떠나온지도 여러해가 되였소이다.

개경을 잘 알고있는 그때문에 홍다구가 절 렴승익에게 보냈던것이오이다. 개경에 가서 렴승익을 만나보니 그의 세력이 이만저만 아닌것 같았소이다. 렴승익은 저에게 인적이 뜬 이곳의 지형을 대주면서 치락이에게 여기서 의원님을 죽이도록 하겠으니 그때 이놈을 붙잡으라고 하였소이다.》

아직은 의심을 다는 풀지 못한 설경성은 칼을 내려놓을수 없었다.

《그대는 우리를 어쩌자는건가?》

설경성의 질문에 왕택소는 제 먼저 칼을 칼집에 밀어넣었다.

《의원님, 제가 악귀같은 상전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저를 살려준 은인까지 해칠 놈은 아니오이다. 저도 제 머리가 있는데 어찌 옳고그름을 갈라보지 못하겠소이까. 전 홍다구를 따라 고려에 가있을 때 그가 제 고국을 물어뜯는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소이다. 그래서 의원님이 소갈을 고쳐주십사 찾아온 그를 받아주지 않은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소이다.》

설경성은 진심이 어려있는 왕택소의 눈길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다는 의혹으로 다시금 물었다.

《제 목숨을 살려준 은혜갚음을 하자고 홍다구의 령을 저버렸는데 그 후환이 두렵지 않소?》

왕택소가 또 코를 불었다.

《홍다구가 한때 황제의 총애를 받아 동경총관이 되여 왜나라를 치는 원나라의 십여만대군을 통솔할 때에는 원나라의 대신들도 그를 두려워했소이다.

하지만 제 고국을 해치는 못된짓때문에 천벌을 받아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 그놈은 산송장이라 인차 죽음을 당할것이오이다. 그러하니 홍다구를 두려워하는건 아니오이다.》

말을 마치며 왕택소가 부하들에게 텁석부리의 목을 치라는 손시늉을 하였다.

땅에 꿇어엎드렸던 텁석부리가 그의 손짓에 독을 썼다.

《왕가 네놈이 그런 놈이였구나. 네놈도 재앙을 받지 않나 두고봐라.》

왕택소가 설경성의 말고삐를 부여잡으며 눈짓했다.

《여긴 의원님이 계실데가 못되오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에서 내리면 안된다는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은 두 제자가 말을 탄채로 설경성의 뒤를 따랐다.

설경성의 말이 길에 들어서자 왕택소가 입을 열었다.

《이제 더는 치락이 이승사람이 아니오이다. 그러니 오늘일은 우리와 의원님네밖에는 알 사람이 없소이다. 의원님은 아직 절 믿지 않는것 같은데… 내가 홍다구를 미워하게 된것은 늦게나마 제가 고려와 동족인 발해사람이라는것을 알았기때문이오이다. 의원님도 대발해국을 아시지 않소이까?》

글을 배운 고려사람치고 그를 어찌 모르랴.

횡포한 거란이 발해의 강토를 집어삼켰다고는 하지만 발해사람들까지 먹히운것은 아니였다.

발해가 무너진 그해부터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발해사람들은 정안국이며 오사성발해국을 세웠다. 이어 흥료국, 대발해국을 일으키고 거란과 맞서싸웠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이 나라들은 발해를 그대로 재건하지 못한채 무너지고말았다.

왕택소의 비분에 젖은 목소리가 설경성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은 또 발해의 강토가 원나라에게 먹히웠다고는 하지만 우리 발해사람들이 일구월심 바라는 소원은 하나 조상의 땅에 옛 발해와 같은 강국을 일떠세우는 그것이오이다.

하기에 우리 발해사람들은 동족의 나라 고려가 보다 강해지기를 빌고있소이다. 송나라까지 먹어치운 원나라가 고려만은 가시나무인듯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것을 보면서 우리 발해사람들은 자부를 느끼고있소이다. 제 일찌기 이런걸 알았더라면 홍다구를 따라다니지 않았을것이오이다.》

왕택소의 진심을 안 설경성이 말우에서 미끄러져내렸다.

왕택소의 손을 그러잡은 설경성의 입에서 근심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때문에 자네가 당할 후환이 걱정되네.》

싱글 웃으며 왕택소가 곁에 와 선 부하들을 가리켰다.

《이들도 나와 뜻을 같이하는 발해사람들이오이다. 의원님, 오늘일때문에 후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마소이다. 의원님이 대도에 무사히 가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편안해질것이오이다.

홍다구도 인차 저승사자가 끌고갈것이고 그놈에게 놀아난 렴승익이도 제놈의 짓이 드러나지만 않으면 모르쇠를 할것이오이다.》

왕택소가 손짓을 하니 숲속에서 몇사람이 수십필의 말을 몰고 나왔다.

왕택소의 부축을 받으며 설경성은 말우에 올라앉았다.

설경성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왕택소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푹 놓고 길을 가도 되겠소이다. 제가 의원님을 모시고가겠으니 말이오이다.

제가 의원님에게 바라는것이 있다면 대도에 가시여 고려의술을 한껏 떨쳐달라는 그뿐이오이다. 비록 원나라황제가 밉더래도 남들이 어쩌지 못하는 그의 병을 고치면 이는 곧 온 세상에 대고 고려를 자랑하는것으로 될게 아니겠소이까?》

그 말에 감격한 설경성은 눈굽이 축축해졌다.

열흘후 왕택소의 호위속에 설경성은 원나라의 대도에 무사히 들어섰다.

원나라조정에서는 설경성의 일행을 고려관에 들도록 하였다.

고려관은 대도에 오는 고려의 사신들을 위해서 원나라조정이 특별히 마련한 객관이였다.

고려관에 든 설경성은 예상치 않았던 정황에 맞다들렸다.

병석에 있다는 원나라임금에게 급히 데려갈줄로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이 나라 어의들이 밀려와 의술을 론하자고 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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