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5)
을유년(1285)의 새봄이 왔다. 이 이태어간에 임금과 왕후를 위해 온갖 지성을 다한 설경성은 이제는 대궐을 떠날 때가 되였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왕후까지도 전혀 딴 사람, 병이 없이 건강한 녀인처럼 변했다.
뼈에 가죽만 남아있고 살갗에는 골병의 자욱이 진했던 왕후가 젖먹이아이마냥 얼굴이 뽀얘지고 실한 몸에 활기가 넘쳐나니 그를 낳은 친어머니도 몰라볼 정도였다.
하긴 그로 하여 자랑스러운 일화를 남긴 왕후였다.
지난해 임금은 한사코 고려의 국익을 해치려 하는 원나라조정의 못된짓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왕후까지 거느리고 대도행차를 하였다.
얻은 소득이 적지 않았다.
우선 고려에 와있는 원나라사람들을 그가 누구이든 고려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대바른 주장으로 원나라조정을 굴복시킨것이였다.
또한 원나라가 수십년간의 전란을 들씌우면서 고려에서 끌어간 백성모두를 고국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더우기 고려조정에 대고 감놓아라 배놓아라 든다면 이는 두 나라간의 화친을 깨려는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항변에 원나라는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것이라고 거듭 다짐하였었다.
하지만 서북면과 동북면에서 원나라침략군을 끌어내가는 문제만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건없이 백두산이남의 강토를 반환하라는 고려의 항의에 원나라임금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고려사람들은 북쪽의 강토를 되찾으려면 반드시 군력을 써야 한다는것을 절감하였다.
어느때건 충돌은 불가피한것이였다.
하여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사이고 련덕신이조차도 병상에서 다시는 일어설수 없을것이라 여겼던 왕후가 건강해진 몸으로 임금을 모시고 대도행차를 하였으니 이것만 가지고서도 고려의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섰는가를 원나라어의들에게 똑똑히 보여준것이였다.
왕후에게 있어서 더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여버린 련덕신은 후비라이의 곁에 떨어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설경성은 대궐을 떠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것이였다.
성상페하와 왕후마마의 몸을 모두 추세웠는데 여기서 무엇을 더 할수 있단 말인가.
그럼 어데로 갈것인가?
서해도나 양광도, 경상도와 전라도는 두루 떠돌아는 다녀보았으니 전혀 발길을 못해본 교주도(오늘의 강원도일대에 있은 고려의 도)로 가야 할것이다.
더불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보고싶어하는 금강산도 구경하면 좀 좋은가.
교주도를 돌아보리라 결심한 설경성은 이 아침 임금께 하직인사를 드리리라 집을 나섰다.
광화문앞에 이르렀는데 방금 타고온 수레에서 내린 홍자번이 설경성을 알아보고 반색을 하였다.
《나도 오늘 성상페하를 모시고 국사를 의논하게 되여있어 가는 길이니 마침일세.》
으리으리한 자주색관복에 옥띠를 두르고 금어를 찬 홍자번에게 비기면 흰옷의 백성차림을 한 설경성의 행색은 너무도 초라했다.
광화문안에 들어선 홍자번이 만족해하는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덕에 요즘은 보람이 있네.》
설경성이 아니였다면 아직도 강윤소가 삼사에 엉치를 깔고앉아 홍자번이 하려는 일이라면 코코에 다리를 걸었을것인데 악독하고 탐오한 간신일뿐아니라 친원파의 괴수인 그가 마침내 꺼꾸러진것이였다.
병만 없었더라면 강윤소는 벼슬을 바칠 나이가 되였어도 임금의 총애를 턱대고 벼슬길에서 물러서지 않았을것이다.
설경성이 병을 거들어 판삼사사(나라의 돈과 곡식의 출납 및 회계를 맡아보는 관청의 우두머리)로 승진한 강윤소가 더는 국사를 감당할수 없다고 하는데야 임금이 어찌 그를 조정에 그냥 둘수 있겠는가.
하루라도 조정에 남아있으면서 자손만대로 먹고쓸 재물을 끌어들이려고 악을 쓰던 강윤소는 집에 쫓겨들어오자 울화통이 터져 두달전에 죽고말았다.
이로써 나라에 큰 도적이 하나 줄어들고 그보다는 제일 큰 적수가 없어졌기에 홍자번이 기뻐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설경성은 홍자번과 달리 기쁘지 않았다.
말을 바로한다면 첨의찬성사로서 백관의 두번째 높은 자리를 차지한 홍자번이 중찬이 결원된 조정을 이끌고있지만 정사가 썩 잘되여가는것은 아니였다.
홍자번의 켠에서는 이태전 중찬 김방경이 나이가 많은때문에 상락공이라는 작위를 받고 조정에서 물러났다면 조인규의 켠에서는 강윤소가 저승행을 함으로써 두편의 세력이 어슷비슷해진것 같지만 실은 조가네가 더 우세했다.
옛말에 충신은 가물 타는 밭에 심은 콩처럼 드물게 나오고 간신은 비온 뒤에 밭이랑을 메우며 기여나오는 잡풀과도 같이 많다고 하였다.
그 말이 신통했다.
바로 강윤소가 섰던 자리에 그보다 더 못된자가 불쑥 나타나 차지해버린것이였다. 렴승익이라고 조인규의 딸을 며느리로 삼은 전리사의 랑중벼슬을 하는 작자였다.
그까짓 정5품의 랑중벼슬이 무슨 큰 자리라고 하랴만 바로 그 자리에 들어앉은자는 모든 문관들의 임명과 파면에 직접 관여하는 까닭에 실은 전리사에서 요직이라고 할만 했다.
그 자리에 들어앉은자가 야심만만하고 임금의 총애까지 받는다면 재상들도 벌벌 떨게 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세도를 부리는자를 가리켜 당권했다고 하는것이다.
렴승익이 바로 당권을 하고 탐욕스러운 조가네에게 입김을 불어넣고있는데도 홍자번이 흠흠해하는것 같았다.
설경성은 홍자번이 렴승익의 존재를 잊고있는것 같아 넌지시 말했다.
《요즘 당권한 사람이 운지의 배를 침몰시키지 않을가?》
그 말에 홍자번은 배심이 든든한 태도를 취했다.
《난 렴가를 하잘것 없는 놈으로 보네. 비록 그자가 지금은 당권을 하고 제놈과 꼭같은 탐욕스럽고 간사한자들로 조정을 꾸리려고 하는데 나나 자네가 있는 한 어림도 없네. 이미 자네가 강윤소까지도 성상페하를 움직여 조정에서 쫓아내였는데 렴승익이라고 가만두겠나.》
그 말에는 설경성이 할말이 없었다.
렴승익이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것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때문이였다.
어려서부터 의술을 배웠던 렴승익이 젊었을 때 어떤 병을 앓았는데 꿈에 중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념불을 하면서 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새끼줄을 꿰면 낫는다고 해서 절당을 찾아가 그렇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는것이다.
그때부터 렴승익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기는 부처가 내려보낸 의술의 신이라고 설교하면서 병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임금이 그를 불러다 그의 재주를 시험해보았다.
했더니 낮에 밤을 이어가며 임금의 무병장수를 위해 기도를 하면서 제 손바닥까지 뚫고 새끼줄로 꿰는데 그 지극함이란 누구에게도 비길 바가 아니였다.
그 정성에 임금이 감동되니 바로 이때라고 조인규가 저런 충신에게 인재천거의 중임을 맡겨주어야 나라가 흥할것이라고 거듭 아뢰였다.
조인규의 간청을 그럴듯하게 여긴 임금은 중노릇을 하던 렴승익을 전리사로 불러주었고 뒤이어 당권할수 있는 랑중으로까지 써주었다.
임금의 총애속에 한갖 떠돌이군이였던 렴승익이 당권한 권세로서 탐욕을 부리고있었다.
각지로 내려간 그의 심복들이 나라와 백성들의 토지를 렴승익의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국고로 들어가야 할 조세가 렴승익의 고간으로 들어가는것을 미워하는 고을원들이 그의 죄행을 올리는 상소문을 올리면 도리여 그놈의 모함으로 정배를 가는판이였다.
렴승익이 어떻게나 든든하게 터를 다지였던지 지난해에는 전리사의 몇몇 벼슬아치들이 당권한 렴가를 죽여야 할 놈이라고 뒤소리를 했다가 하루아침에 재산을 몽땅 몰수당하고 정배를 갔던것이다.
악은 후에 오는 악이 더 무섭다고 렴승익은 강윤소보다 더 큰 도적이였다.
그때문에 설경성이 렴승익을 전리사에서 몰아내려고 마음을 먹은것이였다.
눈길을 발치앞으로 떨군 설경성이 걸음을 늦추며 울분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렴가가 우리 고려는 빼앗긴 강토를 두고 원나라와 다툴게 아니라 그런건 뒤에 밀어놓고 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이게 나라에서 제일먼저 개체를 하고 원나라를 섬기자고 한 강윤소와 무엇이 다른가 말일세.
그래서 조인규가 그 점을 보고 성상페하께 렴가를 써주자고 졸라댔을거네.
내가 렴가 그놈보다 한걸음만 먼저 성상페하를 뵈왔어도 조정에 발붙일수 없게 하였겠는데…》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설경성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홍자번을 결단이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힘장수도 돌부리에 채이면 넘어질수 있다고 하였네. 운지는 렴가가 더 큰 세력을 이루기 전에 제거해야 하네.》
웃음을 거둔 홍자번이 대꾸했다.
《알겠네.》
실은 홍자번도 렴승익을 전리사에서 몰아내리라 생각하고있었다.
조정의 실권을 쥔 홍자번이 렴승익의 죄행을 거들어 당권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면 임금도 마음을 돌릴것이였다.
홍자번의 대답에 마음이 놓인 설경성이 큰걸음을 놓았다.
《오늘 난 성상페하께 하직인사를 드리자고 하네.》
그 말에 홍자번이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흥, 내가 자넬 놓아줄줄 알고? 비둘기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자네의 마음이 의술의 바다에 가있는걸 모르지 않네. 내 그래서 임금께 아뢰여 자넬 어의로 돌려놓게 하였거던.)
며칠전 홍자번은 임금을 만난 기회에 설경성을 화제에 올리였다.
《성상페하, 옛글에 재주있는자를 구하자면 애를 써야 하고 적임자를 얻은 다음에는 큰 일감을 맡겨주어야 한다고 하였소이다.
페하께서 의술의 인재를 얻으셨는데 그에게 중임을 맡겨야 할줄 아오이다.》
그 말에 임금이 놀라와하였다.
《이태전 공은 설경성에게 관직을 주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제서야 홍자번은 설경성이 벼슬을 주면 초야에 숨어버리겠다고 한 그때의 일을 사실그대로 아뢰였다.
했더니 임금이 껄껄 웃었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일을 맡아할수 있노라. 짐에게도 생각이 있네.
지내보니 설경성은 의술뿐아니라 만가지 리치에도 환한 사람이네. 그런즉 더 늙은 다음에 쓴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손해지. 옛적에도 리상로라는 의원을 중히 써주지 않았는가.》
…
그때 일을 돌이켜보는 홍자번은 기운이 나서 힘있게 걸음을 내짚었다.
그들이 얼마쯤 갔는데 내시가 앞을 막으며 절을 하는것이였다. 설경성도 아는 내시였다.
《성상페하께서 찬성사어르신과 설의원님을 급히 모셔오라고 했소이다.》
그 말에 홍자번은 임금이 자기의 친구를 크게 등용하려고 불렀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설경성은 의문이 가득하였다.
무슨 일일가?…
왕후에게 급병이 생겼다고 해도 그의 곁에 의술이 어의들에 못하지 않은 을나가 있고 또한 내가 날마다 입궐하는데 일부러 사람을 보낼게 있는가. 그러니 병과는 인연이 없는 일때문에 부르는것이 분명하다. 그게 뭘가?…
내시는 그들을 연경궁으로 안내했다.
연경궁의 어느 한 방에 들어서니 임금과 왕후가 맞아주는것이였다.
두사람의 큰절을 받아준 임금이 설경성이부터 손을 잡아일으켰다.
《참, 일이란… 이번에만은 그대와 함께 온정욕을 하러 가고싶었는데 그렇게 할수 없게 되였노라.》
설경성은 어리둥절해졌다.
올해 정초에 임금은 설경성의 권고대로 왕후와 태자를 데리고 평주의 온정골에 갔었다.
보름동안 온탕욕을 하였더니 임금에게도 왕후에게도 효험이 있었다.
그에 마음이 끌린 임금은 설경성이 온정골에 동행하지 않은것이 못내 섭섭하였다.
그래서 화창한 봄이 오면 설경성을 데리고 온정골을 다시 찾으리라 생각했었다.
홍자번의 손을 잡아일으킨 임금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제 저녁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여왔네. 후비라이의 병이 대단히 중하다면서 설경성을 보내달라고 말이네. 공의 생각엔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홍자번은 눈앞이 아찔하였다.
일이 이렇게 뒤집히다니… 아마도 련덕신이 그자가 후비라이에게 설경성에 대해서 떠들어댔을테지.
이제는 설경성과 손을 잡고 친원세력을 조정에서 밀어낼수 있겠다고 확신했던 홍자번은 손에 쥐였던 보물을 빼앗긴 심정이였다.
인차 홍자번은 화를 복으로 만들 수를 생각해냈다.
설경성이 뛰여난 의술로 후비라이의 목숨을 틀어쥔다면 그 힘으로 친원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기가 더 헐할게 아닌가.
임금이 고려를 넘보는 원나라를 원쑤처럼 여기고있다는것을 아는 홍자번은 힘주어 말했다.
《성상페하, 국사는 국사이고 사사는 사사이오이다. 남이 바랄 때 주는 도움이 진정 값진 도움이란 말도 있지 않소이까?》
홍자번이 임금에게 설경성을 가리켜보였다.
《후비라이도 설의원이 련덕신따위와는 비길수 없는 명의임을 알았기에 보내달라고 했을것이오이다. 설의원이 원나라에 가면 성상페하께옵서 진실로 두 나라간의 화친을 길이 도모하려 힘쓴다는것을 보여주는것으로 될것이오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천하에 대고 우리 고려사람들의 슬기와 재능을 시위하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소이다.》
임금이 호탕하게 웃었다.
호탕하게 웃는 임금을 바라보며 홍자번은 렴승익을 당권하는 자리에서 떼야 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것을 삼켜버리고말았다.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때문이였다.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으니…
이윽고 웃음을 거둔 임금이 홍자번의 등을 두드렸다.
《짐은 경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줄 알았노라. 이는 특별히 중대한 국사이거늘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경이 직접 군사를 내주어 설의원이 무사히 대도에 가도록 하라.》
이어 임금이 설경성의 손을 그러잡았다.
《짐은 그대를 믿노라. 그대가 벼슬을 극구 만류하기에 아무것도 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수 없다. 그대는 짐의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야 하는것만큼 상약국의 시의로서 나서야겠노라.》
시의라면 상약국에서 두번째 가는 관직이기는 해도 임금의 약시중을 도맡아야 하는 이를테면 나라에서 으뜸가는 약비방을 가진 명의만이 뽑히는 자리였다.
설경성은 너무도 생각밖으로 번져지는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헛되이 세월을 잃게 되는것은 아닐가?
그러나 부닥친 사태는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되돌려세울수 없었다.
그러니 차례진 운명에 순종할수밖에 없단 말인가?!…
임금이 지엄한 령을 내리였다.
《그대는 길떠날 차비를 서둘러서 래일모레는 어김없이 떠나도록 하라.》
이날 설경성은 력동이를 불러앉히고
설경성이 원나라로 가게 되였다는 소식은 즉시 조인규에게도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