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4)

 

이튿날, 설경성이네 집뜨락에는 그의 제자들이 가득 모여앉았다.

초겨울치고 맑게 개인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스한 해빛에 아늑한 마당은 훈훈하였다.

먼저 력동이 일어나 제자들을 마주 향해 상좌에 앉은 설경성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현재 개경에 있는 향도의 성원들은 모두 모였소이다.》

침묵속에 설경성은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10여년전 설경성은 제자들을 위주로 향도를 무었다.

근래에 사람들이 서로 돕고 화목을 위해 향도를 뭇는 바람이 불고있었다.

이 바람을 타고 설경성도 제자들이 서로 위해주면서 병치료에 전심하게 할 목적으로 향도를 무었던것이다.

설경성이 회의를 시작하자는 눈짓에 따라 력동이 맨 앞줄에서 고개를 떨구고있는 중년의 사나이를 손가락으로 겨누었다.

《여, 의민이, 일어나라.》

고개를 떨군채 중년사나이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머리를 들라.》

력동의 큰소리에 그가 까맣게 질린 얼굴을 쳐들었다.

의민은 그의 호였다.

설경성을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의술의 의자라는 글도 쓸줄 모르는 까막눈이였다.

그런 까막눈에게 의원의 날개를 달아주고 장가도 보내준 은인이 설경성이였다.

향도의 부장으로서 모임을 사회하는 력동이 그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 지어주신 너의 호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있는가?》

의민이 기여드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평백성을 위해주는 의원이 되라는…》

력동이 위압적인 눈길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는 사부님앞에서 계률을 어긴 의민의 죄를 론하자고 하오. 사부님의 말씀이 계시겠소.》

수치감으로 목이 잠긴 설경성은 력동에게 의민의 죄를 묶은 글을 읽으라고 손짓했다.

엄한 눈길로 의민을 쏘아보며 력동이 종이말이를 펼쳐들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하는 말이 있다. 너 의민은 우리의 계률을 심히 어지럽힘으로써 스스로 제가 사람이 아님을 드러냈다.

너의 죄는 첫째로 가난한 병자들에게서는 약값만 받으라는 계률을 어기였다. 너는 가난한 병자들한테서까지 치료비를 망탕 받아먹었으니 여느 의원들과 무엇이 다른가?》

설경성이 바닥을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잠겼던 목이 터졌다.

《그게 사실이냐?》

의민은 대답대신 몸을 떨었다.

설경성이 부르짖었다.

《이놈아, 의술을 안다고 우리까지 가난한 병자들의 재물을 앗아낸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누가 그들을 위해준단 말이냐? 어쩌면 네가…》

설경성은 력동이에게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였다.

성난 력동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네 죄는 둘째로 부자들한테서 받은 돈의 절반을 향도에 바쳐야 한다는 계률을 지키지 않은것이다.》

설경성이 부자들에게서 받은 치료비의 절반은 향도에 들여놓게 한것은 그 돈으로 곤궁에 처한 계원들도 구제하고 역병과 같은 질병이 돌 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색을 멀리하라는 계률도 어긴 의민의 죄를 렬거한 력동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졌다.

《네가 진 제일 큰 죄는 나라에 불충하고 백성을 못살게 구는자들의 병을 보아줄수 없다는 계률을 어긴 그것이다.

네가 어쩌면 탐욕으로 백성들을 괴롭힌 강윤소의 병을 보아줄수 있느냐 말이다?》

그 말에 설경성이 틀어쥔 주먹을 떨었다.

피발진 눈으로 의민을 노려보며 력동이 꾸짖었다.

《네놈은 나라와 백성살이를 망치려드는 악독한 탐관오리들을 하루빨리 없어지길 바래서 그놈들의 병을 보아주지 않는것이 우리 향도가 정해놓은 계률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렇게도 돈에 환장을 했다더냐? 이 배은망덕한 놈아, 네놈이 아니였다면 역적 홍다구가 아직까지 살아있지 못할게다.》

그 말에 설경성이 놀란 눈길로 력동을 쳐다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력동이 한숨을 그으며 대꾸했다.

《사부님, 이번에 자세히 알아보았더니 글쎄 저놈이 그전에 소갈로 죽어가던 홍다구를 살려주었다는것이오이다. 돈 천냥을 받아먹고…》

설경성이 치를 떨었다.

일찌기 고려가 생겨 홍다구같은 역적은 없을것이였다.

10여년전 왜나라를 치러 가는 원나라의 군장으로 개경에 온 홍다구는 군사를 풀어 나라와 백성의 재물을 로략질하고 충신들을 모해하면서 고국을 해치려고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그에 격분한 설경성은 소갈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홍다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독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놈을 살려준 그때문에 손목을 자르고싶었는데 두번다시 그런 죄를 저지르겠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제자가 그 상역적을 구원해주었다니 그런 놈을 키워낸 자신이 막 혐오스러워지는 설경성이였다.

아,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진작 이들의 행실에 눈을 밝히였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겠는데

지금껏 설경성은 제자들을 키우는데 관심이 컸을뿐 그들의 행동에는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었다. 그만큼 그는 제자들을 믿는데 습관되여있었던것이다.

《저놈의 목을 쳐라.》하고 이구동성으로 떠드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설경성이 손을 쳐들었다.

죽가마끓듯 하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설경성의 입에서 뜻밖에도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내 오늘 느낀바가 크다. 의민이 왜 저 꼴이 되였겠느냐? 그건 저 녀석이 저를 위해서 의술을 배웠기때문이다. 당초에 의술을 밥벌이재주로 여기였기에 나라의 원쑤조차 가려보지 않은거다.

우리 계률에는 계률을 어긴자 의술을 바치도록 되여있다.》

그 말에 의민은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의술을 내놓는다는것은 곧 목을 바치는것을 의미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설경성이 고개를 저었다.

《의술이란 사람의 재주중에서 제일로 의롭고 깨끗한것이기에 그리고 그 사명이 제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것이기에 이런 길로 억지로 데리고갈수 없네.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서 가야 하는 길이 우리가 가는 길이란 말일세.》

자리에서 움씰 몸을 일으킨 설경성이 제자들을 굽어보았다.

《난 그대들과 같이 의술을 가진 사람으로서 말하려네. 나와 함께 한길을 가고싶은 사람은 향도에 남아있고 저 의민이처럼 아니, 이제 더는 의민이 아니지. 저녀석처럼 의술을 장사치의 재주로나 여기는 사람들은 가도 좋네.》

이어 력동에게 일렀다.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욕하지 말고 보내게. 그다음 향도의 명부를 다시 만들라구.》

그때 대문이 열리고 이번에 첨의부의 두번째자리인 첨의찬성사로 승진한 홍자번이 싱글벙글하며 들어섰다.

성큼성큼 설경성에게 다가온 홍자번이 다들 들으라는듯 목청을 돋구었다.

《이 집에 경사가 났네. 그걸 알려주고싶어서 달려왔네.》

그 말에 놀란 설경성이 그를 방으로 이끌었다.

방문을 꼭 닫고서야 설경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운지, 대체 무슨 일인가?》

제 기쁜김에 설경성의 기분을 알리 없는 홍자번이 흥이 나서 웃었다.

《아무렴, 이보다 큰 경사가 있을라구. 방금 성상페하께서 그대에게 태의감과 상약국을 맡긴다는 고신(벼슬임명장)을 만들어올리라는 성지를 전리사에 전하라 하시였네.》

그 말에 설경성은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불만을 터뜨렸다.

《어쩌면 자네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는건가?》

제 기분에 들떠있는 홍자번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네, 안다니까. 그대같은 사람이 장차 조정의 기둥이 되지 않으면 누가 된단 말인가.》

설경성이 두눈섭을 꿈틀거리며 성을 냈다.

《정 그렇게 나오면 난 오늘로 초야에 숨어버리겠네.》

그제서야 설경성의 기분을 알아차린 홍자번이 두눈을 치떴다.

《그건?!…》

설경성이 제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벼슬길로 나설것 같으면 벌써 자네와 함께 나섰지.》

홍자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어찌 자네의 뜻을 모르겠나. 항간에 묻혀있는 조상전래의 모든 비방을 찾아내서 병자구제에 리용되도록 하겠다는 그 뜻을 말일세.

그러나 벼슬길에서는 그 뜻을 이룰수 없다고 하는 자네의 생각은 짧은것 같네. 오히려 더 좋지 않을가?》

설경성이 도리머리를 하였다.

《그 말 과연 가당치 않네. 자고로 벼슬길은 간신들이 득세하여 날치는 복마전인 때가 아닌적 없었네. 그런데서 어떻게 뜻을 이룬다고 하나. 나의 뜻이 자네와 다르다는걸 그래 운지, 그대가 모른단 말인가?》

격해진 홍자번의 목에서 피줄이 꿈틀거렸다.

《자넨 좀 너무하구만. 바른 정사를 떠나서 병자구제를 할수 있을것 같은가. 지금처럼 해서는 언제 가도 병자구제를 할수 없네.

그래서 난 자네도 벼슬길에 나서가지고 조정의 쇄신을 위해 힘과 지혜를 합치자는걸세. 벼슬길에서 간신들만 몰아내면 병자구제는 엿죽방망이 한가지일세.》

설경성이 더 세차게 도리머리를 하였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일세. 지금껏 그 어떤 나라도 바른 정사를 펼친적은 있어도 병자구제를 한적은 없네.

자네도 가난구제를 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들은적 있나?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은 있어도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말은 없네.

가난구제란 무엇이겠나, 굶주림과 질병에서 건져낸다는것이 아니겠나?

사방에 널려있는 비방들을 모두 건져내서 누구나 그 비방을 써먹을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병자구제란 말일세. 그러니 제발 나의 마음을 성상페하께 알려주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개경장안에서 더는 날 보리라고 생각말게.》

흥자번은 설경성이 결코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홍자번이 아니였다.

(흥! 자네를 중히 써준다는 성상페하의 어지가 내려져도 뻗칠텐가. 이젠 내곁에 자네가 꼭 있어야 한단 말일세.)

이런 배심이였지만 홍자번은 설경성을 진정시키려고 속에 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알겠네, 그대의 마음을 성상페하께 전하겠네.》

대문밖을 나서던 홍자번이 웃으며 말했다.

《깜빡 잊을번 했다니까. 성상페하께서 자네의 청을 받아들여 탐라뿐아니라 온 나라의 문둥병자들을 관가에서 돌봐주라는 어지를 내리셨네. 태의감에서는 인차 사람이 탐라에 내려가게 될걸세.》

설경성의 두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날 설경성은 김석에게 태의감의 허락을 받고 탐라로 내려가라는 분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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