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3)

 

 

《설경성은… 국왕의 총애도 받았으나 후손을 위하여 특별한 혜택을 바라지도 않았고 살림살이에 류의하지도 않았다.》

                                                                                            (《고려사》권 제122 렬전 35에서)

 

신효사의 별궁에 머무르고있는 설경성은 자신의 의술을 의심할 정도였다.

비방을 쓰기 시작해서 벌써 며칠만에 임금에게서도 왕후에게서도 효험이 알리기때문이였다.

열흘이 지나서부터는 왕후의 얼굴에서 병조의 진때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래놓으니 임금은 신선이 내렸다면서 설경성이 잠시도 제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만물이 소생하는 새 봄에조차 피기가 돌지 않았던 왕후의 얼굴에 홍조가 비끼고 부해진 몸에 생기가 넘쳐있었다.

일단 골수와 진액의 부활이 가동되면 젊음이란 혈기가 마침내 용을 쓰는 법이였다.

이것이야말로 환생약이라고 할수 있었다.

설경성은 보옥이 더없이 고마왔다.

그가 아니였다면 이런 신비한 효험이 인차 나타나지 않았을것이였다.

보옥의 재주는 설경성이 생각했던것보다 우월했다.

임금에게는 메밀음식외에도 만문한 련의 줄기에 락화생을 넣어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데 그 음식이 피를 잘 생겨나게 하는데 특효가 있었다.

왕후에게는 삼계탕이나 호박음식, 가지음식외에 별도로 송이버섯, 참나무버섯, 우웡을 섞어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데 그 별식이 유종의 독기를 푸는 명약이였다.

이런 음식비방이 있어 설경성의 비방이 신비한 효험을 나타낼수 있었다.

또 한달이 지나자 왕후는 몰라보게 몸이 좋아졌다.

이에 감동된 임금은 설경성을 위해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주연에는 보옥이며 왕후의 약시중을 맡은 을나며 설경성의 여러 제자들 그리고 홍자번, 김방경이 초대되였다.

임금은 주연에 이어 다음날에는 별궁앞마당에서 가무놀이를 펼치게 하였다.

가무가 펼쳐지는 채붕부터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공중에는 갖가지 크고작은 종이꽃, 비단꽃들을 매달고 눈부신 꽃문양을 수놓은 비단으로 꾸린 무대를 가리켜 채붕 또는 산붕결채라고 부른다.

이 무대에서 교방(궁중예술단)의 무용수들이 악공들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그 모양이 황홀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였다.

관람석에서 설경성은 임금과 왕후의 사이에 거북스럽게 앉아있었다.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임금과 나란히 앉는다는것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불충한짓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임금과 왕후가 병자와 은인간의 례의를 따라야 한다며 이끄는 바람에 그를 마다하지 못한 설경성이였다.

그래서 밤송아리를 깔고앉은듯 불안스러워 진땀을 흘리고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태자가 두팔을 벌리고 나타나서 설경성은 얼른 그를 무릎우에 앉히였다.

《명의님!》하고 해죽거리는 태자를 안은 설경성은 그제서야 크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폈다.

왕후는 공경어린 눈길로 설경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요즈음은 몸이 화끈하게 더워지는것이 알리오이다.》

그 한마디가 설경성을 흡족하게 하였다.

염증을 풀고 피를 왕성하게 해주는 생지황, 홍화, 산골(자연동)과 대한추위속에서도 땀이 나게 한다는 천문동, 흰솔풍령을 약처방에 넣었는데야 어찌 몸이 더워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을나가 날마다 왕후의 온몸을 주물러도 주는데야…

임금도 한마디 하였다.

《그래서 천하명의가 아닌가.》

왕후가 두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의원이라면 누구나 의서를 파고들었겠는데 어이하여 명의님만이 련덕신까지도 스승이라 불러주는 무쌍한 의술을 지니셨는지 그 비결을 알고싶소이다.》

설경성이 공손히 여쭈었다.

《그건 신이 항간의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갖가지 비방을 모아들였기 때문이오이다.》

임금이 탄복하여 말하였다.

《과시 그대만이 할수 있는 명담이노라. 현명한자는 세살난 아이의 말도 귀담아듣는다고 하였으니 그대가 항간에서 배우는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기에 명의가 될수 있었노라. 짐은 그대를 너무도 늦게야 만난것을 후회할뿐이요.》

왕후도 임금에게 지려들지 않았다.

《천재는 뭇사람들속에서 제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설익은 재사는 그들을 비집고나와 내가 제일이라고 자랑한다는 말이 있나이다. 그래서 페하께서 때늦게 만난것을 후회할수밖에 없나이다.》

임금이 껄껄 웃었다.

《왕후의 그 말 참으로 지당하오.》

기분이 흡족해진 임금이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보다도 각지를 많이 밟아보았는데 혹시 백살난 장수자를 만난적 있소?》

백성들을 찾아다닌 길이 십만리도 넘을 설경성은 그 길에서 만나본 장수자들을 그려보았다.

《몇사람 만나보았소이다. 옛적에는 고을마다 장수자들이 있었다던데 오랜 전란의 탓인지 지금은 정말 보기 드무오이다.》

임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럴테지. 수십년 세월이나 전란을 겪었으니까. 그래, 장수의 비결이 무엇인것 같소?》

오래 살고싶어하는 임금의 심정을 헤아린 설경성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장수의 비결이라…)

설경성은 의술의 바다에서 장수의 비결도 찾아쥐려고 애를 써왔다.

그래서 어느 고장에 장수자가 있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가군 하였다.

그 나날 장수의 비결과 더불어 장수보약까지 만들어낸 설경성이였다.

그러나 장수보약을 만들었다는 말만은 하고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보약을 얻게 되는 경우 매사에 몸을 단련하고 섭생에 관심을 돌리려는 의욕이 이전만 못해지기때문이였다.

《성상페하, 장수의 비결은 결코 값비싼 보약재나 신비한 비술에만 달려있는것이 아니오이다.》

설경성은 10여년전 구월산(아사달, 궁홀산이라고도 불렀다.)기슭의 어느 마을에서 만나본 백살로인이 생각났다.

구월산의 장수자로인은 쉰살 나보였고 눈도 귀도 젊은이 못지 않았다.

그의 섭생에서 남다른 점이 있다면 산나물 특히 죽대둥굴레를 많이 캐먹은 그뿐이였다.

산나물이 무슨 별맛이여서가 아니라 가난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것이였다.

비록 살림은 구차했지만 그는 세상을 원망함이 없이 이웃들과 화목하기에 힘썼다.

《신의 생각엔 사람이 오래 살자면 무엇보다 정신을 보양해야 한다고 보오이다. 재물에 욕심이 나서 남을 해치는 악심을 가진자는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오래 살지 못하오이다.》

《알겠노라.》하고 미소를 머금은 임금이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고?》

왕후도 재촉하였다.

《무엇이든 어려워마시고 아뢰이소이다.》

설경성은 이런 기회가 오면 아뢰이자 생각해두었던것이 있었다.

설경성은 간절한 눈길로 임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페하를 받드는 신하들속에 진정으로 백성살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적은것 같소이다. 우리 고려가 강대한 나라로 되기를 바라는 신하들조차도 아직은 백성살이를 돌볼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있소이다.》

이것은 홍자번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오래전부터 설경성은 홍자번과 마주할 때면 백성살이에 대한 론쟁을 해오고있었다.

그때마다 설경성이 백성들속에서 군사도 나오고 쌀도, 천도 나오니만치 백성살이를 돌볼 때 부국강병을 이룰수 있다고 하였지만 나라가 있고야 백성도 있다고 주장하는 홍자번은 그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청렴하다는 홍자번이조차도 이런 관점이니 백성을 먹이감으로 여기는 탐관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옛적에 큰 나라에게 먹히웠던 어느 한 작은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아뢰일가 하오이다.

큰 나라에 먹히운 작은 나라 왕은 속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로는 민심을 모으는 길이라고 생각했소이다.

그래서 왕은 삼년세월 백성들에게서 조세를 받지 않았소이다.

이렇게 해서 민심을 모은 왕은 불의에 백성들속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큰 나라를 들이쳤소이다.

군사들은 자기들을 잘살게 해준 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소이다. 결국 왕은 큰 나라를 쳐이기고 패전의 한을 풀수 있었소이다.》

심중해진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마음을 알겠노라. 그다음은 또 뭔가?》

정말이지 헐치 않은 말을 하였는데 임금이 너그러이 받아주니 설경성이로서는 용기가 나지 않을수 없었다.

달아오른 심정같아서는 큰 나라에 굽신거리는 얼빠진짓이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탐욕의 괴수인 강윤소를 조정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아뢰이고싶었다.

그러나 임금이 원나라조정과 친한 까닭에 강윤소를 크게 쓰고있다니 머리를 써야 했다.

《페하, 밀직부사 강윤소가 몇달밖에 살것 같지 못하오이다.》

임금이 놀라서 물었다.

《짐도 그가 간적에 들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빨리? 그대의 재주로 고칠수는 없는고?》

설경성은 나쁜 세력을 만들어놓고 알면서 죄를 범한자는 가차없이 처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것을 꾹 눌러버렸다.

크게 간사한자는 충신인것 같고 크게 속이는자는 진실한것 같다는 말이 강윤소와 같은 놈을 두고 생겨난 말이 아니겠는가.

설경성이 나직이 대꾸했다.

《옛말에도 나라일에는 모두가 힘쓰려 하지만 사사일에는 천갈래만갈래로 갈라진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아무리 의술이 좋아도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은 고칠수 없소이다.》

임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경성의 말뜻을 알고도 남기때문이였다.

강윤소가 어떤 사람인지 짐도 모르는바가 아니지. 처음은 그가 고려를 위해서 이웃나라를 드나들며 애쓴건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우리에게 감놓아라, 배놓아라 참견하려드는 후비라이를 끼고 조정에 자기 세력을 늘여놓았지. 탐욕도 부리고…

그런데도 그를 떼버릴대신 더 크게 써준것은 생각이 있기때문이다.

원나라에 빼앗긴 강토를 되찾는 싸움을 일으킬 때까지는 그런자들을 잠시 내버려두는것이 유익하니까.

강윤소가 벼슬을 내놓을 나이도 되였고 또 불치의 병으로 오래 살것같지 못하다고 하니 이런 명분으로 조정에서 내보내면 원나라것들도 할말이 없을것이다.

임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노라. 골병든 사람이야 쉬게 하는것이 도리이지.》

설경성은 가슴이 은근히 들뛰였다.

탐욕의 괴수, 친원의 괴수를 벼슬길에서 끌어내리게 되였으니 이런게 경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기회에 이루어야 할것들이 많고많은 설경성이로서는 이것으로 만족해할수 없었다.

《페하, 소신에게 제자들이 있사온데 그들을 동서대비원과 혜민국, 제위보들에 받아주셨으면 하오이다.》

동서대비원과 혜민국, 제위보는 주로 백성들을 의술로 구제하는 사명을 지닌 관청이였다.

《그리고 그 관청들에 의원수를 늘였으면 하오이다. 각 고을들에 있는 약점들에도 의원을 늘였으면 하오이다. 지금 약점들에는 보통 네명의 의원을 두고있는데 그들로서는 고을의 병자들을 다 돌볼수 없소이다.

각 군진들과 경군에도 군후사(군의), 용약원(군의로서 주로 약제사)의 수를 곱으로 늘였으면 하오이다. 이와 함께 앞으로 역병이 돌때마다 지체없이 구제도감을 내옴으로써 즉시 병을 막게 하였으면 좋겠소이다.

그리고 향교들에서는 그 고을에서 의술이 제일 높은 의원들을 교수로 받아들여 제자들을 키우게 하였으면 좋겠소이다. 동시에 태의감과 혜민국에는 의원들을 전업으로 길러내는 의생방을 내왔으면 하오이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나라를 위한건데 어찌 짐이 모른다 하겠소. 그런데 그대의 제자들을 어찌 그런데만 보내겠소? 의술이 높은 제자들을 우선 태의감과 상약국, 동궁과 다방에 보내야겠소. 그대가 천거한 보옥이를 식의(임금과 그 식솔의 식사를 관할하는 의원)로 쓴것처럼 말이요.》

태의감이 임금과 그 식솔의 병치료도 맡아했다면 상약국과 다방은 그들이 쓰는 약을 짓는 관청이였다.

《짐은 의과시도 그대에게 맡기겠노라. 그리고 의과급제자들을 재주에 따라서 7품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벼슬에도 오르도록 하겠소.》

임금이 그런 말을 한것은 백여년전에 의과급제자들의 벼슬을 7품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그때뿐이고 리상로와 같은 의원들은 재상으로까지 출세하였었다.

사실 임금은 설경성에게도 리상로처럼 크게 써주겠다는것을 암시한것이였다.

그를 모르지 않았으나 설경성은 벼슬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였다.

《성상페하, 왕후마마의 병시중을 드는 을나는 탐라태생이오이다.》

설경성의 두눈에 눈물이 고여올랐다.

몇해전 을나의 고향마을에 달려든 원나라 목자(말을 키우는 목자라고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군사들이였다.)들이 집들을 불지르고 마을을 양마장으로 만들었다.

한지에 나앉은 마을사람들이 산골짜기로 쫓겨들어가 죽지 못해 살고있다는 소식에 설경성도 을나도 눈물을 흘리였다.

《탐라에서 원나라 목자들이 우리의 백성들을 해치고있소이다. 나라에서 그놈들을 엄히 다스렸으면 하나이다.》

그 말에 임금도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서북면과 동북면의 강토를 차지하고도 모자라 탐라까지도 빼앗아가지려고 악을 쓰는게 원나라조정이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강토수복의 령을 내려 군력으로 원나라침략군을 쳐몰아내고싶다만 전란의 피해를 가실 때까지 참아야 했다.

때를 기다리는 임금은 수차에 걸쳐 대도에 사신을 보내여 원나라의 강토인듯 동녕부를 설치한 서북면과 동북면을 내놓을것과 탐라에서도 그들의 말목장을 끌어내갈것을 요구했었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주먹이 오가기마련이다.

고려라는 나라만은 힘으로도 굴복시킬수 없는 강적이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얼마전 원나라조정은 탐라의 말목장을 고려에서 관할하라는 국서를 보내여왔다.

하지만 서북면과 동북면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손탁이 세고 용맹한 장수를 탐라에 보내리라 결심한 임금이 입을 열었다.

《다음은 또 뭔가?》

《예, 탐라에는 문둥병을 앓는 병자들이 많소이다. 나라에서 그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돌봐주면 병도 고치기 헐하고 병이 퍼지는것도 막아낼수 있소이다.》

《그건 념려말라. 나라에서 문둥병자들을 돌봐주라는 어지를 내리겠노라.》

설경성은 그렇게도 암담하게 여기던 골치거리가 쉽게 풀리는 바람에 기분이 붕 떴다.

이제 어지가 떨어지면 그 즉시 제자들을 탐라에 보낼 생각이였다.

탐라에 보낼 적임자로는 그곳에 대풍자를 가지고 갔던 김석이 좋을것이였다.

앉아있기가 갑갑한지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경성도 따라 일어섰다.

바람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후원으로 걸음을 옮긴 임금이 근심조로 말했다.

《올해에는 여러번이나 범이 도성으로 기여들어와 저자를 싸다니며 사람들을 물었소. 점쟁이들의 말이 개경의 지기가 쇠진했기때문이니 강화도로 다시 천도해야 한다는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

설경성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성상페하, 성현들이 이르기를 점쟁이란 헛된 요설로 민심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무리라 하였소이다.》

《알만 하이. 그건 그렇고… 흉악한 외적이 일으킨 전란때문에 백성도 군사도 다 지쳤네. 외적이 또 언제 전란을 일으킬지 모르네.》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가서 서북면과 동북면에 둥지를 틀고있는 원나라침략군을 쳐부시고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임금이 그런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것은 지친 군사로는 뜻을 이룰수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였다.

《전란을 방비하자니 백성살이를 돌아볼수 없거던. 그대는 민심을 모으는것이 나라보존의 방책이라고 하였는데 짐도 그걸 모르는건 아니네. 그리고 짐도 민심이 좋지 않다는것도 알고있네.

그대는 의술을 배우느라 전국각지를 밟아보았다고 하니 민심이 어떻다는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거네.

그대는 조세와 부세를 탕감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하면 민심을 모을수 있다고 생각하오?》

설경성은 외워두었던 말인듯 즉시 입을 열었다.

《성상페하께서 최석과 같은 사람들을 천거하여 고을을 맡기신다면 어찌 백성들이 나라를 칭송하지 않겠소이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석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크게 난것은 고을원으로 나가있을 때 정사를 공정하게 잘한 그때문만이 결코 아니였다.

몇해전 그는 고을원으로 임기가 차서 조동되게 되였다. 그래서 그는 암말을 타고 새 부임지에 갔다. 그리고는 타고온 암말은 물론 어미를 따라온 망아지까지 고스란히 본고을에 돌려보냈다.

이로써 최석은 고을원들이 조동되여갈 때마다 고을의 말을 타고가서 돌려주지 않던 관례를 처음으로 깨버렸다.

이에 감격한 고을사람들이 최석의 청렴을 칭송하는 송덕비까지 세웠다.

《하오나 리덕손이처럼 토색질로 사람들의 원망을 사는자들을 크게 써준다면 백성의 원한을 살수 있소이다.》

리덕손이때문에 경상도의 민심을 적지 않게 잃었음을 모르지 않는 임금이 그 말에 얼굴을 붉히였다.

설경성의 목소리는 더욱 절절하게 울리였다.

《성현들이 이르기를 흥하는 나라에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지만 망해가는 나라에서는 짐승처럼 여긴다고 하였소이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만이 몽골에게 먹히우지 않았으니 이는 성상페하의 나라가 흥하는 나라임을 보여주는것이라 할수 있소이다.

하기에 응당 백성을 자식으로 대해주어야 할것이오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는것은 곧 그들에게 득이 차례지도록 정사를 한다는것이며 그 정사에서 선참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것은 백성이 배를 곯지 않도록 하는것이오이다.

백성은 배가 곯으면 조정을 좋다고 말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나라를 원망하게 되오이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와진다고 성현들이 말했소이다.》

설경성은 구동에 갔을 때 본 죄많은 백부자를 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 고을원이 탐욕스러운 고을들에서는 세력있는자들이 관가를 끼고 남의 땅을 빼앗아 더 큰 부자가 되는 반면에 가난한 백성들은 더 가난해지고있소이다. 빈부의 차이가 천양지차로 되고 부자는 한줌이라면 배곯는 사람이 절대다수가 되는 경우 나라는 어찌 되겠소이까.

그렇게 되기 전에 청렴하고 대바른 사람들을 크게 등용하여 탐관오리들의 페행을 바로잡아야 할줄로 아오이다.》

임금이 언짢아하는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국자감시절 아니본 책이 없다더니만 헤아리는 눈이 날카롭도다.》

그 말에 설경성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열에 아홉은 참람한 언사라는 꾸중을 받고 정배를 갔을것이였다.

휴휴선생이 바로 그러했고 최유엄도 그런 벌을 당한게 아니던가?!

아무리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임금의 기분을 거슬렸다면 그런 벌을 면할수 없다.

그러나 내 한몸을 위해서 이 길에 나선것이 아닌 나로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수 없지 않은가.…

설경성이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할말은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데 울분에 젖은 임금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힘에 부치네. 우리 고려가 지금처럼 어려움을 겪은적은 일찌기 없었소. 송나라까지 집어삼킨 몽골사람들과 맞서서 나라를 부지하자니 지쳤네.》

그 말에 설경성은 임금에게 힘을 주는 말을 해주고싶었다.

말로는 고려와 길이 화친하자고 하지만 속에는 칼을 품고 달려들 기회만을 노리는 원나라가 아닌가.

《성상페하, 일찌기 황태조께서 림종시에 남기신 10훈요에서 이르시기를 우리는 강하고도 악한 나라 거란과 이웃해있기때문에 어느 한시도 위험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군사들을 내세워주고 잘 우대해주며 무술이 뛰여난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라고 하시질 않았소이까.

자고로 우리 고려에는 무술에 뛰여난 인재가 많고 백성 또한 제 나라를 목숨바쳐 지켜내기로 세상에 알려졌소이다.

성상페하께서 10훈요를 받들어 나라방비를 국사중의 국사로 내세우시고 장수들과 군사들을 위해주고있는데 원나라따위가 무엇이라고 두려워하겠소이까.

한 기둥으로 지은 집보다는 두 기둥으로 지은 집이 더 든든하고 두 기둥으로 지은 집보다는 네 기둥으로 지은 집이 더 든든한 법이오이다. 경강대왕(덕종)때에는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 등 이 네 충신으로 조정을 버티게 하였기에 그때는 간신들이 날칠수 없었고 그래서 나라는 부유해지고 군사는 강했소이다. 그때에 압록강으로부터 동해에까지 이르는 천리장성이 쌓아진것이고 박원작이라는 사람은 염초를 쓰는 위력한 병기(화약무기)까지 만들어냈소이다.

때문에 횡포한 거란이 도리여 우리를 두려워했던것이오이다.》

임금이 두눈을 슴벅거렸다.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 이들이 어떤 인재들이였던가.

서희장군의 아들인 서눌이나 강감찬장군과 함께 개경에 라성을 쌓는 일을 맡아해낸 왕가도나 그리고 처음으로 사학을 개척한 최충, 황태조로부터 7대임금까지의 실록을 재편찬한 황주량이나 다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큰 인재들이였다. 뛰여난 학식과 재주로는 부국강병에 이바지했고 청렴한 성품으로는 백관의 본보기가 되여 조정의 쇄신을 이룬 그들이였다.

임금이 설경성을 기대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늘날 이 나라에 그런 인재, 그런 충신들이 있는것 같소?》

설경성의 가슴이 세차게 높뛰였다.

《이미 성상페하께옵서는 그런 사람들을 크게 써주고계시오이다. 하기에 홍자번이와 같은 충신이 지첨의부사로 중히 등용된게 아니겠소이까.》

설경성은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페하께서는 룡체를 아끼셔야 하오이다. 옛 책에도 임금은 아침엔 조정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낮에는 신하들의 움직임을 알아보며 저녁에는 정사의 방도를 세우고 밤에는 편안히 쉬여야 건전한 기력으로 나라를 이끌수 있다고 씌여있소이다.》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임금의 두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내시가 임금에게 아뢰였다.

《통례문지후 채공이 성상페하를 급히 뵈왔으면 하오이다.》

의아해진 임금이 손짓으로 채홍철을 데려오라는 분부를 하였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나타난 채홍철이 임금앞에 꿇어엎드렸다.

《성상페하께 감히 아뢰나이다. 급한 일이 생기였기에 저희들의 사부님을 만나게 해주셨으면 하오이다.》

채홍철이 설경성이 아끼는 제자임을 알고있는 임금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짐도 함께 들으면 안되겠느냐?》

설경성은 어쩔줄 몰라 자기를 쳐다보는 채홍철에게 임금의 의도를 따르라는 눈짓을 하였다.

그제서야 채홍철이 입을 열었다.

《성상페하, 사부님이 정해놓은 계률이 있사온데 그중의 하나가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에 불충한 사람의 병을 보아주지 않아도 죄로 될수 없다고 하였소이다. 그런데 그 계률을 어긴자가 생겼기에 어전임에도 불구하고… 황송하오이다.》

안색을 흐린 임금이 채홍철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설경성에게 일렀다.

《그대가 세운 계률이 나라에도 유익하니 그를 어긴자를 엄하게 다스리는것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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