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2)

 

홍자번에게 떠밀려 수레에 오르던 설경성은 불쑥 떠오르는 예감에 그를 바라보았다.

《성상페하의 룡체때문이겠지?》

《물론이지.》

언제인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던 설경성이 대문밖에 서있는 을나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 녀인도 함께 가야 하네.》

홍자번이 치뜬 눈으로 을나를 바라보았다.

《저 녀인은 뭣하러?》

《저 녀인은 녀의일세. 소문에 왕후마마도 앓으신다던데 녀의가 있어야 할게 아닌가?》

다시한번 힐끔 을나를 바라본 홍자번이 수레를 따라온 하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저 녀의를 신효사로 모셔오라.》

설경성이 놀라서 물었다.

《신효사라니?》

《성상페하께서 지금 그곳에 나와계시네.》

수레에 설경성과 나란히 앉아가는 홍자번은 지금 승자의 기분이였다.

이번에 임금의 측근에서 밉고미운 조인규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청렴한 정가신을 들여앉히였으니 기분이 유쾌할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 뉘덕이냐? 설경성의 덕이다.

홍자번으로부터 광명사에서 있었던 설경성과 련덕신의 일화를 안 임금은 대노했다.

련덕신에게 날마다 륭숭한 대우를 해주고있건만 별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것은 물론 고려에서 의술이 두번째라고 하면 섭섭해할 어의들도 신통한 비방을 내놓지 못하고있는데 너무도 늦게야 설경성을 알게 되였으니 대노하지 않을수 없었다.

첨의중찬 김방경을 불러들인 임금은 어찌하여 그 사건이 묻혀버리였는가 그 까닭을 밝히라고 추궁하였다. 김방경으로부터 그게 다 조인규의 작간이라는것을 알게 된 임금은 청렴결백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을 골라 승지로 천거하라는 령을 내리였다.

지금의 임금이 추밀원을 밀직사로 고칠 때 정3품관인 승선도 승지로 그 이름을 달리하게 하였다.

이때라고 홍자번이 정가신을 천거했다.

아쉬운것은 임금이 조인규를 파직시킨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정을 잊을수 없다며 밀직사의 종2품관인 지밀직사사로 승급시켜놓은것이였다.

하여튼 당장은 임금의 측근에서 사사건건 말째게 굴던 조인규를 몰아냈으니 눈에 든 티를 뽑아버린셈이였다.

아마 이제부터는 만사가 쭉쭉 펴일것이였다. 그것은 설경성이 천하명의의 재주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될것은 뻔한 일이니 그 힘을 빌어 조인규의 무리를 얼마든지 몰아낼수 있기때문이였다.

수레가 신효사의 절문앞에서 멈춰섰다.

절문앞에서 이번에 국존(나라에서 으뜸가는 중의 벼슬)으로 임명된 견명대사 일연이 설경성을 맞아들이였다.

로승 일연이 국존으로 임명될수 있은것은 《어록》, 《조정사원》 등 숱한 저서들과 함께 《삼국유사》를 써낸 공을 세운때문이였다. 로승을 따라 금단청의 으리으리한 절당을 에돌아가니 웅장화려한 별궁이 나타났다.

고려의 이름있는 절간들에는 아무때건 임금을 모실수 있는 별궁이 있었다.

별궁의 어느 한 방에 들어선 설경성은 누런 황포를 걸친 사람이 임금임을 알아보았다.

얼른 그앞에 꿇어엎드리며 설경성이 아뢰였다.

《성상페하께 문안드리오이다.》

임금이 설경성을 부축해 일으켰다.

《짐은 그대를 아노라.》

이윽고 룡상에 걸터앉은 임금이 허리를 굽히고 선 설경성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대가 얼굴만을 보고도 병을 알아맞춘다는데 그래 짐의 병은 어떠하오?》

천천히 꿇어앉으며 설경성은 임금의 안색을 살피였다.

좀 길쑴하고 여윈 임금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두눈은 크나 광채가 없었다.

설경성은 임금의 성품이 온화하며 자기의 속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이며 느린 성미임을 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임금이(물론 소문을 통해 짐작은 했었지만) 무엇때문에 신기가 편안치 않은지 그 까닭도 알수 있었다.

지금의 임금은 25대 임금으로서 이름이 왕거이고 황태조의 12대손이다. 고종23년에 태여났으니 설경성이보다 한살우였다.

설경성은 확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도 성상페하께서는 두다리가 무겁고 뻐근하여 맥이 없을것이오이다. 거기에 무릎까지 쑤시니 오래 서있기 힘들것이오이다.

그런 병을 가리켜 각슬(골관절증에 해당되는 병)이라고 하는데 오랜기간 전복을 입으시고 고생을 하여 생긴것이오이다.》

그 말에 임금은 가슴이 쩌르르 저려들었다.

어쩜, 이 사람은 맥도 보지 않고서도 선자리에서 병을 알아맞추는것일가?!

임금은 태자이던 애젊은 시절부터 나라에 대한 근심으로 발편잠을 자본적 없었다.

천하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두꺼비 파리 먹듯 먹어치운 몽골이 쳐들어왔는데 어찌 발편잠에 들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전장에 나가 산 날이 허다했고 그때 다리에 병이 생겼던것이였다.

《각슬과 함께 룡체를 해치는 병은 맥이 지나치게 높뛰는 병이오이다. 맥이 지나치게 높뛰면 다리와 함께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메스꺼우니 그래서 입맛을 잃게 되는것이오이다. 나중에는 중풍을 당할수 있소이다.

그 병에 걸리신것은 록용을 과하게 쓰시였기때문인줄로 아오이다. 록용이 양기를 돋구어주는 특효약이지만 과하면 몸을 해치게 되오이다.

하오나 신에게 비방들이 있사오니 성상페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되오이다.》

그렇지만 임금은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아직은 태자도 어린데 중풍에 걸린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였다.

록용이 독이 되는줄도 모르고 망탕 썼으니…

임금은 몸이 불편한것 같으면 덮어놓고 록용을 써왔던것이다.

《그래 어떤 비방들이 있소?》

설경성이 가문의 비방을 입에 올리였다.

《의서에 이르기를 별다른 까닭이 없이 무릎아래가 시리고 아프면서 무거우면 중풍이 온다고 했소이다. 이때는 뜸이 명약인바 잔등의 절골과 두다리의 족삼리에 뜸을 뜨면 중풍을 몰아낼수 있소이다.

이 비방을 많은 사람들에게 써보았는데 효험이 대단하였소이다. 그외에도 약비방이 있소이다.

각슬은 무릎안쪽과 음교혈에 뜸을 뜨면서 중완에 침을 주면 고칠수 있사온데 이 비방이 바로 명의 리상로가 남긴것이오이다. 약으로는 지백지황환을 쓸수 있소이다.

평주고을의 학래온정이 유명한데 거기서 목욕을 하면 각슬도 고칠수 있고 중풍을 막는데도 효험이 있소이다.》

임금은 대만족이였다.

룡상에서 일어선 임금이 설경성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말했다.

《말만 들어도 병이 천리밖으로 달아난것 같노라. 그대의 보배손이 곁에 있으니 무엇을 근심하리오. 그런데 짐도 짐이려니와 보다 급한 병자가 있으니 그대는 재주를 아끼지 말라.》

임금이 손벽을 치니 병풍뒤에서 아름다운 궁녀가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임금이 그에게 설경성을 가리켰다.

《의원님을 너희 주인에게 모시여라.》

설경성이 궁녀에게 이끌려 병풍을 에돌아가니 다른 방이 나타났다.

그 방에 들어서니 눈이 부시는 홍의를 걸친 녀인이 반갑게 맞아주는것이였다.

궁녀가 왕후라고 귀띔하자 설경성은 얼른 꿇어엎드렸다.

왕후가 설경성의 팔을 잡아일으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대를 기다렸노라.》

며칠전에야 임금을 통해서 설경성이 어떤 사람인가를 안 왕후는 그날부터 그를 만나볼 생각뿐이였었다.

《여기 앉으소.》

두툼한 비단방석우에 설경성을 앉게 한 왕후는 기뻐서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방금 왕후는 병풍뒤에서 (물론 임금의 허락으로)설경성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은터였다.

지금껏 의술이 제노라하는 어의들은 말할것도 없고 천하명의라는 련덕신까지 팔다리처럼 부려왔지만 그들에게서는 설경성이한테서 느껴지는 신비스러운감이 없었다.

즉석에서 상대의 병을 알아내고 그것을 다스릴수 있는 비방을 내놓은 사람은 설경성이뿐이였다.

게다가 금상첨화라더니 더없이 보기드문 미남자가 또한 설경성이다.

용모도 마음에 꼭 들었고 행동거지에서는 진실로 병자를 위해주려는 애틋한 정이 확연하니 이런 사람이라면 내 병도 고쳐주겠구나 하는 믿음이 앞서는 왕후였다.

왕후는 감히 마주보기가 무안하여 고개를 숙이고있는 설경성에게 친근한 정을 담아 말했다.

《의원님은 나를 왕후라 하지 말고 병자로 가없이 여겨주사이다.》

그 말이 설경성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였다.

천천히 눈길을 들어 왕후를 들여다보는 설경성은 기가 막혀 한숨이 나갔다.

왕후의 몸은 손을 쓰기에 때를 놓치였다고 할수 있었다.

녀인에게 있어서 스물네살이면 한창이라 할수 있지만 왕후의 얼굴에는 골병든 병조가 너무도 진했다. 분단장을 했건만 그 병조를 지워버릴수 없었다.

이윽고 맥을 짚어본 설경성은 왕후가 실망해하는 자기의 안색을 볼세라 고개를 숙이였다.

왕후야말로 타고난 약골이였다.

약골은 대개 입이 밭기마련이라 편식을 면할수 없는 법이다.

다년간의 편식이 왕후로 하여금 피와 골수와 진액을 말라들게 하였고 그때문에 오는 병, 가는 병에 쉬임없이 말려들어 병다리가 된것이였다.

《의원님, 숨기지 말고 알려주소이다. 내 몸이 얼마 가지 못한다는게 사실이오이까?》

사실이였다.

단음식을 골라먹은 그때문에 왕후는 소갈이 심했다.

소갈이 심하면 삼초와 5장에 허열이 나고 달고 기름처럼 미끄러운 오줌이 나간다. 그리고 혈액에 당분이 많아서 부스럼이 나는 경우 아물지 못한다.

이때문에 골수와 진액이 날로 감소되여 나중에는 빼빼 말라죽는다.

죽기 전에 눈이 어두워지다가 청맹과니로도 될수 있고 신장에도 병이 들어 고생이 말이 아니다.

왕후는 혈액의 부족으로 랭이 심했다. 그래서 한여름철인데도 두툼한 속옷을 입은것이다.

랭이 심해지면 소갈도 심해지기마련이다.

게다가 왕후는 유종(유선암)까지 앓고있었다.

맥의 소견에는 유종이 지금부터 독을 쓰는것으로 답이 나왔다.

유종을 다스리는 비방은 많아도 깨끗이 고쳐내는 비방은 아직 없었다.

리상로조차도 공예태후(의종의 어머니)의 유종을 고치지 못했는데…

리상로의 특기가 침구술이였으니 그것으로는 유종을 고칠수 없다는 답이 나왔다.

이제야 설경성은 련덕신이 독이 있는 약재로 지은 조양환에다 또 독이 센 석웅황과 경분까지 썼는지 그 까닭이 리해되였다.

오윤부가 무엇때문에 련덕신을 가리켜 성상페하의 자손이 번성할수 없게 잔꾀를 부리는 몹쓸 놈이라고 꾸짖었겠는가.

그것은 독이 센 조양환을 왕후에게 썼기때문이다. 조양환이 유종을 억누르는 좋은 점은 있어도 임신을 억제한다.

그때 《우리 엄마마마를 고쳐주사이다.》하며 설경성에게 매여달리는 아이가 있었다.

임금에게 8살짜리 태자가 있다는것을 아는 설경성은 그 애를 부둥켜안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왕원이고 후날 고려의 26대임금이 될 태자였다.

설경성은 눈물을 머금은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념려마소이다. 왕후마마는 오래오래 사실수 있소이다.》

왕후가 측은해하는 눈길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아이에게는 진실만을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나이까?》

설경성이 번쩍이는 눈길로 왕후를 바라보았다.

《원나라의 의술은 몰라도 우리 고려의술은 제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것을 보여줄것이오이다.》

설경성의 머리에는 왕후의 죽음을 적어도 20년은 지연시킬수 있는 비방들이 가득했다.

우선은 소갈을 악화시키는 조양환의 독기부터 뽑아내야 할것이였다.

모든 약물의 중독을 신통하게 푸는 약은 개경에 흔한 황토였다. 황토를 우려낸 물을 마시면 비상의 독도 씻어낼수 있었다.

그와 함께 아이들 오줌에 재운 황련, 로희, 진사, 흰솔풍령, 진피, 고삼 등을 가루내여 꿀로 반죽해서 맥문동탕으로 먹으면 제아무리 지독한 소갈도 맥을 추지 못할것이다.

골수와 진액을 솟게 하고 피를 힘있게 뛰게 해주는 약재로는 인삼과 마황이 좋다.

그다음 울금, 시호, 두릅뿌리껍질, 당귀, 궁궁이같은 약재들에 옻나무진을 섞어 약을 쓰면 유종의 뿌리를 녹여내지는 못해도 그때문에 명을 재촉하지는 않을것이였다.

설경성은 또 한가지 비방을 생각해냈다.

소갈을 더욱 악화시키는 병으로는 이발과 이몸사이를 곪게 하는 치담이였다.

그러니 치담을 없애는 약도 써야 할것이였다.

품에 안은 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왕후를 바라보는 설경성의 두눈에서는 눈정기가 뿜어나왔다.

그러는 설경성을 바라보며 왕후는 그에 대한 신뢰감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설경성이 임금에게 도움을 청한것은 온정골의 대보옥을 궁중의 숙수로 받아달라는 그 한가지뿐이였다.

대중보는 세상을 떠났어도 대씨가문의 음식비방을 물려받은 대보옥이 남편과 함께 온정골에 살고있었다.

보옥이까지 데려온다면 설경성에게는 말타고 견마를 잡힌 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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