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1)
이번에도 역참의 신세를 지면서 설경성과 그의 일행은 구동을 나선지 수일만에 개경에 당도하였다.
을나를 먼저 집으로 떠나보낸 설경성은 림종과 연종을 뒤에 달고 최유엄의 집으로 향했다.
실은 최유엄이 리승휴의 두 아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던것이였다.
최유엄은 그들을 자기 문하에 두고 학식을 닦게 한 다음 과거에 내보낼 생각이였다.
그들을 최유엄에게 맡기고 집에 들어서니 반갑게 맞아주며 나리가 귀뜀을 하는것이였다.
《헌지어른이 벌써 몇번씩이나 왔댔소이다. 글쎄 우리 문우를 광릉공댁으로 장가를 들이라나요. 그 집에서 문우를 사위로 삼게 된다면 사돈집도 호의호식할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나보오이다.》
설경성의 두눈이 대바람 크게 떠졌다.
《그래서? …》
갑자기 앵돌아진 나리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나야 이 집에서 아이나 낳아기르고 식솔을 돌보아야 하는 심부름군에 불과한데… 주인마음대로 하시오이다.》
그른데가 없는 그 말에 설경성은 가슴이 알찌근하였다.
늦게나마 안해를 자식앞에 내세우리라 마음먹은 설경성이 나직이 말했다.
《저녁에 모여앉아 문우의 일을 상론합세.》
그때 력동이 달려와 인사를 하였다.
《사부님, 먼길에 고생 많았겠소이다. 그런데 려독을 푸실 틈도 드리지 못해 죄송하오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비만(여기서는 지방간에 해당되는 병)에 걸린 녀인을 석달째 손을 대고있는데 도대체 효험이 없으니…》
《병자가 어데 있나?》
《행랑채에 있소이다.》
설경성이 없을 때에도 찾아오는 병자들을 행랑방들에 받아들이고 그의 제자들이 치료를 하고있었다.
《어서 가보세.》
행랑방에 들어선 설경성은 검푸르게 혈색이 죽은 얼굴에 검버섯이 박혀있는 녀인이 누워있는것을 볼수 있었다.
녀인에게서 부어오른 배며 손바닥의 붉은 얼룩점들을 들여다본 설경성은 곧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풀이 죽어있는 력동에게 엄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비방을 썼나?》
《저… 도홍사물탕을 쓰다가 말을 듣지 않기에 화어고를 쓰고… 뜸도 뜨고…》
《처방은 잘못된게 아니구만.》
잠시 오락가락하던 설경성이 력동의 팔을 건드렸다.
《자네 단순한것이 지름길이다는 내 말을 소홀히 한것 같애.》
《?!》
《내 얼마나 말했나? 우리의 의술은 반드시 향약 다시말해서 우리 고려에 흔해서 누구나 쉽게 구할수 있는 약재를 그것도 이웃나라들에서처럼 수십가지를 배합해서 쓰는 복잡한 처방이 아니라 기껏 많아서 여러개로 지은 단순한 처방으로 병을 고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구하기 힘든 다른 나라의 약재를 그것도 십여가지 이상으로 약을 지어쓴다면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질것이네. 그런 비싼 약을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사쓸수 있단 말인가. 우리 조상들은 이미 우리 나라의 약재로 그것도 될수록이면 한두가지 약재로 약을 지어쓰는 비법을 만들어냈거던. 우린 우리 의술의 이런 특기를 잘 살려나가야 하네.》
력동의 고개가 더 깊이 수그러들었다.
련민의 정으로 력동을 바라보며 설경성이 말했다.
《그래서 자네에겐 한가지 약재이면 더 좋고 많아서 두세가지 약재로 지은 약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 비방을 얻어내라는 일감을 특별히 주었던거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옛 비방에나 매여달리고있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게.
내 생각엔 이렇게 해야 할것 같네. 뽕나무뿌리껍질을 주로 놓고 여기에 단너삼, 황금, 찔광이, 황경피를 섞어서 달여먹이면 좋겠네.》
이 처방도 항간에서 얻어낸것이였다.
《그걸 장복하면 복수가 없어질거네. 당장은 복수부터 없애야 하네. 음식비방으로는 미꾸라지를 끓여먹이되 두부는 금하라구. 가끔 염소고기를 붉은 팥을 두고 푹 끓여서 먹이도록 하게.》
그날 저녁 밥상을 물리자 설경성은 안해와 한자리에 앉아 문우를 불러들였다.
설경성은 안해를 존중하여 나리에게 말했다.
《문우의 혼처를 어떻게 락착을 지어야 하겠는지 어머니가 되는 그대가 먼저 의향을 말해보오.》
나리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문우를 바라보았다.
《색시될 사람이야 시부모가 아니라 너와 살아야 하는것만큼 네 결심이 기본이다. 그래 광릉공댁에 장가를 들려느냐?》
광릉공은 문종대왕의 고손자로서 이름은 왕면인데 고종대왕때 세상을 마친 사람이였다.
그는 죽은 후 광릉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후손이 사는 집을 가리켜 광릉공댁이라고 불렀다.
고개를 숙였던 문우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저… 부모님께 자식된 도리를 다하자면 헌지어른의 말대로… 헌지어른이야
설경성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정가신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 옳다. 그가 병을 고칠수 있은것은 내가 대준 비방이 신통해서라기보다 본인이 마음먹고 그 비방을 썼기때문이다. 그런데도 비방이나 대준게 무슨 큰 은혜라고 이런일에까지 발벗고 나서주니…
《광릉공어른은 우리 증조할
문우의 말에 설경성은 또 고개를 끄덕일뿐이다.
광릉공은 설씨네와 좋은 인연이 있었다.
세상을 떠난지 60여년이 되는 광릉공은 설씨네한테서 의술을 배운바있어 설경성의 할아버지와 의형제를 뭇고 병자구제에 좋은 이름을 남기였다. 제 돈으로 약도 지어주고 아무때건 찾아오는 병자들을 다 받아주었다니 어찌 호평을 받지 않을수 있겠는가.
《전 병자구제로 어렵게 살아가는 부모님이 늙마에 남부럼없이 여생을 보낸다면 더 바랄것이 없소이다.》
그 말에 설경성은 대단히 불쾌해하였다.
물론 대단한 부자이고 왕족인 광릉공댁이 사돈이 되면 그 집의 도움으로 호강을 누릴수 있을것이다.
설경성은 감정을 누르고 나리를 바라보았다.
《보다싶이 아들생각은 저렇소. 우리가 저 애 생각을 따라야 하는지? …》
랭랭해진 눈길로 문우를 바라보며 나리가 말했다.
《너는 어이하여 네 할
문우를 바라보는 나리의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설씨가문의 가훈은 가문의 재보인 의술로 겨레를 구제하라는것이다.
그래서 네 할
나리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하지만 넌 아버지의 뜻을 등지고 호강할 꿈만 꾸고있구나. 사람이 호강할 꿈이나 꾼다면 자기를 위해서는 큰일을 쳐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는 아무런 자욱도 남길수 없다.
아, 설씨가문의 유풍이 너희 대에 이르러 끝장이 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무섭구나. 네가 진짜 효자가 되려했다면 옥춘이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넌…》
옥춘은 문우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되는 사람의 딸이였다.
십여년전 나리는 어린 문우를 데리고 선친들의 묘를 찾아 서경에 간적 있었다.
그때가 역적 최탄이 반란을 일으킨 해였다.
역적들이 끌어들인 몽골침략군이 대동강가에 진을 치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려 하는 사람들의 앞길을 막고있었다.
소라골의 뒤산에 있는 선친들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한 나리가 시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밤중에 나루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린 나리와 길손들이 대동강 남쪽의 어느 한 야산을 가까이했는데 로략질을 하던 원나라침략군과 맞다들려 모두가 사로잡히였다.
이젠 죽겠구나 했는데 군교였던 옥춘의 아버지가 거느린 고려군사들이 나타났다.
그는 서경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상부의 령을 받고 야산에 매복하고있었던것이였다.
그 싸움에서 옥춘의 아버지는 나리와 길손들을 구원하고 잘못되였다. 그가 목숨을 잃은 대가로 나리도 문우도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 은혜를 갚고싶은 설경성이 개경에 사는 옥춘이를 찾아내여 문우의 배필로 점찍어놓은것이였다.
《이녀석아, 호강이 탐이 나서 너를 구원해준 은인의 딸을 잊어버리겠단말이냐? 네가 그래 옥춘이를 모른단 말이냐, 엉?》
너무도 안타까와 가슴을 치는 나리앞에 설경성은 눈굽이 축축해졌다.
이렇듯 인정깊고 강직한 녀인이 내 집사람이로구나!
나리를 껴안고싶은 격정을 누른 설경성이 고개를 떨군 문우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들어라, 네 어머니의 마음이자 이 아비의 마음이다. 지금 네 몸값을 론한다면 말이다. 겉보기에도 괜찮고 가문도 괜찮겠다, 네 신수도 그만하면 미끈한데다 국학을 마치고 과거에 나가면 급제도 할수 있겠다, 그래서 너의 몸값이 만냥짜리인줄로 알고 그 집에서 널 사위로 삼자하는게다.
그러나 네 진짜 몸값은 서푼도 안돼. 너같이 호강이나 탐내는자가 벼슬길에 오르면 십팔자식 덕손이처럼 백성의 피와 땀으로 관복을 어지럽힐거란 말이다. 그러니 대대로 정직하게 살아온 설씨가문을 시궁창에 처박을게 아니냐.
그래 어떻게 하겠느냐?》
문우가 너푼 부모앞에 꿇어엎드렸다.
《제가 못된 놈이였소이다.
이튿날 아침, 설경성이 리승휴의 아들들이 보고싶어 집을 나서려 하는데 대문밖에서 《지첨의부사어른의 행차시오! -》하는 소리가 울리였다.
그럼 운지가?! …
급히 대문을 열어제끼니 과연 홍자번이 수레에서 내리고있었다.
《운지!》
《이 친구야!》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는데 헐레벌떡 달려온 홍법사의 승의 학선이 설경성에게 아뢰였다.
《사부님, 변고가 생겼소이다.》
학선을 알아본 설경성이 물었다.
《변고라니?》
얼굴이 땀투성이인 학선이 헐금씨금 숨이 차서 말했다.
《오… 오늘 새벽 절밖에 류… 류랑걸식자 몇사람이 초기를 만나 쓰러져있는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래서 절에 데려다 서둘러 밥을 지어주었더니 그걸 먹고 질려가지고 죽어가고있소이다. 주지스님은 절에서 살인내겠다고 울고… 소승에겐 살려낼 비방이 없으니…》
긴장해서 듣던 설경성이 한숨을 내쉬였다.
진작 그런것들도 배워주었어야 하는건데… 소소한것들을 소홀히 했으니 이럴수밖에…
가문의 의술만으로도 그런것들을 바로잡는것쯤은 식은죽먹기였다.
설경성이 자책감에 입을 열었다.
《내가 설친게 많아서 자네가 고생을 하는군. 이렇게 하라구. 초기를 만난 사람이 갑자기 더운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질려 죽을수 있네. 그때는 댓숟가락의 장을 찬물 한사발에 타서 단번에 먹이라구. 그러면 질렸던게 쭉 풀리네. 그다음 이틀간 차게 식힌 죽을 먹이면 아무 일도 없게 되게. 가만, 류랑걸식자라면 얼굴이 붓고 누렇게 되였겠는데…》
《바로 그렇소이다.》
《이왕이면 얼굴이 부은것도 고쳐주게. 얼굴이 부은데는 붉은나무껍질을 달인 물로 쓴 죽이상이 없네. 그 죽을 하루 두번씩 빈속에 반보시기씩 먹이라구. 자, 이젠 그들을 얼마든지 살려낼수 있으니 어서 가보게.》
학선을 떠나보낸 설경성은 력동이를 불렀다.
《자네가 내대신 학선이한테 가서 도와주게.》
《알겠소이다.》
그때까지 마음이 초조해서 설경성을 지켜보던 홍자번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성상페하께서 자네를 부르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