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10)
리승휴의 몸이 회복기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 설경성은 마을사람들의 병치료에 나섰다.
의원이 없는 마을이다보니 병자가 많았다.
설경성의 손이 가닿기만 하면 신비하게도 낫지 않는 병이 없으니 개경명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짜했다.
이리하여 리승휴의 집마당에는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마당을 방불케 하였다.
그때문에 설경성은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른새벽 리승휴의 집에 뛰여든 늙은이가 있었다. 이웃마을 백부자였다.
그는 설경성의 팔을 부여잡으며 다짜고짜 저의 집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말해야 알지 않소이까?》
설경성이 물어서야 백부자가 울먹이며 대꾸했다.
《손자가 죽어가고있소이다.》
리승휴가 백부자를 가리켰다.
《이 어른이 내가 말하던 그 땅임자일세. 어서 가서 손자애를 살려주게나.》
그제서야 늙은이가 리승휴에게 곰투성이의 묵은 좁쌀을 리자로 꾸어주는 대가로 해마다 햇곡식을 모조리 앗아가는 그 백부자임을 안 설경성은 그자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백부자를 찾아가 시비를 가르려 했는데 마침이였다.
며칠전 설경성은 마을사람들을 통해서 리승휴가 일군 땅이 본래는 백부자의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아냈다.
설경성을 은인으로 여기는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숨기는것이 없었다.
백부자 이놈, 너같은 놈은 천백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나라의 인재를 감히 짓밟다니… 어디 두고보자.
금시 두눈에 피발이 선 설경성이 백부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앞서시우.》
고래등같은 백부자의 기와집에 들어서니 로파와 젊은 녀인이 어푸러질듯 달려나와 설경성의 팔에 매달렸다.
《천금인들 아끼지 않겠사오니 우리 애를 살려주사이다.》
설경성이 팔을 잡아끄는 녀인들을 따라 안방에 들어서니 아래목에 열살쯤 나보이는 사내아이가 누워있었다.
그 애의 곁에 앉아 얼굴을 살펴보니 한쪽눈확에 끔찍한 종기가 나있었다. 부골저였다.
의술이 뛰여난 설경성에게는 그리 힘든 병이 아니였지만 이 고장 의원들에게는 불치의 병이나 다름없었다.
눈확의 부골저는 종창을 다스리는 재간이 좋은 의원들도 어려워하는 병이였다. 백부자가 설경성이 명의라는 소문을 듣고서도 찾아오지 못한것은 리승휴에게 한짓이 있기때문이였다.
그래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의원들을 청해왔지만 그들모두가 고개를 흔들며 가버렸다.
그들의 말이 눈확의 종창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눈이 멀고 그 뿌리를 깨끗이 들어내지 못하면 독기가 뇌수로 뻗쳐 죽음으로 끝난다는것이였다.
하는수없이 백부자는 낯짝을 들지 못하고 설경성을 찾아온것이였다.
설경성은 영영 한눈을 잃게 될뿐아니라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아이를 보느라니 당장 손을 대여 살려주고싶었다.
그러나 백부자때문에 화를 당한 리승휴를 그려보니 아이의 병을 고쳐주기전에 따질건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욕심 사나운 부자들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꼬물만치도 모르는것들이다.
그런자에게 은혜를 끼치고나면 수염을 뻑 내리쓸며 모르쇠를 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그전에 은혜갚음을 다짐받아야 랑패가 없을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설경성은 사색이 되여 자기를 지켜보는 녀인들에게 말했다.
《아이의 병은 얼마든지 고칠수 있으니 념려마시오이다.》
설경성은 얼굴이 환해진 백부자에게 엄한 눈길을 던졌다.
《잠시 의논할게 있으니 조용한 방으로 갔으면 하오.》
설경성이 약차한 치료비를 내라 할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백부자는 묵돈이란들 아낄소냐 하는 생각으로 설경성을 제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선 설경성은 백부자를 노려보았다.
《나와 휴휴선생이 어떤 사이이고 나나 휴휴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소문을 들었다면 모르지 않을거요. 난 남들을 못살게 구는것들은 그가 누구이든 병을 보아주지 않소.
내 알아보았더니 휴휴선생의 밭은 본래 이 집것이 아니였소. 하늘이 무섭지 않으면 그냥 버티여도 좋소. 죄를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면 난 가겠소.》
설경성이 돌아서려는데 털썩 꿇어앉은 백부자가 와락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가지 마오이다. 다 이실직고하겠소이다. 이제 와서 무얼 숨기겠소이까. 락향해온 휴휴선생이 산을 개간하자 고을원이 저를 불러 이르기를 리승휴는 나라에 역적죄를 짓고 쫓겨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가 일군 땅을 내 집의 땅문서에 올려주겠으니 땅구실을 받아가지라고 하였소이다. 물론 땅구실의 절반은 고을원에게 바쳐야 했소이다. 역신이라는데야 관가의 령을 어길수 없어서…》
설경성이 이를 갈았다.
이제는 알만 하다. 그러니 리승휴를 파직시키게 한 강윤소와 조인규가 경산부에까지 줄을 늘여놓고 그를 굶겨죽이려 했구나.
《지은 죄를 알았으면 씻어야 하오. 그래 어떻게 씻겠소?》
《예예, 그 땅을 휴휴어른에게 돌려드리겠소이다. 국법에 나라의 소유지를 개간한 경우 3년간은 땅구실을 받지 않고 4년째부터 소출의 4분의 한몫을 바치게 되여있소이다.
그런데 전 첫해부터 소출의 절반을 받아냈으니 그것도 몽땅 돌려드리겠소이다.》
설경성이 발을 탕 굴렀다.
《내가 바라는건 그 정도가 아니요. 바로 백부자 거기때문에 휴휴선생이 골병에 든것이고 부인마저 잘못된게요. 그 손해를 보상할테요, 아니면 그대가 지은 죄를 조정에 상주하라오?》
백부자의 낯짝이 시꺼멓게 질리였다.
《제발 모르고 한것이니… 지금껏 받아낸 땅구실의 두곱 아니, 세곱으로 갚겠사오니 용서해주사이다.》
《말로는 보상할수 없소.》
그제서야 백부자는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면서 꾸민 문서장을 내밀었다.
땅도 돌려주고 그동안 앗아낸 소작료를 세곱으로 갚겠다는 문서장을 받아쥔 설경성은 안방으로 향했다.
이날 설경성은 능숙한 솜씨로 종창을 손색없이 처치했다.
이래놓으니 백부자네 온 식솔이 코가 땅에 닿아라 절을 하며 설경성을 은인으로 떠받들었다.
봄이 왔다.
리승휴네도 밭에 조씨를 뿌리느라 흥이 났다. 이제는 남의것이 아닌 제 밭에 씨를 뿌리는데 어찌 흥이 나지 않을수 있겠는가.
설경성도 을나도 떨쳐난 덕에 리승휴네 씨붙임은 더욱 흥이 났다.
또 한달이 흘러갔다.
이제는 건강이 회복되여 혈색이 좋아진 리승휴가 아침부터 약을 지으려는 설경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나와 함께 산천구경이나 하세나.》
그 말속에 무슨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한 설경성은 일손을 거두고 리승휴를 따라나섰다.
신록이 한창 짙어가는 아주 좋은 계절이라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아름다왔다.
리승휴는 한뽐이나 자란 조대가 새파랗게 뒤덮은 조밭을 지나 산골짜기로 설경성을 이끌었다.
인차 잎새 무성한 차나무밭이 나타났다. 반마지기쯤 돼보였다.
리승휴가 그 밭을 가리켰다.
《몇해동안 가슴을 조이며 마련한 차나무밭일세.》
그전에 리승휴가 차를 즐겨마시던 생각에 설경성이 웃음지었다.
오죽 차가 그리웠으면 가난한 그속에서도 이런 차밭을 가꾸었겠는가.
《올해부터는 차잎을 딸수 있을거네.》
리승휴의 말에 설경성이 힘있게 대꾸했다.
《이젠 누구도 휴휴선생을 건드리지 못할것이오이다. 그러니 마음놓고 차잎을 따들이시오이다.》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면 홍자번에게 부탁하여 경산부의 관가것들이 리승휴를 다치지 못하게 하리라 마음먹은 설경성의 입에서 시가 흘러나왔다.
남쪽고을 백성들 차잎을 따서
등짐지고 부세로 바쳐야 하는
이따위 몹쓸 법을 없게 해주오
놀라는 눈으로 설경성을 바라보던 리승휴가 탄복을 터치였다.
《백운거사의 시를 뜬금으로 외우는걸 보니 과시 국자감의 우수생이 달라.》
리규보가 손득지라는 사람의 차에 대한 시에 화답하여 지었다는 이 시에는 벼슬아치들이 즐겨마시는 차때문에 고생하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군들을 동정하는 그의 마음이 어려있었다.
관가들에서는 더운 지방 농군들에게 억지로 차나무를 심게 하고 공짜로 앗아감으로써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있었다.
리승휴가 두눈을 슴벅이며 차나무들을 가리켰다.
《사실 차나무밭을 꾸린것은 내가 차를 마시자고 하는것이 아닐세. 차를 팔아 과거공부를 하는 두 자식의 뒤배를 봐주려고 해서일세.》
리승휴는 차나무밭을 지나 그 맞은켠의 뽕나무밭으로 이끌었다.
한창 잎들이 무성해지는 뽕나무밭에 이른 리승휴는 가슴을 쭉 폈다.
《내 예순살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 몇해처럼 심한 된가물은 보질 못했네. 세해전의 가물은 두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할걸세. 봄부터 여름까지 무려 반년간 비가 내리지 않아 얼마나 농군들의 속을 말리웠는가 말일세.》
그 말은 설경성에게도 가슴아프게 들리였다.
정말 그러했다. 오죽 가물이 심했으면 저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비가 올수 있다는 점쟁이들의 허망한 말을 탓하지 않고 나라에서 개경의 저자까지 옮기도록 했겠는가. 그리고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삿갓이나 부채를 사용하지 말라는 령도 내리였었다.
《가물때문에 난 이 뽕나무를 마련한거네. 뽕나무는 왕가물이 들어도 뽕잎을 낼수 있으니 누에를 칠수 있다네.》
《그럼 누에까지 치겠다는것이오이까?》
놀라와하는 설경성에게 리승휴가 히죽 웃어보였다.
《나도 자수성가를 해보자는것일세.》
리승휴는 둥그스름한 뽕잎들을 가리켰다.
《뽕잎은 이렇게 생겨야 좋다더군. 뽕나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것들처럼 뽕잎이 둥글고 두터운 로상이요, 다른것은 잎의 모양새가 들쑹날쑹하고 얇은 형상이라네.
그래서 난 뽕잎이 실한 로상을 얻어다 심었네. 아마 올해부터는 뽕잎풍년이 들거네.》
설경성이 펄쩍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제발 그만두소이다. 누에치기까지 벌려놓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오이다.》
리승휴가 히죽 웃으며 설경성의 어깨를 쳤다.
《그래서 자네를 이곳으로 데려온거네. 사실은 말일세.》
리승휴는 뽕밭아래의 초가집을 가리켰다.
《저 집에 마음이 통하는 과부가 산다네.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고 마음씨도 고운 젊은 녀인일세. 이제는 안사람이 간지도 삼년이 지났으니 모여살자 언약은 했네만 어디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가야지. 이 뽕밭도, 저기 차나무밭도 다 그 녀인과 함께 만든거라네.》
설경성의 두눈이 기쁨으로 타들었다.
《이젠 알만하오이다. 내 그렇지 않아도…》
설경성은 무거운 돌짐을 벗어놓은 심정이였다.
리승휴의 몸이 회복되긴 하였어도 곁에서 돌봐주는 녀인의 손길이 없으면 나무아미타불이 십상이였다.
그래서 맞춤한 녀인을 물색하려 했는데 당사자가 벌써 제살궁리를 해놓았으니 정말 기쁜 일이였다.
《그 일은 내게 맡겨주소이다. 인차 매듭을 짓고말아야지.》
《고맙네.》하더니 리승휴가 능청스러운 눈길로 설경성을 쳐다보았다.
《내 보건데 을나가 자네를 사모하는것 같네. 소실로 삼는게 어떤가?》
설경성이 펄쩍 뛰였다.
《날 박유로 만들 생각을 마시오이다.》
그 말에 리승휴가 껄껄 웃었다.
나라적으로 태부경의 벼슬을 하는 박유만큼 녀인들의 미움을 받는 사람은 없을것이였다.
몇해전 박유는 고려는 예로부터 녀인은 많고 사내는 적기때문에 인구를 늘이기 위해서는 관리들이 여러명의 처첩을 두며 평민일지라도 처첩을 두는것을 법으로 눌러놓아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리였다.
그의 소행이 크게 소문이 나서 부녀자들이 절치부심을 하던중 임금을 모시고 길에 나선 박유를 알아본 그들이 빌어먹을 개놈이라고 상욕을 퍼붓는 바람에 개코망신을 당하였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벼슬아치네 집들에서는 녀인들이 홍두깨를 들고 늙은 수개같은 박유의 상주가 법으로 되는 날에는 제 남편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행악을 부리였다.
그에 혼쭐이 난 조정대신들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박유의 상주는 흐지부지되고말았다.
껄껄 웃고난 리승휴가 눈웃음 지었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닐세. 자네가 갈길은 험하지 않나. 늘 집을 나가사는 자네같은 사람에게는 곁에서 돌봐주는 녀인이 있어야 하네. 중이 제 머리는 깎지 못한다고 명의일지라도 제 몸은 돌보지 못하는 법일세.》
설경성도 사내인것만큼 마음씨도 곱고 의리도 중히 여기는 을나와 같은 녀인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품고있는 감정을 그대로 언행으로 나타낼수는 없었다.
그것은 애오라지 남정네가 가는 길이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무거운 집안일을 도맡아해오는 나리에게 죄를 짓는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그런 말을 입에 담고싶지 않은 설경성은 얼른 화제를 돌리였다.
《어제밤 휴휴선생이 우리 나라의 력사를 담아 시를 짓겠다고 했는데… 그러자면 몸을 아낄줄 알아야 하오이다. 사람들은 흔히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은 헐한줄로 아는데 글짓기보다 진액을 말리우는 일이 없소이다.
뚝심을 써서 하는 일은 밤잠을 자지 않고서도 며칠을 견딜수 있지만 글짓기는 하루도 견디기 어렵소이다. 옛적에 주흥이라는 사람이 하루밤사이에 천자문을 고쳐짓고 온통 머리가 하얗게 세였다질 않소이까. 그러니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자휴자양하시오이다.》
《자휴자양이라… 스스로 쉴줄도 알고 스스로 몸의 기운을 돋굴줄 알라는 자네 말을 새겨듣겠네.》
하늘을 쳐다보던 설경성이 혀를 찼다.
《벌써 정오올시다.》
며칠후 설경성의 주선하에 리승휴는 재취를 하였다.
온 구동이 경사가 났다며 잔치상을 받은 리승휴를 축하해주었다.
이렇게 리승휴를 구제한 설경성은 며칠후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
설경성이 개경으로 돌아오고있을 때 지첨의부사 홍자번은 연경궁에서 단독으로 임금을 만나고있었다.
오늘 홍자번은 이 자리에 자기의 뜻을 펼치느냐 마느냐 하는 운명을 걸고 나섰다.
지금 조정에서는 두 세력이 권력을 다투고있었다.
홍자번의 세력은 자존자대의 유풍을 이어 그 어떤 나라와도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강윤소네는 큰 나라와 맞서는것은 심중해야 한다면서 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강윤소네는 원나라와는 굴욕스럽다고 해도 허리를 굽혀야 두번다시 이 땅에 전란을 가져오지 않을것이라고 내놓고 떠드는판이였다.
홍자번은 강윤소의 배속을 들여다본듯 그의 속심을 모르지 않았다.
고려의 내정에 코코에 참여하려드는 원나라조정을 등에 업고 조정을 장악함으로써 저희들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자는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강윤소네는 큰 나라에 순종하는 길이자 망국의 길임을 알려고도 안했고 오로지 탐욕을 한껏 채우는것이 생의 전부이라 여기였다.
임금도 조정에서 이 두 세력이 권력다툼을 하고있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애젊어서부터 전장에 출전하느라고 지친 임금은 심상치 않은 병에 걸린 다음부터는 그전과 달리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빼앗긴 강토를 둘러싸고 원나라와의 갈등이 격화될 때에조차 땅을 돌려달라는 국서를 강윤소에게 주어 후비라이에게 보내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럴 때면 홍자번은 너무도 안타까와 땅을 치며 울고싶었다.
선왕때처럼 큰 나라에 굴복하려드는 신하들을 가차없이 쫓아내고 드센 반격을 들이댄다면 얼마나 좋을가. 강포한 몽골침략군과도 수십년이나 싸워 끝끝내 이긴 우리 고려인데 대군으로 답새긴다면 백두산까지의 강토야 어찌 되찾지 못하겠는가.
홍자번에 이런 의향을 여러 기회때마다 조심히 내비치였건만 임금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강윤소네가 득세하여 망국의 길로 끌고갈수 있다는 위구심으로 요즘 발편잠에 들지 못하는 홍자번은 설경성을 임금앞에 내세우는 일을 더는 미룰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설경성을 임금의 곁에 들어앉히면 얼마든지 강윤소네를 누르고 조정정사를 뜻대로 펼칠수 있을것이였다.
그래서 성상페하의 신상과 관련하여 알현하겠다는 청을 올려 오늘 이렇게 단독으로 임금을 만난 홍자번이였다.
룡상에 걸터앉은 임금이 일어서라는 손짓을 거듭해서야 꿇어엎드렸던 홍자번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짐의 신상과 관련된 일이 있다는데 그게 무엇인고?》
단숨에 찾아온 사연을 아뢰이고싶은 조급중에 홍자번은 도리여 말을 떠듬거렸다.
《페하, 천하에 그… 그 어떤 병도 능히 고칠수 있는 뛰… 뛰여난 명의가 있소이다.》
놀란 임금이 룡상에서 일어섰다.
《그런 명의가 어디에?》
《바로 우리 고려에 있소이다.》
임금은 더욱 놀라와하였다.
《그게 누군고?》
《이름은 설경성이라고 하온데 소신과 국자감을 함께 다녔소이다. 그의 조상은 홍유후 설총이온데 대대로 의술을 해오는 선친들에게서 의술을 배우고 또 온 나라를 찾아다니며 기이한 재주를 익히더니 마침내 으뜸가는 명의가 되였소이다.》
《홍유후의 후손이란 말이지.》하고 곱씹으며 방안을 거닐던 임금이 물었다.
《설경성의 의술이 련덕신에 비기면 어떠한가?》
천천히 거니는 임금을 바라보며 광명사의 별궁에서 설경성과 련덕신이 의술을 겨루던 일을 아뢰이고난 홍자번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련덕신이 설경성의 제자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을 하였다니 과연 알만 하지 않소이까?》
임금은 선뜻 믿기 어려운지 고개를 기웃거리며 홍자번을 바라보았다.
《련덕신은 그렇다치고 민방과는 어떻다고 보는가?》
민방에게서도 치료를 받아본 임금은 그의 의술이 련덕신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민방이 한창 명의라는 이름을 날릴 때 설경성의 재주가 그보다 못했던것은 사실이오이다. 허나 설경성은 자기의 의술이 똑 제일이라며 자고자대했던 민방과 달리 어깨를 낮추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서까지 배우기를 좋아했소이다. 하찮은 사람의 말도 귀담아들으면 만사의 리치를 깨친다는데 그 덕에 설경성은 의술의 큰 봉우리에 올라선것이오이다. 그러니 어찌 민방이따위에게 비길수 있겠소이까.》
임금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지 의문어린 눈길로 홍자번을 바라보았다.
《설경성이 편작이나 화타만이야 하겠나?》
홍자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페하, 신은 편작이나 화타의 의술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페하께서 설경성을 불러들인다면 틀림없이 크게 덕을 볼것임은 믿어의심치 않소이다. 약돌을 버렸으니 내가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옛말이 있사온데 설경성이야말로 그 약돌이라고 할수 있소이다.》
홍자번의 절절한 말에 반신반의하던 임금이 웃음을 지었다.
《그대가 어찌 빈말을 할텐가. 짐이 꼭 설경성을 만나보겠네.》
그제서야 홍자번은 크게 한숨을 내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