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5)
이때 개경에서 설경성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지첨의부사 홍자번이였다.
이날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때문에 울적한 기분으로 황성안의 첨의부에 출근했던 홍자번은 해가 기울기 전에 관청을 나섰다.
주로 황태조의 후손들과 고관대작들이 사는 북부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홍자번은 별식을 차린 저녁상이였지만 무거운 기분으로 몇술 뜨고는 상을 내가도록 하였다.
너렁청한 방에 홀로 남은 홍자번은 기세좋게 타오르는 초불을 바라보며 이를 사려물었다.
내 한생을 태묘와 사직을 위해서 저 초불처럼 살자 했건만… 왜 이다지도 앞을 막아나서는자들이 많은가. 조인규, 그놈이 그렇게까지 세력이 커질줄이야…
그놈때문에 나의 뜻이 물거품이 되는것은 아닌가?!
홍자번이 세운 뜻은 강감찬이나 윤관과 같이 뛰여난 지략과 용맹으로 천하에 고려의 국력을 떨치지는 못해도 황태조로부터 여러 임금들을 섬기며 국사에 관한 스물여덟가지 의견을 상주하여 바른 정사에 기여한 최승로나 역적들의 음모를 제때에 적발하여 사직을 지켜낸 소태보와 같은 조정의 기둥이 되는것이였다.
그를 위해 벼슬길에 나선지 30년 가까이를 어느 하루도 발편잠을 자보지 못한 홍자번이였다.
그러했기에 오늘은 첨의부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우는 종2품의 지첩의부사로까지 천거된것이다.
여기까지 온 길은 결코 평탄하고 헐한 길이 아니였다. 실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할수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까지도 후회되는 일은 9년전 김구와의 대결이였다.
그때 김구는 종2품의 참지정사로서 과거시험을 주관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구로 말하면 뛰여난 학자로서 선대임금들의 실록을 편찬한 공신이고 국사에 도움되는 일을 많이 한 로재상이였다.
추밀원의 승선이던 홍자번은 어보(임금의 도장)를 가지고 과거장에 나갔다.
나라법에 시험관이 어보를 받아야 과거를 진행할수 있었다.
어보를 가지고 시험장에 당도한 홍자번은 김구가 뜨락으로 내려와 자기를 맞이하지 않는것이 대단히 불쾌했다.
그래서 시험관에게 뜨락으로 내려서라고 요구했다.
했더니 김구는 재상으로서 벼슬이 아래인 사람을 상좌에서 내려가 맞이할수 없다고 그를 꾸짖었다.
그제서야 홍자번은 이 자리에서 물러선다면 조정의 웃음거리가 될수 있으며 출로는 오직 하나 재상을 굴복시키는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강심을 먹은 홍자번은 어보를 가진 사람에게는 설사 시중일지라도 내려와 맞이하는것이 도리라고 완강히 버팀으로써 끝내는 김구를 굴복시키고야말았다.
이 일로 하여 그때는 기뻤고 또 사람들로부터 홍자번이 장차 조정의 기둥이 될만 하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얼마후에는 자기가 너무했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정에 기강을 세우고 쇄신하려면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서로 위해주어야 하는건데 청렴한 김구에게 욕을 보였으니 탐관들을 좋아하게 만든것이였다.
김구를 그려보던 홍자번은 사죄의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앞으로 두번 다시야 그런 일이 있을가.》
인차 홍자번의 눈길이 엄해졌다.
《그러나 조인규, 그자하고만은 손을 잡을수 없어.》
사실 홍자번은 너무 늦게야 새로 득세한 조인규가 무서운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재주없는 탐욕자는 기껏 몇사람을 해칠수 있지만 총명한 탐욕자는 국운을 기울인다는 옛말대로 탐욕스러운 조인규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나라가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를것이였다.
《내가 그놈을 너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거던.》
긴 한숨끝에 홍자번은 주먹을 틀어쥐였다.
이제 와서 홍자번은 조인규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답새기지 않은것이 자기의 가장 큰 실책이였음을 통탄하는것이였다.
《차산(김구의 자)이 친원의 거두인 강윤소를 치자고 했을 때 쳤어야 했는데…》
후회는 이렇게 때늦게 오는 법이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몽골옷인 호복차림에 개체를 하고 나타난자가 강윤소였다.
역관으로서 몽골에 갔던 강윤소가 그 꼴을 하고 나타났을 때 김구가 《저런 놈이 역적이지 별게 역적이냐?》하고 꾸짖으며 그를 정배를 보내자고 했었다.
그러나 홍자번은 김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 부승선이던 홍자번이 발벗고 나섰더라면 강윤소를 정배는 보내지 못했어도 군부사의 판서로는 기여오를수 없게 하였을것이다.
그때 홍자번은 그까짓 역관노릇이나 해먹던 사람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 높이 추서겠느냐 하는 심산이였다.
군부사의 판서를 거쳐 오늘은 밀직사의 부사로까지 출세한 강윤소는 조정의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는 승지의 자리에 조인규를 끌어들였다.
조인규를 우습게 보았던 홍자번은 처음 그에 개의치 않았었다.
당초에 그를 국운까지 기울일수 있는 흉물로 여겼더라면 조인규가 그런 자리에까지는 기여들지 못했을것이였다.
《내가 혼이 나갔댔지. 어쩌자고 그놈들에게 벌을 주지 않았는지…》
밀직부사로 기여오르기 무섭게 본심을 드러낸 강윤소는 닥치는대로 백성들의 땅을 앗아내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땅을 게워놓게 하였을뿐 다른 벌은 주지 않았다.
조인규 역시 부하들을 내몰아 나라의 재물을 략취했건만 무슨 오그랑수를 썼는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하찮게 보았던 조인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데서도 그 수완이 보통이 아니였다.
이태전 최유엄이 백성살이를 돌봐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렸다가 분수에 넘치는 오만한짓이라는 대신들의 지탄을 받고 대청도로 귀양을 갔을 때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소환시킨 사람이 조인규였다.
《조인규 그놈이 참새 얼려잡을 놈이라니까. 그러다 그놈에게 발등을 밟히우게 되는건 아닐가.》
홍자번에게는 조정의 수석으로 될수 있는 길이 얼마전까지는 크게 열려져있었다. 시중이였던 리장용과 쌍벽을 이루고 조정을 이끌던 류경이란 사람도 70고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김방경도 이미 늙어 성쌓고 남은 돌신세가 되였다. 지금 원부라는 늙은이가 첨의중찬 다음가는 첨의찬성사로 있으나 그도 인차 치사를 해야 했다.
결국 머지않아 홍자번이 조정의 실권자가 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나라를 등에 업고 조정의 실권을 독차지하려 꾀하는 조인규가 나타나 앞장을 치려드니 홍자번으로서는 분통이 터질만도 하였다.
흉물스러운 조인규가 조정의 수석자리를 노리고있을거라는 생각에 홍자번은 한탄을 터치였다.
《그놈의 권모술수가 너무나도 변화무쌍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말인가.》
권모술수는 조인규의 타고난 재주라고 할수 있었다.
조인규는 처음 벼슬길에 나섰을 때 청렴한듯 본심을 가리우더니
바로 그것이 말썽거리였다.
원나라라면 덮어놓고 할애비인듯 섬기려드는 강윤소의 물을 먹어서인지 조인규도 그런 면에서 첫손가락에 꼽아주지 않으면 섭섭해할
하기에 그가 벼슬길에 끌어들인자들은 신통히도 조인규처럼 원나라를 섬기려드는 못난 작자들이였다.
조인규의 세력이 득세한다면 조정은 원나라에 속옷까지 벗어주려고하는 친원파가 장악할것이고 그러면 수십년세월 강적과 맞서 싸워이긴 업적이 일시에 무너지고말것이 명백했다.
《아, 정직하고 대바른 설경성이 나를 따라 벼슬길에만 나섰어도 그놈의 세력을 누르는것쯤은 힘든 일이 아니겠는데…》
생각할수록 설경성이 그리워졌다.
이제는 나라에서 당당히 손꼽히우는 명의로 이름난 설경성이 어의로서 임금의 곁에 들어온다면 또 고려의 부국강병을 바라는 그가 뛰여난 실력으로 조정의 기둥이 된다면 조인규같은 탐욕의 무리가 어데라고 날치겠는가.
생각할수록 지금이야말로 설경성을 벼슬길로 이끌어야 하는 적기임을 절감하는 홍자번이였다.
《이번에는 설경성이 그 친구가 내 말을 듣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걸.》하고 부르짖은 홍자번은 그제서야 배속에서 얹혔던것이 쑥 내려가는듯싶었다.
물론 홍자번에게 심복자들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밀직사에서 동지사의 벼슬을 하는 김주정이도 그의 심복으로서 강윤소를 견제해주고있었다. 그러나 김주정은 권모술수를 능사로 하는 조인규의 상대가 못되였다.
오로지 뛰여난 학식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설경성만이 조인규를 견제할수 있을것이였다.
그 친구의 의술이 신선술이라 할수 있으니 성상페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랴. 그렇게 되면 친원것들을 손쉽게 눌러놓을수도 있고 국사도 더 잘해나갈수 있을게다.
그때 《
《들어오너라.》
방문이 열리고 장대한 몸집의 잘생긴 젊은이가 들어섰다. 국학을 마치고 올해에 벼슬길에 나선 홍경이였다.
홍자번은 저를 꼭 닮은 아들을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게 앉거라.》
꿇어앉은 홍경이 근심조로 말했다.
《
이제는 방책을 면밀하게 세운터이라 홍자번은 배심좋게 웃었다.
《걱정말아. 아무렴 탐욕의 무리가 의를 이길상싶으냐. 이제 이 아비가 어떻게 손을 쓰는지나 두고보아라.》
홍자번이 장담하는데는 타산이 있기때문이였다.
그는 이번에 기어코 설경성을 어의로 눌러앉힐 결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