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4)

 

오늘도 설경성은 아침일찍 처소에서 10여리 떨어진 마을에서 사는 숭근이라는 문둥병자를 찾아나섰다.

숭근은 스무살난 총각인데 문둥병때문에 장가는커녕 바깥출입도 못하고있었다.

두달전 처음 찾아왔을 때만 해도 숭근이는 문둥병때문에 얼굴에 깊고 굵은 주름이 많아서 사자의 상판처럼 되고 손가락들이 매발톱처럼 변해서 보기에도 끔찍했지만 대풍자를 쓰는 동시에 남새와 과일을 많이 먹도록 하였더니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다.

얼굴에서 주름살이 걷혀지고보니 잘생긴 총각이였다.

미열도 없어지고 잠도 잘 자고 뼈마디의 아픔도 상당히 덜어지고 밥도 잘 먹으니 하루가 몰라보게 몸이 추서는 숭근이였다.

약꾸레미를 든 설경성이 숭근이네 집에 들어서니 병자와 그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설경성은 숭근이에게 약꾸레미를 들려주며 말했다.

《이건 한달분 약일세.》

그 말에 숭근이 의아한 눈길로 설경성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많아서 사흘간의 약을 주군 하였는데

토방에 걸터앉은 설경성이 숭근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한달만 약을 더 쓰면 그 몹쓸 병이 뚝 떨어질걸세. 이젠 가지고 온 약도 거의다 떨어졌으니 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가보네.》

어제밤 설경성은 앞일을 결정짓느라 자정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각끝에 약도 약이지만 홍자번과 같은 친구들을 움직여서라도 이 고장의 문둥병자들을 나라에서 돌보는 조치를 취하게 해야 한다는 결심을 내리였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일찍 홀로 처소를 나선것이였다.

그동안 손을 대고있는 문둥병자들을 한명도 빠짐없이 돌아보며 하직인사 겸 치료대책을 세워주고싶어서였다.

눈물이 글썽해진 로파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명의어른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게 아니우?》

토방에서 일어선 설경성이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제 꼭 다시 오겠소이다. 그땐 숭근이에게도 의술을 배워주겠소이다.》

숭근이의 집을 나선 설경성은 고개너머의 마을로 향했다.

그 마을에는 서른살이 넘는 로총각의 문둥병자가 있었다.

고개마루에 올라선 설경성의 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이제 만나야 할 로총각은 대풍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문둥병에 걸린지 너무도 오래서 그 어떤 약도 말을 듣지 않는 로총각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진작 손을 썼더라면 죽지 않을 사람인데… 아…》

땅이 꺼지는 한숨이 절로 나갔다.

문둥병자들을 모두 돌아본 설경성이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 을나네 집뜨락에 들어서는데 등뒤에서 웬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 개경의원님이 들지 않았소이까?》

무심해서 듣던 설경성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멀리에 나와있다고 한들 제일 믿는 제자의 목소리까지 잊었겠는가.

설경성은 삽짝문을 박차듯 떠밀며 나섰다.

《의재, 나 여기 있네.》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과연 몸집이 우람한 력동이였다.

《사부님!》

중년나이의 엄장큰 사나이가 그것도 관복차림으로 불쑥 나타나 설경성에게 큰절을 올리자 을나의 식솔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력동이의 손을 잡아일으킨 설경성의 두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자네 집에서는 어떻게들 지내나?》

《의원이 된 맏이녀석을 올봄에 장가를 보냈소이다. 사부님이 계시지 않는데도… 미안하오이다.》

설경성이 력동이의 넓은 등을 두드렸다.

《내 이미 승낙을 한건데 뭘 그러나.》

력동이에게는 스무살난 아들이 있었다. 설경성이 력동이보다 몇달 먼저 장가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첫 자식을 먼저 본 사람은 그가 아니였다. 장가든 이듬해에 아들을 본 력동이와 달리 설경성은 몇해후에야 첫 자식을 안아보았던것이였다.

지난해 설경성이 집을 나설 때 혼사말이 난 그 애를 장가보내라고 일렀던것이다.

《사부님의 집에서도 다 잘있소이다. 문우는 국학에서 수재라고 소문이 났소이다.》

그 말에 설경성은 괴롭던 마음을 바람에 실려보낸듯싶었다.

문우가 뛰여나게 글눈이 좋아서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는 설경성이였다.

《김석이네도 잘있소이다. 지난 가을에는 떡돌같은 아들까지 보았소이다. 그리고 올해 봄에 사부님의 뜻대로 그 사람이 제위보에 들어갔소이다.》

제위보도 혜민국처럼 의술로 백성들을 구제할 사명을 지닌 관청이였다.

《헌데 내가 여기에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나?》

의아해하는 설경성을 바라보며 력동이 웃었다.

《사부님께서 라주에서 탐라로 간다는 글을 혜민국으로 보내지 않았소이까?》

설경성은 대굴포에서 배를 타기 전에 라주의 역참에서 탐라로 간다는 공문을 혜민국앞으로 보냈었다.

최유엄이 임의의 역참에서 역마도 빌려탈수 있고 공문도 부칠수 있는 허가문서를 주었기에 큰 신세를 진것이였다.

《어제 탐라에 들어서는 길로 관가에 찾아가 사부님의 행처를 물었더니 마침 아는 사람이 있어 이 마을을 가르쳐주었소이다.》

을나의 증조부가 력동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먼길을 오셨는데 안으로 들어가시소.》

곁채의 방에서 을나네 온 식솔이 력동을 지켜보았다.

력동은 곧 이들이 자기를 지켜보는 까닭이 짐작되였다.

어데 가나 시골사람들이 알고싶어하는것은 서울소식이 아닌가?!

력동은 가지고온 보짐에서 종이말이를 꺼내들었다.

《사부님, 이건 새로 만든 력서 <수시력>이오이다.》

그 말에 설경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력서때문에 기분이 언짢던 설경성이였다.

나라에 력서를 만드는 태사국이라는 관청이 있으면서도 오래 된 력서를 그냥 쓰게 하다보니 절기가 잘 맞지 않아 누구나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새 력서를 만들어냈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사부님, 이 력서는 태사국의 보배라는 애젊은 강보가 만든것인데 세상에서 으뜸이라고 하오이다.》

력동이 설경성의 손에 력서를 들려주었다.

《관후서판사 오윤부어른이 24절기가 아주 정확한 이 력서를 사부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했소이다.》

력서를 받아든 설경성에게는 강보라는 젊은이가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력서를 만드는 일에는 산학(수학)의 대가들만이 접어들수 있는데 강보가 으뜸가는 수시력을 만들어냈다니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만 하지 않는가.

설경성은 력서를 을나의 증조부 손에 들려주었다.

《이게 농사에 도움을 줄것이오이다.》

그가 너무 좋아 싱글벙글하는데 력동이 설경성에게 말했다.

《이번에 성상페하께서 사부님의 조상이신 홍유후어른에게 봉작을 더해주라는 성지를 내렸다고 하오이다.》

감격해하는 설경성을 지켜보며 을나는 가슴을 조이였다.

그는 갑자기 찾아든 손님때문에 설경성이 더는 여기에 머물러있지 않으리라는것을 직감하였다.

력동이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리였다.

《제가 급히 사부님을 찾아온건…》

설경성은 의아해하는 눈길로 말끝을 맺지 못하는 력동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저… 지금 개경에 역병이 돌고있소이다. 지난해 각지에서 돌던 역병이 옮겨온것인데 조정에서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있소이다.》

설경성은 울컥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그럼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역병으로 겪는 고통을 강건너 불보듯 하겠다는건가?》

그 말이 력동에게는 자기를 꾸짖는 소리로 들려 얼굴을 붉히였다.

얼굴을 붉히는 력동을 본 설경성이 분기를 애써 누르며 나직이 말했다.

《계속하게.》

《떠나올 때 운지어른을 만났는데 그 어른의 말에 의하면 원나라임금이 보냈다는 련덕신이란 의원이 자기를 천하명의라고 하면서 고려의술을 욕되게 하고있다는것이오이다.》

설경성이 두눈을 부릅떴다.

《좀 차근차근 말하라구. 련덕신이 누구인가?》

《련덕신은 멸망한 송나라에서 으뜸가는 명의였다고 하오이다. 그의 명성을 듣고 원나라임금이 자기의 어의로 써주었는데 우리 왕후의 병이 위중하다는것을 알고 지난해 그를 보내주었소이다. 많은 제자들을 달고온 련덕신은 우리 어의들을 무식쟁이라고 비웃어대면서 고려의술은 아이들 놀음같다고 모욕하였소이다.》

그 말에 성이 난 설경성이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아, 안타깝도다.》

《오윤부어른의 말이 련덕신이 만든 조양환이라는 약에 문제가 있다는것이오이다. 그 약을 쓰신 성상페하와 왕후께서 몸이 좀 거뜬해진것같다고 하였는데 오윤부가 알아보니 조양환이 녀인들에게 잉태를 할수 없게 하는 독약이라는것이오이다.》

《대관절 왕후께서 어떻게 앓으신다는건가?》

설경성의 질문에 력동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의들 말은 산후탈이라는데 잘 모르겠소이다.》

력동이 책뚜껑같은것을 꺼내놓았다.

《이건 아무 역참에서나 역마를 우선으로 탈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는 조정의 문서이오이다. 홍자번어른이 이걸 주면서 사부님을 빨리 모셔오라고 했소이다.》

《나를?!…》

《예, 왕후도 그러하지만 성상페하의 병도 심상치 않은것 같다면서 사부님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고 하였소이다. 오윤부어른은 사부님을 데려와야 분수없이 구는 련덕신을 코가 납작하게 눌러놓을수 있다고 했소이다.》

설경성의 입귀가 실룩거렸다.

이거야 어디 참을수 있나. 지금당장은 우리 고려의 의술이 어떠한지 원나라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앞일을 정하고보니 괴로웁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설경성이였다.

그날 저녁 을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집앞의 커다란 귤나무아래로 설경성을 불러내였다.

의아해하는 설경성에게 을나는 직판 들이대였다.

《저도 사부님을 따라가겠소이다.》

《?!…》

《소실로라도 좋으니 데려가주소이다. 죽을 때까지 사부님을 따라다니며 도울 마음을 가진지 벌써 오래되오이다.》

그 말에 설경성이 어이가 없어 껄껄 웃었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꽃나이의 녀인이 나같은 사람에게 정을 주겠다니

난 작은댁들을 여럿이나 거느린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당초에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난 나리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다.

《나로 말하면 인차 두벌자식까지 거느려야 하는 사람일세. 내 나이 마흔다섯이란 말일세.》

《그래도 난 따라가겠소이다. 정 소실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녀의가 되여서라도 사부님을 돕겠단 말이오이다.》

설경성이 무슨 말로 설복시켜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데 을나의 할아버지가 다가와 그의 손을 그러쥐였다.

《내 다 들었네. 우리 손녀는 한번 한다고 하면 물러설줄 모르네. 자네는 큰 사람인데 이 애의 소원 하나 풀어주지 못할가. 데려가주게.》

설경성은 할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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