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3)
이날 설경성은 나리의 집을 나설수 없었다.
어느새 의술이 좋은 의원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서 소라골사람들이 찾아온때문이였다.
의원이 없는 마을이니 그런 소문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은 시간도 있고 나리에게 정이 든 설경성이라 그들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얼른 거처지에 가서 침통이며 부항이며 약을 가져온 설경성은 밤늦게까지 병치료를 하였다.
눈썰미가 빠른 나리까지 시중을 들어주어 힘든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나리에게 정이 쏙쏙 들었다.
녀인이 알뜰하고 깐진가를 알려거든 그가 쓰는 부엌을 보라 했는데 슬쩍 부엌안을 엿보니 정말 나무랄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마뚜껑도 참기름을 바른듯 까만 윤기가 찰찰 돌고 시렁우의 놋그릇들도 방금 닦은듯 번쩍거렸다.
깐진 녀인은 집살림을 추세운다 했으니 그런 유익함도 유익함이지만 온몸에 정을 한껏 담아 따르고 대해주는 나리의 모습에 당장 제사람으로 삼고싶은 욕심이 굴뚝같아졌다.
이런 처녀라면 어찌 눈에 넣고싶지 않겠는가.
이웃나라로 가는 길만 아니라면 나리를 데리고 어머니앞에 나서겠는데…
나리의 집에 묵고있는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김로인이 연줄 찾아오는 마을사람들에게 설경성이 먼길을 가는 길에 잠시 들린것이라며 량해를 구했다.
한숨속에 돌아서는 마을사람들을 보느라니 설경성이로서는 속이 좋지 않았다.
그때 대문으로 성큼 들어서는 관복차림의 벼슬아치가 있었다.
설경성에게 다가온 벼슬아치가 제 목뒤를 가리켜보였다.
《여기에 부스럼이 나서 찾아왔소. 다른 의원들에게 보였더니 불에 달군 화침을 맞아야 한다나?! 난 무서운 화침을 맞지 않고서도 고칠수 있나해서 온거요.》
설경성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구면지기인듯 푸접좋게 접어드는 이런 사람은 보다 처음이였다.
《뉘신데?…》
설경성의 물음에 그는 벌쭉 웃어보였다.
《내 자기 소개를 안했던가? 난 리승휴라는 사람인데 호부시랑 운지와 막역한 사이라네. 운지 그 사람이 이 집에 가면 그대를 만날수 있다 하더군.》
그래서야 설경성은 리승휴의 태도가 리해되였다.
설경성은 나리의 집으로 침통을 가져갈 때 홍자번에게 자기의 행처를 밝혀두었었다.
《친구의 친구는 내 친구라 하는데…》하고 웃으며 설경성은 리승휴의 뒤목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도토리만 한 부스럼이 있었다. 절종(뽀두라지)인데 한창 곪느라 벌겋게 부어있었다.
설경성이 롱조로 말했다.
《예로부터 종처는 뿌리채 뽑아야 고칠수 있다 하였으니 살을 썩뚝 버이여야 하겠소이다.》
오만상을 찡그린 리승휴가 우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다 객사해. 난 살만은 째지 못하겠소.》
설경성은 나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기 어디에 마가 없을가? 생신한 마 한쪼각이면 이 어른의 목을 째지 않아도 되겠는데…》
나리가 방실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마을에 울바자밑에 마를 심은 집이 있나이다. 방에 들어가 기다리시오이다.》
설경성이 리승휴를 이끌고 방에 들어가있은지 얼마 안있어 손가락만한 마를 든 나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를 받아든 설경성은 칼로 엽전두께로 한쪼각 베여냈다.
마쪼각을 종처에 붙인 설경성은 명주천으로 리승휴의 목을 싸매며 말했다.
《이는 우리 집 비방인데 이런 부스럼은 화침을 쓰지 않고서도 고칠수 있소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마를 붙인 자리가 근질거리고 래일쯤은 아픔이 가셔지고 며칠후에는 깨끗이 나을것이오이다.》
설경성은 남은 마를 리승휴의 손에 들려주었다.
《하루에 두세번 마를 바꾸어 붙이소이다.》
리승휴는 뜨아한 눈길로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흔한 이따위가 종기의 명약이라?…》
못미더워하는 리승휴에게 설경성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마는 먹으면 보약이요. 겉에 붙이면 부스럼이나 타박상에 명약이오이다. 타박으로 어혈진 자리에 이걸 붙이면 며칠 지나 어혈이 깨끗이 풀리오이다.》
리승휴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운지의 말이 그대는 다섯살에 천자문을 뗀 신동이고 대대로 명의가문의 자손이라는데 어련하겠소.
난 종처도 고칠겸 그대와 통성을 하고싶어 온거네.
오늘은 나와 함께 이야기나 나누세.
내 나이 올해 마흔인데 도병마사에서 록사를 맡고있네. 그리고 자는 휴휴라고 하네.》
도병마사는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대신들이 모여 국사를 결정짓는 비상설적인 국가최고기구였다.
도병마사에서 록사는 문서를 맡아보는 말직벼슬이였다.
설경성은 리승휴에게 마음이 끌리였다.
준수한 생김에 학식도 여간 아닌것 같은 리승휴가 마흔살인데도 겨우 록사나 한다니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는것 같았다.
설경성은 조심스레 물었다.
《본적지가 어데이오이까?》
설경성과 마음이 통했다는 생각으로 리승휴는 흐뭇해하였다.
홍자번을 통해 설경성이 인재임을 안 리승휴는 진심으로 돕고싶어 찾아온것이였다.
《난 경산부 가리현태생일세. 어려서는 아버지를 잃고 젊었을 때는 과거에 급제를 했네만 도읍으로 옮겨살 밑천이 없어 두타산의 구동에서 십여년간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했네.
어머니를 잃고 도읍에 올라온 나는 국자대사성이던 현보선생을 찾아가 벼슬길에 나설수 있게 도와줄것을 청했네. 내가 과거급제자라는것을 안 현보선생이 내 소원을 풀어주었네.》
설경성은 리승휴의 배경이 이만저만 아님을 알수 있었다.
현보선생이라면 지금 중서시랑평장사인 리장용이다.
조정의 실권자를 업고있으니 리승휴에게는 출세의 대문이 열려있는 셈이였다.
《헌데 국자감까지 나왔다는 자네가 고작 의업을 잡을건 뭔가?》
설경성이 눈길을 떨구었다.
내가 왜 의업을 하는가고? 그걸 어찌 한두마디로 말할수 있단 말인가.
설경성은 어렸을 때 가보로 전해오는 의서들을 즐겨보았을뿐 의원이 되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조상들과 달리 벼슬길에 나가 부국강병에 공헌하는 공신이 되려 했다.
그래서 국자감을 마치면 홍자번과 벼슬길에 나서기로 언약했던것이다.
국자감은 국자학과, 대학과, 사문학과, 률학과, 서학과, 산학과 등 6개의 학과로 되여있었다.
기본학과들인 국자학과와 대학과, 사문학과에는 7품이상의 벼슬을 가진 관리의 자식들만이 입학할수 있다는것이 나라가 정한 법이였다.
대대로 의술을 해오는 가문의 자식이였지만 설경성이 국자감에서도 기본학과인 국자학과에 입학할수 있은것은 홍유후 설총을 조상으로 둔 덕이였다.
기본학과는 9년, 그외의 학과들은 6년간 배울수 있는 국자감에서는 여러 경서를 읽게 하고 글짓기며 수학은 물론 의술도 가르쳐주었다.
벼슬길을 바라서 애써 학식을 닦은 설경성이 마음을 돌려야 했던것은 어머니때문이였다.
설경성은 국자감을 마친 그날 어머니에게서 초달을 받던 그때를 돌이켜보았다.
《래일부터는 오로지 의술을 닦는 일에 전심해야겠다.》하고 어머니가 말했을 때 설경성은 억이 막혀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이때껏 모든 학문을 알아야 한다며 불교의 경전까지 얻어다주던 어머니가 리해되지 않았다.
그때문에 볼멘 소리를 하였다.
《의업은 잡직으로서 천한것이고 의술로는 큰 공을 세울수 없소이다. 제가 닦은 학식이면 과거급제는 물론 벼슬길에서도 막힘이 없으니 얼마든지 가문을 빛내이고 나아가서는 국력을 떨치는데 기여할수 있소이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엄하기 그지없었다.
《난 네 아버지앞에서 널 훌륭한 의원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넌 의술을 하치않게 보는데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의원은 풍랑을 만난 배를 구원하는 사공과 같으니라. 이 말은 네 아버지와 조부님의 말이다.
나라는 많은 사람이 뭉칠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사람을 개개별로 따져보면 병이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병자는 풍랑을 만난 배와도 같다. 풍랑을 만난 배가 아무리 많다 한들 산을 떠실을수가 있느냐? 난 너에게 앞선 의술을 배워도 주고 보다는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기 위해 국자감을 다니게 한거다. 세상을 바로 볼줄 알아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수 있고 명의로도 될수 있다.》
하지만 설경성은 어머니의 말을 따를수 없었다.
외란때문에 단명하신 아버지는 그렇다치고 한생 의업을 놓지 않은 할아버지는 무엇을 남기였던가.
의서를 써내지도, 후세에 명의라는 부름도 남기질 못했다.
《넌 마음만 먹으면 능히 아버지의 뜻을 빛내일수 있다.》
설경성의 귀에는 어머니의 말이 더는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은 하나 벼슬길에서 공신이 될 그뿐이였다.
이때문에 어머니는 여러날이나 속을 썩이였다.
그러나 끝내는 의서 《제중립효방》을 내놓은 김영석이라는 의원의 생을 거들어 아들의 마음을 돌리였다.
김영석은 근 이백년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문하시중(수상격)의 최고관직을 지닌 사람의 아들로 태여난 김영석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열중하였다.
깊은 학식을 가지고 오랜 기간 벼슬길에서 바른 정사를 힘썼기에 그는 시중 다음가는 중서시랑평장사로 되였다.
하지만 그는 퇴임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 좋은 벼슬을 내놓고 집에 들어와 의서를 집필하였다.
《그때 김영석어른이 그냥 벼슬길에 있었더라면 시중이 되였을게다.
그런데도 집에 들어와 왜 의서를 써냈는지 그걸 모르겠느냐?
오랜 세월 벼슬길에서 그 어른이 깨달은것은 부국강병은 바른 정사와 더불어 사람들의 육체가 건전해야 이루어질수 있다는 그것이였다.
사람이 육체에 병이 들면 정신도 허약해져서 제구실을 할수가 없게 된다.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많아가지고서야 어떻게 부국강병을 이룰수 있단 말이냐? 하기에 김영석어른은 젊어서부터 터득한 의술의 비방들을 모아 의서를 내놓았다. 의서를 써낸다는것이 어디 헐한 일이냐. 한생 의술을 생업으로 해온 사람들도 얇은 의서조차 내놓기 힘들어하는데… 하지만 그 어른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하루와 같이 애써 끝내는 의서를 내놓았다. 그 어른이 내놓은 의서는 우리 고려의 풍토와 고려사람의 체질, 우리의 실정에 맞게 썼기때문에 훌륭한것이다.
사람들의 육체가 건전해야 나라도 강해질수 있다는것을 절감했기에 너의 조상들도 의업에 나섰던게다.
너는 할
바로 너의 선친들과 같은 의원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람들이 건강한 육체를 보존할수 있었고 몽골침략군도 쳐부시고 나라를 지켜낼수 있은게다.
공을 이루기도 전에 제 이름부터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큰일을 할수 없다.
난 네가 김영석어른을 돌이켜보면서 스스로 의업에 나서리라 믿는다.
너에겐 훌륭한 의원이 될수 있는 바탕이, 바로 백성을 아끼고 위해주려는 착한 마음이 있다.
난 네가 열다섯살나던 해 전상자들을 도맡아 돌봐준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구나.》
그 말에 설경성의 눈굽이 축축해졌다.
설경성은 열다섯살때 벌써 웬만한 의원만큼 의술을 가지고있었다.
그해 전장에 나가 군공을 세운 전상자들이 마차에 실려왔다.
설경성의 마을에도 그런 전상자가 여러명이나 돌아왔다.
전상자가 늘어나니 의원들의 손길이 미처 따라서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안 설경성은 스스로 이웃마을의 전상자들까지 맡아가지고 날마다 찾아다니며 치료했다.
만일 그때 설경성의 가슴에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스스로 그 일을 맡아하지 못했을것이였다.
《훌륭한 자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하였다. 자식이라면 응당 훌륭한 선친들이 못다한 일을 끝장을 볼 때까지 이어야 하는게다.
옛말에도 훌륭한 뜻은 따를지언정 줴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만에야 설경성은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 생각하였소이다. 선친들의 뒤를 잇겠소이다.》
설경성은 그 사연을 입에 올리였다.
그 말에 리승휴도 눈굽이 축축해졌다.
설경성을 어떻게 해야 지름길로 떠밀가 하고 많은 생각을 해가지고온 리승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거처지로 가세, 내 한턱 내려네.》
리승휴와 함께 설경성이 방을 나서니 뜨락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리가 보꾸레미를 안고있었다.
헤아리는 눈이 밝은 리승휴는 나리와 설경성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엿보았다. 그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먼저 대문을 나섰다.
다들 어데로 갔는지 뜨락에는 설경성과 나리뿐이였다.
《나리!》
설경성의 정찬 소리에 나리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속에 옷이 있사오이다. 뜻을 이루시고… 돌아오소서.》
설경성도 눈물이 글썽하여 나리의 손을 꼭 잡아쥐였다.
《내 어디에 가있든 그대를 잊지 않겠소. 나를 기다려주오.》
설경성은 눈물속에 웃는 나리의 눈빛에서 그가 반드시 자기를 잊지 않으리라는것을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