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15)

 

주점에서 점심을 치른 설경성은 온정골로인의 집을 찾아나섰다.

기인의 이름이 대중보라 하였으니 찾기 어렵지 않을것이였다. 왜냐하면 대씨는 발해왕족의 성씨이기때문이였다. 발해가 무너졌을 때 왕족인 대씨들이 적지 않게 동족의 나라 고려로 살길을 찾아왔고 고려에서는 그들을 백주와 그 주변고을들에서 살도록 하였다.

대중보도 그 후손일것이였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다들 대중보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운두골편자군이 그의 처소를 잘못 대주었다는것이 아닌가.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생각에 길가집 마당에서 낫을 가는 로인에게 물었다.

《로인님께 하나 물으려 하오이다. 이 마을에 대중보라는 어른이 살지 않소이까?》

낫갈기를 멈춘 로인이 설경성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대중보? 아, 그렇지. 장수대가집주인이 대중보라고 했어. 여기선 그 사람의 이름보다 장수대가집주인이라 해야 통하네.》

《장수대가집이라니요?》

《하도 남달리 오래 사는 집이기에 그렇게 부른다네. 그 집 조부님은 아흔다섯해를 사셨고 증조부님도 아흔살을 넘겨 사셨다더군. 그 집어른들처럼 대대로 장수하는 집은 이 아근에 없다네.》

로인이 가리켜보이는 대중보네 집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당에 서있는 기와집이였다.

《로인님, 대중보란분이 벼슬을 하신적 있소이까?》

로인이 낫을 갈며 대답했다.

《벼슬을 하긴 했다는데 잘은 모르겠네.》

설경성은 바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얼굴이 환해졌다.

대중보네가 대대로 장수를 누린다면 그건 다 음식비방의 덕택일것이다.

한다하는 의원들도 장수를 누리지 못하는데…

로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기와집의 대문을 두드렸더니 그안에서 《누구시나이까?》하는 녀인의 챙챙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대문이 열리고 나타난 녀인의 자태에 설경성은 깜짝 놀랐다.

푸른색치마저고리를 차려입고 머리태에 빨간 댕기를 드리운 녀인이 나리였던것이다.

(나리가 이 집에?!…)

밤이면 잠자리에서 어느 하루도 잊은적 없는 나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대문안으로 뛰여든 설경성이 부르짖었다.

《나리, 나요. 헌데 여기에 어떻게 와있소?》

단김을 내뿜으며 기뻐하는 설경성의 앞에서 처녀는 아연실색하였다.

더럭 겁이 난 처녀가 다급히 한걸음 물러섰다.

《나리라니 웬 나리란 말이오이까? 집을 헛갈린게 아니오이까?》

겁에 질린 처녀의 두눈섭사이에서 록두알만 한 검은 기미를 보는 순간 설경성은 후닥닥 물러섰다.

나리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었던것이다

세상에 쌍둥이처럼 생긴 사람도 있다니?!…

그 기미만 아니였다면 나리의 부모조차 몰라보았을것이였다.

인차 설경성은 두손을 모아잡으며 사죄를 하였다.

《정말 안됐소. 집을 헛갈린게 아니라 사람을 헛갈렸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의 태도에 처녀가 생글 웃었다.

《나리라는 녀인이 아마도 약혼녀가 아니오이까. 제 이름은 대보옥이나이다. 그런데?…》

설경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난 도성에 사는 설경성이란 사람인데 의술을 배우러 다니던중 이 집의 어른이 신비한 음식비방들을 가지고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알고싶어 왔소.》

《그분이 저의 아버님이오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버님은 오늘 잔치집에 가셨는데… 이웃마을에 사는 사람이 환갑이온데 잔치상을 차리는걸 보아달라고 해서 가셨나이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설경성이 물었다.

어머님도 함께 가셨소?》

보옥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머님은 계시지 않소이다.》

《계시지 않다니?…》

《제가 어렸을때 몽골놈들한테…》

본의아니게 남의 아픈 마음을 건드린것이 미안하여 설경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래일 다시 오겠소.》

보옥이 얼른 설경성의 앞을 막아섰다.

《타지에서 오셨다면서 갈데가 있겠나이까? 좀 있으면 아버님이 돌아오시겠는데 좀 기다리시오이다.》

보옥의 어글어글한 인정에 마음이 끌린 설경성이 뜨락을 둘러보았다.

뜨락은 방금 비자루질을 한듯 깨끗한데 한켠 울담밑에서 봉선화가 꽃망울을 터치려 하고있었다.

봉선화앞으로 다가간 설경성이 벙끗 웃었다.

《봉선화는 꽃도 곱지만 씨는 좋은 약재지요. 아이들은 물고기가시가 목에 잘 걸리는데 그때 가루낸 봉선화씨를 물에 타서 먹이면 그보다 더 좋은 비방이 없소.》

이 말을 하고난 설경성은 처녀앞에서 아는체를 했다는 후회로 눈길을 떨구었다.

《저… 이 마을에 온정(온천)이 있다던데 효험이 어떻소?》

가지런한 흰이를 드러내며 보옥이 자랑조로 말했다.

《우리 마을 온정을 가리켜 학래온정이라 하오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옛적에 다리부러진 학이 날아와 며칠동안 온정에 부러진 다리를 담그고있었더니 부러졌던 다리가 든든하게 이어져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오이다. 그래서 학래온정이라 한다나보오이다.》

《그럼 학래온정에서 목욕을 하면 부러진 팔다리가 잘 낫겠소?》

《어찌 그뿐인줄 아시오이까. 팔다리가 쑤시는 력절풍(류마치스관절염에 해당되는 병)이나 요퇴통과 같은 통증(신경통)에도 좋고 두드러기도 아주 잘 낫소이다.》

설경성은 기분좋게 벙글 웃었다.

한걸음에 두가지 리득을 본다고 대씨집에 왔다가 음식비방뿐아니라 이 고장 온정의 효험도 알고 갈수 있으니 좀 좋은가.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온정을 병치료에 얼마나 잘 써왔던가.

고구려사람들이 얼마나 온정치료를 즐기였으면 임금들이 국사까지 전페하고 온정에 나가살았다는 일화도 있었겠는가.

설경성은 온정의 쓸모를 일깨워준 보옥이앞에 고개가 숙어졌다.

보옥이 밖을 가리켰다.

《전 풋마늘을 캐러 터밭에 가야 하니 예서 좀 기다려주시오이다.》

《아니, 나도 함께 가게 해주오.》

보옥을 따라가니 집옆에 꽤 큰 터밭이 있었다. 차, 마늘, 고수, 부루, 가지, 아욱은 물론 오이와 참외까지 밭을 뒤덮고있었다.

보옥이 무릎만큼 자란 푸르싱싱한 풋마늘을 한아름이나 캐니 설경성이 의아해졌다.

《한번에 그렇게 많이 뽑아서 어데 쓰자고?!…》

《풋마늘장절임을 하려고 하오이다. 여름철에 입맛을 돋구는데서는 풋마늘장절임이상 없소이다.》

보옥이 한아름이나 되는 풋마늘을 안고 일어서는데 흰 덧저고리에 복두를 쓴 로인이 나타났다.

보옥이 로인에게 눈짓으로 설경성을 가리켰다.

아버님, 이 손님은 도성에 사는 설경성이란 의원이온데 아버님한테서 음식비방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나이다.》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린 설경성은 대중보의 모습에 의문이 생기였다.

스무살난 외동딸이라는 보옥의 아버지치고는 너무 늙지 않았는가.

할아버지와 손녀라고 한다면 좋을것 같았다. 설경성의 눈길에서 그런 심중을 읽은 대중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올봄에 일흔살을 맞는 생일을 쇠였네.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게 어떤가?》

로인을 따라 방에 들어서니 값진 기물보다도 방안이 잘 정돈되여있는것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앉게.》

로인이 방석을 내여주며 말했다.

《이건 좀 다른 말인데… 자네 성상페하께서 이웃나라에 가시여 어떤 일을 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아나?》

방석우에 자리잡은 설경성이 의혹의 눈길로 로인을 바라보았다.

《성상페하께서 돌아오시였다는 소식은 알아도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오이다.》

로인이 힘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 성상페하께서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고 하네. 황제즉위식때 몽골군주가 우리 성상페하를 으뜸가는 국빈으로 대우를 했다네. 그것을 보고 여러 나라 군주들이 고려를 강대국이라며 부러워했다는거네.

그것도 그것이지만 우리 사람들이 몽골조정을 보기 좋게 눌러놨다누만. 사실 몽골이 우리 임금을 초청한것은 황제의 즉위식을 판이 크게 벌리기 위한데도 있었지만 그 못지 않게 바란것은 우리 군사를 빌려쓰려는것이였네.

그래서 몽골승상이 우리 판병부사 리장용어른에게 송나라를 치려 하니 군사를 좀 빌려달라고 간청했다네.

그때 리장용어른은 우리 성상페하께서 불원천리 대도에 온것은 고려의 지경을 범하는 몽골군을 화친의 힘으로 막기 위해서이지 남의 나라를 치는 군사나 빌려주자는것이 아니라고 또 나는 군사수도 모르니 다시는 그런 부탁 말라고 딱 잘라말했다누만.

그만 화가 난 몽골승상이 재상이란 사람이 그런것도 모른다는게 말이 되는가고 했다누만.

바로 이때라고 리장용어른이 몽골승상에게 창문을 가리키며 저기에 문살이 몇개인지 아는가고 물었다네.

몽골승상이 얼굴이 수수떡처럼 되여가지고 대답을 못하니 리장용어른이 한다하는 승상이 제 방의 문살도 몇개인지 모르면서 남의 나라 군사수는 알아 무엇하겠는가고 핀잔했다네. 물론 몽골승상이 뻐꾹소리 한마디 못했고…

몽골조정에서 우리 사람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 주연에서 몽골악공들이 옛 곡조를 탔다누만.

그때 리장용어른이 그 곡조에 맞추어 옛 가사를 읊었더니 몽골사람들 눈들이 화등잔같이 되더라더군. 또 그가 천하의 력사를 쭉 내리푸니 그들이 또 입을 딱 벌리였다네.

그들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지금껏 이렇게 박식한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나. 이 사실을 안 몽골군주 후비라이가 리장용어른을 가리켜 아만멸아리간이라고 했다누만. 그 말인즉 우리 말로 리재상이란 뜻이라고 한다나.

천하를 쥐고 흔드는 황제라고 자처하는 후비라이는 지금껏 다른 나라들은 말할것도 없고 저희 승상한테까지도 재상이라고 공대하는 말을 한적 없다누만. 이로써 몽골사람들은 리장용어른을 가리켜 고려명인이라고 공대를 아끼지 않았다네.

결국 우리는 단 한명의 군사도 빌려주지 않으면서도 몽골이 고려를 넘보지 않고 길이 화친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네.》

설경성은 통쾌한 그 소식에 감탄해하면서도 시골의 대중보가 어떻게 조정의 일에 그리도 환할가 하는 의문을 풀수 없었다.

짙은 눈섭을 꿈틀거리며 중보가 설경성을 바라보았다.

《예로부터 우리 고려에는 인재가 많이 나오기로 소문났네. 지금도 우리 고려에는 리장용어른같은 인물은 얼마든지 있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 그건 아무리 시골사람이라고 해도 자기 나라형편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걸세. 그래야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을 찾아할수 있다네.》

설경성은 대중보에게서 놀라는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이 집 어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가?!

하여간 대중보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것만은 틀림없어보였다.

그걸 느끼니 무거운 중압감에 숨결이 가늘어지고 손에서 땀이 났다.

어느새 저녁해가 떨어져버리고 초불이 밝히는 방에 보옥이 밥상을 안고 들어섰다.

설경성을 밥상으로 이끌며 대중보가 풋마늘무침을 가리켰다.

《밥상앞에서 말이 많은건 실례가 되오만 자네가 음식비방을 알고싶어한다니 어찌 례의만 차리겠나. 이게 이래뵈두 값진 보약 못하지 않는 반찬일세.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병의 하나가 적(암에 해당되는 병)이 아닌가.

그 몹쓸 적이 위에 들면 위적이요, 간에 들면 간적이고 페에 들면 페적이라 하는거네. 일단 적에 걸려 그 독기가 용을 쓰면 천하없는 명의일지라도 병자를 건져내기 바쁘네.

하기에 적이란건 미리 막아내는것이 상책이요, 병든 초기에 약을 쓰는건 하책이라고 할수 있네. 그런데 말일세, 그 누가 적을 미리 막는다며 날마다 약을 달여먹겠냐 말일세. 말도 되지 않을 소리이지.

하지만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하는거네. 바로 이때 적을 막게 하는 이런 마늘무침을 먹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일세.》

대중보가 웃으며 두눈을 끔뻑했다.

《허- 사설질에 국이 식겠다니. 자, 어서 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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