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14)
새해 을축년(1265)의 날과 달도 거침없이 흐르는 속에 진달래꽃이 만산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화창한 봄이 왔다.
반년나마 운두골에서 병치료에 전심해온 설경성은 이제는 마을을 떠날 때가 되였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력동의 집을 뜨지 못하고있은것은 두가지때문에서였다.
첫째로는 제자로 받아들인 력동에게 어느 정도의 병을 고칠수 있는 의술을 배워주어야 했기때문이고 둘째로는 목숨을 구해준 이 집 사람들에게 치료비를 받아 도움을 주고싶었기때문이였다.
그 소망을 다소나마 이루었으니 운두골을 나서도 발걸음이 무겁지 않을것 같았다.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한 설경성은 살구꽃이 한창 꽃망울을 터치는 날 력동을 뒤에 달고 이 마을에서 어디서나 잘 보이는 정자나무를 찾았다.
정자나무아래에 이른 설경성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래일 떠나자고 하네.》
이날을 기다려온 력동이 기뻐서 대꾸했다.
《너무 지체한것 같소이다. 사부님을 따라 도성에 올라가서 의술을 더 잘 배우겠소이다.》
설경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넨 갈수 없네.》
그 말에 력동의 두눈에서 흰자위가 커졌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자넨 내 제자이기때문일세.》
《그건?…》
력동을 바라보는 설경성의 눈빛이 엄해졌다.
《자네도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않나. 자네가 내 제자라면 스승이 하라는대로 해야 하네. 자네도 스무살을 넘긴 총각이 아닌가. 나이든 총각이 훌쩍 집을 떠난다면 그보다 부모에게 더 큰 불효가 없네. 나도 장가를 가겠으니 자네도 가게. 그다음…》
설경성이 서경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넨 확실히 의술에 재간이 있네. 여느 사람같으면 이태나 애써야 알것을 단 반년사이에 깨치였거던. 장가를 드는 동안 병자를 맞아들여 의술을 다지게. 그런 다음 서북면으로 가게.
오늘 우리 나라가 몽골과 화친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그것들이 다시금 전란을 일으킬지 모르네.
그래서 난 무술에도 뛰여난 자네가 서북면을 맡아가지고 그 고장에 묻혀있는 비방들을 거두어들이라는거네.》
력동의 두눈에 눈물이 어려들었다.
《그럼 난 언제 국자감에 가야 하오이까?》
황소같은 체통의 사내가 눈물을 보이니 설경성의 마음도 쓸쓸해졌다.
《이 사람아, 내가 국자감에 다녔다고 해서 자네도 다녀야 한다는 법은 없어. 국자감에서만 의술을 배워주는것도 아닌데… 의술은 각 고을의 향교들에서도 배워주고있네. 그러니 학당에 다녀야만 의술을 배울수 있는건 아닐세. 내 이제 집으로 가서 의과를 치는데 소용되는 의서들을 보내주겠네.》
고려에서는 의술부문의 관청에 등용할 의원을 선발하는 시험제도로서 의과가 있었다.
의과는 의업과 주금업으로 나누어 내과의와 외과의를 각각 선발하였다.
의업에서는 국내외의 내과의서들에서 그리고 주금업에서는 외과의서들에서 시험문제를 냈다.
《내가 보내주는 의서를 통달하면서 의술을 닦으면 자넨 꼭 의과에 나가 급제할수 있네.》
《그럼 언제 사부님을 만날수 있소이까?》
돌아선 설경성의 두눈에도 눈물이 고이였다.
《아직은 딱히 모르겠네만 하여간 머지않아 함께 있게 될걸세. 난 혼자서 먼길을 가지 못할거네. 내 생각엔 한 삼사년이면 자네가 서북면을 다 돌아볼수 있을것 같네. 그럼 이렇게 하세. 삼년후 추석날에 날 찾아오게. 그날은 하늘이 무너진대도 집에서 자넬 기다리겠네.》
설경성이 3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준것은 그동안이면
《그럼 약속했소이다?》
《장부일언중천금이라고 사내가 일구이언하겠나?!》
큰숨을 들이키는 력동에게 설경성이 힘주어 말했다.
《이 사람, 내가 자네의 세운 뜻에 맞는 호를 지어주려고 하는데 어떤가?》
력동의 두눈이 기쁨으로 타들었다.
《고맙소이다.》
《난 자네가 나라에 절실한 의술의 재목이 되길 바라네. 그래서 자네의 호를 의재라고 하자는거네. 어떤가?》
력동이 깊숙이 허리를 굽히였다.
《저의 호에 어려있는 뜻을 뼈에 새기고 사부님을 따르겠소이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식사가 끝나니 력동의 아버지가 설경성에게 베개통만 한 꾸레미를 내놓으며 말했다,
《아들녀석한테서 설의원이 오늘 떠나려 한다는걸 알았네. 큰 새는 창공을 날기마련이라… 아무렴, 설의원이 이만큼 내 집에 머물러준것도 과남한 일일세. 좋은 자식은 세상의 자랑거리라고 설의원의 슬하에서 내 아들이 사람구실을 하게 되였은즉 귀인이면 이런 귀인이 어데 있겠나.
난 력동이녀석에게 이 나라 의술의 기둥이 되라고 의재라는 호를 지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울었네. 정말 하늘이 도와 우리 집에 귀인이 들었지. 끝까지 의재를 바른 길로, 의술의 기둥감으로 키워주게.》
로인이 꾸레미를 펼쳐보였다.
《이안에 곰열과 록용이 있네. 집에 홀어머니뿐이라니 가세가 여의치 못할걸세.
이걸 집살림에 보태쓴다면 내 마음이 한결 가벼울걸세.》
너무도 분에 넘치는것이라 설경성은 얼른 꾸레미를 밀어놓았다.
《제발 이러지 마소이다. 궁벽한 산골살림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걸 받으면 하늘이 노할것이오이다. 전 의술이 있어 가는 곳마다에서 배고픔은 걱정하지 않으니 이러면 안되오이다.》
설경성을 바라보는 로인의 두눈이 엄해졌다.
《이보게 설의원, 늙은이의 진정을 짓밟으면 못쓰네. 난 주고싶네. 그리고 리치로 따져도 이건 설의원의것이란 말일세. 설의원이 아니였다면 내 어찌 범을 잡을수 있었겠나. 이건 범가죽을 판 돈으로 장만한걸세.
이제 몇해후에 내 아들이 찾아가겠는데 오죽이나 신세를 끼치겠나. 그래도 늙은것의 성의를 뿌리친다면 다시는 상종마세.》
로인의 진정에 설경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제 생각이 짧았소이다.》
《암, 짧았고말고.》
로인이 설경성의 무릎우에 보꾸레미를 올려놓았다.
그안에 주먹만 한 곰열 두개와 높이가 한뽐을 넘는 한쌍의 록용이 있었다.
설경성이 숱한 약재를 다루어보았지만 이렇게 옹근 곰열과 록용을 만져보기는 처음이였다. 로인이 곰열을 가리켰다.
《이건 곰열에서도 으뜸으로 일러주는 여름곰열일세. 늦여름부터 가을사이에 잡은 곰의 열을 여름곰열이라고 하는데 껍질이 두텁고 열물이 적은게 흠일세. 껍질을 벗기면 금황색의 마른 열물이 들어있는데 그 맛은 처음에는 쓰고 후에는 달다네.
겨울부터 봄사이에 잡은 곰의 열은 겨울곰열이라고 하네. 겨울곰열은 껍질이 얇고 마른 열물이 많아 좋긴 한데 약효가 여름것보다 썩 못하다네.
겨울곰열은 그속이 검고 여름것보다 쓰고 단맛이 거의 없네.》
곰열을 가져본적 없는 설경성에게는 그 말이 흥미진진하였다.
로인이 록용을 가리켰다.
《이건 한해 묵은걸세. 올해는 아직 록용철이 못되였네. 록용은 늦은 봄부터 이른 여름사이에 수사슴을 잡아야만 얻을수 있네. 그런데 수사슴은 사슴 열마리속에 한마리밖에 없어 그 값이 더 비싼거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로인이 웃방에서 장검을 들고나왔다.
로인이 장검을 설경성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뜻을 품고나선 사내가 먼길을 가려면 이런 병쟁기도 있어야 하네. 이런 칼이 있었더라면 어찌 호환을 당했겠나. 이 칼은 검을 잘 벼리기로 유명한 대장쟁이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왔네.》
칼집에서 장검을 뽑아든 설경성은 희한한 그 모양새에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첫눈에도 보검이라는것이 대뜸 알렸다.
칼날이 서슬푸른것은 말할것도 없고 칼등까지도 방금 숫돌에 문댄듯 흰빛을 번쩍이는데 이런 칼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녹이 잘 쓸지 않는다.
또 칼집에서 꺼낼 때 잘그랑 쇠소리가 또렷한것도 그 질이 여간 굳은 쇠가 아니라는것이 알렸다.
이런 칼은 쇠를 내리쳐도 무디지 않는다.
칼자루에는 범과 란초가 돋을새김되여있었다.
범은 힘과 용맹을, 란초는 우정과 정의를 뜻하는바 보검이 아니고서야 무엇때문에 이런걸 새기려 하겠는가.
《력동이
《설의원의 마음에 든다니 됐네.》
이날 설경성은 마을사람들과 하직하고 운두골을 나섰다.
이제 가야 할 곳은 평주고을의 온정골마을이였다.
온정골로인을 만나면 틀림없이 새로운걸 알게 될것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온정골이 있으니 이런게 복이 아니겠는가.
《어서 가자, 어서!》
이렇게 부르짖으며 길에 나섰지만 생각밖의 일을 당해 한달이 지나서야 온정골에 들어설수 있었다.
온정골의 서산봉 고개마루에 올라선 설경성은 정오까지는 아직 반나절은 실히 있다는 생각에 그늘좋은 소나무아래에 주저앉았다.
머리에 썼던 검은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문지르던 설경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력동이네 마을을 떠나서부터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겪어보니 걸음걸음 소득이 아주 많았다.
의서에도 오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의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수다한 비방들이 민가에 묻혀있었다.
그때문에 걸음이 지체될수밖에 없었다.
이번 걸음에 제일 큰 소득은 서흥고을의 거석골에서 얻어낸 비방이였다.
커다란 룡바위가 있어 거석골이라고 불리우는 그 마을에서 하루밤을 묵자했던것이 스무날이나 지체된것은 찾아들었던 집의 딸이 로채(페결핵)로 고생하고있기때문이였다.
누구나 일단 로채에 걸리면 낫기는커녕 남들에게 그 병을 옮겨놓기가 일쑤이라 병자처녀는 시집을 가기 어려웠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뜸도 뜨고 약도 지어먹이면서 로채를 다스리는 약비방을 처녀의 부모에게 알려주었다.
그게 고맙다며 처녀의 어머니가 가문의 비방이라는 위적(위암에 해당되는 병)이나 간적(간암에 해당되는 병)에 좋다는 약방문을 알려주는데 설경성이 모르던것이였다.
내장을 뽑아낸 닭의 배속에 옻나무가지를 한줌 넣고 푹 고아서 옻나무가지는 버리고 닭곰을 먹되 대여섯마리 해먹으면 위적의 시초쯤은 문제없다는것이다.
옻닭곰이 그리도 효험이 크다면 그 비방도 발이 썩어드는 병을 고치는 비방과 나란히 세울수 있는 명처방이라고 할만 했다. 옻닭곰을 만드는 리치를 따져보니 참으로 신통했다.
옻을 잘 타는 사람은 옻나무의 곁에만 가도 옻이 오른다.
옻이 올랐을 때 닭을 삶아서 삶아낸 물로는 살가죽을 씻어내고 고기는 먹으면 옻이 떨어진다
옻진은 어혈을 삭이고 벌레를 죽이나 그 독이 심해서 반드시 불에 거멓게 닦아 써야 한다.
옻닭곰은 이런 리치로 옻독을 길들였으니 이 얼마나 기발한것인가. 하여튼 그 집에서는 그 비방으로 여러 사람을 살려냈다 하니 앞으로 써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믿음이 가는 비방이였다.
설경성이 기분좋은 생각에 잠겨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의 곁에 와앉으며 투덜댔다.
《에익, 덥다. 무슨 놈의 날이 삼복더위같을가.》
그때문에 생각에서 깨여난 설경성이 눈길을 들어보니 높이 떠오른 해는 한낮을 가리키고있었다.
(벌써?!… 너무 지체했군.)
불청객으로 점심밥을 다 지어놓은 때식에 찾아들어가는것은 실례이니 주점에서 밥을 사먹어야지.
고개길을 내린 설경성은 곧바로 주점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