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12)
강산을 하얗게 눈단장한 그 한가운데로 수십대의 마차들과 그를 호위하는 수백명의 말탄 군사들이 남쪽을 향해 기세좋게 달리고있었다.
대도에서 돌아오는 고려임금의 행차였다.
임금의 크고 화려한 수레의 뒤를 따르는 마차에는 호부시랑 홍자번도 앉아있었다.
눈보라치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진 홍자번의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그리운 고국의 강, 압록강에 가닿을것이다.
대도에 갔던 일은 거의다 고려의 뜻대로 되여 좋은 결실을 안고 고국땅에 들어설수 있으니 즐거워야 하지만 마음이 무거운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홍자번도 국사를 두고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기뻐했다.
《공적인 일이야 더 론해 무엇하랴. 아, 설경성이 이번 길을 택했더라면 더없는 행운이 차례졌겠는데…》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홍자번은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 다셨다.
그 친구 왕고집쟁이라니까. 들어오는 복을 차버렸으니 그 좋은 재간을 썩일수밖에.…
이번 길에 임금은 고뿔로 여간 고생이 아니였다.
어의들이 온갖 지성을 다했지만 별로 효험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후비라이가 자기의 어의들까지 보내주었겠는가.
하지만 그들도 의술이 시원치 않았다.
다른 병이라면 몰라도 고뿔만은 국자감시절에 벌써 솜씨있게 고치는 설경성의 재주를 직접 체험한 홍자번은 임금의 고통이 안타까와 견딜수 없었다.
지금도 홍자번의 귀가에는 국자감시절 설경성이 한 말이 쟁쟁히 들려오는듯싶었다.
그 친구가 뭐라고 말했더라. 찬바람이 불러들인 고뿔은 만병의 시초로서 처방은 많아도 고치기가 헐치 않다고 했지. 그 친구 고뿔에 걸린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즐겨했어. 그리고는 맥이랑 숨소리랑 시시콜콜 따져보고 약을 지어주었는데 병자마다 약이 다 달랐지. 그 약을 먹은 사람들은 며칠후에는 꼭꼭 병을 털어버렸고.…
그 재간으로 성상페하를 돌봐드렸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면 설경성이 성상페하의 총애를 받게 될것이고 난 또 그 친구의 도움으로 나라를 위해 큰일을 더 잘할수 있겠는데… 에익, 고약한 친구.
벼슬길에서 홍자번의 눈에 거슬리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탐욕에 빠져 제살궁리에나 몰두하는자들, 몽골이 큰 나라라고 하여 굴복하려는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자들이 서로의 리해관계를 앞세우면서 서로 싸고돌며 비호하는데 만일 큰 세력을 이른다면 조정이 골병에 들것이였다.
홍자번은 그것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가장 위력한 힘은 임금을 움직이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상페하의 마음만 움직인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할가.》하고 입속으로 뇌이던 홍자번은 창가로 안겨드는 이채로운 설경을 구경하는것도 언짢아 두눈을 감고말았다.
머리속에서는 지혜가 있어도 세력이 없으면 뜻을 이룰수 없다는 옛글이 떠올라 가슴이 활랑거렸다.
《독불
맥없이 중얼거리던 홍자번이 두눈을 치떴다.
아니다. 나라 위한 뜻을 안고 벼슬길에 나선 사내대장부가 뒤걸음을 쳐서야 되겠는가. 내 어떻게 하나 경성이 그 친구를 조정에 끌어들일테다.…
임금의 행차가 압록강을 가까이하고있을 때 설경성은 여전히 운두골에서 병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도 아침일찍 일어나 병자맞을 차비를 갖추고난 설경성은 력동이네 식솔과 한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상을 물리는데 《이 댁이 운두골 사냥군집이 옳지요?》하는 귀에 선 목소리가 돌려왔다.
설경성이 나를 찾아온 병자이겠지 하는 생각에 방문을 여니 두사람이 뜨락에 서있었다. 한사람은 젊은이인데 늙은이는 그에게 의지해 서있었다.
《추운데 어서 들어오소이다.》
방에 들어선 젊은이가 아래목에 앉은 력동의 아버지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린 주인장어른을 찾아왔소이다.》
력동의 아버지가 의아해하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그건 어째서?…》
꿇어앉은 젊은이가 곁에 선 로인을 가리켰다.
《이분은 저의
설경성은 어리둥절해졌다.
사냥군에 불과한 력동의 아버지가 의술을 안다는것도 놀라왔지만 그보다 발이 썩는 병을 고친다니 하루사이에 백로가 학으로 둔갑했다 한들 이보다는 놀랍지 않을것이였다.
사람의 재주로는 아직 그 병을 고치지 못하는것으로 세상이 아는것인데…
로인을 앉게 한 력동의 아버지가 그가 신은 버선을 벗기니 헌데가 나있는 엄지발가락이 부어있었다. 엄지발가락은 검푸르스름하였다.
설경성은 첫눈에 탈저(특발성괴저)임을 알아보았다.
그 발가락을 들여다보던 력동의 아버지가 말했다.
《발병이 난지는 몇달이 되였겠네. 이 정도이면 발이 저리고 쏘아서 잠을 잘수 없을거네. 이대로 놓아두면 인차 엄지발가락이 썩어문드러지고 나중에는 발이 온통 그렇게 되네. 이제라도 바싹 달라붙어 약을 쓰면 고칠수 있으니 너무 상심말게.》
그 말에 나그네들이 기뻐했다면 설경성은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력동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한다하는 의원들도 고치기 어려워하는 그 병을 력동이 아버지가 꽤 고쳐낼가?!
《그럼 손을 써볼가?!》
이윽고 병자가 배를 깔고 눕게 한 력동의 아버지는 그의 잔등에서 기죽마혈을 찾아 뜸을 놓는것이였다. 이어 배의 중완혈과 관원혈 그리고 다리에서는 족삼리혈에 뜸을 놓았다.
설경성은 한모양새의 의문어린 눈길로 지켜볼뿐이였다.
숙련된 솜씨로 뜸을 뜨고난 력동이 아버지가 웃방으로 올라가더니 무슨 꾸레미를 들고 내려와 병자의 아들에게 들려주며 입을 열었다.
《이안에 열흘분의 약이 있네. 하루 두첩 아침과 저녁에 한첩씩 달여 올리게. 헌데 뜸은 매일 떠야 하는데 어데다 거처를 잡으려나?》
병자의 아들이 공손히 여쭈었다.
《이 마을에 저의 가시집과 8촌되는 집이 있소이다.》
《그랬댔군.》
설경성은 그때까지도 방을 나서는 나그네들을 물끄러미 지켜볼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