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장

 

5

 

《야, 이 새끼들아. <월담스포츠맨>이 나가시는데 빨랑빨랑 철문 못 열거야?》

남의 집 담을 넘는다 해서 《월담》이고, 도적질을 하는 행위를 《스포츠》, 거기에 영어의 《맨》(사나이)을 붙여서 남의 집 담을 넘어가 도적질하다가 잡힌 자기를 《월담스포츠맨》이라고 자칭하는것이다. 그 《월담스포츠맨》이 담벽에 붙어있는 2중철문을 발로 탕탕 차며 야료를 부렸다.

《세계적인 쳄피온 <월담스포츠맨>이라도 15척 높이는 뛰여 넘지 못해. 피보기 전에 빨리 철문 열란 말야.》

그의 동료격인 좀도적이 또 큰소리를 쳤다.

《여기 <부러진 칼>도 나가려고 하신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박형사놈 발편잠 다 잤다. 이번엔 <옹근 칼>이 네놈 침실에 뛰여들거니까.》

《부러진 칼》도 은어, 절도를 제멋대로 《切刀》라 쓰고 그것을 또 제멋대로 《부러진 칼》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러니까 《부러진 칼》의 말은 앞으로 옹근 칼 즉 강도가 되여 지난날 자기를 체포한 형사의 침실에 뛰여들어가 복수하겠다는 뜻이였다.

은어도 많고 저주와 원망, 욕설도 많은 감옥이였다. 거기에 갇혀있던 일부 수인들이 출소하는 날, 정문열쇠를 가진 간수가 어째선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만기출소자들이 야료를 부리는것이다.

정문담당 간수가 그들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이것들이 개과천선하는줄 알았더니 더 개차반이 됐네. 콩밥만 공연히 없앴군.》

담당의 말꼬리를 《월담스포츠맨》이 잡고 늘어졌다.

《어랍쇼, 개과천선 좋아하시네. 너희들이나 개과천선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가두지 마!》

《부러진 칼》이 한마디 덧붙였다.

《콩밥값은 후날 으슥한 골목에서 만나면 그때 후히 갚아줄거다.》

주먹맛을 단단히 보여주겠다는 위협이였다. 그러나 출소하는 사람들을 서뿔리 잘못 건드려서는 안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정문담당은 쓰겁게 입맛만 다셨다.

담벽밖에서는 마중 온 가족들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이 웨치는 소리가 담벽을 넘어왔다.

《문 빨리 열어라!》

《뭘 꾸물거리는거야! 시간 되잖았어.》

《우진아, 여기 어머니랑 누나들이 와 있다!》

《호윤씨!》

《김철현학형, 후배들이 기다립니다!》

《순희 아빠, 나 왔어요!》

순희 아빠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부러진 칼》이 헤벌쭉 웃으며 《월담스포츠맨》에게 수군거렸다.

《저기 마누라가 왔네요. 고무신 거꾸로 신은줄 알았더니.》

《내 녀편네는 고무신 거꾸로 신은것 같네.》

《월담스포츠맨》이 오만상을 찌프리며 투덜거렸다.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것은 남편이 수감중에 그의 처가 딴 남자와 붙었다는, 그 역시 형무소 특유의 은어였다.

《그년 어데서 잡기만 하면 가랭일 찢어줄거다!》

이를 갈며 벼르는 《월담스포츠맨》의 눈에선 벌써부터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게 들레며 정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출소자들속에 현석우도 섞여있었다. 10년동안이나 갇혀있은 감옥에서 드디여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것이다. 30대의 10년을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파묻어버리고 만기출소를 하는 그의 마음속엔 가지가지 감회가 차고넘쳤다. 해와 달이 바뀌고 또 바뀌면 모든것이 세월의 강물과 함께 흘러가며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것이라고 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먹고 할일 없는 자들의 얼빠진 수작이다.

하루하루를 굴욕과 원한속에 보낸 사람들의 추억이 어찌 아름다울수 있으랴. 그들의 추억은 곧 묵은 상처인것이다. 현석우도 그 묵은 상처들을 지니고 그날 형무소의 정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안해와의 리별과 피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의 고문과 송청, 재판, 10년징역형, 그 모든것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그의 몸과 넋에 박혀버렸던것이다. 그보다 더 큰 아픔으로 그를 괴롭힌것은 미제의 식민지통치가 의연 계속되고 국토량단의 비극이 가셔지지 않고있는 현실인것이다.

그러나 가지가지 상처의 아픔에 몸부림치기만 하면서 보낸 10년은 아니였다. 리인준과 허진규, 독고상호… 좌절감에 한숨을 쉰 좌익수들은 그들뿐이 아니였다. 현석우는 그들에게 통일애국투쟁이 반드시 최후승리를 달성한다는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바쳤었다.

그들이 한때의 좌절감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억센 투지와 신념을 가다듬는것을 보았을 때 현석우의 가슴속에서도 최후승리에 대한 신심이 더 굳게 다져졌다. 여러해 동안 형무소내 로역장인 인쇄공장에서 일하면서 사귄 대학운동권출신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남조선에서의 민주화투쟁의 최종적지향점은 곧 조국통일이라는 진실을 알려준것도 현석우가 한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통일애국투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기회를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주고 신심을 안겨주었던것이다.

사실은 애당초 아주 중형을 언도받게 되리라고 각오한것이지만 서울에서의 활동내용이 놈들에게 폭로되지 않은데다가 지리산에서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비전투원이라 해서 10년형을 언도받은것은 불행중 다행이였다. 체포되는 날 접선하러 오기로 약속된 김동지가 그후 체포되지 않은것도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그가 바깥세상에서 투쟁대오를 착실히 꾸리고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때면 자기도 하루속히 출소돼 나가서 그 투쟁의 격류속에 뛰여들고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그 길에서 또다시 체포된다 해도 투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을것이다.

드디여 만기출소를 하게 된 그날도 현석우는 그 투지와 신념을 새롭게 가다듬으며 정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인쇄공장에서 함께 고역을 치른 권우진이 그의 옆에 다가서며 말했다. 대학생으로 무슨 리념써클사건에 걸려 3년형을 언도받은 그에게도 현석우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 한 고생이요. 참, 방금 바깥에서 학생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것 같던데.》

《예, 어머니와 누님들이 마중 온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가족들도 와 있겠지요?》

현석우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친정집에 간 안해가 정말 아들을 낳았을가? 그동안 안해가 한번도 면회 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당부한 일이니 탓할 일이 아니였다. 그후 안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있는지? 아이는 누구를 닮았을가? 보고싶었다. 이제 서울에서 아무 직업이나 구해둔 다음에 그들을 만나러 가리다!

《선생님, 만약…》

권우진이 또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는데 열쇠담당이 나타났다.

곧 정문이 열리고 출소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여나갔다. 마중 온 가족,친척들과 친지들이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여보!》

《우진아!》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한데 어울려 부둥켜안고 웃으며 울며 하던 그들이 형무소정문앞의 두부탕집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출소하자마자 두부를 먹어야 액땜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출소하자마자 두부부터 먹는것이 예로부터 형무소주변 풍경의 하나였다.

현석우는 잠시 정문앞에 혼자 서있었다. 아무도 마중 온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쓸쓸한 고독감을 자아냈다. 면회 한번 오지 않았고, 출소날 마중도 오지 않은 안해를 탓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이 서글퍼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두부탕집으로 가던 권우진이 급한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선생님, 저희들과 같이 갑시다.》

현석우는 두부탕집앞에 서있는 로부인을 보았다.

《내 걱정 말구 어서 가보시오. 저기서 어머니가 기다리구 계시는데.》

《어머니도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신겁니다. 만약 당장 어디 가계실데가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갑시다. 누님들은 다 출가하고 어머니와 제가 두칸집을 쓰고있으니 선생님에게 따로 방을 내드릴수 있습니다. 저하구 같이 한방을 쓰셔도 됩니다. 선생님만 불편하시지 않다면 말예요.》

현석우는 그의 호의가 고마왔다. 당장 갈데가 없으니 그를 따라가서 다문 며칠동안만이라도 신세지는수밖에 없지 않을가 싶었다.

《어서 가십시다. 선생님.》

권우진이 거듭 재촉하는데 택시 한대가 그들앞에 와서 멎어섰다. 차안에서 낯익은 사람이 뛰여나왔다.

《선생님, 이거 미안합니다. 차도가 갑자기 막히는 바람에 늦어졌습니다.》

인쇄공장에서 함께 로역수로 고생하다가 1년전에 출소한 지상범이였다. 그는 키가 1m 85㎝라고 했다. 키 큰 사람치고 싱검둥이 아닌 사람이 없다더니 그는 좀 경박하고 말이 헤펐다. 그런 성질이여서 평양방송을 듣고 조심성없이 아무에게나 그 이야기를 옮긴것이 경찰끄나불의 귀에까지 들어가 체포되여 3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심성은 아주 착한 사람이였다. 그가 1년전에 만기출소를 앞두고 현석우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래년에 출소해도 가족이 하나도 없다죠. 걱정 마십시오. 제가 먼저 나가서 자리잡은 다음 선생님 거처를 마련해드릴테니까요.》

바로 그 사람 지상범이 택시까지 끌고 마중 온것이다. 현석우는 여간 반갑지 않았다.

지상범은 권우진과도 구면이여서 그와 인사를 나눈 다음 현석우를 택시에 태웠다.

운전사가 미리 들은 말이 있는듯 택시는 형무소건물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멈춰섰다.

《선생님, 내리십시오. 두부탕 한그릇 잡수셔야죠. 형무소앞에도 두부탕집이 있는걸 압니다만 하필이면 형무소담벽을 바라보면서 두부탕 먹을거 없잖습니까.》

사양하는 운전사까지 데리고 함께 들어가서 두부탕 한그릇씩 먹고 다시 택시를 타고 출발, ××동에서 내렸다.

《여깁니다. 들어갑시다.》

벽돌로 지은 2층집이였다. 복덕방이며 직업소개소, 시계수리, 양복점 등 각종 간판이 아래우층의 문짝마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상범은 《명함인쇄 흥신사》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문을 열고 현석우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감옥에서 배운 그 알량한 기술덕분에 이런걸 차려놓았습니다.》

활판인쇄기와 활자판, 인쇄잉크며 명함용지를 쌓아둔 탁자 그리고 책상 하나에 의자 두개가 놓여있는 방이였다. 형무소의 인쇄공장처럼 인쇄잉크냄새와 석유냄새, 납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쪽벽에 문이 하나 붙어있었다. 지상범이 그 문을 열어보였다.

《여기가 침실입니다.》

현석우는 방안을 기웃해보았다. 아무렇게나 개여놓은 침구며 말코지에 걸려있는 옷가지들이 지상범이가 밤에 이곳에서 혼자 잔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부인과 딸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비좁은대로 네 식구가 살수도 있는 방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석우가 물었다.

《있기야 있지요.》

《살림집은 딴데 있는건가요?》

《그런게아니라 저… 두달전까지 이 방에서 같이 살았는데 지금은 처가 딸들을 데리고 제 친정집신세를 지고있습니다.》

《처가집이 어디 시골에 있습니까?》

《예.》

《서울살림이 어려웠던가 보군요.》

《아직도 <절대적빈곤시대>가 아닙니까. 너나없이 다들 곤궁하게 살지요. 그렇지만 뭐 꼭 살림이 어려워서 처를 친정집에 보낸건 아닙니다.》

지상범의 어조가 다분히 자조적이였다.

《무슨 특별한 곡절이라도 있은겁니까?》

《후에 말씀드리죠.》

가정불화라도 생긴걸가? 현석우는 더 캐여묻기가 거북했다.

《이런 내 정신 보지.》

지상범은 그제서야 무슨 생각이 떠오른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현석우의 팔을 잡았다.

《선생님, 옷을 갈아 입으셔야죠. 어서 들어갑시다.》

현석우를 데리고 침실에 들어간 지상범은 벽장에서 자그마한 트렁크를 집어냈다.

《갈아 입으실 옷이 이 안에 있습니다. 썩 좋은건 못되지만.》

지상범은 현석우가 감옥에서 입고 나온, 꼬깃꼬깃 꾸겨지고 곰팡내가 코를 찌르는 옷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걸 그냥 입고 있을수야 없잖습니까. 제 잠간 나갔다 올거니 어서 갈아 입으세요.》

밖에서 누가 옷을 들여보낸 사람이 없어서 현석우는 무의무탁 출소자들이 다 그러는것처럼 형무소측에서 내준 그 누데기같은 옷을 입은채 출소했던것이다.

지상범이 방에서 나가면서 문을 닫아주었다.

평상복으로 입을수 있는 잠바와 바지, 춘추내의와 그밑에 받쳐입을 속옷 그리고 혁띠와 손수건까지 있었다. 트렁크안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현석우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가슴속의 뜨거운 설레임이 피줄을 타고 손끝에 퍼져온것이 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것인가! 조금 경박하고 입이 헤픈,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겼던 지상범이 그처럼 사려깊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라는것을 알게 된것은 하나의 크나큰 감동이였다.

지상범은 현석우가 옷을 다 갈아입고 벽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거울에 비쳐보고있을 때 술 한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비슷하게 맞네요. 좀 크지 않을가 걱정했는데.》

그는 술병을 그냥 손에 쥔채 현석우의 우아래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 앉으십시오. 바닥이 좀 찹니다.》

지상범은 술병과 마른 안주들을 싼 신문지꾸레미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이 아직 안 좋으시겠지만, 그래두 출소한 날인데 그냥 보낼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가 가끔 혼자서 마시는지 술잔도 있었다.

현석우는 그가 따라주는 첫잔을 천천히 마셨다. 과히 독하지 않은 소주였지만 10년만에 마셔서 그런지 금시 머리가 조금 휭해졌다.

지상범도 한잔 마시고 마른 낙지를 찢어놓았다.

《대낮부터 마셔도 괜찮은겁니까? 손님들이 찾아올수도 있겠는데.》

《출입문을 걸고 오늘은 손님 받지 않는다는 패쪽도 밖에다 걸어놓았습니다.》

지상범은 술이 좀 센것 같았다. 현석우에게 억지로 권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퍼 따라 마셨다.

《길건너편에 순대국집이 있습니다. 점심은 거기 가서 합시다. 혹시 순대 안 좋아하시는거 아닙니까?》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래 식성이 조금도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럼 됐습니다. 처가 있으면 선생님 구미에 맞는 음식을 해드릴수 있겠는데 이렇게 홀아비생활을 하니 식당에 모실수밖에 없습니다.》

현석우는 말이 난김에 부인을 왜 친정집에 보냈느냐고 물어 보고싶었지만 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것으로 될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 인쇄소 언제부터 차려놓은겁니까? 수입은 괜찮습니까?》

《작년 여름에 집 한채가 있는걸 팔아서 이 방을 전세로 얻고 기계랑 샀지요. 수입은 그럭저럭 굶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지상범은 또 자작으로 한잔 따라 마셨다. 현석우는 그냥 맨숭맨숭하게 마주앉아있기가 거북해서 술잔을 입에 가져가서 조금 마셨다.

《안주라도 좀 드십시오.》

명태를 조금 뜯어내여 먹으면서 현석우는 지상범의 얼굴에 자조적인 고소가 스치는것을 보았다. 가족을 처가에 보낼수밖에 없었던 그 어떤 사정을 돌이켜보는것 같았다.

지상범은 다시 한잔 따라 마시고 말문을 열었다.

《래일모레면 40이 되는 나이에 궁상스럽게 홀아비노릇하기가 싫었지만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형사놈들이 시끄럽게 굴어서요.》

《형사놈들이 시끄럽게 굴다니요?》

《제가 원래 주대가 세지 못하고 겁이 좀 많은 사람이라는걸 그것들두 아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얕보구 하는 수작이 뭐 제놈들의 끄나불노릇을 하라나요. 더러워서!》

지상범은 또 술 한잔을 따라 마셨다.

《그렇게 깡술만 마시지 말구 이거 안주두 좀 드십시오.》

이번에는 현석우가 그에게 권했다. 지상범은 그가 집어주는것을 받긴 했으나 입에 가져가지는 않았다.

《명함 찍는 작업장을 차려놨으니 손님들이 자주 찾아올거다, 그 짬에 <빨갱이>들두 나타나서 선을 잇구 지하공작하자구 할거 아니냐, 그것들이 나타나면 제꺽 우리한테 알려라, 하구 구슬리더란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구 뭐구 할것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지두 않을거구 찾아온다구 해도 나두 사람인데 어떻게 개노릇을 하겠느냐 했더니 그것들이 아 글쎄 사람을 개 패듯 하더라니까요.》

지상범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선생님, 이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원래 의지가 박약하구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형사놈들이 그 약점을 아니까 앞으로 계속 개노릇하라구 얼리고 위협할겁니다. 그러니 어떡해야 합니까? 선생님.》

현석우는 난감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시오, 무서워 말고 지조를 지키시오, 그런 말을 해야 지금의 지상범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것이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것이 뭔지 아십니까? 선생님, 세상사람모두가 영웅호걸이 될수야 없지 않습니까. 영웅호걸도 살고 나같이 마음이 약하고 겁이 좀 많은 사람도 살수 있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놈 세상이 남들한테 아무런 해도 끼치려고 안하는 나같은 사람을 마음 편하게 살수 없게 한다 그겁니다. 그게 유감스럽다 그겁니다. 이런 현실이 질색이다 그겁니다!》

지상범은 또 술병을 집었다.

현석우가 말렸다.

《그만 마시십시오.》

지상범이 순순히 술병을 놓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취해가지구 주정이나 하려구 한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제가 사람이 좀 부실하구 의지도 박약한건 사실이구 그래서 자신이 없습니다.》

《뭐가 자신이 없다는겁니까?》

《그놈들의 회유와 강압을 끝까지 뿌리칠수 있겠는지 그게 자신이 없구 그래서 겁두 납니다.》

《겁난다는건 또 뭡니까?》

《개노릇을 하게 될가봐 겁나는겁니다.》

《설마 그렇게야…》

《아닙니다. 나처럼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 지경으로 굴러 떨어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놈의 서울에서 몸을 피하려구 합니다.》

《현실도피를 하겠다는 말 같은데…》

《아무렇게나 말씀해두 좋습니다만 제발 말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말리기엔 때가 늦기도 했습니다.》

현석우는 후후 한숨이 나갔다.

이 세상에 영웅호걸만 살라는 법이 없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지상범이처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까지 편히 살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할것이다.

《도대체 어데로 갈 작정입니까?》

《처자가 가있는 그곳에 갈겁니다. 이미 그럴 작정으루 처자를 미리 그리로 보낸겁니다. 처가살이를 하는것이 좀 창피하고 고생스럽기야 하겠지만 서울에서 그놈들의 시달림을 받기보다야 낫겠지요. 량심을 더럽히며 살수 없다 그겁니다.》

아니다, 그것은 참된 량심이 아니다. 부정에 대한 항거와 인간적존엄을 지키려는 억센 투지와 신념에 기초한것이라야만 참된 량심으로 되는것이다.

《지선생, 내 말 좀 들으시오.》

《미안하지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건지 알만 합니다. 겁낼것 없다, 신심 가지면 된다, 그런 말씀이겠죠. 그건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살 재목이 못됩니다. 사람마다 제 푼수에 맞게 살아야지요.》

지상범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성급히 말했다.

《제가 아까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리기엔 때가 늦었다구요. 이미 결심이 섰지만 여태 안 떠나고있은것은 이 명함인쇄소때문입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이걸 넘겨받지 않겠습니까?》

《그건 또 어떻게 하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전에 프린트업을 하셨다는건 알구 있습니다. 지금은 등사하는 때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앞으로 투쟁을 계속하시든 안하시든 어쨌든 생업이야 있어야 될거 아닙니까. 형무소인쇄공장에서 익히신 기술도 있으니 명함인쇄작업쯤은 식은죽 먹기일겁니다.

제발 넘겨받아 주십시오. 이것만 선생님한테 넘겨주면 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서울에서 떠날수 있습니다.》

현석우는 가슴에 뜨거운것이 안겨들었다. 지상범이 제 입으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명함인쇄소를 굳이 넘겨주겠다는것은 앞으로 통일애국투쟁을 계속할 동지를 지원하는 뜻에서 그러는것임에 틀림 없었다. 《현실도피》를 하면서도 그러한 지원을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현석우의 가슴속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명함인쇄소를 넘겨받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현실도피》의 길로 떠나가는것을 방임해두어서는 안된다고 현석우는 생각했다.

그에게 신심과 투지를 안겨주고싶었다.

그의 불안한 예감과 거기에서 나온 공포심도 따지고 보면 파쑈폭압통치때문이 아닌가. 그 파쑈통치가 결코 만능의 힘이 아니며 영원히 지속되는것도 아니라는것을 깨우쳐주자. 적들의 끄나불이 되지 않겠다는 그 결심도 반항의 한 형태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의지가 박약하고 겁도 많은 약자로 비하시키지만 그는 결코 약자가 아니다.

《지선생, 너무 그렇게 외곬으로 생각하지 말구요, 우리 저녁에 다시 의논해봅시다.》

지상범은 현석우를 빤히 쳐다보다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거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두 좀 마셨는데 쉬십시오. 난 목욕이나 하구 오겠습 니다.》

《그러시죠. 목욕탕은 찾기 쉽습니다. 길건너편 순대국집 옆골목으로 들어가면 간판이 보입니다.》

방에 지상범을 혼자 남겨두고 밖에 나온 현석우는 곧장 목욕탕에 갔다.

감옥살이 10년을 모조리 씻어버린다는 기분으로 오래동안 씻고 또 씻고 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온 다음 곧바로 지상범에게 갈가 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잠이 든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잠 푹 자고나면 생각을 돌릴수도 있지 않는가. 현석우는 천천히 거리를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곳 ××동은 전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였다.

길 좌우에 벽돌건물이 줄지어 서있었다. 건물마다에 각양각색의 간판들이 걸려있는데 적지 않은것들은 영어와 일어로 쓴것들이였다.

이젠 세시간쯤 지났겠지, 하고 짐작될 때 명함인쇄소로 갔다. 그런데 문에 자물쇠가 채워있었다. 그동안 지상범이도 자지 않고있다가 어디로 외출했나 하고 생각하며 잠시 문앞에서 그를 기다리고있는데 같은 건물에 들어있는 시계방에서 웬 중년남자가 나와 그에게 말을 붙였다.

《현석우씨인가요?》

《예.》

《이거…》

시계방주인이 열쇠를 내밀며 말했다.

《아까 지상범씨가 맡기고 간겁니다. 현씨가 오시면 드리라구 하데요.》

《언제쯤 나간겁니까?》

《한시간쯤전에요. 조그마한 트렁크를 들고가시데요. 주문받은 명함을 손님한테 갖다주려고 간거겠지요.》

현석우도 그래서 외출한것이려니 짐작하고 쇠를 열고 들어갔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것이 있었다. 방안의 물건들이 없어졌거나 위치를 바꿔놓은것이 없는데도 그 어떤 변화가 생겼다고 느껴지는것이였다.

지상범이와 마주앉아 술을 마신 그 침실문을 열어보았다. 술병도 안주감도 깨끗이 치워졌는데 그 자리에 종이가 한장 놓여있 었다.

얼른 들어가 집어보았다.

《선생님, 저는 갑니다. 용서하십시오.》

쪽지에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명함을 제작해주지 못한 미결건이 하나도 없으니 래일부터 새로 찾아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 제작해주면 된다, 이 작업장 전세를 물고 받은 령수증과 선생님이 영업수입을 올릴 때까지 식사비와 용돈으로 쓸 돈은 말코지에 걸어둔 작업복주머니에 있다, 작업장에 있는 인쇄잉크와 명함용지는 당분간 쓸수 있을거다 하는 말도 적혀있었다.

《…그럼 선생님,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전 언제나 선생님을 잊지 않을것입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고 하시는 일에서 좋은 결실 얻으시기를 축원하면서 이만 붓을 놓습니다.》

그 마지막구절까지 본 현석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상범의 《현실도피》행각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절로 머리가 숙어진것이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