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장

 

3

 

안해가 들은 그 12시 고동소리를 현석우도 청계천기슭의 《평화프린트》에서 들었다.

그는 작업대앞에서 천천히 일어나 환기창에 창가림을 쳐놓았다. 그것은 이제 곧 오게 될 김동지에게 알리는 위험신호였다.

김동지는 12시 10분에 나타날 예정이였다. 그러나 그전에 근처에 와서 시간을 보내면서 환기창에 위험신호가 있는가 없는가를 반드시 확인할것이다. 그래서 미리 창가림을 쳐둔것이였다. 그것은 바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는것이 싫어서 그렇게 한것 같기도 해서 지극히 자연스러운것이였다. 조성철 그놈이 근처에 와 있다 해도 그 창가림을 별로 의심하지 않을것이라고 현석우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였다. 조성철이가 결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였고 더우기 그의 밀고를 받고 아침부터 현석우의 작업장을 예리하게 감시하고있던 형사들은 그러루한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있는 놈들이였다.

현석우가 창가림을 쳐놓고 작업대앞에 앉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고 첫눈에 형사들이라는것이 대뜸 알리는 두놈이 뛰여들어왔다. 그중 한놈이 들어서는 걸음으로 환기창에 가서 창가림을 제껴놓았다.

《신호지?》

빼빼 마른 키꺽다리였다.

밭은 이마밑에서 뱁새눈이 깜박거리는 다른 한놈은 권총을 뽑아들고 출입문옆에 딱 붙어섰다. 밖에서 들어오는 접선자를 때려잡을 잡도리였다.

키꺽다리는 현석우의 등뒤에 와서 섰다.

《까딱 움직이지 말고 앉아있어!》

현석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였다. 침착해야 한다, 당황해서 덤비면 안된다고 스스로 자신에게 당부했다. 자기가 체포되는것은 이젠 면할수 없게 됐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김동지를 이놈들의 손에 걸리지 않게 해야 했다. 창가림 위험신호가 파탄된 상황에서 무슨 방법으로 그에게 이 위기를 알릴것인가?

번개치듯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한가지 방도가 있었다. 좋았어, 현석우는 시치미를 떼고 놈들이 눈치채지 않게 손목시계를 보았다. 2분, 3분, 4분, 5분… 유리에 긁힌 자리가 많은 《세이꼬》중고품이지만 시간은 잘 맞는 시계였다. 6분, 7분, 다시 1분이 지나 분침이 8분을 가리킬 때 뒤의 키꺽다리가 어쩔사이도 없이 벌떡 일어선 현석우는 작업대우에서 등사잉크통을 집어가지고 환기창으로 힘껏 던졌다. 챙그랑! 환기창유리가 깨지는 순간 키꺽다리의 주먹이 현석우의 관자노리에 날아들었다.

《강도다! 강도다!》

현석우는 목청껏 웨쳤다.

키꺽다리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현석우는 그 손을 뿌리치며 계속 웨쳤다.

《강도다! 강도!》

문옆에 지키고 서있던 뱁새눈도 달려들었다.

현석우는 두놈을 치고 차고 하면서 계속 소란을 피웠다. 그러다가 이젠 10분이 됐다고 짐작됐을 때 반항을 중지하고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두놈의 구두발이 그를 사정없이 차고 짓밟고 했다.

유리가 깨진 환기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현석우는 그들중에 김동지는 없다고 확신했다.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듣고 이미 피신했을것이다.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도 몸집도 옆으로 퍼진 땅딸보가 들어섰다.

《뭣들 하는거야!》

땅딸보의 호통에 키꺽다리와 뱁새눈이 매질을 중지했다.

《왜 소란 피운거야? 접선하러 온 놈이 벌써 삼십륙계 줄행랑을 쳤을거다.》

《이놈이 갑자기 환기창유리를 깨며 고함을 쳐서…》

《닥쳐!》

땅딸보가 키꺽다리의 말허리를 잘라버리고 꾸짖었다.

《그게 바로 위험신호였어. 그걸 왜 막지 못한거야?》

《이놈이 먼저.》

《닥쳐!》

《죄송합니다. 반장님.》

반장이라고 불리운 땅딸보는

《끌어갓!》

하고 키꺽다리에게 분부한 다음 뱁새눈에겐 딴 임무를 주었다.

《여기서 지키고있어. 한사람 더 붙여줄거니까 딴 놈 오면 놓치지 마!》

현석우는 포승에 묶여서 끌려나갔다.

그로부터 약 두시간후 현석우는 중부경찰서 지하실에서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지독한 고문에 까무러쳤다가 깨여난것이였다.

키꺽다리가 그의 얼굴에 바께쯔의 물을 통채로 쏟아부었다.

《5분간 여유를 준다. 누가 접선하러 올 예정이였는가? 다음 접선시간과 장소, 그놈의 주소, 성명, 그걸 대면 살려줄거구 똥고집으로 계속 모르쇠 부리면 이번엔 영영 깨나지 못하게 할거다!》

정확히 5분후에 다시 고문이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매타작으로 까무러치게 하더니 이번에는 물고문이였다. 고문용탁자우에 반듯하게 눕혀놓은 다음 머리를 탁자밖으로 나가게 하고 온몸을 까딱 움직이지 못하도록 바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지하실에 새로 들어온 놈이 얼굴에 축축히 젖은 수건을 씌우고 그우에다 주전자물을 부었다. 고추가루를 탄 매운 물이였다. 물이 입과 코구멍에 마구 쓸어들어갔다. 물을 피하기 위해서 얼굴을 내돌리려 해도 키꺽다리가 머리카락을 꽉 잡고 전혀 내흔들지 못하게 했다. 숨이 떡떡 막혔다. 다른 한놈은 구두를 벗기고 고무호스로 발바닥을 때리며 셈을 셌다. 하나, 둘, 셋… 고추가루물이 가슴속까지 스며드는것 같았다. 발바닥의 아픔이 머리속까지 치밀어올랐다.

《댈거냐?》

《죽여버릴테다!》

놈들의 고함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이윽고 그나마 들리지 않았다.

《고문왕국》으로 소문난 《한국》경찰의 고문방법이 참으로 다양하고 혹독했다. 비녀꽂기, 관절꺾기, 전기고문, 통닭구이, 비행기태우기… 그것은 인간의 육체와 넋을 갈가리 찢고 불태우는 극악무도한 가혹행위였고, 사람으로 하여금 너무너무 고통스러워 인간적인 체면과 자존심을 잃고 그저 한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치게 하는 광란적인 란타의 련속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으로 하여금 비인간으로 되기를 강요하는 야수들의 가혹행위이기때문에 혁명가들은 결사의 각오로 그에 항거하는것이다. 그 대가로 까무러치고 팔다리가 꺾이고 심지어 고문치사로 죽는다 해도 그 항거 즉 자백거부자세를 허물수 없었다. 자백은 곧 인간적인 존엄과 신념을 상실한 짐승으로 되는 길이기때문이였다.

현석우는 최악의 경우까지도 각오하면서 자백하지 않고 버티여나갔다. 고문의 강도가 높아지고 그 회수가 거듭될수록 점차 감각능력이 상실되고 사고력도 감퇴되였지만 절대로, 절대로 짐승이 돼서는 안된다는 의식 하나만은 잃지 않았다. 지금의 조건에서는 가혹한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비밀을 고수하는것이 곧 인간 현석우의 존엄과 전 생애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였다.

놈들도 점차 지쳐버리는것 같았다. 현석우가 실신상태에서 깨여나자마자 곧 덤벼들군 하던 놈들이 잠시 여유를 두군 했다. 현석우에게 주는 여유가 아니라 저들이 잠시 쉬는것이였다. 현석우가 깨여난것을 미처 모르고 그냥 쉬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또 한차례 죽음의 문턱앞에까지 갔다가 현실로 돌아온 현석우가 이젠 눈을 뜰 기운도 없어서 그냥 눈을 감은채 쓰러져있는데 놈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보통 악질이 아니구먼.》

《그러게 말야.》

《조성철이가 혹시 잘못 본게 아닐가?》

《그 새끼 뒈지지 않았으면 저놈하구 대면시켜보는건데.》

《그러게 말야. 바보같은 녀석이 하필 미군찦차에 깔려 죽을건 뭐람.》

《술 취한 장교가 몰고 가던 차였다면서.》

개처럼 차에 치여 뒈졌군, 현석우는 그냥 눈을 감고 쓰러져 있으면서 고소를 머금었다.

《아니 저 새끼 깨난거 아냐?》

《그럼 또 시작해봐야지.》

이때 땅딸보반장이 고문실에 들어왔다.

《아직도 버티고있는거야?》

《예.》
《수정 풀어주고 의자에 앉혀.》

《예?》

《시키는대로 해!》

키꺽다리가 현석우에게서 수정을 벗기고 그를 심문용책상앞의 의자에 끌어다 앉혔다.

《너희들은 나가봐.》

부하형사들이 나가자 땅딸보반장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현석우와 마주앉았다.

《우리 사람들이 너무 심하게 다룬것 같은데 안됐소.》

제법 점잖고 유순한 말투였다.

《한대 피우겠소?》

현석우는 그가 권하는 담배를 거절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무 고집부리지 마시오. 당신이 끝까지 부인하면 우리도 누가 당신한테 접선하러 올 예정이였다는걸 증명할 방법이 없소. 그렇지만 당신이 지리산빨찌산출신이라는것만은 확실하다고 믿는거요. 당신을 체포하기 전부터 현석우라는 사람이 지리산에서 대내신문제작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딴 정보선을 통해서도 입수했다 이거요. 조성철의 공로는 서울에 침투한 당신의 거처를 알아낸거요.》

땅딸보반장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에게 아무런 현행범죄가 없다 해도, 사실은 뭐가 있긴 하겠지만 당신이 끝까지 그것을 부인하면 말이요. 지리산빨찌산에서 활동한 그 죄만 가지고도 사형수 아니면 무기수로 만들수 있다 이거요.》

그것은 현석우가 이미 각오한것이였다. 그런데 땅딸보반장이 그런 이야기를 제법 친절한 어조로 장황하게 하는 저의를 알수 없었다.

나도 실은 6.25전에 지하조직에서 뛰던 사람이요. 48년에 체포돼서 지금의 당신처럼 고문깨나 받았지. 그때 그걸 견디여 낼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죽을 고생하면서 내가 지켜야 할 <빨갱이>사상이란것이 과연 내 생명보다 더 귀중한것인가 하는 회의가 생겨서 결국 전향하고 경찰계에 투신했던거요.》

현석우는 지리산에서 헤여진 강창근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우리와 맞선 적들보다 우리 대렬내에서 생기는 변절자들을 더 경계해야 하오. 전쟁전에도 그런 놈들이 경찰, 검찰기관의 요원이 돼서 수많은 우리 동지들을 체포, 학살했소.》

현석우가 ××전선에서 강창근을 만났을 때 그는 인민군대의 정찰병으로 근무하고있었다. 6.28서울해방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길로 곧장 인민군대에 탄원입대, 정찰소대원으로 된것이라고 했다.

이미 6.25전부터 남조선사회제도에 반감을 품어온 현석우는 《국군》의 한 부대에서 취재를 하다가 그 부대가 퇴각할 때 일부러 따라가지 않고 떨어졌다. 그가 머물러있은 마을에 곧 인민군대 정찰병들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에서 발급한 종군기자신분증을 가지고있는 그를 인민군대 정찰병들이 의혹과 적의에 찬 눈초리로 쏘아본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때 강창근이 흥분해서 말했다.

《동무들, 나를 믿는다면 이 기자도 믿어주십시오.》

강창근은 현석우의 중학선배였다.

그후 인민군대편에서 취재활동을 하게 된 현석우가 하루는 그에게 물었다.

《강동무, 그때 무얼 믿고 나를 보증해나선겁니까?》

《난 중학교때부터 동무가 아주 량심적인 학생이라고 보았소. 동무가 8.15후에 좌익을 하지 않았지만 대학때도 그렇고 지방지국기자시절에도 량심을 버리지 않고있다는걸 알았소. 동무가 쓴 기사도 몇편 보았소. 내 생각엔 량심은 곧 애국이고 애국은 곧 우리의 통일위업이요. 그래서 동무를 보증해나섰던거요.》

그 강창근을 지리산에서 만난것은 1952년정초였다. 당시 현석우는 지리산유격대에서 대내기관지제작공작을 하고있었다. 인민군대의 전략적후퇴시기 북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남에 남아서 조국통일위업에 투신하려고 자원입산했던것이다.

전쟁시기 그가 만난 인민군장병들은 새세상, 새 제도에서 육성된 정의롭고 깨끗한 새 인간들이였다. 그리고 인민군대에 의해서 해방된 지역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민주개혁은 그를 또 얼마나 경이적인 환희에 휩싸이게 했던가.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누릴수 있게 해주는 정의의 정치가 어떤것인가를 생동한 현실로 보여준 사변이였다.

사실은 현석우도 전쟁전부터 남조선사회제도에 반감을 품은 지성인으로 제반민주개혁이 실시되고 인민을 위한 정책이 구현되고있는 북의 현실을 동경해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38°선너머북쪽 딴 세상의 일이였다. 자기가 사는 곳이 아니였고 자신이 체험하는 일도 아니였기때문에 그만큼 현실적감각으로 그 사변의 의의를 절실히 느끼지 못했었다. 자기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싶었지만 38°선이 가로막혀 갈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민군대에 의해서 해방된 남조선의 여러 지역에서 실시되는 제반민주개혁은 생동한 현실로써 그를 커다란 감동에 휩싸이게 했다.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이 자기들에게 땅을 주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는것을 볼 때면 지난날 자기 아버지가 일년내내 피땀으로 가꾼 낟알을 지주집에 갖다 바치며 한숨짓던 모습이 절로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도 지금 청주교외의 고향마을에서 땅의 주인이 된 기쁨을 못이겨 그렇게 춤추고있으리라는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고 그러한 새세상을 펼쳐주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격정을 느끼군 했다.

그럴수록 자애로운 은인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고 싶은 념원이 더욱더 간절해졌다. 정녕 뵙고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주제넘는 욕망이라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만이 장군님을 뵈옵는 최상의 영예와 행복을 누릴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장군님을 뵈올수 있는 인간이 되자,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의 길에서 자그마한 공로라도 세우자 하고 현석우는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맹세다지며 대내기관지제작작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 등사잉크와 원지, 종이, 등사기 그 모든것을 자체로 구해야 했고, 행군시에는 그것들을 천막천으로 남들의것보다 두배나 크게 만든 배낭에 넣고 다녀야 했다. 행군과 전투가 련일 계속되는 속에서도 대내신문을 제 날자에 발행하기 위해서 남들이 휴식하는 짬시간에도 작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때로는 한창 로라를 굴리다가 불의에 《비트》까지 기여든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총을 잡기도 했다. 경사가 심한 비탈을 오를 때 발끝을 돌짬에 박고 급한 내리막길에선 발뒤축으로 땅을 꽉 디디며 걷는 요령을 터득한것도 등사기재를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장마철 행군때는 온몸이 다 젖어도 원지며 종이만은 적시지 않았다.

그 간고한 대내기관지제작전투과정에 강창근과의 두번째 상봉이 이루어졌다. 전투단위에서 올라온 통신원고에 강창근중대장의 전투적공로에 대한 내용이 있는것을 보고 그날로 중대에 가서 그를 만났던것이다.

그들은 중대 《비트》앞에 나란히 앉았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구슬처럼 박혀서 반짝거리는 밤이였다. 초생달이 건너편 산릉선우로 솟아오르고있었다. 두사람이 앉아있는 산기슭이 은회색달빛에 훤히 밝아졌다.

《난 현동무가 인민군대를 따라 북으로 간줄 알았소.》

《자원해서 입산한겁니다.》

현석우는 자원입산한 동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신통히도 나와 같은 심정이군요. 잘했습니다. 우리 조국통일을 위해서 힘껏 싸워봅시다. 참, 저걸 보시오.》

강창근이 저 멀리 북녘하늘을 가리켰다. 유난히 큰 별, 북극성이 두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난 밤마다 저 북극성을 보면서 평양생각을 합니다.》

쏴- 바람소리와 함께 눈가루가 날아왔다.

《평양에선 바람이 더 세게 불겁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최고사령부 창문을 두드리는 그 바람소리를 들으시며 우리들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요.》

《몹시 심려하실겁니다.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지리산일대의 기온에 대해서도 자주 문의하시면서…》

《먼곳에 있는 자식들을 더 걱정하시는 친어버이심정 그대로이겠지요.》

《맞습니다. 장군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앞으로 더 잘 싸웁시다. 그래서 승리의 날 평양에 달려가서 장군님을 만나뵙는 행복을 누립시다.》

후일 현석우가 조선로동당에 입당할 때 강창근이 입당보증인의 한사람이 되여주었다.

간고한 적구유격투쟁속에서 세월이 흘러 1953년 봄, 현석우는 통일애국투쟁을 서울에서 계속하기 위해서 지리산을 떠나게 되였다. 그가 산을 내릴 때 강창근이 인솔하는 무장소조가 그를 엄호안내하는 임무를 맡아나섰다. 지리산을 겹겹이 포위한 적 《토벌대》초소가 요소요소에 도사리고있었다.

현석우는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먼저 전라남도 광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출발, 대전교외의 주봉혜를 만난 다음 서울에 가서 정착할 예정이였다.

우선 적 경계초소 세군데를 피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두군데는 무사히 지나쳐버렸다. 세번째는 ××리 초소였다. 그 초소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일행은 잠간 쉬였다. 잡관목이 우거진 산등성이가 저녁노을에 물들여졌다. 이제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지면 산등성이에서 출발, 적 초소를 에돌아갈것이다. 강창근은 현석우가 그 지점을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엄호해주고는 부대로 돌아간다고 했다.

따쿵, 따쿵, 어디서 쏘아대는것인지 총성이 메아리쳐 울려왔다. 산아래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후일 하산하게 될거요.》

강창근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서 다시 만날수 있겠군요.》

《설사 만나지 못하더라도 우린 언제나 한대오에서 싸우게 되는거니까…》

《그야 물론이죠.》

강창근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동무자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적들에게 로출되지 않도록 경각성을 높여야 하오. 특히 변절자놈들을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변절자들이 우리 혁명대오에 얼마나 큰 해독을 끼쳤는가 하는, 현석우가 지금 서울 중부경찰서 고문실에서 상기한 그 말을 했던것이다.…

《서푼짜리도 안되는 그 사상이니 신념이니 하는걸 버리시오. 이건 당신보다 먼저 좌익에서 뛰여본 선배의 충고요.》

현석우는 땅딸보반장이 지껄이는 소리를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강동무, 죄송합니다. 동무의 당부대로 경각성을 높이지 못해 변절자놈의 손에 걸렸습니다.》

그것은 강창근의 넋을 부르며 속삭인 말이였다. 그날 그 산등성이에서 그와 영영 헤여지고말았던것이다.

운명의 그 시각이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그때 현석우가 그에게 물었다.

《뭐 부탁할게 없습니까?》

강창근이 현석우의 손을 잡았다.

《내가 부탁할건 한가지요. 어데 가서도 통일애국투사의 신념을 잃지 말고…》

그가 미처 말끝을 맺기 전에 봉우리쪽을 감시하고있던 대원이 달려왔다.

《중대장동지, 놈들이 내려옵니다.》

강창근이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들며 침착하게 물었다.

《몇놈이나 되오?》

《한개 분대, 아니 두개 분대는 될것 같습니다.》

그 대원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아래쪽에서 또 한대원이 뛰여왔다. 그가 보고하기 전에 강창근이 물었다.

《아래에도 개놈들이 나타났소?》

《예, 한개 소대는 될것 같습니다.》

서쪽하늘에서 마지막 노을빛이 사라져가고있었다. 골안에선 어둠이 연기처럼 꾸역꾸역 우로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내 명령을 들으시오. 적들을 이 릉선에 붙잡아두어야 하오. 적들의 눈과 화력이 우리에게 집중되게 하자는거요. 임무를 알겠소?》

《예!》

두 대원이 동시에 힘차게 대답했다.

《자기 위치로!》

두 대원이 뛰여가자 강창근이 현석우에게 말했다.

《이제 곧 어두워질거요. 그럼 동문 비탈을 타고 골짜기로 내려가오. 그때까지 우리가 적들의 발목을 붙잡고있겠소.》

《강동무!》

《내 말 마저 듣소. 골짜기바닥에 내려가면 오솔길이요. 그 길을 따라 마을까지 채 가기 전에 느티나무가 있소. 거기서 오른쪽 밭두렁을 타시오. 적의 초소가 왼쪽에 있지만 어둠이 동물 도와줄거요. 탐조등을 가끔 비치는데 그것을 조심하오. 마지막 초소니까 거기에 걸리지만 않으면 되오.》

《강동무, 나도 전투에 참가하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동무의 임무를 잊었소?》

강창근이 성난 소리로 웨쳤다.

《알고있습니다.》

《임무를 알고있으면 그걸 집행해야지 여기 남아서 전투하겠다는건 뭐요?》

현석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강창근이 현석우의 어깨를 툭 쳤다.

《됐소. 더 말할 시간이 없소.》

그리고는 현석우를 혼자 남겨두고 릉선 웃쪽으로 달려갔다.

잠시후 그쪽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현석우는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이 그의 몸에 휘감겨들었다.

《투항하라! 네놈들은 독안에 든 쥐새끼꼴이다!》

릉선에서 멱따는듯 한 소리가 울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총소리가 연방 울렸다. 강창근이네가 쏘는 세자루의 총성을 제압하며 수십정의 총이 불을 토하는 소리가 산발에 메아리치며 요란히 울렸다.

그리고는 정적, 세 동지가 벌써 쓰러졌는가?

현석우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귀울였다.

갑자기 하늘땅을 진감시키듯 힘찬 웨침소리가 울렸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다음 순간 세개의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어둠이 깃드는 산발에 우뢰소리처럼 울렸다.

그리고는 또 정적, 어둠이 더 짙어지고, 강창근무장소조의 생존을 알리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발에 하늘의 눈물인양 달빛이 서글프게 비쳐내렸다…

《어때? 내 말 알아먹었소?》

현석우의 고귀한 추억에 더러운 찬물을 끼얹으며 땅딸보반장이 또 지껄였다.

《당신이 아무리 신념이니 지조니 하는걸 지킨다 해도 그걸 누가 알아줄것 같소? 여기서 죽을수 있다는것도 생각해야지. 이미 여기서 숨을 끊은 사람이 한두명뿐인줄 아오? 당신도 여기서 그 신념이니 지조니 하는걸 지키다가 죽는다 해도 그걸 알아줄 사람이 없다 그거요.》

《그래 당신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구 좌익을 하다가 후에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을것 같아서 변절한거요?》

《그야… 맞소. 그렇다구 말할수도 있소. 나두 인간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고생, 개죽음을 하고싶지 않았소. 우선 살고 볼판이지. 살자고 태여난 인생이니까.》

네놈은 애당초 애국자가 아니였고 참된 인간도 아니였다. 때문에 변절해서 개가 되였고 참된 인간들을 잡아먹는 미친개가 된것이다. 참된 애국자란 애당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사는가를 잊을수 없기때문에, 미제의 군화에 짓밟힌 우리 남조선인민들의 굴욕을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기때문에, 국토량단의 비극을 더는 지속시킬수 없기때문에 싸우는 사람들이다. 자기보다 나라와 민족의 리익을 우선시하고 《살고 볼판》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통일위업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싸우는것이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참된 인간의 길이다.

그 통일애국투쟁의 길에서 이미 희생된 전우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지리산의 깊고 깊은 골짜기와 릉선들에서만도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쓰러졌던가.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웨침소리-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그 웨침소리를 못 잊어 오늘도 그 골짜기와 릉선에서 바람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있지 않는가.

적의 흉탄이 직방 심장에 뚫고 들어왔기때문에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고귀한 유언으로 될 그 《만세》도 한번 크게 부르지 못하고 생을 마친 투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웠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를 그 누가 모르랴.

그 모든 사람들을 잊을수 없기때문에, 잊어서는 안되기때문에 싸우는것이 나의 의무이며 영예인것이다.

나의 이러한 뜻을 이 추악한 변절자, 땅딸보반장이 어이 알랴.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이따위 개에겐 그 뜻을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어때, 더 늦기 전에 전향해서 우리와 손잡고 살아보지 않을테냐?》

땅딸보반장이 또 구린내나는 소리로 지껄이자 현석우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천만에! 인간이 개로 될수 없는거다!》

땅딸보반장이 실눈으로 그를 잠시 쏘아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까 그 세놈이 곧 나타났다.

《이 새끼가 아주 지독한 악질 독종이야. 아무리 타일러도 알아듣지 못하는걸 보니 귀구멍에도 빨간 못이 박혀있는 모양이다.》

《예, 저희들도…》

키꺽다리의 대답을 채 듣지 않고 땅딸보반장이 지시를 떨구었다.

《귀구멍의 못도 뽑아주고 혀바닥도 잘 움직이게 해!》

《예, 알았습니다.》

땅딸보반장이 나가고 세놈은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현석우를 이번엔 고문용의자에 비끄러맸다. 전기고문을 하려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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