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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진호가 어머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른아침 그가 출근할 때 함께 나간 어머니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어머니방이며 부엌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낮에 어머니가 들렸다가 나간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좀 늦게 돌아올거라는 말도 없이 떠나간 어머니였다. 진호가 보기에 요새 어머니가 좀 이상했다. 은연중 흥분하는것 같기도 했고, 남 모를 그 어떤 긍지감을 느끼고있는것 같기도 했다. 워낙 경망스러운데가 전혀 없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여러모로 자중하며 조심한다는것이 알렸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는 어머니쪽에서 아들에게 일부러 곁을 주지 않으려 하는것 같았다. 진호가 정종기선배의 미망인 안정희를 만나고 온 그날 밤에도 그랬다. 이전 같았으면 진종일 어디에 가있다가 인제야 오는거냐고 묻기라도 했겠는데 그저 잠간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기만 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아들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것을 꿰뚫어보고 아들스스로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는것 같았다. 한편 진호는 이상하게 쉬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 어머니를 노엽힌데 대해서 사죄하고 새롭게 살아갈 뜻을 밝혀야 할것이지만 오늘 저녁에 말하지, 래일 이야기할거다, 하면서 자꾸만 미루게 되였다. 그후 안정희를 두번 찾아가 만나기도 해서 더욱 어머니에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는데도 자꾸만 미루게 된것이였다. 하지만 무한정 미루기만 할수 없는 일이였다. 어머니와 아들사이의 사랑과 믿음의 대화, 그것은 두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활의 출발점으로도 될것이기에 더 미루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꼭 이야기하는거라고 생각하며 여느 날보다 일찍 퇴근했는데 집에 어머니가 없었다. 전에 어머니가 그랬던것처럼 대문소리가 나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진호는 부엌에 들어가 전등을 켰다. 오늘은 제 손으로 저녁밥을 지어서 늦게 돌아오는 어머니의 수고를 덜 어 드리고싶었다. 군인생활을 할 때 자주 해본 일이여서 밥 한끼 하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쌀을 씻어 안치고 찬거리를 찾아 보니 굴비가 한마리 있었다. 됐어, 굴비 구운것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 하는것이였다. 굴비를 알맞춤하게 구워놓고 오이랭국 을 풀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났다. 《진호야!》 《예, 나가요!》 단숨에 뛰여나가 빗장을 벗겼다. 부엌에서 비쳐나온 불빛에 커다란 보짐을 든 어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뭡니까? 어딜 갔다 이 무거운걸 들구 오시는거예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보짐을 넘겨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넌 이게 뭐냐?》 아들이 바지우에 두른 앞치마를 보고 놀라는것이였다. 진호는 그제야 앞치마도 벗어놓지 않고 뛰여나왔음을 깨달았다. 조금 멋적은감이 들어 싱긋 웃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어머니앞에서 웃어보인것이였다. 《원 다 큰 사내가 부엌에서 동자질을 한거구나.》 어머니도 혀를 차며 웃었다. 어머니 역시 오래간만에 아들에게 보인 웃음이였다. 《내가 얼마나 맛있는 저녁밥 해놓았는지 이제 잡수어 보세요.》 《오냐 오냐, 우리 집에 고급료리사가 생겨 났겠지.》 그 웃음과 가벼운 롱담이 어머니와 아들사이를 멀어지게 한 불신과 노여움의 장벽을 일시에 허물어버렸다. 어머니가 들고온 보짐을 풀어보니 풋강냉이가 나왔다. 《이거 어디서 갖구 왔어요?》 《밭에서 따가지구 온거다. 굳어지기 전에 삶자. 풋강냉이맛이 괜찮을거다.》 어머니와 아들이 부엌에서 함께 일손을 놀렸다. 강냉이를 한남비 삶아내는데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들이 해놓은 밥을 펐고 찬그릇도 챙겼다. 아들이 그것을 하나하나 방에 날라갔다. 삶은 강냉이까지 오른 저녁상이 제법 푸짐했다. 어머니도 아들도 전에 없이 맛있게 먹었다.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수저를 놓고 삶은 강냉이를 하나 집으며 어머니가 물었다. 《시골에서요?》 진호는 먼저 어머니가 간 곳을 알고싶은 호기심에서 시골소리를 했다. 《응, 시골에 가서 영숙이모를 만났지 뭐냐, 네가 아이적에 친이모처럼 따르던 그 아주머니가 생각나니?》 《생각나구 말구요. 아직 살아계시는군요.》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는데두 기운이 펄펄 하더라. 네가 아이적에 첫 걸음마를 어떻게 뗐다는것까지 다 기억하구.》 《만나보구싶네요.》 《이모두 너를 보구싶다는 소리를 하더라.》 《지금 사시는데가 어딘데요?》 《강원도에서 농사짓구 살면서 그 지방의 농민운동에두 부지런히 참가하구있다더라.》 어머니가 강원도에 가신거구나, 영숙아주머니의 남편이 6.25전쟁때 《부역자》라 해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분이라구 했지, 그런데 어머니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서 그 아주머니를 만났을가? 문득 지상범선생 생각이 났다. 아버지와 옥중생활을 함께 하다가 출소했다는 지상범선생에게 어머니가 어제 저녁에도 갔다는것을 진호는 알고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지상범, 어머니, 영숙, 그 네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진호의 머리속에 피뜩 그려졌다. 그것이 신념의 대오, 통일애국의 한길이라면… 진호는 돌연 가슴이 후더워졌다. 《내가 오늘 아주 희한한 이야기두 들었구나.》 자기 생각에 흥분해있던 진호는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작년에 강원도쪽에서두 큰 수해가 나지 않았니. 너두 생각나지?》 어머니가 그렇게 물어서야 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락동강상류와 서울지역에서도 숱한 수재민들이 났지요.》 《그때 북에서 많은 구제물자를 보내주지 않았니. 영숙이모네두 수해를 입구 죽을번 했는데 북에서 보내준 그 구제물자덕분에 살아났다더라.》 진호는 얼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쌀 5만석과 천 50만m, 세멘트 10만t, 그리고 많은 량의 의약품, 그때 북에서 보내준 그 수많은 구제물자들이 120여년간의 국제적십자구제운동력사에서 전례가 없는 최대규모의것이라고 신문들도 대서특필로 보도했었다. 《너의 아버지가 옛날 체포되기 전부터 이북정치가 만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정말이지 백성들을 끔찍이 위하지 않으면 그렇게 많은 구제품을 보내주겠니. 영숙이모네 동네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고마운 은정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구있더라.》 어머니의 말이였다. 《어머니!》 진호는 가만히 어머니를 불렀다. 주씨가 부드러운 눈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저도 얼마전에 아버지소식 들었어요.》 어머니의 눈에 기쁨이 반짝거렸다. 아들의 그 어조와 표정이 달랐던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앞치마를 두르고 대문간에 뛰여 나온 아들을 보았을 때부터 그리고 저녁밥상에 마주앉아 그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아들의 마음속에 어떤 반가운 변화가 생겼다는것을 눈치챈 주씨였다. 《누구를 만났던거냐?》 《군에 나가 있을 때부터 아는 대학선배님의 미망인이예요. 그 아주머니가 아버지소식을 알고있더군요. 아버지가 무기징역형언도를 받았다고 했어요. 15년추가형이 아니구요.》 어머니는 호젓이 한숨지으며 말했다. 《나두 지상범선생한테서 다 들었다. 너의 외삼촌이 우리가 너무 락심할가봐 일부러 15년추가형이라구 거짓말 했던 모양이다. 지상범선생두 어제야 무슨 일루 무기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더라.》 진호는 오늘 아침 어머니의 눈이 퉁퉁 부은것을 본 생각이 났다. 지상범의 이야기를 듣고 밤새 주무시지 못해서 눈이 부었을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랴. 그 아픈 마음을 붙안은채 지상범의 부탁을 받고 흔연히 저 멀리 강원도까지 갔다오신 어머니, 아, 얼마나 장한분인가! 진호는 지금까지 자기가 아버지뿐만아니라 어머니에 대해서도 참으로 많은것을 모르고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제 뭐라구 사죄말씀을 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분이란걸 미처 몰랐구요, 그래서 불효자식노릇을 했던겁니다.》 어머니는 잠시 아들을 정답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 오늘 무슨 일로 거기에 간줄 아니?》 《이제 방금 영숙이모를 만나신거라구 하시잖았어요.》 《영숙이모는 우연히 만난거구. 실은 지상범선생의 부탁을 받구 얼마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비전향장기수선생님 한분을 만나러 갔던거다. 그분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지, 뭐 도와드릴것이 없나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였다.》 《그랬었군요.》 《가보니 근 30년세월 감옥을 살구 나와서 몸이 아주 허약해 졌는데두 통일애국운동에 아주 열심이더라. 뭐 도와드릴거 없느냐구 물었더니 교도소에 남아있는 동지들에 비하면 나야 지금 너무 호강하는거다, 그 동지들 생각을 해서라두 통일운동에 더 많이 이바지해야겠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송구스럽다, 그런 말씀만 하시더라. 진호야.》 어머니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 알겠어요. 저도 아버지생각을 해서라도 이제부터 다르게 살거예요. 아버지가 결코 <환상의 영웅>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참된 영웅, 애국자이며 아버지가 바라시는 통일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걸 알았으니까요.》 주씨는 가슴이 찡 울렸다. 뜨거운것이 뺨으로 쭈르르 흘러내렸다. 아들이 언제건 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라는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믿으면서도 불효막심한 소리를 할 때마다 얼마나 노엽고 섭섭했던가. 정 참을수 없어서 뺨을 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제 손으로 제 뺨을 친것과도 같았다. 뺨을 맞은 아들보다 어머니자신이 더 아팠다. 심장에 파고드는 아픔에 소리없이 흐느껴 울기도 했었다. 아들의 뺨을 치게 된 자신이 스스로 처량하게 느껴져, 분통이 치밀어, 가슴이 아파서 울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쁨의 눈물이였다. 남편과 헤여져 외롭게 살아온 수십년세월 설음의 눈물만 흘려오다가 오늘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것이다. 《진호야! 고맙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우리 앞으로 새롭게 살아가자.》 《예, 알겠어요.》 이때 느닷없이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진호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 받습니다.》 진동판에서 기침소리가 먼저 두세번 울렸다. 《나 한익훈일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제 주진호입니다.》 진호는 인사말을 하면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서 이야기하라는듯이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그새 건강하셨습니까?》 《응, 나야 그저 그렇지. 어머니랑 편안하신가?》 《예.》 《다행일세. 그런데 여보게.》 《예, 말씀하십시오.》 《자네도 우리 선아가 집에 와있다는걸 알구 있겠지만…》 《선아씨가 귀국했다구요? 금시초문입니다.》 진호는 다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있는것 같은 눈치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한겁니까, 어머니는 어서 저쪽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라는듯이 눈짓으로 송수화기를 가리켰다. 《금시초문이라… 그럼 선아를 만나보지두 못했다는 말이군.》 《예.》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통 모르겠군.》 한익훈로인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려있었다. 《선생님, 제가 혹시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다면…》 《나두 누가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이거 늙은이가 주책없이 젊은이들의 일에 관여하는것인지 모르겠네만, 자네때문에 결혼도 안하고 귀국한 선아가 또 자네때문에 떠나가겠다구 하네. 듣나? 이사람.》 《예, 듣고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그 애가 귀국한것두 모르구 있다지, 그 애는 또 자네때문에 영영 떠나가겠다니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감투끈인가?》 한익훈로인은 몹시 노한것 같았다. 진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진호는 한익훈로인의 말뜻을 얼른 리해할수 없었다. 로인이 성을 내는 까닭도 알수 없었다. 《선아의 할아버지 맞지?》 어머니가 물었다. 《예.》 《무슨 말씀 하시더냐?》 《선아가 집에 와있다는거예요.》 《선아가 귀국했다는건 나두 알구있었다. 전화가 왔더라.》 《그래요?》 진호는 어머니가 선아를 사뭇 언짢게 여기고있다는것을 전에부터 알고있었다. 선아가 귀국했고 전화를 걸어왔다는것을 자기에게 알려주지 않은 어머니의 마음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네가 선아를 만날 일이 없을것 같아서 전화 왔다는걸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이였다. 《이제 한익훈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곧 다시 출국한다는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무튼 가든지 말든지 우리한테 상관 없는 일이니 더 생각할것두 없지 않느냐?》 주씨의 말마디에서 노여움이 툭툭 튕겨나왔다. 《예.》 진호는 그렇게 외마디 대답을 건성으로 하고는 마음속으로 한익훈로인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선아가 나때문에 또 떠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때문에 결혼도 안했다는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가 전화로 나를 찾은 저의는 또 뭘가? 의문만 연방 떠오르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참 얘야, 일전에 외삼촌이 와서 웬 아가씨얘길 하더라.》 어머니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너 듣니?》 《예, 말씀하세요.》 《혼사말이다. 너두 총각으루 늙을수야 없지 않니. 그쪽 부모들이 우리 집안 래력을 가지고 시비 안할거라구 하더라. 아가씨당자는 아주 얌전하구, 어떻냐? 한번 만나보지 않겠니?》 《글쎄요. 제 좀 생각해보겠어요.》 아니 무엇을 더 생각한단 말이냐, 나에겐 선아외의 딴 녀자가 없다, 선아는 결코 흘러간 과거속에 영영 자취를 감추어버린 녀자가 아니다, 그때 선아를 보낸것이 내 실책이였다, 바보짓을 한거다, 다신 바보노릇을 안할거다, 하고 진호는 마음속으로 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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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아가 빠라과이로 갈 작정으로 출국수속을 시작하자 말리고 달래고 하다가 그만 지쳐버린 한영태박사는 정 갈테면 가라, 거기 인디안들속에서 개고생하는것이 정 소원이면 빨리 가서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 하고 소리질렀다. 한편 어머니는 네가 떠나가는 그날로 이 어미가 죽어버릴거다, 하고 울며불며 하다가 그만 혈압이 220까지 올라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버렸다. 태연한것은 할아버지 한사람뿐이였다. 철부지아이가 생떼를 쓰는것을 보듯이 조금 딱해하는 시선으로 손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빠라과이라는 나라가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가 아니냐?》 《그렇대요.》 《그런데 하필 그런 나라에 가겠다는건 뭐냐?》 《어머, 그새 잊으셨어요?》 《잊다니?》 《전날에 제 말씀드리잖았어요. 이민 가서 고생하는 교포들이 많다고.》 《응, 생각난다. 앓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구 학교 못 가는 아이들에게 공부 가르칠거라구 했지.》 《예.》 《기특한 생각이다.》 《그럼 할아버진 제가 떠나가는걸 찬성하시는거죠?》 《글쎄…》 《어머, 글쎄가 뭐예요.》 한익훈로인은 기침이 나와서 쿨렁쿨렁했다. 《선아야.》 《예.》 《이번에 네가 떠나가면 다시 못 볼것 같은데…》 《아녜요, 할아버지, 그런게 아녜요.》 선아는 서둘러 부정했지만 금시 목이 꽉 메였다. 다시 귀국하지 않을 결심이였다. 그러니 할아버지도 어머니와 아버지도 다시 만나지 못할것이다. 《선아야.》 《할아버지가 보구싶을 땐…》 《그런 얘기가 아니구, 너의 그 착한 마음 가지구 여기서 살면 더 좋지 않겠니?》 《어머, 그럼 떠나가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다시 잘 생각해보라는거다.》 선아는 책상우에 꺼내놓은 출국수속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볼만큼 생각해본거예요.》 《아니다. 우리 늙은이들은 너무 오래 생각하면서 실천을 미루는것이 흠이지만 젊은이들은 지내 적게 생각하면서 서둘러 결론하고 행동하는게 탈이다.》 《충분히 깊이 생각했다니까요.》 한익훈로인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너무 서두르지 않는게 좋을게다. 내 생각에는 일이 제대루 될것 같다. 우리 선아처럼 착한 아가씨에게 고약한 액운이 낄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한익훈로인이 진호에게 전화를 건것이 바로 그날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선아는 자기 방에서 려행가방에 옷가지들을 챙겨넣다가 밖에서 울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방이네. 어서 들어가보게.》 《예, 고맙습니다.》 선아는 금시 얼굴이 새빨개졌다. 진호의 목소리를 들은것이다. 착각인가? 아니다. 틀림없는 진호의 목소리였다.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리고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선아는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 선아는 숨소리를 딱 죽이고 문을 지켜보았다. 한번 더 손기척소리가 나더니 이어 문이 열렸다. 진호가 들어왔다. 《오래간만이요!》 《예.》 대답소리가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왜 왔을가? 이제 무슨 소리 하려는걸가? 난 어째야 되는거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선아!》 《예.》 선아는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은 했지만 그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거지, 내가 무슨 죄 지었다는거야, 야릇한 반발심이 발끈 치밀었다. 《내가 실은 과거를 하나하나 깨끗이 결산하고 새 인생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는데.》 그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람, 선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결산사항중의 하나가 선아문제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 온거요. 내 말 듣소?》 《들어요.》 《그땐 내가 바보짓 한거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한선아를 그냥 미국에 가게 했으니 말이요.》 그래서 어쨌다는거예요. 그땐 왜 나를 붙잡아두지 않았어요? 선아는 툭 튀여나가려고 하는 말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런 바보짓 다시 안할거다 이거요! 뭐 빠라과이에 간다구? 천만에, 못 가! 안 보내겠단 말이요!》 선아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탁 터지는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진호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지며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려 책상우에서 출국수속서류들을 집어드는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따위건 왜 작성하는거요?》 진호가 그 서류들을 쫙쫙 찢어버렸다. 《어머!》 《왜?》 《몰라요!》 내가 이거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한거냐, 모르긴 무엇을 모른다는거야. 진호가 다가왔다. 《선아!》 진호의 손이 선아의 어깨를 잡았다. 사랑과 열정의 자석인가, 선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못 가! 알았지? 다신 아무데도 안 보낼테야!》 선아는 눈물에 함빡 젖은 얼굴을 진호의 가슴에서 오래도록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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