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이 새꺄! 뒈지고싶은거야?》 급정거를 한 택시에서 운전사의 욕설이 터져나왔다. 진호는 화들짝 놀랐다. 택시가 굴러오는것을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가려고 했던것이다. 《뒈지고싶으면 한강다리에 가서 뛰여내릴거지 왜 애매한 내 차에 기여드는거야?》 택시가 떠나가고, 진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헤매여다니며 하루해를 다 보내고 지금은 초저녁, 이제 또 어디로 갈것인가? 생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에 뺨을 맞은 진호였다. 개구쟁이시절에도 어머니를 노엽힌적이 많았지만 종아리 한번 맞아본적이 없었다. 서러웠다. 분했다. 내가 뭐 못할 소리를 한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가 별의별 고생을 다하고 내가 그런 배신과 모욕을 당한것도 아버지의 그 환상때문이 아닌가. 아버지의 그 신념과 투지에 머리가 숙어지지만 실현가망성이 없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는것이 안타까와서 한마디 한것인데 어머니가 왜 내 마음을 리해하지 못하는가. 어머니도 그런 환상에 사로 잡혀있기때문인가? 아버지야 외계와 차단된 교도소에 오랜 세월 갇혀있은 바람에 세상형편을 몰라서 그런다 해도 어머니는 엄혹한 이 세상 현실에서 살고있지 않는가,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감정이 어머니의 현실인식능력을 제거해 버린것일가? 아니 혹시 나의 인식이 착오가 아닐가? 그렇다면… 천만에! 인식착오는 아버지와 어머니쪽에 있는것이다. 어머니원망도 하면서 여기저기 발길이 나가는대로 향방없이 돌아다니다가 그 택시에 치울번 했던것이다. 또 어디로 갈것인가? 막연한 심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는데 웬 녀인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주진호씨 아녜요?》 아는 사람을 만나야 별로 반가울것이 없는 울적한 기분이여서 마지 못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정종기선배의 부인 안정희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그새 건강하셨어요?》 《예. 정선배님도 잘 계십니까? 그때 광주쪽에 이사 가신다는 말 들었는데요.》 《작년에 또 서울에 이사해온거예요.》 진호는 얼른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제 안정희가 앉아있던 그 문방구가게가 대여섯집 건너에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또 이 동네에 온것이다. 《우리 집이 저기 있어요. 잠간 들렸다 가시죠.》 《알고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우연히 가게앞을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어머, 근데 왜 들리지 않으셨어요?》 진호는 어제 저녁의 그 기분을 차마 이야기할수 없었다. 《우리들한테 섭섭한 일이 있는가 보네요. 군에 계실 때도, 우리가 광주로 이사 가기 전에 말예요, 좀 만나고싶다고 권학범소위님한테 몇번 전갈을 보냈는데도 안 나오신거죠.》 그것은 진호의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있는 일이였다. 정선배의 부인이 서울에 가서 선아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두 젊은 녀인의 가벼운 입들이 무슨 소리인들 안했으랴. 선아가 미국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연을 실토하면서 진호의 부친이 교도소에 갇혀 있는 수인이라는것까지 말했을것이다. 그래서 진호 자기의 실련과 그 배경을 알게 된 정선배부인이 동정의 말이라도 하려고 자기를 만나려 하는줄 알고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던것이다. 외출증을 쉽게 받을수 없는 때이기도 했다. 15일간 영창처벌을 받고 나온 직후였다. 하극상죄로 받은 영창처벌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진호가 중대장이 보급계 하사와 숙덕거리는것을 우연히 본것에서 생겼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중대장이 대대장에게 불리워가서 땀을 뺐다고 했다. 전에부터 중대장이 보급계와 짜고 군수품담요며 내의류를 뽑아내여 시중에 팔아먹는다는 소문이 쉬쉬 돌았는데 그것이 대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나, 단단히 꾸중을 들은 중대장이 그날 밤 진호를 자기 방에 불렀다. 《네가 주둥아리 놀린거지?》 《뭐 말입니까?》 《이 새끼 시치미 뗄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구?》 중대장이 벌떡 뛰여 일어나면서 군화발을 날렸다.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배를 안고 쓰러진 진호의 어깨와 머리를 군화발이 연방 짓밟았다. 무자비한 란타였다. 그저 당하고 있기만 하면 숨이 끊어지든지 병신이 되기 전에 그칠것 같지 않았다. 이거야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않은가, 도적질은 제가 하고 왜 애매한 사람을 구타하는거냐, 《상관에 대한 무조건 복종》이라 해서 이런것도 참아야 하는가, 진호는 벌떡 뛰여일어났다. 《왜 이러는겁니까?》 《이 새끼 반항이야?》 그렇다, 반항하고싶다! 진호는 날아오는 중대장의 주먹을 왼손으로 잡으며 오른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도 물렁물렁한 맨살이 아니였다. 격술훈련때 배운대로 군화발도 날렸다. 규률이고 복종이고 다 개똥같다, 나도 인간이다, 때린다고 맞아주기만 할수 없다, 진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주먹과 군화발을 내질렀다. 누군지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뺨을 후려치는 자도 있었다. 중대행정반의 하사, 중사들이 달려와서 진호를 때려눕혔다. 사고보고가 그 즉시로 대대를 거쳐 련대까지 올라갔다. 검열관이 뛰여와서 진상조사에 착수, 그러나 들출수록 중대장의 부정행위가 자꾸자꾸 드러났다. 중대보급계와만 짜고 해먹은것이 아니라 련대창고장과도 흑맥선을 이어가지고 숱한 물품들을 빼돌렸다나, 그 부정수입금의 일부로 련대장녀편네에게 밍크코트를 사주었고, 중대장의 부정행위를 꾸짖은 그 대대장의 돈지갑을 채워주기도 했다는것이였다. 또 한가지 놀라운것은 련대에서 달려온 검열관이라는 대위도 대대장에게서 가끔 용돈을 얻어썼다는 사실이였다. 들추어낼수록 점점 더 너절한 자료들이 드러나자 련대장이 검열관의 조사활동을 중지시키고 명령을 떨구었다. 하극상죄를 저지른 주진호상병을 15일간 영창에 가두어라! 중대장은 군단 《회보》에 이미 명시된 기합금지령을 위반했으니 타 대대로 조동시키라! 덕분에 진호는 일약 련대의 《명물》이 되였다. 감히 직속 중대장에게 주먹을 휘둘렀으니 《명물》이 될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그에게 기합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 진호도 누구든지 함부로 건드리기만 하면 또 맞받아 치려고 눈을 번뜩이며 다녔다. 그러나 속은 편안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납덩어리처럼 매달린것이 풀리지 않았다. 중대장 한놈을 때려눕혔다고 아무것도 달라질것이 없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제대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있는데 권학범소위에게서 정종기부부가 곧 전라도 광주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듣게 되였다. 도의상 응당 뛰여가서 작별인사도 하고 이사짐 꾸리는 일도 도와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창피한 생각이 앞서서 찾아가지 않았던것이다. 자기의 가슴속에만 묻어둔 그런 사연을 정선배의 부인에게 이제 와서 새삼스레 다 실토하기도 쑥스러운 일이였다. 《그땐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욕 많이 하시리라고 짐작했지만…》 《아녜요. 욕은 무슨 욕을 했겠어요. 자당님께서도 건강하세요?》 안정희가 묻는대로 적당히 대꾸하며 진호는 그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안정희가 선아 안부며 아버지에 대해서 묻지 않는것이 다행이였다. 역시 사려깊은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그의 남편 정종기에게 모든것을, 생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서 뺨을 맞은 일까지 다 이야기하고싶은 생각이 불쑥 생겼다. 문방구가게문에 쇠가 걸려있었다. 《어서 들어가시자요. 오늘 딴 일이 좀 있어서 가게문을 닫았던거예요.》 전연지대 읍거리의 그 강남서점집처럼 가게안쪽에 살림방과 통하는 문이 있었다. 두사람이 가게안에 들어서자 살림방에서 애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엄마야?》 《응, 엄마 왔다.》 안정희가 가게방에 불도 켜지 않고 문께로 달려갔다. 문이 활짝 열리고 방에서 내비치는 불빛과 함께 대여섯살짜리 처녀애가 뛰여 나와 제 엄마에게 안겼다. 《우리 진미 용쿠나. 무섭지 않았지?》 《엄마 빨리 안 와서 많이 많이 무서웠던거야.》 안정희는 딸을 안은채 진호를 돌아보았다. 《우리 집 응석받이예요. 어서 들어오세요.》 살림방은 강남서점의 그 살림방처럼 변변한 가구 하나 없었다. 《정선배님은 어디 외출하신겁니까?》 방안에 남자의 허드레옷 하나 걸려있지 않은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진호가 물었다. 《우리 진미 아빤…》 안정희가 눈길을 떨구며 뒤말을 잇지 않았다. 《아저씬 누구나?》 진미가 제 어머니에게 안긴채 진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응, 너의 아빠하구 친했던 선생님이시다.》 《근데 왜 우리 아빠 죽은것도 모르나?》 진호는 소스라쳐 놀라며 안정희를 바라보았다. 《80년 5월에… 광주에서 그만…》 진호는 오싹 몸서리를 쳤다. 시민군의 진지를 깔아 뭉개는 땅크의 무한궤도와 기관총의 란사, 무리 지어 쓰러지는 봉기자들과 선지피로 물 든 거리들… 광주의 그 참경이 금시 눈앞에 어지럽게 떠올랐다. 《정선배님이 거기서 희생되신겁니까?》 《예, 시민군의 마지막진지를 지키시다가 그만…》 안정희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는 강남서점에서 만나던 그때보다 퍽 여위고, 두눈이 움푹 꺼져들어간 얼굴엔 준엄한 기색이 서리발처럼 비껴있었다. 진호는 뭐라고 위로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위로할 일이 아니였다. 5월의 광주, 그것은 누구를 위로하기전에 매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것을 요구하는 력사의 웨침이 아니겠는가. 진호는 불현듯 1980년 5월 그때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살인마들에 대해서 치를 떨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있은 자신의 몰골이 생생히 떠올랐다. 정종기선배의 넋이 자기의 그 몰골을 쏘아보며 질타하는것 같았다. 그의 부인도 지금 움푹 꺼져들어간 눈으로 오늘의 자기를 지켜보며 뭐라 꾸짖는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진호는 고개를 떨구며 입안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정희가 그의 얼굴을 주의깊이 살폈다. 《우린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광주에서 희생된분들앞에 큰 죄를 짓고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죄송한 마음 뭐라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녜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안정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전 우리 진미 아빠가 영영 가신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진호씨처럼 5월의 광주를 잊지 않고 계시는분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넋이 살아있는거예요.》 《맞습니다. 우리모두 광주의 영령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겁니다. 그럴수록 광주를 돕지 못한 죄책감을 더욱 금할수 없습니다. 그때 아무데서도 광주지원의 봉화를 지펴올리지 못했으니까요.》 《당시의 정세가 너무 엄혹해서 그랬던거예요. 그래도 그 엄혹한 상황에서 광주봉기자들을 지원해서 헌신적으로 투쟁한분들이 있었던거예요. 특히 ××교도소에서 고생하시는분들까지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셨다는 말 듣고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진호는 은연중 긴장했다. ××교도소라면 아버지가 수감돼있는 곳이 아닌가. 《광주에서 쫓겨난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쳐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대요. 교도소 로역장인 인쇄공장에 광주시민들에게 뿌릴 투항권고문과 경고문인쇄물을 제작하라는 분부가 떨어졌다는거예요. 그 인쇄물이 광주시민들에게 공포를 줄거라고 생각할수 있잖았겠어요. 그래서 인쇄공장 로역을 하는 수인들이 그 인쇄물제작을 파탄시켰다는거예요. 그 투쟁을 조직하고 지휘한분이 어떤분인줄 아세요? 글쎄 30년형기를 4년 남긴 통일애국투사였대요. 근데 장장 26년세월을 령어의 몸으로 고생하시다가 4년후면 출소하실수 있는데 그 투쟁을 조직지휘했다는 <죄>로 무기징역형을 추가로 언도받았다는거예요.》 진호는 뜨거운것이 가슴에 치미는것을 느끼며 가만히 물었다. 《그분도 그러한 후환이 생길수 있다는것을 각오하신거겠죠?》 《물론 각오하셨겠죠. 동시에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졌기때문에 그렇게 과감한 투쟁을 벌렸을거예요.》 《어떤 승리 말입니까?》 《반파쑈민주화투쟁과 조국통일운동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심이지 뭐겠어요.》 《아니 그거야…》 진호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아버지에 대해서 《환상의 영웅》이라고 말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안정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혹시 민주화투쟁과 조국통일운동이 승리할수 없다고 생각하는거 아니예요?》 《광주봉기도 결국 참패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녜요! 그건 참패가 아녜요! 그들은 승리자예요!》 안정희의 말이 어찌나 날카롭게 울렸던지 어린 딸애가 놀라서 제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다. 진호도 재삼 놀랐다. 강남서점에서 만났을 때는 사리에 밝고 상냥한 부인이라는 인상을 주던 안정희에게서 그처럼 날카로운 역설을 듣고보니 여간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 광주봉기자들이 참패 당한것이 아니고 그들을 승리자라고 말하는것은 역설이였다. 안정희는 아주 예민한 녀인이였다. 진호의 얼굴에서 그가 자기 말에 공감하지 않고 부정하는 기색을 제꺽 눈치챈것 같았다. 《내 말이 수긍되지 않는 모양인데, 좋았어요, 그럼 좀더 이야기해 보자요. 진호씬 그래 광주의 5월이후에 우리 민중의 의식구조에서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난것도 모르세요?》 《그거야… 반미감정의 확산이 아닙니까?》 《맞아요. 광주를 피바다에 잠기게 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인식이 반미감정의 심화, 확산으로 이어졌어요. 5월의 광주뿐만 아니예요. 민주화투쟁이 격화되고 통일운동이 대두될 때마다 그의 교살자노릇을 한것이 미국이였어요. 그러면서도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가장해온 미국이 5월의 광주에 계엄군 살인집단을 투입한것으로 자기의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내보인거예요. 그래서 우리 민중의 반미의식이 심화, 확산돼서 미제침략자들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민주화도 조국통일도 성취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격렬한 반미투쟁의 불길을 지펴올리기 시작했어요. 비근한 사례로 광주 미<문화원>방화투쟁을 들수 있어요. 그건 곧 우리 민중이 드디여 과감한 반미투쟁에 나선다는것을 만천하에 알린 선전포고였어요.》 진호도 그러한 해석에는 수긍이 갔다. 최근년간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새로운 인식을, 자기가 아직 확고한 지론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느끼고있던것을 안정희에게서 듣는 기분이였다. 《그러한 새 국면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에서 5월의 광주봉기자들이 류혈적탄압을 당하긴 했지만 참패가 아니라 승리한것이라고 평가해야 된다는것이 저의 생각이예요. 우리의 력사적과제인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성취의 날로 가는 한걸음을, 승리적진군의 한걸음을 내디디였다 그거예요. 이건 제 혼자만의 생각이 아녜요. 전위투사들이 모두 그렇게 인식했던거예요. 우리 진미 아빠도 그 마지막날 저와 헤여지면서…》 안정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뒤말을 이었다. 《이제 계엄군의 총알에 맞아 내 심장이 멎는다 해도 그러나 결코 패배자로 죽는건 아니다, 민주화와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에서 우린 반드시 승리한다, 나는 그 승리를 위한 진격로를 헤쳐나가는 개척자의 한사람이 되는거다, 승리에로 가는 길에서 죽는건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죽는거다, 그러니 당신 너무 슬퍼 말고 내 뜻을 이어 싸워준다면 나의 시체우에 승리의 꽃보라를 뿌려주는것으로 된다, 이런 말씀을 하셨던거예요.》 안정희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엔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엄마, 울지마.》 어린 딸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씻어주며 말했다. 안정희가 딸을 꼭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호는 시민군진지에서 부인과 마지막작별을 하는 정종기선배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것은 패배자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였다. 정의에 살고 정의를 위해 죽는 슬기로운 투사의 긍지가 어린 정종기였다. 죽음으로 우리는 승리한다는 그의 웨침소리가, 광주땅에서 울린 그 웨침소리가 아득한 시공간을 넘어와 자기의 귀전에서 울리는것 같았다. 이윽고 자신을 억제한 안정희가 조용히 말했다. 《아까 말한 그 교도소의 무기수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 인쇄물제작거부투쟁이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크게 기여했거든요. 그런 뜻에서도 전 교도소의 그 선생님도 패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됐다고 생각하는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 선생님들은 광주시민들보다 더 험악한 상황에서 싸웠어요. 그 극한상황에서 그처럼 민족적숙원이 성취될 승리의 그날을 믿고 과감히 싸우신 그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참된 영웅, 애국자라고 생각해요.》 진호는 문득 아버지를 가리켜 《환상의 영웅》이라고 말했던 일이 다시금 생각났다. 그 말을 입밖에 낸탓에 뺨을 맞았는데 지금 안정희는 그 미지의 무기수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참된 영웅, 애국자》라고 하지 않는가. 진호는 아버지를 《환상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의 론거를 다시 상기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였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대신 안정희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의 말대로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운동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비단 광주의 5월뿐만 아니라 4.19와 3.24―6.3 그리고 정전후 경향각지에서 발생한 그 모든 투쟁들이 그때그때 무참히 탄압당하긴 했지만 실은 그것이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에로 가는 하나하나의 전진운동이였다. 따라서 그 투쟁참가자들을 《환상의 영웅》이라고 부른것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지향이 정의로운것이고 그것이 반드시 유종의 미를 거둘것임에 틀림 없을진대 그 승리에로의 전진을 추동시킨 그들을 《승리자》라고, 우리 시대의 참된 영웅이며 애국자라고 한 안정희의 그 말이 옳지 않을가? 맞다, 옳은 말이다. 문득 푸른 수인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도소에서 인쇄물제작거부투쟁을 조직지휘했다는 그 수인의 모습이였다. 그 투쟁후에 또 야수적박해를 당했을것이다. 어느 독감방에 앉아있을것이다. 백발에 광대뼈가 툭 불거져나온 얼굴이 진호의 눈앞에 그려졌다. 수십년간의 옥고에 창백해진 얼굴이였다. 그러나 두눈엔 그윽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것은 승리의 래일을 확신하는 억센 투사의 여유작작한 미소였다. 지금까지 제 어머니를 말똥말똥 쳐다보던 진미가 소곤거렸다. 《엄마, 나 그 교도소할아버지 보고싶어.》 안정희가 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진미 용쿠나. 이제 엄마하구 같이 그 할아버지 만날 때가 있을거다.》 진호는 느닷없이 가슴이 후두둑 떨렸다. 그 무기수가 바로 나의 아버지가 아닐가?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추가형으로 1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잘못 안것인지도 모른다. 《저 혹시… 그분이… 성함말입니다. 그분 성함을…》 가슴이 그냥 후두둑 떨려 말이 잘 나가지 않았다. 《성이 달라요.》 진호가 왜 갑자기 흥분하는지 제꺽 눈치 챈듯 안정희가 그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주진호씨 아버님이 아닌가 했던거예요. 아버님이 교도소에 계신다는 말 선아씨를 만났을 때 들었거든요.》 내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했다는것까지는 모를것이다, 진호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채 다시 물었다. 《그분 성함을 어떻게 부르는가요?》 《현석우라는분이예요.》 진호는 온몸에 불이 확 달리는것 같았다. 전신의 피가 머리우로 치달아올라 가는것 같았다. 그것은 환희의 파도가 아니였다. 참을수 없는 진통의 발작이라 할가, 천만마디 말에도 담을수 없는 죄책감이 채찍이 되여 자기의 육신과 넋을 때리는것 같았다. 《진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건데…》 아버지의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목소리가 귀전에 울리는것 같았다. 진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세요.》 안정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분이… 그분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어머!》 《제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한것은…》 아니 지금은 아무 이야기도 할수 없다. 우선 자신을 정리하고 싶었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현석우의 아들로서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을 랭정하게 반성해보아야 한다. 아버지 현석우의 시각에서 아들인 나의 어제와 오늘을 검토해보아야 하는거다. 《후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진호는 실눈을 짓고 쳐다보는 안정희에게 가볍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서 성큼 일어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