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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반격작전》에 투입된 병력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8일만에 귀대했다. 아이구 죽겠다, 이거야 어디 견디겠나, 오장륙부 다 피곤해 졌다, 하는 불평을 털어놓을 사이도 없이 《차렷! 렬중 쉬엿! 차렷! 번호 붙여가! 함성은 <필승 야>! 함성과 함께 헤쳐! 집합! 1소대 우측 기준 차렷! 중대장님께 대해 경례! 주목! 중대장님 훈시 끝!》 하는 구령에 따라 또 한차례 볶인 다음에야 헤쳐가서 휴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실전을 방불케 한 기동작전훈련이였다. 《공격목표는 <휴전선>너머 K고지, 선제타격으로 그곳 인민군진지를 소멸하라, 차후작전으로 A고지로 진격, 그곳에 교두보 확보하라, 고지아래 기동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기갑부대의 작전을 엄호하라, 그 엄호작전 종료후 즉시 <적>군단사령부를 강타, 점령하라!》 그러한 《작전계획》에 따라 실시되였던것이다. 가상《적》의 저항을 격파하며 진격 또 진격, 강행도하, 완전군장을 짊어진채 포복전진으로 《적》참호에 접근, 명령일하 돌격함성도 요란히 돌입하여 찔러! 돌려쳐! 우비여 찔러! 올리막고 차! 등 16개 동작 창격전으로 《적》을 완전소멸한 다음 또다시 전진, 날마다 시간마다 《승리》의 함성높이 울리며 실시한 작전이였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다. 헤쳐, 휴식구령이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 아무데나 퍼더앉은 사병들은 승리자가 아니라 패잔병처럼 녹초가 되여버린 꼴들이였다. 말할 기운도 없어서 헤 벌린 입에 바람만 들이키고있는데, 아니 저 밥풀 세개(대위견장)가 왜 또 모엿구령을 치는거야. 뒈질 놈 같으니라구, 명령이니 또 모여야지. 어랍쇼, 바람 빠졌다네, 군가 부르면서 《사전》을 세바퀴 행진할것! 목이 터져라 군가 부르며 세바퀴 돌고나자 또 새 명령이다. 시계 청소하라! 아이구 맙소사. 시선이 미치는 곳까지 다니면서 풀 뽑으라네, 잡초가 기세좋게 자라는 계절에 8일간이나 방치해둔 그 넓은 시계에 무성해진 풀을 언제 다 뽑으랴, 하지만 별수 있나, 군바리(군인)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 한다》니까, 론산훈련소에서 떠날 때 《주특기 10단위 빵빵 100원짜리》보병으로 된걸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거구, 하여간 저 밥풀 세개 곤죠 더럽다니까, 네 에미 ×이나 빨아먹다가 뒈져라! 제대말년 될 때까지 참아준다만 후에 어디서 만나면 피 보게 해줄거다! 《빌어먹을것, 군대 충성하러 나왔나, 슬금슬금 하자.》 《누가 아니래, 군대서 땀흘리면 3대까지 빌어먹는다더라.》 《이놈의 잡초, 깔치들의 그것처럼 무성하기도 하다.》 《하하…》 《그러니까 슬금슬금 하래두, 한꺼번에 다 뽑으면 깔치들이 어머머 아파요, 부끄러워요 할거야.》 《하하하…》 《그나저나 륙군 정량 먹고 이번작전 같은거 두번 다시 못하겠어.》 《말두 마, 포병놈들은 3보이상 승차하는데 우리 보병은 3보이상 구보하라니 다리뼈가 다 부러질판이지.》 《그때 우리가 <점령>한 고지에 시찰나온 그 양키 중위놈 봤지?》 《응, 풀속에서 뱀 나오는걸 보구 기절초풍하던 그놈말이지, 아마 바지에 오줌 쌌을거야.》 《하하…》 《그 쪼다(바보)가 주제에 여물통(입) 살았다고 우리 대대장에게 찜바(욕)를 퍼붓데.》 《가나오나 그 노린내들의 꼴 보기 싫다니까.》 《실컷 여물통 울리라지. 개새끼는 짖어도 세월아 흘러라. 나도 제대말년 오래잖으니까.》 손보다 입을 더 분주히 놀리며 하는 사역이 그럭저럭 끝날 때 중대인사계 오병장이 나타났다. 《편지 왔다. 두귀 잡고 절하는 놈한테만 줄거다.》 진호에게 온 편지도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였다. 얼른 뜯어보았다.
진호는 앉은자리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한번 더 읽어보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구절구절에 슴배여있는 편지였다. 진호는 편지를 손에 쥔채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곁에 물 한모금 떠주는 사람도 없어서 몸이 더 아팠을것이다. 이제 제대하면 그땐 잘 모셔야지. 어머니생각 뒤로 선아생각에 마음이 끌려갔다. 어머니의 편지 못지 않게 기다려지는것이 선아의 편지였다. 어머니의 편지와 함께 선아의 편지는 정이 메말라버린, 병영생활에 매인 그에게 큰 위안으로 되였다. 그러나 소대에서는 애인의 편지가 오기만 하면 무조건 강제적으로 《회람》도 하고 《독보》도 하게 한다. 군사검열을 거치게 하는것도 싫지만 그따위 장난거리로 되는것이 불쾌해서 선아의 편지만은 영외 마을의 강남서점주소로 오게 했다. 입대하기 전날 밤 그의 가슴에 불을 확 지펴준 선아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그의 집동네 골목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선아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선아의 몸이 자석에 끌리듯이 그에게 바투 다가왔다. 《선아!》 《기다릴거예요. 제가 많이 많이 걱정한다는걸 잊지 말고 제발 몸조심하세요.》 《알았어, 하루도 선아생각 안 잊을거야.》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속삭임을 뜨거운 입맞춤으로 주고받았던가. 입대후에 자주 받아본 편지에도 사랑하는 애인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선아의 뜨거운 마음이 슴배여있었다. 그러한 편지를 거칠고 무례한 군바리들이 《회람》하고 《독보》하게 할수 없었다. 그래서 강남서점주소를 알려주고 그리로 편지를 하도록 했던것이다. 서점주인 정종기는 그의 대학선배였다. 진호가 대학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학한 해에 졸업한 정종기를 처음 알게 된것은 대학신문에 게재된 《엽전도 싫지만 딸라는 더 질색이다》라는 제목을 단 그의 수필을 보았을 때였다. 사색당쟁과 사대굴종으로 얼룩진 리조시대의 망국수난사를 개탄하면서 8.15후 이 땅의 자주권을 침해한 딸라―미국의 오만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수필이였다. 그 수필의 필자 정종기를 교내에서 몇번 만났고 함께 막걸리도 마셨는데 입대직후 영외외출날에 읍거리의 강남서점주인이 되여 앉아있는 그를 다시 만났던것이다. 무척 반가왔다. 그는 졸업후 취직자리가 쉬 나지지 않기도 했지만 한동안 조용한 시골에서 독서도 하면서 살고싶어 이곳에 와서 결혼하고 정착한것이라고 했다. 진호는 외출날마다 서점에 들려 책도 뒤적거려보았고 정선배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총반격작전》을 종결짓고 귀대한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였다. 오후일과는 정훈교육, 《자유우방》 미국의 지원하에 기어이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침방울을 튕기며 력설하는 정훈장교의 훈화를 귀등으로 흘려버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식사, 그후에야 자유시간이였다. 밀린 빨래도 하고 노가리(잡담)도 좀 하다보니 취침전 일석점호시간이 되였다. 《너희들 정돈상태 왜 이따위야? 모두 골 비여도 분수 있지, 침구정돈상태 모두 불량, 개판 5분전이다. 규률이 없다 이거야. 5분간 여유 준다.》 일석점호를 실시하러 내무반에 온 주번사령장교의 호통에 한바탕 복닥소동을 피운 다음에야 소등하고 침상에 드러누울 수 있었지만 진호는 재수 옴딱지 붙게 그날 따라 불침번에 걸렸다. 눈시울을 내리누르는 졸음을 참는것이 엄청난 고역이였다. 종시 쪽잠이 들고말았다. 꿈결에 누가 밖에서 내무반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불침번 문 열어! 이 새끼 자고있는거 아냐?》 일석점호때 나타난 그 주번사령장교의 목소리였다. 《누구야?》 진호는 시치미 떼고 소리쳤다. 《이 새끼, 주번사령이다!》 《암구호!》 밖에서는 그날 밤의 암구호를 댈 대신 또 욕질이였다. 《이 쪼다야, 나다, 나! 주번사령도 몰라? 빨리 문 열어!》 《암구호!》 진호는 불침번근무수칙의 요구대로 다시 소리쳤다. 《너 정 피 보고싶어? 빨리 문 열지 않을거야?》 상대의 기세가 너무나 당당했다. 장교의 명령에 복종할수밖에 없기도 했다. 문을 열어주었다. 《필승! 불침번근무중 이상 무!》 주번사령은 진호의 보고에 주먹으로 대답했다. 《이 쪼다야! 누가 암구호도 안 댔는데 문 열라고 했어?》 《주번사령님이…》 《닥쳐! 주번사령 아니라 련대장이 와도 암구호 안 대면 문 열어주지 말라는 불침번근무수칙도 몰라? 이 내무반놈들 온통 김빠져서 안되겠다. 기상!》 사병들이 침상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업어가도 모르게 잘 때도 기상구령소리를 들을 귀구멍만은 환히 열어놓고있기에 습관된 사병들이였다. 《소대전원 완전군장으로 <사전>에 집합!》 《사전》에 뛰여나간 사병들에게 주번사령이 구령을 치는 소리가 불침번자리에 앉아있는 진호의 귀에까지 들렸다. 《구보로 열바퀴 돌아! 한놈이라도 락오자 생기면 스무바퀴 돌게 할거다!》 진호는 그만 속이 새까매졌다. 자기가 불침번근무수칙을 위반했다고 소대전원이 집단기합을 당하고있는것이다. 소대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주번사령에 대한 증오가 불길처럼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어쩌는수가 없었다. 사병에게 있어서 장교는 절대권자인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나도 그저 당하기만 해야 하는것이 사병의 위치였다. 이윽고 집단기합에 녹초가 된 소대원들이 헉헉거리며 내무반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첫 동작으로 진호에게 주먹질, 발길질이였다. 진호보다 늦게 입대한 신병들만이 그냥 지나갔지만 그들의 눈에서 쏟아져나오는 무언의 원망이 오히려 주먹질보다 더 아팠다. 보복은 다음날 일요일에도 계속되였다. 내무반에서 몇몇 고참들과 함께 막걸리내기화투를 치던 분대장 황중사가 울적한 얼굴로 침상에 앉아있는 진호를 불렀다. 《야, 이리 와.》 얼른 일어나 뛰여갔더니 군화를 벗어던졌다. 《이거 갖구 가서 악센부리(새것)하구 바꿔와.》 군화가 좀 낡긴 했지만 꼭 신품과 바꿔야 할 정도는 아니고 더우기 피복류를 공급, 교체하는 일이 진호 담당이 아니였지만 명령이니 불복할수가 없었다. 보급계에 뛰여갔다. 문에 쇠가 채워있었다. 영외외출을 했나? 아니면 영내 어디에 잠간 갔나? 근 30분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할수없이 내무반에 돌아갔다. 《너 어디서 농뗑이 부리다가 인제야 오는거야? 군화도 못 바꿔오구, 엉?》 황중사가 그 군화로 진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사정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야, 저기 내 침상밑에 세탁물 있는데 그걸 빨아와!》 《…》 《이 새끼 왜 대답 안해? 어제 밤 불침번때 사고친 죄 씻기 위해 하라는거다. 복창해!》 《예, 필승! 어제 밤 불침번때 사고친 죄 씻기 위해 빨래하겠음, 복창 끝!》 《좋았어, 빨리 가서 실시해!》 세탁물이란것이 발고린내나는 양말과 빤쯔였다. 치가 떨렸다. 차라리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기합을 당하면 당했지 이거야 너무 지독한 학대가 아닌가. 세면장에서 세탁물을 주무르자니 막 구역질이 났다. 문득 선아의 해맑은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가 지금의 자기 꼴을 보면 얼마나 놀라고 불쾌해할것인가. 창피했다. 이러한 모욕을 당하고있는것으로 해서 자기를 믿고 사랑하는 선아까지 모욕하는것만 같았다. 《주상병 아냐? 뭘 하고있나?》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권학범소위였다. 대대내 위관급장교들중에서 그중 지성도가 높은 장교라는 소문이 난 소대장이였다. 진호는 1중대 소속인데 2중대 3소대장인 그는 강남서점주인 정종기와 친한 사이였다. 진호가 그와 장교 대 사병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통성을 하고 사귀는 벗처럼 인사를 나눈것도 그곳 강남서점에서였다. 권학범소위는 진호가 대학재학중에 징집돼 나온 《학사사병》이라 해서 그런지 단둘이 만날 때면 야, 너, 하고 막 부르지 않았다. 《일요일인데 왜 외출도 안했나?》 권학범소위는 주번사령완장을 두르고있었다. 《증을 못 받았습니다.》 진호는 손에 묻은 비누거품을 털어버리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아침에 외출증을 떼달라고 소대장에게 제기했다가 퇴방을 맞았던것이다. 《왜? 응, 어제 밤 불침번 서다가 조중위한테 걸려서 집단기합당했다면서? 그 사람이…》 권학범소위는 랭소를 머금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병들을 심하게 다루기로 소문난 조중위에 대한 비난이 나오려 했지만 사병앞에서 장교흉을 보기가 안돼서 참는것 같았다. 《외출 안해도 괜찮겠나?》 《서점에 좀 나가볼 일이 있습니다.》 《그럼 세탁 빨리 끝내고 가서 기다리게.》 그로부터 한시간후 주번사령 권소위가 갖다준 외출증을 내보이고 영문을 통과한 진호는 곧장 강남서점으로 갔다. 《어머, 오셨어요. 어서 들어가보세요.》 정종기의 부인이 서점에서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눈빛이 조용하고 따뜻해보여서 언제 만나도 편안한감을 주는 그가 서점을 보고있었다. 정종기는 살림방에서 독서하고있는 모양이였다. 서점 안쪽벽에 살림방과 통하는 문이 있었다. 문앞에서 가볍게 인기척을 내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난 누군가 했지, 어서 들어오시오.》 정종기가 두레상우에 펼쳐놓은 책을 치우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진호의 손을 꽉 잡는 그의 손이 크고 두툼했다. 몸집도 커서 가뜩이나 좁은 살림방이 더 좁게 느끼게 하는 사람이였다. 《오늘쯤 주형이 나타날줄 알았지, 어제 귀대한거지요. 고생깨나 했겠소.》 목소리도 저음으로 우렁우렁 울려서 여유있는 정감을 안겨주었다. 진호는 오면서 산 《진로》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놓았다. 《그새 별고없었습니까?》 《자그마한 책방주인에게 무슨 별고가 있겠소. 근데…》 정종기는 진호가 꺼내놓은 술병을 슬쩍 보고 의아쩍게 물었다. 《술이야 우리 집에도 있는데… 불쾌한 일이라도 있은게 아니요?》 《뭐 별로… 선배님이 괜찮으시다면 한잔 하고싶어서요.》 그날 따라 진호는 술이라도 콱 마시고싶었다. 《사내대장부가 술을 마다할수 없지.》 정종기가 쾌히 동의하고 가게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예, 이제 들어가요.》 부인이 들어와서 책상서랍에서 편지를 꺼내여 진호에게 주었다. 《닷새전에 온거예요.》 선아의 편지였다. 진호는 세면장에서의 그 기분이 되살아나 얼른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후에 보지, 편지를 바지주머니에 넣 었다. 잔잔한 미소가 어린 눈으로 진호를 바라보는 안해에게 정종기가 물었다. 《가게에 손님 없지?》 《예, 아까 두 손님이 왔다간 후에 아무도 안 오네요.》 《그럼 문 닫고 안주 좀 준비해주지 않겠소? 주형이 술 사가지고 왔구먼.》 《그러죠.》 부인이 얼른 일어나 서점문을 닫으러 나가더니 곧 다시 들어 왔다. 서점뒤에 살림방이 있고 살림방뒤에 부엌이 붙어있는 주택구조였다. 《잠간만 기다리세요.》 부엌으로 나가는 부인에게 정종기가 물었다. 《장 봐 오지 않아도 되겠소?》 《고기랑 조금 있어요.》 《그럼 얼른 해주오.》 《예.》 주고받는 말이 다정스러웠고 서로 바라보는 눈길에도 은근한 정감이 넘쳐흘렀다. 그 어떤 가식도 위선도 없이 사는 행복한 부부 같았다. 진호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처럼 자기도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싶었다. 선아와 더불어 그들처럼 살면 얼마나 좋으랴. 《이번에도 선제공격훈련이였다지요?》 정종기가 담배갑을 꺼내놓으며 물었다. 《예.》 진호는 외마디대답을 하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부상자가 더러 생겼다더군요.》 진호가 켜준 라이터불에 담배를 붙이고 정종기가 또 물었다. 그는 부대주둔지역에 살아서 그런지 언제나 부대내 형편을 잘 알고있었다. 《우리 대대에서만도 일곱명이나 생긴걸요.》 진호는 별로 흥이 나지 않았지만 훈련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실은 그러한 이야기나 하려고 찾아온것은 아니였다. 선아의 편지때문에 온것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종기와 뭔가 딴 이야기를 기탄없이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잠시후 그의 안해가 안주그릇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정종기가 두레상우에 하나씩 받아놓았다. 두부탕에 고기볶음, 오이채와 김치가 전부였지만 그 하나하나의 음식에 부인의 알뜰한 솜씨가 엿보였다. 《안주가 변변치 못해요.》 《이것도 너무 과남합니다.》 첫잔을 부인이 따라주었다. 《자 듭시다. 뭔가 마음에 맺힌것이 있는 모양인데 쭈욱 들구 속을 푸시오.》 정종기가 자기 잔을 집어 진호의 잔에 가볍게 찧었다. 진호는 단숨에 첫잔을 비웠다. 독한 소주가 목구멍을 지지며 울적한 가슴속으로 쏟아져내려갔다. 《참, 권학범소위도 오늘쯤 놀러 나올줄 알았는데, 뭐 바쁜 일이 있나.》 정종기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이 진호에게 세면장에서 느꼈던 그 굴욕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말문이 열렸다. 《선배님, 이거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제오늘 겪은 일에 대해서 다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그 울분을 털어놓고싶어서 정종기를 더 만나고싶어진것 같기도 했다. 정종기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안해는 이따금 《어머!》, 《어쩌면!》 하는 외마디소리를 내지르군 했다. 이야기를 끝낸 진호는 제 손으로 술 한잔을 따라서 입안에 활 쏟아넣었다. 정종기도 한잔 따라 마시고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의 안해는 이슬이 맺힌 눈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선배님, 그러한 모욕을 당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개인을 원망하고싶진 않습니다. 어제 밤의 그 주번사령이나 저에게 더러운 세탁을 시킨 분대장도 원래부터 악독한 사람은 아니였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요. 애당초 악한으로 태여난 사람은 없으니까.》 정종기가 웅글은 소리로 동의했다. 《그런데 군에서 고참이 되니까, 장교가 되고 분대장이 되니까 말입니다. 모두들 인격상실자, 폭력만능주의신봉자가 되는겁니다. 왜들 그럴가요?》 정종기가 또 담배를 붙여 물었다. 《<한국군>의 생리탓이 아닐가 싶은데.》 담배연기를 푸실푸실 내뿜으며 정종기가 천천히 말했다. 《군의 생리요? 하긴 강압적몽둥이규률로 통솔되는 군대니까요. 전 가끔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70만병력입니까. 언필칭 <국토방위>라고 하는데 누구의 국토인데 무엇에 대한 방위입니까?》 《그야…》 《북의 <남침위협>때문이란 말입니까? 천만에요. 이번에도 우린 방어전훈련이 아니라 선제타격작전훈련을 했던겁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한다고 저도 군바리노릇하는 과정에 군사원리라든가 병력배치안 같은걸 좀 알게 됐는데 지금 <국군>의 병력배치는 방어전이 아니라 공격전을 위한 배치대형입니다.》 정종기가 옳은 말이라는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누구를 공격한다는겁니까? 북에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있잖습니까. 리념의 차이가 있는건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 아직 북의 리념에 대한 리해가 부족하기때문에 그의 당위성 여부에 대한 인식도 정립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렇다고 <청와대>위정자들이 고창하는 <자유민주주의>에 공감하는것도 아닙니다. 그의 허위와 위선에 분노해서 대학때 운동권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제가 모든 진실을 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했다고 생각하는것도 아닙니다. 설사 저의 인식이 오판이고 <청와대>위정자들의 주장이 정당한것이라 해도 리념의 차이가 있다 해서 같은 동족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겠다는것이 그래 옳은 일입니까?》 《배족적범죄행위지!》 정종기가 단마디로 단죄해버렸다. 주의깊이 진호의 말을 듣고있던 그의 안해도 한마디 했다. 《그래요, 정말!》 《그러니까 배족적범죄행위를 목적해서 조직된 <국군>의 그 생리가 장병들을 온통 패덕한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씀이 군요.》 진호의 말에 정종기가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다는 아니지. 주형처럼 민족적량심으로 자신의 좌표를 찾으려고 하는 장병들이 왜 없겠소. 내가 보기엔 권학범소위도 상황감각이 정확한 량심적인 장교 같더군. 그런 장교, 사병들이 어디 한둘뿐이겠소.》 《맞습니다, 선배님말씀이. 그러나 부정과 사악의 생리가 량심의 사소한 발현도 몽둥이와 군화로 짓밟아버리니 어떡합니까? 어쩌다 이런 극한상황이 된겁니까? 그 근원이 대관절 뭡니까?》 진호는 흥분도수가 점점 더 높아졌다. 전에도 생각해본적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처음 당해본 굴욕도 아니였다. 그러나 어제오늘 그 지독한 모욕을 당한탓인가, 입대후 오랜 기간 가슴 밑바닥에 쌓이고 맺힌 의분이 마구 쏟아져나갔다. 《근원에 대해서 말하자면…》 문득 정종기의 안해가 한마디 하려다가 남편을 슬그머니 쳐다 보았다. 남자들의 이야기에 끼여들어도 되겠는지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정종기가 어서 말해보라는듯이 턱을 약간 쳐들어보였다. 《미국의 대<한>정책에 근원이 있는게 아닐가요.》 《맞소. 근원은 미국에 있는거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정말 자유우방인가? 침략자인가? 주<한>미8군은 왜 철수해가지 않는가? 참 주형이 아까 말했지, 이번의 선제공격훈련때 북상하는 미군기갑부대를 엄호하는 작전도 있었다고.》 《예.》 진호가 역겨운 심정으로 대답했다. 맞다, 미국의 대《한》정책, 그것이 화근인것이다. 주《한》미8군사령관의 작전지휘권에 속해있는 《국군》의 북에 대한 선제공격훈련도 기실은 미군측의 전략적의도에서 출발한것이고 더욱 엄중한것은 그 선제공격에 미군기갑부대가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명백하지 않은가. 부대내에 만연된 그 온갖 비리와 사악도 《대한민국 국군》이 바로 미국의 대북공격전략을 실시하기 위한 고용병노릇을 하고있다는 이 굴욕적예속성의 산물인것이다. 나도 그 고용병의 일원이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비극인가. 진호는 의분이 서리는 가슴속에 또 한잔 술을 쏟아넣었다. 《안주도 좀 드세요. 두부탕 덥혀올게요.》 정종기의 안해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두부탕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선배님, 제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어서 말하시오.》 《딴게 아니구요. 선배님은 대학때부터 모든걸 간파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민족이 겪고있는 비극말입니다.》 《그렇지도 않소. 지금도 모르는것이 많은걸요.》 《그건 겸손의 말씀입니다. 대학신문에 낸 그 수필만 봐도 선배님이 결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였다는걸 알수 있었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졸업후에 이런 생활을 하는것이, 실례 말씀이지만 일종의 은둔생활이 아닙니까? 시대의 선각자로서 해야 할 일도 많겠는데.》 정종기의 안해가 김이 나는 두부탕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여보, 주형이 나보고 은둔생활을 한다누만.》 부인이 가볍게 미소했다. 《제가 잘못 말한거라면 용서하십시오.》 《뭐 대단한 명사처럼 은둔생활을 한다고 할것까지는 없고, 당분간 공부도 하면서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시골생활을 하는겁니다.》 내 말 맞는거지, 하고 동의를 구하듯이 정종기가 안해를 돌아 보았다. 부인의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여났다. 《그렇다면… 알만 합니다. 도약을 위해서 먼저 허리굽힘을 하는셈이겠네요.》 정종기가 껄껄 웃었다. 부인도 소리내여 웃었다. 《제 표현이 적중치 못한것 같은데 아무튼 새로운 활무대로 도약해가기 전의 예비기간이라구 할가요, 아니 그것도 정확한 표현 같지 않네요. 아무튼, 아무튼…》 진호도 웃었다. 아무튼 소리를 되풀이한것이 멋적고 우습게 느껴졌다.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그런지 모르게 한가닥 서러움이 치밀어올랐다. 무엇에 대한 설음인지는 알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감 같은것이 느껴지면서 문득 선아생각이 났다. 《선배님, 제 오늘 말이 많아서 죄송하지만 한가지 더 실토하고싶은것이 있습니다.》 《사양 말구 무슨 이야긴지 어서 하시오.》 《제가 아까 분대장의 세탁물을 주물렀다는 말 하잖았습니까? 아까는 다 실토하지 않았는데요, 제가 실은 그 더러운 세탁물을 주무르면서 이 아가씨생각을 했던겁니다.》 진호는 호주머니에서 선아의 편지를 꺼내여들었다. 《제가 그처럼 비참한 굴욕을 당하고있다는걸 알면 이 아가씨가 필경 진절머리를 칠거라고 생각했던겁니다. 존경과 기대감이 배제된 사랑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굴욕을 그저 당하기만 하는 인간을 어떻게 존경하겠습니까? 그뿐이라면 또 모릅니다. 미국의 한개 고용병이 된 오늘의 제 처지가 얼마나 치욕적인겁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한숨이나 쉬고있는 저의 실체를 알면 사랑은커녕 경멸할겁니다. 그렇다고 속이면서 허세를 부리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고…》 정종기의 안해가 갑자기 진호의 말허리를 자르며 흥분된 소리로 말했다. 《아녜요! 그럴수 없어요! 그건 녀자들의 마음을 너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예요. 선아씰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절대로 그런 아가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확신에 넘쳐 날카롭게 울린 그의 말에 진호는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늘 잔잔한 미소를 짓고있던 그가 갑자기 그렇게 날카로와지고 결연한 어조로 말하는것이 여간만 놀랍지 않았다. 《그건 절대로 진호씨 개인의 허물이 아녜요. 되려 그러한 인식을 갖고 고민하신다는건 진호씰 더 돋보이게 하는거예요. 진호씨가 사랑해온 아가씨라면, 선아아가씨가 남달리 순결하고 지성미도 있기때문에 사랑하셨을거 아녜요. 그런 아가씨에 대한 불신은 곧 모욕이며 배신이예요. 아이 참, 남자들이란… 진호씨 다신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마지막 몇마디는 녀성적인 자존심에서 나온 꾸중 같기도 했다. 하긴 기혼녀들은 흔히 같은 나이또래의 미혼의 남자보다 생활일반에 대해서, 인간의 정서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때문에 미혼의 남자들이 설사 한두살 년상이라도 동생처럼 살뜰히 돌봐주려고 하는것이 무릇 젊은 부인들의 심정인것이다. 《만약 선아가 절 마다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저도 이제 제대되면 복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선배님처럼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조그마한 책방주인노릇을 할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정종기가 물었다. 《새 도약을 위한 허리굽힘이지요.》 정종기가 웃으며 또 물었다. 《물론 선아아가씨하고 결혼한 다음에겠지요?》 《그러문요! 결혼식때 초청할거니 꼭 동부인해서 참석해주셔야 합니다.》 《어머, 비약이 심하시네. 호호…》 정종기도 안해를 따라 웃었다. 첫날옷차림을 한 선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며 진호도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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