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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살아 남은 자
34년만에 열린 감옥문
출소하던 당시의 심정을 좀더 자세히 되살려 보기로 하자. 1988년 10월 27일, 이날 늦가을의 짧은 해가 아직 돋지 않아 몇시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이른새벽 내가 수감되여 있던 청주보안감호소 3사 18방 감방문이 덜컹 열렸다. 《94번 나와, 검방.》 검방이란 감방과 재소자의 소지품을 검열한다는 감옥에서 쓰는 용어이다. 나는 곧바로 교무과장에게 불려 갔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꿈에도 믿지 못할 말이 떨어 졌다. 오늘 내가 이 청주보안감호소를 나가게 된다는것이였다. 과장은 《사회안전법》의 보안감호조치가 《주거제한》으로 변경됐다고 하였다. 충격적이였다. 청주에서 기약 없는 감호살이만 12년째, 그 이전의 징역까지 합치면 34년간의 감옥살이였다. 물론 그해 5월 25일 서준식동지가 비전향상태로 이곳에서 석방되였을 때 어떤 동지들은 《우리들의 감옥살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망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심 믿지 않았었다. 그는 재일교포인데다 국제적으로 석방운동이 계속되여 오는 등 우리들과는 조건이 상당히 다른 사람이였기때문이다. 그런데 나가라니… 교무과장의 전에 없는 진지한 얼굴에서 나는 내앞에 놓인 현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충격은 서서히 기쁨으로 변하여 가슴에 차올라 오고 있다.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저들에게 붙잡혀 갇혀 있던 나날이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투쟁의 세월이기도 했다.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전향서에 도장을 찍지 않고 버틴 나를 저들이 진실로 무슨 리유로 내보내려는지는 알수 없지만 마치 큰 은혜나 베푸는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거기에 감지덕지하면서 나갈수는 없다. 과장이 늘어 놓는 말을 귀전으로 흘리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불쑥 나는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여보시오. 과장, 감옥살이 34년에 청춘은 가버리고 머리가 허옇게 되여 죽을 날이 다되였소. 이제 내보내 사회시설에서 죽게 하는것이 인도적처사요? 나는 못 나가오. 죽어도 여기서 죽겠소.》 과장은 약간 인상이 굳어 지는듯 하더니 전에없이 친절한 말투로 《가둬 두라는 사람 내보낼수도 없지만 내보내라는 사람 가둬 둘수도 없는게 우리 립장임을 리해하라.》고 했다. 그의 말소리는 낮았지만 나를 내보낼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검열을 끝낸 소지품을 간수가 싸들고 왔고 군복 비슷한 작업복을 내주며 갈아 입으라고 했다. 오냐, 나가마. 저들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나 같은 늙은 고목이 감옥에서 나간다 해도 무슨 기력이 있어 투쟁하랴 하고 마음 놓을수 있다. 등치고 배 만지는것 같은 수작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나로서의 결심은 이미 섰다. 신념을 고수하기 위한 나의 투쟁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될것이였다. 잠시후 나의 주거지로 지정된 양로원까지 나를 데려 갈 형사 두사람이 왔다. 따라 나가 그들이 가져 온 차에 탔다. 시동을 건 자동차가 움직인다 했더니 어느새 감옥문을 빠져 나왔다. 담밖으로 나온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솔직히 말해서 정말 반가왔지만 한편으론 《정말 나왔는가》만 싶고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감방에서는 해빛을 보기가 어려웠던터라 차창으로 비치는 해살이 눈 부셔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머리속으로는 온갖 생각들이 스쳐 간다. 다른 동지들은 언제쯤 나오게 되는가… 《주거제한》이라는 딱지아래서 저들은 나를 또 얼마나 감시할것인가… 혈육 한점 없는 땅에서 늙고 병든채 낯 선이들에게 페를 끼치며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것이 낫지 않을가… 동지들은 언제쯤이나 만나볼수 있을가… 어느 사이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구세군양로원에 도착했다. 종교단체인 구세군이 운영하는 양로원이라는데 관악산 기슭밑에 숲으로 싸여 있어 그런지 공기도 좋고 흙냄새도 구수했다. 형사들은 나를 사무실로 데려 갔다. 20대 후반쯤 되여 보이는 성이 리씨라는 총무처녀가 웃음 띤 얼굴로 맞아 주었다. 총무처녀는 대장에다 내 이름과 인적사항 등을 적느라 형사와 문답하다가 순간 눈이 둥그래진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소한 로인네가 온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직접 대하고보니 놀랄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양로원에 오는 늙은이들이야 집도 친척도 없는게 보통이겠지만 나의 경우는 유독 호적도, 주민등록번호도 없었기때문이다. 약간의 절차를 밟은후 총무처녀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사무실에서 50m정도 떨어 진 제법 우거진 나무들속에 단층집이 몇채 들어서 있었다. 현관에 들어 서니 왼쪽에는 방들이 렬 지어 있고 오른쪽은 대청 겸 복도였다. 나는 그중 중간쯤에 있는 방에 들게 되였다. 식당, 변소 등을 자상하게 일러 준후 《식사때까지 편히 쉬세요.》하는 말을 남기고 총무처녀는 방을 나갔다. 갑자기 맥이 빠져 벽에 기대 먼산을 보는데 방문이 눈에 들어 왔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로 한걸음 나섰다. 《문이 열려 있다!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방문이 잠겨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것도 아닌데 34년만에 막상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방밖으로 한걸음 나서보니 전신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감개가 북 받쳤다. 마침 아무도 없었기에망정이지 누가 보았다면 새로 온 늙은이는 미친 령감이라고 소문이 났을것이다. 방에 다시 들어 온 나는 자신의 처지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결코 자유로운 몸이 아니였다. 나는 여전히 《사회안전법》상의 《주거제한》처분을 받고 있는 처지였으니까. 보안감호소에 가둬 두라는 보안감호처분이 《주거제한》처분으로 변경되였을뿐이였다. 나는 주거지가 없는 행정구역을 허가없이 벗어 날수 없었다. 벗어 나자고 할 때는 관할경찰서에 신고를 하여 허가를 받아 떠나야 하고 내가 방문한 행정구역의 경찰서에 가서는 왔다고 신고를 해야 하며 돌아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3개월에 한번씩 그동안의 생활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한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돌아 다녔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낱낱이 밝혀야 하는것이다. 내 마음대로 이사를 갈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부자유는 내가 《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이기때문이라는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쇠사슬이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바뀌였을뿐이였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 와 눈을 감고 앉았다. 머리속은 텅 비여 버린것만 같은데 눈앞에 한 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단정하게 입은 저고리에 쪽진 머리,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표정… 어머니…그렇다! 어머니였다. 50년 7월 전선으로 떠나는 이 아들앞에서 눈물을 보일수도 없고 웃음을 띠기도 힘들어 어머니는 그런 표정으로 아들을 보내셨다. 이제는 어머니도 저세상사람이 되셨을것이다. 불효한 이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지친 몸으로 눈을 감았을것이다. (아! 어머님, 환갑도 림종도 못해 드린 이 아들이 머리가 허연 일흔둘이 돼서야 옥문을 나왔습니다. 어머님묘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그날은 언제나…) 생각을 잇다가 그만 목이 메였다. 조국통일의 그날, 어머니묘소에 성묘할 그날이 곧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일흔을 넘긴 고혈압환자에겐 하루하루가 알수 없는 나날인것이다. 나뿐아니라 오랜 령어생활을 한 동지들중엔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동물성지방 과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고혈압은 장기간의 구속에 의한 정신적압박이 원인이 아닐가 싶기도 하다. (만약 혈압이라도 터져 반신불구가 된다면…) 아침에 차속에서 하던 생각을 다시 이어 갔다. (구차하게 낯 선이들 짐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게 옳겠다. 그전에 나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어떤것이 있을가?) 무심코 시선이 가닿는 방구석에 원주필이 한자루 굴러 있었다.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세라 나는 얼른 가서 주어 들었다. 감옥에서는 죄수들에게 필기도구를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편지를 쓰러 나가서 잠간 만져 볼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남쪽에 연고자라고는 없는 내가 편지를 쓸 곳이 있을리 만무했다. 이래저래 펜을 만져 본지도 징역해수만큼이나 되였던것이다. 펜이 있었다면 무엇을 했겠느냐고 물으실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일기니 자서전이니 하는것을 쓰지도 않았겠고 써봐야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종군기자로서 내가 취재하고 목격한 수많은 동지들의 영웅적인 행적만은 반드시 기록해 두고 싶었다. 34년 감옥살이하는 동안 나는 그 기억들이 내 머리를 떠날세라 밤이나 낮이나 지리산에서 내가 보고 들은것을 되새기군 했었다. 보안감호소 초기에 잠간 한방에 세명씩 기거했을 때 나는 같은 방에 있게 된 기억력이 비상한 젊은 동지에게 내 머리속에 든 지리산유격대의 력사를 일러 주고 좀 외워 두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다. 자꾸만 나이 먹어 가는 내 머리나 육신을 믿지 못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본인의 절실한 체험이 아니였기때문이여서일가? 한주일쯤 지난 뒤 다시 물어 보니 이 동지가 지명이니 인명들을 모두 잊어 버린게 아닌가. 할수없이 젊은 동지에게 의지할 생각을 버리고 다시금 내 기억들을 다져 나갔는데 얼마후 그 동지는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젊은이가 늙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버렸으니 사람의 일이란 알수 없는것이다. 나는 손안에 있는 원주필을 만지작거리며 내 기억들을 되도록 빨리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산에서 《조국통일 만세!》를 웨치며 죽어 간 동지들의 청춘과 투쟁과 애국심을 기록해 후세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이 일이야말로 죽을 날이 다된 인민군종군기자의 최후의 임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앉아 있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이 되였다. 나와 함께 지내게 될 세사람의 로인이 하나씩 방으로 돌아 왔다. 한사람은 벙어리였고 또 한사람은 딸 하나밖에 없는데 딸네 집도 가난하여 양로원에 왔다는 늙은이였다. 나머지 하나는 상당히 건달기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였다. 그는 들어 오자마자 새로 온 나를 흘끗 보더니 인사 한마디없이 방바닥에 철썩 앉아 화투패부터 떼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나를 방식구로 하는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듯 하였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감옥밖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흘러 갔다.
처음 먹어 본 약밥
불안한 하루밤을 지내고나니 뜻밖에도 궁중교회의 박홍자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가 찾아 왔다. 너무나 반가왔다. 그들은 나에게 입힐 내의, 샤쯔, 바지, 잠바 등 옷가지 일체에다 허리띠, 시계까지 사가지고 왔다. 나는 비로소 감호소에서 입고 나온 군복 비슷한 작업복을 벗고 30여년만에 사회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서툰 솜씨로 허리띠를 매고 시계를 차며 그들의 자상한 마음씀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박홍자사모님은 내가 있는 방도 살펴 보고 총무처녀에게 인사도 하고 하더니 나에게 나가자고 하였다. 자기 집에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는것이였다. 두사람과 함께 나와 보니 문앞에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차라고 하였다. 다리를 저는 나를 위해 마음을 쓴것이였다. 차를 달려 궁정교회의 목사사택으로 갔다. 사택에 들어 서니 목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현관에 들어 서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안방도 있고 건넌방이 있고 마루도 있고 부엌에서 맛 있는 음식냄새가 풍겨 나오는 그런 집에 들어 서본게 대체 얼마만인가… 50년 7월 흥남의 내 집에 어머님, 안해, 어린것을 두고 떠나온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나를 보내며 우는지 웃는지 모호하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스쳤다. 내가 좋아 하는 풋고추와 된장을 챙겨 놓은 밥상을 들고 들어 오던 안해… 곧 사모님과 리전도사가 상을 들여 왔다. 30여년간 꽁보리밥 한덩어리로 허기를 채워 온 내가 한스러웠던지 사모님은 이것저것 맛난 음식을 많이도 만들었다. 음식들이 얼마나 맛 있었는지를 자꾸 주어 섬기면 주책스러운 늙은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뜻한 안방에 앉아 식사를 해본것이 40년전 내 집을 떠난후 처음이고 보면 이런 심정을 조금은 리해할수 있으리라. 많은 음식중 약밥이 특히 맛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약밥을 처음 먹어 보았던것이다. 그 말을 했더니 사모님은 《함경남도에서는 약밥 안해 먹는가봐요.》 하였다. 그건 아니였고 일제때는 나를 키워 주신 외삼촌이 돈이 많은분이였지만 《이웃은 피죽도 못 먹는데 별미가 다 무엇이냐.》 하면서 검소하게 사셨기때문에 구경을 못하였고 광복후에는 너무 바빠 그런 음식을 찾아 먹을새가 없었던것이다. 남쪽에 와서는 바로 전날 감옥에서 나온 나였으니 더더욱 먹을 기회가 없었을수밖에. 이 말을 들은 사모님이 《아이고, 세상에…》 하더니 부엌에 가서 약밥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왔다. 갈 때 가져 가라는것이였다. 이후로도 나는 궁정교회에만 가면 약밥을 얻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차대접까지 받고 있는데 목사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태껏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이제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여 앞으로의 일을 하느님께 맡겨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목사인 그로서는 당연히 할만 한 얘기였지만 나로서는 대답하기가 난처하여 그저 웃고만 있었다. 34년간 감옥에서 전향하지 않았던것이 결국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기 위해서였던가. 말도 안될 일이였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전향》을 의미하는것이 아닐가. 나의 심정을 엿보았는지 옆에서 박사모님이 남편을 만류하는것이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 말에 목사님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리다.》 그후로는 사모님은 물론 목사님도 두번 다시 나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립장에서가 아니라 나의 립장에 서서 도움을 주는 그들부부와 리전도사가 정말 고마왔다.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의 최후의 임무
양로원생활은 상당히 힘들었다. 배가 고프거나 추위에 떠는것도 아니였는데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내 성격탓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양로원생활이 내가 30여년간 동지들과 함께 해온 공동체생활과 너무나 다르다는데 있었다. 기본적인 식의주는 해결되지만 결코 윤택하다고는 할수 없는 생활이다보니 로인들은 점점 더 재물에 탐욕스러워 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술 궂어 지는듯 하였다.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도 과자 한봉지를 가지고 싸움을 벌리기가 일쑤였다. 물론 과자구경하기가 어려운데도 있지만 당시는 크리스마스다, 년말년시다 하여 위문품을 든 자선단체들이 하루에 두번씩 왔다 갈 때도 있을 정도여서 간식거리들이 흔한 편이였다. 그런데도 로인들은 하나라도 더 챙겨 자기 옷장속에 넣어 두려고 아귀다툼이였다. 보리밥 네숟가락에 배를 곯으면서도 삼엄한 감시를 피해 동지에게 빵 한봉지라도 건네주려고 한주일을 벼르던 우리 동지들의 삶의 자세와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 한방에서 한이불을 덮고 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로인들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 총무처녀가 와서 타이르고 꾸짖기도 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서로 다른 방으로 떼여 놓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공연히 총무처녀 보기가 민망하여 나라도 말썽없이 지내야겠다싶었다. 그래서 누가 뭐라 듣기 싫은 소리를 하여도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위문품이나 박사모님이 들고 오는 간식거리들도 모두 한방 로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얼마후 나는 내가 양로원들사이에 《새로 온 바보늙은이》로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시비를 걸어도 반응이 없는데다 제 먹을것을 죄다 남 주어 버리니 바보로 보였던 모양이다. 총무처녀는 내 사는 모양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남몰래 은근한 친절을 베풀군 하였다. 간혹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사무실에서 내 방까지 100m는 될터인데 무선전화기를 가지고 와 통화를 할수 있게 해주었다. 로인들이 모두 100여명이나 되기때문에 급한 용무가 아니면 전화가 와도 바꾸어 주지 않고 나중에 용건을 전해 주는게 보통이였는데 말이다. 후에 다른 양로원에 있던 동지들에게 들으니 거기서는 전화가 와도 바꿔 주기는커녕 전화 왔다는 사실조차 알려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고 하였다. 양로원로인들이 먹을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리는 광경을 보면 볼수록 동지들이 그리웠다. 이따금 서준식동지가 찾아 와 감호소에 남아 있는 동지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고령자로부터 한두사람씩 계속 내보내고 있는데 나처럼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은 전국의 양로원이나 갱생보호소 같은 곳에 한사람씩 뚝뚝 떼여 수용해 놓았다는것이였다. 서동지는 감호소시절이나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나이벌 되는 우리들을 자기 손으로 돌볼 여건을 만드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감옥살이를 시작할무렵 현해탄건너 일본땅에서 태여난 아기가 20대 청년이 되여 조국을 찾아 와 이 땅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과 만나게 되고 마침내 뜻을 함께 하게 된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한방 로인들은 낮이면 방에 붙어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모두들 구경거리나 소일거리를 찾아 다니는것 같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책들을 보는데는 안성맞춤의 환경이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들고 앉아 있노라면 활자사이로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군 하였다. 《조국통일 만세!》를 웨치며 산에서, 형무소에서, 감호소에서 죽어 간 수많은 조국의 아들딸들, 34년 감옥생활로 청춘은 가버리고 이제 백발이 되였다 한들 내 어찌 그들을 잊을것인가. 나는 이미 양로원에 온 첫날에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결심을 했댔다. 여건이 허락치 않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을뿐이였다. 그런데 더는 그 일을 미룰수 없다고 깨닫게 한 날이 왔다. 지리산에서 함께 싸운 동지들을 모독한 책자와 텔레비죤극을 보았던것이다. 《남부군》이라는 책도 보고 리병주라는 작가가 쓴 《지리산》이라는 소설을 텔레비죤극으로 각색하여 꽤 오래동안 방영된 프로를 양로원 로인들속에 끼여 지켜 보면서 나는 비분에 몸을 떨었다. 지금쯤 지리산 어느 기슭에서 한줌의 흙으로 잠들고 있을 조국의 아들딸들, 그들이 적의 총탄에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웨쳤던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의 절규들… 지리산근처에도 안 가본 작자들, 지리산유격대의 변절자들이 그날의 함성을 롱락하고 있었다. 더이상 침묵할수는 없었다. 내 나이 일흔둘, 인생의 마지막황혼을 바라보며 지난 날 지리산의 력사를 기록해야 한다. 더불어 그들이 어떻게 교형리들의 악형속에서도 신념을 지켜 싸웠는가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것이 인민군종군기자의 마지막임무이기도 하다. 나는 이 하나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살아 남았던것이 아닌가. 이런 결심을 세우고 머리속에서 다시한번 기억을 더듬어 나가노라니 나의 곁에서 떠나간 동지들이 더욱더 못 견디게 그리워 졌다. 동지들이 죽어 간 보안감호소 사동옆에 피였던 개나리를 생각하며 나는 우선 그들에게 바치는 서툰 노래를 하나 지어 보았다.
그때로부터 매일 나는 한방 로인들이 외출한 틈을 타서 기억들을 기록해 나갔다. 지리산에서의 유격투쟁외에도 내가 목격한 일제하의 항일투쟁, 50년대이후 좌익수들이 처한 가혹한 환경들도 기록에 포함시켰다. 막상 쓰다보니 기억이 불투명한 부분들도 상당히 있어서 우선 1차로 기억해 분명한 부분들부터 기록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쓸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러나 전향을 거부한 《빨갱이》로 《주거제한》이라는 딱지아래 감시 당하고 있는 내 처지에서는 집필조차도 남의 눈을 피해야 했다. 우리를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키려는 자들이 의연 권력의 자리에 있는한 기록을 세상에 발표할 때까지는 원고집필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래서 같은 방 로인들이 외출했다 돌아 오는 저녁시간이후에는 눈을 감고 머리속으로 옛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그들이 나가고 없는 낮동안 그것을 원고지에 옮기군 하였다. 그러나 낮이라고 해도 다른 방 로인들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 오기도 하고 양로원직원들도 한번씩 들여다 보군 하였기때문에(양로원의 총무처녀나 간호사는 정말 친절하게 나를 돌봐 주었다. 고혈압에 나쁘니 담배 끊으라고 간호사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들이 나를 감시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으나 원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게 좋을것 같았다.) 집필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였다. 써나가다보니 빠뜨리고 지나왔구나 싶은 부분이 뒤늦게 생각나군 하였지만 우선 초고를 완성해서 안전하게 보관해 놓고 다시 틈틈이 보충하는게 좋을것 같아 초고를 빨리 마치는 방향으로 서둘렀다. 일흔두살이라는 나이와 여지없이 파괴된 육체가 언제 쓰러질지 나도 장담할수 없었고 《보안관찰법》이라는것이 언제 다시 나를 덮쳐 담장안에 집어 던질지 예견하기 어려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서의 마지막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였다.
부칠수 없는 편지
세월은 빨라 어느덧 해가 바뀌였다. 양로원에서 설날에 떡국을 먹고 텔레비죤에서 제수를 진설하는 법이 어떻고 하는 방송을 보면서 고향생각이 아니 날수 있겠는가. 1900년생이시니 살아 계신다면 어머니는 아흔이시겠지. 하지만 아직껏 이 세상에 계시리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홀어머니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중로동으로 청춘을 보내신분이 며느리, 손녀 얻어 잠간 삶의 재미를 맛 보시는듯 하다가 다시 유복자 아들을 잃으셨으니 그 마음의 심화가 오죽하셨을것인가. 이제 34년만에 옥문을 나왔으나 아직도 어머니제상앞에 절 한번 올리지 못한 나, 새해아침 어머니를 생각하다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를 썼다. 써도 부치지 못할 편지, 부친다 해도 받아 보실분이 안 계실 편지였다. 소용 없는짓인줄은 알고 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을것 같았다. 비록 부칠수도 없는 편지였지만 그것은 어머니께 드리는 나의 마음이였으므로 나는 그 편지를 간직해 두었다. 며칠후 새해라고 이것저것 잔뜩 꾸려 들고 찾아 온 박홍자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가 내가 책상으로 쓰고 있던 작은 밥상우에서 이 편지를 보았던 모양이였다. 《이 편지를 고향에 전할 방법이 없을가요?》 《난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허허 웃는데 그들은 기어이 그 편지를 달라더니 가지고 갔다. 얼마후 두사람에게서 련락이 왔는데 《편지를 직접 고향에 보낼 방법은 없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실으면 어쩌면 고향에서 보실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또 설사 고향에서 내 편지를 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걸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뒤말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별것도 아니면서 위험하기만 한 편지를 실어 줄 언론기관이 있겠는가 싶었다. 며칠후 다시 련락이 왔는데 그 편지가 《말》이라는 월간지에 실리게 되였다고 하였다. 《말》은 바른 글을 쓰다 신문사에서 쫓겨 난 기자들이 모여 만든 잡지인데 그야말로 정론지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말》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감호소측은 보수적인 신문사에서 펴내는 시사지조차 일체 구독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재야언론인 《말》은 내가 그 존재조차 알수 없었던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쓴 글을 싣겠다는걸 보니 용기 있는 언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쯤 지났을가. 89년 3월 초였던것 같은데 내게 편지가 한장 왔다. 워낙 오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지라 온통 오랜만에 해보는 일들뿐이였지만 편지 받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마음으로 겉봉을 보니 《말》지의 신준영이라는 기자가 보낸것이였다. 뜯어 보니 내가 쓴 편지가 《말》 89년 4월호에 게재될것인데 책이 나오면 책과 원고료를 가지고 찾아 오겠다는 내용이였다. 내 편지가 활자화된다는 사실보다는 이 나라의 참언론과 거기에서 일하는 기개 있는 젊은 기자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기대속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답장을 보냈다.
젊은 녀기자 신준영
89년 3월 말쯤 《말》지 신기자가 찾아 왔다. 이름과 글씨로 보아 청년이리라 짐작했었는데 뜻밖에 녀학생 같은 녀기자였다. 그런데 체구도 조그마한 사람이 상당히 큼직한 짐꾸레미를 들고 왔기에 뭔가 했더니 창간호부터 그달까지 발간된 《말》지 34권을 모두 싸들고 온것이였다. 《오래동안 신문도 못 보셨을텐데 저희 책을 훑어 보시면 정세를 리해하시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 가져 왔습니다.》 《그 무거운걸 어떻게 들고 왔소?》 《선생님께서 아직 <말>지를 모르실것 같아서 직접 읽어 보시고 판단하시는게 제일 빠르겠다 싶어 힘 좀 썼습니다.》 신기자는 내가 출소후 만나게 되였던 여러사람들과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우리의 현대사, 《사회안전법》, 감옥생활 등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기자는 어떻게 우리들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가?》 하였더니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덕분이라고 하였다. 80년대 들어 대학생들중에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졌는데 이들중 많은 수가 시위를 주동해 교도소에 가고 거기서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듣고 나오기때문에 모두들 장기수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고 있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가 손발 묶여 담장안에 갇혀 있는 동안 이 땅의 나어린 후배들이 이토록 름름하게 자라났구나 싶어 가슴이 벅찼다. 신기자가 다시 한쪽 꾸레미를 풀어 내게 주는데 한 1,000장은 될듯 한 원고지와 원주필 수십자루였다. 《선생님께서는 원래 기자의 임무를 띠고 남쪽에 내려 오셨는데 감옥 사시느라 그 일을 다 못하셨다고 봐야겠지요. 이제는 못다 쓰신 기사를 완성하셔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 펜과 원고지를 가져 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당장 발표하시든 발표를 보류하시든간에 구멍 뚫린 력사의 페지를 복원하기 위해 그간 헤쳐 오신 격동의 력사를 지금부터 꼼꼼하게 기록해 나가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신기자의 이 말은 나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다. 《반공》의 허위속에 파묻힌 지리산유격대전사들의 진실을 남몰래 기록해 나가고 있던 나에 대한 커다란 고무였다. 전쟁직후 수만명에 달했다는 좌익수들의 수를 생각하면 감호소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우리들 51명 동지들은 모두들 자신들의 활동령역에서 살아 남은 단 한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단 한사람만 살아 남아도 력사에 진실을 증언할것이라고 웨치며 죽어 간 동지들, 혹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지리산에 뼈를 묻은 동지들, 그들을 위해 살아 남은 내가 할 일은 그들의 진실을 세상에 증언하는것이라고 나는 매 글줄마다에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에 성장한 젊은 후배의 입에서 내 생각과 같은 얘기를 들으니 나는 《이것이 력사와 시대의 요청일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시대의 요청을 재확인해 준 젊은 후배의 지적과 그가 가져 온 원고지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절차가 하나 남았습니다.》 신기자가 흰 봉투와 령수증용지를 꺼냈다. 내가 쓴 편지에 대한 원고료라고 했다. 사양하였으나 《안 받으시면 우편으로 부치겠다.》는 말에 받아 넣었다.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며 령수증에 지장을 찍으라기에 찍었는데 내 이름과 주소를 적던 신기자는 갑자기 소리내여 웃었다. 《선생님, 주민등록번호 없으시지요?》 내게 원고료라는 수입이 생겼으니 세금을 내야 하는데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세금을 물리겠는가, 신기자가 세금청산에 필요한 사항을 적다가 그 점을 나중에야 깨닫고 웃은것 같다. 가방을 둘러 메고 활발하게 걸어 가는 신기자의 뒤모습을 보니 그 옛날 흥남에서 일하는 재미에 밤낮없이 돌아 다니던 내 젊은 날이 떠올랐다. 내 청춘은 갔지만 조국땅에 자라나고 있는 새 세대를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훈훈해 졌다. 이왕 말이 난김에 신기자에 대해 몇마디 더하고 싶다. 신기자는 1963년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생이다. 그는 처음의 수기 《전 인민군종군기자의 수기》가 월간지 《말》에 련재되는데 많은 역할을 했었고 그후 내가 보충한 원고와 나에게서 취재한 자료를 가지고 《리인모》란 한권의 책을 만들어 냈다. 그는 나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했고 가족과 떨어 져 40여년간을 십전구도하며 살아 온 《비전향장기수 리인모》를 만들어 낸 조국의 분렬로 인한 비극을 뼈 아프게 가슴에 새긴 새 세대였다. 신기자와 교제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친딸과 비슷한 정을 느꼈다. 따라서 헤여 질 때는 그 무엇이든 그의 손에 쥐여 주고 싶어 안달아 했다. 이에 대해 신기자도 《분노와 투쟁으로 평생을 일관해 온》 나에게서 《여느 시골로인 같은 소박한 인정을 발견할 때마다 무척 신기해 하였다.》고 쓴바 있다. 그러나 그에게 기울어 지는 나의 정을 어떻게 시골로인의 인정과 같은것이였다고만 말할수 있겠는가. 나는 그에게서 이 땅의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의 다른 한 모습을 보는것만 같았다. 그를 대할 때마다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모든 정치범의 즉시 석방, 올림픽남북공동주최, 미군철수》를 웨치며 투신자살한 조성만렬사와 같은 열혈의 청춘들의 모습을 련상하게 되는것이 무엇때문인지… 아마도 그것은 그런 렬사들의 가슴에 뛰고 있는 정의와 량심의 심장, 민족애의 열정이 신기자의 그것과 같다고 느꼈기때문일것이다. 신준영은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분렬된 민족의 슬픔을 세상에 깨우쳐 주었을뿐아니라 자신이 국제적십자사에 북으로의 나의 송환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으로 나의 송환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어쨌든 출옥이후의 나의 생활은 신준영과 불가분리적으로 련결되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것이다. 신준영과의 상봉이후 나는 《말》지를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겉모양은 화려하지 않지만 내용이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부분의 기사들이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읽고 리해할수 있을 정도로 쉽게 씌여 진것이 마음에 들었다. 언론은 대중의것이여야 하니까. 양로원에서 300m쯤 나가면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가 나오는데 그 길가에 책방이 하나 있다. 거기 나가 책구경을 하는것도 내 일과중의 하나였다. 물론 책은 거의 안 사는데 고맙게도 책방주인이 박대하지는 않았다. 《말》지를 알고 나서보니 그 책방에 《말》지도 있었다. 주인에게 잘 팔리냐고 했더니 잡지중에서는 많이 나가는편이라고 하였다. 그무렵부터 나는 《말》지의 애독자가 되였다. 고맙게도 신기자는 매달 꼬박꼬박 책을 거저 보내주었다.
《사회안전법》대신 《보안관찰법》
그해(89년) 5월 6일에는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다. 서준식동지가 배필을 맞은것이다. 신부는 서동지보다 열몇살 어렸는데 몸매는 가냘파 보이면서도 눈빛이 또렷한 녀성이였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과연 새 세대가 왕성하게 자라나고 있구나 하고 다시한번 실감할수 있었다. 두사람이 서로 가르치고 이끌며 훌륭하게 살아 갈것을 기원하였다. 또한 결혼식장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던 동지들을 만나 너무나 기뻤다. 결혼식장에 오면서도 입고 올 양복이 없어 잠바들을 걸치고 온 머리가 허연 늙은이들이 서로 부여안고 어린애들처럼 즐거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른 하객들의 눈에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든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우리들은 그저 반가와 어쩔줄을 몰랐다. 그런데 듣자니 몇몇 동지들은 담당형사의 제지로 식장에 오지 못하였다 한다. 서동지의 결혼을 축하하고 오랜만에 동지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잠을 설쳤을 그들이 집에서, 양로원에서 방안에 갇혀 분을 삭이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해 5월 《사회안전법》이 페지되였다고 하더니 곧 이어 6월 16일 《보안관찰법》이란 새법이 대신 생겨 났다. 《사회안전법》에서 보안감호조항 즉 감호소에 집어 넣는 처분은 없어 지고 보안관찰과 《주거제한》처분만이 남았다. 언뜻 보면 감시가 약화된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였다. 보안관찰이나 《주거제한》처분을 당하는 우리들은 자신의 생활에 대해 여러 항목에 걸쳐 자세하게 또 자주 신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어길 때는 교도소로 보낸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즉 변화는 감호소대신 교도소라는것일뿐이다. 이 법에 의하면 나는 담당형사가 가지 말라거나 만나지 말라는 사람은 만나서는 안되며 그들이 부르면 반드시 달려 가야 하고 그들이 정해 주는 곳에서만 살아야 했다. 하여간 이 모든것중 어느것이라도 위반할 때에는 교도소에 보내 2년이하의 징역을 살리겠다는게 새로 공포한 《보안관찰법》이였다. 그해 11월 나는 이 법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다. 그무렵 《민가협》에서 《사회안전법》출소자환영대회라는 행사를 마련했는데 행사날 새벽부터 형사가 양로원에 와서 못 간다는것이였다. 젊은 형사들이 완력으로 등을 떠미는데 내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하루종일 방안에 앉아 울분을 삭이는수밖에. 나중에 들으니 그날 탈출에 성공해 《무사히》 행사에 참석한 동지들은 6명밖에 되지 않았다는데 그나마 모두들 귀가길에 경찰에 잡혀 가 수모를 당했고 형사립건된 동지도 있다고 하였다. 나이도 많고(당시 78살) 지리학 교수출신으로서 학식과 인격으로 우리 동지들에게 존경 받아 온 최남규선생은 이때 경찰서지하실에서 알몸으로 취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스도교인과 사회주의자의 친교
89년 10월 10일에 있은 일이다. 남에서 나는 10월 10일을 생일이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되였는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에 더 쓰지 않겠다. 그날은 나에게 조선로동당원이라는 자각을 굳게 해주는 날로 되여 왔다. 이날도 나는 양로원의 정적속에서 풍산의 나날을 더듬어 보고 있는데 박사모님이 생일을 축하 드린다며 자기 집에서 생일상을 차렸다고 하여 비로소 《내 생일》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또 《몇십년만에 처음》하는 소리가 나올판인데 사실이 그랬다. 친척 한사람 없는 남쪽땅 서울에서 잘 차린 생일상을 받은 내 마음이 어떠했으랴. 리미순전도사 또한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항상 살갑게 굴었다. 나 역시 그 모습이 친손녀같이 귀여웠고 아예 《미순아》 하고 부를 정도로 친숙해 졌다. 미순이는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갈 때면 내가 넘어 지기라도 할세라 꼭 내 손을 잡고 걷는다.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이 두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감호소에서 자매결연하였던 여러 가족 없는 동지들에게도 꾸준히 정성을 쏟고 있다. 정기적으로 찾아 가 위안하고 명절이면 쓸쓸할세라 자기 집에 초대하고 가끔씩 음식점에 데려 가 별미음식을 맛 보게 하는 등 그들의 정성을 라렬하자면 끝이 없다. 한두번 생색내고 마는것도 아니요, 몇년째 한결같이 정성을 쏟는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고 두사람이 우리들을 먹고 입히는데만 열성이였던것은 아니다. 두사람은 《우리가 장기수로인들을 계속 만나다보니 많이 물들었다.》고 우스개소리를 자주 하는데 그들은 우리 장기수들의 인권보장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극성스러운 운동자이기도 하다. 89년 가을이던가 당시 평민당에서 량심수의 인권문제를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는데 박사모님과 리전도사는 여기에도 달려 갔던 모양이였다. 당시에 보안감호소는 문을 닫은 뒤라 대전교도소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의 석방문제가 중요관심사였다. 박사모님은 서승동지(서준식동지의 친형, 함께 구속되여 당시에도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었다.)의 자매결연자로서 이미 몇차례나 평민당인권위원회에 서동지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낸바 있었다. 그런데 서동지의 석방문제는 《한가위에 나올 가능성이 있다.》, 《성탄절에 나올것이다.》 등등 소문만 떠돌뿐 계속 안개속이였다. 강연회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김대중총재도 참석하였던 모양이였다. 강연회가 끝나고 김총재가 퇴장하기 위해 단상에서 내려 오는데 기회를 노리던 박사모님이 쏜살같이 달려 가 김총재를 가로 막았다. 《서승씨 나오는겁니까, 못 나오는겁니까?》 갑자기 웬 부인이 자기앞을 막아 서며 높은 목소리로 량심수문제를 따지고 들자 로련한 김총재도 약간 당황한것 같더라고 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박사모님은 우리들을 만나기전까지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이 조용히 신앙생활에 정진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드세거나 넉살이 좋은 성품도 아닌 조용한분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야당총재를 가로 막고 서서 서승동지의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니 박사모님도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한번은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동네에서 제가 미운 살이 박혔나봐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동네가 《청와대》 바로 옆에 위치한 궁정동이라 이런저런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며 《청와대》부속기관에서 동네사람들을 초대한 《미소작전》이 있었는데 유독 박사모님은 빼놓고 부르더라는것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불안해 하거나 최소한 속상해 할만 한 일이겠지만 그는 전혀 괘념치 않는것 같았다. 박사모님과 리전도사는 내가 남쪽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로 가장 믿고 좋아 하는 사람들중의 하나다. 혹 어떤이는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인과 사회주의자가 어떻게 그토록 각별한 정을 나눌수 있을가 하고 말이다. 물론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나 같은 《빨갱이》를 돌봐 주는 까닭은 무엇일가. 그들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들이 오직 사상이 다르다는 리유로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학대 받는것을 깊이 동정하며 자신들이 할수 있는한 우리들을 보살펴 왔다. 그들은 우리 동지들과 같은 사람들도 박해 받지 않고 인간답게 살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때 그들이 굳게 믿고 있은것은 그리스도교의 박애정신보다 나라와 민족이 하나로 되여야 한다는 통일념원이였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기때문에 두 그리스도교인들은 나를 돕고 나는 그들을 믿으며 오랜 세월 친교할수 있은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감정, 이것을 지닐 때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서로 정이 통할수 있고 화합할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든 우리는 한민족이 아닌가. 바로 이 감정이 조국통일의 기초가 아닐가 싶다. 그날 박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를 보며 나는 당시 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문익환목사, 림수경학생, 문규현신부를 생각하였다. 198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사이에 평양을 방문하여 남녘땅의 통일운동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기여를 한 《전민련》고문인 문익환목사의 가슴에 끓고 있은것도 이러한 애국애족의 념원이 아니겠는가. 그해 7월 《전대협》의 대표로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가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귀환함으로써 《통일의 꽃》으로 불리운 림수경학생도, 림수경학생의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도와 주기 위해 한몸을 내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문규현신부도 사상과 리념,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북쪽의 동포들도 한민족, 한겨레임을 절감하고 통일성업에 뛰여 든것이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로운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감옥에 가두는 족속들이야말로 극악한 민족반역자, 민족의 원쑤가 아닌가. 이런 자들에게 묶여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니 박홍자 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가 성의껏 차린 생일음식이 목에 걸리는것만 같았다.
《전 인민군종군기자의 수기》를 탈고하다
양로원생활에서 제일 기쁜 때는 동지들이 찾아 오는 때였다. 그들 역시 《주거제한》이라는 딱지때문에 손발이 묶여 있기는 나와 같았으므로 간난신고를 거쳐야 찾아 올수 있었다. 그런만큼 상봉은 더욱 즐거웠다. 동지들과는 주로 지난 날의 투쟁에 대한 회억을 나누었는데 그런 과정에 나는 잊혀 져 가던 사실들을 기억에 떠올릴수 있었고 그것들을 기록으로 옮겼다. 어느 날인가는 서울에서 함북 무산태생의 김병주동지가 찾아 왔다. 그는 지리산유격대에서 나와 함께 싸웠는데 나보다는 퍽 후인 1954년에 체포되였고 10년형을 살았다. 그러니 우리의 재회는 근 40년만이였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그는 다짜고짜로 양로원에서 나와 자기 집에 가서 살자고 강권했다. 무척 고마왔으나 나는 거절하였다. 그가 자식들을 다락에서 재우고 나에게 방 한칸을 내줄것이 뻔했기때문이였다. 그는 2남2녀를 두고 있었는데 집은 방이 두칸이였고 막로동과 로점상으로 겨우겨우 살아 가는 형편이였다. 하기야 《반공》이 살판치는 남조선사회가 유격대출신인 그에게 넉넉한 생로를 열어 줄리 만무했다. 그의 건강도 무척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자기 집에 데려 가려고 찾아 온것이였다. 동지적인 의리라고 할가. 겉보리 한줌을 서로 나누던 지리산시절의 그 변함 없는 동지애가 눈물겨웠다. 이래서 투쟁의 길에서 맺어 진 혁명적동지애는 영원하다고 하는것이리라. 나는 찾아 오는 모든 동지들에게서 그런 동지애를 보았다. 동지들의 그 뜨거운 사랑에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가. … 그때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동지들의 투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것이였다.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모두 그 일에 바쳤다. 나에게서는 그 일이 투쟁이였다. 그 일에서 삶의 보람을 느꼈다. 글줄과 함께 나는 이미 희생된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울기도 했다. 그 기록으로 나는 동지들과 여전히 한대오속에 서 있는 자신을 느꼈다. 여름이 다 갈무렵에 나는 드디여 기록의 초고를 끝냈다. 써놓고 제대로 되였나 다시 읽어 볼 틈도 없었으므로 문장은 거칠고 구성도 치밀하지 못한 글이였지만 나로서는 너무나 소중한 글이였다. 그것은 내가 죽기전에 반드시 써놓아야 할 과제였으니까. 다 쓰고 나니 보관이 문제였다. 내가 가지고 있기보다 믿을만 한이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얼마후 박사모님과 리전도사가 찾아 왔기에 사정을 얘기하고 원고보관을 부탁하였다. 제법 두툼한 원고뭉치를 보고 두사람은 깜짝 놀란 표정이였다. 《언제 이런걸 다 쓰셨어요?》 《이런 글은 잡지에 발표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게 좋지 않을가요?》 《그러면 혹시 할아버지가 또 무슨 피해를 입지 않을가?》 두사람이 다투어 이야기했다. 《앞으로 적당한 때가 오면 발표하도록 합시다.》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원고뭉치를 넘겨 주었다. 얼마후 박사모님에게서 원고를 《말》지의 신기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말》지에 싣겠다며 가져 갔다는 련락이 왔다. 《말》지라면 믿을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잘하였소.》 하였다. 그후 내가 쓴 글은 《전 인민군종군기자의 수기》라는 부제아래 《말》지 89년 10월호부터 90년 1월호까지 네번에 나뉘여 실렸다. 그 글이 《말》지에 발표된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 났다. 수기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 왔고 과분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건네는 정성은 나 하나가 아니라 내가 기록한 력사속에서 활동했던 모든 동지들을 향한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죽고 나는 살아 있으므로 사람들은 나를 통해 죽어 간 동지들을 보려 하는것이리라.
《수기》가 맺어 준 수많은 인연들
《말》지에 내 글이 련재되는 동안 《말》지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것을 실감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서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 왔는데 대학생들과 사회단체 회원들이 가장 많았던것 같다. 그들은 대개 대학과 소속단체에서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젊은이들이였다. 그들과 인터뷰하다 보면 언어습관이 많이 달라 젊은이들이 내 말을 적당히 고치느라 애를 먹는듯 했다. 즉 내가 입에 밴대로 《인민들이…》 하면 《민중들이…》로 고쳐 적고 《군중들이…》 하면 《대중들이…》로 고쳤다. 또 《국방군》은 《국군》으로, 《동지들을 학살했다.》고 하면 《동지들을 처형했다.》로 바꾸는 식이였다. 젊은 기자들은 이렇게 바꾸면서 미안해 했다. 《이북에서 쓰는 단어를 사용하면 공연히 트집 잡히기 십상이라 좀 고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의 고충을 내가 모를리가 있겠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선선히 말했다. 《기자선생, 다치지 않도록 알아서 고치시오.》 남쪽의 말, 북쪽의 말, 언어에도 분렬의 장벽은 높은것 같았다. 이런 현상은 제도권언론사의 경우 더 심각했다. 신문, 방송, 외신에서도 기자들이 많이 다녀 갔는데 아예 내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했던지 엄중하게 보도한것도 있었다. 나중에는 《남부군》을 쓴 리 아무개라는 사람에게서도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전갈이 왔는데 그때까지도 마음에 노여움이 풀리질 않아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또 민족문학을 위해 활동한다는 소설가, 문학평론가선생들도 더러 찾아 왔는데 내가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것에 대해 격려해 주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후 신세를 많이 진분으로 《한겨레신문》 과천지국장이 있다. 이분은 양로원으로 날 찾아 와 내 손을 잡고 《가까운 곳에 장기수로인이 계신줄 몰랐다.》며 반가와 하더니 다음날부터 나에게 《한겨레신문》을 보내주었다. 얼마후에는 또 그의 부인이 찾아 와 여러가지를 알뜰하게 살펴 주고 갔다. 그뒤에도 지국장부부는 《한동네 사는데》 하면서 양로원에 자주 찾아 와 벗해 주었다. 감호소에서 나올 땐 상상도 못했는데 이 사회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민주동문회》 회원들의 방문이였다. 법과대학 졸업생들이라 그런지 녀학생은 한사람도 없었는데 이 사람들이 내 겨울외투를 한벌 사가지고 왔다. 학교를 졸업한후 각자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달에 한번정도 만나 친목도 도모하고 회비를 모아 보람 있는 일을 하고저 하는데 《말》지를 보고 이번에는 나를 찾아 왔다고 하였다. 하도 고맙고 기특하여 뭐라 말을 못하겠는데 그들이 달려 들어 나에게 파카라는 그 외투를 입혔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물었다. 《남자들뿐인데 이 옷 사러 장에 다녀 왔소?》 《객지생활하는 총각들이 많아 장보기뿐만아니라 밥도 썩 잘합니다.》 한 친구의 말에 모두들 웃었다. 이런 건전한 젊은이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는데 내 청춘이 간것을 한할 리유가 있으랴 싶었다. 그후에도 그들생각만 하면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경남 진영의 김상원선생집으로 옮긴 뒤에도 장보기솜씨를 또 발휘하여 샤쯔와 바지를 사가지고 왔다.
내 조국은 장군님의 품
이래저래 소식이 끊어 졌던 옛 동지들이 《말》지를 보고 나 있는 곳을 알게 되였다며 찾아 오기도 하였다. 그중 김병주동지가 맏딸을 데리고 또다시 양로원으로 찾아 와 정말 반갑게 만났다. 지현이라는 이름의 딸아이는 이미 다 큰 처녀로 직장에 다닌다고 하였는데 어찌나 눈치 빠르고 싹싹한지 마치 친딸 현옥이를 보는것처럼 보면 볼수록 흐뭇하였다. 제 아버지가 일렀는지 지현이는 그후 나를 꼭 제 아버지 대하듯 하였다. 91년 여름에 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지현이는 직장을 휴직하고 부산으로 내려 와 꼬박 한달반동안 내 병간호를 하였다. 나는 어찌다가 베풀지는 못하고 도움만 받고 사나 싶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꼭 반가운 사람들만 찾아 왔던것은 아니다. 하루는 고향사람이라며 한사람이 찾아 왔다. 자세히 보니 낯이 익기는 익은데 이 사람이 왜 찾아 왔을가 의아하였다. 고향에서 그리 좋은 관계는 못되였기때문이다. 그는 일제때부터 광신도라 할 정도로 열성적인 그리스도교인이였는데 우리 일군들을 마귀라고 욕을 퍼붓군 하였다. 광복후 남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게 마지막이였던듯 하다. 그는 남쪽에 와서도 종교적으로 《일관성》을 굳게 지켜 온것 같았다. 남조선사회 개신교의 여러 교파중에서도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고 개인의 령혼구원에만 치중한다고 알고 있는 교파의 교회에서 그는 중책을 맡아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더러 교회의 신문에다 그동안 《빨갱이》짓한것을 회개하고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글을 쓰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기 교회에서 내가 여생을 편안히 보낼수 있도록 도움을 줄것이라고 하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물었다. 《왜 하필 나에게 그런 글을 쓰라고 하오?》 《우리 교회는 소매치기, 강도, 깡패 등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라고 할만 한 사람들도 많이 회개시켜 목회자로 만들었는데 그런 기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서 신앙을 갖게 됩니다.》 내가 글을 쓰면 《평생 전향 안하던 빨갱이가 우리 교회에 나와 회개하였다.》고 널리 선전할셈이였을가? 딱한 사람이 아닐수 없었다. 결국 좋지 못한 낯으로 헤여 지고 말았는데 뒤맛이 몹시 씁쓸하였다. 남도 아닌 한고향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기는커녕 리용대상으로 삼으려는 저들이 개인의 령혼인들 제대로 인도할수 있을가 싶기도 하였다. 이처럼 온갖 사람들이 오가다보니 양로원 원장의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그의 말인즉 《다른 로인들은 찾아 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당신만 손님이 자주 오면 다른 사람들이 속상해 한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방문객들이 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총무처녀와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잡지에 글을 쓰고 그때문에 여러사람들이 찾아 오는 등 바빠 지자 경계심이 더 높아 진듯 하였다. 그런중에도 총무처녀는 내 호적을 만들어 준다고 스스로 나서서 여기저기 뛰여 다니며 절차를 밟아 주었다. 덕분에 나는 구세군 양로원을 본적과 현 주소로 하는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발급된 《주민등록증》을 들여다 보노라니 서글픈 감회를 금할수 없었다. 그와 함께 더욱 그리워 지는것이 풍산의 고향이였다. 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기쁨과 환희에 차서 뛰여 다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 기쁨과 환희속에 나는 순임이와 결혼식을 하였었지. 머리우에는 공화국기발이 휘날리고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소리… 나는 앞에 놓여 있는 《주민등록증》을 다시 보았고 자기네 교회에 귀의하라던 《반갑지 않은 친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영영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땅에도 인정 있고 정의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다. 나의 조국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40년나마 떨어 져 있었어도 변함없이 김일성장군님의 품, 나의 처자들과 친척, 친우들이 살고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용서하시라, 조국이여, 당이여. 운명의 순간까지 그대품에 안기지 못할수 있어도 이 아들은 영원히 그대의 아들, 당의 아들이거니…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비전향장기수 정대철동지의 최후소식
그해(90년) 11월 25일 《한겨레신문》을 읽다가 뜻밖에도 정대철동지의 최후소식을 알고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11월 21일 아침 6시경에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섬의 소나무숲에서 그의 시체와 함께 유서가 발견되였다는것이였다. 나어린 지리산의 유격대원으로서 3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속에서 란도질 당하다가 출옥후 1년만에 생을 마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했다. 그는 나와 같은 지리산유격대출신이고 같은 비전향장기수였지만 나는 그와 한번도 말을 주고 받은적이 없다. 그럴만 한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것이 정확할것이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복역할 때 먼발치에서 그를 본적이 있었고 동지들을 통해 그가 누구인가를 들은것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것의 전부였다. 비록 말은 주고 받지 못하였지만 그는 신념으로 나와 얽혀 진 전우였고 동지였다. 1926년 평북도 룡천군에서 태여나 광복후 내무성군관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남조선해방지역 경비임무를 받고 전라남도일대에 파견되였던 정대철동지는 미군의 인천상륙으로 길이 막히게 되자 지리산에 입산했다. 그가 북으로 후퇴하느냐 지리산에서 싸우느냐 두 갈래의 길에서 스스로 유격대원이 되는 길을 선택한것은 어쩌면 나와 비슷한 전력이였다고 말할수 있겠다. 지리산에서 군사교련을 맡은 교관으로 된 그는 언제나 말이 없고 성실하였으며 전투에서 용맹하였다. 그는 1951년 12월 한 전투에서 심한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정대철동지는 놈들의 혹독한 감옥살이를 이겨 내고 1973년에 대전교도소에서 21년 6개월만에 석방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47살이였다. 그런데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북남회담이 한창이던 시기 《유신》독재체제는 석방된 비전향유격대원들을 합법적으로 재수감하기 위해 《사회안전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정대철동지를 재판도 없이 끌고 간 《사회안전법》은 그후 14년동안 그의 자유를 짓밟았다. 그는 모든 비전향장기수들과 마찬가지로 갖은 고문과 억압을 다 당했지만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한번은 그가 73년 출옥한후 2년간 거처한적이 있었던 경기도의 늙은 오씨로인이 면회 왔던적이 있었다. 선량하고 근면하여 깊이 정들었던 정대철동지가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로인은 억이 차하며 사람이 살고 봐야 할게 아닌가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하였다. 《지조를 지킬줄 아는게 사람이지요.》 그 지조란것이 무엇인가고, 눈에 보이길 하나 손에 잡히길 하나, 더 늙기전에 자식을 보아야 할게 아닌가고 로인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전향문에 도장 한번 찍으면 아직 늦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보고 가정의 온기를 누릴수 있다는것을 그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로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것이다. 《로인님, 만약 누가 로인님에게서 가장 소중한것을 앗아 내려 한다면 얼린다고 듣고 때린다고 내놓겠습니까. 신념이라는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것이지만 사람에게 그처럼 소중한것이랍니다.》 그 신념을 정대철동지는 어떻게 끝까지 지켰던가. 재수감되여 14년의 옥고를 치르고 환갑이 지나 출옥한 정대철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나날을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섬의 밀감농장에서 보냈다. 오랜 감옥살이에서 상할대로 상한 그의 육체에 갑자기 장티브스가 덮쳐 들었다. 육체는 더는 지탱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앓다가 병든 늙은이의 죽음으로 명이 끊길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렇게 된다면 수십년세월 지조를 꺾지 못해 지랄하던 놈들이 얼마나 쾌재를 올릴것인가. 죽는 대가도 받아 내지 못하고 죽는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인간의 마지막기쁨, 자기가 죽으면서 원쑤를 죽인다는 그 기쁨마저 빼앗기고 죽을수는 없었다. 각일각 꺼져 가는 생명을 불 살라 그 죽음을 마지막투쟁의 무기로 하는 길밖에 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한산섬의 소나무밑을 찾아 갔을것이다. 가슴속에 원쑤들이 전률할 신념의 유서를 품고서… 자기 한생을 총화 지은 정대철동지의 유서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미력하나마 노력해 왔고 조국을 지상락원으로 잘 살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당에 입당도 했고 노력도 해왔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없어서 부득이 이 길을 택했습니다. …모든것을 용서를 바랍니다. 현 위치에다 그냥 파고 묻어 주고 그우에다 잣나무나 심어 주셨으면… 마지막소원입니다. 살아서 아무 역할도 못한것이 죽어서나마 한그루 잣나무에 밑거름이 되고저 합니다.》 이 유서를 읽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가 통일된 조국에서 그리운 동지들과 벗들, 부모형제들의 곁에서 생을 마무리했다면 얼마나 마음 편히 눈을 감았을것인가. 나도 역시 죽음이 멀지 않은 늙은 몸, 이제 죽음이 닥쳐 온다면 정대철동지처럼 통일념원을 바라는 유서나 남기고 생을 마쳐야 하는가. 아, 통일은 언제나 오려나. 그때처럼 통일을 강렬하게 바랐던적이 언제 있었을가 싶다. 북쪽땅에 와서 나는 정대철동지에게 《조국통일상》이 수여되였다는것을 알았다. 룡강군에 살고 있는 정대철동지의 누이동생 정희철녀성은 오빠의 돐제사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빠는 죽어서도 조국통일의 억센 나무를 키워 내는 밑거름이 되고저 하였지요.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오빠의 그 소원을 이루어 주셨어요. <조국통일상>을 수여해 주심으로써 오빠의 처절한 한생을 조국통일의 영원한 밑거름으로 조국청사에 새겨 주신거예요. 사랑하는 오빠, 우린 마음속에 잣나무를 심었어요. 나도 내 남편과 아이들도 그리고 큰오빠의 아들과 딸도… 그 잣나무는 우리 마음의 억척 같은 기둥으로 언제나 푸르싱싱할거예요.》 나는 정희철녀성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것이다. 조국의 남쪽끝 한산섬의 한 기슭에 외로이 누워 있는 정대철동지의 봉분은 오늘도 래일도 남조선 력대 통치배들의 비인간적인 살인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할것이다. 1990년 12월 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이 주최한 정대철동지의 추도식이 있었다. 그 추도식이 있은 이후 안해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그것은 아마 정대철동지의 죽음에서 나도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해서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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