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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죽어 상여로 떠나야 할 곳 청주보안감호소
영산강은 흐르는데
머리뿌리가 하얗게 되여 가는 나이 오십에 1952년 포로가 되여 갇혔던 광주교도소로 돌아 왔다. 남쪽땅의 감옥들을 순방하다 싶이하여 하도 감옥살이를 오래 하다나니 제자리로 돌아 온셈인가. 《앞줄 사형, 뒤줄 무기》식의 군법무관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그 시절 배가 고파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분계선이 무너질 날, 고향으로 송환될 날을 기다리던 그 시절이 실로 언제이기에 벌써 내 나이 쉰이 되였는가. 나이 오십이면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보다 적게 남은 시절이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보다 그간 해온 일들을 마무리해 가야 할 때라고나 할가. 52년 그무렵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여전히 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었고 현재 나의 바람 또한 그 시절과 변함이 없다. 조국통일, 그렇다. 민족지상의 과업이자 나의 필생의 념원이다. 감옥밖에서나 감옥안에서나 내 한몸 바쳐 이룩하고저 하는 념원, 삼천리강토에 완전해방의 날을 이끌어 오는 그날이 없이는 자신의 해방도 있을수 없다는 생각, 오로지 걸어 온 이 한길을 굳세게, 끝까지 걸어 갈 결심을 다시한번 가슴깊이 되새기며 50년대 들어 섰던 감옥을 70년대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러 보았다. 광주교도소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좀 달라 졌다면 특별사동을 새로 지어 그 규모가 퍽 커진데다 그 경계가 그때에 비할바없이 째워 지고 강화된 점이였다. 나와 동지들은 담장안에 또 담장을 둘러친 특별사동에 갇혔다. 모두가 독방이였는데 감방이 꼭 관크기만 했다. 너비가 내 손으로 다섯뽐반, 길이가 열세뽐이였던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변소쪽 들창을 널판자로 막아 버려 캄캄한 좁은 독방에 꼼짝 못하고 앉아 있자니 참말로 죽을 지경이였다. 관속에서도 세월이 흘러 73년경이였을가. 어느 날 운동하러 나가서 흘끗 보니 20대초반밖에 안되였을 웬 젊은이가 하나 들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7년형을 받은 재일교포학생인데 이름은 서준식이라 하였다. 70년대처럼 남조선땅에 ○○사건이요 뭐요 하는것으로 범람한적은 없을것이다. 《동베를린사건》으로 윤이상씨가 랍치되여 오고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최영도, 김종태동지들이 체포사형 당하였다. 《정권》교체나 《선거》직전엔 반드시 그 무슨 《간첩단사건》이 생기군 하는데 그 조작수법과 위장이 비슷비슷한데 놀라지 않을수 없다. 같은 체질 《정권》의 어슷비슷한 진통의 반사인즉 달리는 될수 없는것으로 생각되면서도 그 《만능처방》에 의해 죄없이 체포되거나 처형되는 사람들의 처지로써는 그 사건의 조작자들에 대하여 이름할수 없는 증오와 반감을 가지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서승형제 역시 독재자의 지령에 의해 남산지하의 밀실에서 조작해 낸 《교포류학생간첩단사건》의 희생자들이였다. 서준식군은 내가 면회자가 전혀 없는 이북출신이란 말을 들었던지 그뒤부터 기회만 있으면 내게 다가와 도움을 주려 애 썼다. 수인들은 운동할 때 일주일에 한번씩 자기 담요를 가지고 나와 담벼락에 널어 말린후 가지고 들어 가게 되여 있다. 서준식군은 나와 함께 운동할 때 제 담요를 가지고 나와 나더러 가지고 들어 가라고 했고 담요밑에 먹을것을 감춰 가지고 나와 간수의 살벌한 눈총을 피해 가며 내게 찔러 주기도 했다. 그러고도 슬쩍 스치는 기회만 있어도 《뭘 사드릴가요?》 하고 속삭이는것이였다. 먹고 싶은것을 말하면 구매물 구입할 때 사서 보내주겠다고 했다. 구매물수레를 끌고 다니는 잡범에게 심부름값을 주고 부탁하는것인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무튼 그간 받은 도움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왔기에 차마 입이 떨어 지질 않았다. 어차피 난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데 어떻게 동지들에게 계속 도움만 받고 있단 말인가. 먹는둥만둥한 보리밥 한덩이를 삼킨후 허기진 창자를 끌어 안고 있을 때 달가닥달가닥 하는 구매물배통(배달)수레소리는 배 고픈 나를 항상 괴롭혔다. 과자니 빵이니 사탕이니가 방마다 배달되지만 돈 없는 나는 신청한것이 없고 자연히 구매물수레는 내 방앞은 항상 통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오후 내 방 식구통이 열리더니 사탕봉지가 쑥 들어 왔다. 서준식군이 보낸것이다. 얼른 받아 든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우선 먹어 버리고 말았는데 먹고 나서 생각해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게 사탕 한봉지를 보내기 위해 서군은 소지에게 사탕 열봉지값을 주었을것이다. 감사도 표하기전에, 다른 배 고픈 동지가 있는지 살펴 보기도전에 먹어 버리고 말다니… 그후에도 동지들의 따뜻한 배려는 계속되였다. 역시 재일교포청년인 강종건동지,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들어 온 권락기동지 등 서준식군과 같은 20대의 젊은 층들이 기민하게 움직여 나 같은 무연고자들을 도왔다. 운동 나가서 나에게 사탕 한봉지 건네 주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 세우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구매물은 구입할 때 평소보다 많이 사면 간수나 소지가 눈치 챌가봐 딱 1인분만 산다. 자연히 다음 구입할 때까지 자신은 먹지 못한다. 어렵사리 구한 간식거리를 이불속에 감춰 두었다가 운동 나올 때 담요에 감춰 가지고 나와 눈치껏 내게 접근해 건네 주는것이다. 때로는 간수의 눈을 피해 여러 동지들이 식구통으로 손을 쭉 빼서 빵봉지를 리레식으로 전해 주기도 한다. 가족 없고 차입도 없어 주린채 앉아 있는 한 동지를 먹이기 위해 여러명의 동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빵봉지를 전달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지리산에서 건보리 한줌을 모아 나에게 주던 조영래동지가 생각났다. 여기 감옥에서도 남녘의 동지들과 벗들이 북녘의 동포인 나에게 기울이는 지성과 은정은 여전하였다. 한지맥으로 잇닿은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초월하여 공통된 념원과 지향점에서 맺어 지는 혁명동지의 의리심에서 오는 뜨거운 정이였다. 그 고마움을 갚을 방법이 없었던 나는 받아 먹으면서도 민망할따름이였다. 한번은 강종건동지가 소지편에 사과를 스무개나 보내왔다. 그때의 사과맛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10년만에 처음 먹어 본 사과였던것이다. 관만 한 방에서 해빛을 보지 못하여 누렇게 뜬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기민하고 열정 많은 남녘동지들속에서 나는 때없이 행복감에 잠겨 있을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한민족, 한동포의 애 타는 기원속에서도 아직 잠을 깨지 못한 남녘땅을 두고 스며 드는 애달픈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 애달픈 심정을 달래이며 특별사 독감방에 앉아 지은 노래가 하나 있다. 영산강은 흐르는데…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동포애의 정은 북남을 경계없이 애절하게 흐르는데 아직 광명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지금도 그처럼 은정 깊던 남녘동지들이 나에게 류다른 향취를 안겨 준 스무개의 사과맛을 생각하며 그 시를 여기에 다시 옮겨 보련다.
대탄압의 서곡
1972년 력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였을 때 뒤늦게야 그 소식에 접한 우리들은 광복이후 처음으로 모아 진 민족의 한목소리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골자로 한 성명은 한자한자에 우리 민족의 피 타는 숙원과 체험과 교훈이 깃들어 있는 지상의 과업이며 서약이였다. 민족의 운명이 기약되여 있는 이 엄숙한 서약을 감히 어길 자가 있으랴 싶은 신심에 넘쳐 통일이 방금 눈앞에라도 이른것처럼 격앙된 흥분속에 보내던 나날… 그런 날이 그리도 빨리 대탄압의 광풍과 바뀌여 질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것은 72년의 《10월유신》광풍이였다. 독재자는 《반공》교육을 강화하며 비전향자들을 전향시키라는 지시를 교도소들에 떨구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들이 7.4공동성명의 기쁨에 젖어 있을 때 이미전부터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강제전향조직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73년 3월경 전향공작전담교회사가 공개채용되였으며 7월에는 그들이 각 교도소에 배치되여 왔다. 파쑈《정권》이 어째서 이 시기에 강제전향공작을 서둘렀던가. 72년경 전국 교도소에는 약 500여명의 비전향동지들이 있었다. 애초에 사형수였던 이들중 상당수가 4.19이후 민주당《정권》때 무기 내지 20년 형으로 감형되여 72년무렵 많은 동지들이 만기출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독재자는 이 만기출소자들을 그대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놈들은 강제전향공작을 통해 우리 동지들의 정신을 죽이든지, 그 최악의 전향강박과 고문과정에 육체를 죽이든지 생명을 꺼버릴것을 타산했던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1의 적》인 장기수들을 산 생명으로는 내보내지 않으려는 포악무도한 책략이였다. 독재자는 애당초 민족의 숙원이 깃든 7.4공동성명에 명기된 대업의 일익을 담당수행할 생각을 꿈에도 한적 없는 자였다. 독재자는 미국정탐기관의 오랜 주구인 륙종관의 사위이며 그자신이 려수, 순천사건 당시 수많은 애국자들을 밀고하여 학살케 한 매국노이며 살인자였다. 그 더러운 《공적》으로 륙군본부정보국 제1국장, 특무대장질을 하면서 더욱 상전의 신임을 얻어 미중앙정보국장 죤 알렌덜레스의 연출각본에 의해 거행된 《5.16쿠데타》의 주역을 담당하게까지 되였다. 민족의 운명은 안중에 없고 권력의 자리에만 눈이 어두운 이자는 7.4공동성명을 화려한 간판으로 삼고 그뒤에서 《반공》보루를 꾸리는데만 급급하였다. 하루가 멀다하게 온갖 악법과 그 무슨 사건을 조작하여 남조선의 모든 민주력량과 통일지향적인 세력들을 숙청하기에 혈안이 되여 있었다. 장기수들에 대한 악랄한 전향공작도 이 독재자의 그 미친 《10월유신》광풍의 한줄기 설한풍이였다. 73년 11월 9일 아침. 광주교도소 관구부장이란 자가 복도에서 특별사동이 떠나갈듯이 고함을 치기 시작하였다. 《오늘부터 운동은 없고 의무와 진찰도 불허한다. 아울러 구매물도 팔지 않는다. 전향 안하는 빨갱이는 해빛을 못 보게 하는것이 우리의 방침이다.》 전향강요, 대탄압의 막이 오른것이다. 감옥에서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것인지 독자의 리해를 돕기 위해 잠간 설명하고저 한다. 굳게 잠긴 감방에서 하루에 단 한번밖에 나갈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운동시간이다. 물론 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되여 있고 간수가 꼭 붙어 지키고 서서 동지들간에 서로 말도 못 나누게 감시한다. 그래도 감방에서 쇠 따고 나간다는 사실만으로 갇혀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운동시간을 기다리는것이다. 해볕을 쪼일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점도 중요하다. 인간에게 해볕이 얼마나 중요한것인지는 오직 갇혀 있어 본 사람들만이 알수 있다. 구매물을 안 파는것이야 나처럼 돈이라고는 없는 빈털터리에게는 별관계가 없지만 밖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징역 사는 남편, 자식에게 빵 한봉지 넣어 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해 보라. 자연히 가족들은 온갖 방법으로 수인들에게 전향하라고 애원하게 된다. 이 역시 대단한 압력임을 알수 있을것이다. 잠시후 간수들은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지품은 책, 세면도구, 내의 할것없이 몽땅 빼앗고 우리들을 일제히 전방(감방을 옮기는것)시켰다. 0.8평 남짓한 독거감방에다 9∼10명씩 처넣어 앉을 자리는커녕 설 자리도 없을 지경이였다. 그리고는 강도, 절도범중에서도 유명한 악질들을 골라 복도에 배치했는데 놈들의 팔에는 《떡봉》이라는 완장이 감겨 있었다. 떡봉이란 사람을 떡치듯 치는 몽둥이라는 의미이다. 이 떡봉이를 선출할 때 교무과장 강철영이란 자가 심사를 하였는데 심사기준은 전과가 얼마나 많든 상관 없고 사람을 잘 때리기만 하면 합격이였다. 이 떡봉이중에서도 특히 악질적이였던 자로서는 살인강도범으로 10년 징역형을 살다 교도소안에서 말썽을 부려 다시 1년이 추가되였다는 정무종이라는 자와 특수절도범 원삼실을 볼수 있다. 떡봉이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그들은 감방열쇠까지 가지고 있는 형편이였다. 평상시 본무 간수만이 가질수 있고 다른 간수들에게도 절대로 주지 않던 그 열쇠를 깡패죄수 떡봉이들에게 넘겨 준것이다. 당연히 떡봉이들은 우리들을 감방에서 제멋대로 끌어 낼수가 있게 되였다. 이 같은 폭거에 항의하여 우리들은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회사들은 떡봉이들을 지휘해 우리들을 한사람씩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한방에 있던 동지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하나씩 끌어 내는데 실패하자 간수와 지도(잡범들중 사동에서 간수들의 심부름을 하는 자들)들이 몰려 와 우리들을 강제로 끌어 냈다. 이때부터 떡봉이들의 구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간수들은 사동에 얼씬거리지도 않았고 떡봉이들은 감방열쇠외에도 수갑, 몽둥이, 포승 등을 가지고 마음 내키는대로 우리들을 끌어 내 복도에 꿇어 앉혀 놓고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중간중간에 떡봉이들은 교무과로 올라 가 지시를 받고 내려 오는 눈치였다. 그들이 가한 가혹행위는 구타만이 아니였다. 감옥의 겨울은 춥고 길다. 여름 석달을 뺀 나머지는 모두 겨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는 11월로 교도소는 이미 한겨울로 접어 들었다. 떡봉이들은 얇은 관담요(교도소측에서 수인들에게 나누어 준 낡은 담요) 한장만을 남긴채 가족들이 넣어 준 담요는 모두 빼앗아 갔다. 게다가 이전에는 겨울이면 지급하던 이불도 12월 16일이 된 때까지 주지 않았으며 구매물도 팔지 않으니 솜옷도 사입을수가 없었다. 이것도 모자라 한 동지의 경우 잠뱅이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긴후 수갑을 채워 담요도 이불도 없는 방에 3∼4일을 가두었다. 그래도 그 동지가 뜻을 굽히지 않자 끌어 내 코에 고추가루물을 부으며 구타하였다. 결국 그 동지는 병을 얻어 얼마후에 죽고 말았다. 그 동지가 반주검이 되여 들어 오자 그다음은 나의 차례였다. 원두성이라는 자는 살인강도범으로 힘이 세고 미욱하기 그지없는 놈이였고 원삼실이라는 자는 체소한 반면에 악착하기 이를데 없는 자였다. 두놈은 나를 홀랑 벗긴후 세면장으로 데리고 가 나의 몸에 얼음 같은 랭수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알몸뚱인채로 꽁꽁 묶은 다음 공중에 매달아 놓고는 몽둥이로 두들겨 댔다. 《전향할래.》 하고 몽둥이세례마다 한마디씩 소리치는데 대답대신 몽둥이에 살점이 묻어 나고 피가 얼룩졌다. 이럴 때면 나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육체에 미치는것인지 정신에 미치는것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하도 얻어 맞고 찢기운 몸이여서 육체에 와닿는 고문이 그대로 내부에 와 부딪치는것만 같은 느낌이였다. 때로는 자기의 온 육신이 폭탄처럼 터져 놈들의 짐승 같은 상판과 온 감방에 피와 살점을 뿌려 버리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활활 타올라 온몸과 뇌수를 불덩이처럼 달구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내가 금시 미쳐 버리는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고 놈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정신 잃을 때까지 세이군 했다. 나는 될수록이면 정신을 잃지 않은채 고문을 이겨 내리라는 생각으로 두눈을 부릅뜨고 땀을 흘리며 날뛰는 놈들을 내려다 보았다. 필생의 목적이 바로 이 하나에 달려 있는듯이 생각되여 이러고 있느라면 눈앞에는 이상한 환영이 떠오르군 한다. 살인, 강간, 특수절도범들의 얼굴이 감옥소장이나 간수장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그자들의 험상 궂은 모습에 청와대에 앉아 있는 독재자의 까마귀상이 겹쳐 지기도 했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얼굴이 이 인간쓰레기들인 살인, 강간, 절도범들의 형상으로 련상된것은 기질과 성격과 본성의 공통성으로 그들스스로가 만들어 낸것이지 내가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이 감옥에서의 독재자와 《떡봉이》와의 묘한 《결합》을 생각하니 고문의 와중에 달아 오를대로 달아 올랐던 나의 온 육신에 그 어떤 싸늘한 기운이 흘러 퍼지는듯 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때 놈들이 《이놈이 웃어?!》 하는걸 보니 내 얼굴에 이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던 모양이였다. 나는 화끈화끈 달아 오른 발이 차가운 마루바닥에 닿는 기분 좋은 순간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이러한 매질 말고도 교도소측은 비전향수들을 잠 못 자게 하느라 밤에는 0.8평짜리 감방에 8∼10명을 처넣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고립시켜 전향시키려고 독거시킨 동지들도 있었다. 놈들의 전향공작이 얼마나 참혹한 양상을 띠였던지 수많은 동지들이 고문끝에 생명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지들도 생겨 났다. 나 역시 삶과 죽음의 계선에 자신을 놓고 많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스스로 죽음의 문전에까지 다가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매 자살자들의 심정이 그 어떤 죽음에 대한 비관에 처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극히 일면적인 생각이다.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 삶에 대한 비관 더는 견딜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 나려는 념원의 실현이 그 죽음이란 문턱너머에 있어 때로는 그것이 안식처처럼, 평온한 다른 세상처럼 생각되여 그 문턱을 서슴없이 넘어 서게 되는것이다. 그 문턱에서 나를 저지시킨것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놈들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 문턱을 넘어 서길 바란다는것이였다. 그러면 놈들은 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한 비관끝에 자살》이란 한마디 말로 나를 《제1의 적》의 명단에서 지워 버리면 되는것이다. 나로서는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전향》과 같은것으로 생각되였다. 살자. 삶이 투쟁이라는 생각이 이때처럼 나의 신념으로 굳어 진적은 없다. 민족앞에, 력사앞에 인간의 신념을 정당화할 그런 날을 기다려 굳세게 살자. 놈들의 대탄압에 항거하여 나의 가슴에 싹 터난 이 결의가 얼마나 힘겨운 행로를 거쳐야 한다는것을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계선에서 다른 《삶》을 택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놈들의 폭거앞에 자기의 신념을 잃고 좌절 당한 인생의 또 다른 허무한 삶의 길, 《전향》의 길이였다.
눈물의 전향식
사실 전향하라며 가해 오는 고문을 참아 내는것도 힘든 일이였지만 매에 못 이겨 전향한 동지를 마주 보는것은 더 괴로운 일이였다. 간수들은 전향자가 생기면 꼭 그가 있던 방에 데려 가 이른바 《전향식》을 시켰다. 전향식이라 해서 대단한건 아니고 같이 있던 동지들앞에서 《내가 전향하였소.》 하고 말하게 하는 절차였다. 그리고나면 간수들은 전향한 동지를 다른 사동으로 데려 가고 몸이 아픈 사람은 병사로도 보내주었다. 동지들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 전향하였소.》 하던 그 모습, 나와 함께 있던 친구중에 허효길이라는 스물댓살 먹은 젊은 청년이 있었다. 생기기도 잘 생기고 성품도 좋아 참 친했는데 어느 날 효길이가 전향식을 하러 왔다. 효길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내내 울먹였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 봐야 했다. 속으로 《네가 그럴수 있느냐》 싶은 생각도 들긴 했지만 전향식을 마치고 간수에게 이끌려 울며 나가는걸 보니 너무나 애처로와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울지 말라…》 그나마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던것도 그때뿐이였다. 몇달후 운동 나갔다가 먼발치로 서로 보게 되였는데 그때도 효길은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을 보고 들어 오니 나 역시 심정이 상해 며칠씩 괴로왔다. 《이놈들, 저런 좋은 젊은이를 저렇게 꺾어 놓고 괴로움을 주는 너희들이 사람이냐.》 분노가 솟구쳤다. 인간이라는 신성한 존재를 이렇게 모독할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모든것, 신념과 생명과 육체에 갖은 모욕을 들씌우고 허울만 남겨 놓아 스스로 괴로와 하도록 만들어 놓고 승리자연한 기쁨을 맛 보는 자들… 남조선당국자들은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인 《전향공작법》까지 만들어 냄으로써 자기들의 지옥의 력사에 또 하나의 장을 기록했다. 인류력사는 땅을 빼앗을수 있고 재산을 빼앗을수 있고 목숨도 빼앗을수 있다는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넋마저 빼앗아 사람들을 이처럼 괴롭힐수 있는 방법을 남조선당국자들처럼 완성시킨 악당들은 이 세상에 둘도 없을것이다. 이 시기처럼 고문의 형태들과 그 이름이 다양해 진적은 없었다. 공중에 매달아 놓고 그밑에 불을 피워 그슬리는 방법의 칭기스한식 불고기고문, 독사들을 가득 넣은 독감방에 수인을 발가 벗겨 넣어 괴롭히는 뱀고문, 폭한들을 들이밀어 녀수인을 괴롭히는 성고문 등등… 수백수십가지의 악착한 고문방법들이 바로 이 시기 《중앙정보부》 남산지하실과 교도소들에서 창안된것들이였다. 이자들의 고문에 의해 그렇게 준수하게 생겼던 서승형제도 그 모습을 알아 볼수 없게 되였다. 더 기가 막히는것은 출소후 어느 잡지에서 본 권말자녀성에 대한 《성고문》의 집행자들이 신문기자의 렌즈앞에서 유들유들한 상판을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것이였다. 그것이야말로 남조선의 현실, 그 현실의 비인간성과 파렴치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허효길청년의 눈물을 보고 그에 대한 노여움보다 그를 그런 처지에까지 이끌어 간 자들에 대한 치솟는 증오로 하여 온밤 잠을 들수 없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인간의 본성을 말살해 버리려는 놈들앞에 조금도 물러 서거나 양보할수 없다는 항거심이 마음에서 더욱 굳건해 짐을 어쩔수 없었다. 그후 효길청년은 어디로인지 끌려 가 더는 볼수 없었다. 그때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11월 20일경부터 제2의 탄압이 시작되였다. 창고에다 고문대를 만들어 놓고 물고문을 시작한것이다. 물고문을 담당한건 교회사들이였다. 그들은 우리를 1메터 남짓한 긴 의자에 눕혀 사지를 꽁꽁 묶은후 얼굴을 뒤로 젖혀 놓고 그우에 젖은 광목수건을 덮었다. 그리고 나서는 10리터들이 주전자로 코와 입에 물을 들이붓는것이였다. 나를 비롯한 장기수들은 이미 체포, 취조과정에서 물고문을 수없이 당해 본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고문했던 형사들은 《고문기술자》답게 사람이 죽어 넘어 가지는 않도록 고문의 강도를 조절할줄 알았다. 하지만 교회사들은 덮어 놓고 코와 입에다 물을 부어대는데 참말로 죽을 지경이였다. 물고문을 당한후 15명의 동지들이 전향을 했다. 이 과정에서 몸을 상해 하반신불수가 된 동지도 둘이나 되였다. 12월 5일 저녁 물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서준식군이 유리쪼각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다. 서준식군은 끊어 진 혈관에서 스며 나온 피로 상반신이 피범벅이 된채 새벽에 간수에게 발견되였다. 아마도 손목을 그은후 피가 흘러 나오면서 정신이 가물가물해 가는중에도 추위때문에 온몸을 옹크렸던 모양이였다. 추위에 떨며 손목을 가슴에 바싹 붙인 덕분에 얼마후 저절로 지혈이 되여 서군은 목숨을 건지게 되였던것이다. 전향고문이 시작되였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투쟁경험이 많지 않은 서군이 버티여 낼수 있을가 속으로 걱정하기도 했었다. 훌륭한 동지의 한사람을 잃는것이 아닌가 초조했던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을 품었던 내가 부끄럽게도 서군은 목숨을 던져 전향공작에 저항하였다. 서군사건이 일어 난 뒤 살인적인 고문은 일단 중지되였다. 그러나 이때의 혹독한 전향공작으로 해서 73년 11월 이전까지 64명이던 광주교도소 비전향동지들이 74년 초에는 25명으로 줄었다. 전향하는 사람수에 따라 감형도 되고 석방도 될수 있는 떡봉이들의 처지와 승진과 출세가 전향공작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는 교도소관리들의 야욕이 빚은 결과였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버티여 낼수 있었는지 나자신도 리해할수가 없었다.
왜 전향을 안했느냐구요?
우리를 고문한 자들은 전향하지 않은 우리들을 두고 《악질, 독종, 빨갱이》라고 했다. 인간으로서 차마 버티여 내기 힘든 육체적고통아래서도 《그놈의 사상》을 버리지 않겠다니 《빨갱이》사상이 무섭긴 무섭다고도 했다. 겨울에 알몸에 랭수를 퍼붓고 몽둥이찜질을 하는가 하면 꽁꽁 묶어 놓고 코에 물을 들이붓는 야수적인 만행아래에서 인간은 우선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그러나 고통만큼이나 강렬하게 치솟는것은 고문하는 자들 즉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에 대한 분노이다. 금품을 목적으로 사람을 잡아다 린치하는 깡패집단도 이럴수는 없을텐데 정치권력을 쥔 자들이 이 같은 야수적폭력을 주도하다니.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야수들에게는 결코 굴복할수 없다는 사무친 분노, 그것이야말로 우리 동지들이 극단적인 폭력아래서도 뜻을 꺾지 않았던 리유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마 못 견딜 구타와 물고문아래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우리 동지들이 악질독종인가, 아니면 인간을 복날 개 잡듯 패면서 항복하지 않는다고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는 정치권력의 하수인들이 야수들인가. 그들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모든것을 잃어 버린 《반공》광신자들의 노예들이 아닐가. 나에게는 결코 그들에게 항복할수 없었던 리유가 또 하나 있었다. 광목수건으로 눈을 가리운채 코로 물이 쏟아 져 들어 오는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안해의 얼굴, 그것은 결혼식날 내 삶의 자세를 그에게 맹세할 때 미동도 않고 내 눈을 응시하던 안해의 진지한 얼굴 바로 그것이였다. 안해에게 아무것도 해준것이 없는 나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 이 시련을 이겨 내야 한다.… 당신에게 줄 선물은 이것밖에 없다.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남에서 수기를 쓸 때 밝혔던 전향하지 않은 리유들이다. 그외의것은 쓸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밤들에는 광복후의 5년간 생활에 대하여 돌이켜 보았고 마음속으로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적기가》를 불렀다는것을 쓸수 없었다. 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참된 삶을 찾은 조선로동당원이였으며 공화국 국장이 찍혀 진 파견장을 받고 조국통일의 성전에 나선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였다. 다른 길이란 나에게 있을수 없었다. 75년 초 나는 다리병신이 되였다. 지리산에서 치렬한 전투중에 부상됐다면 오히려 기쁠텐데 징역 살다가 깡패들의 폭력으로 이렇게 되였으니 오직 억울할뿐이다. 내가 다리를 다치게 된 사건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였다. 75년 《사회안전법》이라는 괴물이 출현한다는데 대해 그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하루는 3사 잡범들에게 새 소식을 방송하는 시간이였는데 《사회안전법》이 어떻고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였으나 미처 알아 들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변소에 들어 가 옆방 동지에게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소?》 하고 물었다. 마침 그때 소지(주로 폭력배로서 사동 청소, 수인 감시 등을 맡고 있는 자)가 내 방앞을 지나가던 모양이다. 그자는 감방문을 차고 달려 들어 와 나를 끌어 냈다. 부지중에 세면장으로 끌려 간 나는 소지들의 무자비한 구타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감방안이였다. 찬물을 끼얹은듯 죄수복이 온통 젖어 있었다. 내가 정신이 든걸 보더니 소지가 다시 교무과로 끌고 갔다. 과장 책상우에 진술서가 놓여 있고 내가 옆방 동지에게 《전향하지 말라.》고 강요했다고 씌여 있었다. 교무과장은 나더러 무조건 진술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당치 않은 구실로 또 몇달을 괴롭히려는 속심이 분명했다. 내가 그것을 거부했더니 옆에 있던 교무과 전향공작전담한 김흥렬을 비롯한 여러 간수들이 달려 들어 닥치는대로 구타하는것이였다. 심지어 《하느님의 교회》라는 교단의 목사라는 자까지 합세하여 때리는 형편이였다. 나는 또다시 실신했고 눈을 떠보니 감방안이였다. 꼼짝할수가 없어 손만 겨우 움직여 만져 보니 오른쪽 갈비뼈가 하나 부러진데다 다리까지 부서져 움직일수가 없었다. 한 6개월동안 의사가 와서 봐주는것도 아니고 그저 꼼짝 않고 지내는 동안 갈비뼈는 제대로 붙었으나 다리는 부러진채로 어긋나게 붙어 버려 절름발이가 되고 만것이다. 한편 《너희놈들같이 전향 안하는 빨갱이들은 영원히 해빛을 못 보게 하는 법이 만들어 지고 있다.》던 교회사들의 호언장담처럼 과연 75년 7월 파쑈《정권》은 《사회안전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사회안전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10∼20년씩 징역을 살고 만기출소해 이제 막 가정을 꾸리고 단란한 생활을 시작하려던 많은 동지들이 한밤중에 일제히 잡혀 와 재판도 없이 《보안감호》라는 기약 없는 감옥살이를 시작한것이다. 만기출소를 앞두고 있던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도소에서 이무렵 다시 끔찍한 전향강제고문이 시작되였다. 이때는 한사람씩 교무과 사무실로 끌고 가 꽁꽁 묶은후 교회사와 간수들이 몰매를 가했는데 두번이상 까무라쳐야 비로소 풀려 날수 있었다. 풀어 줄 때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동지들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발로 차면서 온몸으로 감방까지 기여 가게 만들었다. 게다가 오랜 감옥생활로 고질병을 얻어 약 없이는 하루도 지내기 힘든 동지들에게서 가족들이 넣어 준 치료약을 빼앗아 가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광복후 평양에서 《로동신문》기자로 일했던 김동지는 위장병이 심해 징역살이 15년동안 가족이 넣어 준 약으로 간신히 연명해 왔다. 그런데 75년 전향담당공작반이 김동지에게서 약을 빼앗아 버렸다. 구타와 고문으로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 진 몸이 약마저 없으니 김동지가 도대체 어떻게 생명을 이어 갈수 있었겠는가. 전향하면 약을 주겠다는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노하여 김동지는 몇차례나 단식롱성을 하였으나 전향담당공작반은 막무가내였다. 마침내 그는 76년 6월 담요를 뜯어 창틀에 목을 매 자결하고 말았다. 전날 그가 《더는 못 살겠소. 병으로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소.》 하고 말하기에 나는 극구 만류하면서도 《그런 심정이 될수는 있으나 설마 진짜 죽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김동지가 떠메여 나간 뒤 나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어제까지도 쇠약한 몸으로 야수 같은 놈들과 싸우던 동지가 이제 목숨까지 바쳐 이 세상사람이 아닌데 나는 여전히 살겠다고 보리밥 한덩이를 목에 넘기고 있구나 싶었다. 전향강요 대탄압과정에서 목을 매 자결한 사람은 김동지가 처음은 아니다. 75년 11월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가벼운 정신이상까지 일으킨 신동지가 역시 끈으로 목을 매 자결했다. 또한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로서 늘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최동지에게도 전향담당공작반들은 약공급을 중단시켜 버렸다. 수차례 약을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최동지는 76년 5월 어느 날 저녁, 독방에서 30여분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와 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신음소리를 낱낱이 들으면서도 곁으로 달려 가지도 못하게 했던 광주특별사의 철벽, 그곳이 과연 사람 사는 곳이였던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사람이였던가. 전향공작과정에서 동지들이 당한 갖가지 고통들을 어떻게 모두 라렬하랴. 우리 동지들의 그 같은 피의 대가로 광주교도소는 전국 4대 교도소 전향실적평가에서 1등을 하였다.
《청주에 <호텔>을 짓고 있다》
광주교도소에서 끝내 전향하지 않고 만기를 맞아 《보안감호》처분을 받은 동지들이 대전교도소 8사로 옮겨 졌다. 각 교도소와 사회에서 그곳으로 잡혀 온 《보안감호》대상자들의 수번은 1번에서 시작해 155번 정도까지 나갔던것 같다. 8사는 일제가 지은 감방으로 낡고 불결했다. 한감방을 둘로 나눠 원래 20개이던 감방을 40개로 만들었는데 이러다보니 방 하나가 0.75평도 못되는듯 하였다. 1∼10방까지 저희들나름대로 전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동지들을 독거시켰고 11∼40방까지는 3∼4명씩 혼거시켰다. 그런데 감호자중 인천교도소에서 장기복역하고 출감한 고노 기시오라는 일본인이 하나 있었는데 76년경 독방에 있던 그가 공기통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일어 났다. 생전에 접촉할 기회가 없어 그가 어떤 리유로 남조선땅에서 장기복역을 했는지, 죽음을 결심한 내막이 무엇인지(물론 《사회안전법》이라는 괴물앞에서 절망한때문일것은 짐작할수 있으나)를 자세히 알수 없어서 안타까왔다. 이 사건이 일어 난 뒤 독거제도가 없어 졌고 손바닥만 한 공기통마저도 막아 버렸다. 그무렵 일반사에서는 형무소가 아니라 교도소라 바꾼 이름에 걸맞게 감방에서 철망을 떼여 내는 등 전시효과를 노린 조치나마 시행되고 있었는데 8사 창문을 막은 철망은 오히려 두꺼워 져 가기만 했다. 바닥을 파서 통을 묻고 그우에 뚜껑을 덮어 놓은 변기통에서는 구데기가 허옇게 기여 나왔다. 식사, 운동, 책문제 등도 징역살이와 하등 다를게 없었다. 대부분 20여년씩 온갖 고초속에 징역을 살아 만기를 채운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고도 옥문을 나서지 못하고 《보안감호》란 이름아래 징역살이와 다를바 없는 령어생활을 계속해야 하는게 기 막히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면 간수들은 《청주에 호텔을 짓고 있으니 잠시만 참으라.》고 했다. 《보호감호자》들을 대전교도소 8사에 수용한 때부터는 폭력적인 전향공작은 일단 중지되였다. 그대신 3개월마다 한번씩 검사가 내려 와 1 대 1로 전향을 설득하는 면담을 실시하였다. 그들중 그래도 법론리에 충실하고저 하는 일부 검사들은 《사회안전법》이 무리한 법률이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것도 우리가 전향했을 때만 가능하다는게 그들의 말이였다. 2년을 단위로 하는 《보안감호》처분의 1차 만기였던 77년 7명의 장기수들이 전향하고 교도소를 나갔다. 그들의 고민이 어떠했을지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두들 야수 같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던 사람들이였다. 하지만 전향을 하지 않는 한 시체가 되여 뒤문으로 나갈수밖에 없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절벽은 너무도 험하고 높았다. 더구나 몇년전에 만기출소해 새로 가정을 꾸리고 늦게나마 자식이라도 본 사람들이나 한평생 자식놈 옥바라지끝에 병들어 죽어 가는 로모를 막로동으로 돌보다가 갑자기 잡혀 들어 온 사람들의 경우 정치적신념과 가정적책임사이에서의 갈등이 그 얼마나 컸겠는가. 평생을 감호소에서 늙는한이 있더라도 전향하지 않고 《사회안전법》페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게 우리 동지들의 신념이였지만 투쟁을 포기하고 출소를 택한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나중에 들으니 그들중 어떤이들은 스스로 투쟁을 포기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급격히 몸이 무너지면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 78년 11월 그들이 짓고 있다던 《호텔》, 청주감호소가 완공되여 그때까지 대전에 있던 감호소처분자 110명이 청주로 이감되였다. 이른바 청주《호텔》이 교도소감방과 다른 점이라면 감방에 수도가 들어 와 있다는 점이다. 또한 3사와 4사는 증기난방시설이 되여 있는데 1사와 2사는 난방시설이 없었다. 뒤날 소내투쟁이 벌어 지면서 그 리유를 알게 되였다. 평소 우리는 3, 4사에 수용되여 있었는데 싸움이 벌어 질 때마다 1, 2사로 쫓겨 가군 했던것이다. 식사는 부식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대개 교도소의 관리급 퇴직자들이 그 끈으로 감호소 부식공급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전, 현직 관리들끼리 어떤 비률로 예산을 갈라 먹는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들어 오는 부식은 모조리 시장에서는 팔지 못해 내다 버릴것들만 주어 온듯했다. 게다가 운동장이라는것도 2층으로 된 사동밑 음지쪽에 담을 쳐서 서너너덧평이나 될듯 한 길죽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22개 감방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대전 8사 간수들의 말과는 달리 머리도 징역살이때처럼 잘라야 했다. 한마디로 《감호소 가면 모든게 달라 진다.》던 대전교도소측의 흰소리는 눈 가리고 아웅이였을뿐이다. 한편 감호소에서조차 사소한 꼬투리로 지하실에 설치되여 있는 고문실에 끌려 가 심한 폭행을 당한 동지도 드물지 않았다. 우리들의 쌓인 분노는 79년 전체 단식투쟁으로 폭발했다. 그런데 놈들의 대응은 가차없었다. 린근 청주교도소의 간수, 교도대까지 모두 동원해 전원에게 수정(수갑)을 채우고 폭행을 가했다. 이 수법 또한 달라 진게 없구나 싶었다. 이 투쟁후 감호소측은 처우개선은커녕 기존의 감방자물쇠밑에다 새로 자물쇠통을 하나 더 달았다. 뒤창문에 철망도 두껍게 붙였다.
결사의 단식투쟁
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비밀료정에서 독재자가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되였다. 독재자사살사건은 남조선《정권》의 부패와 모순이 낳은 응당하고 불가피한 귀결이였다. 5.16쿠데타로 권력의 자리에 오른 독재자는 초기 대통령의 명분을 세우느라고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을 내여 마치 정치와 경제, 통일국책에 전환을 가져 올 력사적인 위업을 위해 출현하는 인물처럼 미화분식하면서도 감히 영구집권의 야망은 표명하지 못했었다. 정책을 바로 세워 놓은 다음에는 스스로 《정권》에서 물러 나 민간인에게 대통령자리를 내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후 독재자는 《민정이양》을 자신이 군복을 벗는것으로 대치했고 이에 항거하는 인민에게 《10월유신》으로 대답했다. 리승만이처럼 권욕에 눈이 어두운 그는 또다시 3선을 조작하고 영구집권의 야망을 표면화했다. 독재자들의 영구집권야망의 쓰디쓴 맛을 너무도 잘 아는 남조선인민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 났다. 미국상전들은 또 다른 각본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전두환에 의한 《5공정권》수립이였다. 《제5공화국》이 광주사태를 비롯한 어떤 피바다우에 세워 진 《정권》이라는것은 세상사람이 다 아는바이다. 10. 26사건으로 독재자가 죽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해서 사회에 민주화바람이 불어도 청주보안감호소는 폭력이 지배하는 《독립공화국》일뿐이였다. 80년 여름이였던가. 하루에 한번 있는 운동시간에 나갔다 왔더니 덥고 땀이 쏟아 져 내리기에 나는 감방뒤에 붙어 있는 변소에 들어 가 변소뒤창으로 들어 오는 한줄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감호과장 오기수라는 자가 지나가다가 내가 감방에 앉아 있지 않은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간수들이 문을 따고 들어 와 불문곡직 지하실로 끌고 가더니 온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고는 마구 때리는것이였다. 허가도 안 받고 방에서 일어 났다는게 나의 죄과였다. 《이놈들, 너희들도 사람이냐.》 아픔보다 분노가 솟구쳤다. 혼신의 힘을 다해 울부짖었지만 구타는 계속되였다. 소지에게 떠메여 감방에 내팽개쳐진 뒤 정신이 가물가물한중에도 몸서리가 쳐졌다. 백보를 양보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권》이 우리들을 사회와 격리시킬수도 있다고 치자. 사상의 전파와 조직화를 막기 위해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우리들을 《합법적》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사회와 격리시켰으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가혹한 행위를 계속한단 말인가. 그자들이 원하는것은 대체 무엇인가.… 전향서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목숨인가. 동지들의 쌓이고 쌓인 분노는 80년 7월 7일 다시한번 폭발했다. 사회에서는 광주항쟁이 일어 나고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하여 분위기가 극도로 긴장되여 있었던 시기였지만 철벽안의 우리들은 광주항쟁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간수들이 비상복을 입고 여러가지 점에서 계속 우리들을 바싹 조여 왔기때문에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을따름이였다. 그중 하나가 책문제였다. 그동안 우리들의 줄기찬 요구로 열권까지 허용하던 책보유권수를 그즈음 감호소측은 다시 3권으로 줄여 버렸다. 7월 7일 아침 내가 있는데서 몇개 감방 건너에 들어 있는 서준식군이 최종대부장에게 책문제를 두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서적보유권수를 왜 갑자기 3권으로 줄인겁니까? 종전대로 환원해주시오.》 《세권이상 안돼.》 《대체 리유가 뭡니까?》 서군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자 최부장이 고함쳤다. 《저새끼 끌어 내!》 그러자 감방문에 붙어 있던 서군이 고함을 질렀다. 《못 살겠다!》 여기에 호응해 이방저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간수 10여명이 몰려 와 그중 감방문을 찬 황동지를 수갑을 채워 지하실로 끌고 갔다. 우리들은 황동지를 돌려 보내라고 요구하여 전원 단식에 들어 갔다. 우리가 단식에 들어 가자 감호소측은 광주사태가 어떠니, 《계엄》이 어떠니 하면서 감호소밖에 땅크까지 와 있으니 단식을 풀라고 협박했다. 말을 듣고보니 긴장된 정황인것은 분명했지만 황동지가 돌아 오기전에는 투쟁을 멈출수 없었다. 우리의 단식투쟁이 광주봉기와 거의 같은 시각에 거행된것이 우연한 일치겠는가. 우리는 광주봉기에 대한 소식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더는 참을수 없는 형편에서 사생결단으로 이 투쟁을 단행했었다. 놈들의 탄압만행의 최극단, 분노와 투쟁의욕의 최극단이 감방밖이나 감방안이나 일치했다는 점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였다. 우리의 투쟁도 역시 력사의 필연적인 귀결점에서 발발했다는 의식이 장기수들의 투쟁기세를 높여 주었다. 《동지들, 밖에서도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다.》 하고 누군가 힘차게 웨쳤다. 놈들도 더욱 혈안이 되여 우리의 투쟁기세를 꺾어 보려고 별의별짓을 다하였다. 이전까지는 한방에 세사람씩 같이 있었는데 우리가 단식에 들어 가자 7월 11일부터 모두 분산시켜 독방에 집어 넣었다. 단식 7일째인 7월 13일 감호소측은 동지들을 차례로 끌어 내 강제급식을 시행했다. 감호과사무실에 한번에 네사람씩 붙들어다 의자에 묶어 앉혀 놓고 고개를 젖히고 강제로 입을 벌려 목구멍에 호스를 밀어 넣었던것이다. 원래 강제급식이라고 하면 호스로 묽은 미음을 주입하는것인데 저들은 소금을 잔뜩 녹인 짠 소금물을 들이부었다. 우리가 물도 마시지 않으며 단식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소금물을 주입하여 목이 타서 할수없이 물을 먹게 하려는 속심이였다. 서준식동지외 네사람이 감호과로 붙들려 갔을 때 우선 김동지와 최동지가 강제급식을 당하게 되였다고 한다. 최동지가 끌려 들어 가보니 먼저 들어 간 김동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 가고 있었다. 최동지는 《호스가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 간것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김동지가 이렇게 되자 그들도 강제급식을 더이상 계속할수는 없었다. 그런데 김동지보다 먼저 강제급식을 당한 변동지는 또한 의식불명상태로 업혀 나가 위급한 상태였다. 그들은 강제급식을 실시한후 변동지를 떠메다가 지하실에 내팽개쳤다. 이미 12∼13명의 동지들이 지하실벽에 기대여 토하기도 하고 설사를 쏟아 지하실전체가 오물로 흥건했다. 변동지는 지하실에 오자마자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 아파 하는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여 나온다고 간수부장이라는 자는 《방성구(딱딱한 뭉치를 입안에 쑤셔 넣어 소리를 막는 행형도구) 채워!》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래도 지하실을 지키던 간수가 일말의 량심은 있었던지 차마 방성구를 채우지는 못하였다. 지하실에 갇힌 동지들은 새벽녘이 되여서야 방으로 돌려 보내졌는데 그때까지 변동지에게는 아무런 응급처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그뒤 변동지가 언제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알수 없다. 우리가 들은것은 그저 죽었다는 소식뿐이였다. 감호소측은 강제급식으로 동지들을 살상하면서 한편으로 사기극까지 연출하였다. 강제급식이 실시되던 전날쯤이던가 나는 또 간수들에게 끌려 나갔는데 가보니 감호과장 오기수가 의무과장까지 데리고 앉아 협박을 하는것이였다. 《계엄사에서 감호소 단식문제를 례의 주시하고 있다는걸 알아? 오늘도 복식하지 않고 계속 버티면 우리도 어쩔수 없지. 계엄사령부로 넘기겠어.》 이번에는 옆에 있던 의무과장이 나서서 나를 진찰하더니 걱정해 주는척 했다. 《당신이 혈압이 130, 230인데 이런 상태에서 계엄사령부로 넘어 가면 어떻게 되겠소?》 밖에서는 시동을 걸어 놓은 뻐스가 부릉부릉 소리를 내고 있었고 소지들이 내 소비품을 뻐스로 옮겨 가느라 소란을 떨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빨리 내보내!》 그래도 내가 계속 버티자 오기수는 연신 재촉이였다. 《당신 어쩌려구 그래?》 《먼저 요구사항을 받아 들인다고 해주시오.》 결국 안되겠다 싶었던지 그는 아예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나도 성이 나서 맞고함을 쳤다. 《보낼테면 보내라. 군인들도 너희들보다는 나을것이다.》 오기수가 잠간 나갔다 오더니 간수에게 소리쳤다. 《리××, 계엄사로 보내버려.》 잠시후 뻐스에 태워 져 내가 끌려 간 곳은 다름아닌 청주교도소 미결감이였다. 청주교도소는 감호소와 담장을 맞대고 있었다. 감호과장이라는 자의 얕은 꾀에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들어 가보니 사동을 하나 온통 비워 놓았는데 그 끝방에 림동지가 먼저 끌려 와 있었다. 나는 1사 14방에 갇혔는데 잠시후 또 한동지가 끌려 왔다. 우리 세 사람은 한사동의 량쪽끝과 가운데감방에 갇혀 일주일정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기수는 보안감호소에 남아 있는 동지들에게 우리가 계엄사령부로 끌려 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을게 틀림 없었다. 하지만 보안감호자인 우리가 무한정 청주교도소에 있게 될리는 없고 어차피 보안감호소로 들어 가야 할텐데 그처럼 금방 탄로날 거짓말까지 해가며 단식을 중지시키려는 그들이 오히려 딱하기까지 하였다. 7월 7일부터 시작된 감호소의 단식투쟁은 17일간을 끌었다. 대부분 나이도 고령인데다 고혈압, 심장병, 위궤양 등 질병을 한둘씩 가지고 있는 우리 동지들이 17일간이나 단식한다는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일수밖에 없었다. 강제급식과정에서 두 동지가 숨진데 이어 투쟁을 마친후 또 두 동지가 후유증으로 죽었다. 특히 김동지는 끝까지 복식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시신이 들려 나갈 때의 슬픔, 내가 살아 남는다면 저 동지들의 죽음을 꼭 세상에 전하리라 다짐하였다. 단식투쟁을 마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대로 감호소측의 태도가 표변했다. 자신들의 강제급식으로 두 동지가 사망하자 문제가 커질가 기겁한 그들은 담요도 좋은것을 가져다 깔아 주고 방충망도 새것으로 갈아 주는 등 《선심》을 쓰는척 하였다. 게다가 우리가 요구사항을 들어 달라고 하면 《당신들의 요구사항은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되였다.》, 《청와대에서까지 다 알고 있다. 곧 개선대책이 나올것이다.》 등등의 말을 늘어 놓았던것이다. 그러나 일단 단식이 끝나자 개선조치가 나오기는커녕 감호소측은 규률을 더 강화하였다. 겨울이 되면서 날씨는 점점 더 추워 지는데 우리들이 추울 때면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던 수건도 두르지 못하게 했고 담요도 깔고 앉지 못하게 하였다. 다 늙어 뼈만 남은 엉뎅이로 마루바닥에 돌부처처럼 앉아 하루종일 지낸다는게 보통일이 아니다. 우리들이 끝없이 항의했지만 간수들의 태도는 5.16직후만큼이나 경직되여 있었다. 하긴 청주교도소 재소자들을 보안감호소 큰 운동장에 끌어다가 군사훈련(뒤에 알고보니 삼청교육)을 시키는 고함소리가 하루종일 끊기지 않는 점도 그무렵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의 단식투쟁을 《청와대》에서도 알고 있다는 오기수과장의 말이 전혀 무근거한것은 아닌듯 하였다. 후에 들으니 우리의 단식투쟁직전에 전두환《보안사령관》이 감호소를 순시하고 갔다고 했다. 그가 직접 모종의 지시를 했는지 아니면 요즘 하는 말로 최고권력자의 순시에서 감호소관리들이 무슨 감을 잡았는지 알수 없었으나 그뒤부터 놈들은 우리들을 바짝 조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폭력적인 강제급식으로 두 동지를 죽음에로 몰아 넣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 문제로 문책을 당하기는커녕 오기수과장은 얼마뒤에 어느 교도소부소장으로 영전되여 갔다고 들었다. 바야흐로 독재자화신이 재림한 세월이였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처우개선투쟁은 계속되였으나 87년 6월항쟁이전까지는 거의 개선된 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재자대신 권력의 자리에 올라 앉은 전두환 역시 남조선땅에 뿌리 내려 진 《반공》, 반민주주의독버섯에 불과했다.
진달래의 마음
80년 단식투쟁과정에서 모든 동지들이 독거수용된후 우리들은 88∼89년 보안감호소문을 닫을 때까지 독방에 있어야 했다.(내가 석방된후인 89년 석방을 기다리던 동지들을 몇달간 혼거시킨적은 있다고 한다.) 혹시나 여러사람이 비좁게 한방에 부적거리는것보다 독방이 낫지 않느냐고 생각하실분이 계실가 해서 《독방의 고통》에 대해 잠시 설명해 보겠다. 하루종일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못한채 10년, 20년을 지내다보면 독거수들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따뜻한 감정교환이라는것이 어떤것이였는지조차 잊어 버릴 지경에 빠지게 된다. 자연히 심정은 메마르게 되고 마치 숨 쉬는 화석 같은 존재가 되여버린다고나 할가. 사방이 무섭도록 조용한 저녁, 어제와 오늘이 잘 구분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언제나처럼 독방에 앉아 《윙》 하는 형광등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두려움이 뼈 저리게 스며 든다. 《이제 내가 미치는구나.》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눈길, 정다운 목소리를 그리워 하는것은 차라리 사치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정서에 오래 잠겨 있을 사이없이 무자비한 물리적폭력은 어김없이 다가왔으니까.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나를 유일하게 지켜 주는분이 있었거니 그이는 우리모두의 마음의 기둥인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밤이면 철창사이로 멀리 반짝이는 북녘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어린애가 어버이의 품을 그리듯이 그리며 흐르는 눈물, 이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것 같았고 미쳐 버릴듯 한 심신의 고통도 서서히 씻어 주는듯 싶었다. 뒤이어 찾아 드는 어머니와 안해의 얼굴, 딸애의 손짓 그리고 마주 달려 오며 소리치는 동지들의 모습… 85년 또 두사람의 동지가 자결하였다. 여전히 실시되고 있던 전향담당공작반의 고문에 죽음으로 항거한것이다. 교도관들에게 맞아 온몸에 피멍이 든채 독방에 실신해 있던 리동지가 《이대로 맞아 죽느니 항거하여 놈들의 탄압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며 《동지들, 내 몫까지 싸워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리동지는 충청도출신으로 중학교 영어교사를 지낸분인데 전향공작반에서 리선생을 괴롭히려고 한방에 넣은 정신병자가 오히려 리선생의 인격에 감복해 그의 수발을 들었다는 일화를 지녔던분이다. 그로부터 한주일쯤 뒤 역시 전향강제고문에 시달리던 황동지가 리동지의 뒤를 따랐다. 그는 《네놈들이 절대 우리를 다 죽이지 못한다. 동지들중 단 한명만 살아 나가도 진실은 낱낱이 밝혀 지고 민중과 력사는 결코 침묵하지 않을것》이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허나 나는 죽음이 너무나 낯 익은것이 되여 버린 감방안에서 무엇인가 생명의 대견함을 지켜 보고 싶었다. 죽음에 맞서 삶을, 변심없이 불 타는 삶의 향기를 맡아 보고 싶었다. 나는 운동을 나갔다가 소지들이 뽑아 버린 진달래 한뿌리를 몰래 품속에 품고 돌아 와 간수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감방구석에 숨겨 심었다. 그리고는 물도 주고 추울 때는 담요도 덮어 주고 있는 정성을 다하며 기어이 피여 주기를 바랐더니 이듬해 봄에 과연 연분홍빛 진달래꽃이 활짝 피여 났다. 나는 기뻤다. 나의 생명의 갈망, 넋의 몸부림을 받아 안고 활짝 피여 난 진달래, 너는 사랑하는 조국과 친지들에게로 달리는 내 마음! 감방엔 붓도 종이도 없었지만 나는 한줄한줄 기억에 새기며 《진달래의 마음》이라는 시를 완성해 갔다. 그후 감방에서 한적하고 고독이 느껴 질 때마다 이 시를 읊어 보면 한결 마음은 든든해 지고 거뜬해 져 가장 힘겨운 몇해를 벗 삼아 읊어 온 그 시를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본다.
최초의 면회자
1987년 6월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어도 높디높은 담장안의 우리들에게 이 소식은 금방 전해 지지 않았다. 그러나 뭔지 모를 변화의 조짐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하루는 나와 같은 함경도사람인 계호과장이 나를 불러 내더니 전에 없이 부드러운 태도로 이런저런 동정의 말을 하는것이였다. 저자가 갑자기 무슨 속심으로 저런 말을 늘어 놓는가 싶어 듣고만 있는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처럼 이북출신으로 면회자 하나없이 감옥생활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여 자매결연을 맺고 후원활동을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는데 며칠후 그들을 만나게 해주겠소.》 그러고보니 그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들은 서울 어느 교회의 목사부인과 녀전도사인데 79년부터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자매결연사업을 해오고 있다고 하였다. 감호소측은 지난 6∼7년동안 그들에게 전향한 사람들만 만나게 하였던 모양이다. 87년경 감호소측은 전향공작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던지 그들을 비전향자중 한 동지와 만나게 했다. 그는 얼마후 전향을 하였고 감호소에서 나갔는데 아마도 감호소 최후의 전향자였던것 같다. 사실은 그가 끝 없는 보안감호소 생활속에서 고민하다가 출소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굳혔을무렵 그 기색을 눈치 챈 감호소측이 전향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목사부인과 전도사를 만나게 했던것 같다. 그런데 그가 진짜로 전향을 하니 감호소측은 그 그리스도교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다른 비전향동지들과도 자매결연을 하도록 주선을 한게 아닌가 싶다. 30여년 감옥생활기간 온갖 고문과 구타에도 굴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 모르는 누군가가 면회 와서 어떤 얘기를 한다고 해서 전향을 결심하는 일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지만 감호소측의 의도는 분명했기때문에 경계심을 갖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감호소측이 그리스도교인들과 처음으로 만나게 한 비전향동지는 서준식군이였던 모양이다. 서군도 나와 같은 경계심을 가질수밖에 없었던지 처음에는 그들을 랭랭하게 대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다시 왔기에 만나보니 정성스럽고 량심적인 사람들인것 같아 그들에게 여러 다른 무의탁 무연고 동지들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속에 아마 내 얘기도 들어 있었을것이다. 계호과장과 만난 며칠뒤 간수가 나오라기에 따라 갔더니 사회사람들과 면회시킨다고 하였다. 순간 너무나 낯 선 느낌이 들었다. 징역살이 22년, 감호소생활 11년째였지만 그때까지 나에게 면회자라고는 없었다. 간수, 검사, 잡범 등등 담안의 사람이 아닌 사회사람을 만난 기회는 전혀 없었던것이다. 면회실로 가는 동안 내 마음속은 기대감과 경계감이 뒤엉켜 몹시 어지러웠다. 면회실에 들어 가 보니 서울 궁정교회 담임목사의 사모님이라는 부인 한사람과 20대 처녀로 보이는 전도사 한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홍자씨는 선량한 인상이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치심대로 옥에 갇힌분들을 돕고저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리유도 아니고 자기 신념때문에 험난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그들이 여느 그리스도교인들처럼 무턱대고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강요했다면 나는 더 들을것없이 돌아서 나왔겠지만 나를 리해하려고 노력하는 진심이 느껴 져 나는 그날 두사람과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얘기, 감방에서 힘들 때마다 노래를 지으며 이겨 나간다는 얘기, 내가 걸어 온 길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얘기 등등, 리미순전도사는 사회분위기가 풀려 감호소에서 나오게 되면 사회에서 잘 지낼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릴테니 걱정 마시라고도 했다. 그들을 믿고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경계심을 늦출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그런 뜻이 없다 하더라도 어차피 감호소측이 그들과 나를 만나게 한것은 내가 전향하기를 바라는 까닭에서 아닌가. 담화과정에 나는 어찌나 보자 하고 깔끔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왜 전향설교를 않으십니까. 당국의 취지도 그건데…》 두 녀인은 나를 물끄러미 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당국의 요구에 따라 온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찾아 왔습니다. 예수의 교리인즉 인간이 인간으로서 참뜻을 지키라는것인데 자기들의 신념을 지켜 수난을 겪는 당신들한테 전향설교가 무슨 필요겠어요.》 그들은 면회시간이 끝나 일어 서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다시 찾아 와도 만나러 나오시겠습니까?》 《그러리다.》 그들은 88년 10월 내가 출소할 때까지 서너번쯤 더 찾아 왔던것 같다. 언젠가 한번은 그들이 《이제는 이렇게 되다나니 오히려 우리가 물들었네요.》 하여 나를 웃기였다. 그리스도교신자와 사회주의자인 내가 친숙해 진데는 인간의 참된 량심과 본성의 공통성이랄가… 새로운것을 깨닫게 하는것이 있었다. 이 깨달음은 차디찬 감방생활속에서 마음속으로 지켜 얻은 흐뭇하고 귀중한것이였다. 올 때마다 령치금은 물론 간식, 과일 같은것을 푸짐하게 넣어 주었다. 그들은 내가 34년간 배를 곯아 온것을 진심으로 안스러워 하였다. 그들과의 인연은 출옥한후에도 계속되였다. 나는 그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새롭게 배운 점도 많다. 두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도록 하겠다. 87년 하반기무렵에는 사회에서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도 감지하게 되였다. 변화하는 정황에서 우리들은 더욱 단결하여 여러가지 처우개선조치를 따냈다. 우선 감호소방에 붙어 있던 두개의 자물쇠중 밑의것은 잠그지 않게 되였다. 어떤이는 자물쇠를 두개 잠그나 하나 잠그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개의 자물쇠로 꽁꽁 잠긴 방안에 갇혀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감 말고도 그놈의 자물쇠는 실제생활에서 우리들에게 상당한 손해를 끼쳐 왔다. 한사동안의 22개 감방은 모두다 열쇠가 다른데 한방에 자물쇠를 두개씩이나 채우면 간수는 44개의 열쇠를 관리해야 한다. 운동하러 나가고 들어 올 때 간수들이 그 많은 열쇠중 특정한 1방열쇠를 찾기 위해 꾸물거릴수밖에 없는데 단 1분의 해빛이 아쉬운 우리들로서는 너무나 그 시간이 아까왔던것이다. 88년이후에는 운동시간도 규정대로 지켜 졌고 책보유권수도 5권으로 늘었다. 그런데 내가 출소한 88년 10월까지도 신문과 같이 새 소식이 실려 있는 인쇄물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새 소식을 차단하려는 감호소측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동지들중에 동아일보사에서 나오는 《음악동아》를 받아 보는이가 있었는데 이 잡지를 넘겨다보면 가끔 남는 공간에 자매지인 《신동아》의 광고가 나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몇개 기사의 제목정도가 나와 있는게 고작이였지만 우리로서는 그것만 해도 소중한 정보가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신동아》광고를 소중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던지 아니면 《음악동아》의 한페지한페지를 모두 검열했는지 알수 없으나 감호소측은 나중에는 그 광고까지 지워 버리고서야 잡지를 우리에게 주었다. 오로지 우리들을 외부의 소식으로부터 차단해야만 질서를 유지할수 있다고 생각한것 같다. 이 같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이 일으킨 민주화의 물결은 보안감호소의 담벽에도 거세게 몰아 쳤다. 《전향 안하면 영원히 해빛을 보지 못하게 하리라.》는 《사회안전법》아래서 서준식동지가 비전향 제1호로 감호소문을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살아 남으면 우리의 진실을 력사에 전하리라.》고 했던 동지들의 유언처럼 출소후 서동지는 《사회안전법》의 야만성과 청주보안감호소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로 인해 우리들의 존재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 지게 되였다. 88년 10월에는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국정감사반원들이 감호소로 찾아 왔다. 이전에는 《법무부》장관과 같은 고위관료들이 감호소를 순시한적이 있긴 했다. 감호소규칙에는 이 같은 순시가 예정되면 감호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게 되여 있다. 순시는 감호자들의 요구사항을 얘기할수 있게 하는 절차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전혀 지켜 지지 않았고 갑자기 대청소를 한다든지 해서 부산을 떨면 우리들이 《누가 오는구나.》 하는 눈치를 채고 처우개선요구를 준비하군 하였다. 하지만 막상 순시하러 온 인사가 말 한마디없이 사동을 휙 지나가버리는데야 무슨 요구를 할수 있었겠는가. 국정감사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여야가 섞여 있겠지만 관료들보다는 낫겠지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만나고보니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적어도 국정감사라면 우리들중 대표를 불러 내 면담하는 자리정도는 가졌어야 했을텐데 그들 《국회의원》들은 각자 흩어 져 사동안을 돌아 다니며 쇠창살의 우리를 들여다 보고 한마디씩 던지는 식으로 《감사》를 하였다. 이 방앞에서 몇마디 주고 받다가 그 방 동지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 마음대로 저 방앞으로 가버리는 식이였다. 게다가 몇몇 《의원》들은 면담중에 보안감호처분이 우리들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해 왔는지 조사하기보다는 《왜 전향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추궁에 가까운 질문으로 대치했다. 한 동지가 참다못해 《우리에겐 우리의 사상이 있다. 왜 사상을 따지는가. 당신들이 조사해야 할것은 우리들이 왜 이런 인권유린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라고 항의했다. 보수적인 신문들이 이 말을 거두절미해 《메마르고 랭혹한 보호감호소 빨갱이들》은 구제불능의 고집인것처럼 외곡해서 써놓았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이 같은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이해 한가위날에는 야당총재 김대중씨가 우리들모두에게 2만원씩의 떡값을 보내왔다. 이것 또한 처음 있은 일이였다. 이 같은 정황에서 많은 동지들이 《감호소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예상을 했다. 《정권》측의 체면때문에라도 《사회안전법》을 더이상 존속시키지 못하리라는 얘기였다. 하긴 3개월만에 한번씩 내려 오는 검사조차도 그무렵 면담에서는 《아예 전향서라는 제목도 바꾸고 전향이라는 말도 빼버리고 <국가법질서를 지키면서 가족과 단란하게 살아 가겠습니다.>라고만 쓰면 내보내주겠다.》고 나왔다. 우리들이 그 오랜 세월 전향서를 쓰지 않은것이 《전향》이라는 단어 하나때문이였단 말인가. 검사의 그 같은 《수정제안》에 응한 동지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검사의 태도는 정세가 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것이였다. 이처럼 정세는 동지들의 예측이 설득력 있는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분석들이 가슴에 다가오지가 않았다. 수십년이나 징역을 살고 2년만기의 보안감호처분이 나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여섯번이나 연장되는 동안 《옥문이란 영원히 열리지 않는 문》이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골수에 박힌 모양이였다.
징역 1590년
이처럼 나가리라는 기대는 한오래기도 갖지 않은채 지내고 있던중 88년 10월 27일 들어 올 때만큼이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옥문이 열렸다. 석방이라는것이다. 서른여섯에 시작된 감옥살이가 일흔둘에 끝난것이다. 이때의 심정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이야기했으므로 생략하고 형사들이 나를 구세군양로원으로 데려 가는 동안 차안에서 만감이 교차하기에 불러 보았던 노래 하나를 여기에 소개한다.
내가 나온후 감호소에 남아 있던 동지들은 89년 5월까지 모두 출소하였고 수많은 동지들의 피와 땀을 묻었던 청주보안감호소는 마침내 문을 닫았다. 어떤 동지가 계산해 보니 끝까지 감호소에 있다가 출소한 51명 우리 동지들이 살아 온 징역의 해수는 도합 1590년, 1인당 평균 29년 이라는 기간이 되더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노라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렸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단두대와 사형장에서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웨치며 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고문실이나 감방안에서 악독한 고문과 굶주림과 추위속에 소문도 없이 숨지였으며 고진히동지처럼 자결로 지조를 지킨 동지들은 또 얼마이던가. 먼저 간 동지들이 숨지는 마지막순간에 《동지들, 내 몫까지 싸워 주시오. 동지들중 단 한명만 살아 나가도 진실을 민중과 력사앞에 낱낱이 밝혀 주오.》 하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히 들리는듯 싶다. 죽어 간 동지들몫까지 합치면 어떻게 징역해수를 도합 1590년으로만 세일수 있으랴. 나 역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의의 있는 시절, 거의 한생과 맞먹는 세월을 해빛 한점 없는 감옥안에서 보냈다. 해빛만 쬐여도 당장 실신할듯 싶은 만신창이 된 몸으로 낯 설은 바깥세상에 던져 진 몸, 허나 이 몸에 피가 흐르고 심장이 고동치고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출옥한 동지들보다 몇십 몇백배로 많은 죽어 간 동지들의 령혼을 불러 보고 싶었다. 나는 34년의 옥고를 치르고 끝내 자신의 신념과 생명을 지켜 냈다는 자부심과 행복감보다 내 가슴속에 새겨 진 동지들의 피 타는 목소리를 심장의 기력이 더 쇠잔해 지기전에 되새겨 웨쳐야겠다는 초조하고 무거운 심경에 처해 있었다. 징역의 해수로 계산된 1590년뿐아니라 빼앗겨 버린 수천수만의 생명의 총 년륜을 되찾아 살려 내야 할 힘겨운 사명이 살아서 석방된 나의 늙은 어깨에 걸머지워 져 있음을 느꼈다. 34년 옥고에서 지켜 낸 생명의 의의도 여기에 있지 그 어떤 다른데에 있을수 없다는 생각이 출옥하는 나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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