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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광풍을 헤치며

 

《감옥문을 나서다》

 

이런 속에서 세월은 흘러서 1959년 1월 27일 징역을 다 살고 출옥하게 되였다. 감옥문을 나서는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삶을 투쟁의 목표로 삼고 드디여 그 지옥 같은 감옥을 나서는 길이지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현실감보다 죽어 간 동지들에 대한 생각으로 걸음이 무거웠다.

40여년 일제통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싸워 온 수많은 동지들, 원통하게도 조국이 동강나고 전쟁이 일어 나면서 남쪽에서 활동하던 많은 동지들이 북으로 갔지만 계속 남아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대다수가 피살되거나 체포되였다.

정전후 포로수용소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들은 줄잡아 수만명이 되리라고 한다.

전후의 무법천지에서 학살 당하고 얼어 죽고 굶어 죽는 가운데 나처럼 《단기형》을 받고 살아서 옥문을 나설수 있었던 사람이 그들중 과연 몇이나 되였을가.

정치범의 생존률이 200 대 1이나 300 대 1이니 하던 50년대 감옥에서 말이다.

동지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 출소날이 되였다. 그러나 내게 입고 나갈 옷이 있을리 없었다. 홀랑 벗겨서 내보낼수는 없었던지 형무소측에서 시퍼런 죄수복에 까만 물을 들여 주기에 입고 나왔다. 죄수 비슷한 거지꼴을 하고 지리도 전혀 모르는 부산거리를 물어 물어 내 거처로 지정된 《사법보호회》를 찾아 갔다.

그곳은 강도, 절도, 사기군 등 징역 살고 출감한 사람들중 갈데 없는 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였다.

경찰의 감시로 인한 고통이야 어차피 각오한것이지만 그렇게 품성이 좋지 못한 자들과 함께 살자니 참으로 힘들었다.

그자들은 《사법보호회》 직원들과 경찰에게 잘 보이는 길이라 생각했던지 걸핏하면 내 얘기를 그들에게 고자질했다. 그것도 경찰이 구미가 당길만 하게 각색을 해서.

더욱 참기 힘들었던것은 자기들은 온갖 나쁜짓을 일 삼으면서도 그것을 변명하기 위해 《그래도 너 같은 빨갱이보다는 내가 애국자다.》라며 공연히 시비를 걸어 오는 일이였다.

그자들이 걸어 오는 시비에 말려 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단속해야 했다.

나는 속으로 끝없이 되뇌이였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내가 내스스로를 애국자라 주장한적은 없다, 나는 애국하려고 노력했을뿐이다. 이 친구들아, 더 이상 조국을 욕되게 하지 말아다오.

《사법보호회》측도 나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도, 절도, 깡패들은 취직을 시켜 주고 그들이 돈이 생겨 술 먹고 란동을 부려도 그냥 두면서 나는 취직을 시켜 주려 하지 않았다.

출옥은 했지만 또 다른 《감옥》으로 옮겨 앉은 심정이였다.

그래도 감옥에서는 견실한 동지들이 곁에 있어서 마음의 의지가 되였는데 여기는 부랑배들판이니 마음의 의지가 없어서 고독하고 외롭기는 감옥보다 더했다.

마침 다른 자들은 일이 고되다고 나가라 해도 안 나가는 구멍탄공장일이 생겼기에 사정사정해서 구멍탄공장에 들어 갔다. 어두운 새벽에 나가 밤 9시까지 일하고 받은 돈이 일당 400환이였다.

나는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담배도 제일 값싼 《파랑새》를 아끼고 아껴 피우면서 번 돈을 부지런히 모았다.

가능한 한 《사법보호회》에서 살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중 하루는 구멍탄공장에 출근하는 길에 낯 익은 사람을 하나 만났다.

부산거리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있겠는가 싶어 지나치는데 그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것이였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분명 고향 풍산의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이였다.

그 역시 타향에서는 고향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심정이였던지 무척이나 반가와 하였다.

내 근황을 묻기에 징역 살고 나와 《사법보호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 별로 경계하는 빛이 없었다. 구멍탄공장에 출근하는 길이라 대충 인사를 나누고 아쉽게 헤여 졌다. 생각지도 않게 고향사람을 만난때문인지 그후 며칠간 고향 풍산모습이 눈앞을 스쳐 가군 하여 공연히 울적하게 지냈다. 하늘을 나는 구름이나 계절조를 봐도 고향이 그리워 눈굽이 축축히 젖어 옴을 금할수 없었다.

어머님과 안해는 무고한지, 현옥이도 이제는 열살을 넘겨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겠지… 더욱 그리운것은 광복후 새 조국건설을 위해 어깨를 들먹거리며 함께 뛰여 다니던 동지들이였다.

그들은 지금 전쟁의 피해를 가시고 조국건설에 분주할텐데 나는 여기 남쪽땅의 막바지에서 얼굴이 새까매 가지고 구멍탄을 찍고 있다는 일종의 비관과 부러움이 엉킨 그리움이였다.

이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길에서 만났던 그 친구가 《사법보호회》로 나를 찾아 왔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 만난 얘기를 했더니 다들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자리를 만들었으니 가자는것이였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가보니 진짜 여러사람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왔지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지금도 감시 당하고 있는 사람인데 당신들이 내게 이렇게 하면 해를 입지 않겠소?》

《그런건 걱정 안해도 됩니다.》

그들은 큰소리였다.

얘기를 듣고보니 그들 대부분이 부산에서 웬만큼 경제적지반을 잡은듯 하였고 뻐스를 몇대씩 가지고 사업을 하는, 당시로서는 큰 부자라고 할만 한 사람도 있어 기관장들과는 통하는 등 자신이 있는것 같았다.

그들의 말이 내 처지를 동정해서 나를 돕는 회를 만들려고 한다는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나는 부산에서 유지라고 할만 한 이들의 보증으로 부산영도극장에 취직해 선전일을 맡아 보게 되였다. 영화선전물이나 포스터, 간판 등을 제작하는 업무였다.

취직해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였지만 당시 극장은 돈벌이가 괜찮은 곳이였다. 전쟁후의 황량한 사회가 사람들을 극장으로 몰리게 만들었던것일가?

돈이 많이 굴러 다니는 곳이니 자연히 선전일에도 갖은 협잡이 끼여 들어 있었다. 직원들은 이런저런 수단으로 비용을 남겨 제 주머니에 챙겨 넣군 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일했다. 사장도 내 전력을 알고 있는 판에 《빨갱이》취직시켜 주었더니 회사돈 잘라 먹더라는 소리가 나와서는 절대 안될 일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장이 이점을 깨닫게 되였던 모양이다. 얼마후 그는 나를 부르더니 《선전책임자로 올려 줄테니 열심히 해달라》는것이였다. 책임자가 되니 돈도 더 많이 받게 되였다. 계속 극장에서 밥벌이만 하고 있을수는 없었으므로 받은 돈을 알뜰히 모았다.

그러던중 60년 봄 4.19감격을 맛 보았다.

 

 

두번째 투옥

 

부산은 마산과 함께 4.19봉기가 제일먼저 터져 오른 고장이다. 거리거리를 떨쳐 나선 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최루탄을 쏴대는 경찰들과 맹렬한 투석전을 벌리였다. 시위군중들은 경찰서와 지서들, 괴뢰정권기관들을 들부시며 시청으로 몰려 갔다.

기동경찰들에 의해 김주렬청년이 살해되자 봉기는 더욱 격앙된 상태에 이르렀다. 《승공》과 《북진》의 잠꼬대속에 얼어 붙었던 통일운동도 힘차게 솟아 올랐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고 쓴 프랑카트를 들고 거리를 내닫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학생들은 우리 영화관에도 밀려 들어 프랑카트들과 포스터를 쓸 붓과 유채화구들을 요구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구호들을 쓰기도 했다.

4.19는 이미전에 터졌어야 할 봉기였다.

리승만《정권》은 곪고 썩을대로 썩은 허수아비정권에 불과했다.

낡디낡은 구식의 식민지독재체제에 경제도 봉건적인 소유관계를 벗어 나지 못하여 도시와 농촌은 황페화될대로 되여 있었다. 남조선인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칭 《국부》라고 하던 리승만은 《북진》이요, 《부흥》이요 하는 낡은 외마디소리를 외우며 종신《대통령》의 단꿈만 꾸고 앉아 있었다. 그의 생명은 오직 이런 《허수아비》를 필요로 했던 미국에 의해서만 겨우 연명되고 있었을뿐이였다.

그가 얼마나 황당한 꿈에 취해 있었으면 자기의 동상을 시위군중들이 끌어 내리자 《저들이 왜 저러는가.》고 놀라기까지 했겠는가.

한때 애국애족을 침이 마르도록 부르짖던 그가 하와이 외딴섬에서 림종을 고할 때 《나의 모든 재산을 절대로 영원히 나의 안해 프란체스카에게 넘겨 준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만 들어도 그의 타고 난 생리를 잘 알수 있다.

그의 생리가 곧 4.19이전의 남조선《정권》의 생리였다. 그리고 지금도 같다. 《정권》은 몇차례 바뀌였으나 그 생리는 변하지 않았다. 전민항쟁으로 리승만《정권》이 꺼꾸러진후 온 남녘땅에서 터져 올랐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하는 통일의 웨침, 그 함성은 4.19의 필연적귀결점이였다.

그러나 61년 5월 16일 새벽, 독재자가 군대를 내몰아 한강다리를 건너 《정권》을 가로 타고 앉았다. 중앙청을 장악하고 방송국을 탈취한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첫 《혁명공약》이라는것을 발표하였다.

여섯가지 조항으로 된 공약중에 첫째 조항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였다.

나는 《국시의 제일》대상이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며 《재정비강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또다시 휘몰아쳐 온 파쑈의 광풍이였고 정치범들에 대한 재검거선풍이였다.

61년 6월 어느 날이였다.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갑자기 찾아 왔다. 사정을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꼭 필요하니 200만환만 빌려 달라고 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알수는 없으나 그 친구의 성품이 진실함을 익히 아는터이고 더우기 내게 돈이 있으면서 거절할수가 없는 일이라 더 묻지 않고 있는 돈을 모두 꾸어 주었다. 이무렵 나는 그동안 푼푼이 모아 둔 돈이 당시로선 제법 큰돈인 150만환정도 되였다.(62년 6월 10일 화페개혁으로 10환이 1원으로 바뀌였다.) 그 돈을 몽땅 꾸어 준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한번 투옥되는 꼬투리가 될줄이야, 며칠후 나는 《사법보호회》에 영문도 모르고 잡혀 갔는데 가서 보니 벌써 조서상 《지하당조직자금제공자》가 되여 있었다.

나는 그때 검거리유가 전혀 무근거하다는것으로 당국과 몇번 맞서 싸워 보았는데 생각해 보니 전혀 필요 없는것이였다. 검거리유가 문제가 아니라 《국시의 제일》대상들을 결박하고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문제였기때문이다. 《지하당조직자금제공자》가 아니라면 또 다른 리유를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나를 가둬 넣었을것은 뻔한 리치였다.

4.19후 1년가량은 4.19의 여파때문인지 형무소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 졌었다고 한다. 《간첩죄》가 붙지 않은 정치범들에 대해서는 비록 감형의 5분의 1이란 린색한 폭이기는 했지만 감형조치도 내려 졌다. 게다가 간수들은 180도 달라 진 태도로 정치범들에게 《당신들도 재심을 하면 다 나갈것이니 신청하라.》며 떠들고 다녔다는것이다. 실제로 공장에 출역하고 있던 동지들중 일부는 재심을 거쳐 석방되기도 했고 병보석으로 나온 경우도 몇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5.16과 함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였다. 형무소 역시 사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기때문이다. 우선 간수들부터 바싹 긴장해서 동을 지나다니는 발걸음이 빨라 졌다. 형무소 요소요소마다 집총 한 경비병들이 지켜 서고 사동안에도 군인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5.16이전 재심이나 병보석으로 출옥했던 사람들은 물론 사안이 가벼워 과거에는 재판에 붙이지도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 붙들려 왔다.

나 역시 《지하당조직자금》제공혐의가 그대로 덮어 씌워 져 일사천리로 재판이 진행된끝에 징역 15년이 확정되였다. 과시 군복 입은 깡패들다운 처사였다. 지리산싸움터현장에서 체포되였을 때도 7년형을 받았는데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15년형을 받고보니 억울하다는 감정에 앞서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에 웃음부터 나왔다.

이제 내 나이 마흔여섯, 환갑때까지 감옥에 있으라는 얘기였다.

독재자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책으로 삼고 서둘러 이런 폭거를 감행한것은 우선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을것이다. 력대 사대주의자들이 하나같이 《반공》을 국책의 제일로 내세우고 미국의 환심을 샀었다. 국민앞에 내놓는 공약이라면 응당 구악을 일소하고 정사를 바로 펴서 민족경제를 부흥시켜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것을 명목상이나마 앞에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독재자》한테는 국민의 얼굴보다 미국상전의 표정이 더 중요했다.

그의 사대매국노의 본성은 공약의 두번째 조항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적협약을 충실히 리행할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뉴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역시 상전의 얼굴에 초점을 두고 잠시도 딴전을 팔수 없는 독재자의 가련한 몰골을 잘 시사해 준다. 이렇게 아부아첨에 환장이 된 자의 국민을 향한 눈길엔 무서운 독기가 어려 있었다.

독재자는 몇달사이에 수백가지 악법을 만들어 놓고 즉결군사재판으로 남조선전역에 걸쳐 애국력량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리승만《정권》때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놓았던 감옥들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차고 넘쳤다.

5.16직후인 61년 8월 전국 형무소에 흩어 져 수감되여 있던 비전향좌익수 780여명이 모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였다. 첫 구호로 《반공》을 웨쳤던 5.16주체들답게 비전향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엄중관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것이다. 나 또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였다.

780여명 동지들이 대전형무소 특별사에 집결되고보니 우리들을 독거시키려 해도 시킬 방이 없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방에 4∼5명정도씩 같이 있게 되였다. 특별사의 마이크에서는 날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하는 《혁명》방송이 울려 퍼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가보안법》으로도 성이 안 차 새로이 《반공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이럴 때일수록 한쪼각의 정보라도 얻기 위해 동지들이 기울이는 노력은 엄청났다. 어떤 수단으로든 정보가 입수되면 그것을 모두에게 전하기 위한 련락이 시작된다. 마치 물속인양 숨 막히게 고요한 대전교도소(62년 1월 1일부터 형무소라는 명칭이 교도소로 바뀌였다. 물론 이것 역시 이름만 달라 졌을뿐 리승만《정권》처럼 생리는 변한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가혹해 졌다 해야겠다.) 특별사의 절벽 같은 벽안에 갇혀 있지만 《똑똑》 하며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 올 때면 우리를 가로 막은 벽은 무용지물이 된다. 신호를 받은이는 다시 두번 똑똑 쳐 듣고 있음을 알린 뒤 귀를 쫑긋 세우고 옆방동지로부터 새 소식을 듣는것이다. 이때 《쿵》소리는 위험신호다. 소리의 주인공은 간수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동지다. 위험신호가 울리면 재빨리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가 시찰구(감방안을 들여다 보기 위해 눈높이에 뚫은 작은 구멍)에서 감시의 눈길이 지나간후 안전신호가 오면 통방(감방에서 옆방에 있는 수인들이 간수의 눈을 피해 서로 얘기를 주고 받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것이다.

그렇게 고심하여 얻은 정보들은 하나같이 살벌한것뿐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파쑈《정권》은 《반공》과 민족의 영구분렬을 위한 《정권》이라는것이였다. 광복직후 려, 순사건때부터 특무로 은밀히 《반공》에 멸사봉공하던 독재자가 이때부터는 공개적인 《반공》에 나섰다고 할수 있었다. 그런만큼 교도소의 특별사에 훈풍이 불어 들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할수 없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당시 잡혀 들어 온 학생들이 매우 용감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교도소당국은 5.16이후 잡혀 온 수천명의 학생, 지식인들을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있는 대전교도소 특별사에는 절대 접근시키지 않았다. 《악질》들곁에 가면 붉은 물이 든다고 해서 그랬을가. 하지만 한 교도소안에 있다 보면 잠간이라도 마주치는 기회가 없을수 없다. 한번은 내가 무슨 문제인가때문에 교무과에 불려 나갔는데 옆방에서 학생인듯 한 젊은이가 고함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왔다.

《나는 이 나라를 부정하는게 아니고 너희들 군사<정권>을 반대하는것이다!》

군인들이 총을 메고 서 있고 륙군소장이 아침저녁으로 교도소를 순시하는 정황에서 그처럼 당당하게 제 의견을 웨치고 있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바로 저들이 4.19봉기를 일으키고 리승만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애국자들이 아닌가. 파쑈《정권》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피 흘려 마련한 터전우에서 돋아 난 독버섯이였다. 력사가 공정하자면 애국이 매국을 단죄하고 정의가 부정의를 판결해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군사불한당들한테 고문을 받고 모욕적인 취조를 받는다는것이 자신이 당하는 일보다 더 가슴 아프게 여겨 졌다. 그러나 한편 저런 후배들이 자라고 있는한 이 나라의 앞날은 걱정할것이 없으며 이 암흑의 남쪽땅에도 광명한 날이 기어이 찾아 오리라는 뿌듯한 긍지감이 가슴에 차고 넘쳤다.

 

 

《빨갱이안해는 어째 하나같이 렬녀냐?》

 

대전교도소 특별사에 비전향좌익수들을 몰아 넣은 군사《정권》은 온갖 광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교도소담장만으로 안심이 안되였던지 특별사를 둘러 싸는 담을 다시 쌓고 귀퉁이마다에 보루대를 세워 그우에 전투용기관포를 걸어 놓은것이 실로 《장관》이였다.

물론 포문은 우리들을 향하게 했다. 그밑에 우리들이 갇혀 있는 세개의 특별사동이 있는데 각각 4, 5, 6사다.

한 사동에는 30개정도의 감방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게 보통인데 4사의 경우 감방이 무려 76개나 되여 전국에서 제일 긴 사동이라고 했다. 또한 6사는 일제때 안창호선생이 갇혀 있었다고 하여 그 부인이 감방을 둘러 보러 온적도 있었다.

이처럼 특별사 세 사동은 일제가 애국자들을 가두기 위해 지은것이니 사실이 오죽하겠는가!

왜정때 《몽둥이감옥》으로 불리우던 대전감옥이 《유신》독재통치하에서 다시 은을 내기 시작한셈이다.

겨울이면 감방벽에 성에가 두껍게 얼어 붙어 겨울내내 우리들은 쓰레받기로 그것을 긁어 내 변기통에 담아 내다 버리느라 바빴다. 가뜩이나 추운 《씨비리사동》(특별사의 별칭)에서 방안의 성에는 우리들의 체온을 빼앗기때문이였다.

감방이 모자라 4사와 6사사이 조금 남은 빈터에 7사를 새로 지었는데 이를 시찰하러 온 《법무부》 고급관리들과 그들을 안내하던 소장은 저희들끼리 《호텔 지었네.》 운운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완공후 동지들이 지낸 첫 겨울에 7사에서는 동사자가 나오고 말았다.

대전특별사의 《호텔》은 바로 그런것이였다.

군사《정권》에 의해 반공체제가 굳어 가면서 간수들은 서로서로 누가 더 좌익수를 학대하는가 경쟁을 벌렸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세방법인 모양이였다.

성에가 켜켜이 얼어 붙은 감방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서 내의를 빼앗는가 하면 이불까지 빼앗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선 다음날 아침이면 저희들끼리 《000호, 어제 밤에 안 얼어 죽었나.》 어쩌구 하며 자랑스럽게 떠들군 하였다.

이때문에 특별사의 아침은 우선 《사체방, 패통쳐라》 하는 고함과 함께 시작되였다. 밤새 얼어 죽은 사람이 있는 방은 시체 치우게 신고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패통(재소자가 용무가 있을 때 담당교도관을 부르기 위해 마련한 장치)을 치는 방은 하나도 없다.

밤새 모두 안녕해서가 아니다. 죽은 사람 몫의 아침밥까지 받아 먹어야겠기에 신고는 잠시 보류되는것이다.

밥덩어리는 50년대 감옥의 네숟가락짜리보다 결코 크지 않았다.

감옥에서는 공장에 나가야 좀 큰 밥덩이를 받는데 우리들은 공장에 내보내지 않으니 여전히 배를 곯을수밖에 없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출역하지 않더라도 행형법상의 규정대로 밥덩이를 찍으면(교도소에서는 주걱으로 푸는 대신 밥공기같이 생긴 틀에 찍은 밥덩이를 준다.) 밥덩이가 제법 크다.

그러나 전향공작을 하느라 혹은 간수들이 잘라 먹느라 우리들의 밥덩이는 정량을 채울 때가 드물었다. 이때문에 밥덩이크기는 소내투쟁의 주요대상이였다. 게다가 국은 고무신에다 받아 먹어야 했다. 식기라고 준 깡통은 벌겋게 녹이 쓸어 국을 받으면 녹부터 떠먹어야 했기때문이였다.

우리들처럼 볕도 안드는 랭방에 꼼작 못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운동이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수 있다.

당시 담장너머 일반사에서는 일반재소자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운동대신 제식훈련을 시키는 고함소리가 하루종일 요란하게 들려 오던 시절이였다.

마치 80년대의 삼청교육마냥 5.16군사《정권》은 교도소를 그들 특유의 군인정신으로 채워 가고 있던중이였다. 이런 마당에 《빨갱이》들의 건강문제가 안중에나 있었겠는가.

추위와 굶주림, 운동부족 등은 대전특별사 780여명 동지들의 육신을 나날이 갉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동원한 가장 비인도적인 탄압수법은 뭐니뭐니해도 60년 비전향자들을 대전교도소에 집결시킨후부터 일체의 가족면회를 금지시켜 버린 일이라 하겠다.

그무렵 대전교도소 소장은 윤병희라는 작자였는데 일제때 부장간수를 지내면서 온갖 악덕을 쌓아 소장이 되였다.

교도소측은 그의 지시에 따라 팔십로모가 두메산골에서 천리길을 찾아 와도 면회를 시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전향하면 금방 나갈텐데 제 고집만 부리고 전향을 안해 부모, 처, 자식 고생시키는 패륜아》라는 식으로 가족들을 부추겨 동지들과 가족들을 리간질하려 했다.

또한 동지들을 애 태우게 하려는 속심이였던지 면회시켜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가족들의 말을 기록했다가 가족이 왔다 갔는지도 모르는 본인에게 던져 주거나 심지어 울부짖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록음하여 특별사 마이크에 대고 방송하기까지 하였다.

나야 어차피 찾아 올 가족이라군 없는 몸이니 심정 상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특별사방송에서 한 젊은 동지의 안해가 《태수씨이-》 하고 남편을 부르며 울부짖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내 심정이 이럴 정도니 당사자의 괴로움은 어떠하였으랴. 놈들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감정을 가지고 이렇게 롱락질을 했다.

애국자들의 인간애의 정신을 전향목적실행의 가장 중요한 《약점》으로 여기고 이런짓을 저지르는 자들의 비렬성을 두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처럼 부모자식간, 내외간까지 리간질하여 전향공작에 리용하려던 윤병희도 별 성과를 못 거두었던지 나중에는 《빨갱이안해는 어째 하나같이 렬녀냐?》고 탄식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놈들이 밖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정치범들의 부모나 처자들을 괴롭히고 있겠는가를 짐작하였다.

4사에 있던 한 동지가 급성맹장염에 걸려 외부병원으로 실려 가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후 희미하게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고향의 로모가 와계시더라는것이였다.

그 동지는 속으로 《이 지독한 사람들도 병원에 입원할 지경이 되니 가족을 불러 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했다.

교도소측은 가족들에게 맹장수술비를 받아 내기 위해 로모를 특별면회시켰던것이다.

그 동지는 수술 받아 핼쑥한 아들걱정, 없는 형편에 수술비 물 걱정때문에 수심이 가득한 로모를 뒤에 두고 다시 특별사로 돌아 와야 했다.

군사《정권》은 비전향좌익수관리를 위해 색 다른 제도를 또 하나 만들었다.

그것이 《특재교도관(62년부터는 간수라는 명칭을 교도관으로 바꾸었다.)제도》라는것이다.

그무렵 간수들은 대부분 일제때부터 간수노릇하던 자들이거나 일제경찰이나 관동군출신으로서 광복후 전직(?)을 한 자들이였다.

간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그리 인상이 좋지 않은데다 처우도 형편 없어 일제파쑈체제의 말단에서 길들여 진 저학력자들이 주로 형무소에 몸 담고 있었다.

 

 

감방바닥에 물을 찍어 미적분문제를 풀다

 

군사《정권》은 비전향좌익수들을 대전특별사에 몰아 넣고 온갖 육체적, 정신적고통을 주는 동시에 질 높은 간수들을 배치해 한편으로는 우리들을 회유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던것 같다.

그래서 특별사에 배치할 간수들을 특재했는데 취직난이 심각하던 60년대 남조선사회에서 제법 고급인력들이 이 특재에 몰려 들었다.

덕분에 대졸출신 간수, 륙군중령출신 간수까지 생겨 나게 되였다. 물론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뽑은것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우리들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제간수출신들보다는 특재간수들이 상대하기가 나았다고 할수 있다.

그들과는 차라리 입씨름이라도 할수 있었기때문이다. 입씨름을 하다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몇몇 특재간수들과는 시간이 흐르면서 잠간씩이나마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본다면 그들 대부분은 대전특별사의 살벌한 환경에 경악하고 이런 곳에서 자신들이 대체 무엇을 할수 있을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였던것 같다.

《교도관이라 해서 대단한건줄 알고 들어 왔는데 와서 보니 딴게 아니라 바로 간수네.》라고 푸념하는 소리를 나는 여러번 들었다.

게다가 겨울에는 랭장고요, 여름에는 찜통인 특별사였지만 그속에서 생활하는 동지들의 모습을 보고 특재간수들이 많이 놀랐던것 같다.

일반수들이 들어 있는 사동에 가보면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에다 간수들이 욕하는 소리까지 뒤엉켜 시장판도 그런 시장판이 없다.

그러니 특별사에 처음 발을 들여 놓는 순간 특재간수들은 당황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780여명 비전향수들이 들어 있는 사동이 마치 아무도 없는듯 물속같이 조용하기때문이다.

대체 무얼하고 있나 해서 시찰구로 각방을 들여다 보면 《빨갱이》들이 저마다 책을 들고 앉아 누가 들여다 보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완전히 기가 죽었다.》는 얘기를 뒤날 어느 특재간수로부터 들은적이 있다.

대전특별사에서 우리 동지들은 비록 갇혀 있는 몸이지만 수형생활을 보람 있게 보내자고 결의하여 저마다 독서계획표를 세워 가지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사회과학서적은 무조건 차입이 제한되였기때문에 우리들은 그외의 분야에서 전공(?)을 택해야 했다.

독서의 분야는 각자의 관심에 따라 대단히 다양했다.

한학이나 력사, 어학을 하는이는 물론 의학서적을 파고 드는이도 있었고 수학책을 펴놓고 수학문제를 푸는 동지도 있었다. 수학은 과학적사고의 기본인데다 근대경제학을 공부하려 해도 미적분을 모르면 공부할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러면 필기도구도 없는 감방에서 어떻게 수학문제를 풀었던것일가. 그 동지는 옷에서 실오래기를 하나 뽑아 저가락끝에 매고는 그것을 붓 삼아 물을 찍어 마루바닥에 수식을 전개해 나간것이다.

물이 마르기까지 잠간동안은 써놓은 수자를 식별하는게 가능하다.

한석봉의 시대도 아닌데 물을 찍어 마루바닥에다 미적분문제를 풀고 있는 이 동지를 보고 그만 한 학사간수는 완전히 질려 버렸던 모양이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대학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한 사람이지만 당신들처럼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자기 세계를 집요하게 추구해 가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수로 교도할수 있겠소.》

《내가 뭣하러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혼자소리처럼 내뱉군 하던 그 간수는 얼마후 모습을 볼수 없었다.

전향시킬 과업을 받고 특재된 그가 이 정도 되였은즉 당국이 어떤 조치를 취했을수도 있고 혹은 그자신이 《못할 일》이라 생각한 뒤 스스로 뛰쳐 나갔을수도 있다.

그만이 아니였다.

특재간수들중 들어 와서 1년을 넘기는 사람은 몇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중 특별사 고방대(감시대)에서 한 특재간수가 비관자살을 한 사건이 일어 났다.

아마도 그 젊은이는 구직난때문에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있으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매일 해야 하는 현실을 비관한것이 아닐가 짐작도 해봤지만 어찌 한 인생의 죽음의 결단이 그것뿐이랴. 교도소측이 워낙 쉬쉬하며 자세한 내막을 숨기려는걸 봐서 심각한 사연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흰것을 검다 하고 검은것을 희다 하는 식의 《반공》교육과 선전을 근 반세기동안 일 삼아 온 당국의 처사로 그것을 그대로 믿고 살아 온 한 젊은이가 믿었던 그 모든것이 허위이며 위선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 그런 용단을 내릴수 있지 않겠는가.

자책과 더불어 남조선당국과 현실에 대한 항거심이 그 비관자살의 리면에 깔려 있었을것이다.

나는 그 젊은이의 죽음을 놓고 남조선당국자들이 그처럼 악랄하게 벌리고 있는 허위적인 교육과 선전이 감옥이나 총칼 못지 않은 살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3.9함성투쟁》

 

우리들을 대전특별사에 몰아 넣고 전향을 강요하며 집요하게 육체적, 정신적고통을 가해 오는 당국에 대해 우리들의 분노는 쌓여만 갔다.

이것이 우연한 계기에 일시에 폭발해 64년 대전특별사에서 큰 싸움이 일어 났다.

그것이 바로 64년 《3.9함성투쟁》이다.

대전특별사에는 《먹방》이라 불리우는 징벌방이 있었다. 이런저런 구실로 우리들을 징벌할 때 사용되는 곳인데 원래도 작았던 감방 3개를 터쳐 앞쪽으로는 복도를 내고 뒤쪽으로 칸막이를 질러 5개의 감방을 만들어 놓았으니 먹방의 비좁음이란 말로 할수가 없었다.

다리를 뻗칠수조차 없는 관을 상상하면 되겠는데 벽에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있으니 쇠살창과 널판자로 둘러 막아 해빛은 한줄기도 볼수 없기에 먹방이라 불렀던것이다.

사람이 다리를 뻗지 못하는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나는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먹방에 갇혀 다리도 못 뻗고 며칠, 몇달을 웅크리고 있노라면 곤욕도 그런 곤욕이 없다. 그무렵 곽병일이라는 동지가 간수의 눈에 거슬려 불려 나갔다가 저녁에 먹방에 들어 간 모양이였다. 취조과정에 심한 구타를 당해 정신을 잃은 사람을 먹방에 떠메다 넣었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우리는 곽동지가 먹방에 들어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3월 9일 아침 소지(사동 복도청소를 맡아 하는 잡범)의 비명소리가 사동의 싸늘한 아침공기를 갈랐다.

《사람이 죽었다!》

기상후 소지는 먹방앞복도를 청소하러 들어 갔다가 먹방을 살짝 들여다 본 모양이였다. 그러다 뜻밖에 곽동지가 죽어 있는것을 본 이 소지가 기겁을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것이다. 만약 소지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곽동지의 죽음은 교묘하게 은페되였을게 틀림 없다. 전날 멀쩡히 걸어서 감방을 나간 사람이 그렇게 되고보니 취조 당하다 맞아 죽은걸로 판단할수밖에 없었다.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든 동지들이 한마음한뜻이였던것일가?

전 사동에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점검부장이 수행원 몇을 데리고 아침점검을 시작했다.

점검은 한 간수가 앞질러 감방문을 따놓으면 점검부장이 방안을 살펴 보면서 지나가고 그뒤를 따르는 다른 간수가 감방문을 잠그면서 진행한다. 이때 수인들은 감방문앞에 렬을 지어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한다.

점검부장이 감방이 76개나 되는 4사의 길고긴 사동입구에서부터 몇개의 감방을 지나갔을 때 누군가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사인을 밝혀라!》

다음순간 이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듯이 76개의 감방에 들어 있는 모든 동지들이 일제히 일어 나 함성을 내질렀다.

《사인을 밝혀라!》

《조국통일 만세!》

함성의 물결은 곧 특별사의 다른 사동으로 퍼져 나갔다.

깜짝 놀란 점검부장은 점검을 하다 말고 간수들과 함께 도망가버리고 급기야 소장이 쫓아 나와 경비대를 지휘하여 우리를 향해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함성과 총소리가 뒤섞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정황이 얼마나 계속되였을가.

총소리에 놀란 린근군부대에서 폭동이 난줄 알고 교도소로 달려 와 《문 열라.》고 한바탕 란리가 났다고 한다.

교활한 소장은 이 소동이 외부에 알려 지면 책임추궁을 당할가 우려하여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였다.

《교도소폭동진압훈련중이다.》라고 둘러대 군부대를 돌려 보냈다고 들었다.

이 투쟁이후 교도소측은 우리들전원에게 수갑을 채우고 차례로 끌어 내 구타하면서 함성투쟁의 모의과정을 밝히라는둥 련락체계를 대라는둥 야단이였다.

바로 그들자신이 지난 몇년간 우리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은 피 맺힌 과정에서 우리들의 가슴에 쌓이고 쌓인 분노가 축적되여 일시에 함성투쟁으로 분출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진정 리해하지 못한것 같았다. 사전모의없이 어떻게 한날한시에 같은 행동을 일제히 할수 있느냐는것이였다.

그들은 우리모두가 하나의 사상을 가지고 한길을 가는 동지들이라는것을 알수 없었다.

60년대는 팽팽한 긴장이 시종 계속되였던 시대로 기억된다. 65년에는 미군정찰기 《아르비 47》이 북쪽령공을 침임했다가 격추되였고 67년에는 괴뢰군의 경호함이 북쪽해역에 침임했다가 인민군의 해안포일격에 침몰되는것으로 떠들썩했으며 68년 1월에는 무장유격대가 《청와대》를 기습공격하는 사건이 일어 났다.

아울러 그 이틀후인 1월 23일에는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가 북쪽령해에 들어 섰다가 인민군 해군함정에 나포되였으며 69년 4월에는 대형정찰기 《이씨-121》이 북쪽령공에서 인민군 공군기에 의하여 격추되였다.

그때마다 간수들은 당장 미국이 북조선을 《보복》한다고 경사라도 난듯 떠들어댔다. 그런 속에서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는 조국의 단호한 목소리를 알게 되였을 때의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물론 이러한 정세의 여파는 우리들에게도 미쳐 왔다. 대전특별사에 집결시켜 놓은 비전향좌익수들을 광주, 전주, 대구, 목포 등 전국의 주요교도소로 분산시키는 조치가 단행된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을 한곳에 집결시켜 둘 경우 청와대를 기습한것과 같은 무장유격대의 구출작전의 목표로 될수 있기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1년후에 목포교도소에 가 있던 동지들이 다시 내륙의 교도소로 이감되였다. 좌익수들을 해안선부근에 두었다가는 해도로 무장구출대가 침투할지 모르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신심은 더욱 굳어 져 갔다.

우리에게는 김일성장군님이 계시여 미국도 어쩌지 못하는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는 긍지를 가졌다.…

하여간 우리들은 파쑈《정권》으로부터 내내 《제1의 적》대우를 받았던셈이다. 말단 간수에서부터 교도소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비전향동지들을 일컫는 말은 동일했다. 바로 《마땅히 죽였어야 하는데 할수없이 살려 두고 있는 놈들》이란것이다.

52∼54년무렵처럼 구뎅이를 파게 하고 무차별 학살해 버려야 마땅한데 세계여론이 있고 《법치국가》의 체면이 있어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인간도 동족도 아니였다. 단지 《빨갱이》일뿐이였다.

나는 그들에게 그 같은 광적인 《신념》을 불어 넣은 자가 과연 누구일가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것은 의심할바없이 일본군국주의와 미제국주의였으며 그들의 괴뢰였던 리승만과 력대 통치배들, 이때는 5.16군사정변으로 차지한 최고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독재자, 바로 그자라고 생각되였다.

독재자는 성장과정에서 그가 항상 존경하며 따랐다는 형 박상희씨를 통해 또한 함께 관여했던(물론 특무로써였지만) 좌익활동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우리 동지들의 진면모를 똑똑히 볼 기회를 가졌던 인물이다.

따라서 신조를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우리 동지들은 돈, 명예, 권력 어떤것으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것이라는 사실을 독재자자신이 가장 똑똑히 알고 있음에 틀림 없다.

결국 단 하나의 방법은 사회와의 철저한 격리뿐이다. 그래서 교도사담장안에 다시 담장을 둘러친 특별사안에 우리 동지들을 몰아 넣고 네 숟가락의 밥과 끝 없는 구타로 하루하루 우리들의 생명을 단축시켜 가고 있었던것이다.

68년도의 분산조치때 나는 광주교도소로 가게 되였다. 그때 내 나이 50이였다.

공자가 불혹이라고 하였던 40대를 묻은 대전특별사를 나서자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불혹의 10년을 대전특별사에 묻다

 

조국통일에 몸 바치겠다고 지리산눈발을 달렸던 서른살시절 그리고 체포되여 굶주림과 폭력,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7년후면 자유의 몸이 될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로, 그러면 뭔가 다시 시작할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독방의 하루하루를 채워 가던 시절, 드디여 옥문을 나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숨 죽이며 살피던 때의 설레임, 그러나 천재지변과 같은 사태, 아니 분명히 파쑈《정권》의 의도된 탄압으로 다시 그들의 포로가 되여 대전형무소에 갇혔을 때의 절망감, 이제 조국통일을 위해 벽돌 한장 쌓아 올릴 기회도 없이 손발 묶인채 평생을 갇혀 있게 되였을 때의 그 깊고 깊은 절망을 어찌 다 표현할수 있으랴.

캄캄한 먹방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다리도 못 펴고 몇날며칠을 웅크리고 있노라면 나도 사람인데 그만 전향서에 손도장 하나 찍어 주고 말가 하는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그 손도장 하나로 우선 밥덩이의 크기가 달라 지고 해볕이 드는 넓은 감방으로 옮겨 갈수 있으며 감옥문을 나서는 날도 앞당길수 있을텐데.

그런데 당장의 육체적고통에서 벗어 나고 싶은 본능만큼이나 절실했던것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가는데 따른 초조감이였다. 풍산에서, 흥남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새 조국건설로선을 받들고 신바람나게 뛰여 다니던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인데 조국은 이렇게 두동강나고 다시 들어 온 외세를 몰아 내고 조국을 통일하는 일에 하루품도 보태지 못하고 여기 앉아 늙어 가고 있구나 생각하니 미칠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감방의 두꺼운 벽들은 한치도 물러설줄을 몰랐다. 아마 당국자들은 정치범들의 심상에까지 족쇄를 채울수 있는 《발명품》이 없어 안달아했을것이다. 정치범들을 벽에 마주 앉히고 꼼짝 못하게 단속을 했지만 마주한 회색담벽이나 철창사이로 스며 드는 엷은 불빛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앞에 무엇이 어리는지는 막을 길이 없다. 세상의 어떤 영화도 고문과 기아와 추위로 떨고 있는 수인들의 눈앞에 비추어 진 추억과 희망과 상상의 화폭들만큼은 풍부하지 못할것이다. 나 역시 감옥속에서 자주 과거에 대한 회상에 잠기군 하였다. 풍산, 흥남에서 활동하던 시절 잘못하였던 일, 미흡했던 점들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왜 그 동지를 그만한 일로 그토록 호되게 몰아 세웠을가. 한번만이라도 다시 볼수 있다면 용서를 빌것인데.…

끝 없는 반성들이 꼬리를 물었다. 오로지 떠오르는것은 죽기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혼신의 힘을 바쳐 다시한번 일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였다. 하지만 눈에 들어 오는것은 굳게 닫긴 옥문뿐, 어느 날 저녁에는 마침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육체적고통에서 벗어 나고 싶은 본능적요구, 감옥문을 나가 남은 여생이나마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 이 강렬한 열망들을 안고서도 어찌하여 전향하지 않고 한창 일할 나이 40대를 대전특별사에 묻었는가, 누군가는 그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나의 생각은 아득한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 가게 된다.

파발리에 울린 첫 총성을 듣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달려가던 일, 《오빠시》를 쏜 두개의 탄피앞에서 작은 주먹을 부르쥐고 《적색독서회》를 뭇던 일로부터 시작해서 장군님품을 찾아 룡정이며 동북땅을 헤매이던 청년시절,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가슴에 품고 서울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까지 넘나들며 조국광복의 날을 애 타게 갈구하던 자신의 인생길을 더듬어 본다.

우리모두의 인생에 참뜻을 안겨 주고 그처럼 억압과 천대속에 지지리 고통 받으며 가난에 쪼들리기만 하던 우리 인생에게 광복의 날,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남녀평등권의 날들을 마련해 주신분, 그이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어엿한 나라의 주인이 되여 새 조국건설을 위해 뛰여 다니던 보람찬 나날들을 더듬어 보게 된다. 바로 그것이였다. 우리에게 주인으로서의 참된 삶을 안겨 준 장군님의 사랑과 은덕을 저버릴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장군님의 품속에 우리모두의 운명, 민족의 운명이 있기에 지리산의 높고 낮은 산발들과 골짜기들에 우리 동지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지 않았던가! 죽어도 변심할수 없고 살아서 배반할수 없는 그 품, 인간의 모든 존엄과 행복과 긍지의 모체인 우리의 장군님께 언제나 참된 전사로 남아 있으리라는 그 자각과 신념이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

나 하나뿐이 아니라 우리 동지들모두가 그러했다. 그 하나의 지향과 신념이 감옥의 동지들을 뜨거운 동지애의 뉴대로 이어 주었다.

대전특별사에 780여명 비전향동지들이 집결되여 있을 때 형무소측은 우리들을 독거시키려 해도 시킬 방이 없었다. 물론 징벌방인 먹방이나 나중에 지은 7사는 독거방이였지만 대체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3∼4명이 한방에 같이 있게 되였다. 그런데 특별사에서는 《전방》이라 하여 수인들이 들어 있는 감방을 수시로 서로 바꾸었다. 주변의 지형지물에 익숙해 지거나 옆방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을것이다. 다른것과 달리 대전특별사에서는 전방을 할 때 한방에 있던 사람들을 그대로 다른 방으로 옮겨 놓군 하였다. 이때문에 대전특별사에서는 여러 동지들과 안면을 넓히고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간수들이 우리들을 아무리 서로 떼여 놓으려고 해도 운동이다 무엇이다 해서 들고나다보면 우연히 먼발치에서나마 동지들과 스쳐 지나가게 되는 기회는 생기기마련이다. 이때 《보지 말라!》 하고 고함치는 간수의 호령속에서 잠간 서로 나누는 미소어린 눈인사의 정겨움이 얼마나 서로에게 힘을 주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할것이다.

마치 여름날 눈 부시게 우거지는 록음과 같은것이 남녀간의 사랑 이라면 땅밑에서 천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서로 얼크러져 있는 나무  뿌리들이야말로 동지애의 표상이라 할수 있지 않을가 싶다. 목숨까지 바칠듯 열렬하던 이성을 향한 애정이 세월이 가면서 싸늘하게 식어 버린 경우가 드물지 않은 반면 동지애란 세월이 얼마나 흘렀든지, 그와 함께 있든 오래동안 보지 못하든, 심지어 그가 이 세상사람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영원히 지속되는것이기때문이다. 지리산에 뼈를 묻은 그 많은 동지들을 어찌 내가 죽는 날까지 잊을수가 있을것인가.

너무도 조용해 숨이 막힐것만 같은 대전특별사의 저녁 절벽 같은 벽에 막혀 외로움이 엄습할 때면 사각사각 벽을 긁고는 이어서 《똑 똑》 두드리는 호출신호가 나를 찾아 든다. 어느 동지가 교무과에 나갔다가 신문 한쪼각을 곁눈으로 훔쳐 보고 왔을수도 있고 아니면 간수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재빨리 귀에 담았을수도 있다. 그밖의 어떤 방법으로든 한쪼각의 새 소식이라도 얻으면 그것을 모든 동지들과 함께 나누고 힘을 얻기 위해 오늘도 옆방 동지는 간수의 눈을 피해 호출신호를 보내오고 있는것이다. 듣고 나면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옆방동지에게 전한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서로를 가로 막는 벽을 뛰여 넘어 하나가 된다.

미제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소식과 고공정찰기 《이씨-121》격추소식도 이런 통방을 걸쳐서 들었다. 놈들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고 하신 수령님의 연설내용도 그렇게 들었다. 당국의 당황함이 그대로 감옥에 미쳐 와 폭력행위는 곱절로 많아 졌으나 우리는 매를 곱절로 맞아도 통쾌하기만 했다.

미국이 드디여 사죄문에 수표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 우리한테는 강철의 령장이신 장군님이 계시고 부강한 조국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이럴 때면 자신들이 고독하고 외롭다는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다. 놈들이 오히려 우리앞에 떨고 있으며 운명의 막바지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생각이였다.

이처럼 통방을 통해 들려 오는 조국의 소식은 우리들의 신념과 의지를 더욱 굳게 해주는 활력과 용기를 북 돋아 주는 생명력과 같은것이였다. 적후에서 그것도 감옥에 갇히여 조국의 소식에서 받은 그 감격과 흥분이 어떤것인가를 이런 체험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짐작키 어려울것이다.

대전특별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현장이자 《투쟁의 마당》이였다.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아래서도 처음 세운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것, 《반공》사상으로 산하를 덮으려는 60년대의 어둠속에서 신념의 홰불을 더 높이 쳐드는것을 우리는 옥중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안해에게 주고픈 마지막선물

 

대전특별사에 전향공작의 특기를 지녔다는 온갖 떨거지들이 찾아 오군 하는데 그들의 입에 한결같이 오르는 말이 《너희 빨갱이들은 안해도 모르고 자식들 정도 모르는 인정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냐.》였다. 전향서에 손도장만 한번 누르면 사랑하는 안해도 부모님과 자식들도 만날수 있는데 그럴줄 모른다는것이다.

인간의 참된 리면을 인간성과 따로 떼놓고 보는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론리》앞에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겠는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앞에 우리 동지들은 대체로 묵묵부답이였다. 자기 가슴속에 품고 있는 가장 깨끗하고 신성한 모습,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같지 않은 론의를 한다는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 졌기때문이다.

나로 말하면 내 삶을 지탱해 준 하나의 지주, 그것은 북에 두고 온 안해였다.

안해의 편에서 본다면 나는 너무나 무심한 남편이였다. 신혼시절에도 일이 바쁘다며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그러다보니 아이이름조차 내 손으로 지어 주지 못했다. 결혼 2년만에 스물세살의 안해를 두고 전선으로 떠나가 전쟁이 끝난 그날에도 돌아 오지 않은 남편, 안해는 남쪽에서 부대가 후퇴해 올 때마다, 정전후 포로송환이 마쳐 질 때까지 군복 입은 낯선이들사이에서 그 얼마나 나를 찾아 헤매였을것인가. 끝내 남편을 찾지 못한 안해가 깊은 밤에 홀로 흘렸을 눈물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한달음에 고향에 가고 싶었다.

52년 포로가 된후 계속된 7년 징역살이, 그사이에 군사분계선이 굳게 막히고 고향길은 더욱 아득해 졌는데 15년 징역살이를 다시 시작한후 나는 대전특별사의 깊고 깊은 감방에서 안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안해의 모습은 50년 7월 떠나올 때 문설주에 기대 울던 얼굴이였다.

나는 조용한 저녁감방에 혼자 앉아 집 떠날 때 안해에게 했던 부탁을 재삼재사 되풀이했다. 나는 이제 돌아 오지 않는 사람이니 어머니처럼 혼자 늙지 말고 훌륭한 동지 만나 행복하게 살아 달라고. 48년 결혼한후 흥남에서 신혼살림할적에 문화학원에서 음악과 무용을 가르치던 안해는 피아노를 몹시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당 선전부장이던 내 월급으로는 피아노를 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다음에 형편이 나아지면 꼭 사주마고 약속했으나 나는 끝내 피아노를 사주지 못한채 안해곁을 떠나왔다.

안해가 슬픔을 딛고 가정을 이루어 알뜰살뜰하게 저축해 사들인 피아노앞에 앉아 제자들에게 가르칠 노래를 만들어 불러 보며 활력 있게 교육사업을 해나가기를 바라던 내 마음에는 추호의 가식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열여덟에 청상이 되여 홀로 늙어 온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을 곁에서 지켜 본 내가 아닌가.

안해에게 잘 살아 달라고 수없이 당부하면서 나 역시 스스로에게 다짐한것이 있다. 결혼해서 아무것도 해준것이 없는 남편으로서 마지막으로 안해에게 기념품을 하나 주어야겠다는 다짐이였다.

48년 고향 풍산에서 결혼식을 한후 나는 안해에게 맹세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결코 조국앞에 욕되게 살수 없을거라고.

담안에 또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혀 있는 나의 소식을 안해가 알리 없으니 안해에게 있어 나는 이미 조국통일투쟁에 한목숨을 바친 남편일것이였다. 수없이 죽어 가는 동지들속에서 용케 죽지 않고 살아 감옥에 들어 있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조국앞에 욕되지 않게 살아 낸 내 삶을 안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안해가 나의 소식을 끝내 알수 없다 할지라도 안해는 틀림없이 그렇게 믿고 있을것이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안해의 믿음을 지켜 주고 싶었다. 오로지 내가 그에게 해줄것은 그것뿐이라고 믿었었다. 한데 나는 지금 43년간 지켜 온 그 믿음의 값을 너무도 값 높게 받아 안았다. 안해 역시 43년간을 변치 않고 나를 기다려 준것이다. 그저 우리들의 정이 나를 취조하던 자들이 말하던 그런 세속적인 정이였다면 안해 역시 43년간을 끝내 기다려 주었겠는가. 우리의 참다운 리념속에 그 사랑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리념이 우리모두의 정신적인 기둥이였기에 43년간의 광풍속에서도 변치 않고 오늘을 맞을수 있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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