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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를 거제도로 보내라》

 

7년형을 선고 받다

 

52년 1월 대성골에서 괴뢰군의 들것에 담겨 포로가 된 나는 광주포로수용소에서 3개월을 지낸후 전라남도경찰국 류치장으로 옮겨 졌다. 부상 당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전에 나는 검사실에 끌려 가 취조를 받았다.

그때 내 심정을 말하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이나 위구심보다 분노와 함께 그 어떤 이름할수 없는 슬픔 비슷한 착잡한 심경에 처해 있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검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 보며 20여년전 《적색독서회》사건으로 풍산경찰서에 끌려 가 취조를 받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때는 왜놈검사가 나를 심문했는데 지금은 동족인 조선인검사가 취조를 하는데 그자의 입에서 《빨갱이》란 호칭이 연방 튀여 나왔다.

《빨갱이.》

열여섯살 철부지때는 이 호칭을 귀맛 좋게 들으며 어느 정도 우쭐렁거리는 기분이였다면 이때는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다. 왜놈이 쫓겨 간 내 나라 땅에서 그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며 그것도 제 땅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을 들어야 한다는것은 나에게 마치 광복전으로 되돌아 간듯 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마주 앉아 호통치는 검사의 얼굴이 왜놈검사의 얼굴로 보일 지경이였다.

취조를 받고 감방에 돌아 가서도 나는 심신을 회복할수 없었다. 산의 동지들과 떨어 져 포로가 되여 버렸다는 고독감과 함께 자기 운명과 얽혀 드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이 나를 몹시 비관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산유격대출신인 고진히동지가 붙잡혀 왔다. 당시 백운산에서는 광주포로수용소에 같혀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한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는데 고동지는 이 전투를 위해 백운산에서 정찰임무를 띠고 광주로 들어 왔다가 체포되였던것이다.

고진히동지는 1948년 8월 제주도민들의 선출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표의 자격을 갖고 남편 강규찬과 함께 평양에 왔다가 전쟁이 터지자 자기 고향 제주도를 해방하려는 열망을 안고 또다시 연약한 녀성의 몸으로 남편을 따라 나선 훌륭한 동지였다.

동지는 덕유산전투에서 남편을 잃고도 비관함이 없이 유격대의 어려운 정찰임무를 자진해서 받아 산을 내렸던것이다.

고진히동지가 체포됨으로 해서 광주포로수용소습격계획은 류산되였지만 우리는 산에 있는 동지들이 우리를 잊지 않고 있으며 구출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생각에 커다란 고무를 받았다.

며칠후 취조관들의 혹독한 고문에도 의연히 입을 열지 않고 고진히동지가 취조를 마치고 류치장에 돌아 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가 전해 졌다. 간수들의 눈이 감겨 지는 한밤중에 비밀을 지킬 각오로 자결했던것이다. 이웃감방에 있던 동지들이 들은것은 자결하면서 남긴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의 부르짖음이였다고 한다. 그 녀성을 잃고 우리는 슬피 울었다.

유격대의 비밀을 위하여 죽음을 택한 녀인, 우리는 그런 용기도 없이 이토록 시달리면서도 삶을 이어 가고 있는데…

그는 죽었지만 죽음으로써 승리하였다.

나는 그 녀성의 희생에서 큰 힘을 얻었다. 감옥에서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불의와의 투쟁에서 일시적인 비관도 있을수 없다는 생각, 처지가 아무리 혹독해도 가능한한 모든 수단을 다해서 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였다.

광주포로수용소에 있는 3개월동안 나는 내가 정규인민군출신임을 밝히고 《거제도포로수용소로 보내라》고 요구하고 두번이나 당국과 싸웠다. 그러나 말이 싸우는거지 내가 감방에서 《거제도…》까지만 웨쳐도 간수들은 가차없이 끌어 내여 죽기직전까지 구타를 했다. 간수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은 《마땅히 죽였어야 하는데 아직 안 죽인 놈들》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하고 거듭 그 요구를 당국에 들이댔다.

그무렵 계속 진행중이던 정전담판에서는 포로송환문제를 둘러 싸고 격론이 벌어 지고 있었다. 북측이 《제네바협정에 따른 무조건송환》을 주장한데 반해 미국측은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미국은 포로수용소에서 이른바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벌리고 있었다. 특히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빨갱이포로》들을 《전향》시켜 《반공포로》로 만드는 심리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판에 《나는 정규인민군이니 포로송환때 북으로 송환해야 한다.》고 부르짖은 내가 거제도로 갈수 없었던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거제도로 못 가고 재판을 받았다. 독자들은 내가 정전협정이 일정에 오르고 판문점에서 포로송환문제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형편에서 그 궤도를 타고 빨리 처자가 있는 북으로 가기 위해서 그랬느냐고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였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실 나는 나와 맞선 당국과 취급자들의 생리로 봐서 전혀 실현불가능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의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처한 환경에서 싸우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부추겼기때문이다. 나는 유격대원으로 리적행위를 했으나 비전투원인 종군기자였다고 하여 당시로서는 드물게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 《사형》,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가 너무나 귀 익게 들릴 정도로 중형선고가 많던 때라 7년형은 그야말로 행운이라 말할수 있겠다. 그러나 7년이나 사형이나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던게 그무렵 우리의 심정이였다. 자고 나면 시체가 실려 나가던 시절, 죽음은 도처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던것이다.

놈들은 사형수들을 무등산이나 광주천기슭 갈밭숲에 끌고 나가 형을 집행하였다. 때로는 수용소안의 담벽밑에 세워 놓고 수인들이 다 보는데서 할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로 우리들의 의기를 꺾어 보려는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놈들의 의도와는 달리되군 하였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죽음앞에서 떳떳이 웨치고 간 동지들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신념과 의지의 불길을 더 세차게 지펴 올렸다. 오히려 먼저 가는 동지들은 떳떳한 자세와 미소로써 그리고 피 타는 웨침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고무를 주었고 인생에서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념이 중요하며 그 신념을 위해 삶도 죽음도 필요한것이라는것을 깨우쳐 주었다.

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였다. 살인적인 탄압이 횡행하는 삼엄한 형무소안이였지만 우리들은 한쪼각의 소식이라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동지들간에 서로 나누었기때문에 바깥소식을 어느 정도 계속 듣고 있었다.

정전협정이후 확고한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3개월이내에 정치회담을 열기 위한 예비회담이 10월 26일부터 판문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공통적으로 《정치회담이 매듭 지어 지면 정치범들은 모두 북으로 송환될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건 우리들만이 아니였다. 형무소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간수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대구형무소인 경우 이무렵 갑자기 정치범들을 끌어 내 하루에 5∼6시간씩 일광욕을 시키군 하였다. 그간 규정을 어기고 하루에 70분씩밖에 운동을 안 시켜 동지들의 얼굴이 백지장 같았는데 송환이 될 때 그것때문에 말썽이 날가 하여 소동을 피웠던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가 멎은것으로 하여 바깥세상에서는 평온한 생활이 시작되고 있을 때 감옥안에서는 살인참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광주포로수용소측이 송환에 대비해 저지른짓은 너무나 가혹했다. 사형을 선고 받은 200여명의 동지들을 한곳에 수용해 놓고 서둘러 집행해 버린것이다.

53년 10월이후 한달에 2∼3차례, 한차례에 십여명씩 총살을 집행해 54년 4월 제네바정치회담 직전까지 200명중 단 6명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마땅히 죽여야 할 자들을 정치회담이니 뭐니하다가 자칫하면 살려서 내보내겠다.》는 조바심의 발로였다.

간수가 명패를 들고 감방문앞에 와 그날 사형집행될 대상을 호명할 때 갇혀 있는 동지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보라.

이런 살인광란은 내가 보내달라고 했던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도 미친듯이 벌어 졌다고 한다. 최근 나는 《로동신문》에서 그때 미군이 거제도에서 세균무기실험까지 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무참히 죽였다는 보도를 읽고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그때 내 요구가 실현되여 거제도에 갔더라면 세균실험대상으로 될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때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6명의 동지들중 한 동지가 만기출소한후 다시 청주보안감호소로 잡혀 와 나와 함께 지내다가 89년에 석방되였다.

 

 

일본 관동군출신 간수들

 

7년형을 선고 받은 나는 광주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갔다가 대구의 륙군형무소로 옮겨 졌다.

대구륙군형무소는 대구동촌에 있었는데 일본인소유였던 과수원을 개조한것이였다. 과수원에 있던 큰 주택을 감방으로 고쳐 일반수들을 수용했다. 그중 사과를 저장하던 지하실은 《특호감방》이라 하여 정치범과 일반수들중 중범자들만 가두었다.

나도 이 특호감방에 던져 졌다. 들어 가보니 한 50여명이 갇혀 있는데 매질로 해가 뜨고 매질로 해가 지는 곳이였다. 당시 형무소의 간수들은 일제 관동군출신들이 대단히 많았다. 일제때 독립투사들을 때려 잡던 자들이 광복된 조국에서 또 우리 동지들을 가둬 놓고 지키고 있는 꼴이 바로 이남의 현실을 말해 주는것이였다.

리승만은 겉으로는 반일지사인척 하면서도 군부와 사법, 경찰의 기둥들을 거의 관동군출신 군인, 경찰들로 꾸리였다.

일제통치시기 총독부산하 경찰 2만명중 조선인이 8천이였는데 그중 5천이 제복만 바꿔 입고 그냥 리승만《정권》에 복무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남조선《정권》의 생태를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리승만의 측근자, 당시 륙군특무대 대장으로 활약하던 김창룡이라는 자도 일제때 북만에서 헌병대 특무로 항일투사들과 애국자들을 검거 처형하는데 혈안이 되여 날뛰던 자이다. 하기에 간수들은 관동군노릇을 한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일본군대에서 배운 잔인한 폭력성을 자랑스럽게 과시하였다. 이 바람에 특호감방의 규률은 병영보다 더 혹독하였다.

죄수들은 감히 간수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간수가 《000번》 하고 부르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 가던 사람도 마치 병정처럼 벌떡 일어 나 부동자세로 있는 힘껏 《옛!》 하고 웨쳐야 했다. 또한 일종의 대리통치자로 일반수 중범자가운데서 아주 포악한 자를 골라 감방장을 시켜 놓았다. 물론 그는 간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지만 성질이 워낙 포악하다보니 지시보다 한술 더 뜨는것이 다반사요, 간수들도 이것이 해롭지 않으므로 그냥 법치했다. 우선 감방장은 우리들 50여명을 몇줄로 앉힌후 각렬마다 《렬장》을 하나씩 배치했다. 물론 그도 일반수중 중범자였는데 그의 횡포 또한 대단했다. 가령 어디가 가려워도 그의 허락없이는 긁지도 못하는것이다. 긁으려면 《렬장님, 어디 가 가려우니 긁겠습니다.》 하고 보고를 한후 《긁어!》 소리를 듣고서 움직여야지 마음대로 움직였다가는 불려 나가서 죽도록 얻어 맞군 했다. 그러니 온 종일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고 벽에 기대앉는다는건 엄두도 낼수 없었다.

감방이 비좁아 자는것도 큰 문제였다. 서로 한사람씩 발과 머리를 엇갈리게 두고 모로 누워 자는데 옆사람의 발이 입에 닿는것쯤은 문제도 아니였다. 어찌나 비좁은지 왼쪽옆으로 누웠다가 옆구리가 결려 오른쪽옆으로 돌아 누우려면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빼낼수가 없고 전원이 일어나 일제히 돌아 누워야만 겨우 돌아 누울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나도 체험해 본바이지만 일제때 감옥형편도 이 지경은 아니였다. 누군가 왜정때 형무소들의 특성을 《향토색》으로 야유하면서 《신의주감옥은 적수감옥이요, 경성감옥은 일감옥, 대전감옥은 몽둥이감옥, 대구감옥은 싸움감옥, 함흥감옥은 쌍간나새끼감옥, 청진감옥은 생선감옥, 해주감옥은 외양감옥 그리고 서대문감옥은 옴감옥》이라 불렀댄바 있지만 남조선땅의 감옥은 무엇이라 해야 할지… 그 특징이 너무도 잔혹하고 많으며 급으로 따진다면 모두 특등급들이여서 그저 아연해서 비유에 능한 사람도 왔다가는 울고 갈것이다.

밥은 어린애들 주먹만하게 뭉친것을 한덩어리씩 주는데 받기 바쁘게 한입에 삼켜 버리면 그만이였다. 륙군형무소 의무과 의사조차 《그 밥만 계속 먹으면 영양실조로 3개월을 못 넘길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과연 3개월이 지나자 모두들 살은 다 빠지고 백골들이 되였다. 매일 자고 나면 한둘씩은 죽어 나가는 나날이 계속되였다.

이무렵 어떤 동지가 꾀를 하나 냈다. 어차피 얼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굶어 죽을게 뻔한데 배나 채워 보고 죽자는 얘기였다. 즉 7∼8명이 한조가 되여 끼니때 어린애주먹만 한 밥을 받으면 눈 딱 감고 반을 덜어 한사람에게 몰아 주자고 하였다. 그러면 일곱끼니는 배가 고파도 한끼는 배를 채울수 있지 않겠느냐는것이였다. 그래서 렬장의 눈을 피해 가며 이른바 《밥계》를 해보았는데 한끼 배 부르자고 사흘을 굶는 일도 할짓이 못되였다.

간혹 가족이 찾아 와 음식물을 차입해 주는 동지들도 있었다. 하지만 차입된 음식물이라는것도 층층치하의 간수들이 다 뜯어 먹고 감방장, 렬장몫까지 뺀후에야 쥐꼬리만큼 본인에게 돌아 오는데 다른 사람들과 절대 나누어 먹지 못하게 했다. 굶주린 동지들을 두고 도저히 혼자 먹을수가 없어 렬장의 눈을 피해 음식을 나누어 먹다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불려 나가 똥물이 올라 올 때까지 두들겨 맞는 판이였다.

굶주린 산 자들때문에 더욱 비참해 지는것은 죽은 동지들의 시신이였다. 감방장은 사람이 죽어도 그 몫의 밥을 더 받아 먹으려고 그 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않았다. 그냥 아프다 하고는 시체를 2∼3일씩 감방 한쪽구석에 놔두는게 보통이였다. 죽은 동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감에 따라 몸속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기여 나와 동지들의 얼굴에 와글와글대군 했다. 맘대로 제 몸도 긁지 못하는 우리가 부릅뜬채 숨을 거둔 그들의 눈을 감겨 줄수나 있었겠는가. 그러한 고통속에서   2년을 지냈다.

일괄해 말한다면 간수들도 관동군출신에 수인들을 다루는 방법이 악착하고 졸렬한데서 극치를 이루었거니와 감옥설비며 감방내 준칙들도 남조선이 가장 높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것이다.

남조선당국은 죽이다 못해 죽일 명분이 없어서 죽이지 못할 정치범들이 옥고를 치르는중 될수록이면 간수들의 악랄성을 최대한으로 발휘되게 했고 감옥설비며 준칙이며 침식조건이며를 비인간적인 마지막계선에 다달으게 했다.

내가 어찌하여 이런데서 죽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7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나는 대구형무소로 넘겨 졌다가 54년 서울 마포형무소로 이감되였다.

 

 

삶아 진 쥐를 뜯어 먹다

 

마포형무소에 도착한후 처음 얼마동안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동지들과 한방에 있게 되였다. 인쇄공장에 출역도 나갔는데 거기서 아는 동지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포형무소라고 대구의 특호감방과 특별히 다를바 없었다. 방마다 간수가 첩자를 하나씩 심어 놓아 한방에 있는 동지들과 마음대로 이야기도 나눌수 없었고 공장에 출역을 나가 아는 동지를 만나도 눈인사조차 제대로 할수 없었다. 공장에 나가면 밥덩이는 조금 커진다고 하나 엄청난 량의 1일작업량이 할당되여 있었다.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죽도록 얻어 맞는데 나이 많고 막일을 해보지 않은 동지들은 책임량을 채우지 못해 살벌한 구타속에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무소 계호과장이 나를 부른다고 하였다. 따라 가보니 그는 《빨갱이》는 절대 용납할수 없다는 요지로 이말저말을 늘어 놓았다. 아마도 내 반응을 통해 성향조사를 하려는것 같았다. 그럴 때 못 들은척 넘어 가야 징역살이가 좀 덜 고될텐데 입바른 소리 잘하는 나는 번번이 그런 순간을 그대로 넘기지 못하였다. 온갖 소리끝에 그가 《이북과 이남은 기름과 물 같아서 절대 합쳐 질수 없다.》는 말까지 하기에 도저히 참고 들을수가 없어서 나도 한마디 했다.

《만약 이 자리에 미국인이 나타나 과장이 보는 앞에서 나를 마구 두들겨 팬다면 과장은 차마 무어라 말은 못해도 마음이 언짢을것 아니요?》

《그건 그렇겠지.》

《바로 그 언짢은 마음도 같은 민족이기때문에 생기는것 아니겠소?》

《그렇지.》

《같은 민족이기에 생기는 언짢은 마음이 바로 남, 북은 하나라는 증거 아니요. 하나의 민족인 남과 북을 어찌 물과 기름이라 하시오?》

《어허, 이 사람 안되겠는데. 이봐, 이 사람 5사에 갖다 넣어.》

이리하여 나는 5사독방에 갇히게 되였다. 마포형무소에서는 5사가 정치범중에서도 《악질》들을 가두는 특별사였다. 독방으로 온후에는 며칠 내보내던 공장에도 내보내지 않았다. 덕분에 밥덩어리는 다시 아기주먹만하게 줄어 들었다.

좁디좁아 량팔을 들면 벽을 짚을수 있는 관만 한 독방에는 변소도 없고 변기통이 한쪽구석에 놓여 있을뿐이였다. 감방뒤쪽의 들창은 쇠창살을 치고 그우에 굵은 철사로 철망을 떠서 막아 놓았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그 바깥쪽을 널판자로 가리우고는 못질을 해놨는데 이때문에 대낮에도 해빛 한줄기 볼수가 없었다.

때는 겨울인데 북쪽출신인 나에게 내의를 넣어 줄 가족이 있을턱이 없다. 물론 내의를 얻어 입을 감방동지가 있는것도 아니였다. 그런데 후에 들으니 여러사람이 혼거했던 동지들도 가족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끼리,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끼리 수용했기때문에 가족 없는 동지들이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이 나보다 더 힘들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도리없이 광목에 시퍼런 물을 들인 죄수복 한꺼풀만 입고 마루바닥에 앉았는데 랭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얼어 죽을것만 같았다. 하도 등이 시려 《이불에 기대면 좀 낫겠는데》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이불은 감방 한쪽구석에 개여 놓게 하고 수인들은 감방 한복판에 똑바른 자세로만 앉아 있으라 하니 그럴수도 없었다.

하도 추워서 꾀를 하나 냈다. 식수를 먹지 않고 구석에 개여 놓은 이불우에다 조금씩 쏟아 부은것이다. 하루이틀 지나니 이불옆쪽에 얼음이 수북이 얼었다. 《이때다.》 하고는 담당간수를 불렀다. 이불 옆쪽에 얼어 붙은 얼음을 보여 주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담당님, 구석에서 습기가 차올라 이불이 어는것 같은데 구석에다 이불 못 놓겠는데요.》

그가 들어 와 이리저리 보더니 이불을 가운데에다 옮겨 놓으라 한다. 감방 한가운데다 옮겨 놓은 이불에 등을 대니 그나마 살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점심 배식시간에 밥과 국을 받았다. 국이라 하니 독자들이 어떻게 상상하실지 몰라 설명을 해볼가 한다.

가을무우수확기에 무우밭주변에는 잘라 버린 이파리들이 널려 있게마련이다. 형무소측은 소년수들을 동원해 이것들을 주어 모아서 취사장에 쌓아 놓는다. 그리고는 겨우내 이 이파리들을 씻지도 않고 거둬 넣어 국을 끓이는것이다. 그러다보니 국물은 쓰디쓰고 빛갈은 새까만것이 꼭 고려약 달여 놓은것 같다. 국그릇은 미제폭탄껍데기를 잘라 만든것인데 녹이 잔뜩 쓸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흉한 그릇이였다. 조미료 같은것은 생각도 못하고 소금만 넣어 끓인 새까만 무우이파리국을 그런 그릇에다 담아 놓았는데도 워낙 배가 고프다보니 국에 건데기가 좀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그날 점심에 국을 받으니 웬일로 무우이파리가 수북이 들어 있었다. 저가락으로 덥석 건져 들었는데 묵직한것이 느껴진다. 입에 가져 가려는 순간 흘긋 보니 통채로 삶아 진 쥐였다.

나는 원래 쥐를 무서워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래서 얻은 별명이 《서공》이였다. 이 별명을 얻은것은 30년대 말 일본 도꾜에 갔을 때였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어디에 갔다 와서 내가 먼저 방에 들어 갔는데 방문을 여는 순간 선반우에 있던 쥐가 깜짝 놀랐던지 뚝 떨어 지는것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놈의 쥐가 정통으로 내 머리우에 떨어 져 버렸다. 나는 어찌나 놀랐던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방바닥에 나자빠져 정신이 멍해 있었던것 같다. 이통에 각 방에 있던 히다찌공장 녀사무원들이 몽땅 모여 들었다. 그후부터 그 녀자들은 나만 보면 《네즈미오소레(쥐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라고 놀려대군 했다. 그래서 내 별명이 《서공》이 되였던것이다.

그런 버릇이 있는데 국그릇에 쥐가 통채로 들어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을가를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놀램도 잠간이였고 나는 삶아 진 쥐를 뜯어 먹었다. 놈들이 나를 때려 죽이고 얼궈 죽이고 굶겨 죽이자고 하는데 기어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항거와 증오의 의분이 엉켜 진 삶에 대한 욕망으로 해서였다.

하루는 역시 아침배식때 국을 받으면서 무심코 국그릇을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신식구통(식사따위를 넣어 주는 네모난 구멍으로 감방문에 뚫려 있다.)으로 들어 오는 엷은 빛줄기로 인해 내 얼굴이 국물우에 비쳐 지는것이였다. 의학백과사전화보에 나오는 해골 같은 몰골, 그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였다. 내가 살아 있다는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북 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 시를 하나 지었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기에 생각나는대로 여기에 적어 본다.

 

     움푹하게 패인 두눈에선

     그렇게도 아름답던

     지난 날 젊은 빛을 찾을 길 없고

     튀여 나온 광대뼈밑 기여 든 볼

     거칠게 금이 간 주름살속에선

     불 타오르던 청춘의 정열

     찾을 길 없나니

     이제 청춘은 갔다

 

     그러나 그 청춘을 너는

     헛되이 보내진 않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싸움속에

     그것을 바친것이다

     그렇기에 조국은

     앙상한 네 온몸을

     그 넓은 품안에 끌어 안아 줄것이며

     참다운 네 사랑은

     주름 잡힌 네 얼굴에

     뜨거운 입술을 보내여 줄것이다

 

     청춘을 헛되이 보내지 않은

     기쁨이여 영광이여

     네 뼈마디에 마지막기름이 마르고

     네 가죽이 백골보다 앙상한 뼈를 감쌀 때까지

     네 심장이

     마지막맥박을 칠 때까지

     조국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라

 

     그리하여

     너를 품어 주는

     조국의 넓은 품을

     더욱 넓게 하고

     네게 보내지는

     네 사랑의 입술을

     더욱 뜨거웁게 하라

 

소금그릇에 비치는 앙상한 얼굴을 바로 보며 나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동강난 조국에 대한 슬픔과 조국을 동강낸 자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이 얼굴을 동지들이 그리고 사랑하는 안해와 딸애가 알아 볼수 있을가 하는것도 생각하였다. 허나 내가 이 아침 감방안의 소금국에 비낀 앙상한 얼굴로가 아니라 남조선땅의 그 어느 구석에서 살이 오른 얼굴로 웃고 있다면 동지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더는 자기들의 동지, 자기들의 아버지며 남편임을 인정하지 않을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장이

     마지막맥박을 칠 때까지

     조국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라

     …

 

 

감옥은 당국의 얼굴

 

감옥이라면 의례히 높은 담장과 철창과 콩크리트로 바깥세상과 잘 격리된 곳으로 흔히들 생각한다. 이런 방법으로 귀와 눈을 막고 모든 감각기관을 마비시켜 정치범들의 온갖 사색과 활동을 정지시키자는것이 당국의 목적이니까.

하지만 나는 체험을 통하여 감옥처럼 바깥정세의 변화에 민감한데는 없으며 특히 당국자들의 심리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가 없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감옥은 당국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마포형무소에서 서울의 중앙청까지는 상당한 거리이지만 나는 때때로 감방안에 쪼그리고 앉아 《대통령실》에 앉아 있는 리승만의 늙어 빠진 얼굴의 변화를 상상해 볼 때가 있었다.

56년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그무렵 인쇄공장에 출역 나갔던 동지들이 돌아 와서 하는 말이 선거전 20여일에 걸쳐 마포형무소 인쇄공장에서는 밤을 새워 투표용지를 찍었다는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3선출마를 단념하겠다던 리승만이가 렴치불문하고 또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선것이다. 《대통령》을 계속해 달라고 경무대앞에서 무리 지어 떠들어댄 시위대의 뜻을 받아 들여 《국민을 위해》 또다시 출마하노라고 리승만이 제 입으로 떠벌였지만 그의 검은 속심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바이다.

반독재기운을 이런 식의 졸렬한 방법으로 짓뭉개며 출마에 나선 리승만이 어지간히 초조해난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포형무소 인쇄공장에서 투표용지를 인쇄했던 동지와 얘기를 나누며 그것이 부정선거를 위해 몰래 인쇄해 간 투표용지임에 틀림 없다는것을 알았다.

그 동지의 말인즉 다음과 같다.

《처음에 물량이 많이 밀리기에 기밀을 요하는 인쇄라 형무소에서 찍나보다 했는데 간수들의 눈치가 영 그게 아니였어. 안절부절 못하면서 20여일간 기계를 밤낮으로 돌려 용지를 다 찍어 낸후에는 조판한것을 빨리 부셔라, 재판도 없애라, 투표용지인쇄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등 성화가 불 같았거든.》

어쨌든 이 《선거》에서 리승만은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고작 52%의 득표에 그쳤다.

《통일》소리만 해도 철퇴를 맞던 리승만경찰독재통치하에서 최초로 평화통일을 웨쳤던 죽산 조봉암도 진보당의 《대통령후보》로서 이 선거에 출마했었다. 그는 극히 불리한 조건에서도 리승만과 큰차이 없는 득표수를 얻어 리승만을 전률케 하였다.

리승만을 놀래운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민주당의 립후보 신익회를 선거전에 암살해 치우고 한숨 돌렸다 생각했는데 죽은 사람을 놓고 전국적으로 추모투표가 진행됐다는 소식에 접해 리승만의 표정이 어떠했으리라는건 뻔하다.

1958년 1월 리승만은 서정학치안국장이 직접 지휘하여 진보당본부를 습격하고 죽산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중심인물들을 모두 체포하게 했다. 사회의 격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리승만은 간첩사건과 련루시켜 자기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되던 조봉암선생을 학살하였다.

리승만은 혹 이런 방법으로 종신《대통령》의 주추돌을 무사히 놓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민중들의 가슴에 소리없이 쌓여 가던 분노는 마침내 그를 몰아 내고 말았으니 이를 두고 사필귀정이라 하는것이리라.

당국의 표정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 보자.

50년대 정치범감옥의 력사가운데서 대전형무소 리용기소장의 얘기를 빼놓을수 없다. 리용기소장이 사상범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설칠 때 나는 마포에 있었으므로 대전형무소의 참상은 후에 여러 동지들의 증언을 듣고 알게 된것이다.

원래 사상전향제도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제국주의로 치닫던 일제가 만들어 낸것이다. 식민지조선의 항일독립운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던 이 제도는 광복과 함께 잠시 사라졌다가 48년에 다시 살아 나 좌익활동전력자들을 무데기로 학살하였던 《보도련맹사건》을 불러일으켰다. 전쟁후 전국 각 형무소에서 《국가관확립》을 내용으로 하는 사상전향절차가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제도화된것은 56년의 일이다.

그러나 파쑈소장 리용기가 설치기 시작한것은 이미 그 전해인 55년부터였다고 한다. 그의 전향정책의 신호탄은 바로 《최후통첩》방송이였다. 그는 동지들이 갇혀 있는 대전형무소 특별사(4사)에 대고 《전향하느냐, 뒤문으로 나가느냐(수형자가 죽으면 시신을 뒤문으로 내보낸다)의 선택권은 바로 너희들에게 있다.》는 최후통첩과 같은 방송을 했다. 그다음 그는 우선 간수들조차 《씨비리》라고 부르는 특별사(4사)에 갇힌 정치범들의 내의를 모두 빼앗았다. 가족들로부터의 차입도 모두 차단한후 그의 전향공작의 핵심인 《기아정책》을 실시했다. 밥은 단 네숟가락, 국은 도람통에서 국물만 살살 퍼서 항상 정량의 일부만이 배식되였다. 남은 밥과 국은 굶주린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쓰레기로 버려 졌다.

이뿐아니였다. 특별사의 복도에선 하루종일 동지들을 끌어 내 구타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30분이상 채우지 못하게 되여 있는 대포수정(한팔을 어깨너머로 넘기고 다른 한팔은 등아래쪽에 비틀어 두손을 잡게 한후 량쪽손목에 수갑을 채워 고통을 주는 형벌)을 3시간이나 채워 그 추운 《씨비리사동》에서 동지들은 마치 물속에 들어 갔다 나온것처럼 땀에 젖군 했다.

한마디로 굶주리다 쓰러져 죽어 나가겠는가, 전향해서 살아 나가겠는가를 선택하라는것이였다. 이 같은 《기아정책》은 4.19가 일어 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계선에서 가장 잔인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우리 동지들이 응당 공포와 불안속에 잠겨 있으리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감옥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리용기와 같은 자들이 험상을 해가지고 설치는 몰골에서 우리는 식민지남조선의 형편, 당국의 검은 얼굴을 보고 있었다. 붕괴직전에 처한 리승만《정권》의 마지막경련을 느끼고 있었다.

전향강박, 고문을 이기고 감방으로 돌아 오면 육체는 말할수없이 고통스럽지만 마음엔 어쩐지 배포유한 안정감이 깃드는듯 한 느낌을 이 시절에 자주 체험하였다.

남조선전역에 걸쳐 4.19가 터졌을 때 우리들은 응당 와야 할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리승만의 동상이 포석우에 나딩굴고 미국이 제공한 특별비행기로 그가 프란체스카와 단둘이 김포비행장에서 다시 미국으로 내빼야 했던 처지도 놀라울것 없었다.

리용기소장도 그간의 악행의 피값으로 서대문형무소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16이후 석방된 그는 그후 종로에서 큰 다과점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마포형무소 5사 독방에서 추위에 떨며 잠 못들던 어느 이른새벽, 저벅저벅 걸어 오는 간수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감방문이 덜컹 열렸다. 벌떡 일어 나 바라보니 담당간수가 서 있었다.

《부산으로 이사간다. 짐 싸들고 빨리 나와.》

퉁명스런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가족 없는 나에게 싸들고 나갈짐이 있을턱이 없다. 빈몸으로 나가니 같이 이감 가는 동지들이 꽤 있었다. 모두들 보따리 하나씩은 들고 나오는데 유독 나혼자 빈몸으로 나오는게 이상했던지 간수가 의아한 눈으로 쏘아 보는것이였다.

차례차례 포승줄로 꽁꽁 묶고 그우에 다시 수갑을 채우고 우리들은 차에 태워 져 서울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총을 멘 경찰 수십명이 우리를 빽빽이 둘러쌌다. 말은 물론이고 주변에 시선만 던져도 《쳐다보지 말라.》 하고 고함을 친다. 여윌대로 여위여 뼈만 남은 산 송장들이 무엇을 할수 있기에 이토록 야단인지. 게다가 간수들은 경찰들앞이라 한번 뽐내보려는지 더욱 기승을 떨며 욕설들이다. 각 역을 지날 때마다 경찰이 40∼50명씩 나와 우리를 둘러 싸는것은 여전했지만 그런 틈에도 기차유리창으로 바깥을 얼핏 내다보니 세상은 참말로 별천지 같았다.

밤이 되여 부산에 닿았다. 그리고는 트럭에 실려 부산형무소로 갔다. 우리들은 하나하나 감방에 집어 넣어 졌는데 모두가 3사 독방이였다. 나는 3사 10방에 가두어 졌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들어 가자마자 이불부터 쳐다봤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피고름이 덕지덕지 말라 붙은 구역질나도록 더러운 이불이였던것이다. 그러나 하도 추우니 더럽다는 생각을 할새도 없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둘러쓰고 잠을 청했다. 후에 알고보니 그 사동은 문둥병환자 전용사동이였다. 그런데 형무소측은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문둥병환자들을 다른 사동으로 옮겨 놓고 우리를 집어 넣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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