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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 리 산
나는 88년 말 석방된후 《지리산》, 《남부군》 등 지리산유격대의 활동을 소개한 몇권의 책에 접할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지들도 대부분 그 책들을 일부러 찾아 읽었던것으로 알고 있다. 지리산에서 붙잡혀 30년이상이나 담안에 갇혀 있다 나온 사람들이 그날의 력사가 담밖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것은 당연한 일일것이다. 그런데 앞서의 책들을 읽은 동지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왜 분노하는가. 《남부군》이란 책이 영화로까지 만들어 져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에서 어떤 로동조합의 간부를 맡고 있다는 청년 두사람이 한 아무개라는 우리 동지를 찾아 왔다. 한동지는 경남부대에서 최후까지 유격대대원으로서 전투를 했던 사람이다. 그는 50년 입산때부터 54년 체포될 때까지 하루도 총을 손에서 놓아 본적이 없었다. 청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더라고 한다. 《<남부군>이란 영화를 보았는데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영화는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온산을 쫓겨 다니다 죽어 가는 비참한 모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죽어 간것입니까?》 매일같이 사선을 넘으면서도 끝까지 지리산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유격대전사인 그 동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 책이나 영화에는 그 질문에 대한 옳바른 대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운명의 장난에 빠진 사람들>, <력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들>이라는 식의 문학적인 수사들이 나오고 그것은 독자를 허무주의로 이끌어 갑니다. 그것이 바로 그 책이 출판된 목적이기도 할겁니다. 지리산에서 내가 총을 들고 싸울 때 나는 바로 당신들과 같은 20대 청년이였습니다. 내가 총을 든 리유는 단 하나입니다. 나라의 주인, 즉 인민이 주인되는 정부를 세워 보려고 나선것입니다. 지금 남쪽에서는 인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인민이라 하면 친일파, 민족반역자, 매판자본가, 악질지주, 악질종교인 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였습니다. 일제에게 40여년을 뜯기다 광복을 맞았는데 광복조국에서도 친일파들이 되살아 나 미국을 등에 업고 날치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백성이 주인노릇하는 정부아래서 한번 살아 보겠다는 열망이 목숨보다 강했던것이 그렇게 리해가 되지 않습니까?》 지리산에 뼈를 묻은 조국의 아들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이 웨침은 나의 웨침이기도 하다. 그것은 낮으나 피 타는 웨침이였다. 인민이 주인된 세상, 외세가 없고 사대매국노가 없는 세상을 위해 멀리 북쪽하늘아래의 땅을 리상향으로 그리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쓰러져 간 나의 동지들,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통일독립된 인민의 조선을 위하여 싸웠다. 그것은 사대매국과 자주애국간의 전쟁이였다. 그날에 군경의 총탄은 이 땅에서 푸르러 가고 있던 민족의 얼을, 자주와 애국의 얼을 쏜것이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운명의 장난에 빠진 사람들》도 아니며 《력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당당히 자기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력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싸웠고, 피를 흘렸고 죽었다. 성스러운 위업에 바친 피와 죽음은 헛된것일수 없다. 내가 남에서 수기를 쓰려고 생각했던것은 지리산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참을수 없었기때문이다. 나는 지리산유격대의 진실에 대하여, 나의 동지들에 대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지리산유격대의 연혁이나 력사에 대하여 쓰려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력사가들이 할것이다. 나는 다만 지리산에서 만났고 알게 되였고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뿐이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싸웠으며 꽃다운 청춘을 바쳤는가 하는것을 세상에 알리는것이 산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내가 두려워 하는것은 이 글이 나의 동지들에 대한 추도사로 되지나 않을가 하는것이다. 그들에 대하여는 추도사가 아니라 찬가를, 송가를 불러야 마땅할것이다. 나의 동지들에 대한 추도사는 북과 남이 하나로, 인민의 세상으로 되는 통일의 날을 위하여 아직은 하지 말아야 한다. 통일조국의 푸른 하늘이 비끼기전에는 그들의 눈이 감겨 지지 않을것이다.…
입 산
당시 지리산에는 경남도당을 비롯해 하동, 산청, 진양군당과 각 지역 인민위원회, 녀맹, 농맹, 민청 등의 외곽조직 등 7∼9월동안 여러 지역에서 공개활동을 벌렸던 모든 기관들이 전략적일시적후퇴시기를 맞아 온통 올라 와 있었다. 그들이 바로 수년간 삼남지역을 들썩하게 한 지리산유격대의 전신이였다. 산에 들어 가 풀뿌리를 먹으며 싸울지언정 다시는 미국과 사대매국노들의 통치하에서는 살지 않으리라는것이 그들의 결심이였다. 인민의 세상이 된 통일조국을 위하여 다시 진공해 나올 인민군대와 함께 싸울 각오를 다진 사람들이 바로 지리산유격대 대원으로 되였다. 지리산의 높고 낮은 산발마다가 반미반괴뢰투쟁의 결심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도 내가 서야 할 대오를 찾아 가야 했다. 나는 우선 경남도당이 터를 잡고 있는 함양군 마천면 세동부락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마침 도당일군들이 유격대원심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이와 난 곳, 전직에 대한 물음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왜 유격대에 입대하려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내앞에서 여러명의 심사가 진행되였는데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미제와 리승만매국역도를 내몰고 온 조선땅이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것이였다. 스무살 남짓한 한 동지는 《우리 집안에서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아버지와 맏형은 리승만의 <5.10단선>을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되고 어머니와 둘째 형은 8월총선거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찬성투표한때문에 학살 당했습니다. 난 죽어도 공화국을 위해 싸우다 죽겠습니다.》 하고 울면서 말했다. 그때 나는 그를 보면서 전쟁전 8월총선거에 남조선유권자의 77.62%가 비밀리에 참가하여 찬성투표했다는 보도를 듣던 생각이 났다. 바로 그 77.62%라는 수자가 수백만 유권자들의 붉은 피로 새겨 진것이였다. 지리산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너나 없이 8월총선거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찬성투표한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단순히 38°선이북에 세워 진 나라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 고향땅에 세운 나라이기도 했다. 다시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들모두의 참된 조국이였다. 그 동지는 물론 합격되였는데 심사하던 안동지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 주며 《김일성장군님과 우리 공화국을 위하여 잘 싸워 봅시다.》 하고 고무의 말을 했다. 나도 그런 동지와 같이 싸울 생각을 하니 무척 기뻤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섰던 나는 몸이 약하다고 심사에서 떨어 지고 말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정해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입산이 거절되는 바람에 나는 그 젊은 동지의 이름도 알 사이없이 헤여 지고 말았는데 그후로는 더 만나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잘 싸웠으리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불합격을 맞은 나는 다급한 마음에 심사를 책임진 안동지(나는 전부터 그와 안면이 있었다.)를 붙잡고 합격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안동지는 역시 안된다고 머리를 흔드는것이였다. 《유격투쟁이라는것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절대 못하는거요.》 하고 그는 안경 낀 나의 얼굴을 동정하듯이 바라보았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안경이 나를 나약한 사람으로 인식케 한것 같았다. 안동지는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심사에서는 한발자국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물러 설수밖에 없었다. 안동지는 나중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오래 했는데 나는 60년대 대전형무소에서 그를 만난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옛날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있은 인물심사에서 떨어뜨렸다고 원망을 하였는데 안동지가 정말 미안하게 되였다고 사과하던 기억이 난다. 안동지는 오랜 옥고끝에 지난 87년 대전교도소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심사에서 떨어 지고보니 차라리 북으로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바위에 기대앉아 조국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이 밝으면 군당으로 찾아 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는 각 군당들에서도 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던것이다. 다음날 진양군당이 대원사골에 터를 잡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서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마천면부근을 거의 벗어 났을 때 뜻밖에 6사단 문화부사단장인 김영준동지일행을 만났다. 일제때 영양실조에 걸린 우리 어머니에게 까마귀고기를 처방하여 어머니를 쾌차케 했던 바로 그 김동지였다. 정말 반가왔다. 그들은 내가 떠나온 세동부락으로 가는 길이였다. 나는 도움을 받을수 있을것 같아 심사에 떨어 진 이야기를 비쳤다. 김영준동지는 그런데 어데로 가는가고 물었다. 내가 대원사골로 가고 있는 사연을 얘기했더니 김동지는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다. 《중앙에서 후퇴하라니 후퇴하는게 좋지 않겠소?》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말을 듣지 않자니 민망했는데 기왕에 결심한바가 있었기에 나는 대답했다. 《이왕 뜻을 세우고 산에 들어 왔으니 산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때 김동지옆에 있던 사람 하나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후퇴하라면 하는거지 왜 건방지게 말을 듣지 않는건가.》 그는 중앙당 농민부장 리구훈이란 사람이였다. 전에도 자기 직위를 믿고 권위적으로 행동한적이 더러 있었다. 이 혼란시기에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그처럼 잘 알아 보지도 않고 기분주의적으로 행동하는게 안타까와 나는 다시 한마디 했다. 《저는 산에 남겠습니다. 저도 이 시기에 질서 있게 후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꽤나 궁리하여 결정한 일입니다. 중앙을 빙자해 동지가 자기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는것은 관료주의적태도가 아닙니까?》 김동지가 나더러 그만 두라고 했다. 리구훈은 입이 쓰거운듯 외면하고 있었다. 결국 리구훈과 별로 좋지 않은 낯으로 헤여 졌는데 김동지 보기가 미안했다. 나는 마천에서 깊은 골짜기를 타고 산청군 삼장면으로 넘는 길인 쑥밭재를 향해 출발했다. 이것이 김영준동지와의 마지막상면이였다. 나중에 들은데 의하면 김영준동지의 일행은 경북도당거점에 들렸다가 포위공격해 오는 괴뢰군들과 접전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 전투에서 김영준동지와 일행은 희생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인 력량차이로 종시 포위를 벗어 나지 못하고 모두 전사하였다는것이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김영준동지를 생각하니 우리 민족의 명의를 한사람 잃었구나 싶어 가슴 아팠다. 또한 나와 사이가 나빴을뿐 리구훈동지 역시 우리 당의 일군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팠다. 그들의 생명은 우리 당의 조국통일위업을 위해 바쳐 진것이 아니겠는가. … 쑥밭재로 올라 가다가 해가 떨어 졌기에 한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 가니 낯 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함경남도 농민동맹에서 공작대로 나왔다가 후퇴하는 길이라 했다. 그와 저녁 내내 이야기하다가 아침에 일어 나니 옆자리가 비여 있었다. 말도 없이 혼자 가버린것이다. 내가 유격대에 남겠다니까 굳이 같이 가자고 권하지 않고 떠나간것 같았다. 리해는 되면서도 혼자 골을 오르느라니 쓸쓸한 마음을 지울수가 없었다. 온종일 골을 올라 쑥밭재에 다달으니 전쟁전 경찰들이 구유격대 《토벌》을 위해 설치한 화점이 보였다. 지리산이 처음으로 유격활동의 거점으로 된것은 아마 《국군》 14련대가 폭동을 일으켰던 려수인민항쟁세력이 입산하면서부터였을것이다. 그때로부터 수년간 지리산유격대는 군경의 《토벌》에 맞서 싸우며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전 49년 3월에 《로동신문》에서 《동기토벌》을 분쇄한 지리산유격대에 대한 기사를 읽은적이 있었다. 그 기사는 김선생이 남에서 써보낸것이여서 더 기억에 남았던것 같다. 지리산유격대는 인민군대의 진공과 함께 이 지역이 해방되자 산을 내려 민주개혁을 비롯한 새로 선 인민정권기관 사업에 투신하였었다. 그런데 한달 남짓한 기간이 지난 오늘 또다시 유격투쟁을 위하여 입산하게 된것이였다. 조국통일이 참으로 간고한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만 아니였다면 하는 생각에 주먹을 떨었던것도 물론이다. 쑥밭재를 넘어 대원사방향으로 내려 가니 소가 한 20마리 널려 있고 웬 젊은이들이 그 소를 지키고 있었다. 물어 보니 진양군당소속이라 했다. 그들의 말인즉 전략적일시적후퇴시 인민군군인들이 사천, 고성방면에서 들판에 널려 있는 소를 붙잡아 탄약을 싣고 왔는데 험한 바위길로는 더 이상 소들이 들어 갈수 없어서 자기들에게 주인을 찾아 주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느라니 문득 대전에서 목격한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전부근의 어느 도로에서 있은 일인데 적기의 맹폭격에 어쩔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한 아이를 구원하다가 새파랗게 젊은 인민군중위가 희생되였다. 아이를 안고 쓰러졌던 젊은 중위의 가슴에 붉은 피가 번져 가는데 철 없는 아이도 사태가 짐작되는지 《아저씨》 하고 목 메여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 대한 기사를 썼었다. 주인이 어디론가 피난 가면서 버리고 간 소들, 걸음걸음 식량부족에 맞다들리는 후퇴의 길에 그 소들을 잡아 식량을 보충한들 누가 뭐라겠는가. 하지만 주인이 있을것이니 돌려 주어야 한다는것이 인민군대의 도덕이였다. 그때 나는 인민의 군대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였다. 인민의 생명재산을 지키는 군대, 그들의 면모는 진격의 길에서도, 어려운 후퇴의 길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에 더듬느라면 요즘 신문과 텔레비죤에서 매일 같이 보게 되는 공화국 방방곡곡에서 일어 나는 군민일치의 미풍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학교-우리 초소》, 《우리 초소-우리 농장》 또는 《우리 공장-우리 초소》 등의 관계를 맺고 군대와 인민이 서로 돕고 위하는 사실들, 특히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신후에는 더욱 거세찬 사회적흐름으로 확대되고 있는것이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43년전에 있었던 군민일치의 작은 일화나마 더듬어 보게 되니 참으로 감회 깊고 긍지가 새삼스럽다. 소를 지키는 젊은이들이 군당은 대원사에서 한 20리정도 더 이동했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결국 20리를 더 걸어 진양군당터에 도착하였다. 위원장을 만나 심사에 떨어 진 이야기를 하고 군당유격대원으로 써달라고 사정한즉 취사장에 가서 밥부터 어서 먹으라고 했다. 식사후 부르기에 입대승인인가 하고 가보니 위원장이 말했다. 《우리는 평촌마을로 옮기니 여기서 소를 지키고 있으시오.》 소주인들이 있는 사천, 고성방면으로 갈수가 없어서 이곳 농민들중 소 없는 농민들을 조사하여 나눠 줄 예정인데 그때까지만 지키라는것이였다. 이것을 첫 임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입대시키기 곤난하다는 의미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군당은 마을로 내려 가고 나를 포함하여 북에서 온 세사람과 그 지방사람 둘이 산에 남았다. 산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외로운 산생활에서 사람 사는 마을에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결 같다. 더우기 그리운 가족을 멀리하고 조국통일투쟁에 보탬이 되겠다고 남은 나에게 소나 지키고 있으라니… 쓸쓸한 마음을 《조국이여》를 되뇌이며 달래면서 이틀을 보냈는데 같이 남아 있던 북쪽출신중의 하나가 떠나겠다고 나서는것이였다.(그는 진양군내무서장의 책임을 맡고 남으로 내려 왔었다.) 《군당위원장이 소를 지키라 했으니 이는 당의 과업이요. 이 일을 수행하지 않고 가겠다는거요?》 《군내무서장으로 파견되여 온 나를 산에 남겨 놓고 자기들만 부락으로 내려 간 처사는 리해할수 없소. 길이 막혔다 해도 산으로 가다 보면 후퇴할수 있는 길이 있을것이요. 나는 가겠으니 식량을 내주시오.》 이바람에 북쪽출신 또 하나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는 군당선전부부장으로 파견돼 온 동무였다. 할수없이 가지고 있던 밀가루를 내여 주었다. 그들은 한되가량 덜어 떡을 쪄가지고 떠났다. 이런 판에 내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묵묵히 소곁을 떠나지 않는 그 지방출신들을 보기가 민망해 나만이라도 여기에 있어야겠다 하고 있던중 진양군당 선전부장 정영섭동지가 부락에서 올라 왔다. 그는 이번 서울해방때 형무소에서 나온 진실한 사람이였다. 《이렇게 남아 있으라 해서 미안하오. 위원장동지의 지시이니 내려 갑시다.》 이렇게 해서 소 지키는 일은 끝이 났다. 소를 몰고 평촌부락으로 내려 가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게 촌놈이 큰 도시에 처음 온것처럼 얼떨떨했는데 어쨌든 살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격당시 우리 인민군을 대하던 친절한 태도와는 달리 은근히 경계하는듯 한 그곳 사람들의 기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다가 다시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다시 미군과 괴뢰군이 들어 오면 무슨 만행을 할지 알수 없으니 그들의 마음이 편안할리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싸워 승리의 신심을 준다면 그들도 반갑게 맞아 주리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길은 하나였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전쟁승리를 위하여 힘껏 싸우는 오직 한길뿐이였다. 다음날 진양군당이 산청군 단성면 울리로 떠난다기에 따라 나섰다. 진양군당에서도 유격대원 시켜 준다는 말이 없어서 이제나저제나 하며 며칠을 보냈다. 하루는 위원장이 부른다기에 가보니 잘 모르는 사람이 와 있었다. 《저는 도당에서 왔는데 그간 동지가 어디 있는지 각 군당에 련락해 보는 과정에 어제야 비로소 확인되여 즉시 데리러 왔습니다.》 그동안 받아 주는데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 했던 노여움이 한꺼번에 솟아 올라 볼 부은 소리가 나왔다. 《심사에도 떨어 진 나를 데려다 어디다 쓰려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니 리해하시오.》 어쨌든 더없이 반가와 그를 따라 나섰다. 지리산 외곽릉선인 달뜨기재를 넘어 삼장골을 가로 질러서 대원사골에 올랐다. 새재를 넘어 반곡부락에서 자고 이튿날 음천골을 올라 세동부락에 닿았다. 도당일군들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남경우도당위원장이 《미안하게 되였다》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허동욱부위원장이 《미안하니 어쩌느니 하는것은 부르죠아형식에 지나지 않으니 다 그만 두고 일이나 하자》며 다음과 같이 힘 주어 말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반공>을 내세워 조선침략전쟁을 하고 있는것을 우리도 알지 않습니까? 저 히틀러, 무쏠리니,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침략을 <반공>으로 은페하려다 멸망한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그런 방식으로 력사를 후퇴시키려는 미제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것입니까? 그러니 미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우리모두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퇴기에 대렬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범한 과오를 랭정히 반성하면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나는 지리산유격대 대원이 되였다. 그때의 흥분되던 감정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경남도당신문》
도당에 돌아 와서 보니 하동, 산청, 진양군당산하에 유격대들이 착착 꾸려 지고 있었고 이 유격대들을 경남통합부대로 만든다고 하였다. 사령관으로는 유능한 군사간부 리영희동지가 거론되고 있었는데 그는 려, 순사건의 주역인 려수 14련대출신이였다. 한편 지리산유격대를 《토벌》한다고 괴뢰군 5사단이 남원에 주둔하고 있기는 했지만 51년 2∼3월까지 지리산린근은 완전한 해방구였다. 도당, 군당을 비롯한 각 기관들은 부락에 터를 잡고 숙식을 하였으며 유격대들도 주로 괴뢰군이 해방구안의 부락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방위하는 정도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때문에 당시 지리산내에는 전투원보다는 비전투원이 더 많았는데 나는 결국 유격대원으로는 못 가고 경남도당 선전부에서 도당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맡게 되였다. 종군기자라는 직무를 띠고 전선으로 나왔던 나였으니 이렇다 저렇다 타발을 할수도 없었다. 동지들은 나더러 도당신문을 내야 할줄 미리 알고 입산한것 같다고 롱을 했다. 이리하여 나는 인민군종군기자로부터 유격대종군기자로 되였다. 신문발행준비를 하기 위해 산속에 있는 무전기반에 가서 2∼3일 있다가 부락에 내려 오니 허동욱부위원장이 전북에 급히 좀 갔다 오라고 하였다. 용무는 전북도당과 경남도당의 련락선을 맺고 오는것이였다. 전쟁전부터 산생활을 해서 지리를 잘 아는 사람 하나, 조직부 통신과장 그리고 나 셋이서 남원군당 선을 타고 급히 출발했다. 6일만에 전북거점인 회문산에 닿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와 련락선을 맺었다. 3일간 머물던중 괴뢰군의 공세가 있어 급히 경남으로 돌아 왔는데 그길로 덕유산으로 떠나라는것이였다. 쉬지도 못하고 무전반과 함께 떡갈산에서 하루밤을 자고 함양군 숙망령을 넘어 농골이라는 마을에 가니 허동욱부위원장이 와 있었다. 신문발행을 급히 하라는것이였다. 사흘후 남경우위원장이 도착했고 도당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직위원회는 경남도당의 주요간부로 구성되였는데 당의 로선을 토의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도당의 최고기구였다. 이후 조직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신문발행을 시작했다. 신문이래야 기계로 인쇄하는것이 아니라 원지를 긁어 등사기로 밀어 발행했지만 산에서 하자니 말할수없이 힘들었다. 우여곡절끝에 원지는 일본 아세다제의 고급원지를 2,000매이상 확보하였고 백지도 상당량 장만하였다. 소식란에는 무전기로 받은 《중앙통신》과 각시, 군당에서 매일 올라 오는 투쟁보고를 싣기도 하고 사설, 론설은 편집계획에 따라 각 부문 책임자들에게 과업을 제시하여 쓰도록 했다. 이리하여 신문은 매주 한번씩 발행되였다. 크지도 못하고 부수도 많지 못한 신문이였으나 신문은 유격대원들속에 널리 애독되였다. 배포가 늦어 지면 사람을 보내여 독촉하기까지 했다. 특히 김일성장군님의 1950년 10월 11일 방송연설을 실었을 때는 신문부수가 모자라 상당히 애 먹었다. 누구나 한부씩 건사하려고 했기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가 《신문을 읽었소?》 하는것이였고 《읽었소.》 하고 가슴을 툭툭 치는것이 대답이였다. 안주머니에 한부 넣었다는 뜻이였다. 인민군의 재진공이 시작되여 청천강이북과 장진호반에서의 대포위전소식을 실었을 때는 정말 대단했다. 평양해방, 함흥해방, 2차 서울해방… 그 나날에는 북쪽에서 포성이 울리면 인민군대의 포성처럼 들린다고 유격대원들은 말했었다. 지리산에서 발간한 《경남도당신문》은 8절지의 크기를 넘지 못했으나 유격전사들에게 당의 목소리를,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보도를 알려 주는 선전자였으며 전사들을 위훈에로 추동한 고무자였다. 지금은 한장의 신문도 나의 앞에 없으나 눈을 감으면 검은 잉크로, 때로는 보라색잉크로, 지어는 빨간색으로까지 찍혀 있던 신문, 유격전사들의 품에 안겨 지리산의 깊고 험한 계곡을 옮겨 가던 신문이 삼삼히 떠오른다. 그 나날에 한밤중 지리산 안장바위릉선에서, 남해 와룡산에서, 또 오부면 떡갈산에서 타오르는 봉화를 보며 가슴에 떠오르는 감회를 시로 지어 신문에 실었던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여기에 적어 본다.
저기 높은 산너머 해는 기울고 바삭바삭 가랑잎 불어 날리는 소름 돋는 찬바람 얼굴 시린데 적의 시선 피하며 혁명길손이
깔려 덮인 어두움 눈앞 가리여 분간 못할 오솔길 돌뿌리 차며 저기 높은 외딴집 등잔불빛이 반짝이는 방향을 목표 삼아서
저기 멀리 마을서 개 짖는 소리 원쑤들의 기척에 놀래 짖는가 발 멈추고 촘촘히 박힌 화점의 적의 동태 살피며 다시 앞으로
침략 위해 원쑤가 덮어 쓴 가면 《자유반공》 탈 쓰고 총칼 휘둘러 피내 맡고 미치인 살인귀들을 애국투쟁 불길로 쓸어 버리리
원쑤들의 발톱에 짓밟히는 땅 새 력사의 새 기발 휘날리려고 혁명의 길 떠날 때 이겨 오라던 미소 짓던 그 얼굴 언제 만나리
이 산 저 산 봉마다 솟는 불길은 원쑤들의 가슴에다 칼을 박는 불 백전백승 통일의 기치 드높인 타오르는 불길인 저기 봉화여
비장한 죽음
그때 남해려단장 리청송동지가 후퇴로가 막혀 덕유산 구천동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 왔다. 도당은 사람을 보내 리청송남해려단장을 데려 왔다. 이후 경남도당 조직위원회는 리청송부대와 경남부대와의 합동투쟁을 벌리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에 따라 전개된 투쟁이 《안의전투》였다. 안의는 함양군에 있는 면소재지이다. 이 전투에서 리청송부대는 거창으로 통하는 기동로를 장악매복하기로 하고 경남부대는 안의공격을 위한 돌격대의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해 그 방향의 고지에 중화기소대를 배치하여 엄페해 둔 중화기거점을 책임지게 하고 전투 총 지휘는 항일유격투쟁에도 참가한적 있는 우수한 군사간부 ○○동지(필자가 그만 이름을 잊어 버렸다.)가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고 경남부대가 돌격하여 안의전투가 거의 승리할무렵이였다. 련락이 잘못되였는지 기동로를 장악하고 있던 리청송부대가 갑자기 철수하는것이 아닌가. 기다렸다는듯이 경찰부대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쳐들어 왔다. 돌격부대가 전멸할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였다. 총지휘관 ○○동지는 돌격부대에 후퇴를 명하고 자신은 중화기가 배치된 고지에 직접 올라 가 엄호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탐지해 냈는지 중화기고지를 족집게처럼 집어 낸 경찰의 박격포사격에 ○○동지는 희생되고 말았다. 그는 돌격부대가 완전히 퇴각했다는것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평양의 최고사령부에 자신의 최후에 대하여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헌신적인 동지의 투쟁으로 돌격부대는 무사히 퇴각할수 있었으나 계획했던 전투는 실패하고 말았다. 손실은 컸다. 중요한 군사간부 ○○동지를 잃고 정예유격전사 몇명이 희생됐다. 중화기고지를 지키던 소대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일급비밀에 속하는 중화기고지의 위치가 사전에 루설된것이 더 큰 문제였다. 우리속에 경찰의 정보원이 잠복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경찰놈들의 추격은 끈질겼다. 결국 정보원의 적발은 후일로 미루고 남해려단에 사전퇴각의 책임을 물어 그 부문 군사간부들을 책벌하고 희생된 군사간부들과 전사들의 주검앞에 추도의 눈물을 흘리며 거점을 다시 지리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곧 조직부장 강명석의 지휘하에 나를 포함한 비무장 50여명이 떠났다. 산청군 오부면 떡갈산에 도착했을 때 돌연 경찰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였다. 떡갈령 중간련락소의 책임자는 홍팔십이라는 젊은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여든살에야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팔십》이라 이름 지었는데 기구한 운명사가 담겨 있을 팔십생남의 전후사를 들을 사이도 없었다. 촉박한 정황에서 그는 우리 비무장들이 빠질 돌파구를 열기 위하여 《돌격대원들은 날 따라 앞으로!》라고 웨치며 경찰놈들을 맞받아 나갔던것이다. 그들이 열어 놓은 돌파구로 우리 비무장들은 무사히 경찰의 포위를 빠져 나왔으나 홍팔십과 돌격대원들은 희생되고 말았다.…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지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웨치던 그들의 최후를 마음속에 그려 보라. 외아들 홍팔십이 로부모의 지극한 사랑도 초월하고 통일된 내 나라, 내 세상을 위해 지리산에 젊은 청춘을 뜨겁게 묻은 그날의 치렬함을, 그들은 내 나라, 내 세상 통일독립된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때문에 젊은 청춘을 아낌없이 바친것이다. 우리들은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한 그날, 비무장 50여명을 살리려고 웃으며 숨진 홍팔십의 모습, 그의 마지막 만세의 웨침은 칼로 새긴 도장자국같이 가슴에 선연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내가 부끄러울뿐이다. 지리산에서 싸운 수백수천 홍팔십들의 조국애가 바로 흰옷 입은 사람들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바라는 마음인데 누가 우리 조국을 오늘까지 두동강내고 절반땅에 외세와 사대매국노를 부식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산을 타고 골을 내려 와 음천강에 닿았다. 이 강을 건너 반곡부락(이 부락은 그해가 저물무렵 김종원이라는 경찰놈이 진두지휘하여 어린애와 로인까지 모두 학살한 곳이다.)에서 날을 새고 새재를 넘어 대원사골을 지나 평촌부락에 닿았다. 그런데 이 부락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 경찰의 총 공격을 받아 어수선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게다가 경찰부대가 다시 쳐들어 온다는 정보가 들어 왔기에 무전반을 데리고 시천장터를 거쳐 거르미골을 올라 동당부락에서 하루밤을 잤다. 그 이튿날 중산마을에 가니 집은 모두 불 타버리고 마을사람들은 타버린 집터에 짚더미를 쌓아 놓고 그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마을에서 감을 사서 허기를 채우고 조복애도녀맹위원장이 비상식량으로 지니고 온 쌀과 소금으로 죽을 끓이고 있을 때 하동군당위원장 심상태동지가 왔다. 그날 밤 적세에 대한 토의를 한 결과 하동쪽보다 산청군 삼장면쪽으로 가는것이 낫겠다고 하여 배고픔을 참으며 장고봉을 넘어 삼장면 장대골에 닿았다. 그동안 그 처절한 싸움속에서도 신문을 3호까지 발간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우리가 장대골에 있을 때 인민군 6사단이 북으로 후퇴한 뒤 최후로 남은 인민군으로 조직한 부대가 있었는데 105부대라 불렀다. 조직한 날이 10월 5일이였기때문이다. 105부대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많고 병기도 정규군수준의 무장을 갖춘 강한 부대였다. 부대장은 정용세라는 대위였는데 그는 일제하 중국 연안에서 김두봉의 련락병으로 있었던 인물이였다. 그리고 105부대 정치위원은 남해 어느 군인가의 검사로 임명 받았던 자였다. 105부대는 안장바위릉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무렵엔 후퇴기간이 많이 지났음으로 해서 후퇴로가 막혀 있었다. 즉 추풍령에서 태백산줄기로 가는 길목이 막혀 전투를 하며 넘어 가야 했다. 이때문에 전투를 기피하고 지리산으로 돌아 와서 유격부대와 합류한 뒤 싸우지도 않고 건달치는 자들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적발하는 사상투쟁이 벌어 지게 되였는데 이 참에 경찰에 투항하는 자들도 생겨 났다. 그런 자들은 우리 유격전사들을 엉터리 없는 거짓말로 악평하면서 자기는 이제 잘 살게 되였으니 자기를 따르라는 내용의 전단(삐라)을 비행기로 뿌리고 확성기로 《자수하라》고 웨치며 날아 다녔다. 이럴 때마다 전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휴지 없는데 휴지공급하러 왔다네.》 한 전사의 말에 웃음판이 벌어 지기도 했다. 그런데 날조된 악선전을 리용해 105부대를 당에서 리탈시키려 기도한 사건이 일어 났다. 즉 살포된 삐라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던것이다. 《도당위원장 남경우는 박문규라는 처녀를 비서라고 자기옆에 두고서 105부대를 자기가 머무는 거점호위에 배치하고는 군주 같은 향락을 누리고 있다.》 105부대 간부들은 이런 악선전을 구실로 부대를 끌고 북으로 후퇴하겠다고 나섰다. 자기들은 인민의 군대이므로 거점호위만 시키는 도당의 지도밑에 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당시 도당은 실패로 끝난 리청송부대와의 합동투쟁을 재평가하면서 다음투쟁을 계획하고 있는중이였다. 그 계획이 완성되면 105부대는 전투에 나가야 했다. 이런 정황에서 105부대 지휘부의 후퇴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면한 전투를 회피하려는 의도로밖에 볼수 없었다. 후에 도당조직위원회가 조사한데 의하면 남경우위원장이 도당거점인 장대골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105부대를 안장바위릉선에 배치한것은 사실이였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부대를 이끌고 당에서 리탈하는것이 옳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남경우위원장을 트집 잡아 큰 전투를 우정 기피하고 《살길》을 찾아 가려던 105부대 일부 간부들의 도발행위였다. 참된 당원이라면 도당위원장에게 원칙적인 비판을 하고 시정하도록 하는것이 마땅할것이다. 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 유격부대란 지북침 없는 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105부대 간부들은 끝내 부대를 끌고 떠나버렸다. 이는 105부대 전사들에 대한 기만이였다. 도당은 즉각 회의를 열고 적에게 다시 그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도당호위중대를 17명으로 조직하고 유격부대는 일체 거점주위에 배치하지 않도록 결정했다. 아울러 위원장비서 박문규는 산청군녀맹지도원으로 내려 보냈다. 그 어떤 정황에서도 당의 권위나 명예에 관계되는 일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었다는것을 지금도 나는 긍지로 여긴다. 105부대는 당에서 리탈한후 적정을 전혀 알수 없어 투쟁하려 해도 할수 없게 되였다. 자연히 전사들은 일부 간부들의 옳지 못한 처사에 대하여 알게 되였고 격렬하게 반발해 나섰다. 결국 105부대는 추풍령부근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105부대가 돌아 오자 도당은 전사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당적립장에서 우선 105부대장과 정치위원의 평상시 계급적립장을 재검토했다. 부대를 이끌고 당에서 리탈한 점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그들의 직위를 떨구어 다른 부문에 배치하였고 사상사업을 강화할것이 결정되였다. 저지른 과오를 솔직한 자기비판으로 시정하고 차후 전투의 선봉에 서도록 하는 사상사업이 진행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기들의 과오를 뉘우치기는커녕 비판을 기피하였을뿐아니라 직위가 떨어 진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변절하였다. 두사람은 한밤중에 경남도인민위원장 배명훈의 터(귀틀집형식으로 지은 유격대거처)에 련발총을 란사하고 그 밤으로 산을 빠져 나가 삼장지서에 투항하였다. 이들의 총질로 인민위원장의 련락병이 희생되고 배명훈위원장도 부상을 당하였다. 배위원장은 로동자출신으로 일제때부터 함북에서 일했다. 광복후 당의 파견으로 외국류학을 마치고 전쟁이 시작되자 소환돼 남으로 내려 온 사람이다. 이들의 변절행위를 놓고 나는 많은것을 생각했다. 그래 지금까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단 말인가. 자기 개인의 영달과 안락을 바라고 총을 쥐고 전쟁마당에 뛰여 들었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애초에 애국심도 없었고 당의 위업에 대한 신념도 없었다. 승승장구할 때에는 누구보다 높은 소리로 조국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우자고 부르짖었으련만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전략적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벌써 동요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던차에 직위가 떨어 지고 비판을 받게 되자 즉각 변절했다. 그것도 적들에게 변절을 담보 받기 위해 도인민위원장터에 사격을 가해 인명을 상하게 하고 도주하는 악착한 행위를 한것이다. 한마디로 이자들은 우연분자들이였다. 105부대 부대장 정용세나 정치위원을 하던 자는 신념을 지니기전에 먼저 간직해야 할 인간의 초보적인 의리도 량심도 없었다. 이런 자들은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짐승으로도 되고 새로도 될수 있는것이다. 결국 이자들은 변절하자 바람으로 이번에는 이전의 동지들이였던 유격대《토벌》에 솔선 참가하였다. 당랑거철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자들은 력사의 수레바퀴를 멈춰세워 보려고 헛된 망상을 품은 한마리의 버마재비로 전락한것이다. 남쪽에 있을 때 나는 변절자인 이전 105부대 정치위원이 지리산부근 지방에서 경찰관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희비극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고작 경찰관노릇이나 하려고 동지들을 배반하고 혁명적원칙을 저버리다니. 한마디 더 부언한다면 이런 자들이 경찰관이 되여 활개치는 사회에 그 무슨 정의와 진리가 존재할것인가. 이 사건이 있은 뒤 도당은 대오를 정리하기 위해 군사간부회의를 열었다. 당지도부가 단 하나의 조국에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전사들이 호위하는 거점에 들어 앉아 안일한 생활을 하는 일이 없었던가를 다시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었던것이다. 이 자리에서 도당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변절자들은 투항후 자기 신분을 보장 받으려고 있는 사실, 없는 사실 할것없이 허위날조해 유격투쟁과 군중들을 리간시키려고 하니 일군들은 티끌만 한 결함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생활과 모범을 보여야 한다. 둘째, 간부들은 하부전사들의 순결한 희생정신을 본 받으려는 사상적준비가 되여 있는가를 자기 검토해야 한다. 아울러 하부전사들의 학습을 강화하고 적개심을 제고시키는 사상사업을 전개하여 내부에 더욱 튼튼한 단결을 가져 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조직위원회에서는 의도야 어떠했든 105부대를 안장바위릉선에 배치하여 혼란을 초래한 남경우위원장에게 견책처분을 내리고 중앙에 보고하기로 했다. 그후 105부대 전사들은 잘 싸웠다. 군대란 기계와 같아 지휘관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지만 인민의 군대전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부대장과 정치위원은 변절자였지만 전사들을 변절의 길로 이끌어 갈수 없었다. 그것은 전사들이 자기들이 싸우는 목적, 김일성장군님을 모신 통일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키기 위하여 싸운다는것을 잘 알고 있은때문이였다. 이것이 105부대사건의 전말이다. 나는 자랑으로 될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하여 남쪽에서도 숨기지 않고 썼다. 몇몇 변절자들의 잘못된 지휘로 전투는 실패한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 전투마다에서 우리의 전사들은 자기의 모든것을 전쟁승리를 위하여 바친 영웅들이였다.
전투와 《가갸거겨》, 지리산에서의 송중명
이후 도당이 지휘한 유격투쟁중 우선 이야기하여야 할것이 51년 초봄에 있었던 시천장터전투이다. 산청군 시천면 소재지에 있는 시천장터는 세석평지로 올라 가는 거르미골 입구인데 지리산을 끼고 있음으로 해서 적아간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주요한 요지라 할수 있다. 이때문에 유격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세워 진 견고한 화점에는 총구가 입을 벌리고 전사들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니 시천장터전투는 아주 힘든 싸움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이 전투에 가장 강력한 전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되였다. 선발된 부대는 《호각부대》라 불리우는 부대였다. 그런 이름이 붙은것은 그 부대의 부대장이 아무리 비발치듯 하는 탄우속에서도 선두에 서서 호각을 불며 지휘를 했기때문이였다. 경찰들은 호각소리만 울리면 도망부터 치려 들군 했다. 그 호칭이 하도 유명하여 이름을 미처 알아 두지 못한것이 더없이 아쉽다. 시천장터전투에서도 가장 힘들고 많은 희생이 예견된것은 화점을 파괴하는 전투였다. 이를 위해 결사대를 조직했는데 이중에는 길택이라는 소년과 원산교원대학 로어과 재학중 전쟁을 맞아 정치공작대로 내려 온 최정옥이란 처녀가 한조가 되여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스스로 자진하여 결사대에 망라되였지 결코 명령에 의한 복종이 아니였다. 어린 소년과 처녀가 결사대에 참가하겠다고 나섰을 때 지휘관은 《동무들이 할 일은 따로 있으니 물러 서오.》 하고 그들을 제외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가슴에 품은 뜻이 굳세고 숭고하거늘 누가 그들을 어리다고 투쟁의 뒤전에 세울수 있겠는가.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여 결사대에 망라된것이다. 여기서 길택이 이야기를 잠간 해야겠다. 길택이는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사오촌까지 학살 당한 고아였다. 집도 불 타버린 와중에서 겨우 학살을 면한 길택이는 삼촌집에 가 있다가 전쟁을 맞았고 후퇴시에 사촌형과 함께 입산했다. 그러나 사촌형은 고생을 못 이겨 내려가고 길택이는 홀로 산에 남아 전투때마다 자진해서 결사대에 참가하군 했다. 그날 밤 사전배치되여 있던 박격포부대의 공격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였다. 결사대원들은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를 돌보지 못한채 화점을 향해 비발치듯 하는 탄환속을 기여 올랐다. 갑자기 길택이가 《아이쿠.》 하면서 쓰러졌다. 정옥이가 얼른 끌어 안고 만져 보니 옆구리에서 피가 마구 흘렀다. 정옥이는 옷을 찢어 신음하는 길택이의 피나는데를 싸매주고 《가만히 있어라. 화점을 까부시고 올터이니.》 하는 말을 남기고 계속 기여 올라 갔다. 결사적으로 한치한치 톺아 올라 화점에 거의 닿았을 때 정옥이는 수류탄핀을 뽑아 쥐고 바싹 다가가 화구에 던져 넣었다. 《꽝!》 순간 화점은 불을 멈추었다. 《돌격 앞으로!》 대기하고 있던 돌격부대가 만세함성을 울리며 지서쪽으로 내달았다. 정옥이가 쓰러져 있는 길택이곁으로 달려 가니 길택이는 출혈이 심해서인지 말도 못했다. 바로 그때 전사한 동지들을 옮기는 부대가 왔기에 정옥이는 길택이를 의무부대에 옮겨 줄것을 당부하고 집결장소로 급히 갔다. 지서순경들은 도망쳤고 총성이 멎은 시천장터에는 아직도 화약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무장선전대가 군중들을 모아 놓고 목이 터지게 웨쳤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침략한 미제원쑤들과 그 앞잡이 리승만역도를 쳐부시기 위해 싸우는 유격전사입니다. 인민들모두가 잘 사는 북조선과 같은 인민의 세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하여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전투와 군중사업의 열기속에서 나는 문득 호각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비발치는 총탄속에서도 계속 호각을 불며 전투를 지휘하던 호각부대장이 전사한것이다. 나는 그가 전투를 결속 짓는 마지막 어느 순간에 쓰러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의 유언은 부대가 울리던 승리의 만세소리였다고 할가. 한편 의무부대로 실려 간 길택이는 적탄이 옆구리를 스치면서 갈비뼈 한대만 상해 두어달 있으면 나을것이라는 소식이였다. 시천면에서의 전투가 일단락된후 시천장터에 계속 부대를 배치할수 없는 형편이라 우리는 일단 철수했다. 유격투쟁이란 이런것이였다. 그런데 유격부대라고 해서 매일 전투만 벌리는것은 아니였다. 부대가 전투를 나가지 않고 안전지대에 거점을 잡고 있을 때는 조직적으로 학습을 하였다. 학습시간에는 부대자체가 하나의 학교로 변했다. 반이 편성되고 과목과 강사가 지정되고 교재와 학습장도 지급되였다. 반은 대원들의 학습능력에 따라 상, 하급반, 국문해득반으로 나뉘였다. 상, 하급반에서는 정치경제학, 철학, 항일혁명투쟁사 등의 강의가 진행되였고 정세평가를 위한 신문독보회도 이루어 졌다. 글을 모르는 동지들은 국문해득반에서 가갸거겨부터 배웠다. 전사들의 학습열은 대단했다. 포탄이 비발치는 전투정황에서도 자기 학습장과 연필을 잃지 않으려고 꼭 모자속에 단단히 넣고 다녔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 와 땀에 젖은 학습장을 소중히 펴서 말리군 하던 전사들의 진지한 표정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과연 이들을 《극한 상황속에 하는수 없어 입산한 사람》들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이들을 어찌 타의에 의한 《력사의 희생자》들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그것은 유격전사들에게 가장 가증스러운 모욕으로 될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사명과 임무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더욱 깊이 체득하기 위해 언제나 배우려 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했던것이다. 그무렵 지리산유격대를 섬멸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첩자들이 파견되군 했다. 그중 한 경우를 이야기해 보겠다. 시천장터전투를 마치고 도당이 지리산안의 조개골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자칭 관상쟁이라고 하는 자가 어린 소년 하나를 데리고 올라 오다가 보초선에 걸리였다. 그 근방에 림시터를 마련하고 두사람을 수용하여 조사해 보니 관상쟁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이북출신으로 관상공부를 수십년 하였는데 유격대전사들의 관상을 보아 주려고 왔다는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말을 따로 들어 보니 그는 해군정보부에서 파견한 자임이 분명했다. 그는 오는 도중 구장집에 들려 대접도 받고 구장과 무슨 약속인지 했다는것이다. 뒤에 판명된바이지만 그자는 자기가 관상 보아 준다고 유격대의 거점까지 찾아 들어 간 뒤 소년을 구장에게 내려 보내면 구장이 《토벌》부대에 련락해서 《토벌》부대가 소년을 앞세우고 거점까지 쳐올라 올 속셈이였던것이다. 구장이 사는 부락의 지역조직에서도 그런 사실이 보고되여 왔다. 관상쟁이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자 밤에 도망쳤는데 아주 빠져 나가지 못하고 숲에 숨었다가 우리 유격대원의 손에 붙잡혔다. 그런데 그 대원이 바로 같은 풍산내기로 전쟁 초에 흥남에서 헤여 졌던 송중명이였다. 조국이 통일된 승리의 날에 만나자던 우리의 상봉은 이렇게 이루어 졌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에 돌아 갈 날이 미구에 오리라는 확신을 나누고 헤여 졌다. 그때 풍산소식에 대하여 묻던것이 기억된다. 후퇴의 혼잡속에 내 안해가 어떻게 되였는지 몰라 무척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였다. 이렇게 그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유격대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오히려 걱정하는 성미였다. 하긴 나의 동지들은 누구나 그랬었다.… 관상쟁이를 심문하였고 그자의 정체를 폭로했다. 그자와 같이 왔던 소년은 자기가 리용되였다는것을 그제야 알고 너무 분해서 막 울면서 그놈에게 달려 들었다. 그자는 소년을 유격대에 데려다 준다고 속여서 함께 왔던것이다. 그 소년도 적들에게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 결국 관상쟁이는 처단되였고 소년은 자기의 소원대로 부대에 배치되였다. 그러고 보면 관상쟁이는 우리에게 한 유격대원을 더 보태주려고 온셈으로 되였다.
지리산의 처녀전사들
복잡한 정세들이 뒤엉키는 가운데 도당은 새로운 투쟁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 일환인 마천전투 역시 51년경이였던것으로 기억된다. 마천은 함양군에 있는 면소재지인데 전북과 경남의 도경계이자 남원군과 함양군사이의 군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우에서 보면 저쪽이 남원군 산내면이고 이쪽이 함양군 마천면임이 빤히 보일 정도로 두 면간의 거리는 지척이였다. 마천에서 밥을 먹으면 텁텁하고 산내에 가 먹어 보면 그 맛이 깔끔하다. 음식맛이 이렇게 다른것처럼 경상도사람들은 겉보기엔 무뚝뚝한것 같지만 무뚝뚝함 속에 진실이 있고 전라도사람들은 겉보기엔 세밀하면서도 그속의 참됨이 느껴 졌던것으로 기억된다.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내면깊이 진실성과 순결성이 깃들어 있다고 할가. 여기서 마천의 지형지세를 잠간 설명해 보겠다. 마천면 앞쪽으로는 음천강이 흐르고 아래쪽에는 문정부락이 있다. 그 건너편이 세동부락인데 여기에는 남원과 함양으로 가는 기동로가 있고 요즘 남쪽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뱀사골로 가는 골짜기가 있으며 아울러 산청군 삼장면으로 넘어 가는 길목인 쑥밭재로 오르는 긴 골짜기가 있다. 이처럼 마천은 지리산중심으로 통하는 골짜기들의 입구로서 전략적요지이기때문에 마천지서는 난공불락의 견고한 화점들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마천전투에서 승리하자면 그 견고한 화점을 격파하는 전투가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피어린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이 전투의 화점폭파결사대에 정옥이는 길택이와 함께 또 자진하여 나섰다. 보통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어찌 보면 소녀 같기도 한 21살의 처녀, 가무스레한 살결에 반짝거리는 까만 눈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정옥이의 장하고 용감한 기개에는 남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번은 내가 정옥이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웃으며 말했었다. 《무섭기도 해요.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나는 저놈들이 나를 죽이고 동지들을 죽이고 우리 인민들을 또다시 노예로 만들려고 발악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증오와 격분이 솟아 올라 이를 악물고 화점을 향해 기여 가지요. 그리고 전 임무를 받고 나온 정치공작대원이 아니나요.》 그의 품속에는 공화국 국장이 찍혀 진 파견장이 간직되여 있었다. 사실은 그 파견장이 길택이를 완전히 반하게 했다. 그는 정옥에게서 그 파견장을 본 다음부터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해 주신 누나라고 하면서 거의 숭배하다싶이 따랐다. 정옥이가 하는대로 따라 하려고 애 썼으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파견장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길택이와 정옥이의 친남매 같은 정을 맺게 해준것은 바로 공화국 국장이 찍혀 진 파견장이였다. 길택은 이제 미제와 리승만역도를 몰아 내고 온 나라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면 정옥이처럼 교원대학에 가 교원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다. 정옥은 그처럼 거치른 산생활에서도 길택이의 살뜰한 누나였고 친절한 선생이였다. 이러한 그들이 같이 결사대에 나선것은 이상할것이 조금도 없었다. 계획대로 경찰이 쳐올 가능성이 있는 기동로에 부대의 매복이 끝나고 화점을 맡은 결사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투시작신호가 울렸다. 우리 박격포부대의 선공에 맞서 화점에선 중화기가 미친듯이 불을 뿜었다. 비발치듯 하는 탄우속을 결사적으로 기여 오른 전사들이 화구들을 하나하나 까부신 결과 중화기가 내뿜던 불이 차례로 멎었다. 이처럼 중화기, 경화기들이 미친듯이 불을 뿜고 탄환이 비발치는 속에서 쓰러진 전우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화점을 향해 기여 오를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것일가. 나는 감히 말할수 있다. 그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던것이다. 마지막화구가 뿜던 불을 멈추자 돌격대는 지서로 내달렸다. 이 전투에서 정옥이는 다리에 적탄을 맞아 뼈가 부서졌다. 의무부대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기우뚱거리며 걸어야 하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유격대생활에서 불구자란 참으로 결정적인 타격이다. 유격대원에게는 발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옥은 절대로 산에서 내려 가려 하지 않았다. 어떤 동지들은 자기들의 친척집에 가 있으라, 그러면 친부모처럼 돌봐 줄것이라고 했으나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전 죽어도 산에서 싸우다 인민군대를 맞이하겠어요. 정 내려 보내려면 수류탄을 주세요. 자폭하고 말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바람에 더 권고하지 못했다. 결국 정옥이는 무전반에 소속되여 신문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였다. 그후 정옥이는 한때 무척 우울하게 지냈던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연이 짐작될듯도 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위안 삼아 정옥이답지 않게 왜 그렇게 우울하냐고 물었더니 엉뚱하게도 애인이 있는데 자기를 싫어 하지 않겠느냐는것이였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였다. 자기와 같이 대학에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 나자 인민군대에 나간 총각이 있는데 자기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하였다. 자기도 그를 사랑하는데 이제 전쟁이 끝나서 만난다면 자기 같은 다리병신이 어떻게 그의 짝이 되겠느냐는것이였다. 용감한 정옥에게서 이처럼 락망적인 근심을 발견한것이 우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더욱 정옥이에게 사랑이 갔다. 그래서 내가 정옥이에게 그 동무는 틀림없이 정옥이를 더욱 사랑하게 될것이라는것, 그가 다리병신이라고 정옥이를 버린다면 그는 정옥이의 사랑을 받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것, 이러루하게 위안의 말을 하자 정옥이의 얼굴은 밝아 졌다.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처럼 정옥이는 순진한데도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온 때부터 길택은 짬만 있으면 찾아 왔다. 내가 길택에 대하여 잘 알게 된것은 이로 해서였다. 마천전투에서 숨진 전사들중 신순월이라는 처녀가 있다. 신순월은 전쟁전 함경남도 리원군녀성동맹(이하 녀맹)에서 함흥시녀맹으로 옮겨 일하다가 전쟁과 함께 정치공작대로 남으로 내려 왔었다. 진주까지 나갔다가 입산하여 도녀맹 문교부장으로 있던중 마천전투에 결사대로 참가했다. 순월이는 다른 전우들과 함께 불을 뿜는 화구로 기여 오르다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급박한 전투의 정황에서 동료들은 그 녀자를 내버려 두고 화구를 향해 기여 오를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화점을 까부시고 결사대원들이 순월이곁으로 달려 왔을 때 순월이는 음성은 떨리고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몸으로 일도 못하고 동지들에게 부담만 될것 같아요. 차라리 자폭하겠어요. 승리한 날 저의 고향에 제 소식을 전해 주세요.》 순월이의 손에는 핀을 뺀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신순월은 이렇게 갔다. 그의 고향에 부모가 있었는지 형제자매가 있었는지 애인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비장한 최후를 전해야 할 나는 그때부터 43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에 대하여 알리게 된다. 이때문에 가슴은 더 아프다. 43년간을 기다려 왔을 그의 부모형제들에게 내 무슨 말을 더하랴. 다만 그의 품속에 정치공작대의 파견장, 공화국 국장이 찍혀 져 있는 파견장이 간직되여 있었다는것밖에는… 그 녀성의 찢겨 진 시신을 거두어 묻으며 나는 북에 두고 온 안해를 생각했다. 나보다 열살이나 어린 안해, 고향 풍산에서 함께 자랄 땐 철 없는 누이로만 생각했었는데… 안해의 소식을 최후로 들은것은 50년이 저물어 갈무렵 남으로 내려 온 처삼촌으로부터였다. 안해는 북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유격대심사에 떨어 지고도 안해가 있는 북으로 후퇴하지 않고 산에 남은 나의 처사를 보면 《그 사람은 제 안해도 어머니처럼 내팽개칠지 모른다.》며 혼인을 반대한 장모님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비전투원이라 할지라도 도처에서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는 산생활이 아닌가. 사실 나는 공연히 어린 사람과 결혼해 감당 못할 아픔을 안겨 주는구나 하는 자책감을 늘 안고 있었다. 하지만 정옥이나 신순월과 같은 처녀를 통해 나는 녀성들의 맑은 령혼속에 깃들어 있는 강인함을 보았다. 안해 역시 민족의 고난기를 건전하게 헤쳐 나가고 있으리라는 믿음, 어떤 순간에도 그것을 놓친적은 없었다.
우리를 옳바로 인식하라
지리산에서의 유격투쟁을 회고할 때 가장 곤혹스러웠던것이 날자를 기억해 내는 일이다. 산사이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만발하는가 하면 삼라만상에 흰 눈이 덮여 내리던 자연의 변화만이 뇌리에 남아 있을뿐 어떤 사건이 일어 난것이 몇월 며칠이였는지는 물론 심지어 그때가 서기 몇년이였는지조차 기억해 내기 어려운 때도 종종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추풍령전투 역시 정확한 날자를 기억하기 힘들다. 51년 가을무렵으로 짐작할뿐이다. 당시 경상남도조직위원회는 장거리기동전투를 계획하였다. 지리산에서 가야산, 덕유산을 거쳐 추풍령까지 이동해 그곳을 관통하는 기차굴을 파괴하여 적들의 군수물자조달을 어렵게 한다는 내용이였다. 51년 가을경 경남도당산하 유격부대는 2,000여명에 이르렀던것으로 기억된다. 활동범위 또한 남으로 지리산에서 동으로 가야산, 서로 덕유산을 넘나들었으니 각 도당산하 부대중 가장 활동범위가 넓지 않았을가 싶다. 도당은 추풍령전투계획에 따라 부대를 파견했는데 이 부대는 기동투쟁중 가야지서 등 3개 지서를 한꺼번에 점령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경찰대신 괴뢰군백골부대가 유격대《토벌》을 위해 투입되였다. 추격해 온 백골부대와 유격대는 가야산에서 조우하여 적아간에 밀고 밀리는 전투가 사흘 밤낮으로 계속되였다. 나는 이 전투에서 체포될 위기에 몰린 한 괴뢰군사병이 자살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매주 한번씩 신문에 정황보도를 해왔지만 그런 소식은 처음이였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여 현장에 있었던 전사를 만나보았다. 유격대가 가야산어름을 이동하고 있을 때의 일이였다고 한다. 척후가 백골부대소속 소규모병력이 릉선을 가로 막고 있는걸 발견하였다. 유격부대는 즉시 산개하여 그들을 포위한후 기습으로 제압해 버리고 수색에 들어 갔다. 《벼가 익어 누런 논다랑이에 분명히 두명이 숨어 들어 가는것을 봤는데 아무리 앞엣총을 하고 <손들고 나왓> 해도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겁니다.》 현장에 있었던 유격전사의 설명이였다. 그가 논다랑이 웃쪽으로 가서 내려다 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즉시 공포를 쏘면서 달려 가 보니 논다랑이옆 바위틈에 괴뢰군사병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더라고 한다. 배우에는 엠-1총이 놓여 있었고… 그런 일을 처음 당한 그 유격대원이 당황하여 포로로 잡은 괴뢰군사병에게 리유를 캐물었다고 한다. 대답인즉 이러하였다. 《포로로 잡히면 죽는것보다 더한 온갖 고통을 다 준후에야 죽이니 차라리 잡히기전에 자살하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백골부대가 참으로 지독한 교육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사실 유격대가 전투를 벌리는 목적은 적을 사살하는것이 아니다. 최악의 정황 즉 적을 죽이지 않으면 이쪽이 살아 날수 없는 형편이라면 할수 없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유격대는 기동성을 생명으로 매복하고 적을 포위하여 기습으로 대렬을 흐트러 버린후 되도록 많은 수를 사로 잡는것을 전투의 목표로 하게마련이다. 살륙은 제국주의군대의 고유한 본성으로서 우리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지난 조선전쟁의 전 행정이 이에 대한 명백한 증언으로 된다.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이 자기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감행한 살륙전들을 돌이켜 보라. 그들은 군인뿐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닥치는대로 살해하였던것이다. 인민군의 기습에 죽은 미8군사령관 워커부터가 《설사 그대들앞에 나타나는것이 로인이나 어린이라 할지라도 손이 떨려서는 안된다.》고 떠들었다. 미8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을 력임했던 릿치웨이는 51년 2월 패전을 만회하려는 공격작전을 꾸미면서 그 암호명을 《살인》작전이라 명명하였고 그에 대한 변명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 곧 살인을 의미함을 국민에게 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말은 미제살인장군들의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라.》의 전쟁관점의 부드러운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났으니 포로문제를 살펴 보자. 우리는 포로로 잡은 자들을 무장해제시킨후 사상교육을 실시했는데 간혹 우리의 뜻에 공감하고 생사를 함께 하기를 자원하는 경우 일정한 훈련기간을 거쳐 유격대원으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대부분은 이후 유격대를 적대시하지 않도록 교양을 주어 내려 보내게 된다. 그렇지 않고 유격부대가 포로들을 잡는족족 죽인다면 경찰이나 괴뢰군사병들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격대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것이 아닌가. 유격부대가 되도록 살상을 피하려는것은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포로되면 죽는것보다 더한 온갖 고통을 다 준후에야 죽인다.》고 떠벌인다. 이것은 적들이 지리산유격대에 한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공산군은 악착하게 포로를 살해한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함으로써 자기들 사병들에게 《공산군》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 주고 자기들의 포로학대를 감추려고 애 썼던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자총한 괴뢰군사병이 그 선전의 희생자였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우리 포로들을 어떻게 취급하였던가. 얼마전의 남조선의 《한겨레신문》 1992년 12월 19일부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 볼수 있다. 그것은 거제도의 옛 포로수용소터전에서 인민군포로들을 총기성능시험과 세균무기실험대상으로 삼은 미제의 죄행을 폭로한 문건들을 발견한 내용의 기사였다. 그 기사에 의하면 포로병들은 속옷을 찢어 만든 가로 80센치, 세로 120센치 크기의 광목에 미제흡혈귀들이 국제법을 란폭하게 위반하면서 포로들을 악착하게 학살하고 세균무기, 화학무기, 원자무기 생체실험대상으로 삼은 사실들을 기록하였고 자기들을 이 인간생지옥에서 구원해 줄것을 조국에 절절히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히틀러의 포로수용소 《마이다네크》나 《오스벤찜》이 얼굴을 붉히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명 높은 살인집단인 《731부대》가 중국대륙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감행한 생체실험을 무색케 하는 만행이였다. 나는 부지중 내가 포로로 되였을 때 인민군포로병들이 있는 거제도로 보내라고 놈들에게 요구했던 일을 상기했다. 그때 거제도로 보내졌다면 놈들의 세균무기실험대상이든지 그 어떤 시험대상이 되여 그 죽음의 섬에 묻혔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때 괴뢰군사병으로서는 자총할수밖에 없었다. 후에 말하겠지만 《거창량민학살》이나 《함평량민학살》을 자행한 그들로서는 그 어떤 자비심에 대해서도 생각할수 없었다. 살인자에게는 살인자로서의 척도가 있을것이니 그들의 척도에 의하면 공산군은 그 잔인무도한 학살사건들에 대한 대가를 오직 죽음으로만 받아 낼것이였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는 포로들을 죽이지 않았다. 적들로서는 리해불가능일수도 있다. 그 리해를 위해서는 《반공》의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 가자. 한편 치렬한 전투끝에 유격부대가 가야산 해인사를 점령하였기에 도당은 터를 옮기는 길에 해인사에 들렸다. 사흘동안 낮에는 괴뢰군이 들어 오고 밤에는 유격부대가 들어 오는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 졌던 직후라 그런지 아니면 백골부대사병처럼 유격대 하면 덮어 놓고 사람을 죽이는 패거리라고 알고 있었던지 사람들은 눈치만 보며 슬슬 피하고 아이들도 《빨갱이다.》 소리치며 도망치는것이였다. 심지어 해인사주지까지 숨어 버렸다. 할수없이 선전대가 먼저 나가 사람들과 부드럽게 접촉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인민들이 다같이 잘 사는 통일조국을 위해 미제와 그 앞잡이들과만 싸우는 사람들이다.》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선전대의 역할이 제대로 되였던지 사람들이 무서움증이 가셔 져 서로 만나 이야기도 할수 있었고 절의 주지도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 우리가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교양을 하고 있는데 주지가 와서 부대의 책임자를 찾았다. 그를 도당간부들에게 안내하니 품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을 꺼내 건네준다. 모두들 놀라 물었다. 《왜 이러십니까?》 《이 잔은 해인사의 보물로서 부처님께 술을 부어 올릴 때 쓰는것인데 유격대 대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유격대를 산적떼로 알았던것일가, 아니면 침략자를 물리치고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는 유격전사들에게 무엇인가 성의를 표하고 싶었던것일가. 어느 편으로 보든 어이 없는 일이였다. 《해인사의 보물은 국가의 보물인데 이런 귀중한 물건을 잘 지키지 않고 무슨짓입니까? 우리 유격대는 이런 나라와 인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한 동지가 이렇게 말하며 술잔 받기를 거절했다. 그 꾸짖음이 오히려 주지를 감심케 했는지 그는 《역시 당신들은…》 하면서 연신 머리를 끄덕이는것이였다. 이윽하여 주지는 우리에게 예로부터 산속깊이 있는 절간들은 의병들의 활동거점으로 된적이 많았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 역시 중으로 있으면서 의병투쟁을 적극 돕다가 왜놈들에게 학살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알수 없지만 후에 지리산의 연곡사에 있으면서 고광순의병부대의 활동을 적극 돕다가 왜놈들에게 학살된 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혹시 그의 부친이 아니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말을 통하고보니 승복을 입고 있었으나 통일독립된 조국을 바라는 심정은 우리와 다름 없었다. 그후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정말 애국적인 주지였다고 생각된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수도하는 중이라도 그렇듯 바라는것이 통일조국인데 지금 남쪽땅의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분렬을 꾀하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해인사의 금잔을 거절한 사실이 한입두입 전해 져서인지 린근에서 유격대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달라 졌다. 유격부대는 계획대로 추풍령으로 향하고 도당과 비전투원들은 지리산으로 돌아 와 터를 잡았다. 이때 입산 초기에 변절투항한 전 105부대장 정용세가 경찰부대를 데리고 와 우리 있는 곳을 2중3중으로 포위공격하는 급박한 사태가 벌어 졌다. 정용세와 같은 변절자는 우리가 터를 잡을만 한 곳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유격부대가 장거리기동투쟁을 나갔다는 정보까지 입수한듯 경찰부대의 공세는 동원병력규모로 보나 기간으로 보나 류례없이 강력했다. 도당터에 있던 사람들은 소수 호위중대원들을 빼면 모두 비전투원들이였으므로 우리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 져 일주일이상을 굶어야 했다. 밤이면 경찰의 눈을 피해 감나무(전쟁전부터 지리산에 살던 주민들은 괴뢰군의 소개령으로 모두 쫓겨 났는데 그들이 살던 곳 주변에는 깊은 산중이라도 감나무가 많았다.)를 찾아 가 풋감을 따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가을이 깊었지만 높은 산이라 감들은 여전히 익지 않은채였다. 덕분에 심한 변비로 고통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같은 악조건속에서도 누구 한사람 대오를 떠나지 않았다. 경찰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 우리가 투항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지리산에 자기의 뼈를 묻을지언정 다시는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감수하지 않으며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을 자기의 조국으로 여기고 입산한 사람들이였다. 굶어 죽을지언정 투항이나 변절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열흘나마 지나자 경찰부대는 제풀에 맥이 빠져 물러 가 버렸다. 그 고난의 열흘간이 경찰부대에 우리 유격대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약간은 인식케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추풍령전투와 악양전투 그리고 정옥이의 최후
한편 추풍령에 도착한 부대는 차굴파괴전투를 계획대로 전개했다. 전쟁전부터 산에서 투쟁하던 구호택부대장이 굴속에 들어 가 폭파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서 미제군수물자를 실은 기차가 올 때까지 잠복해 기다리다가 기차가 굴에 들어 가자마자 폭약을 터뜨렸다. 후일 들어 온 정보에 의하면 미제군수물자를 실은 차가 완전히 파괴되였고 굴속을 정리하는데만 15일이상 걸려 그동안 군수물자수송이 완전히 두절되였다고 했다. 계획된 전투를 승리로 마치고 유격부대가 지리산으로 돌아 온후 도당은 하동군 악양지서 기습계획을 세웠다. 부대가 나가 있는 동안 당기관이 당했던 경찰의 공세를 맞받아 치는 동시에 월동준비를 해야 했기때문이였다. 악양면은 마치 소쿠리모양으로 생겼는데 기름진 평야로 가득찬 하동군 제1의 부면이였다. 당시 경남부대산하에는 4개 련대가 있었는데 하동군당유격대가 1련대, 산천군당유격대가 3련대, 진양군당유격대가 5련대였고 각 부대에서 뽑은 인원으로 새로 조직된 덕유산부대가 7련대였다. 각 련대는 3개 중대로 구성되였는데 애초에는 대대라 불리던 명칭이 51년 중순경 련대로 바뀌였다. 51년 11월경에는 총 병력이 2,000여명 가까왔던것으로 기억된다. 정규군기준으로 본다면 결코 련대라 부를만 한 규모는 못되지만 유격부대로서는 막강한 전력이였다. 악양지서기습계획에는 구례에서 동원된 괴뢰군부대를 전남부대가 차단하고 하동에서 올 부대는 3련대가 차단하기로 하고 1련대가 지서점령을 맡았다. 여기서 리해를 돕기 위해 당시 지리산린근의 지서의 모습을 잠시 설명해 본다. 우선 지서는 주변을 대울타리로 이중으로 쌓고 그안에 중화기를 배치한 화점이 있었다. 계획대로 1련대가 악양지서를 포위하고 외부와의 련락선을 끊어 버린 뒤에도 유격대는 지서안의 경찰들과 장시간 대치전을 벌려야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지서후문을 맡았던 1련대 2중대가 지서안에서 굴을 파고 나와 도망하려는 경찰들에게 사격을 퍼부어 퇴로를 막아 버린 결과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경찰들이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했기때문이였다. 정문쪽을 맡았던 1중대가 돌격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유격부대가 사용했던 지뢰는 괴뢰군에게서 빼앗은 60kg짜리 포탄에서 뢰관을 빼버리고 화약을 꺼내 만든것이였다. 그런데 이 지뢰가 말썽이였다. 경찰의 결사적인 방어사격때문에 1중대원들은 지서담까지 도저히 접근하지 못하고 15m 전방에서 지뢰를 터뜨렸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아름이나 되는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지뢰가 너무 셌던것이다. 이 불기둥이 악양면전체를 대낮같이 밝히는 바람에 적아간 모두 돌격은커녕 모습을 드러내고 사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잠시후 하늘높이 올라 갔던 불기둥이 부서져 내리면서 초가집지붕에 떨어 져 온 동네에 불이 나는 바람에 유격대는 전투보다 불 끄기에 더 진력했다. 인민의 재산이 타는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수 없었던것이다. 혹시 전투의 승패가 더 중요치 않은가 누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수가 없다. 다만 그때 명심했던것은 유격대는 어떤 정황에서건 인민의 생명재산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괴뢰군《토벌대》가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왔고 악양지서를 포위했던 유격부대는 별 성과없이 물러 나야 했다. 악양전투에서의 괴뢰군《토벌대》투입은 51년 말부터 52년 초에 걸친 적들의 대공세의 서막이기도 했다. 악양전투후 부대를 정비하고 있을 때였다. 삼장면 대포리에서 열세살 먹은 소년이 경찰 한명을 사살하고 산으로 유격대를 찾아 올라 온 놀라운 사건이 일어 났다. 취재차 소년을 만나보니 사연은 이러했다. 소년이 살고 있는 대포리는 지리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이기때문에 마을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수시로 경찰이 와서 산사람과 련락했다면서 애, 어른 할것없이 때리고 차고 하는 바람에 산에 올라 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숨도 크게 못 쉬는 형편이라 했다. 그러니 경찰이 오면 울며 겨자먹기로 닭 잡고 돼지 잡아 술을 대접해야 했고 돈이 없으면 빚을 내다가라도 잔치를 베풀어 줘야 했다는것이다. 게다가 산에 올라 간 사람이 있는 집에서는 얼굴이 반반하면 색시고 처녀고 할것없이 유린 당해도 아무 대항도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는것이였다. 이것은 그무렵 유격대지역 주민들이라면 례외없이 당해 온 고초였다. 그날도 경찰들이 왔기에 마을사람들은 억지춘향으로 잔치를 차렸다고 한다. 경찰들은 총을 한쪽에 모아 세워 놓고 술에 취해 떠들어 댔다. 소년은 지난번에 자기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이 경찰에게 즉살하게 맞던것을 생각하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구장과 반장이 자기 아버지를 때리던 자에게 슬슬 기며 아첨하는 꼴을 보니 분이 벌컥 치밀어 한쪽에 세워 놓은 총을 집어 들고 냅다 쏘았는데 그놈이 푹 쓰러지기에 총을 쥔채 산으로 도망쳐 올라 왔다는것이다. 도당은 어린 가슴에 총을 지니게 한채 부대에 배치했다. 한편 장대골 산죽밭근처에 거점을 잡고 있을 때 가슴 아픈 일이 일어 났다. 악양전투이후 점점 심해 지는 경찰《토벌대》의 포위공격으로 가지고 있던 식량이 모두 떨어 져 버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굶으면서도 자기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벌대》의 포위공격이 급박해 져 신속하게 이동해야만 할 정황이 벌어 졌다. 공교롭게도 이때 정옥이는 심한 열병에 걸려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위독한 상태의 정옥이를 옮겨 갈수가 없어서 산죽밭에 은페시키고 당부했다. 《토벌대가 접근해도 절대 인기척을 내지 말고 있어라. 밤에 와서 데려 가겠다.》 그러자 열이 심해 혼수상태에 있던 정옥은 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절 죽이고 가세요. 그리고 이 파견장을 중앙당에 바쳐 주세요.》 그는 파견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가만 숨어 있거라. 살아서 끝까지 싸워야지.》 돌아서 떠나는 나에게 정옥은 소리치는것이였다. 《선생님, 왜 이렇게 무능합니까. 왜 나를 돌아 가신 어머니곁에 못 보냅니까.》 그 말은 나의 가슴을 에이는듯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말로 될줄이야. 그날 밤 한밤중에 다시 산죽밭을 찾아 갔다. 그런데 《토벌대》들이 불을 질러 온통 불 타버린 산죽밭에는 정옥이의 앙상한 해골만이 남아 있었다. 슬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광경이였다. 용감하고 다감하기도 했던 정옥이는 이렇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정옥이의 유해를 땅에 묻으며 나는 그에게서 애인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 두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이 모든 고난의 시기가 끝나면 정옥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을 찾아 내여 눈물을 흘리며 정옥이의 사랑과 견결한 투쟁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보다 거의 15년이나 나어린 그가 먼저 갈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어릴적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는 정옥이, 대학생이 되였을 때 눈물을 흘렸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이제 전쟁이 끝나고 통일조국에서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것을 보면 아버지가 또 우실거예요.》 하고 말하던 처녀였다. 나는 그의 무덤앞에서 부르짖었다. 《지리산을 잊지 말라. 그 산의 줄기줄기에 조국과 민족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안고 숨져 간 이 나라의 장한 딸들이 잠들어 있다.》고. 불속에서 떠나간 정옥이의 마지막모습은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하다.
리현상부대
정옥이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고 있을 때 리현상부대가 온다는 련락이 왔다. 유격대생활에서 새로 부대가 온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중에서도 기쁜 소식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나는 별로 큰 기쁨으로 리현상부대를 맞이하지 못했다. 정옥이를 잃은 슬픔때문이였을것이다. 리현상부대가 온 날밤 차후투쟁방향을 토론하기 위해 경남도당의 군사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나는 신문편집을 하고 있는 까닭에 그 자리의 말석에 끼워 앉았다. 토의의 주제는 경남도당산하의 유격부대와 리현상부대가 합동투쟁을 할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진지한 토론이 전개되였다. 우선 전쟁전부터 지리산에서 싸워 온 구유격대동지들과 남경우 경남도당위원장은 합동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리현상의 혁혁한 전과들때문인것 같았다. 사실 리현상은 해방전부터 서울에서 잘 싸운 사람이였다. 서울콩크룹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1차 남진때는 거창, 함양, 합천 등지에서 적군의 렬차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놈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도 거두었다. 대구근방의 미군무선전신대 기습, 창녕군에 있던 미군사령부습격, 전주시의 씨아이씨본부와 형무소습격사건 등으로 지리산유격대원들속에서는 물론 이 지대 인민들속에서 《유격대영웅》으로 불리워 온 동지였다. 그의 부대는 적후전선부대와 함께 북상하다가 다시 소백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여 대오를 확산하고 미국제무기며 복장이며를 원만히 갖추고 있어 부대의 전투력이며 사기가 높아 있었다. 구유격대동지들과 남경우위원장을 비롯한 적지 않은 동지들이 이들과의 합동투쟁을 추구한 원인이 여기 있었다고 보아 진다. 이에 대해 허동욱경남도당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리유로 합동투쟁을 강력히 반대했다. 첫째, 사회주의국가에서 군대는 당의 지도하에 있는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각 도당산하에 있는 유격대들을 당에서 떼여 내여 리현상동지의 남부군이라는 순수 군사조직에 모두 소속되게 하는것은 당과 유격대를 분리시키는 결과가 되며 원칙적으로 옳바르지 않은 일이다. 둘째, 유격대는 불리한 정세속에서도 지형지물을 리용해 소부대활동을 함으로써 정규군에 대항하는 부대이다. 남부군이 각 도당산하 유격대를 흡수해 합동작전을 하겠다는것은 소부대투쟁대신 정규군과 같은 대부대투쟁 즉 진지전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러한 무모한 시도는 유격대에 엄청난 희생을 가져 올것이다. 경남도당의 나머지 군사간부들과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하여 나섰는데 남경우위원장이 끝내 자기 의견을 고집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회의를 마치게 되였다. 아마 경남도당 군사간부들의 회의내용이 리현상동지에게도 전달된 모양이였다. 얼마후 그 부대 정치부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 와 《내용을 검토하겠으니 <경남도당신문>의 편집내용과 자료를 보여 주시오.》라고 하였던것이다. 나는 선뜻 응할수 없었다. 《그런 일은 관례에 없는 일임을 동지도 알지 않습니까?》 《이건 총사령관의 지시요.》 《당중앙의 지시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보여 줄수 없소.》 《아니, 이 동무가?》 《내가 산에 들어 온것은 언쟁하러 온것이 아니니 그만 둡시다.》 그가 이 과정을 그대로 전했던지 리현상은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했던것 같다. 그후 충남북, 경남북, 전남북, 6개 도당 경험교환회가 있었는데 그때 리현상이 나에 대한 말을 하더라는것이였다. 《경남도당에서 신문편집하는 리 아무개는 왜 그리 태도가 불손하오?》 허나 이것은 그와 나사이의 개인감정일뿐이다. 나의 감정이 어떠했든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떠했든지 그는 열혈의 투사, 혁명에 철저한 동지였다. 그후에도 동지는 지리산과 소백산줄기의 험한 산발을 넘나들며 적들을 유인, 매복, 기습, 소탕하는 유격투쟁을 힘 있게 벌려 조국해방전쟁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53년 9월 정전이 된지 달포가 지난 어느 날 동지는 지리산 빗짐골에서 불의에 맞다들린 적《토벌대》와의 힘겨운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8살이였다. 수만금의 현상금까지 걸고 날뛰던 《토벌대》는 동지의 시신에서 목을 잘라 내여 그의 고향마을에 매달아 놓고 그가 전사한 곳에는 《공산비적 리현상이 죽은 곳》이라는 말뚝까지 박았다고 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때 일을 생각하며 가슴이 몹시 아파옴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비록 전사했으나 리현상동지와 그의 부대 전사들은 통일성업과 혁명위업에 몸을 바친 우리 당의 일원으로 력사에 솟아 오르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 와 전 지리산유격대 대장이였던 리현상동지와 그 유가족에게 베푸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신임과 배려에 대하여 듣고 감격의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우선 그의 아들딸 4남매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극진한 보살핌속에서 아버지의 뒤를 잇는 훌륭한 인재들로 자라났다는 소식이 나를 무척 기쁘게 하였다. 그의 자녀들은 당의 배려로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외국류학을 갔다 오기도 했고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와 중앙의 여러 기관에서 일하였거나 일하고 있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51년에 벌써 리현상동지에게 국기훈장 제 1급을, 19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2급을, 1953년 2월에는 공민의 최고영예인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시고 적구에 있는 그에게 훈장의 략장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푸시였다.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1990년 8월에 그에게 또다시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시고도 마음이 놓이시지 않아 10년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안해 리문기녀성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된 남편의 묘에 합장하도록 은정 깊은 조치를 취해 주시였다. 그 뉘가 지리산에 묻힌 우리 동지들을 두고 《력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무참히 흩어 져 버린 불쌍한 령혼들》이라고 하고 있는가. 지리산의 영웅들과 함께 한나산과 태백산, 오대산과 덕유산의 유격전구와 항쟁의 거리에 붉은 피 뿌리며 장렬하게 희생된 유명무명의 용사들, 감옥과 단두대에서 굴할줄 모르고 싸워 온 동지들의 넋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넓은 품속에서 영생하고 있으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산 사람들로 간직되여 있다.
남녘동지들의 마음
51년도 겨울로 접어 들어서였다. 겨울은 유격대에게 가장 괴로운 계절이다. 보급도 보급이려니와 울창한 수목들이 잎을 떨구고 나면 엄페물들이 사라져 《토벌대》의 공세가 시작되군 하기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 심상치가 않았다. 각 릉선마다 전화줄이 거미줄처럼 늘여 지는 등 괴뢰군의 공세준비가 눈에 띄게 진행되고 있을 때 지방조직에서 정보가 들어 왔다. 전선이 고착상태에 있는 틈을 타서 일선의 괴뢰군부대들이 유격대《토벌》을 위해 투입될 징조가 뚜렷하다는것이였다. 게다가 갑자기 열병환자가 늘어 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대성골에 있는 환자터로 옮겨 져 치료를 받았다. 환자터란 땅을 가지런히 고른 다음 가운데에 뻬치까를 놓고 그우에 산죽이나 싸리, 억새풀 등을 깔고 천막을 덮은것으로 옆으로는 나무를 삼각형모양으로 기대여 놓아 눈비를 피하는 동시에 시설자체를 은페하였다. 환자들의 병세는 심각했는데 진주출신의 의사로 당시 경남도의 의무과장이였던 양기출은 그 병이 재귀열이라고 하였다. 미군이 대공세를 앞두고 세균탄을 써서 유격부대에 재귀열이 급속도로 퍼졌다는것이다. 얼마후 예상했던대로 괴뢰군의 공세가 시작되였다. 놈들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지리산전체를 포위하다싶이 하면서 올라 왔다. 골짜기의 큰 바위틈에 싸리나 산죽을 펼쳐 놓은데를 집 삼아 살고 있던 입산주민(전쟁을 피해 산에 올라 온 피난민)들은 아침밥을 지어 먹다가 연기를 겨냥한 전투기들로부터 기총소사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도당의 거점은 칼바위골이였는데 낮이면 괴뢰군이 골짜기를 이 잡듯이 뒤지기때문에 모두 중턱 바위틈에 박히거나 숲속으로 피하였다. 나는 그때 몇몇 동지들과 함께 산중턱바위틈에 생겨 난 동굴속에 피해 있었다. 밖에서 보면 동굴이 있는지 없는지 도무지 분간할수가 없는 점은 좋았으나 말이 동굴이지 앉으면 천정까지 높이가 30cm정도나 남을가. 게다가 먹을 식량까지 떨어 져 우리들의 처지는 한심했다. 눈이 내리기전까지는 그래도 도토리나 산열매 같은것을 주어서 쪼르륵거리는 배를 잠시나마 달랠수 있었지만 괴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눈이 내려서 그것마저도 얻을수 없는 형편이였다. 밤이 되자 함께 피신해 있던 조영래동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른 동지들에게 호주머니를 뒤집어 비상식량을 모아 보라고 했다. 모두들 호주머니를 터니 쌀도 아닌 겉보리가 두어줌 나왔다. 다들 굶고 있는 형편이니 그것을 조금씩 나누어 주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조동무는 그 겉보리를 모두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북쪽출신이라 부락에 아는이도 없고 말씨도 다르니 앞으로 제일 곤난할거요. 급할 때 그거라도 씹으시오.》 내가 선택한 삶의 현장, 지리산에서 남쪽출신의 동지로부터 전해 받은 그 진실한 마음을 내가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그후 캄캄한 독방에 갇혀 한두해도 아닌 수십년, 가족이 없으니 편지가 없고 편지가 없으니 회답도 할수 없는, 그야말로 꼼짝 못하고 당국에서 주는 밥덩이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고통스러운 지옥살이동안 나는 간간이 조영래동지의 진실이 깃든 겉보리를 생각했다. 비록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따뜻한 동지애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 차거운 감방에 불을 지펴 주는듯 하였다. 동굴속에서 열흘은 버텼을가. 괴뢰군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기에 살금살금 기여 나가보니 릉선우에는 괴뢰군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함정이 아닐가 의심하며 기여 올라 가 보니 멀리 바위우에 젊은 녀인이 하나 오도카니 앉아 있는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배숙환이였다. 그 역시 전쟁이 일어 났을 때 의용군으로 지원한 처녀였다. 그는 남해려단에 배치되여 남해전선에서 처녀의 몸으로 잘 싸웠다. 9.18미군인천상륙이후 인민군대의 전략적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남해려단장과 함께 부주 구현동까지 후퇴했다가 51년 봄 다시 경남도당산하의 유격부대로 돌아 왔다. 자기 고향땅을 미국놈들의 손에서 해방하자는 뜻을 품고 무용가이자 가수인 최순이라는 처녀와 함께 왔는데 그들 둘은 똑같이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하고 발랄한 처녀들이였다. 여기서 배숙환의 사람됨을 알수 있는 일화를 하나 이야기하자. 유격대의 한 지휘관이 허동욱부위원장을 찾아 와 배숙환과 결혼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허동욱은 아무리 산생활이라도 사랑을 배제할수는 없는것이고 이모저모로 다루기 곤난한 문제이기도 해서 그에게 《본인과 직접 이야기해 보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이에 그 지휘관은 배숙환을 불러 직접 사랑을 고백했다는것이다. 배숙환은 그의 고백에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잘라 말했다고 한다. 《제가 입산한것은 미국놈과 리승만역도와 싸우기 위해서지 결혼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지금 전사들은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동지는 어찌 결혼할 생각이나 하고 계십니까?》 배숙환의 이 말에 그 지휘관은 다시 그런 문제를 입에 담지 못했다는것이다. 유격대에서 높든 낮든 지휘일군이라고 하면 처녀들이 존경하며 바라보는 대상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그앞에서도 주저없이 자기 의사를 똑똑히 밝힌 배숙환이야말로 기개 있는 조선녀성의 표본이 아닐가. 나는 대중들이 권력을 가진이들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자기 주장을 펼수 있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일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회일수록 대중의식은 더욱 높아 져서 개인주의나 리기주의, 특히 권위주의는 결코 발 붙이기 어려울것이다. 남조선땅의 작은 한 구석이였으나 지리산의 유격대지역은 바로 그런 사회였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무지와 유혹, 강요의 희생물일수 있겠는가.… 배숙환이 그 지휘관을 사랑하면서도 투쟁을 위하여 멀리했던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에게는 자기 개인의 생활보다 조국의 운명이 더 귀중하였다. 조국의 운명, 전쟁승리밖에는 더 생각지 않았다. 얼마후 괴뢰군이 포위를 푼것으로 판단한 우리들은 저장해 둔 비상미중 마지막 남은것을 운반해 오기로 했다. 그때 우리 동지들은 각자 은신한 곳에서 가지고 있던 겉보리를 씹다가 그것마저 떨어 져 며칠째 굶고 있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비상미운반조에 자진해서 나선 배숙환이 비상미를 숨겨 둔 곳 부근에 매복해 있던 괴뢰군의 탄환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저는 이제 죽지만 조국의 흙이 되여 영원히 조국과 함께 있을것입니다.》 숨지기전 배숙환의 마지막말이였다. 지리산에 묻힌 이런 마음들을 허무와 회의의 무덤에 몰아 넣는것은 변절자들만이 할수 있는것이 아닐가. 나는 그 마음들을 대신하여 웨치고 싶다. 이 땅의 아름다운 넋의 한 부분을 더는 모욕하지 말라고…
전률의 기록들
1951년 2월 어느 날 나는 신문편집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나선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하동으로 가고 있었다. 산청군 시천면 거르미골 막바지에서 다시 대성골을 넘는 산비탈을 오를 때였다. 숲속 바위사이에 시체가 하나 있었다. 무명홑바지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농군이였다. 쓰러진 가슴팍에는 피가 엉켜 붙어 있고 꺼멓게 색이 변해 있어 죽은지 꽤 시간이 흘렀음을 알수 있었다. 해볕에 그을러 검게 탄 농군의 얼굴을 침통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던 함경도출신 안용춘동지가 그를 묻을 준비를 했다. 우선 눈을 치웠다. 땅을 팔 연장이 없어 움푹한데서 돌을 뽑아 주어 내고 시체를 옮겨 뉘였다.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 때까지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이름 없는 농군의 무덤앞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오래 머리를 숙이고 서 있었던지. 바로 이런 잔인한 살륙을 례상사로 감행한 괴뢰군들이였기에 가야산어름에서의 《백골부대》사병처럼 자총하는것과 같은 기이도 빚어 낸것이 아니겠는가. 무엇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자신도 모르며 동족의 손에 무주고혼이 되였을 그 농군의 무덤앞에 우리가 서 있을 때 뒤따라 올라 온 한 동지가 그 농민이 혹시 거창에서 괴뢰군들의 대학살에서 빠져 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전 거창에서의 잔인한 학살만행을 목격한 동지였다.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무도하여 믿어 지지 않을 지경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였다. 거창에서의 대규모학살사건은 바로 우리가 이름 없는 농군의 무덤앞에 서 있던 때로부터 며칠전인 2월 10일에 감행되였던것이다. 당시 산청군 오부면에 있던 산청군당유격대가 지맥을 타고 신원면에 들어 와 경찰들을 습격하여 일부는 소탕하고 일부는 거창으로 쫓아 버렸다. 신원면일대는 일시적으로 유격대세력권내에 있었다. 소위 《화랑사단》으로 불리우던 괴뢰군 제11사단 9련대 3대대가 신원면 과정리에 밀려 든것은 1951년 2월 8일이였다. 유격대전법이 그러하듯이 그때 우리 동지들은 벌써 대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전투라면 퇴각도중 산청에서 접전이 좀 있었을뿐이다. 놈들은 유격대《토벌》로부터 량민《토벌》로 이전했다. 2월 10일, 괴뢰군 3대대는 이 지대의 6개 부락이 유격대와 내통하였다는 당치 않은 리유를 걸어 청장년 136명을 붙들어서 린근의 박산골로 끌고 가 기총사격으로 사살하였다. 그 다음날인 2월 11일에는 이 지대에 남아 있던 주민 거의 모두를 피난시킨다는 명목으로 신원국민학교 마당에 모여 놓고 그중 괴뢰군, 경찰, 공무원가족들만 가려 내고 그 나머지를 모두 깊은 산골짜기로 끌고 가 사살해 치웠다. 이날에 죽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늙은이들과 녀자, 어린이들이였다. 후에 알려 진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 량일간에 사살한 수가 무려 719명에 달한다고 한다. 놈들은 700구가 넘는 시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놓았고 그옆 산비탈을 폭파하여 그 흔적을 메워 보려 하였다. 이것은 그 어느 민족의 전쟁사에도 찾아 보기 힘든 가장 잔인하고 비렬한 학살행위였다. 분명 이 사건은 미국이나 그를 추종하는 리승만괴뢰《정권》이 우리 민족전체를 전쟁의 대방이나 적으로 삼았다는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놈들은 이 비렬한 사건을 흑막속에 덮어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 사건이 문제시되자 당시 《국방부》장관이였던 신성모란 자는 량민학살이 아니라 《공비토벌》이였다고 진상을 외곡하고 내부적으로는 이 사건의 묵살을 지시하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11사 사단장이란 자는 《상식에도 어긋나는 그런 명령을 내릴탓이 있는가.》라는 한마디말로 그 책임에서 발뺌을 했고 진상해명이 국내외적으로 더욱 여론화되고 조사단이 무어 져 현지조사가 진행되자 놈들은 유격대로 가장한 군대를 매복시켜 사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단입산을 파탄시키는 비렬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비등되는 반《정부》기운에 바빠난 당국자들은 그해에 다시 대구에서 재판놀음을 벌려 놓고 련대장과 대대장은 사형, 누구누구는 10년, 7년 등의 징역형을 언도하였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피고인들전원이 1년 남짓해서 석방되였고 그중 김종원이란 자는 전북경찰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까지 승진했다는것이다. 류혈참극, 719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간 살인자들중 처형된 자는 한명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들이 합법화된 명령에 의해서 행동했다는것을 의미한다. 살인명령은 누가 떨궜는가. 다름아닌 미국이였다. 재판과정에 한 피고가 《작전수행중 미수복지역에 남아 있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총살하라.》는 명령 5호에 따라 집행했을따름이라고 증언한데서 그 흑막의 리면을 여실히 볼수 있다. 전쟁 초입부터 미주둔군사령관이 괴뢰군통수권을 쥐고 있었다는건 기정사실이고 명령서의 취지, 성격이 신통히도 력대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들과 꼭 같다는 점이다. 1948년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터졌을 때 그 지역 미군사령관 브라운대령은 《원인은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하며 《해안선으로부터 4km 떨어 진 지점부터 적지로 간주하라.》는 명령서를 떨구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해안선에서 4km 떨어 진 곳에서 발견된 사람은 로인, 아이, 녀인을 가림없이 적으로 간주하고 사격을 하라는 소리인데 《작전수행중 미수복지역에 남아 있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총살하라.》는 명령서와 일맥상통한데가 있다. 남조선의 군복 입은 무리야말로 미국의 의지, 미국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철저한 꼭두각시였다. 그들은 미국제무기의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불과했다. 그자들에게는 괴뢰군이라는 이름이외에는 다른 이름이 있을수 없다. 이것은 가증스럽기보다 슬픈 일이며 조선민족의 수치이다. 제2의 거창사건으로 알려 진 《함평량민학살사건》은 그 진상이 더욱 처참했다. 놈들은 수백명의 주민들을 한곳에 운집해 놓고 기관총으로 사격한 다음 《너희들중 살아 남은 자 있으면 그건 하나님의 은총이니 돌려 보내겠다.》라고 해서 일궈 세워 놓고는 또다시 사격을 했다. 이런 식으로 몇번 반복하여 《씨를 말리운것》이 함평사건이다. 그뿐이 아니다. 괴뢰군 11사단 9련대 3대대는 거창으로 들어 가기전인 2월 8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로인, 부녀자, 미성년자 183명을 학살한데 이어 다시 가현, 접천 등 8개 마을 주민 380여명을 금서면 방곡리의 논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으며 린접한 함양군 류림면 서주, 손곡, 지곡 등 3개 마을에서도 370여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당시 놈들의 학살만행이 어떤 극점에 닿았던가는 그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지리산린근마을들에서는 한날한시에 제상을 지어 놓고 곡성을 터뜨리군 하는 집들이 100, 200세대정도가 아니라는것으로도 짐작할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 남편을 잃은 녀인들, 자식들을 잃은 로인들… 지리산기행을 마친 한 문사는 《나로서는 이곳 지리산이 울음주머니인것처럼만 느껴 진다.》라고 쓰기까지 했다. 세상을 경악케 할 이 사건들은 사건의 당사자들이 거의 생존해 있지 못한데다가 그의 유가족들조차 사대매국세력의 《반공》력으로 말 한마디 할수 없어 지금까지 과거의 어둠속에 파묻혀 왔다. 이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많은 사람들이 《용공》분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무고한 죽음을 당한 자가 죄인으로 되고 살인자가 《정의》로 되는것이 오늘의 남조선사회이다. 그러나 력사는 공정한것이다. 그 전률의 기록들은 무척 더디게나마 한페지 두페지 들추어 지며 사건의 진면모를 드러내주고 있다. 이 사건들의 진상에 대해서는 이미 남쪽의 여러 출판물들에도 적으나마 실렸으며 《무지와 권력의 야수화》라고까지 특징 지었다. 내외에 이미 알려 진 사실이기에 나는 남에서 쓴 수기에서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수기를 다시 쓰면서 학살만행에 대하여 언급하는것은 요즘 남조선당국자들의 너무도 파렴치한 랑설때문이다. 나의 동지들인 김인서, 함세환에 대한 송환요구에 《량민을 학살한 범법자》들이기에 돌려 보낼수 없다는 이남당국자들의 궤변에는 의분을 참을수 없다. 문자 그대로 적반하장격이다. 거창사건이나 함평사건을 《빨갱이의 소행》으로 꾸며대려다가 들장난것이 언제인데 또 이런 장난을 하는것인가. 그자들의 파렴치에는 한계가 없다. 언제인가 가서는 수천의 애국적시민들을 학살하여 도시전체를 《피의 목욕탕》으로 화하게 한 광주학살만행도 《북의 소행》으로 날조하지 않겠는가. 너무하다. 실로 너무하다. 바로 그런 거짓을 위하여 그자들은 남녘의 천하에 《반공》의 독초를 심어 놓았다. 무지와 편견이 만들어 냈고 미국산, 일본산 비료로 키워 낸 《반공》의 독초, 나와 나의 동지들은 바로 그 독초를 뿌리뽑으려고 싸웠고 피를 흘렸다.…
남녘의 동지들이 즐겨 청한 이북이야기
이름 없는 농군의 시체를 묻고 우리일행은 다시 높은 령 숲속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 모두 굶고 있을 때 권영태동지가 공작갈 때 쓰려던 최후의 비상미를 탈탈 털어 내놓았다. 그것으로 죽을 끓여 저녁을 때우고 아침에는 무전반에서 무전기를 돌리는 동지들에게 남은 쌀을 모두 넘겨 주고 떠나온 우리들이기에 배에서는 계속 쪼륵쪼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허덕허덕 산길을 오르다 숲속에 앉아 쉬는데 난데없이 콩볶듯 한 총성이 요란하다. 모두 신경을 곤두 세워 여기저기를 살필 때 정영섭동지가 살살 기여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는 하동군에 파견되여 악양면당에서 사업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총화를 위하여 산으로 돌아 오는 길에 괴뢰군잔여부대의 매복에 걸려 죽을번 한 고비를 용케 넘기고 빠져 나오는 길이였다. 권영태동지가 쫓아 나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거기 있지 말고 숲속으로 빨리 들어 오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그들은 부둥켜 안은채 기여 들어 왔다. 정영섭동지가 묻는다. 《이번 놈들의 공세로 하동군당은 분산되고 련락선에도 나오지 않아 군당에도 못 들리고 오는데 동지들은 어디로 가오?》 취재를 위해 하동에 가는중이라고 했더니 선이 끊어 져 찾을 길이 없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걱정한다. 《점심들은 먹었소?》 하고 정영섭동지가 또 묻는다. 《점심이 다 뭔가.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점심 같은 소리하네.》 배 고픈중에서도 그 대답에 박장대소하는 우리들앞에 정동지는 배낭을 끌러 인절미 세개를 내놓는다. 면당에서 사업하는 동지가 할아버지 제사날 집에 가 제사를 지내고 그 제물을 가져 왔다는것이다. 조금씩 쪼개여 똑같이 한쪽씩 입에 넣으니 그 쫄깃쫄깃한 맛이란!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던가 싶다. 작은 떡쪼각을 씹어 넘기니 렴치도 없이 더 먹고 싶던 그때의 심정을 무어라 표현할수 있을것인가. 《그게 다요. 적기는 했지만 값은 내셔야 하오.》 정동지가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다. 정영섭동지는 항상 위험하고 힘든 일은 제가 다 도맡고 헐한 일은 다른 동지들이 하게 하는 말 없고 부지런하며 희생적인 동지였다. 지난 여름 식량이 떨어 져 며칠을 굶다가 할수없이 증산뒤로에서 입산주민들을 교양하고 있던 그를 찾아 갔던 일이 있다. 우리가 굶고 있으니 방법이 없겠는가 했더니 그는 입산주민들에게 《나의 집은 하동인데 소 한마리를 우선 주면 꼭 갚겠다.》고 채용증서를 써주고 소를 얻어 주었다. 내가 펄쩍 놀라며 당신 혼자서 그걸 어떻게 물어 주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그런 걱정은 말고 그 대신 자기와 입산주민들한테 이북이야기나 해달라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산나물을 캐여 넣고 고기국을 끓여 먹으며 위기를 면할수 있었고 밤늦도록 북쪽땅에서의 평화적건설시기의 광복후 5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지금 그가 미리 빚 지우는 《값》인즉 또 이북이야기를 해달라는 소리다. 그만이 아니라 남쪽출신 동지들은 이북땅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 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 생활이 바로 그들이 목숨 바쳐 얻으려는 생활이고 그들이 통일조국에 세우려고 결심한 인민의 세상인데야. 그때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이야기를 펼쳐 놓군 했었다. 《암, 물론 값을 내야지.》 하고 대답해 주는데 하동군당위원장 목영일동지가 련락원을 데리고 우리쪽으로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우리가 인기척을 내자 련락원은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태세이고 목영일동지는 우뚝 서버리는데 돌로 굳어 진 사람 같았다. 정영섭동지가 얼굴을 내보이며 손짓하니 목동지는 삽시간에 긴장이 풀려 싱긋 웃는다. 그는 자폭하기 위하여 손에 쥐고 있던 수류탄을 도로 넣고 뛰여 와 정동지를 덥석 껴안았다. 목영일동지는 놈들의 대공세에 피해를 입은 다음 대성골의 험한 산죽밭에 군당거점을 옮기고 끊어 진 련락선을 잇기 위해 최후비상련락거점으로 가는 길이였다. 정동지는 이 정황을 알리려 다시 도거점으로 떠나가고 우리는 목동지를 따라 대성골로 떠났다. 험한 산발을 타고 눈속을 헤치고 그들이 옮긴 거점에 도착하니 전사들이 큰 바위에 의지하여 모닥불을 지펴 놓고 무기소제들을 하며 코노래에 맞추어 발장단을 밟고 있었다. 기세들이 죽지 않은 전사들을 감동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섰는데 목영일동지가 우리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끼니를 번졌을거라고 하니 전사들은 거침없이 배낭을 헤쳐 겉보리 몇줌을 내여 준다. 그것을 정신없이 입에 넣어 맛 있게 씹으며 허기를 면하고 나서야 나는 그 겉보리가 그들의 저녁거리임을 깨달았다. 자기 배 곯을 일은 생각도 않고 굶고 있는 동지를 우선 먹인 그 아름다운 인정앞에 새삼 머리가 숙어 졌다. 때투성이의 떨어 진 옷, 숯검댕이에 그슬린 얼굴들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죽음도 각오한 유격전사들이구나 하는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이들이 무엇때문에 산중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이렇게 싸우고 있는가. 북과 같은 정치, 북과 같은 세상을 그리며 자신들은 싸우다가 죽어도 자식들이라도 그런 세상에 살게 하려는 념원에서 비롯한 각오가 있기때문일것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모닥불을 쪼이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로 된것은 이번 괴뢰군의 공세에 대한것과 전쟁정세 그리고 나의 북도말씨를 알아 듣고 청한 북에서의 5년간 생활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아마 흥남비료공장 지배인 공부시키던 이야기를 했었던것 같다. 한 동지가 《남의 일 같지 않소. 나도 공부는 잘하는 축이 못되는데.》 하여서 모두 웃었던것이 기억난다. 나는 토지개혁때의 이야기도 했다. 그러자 다른 한 동지는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소. 짧긴 하지만.》 하고 싱그레 웃었다. 남녘동지들이 자주 청하고 즐겨 듣던 이북이야기, 그 이야기를 꿈 꾸듯이 미소를 지으며 듣던 그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연하다. 아, 그들중 한 동지만이라도 이 북쪽땅에 나와 같이 올수 있었더라면!…
지리산의 밤
《남부군》과 《지리산》의 필자들과 지리산유격대에 대한 텔레비죤극을 만든 사람은 지리산유격대의 력사를 《굶고 얼고 쫓겨 다니다 죽은》것으로 그렸으며 절망과 탄식, 후회로 일관된 행로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포위속에 있다고 하여 절망하지도 않았고 락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유격전에 대한 무식에 기인되는 견해이다. 유격전이란 원래 포위속에서 진행되는 투쟁방법이 아닌가. 적을 불의에 기습하고는 그 장소를 빨리 리탈하며 정면충돌을 될수록 피해야 한다. 유격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적의 추격과의 투쟁이다. 유격전의 상식이 없는 사람만이 지리산유격대원들을 굶고 얼고 쫓겨 다니다가 절망과 탄식, 후회속에서 죽은 사람들로 볼것이다. 하기는 그들에게서 군사란 미국의 하이칼라식전술교범에서 얻은것이 전부일테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것 같다. 우리에게는 웃음도 있었고 노래도 있었다. 대성골 산죽밭에서 전사들과 함께 오락회도 하며 지낸 그날 밤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밤이 얼마간 깊었을 때 그들은 오락회를 벌려 놓았다. 돌아 가며 지명하는 식으로 노래 불렀는데 대체는 북쪽노래를 많이 불렀던것으로 기억된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른 전사도 있었고 한 전사는 서울부민관에서 인민군협주단의 공연때 배웠다면서 《전진이다 전진이다》를 불렀다. 나에게도 차례가 왔는데 무슨 노래를 불렀던지 모르겠다. 결혼식때처럼 《적기가》를 부른것이나 아니였는지… 다음차례는 김동무라는 전사였는데 이름은 똑똑히 기억나지 않는다. 김 무슨 룡이던가 김덕뭐였던것 같다. 내 입당보증인 김덕룡동지와 비슷한 이름이구나 하고 생각했던것만 뚜렷하다. 김전사는 노래대신 시를 읊었다. 그중의 몇구절을 여기에 옮겨 본다.
무너진 옛것을 다시 쌓아 보려는 림종이 가까운 늙은 추물의 망녕든 잠꼬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한 우리의 젊음이냐 … 새로운 제국주의자와 망녕된 늙은 강아지에게 저승길로 가는 로자를 주어 지옥으로 내여 쫓자
시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랑송이 끝난후 나는 그에게 말했다. 《김동문 시인이구만.》 그는 웃으며 자기는 시라는 글자도 잘 모르고 그 시는 유진오라는 시인의 시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그 시인은 전쟁전 이 지리산유격대에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학살 당했는데 그 시는 1946년 서울에서 국제청년절행사때 랑송한 시라는것이였다. 시인은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0개월 복역하는 기간 미군정이 전향공작의 일환으로 벌린 《성탄절오락회》에 나가서 《적기가》를 부름으로써 그것이 선창으로 되여 온 인왕산을 《적기가》로 진감시킨 일도 있었다. 그가 얼마나 대중을 틀어 잡았던지 출옥후 문화공작대로 경남 진영에 갔을 때는 농민들이 수십리밖에까지 나와 환영했고 《함구령》을 받은 시인이 시랑송을 할수 없음을 알리자 《그럼 얼굴만이라도 보자!》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쏟아 지는 폭우속에서 시인은 군중앞에 나섰고 틀어 쥔 주먹을 머리우에 높이 쳐들어 시랑송을 대신했다. 그때 마음속으로 읊은것이
다시 또다시 톱날 같은 땅우에 한몸 하늘을 떠받들고 말해서는 아니될 말을 씹어 삼키며 라는 시였다고 한다. 그후 시인은 1948년 말에 지리산으로 들어 왔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처녀와 결혼한 며칠후였다는것이다. 젊은 부부는 폭력단의 습격으로 결혼 첫날 밤을 뒤산에 올라 찬이슬을 맞으며 보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싸우던중 1949년에 체포되였으나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고 학살되고 말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군사재판정에서 그는 《피고는 형무소에서 불온시를 써서 <란동자>들을 선동한적이 있는가?》 하고 검사가 물었을 때 《나는 시인이다. 이것이 왜 불온시란 말이냐?》 하고는 《아 보고 싶은 북쪽하늘이여!》라는 시를 랑송하여 법정을 찌렁찌렁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재판관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피고는 남한을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북한을 지지하는가?》 하고 묻자 그는 《너희들은 그만한것도 판단할 능력이 없느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다!》라고 소리높이 대답했다는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살이였다. 나는 그후 그에 대하여 자주 생각했다. 형무소에 앉아 있느라면 《아 보고 싶은 북쪽하늘이여!》라는 시구절이 저절로 떠올랐고 4.19때에는 《누구를 위한 우리의 젊음이냐》를 생각했고 출옥후에는 《조국과 함께》를 자주 생각했다. 그는 긴긴 옥고에서 여러 동지들과 나란히 나와 함께 있은것과 다름 없었다. 안해는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며칠후에 그에 대해 쓴 책을 한권 가져다 주었다. 그 책을 보니 시인의 부인 김금남(시인은 남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한다.)은 1950년 늦은 가을 부상 당한 몸으로 갓 돌 지난 딸을 안고 북으로 들어 왔다는 내용이 있었다. 부인은 그후 재령식료공장 공장당위원으로, 작업반장으로 사업하고 딸 유향순은 학교를 최우등으로 다니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그들은 1949년에 세상을 떠난 유진오선생이 어떻게 이 리인모의 동지로 될수 있었는지를 모를것이다. 혁명가는 신념과 의지로 동지를 갖게 되는것이다.… 이왕 시인에 대한 말을 시작한김에 몇마디 더 쓰고 싶은것이 있다. 내가 지리산에서 싸울 때도 지리산유격대에는 종군작가가 한 동지 있었다. 길택이에게서도 들은적이 있는데 직접 만나본 기억은 없다. 아마 신문에도 그의 원고를 많이 편집하였을것인데 전투원으로 싸웠던것 같다. 하기야 수백수천의 지리산 갈피마다에서 싸우고 있었을 전사들을 어찌 다 알수 있으랴. 이곳에 와서야 나는 그 작가가 광복전에는 《카프》문학에도 참가했고 광복후에는 서울에서의 문필활동에 이어 평양에 들어 와 사범대학 강좌장을 력임하면서 다수의 소설을 창작한 리동규선생임을 알게 되였다. 그는 종군작가로 남진대오를 따라 나갔다가 전략적일시적후퇴시기에 지리산으로 들어 갔던것이다. 시천장터전투, 마천전투를 비롯한 수다한 전투들의 참가자였던 선생은 1952년 3월 15일 변절자의 밀고로 적들의 포위속에 들자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자폭했다고 한다. 그의 영웅적최후를 목격한 괴뢰《특공대》 장교는 후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리동규라고 하면 남조선에도 널리 알려 진 작가여서 손들고 나와 글만 몇편 잘 써내도 처지를 얼마든지 고칠수 있었는데 그렇게 죽음으로 길을 택한것은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선생의 배낭에는 《지리산빨찌산의 노래》 미완성 유고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구절구절이 너무도 가슴을 두드려 여기에 그대로 인용해 본다.
지리산 첩첩산악 손아귀에 거머잡고 험악한 큰 산준령 평지같이 넘나드네 지동치듯 부는 바람 우리 호통 웨치고 넓은 들에 흐르는 물 승리를 노래한다 …
그뿐이 아니다. 형무소에 있을 때 태백산유격대출신의 한 동지를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네 부대에도 작가가 한명 있었다고 했다. 후퇴를 미처 못해 유격대에 합류한 북에서 종군나온 작가였는데 원주지방에서 괴뢰군에 포위되자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자폭했다고 그 동지는 감동에 겨워 말했다. 북쪽에 와서 알아 보니 그 작가는 바로 김사량선생이라고 한다. 일제때 벌써 대단한 문필력으로 《아꾸다가와상》에 론의되여 들썩하게 했고 일본의 나프문학건설에도 참가했다는것은 그때 벌써 널리 알려 져 있었다. 중국 연안에 가서 지낸적이 있어 《노마만리》라는 장편종군기를 썼고 광복후 평양에서는 《뢰성》이라는 장군님에 대한 장막극을 써서 공연했다. 그런분이였으니 적들의 손에 붙잡히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것이다. 참된 문필가는 신념과 량심, 지조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남부군》이나 《지리산》의 필자들도 과연 문필가라고 할수 있을가. 지리산의 그날 밤, 찬바람이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몸을 얼구었으나 그 밤에 우리 전사들은 통일조국을 그려 보았고 그 조국을 위하여 쓰러진 동지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언땅에 뜨거운 노래를 묻으며 지새운 밤이였다. 산생활을 못해 본 사람들은 언땅과 마른 나무잎을 깔고 자는 밤의 뜨거움과 랑만을 알수 없을것이다. 그 밤들에 나무가지사이로 비껴 드는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찾아 보군 하던것이 기억에 새롭다.
한 녀맹위원장의 최후
이튿날 전사들과 헤여 져 눈길을 헤치며 령을 오르고 내려 청대골을 지나 장고봉에 오르니 벌써 해는 떨어 지고 땅거미가 밟힌다. 어디로 가서 잘것인가 생각하다가 상봉쪽 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진주시당 거점을 알기에 거기에서 자려고 찾아 가보니 많은 동지들이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데 조직부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좀 앉아 있으려니 조강지처형으로 순하디순한 모습의 한 녀성이 조용히 들어 섰다. 조직부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였다. 진주군에 사업을 나갔으므로 좀더 있어야 돌아 올터인데 무슨 사고가 났기에 이렇게 빨리 왔을가 해서였다. 알고보니 그 녀자는 진주군녀맹위원장이였다. …그가 진주에 도착하여 녀동무의 집에 가니 마침 일전에 산에서 내려 가 경찰에 자수한 자가 와 있었다. 모른체 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자의 눈치가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그곳을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맹위원장은 녀동무에게 변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자가 눈치를 못 채도록 태연히 저고리를 벗어 홰대에 걸어 놓고 방을 나온후 변소뒤창으로 빠져 나와 산으로 오다가 중간에서 다른 저고리를 얻어 입고 왔다는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조직부장이 당신의 친구라는 녀인도 의심스럽다고 했더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며 그 녀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전에 마산에서 한 십리가량 떨어 진 농촌에서 살 때예요. 그 녀자는 바로 이웃에서 살았지요. 남새가 날 때면 남새를 그 동무와 함께 마산에 이고 가 팔기도 하고 형이야 동생이야 하며 지내던 극진한 사이였답니다. 그는 마음이 곱고 인정이 많은 사람일뿐만아니라 시부모공대는 물론 남편도 잘 섬기는 알뜰한 세간살이군이예요.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착실한 아낙네였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가정에 날벼락이 떨어 질줄이야… 그것은 광복후 미군이 진주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미군 네놈이 들이닥쳐 식구들을 총으로 몰아 내고 한놈이 내 친구를 딴방에 끌어다가 옷을 벗기고 짐승 같은짓을 저질렀답니다. 한놈은 문앞에 총을 들고 서 있고 또 한놈은 사립문앞에서 지켜 서서 교대로 드나들며 덤벼 들자 내 친구는 기절했대요. 짐승 같은 놈들에게 그 일을 당한후 그 집안은 남 부끄럽다고 몰래 마을을 떠나버렸구요. 그 일이 있은지 몇년후에 진주에서 그 녀인을 다시 만났는데 미군에 대한 적개심은 말할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죽지 못해 당한 그 분함을 어찌 잊겠어요. 비록 총을 쥐고 싸우지는 못하고 있으나 절대로 변할수는 없어요. 내 남편이 놈들한테 학살 당했을 때 함께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가 밀고자들과 련결되다니요.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녀맹위원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숙연해 진 분위기가 되였다. 나는 《현모량처》로 불리우던 우리 녀성들이 어떤 곡절들을 거쳐 저렇게 강해 졌는가를 생각했다. 지리산유격대에는 녀인들도 많았다. 여느 때는 양처럼 순해만 보이는 그들이 싸움에 들어 서서는 남자들 못지 않게 희생적이였다. 곤난을 이겨 내는데는 남자들보다 더 이악하면서도 참을성이 강했다. 조직부장이 침묵을 털어 내려는듯 말했다. 《자아, 녀맹위원장동무도 무사히 돌아 왔으니 우리 꿀이나 따다가 맛을 봅시다.》 산생활에서 단맛을 본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그래서 제일 먹고 싶은것이 당분이므로 그 말에 모두 귀가 솔깃하였다. 알고보니 한 200년도 넘었을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하도 오래되여 그속에 구멍이 났는데 거기다 벌들이 집을 지었다는것이다. 한시간쯤 지나 꿀벌집이 그냥 섞인 꿀을 대야에 수북이 담아 가지고 돌아 왔다. 우선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들도 숟가락으로 꿀을 먹기 시작했다. 좀 먹다보니 느끼하였는데 《이 꿀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는 깊은 산속의 산꿀이기때문에 보약이 된다.》는 말에 유혹되여 억지로 더 먹었더니 술도 아닌 꿀에 취한듯 하였다. 취한 잠에서 깨여 나니 몸이 끈적끈적하고 좋은 보약을 먹은 기분이였다. 그때 보초선에서 괴뢰군이 포위공격해 온다는 련락이 왔다. 급히 열병환자들을 옮기고 서류를 감추고 나서 나머지사람들도 피신할 곳을 찾는데 누군가 《이 굴 바로 우에 또 굴이 있는데 견고하고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녀맹위원장은 《제가 여기 있을터이니 빨리 올라들 가세요.》 하고 나섰다. 밑에 있는 이 굴을 누가 지키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놈들이 이 근방을 샅샅이 뒤질것이니 환자들이 문제라는것이였다. 동지들이 딱해 하자 그는 입산주민으로 가장할테니 자기 걱정은 말라며 우리들을 안심시켰다. 사실 급할 때 더러 입산주민으로 가장하여 위기를 모면한 일이 드문히 있기도 했다. 웃굴에 올라 간 우리들은 만약 그가 위협에 못 이겨 우리가 숨은 곳을 알려 주면 어쩌나 하는 한가닥 위구심때문에 수류탄들을 뽑아 들고 아래굴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괴뢰군놈들이 올라 오는 소리가 났다. 그중 상관인듯 한 자의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넌 뭐냐?》 《저는 중산부락에 사는데 농사때문에 시천에는 못 나가고 여기 피난 와 있어요.》 녀맹위원장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전에 다시 그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짓말 말아. 네가 다른 놈들 있는데를 알려 주면 살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일테다. 이 갈보년아!》 《갈보년이라고? 네놈들은 부모도 없는 놈들이냐. 녀인들을 욕되게 하는것이 네놈들의 업이니 그런 말밖에 모르누나?》 한편 피할수 없는 위험을 감지한데도 있지만 놈들의 행위에 더욱 칼날 같아 진 그 녀인의 목소리. 《이년 죽고 싶으냐?》 《그래 죽고 싶다. 너 죽고 나 죽자.》 순간 밑굴에서는 소요가 뚝 끊어 졌다. 녀맹위원장이 수류탄을 빼들었음이 분명했다. 이윽고 그 녀자의 챙챙한 목소리가 우리들의 심장을 때렸다. 《김일성장군 만세!》 굉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비규환의 소리. 다시 깃든 정적속에서 우리들은 말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 녀인의 최후의 순간에 부르고 간 웨침소리는 모두의 가슴속에 계속 울리고 있었다. 밑에서 폭음을 듣고 올라 온 놈들이 시체들을 거두느라고 야단법석들이였다. 누군가 구석에서 흑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한참 지난후 우리들은 모두 그곳에 내려 갔다.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흥건히 고인 피가 동굴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녀맹위원장이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하여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눈물을 머금고 그 녀성이 무엇을 기원하며 갔던가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또 새기였다.
비판과 동지애
한 녀성의 영웅적희생으로 우리 비무장들은 위기를 면할수 있었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폭포수골 릉선 바로 밑에 거점을 잡았다. 그런데 이때는 괴뢰군이 총 공세를 취하던 때여서 안전한 곳이란 없었다. 겨우 자리를 잡을가 하는 때에 갑자기 괴뢰군무리가 까맣게 몰려 올라 왔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를 발견하고 밀려 온것이 아니였다. 우리도 이제는 계속되는 공세에 익숙해 져서 별로 당황함도 없이 짐을 챙겼다. 한두명씩 흩어 져 바위틈에 숨어 수색망을 피하며 다음 집결장소로 찾아 가기로 했다. 중봉에서 뻗어 내리다 갈라 져 쑥밭재옆으로 뻗은 릉선끝밑에 다달았을 때 릉선에서 《누구야!》 하는 소리와 함께 격발기를 찰칵 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숲속에 엎드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그때 옆에 같이 있던 강명석동지가 나를 쿡쿡 치며 나가보라고 했다. 그는 전쟁전에도 유격대에 참가하여 싸웠던 경험이 풍부한 도당간부이다. 나는 유격전의 경험이 없기에 그의 말을 존중하여 지시대로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 《누구요? 나는 무전반에서 신문편집하는 아무개요.》 그러자 상대는 주춤하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도당 호위중대장이였다. 《그 골짜기로 올라 가시오. 경리부가 저녁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소.》 함경도억양이 별로 반가왔다. 그런데 그는 왜서인지 성이 난 표정이였다. 그는 함경북도출신으로 목포지역에 정치공작대로 나갔다가 후퇴시 지리산유격대에 입대했다. 나는 숲속에 들어 와 강명석동지를 데리고 함께 골짜기를 올라 가 주먹밥을 한덩이씩 얻어 먹었다. 무전반이 어떻게 되였는지 궁금해 곧 일어 서려는데 호위중대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땅거미가 덮여서 적들이 일단 철수하였다고는 하나 만일을 알수 없는데 내가 만일 방아쇠를 당기면 어쩌려고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한단 말이요?》 나는 머쓱하여 정황을 설명하였다. 그는 혀를 차더니 내게 침을 놓았다. 《경험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건 엄격히 말하면 모험주의라는것을 알아야 하오.》 그때야 나는 그가 왜 처음 만났을 때 성난 얼굴이였는지를 알았다. 《그렇게 값없이 죽어서야 되겠소? 우리는 조국을 통일하고 돌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온 사람들이 아니요? 우리 값 있게 살고 죽어도 값 있게 죽읍시다.》 그때의 찡- 해오던 마음을 어떻게 말할지, 그렇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 동지는 그후 중상을 입어 적들에게 체포되였고 1953년 광주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쳤다. 참으로 아쉽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후 그는 그 사실을 도당조직위원회에 제기하여 다시 그 문제가 취급되였다. 조직위원회는 강명석동지가 해가 비록 떨어 졌다고는 하지만 적이 완전히 철수하였는지도 잘 모르는 위험한 조건속에서 자기 대신 동지를 내보낸것은 자본주의적리기심을 청산하지 못한 옳지 못한 행위라는 비판과 함께 책벌을 주었다. 강명석동지는 비판을 허심히 접수했고 나를 찾아 와 다시 자기비판을 했다. 그후 그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되였다. 참으로 훌륭한 동지들이였다. 그런데 강명석동지 역시 오늘을 보지 못하고 1952년 1월 괴뢰군들의 공세때 대성골전투에서 조영래동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다른 하나의 일도 생각나는것이 있다. 바로 그날에 있었던것 같다. 흩어 졌던 무전반동지들을 수습하여 간단한 터를 만들고 모닥불가에 앉아 동지들을 무비판적으로 대한 일이 없었던가를 돌이켜 보고 있을 때 무전반원들의 한사람인 오철남동지가 돌아 왔다. 뒤늦게 돌아 온 그의 얼굴에는 무척 당황한 기색이 력력했다. 《저우에 아름드리 자작나무가 있는데 그 주변에 각 뜬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급히 가보자고 서두르는 그를 좀 있으면 새벽인데 그때 올라 가 보자고 말한후 동이 트자마자 그를 앞세우고 올라 갔다. 한참 올라 가니 얼마나 묵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자작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 보아도 사람의 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울툭불툭한 뿌리들이 땅우로 여기저기서 드러나며 사방으로 뻗어 있을뿐이였다. 얼마후에야 우리는 그 드러난 뿌리들이 어둠속에서 사람의 팔다리처럼 보였음을 깨달았다. 처음은 웃었으나 다음은 생각 많게 하는 실수였다. 지리산의 곳곳에 괴뢰군과 경찰이 학살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자들은 전쟁을 피해 산에 피난해 올라 와 있는 주민들을 만나기만 하면 유격대라고 학살했고 《토벌전과》에 포함시켰다. 그들이 발표한 《소멸》된 유격대수자들중에 유격대라는 말조차 몰랐던 입산주민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여 있을것은 의심할바 없다. 거창이나 함평에서 학살한 주민들도 《공산비적》이라고 주장한 그자들이였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별로 당황함이나 겁을 모르던 오철남동지가 나무뿌리를 각 뜬 사람의 시체로 오인했으랴. 이야기가 지내 다른 갈래로 흐르는것 같다.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 오동지를 달래여 데리고 내려 오는데 숲속에 웬 자그마한 사람 하나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게 보였다. 아이 같았다. 이 무시무시한 산중에 웬 아이가 혼자 앉아 있을가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누구요?》 하고 내가 조심히 물었더니 아주 깔끔하고 예쁘게 생긴 소녀의 얼굴이 나를 향해 반기는것이 아닌가. 《신문반동지시죠? 전 동지를 압니다. 저는 산청군녀맹 문교부장인데 부락에 사업 갔다 돌아 오는 길입니다.》 그는 밤이 되자 길도 찾을수 없고 또 가는 곳마다 괴뢰군천지여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것이였다. 어린 처녀로 숲속에서 혼자서 밤을 새우려니 얼마나 무서웠고 힘겨웠으랴. 게다가 지칠대로 지쳤고 이틀째나 식사도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배 고파 잘 걷지도 못하는 소녀를 부축하여 돌아 와서는 밥을 먹이고 선을 태워 산청군으로 보냈다. 우리 동지들은 그를 친누이동생처럼 대해 주었고 바래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소녀와는 아주 친숙해 지게 되였다.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그 처녀는 구례녀고재학중 의용군에 자원하여 락동강전선에서 싸우다 지리산에 오게 되였다고 했다. 고향으로 보내주려 해도 안 간다며 지리산에 남아 녀맹에 소속되여 싸우는 처녀였다. 한번은 련락선을 통하여 그 처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만년필이 필요하니 여유가 있으면 보내줄수 없겠느냐는것이였다. 당시는 원주필도 없는 때고 만년필은 산생활에선 구경조차 할수 없는 귀한것이였다. 그러나 누구나 소녀의 첫 부탁인데 꼭 구해 주자고 하였고 그래서 여러 군에 부탁했는데 마침 구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흐뭇해 했던가. 온 종일 기분 좋았던것이 기억된다. 만년필을 보내준 뒤에는 소녀가 만년필을 받아 들고 기뻐 할것을 생각하며 오래동안 마음 흐뭇함을 느꼈다.… 이렇게 우리는 지리산의 언땅을 뜨거운 우애로 덥히며 싸웠다. 동지를 기쁘게 해주었을 때가 제일 기뻤다. 이런 동지애가 없이는 산생활, 유격투쟁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잊지 못할 지리산의 애어린 꽃망울들(1)
51년 12월, 전선에 있던 괴뢰군 《수도사단》이 지리산주변으로 집결하여 유격대《토벌》을 위한 1차 대공세를 감행했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괴뢰군의 공세는 끊임없이 계속되였으나 12월 대공세의 규모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였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속에서 괴뢰군경들은 서로 손을 잡으면 잡을수 있는 간격으로 서서 산을 포위하면서 수색해 올라 왔다.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던 왜놈들의 《참빗전술》 그대로였다. 하기는 괴뢰군장교들의 대부분이 왜군이나 위만군출신이였으니 응당하다고 해야겠다. 괴뢰군의 포위공격을 피해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산중턱을 끼고 돌다가 우리는 하동쪽에서 산청군 삼장면쪽으로 빠지기로 하였다. 온밤 눈속을 헤쳐 날샐녘에는 싸리봉에 올라 섰다. 진양군녀맹에서 일하는 녀성이 보따리에서 쌀을 꺼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없어 씻지도 못하고 그냥 솥에 넣고 그우에 눈 녹인 물을 부어 끓이는것이다. 그래도 솥에서 죽이 끓으며 피여 나는 고소한 냄새는 배 고픈 우리를 못 견디게 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고향생각을 불러 일으킬 때였다. 남경우위원장이 벌떡 일어 서며 《적이다!》 하고 웨쳤다. 뒤이어 총탄이 날아 온다. 죽이고 남비고 모두 팽개치고 릉선을 향해 뛰는데 총알이 비발친다. 바위옆을 지날 때면 총탄이 바위에 맞아 돌쪼각과 탄환파편들이 날아 와 몸에 박힌다. 그래도 계속 뛰여 가고 있을 때 내앞에 가던 허동욱부위원장이 외투를 벗어 던지는것이였다. 경황 없는중에서도 나는 외투를 주어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는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또 집어 던지는것이 아닌가. 그것마저 주어 들고 정신없이 릉선을 넘으니 총성이 멎고 따라 오던 괴뢰군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눈속에 앉아 가쁜숨을 돌렸다. 내가 허동욱부위원장에게 외투를 주면서 롱담으로 주어 온 값을 내라고 했더니 하도 몸이 무겁고 숨이 차서 벗어 던졌단다. 호주머니에서 꺼내던진것은 양말이였다. 얼마나 숨이 찼으면 양말까지 내던졌을가. 나이가 50이 넘은분이니 더 힘들었을것이다. 그러면서도 앞길에 대한 정찰을 조직하고 누가 뒤떨어 진 사람이 없는가부터 알아 보려고 남경우위원장과 함께 다시 일어 난다. 나도 그들을 도와 나섰다. 빤히 마주 보이는 장고봉에서는 괴뢰군들이 불을 피워 놓고 떠들고 야단이다. 그런데 점검해 보니 길택이와 송중명이 보이지 않았다. 떠나온 자리에는 이미 적들이 욱실거리고 있어서 다시 가볼수도 없었다. 걱정하고 있을 때 정찰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 왔다. 그들이 안장바위릉선에는 괴뢰군이 없는듯 하다기에 모두 일어 나 안장바위로 출발했다. 실종된 송중명과 길택이는 밤에 다시 찾아 볼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비상집결장소인 조개골에 들려 신호를 하니 대답신호가 온다. 그런데 대답신호의 주인은 뜻밖에도 길택이였다. 조금후에 길택이가 달려 왔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내 가슴팍에 매달려 울기에 끌어 안아 주니 더욱 심하게 흐느끼는것이였다. 달래여 사연을 물었다. 그런데 길택이의 대답을 듣고보니 그는 너무나 기적같이 살아 난것이였다. 괴뢰군 탄환이 날아 올 때 우리와 함께 뛰다가 무엇엔지 걸려 넘어 지는 바람에 괴뢰군에게 붙잡혔다는것이였다. 적들은 아직 어린 소년이라고 해서인지 《너희 간부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면 살려 준다.》고 달래더라고 한다. 길택이가 그러겠다고 했더니 그 애가 메고 있던 카빈총에서 탄창을 빼고는 빈 총을 되돌려 주면서 앞장 서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길택이는 앞장서 걸으며 달아 날 궁리를 했다는것이다. 마침내 릉선에 좁은 바위가 마주선데까지 왔을 때 험한 바위사이의 좁은 곳을 빠져 나오느라 뒤에서 주춤거리는 사이에 바위밑의 벼랑으로 내리 굴러서 빠져 나왔다고 한다. 어린것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적들을 속이고 빠져 나온것에 탄복하면서 안장바위방향인 장대골로 갔다. 모두들 여러 날 굶어 배 고프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허동욱부위원장은 나의 눈치만 부지런히 살핀다. 일전에 내가 비상미를 련락병에게만 맡기지 말고 스스로들 챙기자고 력설한 일이 있었기때문이다. 아울러 그 방법까지 설명했던것이다. 광목으로 개의 창자같이 가늘고 긴 자루를 기워서 그속에 쌀을 넣어 맨등에 감고 다니라고. 그 말을 듣고도 자기들은 실천을 안했지만 처음 말을 꺼냈던 나는 비상미를 챙겨 두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 눈치를 살피는것이다. 내가 저고리를 벗고 등에 감은것을 내놓자 모두들 살았다고 환호한다. 자루를 쏟으니 한되가량 되기에 삼등분하여 죽을 끓이기로 했다. 그러나 끓여 놓으니 죽이 아니라 미음이였다. 누군가 배낭에서 소금을 꺼내놓아 미음에 넣어 마시고 있을 때였다. 보초선에서 안장바위방향에 적들이 나타났다고 알려 왔다. 급히 짐을 챙겨 숲속에 숨으려 할 때 안장바위릉선에서 괴뢰군 7∼8명이 골짜기로 내려 오는것이 보였다. 《저놈들이야요.》 길택이가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 봤다. 그놈들은 골짜기를 내려 오더니 대오를 짓는다. 여기로 옮겨 앉기전 우리가 거점으로 있던 곳에 가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거점위치를 잘 알고 있는 변절자의 말을 듣고 온 모양이였다. 그곳에는 신문발행용비품들과 자료들이 보관되여 있었다. 금싸래기처럼 아끼는 원지와 백지들을 옮겨 오지 못한채 숨겨 놓았던것이다. 놈들이 과거 거점으로 들어 간지 한시간쯤 후에 불길이 치솟았다. 원지와 선화지를 찾아 태우는것이 틀림 없었다. 당장 쫓아 가 불을 끄고 싶은 충동이 미칠듯이 치솟는것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데 길택이가 그들이 돌아 올 길목에 매복을 나가겠다고 나섰다. 《저놈들과 회계를 좀 해야겠어요.》 길택이외에 몇명이 더 나서기에 전투에 대한 주의를 시켜 내보냈다. 잠시후 그들이 간쪽에서 련발총소리가 요란하였다. 놈들이 매복조에 걸린 모양이다. 매복 나갔던 동지들이 돌아 와 하는 말이 세놈이 도망치고 네놈이 쓰러졌다는것이다. 이만하면 아저씨의 분한 마음도 풀고 자기 원도 풀지 않았느냐는듯 길택은 나를 향해 씽긋 웃었다. 그후 인차 괴뢰군의 대공세가 시작되고 대성골전장에서 부상으로 의식을 잃고 체포되는 바람에 나는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길택이와 얼마 같이 있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학살 당한 불쌍한 아이였기때문에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 역시 그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데리고 다녔다. 길택이는 참으로 침착하고 속이 깊은 아이였다. 나는 길택이에게 어디에 작전을 나가든간에 과자니 떡이니 하는것들을 배낭에 주어 담아 오지 말라고 단단히 타일렀는데 길택이는 이 약속을 꼭 지켰다. 양양전투때의 일이다. 길택이는 이때 신문제작을 위해 취재하러 가는 동지를 따라 갔는데 그 동지가 거기서 꿀 한병을 얻게 되자 그것을 먼저 돌아 오는 길택이에게 가져 가라고 주었던 모양이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 온 동지가 나에게 꿀을 받았는가 하고 묻다가 안 받았다는 대답에 길택이에게 확인하니 아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작전 나가서 절대 먹을것을 주어 오지 않겠다고 아저씨와 약속했기때문에 차마 가져 올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버릴수도 없어서 바위틈에 숨겨 놓고 왔어요.》 이렇게 순박한 길택이였다. 그의 이야기가 나온김에 감옥에 들어 가서 다른 동지들한테 들은 길택이의 최후이야기를 마저 하련다. 내가 체포된후 그는 련락병으로 일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진주에 공작 갔다 오는 사람을 맞아 들이기 위해 약속장소에 나갔는데 그곳은 달뜨기재였다고 한다. 길택이가 온밤을 걸어 약속장소에 나가 도착신호를 하니 그자는 도착신호대신 라이타를 켜더라는것이다. 불빛에 얼른 보니 괴뢰군복을 입었고 약속에도 없는 라이타를 켜는것을 보고 길택이는 이자가 변절하여 괴뢰군을 데리고 와 포위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했던것 같다. 아니나다를가 《찰칵》 하는 격발기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 오기 시작하자 길택이도 마주 총을 쏘았다. 그때 그자가 소리쳤다. 《길택아, 엎드려라. 너는 내가 꼭 살릴테니.》 《아저씨가 이럴줄은 몰랐어요.》 최후의 한방까지 쏜 길택이는 그만 쓰러졌다는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제 자식을 잃은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슬퍼서 온밤 눈을 붙이지 못했었다. 길택이처럼 순진한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싸우다 숨진 생명이 어찌 하나뿐이랴. 여기에 또 다른 한 어린 전사의 최후에 대한 얘기가 있다. 월성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덕유사부대라고도 부른 305부대의 진종수부대장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강병구, 13살난 소년련락병이 있었다. 그는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곁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반미투쟁을 하다가 입산하자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아버지를 데려 오라고 울며 떼 쓰는데도 소문난 아이였다. 전쟁이 터져 고향이 해방되여 아버지가 집에 와 있게 되자 병구는 너무 좋아 하며 자나깨나 아버지곁에 붙어 다녔다. 후퇴시기 아버지가 다시 입산하게 되니 이번엔 꼭 따라 가겠다고 나섰는데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아버지의 친구가 산에는 당원들만 가는데 너는 당원이 아니니 못 간다고 타이르자 나는 당원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당원인데 당원의 아들이 산에 못 간다면 말이 안된다고 우기며 끝내 따라 왔다고 한다. 아이가 똑똑하고 재빠르기로 유명하기에 나는 305부대에 갔을 때 일부러 그를 찾아 가보았다. 그날 마침 안의면에서 입산한 자가 경찰의 앞잡이란 보고가 있어 조사하여 자백을 받는 참이였다. 자백을 듣자 병구는 그를 쏘아 죽인다고 야단이다. 모두들 말리여도 듣지 않기에 나까지 나서서 어른들의 말을 들으라고 권하니 병구 말이 《미제앞잡이를 용서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다.》는것이다. 한편 지리산에도 유명한 소년중대장이 있어 작전에 유능하고 자기 중대를 꾸려 나가는데 있어서 나이 많은 어른들도 못 따라간다고들 했는데 후에 알고보니 19살 먹은 강병구의 사촌형이였다. 그 집안은 모두 혁명적인 가정이였던것이다. 한번은 내가 거창군당거점이 있는 월성부락 뒤산을 넘어 산태동에서 며칠 지내고 산을 타고 돌아 오는데 북산방향에서 전투가 벌어 지고 있었다. 월성부락에서 중기, 경기탄이 날아 오고 산길에도 파편이 튀여 조심스럽게 갔는데 북산방향에서 한 소년이 탄우속을 뛰여 오고 있었다. 만나보니 병구였다. 하도 신기해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총알이 무섭지 않느냐?》 《내가 꿩이예요?》 《꿩은 겁이 많냐?》 《꿩이야 총소리가 나면 숲속에 냉큼 숨어 버리지만 나는 꿩이 아니기때문에 총알을 무서워 하지 않아요.》 말을 마친 병구는 전투지휘본부로 달려 갔다. 그후 전투기사자료가 올 때마다 병구의 투쟁과정과 용감한 사연들을 자주 접하게 되였다. 거창군 고제전투때 고제면당위원장이 양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심히 보아 넘긴 그 점을 병구는 례사로이 보지 않았던듯 하다. 병구는 면당위원장이 양담배를 피우는것은 지서장과 어떤 관계가 있기때문일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작전비밀은 경찰에 루설되였다고 보아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말이라 귀 담아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고제작전은 결국 실패하였고 고제면당위원장이 지서장의 앞잡이였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처럼 병구는 남달리 적개심이 강하고 눈치가 빠른 소년이였다. 함정부락에 경찰이 들어 와 마을을 수색한 끝에 부락민중 괴뢰군작업복을 입은 사람 셋이 붙잡혔다. 경찰은 그 옷이 어디서 났느냐며 시장에서 사왔다는 부락민들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세사람을 죽이려 했다. 셋을 세워 놓고 총살하려는 순간 병구가 먼발치에서 보고 있다가 경찰들에게 사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이리하여 죄없이 죽을번 한 부락민 셋을 살린 일도 있었다. 전투때도 비발치는 적탄속을 겁없이 뛰여 다니는 용감한 소년이였으므로 험한 전투때면 그 련락을 병구가 도맡아 하였다. 한번은 병구가 련락을 왔기에 특별히 대우하였더니 싫다고 하며 사양했다. 그가 돌아 갈 때 아껴 두었던 곶감과 엿을 꾸려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던 청백한 아이였다. 어린 소년이 산생활에서 먹고 싶은것이 없을리 없겠건만 다른 아이들을 주라며 끝내 사양하였던것이다. 용감한 소년은 힘든 전투때마다 부대간의 련락을 도맡아 비발치는 총탄속을 겁없이 뛰여 다녔다. 52년 겨울 가혹한 대공세때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기 임무를 굳건히 수행하던 병구는 거창전투에서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환자터에 있게 되였다고 한다. 그때 자수한 변절자가 경찰을 데리고 와 환자들을 여럿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북상지서에 잡아 갔다. 승리감에 도취한 놈들은 모두들 한잔씩 들며 밤을 샌 뒤 이튿날 아침 취조를 시작했다. 《우선 부대장련락병놈을 구슬려 보자. 함양군당거점을 파악해야 하니 그놈한테 주게 과자를 좀 사와.》 지서장놈이 책상앞에 마주 앉아 지시하니 순경이 나가 강병구를 데리고 왔다. 어린 병구가 다친 다리를 잘 쓰지 못하여 절룩거리며 들어 오자 지서장놈은 《날씨가 추우니 여기 가까이 앉아 불을 쪼이라.》며 난로앞 의자를 가리켰다. 병구가 시키는대로 앉아 불을 쪼이는데 지서장이 과자를 내주며 먹으라고 다정하게 권했다. 병구는 설사를 하는중이여서 지금은 못 먹으니 나중에 먹겠다고 하고는 추위에 떠는 시늉을 하면서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훔쳐 보았다. 지서장책상에 수류탄 세개가 있는게 눈에 들어 왔다. 병구는 《이놈들, 내 손에 죽을것이다.》 하고 마음을 굳히고 수류탄을 못 본척하며 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지서장놈이 곧 엄마에게 보내줄테니 마음 놓고 있으라며 부대장의 지시와 함양군당의 거점을 묻자 병구는 환자터에 있었기때문에 잘 모른다며 능청스럽게 잡아 뗐다. 병구는 계속 추위에 떠는 시늉을 하며 수류탄에만 온통 신경을 쏟아 붓는데 적들은 병구가 너무 어린 까닭에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때 변절자가 들어 오더니 병구에게 마음 놓으라고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병구는 속으로 증오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있다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 때 얼른 책상우에 있던 수류탄을 집어 들어 고리를 뽑으며 웨쳤다. 《이놈들아, 손들어라!》 지서장과 변절자는 병구의 서슬에 질겁하여 손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고 주변의 순경놈들도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 수류탄이 터짐과 동시에 소년의 웨침소리는 파편과 더불어 날아 올랐다. 병구의 최후를 전해 듣고 하도 가슴 아파 뒤에 시를 지어 보았다.
그대들 가슴에 깊이 기억하라 지리산 덕유산에 피지 못한 이름 없는 꽃봉오리로 조국의 흙이 된 한 소년을 조국통일을 위해 숨진 소년유격전사를
《안해에게 전해 주시오. 부끄럽지 않게 죽었다고.》
우리는 실종된 송중명동지를 찾으려 싸리봉쪽으로 사람을 띄워 보냈다. 그런데 그는 찾으라는 송중명동지는 못 찾고 무전반에서 발전기를 돌리던 동지를 부축해 왔다. 그는 덕유산밑 함정부락에서 머슴살이하다가 유격대를 따라 온 사람이다. 그가 전하는 말이 또 기가 막혔다. 싸리봉에서 무전반일군들이 적들의 포위공격에 모두 희생되거나 체포되였다는것이다. 붙잡힌 동지들은 중산마을아래 동당마을까지 끌려 갔는데 가보니 잡힌 사람들은 50∼60명 되더라는것이다. 놈들은 그들에게 구뎅이를 파게 했는데 언땅을 파다 생각해 보니 자기들을 죽여서 파묻을 구뎅이임이 틀림없더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이래도 저래도 죽을바에는 도망치다 죽는게 낫겠다고 작정하고 셋이서 뛰여 달아 나다가 둘은 총에 맞고 자기는 겨우 숲속에 피해서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비상집결장소 몇곳을 거쳐 다니던중 우리 동지들과 만났다는것이다. 우리는 그날 밤 청내골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곳에 적정이 없기에 여러 동지들이 그곳에서 거점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때문이였다. 우리는 곧 청내골로 향해 출발하였다. 괴뢰군의 공세는 잠시 중지되고 일시적정적이 깃든 상태였다. 공세와의 싸움에서 분산된 동지들을 수습하기 위해 도당은 싸리봉에 련락병 셋을 보냈다. 싸리봉까지는 하루종일 가야 도착할수 있는 거리이기때문에 련락병을 왕복 사흘계획으로 보냈는데 이튿날 련락병 소년 하나가 급히 되돌아 왔다. 실종된 송중명동지를 발견했던것이다. 련락병들이 싸리봉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어느 바위틈에선지 신음소리가 나더라는것이다. 가보니 송중명이가 얼마나 굶었던지 거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더라고 했다. 굶주림으로 움직일 기력이 없는데다가 엎친데덮친 격으로 두발까지 얼어 버린것 같았다. 부축해도 일어 서지를 못해 련락병으로 간 소년들의 힘으로는 업고 올수가 없어 급히 되돌아 온것이였다. 송중명이 괴뢰군의 추격을 피할 때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신발에 잔뜩 달라붙었는데 바위틈에 숨어 있는 동안 체온으로 눈이 녹아 신고 있던 롱구화가 푹 젖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밤이 되여 기온이 쑥 내려 가 신발이 다시 얼면서 발목까지 완전히 동상에 걸려 버린것이다. 급히 두사람에게 지게를 지워 보냈더니 송중명을 지고 왔다. 그는 극도의 굶주림과 동상으로 이미 반실신상태였다. 하면서도 그는 장고봉숲속과 싸리봉골짜기가 온통 괴뢰군천지인데 며칠안으로 또 적들의 대공세가 있을것이 틀림 없다는 정황을 지휘부에 보고해 달라는 말부터 하는것이였다.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송중명동지는 평시에 별로 말이 없고 이런저런 론쟁에도 좀체로 끼여 들지 않는 과묵한 성미였다. 지내보면 행동보다 말로써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송중명동지는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였다. 그때도 그는 자기의 아픔보다 부대의 안전부터 생각했다. 굶주림과 피로, 동상으로 눈앞이 핑핑 도는것을 참으며 그는 적들속을 기여서 빠져 나왔다. 한번은 비탈길에서 내리 굴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가 깨여 났는데 발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위우에 얹혀 져 있던 두발이 얼마나 얼었는지 바위등에서 떨어 지지 않더란다. 그때부터 그는 기기도 하고 무릎걸음도 하며 한시간에 겨우 백보가량씩 한치한치 움직여 왔다 한다. 깜박깜박 정신도 잃고 기운도 빠질대로 빠졌지만 그는 자기 일신보다 부대와 동지들을 더 생각했을것 이다. 그는 련락병들을 만나기전에는 그런데로 정신을 유지했는데 그들을 보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는것이였다. 롱구화를 벗기고보니 두발은 얼어 온통 새까맣게 죽어서 롱구화자리만큼 피부가 벗겨 졌다. 살가죽이 벗겨 져 빨간 속살뿐인 두발이 오죽 아프랴만 그는 이를 악물고 땀을 뚝뚝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당장 약은 없고 민간료법에 따라 대야에 콩과 물을 붓고 두발을 담그느라 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에 닿으랴. 의무대 의사가 얼굴을 찌프리고 말했다. 《두발을 발목까지 잘라 내야 하겠는데 마취제없이는 수술을 할수 없소.》 발목을 잘라 내지 않으면 온몸이 썩어 들어 가 죽고 말것이다. 갑자기 이 깊은 산중에서 마취제를 어디 가 구하랴는 생각에 우리들은 난처했다. 그런데 송중명이 조용히 말했다. 《마취제없이 자르시우. 내 참아 낼테니…》 우리는 우선 그의 생명을 살려야겠기에 본인의 의사대로 마취제없이 수술하기로 결심했다. 네댓사람이 송중명이를 붙잡고 의사가 그의 발목을 나무 썰듯 자를 때 그 아픔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것이 유격대생활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를 보고 죽기보다 더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참고 견디여야 하는가를 배웠다. 기나긴 옥중생활에 별의별 고문을 다 겪을 때마다 번번이 나의 눈앞에 송동지의 모습이 떠올라 고통을 이겨 내려는 나의 노력에 크나큰 보탬을 주군 하였다. 발목절단이 끝난후 송중명을 환자터에 운반해 놓고 돌아 오는데 그가 우려했던바대로 52년 정월달의 대공세가 시작되였다. 릉선마다 까맣게 놈들이 덮여 오니 모두들 급히 떠나야 했다. 산과 산, 골짜기마다 온통 놈들의 풀빛철갑모로 덮여 있어 환자터를 다른 곳으로 옮길데도 없었다. 각자는 자기 위치에서 목숨이 진할 때까지 싸울 각오밖에 달리는 어쩔수 없었다. 놈들이 환자터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랄뿐이였다. 하지만 송중명을 보지 않고 떠날수는 없었다. 나는 환자터에 가서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말없이 수류탄 하나를 쥐여 주었다. 최후의 순간에 쓰라고 쥐여 주는 수류탄, 죽을수 있는 수단을 주는것,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줄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그러나 송동지는 히죽이 웃으며 자기 자리밑에서 수류탄 한알을 삐죽이 내보인다. 쓰라린 마음으로 떠나는 나에게 그가 남긴 최후의 말-놈들이 오면 자폭할테니 그리 알라며 고향의 안해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었다고 전해 달라던 그 마지막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가 화가라면 그때 그 얼굴을 그대로 그려 남겼을텐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상봉에 올랐다. 환자터에서는 벌써 총소리와 함께 수류탄폭음이 터지고 있었고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폭음속에는 송중명동지의 자폭하는 폭음도 있었으리라. 이렇게 일찌기 풍산땅에서 함께 투쟁의 한길에 나섰던 송중명과 나는 영원히 헤여 졌다. 눈물속에서 새삼스레 둘러 보던 지리산의 첩첩한 산발, 백두의 지맥이 흘러 내리다 이 땅 한끝에서 멈추어 불끈 솟구쳐 올랐다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불리우며 80여리를 휘감아 삼남땅에 좌정한 지리산! 남녘땅의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피를 머금고 웨치고 있는듯 싶은 메부리들, 그때 지리산은 무엇을 웨치고 있었는가. 백두의 참된 아들딸들의 비장한 죽음을 길이길이 잊지 말라고 웨친것이 아니였을가.
마지막전투
상봉에 이르니 로영호부대와 리영희부대가 와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행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로영호대장은 서울공대 건축과출신으로 경남도당의 이름 있는 군사간부였다. 경남부대 사령관직을 맡은 리영희대장은 려수 14련대출신으로 자신이 항상 선두에 서서 싸우는것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도당의 지시로 여기로 왔다. 도당군사간부들의 회의에서 남경우위원장의 강경한 주장에 의해 리현상부대를 찾아 가기로 결정되였던것이다. 《적들이 대공세를 들이대고 있는 때 뿔뿔이 흩어 져서 무슨 맥을 쓰는가.》 이것이 그 주장의 론거였다. 허동욱부위원장을 비롯한 여러사람들이 그것은 유격전의 원칙에 어긋나며 더 큰 위험을 초래할수 있다고 반대했으나 남경우위원장의 주장을 꺾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부대들은 리현상부대와의 합동투쟁을 위하여 대성골로 향해 떠났던것이다. 이때 군사에 밝고 경험 있는 리영희부대장과 같은 동지들도 우의 지시라니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부대는 눈을 헤치며 세석평지를 가로 질러 대성골로 내려 갔다. 경남 하동군 하계면에 있는 대성골은 지리산계곡중에서도 특히 넓고 깊은 골짜기이다. 쌍계사에서부터 세석평지에 이르는 골짜기의 길이가 40리나 넘는데다 릉선이 부채살처럼 퍼져 다른 곳과 달리 매우 광활한 지대였다. 괴뢰군의 공세와 맞서 싸우던 유격부대들은 모두 대성골로 모여 드는듯 했다. 나는 그때 열병에 걸려 있어 조영래동지의 부축을 받으며 대렬뒤를 가까스로 따라 가고 있었다. 조동지가 약을 먹고 가자며 나를 앉히워 놓고 주머니속의 약을 꺼낼 때였다. 대성골이 터져 나갈듯 한 포격소리가 산지사방에서 연기를 뿜어 올리며 들려 왔다. 포탄 터지는 소리, 기관총소리, 수류탄 튀는 소리… 부대가 놈들이 쳐놓은 큰 포위환에 든것이 분명했다. 가렬처절한 전투가 벌어 졌다. 우리 동지들은 참으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총성과 수류탄폭음, 적들의 포위를 벗어 나기 위한 치렬한 접전을 벌렸다. 적지 않은 동지들이 이미 희생되였다. 남경우위원장도 이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는 마지막순간까지 부대를 포위에서 끌어 내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골안이 무너지는듯 한 포탄세례속에서 나는 조영래동지가 부축여 주어 겨우 바위틈에 들어 가 숨었다. 밤이 깊었을 때 경리부에서 준비한 주먹밥을 나누어 먹었는데 참말로 꿀맛이였다. 밤 12시에 어둠을 틈타 릉선에 올랐다. 올라 가 보니 허규활이란 자가 중산이(소년병의 이름)를 데리고 서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모두다 릉선을 넘어 갔으니 얼른 따라 넘으시오.》 그자는 린근부락에서 살아 지리산지대에 밝은 중산이를 길잡이로 어디론가 혼자 빠져 나가려는것 같았다. 여느 때 그는 남달리 좋은 언변으로 정치적인 술어만 써가면서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 하던 자였다.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도 다른 동지들을 충고하고 비판하며 자기의 《신념》을 뽐내던 자가 죽음의 위기가 직면하자 자기 혼자 살아 보겠다는 더러운 속심을 품은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옳지 않은 행동을 비판할 여유마저 없는 정황이라 할수없이 릉선을 넘었다. 괴뢰군의 야간사격이 계속되고 있었던것이다. 마천으로 넘어 가는 릉선을 절반이상 올라 갔을 때 심상태동지가 눈우를 벌겋게 물들이며 굴러 내려 오다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올라 가지 말라!》 쫓아 가서 끌어 안아 보니 피가 걷잡을수없이 흐르고 있었다. 허동욱부위원장과 함께 놈들의 중화기가 배치된줄 모르고 릉선에 올라 갔다가 중화기부대와 정면으로 마주쳤던것이다. 허동욱부위원장은 《빨리 뒤에 알리라!》 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자기도 파편을 복부에 맞았다고 하였다. 이제 자기도 죽을것이라며 권총을 내게 준다. 그 추운 겨울, 파편을 배에 맞은채 동지를 살리겠다고 눈우를 굴러 내려 온 동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를 두고 나는 살겠다고 피신할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이튿날 새벽에 로영호부대가 선두에 서고 나를 비롯한 비무장들이 뒤따르면서 다시 릉선을 타기 시작했다. 날이 훤히 밝을무렵 다시 괴뢰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뭔가 무릎을 탁 치는듯 한 느낌과 함께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내앞에 섰던 산청군 신안면 녀맹위원장일을 보던 녀성은 다리뼈가 부서졌다. 나는 뼈를 다치지는 않았으나 탄환이 근육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무릎뼈가 환히 드러나고 피가 주체하지 못할 지경으로 쏟아 졌다. 조영래동지가 옷을 찢어 싸매주고는 출혈로 정신이 가물가물한 나를 바위틈에 은페시켜 놓았다. 나중에 들으니 조영래동지를 비롯한 그들 비무장들은 50m쯤 내려 가다가 수색대들과 맞다들어 싸우던 끝에 모두 희생되였다고 한다. 조영래동지는 참된 동지였고 벗이였다. 지리산의 갈피에는 우리사이에 오간 뜨거운 정과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그는 주병포도 알고 있었고 김동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주병포와 김동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나의 고향 풍산군에 꼭 가보고 주병포의 집에도 가보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리산의 언땅에 청춘을 묻고 가버렸다.… 반가운것은 조영래동지의 친지들이 북에 살고 있을뿐아니라 평성 과학원에서 박사로 일하고 있는 친척이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 틈을 내서 꼭 만나볼 작정이다.… 그때 나는 바위틈에 정신을 잃은채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꼼짝 말라!》고 소리치며 총끝으로 가슴을 쿡쿡 찌르기에 눈을 떠보니 괴뢰군사병이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포로가 되였다. 나는 들것에 담긴채 구례, 순천, 남원경찰서를 거쳐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였다.
잊지 못할 지리산의 애어린 꽃망울들(2)
나에게서 마지막전투였던 52년 정월의 대성골전투이후부터는 전술기조가 변화되였다고 한다. 지서나 화점 등 경찰이 굳게 지키고 있어 아군의 손실이 클수밖에 없는 곳을 점령하려는 식의 무모한 전투는 피하고 치밀한 정보입수아래 기습전을 벌리거나 의외의 지역에 들어 가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썼다. 물론 내가 그들의 투쟁소식에 접할수 있었던것은 수십년이나 지난 후날의 일이다. 당시 주역들중 생존자도 많이 없고 기억도 희미해 져 내가 들은것은 전황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겠지만 결코 빠뜨릴수 없는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여기에 적어 보자 한다. 정세에 따르는 전술기조의 변화는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입수를 요구했다. 그를 위해 많은 동지들이 헌신적인 활동을 벌린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52년 이후 경남부대에서 활동했던 전사들중 현재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동지들은 자신들이나 동료들의 활동보다는 어린 소년들의 활약상을 즐겨 입에 올린다. 험난한 산중투쟁에서 아무래도 성인들보다는 소년들의 활동이 인상적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길택이, 병구에 이어 박생이라는 소년의 활약을 잊지 못해 했다.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던 52년 여름 경남부대는 괴뢰군 한개 대대를 유인해 대원사골에 몰아 넣고 포위공격해 엄청난 수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박생이소년은 부대장의 련락병이였는데 얼마나 어렸던지 앞이가 빠져 있었다는게 한 전사의 증언이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년이 대원사골전투에서 괴뢰군소위를 포로로 잡았다는것이다. 그 괴뢰군소위로서도 유격대의 포위공격에 쫓기던중 누군가가 등에 총구를 대고 《손들엇!》 하고 웨치니 손을 들수밖에. 결국 박생이는 손을 번쩍 든 소위를 앞장 세워 부대거점까지 데리고 왔는데 부대에 와서 무장해제를 당한 그 소위는 박생이를 보고 어이가 없어 어쩔줄을 몰라 하더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체포한 괴뢰군들은 무장과 군복을 빼앗은후 교양사업을 해 내려 보냈는데 이때 빼앗은 군복으로 경남부대는 전투에서 때때로 괴뢰군소대로 둔갑하기도 하는 등 조화를 부렸다고 한다. 52년 겨울로 접어 들면서 놈들의 《토벌》작전도 훨씬 강도가 높아 졌다. 시천면과 삼장면사이에 있는 덕산뒤고지에 유격대《토벌》을 위해 보름이나 올라 가 있던 괴뢰군 60여명이 모두 동상에 걸려 공포 한방에 모조리 포로가 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자는 불을 피우면 유격대에게 기습 당한다고 불도 피우지 못하게 했는데 폭설로 물자마저 공급이 안돼 병사들은 눈구뎅이에서 굶주리며 동상으로 죽어 가고 있었던것이다. 결국 경남부대는 이들에게 밥을 먹인후 다른 유격부대의 기습을 막기 위해 호위까지 해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인상 깊었던 산청군 문교부장소녀의 최후도 나는 이후 다른 동지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들었다. 이중삼중의 포위공격속에서 동지들이 식량이 떨어 져 굶주리고 있을 때 소녀는 식량을 구하러 문정부락으로 내려 갔다고 한다. 당시는 유격대에 식량을 준 사실이 발각되면 부락민들도 학살을 당하고 마는 때였기에 보급투쟁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였다. 다른 동지들이 로장대에 피신해 있었기때문에 소녀는 일부러 로장대에서 멀리 내려 가 세동부락근처 음천골 강을 건너 가까스로 보초선을 뚫고 문정부락에 숨어 들었다고 한다. 그가 늘 다니던 할머니네 집에 들어 서자 로인은 《<국군>들이 꽉 찬 이곳에 대체 어떻게 왔느냐.》며 놀랐다. 할머니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이야기하고 식량이 떨어 져 굶고 있는 사정을 말하니 불빛때문에 밥을 지을수 없다며 남은 찬밥을 내여 주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보리와 쌀을 몇되박 꾸려 주고 조심조심 가라며 빨리 떠나기를 재촉했다. 식량을 준 사실이 발각되면 학살 당할것이 뻔한 일이라 소녀는 할머니의 뒤일을 걱정하며 동행한 민청 젊은 남자동지와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에 보초선에 걸린 소녀는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소녀는 괴뢰군 7∼8명에게 붙잡히고 민청동지는 가까스로 피했는데 동지를 두고 혼자 갈수 없어 가까운 숲속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놈들이 소녀에게 몰려 들어 귀찮은데 쏘아 죽여 버리자고 하자 그중 한놈이 《죽이지 마! 이건 내거야.》 하고 웨치며 소녀를 업으려고 하였다. 소녀는 업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래도 그자가 억지로 업고 가려고 하자 못된짓을 하려는 속심을 알아 챈 소녀는 두주먹으로 그자의 등을 치고 머리를 잡아 끌며 안깐힘을 썼다. 그 순간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녀가 그자의 뒤목을 입으로 깊이 물었던것이다. 《아이쿠, 요 계집애가 사람을 막 무네. 이 피를 어쩌나.》 고함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녀를 문교부장소녀로 부르다나니 이름도 미처 알아 두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죄스러운 생각이 적지 않다.
사람이 곰을 잡고 곰이 사람을 잡다
다음은 곰이야기다. 유격전이 벌어 지고 있던 당시의 지리산에는 지금은 자취를 감춘 반달곰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산속을 움직이는 유격대전사들이 이 반달곰과 마주치는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52년 11월 경남부대가 청내골에 주둔하고 있을 때 대원들이 곰을 한마리 잡았는데 이 곰이 다시 사람을 잡은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전날 전투를 치른터라 부대원들은 아침식사후 이동초(주위를 돌아 다니면서 경계하는 보초)를 세워 놓고 휴식에 들어 갔다. 그런데 취사반에서 아침밥을 지은 모닥불이 채 꺼지지도 않았을무렵 보초선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막 선잠이 들려던 부대원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한줄 알고 전부 일어 나 총을 들고 몰려 나왔다. 총을 쏜 보초는 괴뢰군사병출신으로 포로가 되여 유격대가 된 전사였다. 《<손들엇> 소리에도 무엇이 계속 뽀스락뽀스락 소리를 내면서 이쪽으로 올라 오다가 방향을 바꾸기에 그 순간 쏘았습니다.》 대원들이 풀숲의 아침이슬을 털며 수색을 나가보니 1m나 되는 산죽사이에 한발이나 되는 짐승이 누워 있더라는것이다. 《돼지다.》, 《아니, 곰이다.》, 《가까이 가지 말라. 죽은척 한다.》, 《아니, 진짜 죽었다.》는 등 한바탕 소동이 났는데 짐승은 반달곰이였다. 곧 의무과장이 군용밥통을 들고 나왔다. 빨리 배를 따서 피를 받자는것이였다. 대원들이 엠1소총에 꽂고 다니는 날 선 칼로 곰의 배를 찔렀다. 그런데 소나 돼지 같으면 날이 쭉 나갈텐데 그놈의 반달곰은 배에 칼이 들어 가지도 않더라는것이다. 몇사람이 달려 들어 겨우 배를 땄는데 앞가슴을 헤쳐 곰열을 꺼내는것이 더 큰일이였다고 한다. 갈비뼈를 도끼로 패니 도끼날이 먹지 않더라는것, 끝내는 큰 바위돌을 들어다 던져 겨우 갈비뼈를 부셨다고 한다. 가죽밑으로는 비게가 한뽐이나 되였는데 얇게 썰어 가을남새를 넣어 국을 끓여 먹었고 곰열을 채 말리지도 못한채 지휘부에 보냈다고 하였다. 도당에서는 자금을 만들기 위해 이 곰열을 지하조직을 통해 남해에서 팔았는데 제대로 값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곰열의 경우 진짜임을 보증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어느 포수가 잡은 곰의것이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유격대가 잡은 곰은 역시 익명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그 일에 관계했던 황성현이라는 자가 경찰에 자수해서 동지들을 밀고하면서 죽은 곰이 산 사람을 잡게 되였다. 즉 곰열 파는 일을 맡았던 함양에서 약국을 하던 세포령감님이 잡혀 들어 간것이다. 후에 전주교도소에서 그 령감님을 보았다는 동지가 있었는데 더 이상의 소식은 알길이 없다. 출옥후 만난 동지들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놈의 곰 크기도 하더니 사람도 잡았다.》고 하였다. 《경각성이 없어서, 그때는》라고도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도 그 시절의 일들을 돌이켜 보며 생각하군 한다. 경각성은 혁명가가 한시도 몸에서 떼놓아서는 안되는 무기라고… 이 고담 같은 이야기를 굳이 다시 쓰는것은(남쪽에서 쓴 수기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썼었다.)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끝까지 싸웠다
53년에 접어 들면서 유격부대는 더욱 곤난한 형편에 처했다. 적들의 《토벌》은 더욱 악랄해 졌고 매일, 매 시각 전투를 벌리느라 휴식은커녕 밥을 해먹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조인과 함께 적들의 공세는 더욱 맹렬해 졌다. 산에서 내려 와 자수하라는 귀순공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유격전사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부대를 리영희부대와 로영호부대로 분산시켜 활동지역을 넓히는 한편 괴뢰군들의 공세를 분산시키기 위한 소조활동을 맹렬히 벌렸다. 그 시기의 투쟁중에서 내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들은것은 1953년 11월에 있었던 의령전투이다. 이 투쟁에 참여했던 동지들중 현재까지 살아 있는이는 몇명 되지 않는다. 53년 11월 지리산 상봉골에 터를 잡고 있던 리영희부대는 4개의 소부대로 구성되여 있었다. 한개 소부대의 인원은 12∼13명, 소부대는 부대장의 성을 따 《박소부대》니, 《안소부대》니 하고 불렀다. 의령전투에 나서던 날 리영희부대장은 두개 소부대는 지리산에 남겨 두고 박소부대와 안소부대 그리고 리춘봉참모장, 박생이련락병, 의무과장 양기출 등 모두 28∼29명을 이끌고 지리산을 출발했다. 출발하기전에 리대장은 전원에게 일전에 로획한 괴뢰군 군복과 신발, 무기를 지급하고 계급장까지 달아 주었다. 오랜만에 새옷과 새 무기로 단장한 부대원들은 사흘분 밥을 해서 짊어 지고 지휘에 따라 낮에는 잠복하고 밤에는 행군하며 동쪽방향으로 사흘을 갔다. 부대원들은 이때까지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사흘째 되던 날 의령군으로 들어 가는 고개에 이르러서야 리영희부대장은 분대장급이상을 모아 투쟁지역과 전술을 설명했다. 괴뢰군으로 가장해 의령읍까지 들어 가서 안소부대는 경찰서를 맡고 박소부대는 《한국청년단》본부를 맡는데 안소부대가 경찰서를 점령해 싸이렌을 5분간 계속 틀면 읍을 해방시킨것으로 알고 읍인민들을 운동장으로 집결시켜 해방대회를 연다는것이였다. 전투후 의무과장 등 3인의 소조는 약품로획을, 다른 소조는 은행 등에서 보급투쟁을 하도록 되였다. 부대원들은 잠복해 있던 야산에서 기동로까지 포복해서 나온후 우선 장군들을 싣고 의령으로 들어 가던 트럭을 세웠다. 장군들을 모두 하차시켰을 때 다시 보급품을 싣고 가던 괴뢰군 트럭이 나타났다. 이 트럭까지 붙잡아 타고 있던 헌병대위를 포로로 해 앞트럭 운전사옆에 앉힌 덕분에 부대원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검문소에서 경례까지 받아 가며 의령경찰서앞까지 들어 갔다. 차가 멈추는 순간 리영희부대장이 뛰여 내리며 소리쳤다. 《부대 하차, 5분간 휴식!》 이를 신호로 부대원 전원이 뛰여 내렸다. 경찰서정문앞에는 망대가 서 있고 그우에는 순경이 카빙총을 들고 서 있었다. 례의 소년련락병 박생이가 미리 지시 받은대로 불시에 순경의 카빙총을 잡아 챘다. 그러자 경찰서정문옆에 물러 서 있던 한떼의 상이군인들이 몰려 와 순경을 마구 때리는것이였다. 이 순간 전투경험 없는 대원 하나가 이외의 사태진전에 놀란 나머지 그만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리영희부대장이 순간적으로 전술을 바꾸어 돌격명령을 내렸고 부대원들은 일제히 경찰서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정전후 4개월이나 지난 때였고 늘 몰려 오던 상이군인들이 또 와서 소란을 피우는것쯤으로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던지 기습을 당한 경찰들은 전혀 대항을 못했고 경찰서는 순식간에 점령되였다. 부대원들은 싸이렌을 울려 읍민들과 장군들을 모두 학교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선전교양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소조들은 무기, 약품, 식량 등 담당한 물품들을 챙겼다. 무려 3시간동안 의령읍을 무인지경으로 휩쓴 리영희부대는 집결장소에 신호탄이 쏘아 올려 진 순간 모두 철수해 트럭으로 의령을 빠져 나와 좌골산골짜기까지 들어 갔다. 애초에 계획된 다음 목적지는 합천이였으나 다음날 전방의 대규모 괴뢰군부대가 《토벌》을 위해 투입됨에 따라 계획은 바로 지리산으로 복귀하는것으로 변경되였다. 의령전투에 놀란 놈들의 총 공세때문에 부대원들은 그후 한달간 지리산으로 들어 가기 위해 치렬한 전투를 벌려야 했다. 밥해 먹을 사이도 없이 들을 지나고 산을 넘었다. 눈앞의 작은 고지를 둘러 싸고 적아간에 누가 먼저 점령하는가 하는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 졌다. 괴뢰군은 포사정거리보다는 가깝고 수류탄투척거리보다는 멀 때 쓰는 착류탄을 비 오듯 퍼부어 대원들이 고개를 들수 없을 지경이였다. 곤난할 때면 항상 그러했듯이 리영희부대장이 선두에 섰다. 엠1소총을 련발로 갈기며 착류탄속을 돌격해 뒤를 따르는 대원들과 함께 모두가 생사가 달린 고지를 점령한것이다. 고지우로 올라 간 대원들은 총을 쏘다못해 손으로 돌을 굴리고 나중에는 발로도 돌을 굴리며 두시간을 싸웠다. 이같이 결사적인 저항에 결국 놈들이 물러 났다. 어둠이 내릴 때 부락으로 내려 간 척후조가 마침 도시락을 운반하던 괴뢰군 하나를 붙잡아 그날 밤 군호를 알아 냈다. 부대는 밤새 그 군호로 놈들의 포위망을 무사통과하여 드디여 금호강앞에 도착했다. 그 강만 건느면 지리산이였다. 대원들은 물이 얕아 지는 곳을 찾아 강을 따라 올라 갔다. 상류로 가니 강은 개울로 변했고 두 개울이 합수하는 곳에 징검다리가 있었다. 막 선두가 개울을 건느기 시작했는데 20∼30m 전방에서 괴뢰군들이 1렬종대로 징검다리를 건너 오고 있는것이 아닌가. 급히 엄호조가 앉아서 엄호사격을 하고 다른 부대원들은 뒤로 돌아 강 왼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를 타고 달려 올라 갔다. 올라 가서 보니 부대가 건너야 할 금호강 건너편에는 서로 손을 잡으면 잡힐듯 한 간격으로 불이 쫙 켜져 있었다. 게다가 저녁내내 부대가 행군해 왔던 방향에서는 트럭들이 계속 전조등을 켜고 달려 와서는 척척 서며 전조등을 끄는데 대체 몇십대나 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사면초가라는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정황이였다. 대원들은 그만 질려 버린듯 했다. 순간 리영희부대장이 《따르라!》는 웨침과 함께 앞서 나갔다. 부대는 조금전에 건너 온 벌판을 다시 건너가 산골짜기로 들어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괴뢰군보초의 《누구냐?》 하는 웨침과 마주 쳤다. 선두에 선 리영희부대장은 황급히 되돌아 부대를 빼라고 손짓하면서 전날의 군호를 댔다. 군호가 틀리자 보초는 당황한듯 다시한번 《누구냐?》 하고 고함치더니 발사했다. 그 순간 리부대장이 쓰러졌다. 경남도당의 유능한 군사간부이자 위험한 전투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것으로 유명했던 리영희부대장은 유격대의 지휘관들이 그랬듯이 부대를 살리고 전사한것이다. 그사이에 뒤로 빠진 부대원들은 골짜기에 엎드려 하루를 보내며 퇴로를 의논했다. 전 부대원이 위험에 처한 정황에서 일부라도 살아서 지리산으로 들어 가기 위해 안소부대와 박소부대가 두 길로 나누어 행동하기로 했다. 안소부대는 리춘봉참모장이 지휘하여 의령전투의 성과를 지니고 지리산으로 들어 가고 박소부대는 근방을 돌며 괴뢰군을 유인하기로 했던것이다. 이후 박소부대는 한달동안이나 근방을 이동하며 놈들을 유인하고 다니다가 최종적으로 8명이 살아 남아 지리산으로 들어 갔는데 안소부대는 대밭에 잠복하여 탈출기회를 노리다가 또다시 괴뢰군《토벌대》와 충돌하여 마지막 한사람까지 영웅적인 최후를 마쳤다. 경남도당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살려 냈던 의사 양기출도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지리산은 백두산과 더불어 오랜 옛날부터 이 나라에 기여 든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애국의 성전터였고 력대 반동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이 나라 백성들의 의기로 넘치던 싸움마당이였다. 1592년 임진왜란때도 그랬거니와 1907년 정미의병때도 그랬다. 여기서 고광순, 안계홍, 심남일의병장들이 싸웠고 일제강점시기에도 여기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 패관산 그 어디나 애국지사들이 흘린 피가 곳곳에 스며 있다. 하거늘 대성골과 노고단, 세석평지와 피아골에 뿌려 진 통일성업의 선혈을 어찌 그저 눈물과 슬픔, 무모한 희생이였다고, 《력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 간 사람들》이라고 모독할수 있단 말인가. 지난 88년∼89년사이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나와 함께 출소한 동지들은 거의가 다 유격투쟁중 체포되여 30∼40년간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중 누구에게서도 스스로가 《력사의 수레바퀴에 깔렸다.》고 하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남에서 출옥후 유격대에 대한 몇권의 책을 읽으며 나는 34년간의 감옥살이에서 살아 난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진실을 한마디라도 말할수 있게 되였기때문이였다. 류례 없는 가렬한 싸움과 수만의 희생으로 엮어 진 지리산유격대의 력사도 다름아닌 이 나라 인민들의 애국충정의 선혈로 씌여 진 력사이다. 나의 눈앞에는 지금도 지리산에서 싸우던 수많은 동지들의 모습이 산 사람들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남조선의 위정자들은 지금 동지들이 묻힌 그 성전의 터에 수많은 유흥지를 만들어 놓고 향연을 벌리고 있다. 허나 그 땅에 스며 있는 동지들의 피는 온 민족의 넋속에 살아 있어 그들이 쓰러지며 부르짖은 최후의 웨침으로 부활되고 있다. 《<김일성장군 만세!>, <통일독립된 내 조국 만세!>》 이제 통일된 삼천리강토우에 그들의 웨침과 웨침이 자유롭게 터져오를 그날까지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것이며 또 계속되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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