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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든것을 전쟁승리를 위하여
전쟁의 첫 나날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그날이 일요일이였다는것을 나는 44년이 지난 오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남쪽땅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잃어 버린 일요일》이니, 《비극의 일요일》이니 하는 6.25전쟁에 대한 낱말들때문이 아니다. 전쟁 전날인 24일과 전쟁 당일인 25일이 나에게서는 그후의 43년간생활에서 마지막토요일, 마지막일요일이였기때문이다. 형무소에서의 긴긴 나날 피고름으로 얼룩진 담벽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그날의 일들을 꿈처럼 되살려 보군 했었다. 1950년 6월 24일, 나는 무척 늦은 밤 새벽이 거의 되여서야 호남동의 집으로 돌아 왔었다. 시당에서 다음해부터 진행할 1951-1953년 3개년인민경제계획에 대한 내각결정침투와 련이어 시당사업에서 주류를 이루는 흥남비료공장의 2개년인민경제계획수행정형에 대한 청취와 협의가 있어서였다. 흥남비료공장에서는 년초에 전국의 로동자들에게 2개년인민경제계획을 4개월 앞당겨 8.15기념일까지 완수할것을 호소했었고 단연 나라의 선두에서 나가고 있었다. 공장은 7월이면 2개년인민경제계획을 앞당겨 완수할 전망이였다. 앞으로의 선전사업방향과 모범로동자들속에서 입당시킬 대상자들에 대해서도 토의하다보니 회의는 밤이 무척 깊어서야 끝났다. 래일은 일요일이니 해가 지붕우에 오를 때까지 마음 놓고 실컷 자자는 말들을 하며 헤여 졌다. 집에서는 그때껏 자지 않고 있었다. 매일같이 늦게 들어 오는데 이미 습관된 어머니와 안해였으나 이날은 너무 늦어서 좀 불안했던 모양이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서야 안심하는 기색들을 지었다. 안해는 아래목에서 자고 있는 현옥을 다독거리며 《3개년계획이 끝날 땐 현옥이가 다섯살이 되겠구만요.》 하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면 현옥이가 막 뛰여 다닐것이라며 세발자전거를 사주어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적수부락에서 화전을 부쳐 근근히 살다보니 이 아들이 어릴 때 잘 사는 집 애들처럼 세발자전거를 타보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리였던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심정이 짐작되여 《아, 자동차라도 사줍시다.》 하고 흔연히 말했고 안해는 《그때는 아무거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해줄수 있을겁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그 밤 세상 모르고 잔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살배기 현옥이뿐이였다. 그날 우리 식구가 잠자리에 누운것은 날 밝을무렵이였다. 아마 그때 벌써 38°선에서는 전쟁의 총포성이 터졌을것이나 우리 가정은 일요일을 앞둔 토요일의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모름지기 그 시간에는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이 마찬가지였을것이다. 얼마 잔것 같지도 않은데 《인모야, 인모야.》 하는 어머니의 다급한 부름이 나를 깨웠다. 여느 때에는 《현옥애비》라고 부르며 반말을 하지 않으시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며 《저 소릴 들어 봐라. 전쟁이라는구나.》 하고 허둥거렸다. 방송에서는 남조선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북쪽 우리 땅으로 침공을 개시했다는 내무성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을 후들후들 떨며 어쩔바를 모르고 서 있었고 안해는 질린 얼굴로 현옥이를 꼭 부둥켜 안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 입고는 어머니와 안해에게 준비하고 있으라 이르고 집을 뛰쳐 나왔다. 무엇을 준비하라고 했는지는 나도 알수 없었다. 시당에는 벌써 다들 나와 있었는데 내가 들어 섰을 때는 내무성보도가 다시 방송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으로만 인사를 주고 받으며 긴장하여 방송을 들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 보도 금 6월 25일 이른새벽에 남조선괴뢰정부의 소위 국방군들은 38°선 전역에 걸쳐 38°선이북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진공을 개시한 적들은 해주방향 서쪽에서와 철원방향에서 38°선이북지역으로 1km 내지 2km 침입하였다.… 지금 공화국경비대는 진공하는 적들을 항거하여 가혹한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다.…》 너무도 엄청난 사태여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때 우리의 생각은 《끝내 일어 나고야 말았구나.》 하는것이였다. 남조선에서 미국에 의해 1946년에 만들어 졌던 《국방경비대》와 《해상경비대》가 정규군인 《국방군》으로 개편되면서 38°연선지대에서의 무장도발이 격심해 졌다는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1948년을 거쳐 1949년에 들어 서면서 무장도발은 무장침입으로 번져 졌고 송악산전투, 은파산전투와 같은 어마어마한 국부적인 전쟁행위들도 빚어 졌다. 그 무장침입의 규모는 나날이 커졌고 리승만의 《북진통일》소리도 더 높아 졌으며 1950년에 들어 서면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 속에서 1950년 6월 11일, 평화적조국통일추진제의 호소문을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사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3명의 조국전선파견원동지들이 38°선의 려현역으로 나갔는데 남측은 그들을 체포하여 《월경죄》를 들씌웠으며 군사재판에 넘기겠다는 폭언까지 했다. 돌이켜 보면 예로부터 아무리 적국들사이라도 사신만은 체포하거나 손 대는 일이 없었다. 남측이 평화제의를 갖고 간 한겨레의 사절들을 처형하겠다는데는 격분에 앞서 아연함을 금할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벌써 6.25전쟁의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그때껏 나와 나의 동지들은 순진하게도 남측에서 우리 사절들의 진의도를 알면 다르게 나올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6월 19일에는 우리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 조선립법기관으로 련합하자는 제의를 담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서가 방송으로 알려 졌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으로 리승만괴뢰도당은 전쟁의 총포성을 터뜨린것이였다. 그날 저녁에 인민군부대들과 경비대가 38°선이북지역에 침입한 적들을 완전히 격퇴하고 반공격전으로 넘어 갔다는 내무성보도가 알려 졌다. 《금 6월 25일현재 공화국 인민군대와 경비부대들은 많은 지역들에서 38°선이남지역으로 5km∼10km 전진하였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불안한 하루밤이 지난 다음날 전체 인민들에게 보내는 김일성장군님의 방송연설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확성기앞에 모여 들었다. 이미 귀 익어 진 장군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하고 침착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리승만역도들이 일제시대와 같은 통치제도를 공화국북반부에까지 실시하고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다시 지주들에게 돌려 주며 조선인민을 미제의 노예로 만들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시였다. 나는 당일군으로서 장군님의 연설을 가지고 다니며 선전사업을 하였기때문에 그날의 방송연설을 거의 뜬금으로 외우다싶이 했다. 특히 다음의 말씀은 이후 수십년동안 두고 두고 잊혀 진적이 없었다. 《리승만매국역도가 일으킨 내란을 반대하여 우리가 진행하는 전쟁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통일위업을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장군님의 말씀은 전쟁시기는 물론 한평생을 두고 나의 믿음으로 되였으며 신조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40여년이 흘러 간 1990년대, 형무소에서 나온 나에게 남조선의 한 신문기자가 《당신은 지금도 6.25전쟁이 통일위업을 위한 전쟁이였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주저없이 《그렇다.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실로 1950년 전쟁은 미국 그리고 친미파로 둔갑한 친일파들, 사대매국세력과 자주와 애국, 민주세력간의 전쟁이였다. 리승만《정부》의 사대매국적체질은 리승만재임기간 8명의 륙군참모총장이 전부 일본군과 괴뢰만주국군출신이였다는것만으로도 알수 있다. 리승만부터가 일찌기 상해림정때에 벌써 조선은 후견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하여 《리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고 단재 신채호가 락인한 인물이다. 나는 남쪽땅에서 《6.25전쟁은 북이 일으킨 동란》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지어 《북의 <빨갱이>들이 쓰딸린의 지령으로 온 조선땅을 크레믈리에 갖다 바치려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하는데는 아연함을 금할수 없었다. 이야말로 적반하장격이라고 하겠다. 더욱 기가 막히는것은 이것이 당시 미국의 거수기로 다수를 이루고 있던 유엔의 개입으로 하여 기정사실화되여 버린것이다. 전쟁 3일만인 6월 28일의 서울해방, 다음의 2개월 남짓한 기간에 남반부 거의 전역을 해방시킨 인민군대의 파죽지세 같은 공격, 이 류례 없는 전승을 남에서는 6.25전쟁을 북이 일으켰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삼고 있다. 먼저 일으켰기때문에 단숨에 락동강까지 밀고 나갈수 있었다는것이다. 그들은 6.25당시 남쪽에는 전쟁에 준비된 군대가 없었다고 말한다. 대포도 한문 없었고 나중에는 군대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까지 한다. 이상한것은 그들이 6.25당시 《국군》은 계획보다 5만을 초과한 15만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1949년 한해동안에만도 15만여정의 보총과 탄약, 수천문의 각이한 구경의 대포와 근 80만발의 포탄, 수천대의 군용차량이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력사적사실도, 1950년에 이르러서는 구축함을 비롯한 99척의 함정과 미국제 비행기로 무장된 해공군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 버리고 있는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6.25전야에 38°선을 시찰한 덜레스가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당신들을 대항하지는 못할것이다.》라고 연설한것은 양복을 입은 사민들앞에서였는가. 또한 송악산, 은파산으로 총포성을 울리며 진입해 들어 왔던 수천명의 인원은 군대가 아니였고 포성을 울린것 역시 대포가 아니였단 말인가. 력사에는 침략자가 첫 반타격에 토붕와해되듯 해버린 사실이 한두번만 아니게 있다. 나는 1959년 1차 출옥되여(이렇게 말할수밖에 없다.) 부산에 있을 때 《아리랑》이라는 잡지를 뒤적거려 본적이 있었다. 몇장 들치니 미국제 땅크에 올라 선 녀군땅크병의 사진이 있었는데 간지럼이라도 타는듯 한 표정으로 《이대로 평양까지 쭉- 밀고 올라 갔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는것이 씌여 있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내 머리속에 떠올랐던것은 6.25전야에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하고 떠들었던 리승만, 김석원의 말들이였다. 미국제 무기를 쥐고 보면 그런 현훈증에 걸리기마련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6.25때 미국제 무기에 현혹되였던 괴뢰군은 첫 반타격에 물 먹은 흙담처럼 무너져 버렸다. 그 원인을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북의 불의공격》이라는 거짓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은 6.25전쟁이 미국과 친일친미세력 즉 외세, 사대매국세력과 자주, 애국세력간의 전쟁이였다는데서 찾아야 한다. 북에서는 리승만역도의 정체를 어떤 선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38°선이북을 수시로 침입한 괴뢰군의 침략행위를 통하여 잘 알게 되였다.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기간에만도 38°선이북지역에 432회에 걸쳐 5만여명의 괴뢰군이 침입해 왔으며 13개 군 45개 면 136개 리에 피해를 입혔다. 비행기와 함선의 침입도 100여회를 넘었다. 그때마다 공화국경비대의 반격이 없었더라면 괴뢰군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 갔으리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쟁은 이미 1949년에 시작된것이나 다름 없었다. 현대적무기로 장비한 수만명 군대의 때 없는 침입, 수천평방키로메터땅의 전장화와 수많은 인명피해… 그것은 단순한 무장충돌이 아니라 전쟁이였다. 되풀이하지만 전쟁은 이미 1949년에 시작되였던것이며 6.25는 다만 인민군대와 경비대의 반공격에서 계기점으로 되였을뿐이라고 말할수 있다. 전쟁의 도발자는 이런 시점에서 찾아야 한다. 6.25의 총포성은 쌓이고 쌓여 오던 우리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일제때 같은 암흑의 시대를 몰아 오려는 자들, 내 땅, 내 공장, 내 나라를 빼앗으려는 자들, 행복한 《황금시절》을 노예생활로 바꾸어 놓으려는 자들에 대한 미증유의 분노였다. 바로 이 분노가 무서운 힘으로 되여 2개월 남짓한 기간 남조선 거의 전역을 해방시키는 전광석화 같은 류례 없는 진공속도를 출현케 했다. 나는 그 나날 선전사업을 하느라고 특별히 애 먹었던 일이 없다. 《모든것을 전쟁승리를 위하여!》 이 말 한마디와 장군님의 방송연설이면 다른 말이 더 필요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평범한 몇마디로써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밝혀 주신것이였다. 방송연설은 온 나라를 불러 일으켰다.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탄원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느라고 나는 애를 먹었다. 그들의 뜻대로 그냥 방임해 두었더라면 흥남시안의 모든 공장들이 며칠사이에 텅텅 비고 말았을것이다. 미제와 리승만이 일제때 같은 세상을 도로 만들자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일이나 하겠는가면서 쌈 싸우듯 대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들에게 일을 잘하여 전선원호를 잘하는것도 전선에서 싸우는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루루이 타이르군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부터가 전선으로 나가고 싶었다. 시당위원장에게 제기했다가 욕 먹은것만도 수차례, 선전부장부터가 그러니 무슨 선전사업을 제대로 하겠는가면서 역습을 하는데는 할말이 없었다. 그런 나날속에 선전부부장 강현철동지가 전선으로 소환되여 떠났다. 강현철동지는 그동안 38경비대에서 희생된 동생의 원한으로 여윌지경이였다. 그를 바래우는 동지들은 모두 나처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의 건투를 빌었다. 《승리의 날 다시 만납시다.》 하는 우리의 말에 강현철동지는 씩씩하게 꼭 같은 말로 대답하며 떠나갔다. 그때 떠나는 사람이나 바래우는 사람이나 《승리의 날 다시 만납시다.》가 인사로 되여 있었으니 승리의 날이란 통일의 날이였다. 통일의 날은 확실히 멀지 않은 앞날이라고 우리는 믿었다. 사실 미국만 아니였으면 그 믿음이 현실로 되였으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7월에 들어 서면서 미군폭격기들이 수십대씩 달려 들어 흥남지구에 대한 맹폭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주민지구고 공장이고 가림없이 폭탄과 기총탄을 퍼부어댔다. 폭격현장에 나갔다 온 어머니는 《그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하시면서 가슴 아프게 우셨다. 녀인들과 아이들을 비롯한 많은 평화적주민들이 살상되였고 수많은 주민가옥들이 파괴되였다. 미군비행기들의 맹폭격이 있은 다음날 방송은 인민군어뢰정대가 주문진해전에서 네척의 어뢰정으로 미군의 중순양함 한척을 격침시키고 경순양함 한척을 격상시켰다는 보도를 전했다. 《이 사람 현옥애비, 순양함이라는게 큰가?》 하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순양함이 《떠다니는 섬》이라 부를만큼 큰 배라는것과 왜놈들은 그렇게 떠들던 태평양전쟁때 숱한 어뢰정으로도 순양함을 격침시킨 일이 없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어머니는 《그놈들은 왜 우리 나라에 와서 그런다더냐. 바다건너 제 나라에서 살지 않구.》 하고 저주를 퍼부으시다가 문득 현옥을 가슴에 안으시였다. 그때 그놈들의 폭격을 막아 나서시듯 어린 현옥을 떨리는 손으로 부둥켜 안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 날 풍산에서 같이 일하던 송중명이 찾아 왔다. 전선으로 소환되여 가던 길에 들렸다는것이다. 체소한 몸에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여는적이 없어 그가 있다는것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 조용한 사람이였다. 무척 반가왔으나 옛날의 회상도 나눌 사이가 없었다. 헤여 지면서 우리는 《승리의 날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굳게 손을 잡았다. 그때 우리의 상봉이 승리의 날이 아니라 준엄한 시련이 기다리는 지리산에서 이루어 지리라고야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전쟁은 점점 더 치렬해 졌다. 전선에서는 미지상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있었고 미군비행기들의 폭격과 미군함들의 함포사격이 흥남지구를 부단히 파괴했다. 그러나 전선에서의 줄기찬 승전소식은 이런저런 희생에 대한 가슴아픔을 승리에 대한 신심으로 다져 지게 했다. 떠나간 사람들의 몫까지 하느라고 밤낮을 모르고 뛰여 다니던중 미24사를 띤사단장이하 완전히 전몰케 한 대전해방전투소식을 들었다. 그 통쾌한 승리의 소식을 들은 다음날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소환명령을 받았다. 마침내 나도 전선으로 나가게 된것이였다.
어머니와 안해
1950년 7월 23일, 내가 평양으로 떠나던 날 아침, 현관에서 신들메를 졸라 맬 때까지도 안해는 두살배기 현옥을 안고 문설주에 붙어 서서 내내 눈물만 흘렸다. 아이어머니가 되였다고는 하나 아직 나이가 어렸고 또 이런 리별은 처음이였다. 지난 밤에는 떠날 때 울지 않겠다고 부디부디 맹세하더니 내가 방문을 열고 나설 때는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것이였다. 나는 위로할 말을 찾을수 없어 신발끈만 조여 매는데 굳어 진 얼굴로 나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순임아, 울지 말아라. 내가 열여덟에 저 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후 일곱달만에 유복자로 낳아 오늘까지 저 애만 바라보고 수절하였는데 하늘이 무심찮아 꼭 이기고 살아 돌아 올게다.》 43년만에 돌아 온 나의 오늘이야말로 그날 어머니의 축복이 그대로 살아 있어 이렇게 차례진것이나 아닌지.… 안해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대문간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대문간에서 낮은 소리로 안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못 돌아 와도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하오. 어머니처럼 혼자 늙지 말고 좋은데로 시집 가오.》 이 말은 나의 진심이였다. 청상으로 수절해 온 어머니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순간에 안해한테 나와 같은 말을 했으리라고 믿는다.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안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 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딜 가도 날 잊을 사람이 아니니 나도 결코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나는 안해를 진정시키려고 《걱정 마오. 승리하고 돌아 올테니. 현옥이 다음 돌잔치는 통일된 땅에서 하게 될거요.》 하고 말해 주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한나산까지 나갔다가 돌아 와서 몇달후엔 다시 이 대문으로 들어 서게 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하기에 나는 현관에 서계신 어머님께 마지막목례를 드릴 때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물없이 서 있었으나 그 얼굴에는 울듯웃을듯 향방 없는 표정이 굳어 져 있었고 떨리는 입술을 감추시려는듯 입을 꽉 다물고 계셨다. 두눈은 나의 얼굴에서 못 박혀 떨어 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눈길이 부딪치자 어서 떠나라는듯 머리를 끄덕여 보이셨다. 그때의 어머니모습, 웃음으로 바래주려면 도리여 울음이 나올가 굳어 졌던 그 얼굴, 눈물없이 지켜 보던 처절한 그 눈빛… 눈물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굳센 그 모습이 나의 떠나는 걸음을 한결 쉽게 해주었다. 어머님께서 눈물을 보이셨더라면 걸음걸음이 천근같이 무거웠을것이다. 《당신은 모르실거예요. 그때 어머님께선 당신이 보이지 않게 되자 돌아 서시며 그냥 우시였어요.》 이것은 내가 집으로 돌아 와 며칠 지났을 때 안해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때가 어머니와의 마지막리별이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울듯말듯 굳어 져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삼삼히 떠오르며 가슴을 허빈다. 그때 만일 그것이 마흔세해동안을 기약하는 걸음이며 영원한 리별인줄 알았더라면… 허나 그것을 알았어도 나는 결연히 떠났을것이며 어머니는 눈물을 참고 이 아들을 굳세게 바래주었을것이다. 통일독립된 조국을 위하여 이 땅의 아들들이 걸어야 할 길이였고 이 땅의 어머니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였기때문이다. 그 나날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떠나는 자식들의 발밑에 눈물 아닌 굳은 마음을 깔아 주며 아픈 가슴을 달래였던가. 나는 추억속에 살아 있는 그날의 어머니모습에서 이 땅의 수많은 영웅들을 키워 낸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는듯 하다. 어머니라는 이름부터가 영웅이라는 부름과 대등한것인데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바친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어떻게 불러야 마땅할가. 어머니가 이 아들의 소식을 마지막까지도 아시지 못한채 떠나가신것이 더 가슴 아프다. 림종의 시각까지 《우리 인모는 꼭 돌아 온다.》고 하셨다는 어머니… 말년에는 인민반장을 하며 유감 없는 여생을 보내셨다는것이 자그마한 위안을 줄뿐이다. 새벽이면 벌써 인민반을 한바퀴 돌아 보며 진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도맡아 했다고 한다. 량주가 다 직장출근하는 집에는 부식물을 사다 주고, 탁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찾아다 씻어 주고, 먹여 주기도 하고… 소식 모르는 이 아들의 몫까지 하려고 그리도 극성이시였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딸 삼아 며느리 삼아 집안의 기둥으로 의지하면서 살아 온 나의 안해, 그 역시 어머니를 고이 모시면서 43년을 하루같이 이 남편을 기다려 주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 못하는 딸 하나를 키우며 43년간을 수절해 온 안해의 주름 잡힌 얼굴과 흰머리칼을 보느라면 실로 감회가 끝이 없다. 안해를 볼 때면 저절로 남쪽땅에 있을 때 형무소, 교도소의 간수, 교도관들이 《빨갱이들의 안해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렬녀들이냐.》 하고 악에 받쳐 떠들던 소리가 생각난다. 어머니, 안해의 믿음과 기다림을 생각할 때면 나는 부지중 벽에 걸린 족자에서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동지를 우리 당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친필을 보게 된다. 리인모는 반드시 우리 당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 하셨다는 김정일동지, 43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으시고 믿어 주고 기다려 주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 그 하해 같은 믿음과 기다림이 나의 어머니를 말년까지 절망 않게 했고 나의 안해를 렬녀로 만들지 않았겠는가. 바로 조선의 혁명가들은 모두 그런 믿음과 기다림을 지니신 장군님과 김정일동지에 의하여 자라났기에 혁명가들의 안해들도 하나같이 렬녀들인것이 아닌가. 이 말로써 나는 남쪽땅의 형무소, 교도소의 간수, 교도관들에게 대답을 주고 싶다. 이 땅에 고유한 그런 특이한 믿음과 기다림을 나는 이미 고인이 된 나의 외삼촌에게서도 찾아 보게 된다. 안해의 말에 의하면 외삼촌은 내 소식을 바이 알수 없었던 때에도 《인모는 죽지 않아, 꼭 살아서 돌아 온다.》고 어머니와 안해를 위로하며 믿음을 허물지 않았다고 한다. 나를 아들처럼 사랑해 주었고 투쟁의 길로 떠밀어 준 외삼촌의 그 믿음은 지금도 나를 가슴 뜨겁게 만든다. 안해는 지금도 내옆에 앉아 있다. 한시도 옆에서 떠나지 않으며 내가 몇줄씩 쓰는 수기를 넘겨다 보기도 하고 내가 불러 주는것을 받아 쓰기도 한다. 때로는 낡은 투의 말이 많고 옛날의 글 같다고 유감을 나타낸다. 나는 안해의 말대로 《오늘의 글》로 가까이 가려고 애 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수기라기보다 나의 동지들의 수기이며 믿음과 기다림의 수기이기때문이다. 한창 옛 추억을 더듬으며 펜을 놀리다가 머리를 들면 방안에 있는 어느 쏘파에는 어머님도 앉아 계시고 《그래, 난 믿었다. 네가 이렇게 살아서 돌아 올줄 믿었다.》 하고 머리를 끄덕이시는듯 한 느낌을 금할수 없다.
전선으로!
평양에 도착한것은 다음날이였다. 첫눈에도 평양은 흥남지구보다 더 맹폭격을 당한것이 알렸다. 합당대회때와 중앙당학교 다닐 때 낯 익혔던 여러 거리들이 페허로 변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도 공습경보가 울렸고 나는 방공호로 쓰는 지하실에부터 들어 가야 했다. 폭격이 끝나고 나와 보니 또 하나의 거리가 페허로 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활기에 넘쳐 있었고 아이들은 《나가자 인민군대》라는 노래를 신이 나서 부르며 다녔다. 가는 곳마다에 남조선해방지역들을 붉은 기발로 표식한 지도가 붙어 있었다. 지체없이 중앙당에 찾아 들어 가니 급히 인민군 문화부로 가라고 했다. 문화부로 갔더니 《중앙통신》소속 문화부 종군기자로 임명되였다고 알려 주었다. 그때 인민군 문화부에서는 풍산내기의 한 동무가 신문사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풍산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동요를 써서 《아동동아》에 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종군기자로 추천한 모양이였다. 《좋은 기사를 많이 써보내주시오.》 하고 그는 나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이렇게 나는 인민군종군기자가 되여 전선으로 떠나게 되였다. 내가 자랑거리가 될것도 없는 어느 고망년적 《아동동아》에 실린 동요이야기까지 끌어 내는것은 남조선에서 43년간 너무도 많았던 종군기자가 아니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의심 많은 론의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서이다. 전선은 그때 바야흐로 락동강지역으로 좁혀 들어 가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막 떠나려는데 따발탄을 몇궤짝만이라도 싣고 가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길에 나서자 온통 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가는 자동차와 달구지대렬이였다. 길좌우의 마을들은 대개 폭격에 페허로 되였으나 그 페허속에서도 군수물자를 실은 달구지들이 줄 지어 나오고 있었고 아이들의 힘찬 노래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진짜 전 인민적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내가 찾아 가야 할 인민군 6사는 이미 진주방향으로 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6.28해방을 맞은 서울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거리들에 나붙어 있는 조선인민군협주단의 부민관공연광고들이 인상적이였다. 거리로는 수십명씩 때로는 수백명씩의 청년대렬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해 가고 있었는데 전선으로 탄원한 의용군대렬이였다. 어느 사이 배웠는지 그들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나가자 인민군대》를 목청껏 부르며 연도에서 바래주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날 만납시다!》 하고 손을 저었다. 그 나날의 인사는 북과 남이 꼭 같았다. 그때는 북과 남이 하나로 된 통일시간이였다. 왜놈들과 친일파들이 활개치던 옛 서울과는 딴판이였다. 여러 상점과 가게방에서는 영어간판들을 조선말로 쓴 간판으로 바꾸느라 분주했다. 창업이래 처음으로 리조도읍이 덕지 껴온 봉건의 때와 일제식민지때를 벗고 있는셈이였다. 해방된 서울을 돌아 보니 주병포의 생각이 더 간절해 졌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 상봉은 얼마나 감개무량하였을것인가! 전쟁터에서 종군기자가 서야 할 곳은 항상 제1선이다. 나는 더 지체 않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때는 벌써 미군비행기들의 폭격때문에 낮에는 차가 갈수 없어서 밤에만 달렸다. 낮에는 차를 대피시키고 주변의 마을을 다니며 취재도 했다. 길가의 전화가 휩쓸어 간 논밭들에는 어데를 물론하고 미군이나 괴뢰군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불 탄 군용트럭들과 못 쓰게 된 대포들이 너저분하게 박혀 있었다. 나는 후일 남조선출판물들에서 6.25당시 《국군》에게는 대포도 없었다는 글을 읽었을 때 이때에 본 광경들이 회상되여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릿치웨이도 자기 글에 그렇게 썼었다. 그때 나는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아 인디안추장처럼 차린 그의 사진을 보며 《그 량반 참 거짓말에 재간 있군.》 하고 부지중 생각했다. 들으니 후에 나토군사령관까지 지냈다는데 그러루한 거짓말을 얼마나 더 했는지는 모르겠다. 평택쯤에 이르렀을 때 한 농민이 도랑에 거꾸로 박혀 있는 대포에서 바퀴를 떼내느라고 땀 흘리고 있었다. 왜 뜯어 내는가고 물었더니 달구지바퀴로 쓰려고 뗀다면서 《달구지바퀴로야 그저그만이예요. 양코들이 바퀴 하난 잘 만들어요.》 했다. 자기들이 만든 대포에 대한 조선농민의 이 평가를 들었으면 아메리카 칼 앤드파운드리회사가 만족을 느꼈을지… 농민은 달구지바퀴가 든든해야 전선원호도 잘할수 있다며 《양코놈들을 다 내쫓고 내 땅에서 실컷 농사를 지어 봐야겠어요.》 했다. 내가 땅을 받았는가고 하니 그는 대답대신 토지분여증서를 꺼내 보이며 한푼의 부채도 없이 내것으로 된 땅이라고 했다. 리승만의 농지개혁때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 이번에는 맨주먹으로 부자가 되였다는것이였다. 다른 한 마을에서는 여러명의 농민들이 잘 깎은 말뚝을 들고 모여서 있는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그들 복판에서 식자나 있어 보이는 로인이 말뚝에다 이름과 밭 몇천평, 논 몇천평이라는 글을 붓으로 써주고 있었다. 분여 받은 논밭머리에 박을 말뚝이였다. 길에는 《땅은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들이 붙어 있었다. 마치 4년전의 나의 고향마을에 간 기분이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게 진짜 토지개혁이예요. 로승만의 농지개혁은 가난만 더하게 했어요.》하고 말했다. 늙다리 리승만이라는 의미에서 로승만이라고 불렀다. 이것만으로도 리승만이 인민들에게서 얼마나 증오 받았는가를 알수 있다. 나는 가는 곳마다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이 실시된 남쪽땅의 새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런데 하마트면 나는 전선에도 미처 못 가보고 황천객이 될번 했다. 평택을 지나 대전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미군비행기의 폭격때문에 불도 못 켜고 달리던 차가 갑자기 요동을 쳤다.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갈림길에 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미군비행기가 그 다리를 끊으려고 폭격을 한것이 빗나가 한t짜리 폭탄이 대전 가는 길에 떨어 져 큰 구뎅이가 생겼던 모양이다. 그걸 모르고 어둠속에서 내달리던 우리 트럭이 그만 그 구뎅이에 빠져 뒤집히고 만것이였다. 맨밑에 깔린 내우에 따발탄궤짝이 덮이고 그우에 다시 차무게가 내리 눌러 정신이 희미해 져 갔다. 눈앞에는 집 떠날 때 바래주던 어머니의 얼굴과 울던 안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안해를 두고 어머니도 모르게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도 스쳐 갔다. 다행히 우리 뒤에서 오던 트럭이 곧바로 멈춰 서 뒤집힌 차를 끌어 낸 덕분에 무사할수 있었다. 내가 얼얼한 몸을 움직여 보며 앉아 있느라니 차를 끌어 내준 인민군전사가 《남해바다가 지척인데 여기서 죽으면 되겠시꺄?》 하며 롱을 했다. 또 한 전사는 한번 죽을번 했으니 이제는 오래오래 살거라고 했다. 아마도 그의 예언이 옳았던것 같다.… 얼마후 나는 다시 차에 올라 당시의 최전선인 경남 진주까지 내려 갔다. 진주에서는 각 농촌마다 인민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농촌위원회의 주도로 토지개혁이 한창 진행중이였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은 해방지역에서 진행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였는데 나에게는 주요한 취재거리이기도 했다. 진주의 린근 각 농촌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열성적인 농민들을 보니 4년전 고향 풍산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될 때 그렇게도 기뻐 하던 순박한 고향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으로 밤낮을 모르고 함께 뛰여 다녔던 동지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지내는지, 나처럼 전선으로 나온 축들이 많을것이라고 생각하니 승리의 날에는 남해바다가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믿어 졌다. 진주에서 있은 한가지 우스운 일이 생각난다. 마을에 나가 취재하는데 박령감이라고 불리우는 농민이 억지로 집으로 끌고 가 식사를 차려 놓았다. 먹음직스러운 국수였다. 고향에서부터 국수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대뜸 저가락을 들고 국수를 한입 듬뿍 떠넣었다. 그 순간 어찌 뜨거운지 나는 와뜰하고 놀랐다. 펄펄 끓는 고기국에 국수를 말았는데 기름이 많이 덮여 김이 오르지 못하니 뜨겁지 않게 보였던것이다. 알고 본즉 진주국수란 원래 이렇게 뜨거운 고기국에 마는데 뜨거울수록 잘 대접하는것이라고 한다. 추운 고장인 풍산에서는 찬국수를 즐기는데 더운 고장인 여기 진주에서는 뜨거운 국수를 좋아 한다는것이 억지스럽게 들리지만 그것은 사실이였다. 지금도 진주국수를 생각하면 불을 삼키는듯 하던 느낌이 되살아 나며 실소를 금할수 없다. 또한 그것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고 환영해 주던 진주사람들의 뜨거운 정으로 안겨 오며 가슴을 젖어 들게도 한다. 전쟁은 점점 더 가렬해 지고 있었다. 전선이 이동되여 제6사단이 경남 사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취재관계일로 6사단 문화부에 갔다가 진주로 돌아 오느라 남강다리로 향하고 있었다. 막 다리를 건느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미군비행기편대가 몰려 오는것이 아닌가. 갑자기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뛰다보니 다리옆 폭격에 타버린 빈터에 가마솥이 하나 굴러 있는게 눈에 들어 왔다. 이미 남강다리는 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하도 급해서 나는 그만 가마솥을 둘러 쓰고 웅크렸다. 폭격이 끝난 다음 가마솥을 벗고 일어 서니 가마솥검댕이로 온몸이 새까맣게 되여 버렸다. 옷을 벗어서 남강물에 씻어 풀덩굴에 널어 놓고 앉아 나는 우리가 치르고 있는 전쟁에 대해 생각했다. 파괴된 다리와 여기저기 마을에서 타오르는 연기기둥을 보느라니 불현듯 미국놈들에 대한 증오로 치가 떨렸다. 미국과의 전쟁, 우리는 《세계최강대국》 미국에 맞서 조그만 내 조국을 지켜야 하는것이다. 허나 나는 그때 미구에 미국만이 아닌 15개국 군대가 밀려 들고 전쟁이 3년을 끌게 되리라는것도 그리고 40여년의 긴긴 세월이 흘러서야 다시 안해와 친지들을 만나게 되리라는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명에 간 김동지
찌는듯 한 무더위와 적기의 맹폭격속에 우리 인민군대가 전선을 동남으로 밀고 나가던 어느 날, 나는 숱한 경난을 겪느라고 한주일나마 늦어 도착한 《로동신문》을 펼치다가 검은테를 두른 기사를 보았다. 당중앙위원회에서 낸 부고였는데 뜻밖에도 일제때부터 활동을 해온 오랜 혁명가 김동지가 리승만역도들에게 학살되였다는 부고였다. 그때 나의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일제식민지하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김동지가 일제가 망한 오늘에 와서 학살 당하다니… 나의 눈앞에는 김동지와 함께 주병포의 얼굴이 얼른거렸다. 일제의 총칼앞에서도 죽지 않은 그들이 왜 오늘에 죽어야 했는가. 그들을 죽인 총탄은 리승만역도의 손에서 발사되였으나 그들을 학살한것은 미국이였다. 나는 기어이 미제를 내쫓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것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내가 김동지를 알게 된것은 광복전 주병포를 통해서였고 서울지구 그룹의 주요관계자로서였다. 김동지는 땅 한뙈기 없는 충청북도 충주군 극빈농가에서 태여났으며 자기의 생활체험으로부터 사회주의사상에 공명하게 되였고 투쟁대렬에 들어 선 동지였다. 그는 리승만역도에게 체포되여 갖은 악형을 당하던 끝에 서울로 인민군대의 포성이 가까와 지던 6월 27일 새벽에 학살 당하였다. 하루만 더 살았어도 그는 6.28서울해방의 기쁨을 맛 볼수 있었을것이다. 나는 그를 해방전 서울에서 주병포와 함께 있던 충신동하숙집에서 두번 만나보았다. 그는 풍산에서의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무척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풍산에 대한 그의 관심이 김일성장군님의 항일유격대에 대한 관심, 조국광복회조직에 대한 관심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광복후에도 그는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줄기차게 싸워 왔다. 그의 최후에 대하여 남조선의 한 출판물에는 이렇게 썼었다. 《륙군특무대장 김창룡과 그 휘하 헌병들은 남산헌병사령부 대문으로부터 150m 상거한 개천근방 소나무에 그를 결박하였다. 결박된 그는 북향으로 몸을 돌리고 수갑을 채운 손을 세번 높이 들었다 내렸다. 수갑을 채운 손을 세번 높이 든 이 무언의 동작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였다.》 헌병들이 감방에서 끌어 낼 때 총탁으로 입을 때려 복도나 도중에서 말할수 없게 된 선생이 왜 최후의 순간에 북녘하늘을 우러러 수갑찬 손을 세번 연거퍼 쳐들었는지를 남조선출판물들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나로 말하면 감옥과 형무소에서 그런 동지들의 무언의 동작을 한두번만 본것이 아니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 평양하늘, 통일연에서 목청껏 부르고 싶었던 《김일성장군 만세!》… 나는 북쪽에 와서야 김동지의 최후와 유언에 대하여 알게 되였고 그의 부인과 딸들의 행방을 알게 되였다. 김동지는 적들의 고등군법회의법정에서 《어제는 일제에게, 오늘은 미제에게 나라를 팔아 먹고 있는 매국역적의 무리들인 네놈들이 감히 애국자들을 어찌 재판할수 있단 말이냐.》 하고 통쾌하게 공박했다고 한다. 김동지가 사형전날에 남긴 유언은 옆감방에 있던 동지들에 의해 전달되였는데 그는 유언에서 마음에 걸리는것은 통일연에 장군님을 모시지 못하고 가는것, 장군님을 인생이 다할 때까지 모시지 못하는것, 장군님의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지 못한것이라고 했다는것이다. 그는 최후를 각오했을 때 안해에게 《당신이라도 살아서 감옥문을 나서게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으로 가오.》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부인은 6.28서울해방후 만삭이 된 몸이였으나 북행길에 올랐다. 그때부터 김동지의 부인과 딸들은 장군님의 배려와 관심속에 살았다. 장군님께서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켜 감옥에서 받은 고문의 후과를 가시게 했고 전략적일시적후퇴의 길을 걸을 때는 운반수단과 함께 이불까지도 보내주시였다. 전후에는 모란봉아래에 처음 세운 다층문화주택에 들었고 지금은 중구역 류성동의 고층주택에서 살고 있다. 장군님께서는 벌써 한두번만 아니게 부인을 만나주시여 김선생은 남조선에서 잘 싸운 애국자라고 높이 평가해 주시였다. 또한 김동지의 딸들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배려속에서 남산중학교를 다녔고 각각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대학을 다녔으며 지금은 당과 국가기관의 여러 직무에서 자기 사업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 김동지는 오늘 형제산구역 신미리에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여 있다. 그의 흰 화강석비에는 《남조선혁명가》라고 붉은 글자로 새겨 져 있다. 사대매국노들과 반공광신자들은 그의 분묘마저 없애 버렸으나 선생은 여기 평양의 애국렬사릉에서 영생하고 있다. 혁명가들이 영생하는 땅, 영생을 안겨 주는 땅 내 조국, 나는 내 조국의 남쪽땅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친 나의 동지들이 영생하는 참된 조국이 되기를 바란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1950년 8월 중순 인민군부대들은 락동강도하를 개시했다. 내가 나가 있던 6사는 8월 7일에 2만 4천여명의 미군과 수백대의 땅크, 대포가 동원된 《킨작전》을 짓부셔 버렸다. 그중의 족제비고지라고 부르던 342고지전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족제비고지는 미군 5련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인민군대의 세찬 공격에 지탱하기 어렵게 되여 미해병려단의 대대들이 급파되여 왔다. 그런데 미해병려단이 고지아래에 도착했을 때 미5련대가 차지한 산중턱에서 총탄이 마구 쏟아 졌다. 해병려단의 대대들은 총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인민군부대는 낮에 적들을 극도로 피로케 한 다음 대번에 총 한방 쏘지 않고 고지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적들을 고지꼭대기로 올리 몰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증파된 미해병대를 접근시킨 다음 몰사격을 퍼부은것이였다. 고지우에 포위된 미군은 공중으로부터 물과 탄약을 공급 받는다는것이 3분의 2는 인민군진지에 떨어 졌다. 아군전사들은 적기들을 보고 《공급소》라고 불렀다. 그와 함께 미야포대대들을 소멸한 봉암리도로전투, 미림시해병대대를 전몰시킨 시천전투 등은 참으로 대승한 전투들이였다. 락동강이 돌파되자 미군은 자기들도 제2차대전시기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로 처음이라고 한 대폭격을 매일같이 들이댔다. 락동강의 좁은 지역은 미군을 비롯한 15개국 군대, 패주해 간 괴뢰군들로 문자그대로 가득찼다. 너무도 현저한 력량차이가 생겼다. 그런 속에서 1950년 9월 15일 미군은 3일간의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보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적아간의 너무나 현격한 력량차이로 인민군련합부대들은 전략적일시적후퇴의 길에 올랐다. 나는 6사단 병사들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적아간의 포탄들이 포물선을 그리는 가운데 낮에는 미군비행기의 폭격때문에 잠복해 있다가 밤이면 은페해 둔 무기들을 옮기면서 후퇴해야 했다. 남해바다를 지척에 두고 북으로 다시 들어 간다는것이 얼마나 가슴 아팠던지. 어떤 전사들은 차라리 여기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죽음을 묻으며 여기까지 달려 온 통일의 길이였던가. 전사들은 누구나 피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길에서 유격전을 하러 산으로 들어 간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경남도당을 비롯한 각 기관들이 산으로 들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내앞에는 두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태백산줄기를 넘어 북으로 갈것인가, 남쪽에 남아 유격전을 할것인가. 사실 북으로 가고 싶었다.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안해도 그리웠다. 그러나 갈수가 없었다. 지금 《세계최대강국》이라고 하는 미국이 내 조국땅의 허리를 끊어 놓은것이다. 일제와 싸웠던 15년이 새삼 떠올랐다. 일제가 물러 간지 겨우 5년, 그런데 이제 또다시 미국과 싸워야 하는것이다.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동지들과 헤여 져 떠나올 때 《승리의 날 만납시다!》 하던 약속도 떠올랐다. 중앙당에서 과업을 받을 때도 《승리하고 돌아 오겠습니다.》라고 했었다. 승리란 통일이다. 그런데 외세를 몰아 내지 못하는한 자주독립도 조국통일도 무망한 일이다. 내 승리하기전에 무슨 낯으로 어머니와 안해를, 동지들을, 평양하늘을 떳떳이 보랴. 조국통일을 이룩하기전에 내 어찌 떠나온 고향땅을 다시 밟으랴. 이때 나에게 생각 키웠던것은 주병포였다. 그가 왜 왜놈이 망한후에도 고향으로 돌아 오지 않고 서울에서 싸우다 생명을 바쳤던가. 그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그 두갈래 길앞에 서서 나는 34년간 걸어 온 생을 돌이켜 보았고 나보다 먼저 떠나간 선배들과 동지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풍산에서 장백으로, 룡정으로 떠돌아 다니던 때도 회상했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품고 오르내린 세월, 도꾜시절에 대해서도 회상했다. 그리고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하루처럼 흘러 가 버린 광복후 5년간의 생활, 그 생활을 깨뜨린 전쟁의 포성, 남해바다가 지척에 있고 통일이 눈앞에 있을 때 막아 나선 미국과 사대매국노들… 나는 결심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넷. 이제는 펜대신 총을 들어야겠다.》 파발리의 총소리를 들은 때부터 이 가슴에 품어 오던 유격전사의 꿈은 이렇게 실현되였다고 할가. 나는 6사단 후퇴대렬과 헤여 져 혼자서 지리산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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