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광복, 새 조국건설
1945년 8월 15일, 이날의 감격과 열광에 대해서는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수 없을것이다. 숨어 있던 《올빼미굴》에서 뛰쳐 나와 개마고원의 높고 낮은 산발을 달리며 쏟았던 눈물과 환희, 그것은 2개월이 아니라 태여나 거의 30년 살아 온 일제식민지라는 감옥에서의 해방이였다. 집으로 내려 오니 김덕룡과 리경모가 기다리고 있다가 너무 기뻐 붙어 잡고 야단이였다. 광복의 기쁨은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 진정할수 없게 했다. 공연히 웃고 떠들고 찾아 다니고 했다. 우리 동지들도 서로 찾아 가고 찾아 오며 기쁨을 나누었다. 흥남에서 달려 올라 온 김영교는 우리 집에서 자면서 나의 어머니를 못 살게 굴었다. 《광복이 됐는데 춤을 추오다.》 어머니는 이제는 마음 편히 아들과 함께 살게 된것을 제일 기뻐 했다. 왜놈들이 망했으니 아들이 숨어 다니거나 어데로 도망치지 않아도 되였고 붙잡혀 갈 걱정도 없어 진것이였다. 이렇게 어머니는 광복이라는 거창한 사변도 아들의 신변에서 일어 난 변화로 받아 들이였다. 그러나 이 아들은 그냥 집에 붙어 지낼수 없었다. 새로운 투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의 힘
풍산읍을 비롯한 여러 면들에서는 일이 잘되여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벌써 우리 동지들, 조국광복회 회원들이 제때에 모든 기관을 손에 틀어 쥐였다. 일제하에서 지하에 있던 조국광복회조직을 비롯한 여러 반일조직들이 광복과 함께 정권기관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할수 있었다. 례를 들면 풍산읍에서 신재국동지는 자기가 꾸려 놓은 방공감시대의 지하조직으로 일제기관들을 점령해 버렸고 무장자위대를 무었다. 그러나 우리 면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를 비롯한 동지들이 피신해 있다가 미처 돌아 오지 못한 공백상태를 리용하여 일제하에서 힘깨나 쓰던 부자와 건달패들이 일제앞잡이노릇하던 자들과 함께 모든것을 틀어 쥐고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꾜제대를 나온 마을유지의 아들이 일제앞잡이들을 지휘해 무장까지 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차지하고서 치안을 유지한다며 야단법석이였다. 권력에 붙어 살던 자들이여선지 권력을 차지하는데서는 매우 빨랐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우리들은 일제통치하에서 늘 쫓겨 다니며 천대 받는 처지였고, 특히 빈농출신들은 공부도 제대로 못해 군중들앞에서 말도 잘 못했으니 그들의 생각에는 광복되였다 해도 저런것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했을것이 틀림 없었다. 우리들은 이런 환경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를 토의하였다. 그자들을 몰아 내야 한다는데는 모두 동의했는데 몰아 내는 방법이 문제였다. 어떤 동지들은 왜놈과도 싸웠는데 그까짓놈들이 무언가, 때려 부시자고도 했으나 얼마후에는 그자들을 우리 몇몇이서 몰아 낼것이 아니라 군중의 힘으로 몰아 내야 한다는데로 의견이 합치되였다. 그러자 그자들을 지지하는 소시민들도 있는데 그게 잘되겠느냐는 의견이 또 나왔다. 하지만 군중들에게 그자들의 정체를 잘 알게 하면 될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모두들 그 안대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즉 한달후쯤 면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동안 각 농촌에 지역별로 책임자를 파견해 농민들을 조직하는 한편 지금 앞에 나서서 설치는 자들이 일제때 저지른 죄과를 낱낱이 아는 사람들을 따로 선정해 면민대회에서 그들의 모든 죄상을 폭로한다는 계획이였다. 모두들 나서서 급히 조직사업을 전개하여 한달후쯤에 그 조직으로 면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동안 일제와 지주, 앞잡이들은 제멋대로 날치며 기세가 등등했는데 우리들에게 자기들밑에 와서 일하라고 제의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앞잡이놈들을 무분별하게 포옹하면서 손을 잡는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농민조직이 완료된 시점에서 면민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대회가 열리자 평소에는 그토록 순박하고 말이 없던 농민들이 연단에 나와 지주들과 친일앞잡이들의 죄행을 낱낱이 폭로하는게 아닌가. 회의분위기는 시시각각으로 고조되여 기세등등해서 날치던 지주와 일제앞잡이들은 낯을 들지 못했다. 이어서 선거로 면의 일군들을 뽑자는 안이 통과되였다. 곧 선거가 진행되였는데 우리 면의 나이 많고 량심적인 인사가 지주와 친일앞잡이들을 물리치고 면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였다. 면민대회는 우리의 승리로 결속되였다. 그 승리로 나와 나의 동지들이 무엇을 얻었는가를 물을수 있는데 우리가 얻은것은 그 어떤 자리가 아니라 친일파와 그 앞잡이들을 얼마든지 이겨 낼수 있다는 자신심이였다. 이때에 얻은 자신심이 그후의 《9.20폭동》때에도, 민주개혁때에도, 첫 민주선거때에도 힘을 주었다. 또한 이 면민대회를 통해 우리는 대중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그 힘은 크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할수 있었다. 안수면에서의 면민대회 승리로 풍산군의 모든 기관들은 정리되였다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순탄하게 진행된것은 아니다. 안수면 면민대회 승리후 얼마 지나 풍산군 반동들의 일대 공세가 있었던것이다.
풍산 《9.20폭동》과 나의 동지들
9월 20일 풍산군에서 일하고 있던 신재국동지가 갑자기 한밤중에 면으로 달려 왔는데 무척 당황한 기색이였다. 원래 장대한 체격에 담대한 성격이여서 일제통치하 지하공작때에도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던 그였는데 이때는 이만 저만 당황해 있지 않았다. 신동지의 말이 그날 풍산읍에서 친일앞잡이들이 갑자기 무력으로 보안서로 밀고 들어 와 무기고를 점령하는 바람에 동지들과 함께 물러 나 쫓기다싶이 나를 찾아 왔다는것이였다. 총도 못 쏴보고 밀려 나다니 리해되지 않는 일이였다. 그러나 듣고보니 맞서지 못할만 한 리유가 있었다. 그자들이 내세운 《명분》인즉 신재국이는 일제하에서 방공감시대장을 하면서 경찰서를 드나든 자이니 쫓아 내야 한다는것이였기때문이였다. 실지 내막은 어떻든 현상적으로는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였다. 그렇게 담대하던 신재국동지도 《친일파》의 모자를 씌워 놓으니 일석에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것으로도 8.15직후의 민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사태는 매우 엄중했다. 속히 수습하지 않으면 일이 어떻게 번져 갈지 몰랐다. 우리는 그날 밤으로 차를 몰아 북청으로 갔다. 북청에서는 사태의 설명을 듣고 급히 30여명의 자위대원을 준비시켰다. 막 떠나려 할 때 신재국동지가 북청에 떨어 지겠다고 했다. 새 조국건설과정에서 불의와는 티끌만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자기가 풍산에서 당분간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자기의 집은 몰수하여 다른데 리용하라고 했다. 리해 불리해를 론할 여유도 없고 하여 다시 토론하기로 하고 30여명의 북청자위대원들을 차에 태우고 서둘러 떠났다. 풍산읍에 날샐 무렵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련락을 받은 면의 여러 청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피 흘릴것을 각오하였다. 일제히 보안서로 돌격해 들어 가니 그자들은 대항도 못하고 손을 들었다. 우리는 사건의 내막을 조사해 보았다. 일은 풍산경찰서 순사부장을 하던 오쓰가가 화근으로 된것이였다. 8.15직후 린근에 몸을 피해 있다가 도망치는것을 함흥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잡아 왔는데 오쓰가가 붙들렸다는 소문이 나버렸다. 그러자 오쓰가의 앞잡이노릇을 하던 자들이 그놈의 입에서 자기들의 행적이 다 나올것이라 생각해 전전긍긍하다가 작당을 해서 무기고를 점령하는 《9.20폭동》을 일으킨것이였다. 이것을 폭동이라는 어마어마한 말로 부르는것은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우리에게 심각한 교훈을 주었다는 의미에서는 《폭동》이라고 부를만 한 사건이였다. 그자들을 전부 잡아 가두고 차후 처리방향을 토론하였다. 우선 신재국동지의 문제를 그의 의견대로 처리하는것이 옳다는데 다른 의견이 없었다. 우리가 일을 끝내고 보안서에서 나오니 군중들이 하얗게 모여 들어 우리들의 결단성 있는 행동을 찬양했다. 남은 문제는 가둬 놓은 폭동참가자들의 처리였다. 동지들은 이 일을 내게 맡기려 하였다. 나는 그들을 석방하든지 처벌하든지간에 내게 일임한다는 조건으로 이 과제를 맡았다. 그날 밤 나는 갇힌 자들을 모두 불러 내 순사부장 오쓰가가 진술한 그들의 과거 잘못들을 낱낱이 밝히고 따져 물었다. 《과거의 잘못을 시인합니까?》 명백한 증거앞에서 모두들 변명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민족적인 량심으로 과오를 뉘우친다면 새 조국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소.》 이 말을 듣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풀어 주었다. 그후에도 《반동》이라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일은 결코 없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수 있다. 우리 동지들은 설사 죄 지은 자라 할지라도 덮어 놓고 그들을 백안시할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포용하면 그들도 뉘우치고 옳은 길에 들어 서게 된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웠던것이다. 또한 열세살 소년시절 목격했던 백두산항일무장부대의 아량도 여전히 인상 깊은 교훈이였다. 잘못을 뉘우치는 조선인순사를 살려 주고 악질순사부장의 안해일망정 비전투원은 쏘지 않았던 유격대의 포용심말이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그렇게 일했다.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일신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했고 뒤로 미루었다. 신재국동지만 해도 자기의 청백함이나 투쟁업적을 증명하는것보다 사업을 바로 잡는것을 더 급하게 여겼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내놓았고 사업장소를 옮기는것으로 우리의 사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여 나가게 했다. 이것은 우리가 일제와의 지하투쟁때부터 지켜 온 하나의 원칙과도 같았다. 이렇게 일함으로써 우리는 군중의 믿음을 받을수 있었고 그 믿음속에서 일을 해나갈수 있었다. 신재국동지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연을 알게 된 군중의 존경속에서 풍산군에 돌아 와 사업하게 되였고 10월 8일에는 우리 풍산군 첫 당세포의 당원으로 되였다.
환희의 나날
1945년 10월 8일 나는 김덕룡, 신재국, 김경문, 박흥윤, 김영교동지들과 모여 앉아 공산당에 입당하고 풍산군의 첫 공산당세포를 조직하였다. 우리는 입당보증을 김덕룡동지는 나를, 나는 김영교를 그리고 영교는 또 누구를 하는 륜환식으로 서야 했다. 모임장소는 소박하고 류다른 격식은 없었지만 우리모두의 가슴은 크나큰 흥분과 격정에 넘쳐 있었다. 우리들은 광복된 고향땅의 첫 당원들로서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전 조선적인 부강한 민주주의완전자주독립국가의 건설과 절대다수 광범한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위하여 한목숨 다 바쳐 투쟁할것을 엄숙히 맹세하였다. 그때의 맹세가 가장 어려웠던 생의 순간마다 되살아 나며 나자신을 지켜 보았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수 있다. 그 맹세가 머리속에서, 심장속에서 사라지지 않는한 나는 언제나 로동당원이였고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입당보증은 김덕룡이 섰다. 판문점을 넘어 43년만에 북쪽땅에 들어 와 내가 맨 처음으로 찾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나의 죽마고우였고 혁명동지였던 김덕룡동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나의 동지였고 벗이였다. 《적색독서회》때부터 《지게군조합》, 류치장생활,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투쟁하던 나날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리인모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김덕룡이 있다고 했고 리인모를 찾으려면 김덕룡을 찾으라고까지 하며 그를 나의 《그림자》라고도 했다. 그는 어떤 일을 맡겨도 잘해 냈고 아무리 멀고 위험한 곳이라도 말만 떨어 지면 주저없이 떠나군 했다. 장백으로, 북청으로, 함흥으로, 서울로 그가 가지 않은 곳이 어데랴. 걸음이 빠르고 하도 믿음성이 있어서 우리는 그를 《천리배》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나자신처럼 믿었고 그 또한 나를 그렇게 믿고 따랐다. 내가 군당선전부장을 할 때 그는 군당조직부장이였다. 혁명동지이며 벗이며 입당보증인인 김덕룡, 함께 싸운 동지들이 모두 그리웠지만 가장 많이 생각했던것은 주병포와 김덕룡이였다. 주병포는 이미 오래전에 저세상에 간 몸이였고 나는 작년에 판문점을 넘어 오면서 김덕룡을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부터 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세상을 떠난것이다. 나는 그가 오래동안 당사업을 했고 나이 들어서는 고향인 풍산군 파발리 《김형권동지혁명사적관》 관장사업을 하다가 년로보장을 받았으며 몇해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처럼 만나보고 싶던 그가 나보다 먼저 없고보니 가슴이 아프다.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에 남쪽에 있는 나의 소식을 알게 된 그는 나의 안해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아무렴 그렇지, 인모가 누구라구. 난 그가 끝까지 잘 싸워서 당의 품에 돌아 오리라고 굳게 믿소.》 김덕룡동지, 그는 이처럼 마지막까지 나의 당생활을 보증하였다. 나는 동지이며 벗인 나의 입당보증인을 영원히 잊을수 없을것이다. 1945년 10월 10일, 평양에서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의 창립과 함께 북조선공산당의 창건이 선포되였다. 우리 당의 창건과 기관지 《정로》의 창간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환희, 격동에 대하여는 무슨 말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나의 당생활, 참인간으로서의 참생활이 시작되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내가 남쪽에서 쓴 수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 수기에서 10월 10일을 나의 생일이라고 했던것을 기억할것이다. 나는 근 40년의 감옥생활에서 자기 생일에 대하여 거의 잊어 버렸다. 그러나 나의 당생활이 시작되였던 10월 10일과 나의 당증번호인 306이라는 수자만은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하여 나는 수기를 쓸 때 서슴없이 10월 10일에 내가 태여났다고 썼다. 사실 그날은 조선로동당원 리인모가 세상에 태여난 날이 아닌가… 북조선공산당의 창건이 선포된 직후 우리는 풍산군당 결성을 위하여 첫 당세포성원 6명이 모여 앉았다. 우리들중에는 6명외에 며칠전에 오기섭이 《풍산에는 지도자로 될만 한 사람이 없다.》면서 파견한 사람도 끼여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전력이 말썽이 되였다. 그는 일제때 사상범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나와 허천강발전소공사장에서 십장노릇을 하였는데 그때 공사주와 짜고 로동자들을 혹사한 사실을 우리 고향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터였다. 도저히 이런 사람을 군당의 지도일군으로 내세울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들은 상급당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명백한 사실앞에서 어쩔수 없었던지 도당은 우리 의견을 받아 들여 조원식이라는 동지를 다시 파견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군당이 결성되였는데 그후 군민청위원장을 맡게 된 김경문동지가 곤욕을 치른 얘기를 빠뜨릴수 없겠다. 앞에서도 썼지만 광복직전 김경문은 아마공장 돈 2만원을 가지고 서울로 갔었는데 광복후 아마공장을 접수한 북청군당이 공장재산중 2만원이 없어 진 사실을 발견했다. 공장이 이제는 개인의것이 아니라 나라의것이였다. 결국 김경문은 국가재산을 떼여 먹은것으로 되였고 국가재산횡령죄로 잡혀 들어 가지 않을수 없었다. 지하사업이라는것이 증거를 남기는것도 아니고 서울까지는 천리길이라 금방 련락이 닿는것도 아니여서 그 돈의 행방을 보증할수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다행히 서울에서 김동지가 그 돈의 사용처에 대해 해명하는 편지를 보내와서 김경문은 석방되여 명예를 회복할수 있었다. 당이 창건된 며칠후에는 더 감격적인 소식이 전해 졌다. 10월 14일, 평양에서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연설이 있었던것이다. 장군님의 사진과 개선연설이 실린 신문을 보았을 때 나는 큰 놀라움에 휩싸였다. 우에서도 잠간 언급한바이지만 1937년 여름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만나뵈왔던 젊은분과 몹시도 방불한 영상이였다. 그리고 개선연설의 구절구절에서는 언제공사장의 우리들에게 조선민족의 대단결로 일제를 쳐부시고 새 조선을 세워야 한다고 하시던 그날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그대로 울리는듯 했다. 그러나 동지들은 누구도 나의 추측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도 장군님의 모습을 오늘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뵙게 되였지만 오래전부터 뵈와 왔던 모습처럼 느껴 진다고 하면서 나 역시 그런 감정때문에 그럴것이라고 하는것이였다. 37년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동지가 한사람이라도 있었어도… 그 밤 우리는 몇달전까지만 해도 숨겨 가며 말해야 했던 장군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마음 놓고 펼쳐 놓으며 밤늦도록 군당을 떠나지 못했다. 그 밤에 주고 받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억해 낼수는 없지만 몇마디로 한다면 장군님께서 평양에 계시고 장군님께서 이끄시는한 우리의 일은 모두 잘되리라는 믿음이였다. 그 이후 공화국북반부 전 지역에서 실시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법령, 남녀평등권법령 등 승리로 아로새겨 진 제반민주개혁성과들은 우리의 믿음을 굳은 신심으로 자리 잡게 해주었다.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946년 8월에 김영교는 외국류학의 길에 올랐다. 나라가 독립한후 처음으로 떠나게 되는 류학생이였다. 풍산군에서는 떠들썩한 경사로 그 일을 맞이했다. 영교의 외국류학은 사람들에게 역시 광복이 좋구나 하는 희열을 안겨 주었다. 평양으로 올라 가는 영교에게 양복을 해입히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덤벼 치던 생각이 난다. 그때 마침 김덕룡이 광복직전 양복점간판을 내걸었을 때 김영교의 양복을 지어 놓았던 일을 기억해 냈다. 모직천으로 무척 품을 넣어 만들었는데 광복후에는 사업때문에 하도 바삐 드달려다니다보니 피차에 잊고 있었던것이다. 그 양복을 찾아 내여 영교에게 입혀 놓으니 감회가 새로왔다. 광복전에 공부를 해보겠다고 도꾜바닥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생노릇을 하던 김영교가 나라의 돈으로 당당한 외국류학을 떠나는것이다. 참으로 우리 세상이였다. 김영교가 떠나간 직후인 8월 28일 평양에서는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가 진행되였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신재국동지와 함께 도대표로 선출되여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대회는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사이에 각도에서 선출된 818명의 대표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100여명의 방청밑에 열리였다. 나는 여기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몸 가까이에서 뵈왔다. 그이께서 북조선로동당결성대회 개회를 선언하실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부대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을 헤매며 다니던 일이 떠오르는가 하면 1937년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있었던 일이 되새겨 지면서 그때 만나뵈온 그 젊은분이 김일성장군님이 틀림 없다는 확신으로 가슴은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로 한생을 보람차게 살리라는 결심은 그때 벌써 나의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로동당이 창립된후 나는 풍산군당 선전부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 시기는 참으로 벅찬 나날이였다. 일하고 또 일해도 일감은 산더미같이 계속 밀려 들었고 매일같이 새로운것, 새로운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1946년 11월 3일 민주선거때에는 선거선전과 선거해설로 낮과 밤을 몰랐고 《선거가 너무 이르다》거니, 《선거표는 검은 함에 넣어야 한다》느니 하는 반동분자들의 요언과 투쟁했다. 한번은 천남면에 있는 한사람이 나를 찾아 와 은근히 묻기를 녀자들이 선거표를 함에 넣지 않고 삶아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게 사실인가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떤 놈이 그런 허튼소리를 하던가고 따지며 선거표란 종이장일뿐인데 내가 종이를 한묶움 줄테니 다 가져다 삶아 먹여 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뒤미처 그 사람이 딸만 다섯이여서 아들 보는것이 평생 소원이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무작정 소리친것이 후회되여 그에게 이번 선거가 어떤 선거인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선거가 그렇게 장군님을 받드는 일인줄 알았으문 내 그런 생각을 했겠소다? 못된 놈들이 또 왜놈세상처럼 만들려고 그따위 오새 없는 소릴 하는줄이야 몰랐지비. 내 딸만 열을 내리 거느려두 좋으니 그따위놈들 소리는 안 듣겠소다.》 하고 단단히 결심하고 돌아 갔다. 그는 물론 처와 함께 선거에 착실히 참가하여 찬성투표를 했는데 그후에 아들을 보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력사상 처음으로 해보는 선거여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선거결과 1947년 2월에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수위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이 발표되였을 때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만세를 불렀다. 마치 자신들이 《개국공신》이라도 된듯 한 기분이였다. 지금도 그 환희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며 가슴을 뛰놀게 한다. 내 만일 그날처럼 개마고원의 산발을 주름 잡으며 달려 다닐수 있다면!
결 혼
이제부터 안해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48년 결혼해 겨우 두해 함께 살고 마흔세해를 떨어 져 살아 온 안해, 하지만 지금 기적처럼 다시 만나 나의 곁에 있는 안해, 그 안해를 바라보느라면 이제는 사랑보다 앞서 고마운 감정이 치밀며 가슴이 뭉클해 진다. 아니, 그것으로 사랑이 더욱 강렬해 져서 이제 다시 헤여 지면 당장 죽을것만 같이 생각된다. 안해 역시 나와 같은 풍산사람으로 처가는 일제때 려관업을 해서 살림이 비교적 풍족한 편이였다. 안해의 외할아버지가 원산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는데 그래서 안해는 원산에 가서 루씨녀고를 다녔던것이다. 경성의전을 다녀 볼가 하여 서울에 갔던 때가 나와의 첫 상봉이였고 두번째 상봉은 내가 서울 가던 길인가 서울에서 오던 길인가 평원선을 타려고 원산에 머물렀을 때 있었다. 광복이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우리 동지들이 하는 일을 지지하여 무척 사업에 열성을 보였다. 이무렵 안해가 입당신청을 했는데 우연히도 그 첫 심사를 내가 맡게 되였다. 그의 혁명적변화를 기뻐 하고 있던 나는 당연히 좋은 평을 주었다. 인생에나 사업에나 열심이였던 안해는 나머지 심사에도 무사히 통과되여 당원이 되였고 풍산군당에서 부녀부장으로 활동했다. 내가 그다지 다정다감한 사람도 못되는데 웬일인지 안해는 무척 나를 따랐다. 일욕심이 많아 밤이 이슥해서야 군당사무실을 나서는게 그무렵 내 일과였는데 안해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퇴근하는 내앞에 갑자기 나타나 《인모동지》 하며 팔에 매달리군 했다. 처음은 옛날부터 아는 사이라 해서 그러려니 하고 범상하게 대했지만 이런 일이 거듭되자 내 마음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묘령의 처녀, 더구나 새 조국건설에 헌신하고저 하는 발랄한 녀성동지가 아닌가. 당시 내 나이 서른이라 며느리 보고픈 홀어머니에게 아침저녁으로 졸리던 처지였다. 처음 안해가 달려 와 팔을 낄 때면 누가 볼가 두려워 슬며시 팔을 빼군 하던 나였지만 혹 퇴근길에 안해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하여 다음날 사무실에서 얼굴을 볼 때까지 남몰래 속을 태우군 했다. 이처럼 가슴으로는 이미 안해를 받아 들이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결혼문제를 생각하면 결심이 쉽지 않았다. 나보다 열살이나 어린데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안해, 당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안해가 좋은 선배동지와 훌륭한 남편감을 혼돈하고 있는것은 아닐가 싶기도 하였다. 갓 스무살의 그 녀자로서는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보다 많은 경험을 쌓는 가운데 반려자를 얻는게 옳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였다. 게다가 그 녀자가 초근목피로 연명해 온 우리 집에 잘 적응할수 있을지도 념려되였다. 다시는 저만한 녀인을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왔지만 고심끝에 나는 안해의 감정을 모른체 하기로 결심했다. 변함없이 퇴근길에 나를 기다리던 안해는 갑자기 엄격해 진 내 눈빛에 어쩔줄 몰라 했다. 전처럼 팔에 매여 달리지도 못하고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인모동지》 하며 나를 따라 올뿐이였다. 게다가 안해가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안해의 어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안해로서는 엎친데 덮친 격이였다. 하지만 장모님의 반대도 리유 없는것은 아니였다. 사위감이 유복자 하나 보고 평생을 수절한 자기 어머니도 돌보지 않고 항일운동한다며 혼자 나돌아 다닌 사람이니 앞으로 안해도 어머니처럼 팽개칠지 모른다는것이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장모의 그 걱정이 맞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연이 어떻든 나라는 사람이 안해와 겨우 2년간을 같이 살고 40여년간이라는 세월을 떨어 져 있지 않았는가. 48년 나는 풍산군당에서 흥남시당으로 옮겨 일하게 되였다. 역시 선전부장일이였다. 처음 흥남에 가라는 지시를 들었을 때 나는 《촌놈이 그런데 못 간다.》고 버티였다. 흥남은 두메산골 풍산과는 비교가 안되는 큰 도시였기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고향이고 정든 동지들이 있는 곳을 선뜻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더 솔직히 말하면 순임이와 헤여 지는것이 아쉬워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여 공부를 시키기로 결정해 버렸다. 결국 나는 당학교에 가서 3개월 공부를 하고 돌아 와 8월 흥남으로 떠나게 되였다. 그때로 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한 북남 총 선거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1948년 4월 29일에 만장일치로 찬성한 공화국헌법초안을 1948년 7월의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실시하여 북과 남 전 조선에 걸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진행할것을 결정하였다. 그것은 남조선에서의 《5.10단선》과 단독《정부》수립으로 하여 민족이 분렬될 위기에 처한 정세하에서 전 조선적인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큰 걸음이였다. 온 나라가 선거분위기로 들끓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흥남으로 나가게 되였다. 이사하는 날 흥남비료공장 지배인이 차를 보내주었다. 풍산의 집은 당일군들에게 내주고 짐을 챙겨 어머니를 모시고 차에 오르는데 갑자기 나타난 안해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면서 매달리는것이였다. 나는 정말 난처했지만 어머니는 또 생각이 다르셨던듯 하다. 안해를 차에 타라고 해 같이 흥남으로 내려 온것이였다. 흥남에 오니 더욱 난처하게 되였다. 남의 집 처녀를 집에 두고 다니는 꼴이였으니 말이다. 안해가 이렇게 완강하자 장모님은 반대를 거두셨고 나도 안해의 뜻을 받아 들였다. 막상 결혼을 결심하고보니 안해는 결코 어린 사람이 아니였다. 괴퍅한 점도 없지 않은 내가 풍산시절 부녀부장일을 잘못한다고 심하게 질책하여 그만 펑펑 운 일도 있었는데 그 같은 3년간의 당생활이 그를 단련시켰던것일가! 나는 조국 북쪽땅에 안긴후 안해와 함께 그립던 그 시절을 추억하였다. 그런데 안해가 문득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남쪽에 있을 때 쓴 수기를 보니 참 엉터립데다. 내가 언제 령감을 그렇게 따라 다녔다고 그러우?》 나는 이미 남쪽에서 쓴 수기에서도 안해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우와 같은 내용을 그대로 실었었다. 그 수기를 본 안해는 좀 부끄러움을 느꼈던듯 하다. 비밀이라면 비밀이라 할수 있는 련애이야기를 그렇게 공개한 내가 야속했던것일가? 하지만 그때는 사랑하는 안해를 이렇게 다시 만날수 있으리라고 상상할수 없었고 따라서 나는 안해에 대한 글을 세상에 남기고 싶기도 했던것이다. 안해의 핀잔에 나는 그저 허허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일로부터 시작하여 둘사이에 있었던 가지가지의 일들을 회고하였다. 그 과정에 나는 안해에게는 안해대로 자랑스럽게 그 시절이 간직되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안해는 자기가 나를 따라 다닌것이 아니라 내가 자기를 따라 다녔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광복전 루씨녀고에 다닐 때 내가 찾아 왔던 일이며 자기가 부녀부장으로 일할 때 누가 볼세라 내가 풋강냉이를 사다 준것을 비롯하여 그러루한 여러가지 사실을 끄집어 내여 그것을 증명해 보이는것이였다. 《풍산에서 달밤에 신원천기슭을 걷던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안해의 말이였다. 안해는 그날 밤에 내가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우리가 서로 언약을 맺었다는것이다. 내가 그때 사랑을 고백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안해에게 조기천의 시 《백두산》과 《쏘련공산당(볼쉐비크)략사》를 보라고 주었던것은 생생히 되살아 오른다. 아니 정말 사랑을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때 나한테 <내겐 어머니가 한분 있는데 잘 모셔 줄수 있는가>고 물었댔어요.》 이처럼 안해의 회상은 구체적이였다. 나는 안해의 주장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안해가 그 시절에 내가 자기를 그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였다고 추억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안해가 나를 사랑한데 비해서는 너무도 그에게 보답이 적었다고 늘쌍 자책을 느끼고 있었기때문이다. 안해와 나는 결혼식사진을 몇번이나 들여다 보았다. 잊지 못할 그날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결혼식이 아니였다. 그것이 평범치 않았던 리유는 첫째로 결혼식날이 바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김일성장군님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선포하고 페막된 날이라는것이다. 둘째로 나와 안해는 이미 결혼식을 한번 한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8월 25일 북남조선 전 지역을 포괄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성과적으로 진행된 직후 우리는 흥남의 동지들이 자기 일처럼 덤벼 치며 뛰여 다니는통에 벼락같이 결혼식을 해치워 버렸던것이였다. 그런데 흥남에서의 이 결혼식이 고향 풍산에서 대단한 항의를 불러 일으킬줄이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투쟁한 동지들과 나의 친척들은 무조건 결혼식을 풍산에서 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결혼식은 이미 했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 준비해 놓을테니 신랑신부만 오면 된다면서 결혼식날자를 자기들이 정해 버렸던것이다. 결국 찬동할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결혼식이 다시 벌어 진것이였다. 우리의 결혼식이 풍산에 있는 나의 동지들에게는 공화국창건경축모임이기도 했다. 읍거리 어데서나 람홍색공화국기발이 날리고 노래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신바람이 나서 돌아 가는 환경속에서 우리의 결혼식이 시작되였다. 동지들은 결혼식사진을 밝은 밖에서 찍어야 한다며 우리를 식장에서 끌어 냈다. 민청위원장 김경문은 식장에 달려 들어 가 신랑 누구, 신부 누구라고 쓴 족자를 들고 나와 세워 놓았다. 막 사진을 찍으려는데 김덕룡이 좀 기다리라고 소리치더니 나와 안해더러 옆으로 약간 옮겨 서라는것이였다. 영문을 몰라 조금 옮겨 서니 더 옮겨 서라고 야단이다. 다른 동지들도 어서 옮겨 서라고 떠들었다. 놀리려는게 아닌가 해서 주위를 둘러 보느라니 문득 머리우에 공화국기발이 있는것이 보였다. 처마끝에 걸어 놓은것인데 그 기발이 사진의 배경으로 되게 하려고 한것이였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글쎄.》 공화국기발, 길에서는 아이들이 부르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가 들려 오던것이 기억난다. 그날의 감격, 이것을 어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들 잊을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결혼의 기쁨보다 우리에게도 참다운 자기 조국이 생겼다는 기쁨과 자랑, 긍지가 더 컸다. 위대한 장군님을 나라의 수반으로 민족의 수위에 높이 받들어 모셨기에 마음은 든든하고 힘이 솟구쳤다. 결혼식날에 동지들이 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부른 노래는 혁명가요 《적기가》였다.
… 높이 들어라 붉은 기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지금 새 세대들은 결혼식날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노래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나도 다른 노래들도 알고 있는것이 적지 않았는데 왜 그처럼 비장한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후렴부분에 가서 동지들이 모두 합창하여 우렁찬 《적기가》의 노래소리가 결혼식장에 울려 퍼졌다. 결혼후 안해는 함흥에서 예술대학의 전신인 문화학원에서 음악, 무용교사로 일했다. 함흥시당에서 일하는 내 생활비가 1,600원(지금의 16원)으로 이것만으로는 생활이 안되였다.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던 안해는 곧 능력을 인정 받아 나보다 월수입이 더 많아 졌고 그것으로 집안살림을 꾸려 나갔다. 한번은 안해가 극장에 가자고 지청구를 하여 《마을의 녀선생》이라는 쏘련영화를 보러 간적이 있다. 주인공은 사회주의혁명가였는데 조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다가 경찰의 기습을 당한다. 겨우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주인공은 추격을 피해 한 귀족의 집 담을 넘는다. 그런데 귀족의 어린 딸이 그를 자기 방에 데려다 숨겨 주고 탈출을 돕는다. 가서 꼭 편지할것을 약속하고 떠난 주인공은 활동중 그만 죽고 마는데 유언에 따라 주인공의 동지들이 귀족의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편지를 받은 귀족의 딸은 주인공의 무덤에 찾아 가 꽃을 바치고 그 마을에 머물며 일생동안 학교선생으로 봉사한다. 후날 혁명이 성공한후 그 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고 마을의 녀선생은 그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한다. 대강 이상과 같은 내용이였던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안해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춘향이가 리도령을 기다린것을 절개의 상징처럼 얘기하는데 그게 뭐 대단한 일이겠어요. 절개라기보다 신분상승의 욕망 같은거 아닐가요. 량반아들 리도령이 아니라 빈농이나 소작인의 아들을 그렇게 기다렸다면 지순한 사랑이라 하겠지만서도.》 이 말을 듣고 나는 안해를 한사람의 동지로서 굳게 믿게 되였다. 그날의 목소리나 표정조차 기억에 선연하다. 결혼은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다정한 남편은 못되였다. 안해가 수고스럽게 밥상을 차려 오면 맛 있게 먹고도 별말이 없었고 어찌다 밥이 좀 되면 《밥이 왜 이렇게 되오?》 하고 질책을 하고 밥이 좀 질면 《이게 밥인가, 죽이지.》 하고 신경질을 내기가 일쑤였다. 지금도 안해는 그때 내가 식성이 참 까다로왔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오죽하면 어머니와 안해가 나를 혼내우려는 《놀음》을 벌렸겠는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괜히 신경질을 낸 다음날에 있은 일일것이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 가니 밥상이 나무랄데없이 차려 져 있었다. 그런데 안해와 어머니는 분명 웃방에 있는것 같은데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다. 좀 이상하다 생각하며 혼자 식사를 다했으나 멋적은감이 들었다. 직장에 나갈 차비를 하는데 벌써 옷은 깨끗하게 손질해 놓았고 구두도 번쩍번쩍 닦아 놓았다. 트집 잡을만 한것은 하나도 없다. 그때야 나는 어머니와 안해가 내 성미를 《고쳐》주려고 짜고 들어 이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머니와 안해사이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라기보다 어머니와 친딸사이처럼 다정스러웠다. 나는 은근히 가책이 되였다.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성격이 데퉁스러웠던것이다. 그래서 직장에 나가면서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여보, 오후에 거리에 나가다가 나에게 좀 들리오. 내가 당신 주려고 직장에 <100곡집>을 사다 놓았소.》 안해의 회상에 의하면 무뚝뚝한 나를 두고 동네의 어느 녀인이 《저렇게 뚝한 사람이 어떻게 고운 색시를 데리고 사는가.》고 말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적구에서 싸우면서 안해가 그리워 질 때면 늘 평시에 그를 살뜰히 대해 주지 못한것이 가슴을 허비군 했었다. 그런데 안해는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내가 정말 뜨겁고 열정적이였다고 결혼생활을 추억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맙다고 할지, 눈물겹다고 할지… 1949년에 딸애가 태여났다. 그때는 2개년인민경제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두 뛰여 다니던 시기였다. 나는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뛰여 다니느라고 딸애가 태여난지 20일가량 지났을 때까지도 집에 들어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 딸애의 이름도 못 지어 주었던것은 물론이다. 하루는 강현철선전부부장이 우리 집에 들렸다가 애이름이 아직 없는것을 보고 자기 이름과 자기의 딸애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현옥》이라고 이름을 지어 놓았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좋은 이름이라 기뻐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무 이름이나 내 손으로 지어 주었을걸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지리산유격대에서 그리고 형무소에서 다시는 가족들과 만날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나의 눈앞에는 두살잡이 어린 딸애의 모습이 떠오르군 했었다. 이름도 제때에 지어 주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였고 아버지없이 자랄 딸애를 걱정하며 잠 못들 때도 많았다. 그 딸이 이제는 끌끌하게 자라 어른이 되였다. 함께 자식들을 거느린 의젓한 딸의 모습을 볼 때면 대견스럽기만 하다.
《황금시절》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수위에 모시고 나라까지 세우고 나니 그때 우리 백성들의 마음은 천만가지 소원이 다 풀린듯 한 심정들이였다. 인민생활이 퍼그나 유족해 진데다가 인젠 일만 꽝꽝 해대면 생활은 더 몰라 보게 달라 질것이요, 나라도 남 부럽지 않게 부강해 지리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꽉 차 있었다. 내가 흥남시당에서 일하던 때는 우리 나라가 《황금시절》이라 일컫는 때였을뿐아니라 모두들 일에 성수가 나서 뛰여 다니던 시절이였다. 나는 사업상 관계로 흥남비료공장에 나가 로동자들과 같이 일도 하고 연설도 하고 침식도 같이 했는데 끼니를 몇끼 번져도 배 고픈줄 모르고 일했다.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고 나라의 주인이 된 로동자들의 모습도 몰라 보게 변모되여 갔다. 로동자들의 희열에 넘친 얼굴, 깨끗한 옷차림은 광복전에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수 없었던것이였다. 광복직후에 언젠가 한번 흥남에 와 봤을 때만 해도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즈음에는 천은 비록 무명천이였지만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다. 확실히 로동자들의 생활이 향상되여 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풍산에서 일할 때부터 느낀바였다. 풍산군당이 조직된 이듬해 봄, 내가 안산면당위원장으로 파견되여 토지개혁법령을 해설선전할 때 있은 일이다. 하루는 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모여 놓고 선동연설을 하고 이웃마을로 옮겨 갔다. 그 마을에서 한창 연설을 하는데 더벅머리의 젊은 청년이 《이 집에서 연설하오?》 하면서 들어 왔다. 어느 집에서 왔는가고 물어 보니 부끄러운듯 머뭇거리다가 말하는데 이미 들렸던 마을에서 왔다는것이였다. 《그 마을엔 방금전에 들렸댔는데… 어째 그때는 모이지 않았댔소?》 내가 이렇게 묻자 대답을 못한다. 후에 알고보니 입을 옷이 없어 모임장소에 오지 못했던것이였다. 그 집에서는 옷 한벌을 놓고 여러 식구가 어울러 입었다. 다른 식구가 그 단벌옷을 입고 나가는통에 그는 집에 박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먼저 선동연설을 듣고 온 사람이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화전민들에게도 땅을 주신대. 이젠 우리도 잘 살게 될거란다.》 하는 희한한 소리를 하자 그런 연설을 직접 자기도 듣고 싶어 옷을 받아 입자 바람으로 헐레벌떡 달려 온것이였다. 나는 그때 내 고향 농민들의 빈궁을 통절하게 느꼈다. 나들이옷 하나 변변히 없는 집이 그 한집뿐이 아니였다. 집에 찾아 가 문을 두드리면 입을 옷이 없어 창피하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집도 있었다. 더벅머리청년의 집에만 해도 옷으로 인한 기 막힌 이야기가 있었다. 광복전에 제 아들 옷 한벌 입히지 못해 가슴 아파 하던 그의 아버지가 감자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장에 가서 옷을 사가지고 오다가 그만 겨울등판에서 얼어 죽었다는것이였다. 사오던 옷을 입었으면 일 없을것을 옷이 너무 귀하여 종시 입지 않고 그냥 꼭 안은채 죽은것이였다. 우리는 그후 이런 집들에 일제놈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생긴 옷가지들을 나누어 준적이 있다. 그런데 광복되여 1년이 되여서부터 벌써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져 가기 시작했다. 나의 선동연설을 들으러 헐떡거리며 달려 왔던 그 더벅머리청년이 좋은 실례로 된다. 그의 이름은 전시호였는데 그 일이 있은후 우리와 아주 가깝게 되였다. 성인학교에도 다니고 입당도 하고 새 조국건설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내가 흥남으로 옮겨 앉을 때에는 풍산군당의 당원등록과에서 일했다. 흥남에 올라 올 때면 가끔 우리 집에도 들리군 했다. 한번은 도당에서 조직한 강습에 참가한다고 올라 왔던 길에 들렸는데 그 옷차림이 놀라왔다. 어디서 옷을 해입었는지 신식으로 양복을 해입었는데 머리도 번듯하게 깎고 머리기름을 진하게 발라 붙였다. 나는 그것이 못 마땅해서 툭 내쏘았다. 《그 머리가 무슨 꼴인가? 기름독에 빠졌다 나왔나?》 소박하지 못하고 지내 멋을 피운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도 흐뭇해 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그때 내가 꾸중을 하고 나가자 우리 어머니에게 물을 끓여 달래서 머리를 감고 갔다고 한다. 그와의 상면이 그때가 마지막이 될줄은 몰랐다. 그는 군당에 루차 제기를 해서 인차 군복을 입었고 전쟁시기에는 전선에서 잘 싸우다가 애석하게도 1953년 7월 27일 바로 정전이 되는 그날 아침에 놈들의 눈 먼 총탄에 희생됐다고 한다. 흥남에 오니 로동자들의 옷차림에서 이러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상기되면서 장군님의 은덕이 가슴에 사무쳐 왔다. 그것은 로동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로동자들과 담화해 보아도 장군님에 대한 흠모의 감정을 얘기하군 했다. 대부분의 로동자들이 1946년 4월 17일 흥남비료공장을 현지지도하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외우군 했다. 장군님께서는 토지개혁을 성과적으로 끝내신 그길로 흥남비료공장을 찾으시여 로동자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시면서 농촌에 더 많은 비료를 보내주어 토지개혁의 승리를 공고히 하고 부강한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라는 연설을 하시였다는것이다. 나이 지숙한 어느 로동자는 나에게 《장군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셨다우.》 하고 자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분은 참 젊었습디다. 우리 조선에 복이 내렸지요. 장군님께서 로동자들의 로동보호문제에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우리 로동계급이 나라의 주인이 된 세상에서는 로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것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실 때 우린 모두 울었수다.》 나는 그 로동자의 손을 잡아 보면서 정말 우리 장군님 같으신분은 없다고 몇번이나 가슴속에 새겼다. 흥남에서 내가 맡은 일은 로동자들에 대한 교양선전사업이였다. 시당선전부는 중앙당에서 내려 온 자료를 교재로 해서 월요일마다 로동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그들의 수준에 따라 상, 하급반으로 나누어 학습을 시켰다. 장군님께서는 흥남비료공장을 현지지도하실 때 벌써 로동자들은 학교에서 배울뿐아니라 일하면서도 꾸준히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던것이다. 학습수준이 높은 당원들을 따로 선발해 《자습당원》이라 해서 개인별 학습목록을 짜주었고 선전부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주어 혼자 공부하게 했다. 정해 진 시기가 되면 도서관책임자는 자습당원을 불러 학습내용에 대한 문답을 하고 오유를 시정해 주기도 했다. 그들의 독서목록은 정치학, 철학이 중심이였는데 몇년씩 공부한 선진로동자들의 리론수준은 상당히 높았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높은 간부라 해서 학습의 의무에서 제외되는것은 아니였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당시 흥남비료공장 지배인을 공부시키느라 애를 좀 먹었던것 같다. 비료공장 지배인이라면 흥남시당 부위원장과 같은 서렬의 위치인데 그가 《바쁜 사람 붙들고 자꾸 공부하라고 간섭하기냐.》 하고 삐딱하게 나오니 우리 선전부의 도서관책임자가 무척이나 난처해 하는것이였다. 사실 공장지배인은 밤에도 집보다 사무실에서 잘 때가 더 많을만큼 바쁜 사람이였다. 그렇다고 선전부가 그를 포기해 버린것은 아니다. 기회를 노리던 도서관책임자가 비료공장에서 지배인과 로동자들이 함께 하는 토론회자리에서 그에게 한가지 문제를 제시했고 대답을 못하자 우스개소리처럼 하면서도 따끔하게 말했다. 《지배인동지, 계속 그렇게 정치학습을 게을리하면 결국 소경처럼 될텐데 새 조국건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서관책임자가 쉽게 대답할수 없는 문제를 제시했던것은 물론이다. 하여튼 이 《면박주기》작전이 주효했던지 지배인은 그다음부터는 꼼짝 못하고 《학습프로그람》에 참여했다. 여하튼 더러 애 먹이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모두들 배우겠다는 열성들이 대단했다. 지난 날 제 나라 글조차 쓰고 읽을줄 모르던 로동자들이 더했다. 그들의 경우에는 일은 일대로 하면서 성인학교의 우리 글 깨우치기로부터 시작해서 정치학습에 이르기까지 일괄하여 공부를 해야 했지만 마른 땅이 물을 빨아 들이듯이 공부를 했다. 이것이 바로 인젠 장군님께서 땅을 주고 공장을 주고 나라까지 세워 주셨으니 자연 주인된 자각이 무럭무럭 자랐기때문이 아니겠는가. 아직은 흥남비료공장이 설비도 그닥 좋지 못했고 기술도 딸렸지만 백옥같이 흰 비료가 폭포처럼 쏟아 져 내려 매일매일 렬차에 그득 실려 농촌으로 나갔다. 나서 처음 제 땅에서 비료까지 쳐가며 농사를 지은 농민들이 흥남부근에서는 물론 먼 벌방에서까지 성의껏 마련한 차떡이며 돼지와 소고기, 과일들을 달구지에 그득그득 싣고 공장을 찾아 왔었다. 그때 로동자들과 농민들이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던 모습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처럼 증산이요, 학습이요 하고 우아래없이 뛰여 다니다가 어찌다 집에 돌아 오면 어머니는 《왜정때나 지금이나 늘 집을 비우니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집에 들려 밥을 한창 퍼먹고 있는데 예술학원에 다니는 안해가 문을 열고 들어 서다가 무춤 서서 문뒤로 몸을 피하는것이였다. 뭣때문에 저럴가 하고 찬찬히 보다가 나는 밥을 입에 문채 눈이 둥그래졌다. 안해가 파마를 하여 모양새가 퍽 달라 진것이였다. 옷차림까지 달리한탓인지 안해의 모습이 한편 세련돼도 보이고 한편 낯 선 녀자처럼 여겨 지기도 해서 나는 군침 넘기듯 밥을 꿀떡 넘기고는 대뜸 덜퉁스러운 소리로 넘어 갔다. 《어머니, 인두를 좀 달궈 주오다. 저 꼬불꼬불한 머리칼을 쭉 펴게 말이요.》 《아이참, 당신두…》 하고 안해는 얼굴이 빨개 져서 어쩔줄 몰라 했다. 어머니는 인두대신 잘 밀봉한 편지 한장을 가져다 주었다. 2년전 풍산군당에서 일할 때 외국류학을 떠났던 김영교한테서 온 편지였다. 장군님의 배려로 지금 자기가 외국 어느 대학 지질학부에서 어떠어떠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고생대요 중생대요 화석이요 하는 전문술어들까지 잔뜩 섞어 써보낸 영교의 편지를 골살을 찌프리며 읽던 생각이 난다. 마음속으로는 기쁘고 대견한 생각 그리고 장군님께서는 건당, 건국, 건군의 그 바쁘신 나날에 벌써 나라를 세운 다음 문명부강한 조국건설의 기둥이 될 인재를 키우실 큰뜻을 품고 그런 조치까지 취해 주셨다는 생각에 목이 메였다.… 정말 좋은 세상이였다. 황금시절이였다! 그 시절의 이런 즐겁고 행복하고 마음껏 떠 있던 추억들을 다 쓰려면 끝이 없다. 끝 없는 추억의 그 갈피갈피들을 34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어둠속에서 나는 쉬임없이 번졌었다.
슬픔과 분노
흥남시절은 신바람나게 새 조국건설에 나선 때이기도 했으나 1949년도에 들어 서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불안한 소식들도 끊기지 않고 들려 왔다. 그무렵 신문과 방송에서는 매일과 같이 적들의 무장도발행위에 대한 보도를 하였다. 특히 1949년 2월부터 10월사이에 감행된 강원도 양양군 고산봉 일대와 황해도 장풍군 송악산, 옹진반도의 국사봉 등 지역에 대한 적들의 대규모적인 무장공격은 온 공화국인민들의 격분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때인 1949년 9월, 38°선일대의 인민경비대에서 복무하던 강현철선전부부장의 동생이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전사하였다는 비보가 전해 왔다. 우리는 강현철동지의 집에 가서 고인을 추모하여 묵상하였다. 우리모두는 주먹을 틀어 쥐고 우리의 행복을 빼앗으려 날뛰는 원쑤들을 저주하며 치를 떨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행복의 상징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그이께서 창건하시고 이끄시는 우리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목숨 바쳐서라도 지켜 갈것을 엄숙히 다짐하였다. 그무렵 나는 풍산으로 갔다가 리현욱동지가 심하게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보니 일제때 받은 여러차례 고문의 후과로 중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체없이 그를 흥남의 우리 집으로 데려 내왔다. 그때는 김시태도 풍산군병원 원장을 하다가 흥남에 나와 시병원 원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완치시킬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니와 안해는 그를 지성으로 간호했고 김시태는 하루에도 두세번씩 들려 치료를 했다. 그러나 리현욱동지의 병세는 너무도 중하였다. 때로는 좀 병세가 호전되는가 싶기도 하더니 새해에 들어 서면서는 걷잡을수없이 악화되여 1950년 1월에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침상을 지키고 있었던 나와 김시태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울었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우리 세상인데 왜 이렇게 빨리 가버리는것인가. 리현욱동지를 죽인것은 병이 아니라 왜놈들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였다. 일제가 망한지도 다섯해가 되여 오지만 그놈들이 남긴 상처는 가시지 않은것이였다. 이렇게 1950년의 첫달을 슬픔으로 맞이한 우리한테는 또 두번째 슬픔이 닥쳐 오고 있었다. 50년에 들어 서면서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은 38°선일대에서 끊임없는 무장도발을 감행하는것과 함께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애국투쟁에 총칼로써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사업하는 동지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할수 없었다. 그러던 50년 3월 또다시 슬픈 소식이 들려 왔다. 친구 주병포가 서울에서 피살되였다는 소식이였다. 일제통치하에서도 그렇게 꿋꿋하게 버티던 사람을 광복된 조국에서 잃다니!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나보다도 어머니가 더 슬퍼 하셨던것 같다. 어머니는 슬픔을 못 이겨 며칠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통일조국에서 다시 만나 옛말을 하며 기쁨을 나누리라 가슴속으로 언제나 상봉을 그려 왔던 주병포였다. 광복전에 병포와 헤여 졌던 내가 그를 이름으로나마 다시 만났던것은 1949년 1월 9일부 《로동신문》에서였다. 1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처음으로 제정한 훈장을 혁명투사들에게 수여하였는데 그속에 주병포의 이름이 있었다. 병포는 서울시당위원장으로 사업하던중 1949년 8월 25일 부평방첩대에 체포되여 륙군형무소에 이송되였다. 적들은 군사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고 1950년 3월 17일 새납화장터에서 학살한것이였다. 악에 받친 놈들이 그를 포로 쏘아 포살했다는 말도 있다. 사형장으로 나가면서 병포는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로동당 만세!》, 《조선통일독립 만세!》를 계속 불러 적들을 어쩔줄 모르게 했다고 한다. 그의 최후에 대한 소식과 유서는 그의 동지들에 의하여 후에 전달되였는데 유서에는 《이 몸은 죽고 죽어도 혼이야 어데로 가겠는가. 조국을 위한 일편단심 변함 없다.》라고 씌여 있었다 한다. 이렇게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주병포, 정열가이며 락천가였던 주병포는 떠나갔다. 종시 고향에 와보지 못하고 갔다. 그도 고향으로 오고 싶었을것이다. 그러나 왜놈은 망했어도 여전히 친일사대매국노들이 활개치는것을 보고는 그 땅을 떠날수 없었을것이다. 그곳에서 통일독립된 조국을 위하여 싸우리라 맹세 다졌을것이다. 나는 고향과 부모처자들에게로 오지 못한 그의 심리를 1950년 가을 지리산으로의 길과 후퇴의 길, 두갈래 길앞에 섰을 때 체험으로 리해했다. 그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이번 평양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얼마전에는 병포의 딸을 만나보았는데 아버지를 신통히 닮은 그는 유자녀학원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평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집은 우리 집에서 100m도 안되는 같은 서장동에 있었다. 결국은 옛 시절 풍산과 서울에서 나와 병포가 가까이서 살았듯이 오늘은 우리의 후대들이 서로 이웃에서 살고 있는셈이다. 또한 병포의 아들도 만나보았는데 그는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사회주의조국의 역군으로 충실히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 첫 국기훈장수훈자이며 《조국통일상》 수상자의 자녀답게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이어 나가고 있는것이 한없이 기쁘다. 주병포가 놈들에게 학살된 소식을 들은후 정세는 날을 따라 더욱 긴장해 져 갔다. 이미 1950년 초부터 38°선지역에서 리승만괴뢰군의 배비변경이 단행되여 10만의 대병력이 《북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놈들은 미친듯이 공격훈련을 벌리여 38°선지역을 소란스럽게 했으며 적들의 정찰기와 간첩부대들이 빈번하게 공화국의 령토에 기여 들군 하였다. 아마도 그 시절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호소하는 최고인민회의 호소문을 지닌 몇몇 동지들이 38°선을 넘어 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이 있은지 며칠후에 6.25전쟁이 시작되였다. 이 땅과 이 하늘이 모두 나의것으로 되였던 5년! 거기에 담겨 진 하많은 기쁨과 환희의 이야기들을 나는 여기에 다 쓸수 없다. 하지만 그 생활이 없었다면 그 이후 43년동안의 나의 투쟁, 나의 생활도 없었을것이라고 나는 서슴없이 단언한다. 그 5년간은 지리산에서 그리고 형무소와 교도소에서 어렵고 간고했던 모든 시련을 이겨 낼수 있게 한 마음의 등불로 되였다. 그 등불은 총칼의 위협으로써도, 교형리들의 악형으로써도 결코 끌수 없었다. 한생에서 5년이란 너무도 짧지만 그 생활은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며 그 5년간의 기쁨과 환희가 북쪽만이 아니라 남쪽땅을 포함한 온 삼천리강토우에 영원히 정착되여야 한다는 신념을 나의 가슴에 굳건히 세워 주었던것이다. 실로 꿈속에서처럼 맛 보았고 즐겁게 흘러 갔던 광복후 5년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나는 용약 군복을 입고 종군기자가 되여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