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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빛을 따라

 

《떠도는 식민지청년》…

이것이 남쪽에서 출판한 나의 수기에 적어 놓았던 이 장의 원래 제목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보천보와 간삼봉의 총소리가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때로부터 우리는 결코 각양각색 사상운동조류에 실려 떠다니는 부평초가 아니였다. 풍산, 북청땅을 메주 밟듯 하고 서울로, 도꾜로 오르내릴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들어 있었다.

 

 

투쟁의 대오를 찾아(1)

 

이미 말한바이지만 형무소생활을 면했으나 나는 별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투쟁의 대오에서 떨어 져 나온듯 한 외로움이 점점 더 커가기만 했다.

나의 그런 정상이 보기 딱했던지 외삼촌은 나더러 장백현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현립중학교를 다니는것이 어떤가고 물었다. 그곳에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가 교사로 있으니 가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입학할수 있으리라는것이였다.

나는 망설였다. 지도자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수 없어 울분으로 세월을 보내느니보다는 공부를 하는것도 좋을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편안히 공부나 하는것은 정운길동지나 조을록동지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 져 선뜻 발걸음이 떨어 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시찰명단》에 올려 놓고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경찰놈들을 생각하면 당장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싶기도 했다. 외삼촌도 아마 나를 공부시키기보다 피신시키려는 생각에서 장백행을 권고한듯 했다.

이럴가저럴가 망설이고 있을 때 국경일대에서의 항일무장투쟁소식이 들려 왔다. 무장부대들이 왜놈군경들을 통쾌하게 짓부시는 전투가 매일처럼 벌어 진다는것이였다. 항일유격대에 대한 소식은 풍산땅으로 해일처럼 밀려 들기 시작했다. 그 소식들이 나의 장백행을 결정했다. 나는 지체않고 외삼촌에게 장백현 현립중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공부하겠소다.》

그러나 사실 조상엔 생각이 없고 제밥에만 생각이 가 있다는 식으로 나의 속심은 다른데 있었다.

장백땅으로 말하면 유격대가 맹렬히 활동한다는 지역이다. 더우기 일설에는 유격대들이 장백현소재지에 나타난적도 있었다고들 한다. 어데까지가 사실이고 어데까지가 소문인지 알수 없으나 어떻든 장백땅으로 가기만 하면 항일유격대를 찾을수 있지 않겠는가.…

외삼촌은 흔연히 떠나라고 했다. 그때 외삼촌이 나의 엉뚱한 속심을 알아 차렸는지는 알수 없다. 아마 십중팔구는 짐작했던것 같다. 하기에 별스레 무거운 음성으로 《어머니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떠나거라.》 하고 말씀했을것이다.

나는 장백으로 건너 갔고 외삼촌의 친구분을 만나 어렵지 않게 현립중학교에 입학했다. 한익이라는 중학교 교사였다.

한익선생은 나더러 자기 집에서 같이 있자고 했으나 나는 좀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고 중국말을 배워야겠다는 이런저런 리유를 들어 사양하고 중국사람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은 나로서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유격대를 찾으려면 여기저기 돌아 다녀야 할텐데 한익선생의 집에서 살면 여러가지로 관심을 돌려 마음대로 할수 없을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숙을 하면 어데 나가 며칠을 있든 어데로 가건 상관하지 않을것이다.

장백현에서도 왜놈들의 횡포는 조선에서와 다를바가 없었다. 왜놈들은 이곳에서도 좋은 땅은 물론 숲까지 차지하고서 가난한 중국사람과 우리 동포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였으며 약간한 항일의 싹만 보여도 사정없이 총칼을 휘둘러댔다.

어느 곳이나 《3광정책》으로 악명 떨친 왜놈들의 《토벌》을 겪지 않은 곳이 없었다. 원한과 비분의 노래 《피바다가》가 태여난 곳이 이 간도땅이라는것을 말한다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족할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온 간도땅은 항일투쟁의 도가니라고 할수 있었다.

그 모든것을 매일같이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다보니 왜놈들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갔고 항일유격대에 들어 가 싸우고 싶은 마음은 불 같았다. 나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면 만사를 전페하고 달려 가보았으나 매번 소득없이 돌아 오군 했다.

항일유격대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파다해 졌으나 나에게는 신기루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고 있던 1935년, 아마 1월이였을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동북인민혁명군이라고도 불렀다.)의 리홍광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후창군(오늘의 김형직군)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제경비대와 일대 시가전을 벌린 사건이 벌어 졌다. 습격전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인민들속에서는 물론이고 당시 국내출판물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였다.

나는 동흥읍에 가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격대는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 당시 우리 조선사람들을 제일 흥분케 한것은 조선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였다. 그 어떤 재미 있는 옛이야기도 장군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만큼 흥미를 끌고 흥분시킬수가 없었다.

어떤 전설인들 없었으랴.

요즘 출판된 《백두산전설집》이라는 책을 보니 그 시절에 주고 받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되살아 나며 감회가 새로와 진다. 그 시절에 우리 인민들속에서 이야기된 장군님에 대한 전설들을 모두 수집한다면 아마 수십권의 책을 이룰것이다.

김일성장군의 유격대에 들어 가 그이의 부하로 싸울수 있었으면! 이것은 나만이 아닌 반일투쟁에 나선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며 꿈이였다.

다시 옛날로 돌아 가보자.

한번은 현청소재지에서 120∼130리쯤 오지로 들어 가면 얼뚜강(이도강)이라는 곳에 조선사람부락이 있는데 그곳에 유격부대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을 얻어 듣고 그곳으로 가본적도 있었다.

나는 내가 살던 적수부락이 제일 심심산골인줄 알았는데 그곳은 더한 산간오지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였고 옷차림도 우리 적수부락보다 더 람루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인상적인것은 아이들이였다. 나의 고향 적수부락에서는 아이들이 낯 선 사람을 만나면 말도 잘 못하고 슬슬 피하는데 그곳의 아이들은 헐어 빠진 누데기 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눈이 이만저만 아니게 또렷또렷했다.

그들 역시 살길이 없어 남부녀대하고 고향에서 만주로 떠나왔고 만주에 와서도 발 붙일 땅이 없어 오지중의 오지까지 밀려 간 막바지인생의 한쪼각이라는데는 여느 곳과 다름 없을것인데 아이들의 눈빛은 주접이 들어 하거나 암담해 보이는데가 없었다. 그 눈빛이 나에게는 장백땅에 타오르고 있는 거세찬 무장투쟁불길의 역광처럼 느껴 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바라는 말을 한마디도 얻어 들을수 없었다. 얼뚜강아이들은 좋은 학생복차림의 내앞에서 기가 죽기는커녕 나의 속심을 들여다 보려는듯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며 묻는 말에 《몰라요.》라는 외마디말로만 대답했다. 나를 왜놈이 보낸 밀정이 아닌가 의심하는것이였다. 노엽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맥없이 돌아 서고 말았다.

그래도 다시 미련이 생겨 어느 일요일날 다시 얼뚜강으로 나갔다가 같은 풍산내기인 리창선을 만났다. 그는 천도교인들이 많이 사는 부락출신으로 《적색독서회》의 천남면조직성원이였었다. 그때 나와 그는 자주 만났기에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왜놈들의 체포령을 피해 장백으로 도망쳐 왔는데 자기도 유격대를 찾는중이라고 하는것이였다. 무척 반갑기는 했으나 둘이 다 유격대에 대해서는 소문밖에 모르고 있는 처지라 서로 도움을 줄수도 없었다.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여 졌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것은 몇년후 풍산으로 돌아 와서였다.

나는 장백현립중학교를 다니는 기간 종시 유격대를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경찰의 등쌀은 점점 심해 졌다. 풍산에서 《요시찰명단》이 넘어 왔는지 아니면 유격대를 찾아 다닌다는것을 냄새 맡았는지 경찰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장백으로 오면서는 딴 나라니까 좀 낫겠지 하였는데 그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였다. 경찰에서 부르거나 찾아 오거나 하는 일이 결코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덜하지 않았다.

유격대를 찾지 못한 실망으로 맥 풀리고 경찰의 미행에 진저리가 났을 때 내 머리속에 떠오른것이 연길현 룡정이였다. 당시 룡정에는 조선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풍산내기들도 적지 않게 가 있었다. 특히 그곳에는 《적색독서회》때 안수면과 감토리책임자였던 전철식선생이 왜놈의 검거망을 피해 가 있으면서 동흥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왜놈경찰의 미행도 떼버릴수 있고 유격대로 가는 선도 찾을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룡정으로 갔다.

지금은 어떤지 알수 없지만 그 시절의 룡정은 해란강변에 위치한 무척 길다란 시가지였다. 말이 시가지였을뿐이지 온통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이였고 한쪽에 몰켜 있는 양철지붕을 한 집들은 왜놈들이 살고 있었으며 높고 큰집이란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왜놈령사관뿐이였다. 바람만 불면 시가지는 황토먼지속에 묻혔고 하루에 두세번씩 왜놈령사관 경찰의 말발굽소리가 메마르게 울리군 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기름기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어떻든 연길지방에서는 중심지여서 중학교만도 여러개가 있었다. 광명, 대성, 은진, 동흥 등 중학교들이 있었는데 동흥중학교는 제일 가난한 학생들이 모여 드는 학교였다. 나도 그곳으로 찾아 갔다. 전철식선생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고 동흥중학교에 다니라고 권고했다.

나는 그의 권고대로 마음 무던해 보이는 집에 하숙을 정하고 동흥중학교에 적을 붙였다.

그때 전철식선생은 동흥중학교 동창회책임자로 있었는데 나도 곧 그 성원으로 되였다. 동창회는 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합법적인 친목단체였으나 내적으로는 학생들속에 반일의식과 계급의식, 사회주의사상을 보급하고 있었다.

전철식선생은 얼마전에 학교를 그만 두고 풍산으로 돌아 간 주병포라는 풍산 능귀면내기의 이야기를 하며 나와 성미가 걸맞았을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병포는 《적색독서회》사건때 검거망을 피해 룡정으로 왔고 아예 눌러 앉아 동흥중학교를 다녔던것이다. 나도 아쉬운감이 적지 않았다. 이럭저럭 자리를 잡았으나 나는 시간과 함께 실망을 느꼈다. 룡정에서도 역시 항일유격대로 가는 선을 찾을수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룡정은 장백보다 안전지대가 아니였다. 어느 사이 련락이 닿았는지 나는 룡정에 발을 붙이기 바쁘게 일본령사관에 불려 가 왜 이곳으로 옮겨 왔는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가 하는 시끄러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철식선생은 몹시 근심스러운 기색이였다. 게다가 몇몇 동창회 친구들이 《령사관경찰이 너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령사관에 불리워 갔댔는데 너에 대해 캐묻더라.》 하면서 룡정에는 왜놈밀정들이 우글우글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령사관에 불려 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 진다는 말을 귀띔해 주었다. 이야말로 승냥이를 피하니 이리를 만난 격이였다. 이미 실망을 느낀바였으므로 룡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전철식선생은 떠날바에는 속히 떠나라고 했다. 령사관경찰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은데 지체하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른다는것이였다. 그런데 며칠후 전철식선생이 령사관경찰에 체포되여 가는 사건이 일어 났다. 나는 떠나는것을 더는 망설이고 있을수 없었다. 너무 서두르다보니 그때 하숙비 두달치를 나중에 보내주기로 하고 그냥 고향으로 떠났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못 보내주고 말았다.

이제는 세상을 떠났을 그 마음 좋은 하숙집아주머니를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투쟁의 대오를 찾아(2)

 

룡정을 떠나 풍산 파발리에 돌아 온 나는 경찰의 눈을 피하려고 귀향소문을 내지 않고 이전에 《적색독서회》에서 같이 투쟁하던 동지들을 찾아 보았다.

신재국동지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었는데 그들 역시 유격대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나는 삼화광산, 수상리 등지로 다니며 동지들을 만났고 유격대에 대한 소식을 알아 보았다.

물론 고향에 돌아 왔으나 마음은 그냥 장백땅에만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유격대를 찾을것인가.

룡정에서 나온지 한달이 채 안된 어느 날 신재국동지가 자동차를 타고 장백땅으로 건너 가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모두 찬성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장백으로 드나들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신재국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함경도일대에서 《자동차왕》으로 불리우던 방의석이 경영하는 《북청공흥주식회사 풍산자동차출장소》에서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기때문이다.

방의석은 장백현 지양개에 있는 지주 김정보와도 물물거래를 하고 있었으므로 풍산출장소의 자동차들이 그닥 드물지 않게 지양개를 비롯한 장백의 여러 지역에 드나들군 했다.

나는 동지들과 함께 신재국의 자동차를 타고 장백으로 건너 갔다. 이도강, 지양개, 관방자 등지를 다니며 유격대에 대하여 열심으로 탐문했다. 그러다가 풍산으로 들락날락하지 말고 아예 장백에 눌러 앉아 있으면서 유격대를 찾아 보기로 의논을 맞추었다. 풍산으로 나간 사이 유격대가 왔다가 가기라도 하면 랑패가 아니냐는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에서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장백농척조합》에 입직하였다. 지주 김정보의 알선으로 입직했는데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그의 소개를 받게 되였던지는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나는것은 김정보가 지주치고는 인심이 매우 후하다고 하던 꼬리 긴 노루도 있다는 식의 희한한 소문이다.

나는 자동차운전사 조수로 입직했다. 운전사는 물론 동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때의 심정으로 말하면 마치 날개라도 돋은듯 했다. 하루에도 수백리 지경을 오갈수 있으니 유격대를 찾는 걸음도 그만큼 빨라 질것으로 여겨 졌던것이다. 그러나 투쟁소식만 더 많이 들려 올뿐 유격대는 여전히 찾을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농척조합에서 일한지 한달이 되나마나한 때였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 났다. 신재국동지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훌렁 뒤집어 놓았던것이다. 자동차가 대파된것도 된것이지만 문제는 승차시켰던 위만군들중 한명이 즉사하고 10여명이 중상 당했던것이다. 신재국동지는 운전상 실수라고만 했으나 나는 그것이 유격대 《토벌》을 떠들며 차를 잡아 타고 운행을 강요한 위만군들에 대한 증오로 우정 차를 엎어 놓은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가타부타 생각해 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신재국동지와 또 한 동지는 헌병대에 끌려 갔고 우리에게는 농척조합에서 《추방령》을 내렸던것이다. 별수 없었다. 며칠후 헌병대에서 풀려 나온 신재국동지와 함께 우리는 유격대를 끝내 찾지 못하고 도로 풍산으로 돌아 오고 말았다. 이렇게 두차례의 장백행은 모두 허사로 끝나버렸다.

이것이 1935년 말께였을것이다.

 

 

보천보의 총소리

 

《여보 령감.》

옆에 앉아 있던 안해가 말을 건다. 처음은 《현옥 아버지》 또는 《승철이 할아버지》라고도 하더니 이제는 아예 《령감》이다. 그렇게 부를 때면 헤여 져 있는 긴긴 세월 우리 부부가 다같이 머리에 맞은 흰서리를 느끼게 되면서도 《내 집이구나.》 하는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이 사진이 기억나요?》 하고 안해가 내놓는 사진을 보자 나는 이만저만 놀랍지 않았다.

먼 옛날 1937년 가을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인부로 같이 일하던 동무들과 찍은 사진이였던것이다.

앞줄의 오른쪽에서부터 첫번째는 동흥중학교에서 음악교원도 한적있는 김유진이였다. 그가 언제 어떻게 되여 풍산으로 나오게 되였는지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전철식선생이 체포될 때 같이 체포되였는지, 아니면 체포령을 피해 풍산으로 나와 있은것인지, 하여튼 그와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함께 일했다.

그옆에 내가 앉아 있었고 내옆에는 전철식선생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흥중학교에서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여 신의주감옥으로 이송되였는데 왜놈들의 그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왜놈들은 8메터구간에 못 박은 판자를 늘여 놓고 그우를 걷게 하였으나 그의 입을 열수 없었다. 왜놈들은 종시 사건성립을 시킬수가 없어 기소유예로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고향에 돌아 온 그는 못에 채구멍처럼 된 발을 치료하느라고 무척 고생했었다.

사진에는 동무인 리석기도 있었다. 그 사진은 1937년 가을에 언제공사장에서 믿음직한 동지들끼리 찍은것이였다. 모두가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와 함께 싸우자고 맹약했던 동지들이였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겠어요?》

안해가 사진에서 짚어 보이는 맨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을 나는 첫눈에 알아 보았다.

《알지 않구! <김빠이>지!》

는 장백현 이도강에서 만났던 그 리창선이였다. 금이발이 유표하게 인상적이여서 우리는 그때 리창선이라는 이름보다도 《김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당신한테 있소?》

당력사연구소에서 나온 사진이라는것이다. 안해는 그중의 세명을 짚어 보이며 그들이 김일성장군님의 지시를 받고 나온 조선인민혁명군 국내공작원이였다는것이다. 《김빠이》에 대해서는 그때 이미 국내공작원이라는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도강에서 그와 헤여 진후 다시 만났던 1937년에는 그가 벌써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이였던것이다.

(1937년!)

사진을 보느라니 감회가 더욱 깊어 졌다.

장백에서 쫓겨 나온후 나는 1936년 봄부터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일했다. 황수원언제공사는 왜놈들이 조선을 완전한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의 일환으로 벌려 놓은 허천강발전소공사의 일부였다. 그때는 수전공사라고 했다.

수전공사장에 발을 붙인 나는 김덕룡에게 양복점을 하나 차리게 했다. 그는 눈썰미가 있고 재간이 좋아 무슨 일이든 막히는데도 없었으며 어떤 일을 맡겨도 군소리없이 무조건 해내는 훌륭한 동지였다. 그는 《신광양복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양복점을 하나 꾸려 놓았다. 어느 겨를에 배웠는지 재단도 제 손으로 척척 해냈다.

나는 공사장에서 일공로동을 하면서 그의 양복점에서 양복주문도 맡아 보았다. 수전공사장에서 얼마간은 《데주라》(출면-아침출근시 일할 표딱지를 나누어 주는 일)로 일한적도 있었다. 막로동을 하고 《데주라》질도 하고 양복주문도 하다보니 동지들을 만나기도 좋았고 새로운 동지들을 찾는데도 매우 편리했다.

압록강건너 장백땅에서는 매일같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승전소식이 들려 왔고 국내에서는 파업과 쟁의가 그칠새없이 일어 났다. 이때를 력사에서는 《조선혁명의 일대 앙양기》라고 부르고 있다.

언제공사장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승전소식이 류달리 빨리 알려 지군 했다. 어데서 왜놈들을 통쾌하게 쳐부신 전투가 있었으면 이튿날에는 벌써 온 공사장에 알려 지군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전공사장에 여러명의 장군님의 국내공작원들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때 김덕룡이 은근히 나에게 이런 말을 한적도 있었다.

《인모, 저런 사람들이 유격대가 아닐가?》

당시 공사장에는 각지에서 모여 온 인부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내남없이 살길 찾아 헤매다가 돈푼이나 좀 벌어 고향으로 돌아 갈가 하여 인부로 된 사람들이였다. 그들중에서 몇사람은 한숨이나 탄식을 모르고 락천적이였으며 세상일에 대해서도 아는것이 많은것으로 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들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한테 왜놈들이 혼쌀난 이야기들로 흥을 돋구는가 하면 김일성장군님의 신출귀몰한다는 전술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로 얼을 뽑기도 했다. 그들이 바로 장군님께서 파견하신 국내공작원들이였던것이다. 리창선도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나는 여기 와서 읽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의 투쟁행적을 알수 있었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되였다는것이 끝없이 아쉽다.

보천보전투소식을 우리가 들은것은 전투가 있은 다음날인 1937년 6월 5일 아침이였다.

그날 따라 여느 날에는 기승을 부리며 돌아 치던 왜놈십장이며 경찰들이 웬일인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하는데 보천보전투소식이 날아 들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보천보를 치셨다! 보천보의 왜놈기관들은 모두 재더미로 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직접 연설하셨는데 왜놈들이 인차 망하고 조선이 독립된다고 하셨다!》

《장군님께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셨다!》

신문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였고 어데 가나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그 이야기뿐이였다. 뒤이어 유격대를 추격하던 왜놈들이 또 무리죽음을 당했다는 통쾌한 소문이 들려 왔다.

《아무렴! 제놈들이 감히 어데라구?》 하고 사람들은 말했다.

6월 30일에는 간삼봉전투가 있었고 일장기속에서 요란한 출정식을 하고 떠났던 함흥 74련대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고 《호박대가리》부대가 되여 돌아 왔다. 풍산도로로 숱한 왜놈군용차들이 함흥쪽으로 나갔는데 사람들은 그 차에 실린것이 모두 간삼봉에서 죽은 왜놈들의 대가리라고 수군거렸다.

보천보의 총소리, 그 총소리는 나의 운명을 결정했다.

1930년 8월 14일, 파발리의 총소리가 내 어린 가슴에 투쟁의 불씨를 심어 주었다면 1937년 6월 4일 보천보의 총소리는 청년이 된 내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투쟁의 불길을 일으켜 주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느라니 문득 남쪽땅에서 우리 민족의 반일투쟁에 대하여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는 사가들에게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사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보다 더 자랑스러운 투쟁사가 무엇이 있는가. 정예를 자랑하는 수십만의 관동군이 뇌심초사하며 림해설원을 헤맨것이 《상해림정》의 몇몇 《대신》들을 잡기 위해서였던가, 아니면 외세의 힘을 빌어 보려고 동분서주하던 지사들을 잡기 위해서였던가. 수십만 관동군의 이동은 단순한 《치안유지》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전쟁》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런데 남쪽땅의 사가들은 우리 민족의 반일투쟁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항일전쟁》을 외면하거나 언급할 가치도 별로 없다는듯 몇줄로 스치고 이런저런 소소한 반일행동에 대해서는 요란하게 떠들어 대는것으로써 교전쌍방이 아니라 단순한 종주국과 식민지였다는 일본의 뻔뻔스런 주장에 《물을 대주고》 있다.

왜놈들자신이 《김일성장군은 조선민족에게 구세주로 되고 있다.》고 비명을 질렀다는것을 그네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애써 모르는척 하고 있는지.…

한 일본인교감은 자기의 글에서 광복전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쓴적이 있다. 조선의 어느 국민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마음 놓고 무기명으로 써내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70%이상이 《김일성장군》이라고 썼더라는것이다.

허나 그것은 일본인의 견해이다.

그때를 회상해 보느라면 나에게는 이렇게 생각된다. 만일 그때 우리 조선민족에게 단 몇초간이라도 마음 놓고 말할 자유를 주었다면 온 이천만겨레가 한결같이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을것이라고!

김일성장군, 그분은 우리 조선민족의 힘의 상징이였고 꺾이지 않는 넋의 상징이였으며 조선독립의 등대였으며 희망이였으며 태양이였다!

이것은 나의 믿음으로, 신념으로 되였다.

 

 

해  발

 

1937년 7월은 풍산지구 반일조직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소식으로 하여 사람마다 가슴이 널뛰듯 할 때인데 김일성장군님께서 직접 파견하신 조선인민혁명군 공작원이 풍산지구에 나왔던것이다. 참으로 그때의 기쁨이란! 천도교인들부락에서 나온 소식에 의하면 천도교종리원 원장 원충히는 그분을 천도교인들에게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로 정중히 소개했다는것이였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수전공사장에서 돌아 와 외삼촌내외와 함께 저녁밥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녁이였으나 장날이여서 길에서는 인적이 끊기지 않고 있었다.

파발리장마당은 한달 6장이였는데 장날이면 파발리주민들보다 몇배 더 많은 령남과 령북에서 모여 온 장군들로 무섭게 붐비였다. 우리 집은 다행히도 리소재지의 맨끝에 있어서 소음이 덜한 축이였다.

인적이 좀 즘즉해 지는가 싶을 때였는데 밖에서 《주인 계시오?》 하는 소리가 났다. 외삼촌이 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창선이 아니냐?》고 반가운 소리를 했다. 나도 일어 나 내다보니 정말로 《김빠이》 리창선이였다.

웬일인지 그는 인사는 대충 나누고 나서 집주위를 살피며 귀중한 손님을 한분 모시고 왔는데 들렸다 가면 안되겠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물론 나와 외삼촌은 쾌히 응낙했다.

리창선은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큰길쪽으로 나갔다가 한참만에 20대의 젊은 녀성을 한분 안내해 왔다. 보통 장군들이나 다름 없는 옷차림이였으나 어덴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였고 류달리 영채가 도는 두눈이 인상적이였다. 맑고 또렷한 음성, 확신에 넘쳐 있는 표정, 몸가짐은 조용했으나 일어 서면 수백리라도 단숨에 내달을듯 힘에 넘쳐 있었다.

리창선과 무슨 이야기인지 나눈 외삼촌과 외숙모는 밖으로 나갔고 나는 리창선과 함께 뒤방에서 그분과 마주 앉았다.

그분은 리창선을 통하여 나와 외삼촌에 대해 알게 되였다고 하며 《적색독서회》사건과 우리의 투쟁정형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그 녀성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것을 느꼈다.

나는 독서회때부터 지금까지의 투쟁정형과 황수원언제공사장, 안산면, 안수면일대의 형편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분은 고생이 많았다고 하면서 지하공작이 무장을 들고 싸우는 유격투쟁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업이라는것, 독서회관계자들을 핵심으로 그 주위에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묶어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가장 격동적이였던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창건하신 조국광복회소식과 장군님께서 친히 작성하시였다는 그분이 해설해 준 《조국광복회창립선언》《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내용이였다.

근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다시 보느라니 그 내용을 해설해 주던 그분의 정열적인 음성이 귀가에 다시 울려 오는듯 싶다.

《…우리가 모든 차별을 론하지 않고 늙은이와 젊은이, 남자와 녀자 할것없이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여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 동원된다면 왜놈들은 파멸될것이며 우리 민족의 독립은 이룩될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분은 우리 집을 나섰고 큰길가에 대기하고 있었던듯한 화물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북청공흥주식회사》의 자동차 같았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듯 한 남자 1명과 녀자 1명이 차가 떠나자 적재함에 뛰여 올랐다. 자동차는 갑산방향으로 들어 갔다.

외삼촌은 그제야 돌아 왔다. 그는 리창선이와 토론하고 주재소에 가서 경관들과 바둑을 놀면서 적들의 동향을 살피였던것이다.

며칠이 지나 리창선을 만났을 때 나는 그 녀성이 누구인가고 물었다.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직접 파견하신 정치공작원이다.》고 단마디로 할뿐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의 놀람과 흥분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얼마 지나서야 그에게 왜 그때 말해 주지 않았는가고 분한 소리를 했더니 그는 《지하공작상 말해 주게 되여 있지 않다는걸 알지 않는가.》 하면서 도리여 성을 냈다. 내가 두말 못하게 하려는것이였다. 나도 지하공작상 지켜야 할 점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은 너무도 컸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성이 장군님께서 친히 파견하신 공작원이라는것을 알았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따라 갔을것인데 당신이 대주지 않아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그에게 마구 들이댔다. 그러나 리창선이 《공작원동지가 지하공작을 하는것도 유격대에 들어 가 총 잡고 싸우는것보다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대로만 해야 한다. 공작원동지가 말한것은 모두 장군님의 뜻 그대로다.》 하고 조리 있게 말하며 나중에는 《그대로 못하는 사람은 조직성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머쓱해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기쁘고 격동되여 부려 본 투정질과 비슷한것이였다. 전설로만 들어 오던 장군님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을 만나보았다는 기쁨은 한없이 컸다.

리창선은 나와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내용을 조항별로 이야기해 주었고 유격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김일성장군님을 뵌적이 있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가 장군님을 뵌적이 있으리라고는 물론 그때 나는 생각도 할수 없었다. 나와 다름 없는 범인인 그가 어떻게 천출명장인 장군님을 감히 뵈올수 있을가 하는 감정이였다.… 요즘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면서야 나는 리창선이 수령님의 친솔부대성원이였음을 알게 되였다.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더우기 잊혀 지지 않는것은 그때로부터 한달가량 지난 9월경에 있은 일이다.

어느 하루 얼마간 보이지 않던 《김빠이》 리창선이 여러 낯 선 사람들과 함께 언제공사장에 나타났다. 낯 선 사람들중에는 키가 큰편인 젊은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우리 인부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에게 담배까지 권하면서 생활형편과 공사장형편에 대하여 물으시였는데 허물 없고 소탈하셨다.

그분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였으며 함께 싸워 조국을 광복하고 다시 만나자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였다. 특별히 인상적인것은 그분의 류다른 안광과 우렁우렁하신 음성, 볼우물이 패이는 인상적인 웃음이였다.

그때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수 없었다. 다만 리창선을 비롯한 류다르게 보이던 몇몇 인부들이 멀찌감치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것과 그분과 같이 온 여러 사람들도 긴장해 주위경계하는것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을뿐이였다.

광복후 신문에서 장군님의 사진을 처음 뵈왔을 때 나는 그 젊은분이 누구이시였는가를 깨달았다. 허나 너무도 놀라운 일이여서 나로서도 내 생각을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국내깊이의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에 나가시였다가 조국광복회조직들과 천도교인들과의 사업을 위하여 리창선의 안내를 받으며 풍산지구에 들리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에 널리 떠돈 《김일성장군이 함흥에 나와 리발하고 려인숙에서 쉬고까지 갔다.》는 소문이 우연한것이 아니였던것이다.

그때로 말하면 참으로 《조선혁명의 일대 앙양기》였다. 유격대의 승전소식은 매일같이 들려 왔고 왜놈들은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었다. 우리 활동도 더 본격화되여 갔다. 조직은 나날이 확대되였고 유격대원호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 졌다. 지하족과 광목천, 성냥, 소금 등 원호물자를 마련하여 신파(오늘의 김정숙군)쪽으로 들여 보냈는데 그곳에서 다시 압록강을 넘겨 유격대에 전해 진다고 했다. 원호물자 마련하는 사업을 생산유격대활동이라고 불렀다. 유격대의 승전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의 힘도 보탬이 되였구나 싶어 힘든줄을 몰랐다.

유격대원호사업은 대체로 소규모로 진행되였으나 때로는 엄청날만큼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한번은 북청쪽에서 원호물자를 화물자동차에 가득 싣고 올라 왔는데 요란스레 경적소리를 울리며 신파쪽으로 들어 갔다. 며칠후 자동차는 나무 몇대를 싣고 돌아 나와 북청으로 내려 갔다. 원호물자는 신파를 거쳐 무사히 강을 넘어 유격대에 전해 진것이였다.

이렇게 원호물자는 등짐으로도 달구지로도 떼목으로도 자동차로도 끊임없이 유격대로 흘러 들어 갔다.

한편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활발히 벌렸는데 그중의 하나가 녀성공작원이 다녀 간후 리창선의 주도하에 무어 진 《황수원언제공사장로동자친목회》였다. 친목회에는 전철식선생도 김유진선생도 들어 있었으며 김덕룡, 리석기, 리경모들도 들어 있었다. 나는 리창선의 주장으로 책임자가 되였는데 사실상은 리창선이 지도한것과 다름 없었다.

나는 그때 양복주문돌이도 하고 있어서 활동하기 편리했다. 먼곳으로 오가는 일은 대체로 김덕룡과 리경모가 담당했다. 김덕룡은 걸음도 잘 걷고 일도 제낄 손이 있어 나는 그를 나자신처럼 믿었다.

친목회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조국광복회조직으로 발전시켜 나가던 때인 1937년 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혜산사건》이 터졌다.

풍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였는데 대부분 천도교를 믿던 사람들이였다. 천도교 함남도 도정이였던 박인진선생도 체포되고 나의 선배였던 리현욱동지도 체포되였다.

로동자친목회는 합법적인 단체였으나 일제가 혈안이 되여 날뛰는 조건에서 당분간 활동을 중지하고 지하로 들어 갈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 한차례의 좌절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투쟁의 지침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있었고 장군님께서 계시는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주  병  포

 

1937년이 저물어 가던 12월경이라고 생각한다. 후리후리한 체격에 날파람 있어 보이는 한 청년이 나를 찾아 와 《리인모가 옳은가.》 하고 묻는것이였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신재국동지가 《파발리에 가면 너 같은 기질을 가진 리인모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찾아 가라.》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좀 두드러질사한 두눈이 열기 있게 번쩍거렸고 말할 때마다 가쯘한 흰 이발이 눈을 끌었다. 첫눈에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바로 나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며 벗으로 된 주병포였다.

그는 그때 《조순사사건》이라고 부르는 일때문에 경찰을 피해 다니는 처지였다.

《조순사사건》이란 조태제라는 사법계 형사에게 주병포가 된주먹세례를 안긴 사건이였다.

조태제란 놈은 이만저만 못된 놈이 아닌데다 걸핏하면 사람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것이 여반장이여서 《조몽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유도까지 하는 놈이여서 《조몽둥이 온다.》 하면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피해 달아 났다. 그놈이 풍산읍의 료리집인 《북일루》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것이 비위에 거슬려 한바탕 폭행을 하려고 날치는것을 주병포가 한주먹으로 쓰러눕혀 놓았다.

원래 아이때부터 권투를 한다고 좁쌀자루를 매달아 놓고 련습해 온 병포였으니 주먹이 보통 세지 않았다. 조순사는 대번에 한쪽눈이 개구리눈알처럼 부어 올랐고 먹단지를 엎어 놓은것처럼 멍이 들었다.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으니 조순사는 반죽음이 되였다고들 했으나 주병포는 그저 한대 먹였을뿐이라고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늪평주재소에 붙들려 가 며칠간 취조를 받다가 나왔다. 그러나 《혜산사건》의 여파로 걸핏하면 도로 잡혀 들어 갈 판이여서 피신하는겸 파발리 우리 집에 가 있으라고 신재국동지가 보낸것이였다.

사연을 알게 된 나의 어머니는 《성미가 똑 같은것들이 만났다.》며 탄식을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한것은 얼마전에 있었던 일때문이였다.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하루 한 아이가 울면서 나에게 달려 왔는데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온통 부어 있었다. 조선말을 했다고 왜놈교원이 자기 방에 데려다 차고 때리고 했다는것이였다.

나는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조선아이가 조선말을 한다고 이렇게 때리다니, 나는 당장 조선바지저고리를 꺼내여 입고 학교로 달려 갔다. 마당에서 나는 《다니》라는 왜놈교사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바가야로!》 하며 그놈은 목검을 쥐고 달려 나와 다짜고짜 나를 후려 치려 들었다. 나는 내려 치는 목검을 받아 쥐고 빼앗아 냈다. 목검으로 되려 그놈을 후려 치기 시작했다. 그 목검이 우리 조선아이들을 무지하게 때렸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분노는 점점 더 커갔다. 마침내 그놈이 잘못했노라고 두손을 싹싹 비빌 때까지 두들겨 팼다. 그 일때문에 경찰에 불려 가 되게 취조를 받은것은 물론이고 얼마동안은 피신해 다니기까지 했다.…

병포는 그 이야기에 통쾌하게 웃었다. 나의 어머니의 말뿐아니라 《같은 기질》이라고 한 신재국의 말이 신통하다는것이였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와 나는 오래전 《적색독서회》때부터 한조직에서 싸워 온 동지였다. 이제 와서야 만나게 되고 알게 된것이 아쉬울 지경이였다. 우리는 이제는 서로 헤여 지는 일없이 함께 싸워 나가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그것은 물론 순수한 우정의 약속이 아니라 혁명동지로서의 약속이였다.

며칠 우리 집에서 묵고 나서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해 멀찌감치 가겠다며 서울로 떠나갔다.

얼마후 다시 왔을 때 그는 서울에서 법정전문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적만 두었을뿐 한달이 멀다하게 풍산으로 오르내렸다. 편지도 자주 왔고 나도 또한 드문드문 서울로 올라 가 그를 만났다.

그는 서울로 오르내리는 과정에 국내의 여러 독립운동선각자들과 알게 되였는데 내 보기에는 그들과의 교제가 병포에게 그다지 기쁨을 주는것 같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풍산에서의 투쟁과 항일유격대에만 쏠려 있었다. 이제 유격대공작원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유격대에 참군하겠다고 했다.

그 생각에서도 우리는 신통히 같았다.

그러다보니 그는 줄곧 서울에서 풍산으로, 풍산에서 서울로 오르내렸고 나도 서울을 여러번 다녀 왔다. 내가 서울로 가면 그의 하숙집에서 머물렀고 그가 풍산에 내려 오면 능귀면 문조리의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 머무르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혜산사건》으로 파괴되였거나 지하에 들어 간 조직에 대한 이야기와 항일유격대에 대한 이야기를 밤 새우며 나누었다.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방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했으나 그 밤들은 모두 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투쟁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밤들이였다.

 

 

녀성공작원을 다시 만나다

 

1938년 7월 초, 신재국동지에게서 련락이 와서 나는 급히 그의 집으로 갔다. 신재국동지는 그때 풍산자동차출장소 리파리취급소에서 일하면서 리파리 후령동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신재국의 집에 가서 얼마 있느라니 리현욱동지가 왔다. 그는 혜산경찰서에서 6개월간 고생하다가 출옥되여 나오는 길로 우리를 찾은것이였다.

그는 파괴된 조직들을 빨리 복구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모든 책임을 맡아 나선 권영벽, 리제순 등 체포된 여러 동지들의 희생적행동으로 출옥할수 있었다.

리현욱동지는 6개월간 받은 고문으로 형상이 말이 아니였으나 머지 않아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으로 진출할것이니 빨리 조직을 복구하고 장군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한조항한조항 해설해 주었다.

나는 이미 지난해에 만난 녀성공작원과 리창선에게서 그 내용을 상세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리현욱동지는 조직을 어떻게 꾸리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묶어 세우겠는가를 차근차근 이야기했는데 얼마나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지 6개월간 류치장이 아니라 지하공작학교를 다녀 오기라도 한듯 했다.

그날 우리는 조직의 이름을 《풍산지구 혁명위원회》로 하였고 세개 지구로 나누어 활동지역을 분담했다. 동부는 신재국, 서부는 나, 남부는 리현욱동지가 맡았으며 그는 파괴된 풍산지하조직을 복구하는 사업도 맡았다.

저녁에는 리현욱동지가 나누어 주는 미농지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우리는 10대강령을 《우리 슬로간》이라고 불렀다.)을 깨알 박듯 썼다.

그때부터 나는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서울에 갈 때도 도꾜에 갈 때도 그것을 가지고 갔었다.

내가 맡은 서부지역이란 안산면과 안수면이였는데 안산면은 지경리, 상시경리, 내중리, 양평리, 파발리 등 다섯개 리였고 안수면은 미전리, 감토리, 수동리, 장평리, 평산리, 수상리 등 일곱개 리였다.

조직결성이 있은후 우리는 산하조직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활발하게 벌렸다.

조직은 빨리 확대되여 나갔다. 내가 맡은 서부지구에서만도 그해 9월 조국광복회 파발분회가 조직되였으며 거의 같은 때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황수원언제로동자돌격대》가 조직되였다. 돌격대의 핵심으로 된것은 지난해 7월 녀성공작원이 다녀 간후 리창선의 주도하에 무어 졌던 로동자친목회의 성원들이였다. 조직결성모임은 김덕룡이 차려 놓은 《신광양복점》에서 진행하였는데 련락책임자로는 김덕룡과 리경모가 되였다. 돌격대는 주로 일제의 전시전력생산보장을 위한 황수원과 내중리의 수전공사를 지연시키고 파괴하는 여러가지 투쟁을 벌렸다. 그때 수전공사장에서는 작고 큰 사고들이 련달아 유발되여 왜놈들이 골치깨나 앓았는데 그중의 대부분이 로동자돌격대의 공작때문이였다. 한편으로는 유격대원호물자도 마련하고 장군님께서 조국으로 진군할 때 합세하기 위한 준비로 비밀리에 칼, 창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그리고 그무렵에 안산면 로은리 큰밭골치기에서 《안산후치령 생산돌격대》도 조직하였는데 북청-혜산, 북청-삼수 등 군용 1등도로에 대한 적정장악과 후치령 수림지대에서 목탄, 신탄 판매금으로 유격대원호자금과 조직자금확보사업도 하였다.

동부와 남부지역에서도 조직은 나날이 확대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이제 뒤에 이야기할 1938년 9월 장군님께서 파견해 주신 정치공작원과의 상봉을 기점으로 해서 이루어 진 성과들이다.

조직들을 내오기 위해 분주히 뛰여 다니던 9월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 오니 래일 저녁까지 리파리 후령동의 《양춘의원집》으로 오라는 련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주병포의 일때문이 아닐가 하고 생각했다.

며칠전 주병포가 서울에서 내려 왔었다. 나를 찾아 온 그는 더는 이러고 있지 못하겠다며 기어이 유격대에 참군하겠다는것이였다. 그가 자기 결심을 리현욱동지나 신재국동지에게 제기했으리라는것을 나는 짐작했다. 나와 만났을 때 그는 당장 유격대로 가는듯이 흥분해 있었던것이다. 그는 원래 마음 먹으면 기어코 그대로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소학교때 한번은 곡마단이 풍산에 왔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구경하고 사까스(교예)에 미쳐 버린 주병포는 사까스를 하겠다고 한달동안이나 곡마단을 따라 다닌 일까지 있었다.

지금도 그때 무릎을 흔들며 앉아 흥분하여 말하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그는 앉으면 무릎을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그가 유격대에 가게 되면 어떻게 떼를 써서라도 나도 같이 가리라고 단단히 마음 먹었다.

그런데 집으로 갔던 주병포는 그만 경찰의 눈에 걸려 경찰서로 끌려 가고 말았다. 왜놈들이 그에게 또 무슨 죄를 들씌울지 알수 없었다.

나는 다음날 일찌기 집을 떠나 후령동 《양춘의원집》으로 갔다. 집주인인 김의원은 조국광복회 후령동 분회 회원이였고 그 집은 우리 혁명위원회의 비밀련락소였다.

련락소에 이르니 리현욱동지와 신재국동지가 먼저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를 말해 주지도 않고 잠자코 앉아 기다리라고만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얼마후에야 그들은 이제 곧 장군님께서 파견하신 유격대공작원이 온다고 알려 주는것이였다.

너무너무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였다. 공작원을 파견하시였다는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풍산조직을 알고 계신다는것이 아닌가. 꿈 같기만 했다.

그런데 얼마후 2명의 유격대원(한명은 녀성유격대원이였다.)과 함께 들어 서는것은 천만뜻밖에도 지난해에 만났던 그 녀성공작원이 아닌가. 반가움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직의 사업에 대하여 료해하신후 앞으로 해야 할 활동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그분께서는 준비된 성원들을 서울을 비롯한 남부조선일대에 파견하여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혁명가들을 묶어 세우려는 장군님의 구상에 대하여 강조했다.

그날 그분께서는 신재국동지를 따로 만났는데 내가 돌아 오면서 묻는 말에 신재국동지는 《주병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며 공작원이 주병포를 풍산혁명위원회 성원으로 임명했다는것을 알려 주었다.

집으로 돌아 와 2∼3일 지났을 때 주병포가 불쑥 나타났다. 경찰서에서 나온지는 벌써 며칠되였다고 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 가겠다는것이였다. 유격대참군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에처럼 자주 오르내릴수 없을것 같다며 편지로 련락을 가지자고 하는것이였다. 그제야 짐작되는바가 있어 내가 《녀공작원의 지시를 받았지?》 하고 직통으로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도 역시 내가 공작원을 만났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녀성공작원이 지난해 8월에 풍산으로 나왔을 때 병포가 사는 문조리 양지마을에서 머물렀으며 이번에 나와서도 양지마을 그의 집에 찾아 오셨다는것, 그때 마침 병포가 경찰서에서 풀려 나온 바람에 공작원과의 상봉이 이루어 졌음을 알게 되였다. 이 상봉이 병포의 서울행을 결정했다. 유격대참군이 국내혁명가들을 김일성장군님 주위에 결속시키기 위한 지하정치공작원으로 바뀌였던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후 서울로 오르내리면서 똑똑히 알게 된것이다. 이제는 자주 못 내려 올 서울행이라는데에 나의 어머니가 누구보다도 섭섭해 하였다. 붙임성이 있고 서글서글한 병포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에 쑥 들어서 노상 《병포는 내 아들》이라고 했었다.

혼자 있는 깊은 밤중에 인기척이 나며 문이 덜컹대면 어머니는 겁에 질려 소리친다.

《거 뉘기요?》

《아들이 왔소다.》 하는 대답이 들리면 어머니는 대뜸 《병포 왔구나.》 하고 반갑게 문을 열어 주군 했다.

병포가 떠날 때 어머니는 상심하는 얼굴로 그를 동구밖까지 바래워 주었다. 혹시 그때 어머니는 병포의 떠남에서 뒤이어 있게 될 이 아들의 떠남을 륙감으로 느끼고 더 상심한것이 아닌지 모른다.

두달인가 지났을 때 병포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이 무척 바쁜 모양이였다.

리현욱동지는 녀성공작원이 풍산조직에 준 임무중의 하나이니 빨리 서울에 가서 주병포를 만나 지시를 받으면서 도와 주라고 했다.

나는 1939년 설명절을 쇠고 인차 서울로 올라 갔다.…

《령감, 그때 풍산에 나왔던 유격대녀공작원이 누구이신지 아시우?》

안해의 물음에 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알지 않구! 장군님의 특사지!》

안해는 머리를 흔들었다.

《알긴 잘 압네다. 이걸 읽어 보시우.》

그는 내앞에 《로동신문》을 한장 내놓았다.

1991년 5월 29일부였는데 안해가 가리키는 2면에는 《동해안일대가 항일혁명의 보루로 다져 지던 나날을 더듬어》란 제목밑에 박정숙, 위인찬 두사람의 글이 전면기사로 실려 있었다.

《…

지금으로부터 55년전 5월에 백두산줄기의 대원시림속인 동강밀영에서 조국광복회운동을 국내깊이에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국경일대와 국내에로 수많이 파견하였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높이 받드시고 1937년 7월과 8월에 국내깊이에 진출하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나는 놀란 눈으로 안해를 보았다. 안해는 계속 읽어 보라고 재촉이였다.

《7월 초 김정숙동지께서는 우리 일행을 이끄시고 압록강을 건느시였다. …풍산지방에 들어 서니 천도교인들중에서 첫 유격대원이 된 리창선동무가 김정숙동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먼저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와 동해안지대를 련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풍산군의 종교인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시였다. …천도교 종리원 원장 원충히는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로 맞이…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음날… 조국광복회 풍산지회책임자를 비롯한 조직성원들을 만나시고…》

계속하여 필자들은 김정숙동지께서 단천에 가시여 단천농민폭동피검후과로 도덕산골안의 절간에서 병치료중이던 리주연을 만나시고 다음은 리원 차호바다가에서 일제경찰에게 《두문령》을 받고 있던 《헤그밀사》 리준의 아들 리용을, 북청에서는 조선공산당관계자인 리영을 만나신 사실과 리영이 그후 서울에 가서 《쓰딸리단》을 조직하고 관계자들에게 수령님의 혁명사상을 전달한 사실에 대하여 쓰고 있었다.

나는 주병포가 서울에 가서 김동지와 련계를 맺고 함께 일하는데 리영도 련결되여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였다. 김정숙동지께서 꾸려 놓으신 조직선을 타고 모든것이 진행되였던것이다.

회상기의 필자들은 그 나날에 대한 수령님의 다음과 같은 교시를 인용하고 있었다.

《김정숙동무도 1937년 여름과 1938년에 전령병이였던 김봉석동무를 데리고 풍산지구에 나와 혁명조직들을 지도하였습니다. 한번은 김정숙동무가 <김빠이>라는 별명을 가진 리창선의 안내를 받으며 풍산지구에 나왔던 일이 있습니다.》

더는 의혹을 가질 여지가 없었다.…

그때 주병포는 자기를 만나주고 과업을 준 녀성공작원이 전설 같은 이야기들로 하여 항간에 널리 알려 져 있었던 유격대의 녀장군이시라는것을 짐작이나 할수 있었을가. 그리고 자기의 모든 행로가 그이께서 꾸려 놓으신 조직선을 따라 진행되였다는것도… 아마 십중팔구는 그도 나처럼 짐작조차 할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병포나 나만이 아니라 우리 조직성원들모두가 같았다.

허나 우리는 그분께서 안겨 주신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그로 하여 언제 어디에 가서나 김일성장군님의 부하로 자부하였다.

우리는 삼천리전역으로 퍼져 가는 위대한 태양의 해발이였다.

 

 

서울에서 도꾜로

 

내가 서울에 올라 갔을 때 주병포는 경성법전에 적을 두고 동대문구 충신동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전문학교에 적을 둔것은 명색뿐이였고 서울콩그룹의 김동지와 함께 서울일대 특히 영등포지구 로동자들속에 들어 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무렵 서울에서는 1930년 9월에 발표된 프로핀테른(국제적색로동조합)테제에 따라 혁명적로동조합운동을 강화하는데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소부르죠아지식인으로 구성되였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과 심한 파쟁으로 1928년에 해산되였기때문에 30년대의 혁명적로동조합운동은 여러 지하써클들의 지도로 다양하게 전개되였다. 그중 김동지의 그룹은 1933년 서울에 침투한 모스크바공산대학출신 권영태와 련결해 서울일원의 공장과 인천부두 등에서 세포를 조직했다. 이것이 서울 콩그룹의 전신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들은 각 공장에 세포가 조직되자 이를 산업별 조직으로 체계화해 나갔다.

그런데 33년 가을 종연방직파업이 발단으로 되여 그룹이 로출되고 말았다.

이때 그 조직자인 김동지와 권영태 등 400여명이 검거되였다. 그후 조직을 수습해 다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35년 다시 검거선풍에 휘말리고 말았다.

1937년 출옥한 김동지는 그해 봄 국제공산당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태평양》에서 김일성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가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것은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고향 충주에 내려 가 있을 때였다. 그때 마을 장터의 《변이복리발소》에서 몇사람이 모여 앉아 지금 조선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김동지는 서슴없이 《조선에서 제일 훌륭한분은 보천보를 들이친 김일성장군님이시다.》 하고 말했다는것이였다.

주병포는 김동지의 동향인으로 청년운동을 하는 리기환에게서 들었다는 그 이야기를 하며 그길로 서울로 올라 온 김동지가 《서울 콤뮤니스트그룹》(일명 콩그룹)을 조직하고 맹활동을 하고 있다고 흥분하여 알려 주었다.

김동지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 병포의 일은 잘 진척되여 가는것 같았다. 알고 싶은것은 무척 많았으나 지하공작상 나는 더 알려고 할수 없었다. 하여튼 김동지의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되니 나는 김동지에게 무척 존경이 갔다.

나는 당장 일에 착수하고 싶었다. 주병포는 나를 어떤 사람에게 련결시키면서 지하사업의 특성상 많은 설명을 할수 없으니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고 그 사람과 련락만 잘하라고 했다.

그런데 련결시켜 준 그 사람이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바로 나와 한고향사람으로 아버지가 그 린근에서 방의석과 나란히 자동차왕으로 알려 진 조재옥이였다.

그는 우리 동무들이 어린 나이에도 투쟁한다고 뛰여 다닐 때 함북의 북경성중학교에 다녔다.

자본가이며 일제와 늘 접촉하는 사람의 아들, 그에 대한 기억이란 여름방학때 고향에 오면 귀공자냄새를 피우며 다녀서 밉게 보았던 좋지 않은것들뿐이였다. 게다가 그는 서울법전(경성법전)을 졸업하고 친일파 최린이 사장을 하고 있는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를 하고 있었다.

동지라기보다는 투쟁대상이라 할만 한 사람을 련결시키니 나는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내놓고 말은 못하고 속만 태웠다. 더우기 지하조직사업이라 그가 그동안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 부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던 나로서는 뭐라 말할수 있는 형편도 못되였다. 속이 상한 나는 병포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이럴바에야 서울이 아니라 도꾜에 가서 공부나 하는게 낫겠다는 부르튼 소리도 했다.

그런데 병포는 의외에도 도꾜에 가서 풍산출신 고학생들과 련계를 가져 보는것이 좋겠다고 하는것이였다. 도꾜에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들 몇이 고학을 하려고 가 있었다.

나는 마침 잘되였다 싶어 우선 도꾜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내기로 했다.

내가 도꾜에 가자면 고향에 가서 수속하여 도항증을 받아 와야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요주의인물에게 도항증이 나올리 만무한데다 고향을 떠날 때 형사들이 내 거처를 모르게 하고 떠났었기때문에 고향의 내 담당형사는 혈안이 돼서 나를 찾고 있는 형편이였다.

결국 도꾜에 가자면 밀항을 할수밖에 없었다. 마침 친구들에게서 회답이 왔다. 자기들이 직접 데리러 오겠다는것이였다.

한달쯤 후에 과연 한 친구가 서울로 왔다. 그는 내가 늘쌍 안경을 끼고 다니는 특징을 리용해서 다른 친구가 안경 끼고 찍은 사진을 붙인 도항증을 내가지고 왔다.

내가 도꾜상업학교 학생이라는 가짜 학생증까지 있었다. 병포와 여러가지로 의논하고 준비를 했다.

내가 도꾜에 가기로 한것은 우선 이미전부터 련계를 가지고 있던 풍산내기 고학생들로 일본땅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는것이였고 다음은 일제의 검거선풍에서 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서울콩그룹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였던것이다.

나는 친구가 가지고 온 학생복을 입고 품속에는 미농지에 깨알같이 박아 쓴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간수했다.

집과의 련락은 병포에게 부탁하고 도꾜로 떠났다.

도꾜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슬아슬한 고비도 많이 넘겼다. 몹시 조마조마했는데 련락선에서는 정작 나는 아무 일 없었고 동행한 그 친구가 검문을 받았으며 시모노세끼에서 도꾜로 가는 기차에서도 역시 그 친구만 검문을 당했다. 왜경들에겐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듯했던 모양이다.혼잡한 도꾜역에 내려서 정신이 빠져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나는 그만 순식간에 동행했던 친구와 마중 나온 친구들을 모두 잃어 버리고 말았다. 큰일났다 싶어 아무리 둘러 봐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수없이 품에서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꺼내들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전차를 타고 우에노역에서 내려 렬차를 갈아 타고 가메리아역에서 내려 겨우 친구들의 아빠트로 찾아 갔다.

초면의 집주인에게 사정얘기를 하니 방문을 따주어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한시간쯤이나 앉아 기다렸다. 그제서야 친구들이 들어 오는데 《촌놈이 혼났지?》 하며 웃고 야단들이다.

알고보니 그들은 나를 혼자 역에 내버려 둔채 숨어서 내가 어쩌는지를 줄곧 지켜 보며 뒤따라 왔다는것이다.

내가 물어물어 집을 찾아 들어 가는것을 확인하고는 근처의 다방으로 몰려 가 일부러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했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도꾜거리에 금방 익숙해 졌다. 친구들은 그 아빠트에 6조방을 얻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란 아마 박경섭, 리시호, 김영교였던것 같다. 나보다 8년아래인 김영교는 한두해사이에 얼마나 자랐는지 의젓한 어른으로 되여 있었다. 내가 거기에 끼여 드니 식구가 한명 더 불은셈이였다.

 

 

도꾜에서의 풍산사람들

 

그들이 도꾜에 와서 무은 조직은 《풍우도꾜고학생친목회》라는것이였는데 활동정형을 알아 보니 그저 공부를 하면서 때때로 모여 앉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불평이나 하는것이 전부나 다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공부나 하려고 조직을 무었는가, 아무리 일본에 와 있어도 자기 할바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고향에서는 동무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있는가 하고 말해 주면서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꺼내 놓았다.

내가 말할 때는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못 찾던 그들이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보더니 활기를 띠고 서로 먼저 보겠다고 야단이였다.

그날 밤 우리는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의논했다. 모두들 열성이 대단했다. 이 《조국광복회 슬로간》만 있으면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은 모두 하나로 될수 있다고 흥분되여 말했다. 그 밤에 친목회조직을 어떻게 조국광복회조직으로 확대해 나가겠는가 하는 륜곽이 그어 졌다. 그때부터 그들은 동지를 찾기 시작했고 《풍우도꾜고학생친목회》는 여러 조선고학생들속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해설선전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일본땅에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기 위한 진일보였다.

나는 도꾜공업고등학교에 적을 두었다. 내가 도꾜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그 학교입학시험이 한창이여서 응시했더니 떨어 질줄 알았는데 합격된것이였다. 도꾜공업고등학교 학생이라는 학생증을 얻게 되니 정체를 숨기기는 그저 그만이였다. 물론 학생증을 쥔후에는 학교에 더 가보지도 않았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정신을 파악했다 싶을 때 나는 동지들의 열렬한 찬동속에 친목회를 조국광복회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조직의 명칭은 그대로 《풍우도꾜고학생친목회》로 하기로 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으로 개편된후 조직에서는 신쥬꾸구근방에서 고학하고 있는 학생그루빠와 련계를 가지고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을 하는 한편 우리 하숙생들의 동자질과 빨래 등을 맡아 해주던 리시호의 동생 리금단을 통해서는 녀학생들과도 련계를 가졌다.

나는 시간을 내여 센다이의 동북대학에서 의학부 연구생으로 있는 어린시절의 친구인 김시태를 찾아 갔다. 《적색독서회》, 《지게군조합》에서 함께 뛰여 다니던 친구였다. 그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받아 보고는 대단히 흥분되였다. 그 시절 장군님께서 친필하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보고 흥분되지 않는 조선사람이란 없었다. 특별히 기억나는것은 김시태가 친구들에게서 들었다며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공작원이 일본땅에 들어 왔는데 하도 신비한 재간을 가지고 있어서 왜놈들도 어쩌지 못한다는 전설 같은 소문을 이야기하던것이다. 그때는 조선사람이 사는 곳이면 그 어데서나 장군님에 대한 전설을 들을수 있었다. 나는 김시태와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하여 토론하고 도꾜로 돌아 왔다.

요즘 몇몇 자료를 보니 1940년 일본 제6고등학교에서 조국광복회 분회를 조직하였던 사실이 밝혀 져 있었다. 그 조직의 활동목표에 대하여 일본 내무성 경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특고월보》에는 《장차로 일본내의 혼란기에 일제히 봉기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것…》이라고 썼다.

그러고 보면 그때 장군님께서 일본땅에 공작원을 파견하였는데 하도 《도술》에 능하여 왜놈들이 잡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데도 근거가 있었다. 그 시절에 조국광복의 빛발로 되여 일본에 파견된 사람이 어찌 한둘만이였으랴.

나는 나 역시 일을 해놓은것은 없지만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품고 일본에 갔던 일원이라는데에 긍지를 느낀다. 애석한것은 《풍우도꾜고학생친목회》가 조국광복회의 분회조직으로 크게 활동을 못해 보고 일제경찰에 검거된탓으로 친목회를 이루었던 풍산청년들이 추방령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 와야 했던것이다.…

어데 가나 한고향사람이면 반갑고 만나고 싶어 지는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성정인것 같다.

도꾜생활중 고향에서 독서회사건때 같이 붙들려 갔던 선배 한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그는 체포된후 고문에 못 이겨 다른 관련자들을 경찰에 넘겨 주고 그 대가로 자신은 처벌을 면하고 일제로부터 도항증까지 얻어 일본류학길에 오른 인물이였다. 그동안 그는 도꾜에서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일본녀자와 살림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마음에선지 나를 찾아 와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했으나 나는 물론 거절했다. 그뒤로 내가 일부러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소식은 별로 들은게 없는데 일면 궁금하기도 하다. 광복된 조국에 돌아 와 그는 과연 어떤 인생행로를 걸었을것인지… 나는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싫었다.

《그게 ○○이란 사람이 아니우?》

원고를 정서해 주고 있던 안해의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인생행로를 걸었든 그도 이제는 저세상사람이 되였을것인데 그 후대들에게까지 선대의 오점을 남겨 둘 필요가 있을가. 그런 식민지력사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는 다시 도꾜로 돌아 간다.

때마침 병포가 외삼촌에게 나의 행방에 대해 알려 주어 외삼촌에게서 편지와 함께 돈이 왔다. 그 돈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도움도 줄수 있었고 경찰의 감시도 어지간히 경감할수 있었다.

경찰의 감시라는 면에서는 식민지백성에게 그 어느 곳도 자유의 땅은 아니였다. 도꾜에서도 조선사람을 감시하는 일을 하는 경시청 내선과 형사들이 종종 우리 아빠트로 찾아 왔다.

나는 밀항한 형편이라 저녁이면 방에다 고급대화단이불(일부러 서울에 련락해 부쳐 오도록 한것이였다.)을 깔고 조선옷도 근사하게 맞춰 입고는 찾아 온 형사들을 맞았다.

그들에게 내가 지위 높은 부호의 아들인듯이 보이게 해 그들이 나를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고향 풍산에서는 나를 맡았던 형사가 나의 행방을 놓쳤다고 감봉처분을 당하기도 했다는데 외삼촌이 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별탈없이 지나갈수 있었다.

그때 주병포로부터 급히 서울로 돌아 와 달라는 전달이 왔다.

나는 서둘러 친구들과 작별하고 도꾜를 떠났다.

 

 

경성콩그룹사건의 검거선풍속에서

 

1941년 설을 하루이틀 앞두고 서울에 도착한 나는 주병포에게 도꾜의 형편과 그곳에서 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그만하면 일이 잘된편이라면서 수고했다고 했다. 크게 한 일도 없이 칭찬을 받자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가책되였다. 병포는 곧 정색하더니 《이제 일을 시작하면 또 불평을 하겠는가?》고 따져 물었다.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극소수 친일파를 내놓고는 모든 사람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꼴이자 병포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고 다시 따져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솔직히 시인하고 협소했던 견해를 자기비판하면서 어떤 일을 시켜도 열심히 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제서야 얼굴이 좀 풀린 병포는 나에게 다시 일을 맡기겠다며 그대신 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시켜도 그 일만 하고 내용을 알려고 하지 말것을 잊지 말아.》 하고 재삼 당부했다.

그 당시 서울에선 경성콩그룹사건이 터져 김동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였다.

경성콩그룹은 33년이래 계속된 서울일원의 혁명운동을 계승한 조직이라 할수 있다. 프로핀테른테제는 혁명적로동계급을 주력으로 하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할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30년대이후 계속된 혁명적로동조합운동은 당재건사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더우기 1938년경부터 백두산지구를 중심으로 한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투쟁에 고무되면서 서울콩그룹의 활동은 매우 격렬해 지고 있었다.

1939년 9월 첫 일요일에는 기관지 《공산주의자》 제1호가 발간되였으며(2호부터는 《콤뮤니스트》) 같은 날에 비합법조직인 서울합동좌익로조가 결성되였다.

합동로조산하에는 서울시내 근 20개 중요공장들을 망라한 금속로조분회, 섬유로조분회, 출판로조분회 등이 조직되여 활동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서는 1939년 10월 태창직물주식회사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이였다.

주병포는 김동지와 함께 수리공으로 변장하기도 하며 태창직물주식회사에 들어 가 로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핵심들을 키워 나갔다. 마침내 1,200명의 로동자들은 임금인상, 로동시간단축, 숙식조건개선 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5일간 파업을 벌려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파업투쟁을 나는 직접 목격하였기에 여기에 언급하는것이다. 파업투쟁이 승리한후에는 투쟁에서 검열된 녀성로동자들로써 공장로조분회를 조직하였다.

그중에는 김동지의 부인이 된 녀성도 있었다. 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들의 결합은 태창직물주식회사의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승리에로 이끄는 속에서 맺어 진 굳건한 사랑이였다.

그외에 유정염색공장 500여명 로동자들의 파업도 나는 목격할수 있었다. 그 나날에 파업투쟁의 배후인물이며 경성콩그룹의 지도적인물인 김동지도 만나보았었다.

그때로 말하면 김일성장군님의 친솔하에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산지구진출을 비롯한 국내작전으로 국내가 떠들썩하던 때였다. 《치안유지》와 《황민화》에 혈안이 되여 있던 일제는 경성콩그룹의 격렬해 지는 투쟁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과의 그 어떤 련계를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일제는 신문들에 축소하고 왜소화하여 내던 장군님의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가혹한 보도관제까지 실시했다.

아마 《토벌의 왕자》라고 하던 마에다부대가 부대장이하 전몰한 홍기하전투에 대한 소식이 신문에서 읽었던 마지막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기사가 아니였던가 싶다.

그런만큼 경성콩그룹에 대한 왜놈들의 추적은 집요했고 드디여 태창직물회사에서 단서가 잡히여 경성콩그룹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휘몰아 쳤다.

검거선풍은 대체로 세차례에 걸쳐 휩쓸었다.

1차 검거선풍은 1940년 7∼8월경부터 12월 말까지로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렀는데 병포가 나를 도꾜로 보낸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차 검거때 파업투쟁의 배후인물이며 경성콩그룹의 지도적인물인 김동지가 체포되였다.

내가 서울로 돌아 온것은 1차 검거선풍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나는 체포령이 떨어 진 동지들을 숨겨 주고 서로간의 련락을 이어 주는 일을 맡게 되였다. 무척 바쁘고 초긴장을 요하는 일이였다. 그런데 그때 고향에서 어머니가 중병이라는 련락이 왔다.

어머니에게 다른 자식이나 며느리가 있는것도 아니고 온 식구가 달려 들어 화전감자농사짓기에 급급한 집안형편에 앓아 누운 어머니를 살뜰히 보살펴 줄 사람이 달리 있을리 만무하였다.

어머니가 물 한그릇 제대로 받아 자시고 있을가 생각하니 마음은 점점 급해 지는데 내가 고향으로 돌아 간다면 무사히 어머니곁에 있을수 있을지 확신할수도 없는 형편이였다. 이도저도 못하고 고민하는 때에 도꾜에 있던 친구들이 《친목회》건으로 검거되였다가 추방령을 받고 고향으로 가던 길에 들렸다. 내 사정을 들은 리시호가 나를 대신하여 자기가 어머니를 돌볼테니 걱정 말라고 나섰다. 우리 집에 가서 내 형편얘기를 하고 어머니를 간호하면 아들이 온것처럼 여기실테니 병도 금방 나으실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끝내 그가 내대신 집으로 가게 되였다. 어머니의 병은 장질부사(장티브스)였는데 리시호의 극진한 간호로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했으나 이번에는 간호하던 그가 전염되여 앓아 눕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너무나 송구한 마음으로 그가 쾌차하기를 빌었는데 그만 리시호는 어머니가 덮던 이불을 쓰고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내가 그를 죽인거나 마찬가지였다. 《시호, 네몫까지 내 일하마.》 이 말밖에 더 할말이 없었다.

리시호는 당시 일제를 반대하고 동지들간의 생사를 초월하는 우정을 몸소 보여 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때 우리들은 힘든 일은 자기가 하고 손 쉬운 일은 동지에게 맡기는것을 당연시했다. 허나 그것이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의 죽음앞에서 했던 다짐을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것 같다.…

서울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다 적을수는 없고, 동지들을 피신시키던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한가지만은 미리 이야기하고 넘어 가야 하겠다.

어느 하루 창경원앞을 지나다가 풍산에서 서울에 시집와 살고 있는 녀자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는 어려 보이는 한 처녀와 같이 있었다. 역시 풍산처녀로 서울에 의전을 다녀 볼가 해서 왔다는데 내 보기에는 의학보다 예능에 더 소질이 있을것 같아 보였다. 그런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처녀는 같은 고향사람이라는데서부터였는지 서울에 있을 생각이 없고 삼촌이 있는 원산에 가서 루씨녀고를 다닐 생각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정말로 그는 몇년후 내가 원산에 들렸을 때 그곳에서 루씨녀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완연한 처녀로 되여 있었다. 내친김에 한마디 더 이야기한다면 내가 그를 세번째로 만난것은 광복후 풍산에서였고 그가 바로 나의 안해로 된 김순임이였다.

43년간 남편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느라고 머리가 반백이 된 안해를 지금 옆에 앉혀 놓고도 그 시절의 애리애리하던 소녀의 인상이 자꾸만 밟혀 와 가슴을 아릿하게 한다.…

이야기를 다시 서울로 돌려 가자.

피신시켜야 할 동지들은 적지 않았다. 그때 우선 급하게 숨겨 주어야 할 사람은 조재옥동지였는데 그가 바로 내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병포가 나에게 련결시켰으나 내가 친일파로 오해하던 그 사람이였다. 나는 그에게 지난 날의 잘못을 사죄했다. 그는 노여워 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잘 싸워 나가자고 나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이렇게 리해가 되니 일심동체가 된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동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려니 돈이 몹시 필요했다. 급히 풍산으로 밀행을 하여 외삼촌을 만나 현금 9,000원을 얻었다. 그리고 신재국동지를 찾아 갔는데 그는 그때 방공감시대 대장을 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억지로 맡겨 시작했는데 일하는 과정에 그는 방공감시대를 자기네 조직원으로 꾸려 놓았다. 풍산군 방공감시대는 일제기관의 옷을 입었을뿐 무장한 반일조직이나 같았다. 그 무장대가 조국이 광복되였을 때 풍산군의 모든 일제친일기관을 무장해제하고 숙청하는데서 우리의 《주먹》으로 되였던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방공감시대 대장이라는것으로 하여 신재국동지는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로 하여 광복후에 《9.20폭동》을 겪어야 했으니 그것은 퍽 후의 이야기이다.

신재국동지는 서울소식과 돈이 필요하다는 나의 말을 듣고는 어떻게 구했는지 돈 1만원을 선뜻 마련해서 주었다. 나는 이 돈과 외삼촌이 준 돈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 와 조동지를 숨기는 비용으로 쓰면서 계속 련락을 맡아 했다.

련락은 주로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오고 그 학교 약리학 조교로 있는 김영준동지에게 했고 더러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후일에야 안 일인데 조재옥동지와 김영준동지는 조직의 학생책임자일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무렵 나와 병포는 충신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12시가 넘었는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 서는것이였다. 놀라서 보니 병포와 같은 조직원인 조희연동지였다. 그는 서울 법전을 졸업한 인테리로 문학이 전공인데 《조선의 고리끼》로 될것이라는 예평을 들을 정도였다. 경성콩그룹에서 조직원교양을 담당했는데 그날 낮 형사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던 모양이였다. 그런데 조동지의 집이 너무 초라하고 당사자도 왜소한 체구인데다 아주 꾀죄죄한 행색이라 형사들이 그가 조희연인가 아닌가 하는 순간 신발도 꿰지 않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쳐 왔다는것이다.

이렇게 찾아 오는것은 지하사업의 원칙에 어긋나지만 경찰의 손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동지를 안전하게 숨겨 주는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우선 하숙집에 누가 찾아 온 눈치를 모르게 하면서 그의 허기를 채워 주기 위해 전당포에 옷을 맡겨 돈을 만들었고 먹을것을 사들여 조동지를 2∼3일간 하숙방에서 지내게 했다.

그즈음 조재옥동지가 다른 한 동지를 비밀리에 만날 일이 생겼다. 그래서 조재옥동지를 종로5가 조흥은행옆의 변소로 데려 가 기다리게 하고 나는 은행으로 오기로 한 다른 동지를 데리러 은행안으로 들어 갔다. 약속시간이 많이 넘었는데도 그 동지가 나타나질 않아 변소에 가보니 조동지도 없는게 아닌가. 아차, 체포되였구나 하고 급히 하숙방으로 돌아 와 조희연동지를 딴 곳으로 옮기게 했다. 그뒤로 조희연동지를 보지 못했는데 49년 평양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때 조동지는 중앙당 선전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때의 반가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하지만 그후 50년 전쟁의 와중에 서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조동지와는 그때가 마지막상봉이였던셈이다.

조재옥동지는 종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였는데 그의 부친이 많은 돈을 내고 석방시켰으나 그때 얻은 병으로 광복의 날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큰 자본가였던 그의 부친은 아들의 투쟁공로로 하여 광복후에도 친일파나 자본가로 규탄 받지 않고 인민정권하에서 편안히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때 병포에게도 체포령이 내렸다. 일명 《종로경찰서사건》이라고 부르는 제2차 검거선풍이 몰아 치기 시작했던것이다.

얼마후 그는 종로경찰서의 경찰들에게 잡혔고 서대문형무소로 넘어 가 감금되였다.

세번째 검거선풍은 1941년 말경이였다고 하는데 잘 알수 없다. 나는 두번째 검거선풍이 일었을 때 급히 서울을 떠나 풍산으로 내려 왔던것이다. 그때가 1941년 6월이였다.

 

 

어머니의 마음

 

나는 풍산으로 내려 와 동지들에게 병포의 체포소식을 알렸고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병이 나았다고는 하나 아직 겨우 자리보전이나 하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그날 밤 어머니는 늦도록 등잔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했다.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들려 왔다. 그 소리에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였다.

《좀 있으문 겨울인데 감옥이란기 춥겠지비. 병포가 감옥안에서 무릎을 떨며 앉아 있겠구나.》

어머니의 눈에는 맑은것이 어려 있었다. 늘쌍 《병포는 내 아들》이라고 하던 어머니였다. 앉으면 무릎을 떠는 병포의 버릇이 어머니의 눈앞에 밟혀 오는 모양이였다. 때로는 어머니가 보다못해 툭 치며 《무르팍은 어째 이리 떠니? 궁상스레.》 하면 《예? 예-》 하고 싱긋 웃으며 무릎을 세웠다가 잠시후면 다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무릎을 흔들기 시작하군 했다. 그런 버릇이 녀인들의 가슴에는 별로 아프게 새겨 지는 모양이다.

내가 이곳 평양에 와서 김동지의 부인을 만났을 때도 주병포의 말이 나오자 그는 그 버릇부터 회상하였다.

《내가 보다못해 툭 치며 <또 그 버릇…> 하고 눈을 흘기면 <아차, 또 욕 먹을짓 했군.> 하고는 조용히 있다가 얼마 지나면 또 흔들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웃고 만적도 한두번이 아니예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때로는 앓음소리를 하면서도 그냥 바느질을 했다. 나는 내 옷을 짓는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며칠후 어머니는 다 지은 명주바지저고리를 내놓으며 《병포한테 갖다 줘라. 날씨가 추워 지면 어찌겠니?》 하는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머니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왔던 아버지의 명주바지저고리를 고쳐 지은것이였다.

나는 이 일을 남쪽땅에서 34년간 옥살이를 할 때 종종 생각하군 했다. 이 아들이 얼음장 같은 감방에서 옷도 못 입고 떨며 겨울에 찬물을 뒤집어 씌우고 얼구는 고문속에 있다는것을 알면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실가. 34년간을 무덤 같은 감방에서 떨며 굶으며 몸이 부서지며 살고 있었음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의 심장은 견디지 못했을것이다. 어머니는 종시 이 아들이 어떤 고통속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가시였다. 허나 나의 고통이 아무리 컸다고 하여도 이 아들을 기다리며 림종때까지도 《우리 인모는 돌아 온다.》고 되뇌이였다는 어머니의 고통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것이다.

아, 어머니의 그 고통에 내 무엇으로 보답할수 있을가.…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을 가지고 김덕룡과 함께 서울로 갔다. 그때 마침 병포의 형 주병두도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을 마치고 나왔기에 동행했다. 주병두는 병포의 활동자금을 대주느라고 비밀리에 아편농사를 했기때문에 잡혀 들어 갔었다. 다행히 왜놈들은 주병두가 조국광복회 회원이라는 사실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던것이다.

서울에 올라 갔으나 주병두는 갓 출옥한 몸이여서 마음대로 나다닐수 없었고 나는 더욱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여서 서대문감옥으로는 결국 김덕룡이 혼자 갔다. 김덕룡은 병포를 만나보고 옷을 전달하고 돌아 왔는데 고문과 옥고로 병포의 정상이 말이 아니라는것이였다.

우리는 급히 풍산으로 내려 가 병포의 석방운동을 벌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에서 변호사를 구하는 한편 병포의 형 주병두와 동지들은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마땅한 변호사를 얻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런데 결국은 변호사가 아니라 돈이 힘을 냈다. 병포의 형 주병두와 동지들이 마련한 돈을 보석금으로 검사에게 주고 병포를 병보석으로 가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1943년 12월이였다.

병포는 2년 6개월을 감옥에서 시달린것이였다. 그는 나의 어머니가 지었던 바지저고리를 입고 감옥에서 나왔다. 나와 김덕룡은 양복을 가지고 북청에 나가 병포를 마중해 같이 풍산으로 올라 왔다. 병포는 문조리의 자기 집으로 갔다.

그때였던지, 그전이였던지 김영준동지가 당장 갈 곳이 없어 김경문과 함께 서울을 떠나 풍산으로 왔었다. 소년투쟁할 때의 친구인 김경문은 북청에 떨어 지고 김영준동지는 우리 집으로 와서 얼마간 지냈다.

김영준동지는 우리 집에 한주일정도 있었는데 기척을 내지 않고 있으면서도 집안사정을 대강 짐작한 모양이였다. 그때도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는데 김동지는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까마귀를 잡아 드리라.》고 했다. 삼촌들은 경성제대를 나온 의사선생의 말이니 그게 특효약인가보다 해서 까마귀만 보이면 잡아다 어머니에게 드시게 했다. 과연 까마귀고기가 신통한 약이였던지 어머니는 원기를 회복하고 썩 건강해 지셨다. 하도 신기해 나중에 김동지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는 껄껄 웃었다.

《까마귀가 무슨 신통한 약이겠나. 까마귀나 소고기나 영양실조환자에겐 다 좋은 음식이 아니겠는가. 자네 집이 가난하고 식구도 많으니 맏며느리된 도리로 어쩌다 맛난것이 생겨도 식구들부터 먹이고 항상 배를 곯으시는데다 세간살이며 농사일 등 고된 일을 도맡아 하시니 병약해 지실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자네가 산해진미를 해드린다고 해도 어디 어머니마음에 드실수가 있겠나. 다행히 까마귀는 사람들이 불길하다고 모두 싫어 해 아무도 먹을 생각 안하는데다 마침 자네 집주변에 많이 있기에 어머님영양식으로 권해 드린것뿐일세.》

그 말을 듣고 나는 김동지의 현명한 처방에 탄복을 했다. 조국을 되찾으면 민족을 구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겠거니 했는데 그는 그만 전쟁때 희생되고 말았다.

김동지덕분에 건강해 지신 어머니는 내가 십여년만에 자기곁에 와 있는게 무던히도 좋으신 모양이였다. 그래도 좋은걸 말로 표현하는 분은 아니였다. 외할머니가 젊은 시절 《과부가 말 많으면 안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교육을 해놓아 어머니는 늘 무뚝뚝하다는 평을 듣는 편이였다. 그러나 말씀은 안하셔도 아들생각을 끔찍이 하는 어머니는 이 아들이 일제경찰에게 쫓겨 다니는것이 늘 걱정이시였다.

어머니로서는 아들의 생각을 모두다 리해하시기는 힘드셨을게 당연하다. 자신이 좀더 부지런히 일해 집도 번듯하게 고치고 살림살이도 좀 풍족해 지면 내가 집에 붙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셨던듯 하다. 어머니는 살림하면서 감자 한쪽도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을 늘 나에게 주셨고 고된 생활중에서도 집을 새로 짓느라고 흙짐을 져나르셨다.

그러나 이 무심한 아들은 여전히 밥만 먹으면 나돌아 다니기에 바빴다.

 

 

리별과 상봉

 

주병포는 능귀면 문조리집에서 고등계형사들의 감시속에 병치료를 하였다. 항상 이렇게저렇게 깔짝거려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것은 왜놈들의 잡스러운 본성인것 같다.

왜놈형사들은 병포가 하루도 마음 놓고 병치료를 할수 없게 수시로 찾아 오거나 불러 내거나 했다. 그것이 시끄러워 병포는 집에서 뚝 떨어 진 샘수천에 돌막을 지어 놓고 들어 배겼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감옥생활도 그의 습관을 고쳐 주지는 못했다. 앉으면 무릎을 흔드는 버릇이나 두팔을 쩍 벌리고 두주먹을 불끈 쥐고 자는 버릇도 여전했다.

《자면서도 왜놈과 싸우는것 같다.》 하고 나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한적도 있었다. 정열적인 성격도 여전했다. 오히려 더 정열적인것 같았다.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정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그는 장군님의 조국광복작전이 마감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조국광복의 날도 멀지 않았다고 희망에 넘쳐 있었다.

우리는 그의 몸만 건강해 지면 백두산으로 가 장군님의 조국광복작전에 참가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4년 7월 그는 서울고등법원의 호출로 풍산경찰서 순사 2명의 호송하에 공판 받으러 가게 되였던것이다. 나는 그가 떠나는것을 보지 못했다.

다른 동지들과 만나고 돌아 오니 돌막은 텅텅 비여 있었고 집에서는 그의 식구들이 맥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 병포는 또 잡혀 갔다.》 하며 우시던 그의 어머니는 병포가 떠나면서 놈들이 또 감옥에 넣을텐데 기어이 도망치겠다고 하며 왜놈들이 망하면 돌아 오겠으니 보고 싶은 생각이 나거든 보라고 사진을 두고 갔다고 말했다.

그것이 병포와 나의 마지막리별이였다.

병포는 그때 서울에 이르러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지하로 들어 갔다고 한다. 그후에 병포에게서는 가명으로 쓴 편지를 한두차례 받았을뿐이다.

그때로부터 1년후 일제는 망해 버렸다.

그러나 그와 나와의 상봉은 영원히 이루어 지지 못했다.

 

 

마지막 1년

 

8.15광복까지의 마지막 1년에 대해서는 회상하기도 숨 가쁜 생각이 든다. 병포는 지하로 들어 갔고 적지 않은 동지들은 피신했으며 김영교를 비롯한 일부 동지들은 《징집》을 피하여 흥남으로 나갔다. 당시 흥남지구의 노구찌재벌산하의 공장들은 군수생산과 관련된다 하여 《징집》에서 면제되여 있었다. 《징용》을 피하려는것이기는 했으나 흥남에 나가 조국광복작전에 호응할 조직을 꾸릴 의도도 가지고 나갔던것은 물론이다.

그 세월 《공출》의 가혹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 진것이니 이야기를 그만 두겠다. 신문출판물들에는 패전을 승전으로 전하는 《대동아전쟁》의 기사뿐이였고 조선글로 된 출판물은 모두 없어 져 버렸다. 조선글, 조선말, 조선사람의 이름까지 없애 버리던 때였다.

그때 외삼촌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직업이 없으면 무조건 《징용》에 걸리는데 아무 일이든 해야겠다며 다시 동지들과 함께 양복점을 해보라고 했다. 전에도 해본 일이여서 별로 어렵지 않게 김덕룡, 리석기와 함께 양복점을 다시 시작했다.

양복점이라는것이 동지들과 련계를 가지는데는 그저그만이였다.

신재국동지도 방공감시대장의 정복차림으로 위엄 있게 드나들었고 박흥윤, 리창황 등 동지들도 하루가 멀다하게 찾아 왔다. 찾아 오는 사람수로 말하면 벌이가 굉장할 양복점이였으나 사실은 그와 반대였다.

흥남에 나간 김영교는 뿌르르 달려 올라 와 하루이틀씩 묵어 가며 흥남소식, 서울소식을 전하군 했다. 그때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이 하도 한심하기에 동지들과 의논을 하고 괜찮아 보이는 천으로 그의 양복을 하나 지어 놓았다. 그러나 영교는 이 양복을 광복이 되고도 1년이 지난 1946년 8월에야 입을수 있었다. 격변하는 사태발전으로 하여 양복 같은것은 누구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것이다.

김영교의 양복이야기를 하느라니 병포에게서 받았던 편지가 떠오른다. 그 양복을 지은 다음날인가 서울에 갔던 병포의 형 주병두가 《철이》라는 가명으로 된 병포의 편지를 가져 왔다. 왜놈들의 최후가 가까와 왔다는 정세보고와 함께 개마고원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조직하자는것이였다.

그때 내가 맡은 서부지구에서는 이미 조직된 조국광복회조직외에 새로 무은 조직으로는 1943년 3월에 무은 《안산반일청년단》과 1943년 여름 김덕룡을 보내여 조직한 《풍우북청대용섬유(구라다)친목회》가 있었다. 조직들은 장군님의 조국광복로선을 대중속에 해설선전하면서 장군님의 국내진공작전에 합세하기 위한 준비로 창, 칼 등을 만들고 군사훈련도 드문히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력량은 준비되여 있는것이나 같았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사실 유격활동경험은 전혀 없었기때문에 병포에게서 온다는 사람들이 모종의 준비속에 올것이라고 예견하고 긴장 섞인 기대속에 기다렸다.

그런데 첫 접촉에서 암호가 서로 맞지 않았다. 나는 《무슨 사고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피신했는데 과연 이 만남이 일제경찰의 정보망에 로출되였던지 그중 한동지가 체포되고 다른 사람들도 피신하여 유격활동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이 계획이 무산된게 두고두고 안타까왔다. 남에서 징역을 사는 동안 경기도 포천군 백운계곡에서도 《김종백부대》라는 유격부대가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일제의 《징병》, 《징용》소동이 극에 달하고 있던 때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동, 요즘 남쪽의 유한계층들이 물놀이하러 잘 가는 백운계곡에 《징병》, 《징용》을 거부한 8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전시체제로 돌입해 최후발악을 하고 있는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활동을 펼치기 위해 부대를 조직했다. 책임자는 로동자출신의 김종백이였는데 이들은 철저한 소부대 편제로 나누어 낮에는 이들이 《공장》이라고 불렀던 아지트에 숨어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지도아래 99식, 38식 총의 사용법을 배우고 다이나마이트로 폭탄을 만들었으며 밤에는 유격활동을 나가 순사, 형사들을 때려 눕히고 무장을 확보하였다.

어느 정도 무장이 확보된후 김종백부대는 중앙선 일부 구간을 완전히 탈선시켜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수십년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나는 그때 전국적범위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전민항쟁방침에 따라 그 준비가 얼마나 거창하게 벌어 졌는가를 알게 되였다.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갔던 조선인학생들이 《김장군님의 부대가 본격적인 공세를 취할 때 호응하여 일어 서자!》는 구호밑에 항쟁태세를 갖추었고 니이가다에서는 《징용》에 끌려 갔던 조선인로동자들이 한꺼번에 수십명이 일제와 싸우기 위해 집단탈주한 사실도 있었다.

일본땅에서도 그러했으니 조선땅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북청에서만도 장군님의 조국광복작전이 시작되자 덕성, 장흥, 삼기의 왜놈주재소들을 습격하고 무장해제시킨 사실이 있었다.

나는 주로 피신해 있어야 했고 또 오래동안 남쪽에서 감옥생활을 하다보니 넓은 범위를 볼수 없었다.

여기서는 병포에게서 받은 마지막편지에 대한 이야기만 마저 하려고 한다.

45년 5월경에 지하에 들어 간 서울의 병포에게서 돈 2만원을 급히 보내라는 련락이 왔다. 당시 쌀 한말에 2원 70전 할 때이니 2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또 렴치를 불구하고 외삼촌에게 부탁하니 현금은 7,000원밖에 없다 하여 급히 북청으로 가 김경문을 찾았다. 아버지가 큰 지주로 마을유지였기때문에 경문은 그 덕분에 서울에서 내려 와 북청아마공장 회계로 취직해 있었다.

그는 그 공장에 조직되여 있는 《풍우북청대용섬유(구라다)친목회》 성원이였다. 내가 찾아 갔을 때 그는 마침 아마공동판매장에 지불할 공장 돈 2만원을 가지고 나가는 길이였다. 내가 돈 급한 사연을 얘기하자 경문은 서슴없이 자기가 그 돈을 가지고 서울로 가 병포를 만나겠다는것이였다. 너무나 고마와 뭐라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그때가 45년 6월, 일제가 최후를 앞두고 발악적인 탄압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 정황속에서 두말없이 용단을 내린 김경문의 희생적인 애국심에 무어라 치하의 말을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김동지가 떠난후 나도 일단 산속으로 피하였다. 그가 행방불명이 되면 형사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게 뻔했다. 산속 바위틈에 마른 풀을 깔고 감자와 소금으로 연명하며 올빼미생활을 2개월쯤 했을 때 동지들이 달려 올라 왔다.

조국이 광복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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