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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판문점을 넘어 북쪽땅에 들어 온지도 벌써 1년이 되였다. 1년전의 이날 나는 43년만에 만나는 안해의 손을 잡고 첫말로서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소.》라고 했었다. 사실 나는 그때 더 바랄것이 없었다. 또한 그때 나의 건강은 생의 여분이 한시간일지 두시간일지 알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나는 《송환》이라는 《인도주의》보자기에 싸여 북쪽땅에 넘겨 진 시체나 다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죽은 자》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1994년 3월 19일, 나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나의 집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43년만에 돌아 온 나의 집이다. 맞은편 벽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활달한 필체로 글 쓰고 계시는 사진을 모신 족자가 걸려 있다. 족자아래부분에는 그이께서 쓰시는 글이 자자구구 부각되여 내 가슴을 파고 든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동지를 우리 당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딸이 올린 편지를 보시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내가 돌아 오기 한달전인 2월 24일에 보내주신 친필회답서한이다. 나는 북쪽땅에 와서야 나를 돌아 오게 하는 투쟁이 얼마나 간고했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이 리인모때문에 얼마나 깊이 심려하시며 치밀한 작전을 세우시고 불면불휴의 지휘를 주시였는지를 알게 되였다. 또한 내가 이미 남쪽에 있을 때 수여된 공화국공민의 최고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 내가 아직 남쪽에 있을 때 나의 사회주의조국에서는 이 리인모를 한 인생이 올라 설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세워 주었던것이다. 옛글에 《의리는 큰산 같고 죽음은 홍모 같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남녘의 감옥에서도 생각했다. 지금은 그 말이 더욱 가슴에 사무쳐 오며 내 이제 죽은들 무슨 유한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전국로병대회때 나에게 앞으로 40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세상에 수호신이라는것이 있다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나의 생명, 나의 한생의 수호신이시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랑과 믿음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가 하는 생각뿐이다. 허나 늙고 부서져 불구된 이 몸으로 무엇을 할수 있을가. 43년전에 나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이 땅을 떠났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다른 직업이라군 가져 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도 여전히 인민군종군기자인셈이다. 남쪽땅에서 수기를 쓸 때 나는 종군기자의 마지막임무를 수행한다고 했는데 이 땅에 와서 보니 종군기자로서의 임무는 끝난것이 아니였다. 건강도 좋아 지고 한가한 시간도 생겨 새해에 들어 서면서 나는 남쪽에서 출판했던 수기를 다시 읽어 보게 되였다. 독자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의 변변치 못한 수기는 이미 두번에 걸쳐 씌여 졌다. 처음 쓴것은 남조선잡지 《말》에 4회에 걸쳐 게재되였고 다음은 새로 기억에 떠오른것들, 탈락되였던것들을 쓴 원고를 《말》지 신준영기자가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글줄마다에서는 양로원에서 혼자 있는 짬시간을 타 인기척에 귀를 강구며 말마디보다 누가 갑자기 들어 오면 어디 감출가를 더 생각하며 급급히 썼던 흔적이 그대로 느껴 졌다.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막을수없이 커갔다. 하여 나는 이렇게 필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한 기록을 정확히 하기 위하여 수기를 다시 쓰려는것이 아니다. 나는 글로 써서 남길만큼 해놓은 일이 없다. 1993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평양으로 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환영 받을 사람이 못됩니다.》 하고 말했던것은 겸손에서가 아니였다.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준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였고 그리고 나를 환영해 주고 맞이해 준 그 사람들이였다. 남쪽땅에서 나는 《당신이 34년간 옥고를 치르면서도 전향하지 않은것은 무엇때문인가.》 하는 물음을 만나는 사람마다에게서 받았다. 나는 그 물음에 응당 34년간, 아니 43년간 신념과 의지의 원천으로 되여 준 그것으로 대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남쪽땅에서는 그에 대하여 쓸수도 말할수도 없었다. 《말》지에 수기를 실으면서 편집부에서 첫 머리에 밝혔던것처럼 나는 <보안관찰법>에 의해 사소한 꼬투리로도 언제라도 징역형에 처해 질수 있는 처지》였다. 게다가 《주거제한》에 두발이 묶여 있었다. 감옥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 진》 것과 같았고 성문화되지 않은 《함구령》을 받은 말하는 벙어리였다. 그런 물음을 받을 때면 부지중 나의 머리속에는 8.15후 2.7구국투쟁때 함구령을 받고 시위대렬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했던 랑송시인 유진오의 불 같은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다시 또다시 톱날 같은 땅우에 한몸 하늘을 떠받들고 말해서는 아니될 말을 씹어 삼키며 우뢰처럼 울부짖으면 한초, 한초 숨결과 함께 넓어 져 가는 조국이여…
나는 그 입밖에 낼수도 글로 쓸수도 없었던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소리높이 말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수기를 다시 쓰려는 첫째 리유이다. 다음은 자주와 민주,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동지들에 대한 의무감때문이다. 소위 현대사의 묻혀 버린 부문을 파헤친다며 남쪽땅의 문사들이 그들을 두고 《력사의 수레바퀴에 무참히 깔려 사라진 인생》들이라고, 《반공》의 언덕에 서서 공정성의 연단에라도 선듯 《추도사》를 하는것을 듣고 읽을 때면 나의 가슴은 비분으로 끓어 번졌다. 과연 나의 동지들이 그런 인생들이였던가. 지금 지리산이나 속리산, 태백산에서 동지들의 봉분조차 찾아 볼수 없고 취흥에 겨운 사대매국노들이 활보하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것으로 쓰러진 나의 동지들을 허무와 회의의 무덤에 매장하려는것이 정당화될수는 없다. 먼 옛날 지각의 대변동으로 지구상에 밀생하던 동식물이 깊은 땅속에 묻혀 버릴 때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였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오늘은 인류에게 열을 주고 빛을 주는 석탄으로 되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처럼 남녘의 산야에 뿌려 진 선혈과 죽음이 때가 되면 민중의 가슴속에서 불 붙는 석탄으로 되여 반미반괴뢰투쟁의 불길로 타오르게 될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민중은 그 시대의 《지층》에서 자주와 사대, 애국과 매국의 격렬한 투쟁사를 감득하며 《반공》의 너울속에 몸을 숨긴 사대매국의 정체를 발견하게 될것이다. 참으로 우리 동지들이 무엇을 바랐던가. 그들이 피 타게 부른것이 과연 《조국통일 만세!》뿐이였던가. 그들이 바란것이 어떤 통일된 조국이였던가. 친일파와 사대매국노가 없는 통일된 조국, 착취와 압박이 없는 조국… 그런 조국은 어디에 있었던가!… 력사는 공정하게 심판할것이다. 내 만일 남녘의 이름 없는 산야에 묻힌 그들의 유골이라도 안고 들어 올수 있었더라면! 나는 먼저 떠나간 전우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투쟁의 길에서 이렇게 저렇게 헤여 진 동지들의 그후 운명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유가족에 대하여 이곳에 와서 잘 알게 되였다. 나는 나의 수기를 읽은 북과 남 그리고 해외의 독자들에게 나의 동지들의 그후 운명에 대하여, 그의 가족들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할 의무를 절감하게 된다. 또한 나는 이곳에 와서 감옥담벽과 간수들의 웨침소리의 강도에서 육감으로 느꼈던 그동안의 정치정세의 격변과정에 대하여 정확히 알게 되였다. 나는 43년간을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감방문틈으로 세상을 보아 왔다. 이제야 나는 비로소 눈과 귀가 열렸음을 느낀다. 43년간, 아니 근 80년간의 나의 한생을 력사의 글줄을 통하여 다시 돌이켜 볼 억누를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이상이 내가 수기를 다시 쓰려는 리유이다. 그러나 남쪽에서 쓴 수기를 나는 귀중히 여긴다. 그 수기로써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는것, 살아 있는한 투쟁할수 있다는 진리를 찾았으며 페인 리인모로부터 적들이 여전히 증오하고 무서워 하는 혁명가 리인모로 남아 있을수 있었던것이다. 때문에 나는 남쪽에서 쓴 수기를 기본으로 하여 약간한 정정을 가하고 할수 없었던 말들, 동지들의 유언과 운명을 언급하는것으로 그치려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43년간 나의 직업은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였다. 당은 아직 나에게 다른 임무를 주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인민군종군기자로서 자기 사명을 수행하려고 한다. 우리 동지들이 걸어 온 영광의 투쟁행로에 대하여, 그들의 고결한 정신에 대하여, 통일된 행복한 조국을 위하여 바친 아름다운 생에 대하여 나는 후대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당과 수령을 위하여 민족의 성업을 위한 전선에서 쓰러진 전사들이다. 나는 종군기자로서 그들에 대하여 그들의 마지막발자국에 이르기까지 써야 한다.
1994년 3월 19일
조선인민군 종군기자 리 인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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