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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 땅, 내 조국
3월 19일
이날은 내가 판문점을 넘어 43년만에 그리운 조국의 품에 안긴 날이다. 이날에 대해서는 아마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것이다. 거의 모든 북쪽땅 사람들이 그 시각 텔레비죤앞에 모여 있었다니 말이다. 내가 판문점을 넘어 선것은 독자들도 알고 있겠지만 오전 11시경이였다. 그러니 남쪽의 부산대학병원에서 깨여 난 새벽 4시 30분으로부터 여섯시간 반만이였다. 그 여섯시간 반은 42년 7개월만에 떠나는 남쪽땅에서의 마지막시간이였는데 랭랭함과 적의가 극치를 이룬 시간이였다. 우선 《안기부》요원들은 남쪽의 민주인사들이 나의 안해에게 쓴 편지를 비롯한 여섯통의 편지를 가져 갈수 없는것이라고 회수해 버렸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준비를 갖추고 장선화간병인과 의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5시 45분경 병실문을 나오니 복도에는 뜻밖에도 10여명의 비전향장기수동지들이 지키고 앉아 있다가 일어 나는것이 아닌가. 복도와 승강기문가에서는 기관원들의 모습이 얼른거렸다. 그들은 내가 동지들과 인사말을 나눌 여유도 주지 않았다. 동지들은 다만 내뒤에서 손을 흔들며 《고향에 돌아 가면 우리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는 당부를 할수 있었을뿐이였다. 병원마당에서는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불을 피워 놓고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그들의 노래소리도 들었었다. 그런데 승강기에서 내리자 나는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가게 되였고 후문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리웠다. 새벽어둠만이 서린 도로로 달릴 때는 경찰차가 앞뒤에서 쫓아 왔다. 마치 랍치되여 가는듯 했다. 차창밖에서는 대학생들과 《민가협》성원들이 나를 바래우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소리가 울리고 있었으나 전후좌우에서는 경찰과 《안기부》의 눈길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빌면 《호위》해 주는것이다. 물론 나는 당국자들이 언제 한번이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리라고 기대했던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순간에까지야… 이것 역시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였는지를 나는 북쪽땅에 들어 서서야 깨달았다. 판문점을 넘어 섰을 때 나는 말도 제대로 할수 없었고 손을 쳐들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링게르점적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북쪽땅에 들어 섰을 때는 모든것이 꿈 같았다. 꽃과 기발을 든 인파를 보았을 때는 놀랐다. 사람들의 웨침속에서 《리인모》라는 내 이름을 들을수 없었더라면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판문점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는 환영하는 인파의 련속이였다. 어데로 왔는지 어데까지 왔는지도 알수 없었다. 침상을 지켜 선 의사와 간호원들의 말을 통해서만 어데까지 왔음을 알수 있었을뿐이였다. 나는 후에 신문과 텔레비죤,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3월 19일의 일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알게 되였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들어 섰을 때도 나에게는 내가 북쪽땅에 들어 섰다는것이 현실로 믿어 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달려 와 손을 잡는 안해와 딸, 사위, 외손주들도 완전한 현실로 안겨 오지 않았다. 통일각에 이르러 벽에 모셔 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초상화를 보고 당중앙에서 나온 간부동지(후에야 그가 계응태비서임을 알았다.)가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리인모를 축하하며 평양까지 무사히 오기를 바란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말씀을 잠긴 목소리로 전달할 때에야 내가 나의 조국땅에 들어 섰다는것이 현실적으로 안겨 왔다. 그곳에서 안해의 시중을 받으며 보름만에 처음으로 식사를 했다. 《어느걸 드시겠어요?》 하고 안해가 앞에 놓인 음식접시들을 가리키며 물을 때 나는 《아무거나!》 하고 대답했다. 어느 사이 옛날 생활할 때의 사근사근하지 못하고 퉁명스럽던 말버릇이 살아 난것이다. 43년만에 안해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오른 생각은 《늙었구나.》 하는것이였다. 이제껏 43년간 기억속에 살아 있은 안해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서였다. 그런데 43년만에 나타난것은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 얼굴에 주름살 잡힌 늙은 녀인이였다. 딸 현옥이조차 기억속의 제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든 중년이 되였다. 안해의 흰머리칼과 주름살을 보았을 때 나는 43년이란 세월의 기나김과 동시에 안해의 43년 역시 나의 43년 못지 않게 굳센 마음, 굳은 믿음을 요하는것이였음을 느꼈다. 떳떳하게 내앞에 앉아 있는 안해, 그는 43년전의 약속을 지켜 그때의 마음으로 내앞에 앉아 있었고 나 또한 늙고 병들어 페인이 되였어도 그때의 그 마음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내 안해, 내 딸이 살고 있는 내 땅, 내 조국에 왔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나는 안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소.》 그러자 안해는 대뜸 내 말을 반박했다. 《죽긴 왜 죽어요? 오래오래 살아야지요!》 나 역시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자기의 건강상태를 알고 있었고 생명이 시간을 다툰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내 만일 제 발로 걸어 저 분계선을 넘고 안해와 딸을 가슴에 얼싸안을수 있었더라면! 안해는 내 마음을 짐작한듯 짐짓 활기를 띠며 말했다. 《이제까지 일은 없었던것으로 치고 더 생각 말아요.》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럼!》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어찌 내가 그 어느 하나라도 잊을수 있겠는가. 지리산에서 숨진 동지들, 감옥에서 떠나간 동지들, 아직 감옥에서 신음하는 동지들, 감옥에서 나와서도 《보안관찰법》의 울타리속에서 북녘하늘을 멀리 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동지들, 통일의 날 만나자고 기약한 동지들, 쇠덩이도 녹 쓸어 없어 졌을 34년간의 옥중고초, 그 어느 하나도 잊을수 없는것이였다. 어떤 기적이 나를 완전한 건강체로 만들고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잊을수 없을것이다. 삼천리 내 조국땅이 분렬의 아픔을 겪고 있는한 내가 입은 상처를, 동지들이 흘린 피를 잊을수 없을것이다. 안해여, 당신도 청춘을 흘러 보낸 43년간을 잊을수 없을것이요. 우리는 비록 만났으나 민족분렬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기때문이요. … 구급차에 오르자 나는 환영의 인파에 묻혔다. 서로 차창으로 다가서려고 애 쓰는 얼굴들이 울며 웃으며 손을 저었다. 때로는 차앞이 완전히 막히기도 했다. 차창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들도 있었다. 그들은 《불사조 리인모!》, 《불사조 리인모!》 하고 웨치고 있었다. 불사조, 그것은 전설속에 있는 불속에서도 물속에서도 죽지 않는 새이다. 34년간의 옥중생활은 참으로 불속이나 물속보다 쉬운것이 아니였다. 그속에서 살아 났기에 내가 정녕 불사조라면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당에 대한, 북녘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까지 살아 있을수도 신념을 지킬수도 없었을것이다.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수백리 연도는 말 그대로 사람의 바다였다. 구급차가 무슨 일로인지 잠시 멎자 뒤따르던 차들에서 내린 사람들이 마구 달려 왔고 《왜 섰습니까?》, 《병세가 더합니까?》 하는 물음들이 차창을 소나기처럼 두드렸다. 《위대한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 오는 리인모동지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발들이 가는 곳마다 새겨 져 있었다. 환영의 열파는 너무도 뜨거웠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기력이 없어 쳐들지 못하는 나의 손을 들어 환영군중에게 흔들어 주었다. 눈앞이 흐려 왔다. 남녘의 산야에 묻힌 동지들, 그들의 유골이라도 안고 올수 있었더라면! 이것은 내가 받을 환영이 아니였다. 나의 동지들이 받아야 할 환영이였다. 나는 북녘땅에서 나를 단순한 리인모가 아니라 통일성업을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과 당을 위하여 청춘과 생명을 바친 수많은 동지들의 상징으로 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광적인 환영의 기저에 깔려 있는것이 무엇이였는지를 나는 얼마후에야 알게 되였다. 후에 나는 병원에서 내가 들어 오던 때의 광경을 텔레비죤으로 다시 보았다. 사리원에 이르렀을 때인데 한 늙은 녀인이 차창을 두드리며 《나 금단이예요. 모르겠어요? 금단이예요!》 하고 울면서 부르짖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한 로인이 서 있었다. 그때야 나는 그 녀인이 일제때 장질부사에 걸린 나의 어머니를 내 대신 간병하다가 죽은 리시호의 녀동생이며 뒤에 서 있는것은 리창황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망각속에 묻혔던 일들이 기억에 되살아 났다. 리시호가 죽은후 풍산에 갔을 때 나는 리창황과 리시호의 녀동생 금단의 소개를 했었다. 시호를 따르듯 나를 따르던 금단은 두말없이 리창황과의 결혼에 동의했다. 그렇게 이루어 진 부부가 로인이 되여 차창앞에 서 있는것을 보니 감회가 새로왔다. 그날은 물론 그들을 알아 볼수 없었다. 그들은 쉼없이 밀려 오는 거대한 인파의 물방울들이였던것이다. 《로인님, 이제 조금만 가면 평양입니다.》 하는 의사의 말에 나는 침상을 좀 높여 달라고 부탁했다. 43년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평양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평양의 입구인 통일거리 관문동에 들어 섰을 때 눈앞에 안겨 온것은 평양시가지가 아니라 사람으로 이루어 진 산악들이였다. 수십층 고층건물들이 사람으로 덮여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고층건물들은 창문과 벽체로가 아니라 사람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그리고 큰거리를 진감하는 환호와 물결치는 꽃바다… 이것은 이미 단순한 환영의식이 아니였다. 나의 조국,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두리에 일심단결된 나의 조국의 장엄한 힘의 시위였다! 미국과 일본, 남조선괴뢰들의 압력과 위협에 단호히 맞선 나의 조국,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는 단호한 선언으로 적들을 전률케 한 나의 조국, 긴장에로 치달아 오르던 정세속에서 수년간 남조선괴뢰들이 이리 틀고 저리 틀고 하던 리인모를 두말 못하고 돌려 보내겠다고 한것은 준전시상태선포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라는 대결의 극점에서 이루어 진 나의 조국의 승리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것은 송환이 아니라 탈환이라고! 적들은 이 리인모에게서 죽음을 바랐다. 그러나 나는 살아서 이 땅을 다시 밟았다. 평양에 들어 서면서 해일처럼 안겨 오던 무적의 힘, 그때 나의 눈앞에 떠오른것은 우거지상이 되여 나를 뒤문으로 빼돌려 급급히 구급차에 밀어 넣던 자들의 몰골이였다. 그자들은 《송환》이라는 《인도주의》보자기로 진실을 감싸려 했지만 그것은 자루속의 송곳이였다. 나를 맞이하던 환영과 환호, 그것은 남조선괴뢰들이 마련한 지옥행으로부터 리인모를 탈환하여 락원행으로 전변시킨 나의 조국, 수천만 인민의 승리의 함성이였으며 당과 수령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3월 19일, 그날의 환영연도는 내가 이 땅에 들어 와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우리 조국의 힘의 시위였다.
내 땅, 내 조국
너무너무 변모되여 어데가 어덴지 짐작해 볼념조차 낼수 없는 평양시내를 돌아돌아 적십자병원 분원에 이르렀다. 병원은 넓은 정원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다양한 수종의 교목들과 관목들이 하도 무성하여 천연림을 방불케 했다. 이것은 물론 3월 19일 첫날에 알게 된것이 아니다. 병원에서는 나라적으로도 제일 유능하다는 의료진과 최신치료설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송환운동이 시작되던 그때부터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더우기 내가 부산대학교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벌써 해당한 치료대책을 협의까지 해가며 만단의 태세를 기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알리 없는 나는 집으로 갈 생각을 했다. 이제 며칠을 더 살겠기에 병원신세를 지겠는가 하는 자격지심에서였다. 죽어도 병원침대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 죽고 싶었다. 43년간을 오매불망 그려 본 집이 아닌가. 그러나 안해는 《치료부터 받아야 해요. 다 나아서 집으로는 훨훨 걸어서 갑시다.》 하면서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뜻이라고 하는것이였다. 하여 나는 43년만에 돌아 왔으나 나를 이 땅에 돌아 오게 해준 은인들에게 인사도 올리지 못한채 병원에 입원부터 하게 되였다. 병원에는 이미 입원실이 완전히 준비되여 있었고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원들은 나를 비누거품 다루듯 조심조심하며 구급소생차에서 침대로 옮겨 눕혔다. 후에야 알게 된것이지만 내가 판문점에서 평양으로 오는 길은 나의 몸상태에 따라 세가지 로정으로 계획되여 있었다는것이였다. 한 로정은 개성시병원에 입원시켜 급한 고비를 넘긴 다음 평양으로 오는것이였고(개성시병원에서는 나의 입원실을 따로 꾸려 놓았다고 한다.) 또 한 로정은 평양에 최단시간내에 닿도록 비행기로 직송하는것이였다.(비행기도 이미 준비되여 있었다.) 평양까지 륙로로 오는것은 나의 건강상태가 가장 《량호한》 경우를 기대한것이였다. 그날 세가지 로정중 어느 로정을 정하는가는 나를 진찰한 오윤환과장과 의사들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5백리 연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행사》의 결정권이 몇명의 의사들에게 있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랄수밖에 없겠다. 어느 국가수반을 맞는 행사도 이렇게 방대할수는 없었다. 내가 이 사실을 언급하는것은 나의 조국에서 이 리인모의 건강과 생명을 얼마나 귀중히 여겨 주었는가를 다소나마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의 3월 19일 로정은 이렇게 선택된것이였다. 그러면 그때 나의 몸상태가 비교적 《량호한》편이였던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독자들도 알고 있는바이지만 나는 링게르점적에 겨우 생명의 연장을 얻는 처지로서 손을 쳐들 기력도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할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절망적인 상태》였다. 회복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고 생명은 경각을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개성시병원이나 비행기가 아닌 륙로 5백리길을 선택했다. 그때 그들은 그 길이 나의 몸상태를 호전시키리라는것을 어떻게 확신할수 있었을가.… 그날 나는 평양으로 오는 로상에서 점점 기운을 되찾았고 사리원에서부터는 내 힘으로 손도 흔들수 있게 되였다. 사람들은 후에도 그때의 내 병상태로 보아 그것은 기적이였다고 하면서 길이 계속될수록 나의 《안광이 점점 더 형형해 지고 발음도 똑똑해 졌다.》고들 한결같이 말했다. 사실 그 길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부산시병원에서부터 사로잡고 있던 무기력상태에서 오래동안 헤여 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옛날 명의였던 리제마선생은 병명보다 환자의 체질과 성격을 보고 처방을 내려 놀라운 치유성과를 올렸다더니 우리 의사들도 그에 못지 않은 명의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병원에서 치료 받는 기간 무척 그들의 속을 태웠다. 입원했을 당시 나는 《건강》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데가 없을만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 하나없이 부서지고 찢겨 진 몸이였다. 영양상태는 매우 나빠 의학술어로 하면 《악액질상태》였고 피의 산소분합수치가 형편없이 낮아 심장기능이 극도로 쇠약해 졌으며 농흉으로 하여 계속적인 미열상태에 있었다. 전신운동기능상태는 령에 가까왔고 심한 언어장애와 호흡장애에 음식을 넘기는 기능까지 거의 상실되여 있었다. 나는 이미 《죽은 자》였다. 침대에 누우면 감방에서 수십년간 꼬부리고 있던 자세로 팔다리가 가드라들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이 사지기능을 회복시키려고 다리를 펴줄 때면 온몸을 비트는듯 한 심한 고통을 느꼈고 나는 그들에게 물러 가라고 마구 소리치기도 했다. 더우기 그들의 손이 코부위에 올 때면 온몸이 전률하며 진저리를 쳤다. 물, 고추가루물, 《강제영양급식》에 너무너무 시달린 코는 나의 리성과는 관계없이 다가오는 모든것에 대한 본능적인 적의를 나타냈다. 그럴 때면 의사와 간호원들은 성내거나 노여워 할 대신 《로인님》, 《할아버지》, 《선생님》 등 별별 호칭을 다 써서 나를 불러 가며 치료의도를 관철시키려고 애 쓰군 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초조해 하거나 지치는적이 없었다. 그러느라니 그들이 얼마나 애를 태웠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나는 미열로 하여 반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 때면 묵은 상처의 아픔과 함께 지난 날의 환각이 덮쳐 들군 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지, 물고문의 환각속에서 몸부림쳤던것 같기도 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간호원과 의사들이 침대를 둘러 싸고 서 있는데 간호원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내가 환각속에서 코에로 가까이 오는 그의 손을 피하려고 애 쓰며 마구 고함을 쳤다는것이다. 그러는 내 정상이 너무 가슴 아파 간호원은 울어 버린것이고 의사들도 눈물이 글썽해 서 있었다. 간호원은 눈물을 씻으며 나에게 말하는것이였다. 《할아버진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회복되셔야 합니다. 이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뜻이고 온 나라 인민들이 바라는것입니다.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묻는 편지가 하루에도 몇백통씩 병원에 오고 있어요. 온 나라가 지금 할아버지가 회복된 모습으로 텔레비죤앞에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의 날마다 면회 오는 안해와 딸, 사위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손자와 손녀들은 학교에 가면 《할아버지 건강이 어떤가?》 하는 물음에 대답할래기 하루가 다 간다 했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신문을 제 손으로 펴서 보더라.》는 말을 했더니 온 교실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려 교직원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지어는 손자손녀의 말을 온 학교 학생, 교직원이 다 모인 아침모임때 교장선생이 전달하여 온통 박수와 환성이였던적도 있다는것이다. 사위가 놀러 갔던 한 집에서는 누군가 《텔레비에 리인모할아버지가 나온다.》 하니까 어른들은 물론 떠들고 있던 아이들까지 모두 텔레비죤앞에 모여 앉더란다.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는 이야기들이였다. 정녕 이 리인모가 무엇이라고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관심한단 말인가. 병원에서는 나한테 오는 방문객들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건강이 회복되기전에는 그 어떤 방문객도 받을수 없다는것이 병원의 취지였고 지위나 용무에 관계없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병원밖에서 벌어 지는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간호원이 매일 《로동신문》을 읽어 주었고 나의 완쾌를 바라는 편지들을 읽어 주었던것이다. 오윤환과장은 전국시청자들의 요구에 의해 벌써 몇번이나 텔레비죤에 출연했다고 했다. 《선생님덕분에 나까지 유명해 지는것 같습니다. 선생님 아니였으면 내가 언제 텔레비죤에 출연해 볼 생각이나 할 일입니까?》 하고 롱담처럼 말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의 몸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 진 날이면 의사와 간호원들이 명절처럼 기뻐 하며 하는 말이 나를 더욱 감동케 했다. 《이 소식을 보고 받으시면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얼마나 기뻐 하시겠어요?》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하는 나의 반문에 병원일군들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매일 치료정형을 보고 받으시며 필요한것이 있으면 천만금을 들여서라도 구하여 리인모를 꼭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물론 나의 송환으로부터 시작하여 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보살핌속에 이루어 진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매일같이 보고를 받으시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한초한초가 보통사람의 1년, 10년 맞잡이로 귀중한것이 그이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날 깊은 밤중에 눈을 뜨니 침대머리맡에는 간호원이 앉아 있었다. 내 눈에 빛이 들어 오지 않게 돌려 놓은 탁상등의 불빛이 탁상우에 모셔 진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원형초상을 비치고 있었다. 넓은 입원실과 창가에 놓인 꽃 핀 화분들, 문 저쪽방에는 의사가 앉아 대기하고 있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엇을 더 해주지 못해 안타까와 하는 사람들… 이것이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몸에 이상이 생겼나 하여 불안한 눈으로 내려다 보는 간호원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건 아니겠지? 내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다시 되뇌이기만 했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겠지?》 내 근 80평생을 살아 온 이 세상에 정녕 이런 사랑도 있었던가. 간호원이 손수건으로 나의 눈가를 훔쳐 줄 때야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 밤 지나간 43년간을 더듬어 보며 꿈처럼 닥쳐 온 오늘을 생각하며 조용히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남녘땅에서 부를 때는 신념의 노래였고 이때는 감격과 감사의 노래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 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3월 19일부터 흘러 간 하루하루는 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 지는 하루하루였으며 고엽으로부터 푸른 잎으로 재생되는 하루하루였다. 열, 스무날도 아닌 그 나날들에 나의 침상을 하루같이 지켜 준 의사와 간호원들에게 내 무슨 말로 인사해야 할것인가. 어느 깊은 밤중이나 새벽에 눈을 떠도 침상가에는 의사와 간호원들의 잠 모르는 사려 깊은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회복되는 날까지 단 한시도 나의 침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었다. 만일 옛말에 있는것처럼 죽은 사람에게는 저승의 사자가 접근할 기회도 틈도 없었다. 의사와 간호원들 그리고 온 나라 인민들은 내 삶을 지켜 준 파수병들이였다. 나는 내가 소생하고 회복된것이 그 어떤 약이나 내 몸에 남아 있는 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사랑이, 온 나라 인민들의 뜨거운 마음이 내 몸에 소생의 힘을 주고 피로 되였다고 믿는다. 어릴적 나는 어느 책에선가 땅이 한없이 기름지고 해빛이 끝없이 따사로와 마른나무가지를 꽂아놓아도 곧 잎이 피여 나고 아름드리 록음으로 자란다는 신비한 나라에 대한 전설을 읽은적이 있다. 바로 이 땅이 그런 나라였다. 고목으로 되였던 나는 이 땅에서 푸르청청한 나무로 되살아 났다. 《죽은 자》에게 삶을 주고 《지옥행》을 《락원행》으로 되게 해주는 땅, 이것이 내 땅, 내 조국이였다.…
《수령님… 아, 어버이수령님!》
4월, 병원의 뜰안에도 봄이 왔다. 내가 밀차에 앉아 넓은 정원을 산보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 졌다. 이제는 스스로 신문도 읽을수 있었고 내 인생의 새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나로서도 느낄수 있었다. 이 봄의 4월에 있은 일을 모두 말하기는 어렵다. 몇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4월 3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살아서 펄펄 뛰는 산천어, 칠색송어, 누치 등 수십마리의 물고기를 건강회복에 좋을것이라며 이 리인모에게 보내주시였다. 백두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에서 자란 물고기를 보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민물고기이기때문에 잔가시가 많으니 잘 뽑아서 대접하라고 친히 이르시였다는것이였다. 그때의 나의 심상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딸 현옥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되살아 올랐다. 1992년 9월 6일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제3차 평양국제토론회》에 참가했던 나의 딸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딸애의 손을 잡으시고 너의 아버지를 아직 데려 오지 못해서 안됐다고, 우리 꼭 아버지를 데려 오자고 말씀하셨다는것이였다. 이 땅에 돌아 와 다른 할말을 찾을수 없어 《수령님, 이 리인모가 뭐라고 이렇게까지…》라고만 되뇌인것이 벌써 몇번이였던가. 거의 매일 그러했다. 4월 6일에는 전에 내가 남에 있을 때 이미 정령으로 발표되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메달과 훈장, 증서를 수여 받았고 며칠후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이 모셔 진 《김일성훈장》을 수여 받았다. 내 과연 이런 사랑과 표창을 받을만 한 일을 한것이 있던가. 이 땅에 와서 아직 그분께 인사도 못 올리지 않았는가. 나의 이 심정이 가족들에게도 그대로 옮겨 져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일인 4월 15일에 수령님께 축기를 만들어 올리는것이 어떤가고 했다. 나는 축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수 놓으라고 하였다.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장군님, 장군님의 탄신절을 해마다 이남의 철창속에서 맞으며 만년장수를 기원해 마지 않던 저는 43년만에 처음으로 당의 품에 안겨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척에 계시옵는 위대하신 장군님께 탄신 81돐에 즈음하여 친히 키워 주신 전사의 혁명적량심과 의리로 충성과 효성을 맹약 드리며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축기는 4월 13일에 올리였다. 4월 15일 아침, 나는 병원에 찾아 온 가족들과 함께 창밖으로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축기를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셨을가. 이 시각 수령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실가. 온 나라 인민들이 한결같이 올리는 만수축원의 소망이 이 아침 나의 소박한 축기와 함께 그분께 전해 지고 적으나마 기쁨을 드릴수 있었으면… 그런데 그때 부리나케 달려 들어 온 의사와 간호원이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를 찾아 병원에 나오셨다고 알려 주는것이였다. 믿기 어려웠다. 온 민족의 소원속에, 만민의 축복속에 편히 쉬셔야 할 수령님께서 일년에 하루밖에 없는 자신의 탄신일에 병원으로 나오시다니 이럴수가 있는가. 복도에서는 벌써 나의 안해에게 리인모동무도 수고했지만 부인도 수고 많았다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기때문에 제가 40년을 남편을 기다릴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씀 올리는 안해의 목소리에 뒤이어 《수령이 있어도 제 할탓입니다.》 하시는 소탈하신 웃음소리가 울렸다. 마음은 벌써 몸을 떠나 복도로 와락 달려 나가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느 사이 문안으로 들어 서시였다. 오전 9시 30분이였다. 나는 터질듯 한 가슴으로 허둥거렸다. 인사를 올려야 할 전사가 일어 설수 없어 그냥 앉아 있어야만 하니 자신의 몸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나에게로 다가오시여 허리를 굽히시고 뜨겁게 포옹해 주시였다. 63년전 파발리에 울렸던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와 함께 이 가슴에 희망의 별로 새겨 졌고 보천보의 총소리,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더불어 조국광복의 태양으로, 광복후 5년간을 거쳐 이 가슴에 신념과 의지의 기둥으로 되여 주신 김일성장군님! 눈 덮인 지리산과 차디찬 감방의 어느 하루도 이 가슴에서 떠난적 없는 장군님, 이 나라의 혁명가라면 누구나 한번 뵈옵는것이 소원이고 그 품에 안기기를 바라는 위대한 장군님! 나는 바로 그 품에 안긴것이 아닌가. 이 나라의 혁명가로서 조선로동당의 당원으로서 가장 큰 행복에 접했으면서도 나의 입은 제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이 리인모때문에 그토록 심려하신 그분께 《수령님, 조선인민군 종군기자 리인모 43년만에 적후에서 돌아 왔음을 보고 드립니다.》 하고 말씀 올렸더라면! … 사람이란 너무 가슴 벅차고 감격이 크면 모든 언어를 잊어 버리는것 같다. 수령님께서는 나를 진정시켜 주시면서 리인모동무는 원쑤들의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지조와 절개를 지켜 용감히 싸워 이겼다고, 조선로동당원의 고결한 혁명정신과 숭고한 풍모를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고향이 풍산이라는데 풍산사람들이 다 세고 똑똑하다,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시기 풍산사람들의 덕을 많이 봤다고 하시였다. 그러잖아도 송구하여 몸 둘바를 알수 없던 나는 수령님께서 이런 과분한 치하의 말씀까지 하시니 더 어쩔바를 몰랐다. 그때 뒤에서 의사들의 놀랜 속삭임이 들렸으나 나는 주의를 돌릴 겨를이 없었다. 후에 들으니 그때에 마비되여 가슴언저리까지도 못 올라 가던 나의 손이 머리뒤에까지 올라 갔다는것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칭찬을 받으면 손을 뒤더수기에 올려 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어버이수령님의 과분한 치하를 받게 되자 어릴적의 그 버릇이 되살아 나면서 굳어 졌던 손이 《극한계선》이라고 의사들이 말하던 가슴을 넘어 뒤머리에까지 올라 간것이였다. 의사들은 기적이라고들 했지만 나는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에 비하면 그 어떤 기적도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순간 벌떡 일어 섰다고 하여도 기적이 아니라 너무도 응당한것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리인모동무는 광복직후에 입당한 로당원이라고 하시며 입당당시의 당원증번호로 되여 있고 자신께서 직접 수표하신 조선로동당 당원증을 수여해 주시였다. 광복후 건당, 건국의 나날 처음으로 당원의 영예를 지니던 그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그러나 나는 단 한시도 입당년월일과 입당보증인, 당원증번호를 잊은적이 없었다. 공화국영웅메달을 수여 받던 4월 6일에 《전향하면 감옥살이도 면할수 있었지만 입당할 때 다진 맹세를 어길수 없어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던것은 진실 그대로였다. 그날의 맹세는 곧 위대한 수령님께 다진 맹세였기때문이였다. 긴긴 세월 나에게 힘을 주고 신념을 준것은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생각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는 위대한 수령님을 뵙고 있는것이였다. 입당한 때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 당의 창건자이시며 령도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직접 당원증을 수여 받는 기쁨과 행복, 나의 한생과 투쟁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싶었다. 수령님께서는 당원증을 받아 쥔 나의 손목에 이번에는 자신의 존함이 새겨 진 손목시계를 채워 주시였다. 나는 겨우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끝까지 충성 다하겠습니다.》라고 말씀 올릴수 있었다. 그이께서는 자애에 넘친 시선으로 나를 보시며 일어 서시였다. 《이렇게 리인모동무와 만났으니 오늘은 기념사진을 한장 찍읍시다.》 병원일군들이 서둘러 걸상을 가져 오자 수령님께서는 손을 저으시며 자신께서는 나의 옆에 서서 찍겠다고 하시였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또 한차례의 《기적》이 일어 났다고 하였다. 그처럼 무겁던 나의 손이 옷깃을 바로잡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등 빨리도 움직이더라는것이였다. 허나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니다. 세상에 과연 이런 경우가 있었을가. 전사는 앉아 있고 수령은 그옆에 서 있다는… 허나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고 이 리인모와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부축을 받아서라도 일어 서려고 허둥대는 나를 어서 편안히 앉으라고, 미안해 할것은 없다고 하시며 어깨를 가벼이 짚어 주시였다. 사진을 찍으신후에도 수령님께서는 인차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시며 원쑤와 싸워 이긴 불굴의 투지와 신념을 가지고 병치료를 잘하여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조국해방전쟁승리 40돐기념 열병식장에 꼭 나서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다시 또다시 돌아 보시며 방을 나서시는 그분의 모습을 나는 뜨거운 눈물속에서 바래웠다. 천만마디 말을 합친다 한들 그때의 내 심정을 전달할수 있을가… 나는 그날부터 나의 완쾌와 래일을 확신하게 되였다. 그날이 나의 치료생활에서 분수령이였다고 의사들은 말했다. 지금도 나는 나의 앞에 모셔 져 있는 그날의 기념사진을 볼 때면 뜨거운 눈물속에 하염없이 되뇌여 본다. 《수령님… 아, 어버이수령님!》
나의 집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뵌후부터 나의 몸상태는 빠른 속도로 호전되여 갔다. 의사들은 기적이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나에겐 여전히 굼뜨게만 느껴 져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인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 졌다. 모든것이 미흡하게만 생각되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지 한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병원에 찾아온 안해에게 짜증부터 냈다. 《왜 이제야 왔소? 계속 찾았는데.》 안해는 다소간 놀라며 물었다. 《왜 찾았어요?》 《당비문제를 토론하려구 찾았소.》 《당비요?》 안해는 어리둥절한 빛이였으나 나는 리유를 설명할 대신 다짜고짜로 물었다. 《내 당비를 언제부터 물었소?》 《3월부터 생활비가 나와서 그때부터 물고 있지요.》 《뭐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마음 놓이지 않고 미흡했던것이 우연치 않았다. 《그게 아니요! 내가 남에 나가 있었어도 당적은 여기에 있었소. 때문에 내가 전쟁시기 군대에 나간 때부터 다 당비를 물어야 하오. 어떻게 해서든지 그동안의 당비를 다 무오.》 나는 헤여 질 때 다시한번 말했다. 《꼭 그렇게 하오.》 며칠후에 그렇게 했다는 안해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마음을 놓았다. 그제야 나는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다소나마 지킨듯 하여 안해에게 집에 대해 물어 볼 마음의 여유도 얻었다. 《우리 집은 어디에 있소? 가보고 싶구만!》 《이제 인차 가봅시다그려.》 5월 10일 드디여 나는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나의 집을 찾아 보았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배려하여 주시였다는 집에 대해 말은 꽤 들었지만 진작 와보니 나의 집이라고 쉬이 믿기 어려웠다. 꽃나무들이 우거진 정원에 솟아 있는 아담한 2층집이였다. 풍산에서 나서 자란 촌사람인 나에겐 너무너무 큰 집이였다. 《할아버지, 내가 집구경을 시켜 드려요.》 손자 승철이가 열심히 밀차를 밀고 쫓아 다니며 집안팎에 대해 설명했다. 《참,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하고 나는 거듭거듭 되뇌이기만 하였을뿐이다. 풍산의 추녀 낮은 동기와지붕아래서 태여나 자랐고 흥남의 자그마한 두칸짜리 집에서 먼길을 떠난 내가 43년만에 한 일도 없이 손잡이 떨어 진 낡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불구의 몸으로 이 땅에 돌아 올 때 이런 집이 기다릴줄 생각이나 했던가. 옛말에는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마의환향을 했다 해야 할것 같다. 비단옷은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금의기향이라고 해야 할지.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방들은 정결하게 꾸려 졌고 어느 방이라 할것없이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보내주신 선물들과 전국각지와 해외에서 보내온 위문품들로 차 있었다. 정원에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의 청소년학생들이 정성껏 옮겨 심은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오늘은 당신이 좋아 하는 국수를 했어요.》 하는 안해의 말에 뒤이어 손자녀석이 식탁을 훑어 보며 《할아버진 마늘을 좋아 하시는데…》 하고 불만을 토하니 손녀는 얼른 《진밥은 아예 질색이죠?》 하고 메아리처럼 외워대여 나도 웃고 안해도 웃고 딸도 사위도 웃었을 때 안해의 눈에는 불시에 눈물이 어리고 나도 목이 메여 왔다. 43년만에 처음으로 남편을 위해 음식을 차린 안해, 43년만에 처음으로 안해가 차린 밥상에 마주 앉은 남편, 이 자리가 과연 어떻게 마련될수 있었던가. 43년만에 돌아 온 나의 집… 한편으로는 비감한 생각도 금할수 없었다. 아직 남녘의 하늘아래서 북녘의 가족들을 그리고 있을 동지들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이 땅에 있는 가족들 그리고 이 자리에 김상원선생의 가족들 그리고 부모없이 세 동생을 데리고 고생하고 있을 지현이도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내가 송환되기 1년전에 벌써 《남북사이에 합의가 이루어 지면 직접 리인모선생을 모시고 갈 용의가 있는가.》라는 한 잡지사에서 온 문사의 물음에 《나도 이북구경을 하고 싶다. 당국이 허락한다면 우리 부부가 직접 모시고 갈 생각이다.》라고 대답을 명백히 했던 김선생이였다. 헤여 질 때는 《안기부》요원들의 방해로 작별의 말도 변변히 주고 받지 못했었다. 지현이는 또 자기 아버지의 고향땅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던가. 그리고 신앙이나 정견을 멀리 떠나 친혈육처럼 돌봐 주던 박홍자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는 나의 이날을 얼마나 축수해 주었던가. … 남쪽땅에 있을 때는 자나깨나 북에 있는 친지들생각이였는데 이 땅에 와 그들을 만나고 나니 이제는 남녘에 있는 동지들과 다정하던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 진다. 이것은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행복이란 없다는 현자의 말로 대치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나라와 민족이 둘로 갈라 진 비극때문인것이다. 그럴수록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은덕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가슴 사무쳐 왔다. 6월 어느 날엔가 집에 들려 식구들과 함께 앉아 있는데 어떻게 알아 냈는지 동평양피복공장 지배인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어리둥절해서 알아 보니 용무인즉 내 몸에 맞는 옷을 지어 주겠다는것이다. 사실 그때 나는 이미 입던 옷들이 퍼그나 작아 진 상태였다. 40키로그람밖에 되지 않던 몸이 60키로그람선을 넘어 섰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 변화를 어떻게 짐작해 냈던지 지배인은 유능한 재단사까지 데리고 왔다. 얼마나 깐깐하게 치수를 재는지, 또 팔을 들어야 하거나 머리를 들어야 할 때면 제편에서 도리여 얼마나 미안해 하는지 그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기쁘게 해주는것을 응당한 일로 여기는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하나의 속성으로 되여 있는것 같았다. 회복되면서 자주 나가보았던 시내의 곳곳에서도 나는 그것을 느꼈다. 6월부터 나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고급승용차를 타고 시내 여러곳을 돌아 보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생가가 있는 만경대를 찾았을 때 나는 감상록에 《꿈결에도 그립던 만경대, 만경대는 신념의 기둥》이라고 써넣었다. 남에서 싸울 때 동지들은 나에게 평양에 가본적이 있는가고 묻고는 있다고 하면 의례히 만경대에 대하여 물었다. 만경대에는 못 가보았다 하면 그들은 《아니? 평양에 가서도 만경대를 못 가보았단 말이요?》 하고 자기 일처럼 탄식하군 하였다. 남녘동지들은 백범 김구를 비롯한 남북련석회의참가자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만경대에 대하여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그들의 탄식을 들을 때면 나도 얼마나 큰 아쉬움을 느꼈던지 모른다. 그런 만경대를 인생말년에야 찾아 보게 된것이다. 시내의 여러곳을 찾아 볼 때마다 절감하게 되는것은 그 어떤 부문이나 무불통달이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령도의 현명성이였다. 그 어느 하나에도 그분의 령도가 미치지 않은데가 없었다. 또한 인상적인것은 가는 곳마다에서 나를 맞아 주고 바래주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담벽처럼 둘러 싸며 박수와 뜨거운 인사로 맞이해 주었는데 그럴 때에조차 너무 떠들썩하지 않도록, 나에게 무리가 없도록 주의하는것이였다. 어린애나 어른이나 한결 같았다. 《조용해, 할아버지가 보고 계시는데.》 《너무 나가지 말아, 할아버지가 힘들어 하신다.》 하는 말을 나는 한두번만 아니게 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의 손자손녀들 같았고 어른들은 모두 나의 딸, 사위, 동지들과 같았다. 개선문에 갔을 때 내가 부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조용히 소리를 합쳐 불러 주었고 주체사상탑에 올라 갔을 때는 내가 다 돌아 보고 내려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수를 쳐주며 바래주었다. 모란봉 을밀대에 올라 갈 때는 여러명의 학생소년소녀들이 앞서 달려 올라 가며 길에서 무엇인지 줏고 있었다. 알고보니 밀차가 올라 갈 때 들출가봐 잔돌멩이들을 치웠다는것이다. 그외에도 천리마동상, 인민대학습당… 어데를 갔을 때도 같았다. 그때의 송구스러우면서도 목 메여 오던 느낌이란! 한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리인모동지가 건강한 몸으로 이 땅을 오래오래 활보하시는것은 우리모두가 바라는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뜻입니다.》 43년만에 돌아 와 보니 나의 집은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2층집만이 아니였다. 이 땅 어데나 모두 나의 집이였고 온 나라가 하나의 집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가장으로 모신 하나의 집이였다. 하기에 조국보위를 위한 군사복무에서 불구가 된 영예군인들을 두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심려하시였을 때에는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영예군인들과의 백년해로를 기약해 나섰고 자식 없는 로병들, 늙은이들의 말년을 두고 그이께서 우려하시였을 때에는 청춘남녀들이 서슴없이 그들의 아들딸로, 손자손녀로 되여 들어 갔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두고 가슴 아파 하시였을 때는 수많은 가정들에서 그 애들을 맡아 나섰고 아버지, 어머니로 되여 주었다. 일심단결이란 그 어떤 물리적인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단위로 사회정치적생명체라는 가를수 없는 유기체의 탄생을 의미하는것이였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구심점으로 계시기에 이루어 질수 있는것임을 나는 날이 갈수록 절감할수 있었다. 이 땅, 나의 조국은 온 나라 어데나 나의 집이였다. 나는 남에 있을 때 《남과 북중 조국을 어디라고 생각하는가?》라는 한 문사의 물음에 《남쪽은 내 조국이 아니다. 북쪽만이 나의 조국이다.》라고 대답했었다. 북쪽땅에 들어 와 날이 가고 많은것을 보면서 북도 남도 모두 나의 조국이라고 대답할 때는 언제일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이 삼천리 온 나라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모신 하나의 집으로 되는 때라는것은 두말할게 없다. 날이 갈수록, 이 땅의 곳곳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생각은 더욱 간절해 졌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바로 남녘의 민심이 그분께로 향하는것이 두려워 《대화창구일원화》를 부르짖으며 북남대화에 장애를 조성하고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손바닥으로 해빛을 가리우려는것과 같은것이다. 남녘땅에 있을 때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주고 받았던가. 그분은 마음의 태양이시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태양의 빛발아래 온 나라가 하나의 가정으로 된 그이의 품속에서 살고 있는것이였다. 《할아버진 어느 꽃이 제일 곱나요?》 어느 날 손자 승철이가 정원의 꽃나무들속으로 밀차를 밀어 주며 물었을 때 나는 그때 주저없이 대답해 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훌륭한 꽃은 김정일화다.》
《그분을 뵈웠습니다!》
7월 23일 나는 전승 40돐을 맞으며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로병대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모시고 진행되는 전국로병대회에 내가 참가하게 될줄이야! 회의장에서 먼발치서라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뵈올수 있다고 생각하니 진정하기 어려웠다. 전국로병대회대표증을 앞에 놓고 앉아 있노라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전승의 날까지 잘 싸우지도 못하고 적들의 감옥에 들어 가 있어야 했던 나를 전국로병대회의 대표라니… 이날을 못 보고 먼저 가버린 동지들에 대한 생각이며 전쟁의 나날에 대한 회상이 줄지어 떠올랐다. 로병대회날 아침 나는 안해와 온 집안식구들이 달라붙어 단장해 준 차림으로 대회장인 4.25문화회관으로 향했다. 나는 대기실로 안내되였다. 그때껏 나는 어떤 영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대회장 나의 좌석으로 데려다 주기만 기다리는데 대회개막시간을 얼마 앞두고 대기실로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들어 서시는것이 아닌가. 이제까지 말로만 들어 오며 초상화로, 텔레비죤화면으로 뵈와 왔던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대회에 참가하게 된 나를 축하해 주시면서 리인모동무가 재생하게 된것은 사회주의조국의 품과 당의 사랑, 동지들의 사랑이 있었기때문이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환한 미소를 보내주고 계시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우러러 보며 《어버이수령님, 저의 이 건강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주신것입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가 아니였으면 저는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몸입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죄송함과 가책을 금할수 없었다. 지난 5월 3일 병원에 찾아 온 당중앙위원회 한 책임일군에게 나는 《내가 원래 당성이 있는 당원이라면 지난 3월 19일 분계선을 넘었을 때 먼저 병원에 오는것이 아니라 당중앙위원회부터 먼저 찾아 가 위대한 김정일동지께 인사를 올리고 그다음에 병원에 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오면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부터 인사를 올리리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나를 찾으시게 한것이 아닌가. 내가 몸을 움직거리자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나에게로 몸을 기울이시였다. 나는 겨우겨우 진정해 가며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언제부터 큰절을 드리자고 생각했는데 저의 첫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하고 말씀 올렸다. 허나 그이께서 환히 웃으시며 건강이 퍽 나아진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오히려 나의 앉은 자세를 편안히 해주시며 마음 쓰시자 나는 목이 메여 인사는커녕 아무 말씀도 더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이 리인모가 살아 있다는것을 아시자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라고 높이 평가해 주시며 적후에 있는 전사에게 공민의 최고영예인 공화국영웅칭호와 《김일성훈장》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고 기어이 당의 품으로 돌아 오게 하여야 한다고 하신 그이이시였다.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새 전쟁도발책동이 극점에 달했던 지난 2월 말에는 나의 딸이 올린 편지를 보시고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동지를 우리 당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친필회답서한을 보내주시였다. 그 서한의 글줄은 나를 항상 울게 한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잊지 않을것입니다.》가 아니라 《잊지 않고 있습니다.》이다. 그 서한에는 리인모를 반드시 돌아 오게 할것이라는 단호한 결심과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단호한 결심과 강철 같은 의지로 하여 나는 이 땅에 돌아 올수 있었다. 그이께서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한시간한시간을 다투는 대결의 극점에서도 매일같이 나의 병상태에 대한 보고를 들으시였고 기어이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시며 모든 배려를 돌려 주시였다. 병원에서 나의 하루는 기어이 회복되여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이의 말씀을 전달 받는것으로 시작되였다. 명실공히 그분은 나의 생명의 수호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에게 앞으로 40년은 더 살수 있다고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더 환하게 웃어주시였다. 그 웃음은 그대로 태양의 빛 그대로였다. 그때 나는 정말로 40년을 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욕망에서보다 무엇인가 보답하기 위해서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회개막시간이 되여 대회장에 들어 서서 나는 주석단 맨 앞줄의 가운데로 안내되여 갔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바로 옆자리였다. 너무너무 놀라와서 뭐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앞으로 보니 《리인모》라는 내 이름이 똑똑히 씌여 있는것이 아닌가. 나를 그 자리로 안내해 준 일군은 나의 귀에 대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친히 잡아 주신 자리라고 알려 주었다. 그이께서는 마음 놓고 앉아 있으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주시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대회장에서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를 위하여 한목숨 바쳐 싸우자!》는 로병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를 위하여!》 우리는 1950년대에 바로 이 구호를 웨치며 미제와 리승만괴뢰역도를 무찌르는 싸움에 나섰다. 4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또다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들으니 실로 감회가 무상했다. 대회장의 주석단 나의 옆에는 바로 1990년대 우리 인민군의 최고사령관이신 김정일장군님께서 앉아 계셨다. 지구상의 곳곳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세계제국주의가 련합세력을 이루어 이 땅의 사회주의를 단숨에 질식시키려고 덤벼들 때 무비의 담력과 단호한 결심으로 적들의 광란을 일격에 짓부셔 버린분, 적들에게는 《판단의 정확성, 결심의 단호성, 타격의 무자비성》으로 《지구가 깨여 진》듯 한 공포를 안겨 주고 인민들에게는 충성의 귀감으로 가장 뜨거운 사랑과 의리를 심어 주신분, 이 나라 인민을 일심단결된 무적의 천만대군단으로 되게 하신분이시였다. 그분의 준전시상태명령일성에 온 나라는 하나로 되여 일떠섰고 150만의 청년들이 군대에 탄원해 나섰다. 사로청원들은 500만의 총폭탄이 되겠다는 사로청 제8차대회 결의를 실천에 옮길것을 서약해 나섰다. 위대한 김정일동지는 우리 민족의 신념이였고 의지이시였다. 그날 회의장에서 돌아 오자 나는 일군들에게 기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기자회견이란 원래 성미에 맞지 않고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나였지만 이날만은 감격과 기쁨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그날 찾아 온 기자들에게 한 말을 나는 그대로 옮기려 한다. 그것은 나에게서 또 하나의 신념으로 되였기때문이다. 《나는 오늘 위대한 태양을 보았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처음 만나 환히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까 찬란한 태양 같았다. 분명 나는 위대한 태양을 보았다. 태양이 빛나니까 우리 조국의 래일은 창창하고 무궁하구나 하는것을 절감했다.》 나는 로병대회참가자들과 만났을 때 말했다. 비록 43년만에 76살 고령의 페인이 되여 돌아 왔지만 나는 잃은것이 하나도 없다고. 이것은 진심이다. 철창안에서 34년, 철창밖에서 9년, 비록 청춘을 다 보내고 80이 불원한 늙은이로 불구의 몸이 되여 돌아 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잃은것이 없음을 절감했다. 공자가 불혹이라고 말한 40대를 두번 포갠 고개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이 땅에서 나는 청춘도 행복도 다시 찾았다. 인간으로서는 열번, 백번 다시 태여난대도 다 누려 볼수 없는 그런 행복, 그런 청춘, 그런 빛나는 인생의 높이에 서게 되였다. 나는 그날 밤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멀리 헤여 져 있는 동지들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들에게 열번, 스무번 《나는 오늘 그분을 뵈웠소.》 하고 되뇌이고 또 되뇌이였다.
인생의 절정에서
사람의 한생이 40을 넘어 서면 내리막에 접어 든다고들 말한다. 그무렵이 인생에서는 절정이라는 의미에서라고 할가. 그러나 나는 80이 불원한 오늘에 인생의 절정에 올랐음을 느끼며 지나온 한생을 돌이켜 보게 된다. 오늘의 이 영광으로 말하면 어느 별세계에나 와 있는듯 하여 때없이 이 영광이 어떻게 차례진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떤이들은 그만큼 고생했으니 응당 락을 누려야 하고 영광을 받을만 하다고들 말한다. 때로는 나의 안해나 딸, 손자, 손녀들에게서도 그 비슷한 말들이 불그러져 나를 곤혹케 한다. 고진감래라는 격이겠다. 허나 이 리인모에게는 그 말이 백천번 지당치 않다. 과연 남쪽땅의 감방에서 긴긴 세월 옥고를 치르면서 내 언제 어느 한순간이라도 오늘 같은 영광이나 인생의 절정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또 이런 영광이 차례지리라고 생각하고 놈들의 갖은 악행과 고문을 이겨 내며 《비전향장기수》의 길을 걸었던가.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우리 당이 있었기에, 조선로동당원이였기에, 내가 5년간 살아 본 우리 제도가 너무 좋았기에 신념을 버릴수 없었고 꺾이울수 없었다. 그것은 조선로동당원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응당한것이였다. 또한 더 단순화한다면 사상과 신념으로 구별되는 참인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감옥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음의 기둥으로 되여 주셨고 감옥을 나와 남조선사회의 탁류속에서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나의 신념과 의지를 지켜 주시였기때문이였다. 미일제국주의와 세계제국주의련합세력, 각양각색 적들의 발광적인 반사회주의, 반공화국책동을 짓부시면서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이 우리 식 사회주의를 한치의 드팀도 없이 지켜 냈기때문이였다. 나의 신념과 의지를 지켜 준것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였으며 우리 인민이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위대한 수령님께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그리고 우리 인민에게 천만번 큰절을 올려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영광과 사랑만을 받고 있다. 전국로병대회와 전승 40돐기념 열병식에 참가한지 얼마후인 8월에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우리 집에 록화기, 텔레비죤, 록음기를 비롯한 선물과 함께 안해의 젊은 시절 소원이였던 피아노까지 보내주시였을 때 안해는 감격에 겨워 울었고 나는 전국로병대회때 만나주시던 그이의 사진을 우러러 보며 부르짖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 이렇게 사랑만 주시면 이 리인모는 어떻게… 어떻게 하랍니까?》 백두산과 정일봉, 백두산밀영고향집을 끝 없는 경건속에 돌아 보고 집으로 돌아 오니 이번에는 또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이 나를 울게 했다. 안해도 딸도 울었다. 세상에 혼이라는것이 있다면 어머니도 지하에서 울으셨으리라. 내 어릴적에 생일날이면 30리길을 걸어 내가 있는 외가집에 찾아 왔다가 허전하게 돌아 가시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지금도 있다면 나에게 말했을것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아버지없이 자랐고 거의 한평생을 어머니 지어 주는 밥을 모르며 80에 이르렀지만 너에게는 진정한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고… 10월 12일 어느 해외교포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올린 이불을 보내주시였을 때 나는 그분의 사진을 눈물속에 우러르며 부르짖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 정녕 이렇게 사랑만 주시면 저는 어떻게 하랍니까? 이 리인모가 뭐라고 이런 사랑까지 주십니까?》 사진속에서 변함없이 자애로이 환히 웃으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나를 바라보시며 대답을 주시는듯 했다. 《우리 인민을 위해서라면 아까울것이 없습니다. 인민들이 바라는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습니다. 리인모동무는 우리 인민의 한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점차 내가 받아 안은 사랑이 이 땅에 사는 인민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베풀어 지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사랑이라는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이렇게 나는 76살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품속에 사는 인민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쓰고 또 써도 다 쓸수 없는것이, 하고 또 해도 끝낼수 없는것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에서 두터운 책으로도 못다할 수많은 이야기를 대신하여 미흡하나 내가 지난해 가을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올렸던 헌시를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한다.
인생의 절정이란 온 행복의 절정을 의미하는것이다. 나는 이 땅에 사는 인민의 한사람으로서 우리 인민이 누리는 최대의 행복에 대하여 쓴 글을 우리 당기관지인 《로동신문》에 투고한바 있다. 《로동신문》편집부에서는 나의 변변치 못한 글을 성의 있게 편집해 주었다. 독자들도 이미 읽었을 글이고 앞의 수기와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글을 여기 그대로 옮기는것으로 수기의 마감을 대신하려 한다.
우리는 수령복이 있습니다
《로동신문》편집국 앞 저는 먼저 정신적자양을 주는 우리 《로동신문》편집국에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그사이 우리 당보를 통하여 많은것을 배웠고 세상을 보는 눈도 밝아 졌습니다. 저는 지난 날 종군기자였고 오늘도 여러 신문사들에 명예기자로 등록되여 있습니다. 종군기자의 마음으로 글을 쓰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제가 우리 당으로부터 스스로 받은 당적분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공을 잘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증번호 306호를 가진 로당원인 제가 당의 품으로 돌아 온지 만 1년만에야 당보에 겨우 한편의 원고를 투고하니 자책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조국의 품에 안기자마자 종군기자답게 글을 써야 했으나 몸이 여의치 못해 이제야 당적분공을 수행하게 되는 나약한 당성을 솔직히 반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뒤를 보며 후회 말고 앞을 보며 분발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때 늦은감은 있으나 저는 이제라도 심장이 뛰는한 당원의 본분을 다하고저 귀 편집국에 어설픈 이 글을 보냅니다.
1994년 3월 18일 리 인 모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증오를 이긴 력사의 날로 말하면 아마도 제가 분계선을 넘어 사회주의조국의 품으로 돌아 온 3월 19일일것입니다. 그날로부터 1년세월이 흘렀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 가도 잊지 못할 나의 1년세월은 한생을 바쳐서도 얻을수 없고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가장 귀중한것을 얻고 깨달은 꿈 같은 365일이였습니다. 1년을 회고하면 감회가 뜨거워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가 남에서 보낸 43년이 삶을 빼앗기고 무덤에로 가는 죽음의 낮과 밤이였다면 북에서 보낸 1년은 새 생명을 받아 안고 최상의 행운을 누린 새삶의 분과 초였습니다. 지난 날 사람들이 수십년간 타향에 나가 살다가 귀향할 때면 금의환향이라고 출세를 하고 돌아 오는가 하면 재산을 모아 가지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어릴 때 서울이나 일본 도꾜에 갔다가 사각모자를 쓰거나 코수염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돌아 온 사람도 보았고 《히로》담배를 피우며 깨끗한 향촌의 정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쪽에서 인생의 고목이 되도록 40여년을 살다가 돌아 왔지만 가지고 온것이란 손잡이조차 떨어 진 빈 트렁크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돌아 올 때 가지고 온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가지 우리 수령님과 우리 당, 우리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뿐이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가지고 온 가장 소중한 정신적재산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은 제가 남쪽에서 인생고초를 겪으며 굳혀 진것이였고 남쪽의 많은 지인들의 가슴속에도 그러한 뜻은 간직되여 있는것이라 보겠습니다. 저는 그사이 조국의 품에 안겨 살면서 많은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강하게 절감한것은 우리 인민이 수령복을 타고 났다는 그 점입니다. 제가 50년도에 남으로 떠날 때에는 절세의 애국자이시고 만고의 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만을 알고 갔는데 43년만에 다시 돌아 와 보니 또 한분의 장군이 계시여 정치를 하시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만민이 숭상하는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동지이시였습니다. 물론 저는 남쪽에 있을 때 《친지김동》으로 불리우시는 김정일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조국에 와서 그분을 더 잘 알게 되였습니다. 남들은 자기 민족사에 참된 령수를 한분도 모시지 못해 곡절을 겪고 있지만 우리 인민은 천하제일의 수령을 두분이나 모시고 있어 가슴을 내밀며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더우기 시국이 복잡한 이때 탁월한 무에 천재적인 문을 겸비하시고 수령님에 대한 각별한 충성심을 지니신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동지와 같으신 절세의 영걸을 모시고 있으니 지금 우리 인민이 얼마나 큰 덕을 입고 있습니까. 저는 김정일동지의 위인상과 인간상에 탄복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우리 인민이야말로 수령복이 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외우군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 하듯이 우리는 정말 수령복이 있습니다.
1. 장군중의 장군을 모시였습니다
시국이 좋을 때에는 장군을 잘 몰라도 어려운 때에 장군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형세에서 위인의 높이와 장군의 위용이 돋보이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장군은 고난속에 있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나가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위인상을 보았습니다. 고난에 대하여 말한다면 제가 조국에 돌아 와 생활한 지난 1년세월처럼 역경이 극한점에 이른 시기는 없었을것입니다. 미국과 서방자본주의련합세력이 동방에 있는 우리 조선의 사회주의를 압살하려고 《핵소동》을 일으켰을 때 우리 조국은 너무도 큰 어려움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저는 남쪽에 있을 때 우리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당국자들이 늘어 놓는 험담도 들었고 언론매체들이 떠드는 어지러운 랑설도 들었으며 지어 북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걱정어린 말도 들었습니다. 제가 북으로 송환된다는 말이 돌아 갈 때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 왔다는 정체불명의 한 요원이 찾아 와 이북으로 돌아 가는것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것이 어떻겠는가고 하면서 지금 모스크바도 넘어 지고 사회주의도 다 없어 지는데 이북으로 꼭 가야 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안기부》요원으로 보이는 그자에게 격한 심정으로 내 조국은 북이지 남이 아니다, 시국이 어떻든 내가 내 조국으로 가자고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 북행길을 막지 말라고 쏘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국에 돌아 온후 시국이 하도 험악해서 늘 남 다른 관심을 가지고 정세의 추향과 세계정치의 기상도를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천하무적의 김정일동지를 모신 우리 조국은 끄떡 없었습니다. 미국이 남쪽으로부터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으로 우리를 위협하였을 때 명장의 지략과 담력으로 우리 조국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다칠수 없다고 위엄 있는 명령으로 도발자들의 기를 꺾어 놓으신분이 영명하신 장군님이시고 국제적으로 《핵특별사찰》소동으로 우리 공화국의 최고국익을 침해하려고 하였을 때 령장의 결단과 의지로 우리에게는 그러한 강도적론리나 강권행위가 통할수 없으며 그 어떤 위협과 봉쇄도 우리를 놀래울수 없다는 또 하나의 성명으로 조국의 운명을 지켜 주신분도 우리의 장군이시였습니다. 저는 세계가 불안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누구도 내릴수 없는 위인의 용단과 장군의 위엄으로 조국을 구원해 주시였을 때 벌써 우리 조선이 장군을 잘 만난 덕을 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한국》이라고 하는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다스리는 미국을 보아 왔는데 북에 와서는 그런 미국과 대등하게 마주 앉아 할말을 다하고 받을것을 다 받아 내는 공화국의 존엄과 위상을 보면서 저는 이런 경이적인 사변도 다 우리의 김정일장군을 모신 덕이라고 탄복하게 되였습니다. 미국이 우리 공화국과 한 약속을 저버리고 남쪽의 설익은 호전분자들을 대결과 전쟁에로 부추겼을 때 대화에는 대화로,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것이라는 철의 의지로 무모한 광기를 제압하신분도 우리 장군이시였고 그들이 또다시 군사적인 압력의 방도를 선택하려 할 때 선택의 권리는 큰 나라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형세를 뒤집어 놓으신분도 천하제일명장이신 우리의 김정일장군이시였습니다. 참으로 우리 장군이시야말로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시는 강한분이시였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아도 그토록 강하신 김정일동지가 아니시였다면 어떻게 그 준엄한 준전시상태속에서 제가 그분의 품으로 돌아 올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저는 생명이 위급했던탓으로 말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북쪽사람들의 얼굴에 넘쳐 흐르는 필승의 신념과 락관을 느끼였습니다. 북쪽사람들은 당의 품으로 돌아 오는 저를 환영하며 모두 울었습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끝 없는 인파와 꽃물결속에서 흘러 내린 그날의 눈물은 준엄한 정세속에서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죽은 자를 산 자로 환생시켜 주시는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이슬이였다고 봅니다. 그때 벌써 우리 평양의 사회주의는 서울의 자본주의를 이겼습니다. 제가 조국에 돌아 와 본것은 모든것이 이기는것뿐이였고 강해 진것뿐이였습니다. 작년 7월 전승 40돐을 경축하는 열병식과 군중시위를 보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조선인민군창건 60돐경축 열병식과 무력시위를 기록영화에서 보고서도 감탄했지만 저는 우리의 자위력이 강해 진것을 보고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마다 지난 전쟁때의 생각이 떠오르고 지리산빨찌산시절이 되살아 나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지난 전쟁때에 비하면 오늘의 우리 나라 무장력이 얼마나 강해 졌고 일심단결의 힘이 얼마나 세졌습니까. 이것이 다 수령을 잘 만난 덕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지도자동지를 모신 행운이 가슴에 부풀어 올라서 그날 저는 열병식장에서 돌아 오자마자 손자더러 우리 지도자동지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분이 너무도 좋아서 술을 한잔 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술을 좋아 했으나 40년 가까이 옥방에서 살다보니 술을 마시지 못했고 요즘은 의사선생님들이 만류해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동지의 덕에 국력이 세지고 천하에 두려울게 없다는 생각으로 너무 기분이 좋아 한잔 하였습니다. 술이란 이렇게 꼭 마셔야 할 때에 마셔야 제 맛도 난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수령을 잘 만나면 작은 나라도 사상의 강국, 정치대국이 되고 군사강국이 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 지도자동지이시야말로 사상으로 이기시고 지략으로 이기시며 담력으로 이기시는 위대한 영걸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장군이라고 하면 용맹으로 싸우는 무인을 뜻하지만 우리 조국에서는 사상으로 세상철리를 밝히고 지략과 담력으로 대적을 무찌르는 문무를 겸비한 령수를 장군이라고 부른다고 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칭송하신것처럼 우리의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문무를 겸비하신 령장이십니다. 세계의 정치가들치고 사람들을 묶어 세우려고 하지 않는 정치가가 없지마는 그런 욕망을 실현한 정치가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묶어 세우는것은 욕망이나 강요로는 될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위대한 사상의 힘, 정치의 힘, 사랑의 힘이 있을 때만이 이루어 진다고 봅니다. 저는 이 진리를 우리 지도자동지의 사상과 정치와 사랑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평양에서 보아도 그렇고 백두산으로 갈 때 량강도에서 보아 도 그렇고 인민군부대나 건설장에 가보아도 그렇고 온 나라 인민이 말을 해도 지도자동지의 뜻으로 똑 같은 말을 하고 걸음을 걸어도 지도자동지의 의지로 발걸음을 맞추는 일심단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의 공산당 총비서들을 여러사람 만났습니다. 어느 한 나라 공산당 총비서는 저의 손을 잡고 지금 조선의 사회주의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힘을 얻는다고 하면서 현 시대를 움직이는 지레대는 김정일동지의 손에 쥐여 져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우리 지도자동지께서는 세상을 자신의 손바닥우에 올려 놓고 움직이신다고 했더니 그도 나의 말에 동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겨야 장군이지 지면 장군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지도자동지께서는 언제나 이기시는 장군중의 장군이십니다. 김정일동지만 계시면 우리는 언제나 이깁니다. 그래서 저는 시인이 아니지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는 가사를 써서 올렸습니다. 제가 남쪽에 있을 때 친분이 있던 한사람이 얼마전에 3국에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여 왔는데 그는 리형이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는 가사를 썼다는 보도가 《부산일보》에 실렸다고 하면서 그 가사와 악보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리형이 쓴 가사와 같은 세상이 반드시 올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정일동지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는 신념은 북쪽사람들의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쪽사람들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사대풍토에 제 정신을 못 가지고 큰 나라에 허리 아프도록 절을 하며 매워 사는 정상배들을 보아 오다가 자기 철학을 가지고 대국에 당당하게 맞서 배심 있게 민족의 대를 세워 나가시는 김정일장군님의 정치상을 보고 남쪽의 뜻 있는 사람들은 저저마다 령도자를 잘 만나야 인간의 존엄도 빛나고 민족의 자주성도 선양되며 나라의 앞날도 밝다고 하면서 절세의 위인을 모신 민족의 행운을 두고 더없이 기뻐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단군이래 5천년의 우리 민족사에서 강성한 때도 있었지만 탁월한 수령과 장군을 잘 만난 덕으로 오늘처럼 우리 조국이 위대하고 우리 인민이 강대하며 우리 배달민족이 행성의 각광을 받는 때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2. 인간중의 인간을 모시였습니다
위인은 장군이기전에 위대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덕이 없는 장군은 검이 없는 무사와 같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역풍을 이겨 나가는 우리 조국의 승리는 어찌 보면 위대한 인간의 승리이며 위대한 인덕의 승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조국에 돌아 와 생활하는 나날에 위대한 인간이신 우리 지도자동지의 덕에 매혹되였습니다. 지도자동지의 덕과 인간상은 의리속에 돋보였습니다. 의리는 위인의 인격적향기이고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작년 7월 로병대회때에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만나뵈왔습니다. 한없이 인자하시고 부드러우신 그분들을 만나뵙는 순간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제가 서툰 시에서 쓰기도 하였지만 인생의 고엽으로 말라 버린 저를 푸르싱싱한 청엽으로 소생시켜 주시고 영예를 주신 은인들이 아니십니까. 온 세상이 떠받드는 위대한 수령님을 또다시 뵈옵고보니 4월 탄신절날에 친히 병원에 있는 저를 찾으시여 어버이의 믿음과 사랑을 주시고도 무엇인가 부족하신것만 같아 자신의 존함을 모신 금시계를 손목에 손수 끼워 주시고 40여년동안 그렇게도 품고 싶었던 조선로동당원증을, 그것도 몸소 수표하시여 직접 수여하여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그 은정, 그 의리가 가슴에 사무쳐 올라 저는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였습니다. 저는 로병대회가 열린 이날 우리의 지도자동지를 처음으로 만나뵈왔습니다. 그처럼 준수하신 모습으로 웃음을 지으시는 그분께서 저의 손을 따뜻이 잡아 주시며 정겹게 바라보실 때 저는 바로 이분이 저를 구원하여 주신 은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으로 목이 메였습니다. 남쪽의 쓸쓸한 양로원을 거쳐 남해가의 한 농가에 얹히여 살고 있던 이 로병을 모래불속에서 보석을 찾아 내듯이 알아 내시여 조국의 품에 데려 오시려고 몇년동안이나 마음을 쓰시고 수백번의 가르치심을 주신 은인이라고 우러르니 저는 그 깊으신 의리와 사랑앞에서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대표단이 남쪽대표단과 마주 앉아 회담을 할 때마다 저를 데려 오는 문제를 성사시키라고, 세계의 량심을 불러 일으키며 리인모송환투쟁을 벌리라고, 안해와 딸이 편지를 보내여 평양에 살아 있다는것을 알려 용기를 내게 하라고, 어느 해 정초에는 올해에 무슨 일이 있어도 리인모를 꼭 데려 와야 한다고, 리인모가 생명이 위급하다는데 그냥 남쪽에 있으면 죽을수도 있으니 빨리 조국에 데려다 살려야 한다고, 리인모를 데려 오지 못하면 자신께 보고도 하지 말라고, 리인모가 처자와 만나 한지붕밑에서 살면서 손자손녀를 앞세우고 모란봉에도 오르고 평양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보아야 마음을 놓겠다고 하신 인자하신분이 아니십니까. 제가 막상 돌아 올 때에는 리인모가 온다는데 우리 당의 간부들이 판문점에 나가 마중하며 온 개성시민들과 평양시민들이 모두 떨쳐 나서 환영하라고, 명의들로 치료대를 뭇고 명약도 아낌없이 다 쓰라고, 리인모가 살 집도 좋은 집으로 주고 료리사도 붙여 구미에 맞는 음식을 대접하라고, 리인모가 완쾌되면 로병대회주석단에도 수령님곁에 앉히고 전승기념열병식장에서도 주석단에 오르게 하자고, 백두산에도 가보고 고향에도 들려 보라고, 고향의 소학교를 리인모소학교로 명명하라고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 우리 지도자동지이시였습니다. 더우기 제가 놀란것은 지난해 7월 피아노를 선물로 받던 때였습니다. 광복후 저의 안해가 학생들에게 음악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하루는 풍금을 사달라고 하였을 때 저는 이제 돈을 마련하면 사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을 40여년동안이나 지키지 못하여 늘 마음이 괴로왔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동지께서는 저의 이 마음까지도 헤아리시고 친히 피아노를 선물로 보내주시여 제가 풀어 주지 못한 안해의 소원까지 풀어 주시였습니다. 저에게 이불을 일식으로 보내주신 지도자동지의 은정도 더없이 뜨겁습니다. 제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느 한 나라에 있는 해외동포들이 지도자동지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성껏 지어 드린 귀한 이불을 받으시고는 저를 먼저 생각하시여 남쪽감방에서 언제 한번 이불이나 제대로 덮어 보았겠는가고, 자신보다 리인모가 덮어야 한다고 따뜻이 이르시며 자신께서 쓰셔야 할 그 이불을 친히 저에게 보내주신 자애로운 우리의 지도자동지이시였습니다. 며칠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지도자동지께서는 제가 조국에 돌아 온지 1년이 되는것과 관련하여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시였다고 합니다. … 우리 당이 1년전에 왜 리인모를 데려 오자고 하였는가. 리인모로 말하면 34년동안이나 옥중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 전사이다. 아무리 정세가 긴장하고 준전시상태라고 하여도 리인모를 데려 와야 우리가 혁명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것으로 된다. 우리를 믿고 30∼40년을 싸워 온 동지인데 우리가 그를 구원하여 주지 않으면 누가 구원하여 주겠는가. 혁명가들에게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의리는 생명과도 같은것이다. 나는 그전에 외국의 한 책을 본 일이 있는데 나뽈레옹이 모스크바를 쳐들어 갈 때 많은 프랑스병사들이 죽거나 포로가 된 이야기가 씌여 져 있었다. 그런데 나뽈레옹이 망하고 다른 왕조가 집정한후 프랑스포로들을 데려 가라고 하였으나 나뽈레옹때의 포로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프랑스포로들의 운명이 이와 같이 비참하게 된것은 결국 령도자를 잘못 만났기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나는 리인모를 데려 올 때 그전에 보았던 이 책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면서 어떻게 하나 그를 꼭 데려 와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어렵기는 하였지만 투쟁을 벌려 리인모를 데려 왔다. 세계에는 옥중투쟁을 한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남조선에서와 같이 30∼40년을 옥중에서 지조를 지켜 투쟁하면서 인생의 전부를 보낸 그런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투쟁한 동지들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하며 그들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 당이 전사들에게 베풀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의리가 깊으신 뜨거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지도자동지를 위함이라면 이 로병이 한줌의 흙으로 변해도 장군님을 받드는 고임돌로 굳어 지고 싶은 일편단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이처럼 혁명적의리가 깊으시고 사랑과 인정이 두터우시였습니다. 저는 조국에 와서 《빛나는 삶의 품》이란 영화문헌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장면들을 보며 저는 김정일동지의 인간상에 매혹되여 저 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 지도자동지를 강하신분으로만 알았는데 그분께서는 정말 인정이 많으시고 눈물이 많으신 부드럽고 정다운분이시였습니다. 한 일군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지방에서 현지지도를 하시던 그분께서 전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시며 사품쳐 흐르는 강물우에 놓인 철교의 침목을 하나하나 아슬아슬하게 더듬어 건느시며 그날 밤중으로 평양에 도착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께서 키우신 전사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하여 갑자기 불어 난 깊은 산 계곡의 강물우에 아아하게 놓여 있는 철길을 몸소 걸어 넘으시는 그분의 초상은 그대로 사랑의 조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남달리 눈물이 많으시였습니다. 세속에 이르기를 참된 영웅에게는 눈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도 눈물이 많지만 김정일동지는 눈물이 더 많다고 말씀하시였다고 합니다. 한 전사가 병상에서 돌아 갔을 때였습니다. 지도자동지께서는 비보를 들으시고 황황히 오시여 싸늘한 전사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부비시며 내가 왔는데 빨리 일어 나라고, 이렇게 눈을 감자고 나에게 그렇게도 정을 남겨 두었는가고, 앓으면서 그렇게도 나의 애를 태우더니 가서도 나를 울게 하는가고 하시며 우시고 또 우시였습니다. 저는 이런 영화장면을 보면서 용장일수록 눈물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 《장군님!》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인정이 메마르고 덕이 없으면 울지 못하는 법입니다. 정이 많고 사랑이 많아 남달리 가슴 아파 할줄 아는 위인만이 그렇게 울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민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제일 귀중히 여기시는것은 우리 지도자동지의 애민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민에 대한 사랑은 우리 지도자동지의 천하지대본이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정신은 우리 지도자동지의 정치적신앙이라고 봅니다. 사상도 인민대중중심의 사상이고 제도도 인민대중중심의 제도이며 정치도 인민대중중심의 인덕정치, 광폭정치인것이 제가 안겨 사는 품입니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말은 우리 지도자동지께서 처음 쓰신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쪽에서 신세를 진 마음이 착한 김상원농민의 집에는 네 남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집에서 살고 있을 때 학비때문에 오고 가는 걱정어린 말을 늘 들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지금 우리 집에는 중학생인 손자애와 손녀애, 대학생인 손녀가 있는데 제가 1년세월이 되도록 그 애들이 집에 들어 와서 학비때문에 울고 불고 하는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놀라는 이 무료교육제도에도 우리 수령님과 우리 지도자동지의 《이민위천》의 사상, 인민대중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꽃 피여 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남쪽에 있을 때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었는데 그때 엄청난 치료비때문에 저도 걱정이 컸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재야인사들의 걱정이 더 컸었습니다. 인정은 있어도 금전이 딸려 걱정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바늘방석에 누워 있는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조국에 와서도 몇달동안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며 치료비때문에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안해에게 치료비때문에 집에 부담이 많겠다고 말했더니 안해가 하는 말이 무상치료제이기때문에 돈 한푼 내지 않으니 걱정 말고 치료나 잘 받으라는것이였습니다. 정말 우리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의 사랑과 고마움은 사람을 울게 하는 혜택이였습니다. 저는 이런것을 두고 수령을 잘 만난 수령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지도자동지의 겸허하신 성품에 대하여서도 느낀바를 한마디 쓰려고 합니다. 지난해 전승 40돐경축 열병식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주석단에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뵈옵게 되였습니다. 원래 저는 그날 원수복을 입으신 지도자동지의 모습을 뵈올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뵈온 지도자동지의 복장은 원수별이 새겨 진 장군복이 아니라 옛날 제가 풍산에서 살 때 입던 닫긴형의 수수한 옷차림이였습니다. 우리 지도자동지의 소박한 옷차림을 보는 순간 저는 또 한번 그 겸허하심에 경탄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소박과 겸손은 미덕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지도자동지이시야말로 《위대한 평민》이시였습니다. 그러니 인민들이 왜 우리 지도자동지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미덕의 힘은 강합니다. 위대한 사랑과 미덕을 지니시였으니 어찌 만사람들이 지도자동지품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는 인간중의 인간이십니다. 우리 인민이야말로 인간중의 인간을 령도자로 모신 수령복이 있는 인민입니다.
3. 제스스로 가다듬는 마음
우리가 수령복을 타고 난 인민이라면 위대한 수령을 잘 모셔야 한다고 저는 마음속으로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령을 모시는 내 마음속에 어지러운것이 있지 않는가고 스스로 눈을 밝히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원래 제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받들어 모시는 전사의 구실을 잘하자면 지난해 판문점을 넘어 오자마자 당중앙에 먼저 찾아 가 그간의 활동에 대한 보고부터 드려야 하였으나 그만 병원으로 갔습니다. 저는 당원으로서 처신을 바로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인생의 황혼기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수령을 충성으로 받들어 모시고 몸으로는 수령을 철석같이 옹위할 성벽이 될 각오를 가지고저 합니다. 우리 수령님과 우리 지도자동지를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겠다고 저는 늘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을 순간이나마 잊는다면 그분들의 권위에 그늘을 지으는 일도 무심히 스쳐 버릴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에 한 해외교포인사가 우리 집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54살이나 된다는 그가 조선말을 몰라서 통역을 가운데 앉혀 놓고 떠듬거리는것을 보니 불쾌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다못해 한마디 하였습니다. 나는 40년나마 남쪽에서 살면서 경상도사람도 만나고 서울사람도 만났지만 남쪽말씨는 배우지 않고 계속 이북말을 썼다,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이 제 나라 말을 할줄 모르니 안됐다, 나는 지금 외국인을 만난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사람이 잊을게 있고 잊지 말아야 할게 따로 있지 우리 수령님과 우리 지도자동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의 존함만은 꼭 조선말로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포인사는 저와 상봉의 기쁨을 나누려고 찾아 왔다가 부끄러움을 느끼며 앞으로 조선말을 인차 배워 가지고 다시 찾아 와 조선말로 인사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도 앞으로 그 사람처럼 수령을 모시는 자세가 깨끗하지 못할가 봐 걱정이 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을 또 채찍질하였습니다. 저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목숨 바쳐 지킬 결심도 굳히고저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살아 보아야 사회주의가 좋은줄을 알게 되고 사회주의에서 살아 보아야 자본주의가 나쁜줄을 알게 되는것 같습니다. 저는 남에서도 살아 보고 북에 와서도 살아 보니 죽어도 못 버릴것은 사회주의요, 살래도 못 살 곳은 자본주의임을 통감하였습니다. 남조선은 소수의 가진 자들은 호화판에 사는 부익부의 세상이지만 못 가진 다수의 근로자들은 눈물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 가는 빈익빈의 세상입니다. 다수의 가난우에서 소수가 호화를 누리는 세상이 참세상일수 없고 그러한 삶이 참삶일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돈이나 물건은 오늘 있다가도 래일은 없을수도 있고 래일 있다가도 다음날에는 또 없을수도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도 빈자도 없이 다같이 고르롭게 잘 살게 하는 사회주의만은 언제나 우리 인민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령을 모시고 사회주의를 지키는 마음은 항상 깨끗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라에서 받을줄만 알고 나라에 바칠줄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밝지 못하고 어지러운 법이라고 봅니다. 더우기 모든것을 공짜로 가지고 싶어 하는 리기심을 순간이나마 가지면 안되겠다고 저는 늘 자기에게 말합니다. 만일 자기만을 생각하는 리기심이 있으면 수령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집식구들이 덕을 입기만 하는데 버릇되면 리기심이 생기고 정신이 병들가봐 걱정합니다. 받는데 습관될것이 아니라 바치는데 습관되여야 수령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다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저는 당조직관념이 부족한 점도 뉘우치고 있습니다. 당에 당비를 바치는것도 당과 수령에게 자기의 순결한 충성의 마음을 바치는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금 당비를 바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어버이수령님께서 저를 찾으시여 친히 당증을 수여하시자 저는 그 다음날로 남쪽에 가서 43년동안 물지 못했던 당비를 한꺼번에 바치였습니다. 늦기는 하였지만 밀린 당비를 바치는것이 당원의 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당비를 물면서 당조직앞에 그동안 마음이 어지러웠던적은 없었던가고 스스로 자신을 총화하며 옥살이가 하도 고통스러워 순간이나마 자결할 생각도 하였고 전향문생각도 해보았던 점을 부끄럽게 돌이켜 보았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저 보고 그저 건강해서 텔레비죤화면에 얼굴만 보여도 힘이 되고 기쁘겠다고 말하는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앞에 큰 위훈도 세우지 못한 제가 나라의 큰 국록을 받고 있는데 일을 안하면 되겠습니까. 복속에서 복을 모르는 때도 있다고 합니다. 남쪽에서 우리 수령님이 너무도 그리웠고 우리 당의 품이 너무도 그리워 언제이면 이 소원이 이루어 질가 애 태워 온 저로서는 모든것이 성취된 오늘 누리는 만복을 잊지 않으려고 애 씁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매 시각 스스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살아 가렵니다. -아침에 깨여 나도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생각부터 하자. -일을 하여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수령님과 지도자동지를 모시고 일하자. -밤에 잠들 때에도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의 안녕을 먼저 기원하자. -꿈을 꾸어도 수령님과 지도자동지에 대한 꿈을 꾸자. -수령복을 누리면 수령께 충성을 바칠줄 알자.
슬픔의 7월
나는 나의 이 수기를 이렇게 끝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에게 삶을 돌려 주었고 40년은 더 살수 있다고 고무해 주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시다니! 믿을수 없었다. 5월과 6월 신문과 텔레비죤에서 나는 거의 매일같이 건강하신 수령님의 모습을 뵈왔었다. 외국의 크고 작은 여러 대표단을 매일같이 만나시고 외국에서 온 많은 항일투쟁연고자들을 만나시고 또 협동농장들을 현지지도하시고… 6월 말에는 북남최고위급회담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남조선당국자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오러 평양으로 들어 온다는것이였다. 그때의 격동되였던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드디여 통일이 왔구나 하는 가슴 벅찬 느낌이였다. 그러나 사실 말하면 그 충격은 김영삼이 평양으로 들어 온다는데서 비롯된것이 아니였다. 김영삼의 평양행은 이미 이 땅을 밟을 자격조차 잃은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어 준 위대한 수령님의 관대한 처분의 결과일뿐이였다. 김영삼이 온다고 하여 감동되거나 기대를 가질 사람이 이 북쪽땅에는 없었다. 《개꼬리 3년에 황모될가. 기생오래비 같은것! 흰 기발을 들고 오는거라구. 그것밖에야 들고 올 기발이 있나? 원래 제 기발이란게 없는 놈인데!》 하고들 말했다. 누구의 생각이나 평양에서의 최고위급회담에 이어 서울에서 열릴 최고위급회담에로 가 있었다. 나도 같았다. 이제 우리 수령님께서 서울에 나가신다면! 남녘의 산야에 어버이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육성이 울려 퍼진다면 이름 없는 봉분에 묻혔던 우리 동지들도 모두 뛰쳐 일어 나 만세를 부를것이다. 최후의 순간에 북녘하늘을 우러러 부르던 《김일성장군 만세!》, 우리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남녘땅의 산과 들에 《김일성장군 만세!》의 함성으로 메아리칠 때 그것은 곧 삼천리 이 땅이 하나로 된 통일일것이다! 일찌기 1920년대부터 긴긴 세월을 우리 민족의 태양으로, 전설적 영웅으로, 우리 겨레의 구세주로 우리 인민과 함께 살아 오신 위대한 수령님! 나는 남쪽땅에 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을 맞을 기쁨으로 들끓었다는 1945년 8월의 서울역두에 대해 여러번 들었었다. 전라도출신의 한 동지는 자기 부친이 그때 조국에 개선하시는 장군님을 뵈옵겠다고 보리밥을 꿍져 들고 서울에 올라 가 역앞에서 보름나마 지새웠던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장군님께서 꼭 서울로 나오실 때가 있을것이니 너희들이 나를 대신하여 장군님을 뵈옵고 인사를 올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면서 그 동지는 자기 집에서는 해마다 가을걷이를 끝내면 어떤 흉년에도 제일 좋은 찹쌀을 알알이 골라 고이 보관하는것이 가풍으로 되여 있다는것이였다. 그 심정은 남녘민중의 공통된 심정이라고 나는 확언할수 있다. 나는 그 땅에서 43년을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는 돌벽이나 무덤 같은 안전을 느끼는지 마음 놓고 이야기들을 했다. 그것은 곧 우리 수령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온 민족이 통일의 환희에 휩싸일 7월과 8월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아, 우리 수령님께서 긴긴 80평생을 바쳐 오신 위업이 오늘에 와서 열매를 맺게 되였구나. 조국의 통일에 대해 한시도 잊으신적 없는 어버이수령님, 인민들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외국기자의 물음에 《통일된 조국》이라고 대답을 주신 우리 수령님, 수령님의 그 념원, 우리 민족의 념원이 실현되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7월 9일 12시, 믿을수 없었다. 나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오보라고 소리높이 온 세상이 다 듣게 웨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낼수 없었다. 아니,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과 땅, 이 세상의 모든것이 깡그리 허물어 져 버린것 같았다. 금수산의사당 조의식장에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뵈왔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 지기만 했다. 《어버이수령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늘이 무너졌단 말입니까. 제가 한평생 지켜 온 마음의 기둥이 허물어 졌단 말입니까. 다 죽었던 저를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신 수령님께서 생신날에도 쉬지 않으시고 저를 찾아 주시고 앞으로 40년은 더 살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이렇게 먼저 가시면 저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조의록에 남긴 이 글줄이 과연 나의 마음을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담을수 있겠는가. 나는 담당의사와 간호원을 만났을 때는 말대신 그들의 옷깃을 잡아 흔들기만 했다. 어찌하여 다 죽었던 나 같은것을 이렇게 되살리고 건강하게 만든 당신들이 그토록 건강하시던 우리 수령님의 생명을, 우리 민족의 심장을 지키지 못했소? 왜 위대한 수령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지는 못하오?! …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때로부터 여러가지 기적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전국각지의 위대한 수령님동상우에 백로가 날아 들고 큰비가 내렸고 잠자리의 떼군단이 하늘을 덮었고 백두산에서는 천지물이 끓어 번지고… 허나 이것은 모두 기적이 아니라고 나는 부르짖고만 싶다. 설사 바다가 말라 산으로 되고 산이 바다가 되였다고 해도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오늘 이 세상에는 단 한가지만이 기적으로 될수 있으니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심장이 다시 고동치는것이다! 슬픔의 7월, 비애의 7월, 우리 민족에게서 7월은 영원한 비애와 슬픔의 달로 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은 7천만 우리 민족의 태양이실뿐만아니라 세계 피압박인민들의 구성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를 두고 세계는 말했다. 《세계혁명은 자기의 위대한 보루를 잃었다.》, 《세계는 현 시대의 가장 걸출한 위인을 잃었다.》, 《파란 많은 력사의 로정에서 거성이 떨어 졌다.》 내가 변변치 못한 필력으로나마 《우리는 수령복이 있습니다》라는 글을 쓴 때로부터 불과 열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력사에 다시 없을 두분의 위인을 수령으로 모신 우리 인민의 행복에 대하여 썼었다. 그런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신것이다. 금수산의사당조의식장에 서계시던 위대한 김정일동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온다. 너무도 수척해 지고 너무도 심려하신 모습이시였다. 자나깨나 그분을 만나 《경애하는 김정일동지, 저희들을, 우리 인민들을 생각하시여 건강을 돌봐 주십시오. 우리에겐 이젠 위대한 김정일동지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였다. 혁명과 건설의 세계를 충만시키고도 남을 혁명업적과 투쟁경험을 쌓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주체혁명위업의 대를 이어 나갈 수령으로 내세워 주신것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에 대한 비보를 받았을 때 캄캄해 지던 세상과 천길나락으로 떨어 지는듯 하던 이 마음, 이 몸을 붙들어 주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소식을 들었을 때 그 순간 생각한것이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우리에게는 경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계신다.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그이께서 서계신다. 이 믿음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슬픔과 비애는 절망의 슬픔이였을것이며 동서남북을 잃은 혼란의 비애였을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은 곧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며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는 곧 위대한 수령님이시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는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영생을 지켜 드리는 길이다. 우리 인민, 우리 민족이 흥할수 있는 길은 위대한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고 일편단심 그이만을 따르는데 있다. 슬픔과 비애의 눈물이 만수대언덕을 적시던 그 어느 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비발을 몸으로 막으며 화환을 들고 수령님동상으로 올라 가는 사람들을 보시고 일군들에게 우리는 참으로 인민복이 있다고 하시며 이런 인민들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세계 그 어느 위인이, 그 어느 수령이 인민복이라는 말을 한적이 있었던가. 그 말은 오직 한분밖에 없으신 우리 수령,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만이 하실수 있는 말이였다. 수령을 믿고 따르는 인민, 인민을 무한히 믿고 사랑하시는 수령, 이것이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높이 모신 이 땅의 오늘이다. 하기에 나는 내 땅, 내 조국의 필승불패를 믿는다. 백전백승을 믿는다. 자나깨나 오직 위대한 김정일동지만을 생각하자. 그이께서 인민들을 사랑하시고 생각하시는 만분의 일만이라도! 위인을 알고 위인을 따를줄 아는 인민은 위대한 인민이다. 더듬어보면 그런 민족, 그런 인민은 력사의 갈피마다에 자기의 자취를 남겼다. 위대한 수령님의 시대에 우리 인민은 가장 포악한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고 사회주의강국을 세웠으며 세계만방이 부러워 하는 주체의 조국으로 되였다. 이전 쏘련인민들은 레닌과 쓰딸린시대에 력사상 첫 사회주의국가를 세웠고 파시즘을 격멸했으며 중국인민들은 모택동의 령도하에 번영하는 새 중국을 세웠다. 인민대중의 혁명투쟁력사는 혁명의 수령의 투쟁력사이기도 했다. 참으로 우리 수령님처럼 한평생을 오직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며 파란만장의 70여성상을 헤쳐 오신 수령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사에 있었던가. 우리의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처럼 혁명위인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지니고 인덕정치, 광폭정치로 수령, 당, 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을 이룩한 수령이 세계 어디에 있었던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거룩한 영상을 뵈옵고 그이의 존함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슴속에서는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는 신념의 노래가 높이 울린다. 그렇다! 위대한 김정일동지만 계시면 우리는 언제나 이긴다. 그이의 이름은 곧 승리의 상징이며 백전백승의 기치이다. 위대한 김정일동지를 따라 갈 때 우리 인민의 앞에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뿐이다. 이것은 력사를 통해 검증된 진리이다. 내 한평생을 바쳐 절감한 절대적진리이다. 나는 이 땅에 사는 우리 인민의 심장속에는 이 진리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것으로 심어 져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진리란 위력한것이지만 저절로 지켜 지는것이 아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언제 어떤 정황에서나 목숨 바쳐 수령을 보위할줄 알라고! 위인을 모르고 위인을 지킬줄 모르는 인민은 불행과 치욕에로 가는 인민이다. 이는 인생말년에 이른 늙은이의 로파심이 아니다. 나는 거의 한평생을 적후에서 살았다. 여러분들은 적의 교활성과 악랄성을 너무도 모른다. 이 땅에 조국통일의 민족성업이 앞에 있고 이 세상에 제국주의가 남아 있는한 나의 마지막말은 언제나 변함 없을것이다. 수령을 보위할줄 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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