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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지막 여섯달
다섯번째 가을
1992년 가을은 교도소에서 나와 다섯번째로 맞는 가을이였다. 기다림속에서 맞은 가을이였다. 허나 이해 가을 역시 기다림에서는 결실이 없는 가을이였다. 가을에 접어 들면서 나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였다. 뇌수술의 후과인지 자주 의식이 흐려 졌고 때로는 반수반성의 상태에서 몇시간씩 주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게다가 때때로 느끼던 언어장애가 이때는 항시적인것으로 되여 한마디한마디를 모지름 써야 할수 있었고 운신도 벽이나 문설주를 짚고서야 겨우 한두걸음씩 옮기는 지경에 떨어 졌다. 김선생내외간은 이만저만 걱정하지 않으며 정성을 다해 주었지만 내리막길에 들어 선 건강은 멈춰 세울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선생의 집주변에서는 기관원들이 떠나지 않았고 김해땅에서 당장 물러 가라는 《시위대》의 웨침소리도 계속되였다. 김선생이 참다못해 《여보세요, 움직이기도 어렵게 건강이 나빠 진 로인에게 이거야 너무하지 않아요?》 하고 문밖에서 떠나지 않는 기관원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저희도 알아요. 그러나 당국의 지시인걸요.》 하고 대답을 피하군 했다. 아마 나를 내쫓으라고 고함을 치는 《시위대원》들 역시 《너무하지 않은가.》 하면 같은 말로 대답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남땅에서 대답하기 딱하거나 립장이 궁해 지면 《당국의 지시니 어쩔수 없다.》고 하는 말을 한두번만 듣지 않았다. 모름지기 교도소의 교도관들속에서도 조용한 자리에서 리치를 따지면 그렇게 대답할 사람이 적지 않았을것이다. 이남민중들은 자신을 당국자와 동일시하지 않는것이 하나의 특징과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당국자들에게 찬동하지 않으면서도 편안을 위해 지시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기관원이나 《시위대》일것이고 지시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민주화운동자들일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누구나 당국과 자기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놓고 있는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독재자는 그 경계선을 없애 보려고 집권 18년간 《국민총화》를 부르짖었지만 종당에는 배척을 받아 저세상으로 갔고 전두환 역시 《국민화합》을 부르짖으며 경계선을 넘어 보려 했지만 백담사로 쫓겨 가야 했고 로태우는 한걸음 물러 나 《민주화선언》을 내지 않을수 없었다. 남쪽의 력대 위정자들은 그 어떤 《국민총화》나 《국민화합》이나 《민주화선언》으로써도 민중과 더 멀어 지기만 했을뿐이다. 이 간격은 그들이 사대와 매국, 분렬주의적인 체질을 바꾸지 않는한은 없어 지지 않을것이다. 결국 남쪽땅에서의 《국민단합》이란 공중루각이라고 해야겠다. 이곳 북쪽땅에 와서 제일 가슴을 파고 들던 말은 《우리 수령님》, 《우리 지도자동지》,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라는 말이였다. 물론 광복후 5년간에도 나와 나의 동지들은 《우리 장군님》,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라고 말했고 자신을 당과 정부의 한 부분으로 알았다. 허나 나는 43년간을 그 생활과 떨어 져 있었다. 추억속에서도 희미해 져 가고 있었다. 북쪽땅에 들어 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요즘 내가 어데 가나 입버릇처럼 저도 모르게 나오는 《좋구나! 참 좋은 세상이구나!》 하는 말로 대신해야 할것 같다. 《우리 수령님》, 《우리 지도자동지》,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 이 짧은 말속에 우리의 힘이 있지 않을가… 남쪽땅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리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북쪽땅에는 당국과 일반민중이 따로 없다는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의 통일》이라는 말에 유혹되기도 한다. 그들이 만일 인민들은 《우리 수령님》, 《우리 지도자동지》라고 부르며 수령님과 지도자동지께서는 《우리 인민》이라고 부르시는 우리 사회의 혈연적인 일심단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수 있다면! 허나 이남민중들은 강권에 의한 당국추종을 알고 있을뿐이다. 그것이 바로 김해군 진영읍 신룡리에 《연금》되여 있는 나의 앞에서 펼쳐 지고 있었다. 동지들이나 기자들은 나를 만나러 와도 들어 올수 없었고 내가 그들을 만나러 가는것은 념도 낼수 없었다. 당국자들은 김선생의 아담한 집을 《리인모의 감옥》으로 만들어 놓은것이였다. 나는 《두문령》을 받은셈이였다. 북쪽땅으로 돌아 갈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질수 없었다. 나는 《신라호텔》앞에서의 봉변과 뒤이은 남해안 어느 섬으로의 추방에서 나를 돌려 보내지 않으려는 남쪽당국의 의지를 절감했다. 게다가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방도를 찾지 못해 하는 김선생의 얼굴에도 그늘이 짙어 갔다. 그러던 9월 말의 어느 날이였다. 김선생이 때없이 낯이 환해서 방에 들어 왔다. 《선생님, 기쁜 소식입니다. 고향으로 돌아 가게 됐습니다!》 하고 그는 9월 중순에 있은 평양 제8차 고위급회담때 북측단장이 리인모송환을 올해안으로 해결하자고 요구했고 남측단장은 판문점에 리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하고 1차상봉때 리인모를 송환하자는 안을 제기했는데 북측에서는 동의를 표시했고 9월 25일 판문점대표접촉에서는 리산가족면회소설치문제와 리인모송환문제를 합의 보았다고 흥분하여 말했다. 《이번에는 틀림 없을것 같습니다!》 김선생의 온 가족이 기뻐 했고 기진이는 《그럼 난 할아버지와 헤여 져야 하나요?》 하고 섭섭해 해서 모두 웃었다. 《어쩌나? 선생님이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을 만나뵈셔야 할텐데.》하는 김선생부인의 말에 나는 《내 병은 가족을 만나면 당장 나을겁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대답해 놓은 다음에야 마치 그들의 정성이 가족들만큼 각근하지 못해서 앓는다는 말로 된듯 하여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김선생내외는 나의 말을 리해해 주었고 진심으로 기뻐 해 주었다. 그날 밤 내가 무슨 생각인들 하지 않았으랴.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귀결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한주일이 지난 10월 초 남측은 《리인모송환조건》으로 또다시 《랍북자송환》이라는 조건부를 내놓아 대표접촉을 파탄시켜 버렸다. 그날 김선생과 그의 가족들의 기색은 말이 아니였고 어떻게 나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했다. 서울에서의 7차회담때도 로부모방문단교환문제를 날자까지 합의 보고 돌아 서기 바쁘게 《핵문제》가 해결됨이 없이는 남북사이의 그 어떤 합의사항도 그 리행을 보류한다고 하며 방문단이 오고 갈 군사분계선지역에서 미국과 함께 《포커스렌즈》합동군사연습을 벌려 놓은 남측이 아니였던가. 력사적으로 놓고 보아도 7.4공동성명을 냈을 때에도 조인하기 바쁘게 《이 한장의 종이장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수 없다.》고 뒤집었고 북남합의서에 수표하고는 잉크가 마르기도전에 리행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하나의 신사협정에 불과하다.》고 했다. 개새끼는 낳는족족 짖는다고 력대 당국자들이 신통히도 같았다. 어느 당국자에게서나 남쪽사람들이 평가한대로 모든것이 그때그때 집권연장을 위한 하나의 《정치적쇼》였을뿐이였다. 예로부터 치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고 했는데 자신들의 집권욕을 겨레와 민족의 운명우에 올려 놓고 있는것이 남쪽의 당국자들이였다. 나는 《리인모송환문제》를 단순히 내가 고향으로 돌아 가는가 못 가는가 하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리인모송환》은 북과 남의 화해와 화합을 이룩하는데서 하나의 상징적인 디딤돌로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측은 대표접촉을 파탄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리인모송환문제의 파탄이 아니라 북과 남사이의 화해와 화합에 밀려 드는 검은 구름장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생각을 김선생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언어기능의 장애는 차치하고라도 김선생과 그의 가족들을 《국가보안법》의 쇠고랑속에 몰아 넣을수 있는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 그때로부터 며칠후인 10월 5일에는 《남한조선로동당사건》이라는 《안기부》의 충격적인 수사결과발표가 있었다. 나는 텔레비죤으로 그 발표를 들었다. 그 《사건》은 9월 초에 있었던 《김락종간첩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 들추어 냈다는것인데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중부, 경인, 령남, 호남 등 4개 지역당으로 구성된 조선로동당의 남조선현지당으로 1995년까지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미군과 핵무기철수, 《국가보안법》철페,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중지, 공안통치종식, 민주정부수립, 련방제통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했다는것이다. 그 모든것은 남쪽땅의 민주세력, 특히 청년학생들의 투쟁목표 그대로였다. 결국은 이남땅의 모든 민주세력은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한것으로 된다. 더욱 가관인것은 수사결과를 발표하여 《안기부》가 《과거 안기부가 국내정치상황이 불안해 질 때를 맞추어 간첩단사건들을 발표하여 국민의 불만을 사온것이 사실》이지만 《이번만은》(!) 어떠한 의혹도 없이 수사결과를 믿어 달라고 구구히 변명을 덧붙인것이다. 마치 마당 한구석에 돈을 감추어 둔 수전노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내가 마당에 돈을 감춰 두었다고 생각할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는 옛말 같다. 이것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리는 반《정부》민주세력에 대한 일대 척결임은 불 보듯 명백했다. 《대통령선거》때는 민주당후보를 지지하라는 지령을 북에서 주었다고까지 했으니 너무 빤드름해 듣는 사람이 얼굴 붉어 질 지경이였다. 오죽하면 남쪽사람들이 《간첩사건이라는거야 당국에서 있었으면 하면 생기는거지요.》 하고 말하랴. 나부터가 나도 알지 못하는 《지하당조직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를 쓰고 독재자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론증하는데 제물로 되였던 사람이다. 입이 쓰거워서 텔레비죤을 끄고 말았었다. 그것 역시 북남사이의 화합에 던져 지는 또 하나의 검은 구름장이라는것이 명백했다. 아닐세라 정세는 나날이 험악해 져 갔다. 11월 초에 들어 서자 남측은 미군과 함께 《화랑》, 《92-독수리》라는 대규모적인 합동군사연습을 벌려 놓았으며 정세를 대결의 극점으로 몰아 갔다. 그와 함께 모든 북남대화는 중단되여 버렸다. 남측의 적십자사는 나를 두고 전쟁때 자률적으로 남에 떨어 진 사람이고 그후에 반《정부》음모에 가담했으므로 전쟁포로가 아니며 인도주의문제가 아니라 당국급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발표했다. 나는 이미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북남대화는 중단상태에 빠졌는데 정세발전으로 보아서는 언제 재개될지 예측할수 없었다. 나는 내가 남쪽당국의 그 어떤 정치적흥정거리로 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희망을 안겨 주었던 다섯번째 가을은 이렇게 절망속에서 지나갔다. 그것은 나의 문제이자 곧 민족의 화합에 대한 희망이였으며 절망이 였다. 그때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 날수 없었다. 거의 하루종일 누워 있었고 자주 혼미한 상태에 빠져 들었으며 때로는 환각상태가 나를 휩쌌다. 때로는 형무소에서 고문 받는 환각에 몸부림쳤고 때로는 외진 섬에서 숨지는 자신을 보기도 했다. 이미 떠나간 동지들의 환각도 떠올랐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죽음뿐임을 깨달았다. 43년동안 그려 보았던 땅도 친지들도 끝없이 멀어 지고 있었다.
전화종소리
그러던 어느 날엔가 받았던 전화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전화는 김선생부인이 받았었다. 원래는 내옆에 전화가 있었으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김선생이 문밖으로 내갔었다. 전화종소리가 나를 자극한다는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종종 협박전화가 걸려 오기때문이였다. 협박전화란 《시위대》들이 웨치는것처럼 나더러 당장 김해에서 사라지라는 내용이였다. 여러차례 그런 전화를 받았으나 나는 김선생이나 부인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은 김선생이 직접 협박전화를 받는통에 알려 지고 말았다. 김선생은 당장 전화를 문밖으로 내여 가 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가 와도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고야 바꾸어 주도록 집안식구들에게 신칙했다. 이날도 김선생부인은 전화를 받으며 따져 묻고 있었다. 《누구세요? 잘 아신다구요? 선생님은 지금 건강이 매우 나쁘세요. 알고 계신다구요?》 나에게 온 전화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김선생부인은 문을 열고 나에게 전화를 받겠는가고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받겠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김선생부인은 《잠간 기다리세요.》 하고는 전화를 들고 들어 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누군지 모르겠네요. 선생님을 잘 안다는데.》 나는 누운채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상대방의 귀 설은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리인모씨지요?》 어느 동지가 걸어 오는 전화로 생각했었는데 첫마디에서 벌써 쌀쌀하면서도 랭소하는듯 한 꾸며 낸 친절이 느껴 졌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언어장애가 오면서 귀는 너무 예민해 졌다 싶은 상태였던것이다. 내가 리인모라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건강이 어떤가고 물었다. 나는 김선생부인이 이미 전화로 하는 말을 들었으므로 공연한 말을 묻는데 언짢아 져서 할말이나 하라고 했다. 그러자 전화에서는 뜻밖의 말이 울려 나왔다. 《리인모씨, 이제라도 고쳐 생각하는것이 좋지 않겠어요? 안해와 딸을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리인모씬 신념을 지킨다지만 동유럽권의 공산정권들이 다 무너진걸 아시겠죠? 남은건 북<한>의 공산정권 하나예요. 쏘련도 없어 지고 크레믈리도 이제는 자유세계의 탑으로 됐어요. 북<한>공산정권이 며칠이나 갈것 같아요? 지금 미국과 자유세계가 북<한>공산정권에 마지막압력을 가하고 있는걸 모르시지는 않겠는데요. 시간문제예요. 아마 리인모씨의 남은 생명보다 길지 못할거예요. 그렇게 되면 신념이라는게 무슨 필요가 있죠? 안 그래요?》 간지럼 피우는듯 한 서울말씨였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혀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때 내 얼굴이 무척 험악했던지 방으로 들어 온 김선생부인이 깜짝 놀라며 내 손에서 전화를 빼앗았다.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끝난 뒤였다. 김선생부인은 무슨 전화인가고 묻지 않았다. 《제가 불민했어요. 더 자세히 알아 보고 바꾸어 드렸어야 하는건데.》 하고 미안해 할뿐이였다. 전에 겪은적 있는 협박전화로나 짐작한 모양이였다. 나 또한 굳이 그 내용을 밝히고 싶지 않아 김선생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기는 새삼스러울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현실은 그 전화보다 더 소란스러웠고 엄혹했다. 동유럽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좌절과 특히 쏘련의 붕괴를 두고 남쪽땅에서는 얼마나 떠들었던가. 신문, 잡지들, 텔레비죤은 온통 그 소식을 특집하여 쏘련의 붕괴에 대해서는 《지구상에서 공산주의의 종말》이라고 했고 《자유세계》의 영원성을 구가했다. 그 소식을 들을 때의 나의 심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일제때 쏘일불가침조약의 소식을 듣고 느꼈던 놀라움과 허탈감도 이때보다는 크지 않았다. 더우기 70여년을 크레믈리에 걸려 있던 쏘련기발이 3만마르크에 경매되여 도이췰란드의 반사회주의전람관에 걸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정… 나와 나의 동지들이 피를 흘리고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친것이 바로 삼천리 이 땅에 통일된 사회주의조국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남의 당국자들은 《승공통일》은 떨어 질 때가 된 무르익은 과실처럼, 도이췰란드식《흡수통일》은 시간문제처럼 떠들었다. 북쪽땅에 가해 지는 봉쇄와 압력에 대해서는 환성을 올리듯이 말하고 또 말했다. 남쪽땅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봉쇄와 압력에 북쪽이 어떻게 질식되지 않고 꿋꿋이 나가고 있는지 의문을 감추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떤 나라도 그런 압력과 봉쇄하에서는 단 며칠도 건재해 있을수 없었을것이였다. 다섯번째 가을, 이때가 나에게는 한평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주위의 모든것이 신념의 기둥을 허물어뜨리려고 끊임없이 타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전화도 바로 그런 타격들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절대로 흔들림 없으리라는것을 믿었다. 그것은 후방도 지원도 없이 100만 관동군과의 20성상 결전에서 승리를 이룩한 장군님에 대한 믿음이였다. 6.25전쟁에서는 세계제국주의련합군을 물리쳤고 《푸에블로》호사건때에는 거만한 미국의 사죄를 받아 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패의 힘에 대한 믿음이였다. 장군님께서 계시는한, 남녘민중들에게 가장 투철한 반제반미립장의 상징으로 새겨 져 있는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계시는한 우리의 공화국은 사회주의를 지켜 내리라는 믿음이였다. 나는 그날 밤 일제때의 20여년간과 광복후 5년간의 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그런 피눈물나는 자리우에 세워 졌던 행복의 5년, 희열의 5년, 그것만으로도 나는 우리 공화국, 나의 신념의 조국의 영원성을 믿었다. 그 밤 내가 광복후 5년간을 돌이켜 보며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적후에서 보낸 기간 홀로 지내본 사람이 아니고는 한 시대의 행복을 추억케 해주는 노래의 힘에 대하여 알수 없다. 내가 마음속으로 부른 노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광복후 5년간 가장 많이 불렀고 인민군전사들과 남진의 길을 걸으면서도, 지리산의 눈 내리는 밤에도 불렀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불렀다. 얼마전 내가 평양의 개선문을 돌아 보며 그 노래를 불렀을 때 박수를 쳐주던 간호원이나 의사도, 주위의 사람들도 그때 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모를것이다. 그 노래속에 담겨 있는 나와 나의 동지들의 한생에 대하여 생각했고 《다섯번째 가을》의 고통스럽던 밤을 생각했다. … 그 밤 부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근심에 싸여 들어 와 위로해 주던 김선생의 말이 기억난다. 《선생님, 너무 생각지 마십시오. <한겨레신문>에서도 선생님에게 압력을 가하는것을 지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가 펼쳐 보이는 《한겨레신문》에는 《리인모》에 대한 압력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락인하며 그만 두어야 한다고 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문의 이름처럼 민족과 겨레의 화해화합에 대하여 모색하는것이 언제나 마음 훈훈케 해주는 《한겨레신문》이였다. 《그런 전화는 그저 잡소리로 들어 넘기세요, 기분 나쁠줄 알지만 곧 잊어 버려야 해요.》 김선생은 협박전화가 있었던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생각을 고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전화가 특별히 기분 나쁠것도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더 엄혹했다고 할수 있기때문이다. 로태우는 《북방정책의 추진》으로 《통일에로 가는 외적장애가 제거》되였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통일의 외적장애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력사적사실을 외면한 《무지》는 차치하고 그 말이 《승공통일》에 대한 호언장담이라는것이 명백했다. 얼마나 많은 데스크들과 문사들이 로태우와 당국의 말을 곱씹으며 환성을 올렸던가. 공산주의는 이미 종말을 고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있을뿐이다 하고 그들은 떠들었다. 이 소용돌이속에서 투쟁을 포기하고 《정부》와의 타협에 들어 간 반《정부》재야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이때에 와서는 종종 나를 교도소에서 내놓은것이 페인으로 된데도 있지만 당국자들이 자기들의 민주화체질을 가장하는것과 함께 남조선의 사회적분위기와 세계정세의 흐름이 전향을 달성케 하리라고 예견한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하게 되였다. 88서울올림픽을 거쳐 《공산권》의 마쟈르, 로씨야와의 국교관계, 뒤이은 동유럽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체계의 몰락, 쏘련의 붕괴, 《유일초대국》으로 된 미국… 이런 사실로 하여 남쪽땅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현훈증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유일초대국》으로 남게 되자 자기들도 유일초대국이 된듯이 떠들었다. 호가호위라고 해야겠다. 이제는 감옥에 있는 몇몇 《빨갱이》쯤은 내놓아도 아무 영향도 없으리라고 여겼던지도 모른다. 도리여 우리가 《비전향》을 포기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나 아닌지…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좌절감을 느끼고 의기소침해 지기도 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앞에 기관원들이 늘어 서고 《자유련맹》의 《시위대》가 나타났을 때는 다시 힘을 느꼈다. 남조선식《자유민주주의》가 나로 하여 일정한 자극을 받았음은 의심할바 없었다. 《빨갱이》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이것이면 나에게는 충분했다. 사회주의자로 태여나 76살의 페인으로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게 있단 말인가. 적들이 나를 미워 한다면 그것은 내가 옳은 길을 걷고 있으며 살아 있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겠는가! … 이날의 전화도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다시한번 안겨 주었다. 그런 전화를 생각해 내고 쾌재를 불렀을 《자유련맹》의 분들에게 나는 때 늦게나마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싶다. 그후로는 협박전화나 그런 전화를 더 받은 기억이 없다. 그런 전화가 더 오지 않았는지 김선생네 가족들이 그런 전화는 차단해 버린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마지막겨울
이해 겨울이 나에게는 남쪽땅에서 맞는 마흔세번째 겨울이였으며 마지막겨울이였다. 나자신도 그 겨울이 마지막겨울로 되리라는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남쪽땅에서의 마지막겨울이 아니라 나의 생에서의 마지막겨울이라는 느낌에서였다. 건강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여 때로는 혼미상태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손이 떨리고 부자연스러워서 글을 쓴다는것은 념을 낼수도 없었고 금방 생각했던것도 까맣게 잊어 버려 멍해 있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잠들었댔는지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는지 눈을 감고 있다가 떠보니 김선생과 선생의 부인이 나를 지켜 보고 있었는데 부인은 황급히 머리를 돌리며 일어 났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의 부인은 아무래도 내가 가족들을 만날 때까지 살기 어려우리라는 가슴아픔으로 눈물 짓고 있었던것이다. 남해안의 겨울은 무척 온화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해 겨울이 일생에서 가장 추위가 심했던 겨울처럼 느껴 진다. 나는 정신이 밝을 때면 이것저것 책을 읽었다. 김선생은 매일 내 손 가까이에 신문잡지들과 책들을 놓아 주었다. 서준식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도 면회 왔다 갈 때면 책을 한두권씩 두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출판물에서 기가 막히는 소식을 읽었다. 1월 12일 서울의 《민사지방법원》에서 리완용의 증손자가 《토지소유권》이전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는 일제시기 리완용이 소유했던 땅을 그에게 상속된것이므로 돌려 주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는것이였다. 그 땅이란 리완용이 나라를 팔아 받은 돈으로 마련한것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재판이 처음이 아니라 몇차례이며 리완용의 증손자는 벌써 적지 않은 땅과 재산을 합법적으로 되찾았고 호화판을 누리고 있다는것이였다. 그런가 하면 경상북도 대구에서 살고 있는 안중근렬사의 후손인 안민생은 일제와의 투쟁에서 한다리를 잃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파쑈독재자때에는 10년 징역까지 살았고 지금은 해외에서 살고 있는 친척들과의 만나는것마저 금지되여 있다는것이였다. 아무리 사대매국체질의 이남《정부》라고 하여도 이렇게까지 파렴치할수야 있는가. 도대체 당국자들은 이 민중을 어데로 끌고 가려는것인가.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치를 떨었다. 분노에 앞서 허무감을 느꼈다. 당국의 한 인물은 민주화의 목소리가 높아 간다고 하여 《이 땅의 우익은 다 죽었는가.》라고 웨치는 글까지 썼는데 나는 《이 땅의 민족성은 이렇게도 무력해 졌단 말인가.》 하고 부르짖고 싶었다. 가슴이 터지는듯 답답하여 나는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 나 창문을 열어 놓았다. 찬바람이 마구 불어 들어 오며 가슴을 좀 진정시켜 주는것 같았다. 나는 창문을 닫고 자리에 와서 누웠다. 나의 건강때문에 그토록 마음 쓰는 김선생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나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찬바람을 갑자기 맞은때문인지 처음은 감기로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도록 열이 내리지 않았고 호흡곤난이 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다고 여긴듯 김선생은 부산병원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때 나는 이미 제대로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날로 나는 부산대학병원으로 갔다. 대학병원에서 진찰결과를 들은 김선생의 얼굴은 사색이 되였다. 악성페염인데다 농흉까지 겹치였다는것이다. 나는 부산대학병원 932호실의 입원환자로 되고 말았다. 그것이 1993년 2월 12일의 일이였다.
한생을 총화 지어 보다
부산대학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은 거의 한달을 끌었다. 김선생은 하루가 멀다 하게 내외분이 함께 찾아 왔고 박홍자사모님과 리미순전도사도 자주 찾아 왔다. 서준식군을 비롯한 동지들도 찾아 와 성심으로 문안을 했다. 그들은 올 때마다 미안할만큼 여러가지 음식을 해가지고 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식사를 할수 없었다. 2월 말에 들어 서면서는 링게르점적을 시작했는데 그것으로 나의 생명은 부지되여 갔다. 누가 찾아 와도 언어장애때문에 말할수 없었고 반혼수상태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침대에도 편안히 누울수 없었다. 몸을 펼수 없었고 다리도 펼수 없었다. 몸을 꼬부리고 모로 누워 있을수밖에 없었다. 의사나 간호원들이 다리를 들어 주려고 할 때면 뼈가 부서지는듯 한 아픔을 느끼며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의 그 정상을 보고 면회 온 사람들은 물론 나의 간호를 맡은 경성대생 장선화도 눈물을 흘리군 했다. 나의 몸은 형무소와 교도소에서 34년간 꿇어 앉아 있던 그 자세로 굳어 져 버린것이였다. 끈질긴 열과 함께 동통과 호흡곤난, 묵은 상처의 아픔이 무섭게 괴롭혔다. 온몸의 모든 부분이 자기 기능을 잃어 버렸으나 귀만은 더욱더 밝아 진듯 했다. 나는 옆환자들이 주고 받는 말소리, 의사와 간호원들이 낮은 소리로 하는 말, 지어는 그들이 복도에서 주고 받는 말까지도 알아 들었다. 그런 속에서 나는 내가 회복될 가망이 없는 환자라는 말을 들었고 나를 지켜 보는 의사와 간호원의 얼굴에서 내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치부되였음을 깨달았다. 사실 나의 의식상태나 몸의 여러 부분이나 죽은 사람에 더 가까왔다. 문득 내 귀에 이런 말들이 들려 왔다. 《이북적십자사에서 악성페염으로 위급한 상태에 있는데 빨리 송환하라고 했다는군요. 남에서는 여전히 들은척 하지 않구요.》 《정말 이러다간 로인님이 가족들도 만나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시겠어요.》 《당국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 좀더 끌면 오히려 북에서 받지 않겠다고 할수도 있어요. 죽은 사람을 보내는것과 같다고 말예요.》 그들은 북에서 강력히 중지를 요구했으나 그대로 강행되는 《팀 스피리트》훈련과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가 감행하려고 하는 북에 대한 《특별사찰》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는데 귀결점은 정세가 이 《리인모송환》과는 점점 더 멀어 지고 있다는것이였다. 그 이야기를 한것이 나를 면회 온 동지들이나 지기들이였는지 의사들이였는지 환자들이였는지 나는 알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혼수상태인줄로 알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것이고 사실 나는 혼수상태에 가까왔다. 나는 꼬부린채 누워 창밖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시 그리운 북쪽하늘, 평양과 고향의 하늘밑에는 가보지 못하고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듯 했다. 부지중 지나온 한생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순간이 닥쳐 오면 인간은 자기의 한생을 총화 지어 보게 된다는 말이 옳은것 같다. 파발리에서 울린 30년대의 총성에서 시작된 투쟁의 첫 걸음, 나를 그 길에 이끌어 주고 비명에 간 정운길, 조을록동지들,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를 따라 장백으로, 룡정으로, 얼뚜강으로 떠다니던 풍운의 나날들, 황수원언제공사장에 오셨던 젊으신 장군님, 그때 그분이 장군님이신줄 알았으면 나는 주저없이 따라 나섰을것이다. 영채 도는 눈빛과 정열적인 말로 장군님의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심장속에 조목조목 심어 주던 혁명군 녀공작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안고 서울로, 도꾜로 오르내리던 나날들… 그리고 광복의 감격, 열광적인 환호, 단 하루였던듯 흘러 간 광복후의 5년간, 풍산에서, 흥남에서 밤낮을 모르고 뛰여 다니던 일, 합당대회에서 연단에 선 장군님을 뵈왔을 때의 감격, 76년간의 생애에서 꺼질줄 모르는 행복의 추억으로 되여 준 영원의 5년,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생각하면 저절로 조수처럼 밀려 들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그리운 5년… 그때로부터 43년간, 그 5년간을 부끄럼없이 돌아 보도록 살아던가. 눈 덮인 지리산에서의 투쟁, 《전향하겠는가?》 하는 말에 《안한다!》는 대답때문에 34년으로 이어 진 형무소와 교도소생활… 교도소에서 나올 때의 좌절감, 수기로 하여 다시 찾은 투쟁의 기쁨… 나는 조선로동당원으로서 공화국 국장이 찍혀 진 파견장을 안고 나온 인민군종군기자로서 다르게는 살수 없었다. 후회없이 돌아 볼수 있는 한생을 보냈다면 이것이 혁명가로서의 행복이 아닐가. 나는 앞으로 언제든 통일될 조국의 하늘아래 떳떳할 한생을 보냈다고 자신에게 대답했다. 유감스럽다면 평양의 하늘, 풍산의 하늘을 멀리에 두고 눈을 감아야 한다는것이다. 《아, 보고 싶은 북쪽하늘이여!》 평양으로 돌아 가 《장군님, 종군기자 리인모 43년만에 돌아 왔음을 아룁니다.》 하고 보고 드리고 싶었고 그리운 집문을 열고 들어 서며 《여보, 내가 왔소.》 하고 말하게 되는 때를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허나 그 말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나의 동지들도 그대로 눈을 감지 않았던가. 마지막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정대철동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죽음도 무기였다. 나에게는 아직 마지막무기가 있었다. 나는 나의 한생을 돌이켜 보았고 부끄럼없이 살았다고 총화를 지었다. 다르게는 살수 없는 조선로동당원으로서의 한생을 살았다. 이제 남은것은 생명의 마지막순간 죽음으로 인생을 훌륭히 마무리 짓는것뿐이다. 한생을 장군님의 사상을 위하여, 통일조국을 위하여 살고 그것을 위하여 죽는것, 혁명가로서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데 있으랴.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지는것 같았다. 병원침대우에서 나는 매일 동지들과 만났고 그들과 마음속으로 작별을 했다. 혹시 환각이였는지도 모른다. 한창 동지들과 이야기를 한것 같은데 둘러 보면 장선화의 근심스런 얼굴만 앞에 있은적도 있었다. 어느것이 현실이고 어느것이 환각인지 나는 지금도 정확히 말할수 없다. 매일, 매 시각 동지들과 진심으로 돌봐 주던 사람들을 만났던것만 같았다. 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거의 전부가 환각이였을것 같다. 김선생네 집을 《지켜 주던》 기관원들이 병원에까지 따라 와서 《지켜 주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나에게서 내가 각오했던것과는 다른 죽음을 바라고 있었던것이다.
2월∼3월
나는 이미 내가 북쪽땅에 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부산대학병원의 침대가 나의 마지막싸움터라고 각오했다. 2월이 끝나갈무렵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쪽땅의 두개 대상에 대한 《특별사찰》을 결정했으며 평양에서는 단호히 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나의 조국을 질식시키려는 또 한차례의-남조선당국자들의 기분을 보면 마지막이라고도 할수 있을지 모르는-압력이라는것은 의심할바 없었다. 그리고 원자력기구의 뒤에 미국이 서 있다는것 역시 명백했다. 치병제일이라는 병원이였으나 엄청난 사태발전이여서 구석구석에서 그 이야기들로 수군거렸다. 《대통령선거》때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마찬가지라는 태도로 알려고도 않고 투표에도 나가려 하지 않던 사람들답지 않게 모두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북에서 거부했으니 《강제사찰》이 들어 갈것이라는둥, 만일 북이 한방이라도 쏘면 미국이 가만 있지 않을것이니 북으로서도 별수 없으리라는둥, 지어는 《강제사찰》을 수백대의 폭격기들의 엄호하에 특별사찰비행기가 들어 가기때문에 조금만 불손하게 나오면 초토화해 버릴터인즉 결과는 뻔하다는둥 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북이 《특별사찰》을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으리라는것이였다. 당국자들은 환영할만 한 사태발전이라고 떠들었다.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의 목을 조르려는 심보가 이때만큼 명백해 진적은 아마 없을것이다. 미국이 남쪽땅에 가져다 쌓아 놓은 핵무기나 일본이 비축해 놓은 핵무기용플루토늄은 전혀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동족의 《핵무기》는 위험하다고 비명을 질러대며 외세의 응원을 청하는것은 무슨 심보라고 할가. 문제는 핵무기가 아니라 북쪽땅의 사회주의제도에 있다는것이 너무도 명백했다. 하기는 그들에게는 어떤 핵무기보다도 사회주의제도가 더 무서울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통일》에 대해서 꿈 꾸고 있을가. 까마귀 꿩 잡아 먹을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혼미상태에 있는적이 더 많았으나 귀는 날카롭게 열려 있었다. 나의 조국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후에 알게 된것이지만 그때는 온 세계가 숨을 죽이고 조선땅을 지켜 보고 있었다. 세계제국주의련합세력이 질식시키려고 하는 사회주의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어떻게 될것인가. 3월에 들어 서면서 마침내 남조선당국자들은 미국과 함께 《북의 핵무기개발》과 《북의 인권상황》을 구실로 최신핵장비들이 동원되는 대규모의 핵전쟁연습인 《팀 스피리트》에 들어 갔다. 3월 8일, 《부산기독교협의회》소속 목회자들이 병원으로 찾아 와 나의 완쾌와 완전귀환을 기원하는 특별례배를 했다. 눈물겨웠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의 화해와 화합을 기원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분렬과 대결의 목소리보다 더 높이 울릴 때가 과연 이 남쪽땅에서는 언제나 올것인가. 그때 나의 복잡했던 심정을 말로 하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을뿐이다. 바로 그무렵인 3월 8일 미해병특수부대 5천여명의 시범상륙공격훈련이 있었고 미군대변인도 훈련을 위한 력량배비가 완료되고 《팀 스피리트》의 서막이 열렸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이 《특별사찰》, 《강제사찰》앞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굴복하게 하려는 위협이라는것은 삼척동자에게도 명백했다. 과연 나의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이튿날 병원으로 찾아 온 부산대학교의 한 학생이 《선생님, 북에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했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라지오방송으로 들었다는것이였다. 준전시상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발표되였는데 적들이 조국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다치는것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했다는것이였다. 《이번에는 그저 지나갈것 같지 않습니다.》 하는 대학생의 말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과연 이 땅에는 40여년만에 또다시 전쟁의 참화가 휩쓸어야 하는것인가. 정전협정이 체결된후 40년동안 대결과 불신만을 조장시키고 격화시키는 미일제국주의와 사대매국노들에 대한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이 땅에서 외세와 사대매국세력을 쓸어 버리지 않고는 평화란 있을수 없었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미국이 좀더 고압적으로 나오면 북에서 굽어 들지 않을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샤만전쟁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힘이 전능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3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정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미국과 제국주의련합세력에 가한 일대 강타였다.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목숨으로 지키겠다는 선언이였다. 《선생님, 통쾌합니다! 북에서 미국의 거만한 코대에 된타격을 안겼습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긍지가 생깁니다.》 하고 대학생들은 말했다. 그럴만도 했다. 미국과 일본에 굴종밖에 모르고 구걸외교밖에 모르는 당국자들에 대한 불만은 대부분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바였던것이다. 대학생들은 나에게 소식을 계속 전해 주었다. 《외국통신들은 북조선의 정부성명으로 미국이 쇼크상태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오스트랄리아방송은 3월 12일은 지구가 깨여 진 날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는 말도 했고 《북조선에서는 전쟁이 일어 나면 모든 책임은 미국과 일본, 남조선당국이 져야 한다며 잃을것은 분계선이고 얻을것은 조국의 통일이라는것입니다.》라는 말도 해주었다. 잃을것은 분계선이고 얻을것은 조국의 통일이라는것은 백천번 옳은 말이였다. 또한 이 전쟁은 외세와 사대매국세력에 의해 강요된 전쟁일것이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은 그런 극단한 사태발전에 당황한듯 유감스럽다느니, 미국에 지나친 압력을 삼가해 달라느니 하고 중언부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위급회담을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위협과 압력이면 북반부의 인민들속에서 공포와 동요와 소요가 일어 나고 사회주의체제가 뒤흔들리리라고 예상했던것 같았다. 6.25전쟁을 준비하면서 리승만이 생각했던것과 다를게 없었다. 그러고 보면 김일성장군님을 수위로 하는 북의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인식에서는 1950년대나 1990년대나 별로 발전을 보지 못한셈이였다.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나는 침대에서 언어기능까지 잃고 누워 있었다. 이제는 내가 북쪽땅으로 갈수 있는가 없는가 문제가 아니였다. 나의 조국이 세계제국주의련합세력과의 판가리계선에 서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나는 믿을수 없는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믿을수 없는 소식
3월 10일, 부산대학병원으로 평양방문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6일에 석방된 문익환목사가 찾아 왔다. 문선생은 75살이였고 나는 76살이였다. 우리는 다같이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겪었고 분렬된 조국의 아픔을 느꼈고 통일을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이였다. 싸움전선은 서로 달랐으나 목적은 통일이였다는데서 다를바 없었다. 우리사이에는 할 이야기가 무척 많았으나 나는 말을 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어우를수 없었다. 문선생이 《리인모씨가 북으로 돌아 가 가족을 다시 만나는것은 나라가 통일되는 상징적의미를 지닙니다. 빨리 회복되여 송환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했을 때도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할 기력이 없어 겨우 《예.》 했을뿐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통일원》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당국에서는 리인모씨를 북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믿지 않았다. 믿을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가야 가는가부다 하지!》하고 내쏘았을뿐이였다. 그는 정말이라고 하면서 《이북에 대표접촉을 제기했는데 북에서 받겠다고만 하면 보낸다.》라고 말했다. 그때 문선생도 있었던것이 틀림 없다. 그가 내 손을 잡고 《헤여 진 내외간이 서로 끌어 안고 재회할 날이 멀지 않은만큼 만나실 때 충격을 받지 않도록 편안한 심정을 가져야 해요.》 하고 당부했을 때도 나는 《예.》 하고 외마디로 대답했다. 믿기 어려운 소식이였던것이다. 벌써 몇차례를 당장 보내줄것처럼 하다가는 뒤집어 놓군 했던가… 혼자 남았을 때 나는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되여 갑자기 나를 보내기로 했을가. 정세가 가장 긴장해 진 이때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남조선당국으로서의 그 어떤 타산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껏 첨예화시켜 온 분렬과 대결의 영상을 이 리인모의 송환이라는 《인도주의》너울로 가리워 보려는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통일원》에서 나온 사람도 《북에서 받겠다고 하면…》 하고 말했을것이다. 또한 이제는 페인정도가 아니라 래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수 없는 나를 넘겨 보내는것이 비난을 인도주의너울로 바꿀수 있기때문일것이다. 그들은 나에게서 《죽음》이라는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는것이다. 이러한 속심을 북쪽땅에서 모를수 있을가,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더우기 이런 일촉즉발의 위기정황에서 시체에 가까운 나를 받는것이 옳은것일가… 나도 알수 없었다. 나는 다만 북쪽땅에서 이 리인모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하기만을 바랐다. 나는 이제는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줄수 없는 한생이 끝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3월 16일 저녁, 김선생이 흥분한 기색으로 달려 들어 와 판문점 대표접촉에서 나를 3월 19일에 송환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 주었다. 북에서는 나의 안해의 요청이라고 하며 나를 돌봐 준 김상원선생부부와 나를 간호해 준 간병인 그리고 담당의사를 평양까지 동행하도록 해줄것을 제기했다고 한다. 간병인도 의사도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는 여러사람들의 축하를 묵묵히 받았다. 그때 내 심정으로 말하면 왜 기쁘고 반갑지 않았으랴. 그러나 정작 가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비명에 간 동지들과 옥중에서 아직 풀려 나지 못하고 있는 동지들 그리고 북쪽의 고향과 처자들을 그리워 하고 있는 동지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아파 왔다. 또한 엄혹한 위기에 처한 조국에 아무런 보탬도 줄수 없는 페인으로 돌아 가야 한다는것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어떤 생각에 집념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쉴새 없이 찾아 오는 사람들의 축하와 인사를 받아야 했다. 3월 17일에는 뜻밖에도 림수경이 나를 찾아 왔다. 림수경은 지난해 12월 교도소에서 가석방된 다음 제일먼저 나를 찾아 왔다고 하며 내가 귀환하게 된것을 기뻐 해 주었다. 나는 그의 방문이 진심으로 기뻤다. 동지들에 대한 생각으로 무겁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벼워 지는것 같았다. 림수경은 《통일이 되면 평양에 내가 제일먼저 찾아 갈래요.》 하고는 몇번이나 돌아 보면서 병실을 나갔다. 나는 그에게 손을 저어 주었다. 그날 《민가협》 부산지구 성원들이 병실에 찾아 와 환송연을 베풀었다. 그들은 나에게 북에 가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여생을 처자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했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으로 불렀다. 나도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 입밖으로 내여서 부른것보다 마음속으로 부른 대목이 더 많았던것은 물론이다. 아 통일, 꿈에도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 이토록 바라는 통일을 누가 가로 막고 분렬과 대결에로만 몰아 가려고 하는것인가. 방문객들이 너무 많아 김선생과 장선화간병인이 많은 수고를 했다. 누구나 다같이 빨리 완치되여 가족과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라는것,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는 인사였다. 18일 정오에 찾아 왔던 최금남동지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내려 온 네명의 동지들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북쪽땅에 가족을 두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로 나와 옥중생활을 같이 한 동지들이였다. 그들은 나를 부둥켜 안고 볼을 비비며 《분단의 장벽이 무너진 뒤 평양에서 꼭 만나자.》고 하였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을 보였으나 가슴속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그들 역시 얼마나 북쪽땅으로 가고 싶으랴. 그들의 심정 역시 한마디로 하면 《아, 보고 싶은 북쪽하늘이여!》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정대철동지를 비롯한 남녘의 산야에 묻힌 동지들, 내 이렇게 운신할수 없지만 않다면 그들의 유골이라도 찾아 안고 북으로 가련만… 3월 18일 밤, 남쪽에서의 마지막밤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꼬박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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