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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 다 림

 

안해의 소식을 듣다

 

나름대로 분주했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해는 례년에 없이 민족의 통일열기가 뜨겁게 삼천리강토에 굽이친 해였다. 조국광복 45돐을 맞으며 판문점 북측지역에서는 북과 해외동포들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가 열렸고(남조선통치배들의 방해책동으로 남측에서는 대표단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9월달에는 제1차 북남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10월에는 북남축구선수단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북남통일축구경기를 벌렸고 범민족통일음악회가 평양에서 개막되였다. 제2차 북남고위급회담이 10월 평양에서, 제3차 북남고위급회담이 12월 서울에서 계속 진행되였다.

12월 제3차 북남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서울에서는 《90송년 통일전통음악회》가 열렸는데 평양민족음악단이 서울의 《예술의 전당》과 《국립극장》에서 2차에 걸쳐 남측전통음악단과 합동공연을 하였다.

통일이 당장 눈앞에 박두한것 같이 기쁨과 희망이 민족의 가슴을 가득 채워 주던 1990년, 나자신의 마음속에도 희망과 좌절이 거듭되던 그해 말에는 나를 놀래울 또 하나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90년 12월 20일경이였던가. 《말》지의 신기자가 헐레벌떡 달려 왔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는 나를 양로원근처의 한 조용한 다방으로 끌다싶이 데리고 가더니 그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였다. 한 도이췰란드교포가 《말》지에 실린 나의 수기를 보고 편지를 보내왔는데 나의 가족소식이 들어 있다는것이였다.

충격적이였다. 신기자가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는걸 지켜 보는데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편지를 꺼낸 신기자는 내 안색을 보더니 혈압이라도 터져 쓰러질가 걱정되는지 떨고 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너무 놀라시면 안됩니다. 부인과 자녀분이 평양에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내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편지를 들여다 보는데 도대체 글자가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안경이 없어도 그 정도는 읽을수 있는데 보고 또 봐도 읽어 지지가 않았다. 그 눈치를 알았던지 신기자가 설명을 해주었다.

《편지를 보낸분은 신옥자라고 하는 도이췰란드교포아주머니입니다. 간호원으로 취업해 갔다가 그곳에 정착한분인듯 합니다. 이분이 도이췰란드에서 교포운동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모양인데 그곳에서 <말>지에 실린 선생님의 수기를 읽고 하도 가슴이 아파 눈물도 흘리고 했답니다. 선생님을 도울 방법이 없을가 생각하던중 마침 지난 8월 범민족대회때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는데 거기서 발행되는 <통일신보> 기자에게 <말>지를 보여 주면서 선생님의 가족을 찾아 보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답니다. 그후 도이췰란드에 돌아 와 한 석달만에 <통일신보> 기자에게서 회답을 받았는데 사모님과 자녀분이 평양에 살고 있다고 적혀 있더랍니다.》

(어머님은 가셨구나.)

경황이 없는중에도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신기자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사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한통 쓰셨으면 합니다. 그 글을 저희 책에 실으면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사모님께서 읽으실수 있을것입니다.》

신기자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먼곳으로 날아 가고 있었다. 어머님, 안해, 어린 딸의 모습이 차례로 눈앞에 떠올랐다.

(내 짐작하였던대로 잘 살고 있었구려…)

《내 쓰리다.》

더 앉아 있기가 힘들어 이 말을 남기고 편지를 들고 일어 섰다. 신기자가 양로원입구까지 따라 왔기에 애써 떼여 보냈다. 나무가지를 잘라 만든 지팽이를 짚고 양로원을 향해 걸어 가는데 마치 꿈속을 가는듯 싶었다. 돌아 보니 신기자가 여전히 서서 보고 있었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고 정문으로 들어 섰다.

방에 들어 가니 다행히도 벙어리로인이 혼자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벙어리인것이 흠일뿐 순한 사람이였다. 오히려 몸이 성해 남을 괴롭히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할가.

그가 깰가 조심하며 편지를 펴들었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편지는 신기자가 전해 준 내용 그대로였다.

《…리인모선생님의 부인과 자녀분이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

어머님은 돌아 가셨음에 틀림 없었다. 어머님이 돌아 가시지 않는 한 안해는 어머님을 모시지 않을 사람이 아니였다. 언제일가. 어디에 모셨을가, 예상했던 일이면서도 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림종은 어떻게, 병마에 시달리지는 않으셨을가… 여보, 순임이, 살아 주어 고맙소, 그 피덩어리를 잘 키우구려. 《말》지의 기자선생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랍니다. 내가 지금껏 당신에게 쓴 편지가 얼마나 되는줄 아오? 종이도 연필도 우표도 없이 적지도 붙이지도 못하였지만 나는 매일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오… 그 피덩이가 벌써 마흔이라니, 당신이 키웠으니 훌륭한 일군으로 자라났을것이요. 사위는 보았겠지요. 손자, 손녀도 많이 보았소? 사위는 어떠할가, 아이들은 또? 여보 순임이, 살아 주어 고맙소. 살아 주어 고맙소.

그후 며칠간은 워낙 여러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아 편지를 쓰려 해도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질 않았다. 신기자가 언제까지 쓰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편지를 쓰는데 몇달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을 맴돌아 한가닥씩 불거져 나온 외마디소리 같은것만 적어서 신기자에게 주었다. 대체 무어라 썼던지 나는 지금도 그 편지를 생각하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얼굴도 모르는 교포아주머니덕분에 나는 91년 새해를 정말 기쁘게 맞이할수 있었다. 안해와 아이들이 한지붕안에서 오손도손 떡국을 들고 있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40년간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 하나가 풀리는듯 한 심정이였다.

 

 

김상원씨와의 상봉

 

이처럼 기쁘게 맞이한 새해에는 또 새로운 사람과의 뜻 깊은 상봉이 준비되여 있었다. 나를 친아버지처럼 돌보아 준 김상원씨를 만나게 된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사람의 일이란 알수가 없구나 싶기도 하다. 저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나서 자란 내가 같은 민족이라는것밖에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경상도 김해땅에 사는 김상원선생에게 로년을 의탁하게 될줄이야. 이 모두가 한겨레, 한민족임에서 오는 동포애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김선생은 1941년생으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시청 사회과에서 공무원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다. 그런데 70년대 들어 《유신》독재가 온 사회를 암울하게 하던 시기 그는 공무원생활을 그만 두고 재야운동에 뛰여 들었다. 그후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일하다가 정치에 뜻을 두었다. 야당 당직을 맡아 일하다가 고향인 김해지역구 《국회의원》 공천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나 복마전 같은 공천과정에 환멸을 느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고향인 김해군 진영읍 신룡리 용전부락으로 락향하여 선산을 지키고 물려 받은 전답을 일쿠며 소박하게 살아 가는 농부로 변신한것이다.

그러던중 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말》지도 정기간행물등록이 되여 손 쉽게 구해 볼수 있게 되면서 김선생은 두 매체의 애독자가 되였다. 결국 김선생이 두 매체를 통해 장기수문제를 알게 되고 나를 찾아 오게 되였던것인데 그전에 한가지 밝혀 둘 일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김상원씨 내외는 결혼할 때 굳게 맺은 언약이 있었다고 한다.

결혼당시 김선생은 《유신》철페운동에 골몰하다가 썩어 가는 온 나라를 감시, 감독할 곳은 《국회》다 라는 생각에서 정치에 발을 들여 놓고 있던 참이였다. 그런데 당시 재야인 야당에 몸 담겠다는 사람들이 어떤 개인적이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지는 세살 먹은 아이도 알만 한 일이였다. 결혼을 앞두고 김선생의 뜻을 리해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가질수밖에 없었을 부인앞에서 김선생은 다음과 같이 맹세를 하였다.

《앞으로 10년간 정치활동에 전념해 보고 보람이 없으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겠소.》

아울러 두사람은 한가지 맹세를 더하였는데 그것은 《만일 사회를 개혁하는 큰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10년후에는 가난하고 병든 단 한사람이라도 우리 가정에 거두어 돌보기로 하자.》는것이였다.

87년 김해로 락향한 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김선생은 결혼당시의 언약을 실천할 때가 왔구나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집에 데려다 거둘 불우한 이웃이라면 우선 고아나 로인이 있겠는데 고아 같은 경우 자칫하면 성장한 뒤에 대가를 바라는것 같은 결과가 되기 쉬워 의지할데 없는 로인을 모시는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로인을 모셔 오자면 천상 양로원 같은데 찾아 가야 하는데 서울시청 사회과에서 공무원생활을 오래 한 김선생이 바로 양로원에 찾아 가 모실 로인을 구할만큼 세상물정에 어둡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양로원운영자들이 희생, 봉사정신이 아니라 양로원로인들의 머리수만큼 나오는 국고보조를 바라고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는게 현실인데 거기 가서 <로인 한분 내주시오.> 했다가는 정신병자 취급 당하기 십상이지요.》

김선생의 설명이였다.

그래서 옛날 서울시청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을 통해 무의탁로인을 소개 받으려 하고 있던차에 88년 말부터 출감하기 시작한 비전향장기수들의 존재를 알게 되였다고 한다. 김선생은 《내가 모셔야 할 사람은 바로 이분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중 90년 12월 《민통련》 정책실 차장 등을 력임한 재야운동가 김병곤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병곤씨는 김선생의 일가조카벌이 되는데 평소부터 기대가 컸던 큰 인물을 졸지에 잃고 초상집에 가보니 그만 눈물도 안 나왔다. 지금도 김선생은 김병곤씨의 말이 나오면 《참말로 의기 높은 진짜 대장부였다.》고 입에 침이 마른다. 그처럼 자랑스러워 했던 김병곤씨의 죽음이 김선생에게 큰 충격이였을것임은 말할나위도 없다. 김선생은 초상을 치르고나니 무언가 빨리 일을 해야 할것처럼 마음이 급해 졌다. 그무렵 비전향장기수 정대철동지의 최후소식보도에 접하게 되였다. 김선생은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수 있나.》 하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기수가운데 비전향출소자 제1호로 널리 알려 져 있는 서준식동지를 무작정 찾아 갔다.

생면부지의 서동지를 찾아 간 김선생은 어리둥절해 하는 서동지를 붙잡고 자신의 결심을 얘기한 뒤 적당한 로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큰 부자가 아니기때문에 주거환경이 불편한것은 물론 반찬도 도시만 못하고 심심하기도 한 농촌생활에 잘 적응할수 있는분이여야 하므로 김선생은 서준식동지가 이런 점들을 고려해 적당한분을 추천만 해준다면 성의껏 모시겠다는 결심이였다.

한편 서동지로서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김선생 같은 사람이 갑자기 찾아 오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던듯 하다. 과연 그를 믿고 동지를 보내도 될가 싶었던 모양이다. 몇차례 만나 김선생을 이리저리 《검토》하고난 뒤에야 그의 진심을 리해하게 된 서동지가 내 얘기를 먼저 했던 모양이였다.

서동지의 주선으로 나는 서울 인사동에서 김선생을 만났다.

《선생님성함을 듣는 순간 <말>지에 나온 그분이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고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장기수로인을 집에 모시고저 결심한 래력을 자세히 이야기하고는 나에게 이렇게 권했다.

《나들이한다는 기분으로 일단 한번 내려 오셔서 보름이나 한달쯤 계셔 보시고 마음을 정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야기를 듣고보니 참으로 놀라왔다. 사실 나는 출소한후 이태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전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도움을 받아 왔다. 그런데 나를 자기 가정에 한식구로 받아 들이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난것이다.

동료끼리 서로 반목하는 양로원을 벗어 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내심 걱정되는 점도 없지 않았다.

《나로 인해 혹 김선생이 피해를 입지 않겠소?》

《그런 문제는 모두 제게 맡기시지요.》

김선생은 잘라 말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진심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말 않고 《내 수일내로 가리다.》 하였다.

김선생은 내게 김해군 진영읍까지의 려정을 알려 주고 먼저 귀향하였다. 나는 며칠동안 여러 동지들에게 진영 가게 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김상원씨의 가정

 

91년 1월 말쯤이였던가. 마침내 김선생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양로원에는 조용한 농촌에 가서 몸조리를 좀 하고 오겠다고 얘기해 주었다. 거주지 변경절차는 뒤에 미루고 우선 떠나고 본것이다. 다리를 저는 나 혼자 먼길 가는것이 못 미더웠던지 한 동지가 데려다 주겠다고 따라 와 진영까지 함께 갔다.

진영에서 택시로 한 5분쯤 농촌마을로 들어 갔을가. 김상원선생의 집은 용전부락의 끝에 있었다. 집뒤에는 산이 듬직하게 솟아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 서니 왼쪽에는 월파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한채, 오른쪽에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단층집이 뒤산의 품에 안긴듯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농촌의 공기가 정말 상쾌했다.

김선생내외와 네 자녀가 모두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넓은 창문이 있는 남향방이 나를 위해 치워 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 가 앉으니 김선생이 가족들을 인사시켰다.

김선생의 부인 리필주녀사는 선한 눈빛을 지닌 친절한분이였다. 진영 대창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고 했다. 자녀는 2남2녀로 큰딸 여진(중3), 큰아들 정진(중2), 둘째아들 기진(중1), 둘째딸 영숙(국민학교 6학년)이였다. 하나같이 눈빛이 초롱초롱하여 령리해 보이는데 농촌아이들이여서 그러는지 순하고 수집음을 많이 탔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금방 밥상을 받았는데 리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워낙 음식솜씨가 없는데다 인공조미료는 전혀 쓰지 않으니 음식맛이 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 저희밭에서 거둔 무공해식료품들이니 많이 드십시오.》

아이, 어른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식사를 하니 꼭 고향에 돌아 온것만 같았다. 평양의 안해는 매일 이렇게 정다운 식탁을 받고 있을가.

저녁을 맛 있게 들고 우리 두 늙은이는 김선생과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9시정도에 잠간 나와 보니 막 잠자리에 들려던 아이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십시오.》

《할아버지》소리를 들으니 가슴에서 뜨거운것이 치미는것만 같았다. 가정적행복이란 바로 이런것일가. 김선생이 따라 나오더니 나를 위생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애들이 저녁에 좋지 않은 텔레비죤프로나 볼가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 나게 하고 있습니다.》

나도 곧 잠이 들었는데 새벽잠이 없는편이라 일찍 눈을 떴다. 조금 있으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리선생이 벌써 아침준비하는가 싶어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살며시 일어 나 앉아 어둑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는데 마루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창밖에 아이들 둘이 지나갔다. 이 집 아이들 같은데 추운 신새벽부터 어델 가는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한시간쯤이나 있으려니 두 녀석이 신문 한장을 옆에 끼고 돌아 오는게 아닌가.

잠시후 김선생이 《한겨레신문》을 들고 들어 왔다.

《아이들이 첫새벽부터 어델 갔다 옵니까?》

《아이들 나가는것 보셨습니까? 마을에 <한겨레신문>을 돌리고 옵니다.》

린근에 《한겨레신문》 보는 집이 스물세집인데 신문 돌릴 아이가 없어 애를 먹는다는 말을 듣고 김선생이 아들형제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요즈음 농촌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 공부에 방해된다고 배달료가 얼마이건간에 신문배달 같은것은 아예 시키려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러니 아직 부수는 적고 지역은 넓어 시간은 많이 들고 배달료는 적은 《한겨레신문》 같은데는 애를 먹을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망국병, 입시병이 농촌까지 퍼졌습니다.》

김선생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내심 그가 아들교육을 잘 시키고 있구나 싶었다.

그때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둘째 아들 기진이가 조용히 들어 왔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더니 내 방에 있던 요강을 들고 나가는것이였다. 순간 아이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기진아, 놔두어라.》 했는데 김선생이 도리여 나를 말리였다.

《손자가 할아버지 요강을 비우는것은 우리 고래의 미풍량속입니다. 그속에서 아이들도 생로병사를 배우며 자랄수 있지 않습니까? 교육의 한 과정이니 말리지 마십시오.》

옆에 있던 동지가 감탄을 했다.

《도시아이들은 로인냄새 난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곁에도 안 가려 한다는데…》

세수를 마친 우리 두사람은 밖으로 나가 집구경을 했다. 어제 밤에는 미처 못 보았는데 뒤산 중턱쯤에 상당한 규모의 묘소가 높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김선생에게 물으니 그의 선대중 조선조 성종때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김극검의 묘라고 했다.

《원래 저의 고향마을은 여기가 아니라 린근의 한림면 퇴래리입니다. 선대중 한림학사가 넷이 나와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특히 극자, 검자 선대께서는 대사헌까지 지냈지만 몹시 가난하여 말년엔 딸네집 행랑채에 거처하다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연산군이 현재의 선산에 묘자리를 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17대 종손이라 묘와 월파정을 돌보기 위해 여기 들어 와 살고 있습니다.》

함께 듣고 있던 동지가 김선생의 선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왕이 내려 준 묘자리라 그런지 퍼그나 좋은 자리 같습니다. 나야 풍수는 잘 모르지만 묘소 좌우로 흘러 내린 산자락을 보시오. 저게 바로 좌청룡, 우백호 하는 그런 형세 아니요?》

김선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에도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조상묘자리덕분에 돈 벌고 출세하기를 바라는것은 결코 아니구요. 아침마다 저 묘를 바라보노라면 높은 벼슬했어도 가렴주구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 온 가문의 종손답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하는 생각이 거듭 듭니다.》

그 말을 들으니 김선생이 돈 많은 사람도 아니면서 나 같은 로인을 돌보겠다고 나선 리유도 조금 리해할것도 같았다. 그의 삶의 뿌리는 청렴했던 조상들에 대한 그의 긍지와 맞닿아 있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집옆에 있는 정자, 월파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들어 서니 본채는 높직한 대청마루 량쪽으로 방이 들어 있는 시원스런 구조였다. 방안에서는 청년들 서너명이 독서를 하고 있었다. 김선생이 소개를 시켰다.

《고시공부하는 학생들인데 여기가 조용하고 좋다고 와서 밥해 먹으며 공부하겠다기에 방을 내주었습니다.》

이를테면 《무료고시원》인셈이였다.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가 싶어 서둘러 정자를 나왔다. 약간 경사진 오솔길을 따라 선산쪽으로 조금 올라 가니 큰 련못이 있었다. 봄, 여름이면 련꽃잎이 제법 무성할듯 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정감 있는 광경이 아무리 봐도 싫지 않아 넋을 놓고 있었다.

뒤날에도 나는 김선생과 이 련못가에 자주 와서 쉬였다. 날씨가 좀 따뜻해 진 어느 날 련못가에 서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련못에서 무엇이 툼벙툼벙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개구리치고는 너무 중량감 있는 소리라 옆에 있던 김선생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이요?》

《식용개구립니다. 큰놈은 2키로나 나갑니다.》

《김선생이 저런것도 기릅니까?》

김선생이 웃으며 그게 아니란다. 린근에 부업으로 식용개구리를 사육하는이가 있었는데 여름에 큰물이 나면서 그만 그 집 개구리못이 넘쳐 개구리들이 온 동네 못으로 떠내려 가서 퍼졌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으며 다시한번 《툼벙》할 때 눈여겨 보니 과연 거대한 개구리였다. 어린시절 개구리 뒤다리를 구워 먹던 생각이 났다.

요즘 사람들은 저런 서양개구리로 고급료리를 해먹어야 성이 찬다니 나로서는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하긴 미국과 일본, 서유럽나라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남조선사회인데 어찌 음식물이라고 례외를 두겠는가.

《개미료리》라는것이 《신사숙녀》들의 멋진 고급료리로 류행되여 서울이나 부산에는 《개미료리》를 1등료리라고 파는 식당이 여러개 있다고 한다. 그뿐인가. 《뱀료리》와 산 원숭이의 골료리 같은것들도 돈 많은 사람들속에서 《특등료리》로 팔리고 있다는데…

저녁에 가만히 들으니 서양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꼭 무슨 귀신울음소리 같았다. 공연히 심술이 났다. 조선개구리는 울음소리도 예쁜데…

집구경을 잘하고 돌아 오니 리선생이 어느새 아침밥상을 차려 놓았다. 아이들은 제 방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밥상옆에 크고 작은 도시락이 네개나 보였다. 다시 어른,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했다. 리선생은 설겆이를 마친 뒤 나의 점심상까지 보아 놓고는 8시 조금 못되여 아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출근했다.

잠시후 함께 내려 온 동지가 돌아 갈 차비를 하였다. 김선생이 배웅하려 함께 일어 섰다. 그 동지는 《이렇게 와서 보니 이 댁의 환경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내 손을 잡고 참 잘되였다고 기뻐 하며 돌아 갔다.

다음날부터 기진이가 나와 한방을 썼다. 귀염성 있게 생긴 이 아이는 말수는 적었지만 착하고 령리하였다. 제 어머니가 가르쳐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이면 신문배달 나가기도 바쁠텐데 꼭 요강을 비우고 이불을 개고 내 세수물까지 떠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내가 아침을 다 먹었다 싶으면 어느 사이 치솔과 양치물을 준비해 놓았다. 저녁이면 제 형과 장난을 치다가도 어느새 달려 와 이부자리를 깔아 놓는다.

나는 어느 사이 아이들에게 정이 들었다. 기진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줄 모르기 일쑤였다. 기진이가 차던진 이불을 덮어 주며 생각하였다. 평양의 안해도 이런 손자를 두었을가. 그 녀석도 기진이처럼 착하고 기특할가. 그러다보면 치솟는것은 그리움이였다.

고향 떠난 이후 이처럼 가정적인 행복을 맛 보며 지낸 때가 또 있었던가. 서울에 있는 동지들에게 이런 행복감을 구구절절히 전했는데도 내 사는 모양을 직접 보고 싶었던지 여러 동지들이 많이도 다니러 왔다. 반갑기로 하면 더 말할것도 없었지만 새벽 4시에 일어 나 아침준비하고 학교에 나갔다가 돌아 온 리선생이 저녁에도 손님때문에 계속 부엌에 서 있는것이 민망하였다. 그런데 김선생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오히려 펄쩍 뛰는게 아닌가.

《절대 그런 생각 마십시오. 선생님 모시고 나서 제 건강이 좋아 져 집사람이 퍽 좋아 합니다. 예전에는 신문에서 세상 돌아 가는 꼴을 보고 부아가 나도 농촌에서 달리 이야기할 상대도 없고 해서 애꿎은 술만 퍼마시군 하였는데 선생님 오시고 나서는 속시원하게 대화를 하니 술도 줄고… 게다가 선생님 주변의 분들이 계속 제 집에 찾아 오시니 저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앉아서 여러 선생님들 만나뵙고 큰 공부 거저 하고 있는셈 아닙니까?》

 

 

보기 드문 남편, 보기 드문 안해

 

이처럼 《칙사대접》을 받다보니 일찍 눈을 뜬 새벽이면 심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신문배달 나간 기진이를 좀 도와 줄가 하여 마당에 나가 비질을 시작하는데 부엌에서 리선생이 질색을 하고 쫓아 나왔다.

《아이들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마당 쓰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새벽이슬 밟으며 산책이라도 하시지요.》

리선생은 끝내 비자루를 뺏더니 대신 지팽이를 들려 주었다.

풀잎우를 걸으며 생각하였다. 김선생도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사람이지만 그 부인은 더 보기 드문 사람이구나.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류행어처럼 나도는 속에 각종 범죄가 공공연히 감행되고 있는것이 남조선현실이다. 20대 부부가 돈을 위해 5살 난 어린이의 목을 눌러 죽이고 저수지에 처넣은 살인사건도 바로 그 얼마전에 벌어 진 일이였다. 이들 범죄인 부부는 《상업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경기도 수원시내에서 어린이를 유괴한 다음 그의 부모에게 5,000만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다가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모골이 송연해 지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 지고 부정부패행위가 사회 구석구석에 팽배해 있고 마약, 퇴페, 유흥산업이 급속히 퍼지는 등 이루 말할수 없는 륜리도덕의 붕괴현상이 일어 나고 있는 그 사회에서 김상원부부는 거친 바람만 일고 있는 황량한 벌판에 핀 보기 드문 꽃이라고나 할가.

내가 같이 살며 본대로 김선생은 물질적인 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였다. 농사일에 서툰 김선생은 《이왕 담당 못할것》 하며 자기 전답중 일부를 남에게 짓게 했는데 절대 대가를 받지 않았다. 남편이야 그럴수 있다고 해도 살림하는 안해는 생각이 다르겠건만 리선생은 시종 남편의 뜻을 리해하고 존중했다. 내가 한번은 하도 신기하여 리선생에게 물었다.

《어찌 그리 안팎이 닮았소?》

《선조때부터 남에게 해입히지 않고 청렴하게 사는것을 긍지로 아는 가문이니까요. 제가 결혼후 교원생활 안했으면 아마 끼니를 걱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활짝 웃었다. 선량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녀성, 나는 리선생의 찡그린 얼굴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가끔 일요일이면 리선생은 내가 심심할세라 학교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하였다.

《요즘 읍소재지인 이곳에까지 바나나 같은 수입과일들이 쏟아 져 들어 와 제법 사먹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래서 리선생은 아이들에게 농촌은 민족의 고향인데 고향을 살리려면 절대 수입과일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리선생이 담임하는 학급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그달에 생일을 맞는 아이들을 위해 간소한 잔치를 베푸는데 학부형들이 간식거리를 조금씩 가져 와 상을 차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달의 생일잔치날 공교롭게도 한 학부형이 커다란 바나나송이를 들고 왔다는것이다. 이를 보고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일어 났다.

《수입바나나를 사먹으면 우리 농촌이 망하기때문에 우리는 수입바나나를 먹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바나나를 들고 온 학부형의 낯빛이 홍당무가 되였다고 하였다.

내가 진영으로 내려 온 뒤 김선생은 과천경찰서와 수원지방검찰청 공안부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나의 신변을 인수하는 절차를 밟았다. 《주거제한》이라는 딱지가 붙은 나의 거주지를 옮기는게 어디 간단한 일이겠는가. 5월에는 나도 김선생과 함께 수원지검 공안부에 출두하여 조서를 꾸몄다.

공무원신분이라도 인간의 심정은 마찬가지인것일가. 조서를 모두 꾸미고 일어 서는데 립회서기인듯 한 젊은이가 김선생의 손을 두손으로 덥석 잡았다.

《선생님, 참 좋은 일 하십니다. 평생 고생만 하신 로인님을 잘 모셔 주십시오.》

그 청년은 눈물까지 글썽이였다.

김선생이 시청공무원생활을 오래 하여 관청 드나드는 일에 훤한 덕분이였던지 91년 7월 10일경 나는 김선생의 주민등록에 동거인으로 오르게 되였다. 결과부터 말하고보니 간단해 져 버렸는데 나는 속으로 거주지변경이 안되면 어떻거나 고민도 하였다.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양로원으로 돌아 가는게 이 가정에 루를 끼치지 않는 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마침내 내가 이 가정의 법적《동거인》이 된 뒤 리선생은 이런 말을 털어 놓았다.

《처음에 아이들 아버지가 장기수로인을 모시자고 했을 때 저는 반대했습니다.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제가 학교 사직하면 모시자고 했습니다. 다른 문제보다도 제가 학교에 나가다보니 매사를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할것 같아서…

양로원에 계시면 최소한 식사는 때 맞춰 드실것 아닙니까? 그런데 애들 아버지가 두주일을 계속 얘기하는 바람에 그만 두손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할아버지를 모시고보니 정말 어린아이같이 순수하시고 애들도 너무 좋아 해서 요즘은 애들아빠생각이 옳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답니다. 저희도 7대 독자로 내려 오는 외로운 집안이고 할아버지께서도 남쪽에 일가라고는 없으시니 외로운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리선생이 덧붙였다.

《기진이가 글쎄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적으라니까 <내가 무엇이 되기보다 우선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 하고 썼다지 않습니까?》

입시병에 걸린 극성 부모라면 펄펄 뛸 일이였겠는데 리선생은 할아버지덕분에 아이들 생각이 어른스러워 졌다며 무척 기뻐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 덕분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막을수 없는 남녘민심의 거세찬 흐름이 아닐가.

당국자들이 인민들의 통일기운을 억누르려 제아무리 발악해도 무럭무럭 자라는 이 민족애의 지향을 어떻게 짓밟을수 있겠는가.

《내가 무엇이 되기보다 우선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기진의 이 말은 그것이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라는 소년의 입에서 나왔다는데 통일문제의 심각성, 절박성이 있는것이다. 북조선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여서 얼굴도 새빨갛고 뿔이 돋았다는 식으로 되여 있어 지어 이남땅의 교육가들까지 얼굴을 붉히는것이 국민학교 교과서들이다. 그런데 그런 교과서로 세상을 깨우친 기진이가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것이다.

나는 그때 리선생에게서 이 말을 들으며 《자신의 청춘보다 조국의 통일이 더 소중하다.》고 한 림수경학생의 말을 상기하였다.

그때로부터 한달후 북과 남, 해외동포들의 념원을 담아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나대행진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였는데 여기에 《전대협》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나는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였던 관계로 퍽 후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남조선통치배들의 갖은 방해책동과 《철통》 같은 봉쇄선을 뚫고 끝내 북에 들어 가 《전대협》의 기발을 날린 젊은이들, 비록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나대행진이 한나산까지 이어 지지 못하고 판문점에서 중단되였지만 벌어 지는 모든 사태는 통일의 넓은 대문을 향해 세찬 힘으로 밀려 가는 이 민심을 어떤 힘도 막을수 없다는 나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오리 몰고 이사 온 한창우동지

 

이무렵 반가운 일이 또 한가지 생겼다.

부산근처에서 오리사육을 하던 한창우동지가 축사를 김선생집 뒤산으로 옮겨 오게 된것이다.

한동지는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중 체포되여 20년을 복역한후 만기출소했다. 체포될 때 스물다섯살 청년이였던지라 20년을 살았어도 우리들중에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마흔다섯의 장년으로 출소할수 있었다. 원래 신체건강하고 손재주와 눈썰미가 뛰여 난 한동지는 감옥에서 배운 목수일로 생활기반을 빨리 잡을수 있었다. 얼마뒤에는 결혼도 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이처럼 가정을 꾸려 확실한 주거지에 살고 있던 덕분인지 한동지는 실로 드물게도 《사회안전법》제정이후 감호소로 붙들려 가지 않고 《보안감찰》처분에 그칠수 있었다.

그런데 한동지는 몇해전부터 약재로 쓰이는 청뒹오리에 관심을 갖고 생업으로 오리사육을 시작했는데 자기 땅이 없다보니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고생한 모양이였다.

한 2,000여마리나 되는 오리를 기를수 있는 축사를 지으려면 제법 넓은 땅이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사료구입이나 판로를 위해서 축사는 도시린근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적당한 곳은 땅세가 너무 비싸 엄두도 못내고 아쉬운대로 촌으로 들어 가야 했다. 그런데 농촌도 안전지대는 아니였다. 애 써 축사를 지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축분뇨때문에 강물이 오염된다 하여 쫓겨 난것도 몇차례나 되는 모양이였다.

한동지가 나를 보러 와 요즘 사는 형편을 얘기하는데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김선생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산에 적당할것 같은 터가 있는데 소용이 되면 거기를 쓰시지요.》

한동지는 뒤산 중턱쯤에 있는 평지를 둘러 보고 《여러가지로 적당하다》며 무척 기뻐 했다. 그후 한동지의 솜씨 좋은 목수질로 축사는 하나둘씩 완성되여 갔다. 마침내 한동지가 2,000여마리의 오리들을 데리고 옮겨 온 날 나도 지팽이를 짚고 오리막을 구경하러 산중턱으로 올라 갔다. 꽥꽥거리며 뛰여 다니는 오리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동지가 반갑게 부축해 주었다.

《선생님, 제가 이 식구를 끌고 이사 다닌게 여기까지 네번쨉니다. 곤난할 때 김선생이 선선히 땅을 내주기에 들어 와서 축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짓다보니 저 우에 김선생선대묘가 있습디다. 선대묘밑에서 짐승 키우는것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땅세를 받자는것도 아닌데말입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참 보기 드문 사람 만났습니다.》

이뒤부터 서울서 동지들이 내려 왔다 하면 한동지의 오리막에 올라 가서 오리불고기로 포식하군 하였다. 이처럼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에서 단란한 가정의 일원이 되여 독서도 하고 산과 들을 산보하며 지내다보니 혈압도 내리고 불편한 다리에도 힘이 많이 올랐다. 그래서 오리막정도는 쉽게 오르내릴수 있게 되였다. 모두가 주위사람들의 과분한 도움덕분이였다.

또한 감사하지 않을수 없는 이런분들가운데 재도이췰란드교포 신옥자씨가 있다. 90년 말 《말》지를 통해 평양의 가족소식을 나에게 전해 주었던 그는 91년 2월호에 안해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가 실리자 얼마후 내게 직접 편지를 보내왔다. 나와 안해가 40년간이나 헤여 져 있는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며 평양을 방문하러 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말》지가 꼭 안해에게 전달되도록 애 쓰겠다고 하였다. 아울러 도이췰란드에는 교포들이 만든 《재도이췰란드장기수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자신은 장기수대책 프랑크푸르트 모임에 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 모임에서 모았다며 편지와 함께 300마르크를 보내왔다.

얼굴조차 모르고 너무나 멀리 있어 찾아 볼수도 없는 신옥자씨 같은이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것일가. 나는 편지를 썼다. 너무나 감사하다고, 이는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고 썼다. 그리고 우표 한장이면 바로 배달될 편지가 아시아를 지나 유럽의 도이췰란드로 해서 로씨야를 거쳐 평양에 전달돼야 하는 민족분렬의 현실이 가슴 아프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그 먼길을 돌아서라도 안해가 그 편지를 읽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으니 나는 얼마나 욕심꾸러기였는가.

 

 

수술대에 눕다

 

91년 7월 10일, 이날 아침 신옥자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답장 잘 받았다는 말, 지금쯤은 안해가 《말》지를 받아 보았을것이라는 소식, 《재도이췰란드장기수대책위원회》가 주최가 되여 나와 안해를 도이췰란드로 초청하고저 한다는 이야기, 부디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당부…

흥분이 온몸에 퍼져 심장이 높뛰기 시작했다.

나는 들뜬 기분으로 산에 올랐다. 건강치도 못한 몸인데다 그날은 날씨도 좋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그런데 관심할 경황이 없었다.

교포아주머니의 음성이 계속 귀전에 울리는것만 같았다.

《지금쯤 사모님께서 <말>지를 받아 보셨을겁니다.》

가슴이 벅찼던탓일가. 내려 오는 길에 나는 그만 비탈길에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발을 헛디뎠던것이다. 김선생이 걱정할가봐 옷에 묻은 흙을 죄다 털고 집으로 내려 왔다.

그날 오후 왠지 식욕이 없고 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큰 이상이리라고는 나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일주일후였던가.

7월 16일 저녁 나는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김선생과 마침 그때 서울서 다니러 온 두 동지가 나를 마산의 한 병원으로 옮겼다. 콤퓨터단층촬영결과 뇌출혈로 밝혀 졌다. 산에서 넘어 졌을 때 실피줄이 약간 터졌던것 같은데 그것이 점점 확대되여 의식불명상태까지 갔다는것이다.

마산의 병원에서는 가망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는 바람에 황급히 부산대학교병원으로 싣고 갔다고 하였다. 뇌에 파이프를 꽂아 고여 있는 피를 뽑아 내는 대수술이 진행되였다. 내 나이가 많다보니 누구도 결과를 장담할수 없었던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였다. 마치 안개속에 있는듯 한 느낌이였다. 김선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그옆에서 웬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전문간병인이라 했다. 뇌수술환자의 경우 일단 의식을 회복하면 생사의 고비는 넘긴셈이지만 정상인으로 돌아 오기까지의 회복기가 중요하기때문에 의사의 권유에 따라 김선생이 그를 부른것이다.

며칠후에 서울서 김병주동지의 딸 지현이가 아예 직장을 휴직하고 내려 왔다. 그때는 이미 김병주동지 내외가 모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고 지현이가 세 동생을 돌보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 소식을 듣고는 직장을 휴직하고 간병하러 내려 온것이였다. 아버지의 동지를 위하여 생계를 미루고 나선 동지의 딸, 동지애도 대를 이어 지는것이랄가. 눈치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은 지현이는 간병인이 하는 모양을 유심히 보고 따라 배운 뒤 웬만 한건 제가 할수 있다고 나섰다. 이후부터는 간병인을 부르지 않아도 되였다.

간병인의 일당이 4만원이나 된다니 지현이 덕분에 큰 부담을 던셈이였다.

서울서 문병 온 동지들과 부산《민가협》일군들은 나를 돕겠다고 온갖 수고를 무릅썼다. 부산《민가협》에서 부탁을 하였던지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학생들이 나를 간병하러 왔다. 그들은 조를 나누어 3교대로 내 병실에 《출근》했다. 덕분에 지현이도 틈틈이 쉴수 있었다. 게다가 처녀에게 대소변 받아 내는 일까지 맡기기가 미안하던터에 치대 남학생들이 와주어 정말 잘되였다고 김선생도 몹시 기뻐 했다. 입원한지 20일만에 병원비는 이미 600만원대에 이르렀다. 동지들은 수술비걱정이 큰 산 같았다. 어느 동지가 알렸던지 《한겨레신문》에 이 같은 사정이 보도되기도 했다. 부산《민가협》과 부산대학교학생회는 공동주최로 나의 치료비모금을 위한 일일차집을 열었다. 그무렵 나는 수술경과가 좋아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겼다. 네사람이 병실을 같이 썼는데 나는 그중 가장 번잡한 환자였다. 간호하는 젊은이들이 두셋이나 지키고 있는데다 병문안객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기때문이다.

보고 싶었던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안온한 기분으로 병원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저간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김선생이 나에게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기때문이다. 하긴 얘기를 했어도 알아 듣지 못했을지 모른다. 내 수술경과가 좋다고는 하지만 뇌기능은 서서히 회복되는 모양으로 나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있었던것 같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항상 얼굴이 붉어 진다.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한 뒤에도 김선생은 퇴원을 미루었다. 이왕 병원에 온김에 소변 불편한것과 저는 다리 진찰까지 받아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몇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수술후유증이였던지 나는 그만 페염에 걸리고 말았다. 가래만 뱉아 내면 치료가 쉽다고 하는데 기운이 없어 그런지 목에서 끓을뿐 도대체 넘어 오지를 않았다.

병원측에서 하루이틀 더 기다려도 가래가 안 나오면 목을 째야 한다고 했다.

내 나이에 수술을 받고 이어 기관지절개를 한다는것은 대단히 무리한 일이였다. 의사선생은 될수 있으면 수술을 안해야 한다며 가래가 잘 나오도록 내 코에다 산소호스를 끼워 놓았다.

코에 호스를 끼워 산소를 불어 넣자면 간지럽고 답답하기마련이다. 《철 없는》 나는 지현이가 잠시 내게서 눈을 돌리기만 하면 호스를 코에서 빼버리군 하였다. 다음날까지 가래가 안 나오면 어쩔수없이 목을 째는 대수술을 해야 하는데 환자가 이렇게 말을 안 들으니 지현이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가. 이미 600만원을 넘어 선 병원비는 또 얼마로 늘어 날지 짐작도 못할 일이였다.

나중에 이런 얘기를 듣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많은이들이 그 찌는 여름날 졸음을 쫓으며 내 병상을 지키는가 하면 뙤약볕속을 다니며 한푼두푼 내 병원비를 모으고 있는줄도 모르고 나는 편안히 입원실에 누워 어린아이 같은 투정으로 간병인을 괴롭히고 있었던것이다.

김선생은 치료비문제로 몇차례나 밤차로 서울을 오르내렸다.

그 여름 서울서 병문안 온 동지들은 나에게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들 했다. 바깥일은 김선생이 책임지고 해결하는데다 지현이와 학생들이 살뜰하게 간병해 주고 기진이, 영숙이까지 병상옆에 붙어 앉아 《할아버지》 하며 재잘거리고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법도 했을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보안감호소 독방에서 고통으로 몸을 뒤치다 죽어 간 동지들이 생각나는게 인지사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뇌에다 구멍을 뚫느라 머리를 박박 깎고 환자용 흰모자를 뒤집어 쓴 나는 그야말로 《바보늙은이》가 되여 지현이 애만 먹이고 있었던것이다. 대체 이 빚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런데 그 지현이가 지금은 중병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는것이다. 내가 북쪽땅으로 온후 그는 륵골결핵으로 갈비뼈를 잘라 냈는데 지금은 척추부근에까지 염증이 번져 몸이 휘고 진통제없이는 참기 어려운 형편이면서도 입원비와 수술비 그리고 세 동생의 생활걱정때문에 병원에서 퇴원하겠다고 한다는것이다. 그렇게도 싹싹하고 알뜰하던 지현이…

《아버님은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모시지 못하는것을 늘 괴로와 하셨어요.》 하면서 딸처럼 손녀처럼 나를 보살펴 주던 지현이, 그가 지금은 간호해 줄 부모님은커녕 찾아 주는 일가친척 하나없이 병상에 괴롭게 누워 있다. 내가 그를 도울수만 있었으면, 이곳에 와서 그가 치료를 받을수만 있었으면… 군사분계선만 아니면 우리 온 가족이 그에게로 달려 가련만. 아, 통일, 통일이 되였으면! 남녘땅도 치료비걱정, 생활걱정, 배울 걱정 없는 그런 땅으로 어서 되였으면…

 

 

지구를 한바퀴 돌아 온 안해의 회답

 

지현이와 학생들의 정성스런 간호로 페염은 수술없이 완치되였다. 입원한지 달포만인 8월 말경 퇴원해 진영으로 돌아 왔다. 병은 나았다지만 혼자 걷기는 힘든 상태였다. 와서 보니 리선생이 벌써 두달째나 나의 쾌차를 비는 백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새벽이면 목욕재계하고 식사때는 채식만 하며 정성을 들여 온 그를 보니 정말 고맙고도 부끄러웠다.

수술로 쇠약해 진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며 김선생이 권해 비타민이니 영양제니 하는것을 많이도 먹었다. 김선생내외의 정성속에 목발을 짚고 한두발자국씩 걷는 련습을 하다보니 어느덧 한가위였다. 한가위 둥근달을 마음껏 보았다.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7천만겨레의 념원을 이루어 달라고.

9월 24일경이던가. 《말》지의 신기자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 사무실에 나와 보니 팩스로 <통일신보>가 들어 왔네요.》

《통일신보》는 신옥자씨가 나의 가족소식을 알아 보았던 바로 그 신문이다. 거기에 내가 92년 2월호 《말》지상을 통해 안해에게 쓴 편지에 대한 안해의 답장이 실려 있다는것이다. 겉봉에 쓸 주소가 없어 우체통에 넣지도 못하고 잡지에 실려 지구를 한바퀴 돌아 도착한셈이다. 꼬박 반년만이였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을 보니 안해의 편지를 요약한 기사가 나왔다. 《말》지도 다음호에 안해의 편지를 전재한다고 하였다.

《한겨레신문》의 기사를 통해 어머님이 83년에 돌아 가셨음을 알수 있었다. 며느리의 무릎우에서 림종하셨다고 하였다. 안해는 중학교 교장으로 평생을 살아 온 모양이고 딸 현옥이도 교사라 하였다. 사위도 보았고 손자들도 둔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안해가 어머니처럼 결국 혼자 늙고 만것을 생각하니 가엾고 측은해 눈물이 흘렀다. 평생을 수절하신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치신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 몰래, 딸자식 몰래 안해가 흘린 눈물이 그 얼마였을것인가. 그런중에도 딸 현옥을 훌륭하게 가르쳐 교사로 키우고 사위까지 보았다니 너무나 고맙고 대견했다.

얼마뒤 도이췰란드의 신옥자씨가 안해의 편지가 실린 《통일신보》를 부쳐 왔다. 나는 그때 사진으로나마 40년만에 안해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 마음속의 시름이야 사진에 나타날리 없겠지만 어쨌든 곱게 늙은 얼굴이라 가슴이 조금은 덜 아팠다. 그후에 받은 9월 7일부《통일신보》에는 《말》지에 련재했던 나의 수기가 실려 있었고 9월 21일부에는 《말》 91년 8월호에 신기자가 쓴 김상원선생에 대한 소개글과 딸 현옥이가 김선생내외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이 실려 있었다. 안해와 딸은 한결같이 우리가 다시 만날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건강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었다.

내 나이쯤 된 로인이 잠간 앓다 죽으면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할것이다. 살만큼 산데다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곱게 갔다는 치하이리라. 언제 다시 쓰러져 많은이들에게 페를 끼칠지 모르면서도 내가 오래 살려고 발버둥쳐야 하는 리유가 생긴것일가. 안해와 아이들이 보고 싶은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들이 건강하고 다복하게 잘 살고 있음을 알게 된것만으로도 족했다. 산에서 죽어 간 송중명과 같은 동지들 그리고 아직도 가족소식 한쪼각 알지 못하고 있는 북쪽출신 동지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91년 가을부터 북측에서 나의 송환을 요구하는 대중적움직임이 일어 나고 이것이 남쪽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 조용하던 진영의 김선생댁은 여러 종류의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우선 체육경기다, 녀성회담이다 해서 북측기자단이 서울에 왔다하면 진영의 김선생댁은 즉시 경찰차로 둘러 싸였다. 북측기자들이 기습적으로 취재하러 올지 모른다는것이였다.

이곳처럼 한갓진 농촌에 경찰차량 5∼6대에 가득 타고 온 사복경찰들이 득실거리니 리선생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놀라지 않을가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또한 10월에 진행된 제4차 북남고위급회담 취재를 위해 남측기자들이 평양에 갔을 때 평양시민들을 인터뷰한 장면이 남조선텔레비죤에 방영되였다. 시민들은 《리인모로인 왜 안 보내는가.》라고 항의하고 있었다. 남조선의 언론은 《평양시민들의 <광적>인 송환요구》를 비난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당국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한 추종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양시민들의 송환요구를 광적이라고 모독하다니. 가슴이 아팠다. 그것이 내 조국 인민들의 동포애, 참다운 동지적의리의 발현임을 그들이 모른단 말인가. 그 송환요구에 민족분렬의 비극을 하루빨리 끝장내려는 민족의 소망과 의지가 깃들어 있는것이 아닐가.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다는 몰랐었다. 북쪽의 신문들에 나의 수기가 게재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처지에 비탄의 눈물을 흘리고 나의 송환을 요구하는 운동이 얼마나 큰 하나의 사회적흐름으로 일고 있었는가를. 그때 북쪽의 각지에서 나의 송환을 요구하는 각종 군중집회들이 련이어 벌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나의 운명문제를 놓고 몹시 심려하시며 나를 꼭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 해야 한다고 몇번이나 당부하시였다는것도 알수 없었다.

 

 

비데오로 본 평양의 가족들

 

이렇게 되자 주간지, 월간지기자들도 진영으로 찾아 들기 시작했다. 부부가 40여년 헤여 져 있다는 사연에 구미가 당겼던지 선정적인 《녀성》지에서조차 취재하러 왔다. 내심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매체들도 있었으나 서울서 하루길을 내려 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저해하는 글만은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던중 10월쯤이던가. 워싱톤 아메리카주방송의 박용찬사장이 먼길을 찾아 왔다. 그는 평양서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라 했다.

《평양에서 선생님얘기를 하도 많이 하기에 어떤분인가 싶어 <통일신보>에 실린 수기를 보았습니다. 감동적이더군요. 사상을 떠나 제가 도울수 있는 길이 없을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정에도 없이 안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빠트를 불시에 찾아 갔다고 하였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몹시 경계하였으나 곧 박사장의 진심을 리해하고 협조하여 그들을 차례로 인터뷰하고 이를 비데오카메라로 록화했다고 하였다.

《선생님, 가족들이 한번 마음의 문을 열자 인터뷰중에 울고 불고 하여 제가 민망해서 혼났습니다. 서울 가면 록화테프를 꼭 선생님께 전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래서 눈물이 더 나셨던 모양입니다.》

김선생집에는 비데오기가 없어 이웃에서 빌려 와 록화테프를 보았다. 화면은 깨끗했다. 평양의 고층아빠트숲들이 나오다가 장면이 안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내부로 바뀌였다. 안방으로 보이는 곳에 안해, 사위와 딸, 세 손자손녀가 모여 앉아 있었다.

박사장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렸다.

먼저 안해의 모습이 나왔다. 나의 소식을 들은 소감을 묻자 안해는 눈시울부터 붉어 졌다. 새삼스럽게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스물세살때 남편과 헤여 진후 40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이 꼭 살아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사장이 현관문을 가리키며) 《지금 남편이 저 문을 열고 들어 온다면 첫마디를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말보다 눈물이 앞설것 같습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안해는 이렇게 답하고 진짜 눈물을 흘리는것이였다.

《남편께서 이 비데오를 보실텐데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지요.》

《당신이 꼭 돌아 온다며 그렇게 아들을 그리시던 어머님이 지난 83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안해는 다시 울었다. 끝내 내 소식을 알지 못한채 돌아 가신 시어머니생각이 났던것일가. 어머님이 돌아 가셔서 내게 송구했던것일가.

외동딸 현옥의 모습도 똑똑히 볼수 있었다. 피덩어리를 두고 왔는데 어느덧 마흔이 넘은 중년부인이 되여 있었다. 안해가 편지에 쓴대로 얼굴모습이 나를 많이 닮은것 같았다. 전국교수경연에서 1등을 했다는게 실감이 날만큼 딸은 카메라앞에서 스스럼없이 말을 참 잘하였다. 하지만 딸도 《언제 아버지가 제일 그리웠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목이 메였다.

《제가 김형직사범대학에 들어 갔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가 와주셨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 허전하였습니다. 내가 대학생복 입은 모습을 아버지가 보아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했습니다.》

현옥이는 현재 평양개선고등중학교에서 물리선생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현옥과 74년에 결혼했다는 사위 오문재는 과묵하고 신중해 보였다. 안해가 좋은 사위를 골랐구나 싶었다.

이어서 꿈에도 보고 싶던 손녀 정혜, 보람, 손자 승철이가 나와 제 소개를 하고 할애비에게 빨리 집에 오라고 야단들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민망해 고개를 돌리는데 김선생도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 나이 열세살때부터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고 선배들을 따라 다녔다. 그후 60년, 나이 칠십이 넘도록 무엇을 했기에 어린 손자녀석에게까지 분단의 아픔을 맛 보게 한단 말인가.

박사장이 돌아 간후 김선생은 나를 위해 록화기를 사들였다. 화면으로나마 안해와 딸, 사위와 손자들의 모습을 자주 대할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왠지 송구하고 화면을 대하면 오히려 가슴이 아파 나는 비데오 보는 일이 두려웠다. 가끔 동지들이 찾아 오면 보여 주군 할뿐이였다.

 

 

《리인모로인》송환 공방전

 

김선생은 나의 송환문제에 행여나 진척이 있는가 하여 《통일원》 교류과에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한번은 북에서 나의 가족, 친지, 의료진, 취재진 해서 50여명의 방문단을 보내겠다는 제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내가 《가족만 초청한다.》는 의사표명을 한다면 가족들이 내려 오는것은 허용될것이라고 하였다. 가족외의 사람들이 오겠다는것은 나의 송환문제를 정치적으로 리용하려는 의도로 보이기때문에 허용될수 없다는 얘기였다.

여러차례에 걸쳐 고위급회담이 열리고 다른 회담들도 림박한듯이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민족간의 불씨는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뼈 저리게 느껴 졌다. 내 처지에서 단 며칠이라도 가족들을 만나볼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남측에서 요구하는대로 《나는 가족만 내려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나선다면 북측의 립장은 어찌될것인가. 본인은 원하지도 않는데 대규모방문단을 내려 보내 나의 송환문제를 정치적으로 리용하려 한다는 혐의를 면치 못할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게는 할수 없었다. 나는 비전향장기수이기전에 그리고 정전담판시 포로로 송환되지 못한 인민군종군기자이기전에 조선로동당원이였다.

나는 가족, 친지, 의료진 등 그 많은 사람들을 보내 나를 위문하려는 조치를 취해 준 당의 사랑, 동지들의 사랑을 느끼고 그에 감사했다. 아무리 가족이 보고 싶기로서니 가족만 초청하라는 남측의 제의에 응해 나설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과 동지들, 가족들의 사랑을 이 몸에 느끼는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족만 초청한다는것은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방문단건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리인모로인》을 송환하라는 북측과 이를 거부하는 남측간에 공방전이 계속되였다. 이 와중에서 어떤 때는 고향길이 환히 열리는듯 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벽처럼 캄캄하였다. 같은 공무원이면서도 어떤이는 나를 찾아 와 짐 싸놓고 기다리라 하였고 어떤이는 헛된 꿈 꾸지 말라고 나를 조롱하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변화들을 내내 쫓아 다녔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선생과 동지들은 거듭되는 기대와 좌절로 내가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가 몹시 걱정하였다. 징역 20년을 선고 받은 사람이 19년을 살고 나서 마지막 1년을 채우다 그만 조급증으로 병이 나 숨을 거두고 만 경우도 더러 있었기때문이다.

나는 《리인모로인》송환 공방전속에서 한개 바위돌처럼 묵묵히 있었다. 오직 한가지 버릴수 없는 념원을 가슴에 간직한채. 이가운데 91년 12월 서울에서 제5차 북남고위급회담이 열리고 7.4공동성명의 원칙을 구현한 력사적문건 《북남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협력, 교류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한해가 저물고 1992년 새해가 밝았다.

 

 

고마운 사람들

 

1992년 2월에 제6차 북남고위급회담이 평양에서 진행되여 제5차회담에서 채택한 북남합의서와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온 민족을 기쁨에 설레이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남조선당국자들은 북측과 화해하겠다고 하고서도 북을 적대시하는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통일사절인 북쪽땅에 다녀 온 인사들을 계속 감옥에 가두어 둠으로써 민족을 실망케 했으며 북에 대한 《핵의혹》을 트집 잡아 합의서의 리행에 제동을 거는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분단을 가슴 아파 하고 하루빨리 분렬의 슬픔을 가시여 내려는 온 민족의 분투는 그 어떤 물리적인 억압과 폭력으로써도 막을수 없는것이였다. 그속에서 나의 운명문제는 통일론의의 중요한 한 측면으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해 4월 중순경이던가.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처녀는 미국 《워싱톤 타임스》 기자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그 기자가 평양을 방문했던 길에 안해와 아이들을 만나보고 그들이 내게 전하는 인사말을 록음해 왔다는것이다.

그 기자가 몹시 바빠 진영까지 내려 가기는 힘들고 내가 서울에 와서 록음테프를 받아 갔으면 한다는 내용이였다.

나는 김선생과 의논해 4월 29일 서울로 향했다.

지난해 겨울을 나면서 수술후유증인지 나이탓인지 체력이 많이 떨어 져 나는 부축없이 걷기 힘든 상태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부산의 독지가 최상근선생이 봉고차를 한대 보내주었다.

최상근이라면 비전향장기수들을 위해 의로운 사람으로 남조선월간지 《말》지에 소개된바 있는분이다. 그에 의하면 최선생에게는 자신이 큰 수치로 여기는 전력이 있다 한다. 그는 부산대학교에 재학중일때 운동권학생들속에 뛰여 들어 집회에도 적지 않게 참가했으나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압과 《시위에 참가하면 졸업후 회사에 취직하지 못한다.》는 학교당국의 위협에 글뒤주가 되여 버렸다. 그때 서울의 리화녀자대학교 학생들로부터 가위를 그려 넣은 편지를 받았는데 그 뜻인즉 남자로서의 체면을 잃어 버렸으니 수술을 하고 치마를 입으라는 편지였다. 그는 90년대 초에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해 알게 되였는데 우리 동지들의 꺾을수 없는 지조앞에 자기의 지난 날을 깊이 뉘우치게 되였다 한다. 원래 그는 돈을 좀 벌자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며 사회의 부정부패행위를 폭로하는 신문이 정상적으로 발행되도록 하는데 돈을 대주기도 하고 환경오염에 무관심한 집권층과 매판업체들을 반대하는 《부산공해추방협회》에 돈을 밀어 넣기도 하였었다.

장기수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물심량면으로 그들을 돕고 있는데 자식이 부모들을 위하는것 이상이였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상근선생이 봉고차를 우리에게 보내준것은 별로 새삼스러운것이 없었다.

마침 한동지의 오리막에서도 시내식당에서 사료로 쓸 음식찌꺼기들을 걷어 오고 알을 내가고 하느라고 차가 몹시 필요한 형편이였다. 최선생은 평소에는 오리막에서 사용하고 혹 내가 먼길 갈 일이 있으면 리용하라고 자신의 봉고차를 내놓았던것이다.

한동지의 오리막에서 함께 일하고 있던 조영삼군이 봉고차를 운전하여 김선생, 나 세사람은 그날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그날 밤은 려관에서 묵고 이튿날인 4월 30일 오전 《워싱톤 타임스》 기자와 약속한대로 궁정교회로 갔다. 박사모님과 리전도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잠시후 《말》지 신기자가 왔다. 나는 당시 신옥자씨의 권유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문을 제출하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신옥자씨를 비롯한 《재도이췰란드장기수대책협의회》 회원들은 국제적십자사에 나의 고향송환을 도와 달라는 편지를 여러차례 보냈던 모양이다. 적십자사측은 《인도적인 견지에서 도움을 주고저 하는데 그전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내 의사를 밝힌 편지를 썼는데 영문번역도 필요하다고 하여 신기자가 이날 영문편지를 만들어서 가지고 온것이다. 국제적십자사에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나니 박사모님과 미순이(리전도사)가 맛난 점심상을 차려 놓았다. 잘 먹고 나서 과일을 들고 있는데 눈은 파랗고 머리는 노란 기자가 통역과 함께 찾아 왔다.

그는 《한국》의 장기수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아직도 안해와 헤여 져 있는것이 가슴 아프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평양에 갔을 때 일부러 안해의 집을 물어 찾아 가서 인터뷰하여 우리 부부의 사연을 기사화했다는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위로가 될가 하여 안해와 딸, 손자 승철이의 인사말을 록음해 왔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그는 록음기를 틀어 내 귀에 대주었다.

그리운 안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현옥 아버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현옥의 의젓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 아버지, 한평생 아버지를 기다려 온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어떠한 시련이라도 견뎌 내고 꼭 돌아 오셔야 합니다. 금년에는 꼭 아버지를 만날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어서 들리는건 귀여운 승철의 목소리.

《… 할아버지를 제일 존경하는 승철입니다. 집에 있을 때면 할아버지사진을 보며 할아버지가 돌아 오실 날을 손 꼽아 기다립니다. 할아버지가 돌아 오셔서 대동강 푸른 물결도 함께 가보고 국수도 같이 먹고 저와 함께 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할아버지가 꼭 오리라고 믿습니다. 할아버지, 빨리 오십시오.》

시종 록음기를 내 귀에 대준 그 기자의 손을 덥석 쥐고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 내 마음을 전했다. 통역 없이도 그는 내 뜻을 리해한것 같았다. 내 손을 마주 잡고 무척 기뻐 하였다. 그는 본국에 돌아 가서도 내 문제를 여러 인권단체들에 호소하겠다고 하였다. 분렬된 민족의 비극은 이 서양사람의 가슴에까지 아픔으로 다가갔던것일가. 그는 잠시 주머니를 뒤지며 부스럭거리더니 10만원권 수표 한장을 내 손에 쥐여 주고 돌아 갔다.

1991년 7월 병원신세를 진이래 참 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보내왔다. 국내는 물론 도이췰란드나 미국의 교포들이 한푼두푼 모은 돈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보여 준 뜨거운 민족애에 가슴이 벅찼었다. 하지만 이날 국적도 인종도 다른이가 내민 따뜻한 손길을 대하고 나는 뭐라 할말을 잊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선함은 사상과 국적을 초월한다고나 할가.

다음날엔 감호소에서 출소한 동지들이 운영하고 있는 제기동의 민중탕제원에 가서 그립던 동지들을 만났다. 오후에는 김선생의 제안으로 요즘 탕제원에서 일하는 최남규동지와 함께 한강에 유람선을 타러 나갔다. 오랜만에 서울나들이, 하지만 유람선보다 더 좋은것은 말을 안해도 서로의 마음을 능히 짐작할수 있는 동지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였다.

 

 

《신라호텔》

 

5월 3일,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 문득 김선생이 《이왕 나온김에 강릉의 후배도 만나보고 가시지요.》 하였다. 강릉에는 고생끝에 자수성가한 고향후배 리은하가 살고 있었다. 양로원에 있을 때 그가 잡지 《말》을 보고 찾아 와 반갑게 만나본후 오래 보지 못하였다. 내가 마다할 리유가 있겠는가.

차가 영동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사실 나는 대관령을 넘어 보긴 처음이였다. 구절양장이라더니 태백산줄기의 산세가 웅장하였다. 강릉에 가니 은하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은하에게서 강릉별미를 대접 받고 명승지까지 두루 구경한후 귀로에 올랐다. 내가 《강원도쪽은 처음 와봅니다.》 했더니 김선생이 그러면 길을 동해쪽으로 잡아 구경을 하면서 내려 가자고 하였다.

우선 명주군의 굴산사터에 들렸다. 김선생은 그곳을 잘 아는듯 하였다. 굴산사는 신라 말기의 고승 범일선사가 한창나이 42살때 당시 권력의 핵심이라 할 국사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들어 와 39년간 면벽참선을 한 곳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름 높았던 신라의 고찰은 간곳이 없고 절터는 페허가 되여 있었다. 김선생이 말했다.

《그가 39년 면벽하며 찾아 헤맨것이 대체 무엇일가요?》

그는 뜻을 세워 39년을 참선한 그와 신념 하나로 34년을 감옥에서 버틴 나는 닮은 점이 있는듯 하다고도 하였다. 페허를 딛고 서서 1,000년전 한 고승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것이 과연 무엇이였을가 하는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후 사흘동안 송강 정철이마냥 유람을 하였다. 삼척의 죽서루도 구경하고 안동의 도산서원에도 들렸다. 이제 집으로 가려는가 했는데 김선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선생님, 고위급회담장에 한번 가보십시다.》

5월 5일부터인가 제7차 북남고위급회담이 시작돼 북측대표단이 《신라호텔》에 와 있다는 보도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영에 있었으면 벌써 형사들이 들락거려 회담분위기(?)에 젖었을것이다. 며칠간 한가로운 유람속에 있었으나 한시도 잊은적은 없었다.

김선생은 내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것이다. 두말없이 《가봅시다.》 하였다. 여느 때였으면 나는 나때문에 김선생에게 탈이 생길 가봐 걱정을 앞세웠을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너무너무 큰 흥분에 그것조차 잊었다. 그저 내 생각을 내짚어 준 김선생이 끝없이 고마왔다. 차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나는 《신라호텔》앞에 가서 서 있다가 먼발치에서나마 고향사람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었다. 설사 말은 못한다 해도 그리운 땅에서 온 그 사람들을 한번 내 눈으로 보기만이라도 한다면, 하다못해 그들이 들어 있는 호텔곁에 가서 그곳 공기를 마시기라도 한다면 묵은 체증이 내려 가듯 마음이 후련할것만 같았다. 이무렵 경찰들이 나를 그토록 혈안이 되여 찾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전에도 무슨 회담이다 하면 경찰들이 집에 와서 지키다가 시골이라 있을 곳도 마땅찮고 저희들도 심심하니 나를 데리고 린근에 유람을 간 일도 있었다. 이번 회담기간중에 집에 있으면 이래저래 피곤하니 동해안을 따라 유람하고 오겠다고 김선생부인에게 전화로 알려 놓았던터라 경찰도 그러려니 할것이라 생각했던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였던가. 5월 7일 오전 10시경 우리 차가 《신라호텔》 일주문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운전하던 조영삼군이 《정문에서 검문을 하네요.》 하였다. 과연 일주문앞에는 검문을 받느라 차량이 몇대 늘어 서 있었다. 조군이 줄꽁무니에 봉고차를 갖다댔다. 순간 100명은 될듯 한 전투경찰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 차를 포위하더니 유리창을 부시고 들어 와 우리 세사람을 끌어 냈다. 나는 순식간에 전경들에게 번쩍 들려 린근 장충체육관으로 옮겨 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행히 《한겨레신문》 기자 한사람이 따라 들어 와 취재를 하다 형사들에게 걸려 쫓겨 났다.

잠시후 우리 세사람은 경찰이 모는 차에 실려 고속도로로 들어 섰다. 어디 가느냐고 했더니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창원의 어떤 려관이였다. 이튿날 북측대표단이 돌아 갈 때까지 거기서 좀 쉬고 있으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북측대표단이 돌아 간 5월 8일 저녁 진영집으로 돌아 온것은 나 혼자뿐이였다. 김선생과 조군은 조사가 끝나지 않아 다음날 보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9일 저녁무렵 김선생 혼자 집으로 돌아 왔다. 김선생은 기관원들에게 조군이 먼저 집에 와 있는것으로 들었던 모양이였다. 집에 오자마자 《조군은 언제 나왔습니까?》 하였다.

 

 

경찰의 포위속에서

 

뭔가 심상찮다 했는데 이튿날 아침 신문을 보니 조군이 구속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조군이 경찰의 저지를 무시하고 차를 몰아 전경들을 다치게 했다는것이다. 너무도 엉터리였다. 남조선당국의 처사는 파렴치하다는 말도 적당치 않았다. 내가 그곳에 간것이 그렇게 못 마땅하다면 문제의 근원인 나를 잡아 넣을 일이지 엉뚱한 사람에게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 씌워 구속시킨단 말인가. 그네들이 하는짓 하나하나가 이렇게 모두 졸렬하고 무지막지한짓이였다. 다 늙은 로인이 자기 조국의 대표를 보겠다는것조차 그렇게 두려울양이면 북과 화해하겠다는 합의서에 무슨 배심으로 도장을 찍었단 말인가.

조군의 일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은 판에 얼마뒤에는 오리막의 한동지에게까지 불똥이 튀였다. 수사관들은 우리가 《신라호텔》앞에 타고 갔던 봉고차의 출처를 조사했다. 차량조회를 하니 최상근씨의 이름이 나왔고 그가 장기수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되였던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최상근씨가 돕고 있는 장기수중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오리막의 한동지를 떼여 낼 작정을 한 모양이였다.

군청에서 갑자기 한동지의 오리막이 무허가건물이니 철거하라는 계고장이 날아 왔다. 이와 동시에 군청관계자는 한동지를 경찰에 고발해 버렸다. 김선생이 이를 보고 《철거하라고 통고를 해놓고 기한내에 철거를 하지 않으면 고발하는거지 이런 행정이 어디 있나.》 하고 흥분하더니 담판을 짓겠다며 군청에 나갔다. 한동지의 오리막이 대규모축사도 아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당했다는 민원이 들어 간것도 아니였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철거까지 당해야 할 리유가 도무지 없는데 군청의 철거방침은 요지부동이였다. 몇차례 옥신각신끝에 그나마 받아 낸 철거기한이 6월 30일, 한동지는 2,000여마리의 오리들을 몰고 다섯번째 이사를 해야 할 처지가 된것이다. 한동지에게 죄스럽고 기관에서 하는짓들에 분노가 솟아 올랐다.

전화도청도 심해 졌다. 《신라호텔》앞에 갔다 온후 많은 기자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반드시 전화로 취재요청을 하고 오게마련이므로 김선생댁 전화만 듣고 있으면 누가 왔다 갔는지 환히 알수 있음은 두말할것도 없다. 진영에 왔던 기자들이 본사에 올라 가 기사를 완성할 무렵이면 《안기부》의 보도중지요청이 회사의 경영진에게 전달되군 하였다고 한다. 어떤 기자는 사정이 그렇게 되여 기사가 빠졌다며 사죄의 전화를 해왔고 어떤이는 사장이 고민중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련락해 왔다.

진영에 와서 취재를 하고 간 기자중 나를 비방하는 기사를 쓴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것 같다. 젊은 그들은 사상을 떠나 나를 동정하였다. 구태의연한 랭전론리로 나를 매도한이들은 주로 신문사의 론설위원이나 데스크들이였다. 그러니 《안기부》로서는 젊은 취재기자들이 쓴 기사들이 계속 쏟아 지는게 달갑지 않을수밖에.

사실상 집안에 연금되는 날도 훨씬 많아 졌다. 5월 하순경 나는 27일부터 서울 한양대에서 있었던 《전대협》이 조직한 행사에 초청 받았다. 이 전화를 받은 다음날 바로 경찰차 6대가 집을 에워 쌌다. 그들은 그대로 한주일이나 진을 치다가 서울서 《전대협》출범의 행사가 끝난 뒤에야 돌아 갔다.

6월 15일경에는 초청강연회가 있어 서준식동지가 마산에 내려 오게 되였다. 내가 그 집회에 나가리라 생각했던지 경찰들이 또 몰려 왔다.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요즘은 가장 조그만 영숙이까지도 경찰이 오건말건 태연자약하다.

방안에 앉아 가만 듣고 있으려니 경찰과 김선생이 주고 받는 말이 걸작이다.

《이번에 내려 오면 서준식이가 여기 오겠지요?》

《마산까지 왔는데 인사 드리러 안 오겠어요?》

《거 순 빨갱이간첩 아니요?》

《오거든 소개시켜 줄테니 직접 보시오. 빨간지, 파란지.》

다음날 예상대로 서동지가 다니러 왔다. 김선생은 《약속》대로  경찰들에게 서동지를 소개시켰던 모양이다. 서동지가 가고 나자 경찰들은 《그 사람 얌전하게 생긴게 간첩 안 같던데요.》 하더라는것이였다.

 

 

철거반이 부셔 버린 젊은 웃음들

 

그무렵 일본 《NHK》방송에서 취재하러 오겠다고 전화가 두번이나 왔는데 웬일인지 오지 않았다.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보도부문 사람들이 왜 그랬을가 싶었다. 또 전화가 문제였을가? 그런데 뜻밖에도 재미언론인 문명자선생이 련락도 없이 불쑥 찾아 왔다. 평양을 취재하고 서울에 들렸다가 귀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서 들으니 나에게 미리 찾아 가겠다고 전화를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고 하기에 아예 주소만 물어 찾아 내려 왔다고 하였다.

문선생은 올해 예순넷으로 국적은 미국이며 유에스 아시안뉴스 서비스의 대표로 있다. 이번 4월 말 평양방문에서는 김일성주석을 단독으로 만나뵙는 등 활약이 대단한 교포언론인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사람이 소박하여 유명인사특유의 거리감이 느껴 지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못 가고 있는 내 처지를 무척 동정하면서 자신이 보고 온 평양의 모습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고향얘기를 들으며 처음 만난 문선생앞에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역시 로인이라 왠지 마음이 놓여 그랬던 모양이다.

문선생은 언제 만들었는지 소고기장졸임까지 한보따리 가져 와서는 나더러 고향 가는 날까지 밥 많이 먹고 건강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경찰이 와서 문선생이 다녀 간 일을 캐묻더니 6월 18일부터는 아예 기관원들이 날마다 김선생집에 출퇴근을 하며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행사나 집회가 있는것도 아니고 보면 기자들의 출입을 막으려는 심산인것 같다.

며칠후 《KBS》텔레비죤 취재팀들이 찾아 왔는데 요행히도 기관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에 찾아 들어 와 무사통과되였다. 그날 저녁에 취재는 마쳤는데 밝을 때 촬영을 해야 한다기에 아침 일찍 오라고 일러 보냈다. 다음날 새벽 취재팀이 일찍 와서 촬영을 무사히 마쳤는데 그만 나가다가 《출근》하던 기관원들과 마주쳐 버렸다. 취재팀을 본 그들이 달려 들어 필림을 빼앗으려 하는 바람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 졌는데 취재팀이 완강하게 맞서 필림을 빼앗기지 않고 무사히 돌아 간 모양이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음날부터는 아예 24시간 상주체계로 바뀌였다. 기관원들도 고생길이였다. 뙤약볕에 달궈 진 승용차안에서 24시간 먹고 자야 했다. 보다못해 김선생이 월파정의 한 방을 내주었다. 대신 이쪽 집에는 얼씬도 못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들때문에 신경을 썼던지 며칠후 그곳에서 고시공부하던 학생들이 짐을 싸 떠나버렸다. 김선생이 집을 비울 때면 꼭 건너 와 내 점심을 챙겨 주군 하던 그들이 나때문에 공부방을 잃은것이다. 나스스로 생각해도 골치 아픈 령감이 아닐수 없었다.

오리막의 한동지는 뙤약볕에서 축사를 뜯어 옮기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마땅한 곳이 없어 한동안 계속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어렵사리 갈 곳을 정한것이다.

축사를 뜯어 옮길 곳에 새 축사를 짓는 한편 오리들을 한끼라도 굶길수는 없기때문에 쉴새 없이 손을 놀려야 했다. 마침내 철거기한인 6월 30일이 닥쳤다. 그간 축사는 다 옮기고 한동지와 조영삼군이 살던 방 두칸짜리 가건물만 남아 있었다. 점심 먹고 하자며 한동지가 밥상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쳤다. 한동지가 《오늘안에 뜯으면 되지 않느냐, 웬일이냐.》고 항의했으나 철거반원들은 순식간에 가건물을 때려 부시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간 뙤약볕아래서 구슬땀을 쏟으면서 자재 하나라도 쓸만 하게 건사하겠다고 조심조심 축사철거작업을 해온 한동지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한동지는 이곳으로 옮길 때 자신이 거처할 방을 솜씨를 발휘해 직접 지었다. 야무지게 지어 진 가건물이였으나 방에 도배 같은것은 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던지 아니면 도배조차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던지 모르겠다. 그런데 91년 여름 병원에서 나를 간호하던 지현이가 진영에 왔다가 신문지가 발린 한선생의 방을 보고는 부산대 남학생들과 함께 예쁜 벽지를 사들고 와서 방을 단장해 주었다. 나는 그 방에 올라 갈 때마다 젊은 그들이 도배지를 붙이며 터뜨리는 쾌활한 웃음소리를 듣군 하였다. 무자비한 철거반원들은 방을 때려 부시며 그 건강한 웃음소리까지 빼앗아 가 버렸다. 란장판우에 멍하니 서 있는 한동지를 볼낯이 없었다. 내 주변에서 나를 돕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떼여 내는구나 싶었다. 이제 다음차례는 누구인가.

 

 

기다림의 나날

 

기관원들때문에 사람구경하기 힘든 날들이 계속되였다. 《한겨레신문》 기자도 대문앞에서 쫓겨 갔고 일본서 진영까지 온 《아사히신붕》의 가키기자는 그래도 멀리서 왔다고 나와 인사는 나누게 하고 내쫓았다.

기자들뿐만아니라 다른 방문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방문이 허용된것은 《빨갱이는 김해를 떠나라.》고 웨치는 《자유총련맹》시위대들이였다.

7월 7일 인적이 끊겨 적막한 집안에 들어 앉아 《총리》가 발표한 대북서신의 내용을 방송으로 들었다. 인도주의니, 상호주의니 수식어는 많았지만 골자가 《북에서 그간 랍치해 간 수백명의 남<한>사람들을 돌려 보내면 리인모도 보내고 다른 장기수들도 북으로 보낼 용의가 있다.》는 얘기였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대북서신에 대한 여러가지 해설이 나와 있었다. 그동안 나의 송환문제를 놓고 《정부》내 강, 온파간에 의견대립이 있었는데 결국 강경파인 《법무부》, 《안기부》의 주장이 관철되였다고 하였다. 즉 남측은 북측이 결코 들어 줄수 없는 조건을 내세워 나의 송환을 사실상 거부하였다는것이다.

그간 남측은 수백명의 어부, 항공승무원들이 북《한》에 의해 랍북되여 지금까지도 억류되여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에 대해 북측은 그들이 자진입북하였다는 주장에서 한치도 물러 선적이 없다. 이런 정황인데 그들을 돌려 보내라니 남측이 실현가능성 없는 요구를 골라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나는 신문을 보며 가슴을 쳤다. 고향길이 멀어 진게 안타까와서만이 아니였다. 나는 《총리》의 대북서신에서 랭전의 망령이 되살아 나고 있음을 보았던것이다. 올해 초 력사적인 북남합의가 이루어 진후 멀리 사라진줄 알았던 랭전의 망령이 나의 송환문제를 놓고 《정부》안의 랭전론자들이 어떤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전해 들은바가 있었다.

《그런 빨갱이범법자를 도와 줄 필요가 뭐가 있나. 더구나 그를 송환하는것은 북<한>에 리로운 일이다.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켜 늙어 죽게 해야 한다.》

내가 남조선사회에서 《범법자》가 된것은 1952년의 일이다. 남에서는 종군기자가 신문사소속의 민간인신분이지만 북의 종군기자는 인민군 문화부소속의 정규인민군이다. 하지만 나는 52년 포로가 되였을 때 본대와 6개월이상 떨어 져 유격활동을 했다고 해서 전쟁포로대우를 못 받고 범법자로 규정돼 감옥에 갇혔다. 이는 분명히 제네바협정을 무시한 처사였다. 나뿐만아니라 유격활동을 했던 인민군출신들은 거의 포로송환에서 제외되고 국방경비법상 《리적행위》의 적용을 받았다.

91년부터 북측이 전쟁포로인 리인모를 제네바협정에 따라 송환하라고 요구해 나서자 남측은 《그는 전쟁포로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남측이 내가 전쟁포로라는것을 인정하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나를 송환해야 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 점을 결코 인정할수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할 때는 일정한 론리적근거가 있어야 할텐데 나는 그 근거가 대체 무엇일가 몹시 궁금하였다.

한번은 《말》지의 신문기자가 국제법전문가인 《한국》외국어대의 리장희교수에게 나의 신분문제에 대한 해석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 대답은 《리인모씨는 전쟁포로다.》라는것이였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왜 전쟁포로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기관원들의 차단으로 외부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부 신문에는 52년 당시 나의 피의자심문조서가 발견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나는 인민군소위로 경남도당 군사지도원이였는데 후퇴시 지리산에 들어 가 유격활동을 하면서 량민을 학살하고 방화, 략탈행위를 저질렀다고 했다. 종군기자라는 직함은 내가 재판에서 형을 가볍게 받기 위해 꾸며댄것이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단 한가지만 되묻고 싶었다.

《앞줄 사형, 뒤줄 무기》식으로 중형이 무차별적으로 선고되는게 보통이던 전쟁중의 군사재판에서 피의자심문조서대로라면 나 같은 범법자가 어떻게 징역 7년이란 최하형량을 선고 받을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한 신문은 또 다른 설(?)을 실었다. 《리인모는 종군기자로 위장한 인민군 고위장교》라는것이다.

나는 광복후 새 조국건설과정에서 선전사업에 종사하였고 그 경험을 살려 전선에서는 종군기자일을 보게 되였다. 지리산에서도 신문을 만들었고 출옥후에도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34년 감옥생활동안에도 언젠가는 기록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억을 거듭거듭 되살려 왔다. 그러고 보면 평생을 통해 그런대로 한길을 걸어 온셈이다. 그런데 별 대단한 벼슬이랄것도 없는 나의 종군기자리력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은것은 대체 무슨 리유인지? 비전투원인 종군기자가 아니라 전투원인 인민군소위출신 유격대원이라야 동정할만 한 가치가 없는 보다 확실한 범법자가 되기때문인가?

그런데 《리인모를 고향으로 보내는 일은 북<한>을 리롭게 하므로 안된다.》라는 식의 론리는 나를 더한층 슬프게 하였다. 전해 들은대로라면 다음과 같은 론리다.

《온갖 시련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회주의신념을 견지해 온 리인모가 북으로 송환되면 북<한>정권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것이고 이것은 북<한>주민의 사상적통합에 큰 역할을 할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리익이 되는 일이니 남<한>에는 손해다.》

물론 평생을 《반공》에 묻혀 살아 온 사람들로서는 나를 고향에 보내는 행위는 자신의 일생 견지해 온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지 않는한 결코 용납할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총을 들고 싸웠던 형제들이 반세기를 끌어 온 랭전적대립을 끝내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로 갈것을 합의한 오늘이 아닌가. 7천만겨레모두에게 이 시대는 과연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내가 그 어두운 나날 안해와 아이들이 있는 평양에 가고 싶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것이다. 차라리 안해의 소식을 몰랐을 때보다 뻔히 알면서 가지 못하고 있는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나에겐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달려 갔으면 하는 바람보다 더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민족의 진정한 화해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이였다. 그 소원을 간직한채 나는 김선생댁의 남향방에 한개 바위돌처럼 앉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손이 떨려 더 이상 글도 쓰지 못할것 같은 상태에 있었다. 91년에 받은 뇌수술의 여파인지 나의 머리는 명료한 사고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기관원들이 지켜 서 있지 않더라도 위생실출입이나 겨우 하는 다리로 더 이상 어디를 다니겠는가. 한마디로 내가 소원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 그때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도 발도 머리도 쓸모 없게 된 나이기에 나는 정성어린 기다림을 시작할수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던가.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할수 없는 한 로인이 마지막기력을 쏟아 붓는 이 간절한 기다림이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한줌 온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나는 기다림의 나날을 계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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