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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마고원
내 고향 풍산땅
나는 1917년 8월 24일 안수면 미전리 적수부락(현재 김형권군 미감리)에서 무녀독남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여났다. 풍산은 개마고원중에서도 가장 높은 화전지대로서 북청, 함흥 등지에서 살수 없게 된 사람들이 들어 와 화전을 일구어 귀밀과 감자농사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고장이였다. 풍산의 력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우리 집안의 래력을 대충 더듬어 보련다. 그것은 우리 집안이 여기 화전지대에까지 와 살게 된 과정이 풍산의 과거와 비슷한데가 없지 않기때문이다. 원래 우리의 본촌은 함경남도 북청군 하거서면(현재 덕성군 임자동리)에 있는 여어골이라는 농촌이다. 이 마을은 타성이라고는 한사람도 없고 온통 리씨들만 사는 문중부락이였다. 젊은 시절 진사시험에서 합격했던 나의 증조부는 평생 그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북청읍어름에 첩살림까지 차려 놓고 술로 집의 재산을 탕진하다못해 말년에는 대대로 물려 받은 얼마간의 토지마저 팔아 없앴다고 한다. 결국 증조할아버지가 돌아 갈무렵에는 여어골에 전답 한뽐 남은게 없어 살아 갈길이 막막하게 된 나의 할아버지는 아들 넷을 데리고 여기 화전지대로 옮겨 앉았던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량반놀음으로 집안이 몰락한 다음에도 나의 할아버지는 진사집안이라는 자랑을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소문은 30리 떨어진 곳에 살던, 뒤날 나의 외할머니가 된분의 귀에까지 들어 갔다.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기르며 물려 받은 전답으로 괜찮게 살아 가던 외할머니는 진사집안이라는데 혹해서 외동딸을 우리 집에 시집 보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딸을 진사댁 며느리로 보냈다고 이웃에 우쭐댄것도 잠시, 아버지는 혼인한지 1년도 못되여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병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려서 듣기로는 처음에 입술에, 배에 무엇인가 돋아 나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의사에게 보일 엄두도 내지 못한채 그냥 앓아 누웠는데 2차감염이 되였던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여 숨을 거두었다는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7개월뒤, 열여덟살에 청상과부된 녀인의 설음 많은 인생에 덧시름을 얹으며 이 세상에 태여났다. 유복자라고 하여 인모라는 이름으로보다 《유복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웠다. 《정바위》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웠는데 그 연원은 나도 알수 없다. 내 나이 벌써 칠순을 넘겨 평양에 와보니 손자손녀들이 대학이요, 중학문을 넘나드는데 이르렀건만 어머니생각은 더욱 새로와 진다. 이 아들 하나를 위해 한평생을 고스란히 바쳐 왔으나 아들에 대한 기다림속에 한평생을 보내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너무도 기쁨 없고 부담과 설음만으로 가득찬 고통스런 시간의 련속이였다. 자신도 홀몸으로 늙어 오면서 유교도덕에 물 젖어 있던 외할머니는 불행해 진 딸의 신세를 고쳐 주려고 하기는커녕 어머니의 행동을 늘 지켜 보면서 잔소리로 어머니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장에 가느라고 옷을 갈아 입자 외할머니는 《이년, 과부가 장보러 가는데 새옷을 입고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입던 옷을 도로 입고 가거라!》 하고 마구 야단을 쳤다. 그때 얼굴을 붉히며 《아이참.》 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다시 방에 들어 가 헌옷을 입고 나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아마 어린 내 마음에도 그러는 어머니의 정상이 못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에 새겨 진 모양이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그런 동정을 몰랐다. 도리여 어머니에게 《저녁이면 꼭꼭 칼을 갈아 베개밑에 넣고 자거라.》 하고 거의 매일처럼 이르군 했는데 당시에는 어려서 그 리유를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과부보쌈에 대한 경계였던듯 하다. 그런 형편이였는데 내가 태여난 몇해후 큰어머니마저 앓다가 돌아 갔다. 우리 어머니는 궁벽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여 가사를 도맡아 보는 한편 셋이나 되는 나의 사촌형제들까지 맡아 기르는 고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없는 살림에 조카 셋과 아들을 똑같이 키우느라 어머니는 궂은일, 진일 가리지 않았고 마음고생 또한 그만 못지 않았다. 복숭아꽃 피는 봄이면 나물을 캐다가 살짝 데쳐 밥상에 얹어 주며 고기보다 맛 있으니 어서들 먹으라고 하시던 어머니, 하지만 개구쟁이아들은 그 정성도 모르고 짜증만 냈으니 그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인들 오죽 아팠겠는가. 농사철이면 어머니는 어릴적부터 장난질이 심한 나를 화전머리에 앉히워 놓고 해종일 밭일을 했다. 품이 많이 들면서도 소출이 극히 적은것이 허드레화전농사이다. 등판에 불을 지르고 힘이 자라는껏 나무등걸과 잡관목뿌리들을 뽑아 던진 뒤 심어 가느라면 처음 한두해는 소출이 괜찮다가도 벌써 삼년이 지나서부터는 숨을 죽인 땅처럼 종자값도 내지 못하는것이 화전이다. 그런 숨 죽은 화전을 어머니는 눈물과 땀으로 적시며 가꾸었다. 새 화전을 일구기에는 힘이 없었고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산림법》이 무서웠다. 어머니는 밭일에 집안일, 하루종일 고되게 일하고도 밤이면 삼을 삼아 피나게 베를 짰다. 우리들을 《에미 없는 자식》, 《애비 없는 과부자식》이라는 뒤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밤 새워 베를 짜다가는 베틀우에 그 흩어 진 머리를 그대로 고이고 잠드시군 했다. 그즈음에 어머니는 나를 외삼촌에게 보낼 생각을 한 모양이였다. 어머니의 이 결심이 나는 육체적인 고달픔때문만이 아니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조카 셋과 아들을 똑같이 기르느라 다른 사람 눈치 보는것이 더 괴로왔을것이다. 게다가 외삼촌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1920년무렵이였다. 성실한 안해였던 어머니는 몇해를 밤 새워 가며 피나게 베를 짜서 모은 돈으로 적수부락린근에 파묻었던 남편의 유해를 본촌인 북청군 하거서면 선산으로 옮기는 일을 벌려 놓았다. 적수에서 북청까지는 달구지로 밤낮없이 가도 이틀나마 걸리는 먼길이였다. 이때 내 나이 네살쯤 되였을가?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는 나를 당시 파발리 소학교 교원으로 있던 풍산군 안산면 파발리 외삼촌(김응인)의 집에 맡기였다.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가 떠나던 날 밤, 외삼촌과 외숙모는 잠자리에 들었건만 어린 조카놈은 마냥 앉아서 잠 잘 생각을 안한다. 외삼촌이 보기 민망했던지 어서 누우라고 잠자리로 끄당기나 아이는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왜 그러느냐, 응 바우야?》 외삼촌이 걱정스레 묻자 아이는 누웠다가 잠이 들면 큰일이라며 《잠만 들면 눈이 딱 들어 붙어 버리는데 붙은 눈을 떼줄 엄마가 없으니 잤다가 눈을 떼지 못하면 어쩌나.》 하며 우는 소리다. 그때 나는 돌림눈병에 걸려 자고 일어 나기만 하면 눈에 눈곱이 끼여 두눈이 달라붙군 하였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더운물에 적신 솜으로 눈곱을 살살 녹여 떼여 주군 하였다. 물론 어린것의 걱정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와의 이번 작별이 그저 범상한 작별이 아니라고 느껴 졌던것 같다. 어린것의 산란한 심사를 환히 꿰뚫고 있었지만 외삼촌은 그제서야 알았다는듯 《야 이놈아, 네 엄마의 눈 떼는 재간은 내가 가르쳐 줬다. 네 엄마가 없어도 붙은 눈은 내가 더 잘 떼니 마음 놓고 자라.》고 달랜다. 아이는 긴가민가 머리를 갸웃갸웃하더니 《거짓말 아니지?》하며 솔깃해 하는 눈치다. 《이놈아,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외삼촌이 다시 타일러서야 아이는 《그럼 나 잔다.》 하며 눕더니 곤히 잔다. 눈 떼는 재간도 재간이지만 외삼촌에게서 느낀 후더운 육친의 정이 어린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을것이다. 내가 잠든후에야 외삼촌내외는 홀몸으로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하나뿐인 제 아이조차 기르기 쉽지 않은 녀동생의 가련한 처지를 한탄하며 눈물을 머금다가 조카를 자기들이 맡아 제 자식처럼 기르자는 의논을 했다고 한다. 아마 어머니도 역시 그날 밤 아버지의 유해를 실은 달구지를 끌고 북청까지 가면서 눈물을 흘렸을것이다. 나를 외가집에 보낸후에도 어머니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때때로 어머니는 낳은 자식이 보고 싶어 시집에서 본가까지 60∼70리 실히 되는 길을 찾아 오시군 하였다. 막상 와서도 슬하에 자녀가 없어 나를 친아들처럼 귀히 돌보는 외숙모앞에서 차마 제 아들이라고 마음대로 안아 줄수가 없어 나를 못 본척 하며 괴롭게 얼굴을 돌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어머님이 열여덟에 청상이 되여 일생을 혼자 산 리유가 단지 봉건유교관념이 심했던 외할머니의 끊임 없는 지청구때문만이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말이 적은 어머니여서 평시에 이에 대한 의사표시를 한번도 한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큰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시가의 며느리된 도리도 그렇고 더우기 유복자인 나를 재가하지 않고 제 힘으로 키우리라 결심을 굳게 했던것으로 믿어 진다. 뜻이 이러했던 어머니가 슬하에서 자식을 떼여 오빠한테 맡기기까지는 고충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것이다. 외삼촌내외는 나를 친자식이라도 할수 없을만큼 잘 돌봐 주었다. 외가집은 원래 물려 받은 재산이 좀 있는데다가 외숙모가 시집 올 때 가지고 들어 온 재산까지 해서 풍산골치고는 유족한 집안이라 할수 있었다. 그 덕에 외삼촌은 서울에 올라 가 공부를 좀 하다가 그 어떤 좌익사건에 관계했던탓으로 풍산에 내려 와 교편을 잡은터였다. 외삼촌은 성격이 온화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였다. 열혈의 젊은 시절엔 그도 독립군을 따라 가겠다고 발 벗고 나섰던적이 있으나 청상과부인 어머니를 홀로 두고 발길이 떨어 지지 않아 그만 눌러 앉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외삼촌자신이 평생 후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는 나를 자신의 온화하고 고루한 성격에 반대되게 키우려고 애 썼다. 퍽 후에 내가 혁명을 한답시고 정신없이 나다닐 때에도 전혀 탓함이 없이 뒤에서 소문없이 온갖 성의를 다해 도와 주었다. 자기가 못했던 일을 사랑하는 조카를 통해 실현해 보려는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면야 어린시절부터 나를 배심 있게 키워 주고 애국심을 심어 주고 여러가지 사회서적과 신문들도 구해다 보게 하였겠는가. 나를 이십여년동안 키워 준 외삼촌 김응인은 나에게 아버지에 가까운 육친으로뿐아니라 인생의 첫 시절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해주고 꿋꿋이 살아 나가게 떠밀어 준 인생의 스승으로 내 가슴속에 고이 간직되여 있다.
어린 가슴에 항일의지 불 지른 백두산의 무장부대
외삼촌댁에서 떠받들리며 자라던 나는 학령이 되여 안산면의 파발소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이 소학교에는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온 선생이 있었는데 함경남도에서는 천도교를 믿는 사람이 제일 많은 안변(지금은 강원도)출신이였다. 그 역시 천도교신자였는데 학교에 부임한후 우리들에게 천도교교리를 재미 있게 가르쳐 주었고 그 영향으로 우리는 그 선생을 잘 따랐다. 1926년경부터 천도교신파의 최린은 조선의 독립을 포기하는 대가로 조선의회의 설립을 허용한다는 일제의 《약속》을 받아 내고 《자치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30년대에 들어 서면서 천도교청년당을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혁명적농민운동을 반대하고 청년운동이나 계몽운동 등 정치성을 배제한 운동을 경쟁적으로 벌리고 있었다. 당시 열살을 갓 지난 내가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었다. 오로지 그 선생이 가르치는대로 우리 고향 농촌이 이렇게 못 사는것은 조선사람이 무지하고 라태하기때문이며 이런 민족성을 고쳐야 잘 살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을따름이였다. 이무렵 정운길이라는 청년이 고향에 돌아 와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북청농업학교에 다니다 그 학교에서 있은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지목되여 퇴학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저녁이면 동네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반일애국사상을 가르치군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천도교신자선생은 《동맹휴학으로 퇴학 당한 자는 일본천황에게 불순한 나쁜 사람》이라고 악평하며 우리들을 정운길의 곁에 못가게 하였다. 철 없는 우리들은 선생의 말에 따라 그후론 정운길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의 그 같은 언동이 일제를 옹호하고 애국자들을 비난하는 반역적인 행위라는것을 자각케 하는 뜻밖의 사건이 벌어 졌다. 1930년 8월 어느 날, 점심때인데 외숙모가 밥이 없다면서 오늘 점심은 국수를 사다먹자고 하며 나에게 양푼하고 구멍 뚫린 5전짜리 엽전을 한잎 내줬다. 그무렵 풍산에서는 귀리국수 한그릇에 1전이였으니 5전어치면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나 이렇게 네식구가 도저히 다 먹지 못할 정도의 많은 량이였다. 당시 파발리는 허천강 지류인 파발천을 끼고 북청과 풍산을 련결하는 도로상에 놓인 반농반상업적인 성격을 띤 비교적 번화한 고장이였다. 북청지대의 과일과 쌀, 물고기 같은것들이 후치령을 넘어 여기 파발리를 거쳐 풍산방향으로 들어 갔고 풍산이북지대에서 나는 감자, 녹말, 호프 같은것들이 여기를 거쳐 북청으로 나갔다. 그런 관계로 파발리는 화전농가들과 함께 가게방, 려인숙 같은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너른 시장구역이 형성되여 있었다. 왜놈들은 이 번화한 곳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장마당 가까이에 주재소를 지어 놓고 마쯔야마라는 가장 악질적인 왜놈순사부장을 골라 여기에 파견하였다. 그놈이 우리 조선사람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못 살게 굴었던지 이름대신 《오빠시》(따벌)라는 별명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놈이 얼마나 밉살스러웠던지 삼복더위때 장마당을 돌아 치던 놈이 파발천가에 나와 달아 오른 몸을 식히느라 흑흑거리며 찬물을 끼얹군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또래의 담찬 사내애들이 멀찍이서 눈 먼 돌팔매질로 저주를 표시하군 하였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양푼과 돈을 쥐고 막 대문을 나서는데 열서너집 떨어 진 주재소쪽에서 《꽝!》 하고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워낙 외진 두메산골이라 1년을 가도 총소리라고는 들을수 없는 곳이였으므로 불시에 울린 총소리는 어린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재소쪽을 내려다보니(주재소는 우리 집에서 열서너집 떨어 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마당의 사람들이 주재소쪽으로 몰려 들고 있고 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었다. 한편 파발천 뒤산으로는 몇몇이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놈들인즉 평상시 순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마을사람들이 한 말을 일러 바치군 해 손가락질 당하던 놈팽이들로서 제 발이 저렸던 모양 이다. 어린 소견에도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푼이고 뭐고 집안에 던져 버리고는 두주먹을 부르쥐고 주재소쪽으로 쏜살같이 달려 갔다. 벌써 그앞에는 사람들이 30명가량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가난에 쪼들리고 왜놈들에게 갖은 멸시와 고통을 받아 온 사람들이였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열기에 떠서 술렁거렸다. 총을 쏜 사람들이 자기들을 옹호해 주는 《자기편》이라고 믿고 있는 기색들이였다.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틈을 빠져 앞으로 나간 나는 주재소안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때 주재소안에 있던 얼굴이 준수하게 생기고 퍽 상냥해 보이는분이 나를 보고 들어 오라고 손짓하는것이였다. 그러잖아도 호기심에 가득차 있던 나는 그분의 손짓에 끌려 얼른 안으로 들어 갔다. 들어 가보니 뜻밖에도 정운길이 와 있었는데 그분과 무슨 이야기인지 하고 있었다. 방안을 둘러 보니 굉장한 장면이 펼쳐 졌다. 순사부장 《오빠시》놈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의 온몸은 부르르 떨렸다. 그놈의 주검을 보니 겁이 나면서도 시원하고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철 없던 내 심정이 이러했으니 《오빠시》놈의 시달림을 받을대로 받아 온 어른들의 마음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랴. 나를 들어 오라고 한분은 나에게 무섭지 않은가고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다고 대답하자 그분은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저런 놈들을 다 없애 버려야 조선사람들이 잘 살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밖으로 나가시였다. 방안을 다시 둘러 보다가 나는 그분들이 쏜 탄피 두개가 바닥에 떨어 져 있는것을 발견하고 주어 들었다. 밖에 나오니 사람들이 그분들을 둘러 싸고 있었다. 모두 세분이였는데 나를 불렀던분이 책임자인것 같았다. 머리들은 뒤로 넘겨 자르고(당시에는 그런 머리를 《주의자머리》라고들 했다.) 짚신에 베잠뱅이를 걸치였는데 모두 손에 싸창을 쥐고 있었다. 그분들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품위 있고 름름해 보이는지 몰랐다. 그분들의 앞에서는 조선인순사가 꿇어 앉아 연신 엎드려 절하며 살려 달라고 두손을 싹싹 비비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늘쌍 거들먹거리며 큰소리만 쳐대던 그 위세는 다 어데로 갔는지… 순사놈을 내려다 보던 세분가운데서 내가 만났던분이 입을 열었다. 《조선사람이라면서 제 나라를 침략한 일제의 앞잡이질하는 당신 같은 사람은 당장 쏘아 죽이고 싶소. 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 조금이라도 량심이 남아 있기를 믿어 살려 주니 그리 아오. 당장 순사질을 그만 두고 집에 돌아 가 농사 지으며 조선사람답게 사시오.》 《예예, 고맙습니다. 당장 그만 두고 집에 돌아 가 깨끗이 살겠습니다.》 하고 순사놈은 그분앞에 무릎걸음을 해가며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그때였다. 주재소옆에 붙어 있던 《오빠시》의 집에서 그의 녀편네가 머리칼과 왜옷자락을 펄럭거리면서 게다도 신지 못한채 맨발로 뒤둔덕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제일먼저 본 한사람이 그쪽을 향해 권총을 들었다. 《잠간.》 하고 책임자인듯 한분이 동료의 팔을 잡아 내리웠다. 《쏘지 마시오. 그까짓 녀자를 쏘아 무엇하겠소.》 솔직한 심정으로 왜년의 뒤통수에 총구가 겨눠 졌을 때 나는 긴장해서 발사의 순간을 기다렸다. 《오빠시》에 대한 원한이 그처럼 사무쳤던것이다. 허나 책임자인듯 한분이 그것을 저지시키자 멋 모르는 나의 작은 가슴속에서도 저분들이야말로 큰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눈길은 자연 그분한테로 쏠리였다. 그분은 고개를 들어 친근한 눈길로 군중들을 둘러 보더니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여러분,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우리는 왜놈들을 몰아 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백두산의 혁명군부대입니다. 우리가 못 사는것도 불행을 겪는것도 모두 왜놈들때문입니다. 왜놈들을 쳐부시지 않고는 우리가 잘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총칼든 왜놈들과 싸우며 피 흘리고 있는 단천농민들의 애국투쟁을 돕기 위해 가던 도중 여기 인민들의 피 맺힌 원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순사부장놈을 처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계속 여러분들을 지켜 드릴수가 없으니 여러분들은 그만 돌아들 가십시오.》 연설을 마친후 그들은 주재소에서 몇집건너에 있는 과자점방에 가서 집주인을 찾았다. 주인이 나오자 그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정중하게 청하였다. 《예정보다 려비가 더 필요하게 되여 찾아 왔으니 려비를 좀 보태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인은 돈궤를 열고 그속에 손을 넣어 1전짜리 동전 두잎을 《옛소.》 하고 내놓는게 아닌가. 그들은 자기 손에 놓인 동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그것을 도로 과자매대우에 올려 놓으며 《가사에 보태 쓰십시오.》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 섰다. 그 순간 나의 어린 소견에도 그 주인이 보기 싫어 졌다. 왜놈들을 물리치고 조국을 찾기 위해 피 흘려 싸우는 애국자들을 저렇게 박대하다니!… 그 과자점으로 말하면 풍산에서 알토란 같은 부자로 알려 진 집이 아닌가. 과자점주인의 행동을 본후 나는 《부자놈들이란 돈에만 눈이 어두워 민족을 위한 애국적인 생각은 전혀 없고 자기 리속만 생각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였다. 나 같으면 총으로 주인을 콱 혼뜨검 내주고 가겠는데 어째서 아무 말없이 그냥들 갈가? 그런 자들이 미워 지던 그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주재소에서 주어 온 두개의 탄피를 손에 꼭 쥐고 그분들처럼 싸창을 들고 못되게 구는 왜놈들을 쏘아 눕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자기를 오래동안 그려 보았다. 그분들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가슴에 자리 잡았다. 이것은 나의 가슴에 심어 진 첫 항일의지였다. 아득한 그 시절 내 고향 개마고원을 누볐던 항일혁명투사들, 궁벽한 산골, 개마고원에서 태여나 자란 열세살소년의 가슴에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을 지폈던 투사들의 름름한 자태는 이제는 아슴푸레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분들이 아니였으면 나는 어떻게 되였을가. 그분들이 울린 파발리의 총소리는 가난과 무지속에 한생을 살거나 독실한 천도교신자로 되였을지도 몰랐던 나를 항일의 전선에 나서게 해준 운명의 총소리였다.
잊을수 없는 혁명선배
그 일이 있은후 나와 몇몇 동무들은 천도교신자선생때문에 피해 왔던 정운길선배를 찾아 갔다. 무장대를 책임졌던분의 연설은 단박에 천도교신자선생이 옳지 않다는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었다. 그분은 조선사람이 못 사는것은 왜놈들때문이라고 했는데 천도교신자선생은 조선사람들이 라태하고 게을러서 못 산다고 했으니 얼마나 엉터리인가. 우리 어머니만 해도 너무 부지런해서 일밖에는 모르지만 얼마나 못 사는가. 우리가 찾아 가니 정선배는 무척 반가와 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제일 알고 싶어 한것은 《오빠시》를 처단한 그분들에 대한것이였다. 정운길선배는 우리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분들은 백두산일대에서 활동하는 김일성무장부대의 김형권부대야.》 지금에 와서 그 말을 되새겨 보느라니 여러가지 추측이 떠오른다. 정운길동지가 어떻게 그들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알며 이름까지 알수 있었을가. 소문에 의하면 그때 무장소부대를 안내해 온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한명 있었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이 정운길동지가 아니였을가 싶어 진다. 더우기 정운길동지는 그분들과 함께 주재소안에 있지 않았던가. 호기심으로 들어 갔을수도 있으나 어떻든 정선배는 왜놈들과 싸우기를 결심하고 나선 사람이였고 나의 첫 걸음을 떼여 준 지도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어떤 추측이 떠올라도 사실로 믿고 싶어 진다. 정운길동지는 무장부대가 간다고 했던 단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왜놈앞잡이 산림간수가 무고한 농민을 가둬 놓고 개돼지처럼 두들겨 패니까 격분한 농민들이 몰려 가 군청과 경찰서를 까부셨는데 왜놈들이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을 죽였대. 지금 단천에서는 농민조합이 조직되고 있어. 김형권부대는 괭이로 왜놈의 총칼과 맞서고 있는 단천농민들을 지원하러 가던 길이였지.》 정선배는 작년(1929년)에 있었던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일본인 악질감독에게 동료가 두들겨 맞자 감독의 파면과 로동자들의 생활보장을 요구하면서 넉달동안이나 죽을 먹으면서 파업투쟁을 했다는 원산로동자들, 조선녀학생을 희롱하는 왜놈학생들과 용감히 싸운 광주고보학생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은 조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죽지 않고 싸우고 있어. 산에서는 무장부대가, 공장에서는 망치를 든 직공들이,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괭이를 들고 왜놈과 싸우고 있어. 학교에서는 또 학생들이 시위운동과 동맹휴학으로 맞서고 있잖아. 이렇게 계속 싸우면 우리 민족은 꼭 독립할수 있어.》 6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까지도 그 이야기들은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다. 난생처음으로 들은 파발리총소리의 여운이 귀에 쟁쟁한 때에 들은 이야기여서였는지… 나는 그에게 주재소에서 탄피 두개를 주어 온 사실도 이야기했다. 정운길동지는 무척 기뻐 하며 그것을 잘 간직해 두라고 당부하는것이였다. 나는 그날 밤 집에 돌아 와 탄피를 헝겊에 싸서 외삼촌내외도 모르게 농짝의 맨밑에 감추어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서도 정선배의 목소리가 귀가에 쟁쟁해 잠 못들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조선민족은 죽지 않았다. 살아서 싸우고 있다.…》 싸창을 들고 서 있던 백두산무장부대의 름름한 모습도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 천도교신자선생의 말은 거짓말이야. 조선민족은 게으르고 우매한게 아니라 살아서 왜놈들과 싸우고 있어!》 그날 밤 말을 타고 백두산무장대가 되여 왜놈을 뒤쫓는 꿈을 밤새도록 꾸었던듯 싶다. 그 꿈은 나의 평생의 《꿈》으로 되였다. 그후에도 나와 동무들은 학교만 파하면 거의 매일 정운길선배를 찾아 갔다. 그는 우리에게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맑스니, 엥겔스니, 레닌이니, 쓰딸린이니 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주입시켰다. 열세살 먹은 소학생이 그 이야기를 잘 알아 들을리 만무했으나 몇번이고 되풀이해 듣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그 말이 옳구나.》 하고 느끼게 되였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잘 몰라도 사회주의자, 농민조합, 로동조합, 무장부대들이 왜놈을 몰아 내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하므로 나도 왜놈과 싸우려면 사회주의자가 되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하여간 정선배에게 다니며 배우는 동안 나는 무조건 그를 믿었고 어린 마음에도 그가 죽으라면 죽을수도 있다고 생각할만큼 그를 따르게 되였다. 이것이 단순히 한 인간에 대한 존경때문이였을가. 인적 드문 개마고원의 광야에 태여나 자라난 티없이 맑은 열세살 어린 가슴에 새겨 진 약동하는 반일사상, 격동의 총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여 난 어린 심장… 지금 생각해 보면 드넓은 개마의 거치른 땅을 주름 잡으며 왜놈과 싸우려는 나래를 키워 준 인간과 사상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였던것 같다. 하기에 나는 한생이 저물어 가는 오늘도 그를 잊지 못하며 고마움으로 추억한다.… 그 시절에 있었던 이런 일도 기억에 떠오른다. 우리 마을의 동구밖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것은 왜놈순사부장 《오빠시》가 죽은후 마을의 친일앞잡이들이 그놈을 추모한다고 세운것이였다. 그 비석 바로 옆에 빈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오빠시귀신》이 나온다는 헛소문이 돌아 나 같은 아이들은 밤이면 그 근방에는 얼씬도 못하였다. 그날 저녁도 우리는 정운길선배집에 모였는데 정선배는 처음에는 《귀신이라는것은 없다.》는 유물론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며시 요즈음 《오빠시비돌》옆 빈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엉터리 없는 소문이 돈다는 얘기를 늘어 놨다. 우리들이 무서움증에 오싹오싹하는데 정선배는 갑자기 빨간 기발 한장을 우리앞에 내놓았다. 《인제부터 귀신이 있나없나 확인을 해보자. 이 기발을 한 아이가 그 집 부엌앞에 갖다 놓은 다음 다른 아이가 가서 그 기발을 가져 온다.》 정선배는 원망스럽게도 나더러 제일먼저 가라는것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못 가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할수없이 기발을 들고 쭈뼛쭈뼛 빈집까지 가서 달달 떨며 부엌문을 들어 서려는데 그 집 안방에서 갑자기 《탁탁》 하는 소리가 나는게 아닌가. 그 순간 전신이 오싹해 지고 겁이 덜컥 나 부엌이고 어디고간에 가리지 않고 기발을 아무데고 던지고는 정신없이 집을 뛰쳐 나와 겨우 돌아 왔다. 내심으로는 기발을 아무데나 던진것이 걱정되였으나 차마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다음차례인 동무 하나가 얼굴이 새파래져 가지고 안절부절 못하며 일어 섰다. 그 아이가 출발한지 얼마나 지났을가. 선배들이 그 애를 떠메다싶이 하고 들어 오는게 아닌가. 나는 《내가 약속을 안 지키고 기발을 아무데나 던졌기때문에 저 애가 어둠속에서 기발을 찾다가 저렇게 되였구나.》 하는 자책감에 도저히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려니 정선배가 말했다. 《너는 부엌안에 들어 가지도 않고 방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기발을 아무데나 던지고 도망쳤고 저 애는 들어 가지도 못하고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그냥 기절한것을 업어 왔다.》 아까 정선배와 다른 선배들은 우리에게 볼일이 있다며 나가더니 우리보다 먼저 그 집에 가서 숨어 있다가 우리가 갔을 때 안방에서 나무로 방바닥을 치면서 귀신인척 하였던것이다. 왜 우리를 그처럼 놀래우며 무서움과 싸우게 했던가. 지꿎은 장난으로 생각했던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를 투쟁의 길로 이끌어 가는데서 하나의 예비적인 훈련과도 같은것이 아니였을가 싶다. 이 세상 혁명가들이 무신론자라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의 힘을 믿게 되려면 우선 이 세상에 그 어떤 신비한것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것이 아닐가. 사실 그날 밤과 비슷한 밤을 여러차례 거듭 이겨 냄에 따라 우리는 귀신이란 없다는것을 믿게 되였으며 어떤 《도깨비불》도 무서워 하지 않게 되여 스스로 《유물론자》로 자처하며 뽐내는데 이르렀다. 담도 어지간히 커졌다. 나와 내또래 소년들은 자주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도망치기도 하고 순사들이 앞잡이들과 술을 마신다는 소문만 들으면 달려 가 돌멩이를 던져 술판을 깨여 버리기도 하였다. 하루는 저녁에 집에 들어 가니 외숙모가 근심어린 얼굴로 캐물었다. 《네가 밤이면 돌을 던져 주재소유리문을 다 깨뜨리고 다닌다는데 사실이냐?》 내가 그저 웃으며 말을 안하니 외숙모는 안색이 변하며 꾸중을 하셨다. 《이놈, 사실이구나. 네가 어쩌자고 그러고 다닌단 말이냐?》 언성이 높아 지니 외삼촌이 내다보셨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외삼촌은 오히려 외숙모를 나무라는게 아닌가. 《당신은 그깐 왜놈앞잡이 과자점마누라 말을 듣고 애를 나무란단 말이요? 나 같으면 그놈의 과자점유리창도 부셔 버리겠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너 요새 정운길의 곁에 놀러 가는 모양인데 더 자주 다니며 놀아라. 배울게 많은 사람이야.》 그 말씀을 들으니 《외삼촌은 정말 좋은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다른 애들 부모는 정선배에게 가지 말라고, 막 혼낸다고 하는데 외삼촌은 달랐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짓을 말렸을 성격이 온화하고 선비 같은 외삼촌이 오히려 부추기고 격려한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아마 그것은 어린 나의 가슴에 일제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심을 심어 주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였다. 외삼촌의 격려덕분에 나는 더욱더 신이 나 유리창을 깨고 다녔다. 물론 그 일도 정선배가 지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소극적이고 절반 장난이며 일종의 모험이였지만 일제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심을 길러 주는 좋은 훈련방법이였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이따금 그때 일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한다. 그후 정운길선배의 지도밑에 우리 소년들의 활동도 점차 조직적인 성격을 띠여 갔다. 그 한 실례가 《지게군조합》이다. 《지게군조합》은 정운길선배곁에 모이던 아이들이 가난한 마을사람들을 돕기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우리들은 한번에 20여명씩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가 나무를 해다 마을의 가난한 집 마당에 쌓아 주었다. 아이들이 한 나무이긴 하지만 스물댓짐씩 쌓아 놓고 보면 상당한 량이 되였다. 화전을 부쳐 거둔 감자마저 일제와 땅주인에게 뜯기고 하루 한끼 감자죽으로 끼니를 잇던 가난한 사람들, 항상 멸시와 천대속에서만 살던 그 순박한 사람들이 우리가 나무를 해다 주면 어쩔줄 모르며 얼마나 고마와 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나무하러 가자고 련락만 하면 조금도 싫은 기색이 없이 지게를 지고 나서던 동무들, 그 동무들이 바로 후일에는 나의 동지들로 되였고 한길을 걸었다. 김덕룡, 리석기, 리경모 등… 한편 우리들은 당시 발행되는 《소년전기》와 《우리 동무》를 비롯한 소년출판물을 주문하여 돌려 가며 읽었고 토론도 벌렸다. 우리 고향에는 밤이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며 노는 《도청》이라는 집이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마을회관쯤 되는셈이다. 정선배는 《도청》을 야학당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여러 출판물을 나눠 읽히며 사회주의교양사업을 벌렸다. 우리가 그 시절 하루중에 제일 기다려 진 시간이 야학당에 모이는 시간이였다. 날만 저물면 서로 찾고 부르며 《도청》으로 달려 가군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간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할수도 있었다. 그무렵 일어 났던 《만보산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제놈들의 중국침략을 쉽게 하고 앙양되고 있는 조중인민들의 반일투쟁을 압살하기 위해 조선사람과 중국사람들을 리간시킬 목적으로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인들이 중국의 만보산에서 조선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선전하여 우리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한편 제놈들의 앞잡이들을 동원하여 조선에 있는 중국인들을 테로하기도 했다. 일부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편애한 민족배타주의에 사로잡혀 그 리간책동에 동조해 나서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는 마을의 일제앞잡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마을에서 몇집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테로하러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선배는 황급히 우리 소년들을 모이라고 했다. 우리가 모이자 그는 왜놈들의 간교한 리간책동을 설명해 주고 중국인들을 보호하러 가자고 하였다. 우리들은 서슴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사실 그때 우리들은 그 복잡했던 사건에 대한 일가견이 있어서 그 일에 발 벗고 나섰던것은 아니였다. 그저 정선배를 믿었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는 믿음에서였다. 지금에 와서는 정선배의 지도가 옳았다는것을 재삼 느끼게 된다. 《만보산사건》때 중국민족과 조선민족을 리간질친것이 왜놈들이라면 광복후 40여년이나 같은 민족을 북남으로 갈라 리간질하고 있는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마디로 력사에는 우리 민족의 분렬을 꾀한 외세가 있었지 민족의 단합을 도우려 한 외세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외세의 덕을 입어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대세력이 버젓이 머리를 들고 있다는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첫 시 련
1930년대는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조선농민들의 절반이상이 봄이면 소나무껍질로 겨우 연명하던 시기였다. 여기에 공황으로 도시에서 실직한 로동자들이 고향농촌으로 밀려 드니 절량농민은 날로 늘어만 갔다. 게다가 왜놈들은 중국침략을 서두르느라 수탈을 여느 때없이 강화했었다. 우리 풍산사람들의 유일한 식량이고 소금과 성냥 같은것을 사는데 돈 대신으로 쓰이던 감자는 물론 아마며 호프 같은것들까지 모조리 긁어 갔다. 이처럼 절박한 생활고에 쫓긴 농민들이 소작료며 농산물 징수문제로 경찰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리는 일도 허다해 졌다. 그러나 이 같은 급변한 정세하에서도 조선공산당이나 조선농민총동맹과 같은 조직들은 일제의 극악한 탄압으로 해산되거나 무력화되여 농민투쟁을 거의 이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선진적인 청년들과 인민들은 투쟁을 보다 실속 있게 이끌어 줄 조직에 대한 기대가 커갔다. 내 고향 풍산땅에도 여러 갈래의 비밀조직들과 함께 그 외곽단체들인 청년조직, 소년조직, 부녀조직들이 생겨 났다. 나도 그 조직의 한 성원으로 되였다. 차례대로 이야기하면 1931년 3월 소학교를 졸업한 나는 외삼촌내외의 일손을 도우며 집에 있었는데 그런중에 천남면 와포에서 교원을 하던 리현욱과도 알게 되였다. 그때 리현욱은 마사원으로 말파리를 몰고 파발리에 수시로 드나들군 하여 나는 그를 통해 중학강의록과 함께 좌익서적들도 구입하여 읽을수 있었다. 리현욱은 정운길동지와 매우 가까왔다. 파발리로 자주 드나드는것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파발리사건이 있은지 1년이 된 31년 8월이였는데 점심녘에 한 친구가 집에 와 정운길동지가 찾는다고 하였다. 그를 따라 가보니 《오빠시》놈의 령혼비가 내려다 보이는 앞산 등성이였다. 거기에는 리현욱, 신재국과 함께 김덕룡을 비롯한 내또래들이 벌써 와 있었다. 정운길은 나에게 지난해 주재소에서 얻은 탄피를 어떻게 했는가고 묻더니 당장 가서 가져 오라는것이였다. 나는 집에 달려 가 농짝밑에서 꽁꽁 싸두었던 탄피 두개를 꺼내 가지고 돌아 왔다. 바로 그 탄피 두개를 앞에 놓고 우리는 정운길을 책임자로 하는 《적색독서회》(반일독서회)를 조직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왜놈들과 싸우자! 이것이 두개의 탄피앞에서 비밀조직을 뭇는 취지였다. 군책임자로는 정운길이 되고 천남면책임자로는 리현욱, 리인면과 능귀면책임자로는 신재국, 안수면책임자로는 전철식이 선정되였으며 우리 안산면책임자는 군책임자인 정운길동지가 겸하게 되였다. 나는 소년부책임자로 되였다. 그날 밤, 그 으슥한 곳에서 작은 주먹들을 부르쥐고 조직의 비밀과 큰뜻을 지킬것을 엄숙히 맹세하던 동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다. 《적색독서회》는 밖으로 문맹퇴치와 계몽을 내세우면서 비밀리에 좌익서적들과 신문, 잡지들을 돌려 가면서 읽고는 토론들을 벌리군 하였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지주, 자본가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어떻게 악랄하게 착취하며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은 어떻게 벌려야 하는가 등 책에서 본 내용들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식의 론쟁들도 벌렸지만 그보다 우리 소년들의 흥미를 더 많이 끈것은 장백지구에서 벌어 지고 있는 반일투쟁소식들이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지게군조합》도 《적색독서회》의 소년부조직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외곽단체였다. 《적색독서회》조직은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만도 풍산군의 여러면들과 하지경리, 내중리, 양평리 등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리현욱은 천남면에서 《프로레타리아연구회》, 신재국은 풍산읍일대에서 《프로레타리아체육구락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조직들은 모두 《적색독서회》계통의 조직들이였고 이것들이 모두 장백에서 태동하고 있는 항일대전의 거세찬 숨결의 영향하에 발족된것들임은 말할것도 없다. 이에 당황망조한 일제는 1932년 여름에 들어 서면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도현 소사하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으로 항일대전의 시작을 선포하신 직후였다. 우리 고향 파발리에도 검거선풍이 들이닥쳤다. 풍산군에서만도 200여명의 애국인사들이 체포되였다. 이 일은 우리 고향에서 포수 홍범도가 악질 친일면장을 총으로 쏴죽이고 의병투쟁을 시작했던 아득한 옛날이후 처음으로 일어 난 가장 큰 력사적인 사변이였다. 그때 내 나이 열여섯, 아직 각성이 무디였던 나는 그런 검거바람이 어른들만 대상하는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있었다. 한밤중에 경찰 여섯놈이 외가집에 들이닥쳤다. 놈들은 다짜고짜로 나를 붙들어 놓고는 집안구석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런 경황중에서도 외삼촌이 나를 막아 나서며 형사들한테 따지고 들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요? 철부지 어린것한테 무슨 죄될게 있다고 이러는거요?》 《흥, 철부지라구? 쪼꼬만게 속까지 물들은 빨갱이란 말야!》 놈들은 이렇게 줴치며 외삼촌을 밀어 던지고 수색을 계속했다. 《빨갱이.》 한평생을 감옥살이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호칭은 《000번》하는 수번도 아니며 내 이름 석자는 더더욱 아니고 바로 이 《빨갱이》라는 외마디소리였다. 그때 만약 내가 부모들이 지어 준 이름 석자대신 처음으로 불리운 《빨갱이》란 호칭뒤에 얼마나 많은 인생고초가 기다리고 있는줄 미리 알았다면 그처럼 귀맛 좋게 들으며 우쭐해서 서 있을수 있었겠는가? 그때부터 1945년 8.15광복의 날까지, 1950년대에 들어 서면서부터 43년간을 나는 일제와 미제국주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들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인 그 이름으로 살아 왔다. 내가 왜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로 태여나 거의 한생을 응당 차례진 이름대신 《빨갱이》로 불리우며 온갖 고초를 다 겪어야 했던가! …열여섯소년은 가슴을 쭉 펴고 서서 놈들이 노는 꼴을 지켜 보고 있었다. 마침내 골방천정에 새로 바른 도배지를 유심히 쳐다보던 한놈이 긴칼로 거길 쿡 찔러 우벼 내니 사회과학서적이 우르르 쏟아 져 내렸다. 득의양양해 진 형사가 외삼촌에게 덤벼 들었다. 《이래도 코흘리개라고 큰소리칠테냐?》 그런데 외삼촌은 일전에 자신이 숨겨 놓은 《지게군조합》일지가 발각될가봐 더이상 큰소리를 못했다. 외삼촌은 활동일지가 경찰의 손에 들어 가면 모든 아이들이 드러날가봐 변소입구에 땅을 파고 일지를 묻은후 그우에 빈 궤짝을 엎어 놓았던것이다. 사실 그때 득의양양해 진 심정으로 치면 그 형사놈보다 내가 더 했을것이다. 나 하나를 붙들려고 형사가 여섯놈씩이나 달려 들었겠다, 제목만 봐도 놀라운 책들이 천반에서 우르르 한무데기나 쏟아 져 내렸겠다.…이쯤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고 남음이 있었다. 끌려 가는 나를 붙들고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울고불고 야단인데 정작 그 장본인은 인제야 진짜혁명가가 되는가보다 하는 우쭐렁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당연히 어깨는 거만하게 올라 가고 얼굴에는 웃음이 마구 떠올랐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철부지기분을 조금도 탓할 생각은 없다. 인생의 첫 걸음처럼 혁명의 첫 걸음 역시 그 장한 마음이 다음걸음을 부추겨 주고 한평생을 그 길우에서 걸어 나가게끔 해주는게 아니겠는가. 그날 밤 놈들은 나를 주재소로 끌고 갔다. 한때 우리또래 아이들이 유리창깨나 부스러뜨렸던 그 주재소였다. 들어 가보니 정운길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야, 너 겁나냐?》 하고 그는 놈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웃어 보이니 그는 《이런 일쯤 겁내지 말고 태연한 마음으로 견디여 내야 한다.》 하고 격려했다. 나는 고개를 힘 있게 끄덕였다. 면소재지에서 한 20명이 잡혔고 주변농촌들에서 이보다 훨씬 많은 수가 붙잡혀 왔다. 이들은 적색농조성원들이였다. 정운길은 이들과도 횡적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의 지시로 자주 레포를 다니던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낯이 익었다. 그다음날 아침, 놈들은 잡아 들인 사람들을 풍산경찰서로 이송하기 위해 트럭에 태웠다. 차가 외가집앞을 지날 때였다. 외할머니가 길복판에 드러누워 《우리 애를 내놓아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놈들은 결사적으로 막아 서는 외할머니와 싱갱이질을 하느라 30분나마 진땀을 뺐다. 12시경에 풍산경찰서에 도착하여 우리들을 류치장에 처넣었다. 류치장안은 높다란 세멘트벽으로 둘러 싸여 어둑컴컴했다. 자그마한 철창사이로 낮빛이 스며 들어 습기에 얼룩진 벽이며 한쪽 구석에 놓인 변기통을 비쳤다.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감방안이건만 내 마음은 공연히 우쭐해 져서 좋기만 했다. 이튿날부터 취조가 시작되였다. 이른바 《빨갱이》의 첫 수련이 시작된셈이다. 정운길선배는 얼굴도 볼수 없었는데 심한 고문으로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다고 하였다. 몰래 그 말을 전해 들으니 《혁명가는 이런 일쯤 겁내지 말아야 한다.》던 정선배의 말이 더욱 생각났다. 그래서 형사들이 나를 차고 때리고 해도 아픈줄 몰랐고 조사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형사들은 어린애라고 봐줘서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빨갱이새끼, 너 고추가루물 좀 먹어 볼래?》 하지만 나는 인젠 혁명가다 싶은 자만심에 기가 오를대로 올라서 그야말로 겁없이 덤볐다. 《먹이려면 먹여요. 하나도 겁 안나!》 《지사이야쓰가!》(작은 놈이 못됐다.) 뺨에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마구 날아 왔다. 그래도 눈을 치뜨고 노려 보니 기가 찼던지 도로 류치장에 처넣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내가 이겼다.》 하고 얼마나 통쾌해 했는지 모른다. 허나 나는 내가 당하고 있는 취조가 얼마나 경한것인가를 몰랐다. 다른 취조실에서는 정운길과 그의 동년배들이 나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을만큼 악착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놈들은 《적색독서회》를 비롯한 여러 비밀조직들의 주모자를 알아 내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고 있었던것이다. 매질과 물먹이기 등 온갖 고문속에서 거의 한달반이 지났다. 《적색독서회》관련자로 정운길선배와 다른 동지들 넷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명이 남았다. 경찰놈들이 작성한 조서에 의하면 정운길선배가 《적색독서회》비밀조직을 만들었고 나는 그 조직의 소년부책임자로 되여 있었다. 그 물질적증거로는 외가집 천정에서 사회과학서적들이 쏟아 져 나온것, 취조과정에 내가 맹랑하게 대들었기때문에 조서가 그렇게 꾸며 진것 같았다. 우리 사건에 대한 조사가 거의 매듭 지어 졌을무렵 천남면에서 지하조직인 《프로레타리아연구회》가 발각되여 또 20여명이 체포되였다. 천남면은 우리 고향의 린접면이였다. 《프로레타리아연구회》지도자는 리현욱이였다. 뒤이어 풍산읍에서도 《프로레타리아체육구락부》조직이 탄로되여 신재국, 리시호를 비롯한 50여명이 더 잡혀 들어 왔다. 이렇게 되니 류치장이 모자라 이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사무실에까지 걷어 넣을 형편이였다. 이 덕분에 조사를 마친 우리 관련자들은 모두 한류치장에 모일수 있었다. 능귀면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 왔다. 능귀면조직은 맨나중에 발각되는통에 일부 동지들은 검거망을 피해 몸을 숨길수 있었다. 그 피신한 동지들중에 후에 나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며 친구로 되였던 주병포도 있었다. 후에 서로 알게 되였을 때 우리는 이때의 일도 회상하군 하였었다. 어떻든 나는 그립던 동지들과 한방에 있게 된것이 기쁘기 이를데 없었다. 더우기 정운길이와 함께 있게 되여 더욱 기뻤다. 그의 신상은 말이 아니였다. 얼굴엔 온통 피멍이 들고 뜯기운 사람처럼 조금도 성한데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맞아 주는 눈만은 감옥에 처음 들어 왔을 때 《너 겁이 나냐?》 하고 웃으며 묻던 그 눈길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 더 정기가 돌고 빛났다. 제일 어린 나는 자청해서 변기통도 나르고 잔심부름을 해가며 정운길곁에 자리를 옮겼다. 그가 옆에 있어 이야기를 해주고 고무를 해주는것이 어린 나한테는 큰 힘으로 되였던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원통하기 그지없다. 12월 25일, 그날은 일본《천황》 대정의 생일이라 왜놈들이 쉬는 날이였고 그리스도교인들에겐 예수의 생일인 크리스마스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형사들은 쉬고 당직인 미우라라는 형사만이 나와 있었다. 미우라놈은 류치장 앞복도에서 별스레 거들먹거리며 수인들에게 수작을 걸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고 하더니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여 소제를 한답시고 걸레쪼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철창안에 앉아 있는 수인들을 향해 이 사람, 저 사람 겨눠 보며 발사하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그러다가 뜻밖에 《땅!》 하고 감방을 들었다 놓는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놈의 장난이 끝내 일을 친것이다. 그 총소리와 함께 뜻밖에 나와 나란히 앉아 있던 정운길선배가 모로 쓰러지는것이 아닌가! 그는 그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마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나에게 계급의 눈을 틔워 주고 혁명의 진리를 깨우쳐 주어 투쟁의 길로 이끌어 준 귀중한 첫 혁명동지가 그렇게 죽다니! 나는 정운길동지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쳤다. 한감방에 있던 동지 들은 물론 다른 감방에 있던 동지들도 격분을 금치 못해 들고 일어 났다. 동지들은 정운길살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경찰당국에 들이댔다. 놈들은 이 사건을 미우라순사의 부주의로 인한 《오발사고》로 락착 지으려고 했다. 동지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정운길동지로 말하면 풍산지구 비밀조직의 중요책임자였다. 놈들의 고문에도 시종일관하게 비밀을 고수하고 조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놈들은 그를 이런 비렬하고 악착한 방법으로 학살함으로써 비밀지하조직의 핵심들을 없애고 아직은 준비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어 확대발전되여 가고 있는 청년들과 인민들의 혁명적진출을 막아 보려 했던것이 아니였을가. 약은 꾀를 잘 쓰는 왜놈들로써는 얼마든지 할수 있는짓이였다. 우리들은 단식투쟁에로 들어 갔다. 그리고 살인진상규명을 위한 시체검안이 있을 때까지 시신을 내놓지 않기로 했다. 놈들은 풍산에 검찰소가 없기때문에 북청검찰소에서 검사가 올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시신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야 검사가 와서 시체검안을 했다. 우리들 다섯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사태를 설명하고 항의했으나 검사는 묵묵부답이였다. 그후 미우라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조차 우리는 알수 없다. 혹시 어떤 표창을 받았을는지 어찌 알랴. 경찰이 재판없이 생사람을 쏘아 죽여도 항의조차 변변히 할수 없는것이 그때 조선민족의 처지였다. 1945년 8월 조국이 일제로부터 광복된 직후 소년투쟁을 함께 했던 우리 동지들은 풍산군당에서 함께 일하게 되였다. 우리는 정운길동지의 묘소에 자주 찾아 가 손질도 하고 꽃도 심고 하다가 묘지가 너무 외진 산골에 있는것이 마음에 걸려 읍 가까운 위치로 이장하기로 뜻을 모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인 김덕룡(풍산군당 조직부장), 김경문(풍산군민청위원장), 박홍윤, 나 이렇게 넷이서 정성껏 묘를 옮기고 그앞에 동지의 뜻을 기리는 추모의 묵상을 하였다. 얼마전에 나한테 찾아 온 30안팎의 한 녀동무가 자기를 정운길의 조카딸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느라니 자신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 왔다. 정운길동지한테도 아들딸이 있었다면 조카가 아니라 저만한 나이의 손자가 있을텐데…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팠다. 이처럼 비명에 간 동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운길의 시체를 검사한후 온 감방안이 끝 없는 비감에 잠겨 있는데 어느 하루 검사가 나를 불러 냈다. 《몇살이냐?》 웬일인지 그자는 나이부터 물었다. 《열여섯이요.》 《이놈, 젖 먹고 싶지 않느냐?》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릴 하자고 불러 냈소?》 정동지가 죽은후 슬픔에 빠져 있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잠시 멈칫하던 검사가 다시 물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느냐?》 《당연히 보고 싶소.》 《그럼 네 어머니곁으로 보내주겠다.》 허튼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튿날 나는 정말로 석방되였다. 어찌된 판인지 알수 없었다. 경찰서에서 외가집까지 9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나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집에 들어 서는 나를 울음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외삼촌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용케 견디여 냈구나.》 하고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얼마후에야 나는 내가 그렇게 쉽사리 석방된 리유를 알게 되였다. 거기에는 비명에 간 정운길동지의 노력이 컸었다. 그는 모든 《죄상》을 자기가 쓰고 우리 어린것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힘 썼던것이다. 한편 밖에서 외삼촌도 힘을 썼다. 그는 원래 붓글을 잘 쓰기로 풍산적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면에서 그를 호적계 서기로 들어 오라고 청했었는데 그런 곳에 들어 가 일본놈앞잡이노릇을 하겠느냐고 거절해 왔었다. 허나 자기 조카와 동료들이 검거되자 생각을 달리 먹고 소학교교원에서 호적과로 옮겨 앉았다. 거기서 외삼촌이 처음으로 한 일은 나의 나이를 열여섯살로부터 열네살로 고쳐 놓은 일이였다. 왜놈들의 법에도 열네살은 미성년이므로 재판에 넘기게끔 돼 있지 않았다. 나는 석방되여 나올 때 검사가 《네 나이 몇살이야.》고 묻던 리유를 그때에야 깨달았다. 30리 떨어 진 적수부락 시집에 계셨던 어머니는 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밤길을 걸어 동창이 밝을 때에야 들어 섰다. 우리는 자지 않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졸였는지를 들을수 있었다. 자식놈 얼굴이라도 보려고 경찰서로 떠나려는 어머니를 외삼촌이 《젊은 과부가 면회 가면 왜놈순사들이 너를 롱락하려고 들텐데 집에 가만 있거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하고 말리였다고 한다. 외삼촌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보다는 고문 받아 험하게 된 자식을 보면 마음이 더 괴로와 지리라고 생각한때문일것이다. 그래 어머니는 붙잡혀 간 아들을 얼굴 한번 못 보고 눈물만 흘려야 했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다. 외삼촌이 보다가 민망하였던지 재촉하셨다. 《계순아(어머니의 이름), 인모가 나왔는데 그렇게 서 있기만 하려냐?》 어머니는 그제야 《응.》 하고 꿈에서 깨여 난 사람처럼 나를 와락 부둥켜 안고 우셨다. 외숙모의 말에 의하면 이 불효한 자식이 붙잡혀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애간장을 태우던 나머지 이런 환각상태에 잠겨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고 한다. 귀리밭 가을걷이를 할 때라고 한다. 할아버지와 삼촌들모두가 낫을 들고 고랑을 잡고 썩썩 베여 나가는데 어머니가 혼자 낫을 쥔채 밭에 엎드려 있었다. 아들생각에 저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여 뭐라고 말도 못하고 계속 베여 나가 그 고랑을 다 베고 돌아 왔을 때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러고 있었다. 삼촌이 하도 보기 딱해 말을 붙였다. 《아주머니, 뭘 그러시우?》 그 말에 화닥닥 놀라 어머니는 두리번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더듬더듬 헛소리를 하더라는것이다. 《얘가 왔기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꿈을 꾸었나? 얘가 어디 갔지. 금방 여기 있었는데…》 이런 어머니였길래 나를 보고도 꿈인가 생시인가 믿어 지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던것이다. 석방후 나는 류치장생활의 여독으로 병을 만나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며 외할머니, 외숙모가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 타게 돌아 치며 정성을 다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 날수 없었다. 물론 감옥생활이며 그 후유증으로 생긴 병과의 투쟁이 어린 나에게 있어서 처음 겪어 보는 어려운 고비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자리에 눕힌것은 그것이 아니였으니 그처럼 믿던 정운길과 같은 선배가 비명에 나의 곁을 떠나갔고 조직이 파괴된데서 오는 좌절감때문이였다. 철 없는 마음에 혁명투쟁의 길을 그 어떤 모험기 많은 단꿈처럼 생각하던 나에게 있어서 동지들의 죽음과 그뒤에 잇닿은 투쟁의 좌절은 그야말로 크나큰 시련이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에 정운길동지가 움직이던 조직을 되살리기 위해 조을록이라는 동지가 북청 대성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는 파발소학교를 나보다 먼저 졸업한 선배였다. 나는 외삼촌의 집에서 고문의 후과로 병치료를 하면서 그의 지도 를 받았고 조직의 재건에 참가했다. 그런데 넉달가량 지났을 때 또 일제의 검거선풍이 일었다. 어떻게 단서가 잡혔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조을록동지는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개마고원일대는 온통 화전으로 일군 감자밭들이였는데 그것을 메돼지들의 침습으로부터 막아 내기 위해 밭머리에 통나무로 뚝막 같은 집을 짓고 밤마다 거기서 양푼 같은것을 두들겨대군 하였다. 그 뚝막을 우리 고향에서는 《도떡》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경찰의 추격을 피해 산으로 올랐던 조을록동지가 그 《도떡》에 앉아 있다가 령하 30도의 추위에서 얼어 죽었다는것이 아닌가. 너무도 급히 피하던 몸이여서 미처 성냥이며 먹을것을 준비해 가지 못한때문이였던가… 사람들이 조을록동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한손에 칼을 움켜 쥐고 《도떡》의 문지방에 눈을 부릅뜨고 마치 산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나는 함흥형무소 미결감에서 전해 들었다. 우리는 풍산경찰서를 거쳐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였던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 비분의 소식에도 소리내여 울수조차 없었다. 그때가 33년이였을것이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얼마전 당력사연구소 동지들에게 알아 보니 조을록동지는 1933년이 아니라 1937년에 결성된 조국광복회 북청지구위원회 성원으로 활동하다가 희생되였다는것이 아닌가. 하기는 나는 그의 죽음을 직접 본것이 아니고 함흥형무소에서 전해 들었을따름이다. 잘못된 소식이였을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체포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조을록동지자신이 꾸며 내여 사실처럼 퍼뜨린 가사가 아니였을가 싶어 진다.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밀라는 무언의 지시였다고 할가. 사실 우리는 조을록동지가 동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책임을 그에게 밀었다. 그 슬픔과 분노가 우리에게 놈들의 갖은 고문과 회유도 이겨 내게 하였고 비밀을 끝까지 고수하게 하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날이 지났으나 우리들의 침묵과 항거로 왜놈들은 도저히 사건을 성립시킬수 없었다. 결국은 조을록동지의 《희생》이 더 큰 희생을 막아 우리들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서 3개월만에 기소유예로 나올수 있었다. 귀중한 동지를 잃은 나의 마음은 비분을 금할수 없었다. 우리 조직의 형편으로 말하면 또 한명의 사공을 잃은셈이였고 나는 기슭에 닿는가 싶다가 다시 폭풍에 밀려 나 표류하는 배에서 망망한 바다를 둘러 보는 심정이였다. 투쟁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라면 조직의 귀중함을 알것이며 그때 나의 심정을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나를 이끌어 주던 동지들은 다 가고 조직들도 파괴되였다. 크나큰 시련은 나의 가슴에 어두운 장막을 드리워 놓았다. 파발리의 총소리가 어린 가슴에 지펴 놓았던 그 불꽃, 정운길과 조직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가 싶던 불길이 그물그물 꺼져 가고 있었으니 이제 그 광원을 되찾지 않고서는 숨 쉴수도, 살 재미도 없어 져 버린 처지… 차라리 류치장생활이 그리웠다. 그때는 그래도 투쟁속에 사는 보람이 있었다. 나는 좌절되여 버린 기분속에서 청년시절로 들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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