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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찬은 요즘 비상한 흥분과 격동에 싸여 그리움에 북받친,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기다림속에 날과 날을 보내고있었다. 수헌이가 다름아닌 자기가 그처럼 찾던 김혁창의 손자라는것을 알게 된데로부터 받은 강한 심리적인 충격과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북남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평양과 서울에서 통일축구경기와 통일음악회가 열리게 된다는 꿈같은 희소식에 접하게 된것이였다. 그처럼 바라마지 않던 통일날이 손을 내밀며 잡힐듯이 눈앞에 바투 다가서고있었다. 그의 마음은 분렬의 장벽을 넘어서 통일의 사절들이 나오게 될 서울에 온통 쏠려있었다. 요즘 언론도 입을 모아서 그 소식을 련속 특별히 보도하고있었다. 그는 그런 보도나 듣는데 만족할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서울에 가서 통일사절들을 환영해주고 통일축구경기와 통일음악회를 보고싶었다. 그래서 더우기나 수헌이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애를 만나서 서울에 갈 무슨 방도가 없겠는가를 의논해보고싶었던것이다. 보안관찰처분을 받고있는 몸이라 서울에 가려면 사전에 려행신고를 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승인을 해줄리 만무했고 몰래 갔다오려고 해도 주민등록증이라는게 없으니 난사였다. 그래도 수헌이와 의논해보면 무슨 수가 날것 같았다. 북에서 온 통일사절들을 만나보러 가는 중대사를 놓고 다른 누구도 아닌 손자와 다름없는 그 애와 의논을 한다는 이자체가 벌써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수헌이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 당장 만나지 못하면 심장이 터져나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자그대로 학수고대하던 소식이 날아왔다. 방금 부산역에 도착한 수헌이가 진주에게 전화를 걸어 래일 아침 양로원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는것이였다.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하고 경비실에 나왔다가 진주의 전화를 받게 된 강용찬은 흥분해서 밤을 꼬박 지새웠고 이튿날 동이 트기 전부터 정문앞에 나와서 시내로 뻗은 큰길쪽을 바라보며 서성거렸다. 이제 곧 수헌이와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별스레 심장이 활랑거리고 가슴이 뛰놀았다. 그 애가 여기로 찾아온다는것은 통일애국투사인 자기 할아버지의 피줄을 찾아온다는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악질검사인 최성규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런즉 그 애는 용단을 내린것이다. 이제 곧 통일도 될테니 나는 그 애를 얼마든지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해줄테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지만 기다리는 그 애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감격적인 상봉을 앞둔 벅찬 흥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라앉았고 번거로와지는 마음 한구석으로 불안이 슴배여들기 시작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너무도 엄청난것을, 아직도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그런것을 너무 쉽게 바라는것만 같았다. 수헌이를 만나는 일도 그러하지만 당장 통일이 될것처럼 욕망과 흥분을 앞세워 생각한것도 그러했다. 북남고위급회담이라는것은 70년대초에도 있은 일이다. 당시 북남공동성명까지 채택되였지만 박정권의 배신적인 책동으로 말미암아 통일이 이루어지기는 고사하고 분렬이 더 고착화되였고 정세는 악화일로로 줄달음치게 되였다. 그런데 이번에 열리는 회담이 당장 통일로 이어질수 있다는 담보가 마련되여있는가? 다름이 아니라 통일이기에 이것은 량자가 뜻을 합치고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립시킬수 없는 대업이다. 헌데 남조선당국자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지난해 가을에 당국자가 내놓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것은 제도통일방안이였다. 남의 제도를 북으로 연장하겠다는것인데 과연 주제넘고 어리석은 망상이 아닐수 없었다. 미군은 여전히 주둔해있고 반통일악법이 우리 공화국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있는것이 남조선의 현실이였다. 결국 통일로 가는 길에는 의연히 시련의 고비와 난관이 중첩되여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헌이가 탈가하여 여기로 와도 난사가 아닐수 없었다. 《선생님!》 착잡하고 번거로운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자기를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재차 울려와서야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옮겨 심은 어린 소나무곁에 진주가 오도카니 홀로 서있었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 애는 어디에 있냐?》 《수헌씨는…》 진주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용찬은 울상이 된 처녀를 보고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종시 생겼다는것을 직감했다. 《자, 어서 들어가자.》 방에 들어가서야 진주는 마음을 좀 진정시켰던지 사연을 이야기했다. 오늘 아침 약속한 시간이 퍼그나 지났지만 그들이 양로원에 갈때면 늘 함께 타고다녔던 하얀 승용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진주는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서 망설이다가 수헌이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늙은이가 전화를 받았는데 수헌이의 할아버지인것 같았다. 무슨 일로 그 애를 찾는가? 너는 누구인가? 하고 심문이나 하듯이 따져묻더니 그녀석을 다시는 찾지 말라, 그런 녀석은 우리 집에 없다!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진주는 영문을 알수가 없어서 한시간정도 지난 다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수헌이의 어머니가 제꺽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낮은 목소리로 진주에게 어디서 전화를 하느냐고 묻더니 좀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송수화기를 놓았다. 좀 시간이 지나서 수헌이의 어머니가 《진주특산》에 찾아왔다. 그래서 진주는 엊저녁에 수헌이네 집에서 벌어진 소동을 알게 된것이였다. 《수헌씨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이제라도 아들이 그 론문원고를 가지고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면 사태를 바로잡을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수헌씨를 찾아서 설복해달라고 울면서 당부했습니다. 수헌씨가 혹시 양로원에 가있을수 있으니 거기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혹시나 하고 여기로 온겁니다.》 수헌이의 탈가로 벌어진 소동은 강용찬에게 있어서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였다. 어차피 일은 그렇게 번져질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수헌이가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이것이 난문제였다. 자기로서는 그 애에게 아무런 생활적인 도움도 줄수 없으니 그것이 괴로왔다. 《선생님, 어쩌면 좋습니까?》 그는 행여나 기대를 안고 자기만 바라보는 진주에게 신통한 대답을 줄수가 없었다. 《글쎄… 넌 수헌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주는 신뢰에 찬 목소리로 주저없이 대답했다. 《수헌씨는 제가 생각했던것보다 더 훌륭하고 용감합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처신했다고 봅니다.》 강용찬은 빙그레 웃었다. 《난 그걸 물은게 아니다. 너희들은 어떤 사이냐?》 진주는 얼굴을 붉히며 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너희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면 수헌이는 반드시 너를 찾아오거나 너에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의 거처를 알려줄거다.》 진주는 얼굴을 들었다. 발그레해진 눈시울에 가랑가랑 맺힌 맑은 눈물은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반짝이였다. 《정말 그럴가요?》 《음.》 강용찬의 말을 듣고보니 수헌이가 지금 《진주특산》앞에서 초조히 자기를 기다리고있는것만 같아서 진주는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잠간만 기다려라.》 강용찬은 이불 한쪽 귀때기안에서 출옥할 때 동지들이 선물로 준 베수건에 꼭꼭 포개여두었던것을 꺼내 진주에게 주었다. 《이건 뭡니까?》 《그새 너희들이 용돈으로 쓰라고 주는걸 모아둔거다. 난 순기가…》 그는 부지불식간에 수헌이의 본명이 튀여나가자 얼른 정정했다. 《아니, 수헌이가 말이다. 그런 글을 썼다면 경찰에서 가만둘것같지 않구나. 그 애가 여기에 찾아오면 안되겠다. 그러니 너를 찾아오면 안전한 장소에 피신하라고 하고 나에게 알려주면 고맙겠다. 현재 나에겐 그 애에게 줄게 그것밖에 없구나.》 진주는 그제서야 수헌이의 신상에 닥쳐온 위험을 감촉하고 매우 긴장해졌다. 《선생님,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수헌씨를 도와주겠습니다.》 며칠이 지나갔지만 수헌이는 진주를 찾아오지 않았고 양로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기에 속이 탈대로 탄 진주는 품을 놓고 시내의 숙박업소들을 다 훑어보았다. 그러나 수헌이의 자취를 찾지 못했다. 법대기숙사에 전화를 해보았는데 거기에도 없다는것이였다. 그래 생각다못해서 정윤수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교롭게도 정윤수는 방금전에 경찰에 련행되여갔다고 했다. 《어머! 무슨 일로 그리되였습니까?》 《이번호 잡지에 법대학생이 쓴 론문을 하나 실은것이 문제로 되였지요.》 그렇다면 수헌씨의 론문이 틀림없을것이다. 《곧 송금해 드릴테니 잡지 한부를 보내줄수 없습니까? 부탁입니다.》 상대방은 몹시 난처해했다. 《이런 부탁의 전화가 련속 걸려오는데 정말 야단이군요, 경찰이 잡지를 배포한 다음날로 회수했답니다. 여기에 있는건 보관용까지 다 압수해갔어요.》 경찰이 일단 배포되였던것을 다는 회수할수 없었을것이다. 어느 독자의 손에든지 남아있을게 아닌가. 진주는 그것을 찾기로 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론문의 필자도 련행되였습니까?》 《필자는 몸을 피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배령이 내렸겠 지요.》 진주는 음식점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양로원으로 갔다. 마침 강용찬은 경비실에 나와 앉아서 무슨 책을 보고있었다. 독서에 어찌두 정신이 팔렸던지 진주가 들어서는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책이기에 저리도 열심히 보실가? 진주는 발끝걸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로인의 어깨너머로 갸웃이 넘겨다보았다. 큰 활자로 찍은 제목이 눈에 확 안겼다. 《통일의 장애물인 <국가보안법>》 그런데 필자의 이름은 김순기, 생소했다. 《아니?》 저도 모르게 새여나간 아쉬운 목소리… 로인은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듯 고개를 돌렸다. 《오, 진주로구나. 마침 잘 왔다.》 진주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성급히 물었다. 《이 잡지는 경찰이 다 압수했다는데 어떻게 선생님에게 있습니까?》 로인은 범상하게 대답했다. 《이걸 발행한 사람이 언젠가 나를 찾아왔던 기자로구나. 그가 보내준거다.》 《그럼 김순기는 누굽니까?》 로인은 진주에게 잡지를 주었다. 《읽어보렴. 그러면 알게 될거다.》 26
수헌이의 탈가소동이 가정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었지만 최성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깐 놈이 집을 뛰쳐나가겠으면 나가라지. 그런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더냐. 양로원에 있는 강용찬이에게 매달려 살수는 없는것이고 정작 제 손으로 땀을 흘리며 벌어먹을 용기도 내지 못할것이다. 어느 다방이나 카페구석에 처박혀서 화술이나 마시며 고민하다가 주머니가 텅 비게 되면 제 발로 기여들어와 용서를 빌어야지 별다른 수가 없을테지. 차라리 잘됐어. 한번 고생을 해보면 정신이 들거야. 이렇게 코웃음을 치면서 속이 든든해서 앉아있었다. 그런데 한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가도 수헌이는 흰기를 들고 나타나지 않았다. 허, 이 녀석이 워낙 옹졸한 놈이라 절망끝에 자살이라도 한게 아닐가? 그러면 손해가 약차하다. 지금껏 그 녀석을 고이 길러온게 헛수고로 되지 않나. 제발 죽지는 말아라. 우리야 회계를 봐야 할게 있지 않니. 두루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웬걸, 월간잡지 《정치정세》에 김순기의 이름으로 된 문제의 그 론문이 실려서 복새통이 터졌다. 《국가보안법》에 무자비한 철추를 안기는 그 글에서 비전향장기수로 실례를 든것은 강용찬이가 분명했고 일정때부터 검사노릇을 하면서 숱한 애국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매국노라고 실례를 든것은 자기 최성규를 념두에 둔게 분명했다. 결국 그 론문은 강용찬을 애국자로, 민족의 자랑으로 격찬하고 자기를 매국노로, 민족의 수치로 타매한것이였다. 제 손탁에서 얻어먹고 자라면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명색이 손자라는 놈이 이런 고약한짓을 했다. 그것도 분통이 터질노릇이지만 론문에 김순기라고 뻐젓이 제 원래 이름을 달아놓은 그 녀석의 처사는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치가 떨려서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네놈이 제 근본을 알았다고 지금껏 키워준 정은 헌신짝처럼 내던진다는거지. 오냐, 내 네놈을 그냥두지 않을터이다. 내 손으로 붙잡아서 감옥에 처넣을테니 어디 네 할애비처럼 콩밥을 먹어보아라. 그러되 너는 김혁창의 손자로는 될수 없을거다. 빨갱이의 손자로는 될수 없어. 그는 즉시에 지방검찰청장을 찾아가서 닉명으로 반정부적인 색채와 친북적인 경향이 농후한 이 글을 써낸 자가 불행하게도 자기의 손자임을 밝히고 수배령을 내릴것을 강경히 요청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검찰청장은 윤의원의 통보를 받고 론문의 필자가 누구라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원로격인 최검사의 손자이기에 심중히 조처하기로 하고 이런 경우에 본인이 어떻게 처신할가? 하고 지켜보는중이였다. 그런데 제편에서 이렇게 나서서 손자를 법대로 처리하자고 요구하니 과연 최검사답다고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사실은 검찰청의 놀라운 화제거리로 되였고 너나없이 최성규검사님이야말로 법관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최성규는 이 기회에 자기의 손자까지도 빨간 물이 들면 가차없이 형사처벌하는 법의 화신, 반공투사로서의 투철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것이였다. 하여 수헌이에게는 수배령이 내렸고 최성규검사가 비통한 얼굴로 수표한 체포령장이 경찰에 발급되였다. 최성규는 수헌이를 체포하는것을 경찰에만 맡겨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돌아치기 시작했다. 우선 강용찬이가 있는 양로원에 경찰의 감시를 붙이고 시내의 모든 숙박업소들을 훑으면서 숙박대장을 깐깐히 뒤져보았다. 여기서 헛탕을 치자 서울로 올라가서 법대의 기숙사를 수색하고 수헌이와 가까이 지내던 대학생들의 집들도 수색해보았다. 하지만 수헌이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락심해서 부산에 돌아온 그는 분풀이로 양로원에 가서 강용찬의 손에 수정을 채워서 곧장 교도소로 끌고가고싶은걸 겨우 참았다. 그런 행패질을 할만 한 법적근거가 허약하기도 했지만 자칫하면 수헌이가 자기의 친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 오히려 자기의 명성에 먹칠을 할수 있는 우려가 있었다. 민법상 견지에서 보면 남의 손자에게 자기의 성을 달아주고 이름까지 고쳐서 아예 자기의 손자로 만들려고 한 행위가 결코 정당할수 없었다. 이건 명백히 위법행위다. 결국 수헌이라는 녀석은 붙잡아도 골치거리였다. 어떻게 수를 꾸미든지 그 녀석은 최성규의 손자로 감옥에 들어 가든지 총살을 당하든지 마련을 보아야 했다. 그 녀석이 자기를 뉘우치는 반성문을 써서 언론에 공개한다면 일이 멋지게 되는거다. 강용찬이는 전향시키지 못했지만 호의호식하며 내 손탁에서 자라난 그 녀석이야 얼마든지 주물러놓을수 있겠지. 아니다. 이 기회에 강용찬이를 무자비하게 쳐서 결정적으로 꺼꾸러뜨려야 한다. 강용찬이가 꼼짝없이 나가넘어지면 다른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치명적인것으로 된다. 그러자면 수헌이부터 붙잡아야 한다. 몇달이 지나가자 수헌이가 자기의 흔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운동권에 속한 대학생들과 로동자들속에 나돌고있는 지하출판물들에 김순기라는 필자의 이름이 자주 나타났던것이다. 김순기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과녁으로 삼고 명중탄을 안기고있었다. 이에 힘을 입었는지 《국가보안법》의 철페를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여느때없이 높아졌고 지어는 언론까지도 그쪽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가을에 접어들어서야 최성규는 수헌이가 울산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고 《소나무회》라는 지하조직까지 결성하고 움직인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수헌이를 체포하기에 앞서 강용찬을 지방검찰청으로 호출하였다. 강용찬은 이태전 가을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는 무심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지명수배를 당하고 숨어지내는 그녀석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타서 재가 앉을 지경이겠는데도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치 수헌이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듯 한 기색이였다. 그 태연자약함이 가뜩이나 속이 뒤탈려있던 최성규의 반감을 격증시켰다. 그는 상대방에게 담배나 커피를 권하는 위선적인 친절조차 베풀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의자에 앉으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강선생.》 습관적으로 이렇게 부른 그는 자신이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얼굴을 찡그렸다. 수헌이가 자기와 론쟁을 하면서 아무런 주저도 없이 강용찬을 선생님이라고 존대해 부르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상했던것이다. 《나는 며칠전에 당신에 대한 보안관찰처분의 기간을 갱신해줄데 대하여 법무부 검찰국에 청구하였댔소. 그 의결서가 보안관찰심의위원회를 거쳐 법무부장관의 동의를 받아 내려왔소. 그 내용을 알려주자고 불렀소.》 최성규는 자기가 즐기는 또 한차례의 법행위를 엄숙히 거행하고저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수 있는 이런 순간, 이런 기회에 정녕 사는 보람이라는것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이 순간, 이 기회는 더우기나 그러했다. 《보안관찰처분의 갱신에 관한 의결서. 청구검사.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최성규. 피청구자. 강용찬. 주거. 부산양로원, 주민등록증 없음. 피청구자는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소한 후 보안관찰처분을 받은 기간이 만 2년에 이른다. 이자는 자기의 거처인 양로원에 순진한 대학생들을 끌어들여 불온사상을 의도적으로 주입시켰으며 대학생들의 집회와 모임들에 참가하여 이북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파쑈국가이며 미국의 식민지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다. 지난해 가을에는 남북고위급회담차로 이북에서 온 대표들과 접촉하려고 경찰서에 사전신고도 하지 않고 서울행 고속뻐스에 오르려다가 단속되여 양로원에 연금된 일도 있다. 이자는 우에서 언급한 위법행위로 경고를 받았지만 불온한 언행을 삼가하지 않고있으며 아직도 전향할 의사표시가 전혀 없는바 재범의 위험성이 농후하므로 보안관찰처분기간을 갱신함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최성규는 의자에 앉으며 상대방의 동태를 주시하였다. 강용찬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의결서랑독을 개짖는 소리만큼도 여기지 않는 모양이였다. 최성규는 약이 올랐다. 《여보! 사실 당신은 여기에 지적한것보다 더 엄중한 위법행위를 했어. 그것을 첨부하면 당신은 다시 감옥에 가야 해.》 강용찬은 좀 피곤해하는 기색으로 시답지 않게 물었다. 《그건 무엇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요?》
《몰라서 묻소? 당신은 순진한 젊은이를 유괴하여 범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단 말이요. 전도가 양양하던 그의 일생을 망쳐놓았소. 한가정의 안정과 화목을 파괴하고 젊은이의 어머니를 절망에 잠기게 했소. 그 녀자는 당신을 원망하고 저주하고있단 말이야.》 강용찬은 이제야 비로소 짐작이 된다는듯이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음, 그러니 내 손자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군.》 (뭐?! 내 손자라구?!) 최성규는 어처구니가 없고 악이 치받쳐서 졸지에 자제력을 잃어 버리고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뻔뻔스럽기란, 당신이 그 애한테 뭐길래 감히 내 손자라고 해?》 강용찬은 침착하게 반문했다. 《그럼 당신의 손자라는거요?》 최성규는 켕기는데가 있는지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검사나리, 명백히 말하지만 그 애는 당신이 사형장에서 학살한 비전향장기수 김혁창의 친손자 김순기요. 누가 당신에게 희생된 통일애국투사의 손자를 데려다가 성을 갈고 이름을 고쳐 제 손자로 만들 권리를 주었소?》 최성규는 졸지에 김이 빠져서 씨근덕거리며 손수건을 꺼내여 지저분해진 입술을 훔쳤다. 《어서 대답하오!》 강용찬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런짓을 했는가?》 갑자기 두눈을 부릅뜨고 격노해서 따지고드는 강용찬이 앞에서 최성규는 미처 응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주객이 전도되였다. 검사가 피고로 피고가 검사로 된셈이였다. 《당신은 그 애가 김혁창동지의 손자라는걸 뻔히 알면서도 우정 그렇게 했을거요. 그 음흉한 목적이 뭐요? 어서 말하시오.》 최성규는 구태여 변명하고싶지 않았다. 《난 그 애를 대한민국의 법관으로 키워서 감옥안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앞에 보란듯이 내세워주고싶어서 그랬소.》 강용찬은 왼손을 꽉 움켜쥐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보, 어쩌면 그럴수 있소? 당신도 인간이요?》 최성규는 손수건을 집어던지고 반발적으로 뾰족한 턱을 추켜들었다. 《뭐? 인간인가구?! 그건 내가 당신에게 하고싶었던 질문이요. 그 애를 지금껏 누가 길러주었소? 누가 대학공부까지 하게 해주었는가? 당신은 그 애의 친할아버지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응당 나를 고맙게 여겼어야지. 그런데 감사를 표할 대신에 그 애를 꼬드겨서 범죄의 길로 떠밀었소. 이게 사람이 할짓인가?》 《그 애의 의로운 처사를 비속화하지 마오. 순기는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할바를 스스로 깨닫고 그길로 가고있소. 그것은 조국을 위한 길이고 민족을 위한…》 《가만.》 하고 최성규는 상대방의 말허리를 꺾었다. 《당신의 말이 옳다고 하기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바로 당신때문에 그 애의 신세가 지금 어떻게 됐소? 지명수배를 당하고 숨어지내는 처지요. 나는 그 애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고있소. 체포는 시간문제요.》 강용찬은 부릅뜬 눈으로 상대방을 묵묵히 쏘아보기만 했다. 《당당한 법관이 될수 있었던 그 애가 법의 희생물이 되게 됐거든. 감옥살이가 어떠한가는 당신이 잘 알게 아니요. 여보시오, 강선생. 당신이나 수십년간 그 고생을 했으면 됐지 은인의 손자에게까지 그 고생을 무슨 유산처럼 물려주어야만 소가지가 편하겠소?》 강용찬은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서 두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켜보건대 자신이 결사의 각오를 품고 투쟁의 길에 나선것은 후대들에게 광복된 조국을,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고 그들이 존엄높은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분렬의 장벽은 더 높아만 지고 동지가 일점혈육으로 남긴 순기는 감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였다. 그 애를 감옥에 가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가 대신 옥고를 치르고싶었다. 예리한 눈초리로 강용찬의 내심을 꿰뚫어보던 최성규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며 의논조로 말했다. 《당신도 결국은 그 애의 할아버지고 나 역시 그 애의 할아버지요. 우리 늙은것들이 두눈을 펀히 뜨고 앉아서 그 젊고 어지고 똑똑한 애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가는걸 보고만 있을수야 없지 않소. 어떻게 할것인가를 의논해보자는거요. 이제라도 사태를 바로잡을 방도가 있소.》 강용찬은 굳어진 자세로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나는 늙은 몸이라 사람들을 감시하고 붙잡아서 감옥에 보내는 시끄럽고 골치 아픈 놀음을 그만두고 쉴 생각이요. 그런데 보안관찰처분을 받고있는 당신을 다른 검사에게 넘겨주고 물러나고싶지는 않거든. 이것도 깨끗이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단 말이요. 참, 왜 그러고 서있소? 앉으시오. 여기에 편히 앉으라는데두…》 최성규는 일어나서 강용찬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 안락의자에 앉혀주고 자기도 그옆에 나란히 앉았다. 《강선생, 당신도 늙은 몸인데 그만 쉬지 않겠소?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양로원에 갇혀있는걸 그만두시구려. 사상이니 리념이니 하는게 사람이 살아나가는데 무슨 소용이 있소. 이제라도 그 거치장스러운걸 집어던지고 우리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이제 살면 몇년을 더 살겠소.》 최성규는 강용찬을 흘끔 돌아보고나서 폭신한 쏘파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자못 감회에 겨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고향이 그립구만이라. 정말 그립소. 봄이면 섬진강의 맑은 물을 거슬러 은어떼가 하얗게 오르고 가을이면 뒤울안의 감나무에는 주먹같이 크고 달콤한 감들이 말큰말큰하게 익고… 너뱅이벌에서 거둔 흰쌀로 지은 밥은 너무도 찰기가 많아서 한숟갈을 뜨려면 밥사발이 통채로 달려올라오거든. 정말 경치좋고 살기좋은 고장이였소.》 강용찬은 그자의 역설에 정신적인 구토감을 느꼈다. 물론 자신도 고향이 그리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은 눈물겨운것이였다. 최성규네가 매일처럼 달콤하고 구수한 잉어탕냄새를 풍길 때 마을사람들은 식량보탬을 하노라고 참대열매를 따서 밥 아닌 밥을 지어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바로 그래서 착취와 압박이 없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동경하게 된것이였다. 그것이 사상으로 되였고 리념으로 되였다. 그것을 버리라는것은 노예살이의 굴욕적인 처지를 감수하라는 수작에 불과했다. 《난 어린시절에 당신이 쩍하면 주먹을 휘둘러보이면서 <첩의 자식인 주제에…>라고 하던 모욕적인 말이 오늘도 잊혀지지 않소. 내 당신과 기어이 해보자고 하는 리유가 여기에도 있었소. 이젠 서로 화해를 하고 섬진강에 가서 잉어잡이나 해봅시다. 당신이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편히 보낼수 있는 조건은 내가 충분히 보장해드리겠소. 하여튼 난 당신이 전향만 하면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드릴 생각이요.》 강용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당신의 신세를 지고싶지 않소. 더 할말이 없다면 가겠소.》 최성규는 얄미울 정도로 히죽이 웃었다. 《아니, 당신은 내 신세를 져야 할거요. 그 대가란게 뭔고 허니 당신이 제 친손자처럼 여기고있는 그 애의 안전이란 말이요.》 《음?!》 강용찬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이자가 차마 이렇게까지 악착하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최성규는 상대방을 놀래워놓은것이 흐뭇한듯 소리없이 웃었다. 《수헌이를 정작 붙잡아서 감옥에 넣자니 지금껏 길러준 정때문인지 손이 떨려서 망설이게 되는구려. 다른 해결책은 없겠는가? 이런 생각끝에 당신과 의논해보고싶었던거요.》 강용찬은 주저없이 성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애 대신에 나를 감옥으로 보낼수 있지 않소.》 최성규는 빙글빙글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동향인의 인정에 어떻게 그렇게야 할수 있겠소. 난 당신도 그애도 다 편안히 살아가게 해주자는거요. 당신이 전향만 하면 나는 그 애를 안전하게 해외로 도피시켜주겠소. 그 애는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데 가서 대학공부를 계속할수 있게 될거요.》 《내가 당신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시 경찰에 지시하여 그 애를 체포하겠소.》 강용찬은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이놈이 자기의 사상과 신념을 꺾어보려고 별의별 방법과 수단을 다 써보고나서 지쳐버린줄 알았더니 최후의 공격을 준비한것이 였다. 최성규는 얼굴이 별안간 숯덩이처럼 새까매진 강용찬을 지꿎게 여겨보며 계속했다. 《김혁창이라는 그 구빨치가 당신에게로 날아오는 총탄을 자기 몸으로 막고 쓰러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만. 당신은 자기 생명의 은인인 김혁창의 손자를 제 할아버지의 뼈가 묻혀있는 감옥에로 보내고싶지야 않을테지. 빨리 결심을 하오. 시간이 없소.》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강용찬은 고문장에서도 먹방에서도 지어는 사형장의 총구앞에 나서서도 지금 이 시각처럼 마음이 나약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 었다. 친손자보다 더 귀한 존재인 순기에게로 쏠리는 련민의 정을 다잡기 어려웠다. 방학기간에 자기를 찾아오던 대학생이 다름아닌 김혁창의 손자라는것을 알게 되였을 때 이 세상에 없는줄 알았던 사랑하는 안해와 아들을 만난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애때문에 자기의 운명이 너무도 비참해졌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팔걸이를 으스러지게 틀어쥐면서 한마디 한마디 심혼을 비틀어짜내듯이 힘겹게 말했다. 《그 애는 그 누구의 손자이기에 앞서 민족의 장한 아들이요.》 《그러니 어떻게 하자는거요?》 《만약 내가 당신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그 애는 백발이 성성한 내 얼굴에 대고 침을 뱉을것이요. 나는 그 애가 감옥으로 끌려 가는 아픔은 참을수 있소. 그러나 그 애에게서 당하게 될 그런 치욕을 참을수 없소.》 잔뜩 긴장해서 상대방을 지켜보던 최성규는 그 의미심장한 말의 뜻을 깨닫게 되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좋소. 소원대로 그 애를 감옥에 보내드리지요.》 강용찬은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빨리 이 장소를 떠나야지 조금만 더 지체하면 최성규의 그 맷맷한 낯짝을 허비든지 걸상을 들어서 골통을 바수어놓든지 무슨 일을 치를것만 같았다. 《잠간만. 강선생, 후회하지 마시오. 인민군 군관이였고 지리산빨찌산이였던 당신은 옥중고초를 견디여낼수 있었소. 그러나…》 강용찬의 숨소리가 걷잡을수없이 높아졌다. 《여보, 무슨 말인지 빨리 하오. 난 나의 행동을 책임지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소.》 아닌게아니라 강용찬의 얼굴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최성규는 슬며시 일어나 적당히 물러섰다. 《그러나 내 손에서 고생을 모르며 자란 수헌이, 그 애는 아마 견디여내기 어려울거요. 사나흘 잠을 안 재우고 두들겨패면 자신의 망동을 뉘우치고 당신을 원망하게 될거란 말이요. 그래 당신은 자신처럼 그 애를 믿을수 있소?》 강용찬은 자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노라 너무도 이를 악물어서 이발들이 죄다 부스러져나가는것만 같았다. 최성규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 하는 강용찬을 보기가 처음이여서 통쾌하게 웃었다.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당신과는 다르다는걸 알아야지. 모름지기 속대가 약한 그 녀석은 쉽게 휘여들거요. 그러면 나는 그 애를 인차 석방시켜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겠소. 다시는 당신을 찾아가지 않을걸. 난 할말을 다했소.》 최성규는 나가도 좋다는 식으로 한손을 젓고나서 수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돌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복도에 나선 강용찬은 더는 한걸음도 움직일수가 없어 쓰러지려는 몸을 벽에 기대였다. 물고문을 받은것처럼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화를 거는 최성규의 목소리가 복도에까지 울려나왔다. 《구역경찰서요? 나 최성규요. 곧 나에게 날파람있는 젊은이를 세명만 보내주오. 그렇소. 내가 직접 그들을 데리고가서 꽁져오겠소.》 강용찬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문을 받고서 독감방으로 돌아올때처럼 이를 악물고 비칠거리며 검찰청을 나섰다. 27
수헌이는 그날로 체포되여 경찰서 류치장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이튿날 구치소에로 넘어가서 검사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법률상 검사는 자기의 가족이나 친척을 조사하거나 기소할수 없으므로 최성규는 다른 검사에게 조사권을 넘겨주었다. 미결수가 나의 손자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사정을 보지 말라, 그놈은 젊은 혈기에 객기를 부리노라 소위 민심에 동조하여 감히 법을 헐뜯은 놈이니 이 기회에 법의 맛을 톡톡히 보여주길 바란다, 그 녀석이 자기를 뉘우치면 관대하게 처리해달라,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총살을 하든 극형에 처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는 수헌이를 조사하게 된 검사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진주는 구치소에 여러번 찾아갔지만 면회를 거절당했다. 검사의 조사를 받고있는 미결수는 그 누구와도 만날수 없었던것이다. 조사가 끝나고 재판이 진행되여 교도소에 넘어간 경우에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면회를 할수 없다고 했다. 수헌이가 무죄석방될리는 만무했다. 옥중고초를 겪을 그에게 뒤바라지를 해주려면 그럴만 한 자격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진주는 깊이 생각하던 끝에 부모에게 자기가 수헌이와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라고 말했다. 룡세네 부부는 깜짝놀라서 딸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딸이 부모의 승인도 받지 않고 약혼을 했다니 놀라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고 더우기나 약혼상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있었으니 과연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였다. 돈을 버는 재미에 푹 빠져서 다른 일에는 전혀 무관심한 심룡세는 《국가보안법》을 정면공격하는 언론활동을 했기때문에 필자에게 수배령이 내린것도 며칠전에 그가 체포되여 시민들의 화제거리로 된것도 전혀 모르고있었다. 《수헌이라니?! 그가 대체 누구냐?》 진주는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눈을 내리깐채 입을 꼭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 총각이 누군지 아오?》 룡세의 물음에 안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글쎄요, 누굴가? 거 혹시 재작년 겨울방학때 저 애를 만나려고 하얀 승용차를 몰고오군 하던 그 총각이 아닐가요?》 룡세는 그제서야 언젠가 딸의 일기장에서 보았던 그 대학생의 이름이 생각났다. 《가만, 그러니까 너와 함께 양로원에 찾아가군 했던 그 총각을 두고 하는 소리냐?》 꼭 다물린채로 있던 딸의 입이 이제야 방긋 열렸다. 《예.》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서울법대에 다닙니다.》 일류급대학에 다니는걸 보니 총각이 똑똑하겠고 집안도 괜찮을것 같았다. 《부모님들은 뭘하시느냐?》 진주는 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상업거래를 하시고 할아버지는 지방검찰청에 있습니다.》 다소 마음이 놓이였던 룡세는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검찰청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떨렸고 기분이 상했던것이다. 《검찰청이라구? 거기서 뭘 해먹느냐?》 《검사랍니다.》 《하필이면… 으음… 이름이 뭐야?》 《최성규라고 합니다.》 《뭐라구?!》 룡세는 경악을 했다. 얼굴이 삽시에 해쓱해진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한손을 홱 내저었다. 《그건 안된다! 그게 어떤 놈인지 아느냐? 네 아버지를 감옥에 보냈던 놈이야. 망할년, 눈이 멀었느냐? 그놈의 손자와 약혼을 해? 약혼이구 개나발이구 다시는 그 녀석을 상대도 하지 말아!》 룡세가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애지중지 길러온 외동딸에게 이런 쌍욕을 퍼부으며 당장 귀쌈이라도 때릴듯이 펄펄 뛰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여보, 제발 진정하세요.》 안해는 남편이 무슨 일을 칠것만 같아서 얼른 두팔을 들고나서며 딸의 방패막이가 되였다. 《아버지, 최검사가 어떤 놈인가는 저도 잘 알고있답니다.》 예상외로 침착한 딸의 태도에 심룡세는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엉? 그걸 알면서도 그놈의 손자와 붙어다닐건 뭐냐?》 《수헌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최검사의 아들에게 재가를 했지요. 수헌씨의 친할아버지는 사형장에서 희생된 비전향장기수 김혁창이라는분이랍니다.》 《?!》 룡세는 대경실색하여 입을 딱 벌린채 굳어져버렸다. 딸이 자기의 멱살을 움켜쥔것 같아서 숨조차 턱 막혔다. 진주는 수헌이와 사귀게 된 경위를 자초지종 이야기했다. 《…수헌씨는 <국가보안법>의 즉시철페를 주장하는 글을 써낸것으로 하여 최검사와 크게 다투고 집을 뛰쳐나갔어요. 그동안 숨어지내다가 며칠전에 체포되여 구치소에 들어갔답니다. 지금 예심중인데 실형은 피할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 앞으로 수헌씨의 옥바라지를 해줄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약혼녀가 아니면 교도소에서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하기에…》 《그런즉 약혼은 하지 않았다는거지?》 진주는 이제야 비로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예, 부모님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어떻게…》 룡세는 막혔던 숨구멍이 드디여 열린듯이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였다. 《다행이로구나. 넌 그 총각과 더는 상종을 하지 말아라.》 이번에는 진주가 어리둥절해졌다. 수헌씨가 김혁창의 손자라는걸 알려드리면 아버지가 의례히 기뻐할줄 알았다. 자기들의 약혼도 기꺼이 승낙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 저는 수헌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수헌씨는 바로 아버지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가 옥중고초를 겪고있는분들을 민족의 자랑으로 칭송하고 그들을 당장 석방하여 북송할것을 주장한것으로 하여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거랍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응당 이 딸의 결심을 지지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룡세는 얼굴이 컴컴하게 질려서 무거운 한숨만 내쉬였다. 《강용찬선생님은 수십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편지도 한장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검사네 집에서 뛰쳐나온 수헌씨가 옥중에서 그런 소외감을 받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 《글쎄 그건 안된다. 너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어머! 그건 무슨 말씀인가요?》 의혹과 놀람에 가득찬 딸의 눈길을 차마 마주볼수 없어 룡세는 고개를 떨구었다. 남편의 절망적인 모습에서 그 어떤 심상치 않은것을 감촉한 안해가 딸을 타일렀다. 《진주야, 뭘 자꾸만 캐묻느냐? 그저 아버지가 하라는대로 하려무나.》 진주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듯 한 기색으로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에게 어째서 수헌씨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지 그걸 꼭 알아야 하겠어요.》 《그건 알아서 뭘하겠니?》 《그런 훌륭한 사나이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면 저는 분명 존재할 가치가 없는 몸일거예요.》 룡세는 흠칠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진주는 비장한 각오를 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마주보며 단호히 언명했다. 《수헌씨를 사랑할수 없다면 살기를 그만두겠다는거죠.》 룡세는 억이 막혔다. 《너 미쳤니? 어째서 그런 독한 마음을 먹는단 말이냐?》 《아버지, 지금 저에게 있어서 수헌씨에 대한 사랑은 곧 이 나라 민중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 사나이가 민족을 위해 바른 길을 택한 죄 아닌 죄로 이미 가정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감옥에 끌려가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처녀에게서까지 배반을 당하게 된다면 그거야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오자 진주는 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수헌씨는 비록 철창속에 갇혀있어도 변함없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스스로 수난을 겪고있기때문에 더 뜨거운 사랑을 받아야 해요. 저는 부정의가 판을 치는 이 땅에서 참된 인간들이 가야 할 곳이 감옥이라면 진정으로 뜨거운 사랑이 흘러가는 곳도 다름아닌 감옥이라는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어째서 저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겁니까?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룡세는 온실안의 꽃처럼 고이 자란 자기 딸이 이렇게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것을 모르고있었다. 딸에게서 이런 심각한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이미 오래전에 량심수라고 불리울 때 사형장의 총구앞에서 오늘의 이 난처한 자리를 예상해볼수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달리 되였을것이였다. 세월은 모질게도 사랑하는 딸을 내세워서 자기에게 가혹한 심판을 내리고있었다. 《너에게 그럴 자격이 없는것은 떳떳치 못한 이 애비의 딸이기때문이다.》 룡세는 이미 두눈을 감고있었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딸의 눈동자를 더는 마주볼수 없었다. 그는 수치감과 자신에 대한 환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강제에 못이겨서… 아 아니 … 신념을 지켜낼만 한 의지가 부족해서… 바로 그 사형장에서 전향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진주는 한걸음 물러서며 아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 아버지가 전혀 얼굴을 모르는 낯선 사람처럼 생각되였다. 두눈을 감은채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수그리고있는 이 낯선 늙은이는 부들부들 떨고있는 온몸으로 자신을 저주하면서 딸에게 용서를 빌고있었다. 진주는 신음소리를 씹어삼키며 눈을 감았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면 아버지가 더는 견디여내지 못하고 쓰러질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정작 기절해서 나가넘어진것은 자신이였다.
진주는 인차 의식을 회복했지만 정신을 잃었던 몇분어간에 명랑하고 귀엽던 그 모습이 얼음으로 깎은 조각상처럼 차겁게 돌변했다. 룡세는 랭기를 풍기는 딸의 모습을 언뜻 바라보기만 해도 대뜸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드는것만 같았다. 원망이 어린 눈길로 말없이 자기를 쳐다보다가 정작 눈길이 마주치면 황급히 외면하면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군 하는 안해를 대하기도 괴롭고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며칠이 지나갔지만 화목하던 가정에 깃든 랭랭하고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자신이 낳아 키운 딸자식에게서 존경이 아니라 말없는 저주를, 랭대를 받게 된 아버지는 인생의 허무감을 쓰겁게 맛보게 되였다. 무서운 번민과 자책속에 시달리던 그는 해결책을 의논하려고 하는수없이 양로원에 찾아갔다. 강용찬이도 구치소에 갇혀있는 김혁창의 손자때문에 마음고생을 되게 하는 모양이였다.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더 늙고 병약해서 헐끔해보였다. 그러나 엄격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안겨주는 눈초리만은 오히려 더 날카로와진것만 같았다. 그 눈초리와 마주치기만 해도 룡세는 중압감을 받으면서 절로 주눅이 드는것이였다.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나?》 상대방의 그저 별치 않은 이런 질문조차 룡세에게는 혹독한 추궁처럼 아프게 안겨왔다. 그는 떳떳치 못한 과거의 오점을 덮어두려고 하다나니 자기를 투쟁의 길에 이끌어주었던 동지이며 제일 가까운 선배였던 강용찬이까지도 의식적으로 멀리한것이였다. 《강형, 이거 면목이 없소만 나를 좀 도와주시우. 이 일을 어쩌면 좋소? 내 딸이, 진주가 구빨치 김혁창의 손자를 사랑하는군요.》 《나도 알고있네.》 그 대답이 너무도 흔연스러워서 룡세는 어마지두 놀랐다. 《아니, 알고있으면서야 왜 내버려두었소?》 《그거야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나같이 너절한 놈이 감히 어떻게 김혁창동지의 사돈이 될수 있겠소. 정말 못하겠소.》 룡세는 자신의 처지가 더 굴욕스럽고 비참하게 여겨져서 꺼이꺼이 흐느끼며 넉두리를 했다. 강용찬은 그러한 룡세의 모습을 보는것이 괴로와서 위로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사람아, 그만하게. 자식이 아버지의 과오를 책임질수야 없지 않나. 또 자네가 전향을 했으면 강제에 못이겨서 그리된것이지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서 그리된거야 아니지 않나.》 강용찬이가 너그럽게 나올수록 룡세는 죄책감이 급증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전향을 했다 안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였다. 전향을 거부했기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들은 그 얼마던가. 바로 그때문에 지금도 옥중에서 고초를 겪고있는 동지들은 몇몇이던가. 이것을 생각하면 살아남았다는 그자체가 스스로 역겨울 지경이였다. 《강형, 나는 절대로 용서를 받을수 없는 놈이요. 이 더러운 목숨이 아까워서 총구앞에서 한걸음 물러선것으로 하여 나는 한생을 량심의 가책속에 살아오지 않으면 안되였소. 이런 인생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하다는걸 이제야 깨닫게 됐단 말이요.》 강용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생각이 난듯 물었다. 《진주가 그걸 알고있나?》 《예, 그 애가 수헌이와 이미 약혼한 사이로 하고 앞으로 옥바라지를 해주겠다기에 넌 이 떳떳치 못한 애비때문에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해주었지요.》 그 말을 듣고 진주가 얼마나 놀랐고 괴로와했겠는가는 구태여 룡세의 말을 더 듣지 않아도 알만 했다. 《진주는 이미 자네의 딸만이 아닌것 같네. 그 애는 이 나라, 이 겨레의 장한 딸인거야. 수헌이 역시 이 나라, 이 겨레의 아들이라면 진주의 그런 헌신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걱정스러워서 잠이 다 안 오네.》 강용찬은 붉은 실이 엉킨 두눈을 왼손으로 비비고나서 자기의 착잡한 심중을 터놓았다. 《최성규놈이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자기의 손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수헌이는 사나흘만 잠을 안재우고 두들겨패면 쉽게 굴복할거라는거야. 그러면서 나에게 당신은 자신처럼 그 애를 믿을수 있는가고 묻더군. 나는 대답을 못했네.》 룡세는 다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즉 강용찬은 자기보다 더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고있었다. 만약 수헌이가 놈들에게 굴복한다면 비전향장기수인 할아버지의 고결한 넋에 먹칠을 하게 될것은 물론이요, 자기의 딸인 진주의 헌신적인 사랑도 모욕하게 될것이였다. 최성규놈의 말마따나 호의호식하며 자라난 그 젊은이가 혹독한 고문과 참을수 없는 항시적인 굶주림, 무서운 병마, 견디기 어려운 고독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매돌처럼 갈아버리는 감옥생활에서 꽤 견디여낼수 있겠는가? 하긴 감방생활은 재판전의 예심기간에 대면 오히려 편안하다고 볼수 있다. 검사의 조사를 받는 기간에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서 웬간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굴복하거나 육체적으로 페인이 되는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구치소에서 그 젊은이가 당할 정신육체적인 고통을 상상해보니 자신이 겪었던 그 고통이 온몸에 되살아나서 막 치가 떨렸다. 자기의 심정이 이럴진대 지금 강용찬이 겪고있을 정신적인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룡세는 뭐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헛기침을 하며 갑자르기만 했다. 이때 가벼운 두드림소리가 나더니 이 며칠사이에 반달처럼 얼굴이 갸름하고 수척해진 진주가 들어왔다. 진주는 뜻밖에도 여기에 와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자 입술이 새파래서 그 자리에 굳어졌다. 강용찬은 근심어린 기색을 얼른 감추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진주가 왔구나. 무슨 일로 왔니?》 진주는 고개를 소곳이 수그린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때문에 그러느냐? 일없다. 어서 말하려무나.》 강용찬이 거듭 재촉해서야 진주는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래일 수헌씨를 재판한다는 공시가 나붙었습니다.》 그 소리에 가뜩이나 불안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쩡 얼어붙는것만 같았다. 룡세는 급한 김에 벌떡 일어났다. 《강형, 변호사를 대야지요. 빨리 서두릅시다.》 강용찬은 뭔가 신중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것 같네.》 《왜요? 돈때문에 그럽니까? 돈은 제가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진주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아버지를 놀란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니, 그 애야 법대학생이 아닌가. 법을 론하는 글까지 쓴 애에게 무슨 변호사가 필요하겠나. 난 래일 재판소에 가겠네. 그 애가 자기를 어떻게 변호하는지 꼭 봐야 하겠어.》 강용찬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비장했다. 《그럼 제가 래일 아침에 택시를 가지고 여기로 오겠으니 함께 갑시다.》 《고맙네.》 룡세가 밖으로 나가자 강용찬은 오도카니 서있는 진주의 등을 다정히 떠밀어주었다. 《자, 어서 아버지와 함께 가거라. 래일 또 아버지와 함께 오면 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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