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양로원의 밤경비를 서던 령감이 임금문제로 총무와 티각태각하고나서 침을 탁 뱉고 나가더니 사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통에 총무는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고 손바닥만한 광고도 붙여보았지만 쥐꼬리만한 로임을 바라고 매일 밤 양로원의 경비를 서주겠다고 나서는 대상이 없었다.

하는수없이 사흘밤을 꼬박 경비실에서 지새운 총무는 생각다 못해서 양로원의 늙은이들가운데서 누구 한사람을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곱게 응해주는 늙은이가 없었다. 이 방 저 방 찾아 다니며 사정도 해보고 구슬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젠장! 그럼 내가 계속 밤경비를 서라는거요? 양로원의 경리사업은 하느님이 해준답디까?

나두 모르겠시다. 까짓거, 될대로 되라지.》

총무가 그 달달 끓는 성미에 약이 바싹 올라서 복도에 나와 큰소리로 두덜거리는데 강용찬이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이 사람아, 왜 그러나?》

총무는 하소연을 하듯이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럼 내가 경비를 서주지.》

다른 누구도 아닌 강용찬이가 이렇게 선뜻 나서주기에 총무는 너무도 황송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아니, 선생님이 어떻게 그런 천한 일을 다 하시겠다고 그럽니까? 몸도 불편하신데요.》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하는거요. 귀한 일, 천한 일이 따로 없지. 내가 오른팔이 제대로 붙어있었다면 어디 가서 막일을 해서 벌어먹어도 양로원의 신세는 지지 않았을거요. 그러니 신세갚음을 하는셈치고 경비를 서주지.》

총무는 그저 고마와서 고개를 갑삭거렸다.

《선생님이 그럼 수고를 해주십시오. 얼마되지는 않지만 임금을 지불해드리겠습니다.》

《그건 경리사업에 보태쓰라구.》

이처럼 총무의 마음을 더 흡족하게 해주고나서 강용찬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물었다.

《참, 나를 찾아오던 애들이 요즘엔 왜 움쩍을 안할가? 자네 모르겠나?》

총무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였다.

강용찬에게 있어서 며칠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헌이와 진주에게 지나온 나날을 더듬어 이야기를 들려주는것은 커다란 기쁨이였고 실로 수십년만에 누려보는 락이였다. 하기에 어인 일인지 그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고 심한 고독감에 휩싸이게 되였다.

그는 수헌이와 진주를 기다리기에 지쳐버렸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싶어서 령남특산음식을 전문으로 한다는 그 음식점에 찾아가볼 생각까지 하던참이였다.

총무는 자기 일을 도와주겠다고 자진해나선 고마운 늙은이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수 없어서 솔직히 말해주었다.

《나는 경찰서로부터 그 대학생들을 양로원에 들여놓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전에 그들이 찾아온걸 돌려보냈 지요.》

《허, 경찰서가 할일도 없나 보군.》

강용찬은 우정 무랍없이 총무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이보게, 자네 늘그막에 락이 뭔지 아나?》

총무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야 뭐 배불리 잡숫고 편히 쉬는거겠지요.》

《아닐세. 그게 뭔고 허니 손자들과 노는거야.》

총무는 어이가 없었던지 픽 웃었다.

《선생님에게 뭐 손자들이 있습니까?》

《있구말구. 그 대학생들은 내 손자나 손녀와 다름이 없어. 헌데 임자는 이 늙은이가 가끔 찾아오는 그 애들에게 옛말이나 해주는것까지 경찰서에 고해바쳐야 하겠나?》

그리고보니 자기가 너무 좀스럽게 논것 같아서 총무는 얼굴을 붉혔다.

《전 그저 경찰서에서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빠짐없이 장악하여 통보하라기에…》

《경찰서에서는 이 늙은게 양로원에 들어앉아서 폭탄을 만들가봐 겁이 나는 모양이군. 난 그 애들이 찾아오면 옛말밖에 해주는게 없으니까 임자는 그저 못 본척 하게나.》

총무는 기꺼이 응했다.

《예. 사실 말이지 선생님이야 법이 없이도 사실분이지요. 우리 양로원의 늙은이들이 다 선생님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편하신 몸으로도 양로원사업에 적극 참여해주시니 이거 무슨 말로 사의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리하여 강용찬은 밤이면 창문곁에 있는 경비실에 나가게 되였다. 경비를 서니 생각지도 못했던 유익한 점이 있었다. 각종 우편물과 출판물들이 경비실을 거쳐서 본인들에게 전달되는데 그 기회에 신문이나 잡지들을 빠짐없이 읽어볼수 있었다. 또한 경비실에는 전화기도 있어서 필요하면 전화도 마음대로 하거나 받을수 있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기사들을 보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정치정세는 급변하고있었다.

쏘련과 동유권의 사회주의나라들이 자본주의로 되돌아간다더니 무근거한 랑설이 아니였다. 10월혁명의 포성도 들어보지 못한 풋내기들이 집권하면서 전 세대가 피로써 쟁취하고 땀 흘려 이룩해놓은 성스러운 모든것을 부정하고 모독하고있었다.

남조선의 정치인이라는 자들은 국회를 둘러싸고 련일 개싸움을 일삼고있었으며 한때 그 무슨 기적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대던 경제는 혹심한 경기침체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벌써 5년째나 지속되는 경제위기는 기업들을 무리로 파산시키고 실업자들을 무리로 토해내고있으며 물가는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뛰여오르고있었다.

당국이 공식발표한 자료를 보아도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려운 《절대빈곤층》이 4백만선을 넘어섰고 자살, 매춘, 마약거래, 어린이매매, 고아수출 등이 때를 만난듯이 성행하고있었다. 괴뢰정부예산가운데서 이른바 사회복지비란 명색뿐이였다. 하기에 양로원의 침식조건도 날을 따라 불리해져서 늙은이들이 불평을 부리고있었다.

강용찬을 기쁘게 해주는것은 남조선의 민주화운동이 사회변혁과 조국통일을 대담하게 당면목표로 제기하고 과감히 전개되고있는것이였다.

이에 고무된 언론이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반민주적이며 반통일적인 《국가보안법》에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짙은 어둠속에 가리워있던 일들, 안기부나 교도소의 고문실에서 이미 벌어졌거나 현재 벌어지고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조심스럽게 지면을 통하여 공개되고있었다.

그는 가물에 콩나듯 이따금씩 나오는 그런 기사들을 여러번 반복하여 주의깊게 읽고나서는 창밖의 어둠속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잠기군 했다. 그럴 때면 의례히 조국통일을 위하여 총탄이 우박치는 결전장에서 피 비린내가 풍기는 고문장과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장에서 만세를 목청껏 부르던 동지들의 모습이 련이어 떠오르고 못잊을 지난날들이 어제런듯 생생히 돌이켜지군 하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저녁식사를 하고 경비실에 나와서 방금 우편배달부가 두고간 석간신문을 보고있었다. 그런데 문득 밖에서 헛기침소리가 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봄가을 외투차림에 중절모를 푹 눌러쓴 웬 사람이 어둠속에서 자못 불안한듯 두리번거리며 서있었다.

《거 누구요?》

강용찬이 큰소리로 묻자 상대방은 얼른 창문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기 소개는 하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강용찬이란분을 조용히 만날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것이였다.

《내가 강용찬이요.》

상대방은 와뜰 놀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강용찬은 자기를 찾아온 정체모를 손님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둠속이여서 누군지 가늠을 할수가 없었다. 어쨌든 심상치 않았다.

《나를 만나러 왔으면 거기에 서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오.》

상대방은 고개를 떨군채 그대로 서있었다.

이윽고 중절모를 벗어들며 중얼거린다.

《난 강형을 뵈올 낯이 없는 사람이요.》

침울하고 처량한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자네 심룡세가 아닌가?》

강용찬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작정 반가와서 한손으로 룡세를 껴안으려던 그는 무춤 굳어지고말았다.룡세가 그 순간에 매를 피하려는듯 한손을 엉거주춤 들어올리며 목을 움츠렸기때문이였다.그 모습이 얼마나 가련했던지 보는 사람이 오히려 무참해질 지경이였다.

강용찬은 말없이 돌아서서 경비실에 들어가 제자리에 앉았다. 주저주저 뒤따라 들어온 룡세는 문지방에 고개를 떨군채 서있었다.강용찬은 그를 외면한채 창밖의 어둠속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용감하게 싸운 그 많은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가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인간인 심룡세가 나를 찾아왔는가?

《정말 면목이 없수다.》 하고 룡세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한채 코멘소리로 중얼거렸다.《강형은 나때문에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는데 이놈은 이래저래 의리를 지키지 못했으니 사람이 아니요.그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후려갈기던가 욕이라도 씨원하게 해주구려.》

강용찬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어둠속만 지켜보고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밤이였다.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북상하기 위하여 또다시 소부대는 동굴에서 나와 출발하였다.실패를 거듭한 포위돌파전에서 대오는 현저히 줄어들었다.겨우내 놈들의 토벌공세를 겪으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대로 시달리다나니 사실 강행군을 할 형편이 못되였다.그렇다고 그저 앉아서 죽을수는 없는 일이다.그래서 마지막으로 사생결단하고 떠난 길이였다.

이밤에도 적들은 지리산의 곳곳에 불무지를 피워놓고 수색작전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출발해서 기껏 십분도 되나마나했는데 방금 그들이 떠난 동굴쪽에서 총소리가 울려왔다.대원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모두들 천만다행이로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하지만 강용찬은 미타한 생각이 들어서 대오를 점검해보았다.

한사람,심룡세가 보이지 않았다.

요즈음 완전히 기가 꺾이여서 때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군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쨌든 그를 두고 갈수 없었다. 총소리는 그의 신변에 위험이 닥쳐왔다는것을 의미했다.

《잠간만 기다리시오.》

강용찬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적들에게서 로획하여 사용하던 카빙총을 틀어쥐고 동굴쪽으로 달려내려갔다.

동굴입구가까이에 접근하니 쌍스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야! 냉큼 일어나지 못해?》

《자식! 꾸물거리긴,쏴죽이고 말가부다.》

동굴안에서 전지불이 번쩍거렸다.

두손을 뒤로 결박당한 룡세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앉은자세로 뻗치는중이다.그를 둘러싼 놈들은 셋인지 넷인지… 강용찬은 놈들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점발로 두놈을 쏴눕히고 다른 놈을 겨누려는데 그놈이 먼저 총부리를 돌려대며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그는 오른팔을 콱 잡아채는듯 한 강한 충격에 모로 나뒹굴었다. 그러면서도 룡세에게 뛰라고 웨치는것을 잊지 않았다. 뭔가 어둠속에서 치고 받는 소리가 나더니 룡세가 달려나와 소리쳤다.

《강형! 어디에 있소?》

《음,여기…》

강용찬은 겨우 대답을 했다.그 소리를 못들었는지 룡세는 두팔을 묶이운 몸으로 정신없이 올려뛰였다.뒤미처 동굴안에서 뛰여나온 놈이 그쪽에 대고 마구 총질을 하며 정신이 나간것처럼 소래기를 질러댔다.

《저놈을 잡아라! 개자식!》

근처에 있던 수색대놈들이 와 하고 동굴쪽으로 몰려왔다.

강용찬은 모진 아픔을 참으며 카빙총을 바로쥐려고 했지만 오른팔을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었다.가까스로 몇메터 기여가던 그는 시내가의 축축한 바위짬에 몸을 틀어박았다.

수색대놈들이 부리나케 옆으로 지나갔다.전지불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뭔가 차고 뭉클한것이 그의 얼굴우에 훌쩍 뛰여올랐다가 툭 튀여나갔다.개구리인것 같았다.

《한놈이 분명 이쪽에서 나가 넘어졌거든.》

《임마,뭘 멍청히 서있어.샅샅이 뒤져봐.》

놈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저벅저벅 개울창을 밟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총탄이 뚫고나간 팔굽이 못 견디게 쑤셔났다.

지혈을 시켜야 하겠지만 주변에서 적들이 쏘다니고있어 서뿔리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피는 계속 흘러나가고 의식은 각일각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날로부터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흐른것이다.

그는 여전히 창밖의 어둠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나직이 그러나 엄하게 물었다.

《자넨 그때 왜 동굴에 남아있었나?》

그때 룡세가 대오를 따라섰더라면 그들의 운명은 달라졌을수도 있었다.하긴 당시의 형편에서 지리산에 쭉 깔려있던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나가 북상한다는건 거의나 불가능한 일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다른 대원들도 포위망을 뚫고나가다가 거의 다 희생되였다.

《난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더군요.그래서 생각하기를…》

《적들에게 투항할 작정이였나?》

《강형!》 하고 심룡세는 울분에 차서 부르짖었다.《투항이라니?! 난 그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소.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산에서 빠져 내려가서 어머니가 무사한지 그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싶었소.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조용히 살아가고…》

룡세의 목소리는 흐느낌소리로 변했다.

《그래 그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나?》

《하긴 어리석었소.그것도 실현 불가능한 일이였는데… 그저 승산이 있든없든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어야 떳떳한건데…》

강용찬은 더 말이 없었다.

창밖을 노려보며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심룡세는 그가 방금 한 질문보다 더 무서운 질문을 할가봐 두려웠다.

왜 전향을 했는가?

이 질문에는 변명할 체면조차 없었다.

일각이 삼추같은 끝없이 길고 긴 감방생활이 해를 넘기고 또 넘겨서 어느덧 십년을 가까이 하고있었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세월을 감옥에서 어떻게 견디여낼수 있었던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였다.만약 자기 혼자서 겪는 옥중고초라면 자기는 십년이 아니라 십개월도 지탱해낼수 없었을것이였다.그러나 많은 동지들이 함께 그 모진 시련을 이겨내고있었다.그는 굴할줄 모르는 동지들의 정신력에 고무되였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사그러지려는 용기를 가까스로 가다듬군 했다.

리승만독재정권을 끝내 꺼꾸러뜨린 4.19항쟁의 웨침소리가 두꺼운 감방벽을 뚫고 울려왔다.

청년학생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민주인사》가 대통령이 되였다니 굳게 닫겨진 감방문도 곧 열리게 되는가 싶었다.그는 온몸이 귀가 되여 피가 타도록 그 소식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5.16군사쿠데타로 어제날의 오까모도중위가 정권을 가로챈것이였다.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였고 대통령감투를 쓴 《민주인사》조차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였다.부정과 무력한 정치인을 더는 신뢰할수 없어 정부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군부가 여섯개 항목으로 된 성명을 공표했다.

그것을 쥐여짜면 반공이였다.

반공을 하지 않으면 북에 남침의 기회를 준다는것이였다.그래서 모든것이 반공으로 일색화되였다.정부도 정당도 정치도 군대도 사상도 지어는 교육까지도…

심룡세의 견해에 의하면 무기를 언도받은 사상범들이 옥중에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가까스로 이어나가면서 애오라지 바라는것은 현 정부의 전복과 새 정부의 출현이다.그것은 곧 그것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운 사상범들의 석방을 의미하며 그들이 고통의 밑바닥에서 영광의 정상에로 일약 용솟음치게 된다는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4.19항쟁에서 흘린 열혈청년학생들의 피의 대가를 뻔뻔스럽게 가로챈 박정권은 반공과 파쑈독재에 있어서 리정권의 뺨을 치고있었다.

무기란 문자그대로 기한이 없는거다.고통스러운 삶의 마지막순간까지 감방에 갇혀있어야 한다.그렇게 오래 살다가 죽을바에는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 편이 낫지 않을가? 그래서 룡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독한 마음까지 먹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귀가 번쩍 열리는 소식이 날아들어왔다. 십년이상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석방시킨다나.정말로 그런 선심을 쓸 잡도리인지 고등검찰청에서 검사까지 내려와서 십년이상 복역중인 사상범들을 한명씩 불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불리워나간 동지들은 웬일인지 감방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다 석방되였는가? 아니면? 더 생각하기조차 속이 떨렸다.초긴장상태에 있는데 간수가 감방문을 열더니 룡세의 수인번호를 불렀다.간수는 그를 교무과장의 방으로 호송했다.

교무과장과 몇달전에 새로 생긴 전향공작을 담당한 반장은 차렷자세로 서있었고 교무과장의 자리에는 군복을 입은 자가 틀스럽게 앉아있었다.바로 그 장교가 자기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심선생,정말 오래간만이요.날 몰라보겠소?》

이게 누구야?

룡세는 놀라도 이만저만 놀라지 않았다.

장교는 다름아닌 십년전에 자기를 무기형으로 기소한 최성규검사였던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소.우린 심선생을 석방시키기로 했습니다.자,이걸 읽어보고 동의한다면 지장이나 찍으면 됩 니다.》

최검사는 종이 한장과 인즙통을 룡세앞으로 밀어놓았다.

룡세는 종이장에 씌여있는 글을 눈으로 읽어보았다.사회에 나가면 현 정권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판에 박은 내용의 서약서였다.이따위 종이장은 너무 구경을 해서 쳐다보기도 싫었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거절하십니까?》

최검사는 하얀 손으로 역시 하얗고 뾰족한 턱을 어루만지면서 새물새물 웃었다.

《서약서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요? 그러면 선생이 쓰고 싶은대로 쓰시오. 석방절차상 뭐든지 쓰긴 써야 할테니까.그저 사회에 나가면 가정을 이루고 생업에 힘쓰겠다는 식으로 써도 됩니다.》

룡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전향서도 아니고 서약서도 아니다.전향의 의미도 서약의 의미도 없는 일종의 생활계획서라고 볼수 있었다.그런데도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러면서도 십년만에 거짓말처럼 차례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그는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자기의 속심을 빤히 꿰뚫어보고 있는듯 한 최검사의 얄미운 눈길을 도전적으로 마주보며 그만 짜증을 냈다.

《그런걸 꼭 써야만 되겠습니까?》

《써야지요.무기수를 석방시키는건데 이 정도의 문건수속도 하지 않으면 되겠나요.이건 그저 석방에 필요한 실무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거예요.

바란다면 비밀도 담보해드리겠습니다.》

심룡세는 바싹 긴장해졌다.

만약 이것이 생활계획서라면 어째서 비밀을 담보해주겠다고 하겠는가? 전향을 시키기 위한 얼림수가 틀림없었다.

《어리석게 처신하는군.》

최검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여보,당신이야 뭐 인민군대요 의용군이요?

일정때도 그래 광복후에도 그래 언제 한번 배를 곯아보기나 했소? 공연히 빨갱이들의 추동질에 넘어가 안할 고생을 사서 하거든.》

심룡세는 자기가 지리산의 당당한 빨찌산대원이였다고 웨치고 싶었다.그러나 자중했다.공연히 그런 말을 해가지고 자신의 처지를 더 불리하게 만들고싶지 않았던것이다.감옥에서는,특히 이 런 장소에서는 그런 말 한마디를 당당히 하려고 해도 목숨을 내대는 용기가 필요했다.

최검사는 구태여 더 전향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았다.그는 너무도 흔연스럽게 실무적으로 판결을 내렸다.

《좋습니다.그럼 생명을 꺾어도 좋으니 비전향을 없애라는 대통령각하의 특명에 따라서 당신을 처리하겠소.》

생명을 꺾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사형이라는건가?

룡세는 전신의 기운이 탁 풀려서 하마트면 그 자리에 물러앉을번 했다.더우기나 놀라운것은 간수가 아니라 엠-16소총으로 무장한 헌병 두놈이 살기를 풍기며 들어온것이였다.놈들은 룡세의 손목에 수정을 채우더니 감방이 아니라 교도소뒤마당으로 끌고나갔다.

거기에는 풍을 친 군용트럭들이 서있었다.

룡세는 총부리에 등과 옆구리를 찔리우며 어느 한 트럭의 적재함우에 올라탔다.감방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지들이 여기에 비좁게 실려있었다.

모두들 죽음을 예감했는지 비장한 기색으로 묵묵히 자기 상념에 잠겨있었다.

무장한 헌병 두놈이 마감으로 꽁무니에 오르자 트럭들은 시동음을 요란하게 울리며 출발하였다.

누군가 사람들 틈사귀를 비집고 앉은걸음으로 곁에 다가오더니 무릎으로 룡세를 툭 건드렸다.

한 절반 얼이 나가서 멍청하니 앉아있던 그는 와뜰 놀라며 돌아보았다.

이게 누군가? 천만뜻밖에도 상대방은 십년전에 남원포로수용소에서 헤여졌던 강용찬이였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만나니 반갑다 해야 할지 공교롭다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강용찬은 왼팔만 뒤로 비틀리운 상태였다.

아마 그때 부상당한 오른팔은 절단한 모양이였다.이곳 공주교도소는 일정때부터 불구자들을 수용하는 장소였다.그러니 강형은 여기에 이감되여온지 오랬을것이다.룡세는 부산교도소에 있다가 여기로 온지 몇달밖에 안되였다.그래서 강형이 여기에 있는줄도 여태 모르고있었다.

《강형, 놈들이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운전칸에 몸을 기대고 돌아서서 수인들을 감시하던 헌병이 눈을 부라리며 꽥 고함을 쳤다.

《거 지껄이는게 웬 놈이야?》

아무리 헌병이래도 새파랗게 젊은 녀석인데 말버릇이 고약했다.

《찍소리 말고 잠자코 있어.우린 빨갱이죄수들한테 기가 꺾여서 비위를 맞춰주던 간수나부랭이가 아니야.듣자니 교도소놈들이 전향공작을 하다가 실패했다는데 고문이나 해가지고 어떻게 빨갱이들을 돌려세운다고 그 지랄이여.우린 애당초 그따위 놀음 그만 두고 전향을 안하겠다는 놈들은 없애버리자는거야.》

놈은 당장 방아쇠를 당길듯이 소총의 격발기를 절컥거리며 서슬이 퍼래서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들 죽고싶지 않으면 이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군부가 정부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거든.사법권도 우리가 쥐고있어.대통령까지도 우리가 죽이고싶으면 죽이는거구 살리고싶으면 살리는거란 말이다.》

놈은 세상이 제 손아귀에 들어있는것처럼 기고만장했다.

군용차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멈춰섰다.

《내렷! 빨리빨리,뭘 꾸물거려?》

헌병이 총부리를 휘두르며 들볶아댔다.

역시 엠-16소총으로 무장하고 대기중에 있던 헌병들이 트럭에서 내린 수인들을 총부리로 몰아서 한줄로 길게 늘여 세웠다.그리고나서 저희들은 십메터쯤 떨어진 맞은편에 정렬했다.이제 사격준비구령이 내리면 놈들은 총으로 겨냥을 할것이고 쏴!구령이 울리면 방아쇠를 당길 판이였다.

찌차 한대가 달려와 멈춰서더니 장교복차림의 최검사가 교도소장과 함께 내렸다.두놈은 야전가방에서 꺼낸 무슨 문건인가를 번져보며 쑥덕거리더니 사형수들쪽으로 걸어왔다.

최성규는 맨끝에 서있는 사형수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짤막하게 물었다.

《이름은?》

《박승호.》

대답 역시 짤막했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하시오.》

상대방은 쓰거운 미소를 짓는것으로 대답했다.

최성규가 손짓을 하자 교도소장은 문건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연필로 뻑 그어버렸다.

최성규는 다음에 서있는 사형수앞에서 멈춰섰다.

《이름은?》

《김혁창.》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하시오.》

역시 침묵이였다.

그옆에 룡세가 서있었다.

이미 얼이 절반 나간 상태로 트럭에 올랐던 그는 사형장에 나선 지금 그 나머지얼마저 쑥 빠져나간것만 같았다.이젠 마지막으로 말 한마디를 할 권리만이 남아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따라서 혹시 살수도 있었다.

살고 볼판이다.죽다니?! 왜 죽는단 말인가? 어째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대를 이어줄 자식이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다.죽었다고 슬퍼해줄 안해도 없는 내가 아닌가. 장가도 못 가본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우리 심씨가문은 끝장이 난다.칠년간이나 갖은 고생을 다하며 옥바라지를 해주던 어머니도 사망했는데 그래 3대독자인 나마저 죽어야 한단 말인가?

완전히 절망에 잠긴 그는 자기앞에 다가와 이름을 묻는 최검사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최성규는 이미 죽어버린듯 사색이 되여 눈을 감은채 대답조차 하지 않는 그를 싸늘한 눈초리로 흘겨보더니 자리를 떴다.

《검사님!》

룡세는 뒤늦게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급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이미 강용찬의 앞에 다가섰던 최성규는 고개를 돌렸다.

《왜? 할말이 있습니까?》

《예. 저는…》

룡세는 불시에 혀가 굳어져서 몹시 당황해하며 한마디한마디 짜내듯이 말했다.

《저는… 생활계획서를… 쓰겠습니다.》

최성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잘 리해되지 않는다는듯이 물었다.

《생활계획서라는건 뭡니까? 아마 전향서겠지요?》

룡세는 숨이 탁 막혔다.

강용찬의 부릅뜬 두눈이 자기를 무섭게 쏘아보고있었던것이다.

일이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아까 교무과장의 방에서,십년이 넘도록 함께 옥중고초를 치른 동지들이 쳐다보지 않는데서,특히는 강형이 쏘아보지 않는 그곳에서 최검사의 요구에 응했을걸 그랬다.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떳떳한 죽음을 피해 비굴하게 한걸음 비켜선 주제에 이건 좋고 저건 싫다는 타박을 할 계제가 못되였다.

인간의 존엄과 인격을 지키기 위한 선택의 권리를 그는 이미 상실한것이였다.

《예. 전향서를 쓰겠습니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 긴장해서 그를 지켜보던 최성규는 매우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심군,진작 그렇게 처신했어야지.응?》

이 짜장 너그러운 목소리는 존대가 아니라 하대였다.법관들도 사상범,량심수들을 감히 하대하지 못한다.그들이 사상범이며 량심수인 까닭에 싫든좋든 선생이라고 불러주어야 하는것이다.

그러나 심룡세의 값은 선생이라는 높은 경지에서 군이라는 하바닥으로 추락하였다.최검사는 이미 굴복한 적수를 존대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교도소장,심군을 넘겨받으시오.》

교도소장은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리 나와!》

심룡세는 형언할수 없는 수치감에 몸을 떨며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두어걸음 나섰다.생명의 안전은 담보를 받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쁨은 고사하고 다행스러움조차 느낄수 없었다.

이렇게 되여 서로 굳게 련결된 강철고리들가운데서 녹쓸어버린 하나의 고리가 끊어져나갔다.이제 또 어느 고리가 끊어질것인가? 그러한 련쇄반응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면서 빙긋이 웃는 눈으로 사형수들을 둘러보고난 최성규는 강용찬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이름은?》

《강용찬.》

《강선생,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겠지요?》

그 어떤 권유와 기대가 담겨진 은근하고 부드러운 물음이였다.강용찬은 흔연히 대답했다.

《예,있습니다.》

최성규는 교도소장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어서 말씀하십시오.》

강용찬은 불쑥 한걸음 나와서 총부리를 등지고 동지들을 향하여 돌아섰다.

교도소장의 뒤에 움츠리고 서있는 룡세는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그의 행동을 질겁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왼팔을 뒤로 비틀어서 수정을 채웠기때문인지 구부정해있던 강용찬은 허리를 쭉 펴며 고개를 들었다.너무도 일찍 희여지기 시작한 짧은 머리칼이 그를 로인처럼 겉늙어보이게 했다.하지만 그 머리칼조차 이 순간에는 그에게 백전로장의 풍격을 유감없이 부여해주는듯 싶었다.

《동지들의 생각은 어떻소? 우리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합쳐 만세나 힘차게 불러보기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슨 의논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한 그는 별안간 전신에 힘을 주며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웨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그의 선창에 호응하여 동지들은 수정을 찬 두손을 일시에 머리우로 추켜들었다.

《만세!- 만세!》

죽어도 통일조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죽으려는 사람들의 만세소리는 살벌하고 음산하던 사형장의 분위기를 산산이 깨뜨리며 창공높이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룡세는 얼른 두눈을 꽉 감았다.

이제 몰방으로 총소리가 울리면 피를 뿌리며 쓰러질 어제날의 동지들을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었던것이다.

《탕!-》

한방의 야무진 총소리가 무시무시한 메아리를 일으키며 울렸다.

강용찬은 누군가 휙 달려나와 자기의 몸을 막아서더니 밑둥이 찍힌 나무처럼 빙그르 돌며 넘어지는것을 그 찰나에 보았다기보다 느꼈다.

잔등에 면바로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은 구빨치로서 지리산에서도 교도소에서도 비전향장기수들의 존경을 받던 김혁창동지였다.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은 동지의 희생을 목격하고 준엄한 눈빛으로 굳어졌는데 기겁을 하여 놀란것은 몇걸음 옆에 서있던 최검사였다.그놈은 헌병들쪽으로 홱 돌아서더니 목청이 째지도록 고래고래 소래기를 쳤다.

《사격중지! 개자식들! 누가 쏘라고 했어?

하마트면 내가 맞을번 했단 말이다!》

백지장처럼 해쓱하게 질린 그자의 상판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노라 불깃불깃하게 상기된 옥중투사들의 얼굴과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놈들은 사형장에서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한 비전향장기수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교도소로 떠났다.누가 먼저 선창을 뗐는지 줄 지어 달리는 트럭들의 적재함에서는 노래소리가 비장하게 울려나왔다.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기발을 물들인다

 

잔뜩 기고만장하여 허세를 부리던 놈들은 기가 푹 죽어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강용찬은 동지의 시신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듯 한 눈으로 말없이 지켜보고있었다.

 

높이 들어라 붉은 기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그 노래를 함께 부를수 있는 자격을 이미 상실한 심룡세는 적재함뒤 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꼼짝없이 앉아있었다.자꾸만 가슴이 졸아들어서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다.마치도 죽은 사람은 김혁창이가 아니라 자기인것만 같았다.

그날 최성규검사가 각본을 짜고 연출한 무대인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던 비전향장기수들가운데서 세명이 자기가 있던 감방에 돌아오지 못했다.

김혁창은 교도소구내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히고 강용찬은 하나밖에 없는 손에 수정을 찬채로 엄정독거를 치르러 먹방에 들어갔으며 심룡세는 전향서에 지장을 찍고 감옥문을 나섰던것이다.

그 두사람이 지금 마주 앉아 밤을 지새우고있었다. 한사람은 변한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였고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뿐이지 지금도 철창속에 갇혀있는 몸이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너무도 몰라보게 변했다. 죽지 않으려고 전향을 강요당한 그는 남쪽땅의 국민이 되였고 빵을 팔고 술도 팔아서 걱정없이 살게 되였다. 그런데 재산깨나 모았다는 부유한 자가 의지가지할데 없어 양로원에 몸을 담은 극도로 빈궁한 자를 찾아와서 차마 얼굴을 들수가 없어 고개를 떨구고있는것이다.

《너는 왜 전향했는가?》

룡세는 자기가 못내 우려한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상대방이 고마왔다. 강형이 진주에게도 그 이야기만은 들려주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강형을 자기네 집에 데리고가서 여생이나마 편히 살도록 돌봐주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기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자고 권고하려는데 강용찬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인석이네가 지금도 부산에서 살고있나?》

《예?!》

《구빨치 김혁창동지의 아들말일세.》

몹시 궁금해하는 상대방의 눈길을 외면하면서 룡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 인석이는 이미 오래전에 해상사고로 잘못됐습니다.》

《뭐라구?! 그럴수가 있나?》

강용찬은 몹시 놀랐다.

《그럼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

《글쎄요. 나도 뒤늦게야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갔었는데 그 집에는 벌써 낯모를 사람이 와서 살더군요.》

강용찬은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내가 관심을 돌렸어야 하는건데 정말 면목이 없게 되였수다.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지내자구요.

진주 그 애가 강형을 모셔오라고 자꾸만 조르는군요.》

룡세가 자기의 딸까지 거들면서 진심으로 권고했지만 강용찬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양로원의 숙식조건은 감옥보다는 나았지만 말이 아니였다. 무슨 음식점을 경영한다는 룡세를 따라가면 좋은 생활조건을 보장 받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내가 강형을 모셔가려고 작년 초겨울에 한번 찾아왔댔지요. 강형은 지방검찰청에 갔다고 하더군요.》

《음, 거기서 최성규를 만났댔네.》

룡세는 뱀을 본 아낙네처럼 와뜰 놀랐다.

《그놈이 나를 담당한 검사라네. 그 무슨 <보안관찰법>에 조금이라도 저촉되게 행동하면 나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하더 구만.》

심룡세는 갑자기 입이 얼어붙었는지 잠자코 있었다.

《잠간만 기다려주게.》

강용찬은 경비실에서 나갔다.

어쩌자는건가? 룡세는 강용찬에게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자고 한걸 후회했다. 지방검찰청에 최성규놈이 눈이 시퍼래서 앉아있다는걸 고려하지 못하고 서뿔리 강용찬에게 그런 권고를 한것이다.

법의 감시를 받고있는 사람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것은 필경 재미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담당검사가 최성규라니 이거야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강형이 보따리를 꿍져들고 나와서 어서 가자고 하면 어쩐다?!

강용찬은 룡세가 우려했던 보따리대신에 돈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이게 자네가 두고 간것이면 가지고 가게.》

룡세는 몹시 급해맞았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시우? 용돈으로 쓰십시오.》

《아닐세. 이걸 자네가 어떻게 번 돈이기에 내가 쓴다고 그러나. 어서 받게.》

그저 사양하는 말인것 같은데도 심룡세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네놈이 전향한 대가로 번 돈을 내가 탐낼상 싶으냐? 더럽다! 걷어치워라! 이런 소리로 들려서 속이 띠끔띠끔했다.

그는 강용찬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하긴 지페 몇장으로 그 비싼 용서를 받으려고 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는 하는수없이 돈봉투를 받아들고 수치감에 얼굴을 붉히면서 도망치듯 양로원에서 나왔다.

20

 

이른아침부터 날이 흐릿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푸근한감을 주더니 소리도 없이 착하게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녹은 뒤에 메말라서 먼지만 일던 대지는 봄의 세례를 받고 흠씬 젖어서 방금 붓을 뗀 수채화처럼 번들거렸다. 겨우내 추위와 해풍에 시달리며 로파의 손가락처럼 잔뜩 꼬부라들었던 양로원마당의 사과나무, 배나무들이 물기가 올라서 한결 생기를 머금고 기지개를 켰다. 화단에도 마당에도 길가에도 어느새인가 움터났던 새싹들이 봄비에 함초름히 젖어서 청신한 자태를 보란듯이 드러냈다.

강용찬은 소나무화분을 안고 마당에 나와서 온몸이 푹 젖도록 봄비를 달게 맞았다.

이 정녕 몇십년만에 맞아보는 봄비란 말인가.

바다쪽에서 아직도 뼈속을 자극하는 차거운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지만 겨울은 이미 지나가고 봄이 왔다는 이런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는것이였다.

한쌍의 까치가 봄비를 맞으며 기운차게 날아오더니 감나무가지에 올라앉아서 꽁지를 까불며 유난스레 깍깍거렸다.

봄맞이공론을 하는지 겨끔내기로 우짖는 까치의 소리는 봄기운에 가뜩이나 부풀어오른 그의 가슴에 그 어떤 기대를 안겨주었다.

나에게도 오늘 귀한 손님이 찾아오려나?

오늘따라 수헌이와 진주가 못 견디게 보고싶었다. 그는 행여나해서 소나무화분을 안은채로 정문밖에 나갔다. 시내쪽으로 뻗은 도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그 눈에 익은 하얀 승용차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수헌이는 방학이 끝났으니 이미 서울로 올라갔을게고 진주는 등교를 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여기에 들려볼 시간을 낼수 있을텐데… 룡세 그 사람이 혹시 그 애의 발목을 잡고있는게 아닐가?

진주가 룡세의 딸이라는게 명백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인것이다. 딸이 아버지처럼 본의 아닌 변심을 하고 일생을 자책과 후회속에 살지 않도록 잘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우기나 진주를 기다리게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소나무화분을 내려놓고 경비실에 들어가서 호미와 부식토를 넣은 비닐주머니를 들고나왔다. 정문옆에 구뎅이를 파고 부식토를 깐 다음 화분에 있는 소나무를 옮겨심었다.

어린 소나무는 봄비를 맞아서 그런지 한결 푸르싱싱했다.

이 나무에 년륜이 몇번이나 더 감겨야 통일의 날이 올것인가?

때없이 이런 생각에 잠겼는데 곁에서 따르릉! 하고 자전거종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인젠 퍼그나 친숙해진 우편배달부녀인이 자전거에서 내리며 웃어보였다.

《오늘은 아바이에게 편지가 왔어요.》

강용찬은 일순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했소?》

《서울에서 아바이에게 편지가 왔다는데두요.》

녀인이 주는 편지봉투를 받아보니 정말 자기에게로 온것이였다. 그런데 보내는 사람의 주소도 이름도 없었다. 그저 《서울에서》라고 짤막하게 써놓은것이 전부였다.

서울에서 자기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자기에게도 편지를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자체가 커다란 기쁨이였고 행복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간혹 편지를 받아보는 동지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물론 편지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척들이 넣어주는 돈이나 물품 같은것을 받는 수인들도 있었다. 강용찬이로서는 돈이나 물품은 바랄수도 없는 일이고 또 부러운게 아니였는데 편지만은 그렇지 않았다.

 

 

편지가 온다는것은 감옥밖에서 자기를 잊지 않고있는 사람이 있다는걸 말해준다. 편지가 오지 않는다는것은 감옥밖에서 누구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했다. 독감방에서 편지 한장 받아보지 못하고 수십년세월을 흘러보낸다는 그자체가 가혹한 고문이였다. 자신의 존재여부를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존재해야 할 리유가 없어지는것이다.

하기에 옥중생활기간에 단 한번만이라도 편지라는걸 받아보았더라면 그는 그것을 기쁘게 추억하며 영원히 잊을수 없을것이였다.

그는 우편배달부녀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고맙다고 사의를 표하고나서 경비실에 들어가 울렁이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겉봉을 뜯고 속지를 꺼냈다.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쓴 글자들이 귀엽고도 대견한 모습으로 안겨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지원》의 뜻을 안고 어린 소나무를 가꿔가고 계실 선생님의 친근하고 강인하신 모습을 그려보면서 펜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에 십년이 넘도록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것을 다 합친것보다도 더 많고 고귀한것을 저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여난 보람이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제야 비로소 철이 드는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새롭게 틔여주신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있으며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바를 찾고있습니다. 시련과 난관을 각오해야 할 일이지만 이렇게 하는것으로써 선생님의 가르치심에 보답하고저 합니다.

떠나기에 앞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작별인사조차 올리지 못해서 매우 죄송합니다.

부디 건강하여 오래 사십시오.

바야흐로 양춘이 찾아오고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것을 위해 기나긴 겨울 천신만고 괴로움을 달게 받으신 선생님들을 위한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속지에도 자기의 이름이나 주소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강용찬은 그가 누구인지 대뜸 알아차릴수 있었다. 수헌이가 분명했다. 그는 편지를 받는 사람만이 자기를 알아볼수 있게 무척 조심스레 쓴것이였다.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조심스레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되였는가?

매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씌여진 편지여서 다시 주의깊게 읽어보는데 전화종이 울렸다.

그는 편지에 눈길을 준채 무심코 송수화기를 들었다.

《양로원입니까?》

무척 귀에 익은 맑고 또랑또랑한 처녀의 목소리가 수화구로 울려나왔다.

《미안하지만 강용찬이라는분을 좀 바꿔줄수 없겠습니까?》

그는 너무도 반가운김에 성급히 물었다.

《너 진주가 아니냐?》

《어머! 선생님이시군요!》

진주는 막 환성을 올렸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선생님의 방에도 전화를 놓았습니까?》

반가와서 어쩔바를 몰라할 진주의 모습이 눈앞에 방불히 떠오르기에 그는 벙글써 웃었다.

《여긴 경비실이다. 난 요즘 밤경비를 서지.》

《그럼 밤에 전화를 걸면 틀림없이 선생님이 받으시겠군요.》

《음, 헌데 너희들은 왜 그새 꿈쩍을 안했냐?》

《전번에 수헌씨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갔댔습니다. 그런데… 경찰서가…》

진주는 말꼬리를 삼켰다.

《음, 그런 일이 있었다는걸 나도 안다. 이젠 나를 찾아와도 괜찮을것 같다.》

진주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그럼 이번 일요일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런데… 저…》

《왜 그러냐?》

《우리 동무들을 데리고 가도 일없겠습니까?》

강용찬은 기꺼이 찬성했다.

《오냐, 다 데리고오너라. 네 동무라면 누구나 다 나에게는 반가운 손님이거든.》

《고맙습니다. 선생님, 수헌씨는 서울에 갔습니다.

전 방금 수헌씨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강용찬은 뻐기듯이 말했다.

《나도 방금 편지를 받았다.》

《전 그런줄을 모르고… 수헌씨가 선생님의 안부를 물어왔기에 전화를 한겁니다.

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통화가 끝났지만 강용찬은 송수화기를 귀에 댄채 잠시 그대로 움직일줄 몰랐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 자신이 행복하게 여겨진 의의깊은 날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40여년만에 처음으로 편지를 받아보았고 전화도 받아보았다. 바로 그 편지와 전화를 통하여 수헌이와 진주가 이 어지러운 풍토에서도 곧게 뿌리를 내리며 푸르싱싱 자라고있는 모습을 볼수 있게 되였으니 이것이 바로 기쁨이였고 행복이였다.

그는 경비실에 홀로 앉아있기엔 너무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밖으로 나갔다.

봄비는 계속 내리고 날씨는 차거웠지만 그는 불을 안은듯 가슴이 달아올랐다.

고목이 되여 철창속에서 나와 양로원에 몸을 담지 않으면 안되였던 자신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일을 벌써 해내고있다고 생각하니 여생이 참으로 귀중하게 여겨지는것이였다. 자신이 거름이 되여 가꾸는 두그루의 어린 소나무가 수백그루로 늘어나 락락장송을 이룰 래일을 그려보니 모진 생을 꿋꿋이 이어온 보람과 긍지가 가슴뿌듯이 차올랐다.

 

21

 

반공을 제1국시로 선포했던 박정희가 종신대통령이 되겠다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심복의 총에 맞아죽은 이후 일대 정치적인 혼란속에서 숙군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깡패들이 다시 정권을 가로챘다.

더욱 철저해야 할 반공국시에 틈새가 생기자 언론이 함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고 북조선을 방문하는 인사들이 생겨났으며 《사회안전법》을 뜯어고쳐서 전향을 하지 않은 장기수들까지 일부 석방시키는 놀음까지 벌어지게 되였다. 이것은 리정권이나 박정권때에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최성규는 개탄을 금할수 없었다.

이 정녕 수수방관할수 없는 일이로다. 한생을 반공투사로 머리칼이 희여진 최성규가 가만있을소냐.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국회에 쑤시고 들어가서 썩은 어금이처럼 건들거리는 《국가보안법》을 고수할 생각이였다. 그래서 줄을 놓아 국회 법제위원회 성원인 윤의원과 사귀게 되였고 그를 통하여 차기대통령감이라는 영삼이에게 자기의 정계진출의향을 알리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아직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최성규는 참을성을 잃어버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윤의원을 다시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그럴듯 한 사업상 용무를 만들어가지고 떠나려는데 며느리가 애원조로 서울에 가면 아무쪼록 수헌이를 꼭 만나보고 오시라고 당부하는것이였다. 그녀석이 양로원출입을 금지당한 후 뿌루퉁해서 말도 안하고 지내더니 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학으로 돌아가서 편지 한장 보내오지 않는것이 어머니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하긴 최성규자신도 그녀석때문에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고있는중이였다.

녀석이 무엇때문에 강용찬이를 자주 찾아다녔는가? 그 접촉과정에 혹시 무엇인가를 알아차렸을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범의 새끼를 길러주었다가 호환을 당하기 십상이렷다.

돌이켜보면 운명의 희롱이란 얄망궂기 그지없었다.

최성규가 서울에 있을 때 부산에서 장사를 하던 아들은 결혼을 두번이나 했지만 두번 다 리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씨가 부실한지 밭이 척박한지 두번 다 자식이 생기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세번째로 결혼한 녀자가 해상사고로 수중고혼이 된 어느 선원의 미망인이였다.

최성규는 아들이 제멋대로 재혼을 한 몇달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부산에 출장갔던 기회에 아들네 집에 들려서 며느리를 만나보았다. 다행히도 과부가 아니라 처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젊고 애교가 있게 생긴 녀인이였다.

우선 그 녀자가 집안을 거두어놓고 사는 품이 갱충머리가 없던 아들의 전처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돈되지 못했던 아들의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습성도 그 녀자의 닥달질에 거의나 바로잡혀 져있었다. 며칠 함께 지내보니 그 녀자는 가정에 늘쌍 화목을 조성했고 특히 시아버지를 공대하는 면에서도 흠잡을데가 없었다.

최성규는 이런 며느리의 손에서라면 퇴직후에 밥을 얻어먹을만 하다고 만족하게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후날 무슨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직업적인 습관으로 새 며느리의 신원을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 녀자의 전 남편은 려수 14련대출신으로 군인폭동을 일으키고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체포되여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여있던 김혁창의 아들이였다. 그런데 문건에는 김혁창이 그냥 군에 복무하다가 전쟁때 폭사한것으로 되여있었다. 최성규는 김혁창이가 사형장에서 총에 맞아죽는걸 목격했었다. 그런데? 신원을 위조한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아연실색해진 최성규는 부랴부랴 부산에 내려가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려주면서 어쩔셈이냐고 따져물었다. 아들은 내 안해의 전 남편의 애비가 죽었든 감옥에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하고 코웃음을 쳤다. 최성규는 화가 나서 이놈아, 네 처가 문제가 아니라 네 이붓아들이 문제란 말이다, 아무렴 우리 최씨가문이 빨갱이의 손자를 길러줄수야 없지 않느냐 하고 소래기를 질렀다. 그런데 아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아버지, 빨갱이의 손자라고 이마에 뿔이 돋았나요? 까짓거 그 애의 성을 갈아치우고 아버지처럼 반공투사로 키워보시구려 하는것이였다.

아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신경질적으로 그런 수작을 줴쳤지만 들어보니 그게 명안이였다.

그래서 김순기가 최수헌이로 된것이다.

애녀석이 계집애처럼 곱살하게 생긴데다가 성미가 유순하고 경우가 밝아서 밉게 보려고 해도 곱게 보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머리가 매우 총명했다. 중학을 나오면서 문과에 지망하는걸 반대하고 법대에 보냈는데 수석으로 입시를 치르었다. 그 소식이 신문에 실리자 과연 최검사의 손자가 다르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했다.

그래서 이 녀석은 완전히 내 손자로다, 장차 내뒤를 잇게 해야 하겠다 하는 욕심이 더 커졌다.

그런데 일이 별나게 번져지기 시작했다.

김혁창이가 자기의 목숨을 내대여 구원해준 강용찬이는 감옥귀신이 될줄 알았는데 백발이 성성해서 감옥문을 나섰다. 그게 께름직했는데 방학기간에 집에 와있던 수헌이라는 녀석은 무슨 바람에 불리워서인지 양로원에 찾아가 강용찬을 만난것이였다.

물론 수헌이의 말마따나 법대학생이 법의 최대 희생자인 장기수를 만나보는것은 그럴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상대가 강용찬이기에 최성규는 수수방관할수 없었다. 경찰의 힘을 빌어서 양로원정문에 즉시 차단봉을 내렸으니망정이지 하마트면 큰일이 날번 했다.

어쨌든 수헌이녀석의 태도가 심상치 않으니 이번 기회에 만나서 단단히 침을 놓아야 했다.

서울에 간 최성규는 고등검찰청에 들려서 몇가지 용무를 보고 나서 국회의사당에 전화를 걸어 윤의원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다음 오래간만에 만난 동료들과 한담을 하다가 나오는데 기다란 복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마주오던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흠칫 멈춰서는게 언뜻 눈에 띄웠다.

만약 상대방이 그대로 걸어왔다면 최성규는 무심중에 그냥 지나쳤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몸을 피하려는 그 동작이 유별나서 오히려 그의 눈에 걸려든것이였다.

《너 수헌이 아니냐?》

수헌이는 몹시 당황한 자기의 표정을 수습하며 애써 반가운듯 고개를 굽석했다.

《할아버지였군요.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고분고분한 손자의 태도에 최성규는 흐뭇해졌다.

《오늘 왔다. 내 너를 찾아가려던참인데 마침 만났구나. 여기엔 왜 왔니?》

《그저… 선배님들을 만나볼 일이 있기에…》

하긴 여기에 법대출신의 젊은 검사들과 서기들이 있었다. 그들과 련계를 가지는건 필요한 일이다.

《나와 함께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수헌이는 무슨 핑게를 대고 응하지 않으려다가 마지 못해 따라나섰다.

그는 요즘 론문집필에 앞서 자료작업을 하고있었다. 대학도서관은 물론이고 대법원과 고등검찰청의 자료실에도 드나들면서 《국가보안법》의 력사를 파고들었다. 그는 비공개자료들을 들춰보는 과정에 강용찬을 1심에서 사형으로 기소한 검사가 다름아닌 최성규라는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되였다.

결국 친할아버지와도 같은 강용찬선생님과 이붓할아버지는 타협할수 없는 숙적인데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커다란 의문부호를 십자가처럼 등에 지고서 골머리를 앓는 판인데 최성규가 나타났다. 생각 같아서는 결별을 선언하고 돌아서고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반가운체 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러 가게 된것이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노릇이였다.

《얘야, 어머니가 소식이 없다고 걱정하더구나.

나 잘 있어요 하고 전화라도 한통 걸어주면 못 쓴다더냐?》

수헌이는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하는 골머리를 수그린채 덤덤히 걷기만 했다.

《이녀석아, 입이 얼어붙었냐?》

대답대신에 짤막한 한숨소리뿐.

《허, 이런 옹졸한 녀석이라구야. 너 혹시 이 할아버지한테서 책망을 들은것때문에 지금도 언짢아 그러는게 아니냐?》

수헌이는 허거프게 웃었다.

《제가 뭐 어린애입니까?》

최성규는 퍼그나 주눅이 들어버린것 같은 손자에게 양기를 돋구어주려고 친절을 다했다.

《할아버지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험한 욕도 하는거다. 난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요구대로 다해주겠다. 돈도 더 많이 보내줄테니 마음대로 써라. 네가 법관으로 출세를 하면 이 할아버지는 검사노릇을 그만두겠다.》

검사노릇을 그만두다니?!

수헌이는 어리둥절해서 최성규를 바라보았다.

최성규는 득의양양해서 저기 바라보이는 국회의사당을 손으로 가리켰다.

《난 저기에 들어가자는거다.》

《아니 그럼 국회의원이 되신다는겁니까?》

《그렇잖구. 국회 법제위원회에 들어가서 나라의 법을 제 마음대로 뜯어고치려는 놈팽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거야.》

마침 방금전에 휴회를 했는지 제낀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맨 국회의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나와서 대기중에 있던 승용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속에서 윤의원을 발견한 최성규는 급히 달려갔다.

《윤선생,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인사말도 없이 직방치기로 물었다.

윤의원은 보동보동한 손으로 유들유들한 군턱을 슬슬 문지르며 벙긋이 웃어보였다.

《검사님의 의향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고맙소이다. 가만, 어느 식당에 갈가요?》

《룡산에 가야지요. <코미스키>식당의 꼬리곰탕이 별미랍 니다.》

윤의원은 미8군사령부의 주둔지역인 룡산을 저희 집 사랑방처럼 여기고있었다.

《윤선생, 나같은 놈이 <룡산왕국>에 어떻게 감히 들어가겠소 이까?》

《걱정 마시오. 내 차를 타고 들어가면 무사통과지요.》

윤의원은 자기의 승용차에 붙어있는 미8군사령부 출입증을 가리켜보이며 잔뜩 으시댔다.

최성규는 졸지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예, 헌데… 내 손주녀석이 따라와놔서… 서울법대에 다니지요. 함께 가면 안될가요?》

《가만, 검사님의 손자라면 법대에서 수재로 소문난 학생이 아닙니까.》

윤의원이 수헌이를 알고있으니 최성규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내 손자녀석을 다 아십니까?》

《내 서기로 쓸만 한 젊은이를 물색해보았는데 법대에서 추천해준 다섯명의 수재들가운데 검사님의 손자가 있더군요. 그러지 않아도 본인을 한번 만나보려던참입니다.》

최성규는 몹시 기분이 좋아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어줍게 서있는 손자를 불렀다.

《얘, 어서 와서 인사를 드려라. 이분은 국회에서 법제정문제를 보시는 윤승달의원님이시다.》

수헌이는 가까이 다가와서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의원님, 처음 뵙습니다.》

윤의원은 때묻지 않은 수헌이의 끼끗하고 준수한 모습을 주의 깊게 여겨보았다.

《에- 나는 군이 학업에 열중하여 앞으로 할아버지처럼 명망이 높은 검사가 되기를 바라네.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기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찾아오든가 전화를 하게.》

윤의원은 체현해서 이런 훈시를 하면서 집주소와 전화번호가 찍혀있는 명함을 꺼내주었다.

《고맙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수헌이는 론문집필을 위한 실태자료연구에 도움을 받을수 있는 이런 연줄이 생긴게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였다.

《자, 그럼 떠나자구.》

일명 미국의 조계지라고 불리우는 룡산에 가볼 기회를 수헌이는 놓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군말없이 윤의원의 승용차에 올라서 운전대를 잡았다. 윤의원은 최성규와 함께 나란히 뒤좌석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잠간사이에 시내중심을 벗어난 승용차는 한강변에 이르렀다. 여기가 예로부터 서울에서 노란자위인, 그래서 물건너온 놈들이 력대적으로 차지해온 룡산이다. 철조망을 빙 둘러친 강변의 넓은 지역에 미군부청사들과 병영들이 있고 경치가 좋은 곳에는 드래곤호텔이니 하텔하우스니 하는 숙박장과 오락장, 골프장도 있었다.

윤의원의 장담대로 미군보초가 지켜선 정문을 무사통과한 승용차는 파란 잔디밭가운데 맵시나게 서있는, 그러기에 마치 푸른 물결우에 떠있는 하얀 돛배를 련상시키는 《코미스키》식당앞에서 멈춰섰다. 식당안에 들어가니 대부분이 미군장교들과 사관들인데 제낀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맨 《한국신사》들도 여러명 눈에 띄 웠다.

그들은 칸막이를 한 조용하고 구석진 곳에 있는 식탁을 차지했다. 접대부는 《양공주》였다. 윤의원은 류창한 영어로 음식을 청했다. 술과 료리가 나오고 그 별미라는 꼬리곰탕도 나왔다.

윤의원과 최성규는 서로 바싹 붙어앉아서 술잔을 나누며 낮은 소리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검사님, 좀 수고를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헌금을 하라는건가요?》

《아따! 검사님에게 무슨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겠나요. 부산에 우리의 뒤를 대주는 기업들이 있지요. 그걸 검사님이 잘 보살펴 주면 됩니다.》

윤의원은 기업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를 넘겨주었다. 그걸 받아서 깐깐히 훑어보던 최성규는 어느 한군데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윤선생, 이건 명색이 피복업체예요. 마약밀수와 밀매가 전업이지요. 우리가 강력히 조처하려는 대상입니다.》

윤의원은 눈을 한번 끔쩍거렸다.

《뭐 요즘 그런 업체가 한둘인가요. 검사님이 눈 한번 감아주시면 되는겁니다.》

《하, 이거 딱한데요. 지금 전국적으로 마약사용자수가 30만명선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거야 의례히 강력조처해야지요. 그러나 례외란것두 있겠지요? 독밑에두 용수가 있다지 않나요.》

《예, 알겠수다.》

수헌이는 한쪽 옆에 떨어져 앉아서 별로 구미가 동하지 않는 음식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미군전용인 이 식당이라고 뭐 특별한 료리가 있는건 아니였다. 미국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혼합주와 안주로는 고기순대와 햄 그리고 랭료리 몇가지와 꼬리곰탕이다. 이런건 서울시내의 웬간한 음식점에 들어가도 사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와야 했는지 그자체가 의문스러웠다.

《윤선생,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다 늙은 내가 그 무슨 명예심에 사로잡혀서 국회의원이 되고싶은건 아닙니다. 하도 인물이 없으니 나라도 나서서 국회의 기강을 바로잡아보자는거죠. 요즘 법이 물렁물렁해지고있거든요. 내 별다른 수가 없어서 당신네 신세를 지자고 하지만서두 실은 당신네가 집권을 하게 될가봐 근심이요.》

윤의원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건 어째서요?》

《까놓고 말해서 김영삼씨야 <국가보안법>철페를 목이 쉬도록 웨치던 사람이 아니요. 그러니 집권을 하면 그걸 실행하려고 할거란 말이요.

그 사람은 아마 자기를 여러번이나 자택연금시켰던 우리 검사들도 좋게 대하지 않을거요.》

최성규가 술기운에 얼굴이 벌개서 속심을 터놓자 윤의원은 껄껄 웃었다.

《거 안할 걱정을 하고있군요. 누가 집권을 하든 <보안법>이 없이야 견디여낼수가 있나요.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요.》

《허, 제 입으로 국민에게 그렇게 말해놓고서 돌아앉아 수염을 뻑 쓸어낼수 있을가요?》

《그렇게 하는게 정치라는거지요.》

《정녕 그렇다면 내 오늘부터는 발편잠을 잘수 있겠수다. 자, 드십시오.》

《예. 어, 술맛 참 좋다.》

윤의원은 싱글벙글하면서 보는 사람이 절로 구미가 당길 정도로 아주 맛나게 잔을 비웠다.

《윤선생은 기분이 퍽 좋으셨구려.》

《예, 국회라는게 열리기만 하면 저마다 당리를 차리며 제 주장을 하고 고집을 해서 골치가 아픈데 오늘도 몇개 안건을 놓고 쌈질을 하다가 다 밀어제끼고 내가 제출한 안건만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거든요.》

최성규는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의제가 뭐길래 여야가 다 쌍수를 들었나요?》

윤의원은 그 말을 꺼내기가 좀 거북한지 수헌이쪽을 흘끔 쳐다보고나서 한결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국회의원들 임금을 인상하자는거죠.》

최성규는 어마지두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임금도 높은데 더 올린단 말씀이요?》

윤의원은 한손을 홱 내저었다.

《그것 가지곤 어림도 없어요. 우리가 돈 쓸 일이 오죽이나 많은줄 아슈. 지역구 관혼상제에 부조까지 해야 해요.》

수헌이는 처음 듣는 소리여서 귀를 강구었다.

《그래서 하는수없이 뒤손으로 돈을 좀 받는건데 아시다싶이 그건 위법행위지요. 그렇다고 뭐 돈을 안 받는 국회의원이 있습니까?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은 법인데 국회의원들이 본의 아니게 위법을 하게 해서야 안되지요. 어때요?》

최성규는 타협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까짓거, 몇명 안되는 국회의원들의 돈봉투 좀 불궈주었다고 국고가 거덜이 나겠나요. 그래서 의제로 제기했더니 만장일치로 찬성인거예요.》

최성규는 어이가 없어서 허 웃고말았다.

《하여간 잘하셨수다. 윤선생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안건제출의 수법을 보이셨구려.》

《가끔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 노상 모여붙어서 싸움질만 할수야 없지 않나요. 저걸 보시우.

다들 얼마나 기분이 상쾌해하는가.》

윤의원은 미군장교들속에 드문드문 끼워서 술을 마시고있는 신사제씨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보니 이 식당에 들어온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은 다 국회의원들이였다.

수헌이는 창피를 당한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더는 그자리에 앉아있을수가 없어서 량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윤의원이 최성규에게 눈을 껌뻑거렸다.

《거 정말 마음에 드는 젊은이로군요. 술도 안 마시지 담배도 안 피우지 쓸데없이 말참견도 안하지 례절이 바르단 말이요.》

최성규는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면에서야 나무랄데가 없지요. 저녀석은 아마 지금까지 아가씨와 키스도 한번 못해봤을겁니다. 알쭌한 숫총각이지요.》

《거 정말 욕심이 나는구려. 검사님, 소인네 집에 리화녀대에 다니는 딸이 있어요. 미래의 피아니스트랍니다.》

최성규는 부쩍 귀맛이 동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저녀석에겐 명문가의 따님을 훔쳐낼만 한 용기가 없질않소.》

《그건 걱정을 마시오. 소인이 댁의 도련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여사여사한 기회도 마련해주겠소이다.》

《거 혹시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우.》

최성규는 만약의 경우를 예상해서 이렇게 뒤를 눌렀다.

수헌이는 승용차앞좌석에 앉아서 최성규와 윤의원이 빨리 나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그는 미군이 명실공히 주인으로 되고있는 이 구역에서 속히 탈출하고싶었다. 여기에 머물러있는 순간순간이 심히 부자연스럽고 모욕적으로 여겨져서 참을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민족적자존심이란 손톱눈만치도 없는 자들이 국회의원의 체면조차 망각하고 여기에 들어와 제 돈을 뿌리며 술 한잔 먹는걸 자랑으로 여기며 으시대고있으니 과연 꼴불견이였다.

생각할수록 더러워서 차창을 내리우고 침을 탁 뱉으려던 그는 무춤 굳어졌다.

그런 사람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보호와 후원을 받고있는 자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데 문득 생각이 미친것이였다. 남부럽지 않은 자신의 호사스러운 생활처지야말로 실은 굴욕적이여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누구를 가련하게 여길게 아니라 자신부터가 비굴하고 가련한 처지로부터 대담하게 탈출해야 했다.

지리산의 구빨치이며 사형장에서 장렬하게 희생된 비전향장기수의 손자인 자기로서는 악법의 화신인 최검사의 후원을 받는 더부살이의 비굴한 처지를 더는 용납할수 없었다. 그래서 새 출발을 할 용단을 내렸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있는중이였다.

전번 방학기간에 할아버지와 함께 옥중에서 싸우던 강용찬선생님을 만난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강용찬은 극빈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돌이켜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과거가 있었고 떳떳하고 긍지높은 현재가 있었으며 통일의 날에 민족의 축복을 받게 될 미래가 있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강용찬이가 희생된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자기네 집을 찾아왔던 로인이 분명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서도 수헌이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온것은 양로원출입이 금지되였기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는 자기에게 친할아버지나 다름없는 강용찬을 더는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구빨치이며 비전향장기수의 손자인 자기가 최성규검사의 손자가 됐다는것을 알게 되면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고 가슴아파하실것인가.

그래서 진주에게도 이 사실을 숨긴것이다.

그는 며칠전에 받아서 품속에 소중히 간수하고있는 진주의 편지를 꺼냈다.

수헌씨.

선생님을 만나뵈러 함께 갔다가 되돌아서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날 우리가 백사장에 나란히 앉아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남해바다가 생각나겠지요? 그날 수헌씨는 자신의 유별난 처지에 대하여 숨김없이 저에게 터놓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것으로 해서 저의 마음도 정녕 괴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결국 그 백사장에서 우리는 서로 괴로움을 안고 헤여졌습니다.

야속하게도 수헌씨는 그후 저를 찾지 않았으며 방학이 끝나기도전에 작별인사도 없이 서울로 떠나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우리의 헤여짐이 다시는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을수도 있겠기에 서운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이 서운함과 야속함은 수헌씨가 보내준 편지를 받는 순간에 봄눈처럼 녹아버렸답니다.

그 편지는 우리의 몸은 비록 서로 멀리 헤여졌지만 마음은 더 가까와졌다는것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하기에 지금 저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행복할뿐입니다.

수헌씨는 편지를 통하여 지금까지는 감히 엄두도 낼수 없었던 그러한 일에 투신하려고 고행을 각오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습 니다. 정말이지 충격을 크게 받았습니다. 실은 저 역시 수헌씨처럼 떳떳하고 보람있는 일을 시작하고 그 소식을 전해드리고싶어서 이렇게 늦게야 펜을 들게 되였답니다.

저는 학우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지원》의 글발아래서 《력사를 바로 아는 모임》을 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가지게 되는 이 모임의 전임강사이며 고문인셈입니다. 학우들의 추천에 의하여 제가 회장의 소임을 맡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우선 력사부터 바로 알고저 합니다.

력사에 대한 바른 인식은 젊은 세대인 우리에게 있어서 자못 큰 의의를 가진다고 봅니다. 어지러운 사회환경은 우리를 오염시키고 그릇된 길로 유인하고있지요. 하기에 력사에 대한 옳은 인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젊은 세대로서의 사명감을 자각하게 해주고 오유와 후회가 없을 바른길로 나갈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주 모임을 가지고 광복사와 통일운동사에 동참하신분들의 체험담을 듣고 준엄했던 력사의 현장들을 밟아보면서 각자가 나아갈 길의 방향각을 정하려고합니다.

우리의 현장답사가 남쪽에만 국한될수는 없습니다. 북쪽에 있는 력사유적들에 대한 답사와 이북대학생들과의 학술교류는 우리 모임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에 오를 희망에 불타고있습니다.

이 희망의 실현이 곧 위법으로 되는 가혹한 현실이기에 저 역시 수헌씨처럼 고행을 각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수헌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어찌하여 지금까지는 엄두도 낼수 없었던 이런 각오를 서슴없이 가질수 있게 되였을가요?

선생님은 그런 각오가 담겨진 수헌씨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결국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우리의 선생님은 교정이 아니라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한분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있다는것은 실로 민족의 자랑입니다. 그분들은 신념, 그것 하나로 꿋꿋이 지켜낸 자신들의 존재, 그자체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고무해주십니다.

수헌씨.

부디 건강하여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주저없이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수헌씨와 함께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게 될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벌써 열번도 더 읽어본 이 편지를 수헌이는 또다시 읽어보고서 정히 봉투에 넣어 품속에 간수했다.

인기척이 나서 차창밖을 내다보니 최성규와 윤의원이 불카해진 얼굴에 웃음을 짓고 비칠거리는 서로를 부축해주며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둘이 다 기분이 좋은김에 코가 삐뚤어질 지경으로 마시다나니 만취돼서 오줌을 누고 바지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식당에 들어가려던 키다리흑인사관이 떡 뻗치고 서서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고주망태가 된 두 늙은이는 굽신거리며 비실비실 뒤걸음을 치다가 동시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자 식당주변에서있던 미군병사들속에서 휘파람소리가 울리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여, 토마스. 무엄하게 굴지 말게. 그분들은 국회의원님들 이야.》

한놈이 이렇게 시까스르자 흑인하사관은 짜장 놀라는척 하더니 늙은것들을 일으켜줄 대신에 거기다 대고 거수경례를 했다.

또 터지는 폭소, 휘파람소리…

수헌이는 얼른 달려가서 놀림가마리가 된 그들을 부축여 차에 싣고 도망을 치듯이 전속으로 《룡산왕국》에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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