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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요사이에 봄비를 맞고서 완전히 활짝 피여난 한송이의 꽃이 되였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꽃에는 풍우가 많다고 했다.

외동딸의 뛰여난 미모는 룡세네 내외의 마음을 항시 놓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되고있었다.

진주가 대학이나 졸업한 후에 혼사문제를 론의해야 하겠지만 룡세는 미리부터 머리속으로 타산을 해보군 한다.

처녀에게 있어서 미모란 곧 큰 재산이다. 그러니 대상자는 어느모로 보아도 짝이 기울어서는 안된다. 나기도 물론 잘나야 하지만 학식이 있고 사회적지위도 있고 생활바탕도 든든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요는 심룡세가 데릴사위로 삼을수 있는 대상이여야 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킬만 한 대상이 나타나겠는지. 이것을 장담할수 없는것이 또한 룡세의 날로 커가는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안해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무슨 큰 비밀이나 알려주듯이 진주에게 애인이 생긴것 같다고 소곤거렸다.

《벌써?! 그게 정말이요?》

《벌써라뇨. 좀 늦은거지요.》

안해의 말에 의하면 며칠에 한번씩 웬 젊은이가 하얀 고급승용차를 몰고와서 《빵빵!》 경적을 울리면 진주는 냉큼 나가서 그 차에 올라 어디론가 사라지군 한다나. 그렇게 나가서는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군 하는데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품이 상사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것 같대. 그래서 너 요즘 어디엘 나다니느냐? 승용차를 몰고오는 녀석은 대관절 누구야? 하고 따져물었는데 입을 꼭 다물고 아무런 토설도 하지 않았다는거다.

룡세는 딸의 비밀을 파헤쳐보고싶은 충동을 누를수가 없었다. 이것을 딸의 장래를 책임진 아버지의 응당한 관심이며 권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기가 세워놓고있는 그 요구조건에 만족되지 않는 대상이라면 제때에 떼던져야 했다. 그래서 모름지기 그 비밀이 적혀있 을 딸의 일기장을 찾아서 펼쳐보았다. 진주는 소학교시절부터 일기를 쓰기 좋아했는데 이것은 대학에 입학해서부터 쓰기 시작한것이였다.

진주는 사랑한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아버지의 고향, 남강의 푸른 물에 시원히 발을 잠그고 창공높이 추녀를 추켜든 고색창연한 촉석루를, 옛날 옛적 성춘향이와 리도령의 사랑이 꽃펴난 남원의 광한루도 사랑한다. 아직은 가보지 못한 개성의 박연폭포도 비단필처럼 쏟아져내리는 폭포수에 무지개처럼 비껴있다는 황진이의 시조들도 사랑한다.

사내대장부들에 못지지 않을 이 나라 녀인들의 애국적의거와 송죽같은 절개, 구슬같이 반짝이는 재능은 또 어느 명승지, 어느 유적에 깃들어있다더냐.

내 다 찾아내여 장차 두툼한 책으로 묶으리.

아빠 엄마 손목잡고 고향나들이 갔던 봄날 어린 나에게 이 소중한 꿈을 안겨준 촉석루여!

부푼 꿈을 안고 대학입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기쁨의 이 소식을 내 먼저 너에게 보내노라!

이렇게 시작된 일기는 대학으로 생활의 령역, 사색의 령역을 넓힌 애젊은 처녀의 일상다반사와 느닷없이 일어난 감정변화를 청우계의 눈금처럼 섬세하게 기록하고있었다.

새로 사귄 학우들, 교수들, 학력경쟁으로 열이 오른 강당과 열람실, 진지한 탐구와 사색, 필요했거나 불필요한 교제들, 사소한 언쟁으로 흐려진 마음, 우정을 되찾은 기쁨, 생일날에 받은 축하와 선물, 까닭모르게 울적해지거나 공연히 이상야릇하게 설레이는 가슴, 아직은 그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품어보는 사랑의 감정…

그 나이의 처녀들이면 누구나 흔히 느껴볼수 있는 그러루한 감정들이 비교적 순탄하게 라렬되여나가다가 문득 굴곡이 생겼다.

최근 부산에 상륙한 서유럽의 땐스음악이 나이트클럽과 호텔의 무도장, 노래방들을 휩쓸더니 대학구내에까지 울려와 청춘들을 환락의 세계에로 유혹한다. 골치 아픈 공부를 하고난 뒤에 땐스음악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들며 춤을 한바탕 추고나면 머리가 거뜬해지고 종일 쌓였던 피로도 싹 증발해버린다나. 건강증진, 기분향상, 우정도모에 그저 그만이래. 학우들의 집요한 권고, 그에 못이겨 노래방으로 달려가던 진주는 주춤 멈춰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양로원을 찾는 불쌍한 늙은이, 오른팔이 없는 불구자로인이 어스름속에서 불쑥 나타나 앞을 막아선것이다. 그는 감옥안에 청춘을 고스란히 두고서 백발을 이고나온 강용찬이였다.

심룡세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일기장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계속 일기장을 번졌다.

신문에 실린 강용찬의 출소소식, 어머! 그 불쌍한 늙은이가 비전향장기수였구나.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가? 지금은 얼마나 외로우실가? 어서 찾아가 만나보고싶은 마음, 그 심정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해. 아버지도 지난날 지리산에서 싸웠고 그래서 감옥생활도 했다는데 왜 그런 태도를 취하실가?

성탄절이 시작되기 전날, 대학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낯 모를 총각, 서울법대생이라나. 이름은 최수헌, 오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양로원에 몸을 담았다는 로인을 외면할수 없다는 젊은이, 어쩌면 내 마음과 그리도 꼭같은지. 그래서 함께 양로원에 가기로 약속했지.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좀 우스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생판 모르던 처음 만난 남학생과 어쩌면 그런 약속을 그리도 쉽게 할수 있었는지, 아마 마음이 통하면, 아니, 그런건 아니야. 그래두…

얼굴을 잔뜩 찡그린 룡세의 입에서는 신음소리 같은것이 흘러나왔다.

자기가 그렇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딸은 끝내 양로원에 찾아간것이다. 학우들과 함께 해운대에 가서 크리스마스성찬놀이를 한다기에 각별히 품을 들여 잉어탕이랑 끓여주었더니 웬걸, 그걸 가지고 강용찬을 찾아갔다. 화기에 넘치는 분위기속에서 강형이랑 그 총각이랑 오붓이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고 화분에 심어놓은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시도 읊었다. 잘한다.

룡세는 기분이 싹 잡쳐서 대충대충 훑어보며 일기장을 벌컥벌컥 번지였다. 그러다가 심상치 않은 대목이 눈에 띄우길래 손을 멈추었다.

오늘 나의 심정을 무엇에 비길가?

장님이 눈을 뜬 심정이랄지. 아니면 눈은 떴지만 사물을 가려 보지 못하던 갓난아기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으로 알아보게 되였을 때의 그 심정이라 해야 할는지.

나는 내가 배운 교과서나 참고서들에 서술되여있지 않은, 그래서 모르고 지내온 광복을 위한 민중의 참력사를 륜곽적으로나마 알게 되였다.

그 력사의 뿌리에는 《지원》의 높은 뜻과 3대각오가 있고 시 《남산의 푸른 소나무》가 영생찬가로 숭엄하게 울려퍼지고있다.

그 노래와 함께 영생하고있는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생애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

인간을 초월한분, 진정 하느님과 같으신분,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뇌심초사하시며 자신을 깡그리 바치신분, 아직은 그 높은 정신세계를 리해할수 없다. 그저 경탄하여 우러러 볼뿐이다.

그분에게서 일생의 좌우명으로 된 《지원》의 높은 뜻과 3대각오를 받아안았다는 우리 선생님이 성인처럼 돋보인다.

《지원》의 글발을 머리에 이고 어린 소나무를 심은 화분곁에 단정히 앉아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우리 선생님, 소박한 모습이지만 그 위엄은 성당의 교단에 나선 목사님을 훨씬 릉가하신다. 목사님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찬 생애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수난, 한생을 바쳐 그 수난을 이겨내던 과정을 이야기하 신다.

《뜻을 지켜 죽은 사람들은 광복전에도 있었고 광복후에도 있었다. 이분들이 광복전에 품은 뜻은 나라를 찾는것이였고 이 뜻을 꺾으려는 자들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이였지. 이분들이 광복후에 품은 뜻은 외세에 의하여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자는것이였고 이 뜻을 꺾으려는 자들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였다.

때문에 우리 나라의 근대사는 외세를 배격하는 세력과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간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볼수 있는거다.》

수헌씨와 나는 로교수의 력사강의라도 받는듯 한 심정이다. 선생님의 온화하던 눈빛이 별안간 노기를 띠고 담담하던 목소리도 격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외세추종세력은 철저히 매국노의 무리다. 그런데 이자들이 충무공사당에 향불을 피우고 3.1선렬들의 순국비에 참배하고 리준렬사와 안중근의사를 추모하는것으로써 저들의 정체를 민족주의로 분장하고있어. 결국 매국이 애국의 탈을 쓰고서 나라를 찾자는 사람들, 조국을 통일하자는 사람들을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빨갱이로 몰아서 처형한거야.》

대단히 충격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반도의 상반되는 두 제도, 북과 남의 대결을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와의 대결로 인식하고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선생님은 역시 그것도 애국과 매국과의 대결이라는것이였다. 애국의 넋과 매국의 넋은 공존할수 없기에 서로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운다는것이다.

6.25전쟁도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침략자 미군을 내쫓고 매국노들을 숙청하기 위한 북과 남의 애국세력의 장거라는것이다. 그래서 반공격하여 남진하는 인민군대를 이남의 절대다수 민중이 환영했다는거다. 청장년들은 의용군에 탄원하였고 남녀로소가 떨쳐나 인민군대를 원호했다는거다.

선생님은 자기네 부대가 마산계선까지 진출했을 때 불비속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포탄과 탄약을 날라준 고향의 녀인들을 못잊어하시며 매우 자랑스럽게 추억하셨다.

심룡세는 그 부분을 다시 주의깊게 읽어보았다. 바로 그 포탄과 탄약을 실은 렬차를 자기가 남원역까지 끌고갔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강용찬이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은 모양이였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진주의 일기는 며칠후에 계속된다.

소백산줄기에서 제일 높은 산, 남해기슭에 억센 산발들을 뻗치고 거연히 머리를 추켜든 내 고향의 자랑인 지리산이여!

일제의 쇠사슬이 한반도를 칭칭 동여맸을 때 징병과 징용을 피해 네 품을 찾은 의로운 젊은이들은 몇몇이였나. 그 압제의 쇠사슬이 드디여 풀려나간 후에도 어이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서 사생결단하고 네 품을 찾아야 했던가.

망국단선을 반대하여 한나산이 먼저 지펴올린 애국의 불길, 그 불길이 바다를 건너와 려수에로 번져졌고 지리산의 정수리로 치달아올라 항전의 봉화로 거세차게 타오르며 온 남한땅에 광휘로운 빛을 뿌리였거니 미제와 매국세력의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었더라.

그래도 꺼질줄 모르는, 다시 타올라야 할 봉화의 불씨를 넓은 품에 꼭 껴안아주었던 내 고향의 산이여!

물어보자. 전쟁전까지 이태동안에 살아남은 빨찌산의 수는 불과 200명이였다니 그의 열배나 되는 빨찌산들은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꽃다운 생을 아낌없이 바쳤는가를…

후퇴시기에 미처 부대를 따라가지 못한 선생님이 몇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덕유산으로 들어갔을 때 지리산과 덕유산에는 무려 4만여명에 달하는 입산자들이 수많은 골짜기들마다에 운집해있었다고 한다.

려수에서 무장항쟁의 불길을 올렸다가 불씨로 살아남은 오랜 빨찌산들과 개별적으로 혹은 소부대로 뒤늦게야 후퇴길에 오른 인민군대 전사들, 정치공작대원들, 민주개혁의 덕택으로 한두달동안이나마 제 땅을 가져보았던 농민들, 불비속을 뚫고 인민군대를 도와 총포탄을 날라주었던 녀인들, 의용군에 자식을 내보낸 부모들, 이처럼 단독선거로 조작된 남쪽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총선거로 창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준엄한 시련의 시기에 모두다 높은 산, 깊은 골짜기들에 삶의 거처를, 투쟁의 거점을 정한것이였다.

이리하여 북에서 남으로 줄기차게 뻗어내린 태백산줄기와 서남쪽으로 갈라져내린 소백산줄기를 기둥으로 한 드넓은 지역의 해방구가 창설되였다고 한다.

통칭하여 지리산빨찌산으로 불리우는 이 집단속에 다름아닌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는것을 나는 어릴적부터 내심 자랑으로 여겨왔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심룡세라는 사람을 아시는가고, 선생님은 무엇때문인지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기억을 더듬는듯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기관사출신인데 싸움을 잘했다고 하시였다.

나는 기뻐서 수헌씨를 돌아보았다.

수헌씨는 좀 떳떳치 못한 기색으로 옹색하게 덤덤히 앉아있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수헌씨에게는 좀 미안스러운 일이지만 이 순간에 내 가슴속에 차오른것은 훌륭한 아버지를 가진 자식의 행복감이였다.

바로 그 대목에서 수많은 불티가 튕겨나 자기의 얼굴에 들씌워지는것만 같았다.

룡세는 급기야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얼굴이 얼마나 뜨거운지 손바닥까지 홧홧 달아올랐다. 자식앞에서 떳떳치 못한 아버지가 겪는 괴로움이 얼마나 비참한것인가를 그는 이 순간에 쓰겁게 맛보았다.

오늘도 선생님의 이야기는 지리산에서 계속된다.

일시적인 후퇴에 이어 인민군대의 전면적인 재진격, 38선일대에서 전선의 고착, 판문점에서 휴전담판시작, 전선에서 들어온 《수도사단》의 대공세, 경상도와 전라도일대를 쥐락펴락하던 지리산빨찌산의 승전기는 지나가고 생사의 판을 가르는 준엄한 시련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주민지역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들이 봉쇄된 지리산에 굶주림과 혹심한 추위, 미군이 떨군 세균탄에서 발생한 무서운 병마가 휩쓸었다.

《놈들의 수색대들이 매일같이 지리산을 참빗처럼 훑어대는거야.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거처를 옮기면서 놈들과 맞불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어. 정말 견디기 어려웠지. 그때 손을 들고 산에서 내려가면 얼마든지 살수 있었어. 그 길을 택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

그러나 절대다수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는 공화국만세를 높이 부르고 지리산의 품속에 영원히 안기는 길을 택했단다.

다시말해서 그들의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였기에 공화국공민으로서 최후를 마쳤던거야.》

선생님은 포위망을 뚫고 북상하려다가 오른팔에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였다고 한다.

정전이 될 때까지 체포된 좌익수의 수는 무려 수만명에 달한다니 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리산에만 있은것이 아니였다.

《그들 대다수가 학살되였어. 형식적으로 재판이라는걸 하긴 했는데 매번 검사의 기소를 판사가 그대로 받아들여서 <앞줄은 사형, 뒤줄은 무기형> 하는 식이였어. 나도 1심에서는 사형을 언도 받았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3심에 올라가서는 무기형으로 확정된거야. 아마 판결문건의 종이장 순서가 바뀌였던 모양이야.》

선생님은 쓰겁게 웃으셨다.

《하여튼 나처럼 요행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부분이 옥중에서 사망했어.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중세기적인 고문을 들이댄 놈들이 살인을 했다고 봐야 정확한거지. 지금 옥중에 살아남아있는 사람들은 다 합쳐도 아마 백명이 되나마나할거야.》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자체가 도무지 믿을수 없는 일, 기적이 아닐수 없다.

감옥이라는 커다란 매돌에 좌익수, 량심수라고 불리우는 수만명에 달하는 애국자들이 갈리워서 가루가 되였다. 이 가루속에 어쩌다 한두알 남아있는 밀알이라고 할가. 갈퀴우고 갈퀴여서 성한 곳이 없지만 그래도 종시 깨지지 않은 밀알들이 씨앗으로 되여 움 트고있는게 아닐가? 우리 선생님이 바로 그 씨앗들중의 하나인것이다.

수헌씨는 강의를 받을 때처럼 수첩에 만년필을 달리고있다. 련속 써나가다가 의문이 생기면 캐묻군 한다.

재판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였는가? 판결은 어느 법조항에 근거하여 내린것인가? 어째서 상소를 하지 않았는가? 감옥안의 식사는? 운동시간은? 독서의 자유는? 령치품사용은? 어떤 고문들을 받았는가?

선생님은 그의 질문에 매번 생동한 례를 들어 상세한 대답을 해주신다. 그때마다 나는 지옥을 보는것만 같아서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군 했다.

지난날을 특히 감옥생활을 돌이켜보기 괴로와하신다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제야 비로소 리해되는듯 싶다. 이런 추억을 가지고있다는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수헌씨는 뭔가 잘 납득되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선생님에게 까박을 붙여보기도 한다.

아마 그가 배우는 법률학은 이런 처참한 감옥실태와 상당한 정도로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거듭 따져 물어보고 까박도 붙여보고 부정도 해보던 미래의 법관은 더는 부정할수 없는 수난자의 처절하고 생동한 고백앞에서 두손을 든채 절망적으로 이렇게 웨치고야 말았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죄다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법은 대체 어떤것입니까? 법은 그렇게까지 가혹하지 않습니다. 이건 위헌중의 위헌입니다!

인간의 량심에 이다지도 모질게 칼질을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더 찾아볼수 없을겁니다.》

수헌씨는 돌아올 때 아무 말도 없었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괴로와하는 기색이였다.

전향서에 지장 한번 찍으면 그 모진 고초를 겪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나올수도 있었던 사람들, 그러나 한번 품은 뜻을 생명보다 더 고이 간직하고서 죽음을 기꺼이 택한분들의 령혼을 위로하고저 옥중에서 동지들이 지어 읊었다는 시 몇편을 내 일기장에 옮긴다.

 

장쾌승 멋진 노래 불러주마 뻐기더니

옥싸움 비명터져 작별조차 못 나눈 님

붉은 뜻 그 사랑 길이길이 모시리

(이분의 고향은 경북)

 

세상일 환하거니 주역독백 못했어도

진솔한 농투성이 외곬으로 나라사랑

수십년 징역살고 통일기원 남겨두고

(이분의 고향은 충남 서천)

 

적에겐 호랑이 동지에겐 순한 양

옥중투사 강장군 총각으로 들어와

통일을 못 보고서 눈감고야 출옥해

(이분의 고향은 전남 강진)

 

충성을 못다하고 먼저 간다 말 남기고

희생을 무릅썼네 박쥐만행 폭로했네

붉은 피 그 뜻 갚으리 님의 기발 덮으리

(이분의 고향은 충남 보령)

 

아! 가슴이 터지는구나. 사랑하는 일기장아.

이 어찌된 일이냐? 명승고적들을 찾으며 옛 시조를 읊조리던 내가 너의 갈피에 이런 현대시조들을 적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구나.

이건 이 땅의 가장 어두운 곳, 지옥이나 무덤속에만 비길수 있는 곳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야. 어찌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분들의 주소가 이런 곳이여야 하는지 나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어. 그러나 끊어져나간 이 나라의 허리를 다시 잇는 일은 바로 이분들이 하고있고 이런분들이 있기에 우리 민족이 력사와 세계앞에 떳떳하고 자랑스럽다는것만은 똑똑히 알게 되였어.

그저 제 한목숨, 기껏해야 제 가족이나 먹여살리자고 서로 악을 쓰며 밀치고 닥치며 정신없이 뛰고있는 이 사회의 현실속에서도 이분들만은 순간도 조국의 통일념원을 잊은적 없고 분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껴오신거야.

하기에 통일의 함성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굴할줄 모르는 이분들의 뜨거운 심장에서 울려나오고있어.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이분들의 웨침에 목소리를 합쳐야 해. 그런데 요즘 땐스음악에 도취된 우리 학우들이 이 웨침을, 이 노래소리를 듣지 못하고있는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야.

반공교육을 받는 과정에 눈뜬 장님이 된 우리들은 아메리카나 서유럽에서 울려오는 장단에 맞춰 미친듯이 춤을 춤으로써 력사앞에 머리를 들수 없는 매국적인 행위를 자행하고있는거야. 그러면서도 그것을 추세에 뒤질세라 선진국문명을 받아들이고 즐기는것으로 몰리해하고있지.

나는 땐스음악에 오염된 학우들에게 비전향장기수들이 지어 부르는 이 노래부터 배워주자는거야. 그들도 나처럼 외곡된 인식이나 편견을 바로잡을수 있게. 력사를 바로알게 해주자는거야.

이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란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력사를 바로알게 되면 이 땅의 현실은 달라지게 될거야. 가장 어두운 곳에 갇혀있던분들이 가장 밝은 곳으로 뛰쳐나와서 만사람의 축복을 받게 될거야. 이런날이 와야 팔도강산의 명승유적들을 다 찾아보고 우리 녀성들의 애국심과 절개와 슬기를 담은 두툼한 책을 써내려는 나의 소박한 꿈도 현실로 이루어질수 있어.

나의 일기장아, 그날에 너와 다시 만나자.

안녕히!

갑자기 복도에서 진주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왔다.

《어머니! 나 도서관에 갔다왔습니다.》

《오냐, 왜 늦었니? 시장하겠구나.》

반기는 안해의 목소리…

심룡세는 무슨 못할짓이라도 하던것처럼 와뜰 놀라며 일기장을 황급히 덮어버렸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문을 열며 들어서다가 멈춰선 진주의 놀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제 딸자식앞에서 자신이 불행하고 가련하고 떳떳치 못한 존재로 느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진주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버지, 제 일기장을 보셨죠?》

룡세는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는 강용찬이라는분을 모르시나요?》

또 거북스런 헛기침소리…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아버지가 기관사출신으로 지리산에서 잘 싸웠다고 했어요.》

룡세는 딸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해준 강형이 고마왔다.

《나도 그 사람을 안다. 알아도 잘 알지.》

진주의 두 눈동자가 환희에 겨워 빛을 뿌렸다.

《나도 그럴거라고 짐작을 했댔어요.

아버지, 그분에 대한 얘기를 들려줘요. 예?》

진주는 갑자기 어린애가 된듯이 아버지의 팔에 매달리며 졸라댔다.

《너야 요즘 계속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니.》

《글쎄 선생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나 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죠?》

《음,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왜 없나요?》

이때 정성껏 저녁상을 차려놓고 남편과 딸을 불러들이는 행복한 녀인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17

 

수헌이는 사나흘에 한번씩 진주와 함께 양로원에 찾아가는것을 제외하고는 겨울방학을 거의나 부산대학교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자기가 리론적으로만 인식하고있던 법률학적인 개념들을 실천적인 견지에서 재검토해보았다. 그러자니 안개속에 가리워져있는 《한국》사의 리면을 파고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선생님이 가르친바 그대로 광복직후와 6.25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의 복잡다단한 정세들은 외세배격세력과 외세추종세력간의 치렬한 투쟁으로 일관되여있었다. 한쪽이 절대다수의 근로민중이라면 다른쪽은 극소수의 자산가들과 관료배들이였다.

모든것을 미루어보아 너무도 렬세한 극소수는 외세를 등에 업지 않고서는 존재조차 할수 없었다. 이 세력은 외세의 윤허를 얻기 위해 《반공》을 표방했고 그것을 몽둥이로 휘둘러서 절대다수를 두들겨팼다. 국토분렬의 현 시점에서 응당 하지 않을수 없는 통일론의는 물론이고 초보적인 생존권의 요구조차 무자비한 처형의 대상으로 되였다. 결국 독재가 법의 이름을 도용하여 민주에게 감히 쇠고랑을 채워서 감옥으로 보낸것이다.

파고들면 들수록 수헌이는 커다란 불신과 의혹에 잠겨들게 되였다.

할아버지가 노상 입버릇처럼 강조하듯이 법이란 곧 국가다. 국가는 마땅히 법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바로정하고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것으로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을 다루어야 한다.

인간의 량심이 곧 선일진대 법이 그것을 지켜줄 대신에 오히려 해치려 든다면 그러한 법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대체 어떤것인가? 어찌하여 절대다수인 민중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움켜쥐고서 마땅히 신성시해야 할 법의 이름으로 독재를 실시해왔는가? 만민복지의 사회이며 인권옹호국이며 법치국이라는 미국은 왜 이런 독재정권을 력대적으로 비호해주고있는가?

그는 리승만때 나온 《국가보안법》과 그것만으로도 성차지 않아서 박정희가 또 만들어낸 《사회안전법》 그리고 이른바 민주를 표방해나선 현 집권자가 《사회안전법》을 페지하고 그대신에 만든 《보안관찰법》 등을 하나하나 공인된 국제법적기준에 대비하여 보고나서 실망을 금할수 없었다.

특히 3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강용찬을 눈에 보이지 않는 철창속에 몰아넣은 《보안관찰법》이 일정때 나온 《전향제도》를 끈질기게 답습하고있다는것을 발견했을 때는 경악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그는 광복직후부터 법계에 몸을 잠그어온 할아버지와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어보고싶었지만 적당한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고 또 그럴만 한 용기도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그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최성규는 조금도 환락에 물젖지 않은 단정하고 준수한 손자의 모습을 못마땅한듯이 흘겨보면서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너 요즘 대체 뭘하는거냐?》

무엇때문인지 할아버지의 기분이 대단히 좋지 않다는것을 직감하고 수헌이는 내심 긴장해졌다.

《왜 대답을 못해?》

《그저 도서관에 가서 독서나 합니다.》

《다른 왕청 같은 곳에 다닌적은 없었나?》

《예. 없었습니다.》

최성규는 노기가 번쩍이는 눈으로 손자를 노려보았다. 수헌이는 반발심을 느끼며 태연히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난 다 알고있어. 솔직히 말해라.》

혹시 양로원에 간것때문에 이러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헌이는 그 자세로 나갔다.

《정말 없습니다.》

최성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남아답지 못하게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너 웬 계집애하고 양로원에 찾아다닌다면서?》

진주를 천박하게 계집애라고 부르는통에 수헌이는 상당할 정도로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그 아가씨를 계집애라고 부르는건 모욕입니다.

양로원도 결코 왕청 같은 곳이 아니지요. 말씀을 삼가해주십시오.》

순하디 순한 손자녀석이 눈을 밝혀 채며 엇서는통에 최성규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새해에 들어와서도 꼬리를 물고 속출하는 강력범죄들을 사사건건 조사하여 법정에 기소하노라 어느 하루도 쉴새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바쁜 속에서도 양로원에 있는 자기의 오랜 적수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어제 구역경찰서장에게 강용찬의 동향자료를 요구하여 서면으로 보고받았다.

다행히도 강용찬은 조용히 지내고있었다.

양로원이라는게 다 늙은것들이 모여들어서는 참하게 북망산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여생에 희로애락을 깡그리 누려보자는것인지 쩍하면 술 마시고 신세타령을 하고 점을 치거나 도박을 하고 지어는 련애질에 질투까지 심해서 별나게 말썽을 일구는 곳인데 강용찬은 생활에서 아주 모범이라는것이였다. 병약하고 불편한 몸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밖에 없는 손에 커다란 비를 들고 마당을 깨끗이 쓴 다음 자기 방을 물걸레로 말끔히 닦아내고 조용히 홀로 앉아 책이나 읽는다나. 전화질이나 편지질도 하지 않았대. 기자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고 지어는 크리스마스날에 찾아온 목사의 방문조차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남녀대학생만은 례외여서 찾아올 때마다 매우 친절히 맞아들이군 한다는것이였다. 대학측에 조회를 해보니 그들은 운동권에 속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수재들이라고 했다.

이 서면보고를 받고나서 최성규가 유감스러운것은, 아니 심히 불쾌하고 속이 섬찍할 정도로 불안한것은 그 두명의 대학생중 한명이 괘씸하게도 자기의 손자라는데 있었다.

《그래 양로원이 왕청 같은 곳은 아니라고 하자. 헌데 왕청 같은 곳이든 아니든 젊은 녀석이 그런데는 뭣하러 기신기신 찾아다니는거야?》

수헌이는 걸고들듯이 따져 묻는 할아버지앞에서 사실대로 말하면 불리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작년 가을에 출소한 비전향장기수로인을 만나보러 갔댔습니다.》

《누가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추기더냐?》

그런 졸렬한 질문을 받고나니 수헌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추기다니요? 내가 뭐 어린애입니까? 난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 스스로 찾아간것입니다. 법학연구의 견지에서 보아도 관심이 가더군요.》

최성규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함께 갔다는건 누구냐?》

《부산대학교 녀학생입니다. 그저 우연히 만나서 동행하게 된겁니다.》

《우연히 만난 아가씨와 계속 함께 다녔다?》

《예. 거 보기 드문 미인이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왕이면 계속 함께 다니고싶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최성규는 담배를 피워물고 눈짓으로 손자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수헌이는 공손히 의자에 앉았다.

마치 심문을 받는것 같아서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 그 령감을 만나보니 감상이 어때?》

수헌이는 자기가 비전향장기수로인을 만난걸 두고 어째서 할아버지가 이다지도 노해서 신경을 쓰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수헌이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였다.

최성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무해주었다.

《어서 사실대로 말해라. 난 솔직한 대답을 듣고싶어.》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최성규는 손으로 뾰족한 턱을 어루만지며 짤막하게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

《난 이번 기회에 교도소와 감호소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하더군요. 몸서리가 쳐질 지경입니다. 우리 법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수헌이는 자기가 느낀바를 그대로 터놓고나서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하여 고함을 칠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할아버지는 표표하던 낯색이 누그러져서 미소까지 짓는것이였다.

《녀석두… 문제를 지나치게 날카롭게 보는구나.

그러니까 뭐 다른 얘기는 없었다는거냐?》

다른 이야기가 없은건 아니였지만 그대로 말하면 수헌이자신은 둘째치고 현재 보안관찰처분을 받고있는 강선생님이 화를 입을수 있었다.

《예. 전 그저 순전히 학술연구적인 호기심때문에 그 로인을 만난것입니다. 법적처벌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처지와 심리상태를 알고싶더군요.》

《음, 그래서?》

《감옥이라는거야 죄를 범한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교화하자는 시설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물론 그렇지.》

《그런데 우리 교도소나 감호소는 너무도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있더군요. 간수들이 수인들을 교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사회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키워주고있지요. 우린 확실히 인권후진국입니다.》

최성규는 눈을 흡떴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

《사실이 그런걸 어쩝니까? 난 할아버지와 이 문제를 놓고 론의해보고싶었습니다.》

최성규는 어지간히 안심이 되는바가 있어서 껄껄 웃었다.

《그럼 좋다. 우리가 왜 인권후진국인가를 증명해봐라.》

《예.》

수헌이는 1955년에 국제련합이 채택한 재소자처우최저기준을 례로 들었다.

우리 교도소나 감호소에서 재소자들에 대한 처우실태는 이 최저기준에도 도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다. 양로원에 있는 그 로인은 36년이라는 세계기록적인 감방생활의 대부분을 한평도 못되는 독방에서 흘러보냈다. 그곳은 거의나 해빛이 들지 않으며 위생상 불결하기 짝이 없다.

그에게는 극히 적은 량의 보잘것 없는 식사가 차례졌으며 중세기적인 고문이 가해졌다. 그는 면회도 할수 없었고 편지를 쓸 자유도 없었으며 지어는 독서도 마음대로 할수 없었다.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수가 없기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거야 너무하지 않는가?

수헌이가 한창 열을 올리는데 최성규는 히물히물 웃었다.

《야, 너 한사람의 말만 듣고 속단하지 말아라.

그건 사상범들에 한한 조치야.》

《제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사상범이라는게 한국을 내놓고 도대체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사상처벌법>은 정치후진국이라는 남아프리카나 대만에서도 이미 페지된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론거를 빈틈없이 세우는 손자앞에서 최성규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는 재판정에서 피고를 기소하다가 변호사의 사리정연한 변호에 몰리게 되면 눈을 꾹 감고서 마지막주패장을 내대던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나가는수밖에 없었다.

《예… 우리 나라에 사상범이 존재하는것은 <승공통일>이 될 때까지는 불가피한 일이야.》

수헌이는 반공만능의 그런 억지주장에 굽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전 그 리유를 알고싶습니다.》

《뭐 그 리유란게 별게 아니다.

내 이전에도 말했지만 우린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기에 반공을 하지 않을수 없어. 너도 아다싶이 공산국가인 북이 우리를 항시 노리고있거든. 때문에 북에 동조하는 그 어떤 사소한 움직임도 제때에 짓뭉개야 하는거야. 그런 자들을 그냥 둬두면 사회적혼란이 생기거든. 북이 바로 이런 기회를 타서 남침을 하려고 한단 말이다.》

수헌이는 피대를 돋구며 반공의 필요성을 력설하는 할아버지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타매하던 비전향장기수로인을 대비적으로 고찰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쪽이 반공으로 빚어진 법의 화신이라면 다른쪽은 그 법의 가혹한 폭압속에서도 자기가 품은 뜻을 변치 않고 꿋꿋이 지켜내는 신념의 화신이였다.

그럼 나는 어느쪽인가?

불쑥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최성규는 열에 들떠서 《단선》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제주도민들의 항쟁과 려수군인폭동 그리고 지리산빨찌산들의 투쟁과 4.19봉기, 지어는 《미국문화원》방화사건과 지난 년대에 일어난 광주봉기까지도 남쪽땅을 적화통일하려는 북쪽의 조종에 따라 움직인 빨갱이들의 반정부폭동으로 몰아붙였다.

《사생결단으로 우리에게 덤벼드는 공산폭도들을 어떻게 그냥 둘수가 있어? 그시그시 모조리 총살해버렸어야 했어. 그러나 국제사회가 지켜보고있기에 다 죽여버릴수는 없었던거지. 양로원에 있다는 그 령감태기도 그통에 요행수로 살아남게 됐을거다. 그러니 불평을 부릴게 아니라 운명의 신에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거다.》

이 순간에 수헌이는 지옥에 있다는 악마가 혹시 할아버지처럼 생긴게 아닐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직접 기소한 사상범들은 모두 몇명이나 됩니까?》

최성규는 언젠가 강용찬이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은 생각이 났다. 그와 꼭같은 질문을 수헌이에게서 또 받게 되는것이 묘한 일치라고 여겨져서 기분이 상했다.

《그건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수자는 모르겠다.》

신경질적으로 이렇게 대꾸한 최성규는 손자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노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녀석아, 너 똑똑히 명심해라. 나는 말이다.

법을 어긴 자는 그가 설사 내 아버지나 아들이라고 해도 결코 용서치 않았을거다. 알겠니?》

수헌이는 할아버지가 자기의 멱살을 물어메치려고 하는 맹수처럼 보이기에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손자를 노려보는 최성규의 부릅뜬 두눈에는 광기와 살기가 희뜩번뜩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응?》

이건 손자에 대한 로골적인 위협이였고 공갈이였다. 수헌이는 무엇때문에 지금껏 자기를 각별히 위해주던 할아버지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어쨌든 당장은 순종하지 않으면 무슨 변이 날것 같아서 급기야 고개를 끄덕이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최성규는 손자앞으로 바싹 들이밀었던 얼굴을 끄당겨 뒤로 젖히며 소리없이 벙글써 웃었다.

이때 그의 모습은 지극히 소탈하고 너그러웠다.

여느 때없이 표정변화가 돌발적인 할아버지앞에서 수헌이는 자기의 인격이 여지없이 무시당하는것 같아서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고분고분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어주는척 하면서 새로운 공격을 시도했다.

《할아버지, 공산폭도들의 망동은 법으로 짓뭉개버린다치고 지금 한창 열기를 띠고있는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성규는 즉시에 주먹을 휘둘러보였다.

《그것두 쳐갈겨야 해. 그게 바로 내막은 공산주의란 말이다.》

《그럼 사회를 민주화하지 말아야 한다는건가요?》

손자의 질문이 꽤 까다로와진다 하면서도 최성규는 설득력있게 론거를 피력했다.

《민주화라는걸 하기는 해야지.

그러나 그것은 후차야. 북을 수복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거든. 남북이 치렬한 대결을 하고있는 지금 상황에서의 민주화는 시기상조로서 결정적으로 국가안보에 불리한거야. 여기로부터 민주화운동이 반국가범죄행위라는 결론이 나오는거다.》

《북을 수복한다는건… 그게 가능한 일일가요?》

최성규는 호언장담을 했다.

《음, 오래지 않아 그렇게 될거다. 너도 알겠지만 사회주의라는건 지금 세계적인 판도에서 저절로 망하고있어. 뭐 이북이라고 별수가 있다더냐.》

수헌이는 잘 납득되지 않는지 잠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오로지 그것때문에 자기의 기나긴 반생을 옥중에서 보내고있는 사람들이 바로 남한에 존재하고있는 이 엄연한 사실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뭐… 뭐라구?!》

최성규는 갑자기 어금이라도 쏘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치명적인 질문으로 호언장담하던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은 손자를 당장 잡아먹을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수헌이는 급작스레 험악해진 상대방의 그 인상, 그 눈초리, 그 목소리에 질려서 선뜻 입을 뗄수가 없었다.

《어서 말해라. 난 솔직한 대답을 듣고싶다.》

수헌이는 당장 벼락이 떨어질것을 각오하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할아버지가 바라는 그런 식의 통일은 절대로 이루어질것 같지 않습니다.》

최성규는 살에 맞은 맹수처럼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꽉 움켜진 주먹으로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힘껏 내리쳤다.

《그래! 바로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전향시켜야 한단말이다.》

학술적인 론쟁에서는 먼저 소래기를 지르는쪽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것으로 된다.

그래서인지 수헌이는 할아버지가 화를 낼수록 언성을 높일수록 자기는 마음이 진정되는감을 느꼈다. 그래서 태연하게 응대했다.

《전향이요? 그것도 내 보기엔 불가능한 일인것 같더군요.》

그래도 명색이 손자라는 녀석이 제 할아버지앞에서, 아니 법을 배운다는 젊은 녀석이 관록있는 법관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이런 건방진 본때로 계속 엇선단말이지.

최성규는 약이 오를대로 올랐지만 체면이 그렇지 않아서 겨우 자신을 자제했다.

《불가능하다?! 그 리유는?》

수헌이는 자신만만하게 자기의 론거를 내놓았다.

《지금 양로원에 있는 강용찬선생님을 만나보니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특수하더군요.

그분이 전향하지 않은것은 <지원>의 뜻과 3대각오에서 출발한것이였습니다.》

《뭐?! 선생님?》

수헌이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퍼그나 입에 오른 자연스러운 말투로 강용찬이를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존대해 부르는데 대하여 최성규는 무서운 질투심을 동반한 치솟는 격분을 누를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뒤를 이은 의미심장한 말의 뜻을 따져볼 경향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은 무슨 놈의 선생님이야? 그놈은 범죄자야! 감옥에서 나왔지만 지금도 법의 감시를 받고있는 위험분자란 말이다!》

웬일인지 갑자기 노기가 치받쳐서 펄펄 뛰는 할아버지앞에서 수헌이는 기겁을 하기에 앞서 완전히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이 괘씸한 녀석, 그놈을 만나보러 다니더니 벌써 빨간물이 들었느냐? 다시 양로원에 발길질을 하면 네놈의 정갱이를 내 손으로 분질러놓을테다! 알겠어?》

최성규의 얼굴은 갑자기 피가 몰려서 시뻘개졌고 부릅뜬 두눈은 광기를 띠고 번뜩거리는데 당장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떠들어대는 소리에 깜짝 놀란 며느리가 사색이 되여 달려들어왔다.

엉겁결에 엉거주춤 일어나서 꼼짝없이 굳어진 수헌이는 어머니가 매우 친절한 태도로 할아버지를 의자에 앉혀드리고 고뿌에 물을 부어 진정제를 타서 먹여까지 주는것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걸 마시고나서야 좀 혈압이 내렸던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휴- 하고 긴 숨을 내쉬는것이였다. 그러더니 수헌이를 보자 얼굴을 찡그리면서 어서 물러가라는듯 말없이 한손을 홱 내저었다.

18

 

《얘, 너 어쩌자고 할아버지를 노엽혔니? 응?》

어머니는 몹시 속이 상해서 따져 물었다.

자기 방에 돌아와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수헌이는 눈을 꾹 감고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헌아, 말을 좀 하려무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니? 왜 할아버지와 다투었어?》

수헌이는 마지 못해서 눈을 감은채 대꾸했다.

《어머닌 상관하실게 없어요. 법률상의 론쟁끝에 일이 그렇게 번져졌으니까요. 나도 할아버지가 왜 성을 냈는지 도무지 알수 없구만요.》

수헌이는 정말 그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물론 자기가 의도적으로 할아버지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립장에서 주장을 편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그다지나 노발대발할것까지야 없지 않는가. 할아버지는 응당 자기나름의 정당한 론거로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했었다. 할아버지야 당국의 법관이 아닌가. 고명하신 검사나으리가 그래 다른 문제도 아닌 법률상의 론쟁에서 법대학생인 자기 손자도 설득시킬수 없단말인가?

어머니가 시끄럽게 또 캐물었다.

《그럼 할아버지가 너에게 양로원에 가지 말라고 소리친건 뭐냐?》

《그럴만 한 일이 있어요.》

수헌이는 하는수없이 상반신을 일으키고 양로원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로인을 만난 사연을 대충 이야기했다.

《뭐?! 그 로인에게 오른팔이 없다구?》

어머니는 별스레 놀라며 관심을 표시했다.

《예. 그래서 그런지 나도 오래전에 한번 만나본 일이 있는것 같았어요. 혹시 우리 집에 찾아온적이 있지 않나요?》

《아니, 난 모르겠다. 모르겠어.》

수헌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별안간 해쓱하게 질리는것을 어리둥절해서 지켜보았다.

《왜 그래요? 어머닌 그분을 아시나요?》

《응?! 그래서 그러는게 아니란다. 난 그저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거야.》

어머니는 황황히 자기의 표정을 수습하면서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과 접촉해야 좋을게 없지 않니.

넌 그저 할아버지가 하라는대로만 하려무나.

그래야 등탈이 없어. 응? 그러지? 제발 부탁이다.》

근심에 잠긴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탁이 아니라 애원에 가까운것이였다.

《할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위해주시는지 그거야 네가 잘 알지 않니. 쓸데없는짓을 해서 할아버지를 두번 다시 노엽혀드려서는 죄가 된단다.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어쨌든 할아버지가 아니였더라면 넌…》

어머니는 말꼬리를 삼키고나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물러갔다.

수헌이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생각될 지경이였다.

이 집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일류급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고급승용차까지 타고다니는 내가 어째서 자신을 행복하게 여기지 못하고있는가? 만약 나의 처지가 불행한것이라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것인가?

이런 의혹에 잠긴채 번민에 시달리며 뒤치락거리던 그는 새벽녘에야 겨우 어설픈 잠에 들었다.

잠결에도 그 풀길없는 의혹의 답을 찾아 모대기는 그의 귀전에 어머니의 자장가소리처럼 단조로우면서도 률동적인 파도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고민에 지쳐버린 그의 심신은 파도에 실려서 오늘의 기슭을 떠나 어제날 동요시절을 찾아 넘실넘실 밀려갔다.

동백꽃이 피여나는 아름다운 바다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아장아장 서툰 걸음마를 떼던 하얀 백사장, 저 멀리 수평선에 상선의 우아한 모습이 떠오르고 부웅!- 배고동소리가 울려올 때면 아버지가 오시는거라고 속삭여주던 어머니의 애틋한 목소리.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가 정말 오신 그날이면 그것이 집안의 명절날이였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던가. 그러나 아버지는 며칠후엔 다시 떠나가군 했었다. 그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친숙해질 사이도 없었던 아버지,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먼바다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가지고와서 안겨주던 선물들, 장남감들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딸랭이, 인형아기, 복슬강아지, 알락달락한 고무풍선들, 방아쇠를 당기면 신기하게도 파란 불꽃이 튕겨나가는 장난감권총 아니 그 권총은 아버지가 사다준것이 아니였다.

허술한 옷차림에 짧게 깎은 머리칼이 반나마 세여버린데다가 몹시 여윈 늙은이, 불쌍한 외팔이로인이였다.

참, 그 사람은 누굴가? 애정이 끓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듯이 어디론가 달려가서 장난감권총과 색갈이 고운 비닐에 싼 우유사탕을 한봉지 사들고 기쁨에 넘쳐 달려왔던 그 늙은이는? 바로 그 시절부터 머리속에 드리웠던 의혹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데 별안간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흠칫 고개를 돌리니 하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위험을 느낀 수헌이는 얼른 비켜서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소리를 치려고 해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온 승용차가 자기를 깔아뭉개려는 순간에 그는 뭐라고 소리를 치며 악몽에서 깨여났다.

멀미를 하듯이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활랑거렸고 머리속이 어수선했다.

내가 이자 무슨 꿈을 꾸었던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괴물의 형태를 띠였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와도 같아서 도무지 그 형체를 가늠할수가 없었다.

다만 명백한것은 오직 한가지, 자기에게 승용차를 사준 할아버지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승용차로 자기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갤수도 있다는 위구심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공교롭게도 양로원에 가기로 진주와 약속한 날이였다. 하여간 일단 약속한것이니 혼자서 그만둘 결심을 내릴수는 없지 않는가.

진주를 만나서 의논해봐야 했다.

우정 할아버지가 식사를 하고 검찰청에 나간 다음에야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아침밥을 먹는둥마는둥 하고 어머니의 근심에 잠긴 눈빛을 등뒤로 느끼면서 복도로 나갔다.

무거운 생각에 잠겨서 천천히 층계를 내려 현관을 나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고에 들어가서 승용차를 끌어냈다. 그런 스산한 꿈을 꾸고나서 이 차를 타고다니자니 께름직했다. 하지만 자기의 차를 두고 구태여 택시신세를 지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승용차를 몰고 곧추 카페거리로 갔다.

이제는 친근할 정도로 낯이 익은 《진주특산》근처에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렸다. 이럴 때면 그러하듯이 정기 도는 시원한 두눈에 반가운 미소를 함뿍 담은 진주가 달려나왔다. 처녀는 스스럼없이 차문을 열고 들어와 수헌이의 곁에 앉으며 재촉했다.

《어서 가자요.》

수헌이는 운전대를 쥔채 차창밖을 바라보며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진주는 수헌이의 태도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것을 뒤늦게야 감촉했다.

《수헌씨, 왜 그래요?》

침묵.

《무슨 일이 있었어요?》

수헌이는 좀 면구스러워하면서 자기의 의향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이젠 거기에 가는걸 그만두지 않겠소?》

《그만두다뇨?》

진주는 의혹이 실린 눈동자로 상대방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그만두자는거죠? 난 그럴수가 없답니다.》

진주는 정말이지 그럴수가 없었다.

강선생님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싶었다. 이제 개교를 하게 되면 력사를 바로 알고싶어하는 학우들로 모임을 가지고 강선생님을 초청할 계획이였다. 앞으로 그런 모임은 자주 열리게 될것이며 지금도 옥중에서 통일의 날을 그려보며 시련을 이겨내고 계시는 비전향장기수들을 가능한껏 후원하기 위한 사업으로 폭을 넓히게 될것이다.

《우리가 양로원에 찾아가는걸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오.》

《그가 누구예요?》

수헌이는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나에게 이 승용차를 사준분이요.》

《그럼 수헌씨는 그분의 의향대로 하시죠.》

진주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이렇게 자기의 곁을 떠나간 처녀가 다시는 자기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것을 수헌이는 두렵고 아쉬운 심정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진주의 어깨를 잡아 당기고 열려진 차문을 닫았다.

《됐소. 함께 가기요.》

진주는 수헌이의 손을 뿌리치고 기어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승용차는 이미 출발하였고 속도를 내고있었다. 진주는 야속해서 싸늘해진 눈길로 수헌이를 흘겨보았다. 수헌이는 묵묵히 차창앞만 내다보며 차를 몰았다.

차안의 분위기는 랭담하고 어색하고 서먹서먹해졌다. 그들은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고난것처럼 서로 외면한채 고집스레 침묵을 지켰다.

늘쌍 열려진채로 있던 양로원의 정문이 웬일인지 닫겨져있었다. 수헌이는 하는수없이 정문앞에 차를 세웠다. 경적을 울리려는데 마침 경비실에서 총무가 나왔다. 늘 갑삭거리던 사람이 오늘 따라 거드름을 부리며 건방지게 나왔다.

《돌아가시오. 오늘부터는 강선생을 만날수 없소.》

수헌이는 뭔가 생각되는바가 있어서 좋지 않은 기색으로 물었다.

《어째서 만날수 없습니까?》

《그건 안보상 리유로 경찰서가 취한 조치요.》

총무는 더 할말이 없다는듯 돌아섰다.

수헌이는 하는수없이 차를 돌렸다.

경찰서로 하여금 이런 조치를 취하게 한 당사자는 검사인 할아버지일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강선생님과 만나는것을 왜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막아나서는것일가? 여기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터인데 그게 무얼가?

그는 어제 저녁부터 자기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그 의혹에 다시 포로가 된채 한적한 바다기슭으로 차를 냅다 몰았다.

누가 자기를 건드릴가봐 겁을 먹은듯이 옹송그리고 앉아있던 진주가 불안한듯 물었다.

《어디로 가는거죠?》

《문전거절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구만.

바다바람이나 좀 쐬고 갑시다.》

진주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수헌이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서 그저 잠자코 있었다.

승용차는 바다가의 백사장에 이르러 멈춰섰다.

겨울이여서 인적이 없는 백사장은 고요했다. 모래불에 레스모양의 잔거품을 쉴새없이 일구는 파도의 단조로운 음향마저 그 고요를 더해주는듯 싶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먼저 차에서 내린 수헌이는 바다쪽으로 몇걸음 비칠비칠 걸어가다가 맥이 풀린듯 모래불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주도 뒤따라 차에서 내렸지만 불안한 눈길로 수헌이를 주시하며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수헌이는 진주가 자기곁에 다가오지 않는것을 서운하게 여기면서 모두었던 숨을 길게 내쉬고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겨울방학은 끝나가고있었다. 그것은 진주와 헤여지게 될 날이 그만치 가까와지고있다는것을 의미했다. 오늘로 이 처녀와 영원히 헤여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 더는 갈수 없다면 이 처녀와 만날 리유도 자연히 없어지기때문이였다. 이런 의미에서 놓고봐도 강선생님이 고마왔고 반면에 할아버지는 원망스럽게 생각되는것을 어쩌는수가 없었다.

수헌이는 진주와 함께 있으면 그저 좋았다. 늘 외롭고 소심한 그는 이 처녀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즐거워지고 담도 커지는것이였다. 정말이지 이 처녀가 지켜보는 곳에서는 화구도 서슴없이 막을수 있을것 같았다. 말로써가 아니라 늘쌍 웃는 눈으로 자기를 고무해주고 고상한 행동에로 이끌어주는 이런 처녀와 다시 만날수 없다는것은 아쉬운 정도를 초월하여 두려울 지경이였다.

자기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속 번거로움을 속속들이 헤아리고 위로해주고싶었던지 그 처녀가 발벼발벼 다가오더니 고맙게도 곁에 앉아주는것이였다.

그는 진주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터놓고싶었다. 이 처녀에게는 자신에 대하여 설사 결함일지라도 숨기고싶지 않았다. 그에 앞서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심양, 정말 미안하게 됐소. 우리가 강선생님을 더 만날수 없게 된건 나때문이요.》

불안한 심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던 진주는 어마지두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예?! 무슨 말씀인지… 어째서 수헌씨때문인가요?》

《이건 분명 우리 할아버지가 취한 조치일거란 말이요. 그러니 나때문이지.》

진주는 그 말을 선뜻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게 그런 조치를 취한다는건가요? 경찰서장이라도 되는가요?》

《지방검찰청 검사요.》

진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수헌이는 여전히 저 멀리 수평선 한끝에 눈길을 준채 침울한 어조로 사연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강선생님을 자주 찾아간다는걸 다 알고있더란 말이요. 나에게 다시는 양로원에 발길질을 하지 말라고 생야단을 했소.

그러고도 안심치 않아서 경찰에 그런 지시를 주었을테지.》

진주는 차마 그렇게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그건 선입견이 아닐가요? 어쨌든 수헌씨의 할아버지인데 어쩌면 그다지도 가혹하게 처신할수 있겠나요.》

《모르는 소리… 할아버진 파쑈악법의 화신이요.

만약 내가 <국가보안법>이라는걸 위반했다면 그는 나를 붙잡아서 감옥에 처넣는것도 서슴지 않을거요. 그가 나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저 고급승용차를 사주었소. 그러나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는 경우에는 그 승용차로 나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개고도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을거요.

아, 내 처지라는게 바로 이렇소.》

수헌이는 갑자기 억이 막힌듯 헉- 흐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수헌이의 그 절망적인 태도, 그 슬픈 흐느낌소리에 진주는 울상이 되였다. 다 큰 사내가, 어느모로 보아도 부러울게 없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이 이렇게 절망에 잠겨 비관하고있으니 진주는 더우기나 가슴이 아팠다. 그를 위로해줄 사람은 지금 이 장소에 자기밖에 없었다. 처녀는 련민의 정에 이끌려서 총각의 곁에 더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는 평소에 감히 엄두도 못낼 용단을 내려 마구 헝클어진 상대방의 머리칼을 손으로 살틀히 쓰다듬어주었다.

《수헌씨, 진정하세요.》

수헌이는 어머니의 애무를 받는 어린애처럼 다정히 안아주는 진주의 품에 그만 얼굴을 묻었다.

《고맙소. 심양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야말로 불쌍한 놈이요.》

수헌이는 진주의 살틀한 손길에 머리를 맡긴채 자기의 마음속 고민거리를 다 헤쳐보이고싶은 충동에 북받쳐서 울먹이며 말했다.

 

《난 할아버지의 친손자도 아니고 아버지의 친아들도 아니요. 재혼한 어머니를 철이 없을 때 따라가서 더부살이를 하고있는 놈이지. 법대에 다닌다, 승용차를 타고다닌다 하는건 다 겉치레에 지나지 않소. 래일 당장이라도 쪽박을 차고 거리에 나앉을수도 있소.》

수헌이는 불쑥 고개를 들고 눈물이 가랑가랑 맺힌 진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심양은 이런 처지에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해서 이렇게 물었더니 진주는 축 처진 그의 어깨에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을 대며 속삭이였다.

《수헌씨는 솔직해서 좋아요.》

수헌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사실 사내답지 못하오. 모든 면에서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하거든. 치명적인 약점이요. 그러나 심양이 곁에 있으면…》

수헌이는 말을 마저 할수 없었다.

진주가 그 부드러운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볍게 막았기때문이였다.

《아니예요. 용기가 없는 사람은 솔직할수도 없지 않나요.》

수헌이의 두눈에 그렁그렁 고여있던 구슬픈 눈물은 순간에 기쁨으로 변하며 환희롭게 반짝이였다. 그는 성급히 자기의 입을 가린 진주의 손을 잡아당기며 웨치듯이 물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한다는거요?》

진주는 여전히 수헌이의 어깨에 한쪽 볼을 댄채 잠자코 있었다. 사실 그 처녀는 수헌이의 준수하고 고상한 인격을 높이 보고 존중해왔다. 그러나 그에게 사랑의 감정까지는 품지 않았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솔직성은 처녀를 감동시켰고 리성만이 아니라 감정으로도 끌려가게 해주는것이였다. 상대방이 위선으로 자기를 미화하지 않고 자신의 결코 행복하지 못한 처지를 그대로 드러내보일수록 동정심이 급증하여 애정으로 승화된것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서뿔리 사랑한다 어쩐다 하고 말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답을 피하며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저… 수헌씨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나요?》

수헌이는 처녀에게서 눈길을 돌려 다시금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상선을 타고 먼바다에 나갔다가 몇달에 한번씩 집에 돌아오시군 했소. 그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지. 내가 너무 어릴 때 있은 일이여서 잘 생각나지 않는구만.》

《할아버지는요?》

《전쟁때 폭격에 사망했다고 했소.

그런데 언젠가 웬 로인이 우리 집에 찾아온적이 있었소. 마당에서 놀고있던 나를 불러서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기가 내 할아버지라고 하시더구만. 그런데 어머니가 그 로인을 매정하게 돌려보냈소. 다시는 그 로인을 볼수 없었지.》

세월의 흐름속에 거의나 잊혀져서 아리숭하던 그때의 일이 지금 이 시각에 이처럼 생동하게 되살아나는것이 수헌이는 놀라울 지경이였다.

어릴적 그 시절처럼 바다가 백사장에 앉아있기때문인가. 아니면 섬세하고 부드럽고 정겨운 그 마음씨를 그 시절의 어머니에게만 비길수 있는 처녀와 나란히 앉아있기때문인가.

수헌이는 뒤늦게야 진주가 몹시 놀란 휘둥그래진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날 왜 그렇게 쳐다보는거요?》

진주는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수헌씨, 혹시 그 로인이 강선생님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수헌이는 선생님이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그런것 같기도 한데…》

혹시나 해서 미심결에 그런 질문을 던져보았던 진주는 제편에서 어마지두 놀란다.

《어머! 설마하니 차마 그럴수야?…》

수헌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관절 뭐가 어떻게 됐다는거요?》

《글쎄 그럴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제 말을 들어봐요.

강용찬선생님이 공주교도소에 있을 때 벌어진 사건인데 어느 날 놈들이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사형장에 끌어냈대요. 총구앞에서 그들의 신념을 꺾어보려고 연극을 꾸민거죠. 그때 선생님이 먼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하고 웨쳤는데 총소리가 울렸지요. 우리 선생님에게로 날아오는 총탄을 김혁창이라는 구빨치가 자기의 몸으로 막고 쓰러졌다는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어 수헌이는 심상하게 물었다.

《구빨치란 무슨 소리요?》

《처음부터 지리산빨찌산에서 싸운 구대원들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는군요.》

《그래서?》

《그 구빨치에게 다행히도 아들이 하나 살아남았대요. 아들이 여기 부산에서 살면서 무역선을 탔었는데 그만 해상사고로 사망했다는거죠. 그러자 안해는 나어린 자식을 데리고 재가했다기에 혹시나 해서…》

《뭐라구?》

수헌이는 보이지 않는 쇠붙이에 되게 얻어맞은듯이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설마… 누구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소?》

진주는 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의 아버지예요.》

《심양의 아버지가 강용찬선생님을 아신단 말이요?》

진주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요. 선생님은 중학공부를 할 때 진주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숙했대요.

지금으로부터 17년전에 선생님은 만기출소하여 교도소에서 나왔었는데 그때 선생님에게 생명의 은인인 구빨치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집주소까지 대준 사람이 바로 저의 아버지였대요.》

수헌이의 두눈은 흥분에 못이겨 이상한 빛으로 번쩍거렸다.

《그럼 심양의 아버님은 그 구빨치네 아들의 이름도 아시겠구만.》

《예. 뭐라고 했던가?》

진주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간 생각을 더듬더니 확신있게 대답했다.

《분명 김인석이라고 했어요.》

수헌이는 두눈을 크게 뜬채 굳어졌다.

김인석,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의 이름이였다. 하도 어릴적에 들은 이름이여서 까맣게 잊었댔는데 불시에 그것이 생각났다. 그러자 기억은 련쇄반응을 일으키며 그 시절에 부르던 자기의 이름까지 또렷하게 상기시켜주는것이였다.

김순기,

그것이 바로 자기의 이름, 진짜 이름이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김순기가 최수헌이로 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는가?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항력적인것에 밀리워 벼랑끝에 나선것만 같았다.

《아니.》

모든것을 부정하려는듯이 그는 고집스레 되뇌이였다.

《아니요. 그건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요.》

기대를 품고 잔뜩 긴장해졌던 진주는 그만에 맥살이 탁 풀렸다. 그러자 온몸이 노근해졌다.

혹시나? 했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던것이다.

《심양의 아버님이 강선생님을 그렇게까지 잘 아신단 말이요?》

《예. 지리산에서두 함께 싸웠대요.》

《그런데 어째서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을가?》

《그건 저…》

진주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얼른 감쳐물었다. 그렇다. 아버지는 왜 그러실가? 이런 의혹이 부쩍 고개를 추켜든것이였다.

수헌씨의 할아버지처럼 강선생님을 찾아가지 말라고 강박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버지도 내가 강선생님을 찾아가는걸 달가와 하지 않은것만은 사실이다. 어째서? 무엇때문에? 선생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그 훌륭한 이야기들을 어찌하여 아버지는 이 딸에게 진작 들려줄수 없었더란 말인가?

그들은 더 이상 이러니저러니 하고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무슨 질문을 할가봐 서로가 은근히 두려워하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괴로운 침묵에 잠긴채 저 멀리 수평선만 멍하니 바라볼뿐이였다.

무정한 파도도 제나름의 속상한 일이 있는지 뭐라고 쑹얼거리고 두덜거리며 밀려와 기슭에 레스모양의 물거품을 일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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