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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 아침식사를 여느때와는 다르게 차렸고 소주도 한고뿌씩 주었다. 늙은이들은 로친네들까지 그걸 마시고 기분이 좋아 철없는 애들처럼 흥이 나서 화투를 친다, 장기를 둔다 법석거렸다.

강용찬은 기분이 언짢아서 밥을 서너숟갈 뜨다가 수저를 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라는 어휘는 명절이라는 어휘가 아니라 총공세라는 어휘와 떼일수없이 결합되여있었다.

50년 마가을에 적들이 벌린 이른바 《크리스마스총공세》로 공화국의 운명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적들은 그해 크리스마스축배를 압록강이나 두만강기슭에서 들게 될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것은 오산에 불과했다. 크리스마스를 한달 앞두고 인민군대의 전면적인 재진격이 시작되였던것이다.

《선생님,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총무도 아침부터 한잔 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개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여느때없이 떠들며 들어왔다.

홀로 조용히 앉아서 추억에 잠겼던 강용찬은 찌르는듯 한 엄한 눈초리로 그자를 쳐다보았다.

《여보! 크리스마스란건 뭐요?》

총무는 아직 상대방의 기분상태를 가늠하지 못했던지 히히 웃으며 지껄여댔다.

《주님이 태여나신 명절날입지요. 그것두 모르십니까? 선생님이 말입니다.》

《난 그따위 명절은 몰라!》

강용찬의 쌀쌀한 태도에 총무는 즉시 기가 죽었다.

《선생님, 그래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강용찬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크리스마스선물을 가지고… 아니, 그저 우리 양로원의 늙은이들을 위로해주겠다고 교회에서 목사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먼저 강선생부터 만나겠다고 하기에…》

강용찬은 시끄러워서 왼손을 홱 내저었다.

《난 만나지 않겠소.》

총무는 뭔가 리해가 안되는지 고개를 기웃거리며 뒤걸음을 쳐서 나갔다.

강용찬이 다시 전쟁때 일을 돌이켜보려는데 총무가 다시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히 들이밀었다.

《선생님, 목사님은 몹시 서운해하시면서 선생님이 어째서 자기의 방문을 거절하시는지 그 리유를 말씀드려달라고 하십니다요.》

《그건 교도소나 감호소의 교회사들을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하시오.》

《예. 그렇게 말씀드리지요.》

총무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이른바 싼타클로스할아버지로 자처한 목사가 이 방 저 방 찾아 다니며 당과류와 세면도구 같은것을 크리스마스선물이라고 나누어 주고 돌아간지 한시간정도 지나서 하얀 윤기가 도는 최신형의 고급승용차가 양로원의 마당에 미끄러지듯이 들어와 사뿐히 멈춰섰다. 차문이 열리더니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준수하고 끌끌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내렸다. 로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던 양로원의 마당이 별스레 환해지는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은 사탕과 과자를 먹으며 놀음을 즐기던 늙은이들은 일제히 일어나 목을 빼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허, 이번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들을 보내주셨구만이라.》

《아유! 저렇게 예쁜 아가씨도 있었나?》

《성춘향이에 리도령이로구만. 좋은 때로다!》

새파란 젊음이 하도나 부러워서 저마다 감탄하듯 탄식하듯 한마디씩 한다.

《저런, 자가용까지 몰고온걸 보니 호부자집 도련님과 아씨가 분명하오. 헌데 도대체 누굴 찾아왔을고?》

《글쎄말이요. 양로원을 광한루로 잘못 보지는 않았을터인데…》

호기심이 어린 늙은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총무가 반색을 하며 마중나갔다.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요? 난 여기 총무입니다.》

수헌이가 례의있게 인사를 했다.

《수고가 많겠습니다. 저희들은 강용찬이라는분을 찾아왔습니다.》

총무는 젊은 손님들이 방금 승용차의 짐칸에서 꺼내든 묵직한 비닐구럭을 재빨리 훔쳐보았다.

《강선생을 찾아오신분들은 신분을 밝혀야 하는데요.》

《나는 서울법대에 다니는 최수헌이고 아가씨는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심진주양입니다.》

《예. 헌데 강선생이 만나주겠는지 모르겠군요.》

총무는 딱한 기색이였다.

《그전에 기자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일체 면회를 거절했지요.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크리스마스선물을 가지고 찾아오신 목사님도 만나주지 않았단 말입니다. 참 우리로서는 리해할수 없는 괴벽한 늙은이지요.》

총무의 말을 듣고보니 강용찬을 만날 일이 아주 난감하게 여겨졌다. 수헌이는 어쩌면 좋을가 하는 눈길로 진주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진주는 쉽게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총무님, 어서 그분에게 저희들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려주세요.》

《강선생은 웬일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던데요.》

《글쎄 말씀드려주세요. 아마 거절하지 않을겁니다.》

진주의 진정이 어린 부탁이였다.

《정 그렇다면 여쭤보지요. 잠간만 기다리십시오.》

총무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헌이는 그리 달갑지 않은듯이 물었다.

《심양은 그분이 우리를 만나줄것 같습니까?》

진주는 입을 꼭 다문채 응대를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돌아갑시다. 한다 하는 기자들과 목사님까지 튕겨버린 괴벽한 늙은이가 우리같은 풋내기들을 왜 상대해주겠소.》

진주는 무슨 모욕이라도 당한듯이 당장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괴벽한 늙은이라니?!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처럼 착하고 부드럽던 처녀가 일단 발끈해지니 수헌이는 마주보기조차 두려웠다.

《방금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길래…》

《그럼 수헌씨는 돌아가시죠.》

진주는 쌀쌀하게 말하고 수헌이를 외면했다.

이통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는데 마침 총무가 새물새물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자, 어서 가십시다. 귀한 손님들.》

얼음쪽처럼 싸늘해졌던 진주의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을 뿌렸다.

《그러니 저희들을 만나주시겠답니까?》

《예. 목사님은 상대도 안하더니 대학생들은 어서 들여보내라고 하시더군요. 왜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가고 나를 나무라기까지 했답니다. 정말 괴벽한 늙은이지요.》

진주는 기쁨이 가득 어린 눈으로 뻐기듯이 수헌이를 바라보았다.

《그것 보세요. 왜 그러고 서있어요? 어서 가자요.》

수헌이는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이내 사라진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진주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이제 만나게 될 비전향장기수로인의 모상을 미리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문예부흥기시대에 서유럽의 유명한 미술가들이 형상한 역시 유명한 전설적이거나 력사적인 인물들, 운명의 가혹한 수난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독사에 휘감긴채 몸부림을 치거나 십자가에 결박된채 초연히 하늘을 응시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쨌든 이 로인도 마주보기 두려울 정도로 무섭게 생겼으리라.

하지만 복도에까지 마중나와서 그들을 맞이해준 로인은 너무도 평범하고 수수하고 소탈하고 너그러웠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오른팔이 없기때문에 왼손으로 자기들의 손을 잡아준것뿐이였다.

《반갑소, 젊은이들을 만나니 이 늙은것도 젊어지는것 같구만.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나를 찾아온게 틀림없소?》

수헌이는 정작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진주가 약간 망설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응? 누구던가?》

강용찬은 수집은 미소를 머금은 처녀를 잠시 유심히 여겨보았다.

보름달에나 비길수 있게 둥글고 환한 얼굴, 희맑은 살결에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두눈동자,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생각났다. 부산에 도착한 그날, 그 저녁이…

《아! 나를 택시에 태워준 아가씨로구만!》

상대방이 자기를 기억해준게 고마와서 진주는 눈물이 나올지경이였다.

《그날 제가 선생님을 양로원에까지 모셔다드렸어야 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별 소릴 다하는군.》

강용찬은 고마운 처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내가 큰 신세를 진거야. 그러고도 아가씨를 깜박 잊고있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주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소. 자, 어서들 앉으라구.》

인정이 그립고 사람들이 그리웠던 로인은 너무 기뻐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자기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원탁우에 차리려던 진주는 화분에 심어놓은 어린 소나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손벽을 탁 쳤다.

《아이! 깜찍해! 선생님은 어디서 이런 멋있는 욜까를 가져오셨나요?》

강용찬은 우정 모르는척 하고 되물었다.

《요르까라니? 그게 무슨 소린고?》

《이 소나무말입니다. 여기에 흰눈이 내린듯 솜을 뜯어붙이고 자그마한 인형이랑 알사탕과 과자랑 매달고 오색테프를 줄줄이 늘이면 크리스마스명절놀이 욜까가 된답니다. 저희들이 당장 그렇게 해드리죠. 잠간이면 된답니다.》

손녀처럼 무랍없이 재롱을 부리는 진주의 청을 들어주고싶었지만 강용찬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냥 둬두라구. 소나무야 푸르싱싱한 맛에 보는거지.》

《예.》

진주는 선뜻 이렇게 응했지만 좀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말이야. 크리스마스라는건 우리 명절도 아니지 않나.》

진주는 물론 수헌이도 깜짝 놀란 눈으로 강용찬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명절로 여기는데 습관되여있었다. 그러나 로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 남들의 명절이지 우리의 명절은 아니였다.

수헌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그래서 크리스마스선물을 가지고 찾아오신 목사님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목사님?! 교도소나 감호소에도 목사라는게 있었소. 그런 자들을 거기선 교회사라고 불렀는데 설교라고 하는걸 들어보면 어처구니가 없거든.

인류의 리상인 공산주의를 악마나 마귀라는거야.

그러면서 끈질기게 전향을 권고했지.

전향을 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수 있게 해주마, 좋은 직업도 알선해주마, 성서를 읽으라, 그래야 령혼을 구원받는다.

십자가를 들고서 하는 소리란 전탕 이런 쓸개빠진 수작뿐이였소. 나는 고문을 하는 놈들보다도 교회사라는 놈이 더 밉살스럽더구만.》

수헌이는 이 괴벽한 로인이 사무친 원한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교회란 그런게 아니랍니다.

최근에는 교인들이 감옥에 있는 량심수들을 위하여 여러가지로 후원사업을 하고있지 않습니까.》

강용찬은 채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다고 하더구만.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오는게 달갑지 않아.》

두눈을 내리깐채 오도카니 서있던 진주는 근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럼 저희들이 찾아온것도 달갑지 않으십니까?》

강용찬은 소나무화분때문에 분위기가 좀 버성겨졌다는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빙긋 웃었다.

《너희들이야 왜 달갑지 않겠느냐. 나에게는 제일로 반가운 귀한 손님들이다.》

진주가 의혹이 풀리지 않은 기색으로 물었다.

《그건 무엇때문입니까?》

《우리가 바로 너희들을 위해서 피흘려 싸웠고 감옥에서 고생도 달게 했기때문이지.》

진주와 수헌이는 어리둥절해진 눈으로 마주보았다. 정녕 믿어지지 않았던지 그들은 동시에 소심하게 물었다.

《저희들때문이란 말씀입니까?》

《그래. 너희들때문이다. 우린 조국의 미래이고 민족의 장래인 너희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고 싸운거다. 피도 적지 않게 흘렸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아직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사실은 너희들을 볼 낯이 없구나.》

당당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는 문득 괴로움에 잠겨들었다. 수헌이와 진주는 새로운 시각으로 상대방을 주시하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이 로인을 왜 선생이라고 존대해 불러야 하는지 그 리유를 깨달은것이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습니까?》 하고 진주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건 나도 잘 몰라. 미국놈이나 리승만이나 박정희에게 물어 봐야지. 참, 리씨와 박씨는 이 세상에 없으니 대답도 할수 없겠구나.》

강용찬은 허거프게 웃으며 두 젊은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남쪽땅에도 자랑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대학생들인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통일! 자주! 민주!를 웨치며 용감하게 싸우는 소식을 감방에서 들을 때가 난 제일로 기뻤단다. 평양축전에 대표까지 보낸 <전대협>이 정말 장하거든. 너희들도 아마 <전대협>에 속해있겠지?》

수헌이도 진주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기자들과 목사의 방문도 거절해버린 로인이 어째서 자기들만은 반갑게 맞아주었는지 이제야 알만 했다.

그들은 운동권밖에 있었다. 그러나 로인의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해서 서운하게 해드리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수헌이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였고 진주는 알릴듯말듯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소나무화분은 해빛이 드는 창턱에 옮겨놓고 원탁의 한가운데에 전열장치가 되여있는 남비를 올려놓고 그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반찬이 담긴 작은 접시들을 놓는데 아주 치여난 솜씨였다.

고기순대에 군만두와 남새빵 그리고 참대순료리까지 상에 오르자 강용찬은 그만 탄성을 올렸다.

《히야! 이 겨울에 참대순료리가 다 있구나.》

진주는 로인의 고향이 하동이라기에 우정 그 고장 특산음식을 준비해가지고 온것이였다. 아닐세라 로인은 꽤나 좋아한다. 그 기쁨을 더 크게 해주고싶어서 처녀는 응석을 부리듯이 물었다.

《선생님, 이 남비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가요?

알아맞춰보세요.》

강용찬은 저도 모르게 단란한 가정적인 분위기와 동심에 이끌려들었다.

《글쎄, 무얼가?》

순식간에 달아오른 남비는 뚜껑을 달가닥거리며 하얀 김을 신이 나서 내뿜기 시작했다. 약간 비릴사 하면서도 엇구수하고 달코무레한 냄새가 기분좋게 풍겼다.

이건 분명 물고기국인데 무슨 물고기일가? 내가 어렸을 때 이런 기막힌 냄새를 맡아본적이 있은것 같은데… 그래, 분명 먹어보진 못했는데 냄새는 맡아본거다. 아, 그렇지…

남비안에서 무엇이 끓고있는지 알아맞히려고 애쓰던 강용찬은 저도 모르게 너무도 오래전, 그야말로 까마득해서 거의나 잊어버렸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에 이끌려들었다.

키높이 자란 미끈한 참대들이 해풍을 안고 설레인다. 아버지가 품을 들여 가꾸는 자그마한 참대밭이다. 개가 들어가 순을 밟으면 참대가 썩는다고 아버지는 참대밭둘레에 촘촘히 울짱을 치군 했 었다.

다섯해 자란 참대는 베여내면 돈이 된다.

참대를 베여 등에 지고서 화개장으로 가는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갈 때가 소년은 제일로 기뻤다. 아버지는 참대를 판 다음 의례히 어물전에 들려서 제일 크고 신선한 잉어를 한마리 사군 했다.

잉어는 얼마나 큰지 번들번들 기름기가 도는 대가리가 놋사발만 했고 정교한 무늬를 이루며 촘촘히 덮인 비늘은 엽전만 한것들이다. 키가 큰 아버지가 손에 들었지만 꼬리가 땅에 철철 끌리는 아주 잘 생긴 놈이다.

소년은 군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해서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본다. 전번에도 이런 잉어를 샀댔는데 작은댁에 놀러온 최성규의 애비한테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다. 도청에서 한자리 한다는 그 령감태기가 나타나기만 하면 성규네의 기와집근처에만 가도 잉어탕을 끓이는 냄새가 풍긴다. 섬진강의 잉어는 그놈이 다 잡아먹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곁에 딱 붙어서서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아들에게 퉁명스레 말한다.

《너 왜 졸졸 따라다니는거냐? 먼저 집으로 가거라.》

《아버지는요?》

무거운 한숨소리.

《또 성규네 집에 가야 하나요?》

아버지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찡그린다.

소년은 볼이 잔뜩 부어올라서 투덜거린다.

《쳇, 전번에 뭐라고 했어요? 다음번에 사는 잉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먹자구 하구선… 난 잉어를 보기만 했지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아들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거나 한마리 먹고 굶어죽을수야 없지 않니. 래년도에도 소작을 받아야 입에 풀칠이라도 해볼게 아니냐. 어서 집으로 가래두.》

아버지는 잉어의 아가미를 손가락에 꿰여서 들고가고싶지 않지만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을 간다.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아버지의 손끝에 매달린 잉어는 꼬리를 흔들거리며 소년을 골려준다.

높은 담장, 고래등같은 기와집, 찌꿍- 대문을 여는 순간에 창자를 뒤집을듯 풍겨나오던 그 잉어국냄새… 지금 풍기고있는것이 바로 그 냄새였다.

강용찬은 지그시 감고있던 눈을 떴다.

여전히 남비는 달가닥달가닥 노래를 부르며 하얀 김을 내뿜고 진주는 대답을 기다리며 맑은 눈동자로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 마분지통에서 고급술병을 꺼내든 수헌이도 자기를 바라보는것이 무슨 대답을 하려나 기다리는 눈치다.

《거 혹시 잉어가 아니냐?》

진주는 손벽을 치며 활짝 웃었다.

《맞혔습니다! 잉어랍니다.》

진주는 서둘러 남비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물씬 피여오르는 가운데 팔팔 끓는 살이 진 잉어토막들이 드러났다.

《허! 정말 잉어탕이로구나.》

《섬진강에서 잡은거랍니다.》

강용찬은 정녕 감개가 무량했다.

섬진강의 잉어라면 하동의 특산물이며 귀물이다.

섬진강은 물밑에 하얀 자갈이 깔려있기때문에 거기서 잡은 잉어나 붕어나 은어는 감탕내가 전혀 나지 않아서 다른 강에서 잡은것보다 배나 비쌌다.

《이거 정말 오래간만에 섬진강의 잉어와 하동의 참대순료리를 구경하니 고향집에 척 앉아있는것만 같구나. 사실 난 잉어는 너무 비싸서 먹어보지도 못했단다.

그대신에 은어는 제손으로 잡아서 먹어보았지. 봄이 되면 섬진강으로 은어떼가 오르는데 정말 볼만 했다. 은어는 비린내가 전혀 안나서 생채로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달콤했어. 그 고기도 값이 비싼데 한마리에 1원씩이나 했단다. 그때 1원이면 큰 돈이였어. 소작인들은 논을 떼우지 않으려고 그 비싼 은어를 사서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

참, 너희들은 고향이 어디냐?》

《제 고향은 대구랍니다.》

진주가 대답하자 수헌이가 곁달았다.

《제 고향은 여기 부산입니다.》

《가만 있자. 그러니까 우린 동향인들이로구나. 다같이 경상도내기들이란 말이다.》

한결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말에 모두 즐겁게 웃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너희들을 보는 순간에 생판 남 같지 않더구나.》

수헌이가 구럭에서 종이에 싼 유리잔을 꺼내며 동감을 표시했다.

《저도 선생님을 언젠가 뵈온적이 있는것처럼 생각됩니다.》

진주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드네요.》

수헌이는 잔에 술을 정히 부어서 로인에게 두손으로 드렸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오래오래 사십시오.》

강용찬은 왼손으로 잔을 받았다.

갑자기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흘려보지 못한 눈물이였다. 관속 같은 독감방에서 홀로 수십년세월 외로움과 고독감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흘려본적이 없는 눈물이였다. 잔을 든 그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은 걷잡을수 없이 떨렸다. 웬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은 흥분에 못이겨 붉게 상기되였고 그물같이 잡혀있던 주름살들이 파도치듯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고맙다. 정말 고마와…》

그는 치밀어오르는 뜨거운것을 가까스로 삼켰다. 환갑날에도 일흔돐날에도 못받은 상을 이제야 받은듯 싶었다. 이런 기쁨을 마련해준 젊은이들이 자기의 손자와 손녀 같아서 막 껴안고 볼을 비벼주고싶었다.

수헌이와 진주도 자기들의 소박한 성의에 저렇게까지 감동되여 어쩔바를 몰라 하는 로인을 보니 저절로 눈굽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어쩐다? 난 그새 술 마시는걸 싹 잊어버렸거든.》

수헌이가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오늘만은 한잔 드십시오.》

《음, 그래야지.》

강용찬은 잔을 입에 대고 한모금 마셨다.

불덩이 같은것이 속을 지지며 내려갔다.

정녕 몇년만에 마셔보는 술인가. 처음으로 마셔본것은 룡세네 집에서 보천보전투의 승리를 축하하여 축배를 든것이고 마감으로 마셔본것은 아마 지리산에 있을 때일것이다. 그때 적들을 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불무지를 곳곳에 피워놓고 둘러앉아서 전투승리를 축하하여 군용밥통뚜껑에 넘치게 부어서 기분좋게 돌려가며 마시군 했던 술이였다. 그런 날이면 의례히 노래소리가 울려퍼졌고 떠들썩하게 춤판이 벌어지군 했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련의 고비를 함께 넘고 헤치며 승전의 축배를 들며 통일조국의 래일을 그려보던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때 마셔보고는 어언 40년이 되여오도록 입에 대본적이 없는 술이였다.

추억이 목을 꽉 메게 해서 더 마실수가 없었다. 잔을 든채 고개를 떨구고 잠시 서있던 그는 창가로 다가가 소나무화분에 남은 술을 정히 부어주었다.

의미심장한 그 모습을 주의깊게 여겨보던 수헌이가 물었다.

《그 소나무는 선생님이 손수 심으신것입니까?》

강용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주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물었다.

《왜 화초대신에 소나무를 심었습니까?》

《꽃은 아름답지만 피여서 오래가지 못하지. 그러나 소나무는 사시장철 푸르거든.》

진주는 뭔가 리해되지 않는듯 두눈을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참대도 사철 푸르지 않습니까. 화분에 심고 가꾸기엔 소나무보다도 참대가 더 좋겠는데요.》

강용찬은 너그럽게 일깨워주었다.

《참대는 더운 지방에서만 자라지. 그러나 소나무는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거든. 그래서 우리 나라의 그 어느 곳에 가보아도 소나무숲이 무성하지. 하기에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소나무를 사랑해온거야.》

수헌이와 진주는 빙그레 웃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강용찬은 빈 잔에 술을 부어서 수헌이에게 주었다. 수헌이는 몹시 당황해서 몸을 뒤로 젖히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전… 아직… 못 마십니다.》

《그게 정말인가? 듣자니 요즘엔 중학생들까지도 술을 곧잘 마신다고 하더구만.》

수헌이는 공연히 얼굴까지 붉어져서 변명이나 하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전 어제 난생처음으로 딱 한고뿌 마셔보았는데 숨이 차고 머리가 너무 어찔어찔해서 혼쌀이 났습니다.》

진주의 두눈이 소리없이 웃었다.

강용찬이 그 잔을 진주에게 주자 처녀는 덴겁을 했다.

《어머! 저두 못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들은 어지러운 사회풍조에 용케도 오염되지 않은 도덕적으로도 건전한 젊은이들이였다.

《음, 과시 <전대협>대학생들이 다르긴 다르구만.》

강용찬은 대할수록 정이 가는 그들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수헌이와 진주는 이통에 얼굴이 더 붉어져서 고개를 떨구었는데 그것이 더 겸손해보였다.

그들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 술병을 치우고 식사를 했다. 강용찬은 조미료를 알맞춤하게 곁들인 잉어 한토막과 고기남새소를 넣은 빵을 하나 먹었는데도 인차 배가 불렀다. 그런데 명색이 집주인이라 먼저 수저를 놓기가 미안해서 공연한 헛저가락질만했다.

그것을 눈치챈 진주가 다소 섭섭한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니 내 구미에 꼭 맞는다. 료리솜씨가 대단하구나. 난 이렇게 맛좋은 음식을 처음 먹어본단다.》

수헌이가 끼여들었다.

《진주양의 부모님들이 령남특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을 경영하고있답니다.》

《글쎄 보통솜씨가 아니야. 잉어탕도 좋지만 찐빵도 아주 맛이 좋구나.》

《그런데 왜 식사를 더 하시지 않습니까?》

그 리유를 설명하자니 기가 차서 강용찬은 허허 웃고말았다.

그는 오랜 기간의 옥중생활에 위가 줄어들대로 줄어들어서 위절개수술을 한 환자처럼 한꺼번에 많이 먹고싶어도 먹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선생님, 감옥의 식사형편은 어떻습니까?》

수헌이는 뭔가 짚이는데가 있어서 정색하여 신중하게 물었다.

《말이 아니지. 그런 이야기는 들어서 뭘하겠나.》

《론문집필에 참고가 될수 있을것 같아서 그럽니다. 전 법학을 전공한다고는 하지만 교도소나 감호소의 실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있습니다.

이번 방학기간에 자주 찾아오겠으니 구체적인 실태를 이야기해주십시오.》

강용찬은 선뜻 응할수가 없었다.

분명 호의호식하며 고생이라는걸 모르고 자라났을 젊은이가 그 무슨 론문집필에 자기가 수십년동안 겪은 옥중고초를 참고하겠다고 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것이다. 참고로 한다는것은 적당히 취한다는것인가? 그 론문이란것은 무엇에 필요한것인가? 그저 학위를 얻고 사각모를 써보자는것은 아닐가? 그렇다면 정녕 달가울수가 없었다.

화기에 넘쳤던 분위기가 좀 버성기여졌다.

진주는 나무라는 눈빛으로 수헌이를 바라보았다. 수헌이는 그 리유를 알수 없었지만 어쨌든 자기의 언행때문에 그처럼 즐거워하던 로인이 좀 언짢아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분위기를 돋구려고 일어났다.

《선생님, 제가 노래를 하나 불러드리겠습니다.》

강용찬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할세라 이처럼 마음을 써주는 젊은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음, 어서 부르게.》

준비도 없이 무작정 일어난 수헌이는 정작 어떤 노래를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일순 망설이였다. 그저 아무 노래나 망탕 불렀다가는 로인의 예민한 감정을 더 상하게 할수 있었다. 아마 《전대협》에 속한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른다면 로인은 기뻐할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위장이고 로인을 기만하는 행위로 되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정작 입도 벌리지 못하고 난처해서 두리번거리던 그는 로인이 그처럼 사랑하는 소나무화분이 눈에 띄우자 빙그레 웃었다.

《부르자고 생각했던 노래는 일어서는 순간에 그만 잊어버렸는데 저 소나무를 보니 옛 시조가 한수 떠오릅니다. 그걸 읊어드리겠습니다.》

수헌이는 이렇게 량해를 구하고나서 뒤짐을 지고 점잖게 시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무엇이 될고허니

봉래산 제일봉에 락락장송 되였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아닐세라 로인은 대단히 만족해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진주는 미소를 머금으며 박수를 쳤다.

《이번엔 심양이 시 한수 읊겠습니다.》

수헌이는 본인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이렇게 정중히 소개까지 하고 앉았다.

당황하고 부끄러워서 어쩔바를 몰라하던 진주는 거듭 재촉을 받고서야 하는수없이 일어났다.

정기도는 두눈동자에서 무언가 반짝하더니 꼭 다물려있던 입술이 방긋 열리며 심산속의 시내물처럼 맑은 목소리가 랑랑하게 울려나왔다.

 

으리으리 높이 서서

굽어보는 소나무야

겨울해 저무는데

너만 유독 푸르구나

 

사시장철 변치 않는

름름한 그 절개

된서리 설한풍도

두려울게 있을소냐

 

강용찬은 흥분해서 왼손으로 원탁을 탁 쳤다.

《아주 좋다! 거 시들이 다 뜻이 깊구만.

옛시들 같은데 누가 지었나?》

수헌이가 제꺽 대답했다.

《제가 읊은 시조는 리조초기의 충신인 성삼문이가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지은것이고 심양이 읊은 시는 임진조국전쟁때 늙고 병약하지만 용약 전장에 나가 싸운 박인로라는 사람이 지은것입니다. 옳습니까? 심양.》

진주는 놀라도 이만저만 놀라지 않았다.

《어머! 법학을 전공하신다면서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수헌이는 씩 웃어보였다.

《내 이래뵈도 중학시절엔 세계적인 문호가 되여볼 꿈까지 꾸었댔답니다.》

《그런데 왜 법대에 가셨는가요?》

《꿈이 현실로 되는 법이란 없지 않소.》

수헌이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약간 주저하는 기색으로 로인을 바라보았다.

《저… 이번엔 선생님차례입니다.》

《나는 시를 읊을줄 모르는데…》

로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생각이 있었던지 기꺼이 일어났다. 마치 무대에 나서기라도 한듯이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경건한 자세를 취한다.

《선생님은 앉아서 읊어도 됩니다. 앉으십시오.》

로인은 수헌이의 말을 듣지 못한듯 그냥 서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화분의 소나무를 이윽토록 바라보는 그의 두눈엔 이루 형언할수 없는 숭엄한 빛이 어리였다.

그 자세와 그 표정이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기에 수헌이도 진주도 숨을 죽이며 몸가짐을 바로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윽고 로인은 입을 열었다.

 

남산의 저 푸른 소나무가

눈서리에 파묻혀서

천신만고 괴롬받다가

양춘을 다시 만나 소생할줄을

동무야 알겠느냐

 

시를 읊는다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서, 심장속에서 울려 나오고있었다.

소중하고 성스러운 추억에 잠긴듯 한 강용찬의 얼굴표정과 몸가짐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수헌이와 진주는 박수를 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감동이상의 숭엄한것을 받은 그들은 얼없이 로인을 바라볼뿐이였다. 대할수록 존경이 가는 범상치 않은 로인의 기구한 한생이 그 짧은 시 한수에 고도로 함축되여있는것만 같았다.

감동의 첫 순간이 지나가서야 수헌이는 소리없이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시는 선생님이 지은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용찬은 아연해지고말았다.

《아니, 수헌이는 이 시를 어느분이 지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수헌이와 진주는 머리속에서 재빨리 문학사의 갈피를 번져보았다. 그러나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은 시였다. 이런 훌륭한 시는 한번만 읽거나 들어보아도 기억에서 사라질수 없는것이다.

《이 시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친히 지으신거란다.》

로인의 말에 수헌이와 진주는 약속이나 한듯이 거의 동시에 꼭같은 질문을 했다.

《그분은 누구십니까?》

《?!》

강용찬은 완전히 아연실색해지고말았다.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자기를 주시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앞에서 그는 눈이 딱 감겼다. 수백년전의 시조까지 곧잘 외우는 대학생들이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귀중한 시가유산인 《남산의 푸른 소나무》는 전혀 모르고있지 않는가. 결국 이들은 나라의 광복대업이 어떠한 희생의 대가로, 어떠한 투쟁의 결과로, 어느분에 의하여 성취되였는지도 모르고있는게 분명했다. 가지끝에 매달린 풋열매들이 뿌리를 모르는 격이였다.

참으로 코 막고 답답한 일인데 그렇다고 이 젊은이들을 탓할수는 없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반공의식을 주입시키려고 새 세대들에게 민족해방운동과 통일운동의 참력사를 가르쳐주지 않은 남조선의 교육현실에, 아니 당국의 위정자들에게 있었다.

심각한 생각에 잠겼던 강용찬은 수헌이와 진주의 물음에 아직 대답을 주지 못하고있는 자신을 뒤늦게야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더는 말을 할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보안관찰처분을 받고있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속을 툭 터놓고 말을 주고받기에는 상대방들에 대한 파악이 너무도 부족했다.

어인 일인지 별안간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는 로인을 의혹에 찬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던 수헌이와 진주는 서둘러 음식그릇을 거두고 작별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겠다.》

강용찬은 그제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당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바래워주었다.

그들이 탄 하얀 승용차는 정문을 나서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잠시 못박힌듯 서있던 강용찬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면서 허전하고 아쉬운 심정으로 돌아섰다.

14

 

마치 이 겨울날에 놀랍게도 한쌍의 꾀꼴새가 느닷없이 날아들어와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날아가버린것만 같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밝고 유쾌하고 젊음이 차넘치던 방은 어딘가 모르게 어둑시근해졌고 침울해졌으며 고리타분해지고말았다. 고요가 깃든 방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으려니 강용찬의 가슴에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허전함과 쓸쓸함이 저녁 어스름처럼 내려앉는것이였다.

그는 벽에 기대여앉은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자가용승용차까지 몰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이 외로운 늙은이를 왜 찾아왔댔는가? 동정심에 이끌려서 위로해주자고 온것인가? 처녀는 그럴만 한 인연이 없지 않으니 그렇다치고 총각은?

참, 무슨 론문을 쓰는데 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법대학생이라?! 그 대학을 나오고 무엇을 하려는것일가? 검사? 아니면 판사? 혹은 량심적인 변호사로 되는 편을 택할수도 있겠지.

요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하는것이다.

그에 따라 저렇게도 될수 있고 이렇게도 될수 있는거지. 그러니까…

그는 문득 자기가 해야 할바를 깨달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수 없지만 자기의 고적한 생활속에 스스로 찾아들어온 그 젊은이들을 잘 깨우쳐주어 조국과 민족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도록 해줄 의무가 바로 자신에게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갔다.

방학기간에 자주 찾아오겠다고 했었지만 다시 오지 않을수도 있었다.

그는 수헌이와 진주가 남기고 간 흔적이라도 찾으려는듯이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다시 원탁 한가운데로 옮겨진 소나무화분뒤에 무언가 놓여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남비와 빵을 넣은 비닐봉지였다. 남비뚜껑을 열어보았다. 잉어탕이 자기가 먹은 가운데토막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기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그들의 성의를 다시한번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는 비닐봉지안에서 빵을 하나 꺼 냈다.

그는 어쩐지 그 생김새가 눈에 익은 빵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있는듯이 이리저리 돌리며 유심히 살펴보다가 한입 베여물고 그 맛을 될수록 천천히 음미하면서 씹기시작했다.

고기남새소를 넣은 찐빵의 독특한 맛은 불현듯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못잊을 중학시절의 진주하숙집, 학교에 갈 때면 룡세 어머니가 책보안에 점심밥으로 넣어주군 했던 따끈따끈한 찐빵, 그 추억과 떼일수없이 결부된 바로 그 맛이였다.

그때로부터 퍼그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찐빵을 또 맛본적이 있는것같았다.

그렇다! 대구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룡세네 진주찐빵집에 들렸댔지. 거기서 오래간만에 배부르게 이런 빵을 먹어보았어. 그렇다면 진주가 심룡세의 딸이란 말인가?

그때 제 엄마의 손에 이끌려 아장아장 걸어오던 귀여운 계집애의 얼굴이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그러자 심양의 부모님들은 령남특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을 경영한다고 하던 수헌이의 목소리도 귀전에 되살아났다.

강용찬은 성급히 개여놓은 이부자리밑에서 돈봉투를 꺼냈다.

만약 진주가 룡세의 딸이라면 자기를 만나러 왔다가 이 돈봉투를 맡기고 갔다는 정체 모를 로인은 룡세가 틀림없을게 아닌가.

이런 확신이 드는 순간 그의 귀전에는 망각을 깨뜨리며 아득히 저 멀리에서 기적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꽥! 꽤액!-

갓 해방된 서울, 역구내는 너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불에 그슬리거나 찌그러진 차량들, 침목채로 뽑혀져 엿가락처럼 탈린 레루들, 그우에 쏟아진 포탄상자들, 터진 마대에서 흘러나온 흰쌀과 밀가루, 굴러다니는 통졸임들, 군화짝, 껌, 비누쪼박들, 탄피들… 이것은 인민군대의 드센 반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부랴부랴 한강 이남으로 도주한 적들이 미처 끌어가지 못한 군수물자의 잔해였다.

후방소대장인 강용찬은 대원들을 데리고 역구내를 정리하고있었다.

다행히도 파괴되지 않은 증기기관차 서너대가 겨끔내기로 꽥꽥 고함을 지르며 마사진 차량들을 구내선밖으로 끌어내는중이다. 급수탑쪽에서 또 한대의 기관차가 방금 물을 넣은듯 칙칙폭폭 흰 연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강용찬은 신호기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쪽으로! 이쪽 차량에 바투 들이대시오.》

그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오던 기관차가 웬일인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아예 멈춰서고말았다.

《여! 기관사동무! 뭘 꾸물거리는거요?》

운전칸에 대고 소래기를 치며 다가가던 그는 흡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두눈을 멍하니 뜨고 자기를 쳐다보고있는 기관사와 눈길이 마주쳤다. 석탄연기에 그슬려서 시꺼멓게 번들거리는 상대방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기관사는 목에 걸치고있던 검은 얼룩이 진 수건으로 땀배인 얼굴을 뻑 문지르고 두눈을 껌벅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거 혹시… 강형이 아닙니까?》

목소리도 귀에 익었다.

《여! 이거 룡세가 아닌가?!》

《옳구만요. 강형!》

룡세는 이렇게 소리치며 용수철처럼 튕겨일어나더니 매우 숙련된 동작으로 운전칸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 두사람은 너무도 반갑고 기뻐서 서로 부둥켜안고 돌아갔다.

《강형! 이렇게 군복차림에 별까지 달고있으니 정말 몰라보겠군요. 그새 어디에 가있었소? 그때 정말로 만주에 들어갔 댔소?》

룡세는 미처 대답할 사이도 주지 않고 거퍼 질문을 들이댔다.

《음, 만주에 가있다가 작년 봄에야 귀국했네.

자넨 왜 그때 약속을 어겼나?

진주역에서 기다리다못해서 나는 혼자 떠났댔지. 쎄빠뜨란 왜놈경찰이 뒤를 쫓는것 같아서 더는 지체할수가 없었네.》

룡세는 슬며시 눈길을 떨구었다.

《그때 일은 정말 안됐수다.

강형이 우리 집에 왔다간 다음 어머니가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발목을 딱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요. 난 너 하나만 믿고 사는데 이 에미를 혼자 두고 가긴 어딜 간다는거냐? 갈테면 만주든 아라사든 이 에미랑 같이 가자. 아 이렇게 울고 불고 하길래 하는수 없이 주저앉고말았지요.》

룡세는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기 괴롭고 부끄러운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후에 왜놈들이 징병이요, 징용이요 하면서 젊은이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어머니도 후회를 하시더군요. 차라리 그때 강형을 따라 만주로 보냈을걸 하고 말이지요.》

《그래 징병에 걸렸댔나?》

룡세는 늬큼 뛰였다.

《아니우다. 강형처럼 나라를 찾기 위해 손에 총을 잡고 왜놈들과 싸우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왜놈군대에 들어가겠소. 징병이요, 징용이요 하는 시끄러운걸 피하려고 진주기관구에 들어갔지요.

광복이 될 때까지 왜놈기관사 조수노릇을 했수다. 천대와 구박이 어찌도 심한지… 그노릇도 못해먹을짓이더군요. 그저 부삽으로 그놈의 기관사새끼 까죽이고 나도 빨찌산을 찾아서 압록강을 건너갈 생각이 불쑥불쑥 나군 했지요.

나때문에 어머니가 화를 입을것만 같아서 종시 그런 용단은 내리지 못했지만…》

《자, 시간이 없는데 어쩐다? 차량을 끌어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세.》

강용찬은 룡세의 뒤를 따라 운전칸에 올라갔다. 그는 땀투성이가 된 조사에게서 부삽을 받아쥐고 불통에 석탄을 퍼넣었다.

룡세는 기관차를 운전하면서 소음때문에 귀머거리와 말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광복직후에 우리 기관구에선 로조가 조직됐수다. 그런데 미국놈들이 이전에 왜놈들에게 붙어먹고 살던 놈들을 등용하고 우리를 못살게 굴더란 말이요. 그래서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갔지요. 그때 부산과 대구, 서울을 비롯해서 전 지역의 철도로동자들이 다 들고 일어났단 말이요.

굉장했소. 우린 진주시청과 경찰서까지 들이쳐서 타고앉았지요. 그러자 진주에 주둔하고있던 미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까지 내몰면서 닥치는대로 총질을 해대더군요.

그통에 숱한 사람들이 죽었지요. 왜놈이나 양키놈이나 다 같고 같은 살인귀들입디다. 진주사람들은 미국놈이라면 누구나 없이 막 이를 갈고 치를 떨어요.》

룡세는 닷새전에 화차를 끌고 서울역에 올라왔다가 전쟁을 겪게 됐노라고 했다. 인민군대가 반격해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정 기관차에 고장을 내놓고 숨어있다가 서울이 해방되자 다시 기관차를 살려냈다는것이다.

《강형, 나도 의용군에 탄원했댔소. 그런데 기관사라고 받아주지 않더군요. 전선에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게 더 중요하다는 거요.》

강용찬은 부삽을 놓고 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었다.

《룡세, 이젠 공화국의 어엿한 기관사가 되였으니 전쟁승리를 위하여 한몫 단단히 하게나.》

《알겠수다.》

《참, 어머니는 편안하신가?》

기세가 올랐던 룡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글쎄요. 이번 전쟁통에 무사하시겠는지 모르겠군요.》

《무사하시겠지. 우리 집소식은 모르나?》

《요시찰대상인 강형이 행방을 감추었다고 일본경찰놈들이 행패질을 되게 했소. 강형의 아버님은 주재소에 잡혀가서 보름이나 고문을 받고 나온 후과로 신병을 앓다가 잘못됐구… 참, 이듬해에 아주머니가 생남을 했소. 아들이 강형처럼 든든하게 잘 생겼습디다. 이젠 제법 사내꼴이 잡혔소.》

강용찬은 느닷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랑하는 안해와 아직은 얼굴조차 본적이 없는 아들을 만나게 될 날도 멀지 않았던것이다.

이 전쟁통에 제발 무사했으면…

다음날에야 역구내선 정리가 기본적으로 끝났다.

이틀후에는 적들이 패주하면서 끊어버린 한강철교가 복구되였다. 강용찬은 군수물자를 접수하여 룡세의 기관차가 끄는 무개화차에 싣고서 사흘전에 부대가 진격해나간 인천으로 향했다.

이처럼 진격의 길에서 만났던 두사람은 불과 두달후에 후퇴의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파죽지세로 충청도와 전라도일대를 해방하고 동쪽으로 공격방향을 돌린 부대는 경남땅에 들어서서 남강을 건너 남해바다가인 마산이 코앞에 보이는 계선에까지 밀고나갔다. 이제 마산과 진해를 거쳐 락동강하구를 도하하면 적들의 마지막아성인 부산을 해방하게 된다.

적들은 종말을 앞두고 최후발악을 하고있었다.

마산과 진해앞바다에는 급기야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군함들이 한벌 쭉 깔려있었다. 거기서 쉴새없이 쏘아대는 함포탄이 우박치듯 날아와 터지면서 부대의 진격로를 차단하였다.

피의 격전, 치렬한 공방전이 련일 계속되였다.

부대에는 포탄과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군수물자를 싣고오던 렬차는 철길이 끊어져서 경남땅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전라도 남원역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탄약과 포탄수송에 자동차와 마차, 우차가 총동원되였다. 이 수송대렬도 폭격에 다리들이 다 끊어져나간 남강에 막혀서 더는 움직일수 없게 되였다. 그러자 주변지역의 인민들이 떨쳐나섰다.

대다수가 녀인들이였다.

치마를 두른 연약한 녀인들이 무거운 탄약상자와 포탄을 머리에 이고 사품치는 남강을 건너서 밤이 새도록 걸음을 다우쳐 불비가 쏟아지는 전선으로 나왔다.

그 포탄과 탄약상자를 받아안는 전사들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구나 다 그러했지만 강용찬의 심정은 정녕 각별한것이였다. 원쑤격멸의 최후결전에 한결같이 떨쳐나선 고향사람들, 고향의 녀인들이 참으로 고맙고 미덥고 자랑스러웠다.

그때 강용찬은 안해가 아들을 데리고 자기를 찾아 북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일시적인 전략적후퇴명령이 내리자 부대는 신속히 남원쪽으로 빠져나갔다. 후방소대는 부대가 미처 끌고가지 못한 포들과 포탄을 처리하고 뒤따라올 임무를 받았다. 정황이 긴박하므로 포들을 파괴하고 포탄은 폭파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강용찬은 고향사람들, 그 연약한 녀인들이 목숨을 걸고 날라온 그 귀중한것들을 그대로 폭파시킬수가 없었다.

나머지 포탄들을 다 적들에게 날려보내는데 이틀이 걸렸다. 다음에야 포들을 파괴하고 마차에 오른 그들은 부대와 만나기로 약속한 남원역으로 떠났다.

남원역에 도착하니 빈 무개차량들을 길게 단 기관차 한대가 외로이 서있었다. 기총사격을 받은 화통은 벌둥지가 되였고 증기탕크에서 쏟아져나온 물이 주변에 질벅했다. 운전칸에 올라가니 누군가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쥔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동무! 동무가 기관사요?》

상대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구 흩어진 머리카락, 절망에 싸여 이그러진 얼굴,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흐리멍텅한 눈…

강용찬은 그가 심룡세라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달전에 서울역에서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였다.

《룡세, 포탄을 자네가 실어왔댔구만.》

룡세는 반기는 기색조차 없었다.

《휴우- 어쩌면 좋소? 그러니 우리가 이 전쟁에서 졌다는거요?》

《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이겼으면 인민군대는 왜 후퇴를 하는거요?

분하구나, 분해! 부산을 코앞에 두고 물러서다니?! 놈들이 들어오면 가만있지 않을거요.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인민군대를 도와준 그 많은 사람들을 죄다…》

절망에 찬 넉두리를 듣고싶지 않았다.

그는 심룡세의 축 처진 어깨를 두손으로 잡아 마구 흔들었다.

《정신차려!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는거야?》

룡세는 락심천만하여 꺼지게 한숨만 내쉬였다.

《이틀전에 우리 부대가 여기로 왔겠는데 보지 못했나?》

《기관차가 이 꼴로 된걸 보더니 그냥 행군해가더군요. 운전지휘설비들과 급수설비들을 다 까부시고 갔수다.》

《어느쪽으로 갔나?》

《팔공산쪽으로 갑디다.》

《자넨 왜 따라가지 않았나?》

룡세는 또 한숨을 내쉬였다.

《글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나야 기관사인데 기관차를 두고 가긴 어딜 간단 말이요?》

《최고사령부를 찾아가야지.》

단호하면서도 엄숙히 울린 그 목소리에 룡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뭐라구요?》

《우린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을 찾아서 평양으로 가야 해. 이건 전략적후퇴야. 우린 곧 다시 진격해나오게 될거네. 빨리 차에서 내려 마차에 오르라구.》

이제야 비로소 다소나마 용기가 생겼던지 룡세는 부시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젠장, 기관사가 마차신세를 져야 하는가?》

량반은 추워도 겨불은 안 쬔다는 식이였다.

《빨리 마차에 오르기나 하게. 내 이번에는 자네를 그냥 두고가지 않겠네. 우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넨 죽은 목숨이야.》

팔공산일대는 벌써 적들이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하는수없이 마차에서 내려 소백산줄기를 타고 덕유산쪽으로 행군했다. 도중에 경남도당이 조직한 빨찌산부대를 만나 거기에 림시로 소속되여 싸우게 되였다.

룡세는 수시로 변하는 정세에 따라 감정변화가 너무도 심했다.

그해 겨울 덕유산에서 인민군대의 재진격이 시작됐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제일먼저 만세를 부르며 달려와 강용찬을 얼싸안은 사람이 바로 룡세였다.

《강형!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막 쏟아져나오는데 미군은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다는구려. 이젠 이길거요. 이건 강형의 공로요.》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엉뚱하게 자기를 추어올리는통에 강용찬은 얼떨떨해졌다.

《내 공로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강형이 만주에 있을 때 중국혁명을 무장으로 도와주지 않았소. 나도 강형을 따라서 압록강을 건너갔더라면 이런 때 한번 큰 소리를 쳐보는건데 정말 아쉽단 말이요.》

룡세는 전투를 승리로 결속하고 돌아온 날이면 그저 기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고 어쩌다가 전투에서 실패를 하고 돌아온 날이면 완전히 의기소침해서 며칠동안 말도 안하군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일대를 번개치듯 들쑤시며 승전을 거듭하던 지리산빨찌산이 악명높은 《수도사단》의 대토벌로 인하여 포위되게 되자 룡세의 얼굴에선 웃음이 아예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어느 날인가 그는 강용찬에게 자기의 심중을 솔직히 터놓았다.

《휴전담판이 시작됐다는 소리를 들으니 눈앞이 캄캄해지는구려. 이제야 인민군대가 여기까지 밀고나올 희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가 이 산속에 뻗치고있으면 뭘하오.

다 소용이 없는노릇인것 같소.》

강용찬은 엄하게 물었다.

《그러니 산에서 내려가겠다는건가?》

《그런건 아니요. 난 비겁하게 적들에게 투항하거나 변절은 하지 않겠소. 지금껏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동지들을 버리고 어떻게 저만 살겠다고 하겠소.》

《룡세, 우리 어떻게 해서든지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자구.》

그들의 소부대는 여러차례나 북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겹겹이 둘러친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 위한 마지막전투에서 대다수가 전사하였고 부상을 당해 의식을 잃은 강용찬과 룡세는 체포되였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며칠 함께 지낸 후 그들은 서로 다른 수용소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후 십년이 지나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사형장으로 가는 군용트럭의 적재함에서…

강용찬은 더이상 그 일을 돌이켜보고싶지 않았다.

어쨌든 심룡세는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세월을 용케도 감방에서 견디여냈다. 그러나 자신의 생사를 순간에 결정짓게 될 사형장의 총구앞에서는 견디여내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에 수치와 모멸감에 몸을 떨며 용서를 바라는 눈길로 주저주저 자기를 쳐다보던 룡세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고싶지 않았다.

진주가 심룡세의 딸이라면 이것만은 이야기해줄수가 없었다. 그는 차라리 진주가 룡세의 딸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란다고 그렇게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더우기나 괴로 왔다.

반갑게 날아들어와 노래를 부르던 한쌍의 꾀꼴새, 그것이 날아가버린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 다시 날아올가봐 두렵기도 했다.

15

 

그날 수헌이는 진주와 헤여지면서 사흘후에 다시 《진주특산》앞에서 만나 함께 양로원에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인차 후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무엇때문에 그 처녀와 다시 만나는 기회를 사흘씩이나 미루어야 한단 말인가? 그 처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래일 모레 글피까지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그 처녀와 함께 있었기에 기뻤고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지어 꿈을 꾸듯이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진주는 자기가 지금껏 보아온 처녀들보다 특이한 미모를 지니고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지성미였다. 그래서 고상했고 서뿔리 범접하기 어려운 일종의 위엄까지 지니고있었다. 그런 처녀가 사내대장부답지 못한 자기를 기꺼이 대해주었다는 이자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이였고 과연 긍지를 가져볼만 한 일이 였다.

만약 진주라는 처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을것이다.

누가 나로 하여금 그런 천사와 만나는 행운을 지니게 해주었는가? 그것은 의심할바없이 시내에서 멀리 외따로 떨어진 양로원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로인이다. 그 로인이 없었더라면 설사 그 처녀와 만났다고 해도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했을건 뻔한 일이다.

수헌이는 그 로인이 참으로 고마왔다.

그래 그 고마운 로인님을, 지금껏 그처럼 고생하신분을, 자그마한 성의를 표시해도 크게 만족해하는 소외된 늙은이를, 우리가 모르는 많은것을 가르쳐주실 선생님을 래일 또 찾아가면 안된단 말인가? 선생님이 사흘간이나 홀로 적적하게 지내게 할수야 없지 않는가.

이렇게 론리를 세우고보니 래일 진주를 찾아가 만날수 있는 당연한 리유가 생겼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차를 몰고서 부산시내를 천천히 한바퀴 빙돌고나서 카페거리의 《진주특산》앞에 멈춰세웠다. 경적을 몇번 울렸지만 진주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혹시 대학도서관에 갔는가 해서 그리로 차를 몰았다. 도서관의 열람실에도 그 처녀는 없었다. 그 처녀가 신문을 펼쳐놓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있던 책상과 의자를 보게 된것만 해도 반가왔다. 그래서 그곁에 다가가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서있었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진주특산》앞으로, 대학도서관으로 고정된 로정을 따라 빙빙 돌았지만 그 처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결국은 약속했던 당일 아침에야 수헌이는 《진주특산》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나타나는 진주를 만날수 있었다.

《심양, 그새 어디에 갔댔습니까?》

《왜요?》

《내가 몇번이나 여기에 차를 세웠댔는데 심양이 나타나지 않더군요.》

진주는 약간 새침해지면서 솔직히 말했다.

《전 우정 나오지 않았어요. 선생님을 만나러 가자고 약속한 날이 아니니까요.》

진주가 그 령리한 눈으로 자기의 마음속을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아서 수헌이는 변명을 했다.

《심양, 무엇때문에 우리가 사흘이나 지나간 후에 선생님을 찾아가야 하오? 매일 찾아가면 안된단 말이요. 그래서 난…》

진주는 삽시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전 그런줄도 모르고… 공연한 선입견을 가졌댔어요. 미안해요.》

원래 남을 속일줄 모르는 수헌이는 상대방이 이처럼 솔직하게 나오자 몹시 당황해졌다.

《아니, 거기서 미안해할게 없소. 사실… 사실말이요. 난… 내가 잘못 처신한거요.》

진주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더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모는 수헌이를 지켜보았다.

사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순박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것은 자기앞에서 허세를 부리면서도 실은 비굴하게 처신하는 사내들을 적지 않게 보아오면서 환멸을 느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맞이해주는 로인의 얼굴표정은 웬일인지 엄숙했다. 방안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그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것은 다름이 아니라 해빛이 잘 비치는 벽에 먹으로 큼직하게 써붙여놓은 《志遠》이라는 두 글자였다. 소나무화분을 놓은 원탁이 그아래로 옮겨져있었다.

원탁옆에 올방자를 하고 단정히 앉아있는 로인은 대학교수들보다 더 기품이 있고 엄엄해보였다.

그래서인지 수헌이와 진주는 몸가짐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전번에 왔을 때 그리도 반가와하고 흐뭇해하던 로인이 작별할무렵에는 왜 언짢아했는지 알수 없었다. 자칫하면 이번에도 질문을 잘못해서 로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것 같아서 그들은 속이 조마조마해졌다.

깨끗한 참지에 먹으로 써붙인 《지원》이라는 두 글자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째서 저런 글을 한자로 써놓았는지 궁금하고 호기심이 났지만 그래서 서뿔리 물어보기를 삼가했다.

로인은 엄엄한 표정과는 달리 친절하게 물었다.

《그래 수헌이는 무슨 얘기를 듣고싶다고 했던가?》

수헌이는 그제서야 굳어졌던 몸가짐을 풀며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선생님은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감옥에서 견디여낼수 있었는지 그것부터 먼저 이야기해주십시오.》

《그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제가 알기엔 전향이라는걸 하면 감옥에서 인차 나올수도 있다던데요.》

로인은 약간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즉 내가 왜 전향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리유를 설명해달라는건가?》

《예.》

《그것 역시 한두마디로 말하기는 곤난한데… 참, 진주도 그 이야기를 듣고싶은가?》

두손을 깍지껴서 무릎에 놓고 참하게 앉아있던 진주는 눈길을 들었다.

《전 선생님이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이야기를 듣고싶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고향은 남해바다가인데 어떻게 돼서 인민군 군관으로 참전하게 되였는지도 알고싶고요. 일가친척들은 다 어떻게 됐는지… 하여튼 선생님에 대한거라면 감옥생활까지 포함하여 다 알고싶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에 대한 호기심이 지나친것 같구만.》 하고 로인은 어째서인지 좀 불안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에 대한것이라면 왜 다 알고싶어 그러나?》

《그건 대학에 다닌다는 저희들이 사실 모르는게 너무 많기때문이랍니다. 전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과 함께 고생하신분들이 걸어오신 길도 우리가 배우지 못했고 따라서 알수 없었던 이 나라, 이 민족의 력사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력사의 대하를 이룬 하나의 물줄기라고 봅니다.》

강용찬은 진지하면서도 조리있게 말하는 진주의 희맑은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룡세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라서 두눈을 꾹 감았다.

이 처녀가 룡세의 딸이라면 구태여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지리산빨찌산들의 투쟁과 감옥생활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있을터인 데… 룡세가 떳떳치 못한 오점이 있는것때문에 자기의 지난날을 딸에게 숨기고있지 않을가? 충분히 그럴수 있겠지.

《그럼 먼저 말해둘게 있다.》

강용찬은 여전히 두눈을 감은채 착잡한 내심이 어쩔수없이 비끼는 어조로 계속했다.

《나는 감옥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보안관찰처분>이라는걸 받고있는 몸이란다. 다시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살고있다는거다. 그런데 내가 이제부터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법에 의해서 철저히 금지된것이다. 그래도 들을 용기가 있다면 앉아있고 없다면 이제라도 돌아가는게 좋겠다고 본다.》

수헌이와 진주는 좀 불안해진 눈길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수헌이는 처녀앞에서 비겁하게 행동할수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쭉 펴며 태연히 말했다.

《저희들은 그런 용기를 가지고있습니다.》

강용찬은 그 말을 듣고서야 지그시 감고있던 두눈을 뜨고 수헌이와 진주를 번갈아보았다.

수헌이는 그 무슨 비장한 각오라도 한듯이 자못 엄숙한 표정이였고 진주는 두눈이 사물거리는것으로 보아 속으로 웃고있는게 분명했다.

《진주는 왜 웃나?》

《저… 거짓 아닌 진실을 듣는데 용기가 필요하다는게 좀 우습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구나.》

강용찬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하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용기만이 필요한게 아니라고본다. 때로는 진실을 알았다는 그자체가 죄로 취급되여 감옥에도 갈수 있고 죽음도 각오해야 할 그런 경우도 있을수 있지. 나는 그런 경우까지 념두에 두고 한 말이다.》

진주는 아직도 뭔가 납득되지 않았던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나라가 왜놈세상일 때는 나라를 찾자는 말 한마디만 하재도 감옥에 끌려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단다. 하기에 그런 말을 하기는커녕 듣기조차 무서워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독립만세를 한번 부르자고 해도 죽을 각오가 필요했던 그 시절에 손에 총을 잡고서 왜놈들과 싸운 투사들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만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할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갔던거야.》

진주의 두눈이 별안간 별처럼 반짝 빛났다.

《그럼 선생님은 팔로군이 아니라 그 유명한 항일유격대에 들어갔댔습니까?》

《항일유격대를 찾아다니다가 왜놈들에게 붙잡혀서 비밀공사장에 끌려갔지. 거기서 몇년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겨우 도망쳐나오니 하늘이 무너져내린것 같은 소문이 돌더구나.

쏘련이 왜놈들과 무슨 불가침조약이라는걸 체결하는통에 동북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고 항일련군이고 다 없어졌다는거야.

나는 절망하여 주저앉았댔지.

그런데 그때 다 없어졌다던 항일유격대가 몇년후에 대일전쟁을 선포한 붉은군대와 함께 조국으로 진격해나간다는 깜짝 놀랄 소식이 날아왔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의용군에 탄원했지. 심양에서 살던 조선청년들로 급히 조직된 우리 의용군부대가 조국으로 나갈 준비를 갖추는데 일본놈들이 벌써 항복했다는거야.

나라를 찾겠다고 압록강을 건너왔댔는데 결국은 조국광복의 성전에 참가하여 총 한방 쏴보지 못했으니 정말 분하더구나.》

강용찬은 그 일을 돌이켜볼 때마다 후회가 막심하여 괴로운 한숨을 내쉬였다.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데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가 왜 없어질수 있겠니. 이건 하늘에서 태양이 없어졌다는 소리와 같은건데 나는 바로 그걸 알지 못했던거다. 그래서 항일유격대를 기어이 찾아갈 생각을 못하고 일생에 다시 없을 후회를 남기게 된거지.

그후 우리 부대는 중국혁명을 도와줄데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을 받들고 4년간이나 국민당군대와 싸움을 하게 되였어.

우리 부대가 활동을 하게 된 그 넓은 만주땅에는 가는 곳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친솔하신 항일유격대의 피어린 자욱이 찍혀있었고 왜놈들을 통쾌하게 족친 전투담이 있었으며 령활무쌍한 전법이 낳은 신비로운 전설들이 있었단다.

나는 그 지방에서 살고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전투담과 그 전설들을 들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피의 공헌을 한 조선의 참된 애국자들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고 그러한 애국자로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신념과 각오를 가져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거다.》

강용찬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정중히 눈길을 들더니 자기가 직접 벽에 써붙인 뜻깊은 두 글자를 바라보았다.

수헌이와 진주는 숨을 죽이고 자기들로서는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 이야기가 계속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이건 우리 부대가 무송에 오래동안 주둔하고있을 때 있은 일이다.

무송은 지난날 독립운동자들이 많이 들어와서 활동한 곳이고 항일유격대가 큰 전투를 벌린 곳이여서 주민들의 동향이 아주 좋았지.》

어느 날 부대장이 후방분대장인 강용찬이와 몇명의 대원들을 지휘부에 불렀다. 거기에 가니 조국에서 왔다는 낯선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속에는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박달몽치처럼 단단하게 생긴 로인도 있었다.

부대장이 로인을 가리켰다.

《이분은 지난날 독립군 중대장이였다오.

지금도 장포리라고 하면 무송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있더구만. 어서 인사를 하오.》

강용찬과 대원들은 각별한 존경심이 어린 눈길로 로인을 바라보며 거수경례를 했다.

로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부대장은 자세를 바로하고 그들을 부른 리유를 알려주었다.

《동무들도 잘 알겠지만 이 고장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생의 마지막시기에 활동하신 곳이요.

김형직선생님의 묘소가 양지촌에 있다누만.

이분들은 그 묘소를 조국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오셨소. 나는 이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부대에서 제일 우수한 동무들을 선발했소. 동무들이 이제 해야 할 일이 조국과 민족앞에 얼마나 책임적인가에 대해서는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

강용찬은 대원들과 함께 묘소이설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나서 로인일행의 뒤를 따라 양지촌으로 갔다.

강용찬은 광복된 조국의 소식이 궁금하여 손님들에게 묻고싶은게 많았지만 그럴 경황이 못되였다. 고개를 떨군채 아무런 말도 없이 앞서가던 로인은 문득 멈춰섰다. 기억을 더듬는지 두눈을 쪼프리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그러다가 별안간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김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로인은 고개를 떨구고 꺼이꺼이 흐느끼더니 목메여 부르짖 었다.

《장포리가 찾아왔단 말입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광복의 날을 그처럼 바라시던 선생님이 여기에 누워계시면 됩니까? 조국으로 모시고 가자고 찾아왔습니다.》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로인앞에는 웬일인지 봉분도 묘비도 없었다. 주위엔 푸른 잔디가 깔려있고 몇걸음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있을뿐, 강용찬은 영문을 알수 없어서 로인에게로 다가갔다.

《진정하십시오. 묘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로인은 통곡을 그치더니 흐느끼면서 소매끝으로 눈굽을 찍었다.

《바로 여길세.

김선생님령구를 발인하던 그날은 온 무송시가 울음바다였소. 그때 봉분도 잘하고 묘비도 잘해서 세웠더랬소. 그런데 후에 왜놈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하는수없이 묘비를 치우고 봉분도 낮추고 표식으로 묘꼬리쪽에 저 소나무를 심어놓았던거요.》

눈물에 젖은 로인의 주름잡힌 얼굴은 한없는 슬픔과 자책에 잠겨 고통스럽게 이그러져있었다.

《나는 오늘 김선생님의 묘소앞에서 떳떳치 못한 내 인생을 총화하지 않을수 없소.

젊은이들에게 교훈이 될테니 부디 명심하고 들어주시오.》

로인은 강용찬이와 대원들을 둘러보고나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것이였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김형직선생님께서 왜놈들에게서 받은 고문의 후과로 병상에 계시다가 너무도 젊으신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신 후 나는 완전히 절망에 잠겼더랬소. 광복이 언제야 되겠는지 도저히 앞이 내다보이지 않았소. 독립군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손맥이 풀린 나도 총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그저 제 입건사나 하기에 바빴더랬소.

그러던 어느 날 김선생님의 맏아드님인 김성주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소.

성주는 길림에 가서 공산주의운동을 새롭게 벌리고있었소. 그때 놈들의 추격을 받고있는지 매우 긴장된 모습이였소. 아마 아버님의 친구였던 나를 찾아온 목적은 위급한 상황이라 피신처를 제공받기 위함이였을것이요.

그런데 나는 내 일신에 미치게 될 위험이 두려웠소. 그래서 면무식으로 성주와 함께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나 한끼 나누고는 헤여지고말았소.

바로 그 김성주가 젊은 공산주의자들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백만에 달하는 관동군을 상대로 눈부신 투쟁을 벌리고있다는것을 나는 퍽 후에야 알게 되였소.

그때 내 심정이 어떠했겠소.

길림시절에 벌써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김성주를 장차 조국광복을 이룩할 지도자로, 조선의 별로, 태양으로 칭송하면서 따르고 있었지만 나는 락심천만해서 눈뜬 소경이 되였는지라 태양의 밝은 빛도 가려볼수 없었던거요. 그러다나니 백성된 도리조차 지킬수가 없었소.》

로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또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마음이 좀 진정됐는지 퍽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나도 한때 나라를 찾자고 독립군에서 중대장노릇까지 했댔소. 그런데 왜 중도에서 총을 놓고 물러앉게 되였는고 허니 품은 뜻이 워낙 원대하지 못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깡그리 바칠 각오를 하지 못했기때문이요.》

강용찬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무송에 계실 때 친히 붓으로 <지원>이라는 두 글자를 큼직하게 써서 벽에 붙이시고 좌우명으로 삼으시 였소.

선생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독립운동자들에게 광복의 대업은 하루이틀에 성취될수 없다고, 때문에 뜻을 멀리에 두고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군 하시였소. 그러기 위해서는 세가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거요.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를 가지고 처음에 품은 원대한 뜻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는거 지요.》

로인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벌써 고향인 만경대에 계실 때 <지원>의 높은 뜻과 3대각오가 담겨진 시를 지으셨소. 내가 젊은이들에게 그 시를 읊어드리겠소.》

봉분도 묘비도 없는 위대한 인간의 묘소앞에서 어제날의 독립군중대장이 눈물을 뿌리며 읊은 시가 바로 《남산의 푸른 소나무》였다.

수헌이와 진주는 며칠전에 비전향장기수로인이 읊은 시에 이처럼 심오하고 위대한 뜻이 담겨있는줄은 알지 못했었다.

사연을 듣고보니 시에는 이 나라 력사의 가장 암담했던 수난의 시기가 비껴있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조국을 찾기 위해 모진 시련과 난관을 결사의 각오로 이겨내며 자신의 한생을 아낌없이 바친 위대한 인간의 고결한 넋이 구절구절 맥박치고있었다.

지금껏 알지 못했고 또 알수도 없었던 인간의 높은 정신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한 그들은 감동되기에 앞서 일순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그들이 살아온 사회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만을 위하려는 리기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간혹 뜻이 있다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고작하여 그 뜻이란 권력에 대한 야심이거나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보이려는 명예심에 지나지 않았다.

하기에 인간의 뜻이 인간을 초월하여 그렇게 높을수 있고 인간의 정신세계가 그토록 고상한 경지에 이를수 있다는것을 알게 된것,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놀라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그들의 뇌리를 치고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놓은 강한 충격이였다.

이 사회로부터 주입을 받아 그들이 여태 인식해온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편견은 그 충격에 부딪쳐 졸지에 산산쪼각이 나고말 았다.

수헌이는 문득 두려움과 공포심에 휩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의 할아버지가 그 고결한 정신세계에 감히 도전하는 반공투사이고 손자인 자기 역시 그 전철을 밟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또한 이 비전향장기수로인을 만난것이 무난하게 흘러온 자기의 생활을 그 어떤 위기에 몰아넣을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은근히 속이 떨렸다.

한편 진주는 이 로인을 다소나마 위해주려는 자기의 동정심이 하등에 보잘것 없는것임을 깨닫고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말았다.

로인은 의지가지할데가 없고 불구자라고 하여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니였다. 모진 시련을 꿋꿋이 이겨낸 강자였으며 누구나 우러러보고 따라배우지 않을수 없는 고결한 정신을 지닌 선망의 대상이였다.

《나는 세월이 흘러도 그날을 잊을수가 없었다.》

로인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에야 비로소 나는 인간이란 조국과 민족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달았다.

그때 이미 조국은 광복되였지만 나는 고향에 갈수 없었다. 내 고향이 있는 남쪽땅에는 일본놈들을 대신하여 미국놈들이 들어와 있었다.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해야만 우리 나라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광복대업을 이루게 되는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날 <지원>의 높은 뜻과 3대각오를 가지고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고서 떳떳이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다지게 된거란다.

이 뜻과 각오를 가지니 감옥도 단두대도 두려울게 없더구나.》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수헌이가 뭔가 크게 깨달은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지원>의 높은 뜻과 3대각오는 선생님이 전향을 하지 않은 원인으로 되는군요.》

《그렇다고 볼수 있지.

전향이란 뭐겠냐? 뜻을 버린다는것이지.

뜻을 버리고나면 인간은 허울만 남게 되거든.

그런 인간은 명이 붙어있어도 죽은거나 다름이 없어. 뜻을 지켜 죽은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있다고 볼수 있지.》

진주가 조용히 물었다.

《뜻을 지켜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까?》

《있지. 있어도 너무 많단다.》

그들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이 막혀서 강용찬은 더 말을 할수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하지 않겠니?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들려주지.》

시간이 퍼그나 흘러가서 수헌이와 진주가 돌아갈 때도 되였다.

겨울의 짧은 해는 어느새 지고 창밖에는 어둠이 소리없이 깃을 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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