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강용찬은 담당검사가 있다는 방의 출입문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노라 숨을 길게 들이쉬였다. 이 순간에 그는 자기의 발목에 채워져있는 《보안관찰법》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새삼스레 실감했다. 칠순이 지난 다음에야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이 감옥밖으로 내보내고도 안심치 않아서 나에게 그 무슨 《보안관찰처분》이라는걸 했단 말이지. 내가 놈들에게 그렇게까지 무서운 존재란 말인가? 양로원에 들어앉아있는 이 늙은이가… 이렇게 생각하니 쓰거운 랭소가 절로 나갔다. 그는 무표정해진 기색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주저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광복직후 적산품냄새가 나는 옻칠이 퇴색되고 군데군데 벗겨진 묵직하고 커다란 량수책상우에 무슨 서류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사람들의 뒤를 캐는 헐치 않은 문서놀음에 그만 지쳤던지 옆에 놓여있는 푹신한 쏘파에 거의나 누운것처럼 앉아있었다. 그자가 왼손에 꼬나든 반나마 타들어간 담배의 끝에는 구부러진 하얀 재가 누에처럼 달려있었다. 헝클어진 실꾸리같은 담배연기속에 몽롱하게 잠겨서 까딱도 없는 그자는 잠을 자는지 무슨 생각에 옴해빠졌는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심중 그쪽으로 한걸음 다가서려던 강용찬은 섬찍한 느낌을 받으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아니?! 이럴수가 있나? 그놈을 여기서 또 만나게 되다니. 차마 믿어지지 않아서 다시 여겨보았지만 그자는 가뜩이나 풍파가 사나운 자기의 인생항로에 암초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던 최성규였다. 조국통일과 반파쑈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길에 나선 수많은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을 감옥에 보낸 공로로 고등검찰청에까지 게바라올라갔던 이놈이 어떻게 되여 여기에 나타났는지 알수 없었다. 최성규가 이제야 비로소 인기척을 느낀듯이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짜장 놀랍고 반가운 기색으로 두팔을 벌리며 일어났다. 《아니? 이게 뉘시오?》 강용찬은 혐오감을 느끼며 묵묵히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최성규는 적수에게 아량을 보이고 관용을 베풀고싶었던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와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서있는 강용찬을 가볍게 포옹까지 하려고 했다. 《강형! 그 무덤속 같은 감방에서 용케도 살아나오셨구려. 출소를 축하합니다.》 강용찬은 자기 몸에 감겨드는 구렝이를 풀어던지듯이 그자를 왼손으로 밀어버리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래, 그걸 축하해주자고 날 불렀소?》 《허. 늙으면 노염이 많아진다더니 강형은 공연히 못마땅해하시는구려. 이젠 떳떳한 사회인이 됐는데 불미스러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해버리고 새 출발을 해야 할게 아니요. 자, 앉으시오.》 최성규는 의자를 권하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시오. 나에게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커피 두잔을 제꺽 끓여오라구. 음.》 최성규는 송수화기를 놓고 돌아앉았다. 《인생이란 참… 리별과 상봉의 련속이라더니 우린 인연이 있는지라 또 만나게 됐구려. 내 이젠 성쌓고 남은 돌이라 여기로 굴러왔소. 차라리 고향에 갔어야 하는건데 잘못했거든. 섬진강에서 낚시질이나 하면 좋으련만… 늘그막엔 고향이 제일이라는데 강형도 환향하시지 양로원엔 뭣하러 들어가셨소? 궁상스럽게스리.》 최성규는 짐짓 혀차는 소리를 냈다. 강용찬은 자기의 아픈 상처를 고약하게 들쑤시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다. 《하긴 고향이라고 찾아간댔자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겠군요.》 최성규는 수염이 한오리도 없는 매끈하고 뾰족한 턱주가리를 역시 녀자의 손처럼 매끈한 손으로 쓸어만지며 밉살스럽게 강용찬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늙은 부모는 돌아가고 수절하던 젊은 부인은 어린 아들애의 손목을 끌고 남편을 찾아 분계선을 넘다가 총에 맞아죽었으니 참 인생도 허무하군요.》 강용찬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지금껏 그 소식을 전혀 모르고있었소? 이거 내가 공연한 말을 했구려.》 강용찬은 꼼짝없이 굳어진 자세로 두눈을 꽉 감았다. 안해와 아들이 전쟁때 다행히도 북으로 가서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있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온 일루의 기대가 무참히 끊어진것이였다. 《그러고보면 강형의 일이 정말 안됐소. 내가 다 속이 좋지 않군요. 괴로울텐데 한대 피워요.》 최성규는 짐짓 한숨까지 내쉬면서 담배를 한가치 뽑아서 내밀었다. 《난 피우지 않소.》 《거 좋은 습관이군요.》 《감옥이 나에게 그런 습관을 붙여주었소.》 최성규는 그 말이 전혀 뜻밖이라는듯 입을 하 벌리더니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강형이 감옥생활의 유익성에 대하여 말할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왜 그뿐이겠소.》 하고 강용찬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감옥에서는 술버릇도 고칠수 있고 중놈처럼 인간의 온갖 욕망을 억제하는 법도 배울수 있소. 그러니 당신도 죄없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지 말고 자신이 거기에 가보는게 좋겠소.》 《그런 조언을 주어서 참 고마워요.》 최성규는 성을 내기는커녕 씨물씨물 웃었다. 젊은 녀자가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커피잔을 놓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커피잔을 놓고는 사라졌다. 최성규가 자못 삽삽하게 권했다. 《질이 대단히 좋은 브라질커피랍니다. 자, 어서 마시십시오.》 《아니, 난 그만두겠소.》 《허, 이제야 사회인이 되셨는데 담배도 피우고 술이랑 커피랑 마셔야지요.》 강용찬은 별스레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사회인이라구요?》 《예. 제 말이 잘못됐습니까?》 《당신은 그 말을 벌써 두번째로 하는데 사회인이란건 뭐 말라죽은거요? 난 주민등록증이라는것도 없는 사람이란 말이요.》 최성규는 일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아, 그래서 강형은 기자에게 그런 말을 했구만요.》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거요?》 《<나는 비록 출소했지만 감옥에서 나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다지요. 무엇때문에 그런 불평을 부렸는지 이제야 알만 해요. 주민등록증을 당장 내드리겠습니다. 그거야 이 나라 국민이라는 징표가 아닙니까. 그게 없으면 선거도 못하고 려행도 할수 없고 병이 나도 치료도 받을수 없답니다.》 강용찬은 짜증이 나서 왼손을 홱 내저었다. 《난 그런걸 받지 않겠소.》 최성규는 또다시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왜 거절하시나요?》 《당신이 그걸 몰라서 묻소?》 《아, 안심하십시오. 전향을 담보로 해서 주민등록증을 내드리자는게 아니니까요. 나는 아무런 조건부도 없이 그저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야 어쨌든 동향인이 아닙니까.》 최성규는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했지만 강용찬은 응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싫다는건가요?》 《…》 《허, 이거 효도도 받아주어야 한다는데 정말 섭섭해요. 그래 생활상 불편한 점은 없나요?》 강용찬은 차라리 피방울이 튀도록 고문을 받는게 낫지 이런 식의 회유는 질색이였다. 《여보시오. 가고싶은 곳에 가지 못하고 양로원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 늙은이에게 왜 불편한 점이 없겠소.》 《가고싶은 곳이라는건 어딥니까?》 《당신이 그걸 몰라서 묻소? 시끄럽소. 부질없는 말장난은 그만두시오.》 《뭐? 말장난이라구?》 강용찬을 노려보는 최성규의 두눈에 살기가 어렸다. 《흥, 아직도 실현불가능한 희망을 품고있군요. 내 이미 오래전에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통일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건 먼 장래의 일이라구요. 강선생이나 나나 아쉬운대로 그날을 보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세대의 비극이 있는거지요.》 최성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탄식을 했다. 《통일이라! 우리는 바로 그것을 위하여 서로 싸우며 늙었는데 그날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야 하니 인생이란 정말 허무하군요.》 《당신이 통일을 바랐다면 우린 애당초 서로 싸우지도 않았을거요.》 자기의 만족스런 연기에 도취되여 자감상태에 빠졌던 최성규는 정통을 찌르는 그 말에 눈을 번쩍떴다. 《강선생,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요? 이 최성규도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란 말이요.》 《당신이야 통일이 되면 자살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커피잔을 들던 최성규는 흠칫 굳어졌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자기가 분명 그런 말을 한 생각이 났다. 그는 강용찬이를 사형으로 기소하였는데 웬일인지 3심에 올라가서 무기로 감형되였다. 헌데 강용찬은 이 판결도 비법적인것이라고 상소를 했다. 이 상소를 심의처리하기 위하여 그는 감옥에 가서 강용찬이를 만났던것이다. 《사형을 면하게 해주니까 감지덕지할 대신에 상소를 하신다? 그 리유는 뭐요?》 《나에 대한 판결이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어긋나기때문이요. 나는 마땅히 북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단 말이요.》 《당신의 고향이 이북이란 말인가요? 인정으로 봐서도 나는 동향인인 당신을 이북에 보내고싶지 않소. 사형을 해서 고향에 묻어주고싶었는데 그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유감스럽소.》 《당신은 지금까지 몇사람을 사형으로 기소했소?》 《글쎄… 적지 않은 수자라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그건 왜 묻소?》 순간 강용찬의 두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펏뜻거렸다. 《명심하시오. 검사나리, 통일이 되면 바로 당신이 사형을 언도받게 될거요.》 최성규는 속이 섬찍했지만 픽 웃었다. 《걱정마오. 통일되면 내스스로 이마빡에 권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길테니까.》 《그럼 나는 당신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겠소.》 《천진하군. 콩밥을 자시면서 당신이 그렇게 오래 살아있을수 있겠소? 당신이라는 인생의 쪽배는 암초에 걸려서 파공이 난셈이요. 언제 침몰되겠는가는 시간문제지. 어쨌든 당신이 한 상소는 기각이요.》 그때 나눈 이러루한 대화를 최성규는 까맣게 잊고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잊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강용찬이가 자기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얼마나 속에 품고있는지 가히 짐작할수 있었다. 《강형, 그때 내가 한 말은 적화통일을 념두에 둔것이였고 지금하는 말은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의 통일을 념두에 둔거랍니다.》 《그건 망상에 불과하오.》 최성규는 천천히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나서 여유작작한 미소를 머금었다. 《망상이라뇨? 승공통일은 실현가능한 일입니다. 하긴 그새 감옥에 계셨으니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잘 모르시겠군요.》 최성규는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강연회에 출연하기라도 한것처럼 손세를 쓰며 력설하기 시작했다. 《요즘 세계는 지진을 만난듯이 크게 뒤흔들리우고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두 초강대국인 미쏘의 세력균형을 토대로 하여 세계의 정치정세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있었다고 볼수 있지요. 그런데 새로운 사고방식을 소유한 고르비씨가 쏘련의 집권자로 등장했습니다. 고르비는 사회주의를 력사의 과오로 대담하게 인정하고 <민주주의>에로 되돌아가기 위한 전례없는 위대한 개혁에 착수했지요. 형님이 그렇게 하니까 동유권의 동생들도 다 따라하고있어요. 이 지진의 련쇄반응에 의하여 랭전의 산물인 <베를린장벽>은 이미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그런즉 38선이 없어지는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가요?》 최성규는 대답을 기다리는듯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기고만장해서 계속 기염을 토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남측의 국제적인 위상이 대단히 상승했습니다. 무너져나가는 동유권이 수혈을 좀 해달라고 우리에게 팔을 내밀고있지요. 아마 래년중으로 한국은 사회주의진영에서 맏형노릇을 해온 쏘련과 외교관계를 맺게 될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시사해주는지는 짐작할수 있겠지요?》 최성규는 강용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용찬은 무표정한 기색으로 묵묵히 마주보았다. 그는 보안감호소에 있을 때 《한강변의 기적》이요 《서울올림픽》이요 하고 놈들이 장황하게 떠들어대는 수작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쏘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소리는 듣기에 처음이였다. 세계사회주의운동이 일시 좌절을 겪고있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쏘련이 이렇게까지 배신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것이 였다. 《재삼 말씀을 드립니다만 북의 사회주의체제가 저절로 무너지게 되는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강선생도 나도 명이 길어서 앞으로 십년정도, 아니 그보다 빠를수도 있으니 오륙년만 더 살수 있다면 그날을 보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함께 기다려봅시다.》 강용찬은 역한 냄새라도 맡은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연설을 하고싶어서 나를 불렀소?》 《아, 강선생을 모처럼 오시라고 한건 말이죠. 다름이 아니라 새로 제정된 <보안관찰법>에 대하여 상세히 알려드림으로써 재범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성규는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더니 사설을 늘어놓노라 목이 컬컬해졌던지 잔에 남은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나서 책상우에 놓여있는 두툼한 서류철을 끄당겨 펼쳤다. 그의 얼굴에는 재판장에서 피고를 기소할 때처럼 자못 엄숙한 표정이 떠올랐다. 《에- 보안관찰처분대상자는 출소후 한주일내에 주거지 관할 경찰서장에게 출소신고를 해야 한다. 그후 3개월에 한번씩 그동안의 생활에 대한 일체 내용을 파출소에 신고해야 한다. 특히 주거지를 옮기거나 려행을 하려고 할 때에는 경찰서에 미리 신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정치적인 발언은 일체 할수 없으며 집회와 시위에도 참가할수 없다. 이를 자의대로 어기거나 제때에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2년이하의 징역형이나 백만원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그 무슨 판결문이라도 랑독하듯이 《보안관찰법》의 내용을 요약하여 위엄있는 목소리로 전달한 최성규는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이 법에 따라서 검사인 나는 피보안관찰자인 당신이 사회의 선량한 일원으로 되는데 필요한 지시를 주거나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 지시와 조치에 불응하는 경우 경고를 줍니다. 경고를 세번 받으면 당신은 다시 감호소로 가야 합니다.》 강용찬은 두눈을 감고있는것이 잠을 자는것 같았다. 최성규는 상대방의 얼굴표정에서 내심의 변화를 가늠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헛기침을 했지만 강용찬은 여전히 그 모양이였다. 《강선생, 주무시는건 아니겠지요?》 《듣고있소.》 《명심해듣고 불리익이 없게 처신하라구요. 보안관찰기간은 2년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도 재범의 가능성이 있으면 다시 2년을 연장하게 됩니다. 그후에도 재범의 가능성이 있으면…》 강용찬은 빨래줄처럼 길게 늘어지는 그 사설을 듣기 싫어서 상대방의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재범의 가능성이란 도대체 뭐요?》 《말그대로 재범의 가능성이지요.》 최성규는 너무도 뻔한 질문을 한다는듯이 이렇게 대꾸했다. 《결국 <전향을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요?》 《예, 사상을 바꾸지 않은 자에게는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거지요.》 《그럼 난 2년이요, 뭐요 할것없이 통일이 되는 날까지 보안관찰처분이라는걸 받으면 될게 아니겠소. 더 할말이 있소?》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강용찬의 담벽같은 태도에 최성규는 그만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망할 놈의 두상태기!》 최성규의 입에서는 드디여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움쩍두 하지 말고 저승길에 있는 그 주막집에 처박혀있으란 말이야! 만약 바스락소리라도 내면 즉시에 꽁져서 먹방에 쓸어넣을테다!》 강용찬은 이제야 벙글써 웃으며 일어났다. 《난 당신이 화를 낼줄 모르는 호인인줄 알았는데 례절도 모르는 망나니였구만.》 《뭐가 어째?》 최성규는 완전히 리성을 잃고 그 맷맷하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풀떡거렸다. 《허, 이제야 당신의 본색이 드러났군. 더 할말이 없는것 같으니 난 가겠소.》 《가만!》 최성규는 강용찬의 오른쪽 빈 팔소매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강용찬은 흔연스런 기색으로 타일러주듯이 조용히 말했다. 《여보, 당신이 방금 품을 들여 해설해준 <보안관찰법>에는 검사의 지시에 응하라는 문구는 있었지만 망나니의 행패를 받아주라는 문구는 없었소.》 사리정연한 그 말에 최성규는 입이 얼어붙었다. 사실 법을 행사하려면 그에 걸맞는 위엄과 초보적인 례의를 갖추어야 했다. 상대가 일반범죄자가 아닌 사상범인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감옥밥을 수십년이나 먹으면서도 자기의 신념과 의지를 굽히지 않은 비전향장기수의 경우에는 검사가 아니라 그 할애비래도 인간적으로 올려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하기에 비전향장기수들을 선생이라고 존대해주지 않고 제멋대로 주물러보려고 하다가는 이런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였다. 화김에 무슨 일을 칠듯이 노발대발하며 강용찬의 빈 팔소매를 잡아쥔 최성규는 그걸 싱겁게 놓을수도 없고 검사의 체면에 간수나부랭이들처럼 무작정 주먹을 휘두를수도 없어서 몹시 난처해졌다. 실로 호미난방격인데 마침 권투시합의 휴식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최성규는 강용찬을 붙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고 책상옆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예. 검사 최성규 전화를 받습니다.》 《할아버지, 나 수헌입니다.》 서울법대에 다니는 손자의 반가움에 겨운 목소리가 수화구로 챙챙 울려나왔다. 《으음?!》 최성규는 웬일인지 흠칠하더니 뭔가 께름직해하는 눈초리로 강용찬을 흘끔 돌아보았다. 《우린 래일부터 학기말시험에 들어갑니다. 시험이 끝나면 방학인데 며칠내로 올해의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다 청산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손자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돈이 떨어졌다는거겠지?》 《예. 절약해 쓰노라고 했는데…》 《알겠다. 오늘중으로 송금해주지. 그런 시시한 걱정은 하지 말고 시험이나 잘 치거라.》 최성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예.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녀석두… 제 할아버지에게 무슨 그런 인사가 필요하냐. 이번에도 시험성적에서 수석을 쟁취하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아주 굉장한걸 크리스마스선물로 너에게 줄테다.》 최성규는 이런 약속을 하면서 마음이 즐거워나서 강용찬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강용찬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떨군채 돌처럼 굳어져있었다. 방금전의 태연자약하고 도고하던 모습이 아니였다. 느닷없이 떠오른 서글픈 생각에 잠긴듯 한 모습이였다. 강용찬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말없이 방에서 나갔다.
11
때로는 하등에 별치 않은것이 인간의 마음속을 칼끝처럼 아프게 쑤셔놓는 경우가 있다. 강용찬은 최성규놈의 야유와 조롱도 끈질긴 회유기만도 지어는 다시 감옥에 집어넣겠다는 위협도 다 꿈만 하게 여겼다. 그러루한 단련은 지금껏 너무도 많이 받아와서 전혀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면역이 생긴것이였다. 그런데 그놈이 전화로 자기의 손자와 제법 무던하고 선량한 할아버지답게 생활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것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가슴이 허전해지는것을 도저히 어쩌는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이번에 처음으로 당하는것이 아니였다. 놈들은 그를 수십년간이나 감옥에 가두어놓고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려고 짐승도 낯을 붉힐 별의별 고문을 다 들이댔다. 때리고 치고 쑤시고 지지고… 이에 항거하여 단식을 하면 눕혀 놓고 여러 놈이 타고 앉아 입을 벌리게 하고 호스를 식도안에까지 쑤셔넣고 죽물을 강제로 주입하기도 했다. 이럴 때 그의 눈에 비치운 그자들의 모습은 결코 인간이 아니였으며 피에 주린 야수의 무리였다. 그런데 이런 놈들이 고문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저들끼리 지껄지껄하는 수작을 들어보노라면 제법 사람냄새가 나기도 했다. 피 묻은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세다가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봉급날이 되려면 아직도 닷새를 더 기다려야 하니 이를 어쩌면 좋아. 중학교에 당기는 녀석이 둘씩이나 되는데 월사금을 안 준다고 오늘 아침에도 칭칭거리는걸 겨우 얼려서 보냈거든.》 이런 근심을 하는가 하면 《요즘 집사람이 확실허게 머슴애를 밴것 같아. 입쓰린지 뭔지 하는걸 독하게는 하는데 계집애를 뱄을 때와는 확실히 다르구만. 이걸 먹고싶다기에 이걸 구해다주면 쳐다보지도 않고 저걸 먹고싶다는거지. 고생스레 그걸 구해다주면 또 다른걸 먹고싶다는거야. 어쩌면 좋아?》 이런 수작을 하는 놈도 있었다. 리성도 량심도 없는 이런 놈들에게도 가정이라는게 있고 가정에 들어가면 안해에겐 남편이요, 자식들에겐 아버지라는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강용찬은 살점이 뜯기워나가는 고문을 받을 때보다 휴식참에 놈들이 저희들끼리 지껄이는 이런 수작질을 들을 때가 왜서인지 더 고통스러웠다. 이런 타성이 방금전에도 작용했기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는가? 그는 진눈까비가 흩날리는 거리로 스적스적 걸어가면서 이렇게 자문해보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닌것 같았다. 그러면 최성규놈한테서 안해와 아들이 죽었다는 가슴이 철렁한 소식을 들었기때문인가? 부지중 걸음을 멈춘 그는 바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태풍이 불어오는지 조용하던 남해바다가 별안간 무섭게 꿈틀거리며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흰 머리칼을 마구 풀어헤친 사나운 파도가 낮게 드리운 어두운 하늘을 치받으며 길길이 솟구쳐오른다. 사납게 울부짖으며 기슭으로 밀려와 부두를 힘껏 때리고는 산산이 부서져 허공중에 흩날린다. 그 스산하면서도 처량한 소리가 운명직전에 이 무정한 남편을 목놓아불렀을 사랑하는 안해와 얼굴도 보지 못한 어린 아들의 피타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대자연의 광란을 지켜보며 그 통곡소리에 귀를 강구던 강용찬의 두눈에선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쇠물처럼 끓어올랐다. 아! 통일은 과연 언제 되려는가? 바로 그것을 위해 나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구나. 나의 안해도 나의 아들까지도… 나와 나의 가족뿐만아니라 이루 헤아릴수 없는 많은 동지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한몸을 서슴없이 바쳤고 일가친척들까지도 억울한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이 남쪽땅에서는 광복직후나 전후나 지어는 오늘까지도 미국놈들이 주인노릇을 하고있고 최성규와 같은 주구들이 판을 치고있지 않는가. 참 그놈이 아까 뭐라고 지껄였던가? 요즘 세계는 지진을 만난듯이 크게 뒤흔들리고있다고 했지. 쏘련이 래년중으로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게 될거라고 했지. 북의 사회주의체제가 저절로 무너지게 되는건 시간문제라고 했지. 과연 어리석은 놈의 망상이로다. 세상이 뒤집혀질수도 있고 어제날 우리의 벗이였던 사람이 우리의 원쑤와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출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단 말인가?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끄떡도 없는거야. 그이께서 만고풍상을 헤치시며 찾아주시고 빛내여주시는 사회주의의 내 조국은 선렬들의 피로 물든 성스러운 붉은기를 더 높이 추켜들고 통일되고 더욱 번영할 래일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거야. 이것은 그야말로 절대적이고도 무조건적인 확신이였다. 어렵고 괴로울 때마다 이런 확신을 안겨주는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심장속에 고이 간직되여있는 소중한 추억이였다. 이 추억에 잠길 때면 언제나 그의 눈앞에는 진달래가 여기저기에 활짝 피여 웃는 화창한 이른 봄날, 시내물이 졸졸 노래하며 흘러내리는 산기슭으로 신바람이 나서 달려가던 가마마차가 떠오르군 하는것이였다. 황량한 이국땅 만주벌판을 내달리며 자기와 생사를 같이 한 애마가 조국에 나와서도 병사들을 찾아서 푸짐한 점심식사를 싣고 달려가는것이다. 그는 왼손에 고삐를 틀어잡고 오른손에 쥔 채찍을 공중에 휘둘러쳐서 소리만 냈다. 《쪄! 쪄!》 저기 바라보이는 산봉우리에서 우렁찬 만세소리가 울려퍼진다. 실전과 다름이 없는 고지점령훈련이다. 철조망을 뛰여넘어 적 《화점》들을 수류탄으로 까부신 대원들이 일제히 총창을 비껴들고 만세를 부르며 산마루에 치달아오르는 모양이였다. 자! 어서 가자! 군마야. 가마마차야! 문득 산굽이를 에돌아 풍을 친 야전승용차가 마주오기에 그는 황급히 고삐를 나꿔채며 마차를 길옆에 비켜세웠다. 이통에 한쪽바퀴가 물홈에 빠지면서 마차가 기우뚱해졌다. 야전승용차는 속도를 늦추더니 멈추어섰다. 수수한 사민복차림으로 차에서 내리신분은 뜻밖에도 그처럼 뵙고싶었던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시며 가마마차로 다가오시였다. 강용찬은 정오의 태양을 바라볼 때처럼 눈이 부셨다. 정신조차 혼미해질 지경이였다.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급히 마차에서 뛰여내린 그는 차렷자세로 거수경례를 했지만 그 자세로 굳어진채 규정대로 보고도 드리지 못했다. 《자, 우선 마차부터 바로세우고 봅시다.》 장군님께서는 뒤따라 차에서 내린 부대장과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허리를 굽히시고 마차채밑에 어깨를 들이미시였다. 이 순간에야 정신이 펄쩍 들어서 강용찬은 허겁지겁 그이곁으로 다가갔다. 《장군님, 어서 지나가십시오. 마차는 제가 혼자서도 얼마든지…》 《국이 쏟아지겠소. 자, 어서.》 부대장과 운전사까지 달라붙어서 영차! 영차! 빠진 마차바퀴를 길우에 올려놓았다. 《우리 전사들이 무얼 먹는지 좀 보기요.》 장군님께서는 가마마차우에 올라가시여 손수 밥가마와 국가마의 뚜껑을 열어보시였다. 다음엔 반찬을 담은 커다란 버치에 씌워놓은 천까지 벗겨보시고 탄성을 올리시였다. 《굉장하오! 이거 교즈까지 있구만.》 장군님께서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시며 마차곁에 어줍게 서있는 강용찬을 돌아보시였다. 《정말 오래간만에 교즈를 구경했소. 교즈는 동무가 빚은거요?》 《예.》 《동문 나이가 들어보이는구만. 몇살이요?》 《서른네살입니다.》 《이름은?》 그제서야 그는 차렷자세를 취하며 규정의 요구대로 씩씩하게 대답을 올렸다. 《후방분대장 강용찬.》 《그러니까 동무도 중국에서 나왔겠구만.》 《예.》 부대장이 경애하는 장군님께 이 동무는 광복직후 심양에서 조선인의용군이 조직되였을 때부터 중국혁명을 도와서 4년간이나 싸운 로병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오랜 지기라도 만난듯이 더욱 반가와하시였다. 《그래 고향은 어디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입니다.》 《남해바다가로구만. 고향엔 누가 있소?》 《부모님들과 안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지 딸이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였다. 그때 량쪽 볼에 패이는 샘이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그 샘에서 밝은 미소와 자애로운 사랑이 계속 흘러나오는것만 같았다. 참으로 친근하신 모습이시였다. 《아니, 아버지가 그걸 모르면 되나? 혹시 임신한 안해를 두고 고향을 떠난게 아니요?》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러게 됐소?》 장군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어주시기에 그는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 압록강을 건느던 일이며 신출귀몰하는 항일유격대를 찾아 만주벌판을 헤매다가 일제놈들에게 붙잡혀서 철조망을 둘러 친 비밀공사장에 끌려가 고역을 치르던 일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서 탈출한 사실을 자초지종 말씀드렸다. 《그후엔 어떻게 됐소? 어째서 우리를 찾아오지 못했소?》 장군님께서는 이미전에 그를 만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우신듯 이렇게 물으시였다. 《저… 그때 저는 항일유격대를 찾아가려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쏘련과 일본이 무슨 중립조약을 체결했다지, 그통에 항일유격대도 다 없어졌다지, 정말 눈앞이 캄캄했댔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신중하신 안색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신채 말씀이 없으시였다. 《그렇다고 다시 고향에 돌아갈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국내에서는 일본놈들이 우리 조선청년들을 징용이요, 징병이요 하고 막 끌어가는 판인데 놈들과 싸우지는 못할망정 그런데야 어떻게 끌려가겠습니까. 여기저기 다니다가 우리 동포들이 많이 모여사는 심양에까지 가게 되였는데 거기서 일본놈들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때 전 너무 기뻐서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에 풀썩 주저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글쎄 이날을 보자고 고향도 가정도 다 버리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결국은 조국광복의 성전에 총 한방 쏘아보지 못했으니…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분하기 그지없고 후회가 막심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항일유격대를 기어이 찾아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주저앉은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때 정세가 급변하자 많은 사람들이 신심을 잃었댔소. 지어는 우리와 함께 오래동안 싸운 사람들가운데서도 절망에 잠겨 고민하다가 적들편으로 도망친 배신자가 나타났댔소. 하지만 동무는 그 시련의 시기에도 조선청년의 넋을 잃지 않고 살았고 그후에는 중국혁명을 도와서 잘 싸우지 않았소. 이젠 동무가 고향을 떠난지도 십년이 썩 넘었겠구만. 부모님들이랑 안해랑 아직은 얼굴조차 보지 못한 자식이 얼마나 그립 겠소.》 《장군님, 전 미국놈들을 다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한 다음에 떳떳이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미더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음, 그래 미국놈들과 싸우면 이길수 있겠소?》 《예.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이깁니다.》 《신심이 좋구만. 어째서 반드시 이길수 있소?》 강용찬은 주저없이 힘차게 대답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기때문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빨찌산으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정규무력인 우리 인민군대가 미국놈이라고 때려부시지 못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음, 역시 싸움판에서 단련된 로병답구만. 전투경험도 있고 남반부에 고향을 두고있는 동무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 서야 하오. 우리는 일제와 싸울 때 애당초 그 누구의 도움으로 조국광복을 하려고 한게 아니였소. 때문에 40년도초에 정세가 아주 불리해졌을 때도 추호의 동요도 없이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출수 있었소. 지금 미국놈들과 리승만괴뢰도당의 책동으로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시련과 난관이 가로놓여있소. 그러나 조국통일은 누구도 대신해줄수 없다,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며 얼마든지 할수 있다, 이런 주체적인 립장과 필승의 신념을 가지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거요. 그래야 동무는 그리운 고향으로 하루빨리 갈수 있고 사랑하는 부모처자들과도 떳떳이 만날수 있소.》 《장군님, 꼭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어서 가마마차를 몰고 가라구. 고지점령훈련을 하고난 동무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겠소.》 강용찬은 고집을 부렸다. 《장군님께서 타신 승용차가 먼저 지나가셔야 합니다.》 《자, 어서 빨리 가오. 식사시간이 늦어지겠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온것은 강용찬의 일생에 있어서 다시 없을 행운이였고 영광의 절정이였다. 사실 그때만 해도 평범한 대원들은 자기네 련대장에게 거수경례를 한번 해본것도 아주 대단한 일이여서 자랑거리로 되군 했었다. 그런데 가마마차나 몰고 다니는 후방분대장인 강용찬이는 인민무력을 통솔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온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몸소 자신께서 타고 오시던 야전승용차를 길옆에 비켜세우게 하시고 강용찬이의 가마마차를 먼저 통과시켜주시였으니 단지 이것만으로도 큰 사변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부대를 시찰하는 바쁜 시간을 지체하며 강용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 서라고 친히 고무까지 해주셨으니 그 사랑 그 믿음을 세월이 흘러간들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그날에 만나뵈온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은 그의 심장속에 고이 간직되여 힘겨울 때나 괴로울 때나 새힘과 용기를 안겨주고 신심을 북돋아주군 했다. 그는 거연히 머리를 추켜들고 백발을 날리며 힘있게 걸음을 옮겼다. 흩날리던 진눈까비들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했다. 미친듯이 불어치는 사나운 해풍에 눈송이들은 수천수만마리의 벌떼처럼 우우소리를 지르며 향방없이 맴돌이를 쳤다. 그걸 보니 만주의 림해설원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생각났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그 무변광대한 빙천설지에는 어느 산봉우리 어느 산골짜기나 앞서걸어간 항일선렬들의 피어린 자욱이 찍혀있었다. 어제날도 그러했듯이 그는 오늘도 그 자욱을 따라 걷고있는것이였다. 양로원을 에돌아 뒤산으로 올라가니 잎 떨어진 떨기나무들이 가지를 잔뜩 꼬부리고 추위에 못 견디겠다는듯 비명을 지르고있는 모양이 애처로왔다. 나지막한 릉선을 넘어서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가니 눈이 내리는 이 계절에도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들의 장한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띄우기 시작했다.
그는 기묘하게 비틀리우면서도 키높이 자란 아름드리 로송앞에서 멈춰섰다. 손바닥만한 크기로 툭툭 터갈라진 소나무의 껍질은 갑옷을 련상시켰다. 이런 갑옷을 떨쳐입었기에 늙은 소나무는 광란하는 눈보라속에서도 붉은 정수리를 창공을 향하여 거연히 추켜들고 윤기나는 푸른 잎새를 흔들며 장엄하게 설레이고있었다. 그립던 동지를 만난듯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서있던 그는 날이 저물기 시작해서야 키낮은 어린 소나무를 하나 떠가지고 산을 내렸다. 경비실에 나와있던 총무가 몹시 기다리던 기색으로 맞아주었다. 《이제야 오시는군요. 그건 뭡니까?》 총무의 호기심이 어린 반들거리는 눈동자는 강용찬이가 왼손으로 가슴에 껴안고 온 어린 소나무에 못박혔다. 《보면 모르겠나. 화분에 심으려고 떠왔네.》 《소나무가 화분에서 살게 뭡니까.》 《기어이 살굴테니 두고보게.》 《차라리 선인장 같은걸 심으시죠. 그건 그렇고 아까 웬 손님이 찾아왔댔습니다.》 강용찬은 눈이 둥그래졌다. 《손님이라니?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을수 있나. 어디서 온 누구라오?》 《환갑이 지나보이는 풍채가 좋은 늙은이인데 자기의 신분은 밝히지 않더군요.》 강용찬은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그가 누구겠는지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총무는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뭐요?》 《돈이지요. 선생님이 쓰라는겁니다.》 《아니, 대관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으면 되는가. 주인에게 돌려주게.》 거저 주는 돈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보기에 처음이라 총무의 반들거리던 두눈이 떼꾼해졌다. 《돌려주다뇨? 이건 선생님의 건강회복에 쓰라고 헌사한겁니다. 뭐든지 잡숫고싶은게 있으면 다 말하십시오. 제가 다 사다드리지요.》 《이리 주게. 내가 건사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겠네.》 사실 총무는 이 돈도 전번에 기자에게서 받은것처럼 슬쩍 먹어치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정체 모를 령감이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 그런 경우 들장이 날수 있었다. 하는수없이 강용찬에게 돈봉투를 고스란히 넘겨주고나니 어찌도 속이 알찌근한지 마치 자기 돈을 생으로 떼운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너무 고지식한게 탈입니다. 무엇때문에 그 돈을 돌려주겠다고 그럽니까?》 강용찬은 총무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갔다.
12
수헌이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대학이 겨울방학에 들어가자 부산으로 귀가하였다. 그동안 학업에 전심전력하여 대학적으로 단연 제일 높은 성적을 쟁취하고 온 그를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해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좋아! 아주 잘해! 그 기세로 계속 학업에 매진하여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거라. 그래서 나처럼 평생 검사노릇만 하지 말고 법무부 장관이나 대법원 원장쯤 해먹으란 말이다. 내가 너에게 줄 크리스마스선물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보여줄테니 이리 오너라.》 최성규는 미처 제 어머니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손자를 문지방에서 돌따세워 아빠트지하에 있는 차고로 데리고 내려갔다. 두어달전에 서울에서 신품전시회를 한 최신형승용차가 거기에 세워져있었다. 《이거다, 어때? 만족하냐?》 우유에 통채로 잠그었다가 방금 꺼낸것처럼 하얗고 뽀야스름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승용차는 광고모델로 나선 미녀의 모습을 련상시켰다. 수헌이가 받기에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선물이여서 오히려 옹색해질 지경이였다. 《수정이란 년이 오빠만 멋진 승용차를 사주었다고 뾰로통해졌단다. 계집애들이란 질투를 하는 법이니 넌 그저 모르는척 해라.》 최성규는 몹시 기뻐하면서도 어줍은 기색으로 말없이 서있는 손자에게 차열쇠를 넘겨주었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음, 헌데… 내 너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다.》 수헌이는 갑자기 심각해진 눈초리로 자기를 유심히 뜯어보는 할아버지앞에서 이상야릇한 압박감을 느꼈다. 《너 어릴적에 부르던 이름이 생각나냐?》 실로 예상치 못했던 천만뜻밖의 물음이였다. 수헌이는 얼떨떨해져서 멍하니 할아버지를 마주보기만 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글쎄요. …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몹시 긴장됐던 최성규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달리 생각지 말아라. 나에게도 어렸을 때 따로 부르던 아명이라는게 있었는데 전혀 생각나지 않는구나. 그건 그렇고… 넌 말이다.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처럼 장사질이나 해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사내대장부답게 나라를 위해 멸사봉공해야 한다. 알겠느냐?》 수헌이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이런 훈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에 별로 새삼스러운감이 없었다. 《늘 명심하고있습니다.》 《너두 잘 알겠지만 나라란 뭐겠느냐? 곧 법이야. 법을 지키는게 나라를 지키는거다. 그래서 너를 법대에 보낸거란 말이다. 이 할아버지는 법을 지켜 공산주의와 평생 싸워왔다. 이 나라는 반공이 국시로 되지 않고서는 존재할수 없기때문이야.》 《알고있습니다.》 《음, 이런거야 대학에서 다 배웠을테지. 그건 또 그렇다 치고 내 보기에는 네 성미가 지내 꼬장꼬장한게 탈인것 같다. 담배를 피우느냐?》 수헌이는 중학시절에 벌써 몰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만 할아버지앞에서 그렇다고 대답할수가 없었다. 《아직은 안 피웁니다.》 《술도 안 마셔?》 할아버지가 오늘따라 이런걸 꼬치꼬치 따져묻는게 이상했다. 《예. 아직은…》 최성규는 못마땅한듯 이마살을 찡그렸다. 《사내대장부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건 흠이 될게 없느니라. 아니할 말로 계집질을 해도 무방한거야. 그러나 무슨 리념써클이니 학생운동이니 이런건 절대로 하지 말아라. 그게 다 피를 물고 싸워야 할 이북에 사상적으로 동조하는거란 말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새 공부를 하노라 수고를 했는데 이번 방학기간엔 승용차를 타고 가고싶은델 다 다니면서 마음껏 놀거라. 피곤을 쭉 풀란 말이다.》 최성규는 손자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고나서 검찰청으로 나갔다. 수헌이는 고개를 떨군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나서 집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화장품이 요란하게 갖추어진 커다란 경대앞에서 새로 지은 털외투를 입어보고있었다. 마흔이 지났지만 그래서 더욱 옷차림이나 머리단장, 화장에 신경을 쓰고 품을 들이는 어머니는 그 덕분에 젊은 시절의 매혹적인 미모를 잃지 않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어머니의 미모를 찍어 닮아서 그런지 딸도 몹시 귀여워했는데 수헌이에 대해서는 거의나 관심밖이였고 지어는 거치장스러워하는 태도였다. 어머니는 옷차림을 깐깐히 살펴보고나서야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놓고 아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정이 담뿍 담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할아버지의 선물이 마음에 드냐?》 수헌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왜 그러니? 기분이 좋지 않았구나.》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어머니는 긴장된 눈빛으로 아들을 주시하였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수헌이는 어머니를 외면한채 뜨적뜨적 말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오히려 지나치게 극성을 부리시거든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녀인의 얼굴에 일순 당황함과 노여움이 비꼈다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상업상 거래로 노상 바쁘신 몸이니까 그러시는거지. 할아버지는 유명한 검사니까 네가 법대에 다니는걸 장하게 여기시기에 그러시는것이고…》 《하긴 아들을 미워하는 아버지는 있어도 손자를 미워하는 할아버지는 없다고 하더군요.》 수헌이는 타협조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호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여 뻐젓이 한가치 뽑아물었다. 《아니?! 너 담배를 피우니?》 어머니는 아연실색해졌다. 《예. 방금 할아버지의 승인을 받았어요. 오래간만에 집에 왔는데 술이나 한고뿌 주세요.》 여느때와는 다른 아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굳어진 자세로 잠시 아들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 술도 배웠느냐?》 《어머니두 참… 술이 무슨 학문이라고 배우고 말고 하겠나요. 어서 가져오세요. 피곤을 푸는데는 그것 이상 없대요.》 《하긴… 너두 이젠 그럴 나이가 됐으니까…》 어머니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술병에 마른 안주를 몇접시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자, 술을 마시되 제발 아버지처럼 폭주는 하지 말렴. 아버지는 간이 좋지 못한데두 매일같이 술을 마시니 얼마나 속상한지 모르겠다. 상업상 거래와 흥정이라는게 술상에서 벌어지군 하니 아버지도 어쩌는수가 없다는건데 핑게지 뭐.》 수헌이는 피우던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끄고 어머니가 부어주는 술고뿌를 받았다. 냄새는 기가 막히게 향기로운데 정작 한모금 마셔보니 쓰거웠다. 목젖이 띠끔하고 목안에서 불이 이는것 같았다. 또 한모금 마셨다. 머리가 핑 돌면서 자기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 재미에 술이라는걸 마시는 모양이다. 알딸딸하면서도 둥실 떠오르는듯 한 이 쾌감을 즐기려고… 《아버진 왜 보이지 않아요?》 《제주도에 가셨단다.》 《수정이는요?》 《그 애도 함께 갔지.》 수정이는 중학교 졸업반생이였다. 그 애도 방학기간이니 놀러간 모양이다. 《아하, 노상 바쁘신분이 따님까지 데리고 관광려행을 떠나셨구만.》 어머니의 얼굴이 일순 해쓱해졌다. 《너 갑자기 왜 이러니? 응?》 둥실 떠오르는듯 한 쾌감은 순간뿐이였다. 수헌이는 술을 마셔서인지 기분이 상해서인지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가는것을 느꼈다. 심장이 활랑거리고 머리속이 지끈지끈 쑤셔나기 시작하고 뭔가 콱 들부시고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에게 꼭 묻고싶은 말이 있었다. 차마 맑은 정신을 가지고는 물을수가 없어서 난생처음으로 술잔을 입에 대여본것이다. 《어머니, 어렸을 때도 나를 수헌이라고 불렀는가요?》 가뜩이나 해쓱해졌던 어머니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연지를 바른 그 입술이 바람을 맞은 꽃잎처럼 파르르 떨리는것을 수헌이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하얗고 가쯘한 이발로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어렸을 때 나에겐 따로 부르던 이름이 있었던것 같은데요. 왜 대답이 없나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어머니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랬을수도 있지. 헌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방금전에 할아버지가 물어보시더군요. 어릴적에 부르던 이름이 생각나는가구요.》 약간 홍조가 되살아나던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해쓱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을 올렸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던?》 《자기도 어렸을 때 따로 부르던 아명이라는게 있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확 피여올랐다. 《그것 보렴. 나에게도 어렸을 땐 무슨 꽃이름을 달아주었댔단다. 모란이라고 했던지 나리라고 불렀던지 나도 잘 생각나지 않는구나. 이제 와서 그런걸 생각해선 뭘하겠니. 다 지나간 일인데…》 수헌이는 골이 지끈지끈 쑤셔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 젠장 이제 와서 그런걸 생각해선 뭘한단 말인가? 다 지나간 일, 과거가 오늘에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 애매몽롱한 일이 과거에 있었던것만은 사실이지만 까짓거 덮어버리자. 그걸 구태여 까밝혔댔자 나쁘면 나빴지 좋을건 하나도 없을테니까. 그는 겨우 고개를 들고 흐리멍텅해진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피곤한데요.》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쉬려무나.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예. 좀 눕겠어요.》 수헌이는 비칠거리며 자기 방으로 갔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두눈을 꾹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더 생각하고싶지 않은것, 덮어버리고싶은것이 집요하게 다시 생각나고 떠오르면서 미칠 정도로 신경을 자극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존재가 안개속에 싸인듯이 명확치 않다는것은 정녕 참을수없이 괴로운 일이였다. 그것을 명확하게 까밝히고싶은데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처지가 불리해질수 있다는 바로 여기에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그는 침대에서 훌쩍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니?》 어머니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왔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푸접없이 대답했다. 《산보나 하려고 그래요.》 밖으로 나왔지만 정작 갈 곳도 없었다.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수헌이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릴 때부터 고독을 즐겼다. 홀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독서에서 환기된 비상하고도 엉뚱한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기가 일쑤였다. 교제를 달가와하지 않았기때문에 친구들도 별로 없었다. 그는 문필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할아버지의 권고에 못이겨서 법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그는 착잡한 눈길로 할아버지가 준 선물이 있는 차고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외면하고 스적스적 걷기 시작했다. 어느 조용한 도서관에 가서 온갖 잡념을 싹 잊어버리고 독서에 열중하고싶었다. 방학이 되여서인지 부산대학교구내는 한적하리만치 조용했다.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열람실에서는 대여섯명의 대학생들이 될수록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책을 보고있었다. 책을 대출받자니 사서가 자리를 뜨고 없었다. 수헌이는 사서가 나타나기를 초조히 기다리다가 무료함에 못이겨서 가까운 책상에 마주앉아 신문을 보고있는 한 녀대학생에게로 다가갔다. 상대방은 신문을 펼쳐놓은채 그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는듯 싶었다. 어쨌든 명상에 잠긴 처녀의 얼굴은 숭엄하리만치 아름다왔다. 사람이란 추악한 생각에 잠기면 얼굴도 미워지는것이고 고상한 생각에 잠기면 얼굴도 이처럼 아름다와지는것인지. 상아로 섬세하게 조각을 한것 같은 처녀의 얼굴은 어지고 착한 마음씨를 그대로 내비쳐보이는 거울같았다. 그 고상한 미에 압도되여 그만 물러서려던 수헌이는 펼쳐놓은 채로 있는 신문에 눈길이 가닿는 순간 무춤 굳어지고말았다. 《비전향장기수 양로원에 입소》 이 기사제목이 화살처럼 날아들어 그의 두눈을 찌른것이였다. 법학을 전공하는 그로서는 결코 무심히 스쳐버릴 기사가 아니였다. 그는 한걸음 더 다가서서 숨을 죽인채 눈으로 빨아들이듯이 기사내용을 재빨리 읽어보았다. 짤막한 기사이지만 특수한 인간의 특이하고 기구한 한생이 함축되여있어 대단히 충격적이였다. 문득 인기척을 느꼈는지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희한할 정도로 희맑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얼굴이였다. 샘처럼 시원하게 생긴 처녀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속눈섭 한오리 한오리가 이슬을 맞은 풀잎처럼 촉촉히 젖어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서글퍼하는 모습이였다. 수헌이는 용기를 내여 물었다. 《실례지만 이 로인님을 아십니까?》 처녀는 여전히 서글픔에 잠긴 눈으로 잠시 수헌이를 마주보더니 입술을 감빨아물며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친척되시는분인가요?》 처녀는 살래살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떻게 아십니까?》 생판 처음 보는 총각이 불쑥 곁에 나타나서 끈질기게 따져묻는게 어이가 없었던지 처녀는 의아한 기색을 지으며 조용히 되물었다. 《거긴 누구시나요?》 수헌이는 얼결에 얼굴을 붉히며 급급히 자기 소개를 했다. 《최수헌이라고 합니다. 서울법대에 다니는데 방학이 돼서 집에 왔지요.》 《그런데 어째서…》 《예. 난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서 결코 외면할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셈입니다. 그래서 초면이지만 이렇게 묻는거랍니다.》 그제서야 납득이 되였던 모양이다. 처녀는 알릴듯말듯 숫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 이 강용찬이란분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둬달전에 거리에서 얼핏 만나보았을뿐이죠. 양로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에 제가 택시운전사에게 부탁하여 모셔다드리게 해주었어요.》 수헌이는 기사의 주인공에 대한 관심도 물론 있었지만 이런 미모의 처녀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것이 더 기뻤다. 하지만 그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진지하게 물었다. 《신문에는 본인의 사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두달전에 거리에서 얼핏 만나본 로인을 이분이라고 생각합니까?》 《여길 읽어보세요.》 처녀는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으로 기사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며 확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잃어버린 청춘, 잃어버린 일가친척, 홀로 남은 그에게는 오른팔도 없다.> 내가 그때 만났던 로인님도 오른팔이 없었답니다. 오른쪽은 빈팔소매가 축 드리워져있더군요.》 수헌이는 흠칫하며 숱진 눈섭을 치켜올렸다. 처녀는 두눈이 올롱해지며 물었다. 《왜 놀라시나요?》 《가만, 나도 말이요. 언젠가 한쪽 팔이 없는 늙은이를 만난적이 있었던것 같아서 그러오.》 《어머?! 그게 정말이나요?》 《아, 그게 언제든가? 내가 어릴적에 있었던 일 같은데…》 수헌이는 번개치듯 자기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그것을 붙잡으려고 두눈을 쪼프렸다. 《이분이야 수헌씨가 어렸을 때는 감옥에 있었을텐데요.》 《참 그렇구만. 내가 어렸을 때 그러루한 꿈을 꾼적이 있었던가?》 처녀는 하얗고 보동보동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때 미소가 샘솟아 남실거리는 처녀의 두눈동자는 대단히 매혹적이였다. 《무슨 말씀이 그래요? 수헌씨는 퍽 재미나는 사람이네.》 《정말 그렇습니까?》 《예?》 《내가 정말로 재미나는 사람인가 말입니다.》 《어머?! 정말 웃기네.》 처녀는 다시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수헌이는 그 무슨 큰 상이라도 받은것처럼 내심 흡족해졌다. 그는 지금껏 자기가 퍽 재미없는 사람인줄로 알고있었던것이다. 할아버지는 자기를 보고 사내녀석이 너무 참한게 탈이라고 했고 아버지는 아예 자기를 상대도 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누이동생은 오빠는 밤낮 책만 들여다보니 말할 재미도 없다고 했다. 지어는 어머니까지도 너는 사귐성이 없고 너무 뚝해서 틀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처녀는, 너무도 아름다와서 자기 같은건 상대도 해주지 않을것 같던 이 아가씨는 자기를 보고 그저 재미나는것도 아니라 퍽 재미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가져볼만도 했다. 수헌이는 상대방이 자기를 그 어떤 희극적인 존재로 볼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어서 정색하여 진지하게 본 화제로 넘어갔다. 《참, 그러니까 그후에는 이 강용찬이라는 비전향장기수를 만나보지 못했습니까?》 웃음이 남실거리던 처녀의 눈동자는 삽시에 흐려졌다. 눈으로 웃는가 하면 눈으로 울기도 하는 다정다감한 처녀에게 수헌이는 더 마음이 끌려들었다. 《어째서 그후에 양로원에 찾아가보지 않았습니까?》 《그저… 처녀가 그런 곳에 찾아가면 남들이 웃는다기에…》 《아니, 웃기는 무엇때문에 웃어요. 그건 결코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처녀는 반신반의하며 소심히 물었다. 《그럴가요?》 《그건 비난이 아니라 찬양을 받아 마땅한 소행이지요. 그 양로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래일 나와 함께 찾아가볼가요?》 수헌이는 대담하게 이런 제의를 했다. 처녀의 인상적인 두눈동자가 별처럼 반짝 빛났다. 《정말 양로원에 가시겠어요?》 수헌이는 너무 기뻐서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그는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신뢰감을 가질수 있게 대답했다. 《난 일구이언 안합니다. 래일 아침에 어디서 만날가요? 그거나 약속합시다. 내가 차를 가지고 그 장소에 가겠습니다.》 처녀의 두눈은 감사의 정에 넘쳐 따뜻이 빛을 뿌렸다. 《정말 고마와요.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도 볼 일이 있어서 그러지요. 비전향장기수라면 우리 법의 최대적수이고 또 최대희생자가 아닙니까. 졸업론문집필에 앞서 내가 꼭 만나봐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래일 아침 아홉시에 카페거리의 <진주특산>앞에서 만나자요.》 수헌이는 내심 긴장해서 물었다. 《아가씨의 이름은?》 《진주.》 《그거야 음식점의 이름이 아닙니까.》 처녀는 수태를 머금으며 얼굴을 활딱 붉혔다. 《음식점이름이자 제 이름인걸요.》 수헌이는 느닷없이 마음이 즐거워졌고 괴롭고 번거롭던 머리가 샘물로 씻어내기라도 한것처럼 맑고 거뜬해졌다. 그는 이 처녀를 그저 바라보는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 처녀와 말을 주고받는다는것, 의사를 소통한다는것은 대단한 행복이였고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였다. 그런데 함께 양로원에 가기로 약속까지 했으니 더 바랄게 무엇이랴. 이렇게 되여 수헌이의 고독한 생활속에 진주라는 어여쁜 처녀가 스스럼없이 안겨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