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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1
구월산과 정방산을 유람한 비전향장기수일행이 낮차로 평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곧바로 옥경이를 찾아갔다. 그동안 그가 썼을 초고를 보고싶기도 했거니와 보다는 그와 함께 선생의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자초지종을 나누어보고 싶었기때문이였다. 이제까지는 선생의 지나온 생활에 대한 취재였다면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희망찬 계획과 실천에 대한 문제들이였다. 무엇보다 우선은 선생의 대상자가 될 맞춤한 녀성을 찾아내는것이였다. 선생의 생활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는 녀성, 물론 처음부터 리해하긴 어렵다 해도 생활하는 과정에 선생의 성격과 취미 그리고 남다른 처지를 알고 진정으로 도와줄수 있는 녀성이여야 했다. 비록 나이는 좀 있다 해도 대학을 졸업한 미모의 처녀래야 하며 특히는 성품이 고상한 녀성. 사실 그런 대상을 찾는다는것이 쉽지 않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녀성을 꼭 찾아내고야말 결심이였다. 크고 단 참외가 없다지만 천만에, 크고 달뿐아니라 색갈에다 모양까지 고와야 한다는것이 나의 요구였다. 그런 요구에 옥경이도 쾌히 발벗고 나서리라는 확신이 들자 저절로 걸음발이 빨라졌다. 《옥경언니요?》 한호실에 있는 처녀가 어딘가 새초롬한 눈길로 나를 훑어보았다. 《혹시 옥경언니하고 같이 취재하는 작가동지가 아닙니까?》 그렇다는 대답이 있기 바쁘게 처녀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외출복차림인것으로 보아 금방 어딘가로 나가려던것이 헨둥했으나 아무리 바빠도 나를 만나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따지듯 하는 처녀의 어조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저도 모르게 되뇌였다. 《무슨 일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전 작가동지를 한번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취재를 끝냈다는 언니가 글쎄 글은 쓰지 않고 며칠째 심각한 번민에 잠겨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여태까지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지요. 언제나 취재를 끝내기만 하면 하루이틀새에 벼락같이 초고를 끝내군 했는데 이번엔 웬일인지 밤새껏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창문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내쉬군 한단 말입니다. 무엇때문인가고 물어도 노상 고개를 젓지 않겠습니까. 분명 무슨 심상찮은 일이 있어요.》 보매 처녀의 태도는 나이는 비록 아래라 해도 생활적으로는 자기가 한등급 우여서 옥경이를 돌봐주고 보살피는것은 자기앞에 나선 응당한 의무라고 간주하는듯 했다. 《그래서 전 글에서는 남달리 승벽이 센 언니가 누군가를 몹시 저주하거나 원망하고있다고 판단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처녀의 눈이 다시 꼬부장해졌다. 《작가동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나는 다시금 부르짖었다. 《내가 왜 저주를 받아야 한단 말이요?》 아무리 터무니없는 말이라 해도 바로 그 어처구니없는 리유로 해서 억울하게 느껴지기마련인것이다. 《이걸 보십시오. 작가동지! 글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글감을 놓고 다투기마련이 아닙니까. 누가 취재대상에 대한 글을 더 빨리 실감있게 쓰는가 하는 경쟁이지요. 거기에 따라 필자의 가치가 평가되니까요. 그런데 옥경언니와 작가동지는 한 대상을 같이 취재했습니다. 남자와 녀자라는 차이는 둘째치고라도 선생님은 전문작가지만 옥경언니야 이제 겨우 기자생활을 시작한 초학도가 아닙니까. 힘이 약한 옥경언니가 작가동지를 원망하는거야 응당하지 않습니까.》 처녀는 자기의 주장을 강조한다기보다 마치 어떤 과오를 범한 사람을 타매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저로서도 지나치다고 여겼는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작가동지, 전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남에게 특히 약자에게 자기를 양보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말 말입니다. 전 작가동지도 그런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작가동지를 만나자고 한건 바로 이 말을 하고싶었기때문입니다.》 《…》 나는 뜻밖의 사실에 아연해졌다. 처녀의 어이없는 의심은 그렇다 해도 그새 옥경이가 고민으로 모대기다니? 모름지기 그동안 초고를 다 썼을뿐더러 오늘 만나면 그 원고부터 내놓을줄 알았던 옥경이였던것이다. 모를 일이였다. 리해되지 않는 일이였다. 《그럼, 전 가겠습니다. 과외수업이 있어서. 옥경언닌 인차 올거예요. 잠간 바람을 쏘이러 나가겠다고 했으니까요.》 필경 어느 중학교 교원인듯 한 처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들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러나 문앞에서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서는것이였다. 《작가동지! 제가 한 부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제법 어떤 일이 있어도 숙제는 꼭 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선생의 엄격한 훈시였다. (여간 당돌한 처녀가 아닌걸…) 처녀가 한 말을 되새기며 걸상에 걸터앉은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옥경이가 나를 원망하다니? 아무렴 그럴리야… 아마 정작 글을 쓰자니까 선생의 투쟁내용이 너무도 아름차 감당하기가 어려웠겠지. 아니면 집필을 앞두고 누구나 체험하게 되는 자기 실력에 대한 좌절감이나 렬등감에 포로됐던가. 사실 옥경이가 언제 그런 요란한 대상에 대한 글을 써보았으랴.) 이런 생각에 젖어있던 나는 책상우에 있는 한권의 학습장에 시선이 갔다. 파란뚜껑에 줄무늬가 건너간 옥경이의 취재수첩이였다. 일기가 아니라 취재수첩이라는데로부터 더우기는 바로 거기에 그가 모대긴 고뇌의 흔적이 새겨져있으리라는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하여 나는 저도 모르게 수첩을 손에 들었다.
10월 ×일 사람들은 흔히 사랑의 힘은 희망을 잃은 슬픔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무기징역으로 하여 희망을 잃은데다 희애의 전향으로 하여 사랑까지 잃어버렸으니 두가지를 다 잃어버린 선생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고 쓰렸으랴! 하지만 선생은 그 희망과 사랑을 자기의 량심과 바꾸었다. 아니 량심만은 저버릴수 없기에 희망이나 사랑을 애오라지 량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환원시켰다. 그 어떤 설음도 시련도 맞받아나가면서… 문득 남녘청춘들이 투쟁때마다 부른다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렇게 피눈물의 거친 광야를 헤쳐온 선생이 오늘은 마침내 해빛이 눈부신 이 땅에 와있는것이 아닌가!
선생의 감옥살이과정을 취재하고 적은 소감이였다. 확실히 내가 느낀것보다 선생의 심정을 더 깊이있게, 절절하게 묘사하고있는데 대한 감동을 피할길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은연중 녀자들, 특히 처녀들에게만 고유한 다감하고 섬세한 감정때문이라고 치부하며 다음장을 넘기였다.
10월 ×일 과연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것이 무엇이고 사람으로 남아있을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가? 선생은 오직 사람답게 살기 위해 손에 총을 잡았고 33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지옥같은 감방에서도 싸워 이겼다. 그후의 사회생활 역시 이 하나의 신조로 일관돼있다. 비인간적인것, 순수하거나 깨끗하지 못한것과는 천성적으로 타협하지 못하는것이 선생의 기질이 아닐가? 그러고 보면 사람다운 사람이란 가장 깨끗한것을 가장 귀중하게 간직하고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면 선생의 일생은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이 선생의 위대한 넋의 거룩함을 확인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간이라는것을… 정녕 그런 선생의 눈에 내라는 인간은 어떻게 비쳐질가? 너무나도 보잘것 없고 초라하겠지. 아니 불쌍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어쩐지 부끄럽고 두렵기만 하다. 부족한 아름다움이나마 제발 선생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보충이 되였으면…
10월 ×일 헤여질 때 희애언니가 했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행복이 저절로 차례지는건 아니라고, 늙은 나이에 옆에서 돌봐줄 친척 하나 없는데 과연 행복할수 있겠느냐고, 그래도 여생이나마 부디 행복해주길 바란다고… 아- 얼마나 가슴아픈 부탁인가! 과연 선생이 그래야 할가? 그토록 남쪽에서 고생한 선생이 북에 와서도 이러저러한 조건들에 구애되여야 할가? 젊고 늙고 하는 나이에 따라 사는게 인생일가? 아니, 선생은 행복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 불행했기에 행복해야 한다는것이 아니라 그처럼 진실한 인간이기에 이제라도 진정한 사랑과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껴야만 하는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을 위해서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와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들모두를 남쪽에서 데려오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들을 세워주시고 앓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3국을 통해 귀중한 약까지 보내주시였으며 또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국가적인 환영사업을 조직할데 대해서와 앞으로의 치료대책이며 고급주택을 배정할데 대해서도 일일이 다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시지 않아 말씀하시였다. … 우리가 아무리 성의껏 비전향장기수동지들을 돌봐준다 해도 그들이 감옥에서 잃어버린 청춘이야 어떻게 되찾아주겠는가고,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청춘, 누구에게나 일생 한번밖에 차례지지 않는 시절이지만 그들은 그 귀중한 시절을 깜깜한 철창속에서 잃어버렸다고 우리 장군님께서 그토록 가슴아파하시는데 내가 맘 편할수 있다면, 잠을 잘수 있다면 어떻게 조선의 청춘이라고 할수 있으랴. 정녕 나는 될수 없을가? 장군님께서 그들에게 안겨주고싶어하시는 그 별,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별이라 해도… 그래서 선생이 신념을 지켜 한생을 바친 대가로 잃어버린 행복을 조금이라도 보상할수 있다면, 그래서 선생이 순간이라도 밝게 웃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면, 그래서 남쪽에 계시는 늙은 어머님과 가족들은 물론 희애언니가 다소나마 마음을 놓을수 있다면, 아- 그렇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가, 자랑스러울가… 과연 나의 이런 감정, 이런 충동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나로서도 알수 없다. 존경? 흠모? 아니면 사랑? 아니 사랑이라니? 내가 어떻게 감히 선생을…
《?!》 순간 나는 굳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제야 옥경이가 무엇때문에 고민하는지 또 어째서 한방에 있는 처녀조차 그것을 알지 못하고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 옥경이가?) 숨이 막히였다. 아니 온몸의 피가 일시에 한곳으로 뿜어져나오는듯 했다. (설마?) 나는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하여 망연자실해있기만 했다. 그 바람에 옥경이가 방안에 들어선것도 알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옥경이를 마주보기만 했다. 책상우에 펼쳐져있는 취재수첩을 통해 모든것을 짐작했는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돌아서는 옥경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모진 번뇌로 하여 애처롭기까지 했다. 선생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바치려는 처녀의 고결한 넋, 그런 불같은 사랑을 지니고도 누구에게 털어놓을수 없어 몸부림치는 그 갸륵한 마음에 고무가 될말을 해주고싶었으나 그런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쿵쿵 하고 흉벽을 두드리는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세차게 온몸을 흔들어댈뿐이였다. 나는 무작정 옥경이의 손부터 으스러지게 잡아쥐였다. 《고맙소, 옥경동무! 정말 고맙소.》 그제야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 어떤 불안과 애원이 어려있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옥경이였다. 《선생님, 전 그저…》 가냘픈 목소리로 되뇌이는 옥경이의 두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어려있었다. 《알겠소. 이제야 동무의 심정을 알겠단 말이요. 자, 가기요. 당장 선생님한테 가잔 말이요.》 갑자기 옥경이가 덴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안됩니다. 그건 절대로…》 고개를 세차게 젓는 옥경이의 행동은 무엇인가를 확정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마치 저로서는 도저히 넘어서지 못할 단애가 가로막혀있다는것을 절감하는 사람의 모습이였다. 그때에야 나는 옥경이에게 다른 하나의 고민이 더 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왜 그러오?》 《전 알고있습니다. 아니 확신하고…》 《뭘 말이요?》 《제 생각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처녀는 기여드는 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 혼자의 소원이고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너무나도 지나친 망상이지요. 글쎄 어떻게 선생님이 저같은 녀자를… 아무런 매력도 뛰여난 점도 없는 저같은 처녀를…》 옥경이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이는 격정이 자기에 대한 어떤 비탄과 함께 솟구쳐오르는 눈물이였다. 자기같은 녀자는 아무 가치도, 볼품도 없다는듯 다시 옆으로 돌아서며 입술을 깨무는 옥경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웨쳤다. (세상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처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녕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처녀를 본적이 없었다. 귀인성스런 외모에 안받침된 남다른 정신적인 매력, 아니 그보다 그런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처녀의 진실한 아름다움이였다. 그래서 그것이 더더욱 값지고 고상하다는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것 같았다. (그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결코 겉에 보이는것이 아니라 속에서 내비치는것이 아니랴. 그래서 그만치 더 고결하고 숭고한것이 아니랴!) 문득 언젠가 소금을 두고 하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것도 소금이고 가장 깨끗한것도 소금이예요.》 정녕 옥경이야말로 소금처럼 깨끗하면서도 귀중한 처녀가 아닌가! 아니 세상에서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아닌가! 하지만 옥경이는 아직도 자기앞에 놓여있는, 아니 이제 자기가 열고 들어서려는 그 사랑의 문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알지 못해 커다란 위구와 불안에 휩싸여있었다. 2
옥경이를 호텔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한 나는 승강기에 올랐다. 난생처음 체험해보는 강렬한 흥분으로 하여 나는 미처 제정신이 아니였다. 승강기에 몸을 싣기는 했으나 오르는지 내리는지, 몇층에 섰는지 그것조차 가리지 못했다. 숱한 사람들이 승강기에 오를 때에야 내가 만장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1층에 내려왔다는것을 알았다. (몇층이더라?) 그제야 나는 선생이 있는 34층의 단추를 눌렀다. 나는 마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임무를 맡은 선택된 행복자처럼 여겨지는가 하면 시대가 기억해야 할 어떤 특별한 사건의 한복판에 서있는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역할에 따라 그 중대사가 이쪽, 혹은 저쪽으로 기울어질수 있다는 비상한 책임감으로 하여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그럴수록 이제 선생을 만나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며 또 선생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지 몹시 불안해지기만 했다. 《아니, 오늘은 어떻게 혼자세요?》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선생이 묻는 말이였다. 《옥경동무말입니까?》 저절로 목소리가 떨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제 오겠지요. 아마 이제…》 《참, 이걸 좀 보세요. 구월산탐승기념으로 가져온건데 얼마나 탐스러워요.》 선생은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나무가지를 나에게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옥경이몫으로도 하나 따로 준비되여있는것이 눈에 띄였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했지만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태연해있는 선생이 못내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는가요? 기자선생말이예요.》 아무래도 옥경이 일이 걱정인 모양이였다. 선생이 옥경이를 찾는다는 사실이 더없이 반가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답대신 선생을 정면으로 그것도 처음보는 사람처럼 아주 심각한 눈빛으로 주시했는데 그 눈길이 색다르게 느껴졌는지 선생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서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세요?》 《옥경동문 앓고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튀여나온 말이였다. 《앓다니요?》 우뚝 굳어진 선생이 나를 찬찬히 여겨보았다. 《글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옥경동무말입니다. 저도 오늘에야 알게 됐습니다만 그가 마음속으로 몹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상대방은 그걸 전혀 모르는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짝사랑을 하고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상대가 자기가 사모하고있다는걸 알면 필경 피하고만다는겁니다. 자기같은 녀자는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돌아서고만다는거지요. 그래서 속을 태우며 앓고있지요. 녀자들이란 참…》 《아- 그래요?》 그제야 다소 안심이 되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예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처럼 훌륭한 녀성을…》 이번엔 도저히 리해되지 않을뿐더러 격분하지 않을수 없다는 표정이였다. 비록 힘은 없지만 자기가 나서서 도울 일이 없겠는가 하고 묻는 기색이였다. 《선생님.》 나는 더이상 에돌수가 없어 말라드는 혀를 추기며 그앞으로 다가섰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내자신이 사랑을 고백한다 해도 이처럼 속이 타들지는 않으리라. 《실은 옥경동무가 말입니다. 옥경동무가 사모하는 사람은…》 《그래 누굽니까?》 과연 그 말을 어떻게 할수 있을가 하고 의심했으나 부지불식간에 튀여나오고말았다. 《선생님입니다. 바로 선생님을…》 《?!》 대뜸 두눈이 화등잔만해진 선생은 나를 한참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하는 눈길로 다시 나를 쏘아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무슨 롱담을… 어떻게 그럴수가… 무엇때문에 그 선생이 나같은걸… 아니, 아니예요. 그럴수 없어요. 없구 말구요.》 《아니 이건 정말입니다. 지금 옥경동문…》 《…》 한동안 눈귀를 쪼프리고 생각에 잠겨있던 선생은 갑자기 성이라도 난것처럼 큰소리로 부르짖는것이였다. 《절대로 그럴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됩니다.》 침대가 있는 옆방으로 들어가는가 싶던 선생이 어느새 불쑥 다시 응접실에 나타났다. 그런 사실은 믿을수도 없거니와 믿어서도 안될뿐더러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것은 자기가 씻을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라고 확신하는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난 인젠 인생을 다 보낸 늙은이지만 옥경선생이야 지금 활짝 피여나는 꽃송이가 아닙니까! 고목과 새싹,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리고 내가 북으로 온건 단지 조국의 품에서 죽자는, 장군님의 품에 안겨 눈을 감자는 하나의 생각뿐이였습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다 그렇지만 우린 죽을 때만이라도 장군님의 품에서 죽어야 한다는 이 한가지 념원으로 조국에 왔어요. 한마디로 말해 묻히기 위해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사랑이라니 원… 당치않아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선생은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데 의하면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해 그 어떤것도 책임을 질수 있는 능력이며 의지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건 아무리 다정한 부부라 해도 주는것만큼 받게 되고 받는것만치 주게 되는게 사랑이예요. 내가 상대를 책임질수도 없는데다가 더우기는 아무것도 줄것도 없는데 어떻게 받겠다고 하겠습니까? 천만에요! 절대로 안됩니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나야말로 사람이 아니지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선생님.》 나는 그 말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만은 리해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는 간절한 눈길로 선생을 주시했다. 《그건 우리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주고받는 량의 크기로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받는것이 아니라 바치는것이 사랑이고 향유가 아니라 창조가 행복의 바탕으로 된다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있을수 있는 우리 식 사랑이지요. 선생도 잘 아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팔다리가 없는 영예군인에게 시집가는 처녀들이나 전사들을 위해 터지는 수류탄을 한몸으로 막는 지휘관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우기 선생님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선생님들은 통일조국을 위해 자기의 한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것으로서 가장 참된 사랑이 어떤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조국을 위해서는 그런 크나큰 사랑을 바치신 선생님이 왜 자기자신을 위해선 자그마한 사랑조차 받아들이지 않으시렵니까? 인간이 아니라구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건 바로 남쪽에 있을 때 선생님이 새긴 인생체험입니다. 그러나 이젠 북에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혁명에 가장 충실한 인간,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만이 받을수 있는 가장 진정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 선생은 입을 벌린채 아무 말도 못하고 마주보기만 했다. 얼굴근육이 실룩거리고 눈시울이 떨리는것을 보면 극심한 고통을 겪고있는듯 한 표정이였다. 그제야 어렴풋이나마 모든것이 사실이라는것을 깨닫는듯 했으나 그래도 자기가 받아안기엔 너무나도 벅찬 충격이여서 그 지나친 격정에 압도돼버린 사람처럼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도저히…》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옥경동무를 직접 만나 설복해보십시오. 지금 밑에서 기다립니다.》 나는 추위를 타는듯 우들우들 떨고있는 선생을 이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은옥경이 우리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듯 했다. 동시에 고선생 역시 한자리에 얼어붙어있었다. 그렇게 얼어붙어버린채 한세기가 흘러갔다고 해도 나는 믿지 않을수 없으리라! 이쪽을 바라보는 옥경의 두눈에서 눈물이 번뜩이였다. 피할 자리를 찾는듯 이쪽저쪽을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두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는 순간 나 역시 눈굽이 저려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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