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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1
성격이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의 성격이 곧 그자신의 운명을 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다시말해 그 사람의 운명은 바로 그자신의 개체적인 본질 즉 그가 지닌 천성에 의해 주어지고 형성되고 굳어진다는 뜻이리라. 그처럼 착하던 광이가 아버지의 비참한 희생과 함께 미친 아이로 변한 그때부터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것은 오직 선만이 정의며 그래서 기어이 지켜야 한다는 남달리 순결한 본성때문이리라. 《토벌대》가 밀려드는 위험천만한 순간에 제 갓난 아들을 희생시킨 승옥이 역시 자기보다 동지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니 혁명을 위해 모든것을 바치려는 그 무섭게도 결곡한 마음때문이 아니겠는가! 정녕 이 두사람의 운명이야말로 그자신들의 성격이 스스로 몰아가고 결론지은 구체적인 산 실례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기태는? 나의 머리에는 어느 옛 기록에서 본 운명에 대한 하나의 전설이 떠올랐다. 어떤 나무군이 오솔길에서 뱀과 맞다들렸다. 첨엔 지게작대기를 휘두르며 뱀과 맞서싸웠으나 도저히 당해낼수가 없다. 그래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뱀은 한사코 뒤따라온다. 인제는 도망칠 기력조차 없게 된 나무군이 쓰러지고만다. 이때 그옆을 지나가던 한 도사가 그에게 말한다. 《뱀과 싸우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마시오.》 《그럼 뱀이 날 잡아먹지 않소?》 《방법이 있소. 우선 저 뒤쪽으로 에돌아 뱀곁에 살짝 기여들어 가시오. 그리고는 뱀이 또아리를 트는대로 같이 따라 움직이시오. 그러면 뱀이 더는 당신을 해치지 않을것이요.》 그 말대로 했더니 정말 뱀이 온순해졌다는것이다. 결국 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과는 싸우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고 타협하라는 뜻이였다. 사람은 자기에게 차례진 운명을 대하는데서 두가지 길, 즉 긍정하지 않으면 부정하는것밖에 없는데 부정한다는것은 어리석은짓이다. 부정한다고 해서 결코 다른 운명을 지닐수 없다. 때문에 부정하지 말고 긍정하면서 타협해야만 살아갈수 있다는 운명에 대한 타협론이였다. 사실 사람들은 대체로 처음부터 자기의 운명을 타고난 숙명으로 여기고 순종하던가 아니면 기태처럼 첨엔 부정하다가도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자기 삶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그것이 바로 내 운명이였으니까.》 마치 자기앞에 놓인 길은 오직 그 길밖에 없었다는듯이. 그러나 광이는 첨부터 자기 운명에 맞섰다.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래서 모진 고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으나 바로 그래서 오늘은 제 운명의 주인, 당당한 승리자로 솟아오른것이다. 정녕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된다는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 동시에 또 얼마나 긍지높은 일인가. 광이나 승옥이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 기태. 그처럼 운명에 타협한 사람들의 삶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일것인가? 나는 오늘 취재에서 심화될 이들의 운명을 머리속에 그려보느라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창작적흥분으로 하여 가슴이 달아올랐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호텔로 가야 할 시간이였다. 전화종이 울렸다. 《예, 창작실입니다.》 《현선생님이예요?》 녀성의 목소리, 그것도 처녀의 맑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절로 미간이 찌프려졌다. 은옥경이였다. 《어떻게 전화를? 그러니 벌써 기사를 다 쓴 모양이구만.》 부러 변죽부터 울려보았다. 《무슨 말씀이예요? 아직 시작도 못한걸요.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그래서?》 《아무래도 고선생님 얘길 마저 듣지 않고는…》 《아니, 그럼 또 취잴 하겠다는거요?》 필경 그것때문일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 짐작이 사실로 맞아 떨어지자 저절로 말꼬리가 굳어졌다. 하루만 취재하면 된다는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지 않는가. 자기 글만 글이라면서 앞질러가며 휘저어놓으면 난 어떻게 된단 말인가! 그만치 양보했는데도 또 끼여들겠다니… 《…》 저로서도 생각되는게 있는지 처녀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나는 지금 그가 자기 생각이 짧았다고 제 글에만 옴해있느라고 미처 글쓰는 사람의 도의에 대해서는 따져보지 못한것을 후회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소설을 쓴답시고 꽤나 재세한다고 눈꼬리가 꼬부장해서 힐난하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처녀로서도 얼마든지 할말은 있으리라. 《뭘 그래요. 고선생이 어째서 작가동지 혼자에게만 차례진 <보물>이란 말이예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구건 다같이 취재할수 있는거예요. 작가동지한테만 차례진 특전이 아니란 말입니다.》 흔히 이 정도 나오기 십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고 뭐고 직판 선생을 찾아갈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러자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를 들고 나의 대답을 안타까이 기다릴 처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려왔다. 《그러니 안된단 말입니까?》 어딘가 애원하는듯이 가냘프게 울리는 처녀의 목소리에 은연중 동정이 솟구쳤지만 나는 못들은척 했다. 《…》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동요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쩐지 처녀가 측은하게 여겨지면서 내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첨엔 불뚝 했다가도 인차 사그러질뿐아니라 곧 그런 처사를 뉘우치기까지 하는 이런 나약성이 바로 자기의 약점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저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나였다. 《그래, 뭘 더 알아야겠다는거요?》 《네?》 반짝 생기를 뿜는 처녀의 눈동자가 보이는듯 했다. 《사실 전 고선생님의 빨찌산투쟁을 소개하는 글에서 인간의 의지와 량심이 무엇이고 그것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것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그러자니 고선생님과는 대조되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알아야겠단 말입니다. 그렇게 산을 내린 기태가 그후엔 어떻게 되였는지 하는것도…》 글을 쓰는 사람의 륙감으로 나는 그가 자기 글의 방향을 인간의 량심과 의지에 대한 호상관계로 잡은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그러자니 선생과 기태의 운명을 대조시키려는것도 응당하다는걸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그 두사람의 운명에 대한 구체적인 조명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실하게 또 생동하게 보여줄수 있었다. 얄밉게도 처녀가 자기 기사의 종자를 옳게 잡았다는 판단을 밀어던질수가 없었는데 그럴수록 그가 괘씸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내 대견하기도 하였다. 나는 어쩔수없이 처녀기자의 취재를 응낙할수밖에 없는 처지라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은옥경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이 어째서 기분 나빠하는지 압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때문에 오늘은 옆에 앉아 얌전하게 듣기만 하겠습니다. 그럼 되지요?》 저도 모르게 웃지 않을수 없었다. 겉보기엔 얌전해보이지만 일단 무엇에 몰두하기만 하면 남달리 극성스러운 처녀라는것을 이미 알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을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나무랄수는 없었다. (이거 일이 점점 맹랑하게 되는걸.) 《그러니… 꼭 같이 가겠다는거구만. 그래 지금 어데서 전화를 거오?》 환성을 터뜨린 처녀는 창작실에서 멀지 않은 공중전화소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미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찾아온 옥경이였던것이다. 2
《정말 미안합니다.》 외국어책방앞에서 기다리고있던 은옥경이 취재수첩을 가슴에 안은채 어쩔바를 몰라했다. 얼굴은 용서를 바라는 어줍은 표정이였으나 옷은 연한 보라빛방울무늬가 아롱진 활짝 개인 달린옷차림이였다. 그 뚜렷한 대조가 공손하기는 하면서도 지꿎은데가 있는 처녀의 성격과 어울리는것 같았다. 《미안하기야 뭘.》 이젠 될수록 태연한척이라도 할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가 스스로도 구차했다. 속이 편안치 않아 절로 보폭이 커졌지만 그것도 꽤나 바쁜척 하는것으로 위장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일은 늘 자기가 저질러놓고도 뒤에서는 짜장 못마땅해하는 미련한 자신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마른 기침이 컹 하고 터졌다. 옆에서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는 처녀는 아직도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 몰라하는 태도였다. 그런 처녀의 모습을 보느라니 내가 글감을 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으려는 속심을 드러낸 속물로 보인듯 싶어 또 속이 꼬였다. 궤도전차가 요란한 차바퀴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지하건늠길에서 총알처럼 뛰여나온 소년이 나하고 부딪칠번 하고는 머리를 굽석하며 소리쳤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는것 같았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생각나는대로 물어본 말이였다. 《25일이예요. 수요일.》 《그런데 옥경동문 왜 합숙생활을 하오?》 말해놓고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오늘 날자와 합숙생활을 하고있는 처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녀성들과의 교제가 서툰 자신의 뚝한 태도며 아직도 내앞에서 주눅이 들어하는 처녀의 옹색스러운 몸가짐에 웬일인지 탕개가 풀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집이 지방이 아닙니까.》 집이 지방에 있으면 누구나 합숙생활을 하는것이 응당하다는 투였다. 《지방 어딘데?》 《온천이예요. 평남온천… 부모님이랑 동생들은 아직 다 거기에 있어요. 저 역시 그곳 제염소에서 일하다가 대학추천을 받았습니다.》 《오- 그렇소?》 나는 마치 꽤나 알고싶던 비밀이라도 알아낸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고나니 더 할말이 없었다. 두사람이 그것도 남자와 녀자가 화제도 없이 걷는다는것이 얼마나 따분한지 새삼스럽게 절감하게 되는 심정이였다. 《선생님.》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처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조심스럽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나는 처녀가 나의 기분상태를 가늠할수 없어 주저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왜 그러오?》 《저… 선생님은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게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런 물음이기도 했거니와 무엇을 념두에 두고 묻는 말인지 가늠이 가지 않아 나는 《글쎄》 하고 얼버무릴수 밖에 없었다. 모르긴 해도 필경 어제 고선생한테서 들은 빨찌산생활에 대한 어떤 소감이리라. 자긴 신념이나 량심, 바로 그런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다는걸 새롭게 느꼈노라고… 《전 소금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소금?》 저도 모르게 되뇌인 소리였다. 나는 처녀가 한때 소금밭에서 일했다는것이 상기됐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게 소금이라고 하는 말은 우정 지어내거나 아니면 자기의 옹색한 립장을 굼때보려는 처녀다운 재치에서 출발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걸음을 늦추며 그를 마주보기까지 했다. 《우선 소금은 공업과 농업을 비롯해서 인민경제 여러 부문의 기본원료로 쓰일뿐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없어서는 안될 첫째가는 필수품이 아닙니까. 화학, 식료, 의학부문도 다 소금을 바탕으로 하고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소금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는것이예요. 해빛, 그것도 뜨거운 태양의 열에 의해서만 졸여진 소금은 그 어떤 세균에도 견딜뿐더러 온도나 환경의 변화에도 절대 자기의 속성을 버리지 않으니까요. 전 소금밭에서 일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것도 소금이고 가장 깨끗한것도 소금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가장 귀중한건 언제나 가장 깨끗한 법이라는 제나름의 진리를 찾아냈어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염공이였던 자기의 옛 직업을 남다른 긍지에 넘쳐 추억하는 처녀의 모습을 나는 새삼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가장 귀중한건 언제나 가장 깨끗한 법이다…》 소금밭에서 일해본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생활의 교훈이라는 짐작이 들면서 그 귀중하고 깨끗한 소금을 사람에 비기면 바로 그가 지니고있는 신념이나 량심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옥경이도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말을 했으리라. 《선생님, 전 사실 기태가 산을 내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컥 했어요. 제발 그것이 거짓말이였으면 하고 생각되면서 믿고싶지 않더군요. 정말 그가 변절했을가요? 그처럼 용감하던 사람이, 게다가 소대를 이끌던 지휘관이 어쩌면… 승옥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가요. 또 희애는?… 난 그들 두사람은 기태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리라고 믿어요. 솔직히 말해서 녀자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한번 먹은 맘을 좀처럼 굽히지 않거든요.》 녀성우월론이였다. 물론 그렇게도 말할수 있으리라 생각되면서도 나의 입에서는 불쑥 다른 말이 튀여나왔다. 《녀자의 마음이란 물결우의 갈대라는 노래가 있소. 그러니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미리 점치지 맙시다.》 《그러니까 믿지 못하겠다는겁니까?》 《믿고싶긴 하지만…》 내가 말도 맺기 전에 옥경은 머리를 돌리며 평양역사의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흔히 녀자들이 자기 마음속 생각을 털어놓을가 말가 망설일 때, 더우기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킬 시간적여유가 있을가 없을가 하고 따져볼 때의 행동이였다. 그러나 취재수첩을 가슴에 안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품이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기로 결심한것 같았다. 《선생님심정은 알만 합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너무 감상적이라고 여길수도 있겠지만 한번 들어보겠습니까?》 처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사색적이고 진지한것이였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보는듯 눈을 가늘게 쪼프리며 조용히 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제나름의 의지와 충동이라는 내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간혹 서로 혼탁되여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의지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충동은 그저 일시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지요. 그러나 이 량자의 구분이 명백치 않기때문에 일정한 기간까지는 충동이 의지로 보이기도 한단 말입니다. 기태도 바로 그런 충동에만 이끌려 살다나니 마침내 자기를 지탱해내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겁니다. 어떻습니까? 유치한 생각일가요?》 처녀가 기태는 물론 승옥이나 희애의 일로 하여 온밤 생각해온것을 털어놓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의지와 충동의 한계를 갈라주는 시약은 있다는겁니다. 시약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계를 갈라주는 시약은 바로 시련이라고 봅니다.》 《어쩐지 좀 설득력이 적구만. 모호하기도 하고…》 《저도 그렇다는걸 느끼고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앞에서 제 생각을 정리해보는거예요. 도움도 바라면서… 사실 기태의 운명을 두고 그가 고선생님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리유가 어데 있을가 하고 생각하던 끝에… 물론 고선생님 이야기를 마저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기태가 산을 내린것은 그가 투쟁을 어떤 충동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해온 결과라고 보지 않을수 없다는거예요. 우리가 신념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그에게 부족했기때문인데 그건 바로 그에게 참된 사랑이 없은탓이 아닐가요? 하지만 승옥이나 희애는 동지들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바쳤고 어린 애기까지 서슴없이… 정말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난 승옥이나 희애는 그처럼 뜨거운 사랑을 지닌 녀자니만큼 절대로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이라…》 《그래요. 사랑이예요. 동지들에 대한, 또 조국에 대한.》 한결 밝아진 처녀의 목소리는 자기 주장에 대한 강조때문이라기보다 분명 내가 자기 말에 끌려드는것이 반가와서였다. 《오래동안 해빛에 정제된 소금과는 달리 강철은 1,800도의 고열에서만 불순물과 분리됩니다. 가열기를 거쳐 용해기에 이르면 용금상태로 되긴 하지만 정련기에 가서야 명백히 갈라지게 된단 말입니다. 제가 황철에서 취재하면서 배운 지식, 아니 상식이지만 기태는 그 정련기에 슬라크로 변하고말았으나 승옥이나 희애는 끝까지 강철로 남아 있으리라는거예요. 그건 그들이 품고있는 진정이 기태보다 훨씬 순도가 높기때문이고 또 그들이 지닌 사랑이 정련기의 그 고온보다는 더 뜨거울거라고 생각되기때문입니다.》 나는 강철의 용융점과 사랑의 온도를 결부시키는 처녀의 생각이 어딘가 일면적이라는것을 설명할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두둔해 주고싶었다. 고선생과 기태, 또한 기태와 승옥이며 희애를 강철과 슬라크로 대조시켜 신념과 의지가 어떻게 지켜지고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제나름대로 해부하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제 와서야 은옥경이가 어떻게 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생활적이고 철학적인 시들을 써낼수 있었는지 리해되는듯 했다. 발그레하게 물들여진 처녀의 상기된 얼굴을 보느라니 그가 더없이 발랄하고 열정적이라는것을, 또 남달리 영특하기까지 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난 동무가 부럽구만. 벌써 글이 다 됐으니 말이요.》 《아닙니다. 아직 희애나 승옥이 또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거야 뻔하지 않겠소. 이미 빨찌산때의 경험이 보여준것처럼 이 길이냐 아니면 저 길이냐 하는것이 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개로 되느냐 하는 갈림길인데야…》 내가 롱조로 말한것은 옥경이의 말을 들으며 내가 쓰게 될 작품을 생각해 보고싶었기때문이였다. 옥경이의 질문이나 의문이, 또 그의 믿음이 곧 내 작품에서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던것이다. 그렇지만 옥경은 뜻밖인듯 했다. 《어쩌면…》 놀라와하면서도 어딘가 유감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실은 어제 그 문제를 놓고 한동무와 토론해봤는데 그 동무도 그렇게 말했어요. 이젠 그들의 운명이 명백하다고 말이예요. 그러나 희애라는 녀자만은 아직 모르겠다고 하잖겠어요. 승옥이는 자기의 사랑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보여줬지만 희애의 사랑은 아직 사춘기의 충동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라나요. 진짜 사랑을 알려면 아직 더 시련을 겪어봐야 한다는거예요. 어쩌면 나이를 기준삼아 사랑의 진가를 저울질할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분석하면 로인들의 사랑이야말로 진짜고 젊은이들, 사춘기의 사랑은 다 가짜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철학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론쟁을 하다가 다투기까지…》 처녀의 웃는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제 와선 내가 어째서 이처럼 사색적이면서도 영민한 처녀를 취재에서 제외시키려고 했댔는지 어이가 없기도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취재에 끼여들었던 이 은옥경이가 차차 나의 생활, 나의 작품속에까지 뛰여들어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것을 나는 미처 알지도 못했고 또 알수도 없었던것이다. 드디여 거대한 고려호텔의 쌍둥이건물이 눈앞에 다가왔다. 《선생님!》 은옥경이 방긋 웃는 얼굴로 호텔쪽을 가리켜보였다. 《저기 고선생님이 나와 계시는군요.》 아니나다를가 선생이 호텔현관앞에서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고있었다. 우리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알수 없어 네거리와 역사쪽을 번갈아가며 돌아보고있었다. 마침내 우리를 발견한 선생이 손을 들어보이면서 활달한 걸음으로 마주 걸어왔다. 3
부대가 분산투쟁으로 넘어간 후부터 소부대들은 아무런 련계도 통일적인 지휘도 받음이 없이 저마끔 흩어져 활동하다가 서서히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리군 했다. 산을 내리면 참혹한 죽음만이 차례진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이들이여서 매일같이 추격에 시달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어떻게 하든 끝까지 싸우려고 정처없이 옮겨다녔다. 1956년 봄이였다. 춘삼월이라지만 지리산에는 때아닌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눈에 빠졌다. 지난 겨울을 지리산에서 보낸 이전 전북유격대 《복수》련대의 마지막대원들은 다시 고향가까운 곳으로 이동하고있었다. 여전히 삼진이라고 불리우는 고광이 그들의 지휘관이였다. 그는 지리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리산에 봄이 오기만 하면 적들이 마지막한사람까지 잡아내려고 미친듯이 달려들군 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대원들모두가 죽어도 고향가까이 가서 죽기를 원하는 심정도 그런 결심을 내리게 한 중요한 원인이였다. 광이는 17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지리산을 내려 먼저 곡성군 고달면 뒤쪽의 천마산에 이를 생각이였다. 그곳에서 섬진강을 건느면 그들이 싸우던 고장이여서 행군하기는 어렵지 않을것이고 그러느라면 추위도 풀리고 보급사업도 한결 용이해 질것이기때문이였다. 모든 대원들이 전적으로 그를 믿고 그에게 의거했다. 그새 광이는 애돼보이던 얼굴이 강의한 사나이답게 의젓해지고 몸집도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진데다가 일단 결심하면 끝까지 내미는 성격으로 하여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단호하고 결패있는 지휘관이였다. 물론 17명이라는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바로 그들이 《복수》련대를 대표하여 가장 용감하게 죽음도 두렴없이 싸워온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바로 광이를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선출했던것이다. 《우린 삼진동무만 믿소. 대장이 되여주시우.》 《삼진동무 아니문 누가 부대를 지휘하겠소!》 《옳아요. 삼진동무가 적임자예요.》 그때 광이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전투경험도 풍부한 그들에게 의미있는 말을 했다. 《내 같은기 워찌 대장을 제대루 하겠습니까. 허지만 믿어주니 있는 힘껏 애써 보겠어요. 하지만 한가지만 약속합시다. 누구든 규률을 어기믄 가차없이 처벌한다는걸 말입니다. 대신 대장이 잘못하문 그를 서슴없이 총살하시우. 절대 기태처럼 그냥 돌아서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언제 한번 발편잠을 자본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무거운 생각에 잠겨 대오의 앞장에서 허리치는 눈길을 헤치고있었다. 무엇보다도 앞날에 대한 근심이였다. 언젠가는 자기들모두가 죽게 되리라는것을 그도 알고있었다. 세상을 뒤흔들던 지리산빨찌산이 그렇게 되였고 전북유격대도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지리산에 남아있는, 지금까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부 사람들과 자기의 대원들 열일곱명이 마지막빨찌산들일수도 있었다. 그는 결코 자기가 죽는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자기가 책임지고있는 대원들, 자기만을 믿고있는 그들을 죽음터로 내몰가봐 그게 걱정이였고 특히 승옥이나 희애와 같은 녀대원들이 적들에게 체포되여 곤욕을 당하거나 무참히 학살된다는것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그들의 생사가 바로 자기한테 달려있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운 일이였던것이다. 날이 어두워서야 섬진강기슭에 이르렀다. 그런데 척후병으로 앞세웠던 키다리대원이 낯빛이 새파래서 돌아왔다. 《야단났당께. 강기슭에 <토벌대>가 한벌 쭉 깔렸는디 보통놈들이 아니여. 그래 절간에 들어가 중한테 물어봤지라. 긍께 그가 하는 말이 뭔 일인지 오늘 아침에 군대와 경찰이 갑자기 이 강가에 들이닥칫대여.》 《군대와 경찰이?》 광이는 예견했던 일이 너무도 일찌기 다가온것이라고 짐작했다. 매해 봄과 함께 지리산으로 달려들군 하던 놈들이 이 해엔 버들가지의 망울도 부풀기 전에 《토벌대》의 포화를 들씌우려는것이였다. 악착한 놈들은 지리산에 남았거나 다른 곳에서 피해온 빨찌산들을 이해 봄엔 흔적도 없이 쓸어버릴 심산이 분명했다. 바로 이 섬진강여울목이 지리산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였던것이다. 광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둘러선 대원들에게 말했다. 《다른 길은 없소. 돌아서거나 우회할것이 아니라 곧바로 보초소를 뚫고 강을 건너야 하오. 그래야 살아날수 있소. 모두 날 따르시오. 소리내지 말구.》 강기슭에 친 천막들과 화토불들 가까이 이른 그는 한동안 적정을 감시하고나서 화토불사이를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그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것이다. 강기슭엔 바람이 세찼다. 보초병놈들도 추위를 참을수 없는지 화토불곁을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산판과는 달리 바람이 눈을 몽땅 휩쓸어가서 어디 몸을 숨길만 한 곳도 없었다. 그래도 사위를 분간할수 없는 어둠이 다행이였다. 그들은 배낭속에서 헐고 누덕누덕해진 하불(백포)을 꺼내 몸을 감싼 후 한덩어리로 뭉쳐 소리없이 전진해갔다. 맨 앞에는 고광이, 맨 뒤에는 승옥이가 희애와 나란히 기여가고있었다. 손이 얼다 못해 마비상태에 이르렀으나 손톱으로 언땅을 허비며 한치한치 기여갔다. 눈가루가 사정없이 눈을 때리고 코에 쓸어들어 기침이 나는것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무서운 역경을 한두번만 헤쳐오지 않은 대원들이여서 눈을 씹고 눈더미에 코를 박으면서도 기어이 참아냈다. 갑자기 가까이에 있는 화토불에서 적병놈이 소리쳤다. 《여, 문일병! 마른 삭정이를 줏어와. 불이 당장 죽어간당께.》 아무 대답이 없자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문일병! 여, 멍게!》 광이는 전진을 멈추고 다시 적들의 동정을 살폈다. 《예, 여깃심더. 선임하사님! 땔감을 구해오라 이 말이제요.》 《이 말이 뭐야, 새꺄, 명령이다, 명령.》 엠원소총을 어깨에 멘 적병이 어슬렁거리며 대원들이 엎드려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발길질을 툭툭 해대는 꼴이 마른 삭정이를 찾는게 분명했다. 광이는 숨을 죽인채 찬 바람때문에 찔끔거리는 눈을 감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그놈을 주시했다. 문일병인지 멍겐지 하는 놈이 바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인제는 부득불 싸움을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대뜸 그는 칼빈총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적병은 혀를 깨무는듯 한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굳어져버렸다. 《빠, 빠-》 《조용해!》 놈의 턱밑에 총구를 바싹 갖다댄 광이는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꼼짝 말앗, 소리치면 죽인다.》 놈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런데 화토불쪽에서 무슨 낌새를 챈것 같았다. 《여, 왜 그래? 뭔 소리여?!》 《아무것도 아임더, 선임하사님!》 그자가 엉겁결에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고광이 제때에 대답할 말을 귀띔해주었다. 《오줌을 눈다구 해!》 저쪽에서 재차 따져물었다. 《뭐라?》 《오줌을 싸는기라예.》 그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지괴춤부터 풀어헤쳤다. 삐죽한 주걱턱에 기다란 코수염이 듬성듬성 달린게 과연 멍게로 불리울만 한 놈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온몸을 떨기만 할뿐 한방울도 짜내지 못하고있었다. 만약을 생각해서 광이는 다시 오금을 박았다. 《소리쳤다간 너들 몽땅 몰살이다. 알겄지?》 이번엔 한손에 든 수류탄을 흔들어보였다. 《예, 예.》 드디여 그자가 쭈르르 더운 물을 내쏘았다. 화토불에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죽어가는 불을 살리는지 푸푸거리기만 했다. 《앞으로!-》 모두 바지괴춤을 쥐고있는 적병의 앞을 재빨리 기여나갔다. 17명전체가 앞을 지나도록 적병은 돌아서지 않았다. 인제는 그자의 입이 얼어붙기만을 기대할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자는 마른 삭정이를 줏는체 하면서 화토불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했는지 알수 없으나 위험은 지나간듯 했다. 드디여 얼음과 눈에 덮인 강에 기여들기 시작했다. 광이는 제발 아무 소동도 없었으면 하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얇은 얼음장이 여러사람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쩍- 갈라지면서 풍덩 풍덩! 빠지는 소리가 요란했던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차디찬 물속에 빠지는 순간 《어이쿠!》 하는 외마디 비명까지 질러댔다. 화토불가의 적병들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누구얏!》 광이는 그쪽을 겨누며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강을 건느시오. 내가 엄호하겠소.》 미리 준비하고있던 수류탄을 화토불가로 힘껏 내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터졌다. 삭정이를 줏던 놈이 멀리 정신없이 내빼는것이 보였으나 그놈은 내쳐두고 두번째 수류탄을 천막쪽으로 던졌다. 창황중에도 부득이한 경우에만 총을 쏘리라고 생각했다. 될수록 적들이 어데서 날아온 수류탄인지 알수 없게 하려는것이였다. 《대장동무, 여기 수류탄이 있어요.》 돌아보니 승옥이와 함께 희애가 엎드려있었다. 순간 광이는 승옥이와 희애를 동시에 물속에 처넣으며 부르짖었다. 《누가 여기 남으라구 했는겨. 넨장!》 다음순간 다른 한 대원이 적들의 두번째 천막으로 달려가며 수류탄을 뿌렸다. (조금만 견디자, 조금만, 다들 제발 강만 무사히 건넜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사선을 함께 헤쳐온 대원들은 대장만 남기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였으나 지휘관을 위험에서 구출하는것도 어길수 없는 빨찌산의 규률이고 철칙이라는것을 가슴에 새기고있었다. 박승옥이와 윤희애 그리고 세명의 용감한 대원들이 광이와 함께 남아있었다. 그들은 휙 휙 휘파람같은 소리를 지르며 놈들을 쓰러눕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박처럼 쏟아지는 놈들의 총탄이 한사람 또 한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결국 두명의 대원들이 강기슭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승옥이는 다리에 부상을 당했다. 광이가 그를 업자 뒤에서 희애가 부축해주며 세사람은 여울목을 건너 칼바람이 세찬 산기슭으로 걸음을 다우쳤다. 등에 업힌 승옥이가 고통을 참으며 속삭였다. 《대장동무, 날 내려놔유. 이러다간 우리가 다 잘못될수 있어유…》 《가만 있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게 빨찌산인겨. 암말 말구 잠자쿠 있는겨.》 죽음에 처한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제 아들을 바친 승옥이기에 더 살아야만 했다.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살려내야 할 승옥이였던것이다. 《제발 내려놔유.》 승옥이는 자기가 더는 살지 못하리라고 느끼고있는것 같았다. 《삼진동무! 동문… 내 마지막부탁 들어주겠지유?》 《마지막이란기 무엇이여? 쓸데없는 말 말구…》
《아니 한마디만… 희애말이유. 잘 도와주어유. 끝까지 사랑해… 희앤 김장군님 계시는 북으로 가고파 했는디 꼭 그렇게 될거라유. 그날까지 삼진동무가 옆에서 도와야 해유. 삼진동무만 있으문 희앤 무섭지도 않구 외롭지도 않데여. 무슨 뜻인지 알겠지유?》 그 말이 광이에게 준 충격은 컸다. 《복수》련대의 소문난 미인이며 견결한 당원이고 녀걸이기도 한 박승옥이는 사랑하는 남편이 살아있는지 희생됐는지 하는것도 알지 못하고 두해째 싸워오고있었다. 그런데도 자기와 희애의 사랑을 위해 그처럼 마음써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승옥이를 부축하던 희애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승옥이의 말이 자기의 진정을 표현한것임을, 그래서 자기가 할말을 대신해주었다는 그 고마움을 암시하는것이였다. 승옥이가 말한것처럼 희애는 광이만 옆에 있으면 그 무엇도 지어는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강을 먼저 건너간 대원들을 만난것은 새벽무렵이였다. 얼음장이 둥둥 떠내리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희생된 전우들을 묵도했다. 이렇게 봉분도 없이, 조총사격도 없이 떠나보낸 전우들이 얼마였던가! 때로는 이름도 기억할새없이 만나자 영영 헤여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복수》련대의 마지막 15명 대원들은 그때부터 련 4일간 적들의 검질긴 추격을 피해 수백리를 달렸다. 승옥이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몸부림치며 자기를 쏘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숨이 질 때까지 업고 달렸다. 그 4일간 또 다섯명이 쓰러졌다. 인제는 10명만 남았다. 광이는 출혈이 심하고 운신하기조차 힘들어하는 부상자들이였으나 9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향했다. (《로동무》를 찾아가자.) 한때 지리산빨찌산과 《남부군》에서 유명했던 전투지휘관 《로동무》가 뿔뿔이 흩어져있는 대원들을 규합하여 련대규모의 덕유산지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돌고있었던것이다. 지리산빨찌산의 리현상사령관도 초기엔 《로동무》로 알려져 있었던것만큼 여러곳에서 그 소문을 듣고 덕유산으로 모여들고있다고 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는것으로 하여 어딘가 미심쩍기도 했지만 위급한 정황은 그 길을 택할수밖에 없게 했던것이다. 광이는 마지막희망을 애오라지 그 《로동무》와 덕유산지대에 걸고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서운 파멸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동무들, 수고했소. 난 인민군대출신이요. 그런데 련대가 온다기에 대단한줄 알았는데 겨우 한개 분대군그래.》 물날은 인민군병사복에 가죽장화를 신은 안내자가 광이에게 하는 말이였다. 《우린 열명이지만 어쨌든 련대요.》 광이의 말에 가죽장화는 버룩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련대라… 어쨌든 장하오. 그런데 부상자들이 많구만. 여 동무들, 어서 한사람씩 부축해야지.》 광이는 그가 신고있는 가죽장화를 보면서 이마살을 찡그렸다. 아직까지 그런 멋진 장화를 신은 유격대는 본적이 없었던것이다. 괜히 손에 들고있던 회초리로 비탈면의 바위를 후려치던 가죽장화가 시선을 곧 산중턱의 숯구이막으로 옮겼다. 《저기 우리 지대장동무가 있으니 어서 만나보시오.》 《로동무가?》 이제까지 한 고생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부대를 만났다는 기쁨만이 가슴에 밀물처럼 쓸어들었다.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던것처럼 여러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숯구이막에서 미식보총을 메고 마주나왔다. 그들의 행동이 수상쩍어 다시 가죽장화에게 머리를 돌렸을 때였다. 광이는 자기를 향해 겨누어져있는 권총을 보았던것이다. 《대장동무!-》 누군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돌아보니 어느새 두팔을 결박당한 희애가 째지는듯 한 소리로 웨치고있었다. 《놈들이예요!-》 광이는 어깨에 메고있던 칼빈총을 날쌔게 벗어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둔중한 타격이 그의 머리에 가해졌다. 일시에 눈앞에서 무수한 별찌들이 아물거리며 맴돌이쳤다. 《삼진동무!-》 먼 하늘가에서 울려오는듯한 웨침소리를 들으며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묵직한 장화발이 그의 목덜미를 짓누르고 다른 군화발은 옆구리에 드센 타격을 가했다. 광이는 땅을 허비며 몸부림쳤다. (이 일을 어떡하문 좋은가? 내가 눈이 멀었지. 대장이라는기 어디로 대원들을 끌구 왔는가?… 아 동무들, 나를 총살해주. 이 미물같은 광이를 릉지처참하란 말여!-) 다음순간 그는 벌떡 뛰쳐일어나 능글스럽게 웃고있는 가죽장화의 코잔등을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무섭게 쥐여박고 그것도 모자라 그자의 피에 젖은 상판을 손톱으로 찢어놓았다. 기겁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자가 나가너부러지자 다른 놈이 또다시 권총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광이는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도 자기에게로 달려온 희애가 온몸으로 날아드는 구두발을 막으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만 둬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광이는 혼신의 힘을 모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기를 끌어 안는 희애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희애, 무슨 꼴이여? 개들한테 사정하다니?… 안돼, 그라문 안돼여!》 희애는 광이의 피투성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알겠어요. 대장동무.》 《울지두 말어. 놈들이 보는데선 눈물도 보이문 안되는거라. 알겄어?》 희애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이렇게 웨치는 광이의 피범벅이 된 얼굴에도 눈물이 줄지어 흐르고있었다. 그것은 그저 눈물이 아니라 가슴찢기는 원한과 가실길 없는 분통이 그의 얼굴에 시꺼먼 그을음처럼 얼기설기 새겨지는것이였다. 얼마후 놈들은 대원들을 짐짝처럼 스리쿼다에 올려던지고 어데론가 실어갔다. 희애와 부상당한 승옥이는 그 가죽장화를 신은 놈이 따로 찦차에 태웠다. 그들은 헌병대에서 먼저 반죽음을 당하고난 다음에야 남원검찰청으로 이송되였던것이다. 4
《1956년 7월, 우리 일행은 다시 완행렬차에 실려 전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였어요.》 여기까지 말한 고선생은 무엇인가 쓰라린 추억에 잠긴듯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웬일인지 그는 놈들에게서 지독한 고문을 당하던 이야기는 피하려고 애쓰는것 같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러했다는것을 미리 말해두는바이다. 그럴만 한 사정이 있었다는것을 나는 후에야 알게 되였던것이다. 그날도 선생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듯 두눈을 가늘게 쪼프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참다못해 은옥경이 승옥이와 희애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되였는가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위 눌린 무서운 꿈에서 깨여난듯 두눈을 슴뻑이였다. 《희애말입니까?》 선생은 우리를 번갈아보다가 옥경이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길은 마치 《희애에 대해서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고 묻는듯 했다.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보인 옥경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승옥이와 희애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그걸 뛰여넘어 전주지방법원얘기로 넘어갔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때 있은 사실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차근차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옥경이만이 할수 있는 응석 비슷한 요구였으나 선생은 소리없는 웃음으로 대꾸했다. 《죄다 말해라, 차근차근 말해라, 마치 취재가 아니라 취조를 받고있는것 같네요. 허허!》 은옥경이가 입을 싸쥐고 고개를 숙이였다. 나는 무엇인가 짐작되는 바가 있어 오늘은 여기서 취재를 그칠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이 제일 괴로와하는 추억에 들어섰다는것을 느꼈기때문이였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오늘 취재에서 역시 거의나 도외시되고 있는 형편이였다. 발언권도 결정권도 없는 방청으로 밀려난 꼴이였다. 오늘은 옆에서 얌전하게 듣기만 하겠다고 한 약속은 벌써 감감 잊어버린듯 모든것을 자기의 의사와 요구대로 끌고가는 옥경이였던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이 그것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오히려 그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말로써 표현되지 않는 미세한것까지 죄다 가려듣고 되살리고 꼬집어내는 열렬한 청강생의 태도에 감동하고있는것 같았다. 《그에 대해선 한마디로 말하긴 어렵네요. 좀 복잡하다구 할가, 어쨌든 괴로운 추억이예요.》 《괴롭다니요? 그럼 혹시 … 희애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잘못됐다?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게 옳은것 같네요.》 뜻하지 않던 말에 나는 물론 은옥경이까지 헉 하고 숨을 들이그었다. 《잘못됐다면?…》 《죽었습니까?》 우리 두사람이 동시에 뱉은 말이였다. 그러자 선생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 지금도 그 녀자는 살아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희애는 아니예요. 감옥에서 형기를 채우기 전에 전향을 했으니까요.》 누군가가 우리를 천길 아득한 벼랑에서 떨어뜨린것 같은 심정이였다. 그게 사실이냐고 물을수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는것조차 두렵게만 생각되였던것이다. 그만큼 희애는 고선생뿐아니라 우리 두사람에게도 그중 가깝고 사랑스럽던 존재였기때문이였다. 은옥경은 머리를 떨군채 입술을 깨물고는 가슴속에 차있던 숨을 조심스레 내뿜었다. 흐느낌소리 같은것이 새여나오더니 손등으로 이마를 고인채 눈을 감았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접한 사람의 모습이였다. 고선생이 당황한 눈길로 나를 넘겨다보았다. 녀기자를 좀 진정시켜달라고 하는 의미의 눈길이였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격렬한 감정을 지닌 시인이고 보면 응당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도 생각이였지만 보다는 한번 보지도 못한 희애를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은 옥경이에게 더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되기때문이였다. 이런것이 바로 작가들에게 고유한 인간적애정이 아니겠는가!… 비록 시인이고 기자라 해도 옥경이는 소설가들처럼 자기의 주인공에게 뜨거운 애착을 품고 자기의 마음을 통채로 쏟아붓고 있는것이였다. 잠시후 옥경은 선생을 쳐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아 아니예요. 오히려 내가 놀라와요. 기자선생은 참 다심하시네요.》 우리는 잠시 흘러간 세월의 발자취를 더듬는데 심취되여있었다. 지나간 과거가 우리의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과거와 현재가 어느새 하나로 융합되여 버렸던것이다. 답답한 방안보다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이야기를 나누자는 선생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호텔베란다에 있는 걸상에로 자리를 옮겼다. 서늘한 10월의 가을바람이 베란다에 있는 화분수의 가지들을 부드럽게 흔들어대고있었다. 창광거리며 천리마거리가 모형사판처럼 한눈에 빤히 내려다 보이는데 까맣고 파란 승용차들은 딱정벌레가 되여 솔솔 기여다니였다. 《사실 난 희애가 전향했다는걸 전혀 몰랐습니다.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후에도 영 몰랐어요. 그땐 2심이 있을 때까지 하루 몇번씩 거듭되는 악착한 고문이 일과의 전부였응께요.》 … 어떻게 해서라도 초기에 《사상범》들을 전향시켜야 한다는 저들의 요구대로 갖가지 고문들을 다 들이댈 때였다. 물고문, 총대수정고문, 비행기고문 … 광이는 첫날에 벌써 이마가 터지고 팔까지 탈골되였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그때마다 희애에게 했던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 힘을 얻군 했던것이다. 《견디기 어려우믄 날 생각하그라. 나도 널 생각할란다. 그라믄 우린 힘을 합쳐 같이 싸우는기나 같은것잉께. 알겄지?》 사실 그때의 힘은 무엇보다도 희애였다. 산에서 지내던 생활이, 그가 자기에게 준 가지가지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그대로 힘이 되고 용기가 되였던것이다. 《난 이젠 살아도 삼진이하고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것이여.》 자기의 목을 그러안고 속삭이던 희애의 이 말은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던 그 불같은 감촉과 함께 더없는 투지를 용솟음치게 해주었던것이다. 확실히 사랑은 힘이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점검때 희애가 뒤로 다가섰다. 용수를 씌운 《사상범》들과 맨 머리바람의 잡범들을 따로 한줄씩 서게 하고는 인원검열이며 몸검사를 하군 했는데 그때가 서로 만날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변호사를 구했대여?》 입속으로 묻는 말이였다. 1심공판때 큰아버지와 함께 교도소에 온 어머니가 집에 있는 가산을 다 털어서라도 변호사만은 꼭 세우겠다고 했던것을 희애도 알고있었다. 변호사를 세운데야 당원인데다가 빨찌산의 《악질공비》가 어떻게 쉽사리 감형되랴만 그래도 집에서는 최선을 다하고있었다. 《걱정 마, 내가 도울것이여!》 무슨 말인가싶어 뒤돌아보았으나 용수에 가리운 희애의 표정은 알수 없었다. 다만 자긴 10년형이기때문에 2심판결에서 형량이 줄게 되리라는것을 내다보고 하는 말이라고 짐작했을뿐이였다. 2심공판에서 광이는 《무기》로, 15년형이던 승옥이는 10년으로, 희애는 또 8년형으로 감형되였다. 재판이 끝나자 곧 비전향수들만은 따로 6사로 이감됐는데 그때에는 벌써 희애가 없었다. 알고보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전향서를 쓰고 일반사로 옮겨간 후였던것이다. (희애가 전향하다니? 그럴수 없어, 절대로!) 하는 사실부정의 갈망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그랬댔구나. 너 역시…) 하는 현실인정의 절망으로 변해갔다. 이발을 부드득 갈며 저주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고통과 분노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처럼 철석같이 약속한 희애가 아니였던가. 그러던 희애가 어쩌면… 그때부터 광이는 희애에 대한 가슴 저미는 원한에 젖어 매일을 번민속에서 몸부림쳤다. 특히 그의 사랑스럽던 모습,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 형언할수 없는 추억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면서 이젠 그가 곁에 없다는, 또 그의 사랑이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옛일로 되여버렸다는 사실로 하여 가슴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던것이다. 《솔직히 말합니다만 그땐 정말…》 선생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기>로 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것쯤은 암것도 아니예요. 그렇게 버림받은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닌데다가 또 자기가 옳다는 확신도 있었응께요. 근데 앞날을 약속하다싶이 한 처녀한테서 배반 당하고보니 정말 견디기 어렵데요.》 얼마나 타격이 컸을것인가! 나는 그 당시 선생의 심정을 상상해 보았다. 희애에 대한 증오와 반감이 그 어떤 비통한 절망으로 뒤얽혀 저로써도 걷잡을수 없는 상태였으리라. 《그때 난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사람의 일생이 소망의 충족이 아니라 체념의 련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릴적부터 세상을 등지고 살아왔고 여늬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걸을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차례질건 앞으로도 오직 체념과 고통과 절망밖엔 없다, 이것이 바로 내 운명, 아니 나에 대한 이 세상의 <세례>다 하고 말입니다.》 (세례?) 피눈물속에서 체험한 사회와 인간에 대한 통절한 느낌으로부터 자기가 겪는 고통을 응당한것으로 여기며 그럴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그 의연함앞에서 나는 생각이 깊어졌다. 역시 다르구나. 자기의 감정으로 세상을 대하는게 아니라 세상을 자기의 의지로 굽어보는 사람이구나, 그러기에 강자가 되였구나 하는 경탄이 저절로 흉곽을 쳤다. 《저…》 은옥경이 취재수첩에서 눈길을 들었다. 《선생님은 그 녀자가 어째서 전향했다고 보십니까?》 옥경이로서는 희애를 그저 타매해버리고만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다문 한쪼각의 련민이라도 남겨두고 싶어 하는것 같았다. 《글쎄요. 녀자의 마음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도 있지만 난 무엇보다 그가 자기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깊이 새겨안지 못했다고 볼가요 그런 정신적준비가 부족했지요. 사상적변절이나 인간적변질은 다 자기의 삶에 대한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데로부터 출발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에 대한 믿음만은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느새 옥경이는 취재하는 기자의 립장이라기보다 같은 녀자의 처지에서 이 문제를 대하고있었다. 《지키다니?》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었다. 《혹시 그 녀자가 자기의 사랑만은 한사코 지키려 했을지도 모르겠소. 그렇지만 그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어데서 출발하는가를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거요. 난 결코 그를 타매하자는건 아니요. 내가 하고싶은 말은 희애라는 녀성이 사랑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서뿔리 행동하지 않았는가 하는거요. 내가 혹시 0.75평의 감방에서 추위와 기아, 팔다리가 꺾이우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30년, 40년을 견디여낼수 있다고 감히 말한다면 누구도 그걸 믿지 않을거요. 왜냐하면 그건 말로써 증명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것처럼 희애도 말로는 배반하지 않았다지만 그건 벌써 변명에 불과한거요.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은 바로 그가 바라는 일에 대한 지지와 공감으로부터 출발하는게 아니겠소. 그런데 상대가 생명을 내대면서까지 이룩하려고 애쓰는 일을 외면하면서 그를 사랑한다는게 말이 되오? 아까 옥경동무가 의지는 깨끗한 량심을 전제로 한다고 했는데 의지뿐아니라 사랑도 역시 깨끗한 량심을 전제로 하는거요. 내 생각엔 희애라는 녀성이 진정한 사랑은 철저히 사상적인 지향을 위주로 한 인간적인 감정의 결합이라는걸 몰랐거나 무시했다고 보오.》 《그럼 사랑도 사상으로 시작된다는겁니까?》 나를 바라보는 옥경은 마치 꽃이야 어디까지나 꽃이지 어떻게 나무로 될수 있느냐는듯 했는데 그 순진한 표정이 나를 아연케 했다. 고선생 역시 어리둥절한 눈길로 옥경이를 바라보았다. 《보건대 옥경동문 그 문제를 오늘 우리 환경과 같은 조건으로 생각하는것 같은데 우리 조건에서야 별로 문제될것이 없지. 누구나 사상적인 지향은 같기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이 전면에 나서니까. 그러나 남조선, 특히 적아간의 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지는 마당에서는 철저히 사상적인 각오가 기본이 아니겠소. 사상적인것이 바로 인간적인것을 규정하는데 희애는 그 반대였단 말이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소? 그러고보니 옥경동무도 희애처럼 사랑을 아주 단순하게 여기는 모양이구만.》 말하고보니 어딘가 점잖지 못한 표현같아 주저되였다. 모름지기 꽤 맵짠 대답이 튀여나오거나 아니면 나를 모욕하는겁니까 하는 야무진 시선이 정수리에 박힐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의외에도 옥경이는 부끄러운듯 제편에서 고개를 숙이였다. 그 모습은 마치도 네, 그래요. 전 바로 그런 처녀예요 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것 같기도 하고 제발 그런 비난은 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간청하는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얼른 선생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그 희애가 선생님을 인간적으로나마 배반하지 않았다는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6년만에 출옥한 그가 감옥을 나서는 길로 찾은 곳이 바로 우리 집이였네요. 자기를 한식구로 여겨달라면서 말입니다.》 《?!》 나는 물론 옥경이도 굳어지고말았다. 《감옥에 면회온 어머니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어머닌… 아니 그보다 그 전에…》 왜서인지 선생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또다시 한꺼번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라 두서를 잡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아무래도 희애에 대한 문제는 우리 집하고도 그렇지만 내 감옥생활과도 얽혀있으니까 그것만 따로 말하기가 어렵네요. 감옥생활과정은 물론 그후에 있은 일들을 이야기해야 그에 대한 문제도 바로 리해되리라고 보는데요.》 때를 기다리고 있은듯 옥경이가 재빨리 독촉했다. 《오늘은 시간도 있는데 감옥에서 겪은 일들을 마저 말씀해주세요. 예?》 옥경은 나에게도 묻는듯 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선생님도 어서 조르세요! 하는 재촉이였으나 나는 고선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수 없이 적당히 얼버무리였다. 《선생님이 피곤하지 않겠는지…》 선생은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니, 난 도리여 선생들이 따분하지 않겠는지 그게 걱정이예요.》 옥경이는 마치 옛말 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기쁘게, 명랑하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선생님! 우린 어쩐지 시간이 가는게 막 아깝기만 해요. 그렇지요. 선생님?》 나는 옥경이가 없었다면 오늘 취재가 얼마나 따분했을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화에도 예술이 필요하다고 할가, 아니 주고받는 마음의 정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옥경이가 충분히 보충해주고 있었던것이다. 나는 괜히 시계를 내려다 보는척하면서 이야기가 계속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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