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장
박인진은 요즘 심기가 매우 불쾌하였다. 도제인 창선이가 천도와 자기를 배반하고 유격대를 찾아가버린 사실만도 분통이 터져 속이 뒤집힐 지경인데 그 후환이 또한 막심했다. 박인진의 영향권에 있는 청년들이 유격대와 련계를 가지고있거나 유격대를 찾아갔다는것을 눈치챈 헌병대장겸 참사관이라는 에구찌 오도마쯔는 자기의 모독적인 요구가 거절당한 뒤에 보복적인 압력을 가했다. 경찰놈들은 그의 집 대문기둥에 순찰함을 만들어다 걸어놓고 하루 두번씩 감시순찰을 와서는 미친개눈으로 집안팎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그의 집에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또 그가 어디로 나다니는가를 조사했다. 그리고 박인진이 신거리를 벗어나 어디 갈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미리 자기네 장백경찰서에 행처와 시일을 통지하라고 강요했다. 놈들만 시끄럽게 굴며 울화를 돋군것은 아니였다. 창선이가 유격대로 들고뛴 그 화단이 있은 며칠후에는 사위를 잃은 지양개의 마령감이 허둥지둥 그의 집에 찾아들어 도와 덕과 의리를 중히 여긴다는 도정님을 믿고 행신하다가 딸신세를 망치고 패가망신만 당하게 되였다고 설분을 토했다. 마로인은 리창선이가 유격대를 찾아떠나기전에 풍산에서 써보낸 편지장을 들고 천방지축 달려온 참이였다. 생전 편지라는것을 받아본 일이 없는 자기 집에 난데없이 고운 꽃을 그려넣은 우표딱지가 붙은 봉투 한장이 날아들었길래 까막눈이 령감로친네와 외동딸은 하늘에서 내려준 길한 소식이라도 들었는가부다 하고 좋아하면서 그길로 언서깨나 뜯어읽을줄 안다는 자기 마을 까까머리한테 달려갔는데 몇줄짜리 짧은 글줄을 해득해본즉 사위될 사람이 밑도끝도없이 자기를 다시 못볼 사람으로 여기고 이미 약속돼있은 혼사는 없었던것으로 알아달라고 적어보낸 파혼장이였다는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 편지를 읽어준 까까머리가 마치 깨고소해하는듯 한 태도로 그 집 죽순이의 사주팔자를 보니 평생 짝없는 외기러기로 살아갈 팔자였는데 사주에 없는 팔자를 억지로 만들어보자고 하니 될턱이 있겠느냐고 그런 방정맞은 소리까지 했던 모양이다. 유격대에 붙잡혀간 선덕어른이 돌아오게 되면 올해안으로 불쌍한 죽순이한테 사주에 없다는 좋은 팔자를 기어이 타게 해주고 선덕어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해도 그런대로 해나 바꾸어 혼사를 치르리라 별러왔던 마로인네 집에서는 장돌뱅이 협잡군같은 사위 아닌 사위의 편지를 받고 어미딸의 울음판이 터지고말았다 한다. 《아무리 지금 세상이 험악하기로니 이런 험악한 일도 있소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험악한 사람인줄은 몰랐지오다. 도정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젊은이겠다, 사람도 대해보니 사근사근하구 인정있구 또 눈도 바로배긴 사람같이 뵈길래 이번에는 우리 죽순이한테는 도리여 과남한 사위감을 얻었구나 하구 로친네와 마주앉으면 그 소릴 하구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까지 했소다. 그게 다 도정님을 너무 믿은탓이오다. 도정님을 너무 믿구 우리 죽순의 팔자를 고쳐주자다가 팔자를 고쳐주기는 고사하구 이런 변을 당해 그 애를 잃게 됐소다. 그 맘 약한게 편지장에 적힌 소리를 전해듣더니 너무 억이 막혀 눈이 뒤집히며 거품을 물구 까무러쳤는데 살려낼것 같지 않소다. 우리 늙은것들이 그걸 하나 믿구 이날이때까지 산전수전 다 겪으며 험악한 세상을 억척같이 살아왔건만… 우리 늙은것들이 무슨 죄를 졌다구 도정님네 한울님은 이리도 모진 변을 내리오다? 예?…》 후들거리는 손으로 토스레덧저고리 소매를 들어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과 함께 눈굽에 낀 눈곱을 찍어내며 원망하고 설분하는 마로인앞에서 박인진은 변명할 말도 위안할 말도 없었다. 그 고약한놈이 자기도 버리고 천도도 버리고 마령감네 딸까지 버리고서 그렇게 훌쩍 달아나버릴줄은 자기도 몰랐노라는 말밖에는… 마누라가 지어올려온 저녁상도 받지 않고 떠나가는 마령감을 옹색스런 심정으로 바래주고나서 다시 집안에 들어온 박인진은 마령감이 버리고 간 창선의 편지가 눈에 뜨이자 두번다시 읽어 보지도 않고 발기발기 찢어 문밖에 던져버렸다. (이놈, 이 간사스러운 도적놈! 네놈이 나를 무슨 꼴로 만들어놓고 달아나? 천하에 인정사정 모르는 패덕한같으니라구. 네놈이 그렇게 못된짓을 저질러놓구 얼마나 잘되나 두구보자. 네놈이 꼭 천벌을 받을 날이 있으렸다.) 박인진은 마음속으로 지난날의 자기 제자였던 리창선에게 갖은 악담을 다 퍼부었다. (유격대라는건 또 뭐냐? 무슨 인민혁명군이라구? 백성들을 위해 혁명하는 군대라는 간판을 달았다는 사람들이 선덕어른같은 사람을 묶어가구 창선이 같은 착하구 똑똑한 사람을 꾀여가구 우리네 맘을 괴롭혀?) 그는 유격대에 대해서도 혼자속으로 이일 저일 두루 껴들어가지고 갖은 험담을 다 늘어놓았다. 성나서 독이 오를대로 오른 박인진은 리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자기의 배신자가 가서 가담한 유격대측에 대하여 험상스럽게 생각하려 하였어도 그의 주위에서 벌어지고있는 생활은 그에게 유격대에 대한 다른 표상을 제공했다. 왜놈들에게 두문불출 당하다싶이 되였던 박인진은 어느날 오래간만에 바깥 세상을 살펴볼셈으로 눈가래를 들고 금방 내린 눈을 치러 대문밖에 나왔다가 장작을 팔러 장백장마당으로 오는 약수동의 박로인을 만났다. 그런데 박로인과 함께 장작단들이 잔뜩 처실린 발구를 끌고 눈길을 가벼이 걸어오는 소가 전에 박로인이 유격대에 보냈노라고 말하던 소와 꼭같은 검정황소였다. 이마빡에 대원군시절의 커다란 엽전들을 번쩍거리며, 왈랑절랑 귀맛좋은 방울소리를 눈길에 흘리며 앞으로 다가오는 그 살집좋고 털에 기름기가 철철 흐르는 검정황소를 대한 박인진은 로인의 인사조차 건숭 받는둥 마는둥 해버리고 이게 웬 소냐고 묻기부터 했다. 《웬 소는 웬 소겠소다? 보시면서도 모르겠소다? 우리네 소지오다. 와―와―》 박로인은 멈춰세운 황소덜미를 자랑스럽게 쓸어주고 자기 수염도 내리쓸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형님네 소인줄이야 내가 몰라서 묻겠소? 저먼저 어디 보냈다던 소를 형님이 다시 몰고 나타났길래 어찌된 갈래판인지 몰라 묻는 소리외다.》 《허, 글쎄 보냈던 소가 하루밤 지나 이튿날새벽으루 도루 와서 우리 집 외양간에 매이질 않았겠소? 세상에 별 희한한 일두 다 있지…》 《보냈던 소가 도루 오다니? 이놈이 제발루 돌아왔던가요?》 《저 미물이 제발루야 올턱 있소?》 박로인은 곁들을 사람이 없나 하고 주위를 휘둘러 살피고나서 박인진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대고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유격대의 사령관어른께서 이 소를 되돌려보내라구 령하셨다우다.》 《유격대 사령관어른이요?》 《김장군님말이우. 소를 도루 끌고온 그 사람들의 말이 저놈을 나한테서 받아가지구 갔다가 장군님한테서 엄한 질책을 받았노라구 그러질 않겠소다? 아무렴 백성들이 소를 가져다 잡아먹으라고 떠밀어준다구 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는 유격대가 온 마을의 공동역축삼아 쓸 단매소를 받아다 잡아먹어서야 되겠느냐, 눈밑에서 주어온 시래기를 끓여서 저녁끼니를 에우도록 하구 소는 당장 임자를 찾아서 돌려드리도록 하라. 백성들이 소를 돌려받지 않더라도 외양간에 들여다 매주고 돌아오라.… 그렇게 엄명하시더라우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백성들의 사정을 깊이 보살펴 엄명을 떨구시니 수하의 군졸들이 그 엄명을 어길수 있겠소다? 그래 그밤으루 소를 도루 끌구 백여리길을 산에서 내려들왔소다.…》 박인진은 머리를 한방망이 얻어맞기라도 한듯 얼떨떨해졌다. 《내사 실루 흥부의 팔자를 탔지오다. 유격대에 시래기 몇오리밖에 보낸것 없이 하늘같이 크신 장군님의 덕을 입구 이런 일등 황소 또 한짝 공으루 생기지 않았소다? 그저 왜놈들을 몰아내자고 산에서 고생하며 싸우는 그 사람들을 돕는게 도리겠다 하는 생각만 가졌는데도 이런 복덩어리박통이 저절로 굴러들었구려. 허허… 이래두 도정님은 유격대를 함부루 돕지 않는게 좋겠다구 말하겠소다?》 무식하나 사리에 밝은 그 늙은이의 물음에 박인진은 역시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써 유격대와 유격대편으로 달아난 창선이에 대한 박인진의 반감이 사그라져버릴수 없었다. 가슴속에 깊이 뿌리박힌 창선이에 대한 고깝고 노여운 생각은 곧 그가 자기를 배신하도록 유혹했을 유격대에 대한 일종의 야릇한 원망심을 둔장질해올렸던것이다. 마누라의 입에 어쩌다 창선이라는 이름이 오르거나 창선이를 상기시켜주는 그 어떤 지난날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도 박인진은 버럭 소리질러 마누라의 말을 무참히 무질러버리기가 일쑤였다. 서른해나마 동고동락하며 살아오는 마음약한 마누라에게 그가 이토록 거칠게 굴기는 처음이였다. 그러한 박인진에게 천만뜻밖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던 소설날 저녁, 오십평생 거의나 어긴적 없는 천도교도의 관례대로 청수를 모셔놓고 주문을 외우고난 뒤끝이였다. 방금 모셨던 청수를 한모금 마시고 청수그릇을 물리는데 마당에서 인기척이 났다. 《선생님 계시오다?》 얼핏 듣기엔 창선의 목소리를 련상시키는 그런 목갈린듯 한 소리로 누군가 그를 찾았다. 《뉘시오?》 박인진은 문을 빠금히 열었다. 《도정님, 그간 안녕하셨소다?》 집안에서 흘러나가는 어슴푸레한 등잔불빛앞에 굽석 허리굽히며 다가드는 불청객의 얼굴을 기웃이 바라보던 박인진은 흠칫 놀라며 일순간 굳어져버렸다. 벙싯 웃음을 짓는 불청객의 아래웃 입술사이에서 반짝 빛나는 한쌍의 눈부신 이발을 본것이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문득 눈앞에 나타났어도 이 순간의 박인진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것이다. 자기를 배반하고 달아났던 사람답지 않게, 마치나 며칠간 품팔이를 나돌아다니다가 빈 제집을 거치지도 않고 여기부터 오군 했던 그전날처럼 천연스레 웃으며 앞에 서있는 창선이를 대한 박인진은 한참동안이나 흡뜬 눈으로 그를 머룽머룽 보고 서있기만 했다. 이 순간에는 반가움도 폭발적인 울분도 괘씸함도 느끼지 못하였다. 있을수 없는 일이 생겼기때문에 그저 놀랍기만 했다. 《자네 대체… 어…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한참만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간 말소리는 떠듬거렸다. 《지양개골에서 내려오는 걸음이오다.》 창선은 목에 둘러멨던 토목수건을 풀어 그것으로 덧저고리와 머리우에 앉은 눈을 투닥투닥 털었다. 《좀전에 여기 들어섰는데 집안에서 선생님이 심고하시는 말소리와 주문 외우시는 소리가 들리길래 청수모시는줄 알구 기다렸소다.》 (청수모시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를 버리고 달아난 놈이면 그걸 정중하게 대해? 유격대를 찾아 산에 가버린놈일것 같으면 예 나타나?…) 괴이하고 야릇한 창선의 출현과 그전이나 다름없이 친밀하고 천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얼떠름해진 박인진은 슬며시 막아섰던 문간에서 물러났다. 추운 북선지방과 장백지방 사람들의 관습대로 신을 신은채 문지방안에 들어선 창선은 도정의 눈치만 살피며 미처 인사도 못하고 있던 안주인에게 인사말을 하고 구들에 걸터앉아 눈버캐가 앉은 미투리와 행전을 벗느라고 끙끙 갑잘랐다. 다시는 받아주기는커녕 상대치도 않을 천하에 고약한놈이라고 수백번이나 마음속으로 험구했던 사람의 신발 벗는 모양을 뒤에서 지켜보고 선 박인진은 차츰 되살아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며 유격대를 찾아갔다던 사람이 어디서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다른데서 올데 있소다? 거기서 오우다.》 언 행전매듭이 풀리지 않아 여전히 등돌리고 앉아 언손질을 하고있는 창선은 자기의 대답에 박인진의 눈살이 금시 꼿꼿해지고 입술이 앙다물리는것을 보지 못했다. 《그럼 자네, 산엘 찾아갔다는 말이 실말인가?》 《정말이오다. 종리원장어른이 그렇단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소다? 도정님이 풍산엘 나가셨다구 하기에 겸사 풍산가서 아버지도 마지막 삼아 만나보구 도정님께도 말씀드리구 떠날 생각으로 풍산엘 나가니 도정님이 풍산왔다 금방 떠나셨다질 않겠소다? 그래 할수없이 압록강을 넘어와서 유격대를 찾아 백두산으루 들어가기전에 종리원장어른댁에 들려서 그렇단 사정말씀을 드려달라구 부탁했는데 원장어른을 상기 만나지 못했소다?》 장한 일을 하고난 사람이 성수나서 하는 말 같다. 박인진은 금시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놈!》 박인진은 불시에 발을 구들바닥에 탕 굴렀다. 《네놈이 그래 그렇게 장한 일을 했느냐?》 행전끝을 주무르던 리창선은 푸른 린광같이 희번뜩이는 박인진의 두눈을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도정님, 왜 그러십니까?》 박인진이 무엇때문에 성이 독같이 나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창선은 어안이 벙벙해있다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네놈이 그걸 몰라서 묻느냐? 이 고현놈!》 박인진은 온몸을 푸들푸들 떨며 또다시 발을 굴렀다. 방바닥이 울리고 구름노전에서 풀썩 일어난 구들먼지가 매캐하게 서려올랐다. 놀란 가슴을 움켜잡고 울상이 되여 령감을 쳐다보며 제발 소리 치진 말아 달라고 말없이 애원하던 마누라는 문득 유격대말이 오가는 이 심상치않은 싸움을 놈들이 엿들으면 큰 변이 나리라는 생각이 났던지 황황히 바깥으로 신발을 끌고 나갔다. 대문에 빗장을 지르고 거기서 망을 서자는것이였다. 《도정님이 이렇게 노여워하실줄은 몰랐소다.》 창선은 그제야 무슨 짐작이 간듯 곰살궂게 머리숙여 사죄의 뜻을 표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땐 도정님을 기다려서 말씀드리구 떠날 형편이 못됐소다. 석배하구 같이 압록강을 가만히 넘다가 수비대놈들에게 들켜서 석배는 총알을 맞구 그 자리에서 숨졌지, 내겐 뒤가 달렸지… 그래서 종리원장어른댁에 한시간이라도 더 지체할수 없었소다…》 《듣기 싫다.》 박인진은 그의 말을 꺾어버렸다. 《네놈이 나한테 말을 안하고 간건 상관도 없다. 네녀석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갔느냐 말이다?》 《제가 도정님을 왜 버려요? 도정님을 버렸으문사 이렇게 왔겠소다?》 《그래 네가 정 유격대로 간게 잘한 일이란 말이냐?》 리창선은 역시 자못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박인진을 쳐다보고있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유격대로 간게 잘못이라면 말씀하시오다.》 마치 그전날 글을 배우던 때와 같은 자세와 어조로 그는 말을 올렸다. 《도정님은 늘 저희들에게 너희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목숨바쳐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구 가르치지 않았소다? 저는 도정님이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대를 찾아가는게 잘못하는 일이라구 이렇게 성내구 꾸짖을줄을 몰랐소다.》 한동안 창선을 쏘아보고있던 박인진은 후렁후렁한 옷자락에서 바람소리를 내며 구들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선을 마주 대하기도 역겨운듯 비스듬히 돌아앉으며 올방자를 틀고 몸을 잔뜩 도사린 그는 서슬푸른 눈길로 창선이를 흘겨보았다. 그러다가 자기를 버리고 유격대로 달아난놈이 대체 무슨 까닭으로 자기한테 내려왔느냐고 따져물었다. 《네, 둬가지 긴한 일이 있소다.》 창선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저하고 같이 산에서 내려온분이 도정님을 만나봤으면 하오다.》 《산에서 같이 내려온 사람?》 《네, 유격대사령부에 계시는 분인데 바루 저를 깨우쳐 유격대에 찾아가도록 이끌어준 사람이오다.》 《자네를 내게서 꾀여간 사람? 그 사람이 대관절 나를 만나기는 왜 만나자는건가?》 《그건 모르겠소다. 그런데 만나서 해될 일은 하나도 없다고 그랬소다. 무슨 중요한 의논을 하자는것 같소다. 마음과 뜻을 합쳐 조선을 독립시킬 거사에 대한 의논이 아니겠는지…?》 유격대에 대하여 아는것이 너무나 적은 박인진은 그저 타성적으로 그들을 경원시해왔다. 그런데다 창선의 배신적소행으로하여 최근 얼마동안은 더더욱 멀리 해야 할 사람들로 여겨온 박인진이다. (유격대에서 내려온 사람과 만난다?!) 그러한 면담은 여태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제기되고 보니 우선 떠오르는것이 유격대에 붙잡혀간 김정보의 처지였다. 유격대사람들과 만났다가 김정보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될수도 있지 않는가? 창선이같이 알고있던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전혀 모르는 유격대사람과 만나는 경솔한 행위는 아무쪼록 삼가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들과 만나볼 의사가 없네. 좀더 생각을 해보겠네만…》 《그럼 생각해보시구 래일 답변을 주시오다. 가불간 도정님이 만나볼 뜻이 없더라도 이제 만나겐 될거우다.》 《내가 뜻이 없어도 만나게 될거란건 무슨 소린가?》 《좌우간 그렇게 될거라는 그저 그 말이우다.》 《그 말은 그만허게, 긴히 봐야 할 다른 일이란건 뭔지 그게나 말해보게.》 그 말이 떨어지자 창선은 갑작스럽게 어줍어하며 뒤덜미를 공연히 손바닥으로 어루쓸었다. 그러다가 깔고앉은 무릎앉음새를 고치며 머리를 굽석했다. 《저… 다름이 아니오다. 잔치를 하자고 그러오다.》 박인진은 눈을 치뜨고 길게 처져내린 량쪽귀를 움쭉거렸다. 몹시 놀랄 때면 그는 귀를 움쭉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잔치라니? 혼사는 이미 자네가 유격대에 들어가면서 파해버리다싶이 하지 않았나?》 《네, 그때문에 제 장군님앞에 불려가서 된 꾸지람을 받았소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인민혁명군은 우리 인민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군대인데 어느 한 인민의 가정에라도 불행을 안겨주는 사람이 유격대에 들어와 있을수 있겠는가, 결혼한다고 해서 조국광복을 위한 싸움을 잘못할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기도 잘 싸우고 안해까지 광복혁명을 위해 우리의 반일항전을 도와나서게 하면 그에서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저를 깨우쳐주시면서 당장 내려가서 잔치를 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시였소다. 제 그래서 이렇게 된 사정을 알려드리자구 지양개에 있는 처가를 거쳐 도정님한테까지 내려왔소다.》 50여평생의 생활상식으로써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박인진은 한동안 머리만 기웃거리며 덤덤히 앉아있었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약수동 박로인네 소를 되돌려보낸 일 역시 지금껏 잘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게 덕망있고 인품을 중히 여기는 유격대에서 김정보는 왜 붙잡아간것인가? 《한번 신의를 저버린 자네의 그 말을 나는 채 믿지 못하겠네만 자네 말대루 그렇다구 치세. 하지만 자네네 일을 주관해나섰던 선덕어른이 잡혀간채 감감한 형편에서 거 꽤 길사로 치러지겠나?》 《김정보어른이요? 그 어르신이 돌아온지 사날이나 지났다는데 도정님은 상기 모르우다?》 《그 어른이 돌아왔다니?!》 놀란 박인진은 얼결에 올방자를 풀고 무릎을 일으켜세웠다. 《그게 실말인가?》 《유격대에서 내려오구 또 지양개에도 들려오는 제가 그걸 모르겠소다? 믿어안지면 래일 직접 가서 만나보시우다.》 그렇게 말하는 창선의 티없이 맑은 눈을 본 박인진은 그 말만은 믿지 않을수 없었다. 《…내 그렇다면 래일 선덕어른을 만나보구 자네들의 일도 겸사 의논하겠네.》 그 대답을 받은 창선은 래일 처가집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저녀석의 말보다 유격대에 붙잡혀가서 한달나마 지내다 온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지. 물론 선덕어른은 자기를 잡아갔던 유격대에 대해서 좋은 말을 안할터이지만 유격대가 뭔지 직접 당해본 그 어른의 말을 들어보면 나대로 판단할바가 생기렸다.) 창선을 보내놓고 박인진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리창선이 박인진도정을 만난 이밤, 그와 함께 밀영에서 떠나왔던 권영벽은 여러해만에 찾은 자기 집에 가있었다. 백두산밀영에서 떠날 때만 하여도 권영벽은 자기 집에 들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하였다. 이번 걸음에 그에게는 몇가지 중요한 혁명과업이 지워져있었다. 첫째는 래일 해질무렵에 다시 만나기로 이미 약속되여있은 리제순이한테 가서 지난번에 조직한 조국광복회 장백현 신흥촌지회산하에 첫 청년분회조직을 내오는것이며 둘째는 지양개에 가서 불쌍한 외동딸에게 꽃피는 봄이 다시 깃들기를 바라는 마로인내외의 필생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는것이며, (그때문에 백두산밀영에서 리창선을 데리고 떠난것이다.) 셋째는 박인진도정과의 접촉이 이루어질수 있는 이번 기회에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에 광범히 인입하기 위하여 도정과의 제휴를 기대하시는 장군님의 편지를 전하는것이였다. 이 세가지 중대과업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리창선을 지양개의 마로인댁에 데려다놓고 그가 박인진도정에게 잔치일을 알리는 사이에 자기는 리제순에게 가서 일을 본 다음 다시 지양개에 와서 잔치도 치러주고 편지도 전할 작정을 했다. 그러나 대덕수방향으로 떨어졌다가 지양개쪽으로 향해가던 도중 뜻하지 않은 정황이 생기는 바람에 당초엔 예견치 않았던 자기집에 들릴수밖에 없었다. 권영벽은 어느 한 등판길을 지나가다가 홀연 이런데서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자기의 친형과 마주치게 되였던것이다. 될수록 날이 저물기전에 지양개마을에 가대자고 창선이와 함께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놓고있던 권영벽은 흰두루마기에 회색씨루벙거지를 쓰고 흔히 촌의원네들이 침통이랑 부황단지랑 넣어들고 다니군하는 작은 아마포주머니를 손에 든 어떤 늙은이를 모시고 앞에서 눈을 걷어차며 마주오고있는 더부룩한 구레나룻의 젊은이가 동만의 연길땅 동거우에서 몇해전에 헤여졌던 자기의 친형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웃마을에 사는 의원을 모시고 경황없이 집을 향해 오고있었던 그의 형도 역시 품팔이군행색에 품팔이군의 중태를 메고 길을 마주오는 두 젊은 사람들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자기의 친동생인줄을 모르고 그냥 지나칠번 했다. 그러다가 서로 길을 피해주며 어기여 지나가게 된 순간 얼핏 시선이 마주쳤는데 이 찰나적인 시선의 부딪침만으로도 한피를 나눠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의 형제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아마도 같은 피줄을 타고난 혈육간에는 그들사이에만 작용하는 그 어떤 육친적인 끌힘이라도 있는 모양이였다. 일단 서로에게 눈길을 준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 박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너 창욱이 아니냐?!》 마침내 형의 입에서 먼저 아버지가 지어준 영벽의 본이름이 튀여나왔다. 벌써부터 형을 알아봤으면서도 파악없는 생면부지의 늙은이가 곁에 있었으므로 형님하고 부르기를 주저하고있던 영벽이도 그이상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형님!》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서로의 어깨와 잔등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구레나룻이 검실검실한 볼을 맞대인 형과 동생의 눈에 꼭같이 이슬방울들이 맺혔다. 《네가 장군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나와 활동한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이렇게 여기서 만날줄 몰랐구나.》 목소리마저 울음에 젖은 상욱형의 말이였다.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소?》 《왜놈들한테서, 그놈들이 네가 혹시 집에 들리지 않는가 해서 벌써 몇차례나 가택수색까지 왔댔다.》 자기가 적후로 나다니는데 대하여 적들이 벌써 낌새를 맡고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듣느니 금시초문인 권영벽이였다. 그는 쓰겁게 웃었다. 《나도 모르는 우리 집이 어디 자리잡고있는줄 그놈들이 알고있단 말이요? 전전년에 장백쪽으로 옮겨갔단 소식은 들었는데 장백 어디쯤에 와있는지 몰랐소.》 《신통히 만났다. 집이 고대 눈앞이니 집에 가자.》 상욱은 덥석 그의 손목을 잡았다. 《형님, 후날 들리겠으니 집이 어디 있는지나 대주고 집소식이나 잠간 들려주시오.》 영벽은 제 손목을 틀어잡은 형의 마디굵은 손가락을 풀어내며 미안스럽게 말했다. 《이번 일을 보고 돌아올 때 꼭 들리리다.》 《그때엔 한발 늦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지금 몹시 위중하시다. 그래서 급히 의원을 모셔오는 걸음이다. 시각이 급하다. 어떡하겠니?》 영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무엇을 위해 가정의 울타리속에만 처박혀 살수 없는가를 깨친 때로부터 아버지는 영벽의 탈가를 의로운 일로 여겨주셨고 그의 처사를 자랑으로까지 삼아주셨다. 그러한 아버지시기에 중환에 계시는 자기를 찾아보지 못한채 지나친다 해도 결코 나무람하거나 원망치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림종의 시각을 다투고계시는 아버지를 곁에 두고 지나쳐버렸다는것을 장군님께서 아신다면 그것을 과연 옳바른 혁명가다운 처사라고 하실것인가? 그런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해서는 추호도 타협하시지 않으시는분이 바로 장군님이시였다. 장군님께 있어서는 혁명가의 도덕과 인간의 도덕이 상치되여있은적이 없으시였다. 그이께는 혁명가란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였기때문이였다. 《형님, 잠간 기다려 같이 갑시다.》 마음속에서 장군님앞에 자신을 세워보고 마침내 결심을 내린 권영벽은 자기 집에 함께 들려보기를 간청하다싶이하는 리창선을 그의 처가댁에 먼저 내려보내면서 될수록 오늘밤중으로 박인진도정까지 만나보고 자기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일러주었다. 자기는 집에 들렸다가 직접 리제순에게 가서 일을 보고 래일밤중으로 지양개의 마로인댁에 가내겠다고 확약을 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형과 함께 림종의 시각을 다투고계신다는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향했던것이다. … 이깔나무숲속으로 우불구불 뻗어나간 등판의 좁다란 눈길을 헤치며 집을 찾아 달릴 때만 해도 그의 앞에는 한줄기 가냘픈 희망이나마 남아있었다. 중태에 빠져 줄창 헛소리를 치다싶이한 지난 며칠동안 자주 자기를 찾으시더라는 아버지의 눈에 자기의 모습을 뵈여드릴수 있지 않을가 하는 희망이였다. 그때문에 영벽은 형과 의원을 앞질러 마을이 굽어뵈는 등판언저리로 내달려갔고 마을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구을며 뛰여갔다. 그러나 자기 집 마당안에 들어섰을 때 여러해만에 찾아든 권영벽을 맨먼저 맞아준것은 적막한 집안에서 불시에 터져나오기 시작한 어머니의 곡성이였다. 잠간 눈을 붙였다가 깨여나기라도 하실듯 목침을 베고 한뙈기의 누데기포대기를 덮으신채 고요히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갈퀴같이 여윈 손과 엉클어진 흰수염짬에 마지막으로 피워본 엽초부스레기까지 그대로 끼여있는 훌쭉한 뺨에는 상기도 채 식지 않은 온기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운명하는 최후의 시각에나마 사랑하는 아버지를 모셔 올리고저 천방지축 달려온 유격대아들에게 단 한순간의 애무의 눈길을 던져줄만한 능력도 더는 갖고있지 못하였다. 의로운것에 대해서는 더없이 자애로왔고 불의에 대해서는 더없이 서리발찼던 권호립로인의 정깊고도 엄한 눈은 영원히 감겨져버렸다. 5년전에 슬하를 떠났던 둘째아들이 자기곁으로 달려오고있다는것을 아시고 단 몇분간이라도 참고 기다려주셨더라면 아버지는 자기 심장의 최후의 고동소리를 객지자식에게 들려줄수 있었을것이며 그 아들이 쓸어주는 손길아래서 고요히 눈을 감으며 운명할수 있었을것이다. 아버지에게는 그 몇분이 모자랐고 영벽에게는 그 몇분이 늦었다. 몇분을 앞당겨 아버지곁에 와대지 못했던탓으로 아버지의 마지막걸음조차 보살펴드리지 못하였다. 한평생 이 둘째아들의 보살핌은 언제 한번 받아보지 못한채 돌아가신 아버지, 이 험악한 세상에 자기를 낳아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셨던 저 아버지를 위하여 이 아들이 해드릴수 있는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돌아가신 아버지곁에 머무를수 있는 시간이란 기껏해야 하루밤과 래일아침 한겻밖에 없다. 늦어도 래일저녁 다섯시까지는 리제순이와 약속돼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몸이니 장례날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이국땅의 흙이나마 덮어드릴 처지가 못된다. 떠나야 할 래일아침 한겻까지 여기 머무르는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위해드릴수 있는 일은 오직 두가지, 가신 아버지에게 마지막옷을 입혀드리고 아버지곁에서 이 한밤을 같이 지내드리는것뿐이였다. 영벽은 형을 도와 늙은 어머니가 눈물과 함께 담아들여온 더운물로 아버지의 몸을 씻어드리고 수의를 입혀드렸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를 씻어드리고 옷을 입혀드리면서 아버지의 몸이 그토록 처참하고 그토록 갑삭한데 새삼스럽게 놀라고 새삼스럽게 가슴저렸다. 나무뿌리같이 마디지고 갈퀴같이 엉성한 손, 한평생 그 손으로 제땅 아닌 남의 땅을 긁고 뚜지고 허비였지만 밭이랑처럼 드러난 저 갈비뼈들이 그 언제 한번 살집속에 묻혀보지 못한 아버지였다. 《모래밭이라도 제 땅을 가져봤으면…》 한숨속에 자주 외우군하던 아버지의 간곡한 목소리가 추억의 갈피속에서 잠꼬대마냥 울려나온다. 불모의 땅이라 해도 제 땅이라 이름할수 있는 땅을 찾아낼수 있을것 같은 서글픈 희망때문에 아버지는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고향땅을 떠나 북간도로 향하였다. 그것은 영벽이 열살되던 해였다. 음산한 이른봄바람에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두만강을 건너 낯선 이국의 황량한 산야를 헤매인지 일여드레, 남의 집 곁방에 짐을 풀며 여기서라도 살아보자고 아버지가 거처를 정한곳이 연길현 구수애 동거우였다. 아버지는 내 나라 땅에서 찾지 못한 제 땅을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찾아낼수 없었다. 또다시 남의 땅을 얻어 저 보습날같은 어깨에 가대기줄을 걸고 저 곽지날같이 얄팍한 두발로 벋디디며 비물같이 흐르는 땀방울로 땅을 적셨지만 그 땅에서 얻어낸 낟알로는 입에 풀칠도 할수 없어 온 식솔은 곡식그루에 발을 베며 이삭주이를 하고 언땅을 뚜져가며 새알같은 감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가면서도 아버지는 짬만 있으면 책장을 번지는 둘째아들을 축은히 여겨 그를 떠밀어 학교에 보냈다. 《내 돌피죽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한달에 강냉이 서말은 기어이 대줄터이니 고학을 하든 무엇을 하든 네 소원대로 해보아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준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룡정거리의 대성중학생 권창욱의 합숙집에는 한달에 한번씩 어김없이 먼 구수애 동거우에서 아들을 찾아오는 촌늙은이가 나타나군 하였다. 그러나 영벽은 아버지의 뜻을 어겨 2학년에서 중퇴당하였다. 룡정시내에 종종 나타나군 했던 삐라와 격문들을 찍어낸 《불온학생》들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은것이다. 《종이장에 글이나 써붙여서 왜놈을 이긴다면 누가 못하겠느냐? 독립군은 총을 잡구 싸웠어두 왜놈들을 못쫓아냈다. 하루밤에 동삼성을 집어삼키는 그놈들의 운세를 너희 젊은것들이 무슨 힘이 있어 당해내겠느냐?》 자식을 별로 나무란적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때만은 불같이 질책하였다. 영벽이 또한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을 고분고분 들어왔지만 이때만은 노여움을 사리라는 각오를 하면서도 자기의 신념을 주저없이 토로했다. 《종이장에 글써붙이는것으로도 왜놈을 이겨냅니다.》 《이녀석, 글쓴 종이쪼각이 무슨 방패라고 왜놈의 총칼을 당한단 말이냐?》 《단합되고 각성된 백성의 힘은 천하의 무적이라고 했습니다. 수천만 조선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여 들고일어나 왜적과 싸우면 왜적을 물리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써붙이는 종이장은 이 진리를 만백성에게 깨우쳐주기때문에 왜놈들이 무서워하는겁니다.》 아들이 깨우쳐주기 시작한 그 진리에 설득되고 공감한 아버지는 그런 리치는 어느 책에 씌여있는가고 물었다. 《한별이라는분이 찾아냈고 우리에게 깨우쳐주었습니다.》 《너는 그 한별이라는분을 어디서 만났더냐? 너희네 학교선생이였느냐?》 《저는 그분을 아직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언제건 그분을 찾아가 만나뵐 때가 올겁니다.》 이태후 영벽은 김일성동지를 찾아서 유격대로 떠나오게 되였다.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을 아들의 괴나리보짐을 싸면서 어머니는 몇방울의 눈물로 싸던 보자기를 얼룩지웠다. 《그 방정맞은 눈물을 거두지 못할가, 새도 자라서 제구실을 할 때가 되면 어미둥지에서 날아가기마련이야.》 아버지는 엄하게 어머니를 꾸짖으며 괴나리보짐을 빼앗아들고 손수 영벽의 잔등에 메워주었다. 《어서 네 길을 가거라. 너는 애비에미의 그늘밑에 붙어살 버섯두 아니구 조롱속에 갇혀살 새두 아니니 네 마음이 향한곳으루 갈줄 알았다. 어디 가서든 내가 너를 낳은것을 후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해주기만 바란다.》 그것이 영벽이가 마지막으로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비록 배운것은 없고 아는것은 적었으나 리해심이 많고 속이 깊은 아버지였다. 영벽은 긴 겨울밤을 자기와 더불어 지새우는 관솔불밑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고앉아 그 근엄한 얼굴에 새겨진 무수한 고뇌의 흔적들과 흰서리가 앉은 한오리한오리의 머리칼들에 비낀 다난한 생의 토막토막들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 희끗희끗한 수염속에 영원히 닫혀버린 자물쇠와 같이 묵중한 아버지의 입에서 더는 밀림의 거쉰 바람소리마냥 울리군 했던 목소리가 울려나오지 않는다. 가혹한 병마와 몰인정한 로쇠가 채워버린 자물쇠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린 순간에 벌써 녹쓸어버리고말았다. 영벽의 귀가에 장밤 들려온 소리는 아버지의 령혼이 불러온듯싶은 눈보라의 울부짖는 신음소리였다. 《저건 아마 네 아버지가 집을 떠난지 다섯해만에 어쩌다 집에 들린 너를 보지 못하고 간것이 섭섭해서 한숨쉬시는 소린갑다. 네 아버진 평생 우신 일이라군 없었다만 집을 떠나 객지에 나가 고생하며 왜놈들과 싸우고있을 너를 자주 외우셨다.…》 영벽의 곁에서 또한 이 밤을 함께 새워주신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왜놈들이 집에 그림자 한번 얼씬하지 않는 너를 내놓지 않는다고 네 아버지에게 뭇매를 안기구 행패질을 하구 그렇게 악독한짓을 안했으문사 네 아버지가 벌써 가실수가 있었겠니? 제 애비에미없이 불쌍하게 자라는 이것이 (어머니는 자기품에 안긴채 잠자고있는 어린 봉룡이를 내려다보았다.) 네 새끼라는게 알려지구 또 네가 장군님을 모시구 백두산에 나와 싸운다는 소문이 났을 때부터는 문쩌귀에 불이 일게 달려들어서 네가 집에 오지 않았느냐구 따지고들며 못되게 굴었다. 날이 새거든 일찌감치 떠나거라. 그 사냥개같은놈들이 또 언제 달려들지 알겠니? 아버지는 네가 입혀준 옷을 입고 저승길을 가시게 됐으니 지내 섭섭친 않으실게다. 저것 보려무나.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그치지 않았니?》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새녁의 고요속에 문창지가 푸름푸름 밝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을 걱정 말고 어서 차비를 해서 길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우려와 생활의 쓰디쓴 교훈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토록 현명한 예감을 가지도록 하였던것인가? 영벽은 피할길 없는 위험이 불시에 자기를 덮친 그 때늦은 시각에 다닥쳐서야 어머니의 권고대로 어뜩새벽에 집에서 떠나버리지 않고 아침한겻까지는 아버지곁에 머물러있어도 무방하리라 여기며 지체했던 자기의 소행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적후과를 가져왔는가를 깨달았다. 사태는 아버지앞에 조반상을 올렸다가 물린 다음에나 길을 떠나리라고 작정했던데서부터 생겨났다. 아버지가 조반상을 받기전에 제먼저 버릇없이 숟갈질을 하고 떠나는것은 너무도 불손하고 죄스런 일처럼 여겨져 차마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던 영벽이다. 형 상욱이가 이웃마을에 있다는 도가에 상여를 가지러 간 사이에 간밤에 조상을 보러 오지 못했던 몇몇 조객들이 찾아들었다. 영벽은 상제로서 조객들을 맞아들이고 그 조객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령전에 조반상을 받쳐드렸다. 뙤창문틈으로 새여든 아침해살속에서 향연기가 푸르스름하게 구불거리며 타래쳐올랐다. 영벽은 돌아가신 때에조차 조밥이상의것을 받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밥사발에 숟갈을 꽂아드리고 꿇어엎드려 절을 올렸다. 둘러선 조객들과 식구들의 슬픔어린 시선과 경건한 침묵속에서 이따금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제의 수저놀리는 달그락소리가 났다. 밥을 한숟갈 떠서 물사발에 말아드리던 영벽은 문득 집앞으로 다가드는 심상치 않은 발걸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자기 몸에 휘감겨드는 차거운 기운을 감촉하고 손을 주춤했다. 《순사놈들이다.》 문구멍으로 밖을 살펴본 누군가의 나지막하고도 겁에 질린 속삭임이 영벽의 등골을 써늘하게 했다. 《에구― 이걸 어쩌누?! 얘야!》 황급해진 어머니의 손이 영벽이가 들고있는 숟가락을 덮쳐앗았다. 《어서! 어서!…》 빠지기는 이미 글렀다. 뒤쪽으로는 빠져나갈 문이 없고 집앞에는 벌써 적들이 닥쳐들었다. 이런 일이 생기기전에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책을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벌써 문이 왈칵 열어젖혀졌다. 문언저리에 뽀얀 김을 서리우며 차거운 바깥공기가 폭풍마냥 집안으로 쓸어들었다. 문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좌우로 갈라섰다. 개털외투에 개털모자를 쓴 털보놈이 문앞에 나타나며 미친개마냥 집안으로 상판을 들이밀었다. 《뭣들 하는거야?》 주둥아리에서 솜뭉치같은 입김을 날리며 짖어댔다. 그놈과 문설주사이의 공간으로 내다보이는 사립문곁에서는 말을 타고 마당에서 빠져나갈 길을 막아선놈의 새까만 장화와 장화옆으로 드리운 긴 칼집이 서리찬 빛을 뿌렸다. 《순사어른, 우리 령감이 상새났소다.》 영벽의 손에서 앗으려던 숟가락을 놓아둔채 어느새 문앞에 다가간 어머니가 집안으로 들어서려는 털보놈을 막아서며 사정하듯 말하였다. 《그건 우리도 안다. 꼼짝을 말아.》 그놈은 어머니를 밀쳐대며 눈투성이의 군화바람으로 문지방안의 구들바닥에 들어섰다. 《이보오다. 상새난 우리 령감이 조반상을 금방 받았는데 이런 무례가 어디 있소다? 이게 무슨짓머리오다?》 밀려났던 어머니가 다시 용수철마냥 튕겨나와 그놈을 떠밀며 소리쳤다. 아들 영벽에게 행동할 순간의 여유나마 조성해보려는 어머니의 본능적이고도 필사적인 저항이였다. 그러나 이미 집안에 들어선 그놈은 아무말없이 연약한 늙은 어머니를 가볍게 물리치고 살기띤 눈으로 상제들과 조객들을 한사람한사람씩 둘러보았다. 그 독살스러운 매눈은 그대로 갈구리가 되여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찍어대는것 같다. 《네놈이 창욱이지?》 두번째로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던 그놈의 시선이 권영벽의 얼굴에 와서 박혔다. 영벽은 온몸이 오싹했다. 어느새 어떻게 자기가 집에 왔던줄을 알고 달려들었는가? 《네놈이 권영벽이지?》 그놈은 손에 들고있는 권총총구로 영벽의 턱을 받쳐올리며 다시금 씨벌였다. 심장은 흉벽을 두드렸다. 금시 가슴이 툭 터져버릴것 같았다. 그러나 넋을 잃지 않은 그의 사색은 이 집안에 상복을 입은 젊은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것과 놈이 자기가 누구라는것을 거듭하여 자기에게서 알아내려 하였다는 사실, 즉 자기 이름은 알지만 자기의 얼굴은 모르고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있었다. 영벽은 침착하게 두손을 마주잡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창욱이 녀석은 집에 없습니다. 어데 가서 객지귀신이 됐는지 몰라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기별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팽팽하게 헤워졌던 집안의 긴장된 공기가 약간 늦춰지는듯 했다. 《너는 누구냐?》 《네, 저는 창욱의 형 상욱이올시다.》 《나쁜놈의 새끼!》 육중한 주먹이 왼볼에 날아들고 눈두덩에서 불꽃이 일었다. 《창욱이놈이 백두산에 나와 활개치며 돌아가는데 제 아비가 죽은 때 집에 안올수 있는가?》 영벽은 한손으로 볼을 싸쥐면서 열려진 문밖에 얼핏 시선을 보냈다.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도가에 간 형이 이런 때에 돌아오면 모든것이 끝장난다는 불안한 생각이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죄여들었다. 《이거 누구지?》 털보놈은 할머니의 치마를 붙잡고 눈물이 글썽해서 겁에 질린듯 서있던 어린 봉룡이를 끌어내여 영벽의 앞에 내세우며 영벽을 가리켜보였다. 수리에게 채운 병아리처럼 가련해진 아들은 금시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리기나 할듯 입술을 이그러뜨리였으나 웬일인지 울지는 않고 그저 울먹거리며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 차라리 그것이 울기나 하였으면, 울어서 말을 번지지 못하게나 되였으면 (이 철없는것아, 네 한마디가 너의 아버지를 어떻게 만든다는것을 너는 아느냐? 너는 오늘밤에 너의 아버지를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있는줄 아느냐? 너는 지금 너의 아버지의 몸에 무엇이 있는줄을 아느냐? 아버지는 죽을 각오가 되여있다. 그러나 이 몸에 간직되여있는 장군님의 편지는 나와 함께 없어져서는 안될것이다. 저놈들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내가 왜 진작 그 편지를 따로 간수해두지 못하고 간밤을 그냥 지냈던가?…) 영벽은 눈물어린 아들의 흑진주같은 눈을 차마 마주볼수 없었다. 그는 조객들을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주먹을 부르쥐였다. 아들이 울어버리게, 그것이 말을 못하게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누구라도 아픈 매를 한대 안겨줬으면싶은 눈물겨운 열망이 솟구쳐올랐다. 《말해, 이게 누구지?》 수리는 아이의 어깨에 박았던 발톱을 뽑으며 소리지르는것보다 더 무서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이제는 어차피 주먹을, 다음에는 품속의 권총을 놈의 상판에 돌릴수밖에 없다고 생각된 순간 별안간 어린아이는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할머니에게 매달렸다. 매달리며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손자를 할머니는 두손과 치마폭으로 감싸안는다. 《그래 네 동생은 정말 집에 안왔는가?》 스스로 약이 오른 털보놈은 다시금 영벽의 얼굴을 향해 총구를 들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벌써 집을 떠난지 다섯해째나 되는데 한번도 온적이 없습니다.》 그놈은 제 입술을 짓씹더니 배앝듯 말했다. 《어디 보자, 밖으로 나갓, 하나씩 몽땅 밖으로 나갓.》 제놈들의 말대로 한사람한사람씩 눈여겨 살피며 모조리 밀어내고 모조리 끌어냈다. 아래간구석에서 잠자던 형수의 갓난애기까지 몰아냈다. 아래웃문이 환히 열리고 텅 비다싶이한 귀틀집안에 남은 사람은 방웃켠에 쳐놓은 휘장뒤에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시신뿐이였다. 집둘레에는 총대를 꼬나든 여라문놈이 뛰는 사람이 없는가를 감시하며 지켜서있었다. 집안에서는 뒤지고 쑤시고 메치고 짓부시며 돌아치는 어지러운 군화발소리가 울려나왔다. 밥상을 자빠뜨리고 궤짝을 둘러메치고 휘장을 잡아뜯고 독을 들부시고 깔개를 들춰보고 천장을 찔러보고 지어는 고인의 시신을 덮은 이불까지 들춰보았다. 뽀얗게 먼지 일고 수라장이 된 집안에서 나온 털보가 입안에 씹히는 흙먼지를 뱉으며 말탄놈에게 다가가더니 숨어있을만한데는 다 찾아봤다고 뇌까렸다. 《지붕밑에 깊숙이 숨어있을수도 있다. 불을 질러보라.》 부엌아궁에서 타던 장작가치들이 지붕둘레에 옮겨지고 구들바닥에 깔렸던 구름노전이 둘둘 말려 불기둥이 되여버렸다. 《이놈들아, 이 악착한 놈들아!》 억이 막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하며 여태 놈들이 하는짓을 지켜보고있던 어머니가 불속으로 달려들었다. 《저안에 우리 령감이 있는줄 네놈들은 못보느냐? 이 개같은놈들아!》 옆으로부터 뻗어나온 총창 달린 총대가 어머니의 가슴앞에 가로질렸다. 한 총탁판은 어머니보다 한발 앞질러 고인의 시신을 불속에서 끌어내오려고 웃문앞으로 달려들어가던 중년조객의 발등을 내리쳐 그를 꺼꾸러뜨렸다. 《할아버지, 나오라, 불속에서 나오라.》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소리 질러대다가 할머니를 막아버린 총대밑으로 빠져들어가려던 봉룡이는 뒤덜미를 잡혀 휘뿌리웠다. 마침내 영벽의 마음속에서 억눌리우고있던 격철이 튀여났다. 어느덧 상복밑에 입고있는 저고리안주머니속에 꿰지르고 들어간 그의 손이 권총자루를 틀어잡고 다시 뽑혀나왔다. 그러나 그 손이 상복밖으로 미처 뽑혀나오기전에 번개와도 같은 편지의 촉감이 그 손을 밖으로 더 뽑혀나가지 못하게 멈춰세웠다. (서라, 멈춰라.) 격앙된 감정을 리성의 올가미가 걸어챘다. (너는 저 몇놈의 목숨과 그 편지를 바꾸자고 드는가? 너는 네 자신의 생명을 저 더러운놈들의 몇몇 시체와 바꾸자고 드는가?) 영벽은 이발을 악물며 머리를 서서히 떨어뜨렸다. (너는 오늘밤에 조국광복회 회원이 될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있다는것을 잊었는가? 마로인네 온 식구가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사위를 맞아들일 차비를 하고있다는것을 잊었는가? 너는 박도정수하의 수백수천의 천도교도들을 누구에게로 이끌어가야 한다는것을 잊어버렸는가?…) 우지직거리며 불타는 서까래가 집안으로 떨어져내렸다. 집을 통채로 삼켜버린 불길은 더더욱 근접할수 없게 넓게 번지며 확확 열기를 풍겼다. 광란하는 불길속에 그냥 아버지가 누워계신다는것을 알고있으면서도 땅을 치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피타는 통곡소리를 들으면서도, 쓰러진 자리에서 피흐르는 손을 쳐들고 할아버지를 어서 나오라고 그냥 울어대는 어린 아들을 보면서도 영벽은 이발을 악물고 주먹을 부르쥔채 눈물도 통곡도 돌진도 없이 바위돌마냥 서있었다. 가슴속에는 원한이 서리고 심장속에서는 아버지의 피가 증오로 끓어번지고 품속에는 만탄창된 권총이 들어있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그 원한, 그 증오, 그 총탄으로는 능히 자기하나와 열놈의 원쑤를 바꿀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놈의 원쑤와도 자기를 바꿔서는 안된다는것을 그는 잊지 않고있었다. 장군님께서 과업을 주신대로 조국광복회의 첫 분회조직을 내오고 지양개의 마로인댁에 웃음을 주고 박인진도정에게 편지를 전하고 그 도정을 통하여 수천, 수만의 천도교도들을 장군님의 두리에 묶어세우고… 그렇다, 수천수만의 새 권영벽을 장군님앞에 바꿔세워놓기전에는 제나름대로 죽을 권리가 없다. 삶도 죽음도 이미 오래전부터 혁명에 바친 권영벽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죽음을 자기 뜻대로 처리할 권리도 또한 혁명앞에 바친것이다. 혁명에 자신을 바친 이상은 살기도, 죽기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무척 힘들다는것을 그는 재벌 죽음을 당하시는 아버지앞에서 뼈저리게 체험하고있었다. × 권영벽은 리제순이와 약속되여있는대로 해가 저물기전에 신흥촌 뒤산, 역시 약속돼있는 숲속의 바위옆에 가댔다. 먼저번에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접선신호만 달리하기로 되여있었다. 전번에는 막대기로 나무를 세번씩 울리는것으로 자기의 도착을 알렸지만 장소를 아는 이번에는 그 바위돌우에 두개의 송이가 달린 젓비나무가지를 올려놓고 거기서 약간 떨어져있는 늙은 잣나무밑에서 기다리기로 되여있었다. 바위돌우에 올려놓는 나무가지에는 반드시 두개의 잣송이나 젓비방울이 달려있어야 한다. 그것이 권영벽이라는 이름자에 달린 두개의 동그라미를 의미하기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방울달린 나무가지를 꺾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있던 리제순이 어느새 가까이 오는 그를 알아보고 제 먼저 불쑥 나타난것이다. 리제순은 권영벽의 손을 잡아쥐자 대뜸 놀라기부터 했다. 《웬일입니까? 손이 불같이 뜨거운데 몸이 불편한게 아닙니까? 얼굴도 그렇구…》 권영벽이자신도 자기 몸에 열이 있는줄 몰랐다. 아버지의 시신을 불태우던 불길이 그의 몸에도 그냥 서려있는것인가? 그 화염을 들쓴채 피눈물을 삼키며 곧장 이리로 와댄 권영벽이다. 《아니.》 《그럼 바삐 오시느라 몹시 몸이 달았던 모양입니다. 손에 땀이 질퍽합니다. 밀영에서 직방 나오시는 걸음입니까?》 《곧장…》 권영벽은 역시 외마디대꾸를 했다. 어쩐지 그 외마디대꾸들도 자꾸 목에 걸렸다. 《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십니까?》 리제순은 헤여진지 고작 한주일밖에 안되는 권영벽을 만난것이 기뻐서 그냥 싱글벙글했다. 《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시오. 동무에게 안부도 전하셨구… 그간 사업성과에… 치하도 주셨소.》 《고맙습니다.》 그의 두눈이 별빛마냥 반짝인다. 《준비는… 어떻게 됐소?》 《준비됐습니다. 날이 어둡자마자 모이기로 했습니다. 벌써 두사람은 왔습니다. 저먼저 얘기있은 그 네사람입니다.》 《갑시다. 어디요?》 《앞으로 비밀아지트로 쓰면 어떻겠는지 하고 제가 말하던 굴입니다. 적당하겠는지 봐주실겸 거기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들렸다 갑시다. 저녁식살 하셔야지.》 리제순은 그의 팔을 잡고 마을쪽으로 끌었다. 식사라고?! 권영벽은 이제야 인간생활에는 하루 세끼 음식을 먹는 법이 있다는것과 자기가 어제저녁부터 무려 세끼나 건너버렸다는것을 문득 상기했다. 엊저녁에는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를 잃은 슬픔때문에 저녁밥을 잊었고 오늘 아침에는 그 치떨리는 봉변을 당하고나서 끼니때들을 모르고 지나쳤다. 하지만 지금 상머리에 앉은들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갈것인가? 《모임장소로 갑시다. 여기서 일을 보곤 곧 떠나야 하오.》 오늘따라 긴말은 전혀 하고싶지 않은 권영벽이다. 리제순은 약간 시무룩해진채 이상스럽다는듯 그를 다시금 흘깃 쳐다보고는 젓비나무숲속으로 권영벽을 안내하며 앞서 걸음을 옮겼다. 시꺼먼 구름이 낀 서쪽하늘에서 저녁노을이 피빛으로 불탔다. 집을 통채로 에워싸고 타래치며 솟구치던 그 몸서리쳐지는 불연기같은 노을이다. 여느때에는 아름답게 비쳐들던 노을, 지금은 눈에 비껴들지 말았으면싶은 노을이다. 네놈들의 머리우에 화염을 바꿔들씌울 그날이 이제 반드시 오리라고 권영벽은 피맺힌 마음속에 벼른다. 《…청년분회는 오늘저녁에 뉘를 보게 됐는데 부녀들을 발동하는덴 암초에 부딪쳐 골치아파죽겠습니다.…》 걸으며 그간 자기가 사업한 정형을 이야기하던 리제순은 안타까운 하소를 했다. 《암초?》 부지불식간에 또 생각이 불타는 자기 집에 가있던 권영벽은 리제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허천집 며느리가 활동력이랑 좋아서 그 녀자를 활동시키면 부녀들이 다 잘 움직이겠는데 그 집 시아버지되는 령감이 어찌나 봉건이 심한지 며느리가 집밖에 얼씬도 못하게 하니 야단 아닙니까. 녀자란 치마를 너펄거리며 나돌아봐야 허파에 바람밖에 찰게 없다구 하면서 녀자가 할 일이란 집안일을 착실히 돌보구 남편과 시부모공대를 잘하는거라구… 동네 부녀들에게도 그렇게 드세게 굴어서 그 로인때문에 부녀들을 움직이기가 여간 어렵질 않습니다. 부녀들이 유격대원호랑 위해 손을 합칠 일도 적지 않은데 그 령감 등쌀에 슬슬 눈치놀음을 해야 하는 판입니다.》 《그 로인과 사업해봤소?》 《몇번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해봤는데 그 로인한테만은 내 말도 이가 들지 않습니다…》 리제순은 그 로인과 사업한 정형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너무 곧은 막대기식으로 한게 아닐가? 그 로인이 뭘 좋아하오? 무슨 취미나 기호가 있겠지?》 《있습니다. 장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동네엔 그 령감 장기를 당하는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권영벽의 아버지 역시 장기를 즐겼다. 어린 자기에게 장기쪽 옮기는 법을 배워주고 자기를 상대로 장기를 들며 일부러 아들이 좋아하는것을 보고싶어 져주시던 아버지의 옛모습이 권영벽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들었다. 《제순동무는 장기를 둘줄 아오?》 《장기엔 영 백지입니다.》 권영벽은 리제순에게 장기를 배우고 그 로인의 장기친구가 되는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그 로인의 장기친구가 되면 그의 마음을 뚫고들어갈수 있을거요. 장래엔 로인분회장으로 만들수 있을거요. 그리고… 마을 부녀자들은 그 집에 모여앉아 무릎에 바가지를 엎어씌워놓고 그 집 삼삼이 일이나 축내주며 녀성들이 조상전래의 미풍량속을 잘 지킬데 대한 이야기랑 나눈다면 아마… 부녀들이 늘 제집에 모여달라고 할거요…》 역시 자꾸 말마디들이 목에 걸려 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권영벽이다. 《그것 참 그럴듯하군요. 그렇게 되면 문제없이 풀릴것 같습니다. 내 며칠안으로 장기를 배우렵니다. 그 로인을 찜쪄먹게 수높은 장기군이 되렵니다… 거의다 왔군요. 이쪽입니다.》 리제순은 희색이 만면해졌다.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그는 자기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있는 권영벽의 마음속에 지금 어떠한 비분이 서려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리제순은 눈이 무겁게 실려 가지가 축 처져내린 커다란 세그루의 가문비나무를 에돌아 그 나무들뒤에 숨어있는 굴앞으로 권영벽을 안내했다. 《여깁니다. 여기서 앞으로 모임들두 가지구 유격대에 보낼 원호물자도 모으구… 유격대공작원들도 여기를 거치구… 어떻겠습니까?》 권영벽은 굴주변을 다시한번 둘러보았다. 《겨울엔 괜찮겠소. 그러나 눈이 없는 계절에는 굴앞에 길이 나지 않겠소? 물이 흐르는데다가 아지트를 마련하는게 나을것 같소. 진대나무나 돌을 타고 개울에 들어섰다가 개울을 따라 올라가서 들어갈수 있는 굴을 마련하는것이 좋소. 그래야 적들의 눈도 피하고 군견의 코도 피할수 있을거요.》 《정말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얼마후 마른 풀이 바닥에 깔린 굴속에는 여섯사람이 둘러앉았다. 권영벽이와 리제순 그리고 신흥촌지회 아래에 처음 생기게 되는 분회조직의 조직원이 될 네 청년이였다. 그들 네 청년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권영벽은 이미 잘 알고있다. 관솔불옆에 앉은 검정조끼의 까까머리청년, 그는 스물여섯살에 한살짜리 딸을 가진 젊은 아버지다. 조선에서 화전을 얻자고 산에 불을 놓았다가 적들에게 붙잡혀 두해동안 감옥에서 곡경을 치른 뒤에 압록강을 건너온 불같은 젊은이다. 목에 토목수건을 질끈 동이고 그옆에 앉아있는 눈이 어글어글한 젊은이, 그는 아버지를 3.1만세시위때에 잃고 어릴적부터 고아로 떠돌아다니다가 지금은 압록강떼목군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전날 독립군에서 화승대를 메고다니던 아버지를 잃은 역시 그와 같이 불쌍하게 된 처녀가 그와 짝이 된 때로부터 그는 늙은 장모가 부대기를 뚜지는 이 화전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겨울에는 산판에 가서 인발구로 나무를 끌어내리고 여름엔 떼를 탔다. 좌중에서 유일하게 치머리를 한 그 다음 젊은이는 이미 지난번에 권영벽이와 낯이 익은 야학반장이였다. 지회의 성원으로 리제순이와 함께 장백현 조국광복회조직의 첫조직원의 한사람이 된 그는 이 자리에서 뭇게 되는 청년분회를 책임질 젊은이였다. 마지막으로 리제순의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나무뿌리같이 울퉁불퉁하고 단단하게 생긴 애젊은 총각은 사대머슴군의 아들이다. 단천땅에서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머슴살이를 했던 그의 아버지는 그만한 나이의 총각시절에 지주집에서 같이 고역을 치르던 부엌데기처녀와 함께 지주집에서 뛰쳐나와 압록강 건너편의 여기, 이 륙산등판의 원시림에 와서 첫 도끼소리를 울리며 힘겨워도 자유로운 새 살림을 폈다. 그러나 이곳에도 왜놈들이 기여들고 지주가 생겨 그를 낳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얽매인 생활을 되풀이하게 되였다. 하면서도 하나뿐인 제 자식이 숙명같은 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싸움에 나서는것은 바라지 않았기때문에 권영벽은 그들의 눈먼사랑을 틔워주느라 지난번의 이틀밤을 고스란히 바쳤다. 그 보람으로 오늘 여기에 그들의 자랑할만한 아들이 어엿이 앉아있다. 《…여기에는 우리 조국을 강탈한 강도 일제를 우리 조국땅에서 몰아내고 독립된 내 나라에 인민의 행복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쳐싸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만고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창건하시였고 이끄시고 계시는 조국광복회는 바로 여러분과 같은 뜻과 기개를 품은 조선사람들이 뭉치는 조직입니다. 이 조직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한 이 시각부터 여러분은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라는 높은 영예와 긍지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뜻깊은 오늘을 잊지 말고 장군님을 잘 받들고 싸우기를 바라면서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권영벽은 그들 한사람 한사람과 일일이 굳게 손잡았다. 청년들의 눈에도 권영벽의 눈에도 뜨거운것이 번쩍였다. 그러나 청년들도 리제순이도 이런 모임을 자주 벌릴 이 이마 넓은 정치공작원의 눈가에 어린 이 밤의 눈물이 얼마나 고결하고 값비싼것인지는 아직 모르고있었다.
아침일찍 길을 떠난 박인진은 점심때도 되기전에 지양개골의 김정보네 마을에 들어섰다. 정작 마을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김정보댁이 눈에 띄우자 혹시 간밤에라도 다시 붙잡혀가지나 않았는가 하는 한가닥의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집대문앞에 이르니 울안의 어디선가 귀에 익은 김정보의 호방한 너털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번 죽을 고비를 겪었을터인데다 또 언제 다시 붙잡혀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는지 알수 없는 처지의 김정보이고 보면 저렇게 배포유하게 웃어댄다는것이 박인진에게는 괴이쩍게 생각되였다. 꽁꽁 닫아걸고 빗장을 든든히 지르고있을줄 알았던 대문에 달린 작은 나들문도 제멋대로 열려져있었다. (이 어른이 상기 정신이 덜 들었군. 문건사도 제대로 안하구 태평스럽게 웃으며 지내다가 또 언제 경칠라구…) 박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휑하니 열려져있는 바깥나들문과 중대문을 거쳐 안마당에 들어섰다. 퍼그나 오래간만에 여기에 들어와보는것 같은 느낌이였다. 널직한 안마당 변두리로 빙 둘러서있는 푸르청청한 분비나무들과 잣나무들은 커다란 아홉간짜리귀틀집과 잘 어울려 장엄한 고산거옥다운 풍치를 한층 더 돋구어주고있었다. 붉은 기와곬에 쌓인 눈들이 따거운 한낮의 겨울해볕에 반짝이며 녹아내리고있었다. 락수물이 쭐벙쭐벙 떨어지는 통나무퇴지밑에는 부스러진 고드름들이 널려있었다. 고드름도 모두 팔뚝같이 실했다. 김정보는 일여덟살쯤 된 손자녀석과 같이 삼태기에 고드름들을 주어담고있다가 안마당에 들어서는 박인진을 보고 반겨맞는다. 《허 이게 뉘시오? 박도정이 어떻게 이 산골엘 다 오셨소?》 김정보는 삼태기를 던지고 손을 툭툭 털며 박인진에게로 몇걸음 마주나왔다. 《무사히 귀가하셨다더니 분명 댁에 와계시는군요. 다시 이렇게 뵙게되여 정말 반갑소이다.》 박인진은 중절모를 가슴에 붙이며 김정보앞에 허리를 굽혔다. 김정보도 마주 허리를 굽신했다. 《선덕어른께서 돌아오신지 벌써 여러날 된다는데 그간 몰라서 문안이 좀 늦어졌소이다. 돌아오셨다는 말을 어제밤에야 들었소이다.》 《그럼 일부러 문안해주시려구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 김정보는 례의 그 더부룩한 반백의 수염을 내리쓸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아침에 방구석에 왕거미 한마리가 줄을 내리며 둥둥 드리우더니 도정어른이 오실 전조였구려. 자 어서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김정보는 박인진의 검정두루마기팔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박인진은 그에게 이끌려 발을 옮겨놓으면서도 어쩐지 활짝 열려있는 중대문과 빗장을 지르지 않은 바깥나들문이 마음속에 켕겨 뒤를 돌아다보았다. 《바깥문에 빗장을 지르지 않았는데 그냥 놔둬도 별일 없겠소다?…》 김정보는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장 드나드는데 뭘 대낮에 빗장을 지르겠소.》 《그래도 혹시…》 그 말에 김정보는 박인진을 의아쩍게 돌아보다가 그가 뭣때문에 그러는지를 알아차린듯 빙그레 웃었다. 《아, 또 전번같은 일이 생길가봐 걱정스러워 그러시오?》 《만사에 조심을 기하는게 랑패없습지요.》 《내 한번 잡혀갔더니 도정어른도 무던히 겁이 많아지셨군. 이렇게 환한 대낮에 그렇게 겁나시면 어떻게 오셨소? 허허…》 김정보는 박인진을 병풍이 둘리고 돗자리가 깔린 방에 안내했다. 그는 손님에게 비단방석과 사기화로를 권하고 그앞에 자개무늬를 박고 옻칠한 담배함도 끌어다놓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주며 담배를 권했다. 《한대 붙이면서 손을 녹이시오.》 《손이나 좀 녹은담에 천천히 피겠소이다. 먼저 태우시지요.》 김정보는 담배함안에서 반질반질 손때오른 진자색의 울퉁불퉁한 곰방대를 집어들고 권연 한가치를 끼웠다. 《그간 갖은 곡경을 치르었겠는데 귀가하신이래 건강은 어떠십니까?》 《늙어두 황소같이 건장한 덕에 보시는바와 같이 나는 여전하오. 도정어른은 그간 무고히 보내셨소?》 김정보는 유쾌했다. 《네, 나는 별고없었습니다. 그저 날이 갈수록 세상이 흉흉해지기만 하니 선덕어른께서 당하신 일도 남의 일같지 않아 불안하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보냈을뿐입니다.》 《정말 내가 없는동안에 도정어른이 찾아왔다가 헛걸음하셨다던가?》 《어른께서 잡혀가신 담날에 왔다가 청천벽력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줄 알았지요. 그때 그 불상사를 알구 돌아가서 나는 며칠간 잠도 제대루 잘수가 없었습니다. 곁사람도 그렇게 불안했을진대 그 무서운 일을 직접 당한 어른께서는 그간 얼마나 심신이 괴롭고 고생이 막심했겠습니까?》 그 말에 김정보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고생은 무슨 고생이겠소.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이런 일두 당하구 저런 일두 당하기마련인걸. 그런 불상사를 당한 덕에 두번다시 없을 좋은 인생체험을 하고 왔소.》 《역시 어른다운 대범한 말씀입니다만 체험도 그렇게 무시무시한 체험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사람이 당찮은 일로 억울하게 잡혀가 죽을 고비를 겪다가 살아돌아온다는것이야 어디 흔히 있는 일입니까?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이기에 어르신같은분네한테 화를 입히구 민심을 소란케 한답데까? 들리는 말로는 어른을 붙잡아간 사람들의 무리가 모다 조선사람들이라는데 제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지내는 동포량민들에게 비적같은 행실을…》 《이보시오, 도정어른!》 김정보는 문득 들고있던 곰방대로 화로전을 딱딱 두드렸다. 혈색좋던 그의 얼굴은 일순간에 울기가 올라서 시뻘개졌다. 《점잖은 어른이 거 무슨 말을 그렇게 막되게 하시오?》 불시에 말을 끊기운 박인진은 왜 그러는지를 몰라 이상스럽게 김정보를 넘겨다보았다. 《내 말이 막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 나라 독립을 찾자구 목숨걸고 싸우는 의로운 우리 조선군사들더러 〈비적〉이라니 그게 어디 말씀이 됐소?》 김정보의 눈에서 노기가 번뜩였다. 《아, 그거… 내 그만 요즘 떠도는 그 말에 버릇돼서…》 박인진은 뜻밖에 주인의 비위를 거슬려놓은데 대하여 변명 겸 사과의 뜻을 표하기는 하면서도 의아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김정보가 이렇게 나올줄 몰랐던 박인진이다. 그가 무참해서 얼굴이 온통 벌거우리해지는것을 본 김정보는 얼마간 누그러진 어조로 깨우쳐주듯 말했다. 《〈공비〉요 〈비적〉이요 하는 그 불미한 소리는 저 쪽발이놈새끼들이 우리 조선의 신독립군사들을 모독해서 붙인 험한 소리인데 그쯤한걸 모를리 없는 도정같은 어른이 우리 군사들을 두고 그런 욕된 말로 불러서야 되겠소? 유격대가 〈공비〉요 〈비적〉이요 하는 소리는 다 개소리웨다. 저 개같은 불공대천의 원쑤놈들이 씨벌이는 그따위 개소릴 도정어른은 다시는 그대로 본따서 입에 올려선 안되겠소.》 김정보는 이렇게 오금을 박아 말하고나서 곰방대를 두드릴 때 거기서 떨어진채 실연기를 피여올리고있는 권연가치를 집어들고 재티를 훌훌 불어버리고는 다시금 곰방대에 끼워넣었다. 박인진은 그에게서 노여움을 샀지만 저으기 기뻤다. 유격대에 랍치되여갔던 김정보가 별로 유격대에 대해 험담한것 같지도 않은 자기 말에 그토록 모욕감을 느낄진대 유격대는 진정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며 백성들을 위해주는 군사들이며 따라서 그들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하고 비호할뿐아니라 손잡고 함께 싸워야 한다던 약수동의 박로인이나 리창선의 말이 옳지 않았는가. 진정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사람들이 믿고 희망을 걸 군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일인가. 《그럼 그분네들이 우리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는 새로운 광복군사들이라는게 실말입데까?》 《그런 소릴 도정어른도 더러 들으셨소?》 《네, 어떤 사람들은 〈비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정 우리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독립군대들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통 어느 소릴 믿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김정보는 고불통을 입에 문채 실눈을 지으며 대꾸했다. 《나도 전에 독립군노릇을 해본 사람이오만 독립군사라 해도 지금 김일성장군님이 이끄시는 항일유격대같이 믿음이 가는 견실한 광복군사는 우리 배달민족의 항일혈전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었소. 나는 그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내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이요. 나는 그렇게 훌륭한 애국청년들을 여태 보지 못했소. 청수같이 맑고 깨끗한 애국충절을 지닌 훌륭한 청년들로 무어진 군사들이였소.》 《그럼 그분네들이 선덕님을 붙잡아다가 모질게 굴지도 않던가요?》 호기심에 찬 박인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정보는 늙은 사자와 같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를 붙잡아갔노라는 소리는 일부러 퍼뜨린 헛소문이요. 그 사람들은 나를 김일성장군님한테루 모셔가면서 부러 그런 헛소문을 놓게 한것이요.》 담배가치를 집어들려고 담배함쪽으로 뻗치던 박인진의 손은 어중간한데서 멎어버렸다. 그는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김일성장군님께루 모셔가다니? 선덕어른님을 장군님께루 모셔다주더란 말씀입니까?》 《허허, 왜 그렇게 놀라시오?》 김정보는 위풍있는 수염을 점잖게 내리쓸었다. 놀랄밖에 없는 박인진이다. 그는 김정보가 장군님을 만나뵈오러 갔을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꼭 잘못되는줄만 알았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왔을뿐아니라 장군님을 만나뵈오러 갔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어른께서 장군님을 만나뵈셨다는 말씀이시오?》 김정보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웃음이 피여있다. 《그래요?!》 더더욱 놀란 박인진은 방석자리를 버리고 김정보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거 정말 희한한 일을 당하셨소이다. 소문에 듣기로는 그분은 매우 덕망높으신 청년장군이라던데 정말 그렇습디까?》 《그게 그른데 없는 소문이요. 아주 젊으신 청년장군이시오.》 《아 그러시오?》 이번에는 박인진이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군님을 만나뵈온 이야기를 자상히 들려달라고 청하였다. 《…자초지종을 좀 죽 얘기해주시오. 어디서 어떻게 만나뵈였는지… 장군님께서 선덕어른을 몹시 반가이 맞아주셨겠습니다?》 《아니요.》 김정보는 여전히 웃음을 띠우고있었으나 그 물음엔 머리를 가로저었다. 《처음에 나를 만나주실 때는 아주 친절하고 례절스럽게 대해주시면서도 나를 몹시 꾸짖으셨소. 엄하게 질책하셨소.》 《엄히 질책하시다니?! 그건 무슨 일로?…》 박인진은 김정보의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을 불에 데기라도 한것처럼 자기쪽으로 가드라뜨렸다. 《이 미련한 늙은것이 그래싼짓을 했지. 독립군때 싸우던 총을 압록강물속에 다 처박고 이 산골에 들어와 두더지노릇하는것도 부끄러워할줄 모르구 유격대더러 승산없는 쌈을 하지 말라구 어리석은 설교를 하려들었으니! 아무리 불민하구 무엄해두 분수가 있지 그이 앞에서 나같이 우둔하고 어리석은 소견을 함부로 아뢰며 방자히 굴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리란 말이요?》 후회막급하여 한숨짓는 김정보의 눈에 회오와 자책의 눈물이 핑 어린다. 《무슨 말씀을 드렸게 그러시오? 너무 무엄하게 대해올린것때문에 꾸중을 받으셨는가요? 장군님께서 대노하셨습디까?》 《아니요. 장군님께서 노하시구 꾸중하신건 내가 무엄하구 방자하게 군때문이 아니였소. 나는 그렇게 외람되게 장군님을 모셨소만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나이대접을 해서 이 백해무익한 썩은 고목같은걸 극진히 공대해주셨소. 장군님께서는 죄많은 늙은것의 어리석고 그릇된 광복관과 인생관에 대해 질책하시며 깨우쳐주셨구 또 그릇되게 살아온 지난날을 두고 분해하시기도 하셨구 섭섭해하기도 하셨댔소. 지난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취할것 없는 내 적은 공적에 대해선 또 과분한 평가를 주시며 애국지사였다구까지 일러주셨구… 정말 그렇게 불의에 대해선 엄하시구 의에 대해선 정깊으신 영웅호걸을 나는 처음 뵈옵고 왔소. 그이야말로 조선의 구세주로 백두산에 강림하신 희세의 영웅이구 절세의 위인이시오…》 눈물어린 김정보의 눈에는 희열의 광채가 내뿜겼다. 아직 자기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황홀경에 잠겨있는듯싶은 김정보의 얼굴을 넋없이 쳐다보고있는 박인진은 김정보가 몸시도 부러웠다. 장군님을 뵙고 온 김정보는 천도를 믿는 자기보다 더 현자로 되여 앞에 앉아있있다. 과연 장군님은 어떠한분이시기에 이 자존심이 강하고 주대가 세다못해 오만한 고집불통의 늙은이로 하여금 그이의 절대적인 신봉자로 되지 않을수 없게끔 하신것인가? 박인진의 마음은 조선의 구세주로 백두산에 현출하셨다는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백두산으로 날아갔다.
그날저녁 박인진도정은 마로인네 집에서 조선인민혁명군대표 권영벽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시며 조국광복회 회장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다. 리창선이와 마로인네 딸의 경사스러운 잔치가 있은 날 밤, 마로인네 이웃집 뒤골방에서 권영벽이와 다시 마주앉은 박인진도정은 백두산밀영을 방문하여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고싶은 자기의 절절한 소망을 적은 회답편지를 권영벽에게 주었다. 그의 회답편지를 받아든 권영벽은 리창선이로 하여금 처가에 머물러있으면서 차후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일러 떨구어두고는 지체없이 백두산밀영으로 들어왔다. 그는 금번의 새 분회조직정형과 창선의 잔치일 그리고 박인진도정과의 상면에 대한 보고와 함께 박인진도정의 회답편지를 장군님께 올렸다. 편지를 받아보신 장군님께서는 도정의 간절한 청원을 승낙하시면서 그의 소원대로 리창선이로 하여금 박인진도정을 모셔오게 하라고 이르시였다. 새 공작임무를 받고 다시 백두산밀영을 떠나온 권영벽은 잔치가 있은 다음 며칠동안 처가에 머무르면서 지시를 기다리고있던 리창선에게 박인진도정을 사자봉밀영으로 안내해오라는 장군님의 지시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박인진은 사자봉밀영에 들어오게 되였다. 백두산밀영으로 들어가는 소백수골어귀의 합수목에 위치한 사자봉밀영은 백두산밀영의 관문적인 밀영으로서 백두산밀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아주고 만나주는 접수면담소였다. 장군님께서는 사령부군수관과 작식대원, 전령병을 데리시고 백두산밀영에서 이 사자봉밀영에 나와 박인진을 기다리고계셨다. 일찌기 어린시절에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천도교조들의 생애를 통하여 희세의 위인이 배출되였거나 행적이 깃든곳은 벌써 그 자연부터가 범상치 않기마련이라는 관념에 인박힌 박인진에게는 김정보가 조선의 구세주이시라고 칭송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밀영지의 모양새자체가 거룩하고 신묘하게 생각되였다. 묘하게 천연요새를 이루고있는 억센 산세와 땅에 꽂은 대검의 수풀마냥 쭉쭉 뻗어올라 하늘을 치받치고 서있는 백두의 검푸른 원시림속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밀영터… 이 성지의 모든것이 여기서 지내시는 장군님을 세상의 온갖 재앙으로부터 막아주며 보호해드리고있는듯싶었다. 박인진은 자기가 마치 천도를 창명한 원조이신 최수운대신사님께서 서른네살 되시던 해에 두차례나 들어가있으며 기천수련을 했다는 바로 그 자산 청성산골짜기에 들어온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리창선을 따라 밀영지에 와닿았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나타날무렵이였다. 어둑시근한 숲속에서 벌거스름한 뙤창불빛이 언뜻 보이게 되자 창선이는 드디여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곳에 다 왔노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알려주는 창선의 귀속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밀림의 한끝에서부터 그 무엇인지를 휩쓸어오는것 같은 세찬 바람소리가 신비롭게 들려왔다. 저으기 놀란 박인진은 일순간 발걸음을 멈추며 사위를 둘러막은 어둑컴컴한 산발들과 더더욱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두릿두릿 둘러보고 쳐다보았다. 그찰나 문득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헤가르며 눈부신 류성이 바로 주변의 북쪽산발 뒤쪽으로 날아떨어져내렸다. 그에 뒤이어 박인진의 눈에는 그 북쪽 산발머리우에서 현란하고 신비한 광채를 휘뿌리고있는 류달리 크고 밝은 하나의 장수별이 비쳐들었다. 우루루―드르릉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는 웅글진 소리가 집뒤의 그 산마루에서 장엄하게 메아리쳐왔다. 때를 같이하여 갑작스럽게 불어닥치는 바람이 흰구름같은 눈가루를 날려 언덕우의 귀틀집을 휩쌌다. 뽀얗게 서린 눈안개에 가리워 금시 눈앞에 보이던 자그마한 귀틀집의 형체도, 불빚이 어린 뙤창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수운대신사가 태여날 때 집근처에 있는 구미산이 사흘동안 크게 소리를 내고 단아한 구름이 사흘동안 집을 둘러쌌다더니 백두산쪽하늘에 문득 장수별이 나타나 신비하게 빛나고 저 귀틀집 뒤산이 대명하여 울부짖고 홀연 구름처럼 떠오른 눈안개가 집을 둘러싸는건 이 어인 일인고? 황홀한 신비경에 잠긴 박인진은 자욱한 눈안개속에서 두손을 단장우에 겹쳐얹은채 거대한 원시림을 마구 휘잡아흔드는 질풍의 울부짖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현듯 눈안개의 소용돌이속에서 그 무엇인가 질풍을 타고 하늘에서 날아내리는듯 한 이상한 펄럭임소리가 나더니 놀랍게도 박인진의 눈앞에 후리후리한 몸에 희끗희끗한 날개가 달린듯싶은 기인이 나타났다. 금시 미친듯이 불어치던 질풍은 일순간에 고요히 잦아들고 뽀얗게 회오리치며 천지를 가리웠던 눈안개도 서서히 걷히였다. 말끔하게 닦아낸것 같은 검푸른 겨울 밤하늘에는 또다시 뭇별들이 나타나 령롱히 반짝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질풍과 눈안개가 일기전에 그리도 찬란하고 신비한 광채를 휘뿌리던 장수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별들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왕별인 그 장수별이 빛나고있었던 자리에는 은빛보석알갱이들을 포석으로 깔아놓은 하늘길같은 은하수의 한끝이 대여져있을따름이였다. 어리둥절해서 장수별이 없어진 하늘과 자기 눈앞에 출현한 희끗희끗한 날개가 달린 기인을 번갈아 살펴보고있던 박인진은 어쩐지 자기 몸이 둥 떠오르는듯 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실로 기이한 일이였다. 수운대신사의 모친인 한씨부인이 최산 림공의 댁에 들이닥칠 때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해와 달이 강림하여 흉중에 들어오고 대기가 오체를 둘러쌈과 동시에 몸이 질풍을 타고 무한의 허공을 비행하는감이 있었다고 하더니 장군님께서 계시는 귀틀집 언덕아래에 들이닥친 이 보잘것없는 교도의 신상에 그 무슨 기적이 생겨나자고 그와 상사한 느낌이 드는것인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기인은 박인진이 서있는 언덕아래로 걸어내려왔다. 기인의 날개는 어느새 백포로 변해버린듯 기인을 감싼 백포자락이 무릎언저리에서 너불거렸다. 어두워서 그 용모를 알아볼수 없는 기인의 얼굴에서 오직 두드러지게 유표한것은 어둠속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안광이였다. 꼭 마치 하늘에서 장수별이 은하수를 타고 땅에 내려온것 같았다. (이 기인이야말로 하늘사람이 아니신가?) 박인진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가 꿈을 꾸고있는것만 같아 단장우에 겹쳐얹고있던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여전히 눈빛이 환한 이상한 사람의 거룩한 영상이 우러러보였다. 그리고 그가 꿈을 꾸고있지 않다는것을 일부러 깨우쳐주기라도 하듯 옆에서 속삭이는 리창선의 귀속말이 들렸다. 《도정님,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뭐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새삼스럽게 자기앞으로 마주내려오시는 기인을 우러러보았다. 《장군님이십니다.》 거듭 깨우쳐주는 창선의 속삭임을 들은 박인진은 모자를 벗으며 눈을 감고 장군님앞에 경건히 머리를 숙였다. 하늘에서 은하수를 타고 질풍과 함께 백두조종의 성지에 강림하신 하늘의 성인 같이만 여겨지는 장군님의 거룩한 발자국소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들다가 멎었다. 백포자락에서 풍긴 한줄기 가벼운 바람이 휘―청신한 기운을 끼얹으며 박인진의 얼굴을 스쳤다. 《누구들이요?》 의아쩍게 물으시는 그 거쉰듯 한 쇠소리나는 굵은 목소리는 하늘에서 울려오는 먼 우뢰소리같았다. 《사령관동지, 보충중대의 리창선입니다.》 리창선의 대답이였다. 《아 창선동무요? 지금 도착하는 길이요?》 《네, 박인진도정을 모시고왔습니다.》 《모셔왔소? 수고했구만.》 창선을 치하하시며 자기에게 시선을 돌리시는 장군님을 우러러 박인진은 정중히 아뢰였다. 《소생이 바로 천도를 숭상하는 도정 박인진이로소이다. 장군님을 알현코저 이렇게 왔소이다.》 박인진은 말을 마치며 두손을 쳐든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까? 저도 도정님을 마중나와 기다리던 참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반가이 감싸잡으시였다. 《이렇게 어두워지도록 멀고 험한 눈길을 헤쳐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어서 올라갑시다.》 장군님께서는 친히 그를 부축하시며 좀전에 내려오시던 언덕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조심하십시오. 여기가 좀 미끄럽습니다.》 이 모든것이 박인진에게는 그저 꼭 꿈에서 당하는 일같이만 여겨겼다. 그는 자기가 어찌하여 황송하다는 말씀 한마디조차 여쭈지 않고 버젓이 그이의 부축을 받으며 언덕길을 춰올라왔는지, 또 자기를 이곳 성지까지 안내해온 리창선은 어느짬에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또한 어느결에 자기가 작고 아담한 귀틀집안에 들어와 장군님께서 권하시는 자리에 무랍없이 들어앉았는지 얼떨떨했다. 장군님께서는 무슨 부하되는 사람이 찾아왔는지 잠시 문밖에 나가시였다. 집안에 혼자 남은 박인진은 얼떨떨했던 정신을 수습하며 집안을 휘둘러보았다. 이 단간귀틀집안의 기물은 모든것을 도끼 하나로 만들어냈다는것이 요소요소에서 대뜸 알렸다. 무엇이나 도끼로 깎고 다듬은 흔적들을 간직하고있었다. 벽체는 강대를 도끼로 정성껏 다듬어 매끈한 면이 안으로 가게 귀틀을 쌓아올렸고 천반도 역시 그렇게 만들어져있었다. 불이 켜진 석유등이 놓여있는 책상과 걸상과 침대도 그리고 출입문도 결이 바른 마른 강대를 쪼개고 다듬어 만든것이였다. 벽체의 귀틀짬에는 백두산의 고산이끼들이 틀어박혀져있었다. 어둑시근한 귀틀집안에 푹 배여있는 태고연한 고산정취… 옛날에도 아득한 옛날 환웅천왕이 하늘에서 3천도중을 거느리고 한박 뫼꼭대기 신단수아래에 내려와 인간의 삼백륙십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며 아들 단군왕검을 낳고 조선이라 부르는 나라를 세우도록 할 때에 지낸 고장이 예가 아닐가? 또 그때 지내던 집도 이런 귀틀초막이 아니였을가? 귀틀집안을 둘러보는 박인진의 머리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현란한것이라군 아무것도 없는 귀틀집안쪽벽에 커다란 조선지도가 붙어있었다. 그것이 온 집안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우는 유일한 장식이였다. 단군왕검이 건국한 이래 5천년동안 찬란한 력사를 이어오다가 저 섬오랑캐놈들에게 빼앗기고 짓밟혀 빛을 잃고 얼을 잃은 맑은 아침의 나라, 오매불망 그리운 내 나라 조선은 건국의 옛성지 백두산의 한골짜기에 자리잡은 이 귀틀집안에서만은 아름답고 자랑찬 제모습을 한껏 떨치고있었다. 박인진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그렇게 커다란 내 나라의 초상을 한참동안이나 감개무량히 바라보았다. 지도옆에 탄피를 박아 만든 말코지에는 권총갑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내 나라 조선을 지켜 그 지도옆자리를 차지하고있는듯싶었다. 문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군님께서 들어오시였다. 박인진은 자리에서 황황히 일어나며 이제 비로소 불빛앞으로 다가오시는 장군님을 온전히 뵈왔다. 환한 미소를 머금으신 장군님의 안광은 어찌나 밝은 영채를 뿌리는지 해님을 마주 향해 볼 때처럼 눈이 시그러울지경이였다. 장군님의 안광에서 여적 그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눈부시게 이채로운 빛을 감수한 박인진은 자꾸만 눈을 껌벅거렸다. 《뭘 일어나십니까? 앉으십시오. 이 따뜻한 난로옆에 앉으십시오. 산에서 살다보니 귀한 손님이 와도 방석 하나 깔아드리지 못합니다.》 네모진 난로에 장작 몇가치를 집어넣으시고 구들로 올라오신 장군님께서는 박인진을 마주하여 소탈하게 올방자를 틀고 앉으시였다. 《도정어른께서 멀고 험한 길을 마다치 않고 이렇게 우리에게까지 찾아와주어 대단히 고맙습니다.》 장군님께서 하시는 다정한 인사의 말씀에 박인진은 황공하여 머리를 숙였다. 《장군님, 황감한 말씀이옵니다. 소생은 장군님을 만나뵙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도 그 소망을 이토록 수월히 이룩하게 될줄 몰랐소이다. 장군님께서 저의 외람된 소망을 너그러이 헤아려주신 덕에 저는 이 성스러운 자리에 와앉았소이다. 장군님께서 벌리신 항일독립전에 단돈 한잎 광복운동기금으로 보탠적 없는 제가 장군님의 하해같은 은총부터 받아 장군님을 알현하는 영광을 지니고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그는 또다시 머리를 숙였다. 장군님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광복운동기금으로 돈 몇잎을 보탰는가 안보탰는가 하는것보다 우리는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그 마음을 더 중히 여깁니다. 나는 도정님이 지금껏 나라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변치 않고 귀중히 간직하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십수백 차량의 황금덩어리보다도 왜적을 몰아내고 내 나라를 다시 찾자는 고결한 뜻을 변함없이 간직하고있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는 몇백배나 값이 있는 힘으로 되고 보탬으로 됩니다. 그전날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입으로 왜적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본따서 〈동조동근〉이요 〈내선일체〉요 하는 말들을 외우고 〈민족개조론〉을 부르짖는 왕년의 〈우국지사〉들이 우후죽순같이 생겨나고있는 오늘과 같은 말세망국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민족의 얼과 량심을 버리지 않은 도정님과 같은분을 만난다는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장군님의 말씀에 박인진은 더욱더 옹색해져서 안절부절못했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사실 얼굴을 들고 장군님을 뵈옵고있을 면목이 없소이다. 그간 저는 한때나마 유격대에 대한 옳바른 리해를 가지지 못하고 민심을 흉흉케 하는 의롭지 못한 무장단으로 여겨왔습니다.…》 박인진은 자기가 유격대를 심히 모독적으로 곡해하고있었던 사실을 숨김없이 실토했다. 《도정님이 우리에 대해서 잘못 알고계시다는데 대해서는 나도 이미전부터 알고있었습니다.》 장군님의 그 말씀에 박인진은 흠칫 놀랐다. 《도정님이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유격대를 함부로 믿지도 말고 돕지도 말라고 충고했던 사실들도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정님이 우국지심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 유격대에 대해서 옳은 리해를 가지게 될 때에는 반드시 지금처럼 되리라는것을 믿었습니다.》 박인진은 스스로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선덕어른이 장군님은 천리혜안이라시더니 예 앉아계시면서도 바깥세상의 일을 환히 다 내다보시고계시였구나!) 장군님께서 자기 마음속도 죄다 환히 들여다보시는것 같아서 그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네, 제가 약수동에 사는 지기 박로인이 유격대에 소를 보냈다는 말을 듣구 유격대앞에 죄될 말을 했소이다. 우리 동덕들한테두 지양개의 김정보씨가 유격대에 랍치돼간 얘길 하면서 장군님앞에 죄될 소리를 했소이다. 제 그후 박로인을 다시 만나 장군님께서 소를 돌려보내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구서야 경박한 실언을 한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기 시작했소이다. 제 그때는 장군님 휘하의 군사들이 덕망높은 의군인줄 몰랐소이다. 제 이번에 유격대에 왔다간 김정보씨도 만나보고 더구나 장군님께서 베풀어주신 창선이의 잔치까지 당하면서 실로 많은것을 깨닫고 느꼈소이다.》 박인진은 지난날의 자기 소행을 진정으로 뉘우치며 장군님앞에 사죄했다. 《서로 잘 모르고보면 곡해도 생기기마련인데 지나간 그쯤한 일을 두고 사죄할것까지 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우선우선하게 말씀하시였다. 《중요한것은 지난날보다 앞날입니다. 앞날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마음과 뜻을 합치고 일심동체가 되여 싸워나간다면 지난날의 일시적곡해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수 있을것입니다. 이미 만나본 우리 대표에게서 들었겠지만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왜적을 미워하는 각계각층 동포들을 다 결집하여 거족적인 항일대전을 벌리기 위해서 지난봄에 조국광복회라고 이름한 반일민족통일전선체를 내왔습니다. 우리는 량심적인 천도교인들도 우리와 함께 광복의 기치를 들고 거족적인 항일대전의 대군을 이룰것을 희망합니다. 도정님이 잘 알고계시겠지만 지난날 수많은 동학도들이 얼마나 애국적으로 싸워왔습니까? 동학은 시초에 애국적이였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가장 이름높은 대시인이였고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28대손이라고 하는 수운 최제우선생이 천도를 창명하고 그것을 동학이라고 별명지은것부터가 조선적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지 않습니까?》 박인진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조선을 동국, 즉 동쪽나라라 이르니 최수운대신사님께서 이 동국의 학문으로 된다는 뜻에서 동학이라고 별칭한줄로 아나이다.》 장군님께서는 가벼이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동학은 〈보국안민〉이라든지 〈구제창생〉같은 애국애민적인 구호를 자기의 리념으로 내세웠기때문에 다른 종교들보다 가난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퍼졌습니다. 동학도들은 〈보국안민〉을 위해서 지난날 피도 많이 흘렸습니다. 갑오농민전쟁때에 동학조직인 〈포〉와 〈접〉들이 피압박농민대중과 함께 잘 싸웠습니다. 나는 도정님의 가친되시는이도 갑오농민전쟁때 동학의 한 접주로서 그 애국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쌓아올렸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갑오농민전쟁은 왜적들을 우리 조국강토에서 내쫓지도 못했고 매국위정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은것도 막아내지 못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해내지도 못했지만 그 거족적애국항쟁은 우리가 마땅히 자랑해야 할 우리 인민의 자랑찬 애국력사를 창조해놓았습니다. 만일 갑오농민전쟁의 최전성기에 호서지방의 〈북접〉군을 총지휘하고있던 최해월신사나 〈북접통령〉이였던 손의암성사같은 동학의 2대, 3대 교주들을 비롯한 천도교의 지도층이 전봉준의 호남 군과의 련합제기에 제때에 응하고 서울진격을 방해해나서지 않았다면 력사는 얼마간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한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각지, 각계의 모든 반일애국력량이 일치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서로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싸웠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만큼 우리 조국땅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시키기 위해서는 왜적을 미워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력량이 한데 뭉쳐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반일의 기치밑에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한 거족적인 반일통일전선체조직이 바로 조국광복회입니다. 그러므로 반일적이고 애국적인 천도교인들도 조국광복회 두리에 굳게 뭉쳐 조선의 모든 반일애국세력들과 함께 손잡고 넓은 반일전선을 펼쳐야 할것입니다.…》 박인진은 더더욱 경탄에 찬 눈길로 장군님을 우러러뵈왔다. 얼굴에 잔주름살이라군 단 한줄도 잡혀있지 않으신 젊디젊으신 장군님께서 어쩌면 지난날 동학사의 세세한 내막마저 저리도 환히 꿰뚫고계시는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왔다. 장군님의 천만번 지당하신 말씀에 감복된 그는 장군님앞에 자기의 결심을 아뢰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출입문밖에서 손기척소리가 나더니 홍안의 애젊은 유격대원이 들어왔다. 묻는듯이 장군님을 쳐다보는 그 유격대원에게 장군님께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회중시계를 꺼내보시였다. 《벌써 아홉시가 되였는데 저녁식사나 나누고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장군님께서 박인진을 돌아보시며 하시는 말씀이시였다. 저녁 아홉시, 천도교인이면 누구나 어김없이 청수 한그릇을 정히 떠놓고 마음을 정화시키며 한울님앞에서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각이였다. 그 어느 천도교도이건 또 천도교도가 그 어떤 곳에 가있건 이시각에 그것을 어길수는 없는 일이다. 갑오년에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뭇 동학도들은 혈전의 전장에서도 이 시각에 닥치면 역시 청수를 떠놓고 주문을 외웠다고 했다. 이 세상에 태여난후 꼭 50년이 되는 이날 이 시각까지 박인진이 역시 어느 하루도 그것을 어겨보지 못했다. 수운대신사가 천하의 인심풍습을 살피고 제세안민의 도를 구하며 17년간 세상을 떠돌아다닐 때 대신사와 친히 안면을 익혔고 후에는 대신사께 충실한 동학신봉자로 되였던 부친은 동학접주로서 박인진이 능히 자리에 앉을수 있는 두살잡히던 때로부터 저녁마다 자기옆에 무릎을 꿇어앉혀놓고 청수앞에서 주문을 외우는데 습관시켰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부친이 죽창을 들고 전장에 나가고 집에 안계시던 갑오년에는 여덟살되는 박인진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청수를 떠놓고 모친과 함께 주문을 외웠었다. 지난 쉰해동안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것은 기미년 3.1만세후 왜적들에게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던 때밖에 없었다. 옥리들이 그렇게 할수 없게 한때문이였다. 그밖에는 어느 하루도 어겨보지 못한 청수 모시는 교례를 박인진은 쉰살만에 처음으로 지금 장군님께서 거접하시는 이 귀틀집에 와서 어기게 된것이다. 홍안의 유격대원을 뒤따라 누런 군복치마를 입고 낭자머리를 튼 중년의 녀대원이 법랑소랭이에 음식그릇들을 담아들고 들어왔다. 녀인답게 박인진을 보더니 단정하게 가리마를 낸 머리를 숙여 말없이 인사를 하였다. 귀밑머리에 흰머리칼이 몇오리 섞인 나이 마흔전일듯 한 녀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웬일인지 녀인에게 상은 아직 차리지 말고 음식 그릇들을 소랭이에 담은대로 두라고 이르시며 그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잠시 나가셨다가 혼자 들어오시였다. 그이께서는 통나무 앉은책상우에 있던 몇권의 책들과 잉크단지와 필갑을 치우시고 상을 반반히 비우시였다. 얼마후 다시 출입문이 열리더니 좀전에 들어왔다 나갔던 그 녀인이 이번에는 마주엎은 하늘색 법랑그릇 한쌍을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나타났다. 녀인은 그 그릇을 반반히 비워져있는 상 복판에 놓고 다시금 박인진에게 머리숙여 인사하고는 뒤걸음쳐 출입문쪽으로 물러갔다. 그 녀인이 밖으로 나가자 장군님께서는 박인진을 상앞으로 청하시였다. 《이리 와서 청수를 모시도록 하십시오. 이곳의 소백수는 백두산곡에서 슴새여나오는 청산의 벽계수로서 티 한점 없이 맑고 정갈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청수를 담을만한 놋그릇이 없어 그대신 깨끗한 법랑그릇에 담아오게 했습니다.》 상우에 놓인 정갈한 청수그릇을 본 박인진은 상곁에서 물러서며 장군님앞에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장군님께서 청수를 모시도록 해주시리라고는 도무지 상상도 못했던것이다. 《장군님, 제 어찌 장군님앞에서 감히 청수를 모시겠소이까?》 《도정님은 천도를 숭상하는 어른인데 수십년간이나 하루도 어김없이 지켜왔을 자기 법도를 여기서라고 어겨서 되겠습니까? 지금 바로 아홉시 정각입니다. 마침 시각을 어기지 않게 됐으니 어서 청수앞에 앉아 심고하고 주문을 외우도록 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진정으로 권하시였다. 천도교도의 법도마저 헤아려 그것을 어기지 않도록 보살펴주시는 장군님의 은정에 박인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장군님, 청수를 모시지 않아도 장군님께서 이렇게 헤아려주시니 제 마음은 순편하옵니다. 제 천도교도라 한들 어찌 우리 천도교를 믿지 않으시는 장군님앞에서야 우리 법도대로 따르겠습니까? 장군님앞에 온 이 자리에서야 장군님의 법도를 따르는것이 옳은 처사일줄로 압니다.》 《그 누가 하늘을 믿는가 안믿는가 하는것은 사람의 권리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줘야 할뿐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또한 존중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사와 요구대로 자기가 믿고싶은것을 믿을 권리를 보장받고 보장하게 하는것이 우리의 법도이며 또 앞날의 광복된 조선에서 그렇게 하자는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도 그 일곱번째 조항에 모든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없는 인륜적평등을 보장하며 녀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히 할데 대해서 밝히고있는것입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어서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외우도록 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두손으로 박인진의 팔을 다정히 잡으시고 청수가 놓여있는 상있는데로 가볍게 떠밀어주시기까지 하시였다. 박인진은 어쩔수없이 청수가 놓인 상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우에 덮인 그릇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얀 법랑을 안에 입힌 정갈한 그릇에는 그지없이 맑디맑은 물이 고요히 담겨져있었다. 그 물을 엄숙하게 들여다보고 앉은 박인진의 눈에 문득 조선의 모습이 비껴들었다. 분명 물속에 오매불망 못잊는 조선의 모습이 뵈였다. 어쩐 일인가싶어 한참이나 의아히 그릇안을 들여다보고있던 그는 머리를 들어 맞은편의 귀틀벽을 쳐다보았다. 바로 정면에 붙어있는 조선지도가 청수속에 비껴든때문이라는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리도 신통한 일이 있을수 있으랴? 이것도 한울님의 뜻이 아닌가? 이 나라 조종들이 마셨을 천지의 맑은 물이 백두산지심깊이에서 정화되고 다시 정화되여 이 그릇우에 옮겨지고보니 이 백두청수속에 조선의 모습이 비껴지는것이 아닌가! 전에없이 숭엄한 감정에 사로잡힌 박인진은 두눈을 사르시 감으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나서 심고를 하였다. 《한울님의 하해같은 은혜를 입어 소인은 오늘 이 백두산속 별천지에 왔나이다…》 심고를 하던 박인진은 문득 말을 끊었다. 그의 마음속 어디에선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던것이다. (그대가 이 백두산속 별천지에 와서 강군님을 뵈옵게 된것은 장군님의 하해같은 은혜가 아니였더냐?) 그렇다. 그것은 장군님의 은혜였다. 장군님께서 그의 절절한 소망을 깊이 헤아리시고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넓은 덕을 베풀어주신때문이였다. (장군님의 은혜가 곧 한울님 은혜인줄 그대는 아는가?) 그것은 박인진자신의 목소리였다. 박인진은 비로소 크게 깨닫는바가 생긴것이다. (오호라. 내 수십년간 한울님을 찾고 또 찾아 주유천하 수만리, 불출산외 수삼년 거쳤건만 오늘까지 찾지 못했고 뵙지 못했던 한울님을 예 와서 찾았구나! 수운대신사가 우리더러 사람속에서 한울님을 찾고 자기 마음속에서 한울님을 찾으시라 일렀거늘 어찌 대신사의 가르침을 명심치 못했던가? 사람속에 계신 한울님께서 예 계시는것을… 여기 계신 장군님께서 바로 우리 한울님이시구 조선의 한울님이신것을!!) 박인진은 대진리를 대각하기 시작한 동학도로서의 환희의 눈으로 자기의 청수같이 정갈한 마음속에 선명히 들여다뵈기 시작한 글줄들을 더듬었다. (저이의 마음이 곧 한울님의 마음이요, 저이의 덕이 곧 천덕이라,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저이의 마음을 알게 하고 가지게 하면 이 세상 사람은 다 신선이 될것이요, 그 덕으로 천하를 덮고 다스리면 천하에 덕치시대가 펼쳐지고 지상천국이 도래하여 자연 구제창생되고 보국안민도 스스로 이룩될지니 우리 천도교도들은 물론이요 2천3백만 배달민족은 마땅히 저이를 한울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섬기며 따를바로다.) 감개무량해진 박인진의 입에서는 저절로 스물한자의 주문이 청산류수로 흘러나왔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거듭 세번을 외우고난 박인진은 50년 가까이 저녁마다 청수를 모셔오며 붙은 습관대로 청수그릇을 들어 거기에 담겨져 있는 백두청수를 한모금 마시고나서 장군님께로 돌아앉았다. 《참말로 고맙소이다.》 그이 앞에 경건히 머리숙여 진정에 넘친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박인진의 얼굴에는 감개무량한 빛이 넘쳐흘렀다. 장군님께서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넓은 아량으로 관심을 돌리시여 친히 백두청수를 마련해주시고 그것을 모시도록 해주실줄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박인진이다. 유격대밀영에 들어와 장군님앞에서 백두청수를 모신, 50평생에서 가장 인상깊은 오늘의 이 일에 대해서는 땅속에 혼을 묻은 뒤에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더할나위없이 감격에 찬 경모의 눈길로 장군님을 새삼스럽게 우러러 뵙고있는 박인진의 마음속에서는 문득 희세의 위인이신 장군님께도 높이 숭상하는 그 어떤 존재가 계실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그러한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지 퍼그나 알고싶은 생각이 났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천도를 숭상치 않으시는 장군님앞에서 천도의 법도대로 청수를 모시고나니 장군님께 여쭈어 꼭 알고싶은것이 하나 있습니다.》 박인진은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장군님앞에 아뢰였다. 《무엇입니까?》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드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약간 쑥스러워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싶은것은 장군님께서도 제가 천도를 숭앙하듯 그렇게 높이 숭상하시는것이 있으신지 하는것이올시다.》 장군님께서는 뛰여나게 미목이 수려하신 얼굴에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시며 선뜻 말씀하시였다. 《나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적신앙대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여기고 높이 숭상하는 대상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온지? …》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위대한 존재로 여기고 절대적으로 높이 숭상하는 대상을 하느님이나 신이라는 비유를 써서 표현한다면 나의 신, 나의 하느님은 인민입니다. 나의 하느님은 근로인민대중입니다. 세상에는 인민대중처럼 전지전능하고 위력한 힘을 가지고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나는 인민을 가장 위대한 존재로 제일 귀중히 여기며 절대적으로 숭상하고 따르기때문에 자기를 인민의 노복으로 여기고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자나 위인도 가르친적 없는 이런 말씀을 듣고있는 박인진의 눈앞에는 박로인에게로 되돌아온 검정황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위를 잃어버렸다고 자기한테 와서 울던 마로인이 외동딸의 잔치날 덩실덩실 춤추던 모습도 떠올랐다. (인민이 바로 하나님이시라!) 박인진은 이제 비로소 어찌하여 약수동인민에게 그 소가 되돌아왔으며 어찌하여 지양개 마로인의 눈물과 한숨이 웃음과 춤으로 바뀌여지게 되였는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장군님께서 인민을 한울님처럼 존중하시고 떠받드시며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시기때문이였다. (인민의 노복이라 하시며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하시는 이분이야말로 마땅히 만백성이 떠받들어모시고 따라야 할 인민의 참다운 어버이이시고 우리의 한울님이시다!) 박인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찬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두손으로 구들바닥을 짚으며 장군님앞에 아뢰였다. 《장군님을 만나뵈온 소인의 감개무량한 지금의 심정을 그대로 장군님앞에 아뢰기는 어렵소이다. 저는 이 시각부터 장군님을 한울님처럼 모시고 따를 한마음밖에 없소이다. 소인은 제 한몸뿐 아니라 소인이 관할하는 8개 종리원의 동덕들은 물론이요, 전국의 수백만 동학도들도 가능한 한 전부가 장군님을 한울님처럼 우러러 섬기는 충신들로 되게 하겠소이다.》 이어 박인진은 천도교청년당원 백만명을 장군님의 휘하 독립전선에 내세우도록 자기의 영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겠다는 맹세를 다짐하였다. 《도정님이 수백만 천도교인들을 궐기시켜 우리의 항일대전을 적극 후원하게 하시겠다니 나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장래행복을 위해서 우리 함께 손잡고 나가봅시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며 환히 웃으시였다. 달같이 환한 웃음이시였다. 귀틀집 뙤창밖에서는 또 한차례 신비스러운 자연의 휘파람소리가 일어나 문풍지를 울렸다.
밀영에 돌아가면 자기들의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장군님께 올려달라고 가시집에서 정성스럽게 마련해준 떡보따리와 엿덩어리 그리고 꿩 두마리를 사령부작식대의 장철구에게 맡겨놓고 장군님께서 박인진도정과의 면담을 끝내시기를 기다리고있던 리창선은 자기 부대 사람들의 눈에 들켜 대원실에 끌려들어갔다. 리창선은 바로 이곳에서 신대원훈련을 받다가 잔치하러 나갔기때문에 그가 나타나자 대원실에서는 귀틀집이 들썽하게 벅적 끓어번지며 활기를 띠였다. 색시 데리러 갔다던 신랑자가 어디 가서 헤매돌아다니다가 색시도 안달고 이제야 돌아왔느냐, 처가집 장독에 빠졌더냐 뜨물통에 빠졌더냐, 잔치떡보따리 하나 안들고 무슨 면목으로 여기가 제 집이랍시고 기신기신 찾아들었느냐, 꽃같은 색시는 어데 감춰두고 지팽이같은 번대머리 령감쟁이만 달고 나타났느냐?… 뭇사람들의 입에서는 일시에 롱어린 질문의 소나기가 쏟아져내렸다. 색시가 어떻게 생겼던가, 꽃처럼 예쁘던가, 달처럼 환하던가? 영영 달아나버린줄 알았던 신랑자가 나타나니 눈속에서 피여난 백두산만병초같아지더라는 말이 있던데 정말 그렇게 웃던가 아니면 가슴에 매달려 울던가? 잔치날엔 유격대의 군복을 입었는가 아니면 늘크데한 그따위 바지저고리차림을 했는가? 신부하고 사과쪼각을 나눠먹으며 입맞춤하는 놀이랑도 있었는가? 결혼이라고 하는 세계를 신비하게만 생각하는 스물안팎의 새파란 총각대원들은 자못 진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미 그 세계를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흥미거리로도 되지 않는 뻔한것을 알아내려고 꼬치꼬치 캐여묻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색시도 안데리고 잔치떡보따리도 없이 돌아온데 대한 책벌로서 잔치때에 불렀던 노래와 춤을 여기서 재탕시키자는 의견도 나왔다. 창선의 잔치를 치르고 잠간 밀영에 들어왔다 다시 떠나간 권영벽이 전한 말에 의하면 홍두산 초막에 와있었던 김정보라는 령감쟁이는 성필이한테서 배워간 우리 유격대의 노래도 부르고 춤도 보여줬다던데 그걸 한번 흉내내보아라, 또한 장군님덕에 잃을번 했던 사위를 되찾은 마로인내외는 한평생 해본적 없는 이중창에 쌍무까지 췄다는데 그 이중창을 장철구아주머니를 상대로 해서 흉내내보아라 하는 따위의 요구도 제기되였다. 사람들이 이처럼 리창선을 극성스럽게 다모는것은 노래춤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그의 재간보따리를 털어내고싶었기때문이였다. 그는 비록 탁성이였지만 그 약간 갈린듯 한 목소리로도 어찌나 감정이 넘치게 노래를 잘 불렀던지 그가 북치며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면 귀없는 나무도 가지를 흔들거리고 감정없는 바위도 들썩거린다고들 하였다. 평소에도 곱살하게 생긴 단아한 얼굴에 늘 생글거리는 정다운 웃음을 담고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따뜻하고 유쾌한 기분에 잠기게 하는 리창선은 또한 기막히게 웃길줄 아는 말재주도 가지고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웃기자꾸나 하고들면 허리를 못펴고 대굴대굴 굴게 만들었다. 《하, 이렇게 질서없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서야 신랑자가 어리뻥뻥해서 누구 요구부터 들어줘야 할지 알겠소? 무슨 대책이 좀 서야 할것 같구만.》 어둑시근한 출입문쪽에서 강세호련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금방 전방차단소를 돌아보고 들어온 강세호는 대바람에 무슨 판을 벌리자는지 눈치를 채고 오락회집행자를 내라고 귀띔하는것이다. 《아무래두 창선동무네 정치지도원동무가 나서서 질서를 세워야겠소.》 부뚜막에 걸터앉아있던 김주현이가 곽두섭의 어깨너머로 오중흡을 넘겨다보며 일어나라고 눈짓했다. 오늘밤 박인진도정을 쉬울 잠자리를 다시한번 살펴보고 이옆으로 지나가다가 여기서 하도 떠들썩하기에 강세호보다 한발 앞서 들어온 김주현이였다. 장철구를 병원으로 따돌려놓았던 일뿐만아니라 김정보를 잘 알아보지도 않고 《악질지주》로 치부하고 붙잡아왔던 일들로 하여 사람취급에서의 경솔성과 좌경적처사를 두고 요즘 내내 심각한 자기 죄책을 느끼며 얼굴이 핼쑥해지도록 우울하고 고적하게 지내오던 그가 이런 떠들썩하는판에 끼여든것은 이 밤이 처음이다. 《한번 솜씨를 발휘하오.》 곽두섭이 역시 오중흡을 돌아보며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여느때는 아주 단정하고 참하다가도 일단 오락회같은것이 벌어지게 되면 누구보다 맵시있고 격이 있고 재치있게 오락회판을 운전하군 해서 자주 오락회집행자로 선출되군 하는 오중흡은 자진하여 일어나며 혁띠고리를 조였다. 단단히 잡도리를 하고 일어난것이니 그렇다는것을 알아먹고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어리석은 생각일랑 아예 버리는게 좋으리라는 암시였다. 《오락대장이 일어났군. 이거 진짜 판이 멋들어지게는 번져간다.》 벌써부터 웃음집이 흔들흔들해진 사람들이 오락대장의 출현을 환영하여 좌르르 박수를 쳤다. 오중흡은 뭔가 잘못되고있다는듯 가벼이 머리를 흔들며 살짝 손을 들어 그 박수를 제지시켰다. 《동지 여러분, 이렇게 함부로 순서를 섞갈리면 안됩니다. 무어나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대렬을 짓는데만 순서가 있는게 아니구 박수에도 자기 순서가 있습니다.》 이렇게 엮어대던 오중흡은 문득 한손을 리창선이쪽으로 뻗치며 목청을 돋구었다. 《자, 첫 박수는 새 생활의 첫페지를 성공적으로 열어젖힌 우리 7련대 랑군〈김빠이〉동무의 행복을 축하해서 우렁차게 울립시다.》 그의 호소대로 우렁찬 박수가 터져올랐다. 웅성웅성 끓으며 요란하게 쳐대는 박수소리로 하여 귀틀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열리는 출입문소리를 가려듣지 못하였다. 갑자기 뒤덜미가 시려나 뒤를 돌아다본, 출입문가에 서있던 몇몇 사람만이 허리를 약간 굽히시고 반쯤 열린 출입문안으로 조용히 들어서시는 장군님을 뵈왔을뿐이였다. 강세호를 비롯한 출입문가의 사람들이 그이께서 안쪽으로 들어가실수 있도록 자리를 내드리려고 하자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들어오셨다는 눈치를 보이지 말고 그냥 가만히 서있으라고 손짓하시였다. 방금 박인진도정과의 이야기를 마치시고 먼길을 걸어온 그가 피곤해진 몸을 쉬울수 있도록 김주현이 마련해놓은 잠자리에까지 친히 안내해주시고 돌아오시다가 리창선한테서 잔치이야기를 들으시려고 이 병실에 들리신 장군님이시였다. 하지만 바깥에서부터 여기서 무슨 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는가를 알아차리신 그이께서는 출입문곁의 뒤자리에 머물러서신채 오중흡의 축하호소에 호응하는 뭇대원들과 함께 박수를 치시였다. 《두번째 박수는…》 오중흡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사령관동지의 위대한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과 거족적인 조국광복회운동방침을 받들고 북부조선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령북천도교지도자의 방향전환과 밀영방문보장에 남모르는 애를 쓰며 수고를 한 풍산의 젊은 빨찌산 〈김빠이〉동무의 숨은 공로를 찬양해서 드립시다.》 또다시 야단스러운 박수소리가 일었다. 리창선이가 신부대신 어떤 거물급의 손님을 사령부에 안내해왔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 초문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손바닥이 터지도록 세차게 두드려댔다. 《세번째 박수는 출연자의 빛나는 성공을 축하하여 관람자들이 전불하는것인데 아직 출연자를 소개하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았다가 쳐주어야 하겠습니다.》 만장의 가벼운 박수속에 오중흡은 문제의 주인공이 앉아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모두가 누런 솜군복을 입고있는 가운데 유독 혼자 흰 광목저고리에 까만 조끼를 받쳐입은 리창선은 비록 머리를 안기둥 그늘속에 숨기고 앉아있었지만 유표하게 두드러져보였다. 그옆에 앉은 몇사람이 리창선더러 일어나라고 잔등이며 옆구리며 궁둥이를 찔러댔다. 그쯤 됐으면 응당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리창선이가 움쩍 일어 날 차비를 하지 않게 되자 오중흡은 그렇게는 못배겨낼걸 하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였다. 여러 사람이 허리를 굽히거나 모로 자빠지며 오중흡이에게 길을 틔워주었다. 《허허, 이거 아무래두 나서게 될걸 가지구 나한테 공연한 수고를 시킨다?》 오중흡은 혼자소리로 두덜거리며 징검다리를 건느듯 사람들속을 비집고 리창선의 등뒤로 다가갔다. 《영예의 무대에 나서는데 이거 불명예스럽게 끌려일어나지 말구…》 오중흡은 그의 등뒤에서 아량있게 권했다. 그러나 기둥의 시꺼먼 그늘속에 머리를 틀어박고있는 리창선은 한층 더 깊이 머리를 숙이며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처에서 졸장부노릇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거니 잔치하고 오더니 색시로 변했다거니 하며 떠들썩하는 가운데 그를 들궈 일구려고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가져가던 오중흡은 불시에 웃음을 지워버리며 다급히 물었다. 《왜 이러우?》 그 근방의 몇사람에게만 들린 그의 이 낮은 물음소리와 돌연히 변해버린 심상치 않은 표정이 여태 귀틀집안에 차고넘치던 흥겨운 분위기를 불시에 가셔버렸다. 시람들의 얼굴에 피여있던 웃음의 불꽃들이 꺼졌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뭇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없이 흐느낌에 떨고있는 리창선의 잔등판에 쏠렸다. 《정치지도원동무, 그 친구 울고있는게 아니요?》 목을 길게 빼들고 이쪽을 돌아보던 곽두섭이가 괜히 흥만 깨쳐 버린다고 힐난하는듯 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오중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하기두 잘한다? 너무 감격이 커서 그러는 모양이구만…》 어쩐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말로 중얼거리며 리창선의 곁에 다가간 곽두섭이도 정작 허리를 굽히고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대뜸 낯색이 달라졌다. 귀틀집안에는 야릇한 침묵이 서렸다. 《무슨 일입니까? 리창선동무?》 조용하면서도 저력있는 장군님의 음성이 울렸다. 출입문곁의 뒤자리에 서계시던 그이께서 밝은 앞자리로 사람들을 헤쳐나오시며 물으시였다. 장군님을 뵈온 리창선은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그늘속에 감춰져있던 그의 이그러진 얼굴에서는 굵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울음소리를 내지 말려고 앙다물고있는 량입술과 눈물에 흥건히 젖은 량볼이 경련을 일으키듯 푸들푸들 떨었다. 《창선동무, 무슨 일이 있었소?》 그의 앞으로 다가가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시며 조용히 다시금 물으시였다. 머리를 쳐들고 바로 지척에 계시는 장군님을 뵈온 리창선은 앙다물고있던 입술을 열고 무슨 말인가 몇번이나 하려고 애쓰다가 끝내 《장군님!》하는 한마디소리밖에 못하고 참아오던 흐느낌소리를 터치며 그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절통함을 못이겨 부르짖는듯 한 그의 목쉰 소리는 벌써부터 뭇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돌연한 불행과 슬픔을 받아안은 사람만이 그럴수 있는 설음의 분출이였다. 《울지만 말구 말하라구…》 가슴에 안긴 리창선의 량어깨를 틀어잡으시고 부축해주시듯 그를 바로세워놓으신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냥 머리를 떨어뜨리고 흐득흐득 떨며 흐느끼고있던 리창선은 애써 울음소리를 삼키며 다시금 머리를 들려 하였지만 끝내 채 들지 못한채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 원쑤놈들이… 그 악귀같은놈들이… 권영벽동지의 아버지를…》 그의 입에서 가까스로 흘러나오던 말마디들이 다시 울음소리에 삼켜졌다. 장군님의 안광에 준절한 빛이 비꼈다. 리창선의 량어깨를 틀어잡고계시던 그이의 손이 저절로 풀려져 내리시였다. 《아버지가 잘못됐소?》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시며 침착하게 물으시는 장군님의 조용하신 음성이였다. 《권영벽동지의 눈앞에서 두벌죽음을… 저놈들이 권영벽동지가… 지켜보고있는데서… 집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뭣이?》 그 엄청난 갑작스런 비보에 놀라시여 외마디 절규같은 물음을 하시는 장군님의 안광에서 푸른 번개가 일었다. 귀틀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에서 서슬푸른 분노의 창끝이 일시에 솟아올랐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소?》 《여기서 지양개로 내려가던 날입니다.… 가다가 산중에서 권영벽동지의 형님을 만났습니다.… 권영벽동지는 잠간 집에 들렸다 가겠으니 저보고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밤에 권영벽동지가 지양개에 왔는데 여느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했습니다. 제가 얼결에 아버님이 중태에 빠졌다는 형님의 말마디를 들은것이 있어서 물어보니 집에서는 다들 무고하더라고… 아무 일도 없다고…》 울음소리에 범벅된 말로 리창선은 이야기를 가까스로 이어나갔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저에게랑 눈치를 안보이구 제 잔치준비를 도와주구 잔치를 치러주었습니다.… 저희들을 축하해서 웃으며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목이 꽉 메여 리창선은 또 한참 말을 못했다. 손등과 손바닥으로 비오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마구 씻어댔다. 《아무런 기색도 안나타내구 박인진도정과도 만나 장군님의 편지도 전했습니다. 그리구 박인진도정의 회답편지를 가지고 밀영으로 떠나들어오면서 지시있을 때까지 저를 처가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권영벽동지가 여기로 떠나들어온 다음에 저는 아버지가 중태에 빠져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권영벽동지가 아무일 없더라고 한것이 수상쩍기때문에 장인이 김정보로인한테서 얻어다주는 산삼 한뿌리를 들고 권영벽동지의 집에 찾아가보았습니다. 형님과 만난 산등성이 아래 첫 마을이라던 생각이 나서 거기 갔더니… 집은 다 불타버리고 식구들은 남의 허청간에서 지내구… 원쑤놈들은 권영벽동지를 잡자구 아버지의 시신을 내가지 않은 집에 달려들어서…》 리창선은 자기가 어머니에게서 들은대로 그 처참한 아버지의 시신 화살광경과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고 그 치떨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참아냈던 권영벽의 모습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권영벽이가 그렇게 가슴속으로 그냥 삼켜넘긴 피눈물의 대가로, 원쑤놈들에 의하여 당하신 그의 아버지의 참혹한 두벌죽음의 대가로 신흥촌에 조국광복회의 첫 분회가 생기고 자기가 잔치를 하게 됐으며 박인진도정이 오늘 여기 들어오게 되였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 대폭발직전의 정적과도 같은 삼엄한 정적이 온 귀틀집안에 꽉 서려들었다. 그 정적속에서 나고있는 소리란 오직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마냥 울리는 리창선의 흐느낌소리뿐이였다. 《동무들, 왜들 이렇게 가만히들 서있소?》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안광으로 귀틀집안을 휘둘러보시던 장군님께서 문득 정적을 깨치시였다. 분노에 사무치신 음성이시였다. 주먹들을 부르쥔채 머리들을 수그리고 서있던 사람들이 눈물에 젖은 얼굴들을 버쩍버쩍 쳐들었다. 《권영벽동무는 창선동무의 잔치를 치르고 오늘밤 우리 밀영으로 나를 만나러 들어온 박인진도정의 회답편지를 가지고 며칠전에 사령부에 들어왔을 때에도 방금 여기서 들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소. 창선동무나 내가 그 사실을 알면 너무 가슴아파할것 같아서 잔치에도, 박인진도정과의 사업에도 많은 영향이 미치게 될것을 생각해서 집에 들렸다는 이야기만 하고 이런 말은 안했소.》 격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던 그이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구슬픈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 동무는 가슴속으로 흘린 자기의 피눈물로 동지의 행복을 지켰고 혁명의 리익을 지켰소. 아버지가 불타는 집안에서 두벌죽음을 당하실 때 권영벽동무에게 총이 없었는가, 분노가 없었는가? 그 동무에게는 훌륭한 권총이 있소. 원쑤 열놈도 쏘아제낄수 있는 권총도 있었고 원쑤 백놈도 찍어넘길수 있는 분노도 있었을것이요. 그러나 영벽동무는 무엇때문에 그 참혹한 아버지의 두벌죽음앞에서 아들의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씹어삼켰는가? 우리가 그 동무에게 준 중요한 혁명임무들때문이였을것이요. 혁명이 자기에게 준 임무를 수행하기전에는 죽을 권리가 없다는 자각으로 그 동무는 참혹한 두벌죽음을 당하시는 아버지의 시신앞에서 울지도 못하였소. 동무들! 혁명의 리익을 위해서 천추에 용서 못할 원쑤놈들에게 분노의 탄환을 한방조차 갈겨줄수 없었던 동지의 원한을 풀어줍시다.》 그이의 말씀이 떨어지자 일시에 분노의 함성이 터져오르며 무쇠처럼 틀어쥔 수백의 주먹들이 창대같이 쳐들렸다. 《우리가 이 백두산에 있는 한 백두산기슭과 압록강기슭에서는 놈들이 두번다시 그런 귀축같은 만행을 할수 없다는것을, 우리가 있는데서는 그 어떤 원쑤도 함부로 우리의 부모형제들과 우리 인민을 다칠수 없다는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놈들이 우리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가차없이 징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합니다.》 장군님께서 잠시 동안을 두시는 사이에 어느덧 그이의 옆에 곽두섭이가 다가섰다. 《사령관동지! 저를 보내주십시오! 》 불같은 청원의 말이였다. 《저는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는 그의 속을 태웠습니다. 영벽동무가 저때문에 아픈 가슴을 안은채 내려가서 그런 참혹한 일까지 겪었으니 얼마나… 얼마나…》 곽두섭은 끝내 말마디를 잇지 못하고 흑 소리를 내며 어깨를 떨었다. 《저희 중대를 보내주십시오.》 어느새 곽두섭의 옆에 나와선 오중흡이가 역시 울음에 젖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한마디의 청을 아뢰고 북받치는 눈물을 걷잡지 못해 머리를 숙였다. 련이어 사처에서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자기들을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좋습니다. 권영벽동무하구 같이 그전부터 오래동안 같은 중대에서 싸워왔던 곽두섭동무랑 오중흡동무랑 주동으로 삼아 강세호련대장동무가 징벌대를 편성하시오. 중요한 손님이 왔기때문에 내가 가지 못하는데 련대장동무가 인솔하시오. 원쑤놈들을 징벌하고 현지에서 부대적인 추도모임을 가지시오. 지금도 중요한 국내공작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후에 나가있는 권영벽동무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령전에 아들들의 눈물을 드리시오.》 장군님께서는 서리찬 명령을 내리시였다. 이튿날새벽 징벌전투대오는 사자봉밀영을 떠났다. 이리하여 장백오지의 원쑤들의 소굴에 불벼락이 떨어진 또 한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가 있은 다음 많은 사람들이 새로 조국광복회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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