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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리제순이 왔다간 다음 박달은 그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매일같이 초조하게 기다렸다. 리제순이 다녀간 이튿날 새벽부터 벌써 기다리기 시작한 박달이였다. 리제순이가 유격대와 련계를 취하고 다시 자기한테 소식을 전하자면 다문 며칠이라도 지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것을 뻔히 짐작하고있었지만 기다리는 마음이란 언제나 그렇게 리성적인것이 못되였다. 땔나무를 가지러 나갔던 안해가 황황히 들어오며 그 누가 찾아왔다고 일러도, 밖에 놀러 나갔던 어린아이가 마당안에 달려들어오며 《아빠》를 불러도, 밤중에 누렁이가 짖어도 그는 혹시나 리제순이 아니면 그의 련락원이 오지 않는가 하여 가슴을 울렁거리군 했다. 그는 아무데도 나다니지 않고 줄창 집에 붙박여 기다렸다. 감기에 걸렸다는 구실을 붙이고 행상을 나다니는것도 그만두었다. 어느날 어느 시각에 소식이 와닿을지 모르는것이다. 달갑지 않은 사람이 집에 와 앉아있을 때 소식을 전해줄 사명을 띤 그 누구인가가 들이닥칠수 있었으므로 공작위원회산하 조직원 외의 사람은 될수 있는껏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다. 오래간만에 《집일을 돌봐줄 기회》를 가진 박달은 헐어빠진 구름노전눈을 기우며 리제순의 소식을 학수고대했다. 정주간의 깔개를 다 깁고 웃방깔개까지 다 깁도록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어찌된셈인가? 왜 여직껏 소식이 없을가? 그때 리제순이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한건 아닌지? 혹은 다시 련락을 오다가 무슨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한건 아닌지?) 불길한 생각들이 갈마들기 시작했다. (유격대와 련계를 취하지 못한탓이 아닐가? 혹시 유격대가 어디로 이동해가기라도 하지 않았을가? 여기서 이렇게 펄쩍하게 앉아 기다리기만 할것이 아니라 신흥촌에 넘어가 알아보는게 낫지 않을가? 그러다 혹시 길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입술이 탈탈 말라들도록 애태우며 기다리다 못해 신흥촌에 넘어가볼가 어쩔가 하고 한창 망설이고있던 어느 하루아침, 방금 조반상을 물리고났을 때 가림마을의 곰보청년 덕삼이가 그의 집에 나타났다. 《소식이 왔소?》 《련락쪽지오다. 이른새벽인데 개가 몹시 짖어대길래 나가봤더니 어떤 낯선 사내애가 울안에 들어와있질 않겠소다. 덕삼아저씨네 집이 옳으냐구 묻구선 이걸 전해줍디다.》 덕삼은 담배쌈지안에 감춰가지고 온 련락쪽지를 내놓았다. 《너 어데서 왔느냐구 물으니까 강건너에서 왔다구만 말하지오다. 그래 난 선생님이 일러주던데서 온줄 알았소다.》 박달은 돌돌 만 종이쪽지를 펴보았다. 거기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밤 10시 모래터로 압록강을 건너가겠음. 대안에서 담배불로 원을 그려 도강안전신호를 해주기를 요망함. 통과위험지점들에서도 안전대책을 강구할것.
리제순의 글씨가 틀림없었다. 박달은 쪽지를 화로에 던져 태워없앴다. 《수고했소. 련락온 그 아이가 무슨 다른 이야기는 전하는게 없었소?》 《다른 이야긴 없구 박선생이 틀림없이 쪽지를 받았는지 그걸 꼭 알아가지구 오라구 했다오다. 만약시 그 아이가 지낙 일굽시까지 압록강을 다시 건너갈 형편이 못되면 가림리 우리 집 마당에서 밤 여들시에 불무지를 두무지 피워올리라구 했다오다. 박선생이 쪽지를 못받았으면 한무지만 피우라구 하더라오다.》 《그리구?》 《그게 다오다.》 박달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리제순이가 이번에 보내주게 될 소식에는 자기와 함께 유격대에 가자거나 유격대와 만나기 위해 어찌어찌 하라는 내용의 알림이 있을줄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련락쪽지에는 리제순이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연만 밝혀져있을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격대가 있는 곳으로는 가지 못하게 됐다는셈인가? 장군님을 뵈옵게 해달라는 나의 청원이 거절당했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청원이 어찌됐다는 사연은 한마디도 언급되여있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온다는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자기가 넘어온다는것을 미리 통고했을가? 사전에 아이를 련락원으로 보낸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시 권총이라도 얻어차고 오는게 아닐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극비문건이라도 품고 오는게 아닌지?) 어쨌든 철저한 안전대책을 취해야 할만큼 중요한 걸음임에 틀림없다. 박달은 덕삼이에게 련락왔던 소년을 날이 아주 어두워진 다음에 무사히 넘겨보내주며 약속된 시간을 어기지 말고 그의 집마당에서 련락을 받았다는 신호불을 지펴올리라고 일렀다. 덕삼이를 보내고난 다음 그는 한동안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마음같아서는 자기자신이 직접 모래터까지 리제순을 마중가고 싶었다. 그러나 박달은 가고싶어도 참아야 했다. 행상걸음을 떠나도 미리 주재소에 통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있는 박달이였다. 하물며 감기에 걸려 바깥에 얼씬 못한다던 그가 마을밖으로 나가게 되면 의심을 사게 될것이고 나아가서 리제순이에게 돌이킬수 없는 화를 미치게 할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낮이나 초저녁에는 집에 꾹 박혀있다가 아주 어두워진 다음에 슬그머니 마을에서 빠져나가야만 하였다. 박달은 비상련락망을 통하여 산하조직들에 비상지시를 내렸다. 그의 비상지시에 따라 갑산공작위원회라는 비밀지하조직이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신속하고 활기로운 조직적인 움직임이 사처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였다. 밤 여덟시 정각에 가림리 까치둥지를 떠인 물황철나무밑의 덕삼이네 집 마당에서는 두개의 불무지가 타올랐다. 모래터 대안의 압록강언덕밑에는 박달의 대리인으로 마중나간 믿음성있고 책임성있는 열성조직원이 개버들숲속에 숨어서 야광시계바늘이 열시를 가리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강언덕의 혜산―보천간 국경경비도로에서는 허리에 도끼와 낫들을 찬 몇명의 《나무군》청년들이 도랑창에 자빠진 두채의 발구곁에서 우물거리며 마사진 발구를 손질하기도 하고 쏟아진 나무단들을 다시 처싣기도 하면서 괜히 시간을 끌고있었다. 거기서부터 오풍동비밀아지트까지 이르는 15리가량 되는 숲속길옆에도 큰 저고리밑에 벼린 칼을 품은 수십명의 청년들이 드문드문 숨어서 자기들이 목숨바쳐서라도 지켜줘야 한다는 미지의 중한 손님이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밤어둠을 타서 리제순이와 만나기로 작정한 오풍동비밀아지트로 간 박달은 거기서 리제순의 도착시각을 초조히 기다렸다. 이밤의 매 시간은 리제순의 소식을 고대해왔던 지난 보름남짓한동안의 하루하루보다도 훨씬 더디게 흘러갔다. 아지트뒤골방에 켜놓은 외로운 등잔불을 지키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벽 저쪽에서 뚝딱거리던 벽시계가 여덟점을 쳤다. 덕삼이가 가림리의 자기집 마당에 불을 피워올려야 할 시각이였다. (덕삼이가 두무지의 불무지를 피워야 한다는걸 잊진 않았는지? 혹 실수해서 한무지만 피워올리지나 않는지? 제때에 시간을 맞추어 불을 피워올리기나 했는지? 성냥을 미리 건사해두지 않고 부뚜막같은데 놨다면 설겆이를 하던 물걸레에 성냥딱지가 젖었을수 있다. 성냥살이나 화약딱지가 젖었으면 덤비지 말구 얼른 부엌아궁에서 불티를 내다가 붙여야 하겠는데.) 덕삼이가 이 시각에 어떻게 하는지 보지 못하고 15리밖에 앉아 있는 박달은 걱정이 다심했다. 모든 일이 자기가 일러준대로 랑패없이 돼가는지 어쩐지 마음이 뒤숭숭하여 도무지 앉아배겨있을수 없었다. 그는 밖에 나왔다. 자기가 일러준대로 손님이 올 길을 잘 지키고들있는가를 한참이나 검열해보고 돌아왔지만 시간은 반시간도 지나가나마나했다. 그렇게 들락날락하기도 여러차례, 안절부절못하면서 안타깝게 가슴을 태우는 가운데 벽시계는 드디여 열점을 쳤다. 압록강건너편에서 도강안전신호를 기다리고있을 리제순에게 담배불로 둥그런 원을 그려보여야 할 시각이였다. (제때에 담배불을 붙이고 어둠속에 휘젓기나 했는지? 그 시각에 국경도로에 적순찰대나 혹은 의심스러운 길손이 지나가고있지는 않는지? 제순이는 대안에 제때에 와서 그 담배불빛을 보기나 했는지? 갑작스레 나타난 적순찰경비차의 전조등불빛이 제순이가 압록강얼음판을 타고넘는 순간에 그리로 비쳐들지나 않는지?) 실로 이밤처럼 갖은 의혹과 의문을 품으면서 그렇게도 많은 잔 근심걱정을 스스로 만들어내여 그 근심속에서 허우적이며 조바심친적은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박달이다. 웬일인지 불길한 환영만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 실로 이상한 일이였다. 리제순이가 꼭 아지트까지 와내지 못할것 같은 불안이 한순간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디여 벽시계가 열두점을 치도록 이제는 능히 와닿았어야 할 사람들이 오지를 않자 박달은 그이상 더는 외로이 가물대는 등잔불만 지키고 앉아있을만한 인내성과 의지를 잃고말았다. 그는 모래터까지 가볼 작정으로 개털모자를 썼다. 뒤골방문턱안에 들여놓았던 미투리를 신고 무릎걸음으로 등잔불곁에 다가가 불을 끄려고 바람을 불었을 때 불현듯 조심스럽고 날랜 발자국소리가 뒤울안을 돌아 문앞에 다가들었다. 《이리 오십시오.》 귀에 익은 속삭임이 들렸다. 마중나갔던 열성조직원이였다. 박달은 얼른 미투리를 벗어놓고 일어났다. 그가 미처 털모자를 벗어버리기전에 문이 열렸다. 《어서 들어들 가십시오.》 역시 귀에 익은 열성조직원의 목소리였다. 열린 문으로 쓸어드는 찬바람에 등잔불이 파르르 떨었다. 아주 짧은동안 문앞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라는 가벼운 입속말싱갱이가 있은 뒤에 토스레덧저고리에 괴나리보짐을 메고 누런 개털모자를 쓴 낮선 젊은 사람이 먼저 들어서고 뒤따라 빈몸뿐인 리제순이가 들어섰다. 리제순은 뜻하지 않았던 낯선 손님의 출현에 어리둥절해하는 박달을 먼저 자기가 모시고 온 낯선 손님에게 소개했다. 《이 동무가 바로 갑산공작위원회를 책임지고있는 박달동무입니다.》 박달을 유심히 보고있던 낯선 손님의 류달리 정기있는 눈에 부드러운 빛이 서렸다. 《그렇습니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낯선 손님은 왼손으로 성에가 하얗게 낀 털모자를 벗어쥐고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권영벽이라고 불러주시오.》 박달은 얼결에 마주 벗어들었던 자기의 털모자를 떨어뜨리며 손님의 언손을 자기의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손바닥에 장알이 박힌 억센 손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선전과장동지이시오.》 옆에서 빙긋이 웃음짓고있던 제순이가 알려주는 말이였다. 박달은 류달리 이마 넓은 손님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토스레덧저고리, 괴나리보짐, 개털모자, 눈이 묻은 행전, 투박한 통버선 그리고 미투리… 그저 보통농사군이나 다름없는 차림새다. 그는 리제순의 말이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에 있다는 높은 간부가 직접 자기따위를 찾아올줄 몰랐던 박달이였다. 낯선 손님은 등잔불밑에 꿇어앉더니 털모자안에 끼워둔 바늘을 찾아내여 그것으로 털모자안을 꿰맨 실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잠시후 그는 모자안에서 크지 않은 얄팍한 봉투 한장을 꺼냈다. 약간 접힌 봉투의 한귀퉁이를 정하게 편 그는 그 봉투를 박달의 앞에 내밀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신 친서입니다.》 《네?!》 얼결에 편지를 받아든 박달의 두손이 가볍게 떨렸다. 편지란 잘 아는 친지들사이에나 교환되는것인줄로 여기고있는 박달이였다. 그런데 장군님의 친서라니? 그 유명하신 장군님께서 갑산두메산골의 이름없는 사람에게 친히 편지까지 써보내시다니! 《어서 개봉하십시오.》 손님은 조용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권하였다. 그러나 박달은 그냥 봉투를 보고만 있다가 리제순이쪽에 내밀었다. 《제순동무.》 리제순은 자기를 쳐다보는 박달의 눈에서 감히 그 봉투에 손을 대기 주저하는 그의 심정을 읽자 봉투를 받아 웃쪽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찢어주었다. 박달은 여전히 후들거리는 두손가락으로 봉투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를 집어냈다. 웬일인지 손가락에 감촉되는 편지지는 명주천처럼 부드러웠다. 불빛아래 꺼내보니 아닌게아니라 그것은 종이로 된 편지지가 아니였다. 네겹으로 접은 명주천이였다. 등잔불밑에 바싹 다가앉은 박달은 명주천을 펼쳤다. 거기에는 활달한 붓글씨로 내려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조국을 사랑하며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국내의 애국자동무들 앞
국내에서 간악한 일제원쑤들과 싸우는 동무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것을 충심으로부터 원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동무들에게 파견하오니 서로 만나서 사심없는 토론들을 교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경 례 김 일 성
거듭하여 친서의 글줄들을 세차례나 더듬고난 박달의 열기띤 눈은 한동안 그냥 편지장에 머물러있었다. 간절히 뵈옵고싶어 자기의 모든 조직들에 다 줄을 놓아 그 행적을 찾고찾았던 김일성장군님 ! 박달자신 또한 행상짐을 걸머지고 압록강변의 마을들과 산발들을 그 얼마나 많이 헤매돌아다녔던가? 마음속엔 그리도 가까이 계셨지만 만나뵙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거의나 불가능한것으로 여겨졌던 바로 그 장군님께서 특사에게 친서까지 들리시여 자기를 찾아주실줄 박달이 어찌 알았으랴! 박달은 자기를 지도해줄만한 사람을 찾아서 4~5년동안이나 동해안일대의 큰 도회지들을 돌아다녔었다. 함흥에도 갔고 청진에도 갔고 성진에도 갔고 길주에도 갔었다. 그를 지도해주겠다고 스스로 찾아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언제나 찾아다닌것은 박달이였다. 그러나 알고보면 지도자로 될만한 별 건덕지도 없는 지난날의 제노라고 자처하는 운동객들은 그들을 찾아 일부러 먼길을 간 박달을 변한 시국도 모르는 시골뜨기 미치광이나 맑스 혹은 레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려는 어리석은 풋내기공산주의저능아 대하듯 멸시하고 랭대했으며 심하게는 만나주려고도 하지 않거나 문전에서 쫓아버리기까지 했었다. 그런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변질, 타락해버린자들이였다. 하지만 온 조선천지에서 유일무이하게 항일대전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백두산에서 강도왜적과 싸우시는 유명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갑산두메의 이름없는 공산주의동경자에게 친히 사랑의 손길을 뻗치시여 같이 굳게 손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것을 충심으로부터 원하신다는 그 마음까지 전해주신것이다. 박달은 아무말도 못한채 펼쳐들고있던 편지장우에 뜨거운 눈물 방울을 떨어뜨렸다. 명주천에 번지는 자기의 눈물방울이 그 귀중한 글자를 적실가봐 얼른 소매자락으로 훔쳐낸 그는 마침내 편지장을 앉은뱅이책상우에 정중히 올려놓고 여전히 후들거리는 손으로 자기가 입은 덧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유지에 싼 신문쪼박들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권영벽의 앞에 내밀었다. 《장군님을 만나뵙고싶었던 저의 심정을 대변하여 장군님께 올릴수 있는건 이것밖에 없습니다.》 권영벽은 의아해하는 눈길로 박달의 이슬맺힌 눈을 마주보았다. 《이건 뭡니까?》 《제가 류치장에서 모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대한 기사들입니다. 저는 이 기사들을 옷혼솔갈피에 감춰넣었다가 집에 가지고 왔댔습니다. 저는 오늘 제순동무가 온다고 해서 혹시 제순동무하구 같이 유격대 있는데루 가게 되는줄루 여기구 제 처도 모르게 건사해두고있던 이 기사쪼박들을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이걸 보면 유격대에서 장군님을 한번 기어이 만나뵈옵고 싶어했던 제 심정을 알아주실것 같이 생각되더군요. 장군님께서 이렇게 간부동지를 친히 파하시고 친서까지 보내주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권영벽은 유지를 펼치고 그안에 차곡차곡 놓인 신문기사쪼박지들을 얼핏얼핏 번져보았다. 그의 표정은 자못 엄숙했다. 마침내 그것을 마지막장까지 번져보고난 권영벽은 다시 차곡차곡 가려 유지에 정하게 쌌다. 《좋습니다. 이걸 제가 장군님께 전해올리겠습니다. 장군님을 만나뵈려는 박달동무의 심정도 제가 직접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미 리제순동무를 통하여 박달동무의 그런 심정에 대하여 알고계십니다. 장군님께서는 박달동무의 그런 심정을 헤아리시여 이번에 박달동무가 밀영에 오는 문제에 대하여서도 토론해보라고 하시였습니다. 오늘밤에 그 문제에 대해서도 같이 의논해봅시다.》 《아, 그렇습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박달은 다시한번 어려움도 잊고 권영벽의 손을 두손으로 꽉 잡아흔들었다.
백두산밀영에서는 이즈음 아주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냈다. 크고작은 부대들이 모두다 싸움터에 나가있었다. 곰의골어귀전투가 있은 다음 며칠간 백두산밀영에 와계시던 장군님께서도 다시금 전투부대를 거느리시고 싸움의 길을 떠나가시였다. 소백수골에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만 남아서 밀영을 지키며 호젓이 지내고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해진 밀영에 남은 사령부작식대원 장철구는 매우 허전하고 불안스러운 나날을 보내였다. 장군님을 곁에 모시고있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놓지 못하고 온갖 근심걱정에 잠기군 하는 장철구였다. 제 살붙이 하나 없이 오직 장군님만을 믿으며 살아가고있는 철구한테는 바람결에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그이의 신상에 해를 미칠것 같아 속이 뜨끔해지고 가슴이 솗아질 지경이였다. 장군님이 계시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수 없을 철구였다. 장군님이 계셔야만 그는 사는 보람을 느낄수 있었고 살아나갈 힘도 지탱할수 있는 녀인이였다. 장군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살아야 할 리유란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장군님을 위하여 살기때문이였다. 그가 사는 까닭은 오직 하나, 살아서 장군님을 보살펴드리고 위해드리자는데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것이 아니라 장군님을 위하여 살고있었다. 그는 자기가 없으면 장군님께 음식을 해드리고 빨래를 해드리는 등의 일을 그 누구도 자기만큼 해드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장군님께 아무리 충실하고 지극하다 해도 남성대원들은 한결같이 덜퉁하기때문에 알뜰하고 찬찬하게 해드릴수 없고 젊은 녀대원들 역시 젊고 경험없는탓으로 제대로 해드릴수 없다고 생각는것이였다. 이러한 철구인것만큼 단 하루이틀이라도 장군님께서 어디 가시여 자기가 돌봐드릴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마다 그는 장군님께서 어디서 끼니나 제대로 잡수며 지내시는지, 그게 구미에 맞기나 하는지, 옷은 덞어지지나 않았는지, 어디 걸려 찢어진데는 없는지, 그런걸 또 손수 깁고계시지는 않는지, 가시는 걸음은 무사했는지, 가계시는 곳은 안전한지… 하고 오만가지 근심걱정에 잠기면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하물며 요즘처럼 적들의 준동이 우심해진 때 밀영에서 나가계신 장군님을 기다리는 철구의 심정이 오죽하랴. 밀정들은 도처에서 욱실거린다지, 적의 《토벌》대들은 사처에서 산이란 산을 모조리 참빗 훑듯하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돌아친다지… 무슨 불길한 일이 언제 어디서 생길는지 모를 아주 위험천만한 때에 장군님께서는 안전한 백두산밀영에 계실 대신 도리여 적구에 나가지내시는것이다. 장군님을 전장에 떠나보내신 순간부터 모진 불안과 근심속에 잠긴 철구는 어느 한순간도 그 항시적인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금도 철구는 설겆이를 끝낸 뒤면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부엌아궁앞에 앉아서 장군님의 놋수저를 재가루로 닦으며 역시 그이의 끼니걱정이랑 하고있었다. 진달래꽃수를 놓은 주머니속에 넣어 따로 귀중히 건사하군 하는 이 놋수저를 철구는 매끼 설겆이를 끝낸 때마다 어김없이 윤기나게 닦아놓군 했다. 요즘처럼 장군님께서 이 수저를 쓰시지 못하시는 때에도 수저닦는 일은 어기지 않는 철구였다. 언제 어느 시각에 오시더라도 윤이 나는 아주 깨끗한 수저를 쓰실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음식그릇들을 받아놓으시고 그 수저를 드실적마다 부드럽고 인자하신 웃음을 지으시며 수고한다는 인사말씀을 언제한번 번지신적 없으신 장군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리운 장군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그려보며 수저를 닦는데 열중하고있던 그는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령부군수관 김주현이 들어왔다. 장철구는 손에 젖은 재가루를 묻힌대로 일어나 맞이했다. 《뭘하구있소?》 군수관은 그의 재묻은 손과 부엌아궁앞에 놓인 닦다만 수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얼하는지를 뻔히 보면서 그렇게 묻는것은 지금 철구가 하는 일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되였다. 《수저를 닦던중입니다.》 《설겆이는 끝냈소?》 김주현은 깨끗하게 닦아낸 가마와 정돈해놓은 그릇들을 돌아보았다. 《끝냈습니다.》 《그럼 수저를 마저 닦소.》 《무슨 급한 일이라두 있습니까?》 늘 엄하고 요구성이 높은 김주현을 좀 두려워할사 하는 철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일을 마친 담에 이야기합시다.》 김주현은 텅 빈 병실 안쪽으로 걸어들어가 어느 한군데 걸터앉았다. 호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더니 수첩에 적어놓은것을 연필끝으로 짚어내려가며 무엇인가 계산하기 시작했다. 철구는 웬일인지 몰라 궁금한 가운데 수저를 마저 닦았다. 공연히 마음이 어수선해지며 가슴이 후두두 떨렸다. 군수관이 수첩장을 뒤적거리고있는것을 보면 전장에서 가슴을 놀래울만 한 소식도 온것 같지 않고 마음이 부산해질만한 일이 생긴것 같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랭랭하게 느껴지는 군수관의 체취가 까닭모를 불안을 자아냈다. 하지만 철구는 그런 내색을 감추고 다 닦은 수저를 물에 몇번 깨끗이 씻고 마른 행주로 닦은 다음 새하얀 천쪼박에 정하게 싸서 수저주머니속에 넣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 주머니를 목에 걸어 자기의 품에 간수한 철구는 솜군복단추를 채우며 김주현에게로 다가갔다. 《거기 잠간 앉으시오.》 김주현은 여전히 무릎에 펼쳐놓은 수첩장에서 눈을 들지 않은채 손에 든 연필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철구는 맞은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는 김주현의 무릎우에 펼쳐져있는 수첩장우에서 무슨 수자들을 적으며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있는 절반쯤 짧아진 회백색연필과 그 연필을 부르쥐고있는 손을 건너다보았다. 마침내 수첩장을 덮어버린 김주현은 비로소 철구에게로 눈길을 들며 연필을 끼운 수첩을 솜군복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다른게 아니구… 아주머니가 이제부터 후방병원에 가서 환자들의 식사를 좀 보장해줘야 하겠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후방밀영에 림시 가서 며칠 일하다가 오라는것인지 아니면 사령부작식은 아예 내놓고 그곳에 가라는것인지? 군수관의 지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으면 좋을지 몰라서 철구는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역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병원에 와있다는 분옥동무하구 또 같이 왔다는 체네는 병원에서 옮겼나요?》 김주현은 그 물음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는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간만 찌프렸다. 《그 동무들은 재봉대와 보충중대로 나뉘여가게 되든지 어떻게 따로 조치가 있을거요. 한시간후에 후방부 운반대장동무가 말기르마에 식량을 싣고 병원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 동무하구 같이 갈수 있게 떠날 차비를 하시오. 그동안 여기서 수고가 많았소.》 김주현의 뒤말에 아연해진 철구는 두눈을 흡뜨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였다. 그동안 여기서 수고가 많았다? 그것은 이제 여기서는 더는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는것 즉 사령부 작식대원의 직무에서는 해임되였다는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곧 더는 장군님곁에서 지낼수 없으며 장군님께서 잡수시는 음식을 지을 권리를 박탈당한다는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였다. 철구에겐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였다. 장군님의 곁을 떠나서는 순시도 살수 없고 살아갈 멋도 없는 이 장철구더러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갑자기 다른데로 가라는것인가? 얼굴이 백지마냥 해쓱하게 질린 철구는 새파래진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동안 해오던 사령부작식일과 관련해서 무슨 인계라두 할것이 있거든 나에게 하시오. 뭐 특별한것이 있소?》 철구는 김주현의 이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채 그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렇게 알구 배낭이랑 준비하시오.》 군수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얼굴에 가벼운 바람을 끼얹으며 출입문밖으로 사라졌다. 눈을 밟으며 어디로인가 멀어져가는 그의 발자국소리도 사라졌다. 철구는 옆에 있는 기둥을 붙잡으며 쓰러지듯 주저앉고말았다. 그를 뻗쳐주고있던 마음의 기둥이 일시에 꺾어진듯 온몸이 불시에 나른해졌다. (어째서 나를 갑자기 다른데로 돌려놓는것일가? 어째서 나한테서 사령부작식일을 빼앗아내는것일가? 그동안 내가 한 일에 무슨 잘못된것이라도 있었을가?) 김주현군수관이 곰의골에서 백두산밀영으로 돌아왔던 날인 며칠전 밤중에 통강냉이를 삶다가 불앞에서 깜빡 존 일이 있었다. 그런탓에 옷에 튀여오른 불티가 하마트면 옷을 말짱 태울번 했다. 그리고 또 한번은 식사준비를 하다가 때아닌 심상치 않은 총소리에 놀라서 (후에 알고보니 그것은 어느 신입대원의 오발탄소리였다.) 일고있던 쌀알을 반줌이나 쏟드린 일이 있었다. 그런 일들을 두고 사령부의 작식대원자격이 없다고 본것일가? 그럴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째서 사령부작식일에서 손을 떼게 하는것일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철구는 문득 김주현이 곰의골에서 백두산밀영으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부터 전에없이 자기가 지은 음식을 미리 검식하기 시작했던 일을 상기했다. 그것은 바로 곰의골밀영에서 조막도끼와 독약봉지를 품고 유격대오에 숨어들었던 밀정의 자백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백두산밀영안에 떠돌던 무렵이였다. 그 소문을 들은 다음부터 철구자신도 장군님께서 잡수실 음식은 자기가 미리 검식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런만큼 군수관이 검식하러 오는것을 철구는 좋게만 여겼다. 장군님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반복검식하는것이겠지. 그러나 지금 이상하게 생각되는것은 군수관대신 경위대장이 장군님의 식사차비를 보러왔을 때에는 자기가 검식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검식을 안했는데 군수관은 이미 검식했다는 말을 들어도 반드시 재검식을 하군 했다는 사실이였다. (어째서 군수관은 내가 검식을 했다고 하는 음식도 기어이 다시 맛보았을가? 경위대장보다 더 철저했기때문일가? 아니면 이 철구가 못미더웠기때문일가?) 철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은 자기를 구원해줄 사람을 찾기나하듯 빈 병실 여기저기를 헤덤벼치며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아, 이걸 어쩌면 좋을가?) 그는 두손으로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바로 그게였어. 이 나를 믿지 못하기때문이였어. 지난날 《민생단》혐의자였던 나를 사령부작식대에 두기가 께름직하기때문에 다른데로 돌려놓는거야.) 김주현은 그를 돌려놓게 된 리유를 한마디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장철구는 도끼사건이후부터 자기를 대해왔던 김주현의 태도와 체취를 돌이켜보는 지금 그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이럴 법이 어디 있담? 이런 법이… 장군님께서 마안산에서 《민생단》문서보따리를 손수 불태우실 때 지난날은 다 무효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정말 어째서 지금껏 믿지 못해하는것일가? 그래 이것이 장군님의 뜻일가? 장군님께서도 나를 못믿으시는것일가? 나를 《민생단》이 아니라고 하시던 바로 그 장군님께서 사령부작식일을 시키셨는데 군수관이 장군님의 승인없이 나를 다른데로 돌려놓을수 있을가? 장군님께서 지금 밀영에 계신다면 속시원히 말씀드려보련만…) 철구는 기둥을 붙안고 마구 몸을 비틀었다. 시원히 말씀드려볼 장군님께서는 밀영에 계시지 않고 군수관한테는 하소연을 해봐야 소용될것 같지도 않고, 속타는 이 마음을 그 누구에게 말할데도 없고… 벌컥 문열리는 소리에 머리를 든 철구는 문안에 들어서는 군수관과 운반대장을 보았다. 철구는 억지로 태연하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머리를 수습했다. 《떠날 준비가 됐소?》 평소에 싫은줄 몰랐던 김주현의 목소리가 웬일인지 몹시 아츠럽게 들렸다. 하관이 빠른 김주현의 얼굴은 대뜸 표표하게만 여겨져 마주보기도 싫었다. 철구는 그를 보지 않고 일어나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준비랄것은 따로 없었다. 그저 자기 배낭을 메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작식하는 그릇이며 작식도구들도 배낭처럼 언제 어느 시각이나 잘 정돈된대로 제자리에 있는것이다. 《그럼 이젠 떠나도록 하시오.》 죽으라는 말보다 가라는 말이 더 섧다는것을 철구는 바로 이 시각에 체험했다. 이제는 사령부곁에서 떠나라, 장군님곁에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선언하는것 같은 그 말을 듣자 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것을 느꼈다. 불시에 눈앞이 캄캄해져서 사람도 문도 기둥도 잠자리도 모두다 분간해볼수 없었다. 정신이 어질거려 금시 쓰러질것만 같았다. 기둥에 다시 몸을 기대여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수습한 철구는 출입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 잃어버린것 없소?》 어둑시근한 출입문쪽에서 김주현의 말소리가 들렸다. (잃어버린것이?) 그렇다. 잃어버린것이 있었다. 철구는 멈춰서서 솜군복단추를 벗기기 시작했다. 맨아래쪽 단추로부터 하나씩하나씩 올라가며 벗기자니 어찌나 손이 무거운지 다음, 또 다음 단추까지 손을 올리기가 몹시 힘들었다. 가까스로 떨리는 손으로 목단추까지 벗기고 솜옷앞자락을 열어헤쳤다. 색날고 기운 외벌군복을 입은 그의 가슴앞에는 목에 건 수저주머니가 드리워져있었다. 진달래꽃무늬가 수놓아져있는 비단수저 주머니, 그것은 태운자리를 기워입은 그의 곁옷과는 달리 정갈하고 아름다왔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것을 건사해두는 그 주머니만은 언제나 가장 깨끗하게 지니고 아름답게 장식해왔던것이다. 한손으로 그 아름답고 정갈한 수저주머니를 잡고 다른 손으로 목에 건 끈을 벗기는 순간 철구는 비로소 눈뿌리가 저려나며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지난 봄 마안산숲에서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임명받았던 때로부터 하루 세번 잠간씩 끼니때를 내놓고 장군님의 수저를 영영 내놓고 떠나자니 참을수 없는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자기 몸보다 더 귀중히 건사해왔던 그 수저, 살뜰한 혈육이라고는 한사람도 지어 아이조차 없었던 철구에게는 여느 사람들의 어린것에 대한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과 정을 붙이고 지내던 그 수저를 내놓자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듯 아팠다. 철구는 목에서 벗겨낸 수저주머니를 두손으로 움켜쥐고 꿇어앉으면서 설음에 겨워 흐느껴울었다.
한밤중이였다. 눈이 오는 어두운 밤… 긴긴 행군종대는 캄캄한 어둠속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누벼나갔다. 앞에서는 척후중대가, 뒤에는 후위중대가 그리고 행군대렬의 중가운데서는 장군님과 함께 사령부직속경위대가 외줄로 늘어서서 가파롭게 비탈진 산굽이를 에둘러 소리없이 흘러간다. 어두워서 앞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고있는지 또 뒤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있는지 알아볼수 없다. 그저 바로 앞에 가고있는 사람의 형체를 대강 가려볼수 있을따름이다. 눈은 허리를 치게 쌓였다. 앞에서 낸 길을 따르지 못하고 졸다가 발을 헛짚으면 량옆에 교통호벽처럼 높이 쌓인 눈속에 온몸을 파묻히우고만다. 엄청나게도 많은 눈이 쌓인데다 또 역시 엄청나게도 많은 눈이 지금도 내리고있다. 바람이 눈을 몰아다 메워버린 깊은 구뎅이속에 잘못 빠져들면 두세길도 넘는 눈속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그럴 때면 앞뒤에 멈춰서라는 신호를 보내고 눈구뎅이속에 사라진 대원을 찾아낼 때까지 긴긴 행군종대가 모두 기다려주어야 했다. 가까이에 인가가 있다면 새벽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려왔을지 모른다. 날이 어둡자마자 시작한 행군을 예닐곱시간동안은 계속했던것 같다. 하지만 잔뜩 길어진 밤이 물러가려면 아직도 두세시간은 지나야 하지 않을가? 조용한 행군대렬… 사람들은 말없이 걸었다. 누구도 말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은 행군대렬이였다. 들리느니 수백의 발들이 생눈길을 헤치며 밟아가는 소리뿐… 이따금 나무가지에 걸린 옷이 찢기는 소리와 나무나 눈덮인 바위돌에 총대 아니면 물통이나 세면대야를 부딪치는 소리가 깊은 한밤중의 고요를 찢으며 졸던 사람들을 놀래웠다. 적구에 나온 다음 벌써 여러날째 밤낮으로 계속해오는 행군과 처처에서 벌려온 전투에 지친 대원들은 걸으면서도 잠을 잤다. 이런 생활에 익숙된 유격대원들은 자면서 걷는 법을 터득했다. 앞에서 가고있는 대원의 배낭을 잡기만 하면 얼마만큼 자면서도 능히 발을 옮겨놓을수 있는것이다. 경위대를 따르고있는 자기중대의 맨 앞자리에 서서 행군해가고 있는 《막담배》중대장 곽두섭은 졸지 않았다. 졸기는커녕 정신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것이 걱정이다. 차라리 졸리기나 했으면 간절한 담배생각을 잊을수 있으련만! 중대장인 그는 전투할 때에도 행군할 때에도 휴식할 때에도 항상 자기의 중대원들을 보살피고 돌봐야 했기때문에 갑절 더 많이 뛰고 소리치며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잠도 휴식도 항상 보통대원들보다 적게 가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도 그는 몹시 지친 어느 한 대원의 배낭까지 두개의 배낭을 지고 걸었다. 그러나 긴장한 그는 도무지 졸리지 않았다. 벌써 근 두시간전부터 그는 몹시 담배를 피우고싶은 생각에 시달림을 받고있다. 몇번이나 담배가루를 집어내여 냄새를 맡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주머니속에 들어가 분옥이가 만들어준 담배쌈지를 주무르고있다. 얼마나 오래동안 담배맛을 못본채 긴긴 야간행군을 해온것인가? 저녁식후, 이 행군을 시작하기전에 담배맛을 보고는 내처 보지 못하고 걸어왔다. 예닐곱시간동안 단 한모금도 맛보지 못하였다. 잠시동안의 휴식도 없이… 참으로 지루한 행군이다. 휴식구령은 어째서 내리지 않는가? 지쳐서가 아니라 담배생각이 못견디게 나서 어서 행군이 끝났으면싶다. 아니 담배를 피우라고 허락만 한다면 하루밤이 아니라 열흘밤 열흘낮이라도, 백리길이 아니라 2백리, 3백리, 천리길이라도 얼마든지 내처 걸을 자신이 있다. 북만에서 백두산으로 사령부를 찾아나올 때 바로 그렇게 쉼없이 수천리길을 한달나마 걷고 또 걷지 않았던가? 담배기갈이 나서 처음엔 닭알같은 군침이 돌고 입안이 바싹 말라들었다. 애타던 나머지 입술도 보숭보숭하게 말라들었다. 입술깝질이 죄여든다. 가슴속 깊은 곳에는 도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앉아 이리도 못견디게 담배연기를 삼키게 해달라고 온 넋을 괴롭히는것일가? 한모금만, 단 한모금만 그 구수한 연기를 들이킨다면 녹작지근한 다리에 기운이 뻗칠것 같고 답답한 가슴이 활 열릴것 같다. (딱 한모금만 어디서 몰래 피울수 없을가? 딱 한모금만! 그저 한모금이면 된다. 불빛이 안비치게 한모금만 피운다면 문제될것이 없지 않는가?) 쌈지를 주무르며 고민하던 곽두섭의 눈에 때마침 아주 알맞춤한 자리가 눈에 띄였다. 바로 길옆의 벼랑바위에 우묵하게 패워 들어간 넓은 짬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앞에서도 뒤에서도 아무도 담배불빛을 보지 못할것이다. 오, 참말로 고마운 바위짬이다 ! 곽두섭은 행군종대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성큼 나섰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두손으로 마구 파헤치며 몇걸음 눈속을 헤쳐나갔다. 벼랑짬안에 바싹 다가들어서자 눈은 정갱이까지밖에 올리차지 않았다. 그안에서는 볼을 스치는 바람기도 없고 목덜미에 날아드는 눈송이도 없다. 기막힌 은페장소다. 곽두섭은 솜군복겨드랑이에 젖은 손을 문대고나서 서둘러 담배 쌈지를 꺼내가지고 손을 후들거리며 되초 한대를 큼직하게 말아물었다. 그리고 부시를 쳤다. 담배질에 인이 박힌 곽두섭은 그쯤한 어둠속에서는 물론 눈을 감고서도 담배말기며 부시치기쯤은 식은죽먹기로 해냈다. 드디여 그렇게도 간절하던 그것이 페부속에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그리웠던 그 류달리 구수한 담배연기맛을 보는 순간 그는 정신이 휭 돌았다. 자기 몸이 허공중에 가볍게 떠오르는듯 한 환각… 그대로 둥 떠서 공중을 날아가는듯 한 야릇한 행복감을 느꼈다. 연거퍼 다섯모금을 빨고서야 대담무쌍하게 아직 절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눈속에 집어던진 그는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눈을 헤치고 나와 다시금 어둠속으로 흘러가는 행군종대에 끼여들어갔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일종의 수치감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행군규률을 어긴 중대장으로서 대원들을 보기가 떳떳치 못하게 하는 그것, 즉 량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것이다. × 부대는 새벽에 도착한 자그마한 화전마을에서 조반을 지어먹고 휴식하였다. 식후에 잠간만 눈을 붙인다는것이 그만 두시간가까이나 되는 잠을 자고 금방 깨여난 곽두섭은 역시 일어나자바람으로 담배부터 말아피워물고 마을경계근무를 나간 1소대원들을 돌아볼 작정으로 신을 신다가 자기한테 심부름을 온 라명희로부터 장군님께서 자기를 찾으신다는 전달을 받았다. 《그래?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모르겠소?》 《그건 모르겠어요. 그저 중대장동무가 깨여나거든 보내라고 그러셨어요. 깨여나지 않았거든 깨여난 뒤에 이르라시더군요.》 급한 부름이 아니고 여유있는 부르심이였다. 이것은 분명 그 어떤 군사적인 명령이나 지시를 주시려는것이 아님을 시사했다. 《다른 지휘관동무들은 찾지 않으십데?》 《찾지 않으셨어요.》 《동무는 어떻게 사령관동지께 갔댔소? 동무도 부르심을 받았댔소?》 《아니예요. 간밤에 행군하시다가 나무가지에 옷이 걸려 찢어진걸 손수 깁고계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기워드렸어요.》 《지금 사령관동지께서는 주무시지 않소?》 《아니, 주인집 어린애에게 무슨 곰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계십니다.》 《그래? 알겠소. 이제 곧 가겠으니 동무는 가서 쉬오.》 라명희를 보내고 그는 생각했다. 혹시 새벽에 내가 몰래 피운 그 담배불빛을 보신것이 아닐가? 은근히 마음이 켕긴 곽두섭은 벌써부터 가슴을 두근거리며 사령관동지께서 드신 집으로 찾아갔다. 무릎우에 대여섯살쯤 돼보이는 주인집 아이를 안고 앉으신 장군님께서는 코물도 닦아주고 손톱도 깎아주시면서 그 무슨 곰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의 제일 재미나는 대목을 들려주시는 참이였다. 그이께서는 곽두섭이 방안에 들어와 한옆에 거북스럽게 앉은 다음에도 한참동안이나 채 끝맺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시고서야 또 새 옛말을 들려달라고 조르는 어린것에게 좀 있다가 다시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정주간에 내보내시고 곽두섭이한데 말씀을 건네시였다. 《좀 눈을 붙였소?》 《네, 좀…》 벌써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진 곽두섭은 눈길을 떳떳이 쳐들지 못하였다. 《담배를 피우오. 주인집에서 내가 담배를 피우는가 해서 이렇게 권했는데 이건 아마 동무한테나 소용될것 같소.》 장군님께서는 써레기담배가 담긴 나무옹배기와 깨끗이 부셔낸대로 놓여있는 나무재털이를 곽두섭의 앞에 밀어놔주시였다. 《피우고싶지 않습니다.》 곽두섭은 두손을 황황히 뻗쳐 자기 무릎앞에 다가드는 담배옹배기에 대한 방어태세를 취했다. 여느때와 다른 그의 이런 태도를 보신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허허,〈막담배〉중대장이 담배를 피우고싶지 않다니? 이런 땐 사양말구 피우오. 이런데서나 실컷 피워야지.》 옹색해진 곽두섭은 이마에서 진땀이 났다. 《방금 피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마음속으로 그이상 담배를 권하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자신께 소용되시지 않는 담배를 그에게 권하고싶으시여 일부러 찾기나 하신듯 또다시 담배이야기를 하시였다. 《중대장동무는 언제부터 담배를 배웠소?》 그것은 벌써 심상치 않은 물으심이였다. 곽두섭은 가슴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그때문이였구나!) 쥐구멍에라도 기여들고싶은 심정이였다. 《열… 너덧살때부터입니다.》 그는 목덜미까지 시뻘개지며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퍽 일찍부터 인이 배겼구만. 집없이 떠돌아다닐 때였소?》 《네.》 일찌기 부모를 여읜 곽두섭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거나 깡통을 차고 부자집 쓰레기통 아니면 오물장을 뒤지며 음식찌꺼기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부자집 부엌문앞에서 음식찌끼보다 많이 얻어내는 소득물은 욕설 아니면 부지깽이 세례였고 오물장의 쓰레기더미에서 보다 많이 눈에 띄우는 《음식찌끼》는 담배꽁초였다. 언제인가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왜 자주 담배를 피우는가고 묻는 그의 철없는 물음에 아주 책임성없는 대답을 준적이 있었다. 배가 부르라고 담배를 피운다는것이였다. 정말 배고파서 담배를 피우느냐고 그가 다시 묻자 그렇다고 대꾸했다. 썩 후에 돌이켜보면 그때 무슨 속타는 일이 있어 자식의 귀찮은 물음에 아무렇게나 대답한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릴 때 건성으로 한 아버지의 말을 곧이들었고 또 곧이듣고싶었던 곽두섭은 쓰레기통에서 자주 보게 되는 담배꽁초로 주린 배를 달래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피워보기 시작한 담배가 차츰 인이 박혔던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가난과 굶주림이 멍들게 해준 악습이였다. 곽두섭은 자기가 어떻게 담배를 배우게 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장군님께서는 눈물겨운 그의 지난 일이 충분히 짐작되신듯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시였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인백인것이니 담배생각이 나면 참기는 힘들겠구만…》 가는 한숨과 함께 조용히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목소리에는 곽두섭에 대한 동정과 련민의 정이 비껴있었다.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죄스러움으로 하여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 같이 옹색해있던 곽두섭은 버쩍 머리를 쳐들었다. 《사령관동지,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중대장으로서 대원들의 모범이 될대신 제가 야간행군규률을 어겼습니다.》 그이의 만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동무자신이 잘못을 알고있구만?》 《그러면 안된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만 또 참지 못했습니다. 저먼저 곰의골어귀전투때도 그래서…》 《그렇소, 곰의골어귀전투때에도 동무는 같은 과오를 범했소. 그래도 나는 동무가 채심하구 다시 전투장에서나 행군중에는… 말하자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할데서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리라구 생각하구 전투총화때조차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소.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결심을 가진 사람한테 뻔한 지적을 구태여 한다는것은 듣기 싫은 잔소리로 되기때문이요. 더우기 동무가 중대장이니만큼 믿었댔소. 또 그때 아주 잘 싸우기도 했구해서말이요. 그런데 오늘새벽에 보니 동무는 채심하지 않았더란 말이요. 너무 분별이 없이 담배를 피우고있소. 두섭동무가 요즘은 고민할 일도 없겠는데 그러는걸 보면 좀 들떠있는것 같아. 기분이 좀 너무 떠있는것 같거든.》 (아, 그놈의 벼랑바위가 눈에 띄울건 뭐람, 그 벼랑바위만 길옆에 서있지 않았어두 그냥 견뎌냈을지 모르는데… 그랬더면 이렇게 죄짓고 얼굴 들지 못하는 처지에 빠지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는데…) 장군님의 지적을 받고 앉았기가 너무도 급하고 옹색했던 나머지 곽두섭은 애꿎은 벼랑바위짬을 원망했다. (그렇지만 이건 다 내탓이다. 내가 그만 참아내지 못한탓이다. 분옥이도 그렇게 담배를 조심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내가 그만 담배생각을 못이겨서 사령관동지앞에 면목없이 됐다. 우리를 그토록 위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사령관동지의 은정에 남다른 모범으로 보답하겠다구 마음먹구선 보답하긴커녕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사람이 되다니…) 괴로운 자책속에서 모대기고있던 곽두섭은 결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사령관동지, 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장군님께서는 묻듯이 그를 쳐다보시였다. 《대체 어떻게 그걸 담보하겠는지 한번 말해보오.》 곽두섭은 입술을 감빨았다. 《제 담배를 끊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새삼스럽게 그를 쳐다보시였다. 《담배를 끊겠다? 건강에도 해로운 담배를 끊는다면 그에서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막담배〉중대장이 인이 배긴 담배를 꽤 끊어낼수 있을가?》 《결심하고 꼭 끊어버리겠습니다.》 곽두섭의 어조는 단호하고 강경했다. 《너무 쉽게 결심하는게 아니요?》 《정말입니다!》 《확고하게 끊을 자신이 있는지 잘 생각해보고 결심을 하오. 나는 동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권고하자구 동무를 찾은건 아니요. 분별있게 담배질을 해야 한다는걸 일깨워주고 좀 비판하자고 찾았을뿐이요.》 《끊겠습니다.》 거듭 자기 결심을 고집스럽게 표명하는 곽두섭을 유심히 보고 계시던 장군님께서는 다시한번 그를 타일러주시였다. 《결심만 하고 실천을 못하면 말공부쟁이로 되고마오. 위신있는 우리 유격대중대장동무가 말공부쟁이로 웃음거리가 돼서야 안되지.… 그러니 실천하지 못할 결심은 오히려 하지 않는것이 좋소.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고 결심하오.》 《사령관동지, 제 말공부쟁이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를 주시하고 계시던 장군님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피여나시였다. 기쁨의 웃음이시였다. 《그럼 좋소. 동무의 결심을 믿겠소.》 그이께서는 곽두섭의 앞으로 손을 내미시여 약속과 믿음의 악수를 청하시였다. 이토록 기뻐하시며 악수까지 청하실줄 모르고 앉아있던 곽두섭은 얼결에 커다란 두손을 내밀어 그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장군님께서는 손에 힘을 주시며 흔드시였다. 《지금 부대안에서 담배가 적지 않은 해를 주고 고도의 은밀성을 보장해야 할 유격활동에 위태로운 정황을 조성하군 하는데 나는 이왕 동무가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바에는 담배끊는 운동을 발기하구 〈금연단〉같은것을 조직했으면 좋겠소. 그러는게 어떻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무들 호상간에 서로 조심하고 서로 도우면서 끊기도 한결 쉬울거요. 옆에 담배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끊자고 맘먹었다가도 그 결심이 흔들릴수 있을거란 말이요. 애연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담배연기를 맡거나 담배말만 나와도 괴로운 모양이던데 그렇소?》 《그렇습니다.》 《동무자신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금연단〉을 조직하는게 좋을것 같구만.》 곽두섭은 솜군복호주머니속에서 담배와 부시가 들어있는 담배쌈지를 꺼내여 장군님앞에 내놓았다. 그이께서는 담배쌈지에 곱게 수놓아져있는 꽃을 류다른 관심속에 보시였다. 《음, 분옥동무의 솜씨겠구만, 그 동무가 재봉솜씨가 있을것 같소. 아주 정성스럽게 곱게 만들었소. 이건 아주 없애긴 아까운데 건사해두오. 건사해두면 담배를 끊은 뒤에도 두고 옛말하며 기념품으로 간직할수 있을것 아니요? 나야 이걸 받아서 뭘하겠소? 〈금연단〉같은 자원조직에야 사령관이 무슨 권한이 있겠소? 그렇지 않소, 〈금연단 단장〉동무?》 곽두섭은 멋적게 웃으며 그이께서 말아주시는 쌈지를 받아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잠간…》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시였다. 곽두섭은 또 무슨 일일가 하고 의아히 여기며 그이의 말씀을 기다렸다. 《한가지 동무하고 의논하고싶은 일이 있는데… 이제는 분옥동무하고 정식으루 결혼하구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해야 하지 않겠소?》 뜻하지 않았던 그이의 말씀에 곽두섭은 대뜸 온 얼굴이 시뻘개졌다. 얼마전에는 그에게 애인을 찾아주시고 일부러 과업을 만들어 상봉의 기회를 마련해주시더니 매일처럼 싸움이 벌어지고있는 이런 때에 자기들의 결혼에 대해서까지 마음쓰고 계시는 장군님이시였다. 잠시 흐린 눈으로 깔개눈을 내려다보고 앉았던 곽두섭은 입술을 감빨며 머리를 쳐들었다. 《사령관동지, 사령관동지께서 저희들의 일을 알아주시고 승인해주셨으면 곧 결혼이지 무슨 결혼식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미 결혼한것으로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일생 한번밖에 없는 일인데 말치레만 할수 있소? 적들의 〈동기토벌〉이나 분쇄하고는 어느 적당한 기회를 골라서 간단히나마 식을 올리도록 합시다. 기회가 있을 때 분옥동무하고 의논해서 날자를 정하고 나한테 알려주시오. 좋소, 이젠 돌아가도 좋소.》
길을 갈수록 눈보라는 더욱 사납게 휘몰아쳤다. 금시 방아확같이 구멍난 사람의 발자국과 말발굽자리들도 일순간에 메워지며 자취가 희미해졌다. 광막한 공간에는 온통 눈가루가 뽀얗게 서렸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앞에는 무엇이 있고 옆에는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사방 어디를 둘러보나 광란하는 눈보라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장막뿐이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디쯤까지 왔는지 그런것도 장철구는 알지 못했다.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무턱대고 후방부 운반대장과 기르마에 식량마대들을 처실은 말을 따라 눈보라치는 밀림속을 걸었다. 그가 알고있는것, 명백히 알고있는것은 정든 백두산밀영의 사령부귀틀집을 뒤에 두고 떠나왔다는것과 어디인가 사령부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곳으로 자기가 지금 쫓겨가고있다는것이다. 그렇다. 가고싶어 스스로 가는것이 아니라 쫓겨가고있다. 지금 가고있는 그곳에도 유격대원들이 있다거나 만나보고싶었던 분옥이를 만날수 있다든가 거기가 소백수골보다 더 안전하다거나 거기서는 소백수골에서보다 더 잘 먹고 더 편안히 지낼수 있다든가 하는따위는 아무러한 가치도 없다. 그곳이 아무리 훌륭한 유격대의 안식처이며 료양지라 해도, 거기에 아무리 반가운 사람이 있다해도 지금 쫓겨가는 장철구에게는 《정배지》였다. 어쩌면 죄도 없이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것이랴? 사랑하는 남편과 더불어, 아니 남편을 따라 혁명의 길에 나선것이 과연 죄였던가? 일생동안 이런 수모와 천대와 모욕을 받으며 살아가자고 혁명의 길에 나섰던가? 장철구는 지금 또다시 혁명대렬에서 따돌리움을 받고 장군님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 화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모른다. 남편을 하늘처럼 믿어왔던 그는 그저 남편이 하는 일이면 그것이 하늘땅 끝까지 가야 하는 일일지라도 따라야 한다고 여기고 남편이 시키는대로 했다. 혁명을 무엇때문에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한채 남편이 삐라를 날라가라면 삐라를 날라가고 누구에게 련락쪽지를 가져가라면 그것을 가져갔고 또 누구를 어디에 숨겨주라면 숨겨주군 했다. 그렇게 남편일을 거들어주면서 차츰 남편한테서 글도 배워익히고 세상물정에도 눈이 틔기 시작해서 남편이 하고 자기가 돕는 그 일들이 바로 혁명을 위한 일이며 그러한 일들이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고 제 나라, 제 땅에서 자기들처럼 지지리 천대받고 구박받으며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활개치며 사람답게 살수 있는 날을 앞당겨오게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지방부녀회사업까지 맡게 된 그는 전날의 자기나 다름없던 부녀자들로 하여금 혁명사업이라는 신성하고도 엄숙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남편들과 오랍들의 범상치 않은 일을 돕고 거들어주도록 깨우쳐주는 사람으로 되였다. 그 일을 위해 그는 자주 집을 떠나야 했지만 어째선지 그 일은 성수가 나고 보람도 있었다. 아무 멋모르고 남편을 내내 옆에 두고 섬길 때보다 어쩌다 만나도 남편의 리해를 받고 남편의 치하를 받고 남편의 웃음을 받으며 지내게 되니 비록 남편과 자주 떨어져지내도 훨씬 더 사는멋이 있었다. 그런데 돌연 청천벽력같이 무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어디엔가 가서 사업하던 남편이 혁명의 《배신자》라는 락인을 받고 《혁명의 이름》으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이였다. 안해에게도 살뜰했지만 혁명에 대해서는 더 살뜰하고 충실했던 남편이 바로 그 혁명을 배반하고 혁명의 징벌을 받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믿을수도 없는 그 무서운 소식을 두고 미처 생각해볼만한 여유도, 슬퍼할만 한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혁명》의 징벌바줄이 철구와 아들의 손목까지 비끄러매였다. 철구는 아들과 함께 왕우구에서 어디로인가 끌려가서 《민생단》감옥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낡은 외양간에 갇혔다. 언제인가 남편을 따라 그의 집에 와서 그가 성의스럽게 지어준 피쌀밥과 갓김치를 달게 먹은적 있는 사람이 전혀 알던 사람같지 않게 눈을 부라리고 목청을 돋구어 꽥꽥 소리지르며 남편을 도와 《민생단》책동을 한 사실을 죄다 털어내놓으라고 강박했다. 나이는 어렸어도 아동단사업이라면 끼니도 몇끼씩 번지며 뛰여다니군했던 아들을 향해서도 목에 피대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남편이 혁명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던 적지 않은 지난 일들을 이 인정사정모르는 사람은 혁명을 배반하는 일이였다고 마구 우겨댔다.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있으면 등어리에 몽둥이가 내려지고 옆구리에 발길질이 안겨졌다. 그것이 바로 혁명을 위해 남편의 말을 좇은덕에 받게 된 《대접》이였다. 사람답게 살날을 위해 밤잠도 잊고 성수나서 부녀회사업에 투신한 덕에 받은 《대접》이였다. 철구는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 멍들고 옷이 피칠갑이 돼가지고 낯익은 왕우구사람들이 모여있는 군중심판장에 끌려나갔다. 언젠가 철구의 손으로 담근 김치를 맛스레 먹던 그 인정사정 모르는자가 역시 《민생단》련루자로서의 철구의 죄행에 대하여 긴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왕우구군중은 그자와 같이 인정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였다. 분개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고 동정의 눈물들이 아낙네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철구모자를 《민생단》련루자로 인정, 처단할데 대한 가부를 물었을 때 손을 쳐든 사람은 거의나 없었다. 하여 군중심판끝에 철구와 아들의 손목에서는 바줄이 풀려지고 그들모자는 다시는 그 구린내나는 외양간에 끌려가지 않고 놓여나게 된것이다. 그러나 《혁명》에서 아버지를 잃고 《혁명》에서 공포를 느끼고 또 바로 그 《혁명》에서 믿음을 잃은 아들은 더는 《혁명》을 믿고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군중심판에서 군중의 의로운 분개의 덕을 입고 겨우 살아났으나 일단 《혁명》에서 공포를 느낀 아들은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울고불고하면서 《혁명》을 피해 아무도 몰래 달아나버리자고 애원하고 간청하고 간절히 호소했다. 차라리 빌어먹더라도 《혁명》이 없는 곳에 가서 살자는것이였다. 철구의 깨우침과 타이름과 달래임도 비록 나이는 어려도 자존심과 고집에서는 제 아버지 그대로인 아들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유격근거지들이 해산되여 많은 혁명군중들이 아직 해산되지 않은 다른 근거지들에 이동해가고있을 때 철구더러 적구로 내려가는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따로 갈라지고말자고 자꾸만 조르고 또 조르던 아들은 이동군중이 눈밑에서 캐여낸 풀뿌리를 삶아먹으며 산중에서 로숙하던 어느 한밤 또다시 철구에게 도망쳐버리자고 조르고 떼쓰다 못해 자기 혼자만이라도 도망쳐버리겠다고 선언하고는 그 어디로인가 몰래 사라져버렸다. 금시 곁에 있던 아들이 없어지자 철구는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 어둠속에서 아들을 찾아 눈덮인 산속을 헛되이 헤매돌아다녔다. 날이 밝아서야 그는 산중의 눈우에 찍힌 작은 짚신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어느 한 구새먹은 진대나무안에 들어가 엎드려 혼자 우들우들 떨며 울고있는 아들을 찾아냈다. 먹을것도 불도 없이 혼자 도망쳤던 아들은 단 몇시간동안의 무인지경 산속 방랑생활에 교훈을 찾았던지 어머니를 따라 순순히 군중이 잠자던곳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어디로인가 떠나간 뒤였다. 그들 모자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허둥지둥 가보았지만 그 발자국들은 평펑 쏟아져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에 묻혀 오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철구는 아들과 함께 그 어디에도 인적이라군 없는 깊은 산속에 외따로 떨어지고말았다. 사방은 어디를 둘러보나 울울창창한 거목뿐, 가고 또 걸어가도 인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울음소리조차 들을수 없는 밀림에서는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만 아우성쳤다. 그런데다 입은것 없이 찬바람만 맞은 아들은 열을 내여 앓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까드라졌다. 감기에 무서운 쫄라병까지 겹친것이다. 두줌도 되나마나했던 통강냉이는 한알두알 세여가며 아끼고 또 아꼈지만 열흘이상은 넘기지 못했다. 쓰거운 마른 풀뿌리를 우려낸 물이나 맨 눈만 녹인 슴슴한 눈물은 가뜩이나 입맛없는 아들애의 구미를 당기게 하지 못했다. 마른 산열매따위라도 있으면 아들애를 살려낼수 있을지 어찌 알랴? 철구는 모닥불옆에 눈만 남은 처참한 아들애를 누데기에 감싸 앉혀놓고 마른 산열매를 구하러 떠났다. 기어이 아들을 살려내자고 지친 자기 힘에 맞지 않는 길을 떠난 이 걸음이 아들을 영원히 잃는 결과를 가져올줄을 그는 몰랐다. 없는 마른 산열매를 찾아 산속을 헛되이 헤매돌아다니던 그는 어느 한 벼랑턱에서 굴러떨어졌다. 기진할대로 기진했던 철구는 골짜기에 쌓인 눈속에 묻힌채 한동안이나 정신을 잃었다. 겨우 정신이 들어 눈을 헤치고 일어난 그는 모질게 내리는 눈을 들쓰며 허둥지둥 아들한테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들을 두고갔던 바위벼랑밑에는 아들도, 그가 피워놓고 갔던 모닥불도 없었다. 두무지의 두둑한 눈더미만 봉긋하게 솟아있었다. 죽은 모닥불을 덮은 눈무지속에서는 상기도 실연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옆에 솟아있는 눈무덤에서는 산 사람의 입김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속에 묻힌 아들애는 온몸을 가드라뜨린채 굳어져있었다. 그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는 녹지 않고 그대로 얼굴을 덮었다. 이제 더는 무심한 하늘이 뿌려주는 눈이 아들의 얼굴에 눈물방울로 되여 맺히지 않게 된것이다. 《명혁아!》 피타게 울부짖는 철구의 부름소리는 광막한 밀림에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철구는 대답없는 아들을 붙안고 부르고 또 부르다가 그냥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채 까무러친 철구를 덮으며 무심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려 새 눈무덤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란 끈덕지게도 질기다. 철구는 그 무인지경 산속을 지나가던 세명의 왕청사람들에 의하여 뜻하지 않게 구원받았다. 자기의 체온으로 죽은 아들을 살려내기라도 하려는듯 그 싸늘한 시체를 꽉 그러안은채 까무러친 한 아주머니를 눈무지속에서 우연히 찾아낸 왕청사람들은 온갖 성의를 다해 그를 살려내고 자기들이 가는곳으로 함께 데리고 갔다. 그렇게 가고간곳이 마안산이였다. 그곳에서는 어제날 《민생단》혐의를 받았던 사람들의 새로운 수용소가 장철구를 기다리고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덕에 철구는 《4중대》라는 이름이 붙은 《민생단》혐의자들의 집단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였다. 그는 전보다 더 엄중한 혐의를 받았다. 혁명을 피해 《도주》하였다는 죄목이 더 첨가된것이다. (남편도 잃고 명혁이도 잃은 내가 이런 무서운 의심과 수모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서는 무엇하랴?) 철구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모든 고통을 순간에 잊게 해줄 올가미를 마련했다. 그 올가미가 같은 4중대소속인 조분옥이한테 들켰다. 《언니, 죽지 말고 살아야 해요. 죽더라도 그렇게 개처럼 값없이 죽을수 없어요. 죽더라도 우리에게 아무러한 죄도 없다는게 다 증명된 다음에, 우리가 혁명을 배반하지 않았구 혁명을 위해 결백하게 살아왔다는게 다 인정된 다음에 죽어야 해요. 지금 죽으면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던 나쁜놈들이 저들이 옳았다구 말할거예요. 언니, 기다려보자요. 장군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보자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악을 쓰며 살아보자요. 장군님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걸 인정해 주실거예요.》 분옥은 무슨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말해주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의 말이 옳았다. 참말로 그의 말대로 되였다. 먼 북만의 남호두에서 백두산기슭으로 나오시던 길에 마안산에 들리신 장군님께서는 백여명 《민생단》혐의자들앞에서 그들의 무죄를 선언하시고 그들의 《죄행록》이였던 《민생단》문서보따리를 손수 불태워 연기로 날려버리시였다. 하늘로 날아올라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연기를 감격의 눈물속에 바라보며 장철구는 자기들에게 들씌워졌던 억울한 지난날의 혐의들도 연기처럼 영영 없어져버렸다고 생각했다. 하긴 바로 그랬기때문에 잃어진 조분옥의 몫까지 합쳐 많은 눈물을 흘렸던것이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여직껏 웃음 한번 제대로 웃어보지 못하고 죄수처럼 지내왔던 그들을 즐겁게 해주시기 위하여 노루사냥을 조직해주셨고 저녁에는 오락회까지 마련해주셨다. 그이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사냥도 나가셨고 노래도 부르시고 춤도 추시였다. 그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특식인들 없었으랴? 그 이튿날에는 장철구를 사령부에 부르시여 그 시각부터 사령부성원들의 작식을 맡으라는 과업을 주시였다. 철구는 새 직무를 받아안자 첫순간에는 그것이 얼마나 중하고 영예로운 일인지를 인차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자기가 바로 장군님께서 매일 잡수시게 될 음식을 짓게 되였다는것을 알고는 그이의 무릎앞에 쓰러져 오래도록 흐느껴울었다. 언제인가 철구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에게서 세상에는 사람이 20억가까이 되고 그가운데 절반은 녀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그 많은 녀성의 대부분이 밥짓는 일을 한다고도 하였다. 그렇게 많은 녀성중에서 장군님께서 잡수실 음식을 짓는 일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장철구에게 차례진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총살당한 《민생단》원의 안해라고, 혁명대렬에서 리탈한 《도주자》라고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마주서는것조차 꺼려하던 자기에게 그렇게도 엄청나게 중한 일을 서슴없이 맡겨주신 장군님! 이런 장군님을 위해서라면 머리를 잘라 신인들 못삼아드리며 또 한목숨 바친들 그 무슨 아까울것이 있으랴. 그 시각부터 장철구는 오로지 장군님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으로 되였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장군님을 위해서 사는 인간이 되였다. 그가 사는 리유도 사는 목적도 오직 그 한가지 점에 있었다. 그의 생활과 투쟁, 사고와 행동의 일체 지향은 다만 그 한가지 점에 귀착되여있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무엇을 하건… 밥을 짓건 빨래를 하건 바느질을 하건 솥을 닦건 총을 닦건 행군을 하건 나무를 하건 그는 장군님만을 생각했고 장군님만을 위했다. 자기가 굶고 자기가 헐벗어도 장군님께서 잡수시고 장군님께서 추워하시지 않으면 배 부름을 느끼고 따뜻함을 느껴온 장철구였다. 그렇던 장철구는 지금 장군님곁에 있을 자격을 못가진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되여 쫓겨가고있는것이다.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지녀왔던 장군님의 수저를 떼여놓고 다시는 돌아올것 같지 못한 길을 떠나왔다. (그때… 그때 그냥 그 눈속에 묻혀 명혁이와 같이 죽었어야 하는걸…)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쳐가며 장철구는 지금 자기를 쫓아낸 김주현군수관이 아니라 눈무지속에서 자기를 살려내준 사람들을 원망했다. (그때… 그때 죽어버렸더면…) 올가미를 걸지 못하게 하며 자기를 떠밀치던 분옥이도 원망했다. 죽고싶었다. 이 모진 눈보라속에 파묻혀 죽고만다면 원망스럽기만 한 모든 일을 모를것이 아니냐. 《원, 무슨놈의 눈보라가 이리두 심하담? 자, 용기를 내구 일어나시오. 좀만 더 가면 뜨뜻이 몸녹일데가 나지오. 거기에다 식량을 덜어놓구 몸도 녹이구 요기도 좀 하구 하느라면 눈보라가 잦아들지두 모를거요.》 눈속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다가 그냥 엎드려있는 장철구를 일으켜세우고 그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면서 운반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장철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여전히 정신적인 허탈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여전히 눈앞에서는 말궁둥이가 뚱기적거리고 부시시한 꼬리털이 무덤가에서 우는 아낙네의 풀어헤친 산발처럼 날리고 말발굽자리는 순식간에 메워지군 했다. 얼이 나간듯 한 그의 눈에는 그밖에 아무것도 얼른거리지 않았다. 앞에는 산이 있는지 숲이 있는지 옆에는 나무가 있는지 골짜기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쯤에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런것도 모른다. 그저 아직도 죽지 않았기에, 저절로 죽어지지를 않기에 무턱대고 발을 옮겨놓는것이다. 문득 누군가 앞에 막아서며 소리쳤다. 《아이! 철구언니!》 김확실이였다. 재봉소에 있는 김확실이였다.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 저 귀틀집은 무엇인가? 여기가 재봉소였는가? 식량을 덜어주기 위해 운반대장은 여기에 들린것인가? 무엇때문에 어째서 나는 여기로 왔는가? 오랜만에 보는 확실이도 반갑지 않다. 그런데 확실이는 무엇이 저리도 좋아서 싱글벙글하는가? 《언니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자기를 보고서도 그 무슨 나무를 보듯 하는것이 이상스러웠던지 확실은 가까이 다가들다가 오똑 멈춰서며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철구는 어째선지 웃어보이려고 애썼다. 까닭모르는 서글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다 왔어요? 사령부작식은 어떻게 하고 여기 왔어요?》 철구는 말을 못했다. 과연 사령부작식을 어찌하고 여기 온것이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캄캄한속에서 하늘땅이 뒤번져지는듯 한 환각이 일어났다. 그는 정신을 잃고 까무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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