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장
권영벽이가 무슨 사명을 띠고 어디로 가는지는 그와 인간적으로 아주 가깝게 지내는 곽두섭이나 오중흡 그리고 친동기간이나 다름없는 라명희도 몰랐을뿐더러 지어는 일정한 거리까지 그에게 길잡이를 해주고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함께 떠나게 된 신입대원 김운신이도 알지 못하였다. 떠나는 권영벽을 바래주신분도 장군님 한분밖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 한점없이 잠풍한 석양무렵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백두산밀영지역을 벗어나 소백수골어귀까지 같이 나오시면서 몇가지 류의할 점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시였는데 그것도 우럭골에서 오래 살다 입대한 김운신으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있는 제고장의 생활세태나 풍속에 관한것들이여서 그에게는 그저 의아쩍기만 했다. 《이제 내려가서 어느 집에서 주인을 찾게 될 때에는 방문앞에 가서 주인을 찾지 말고 반드시 정주문앞에 가서 찾도록 주의하시오. 방문앞에 가서 주인을 찾게 되면 백두산지대사람이 아니고 타고장사람이라는게 인차 표가 나게 되오.》 장군님께서는 나무사이로 석양이 비껴드는 눈길을 권영벽이와 나란히 걸으시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것은 백두산지대 화전민들이 거개가 다 정주간에 붙어살다싶이하고있기때문이요. 가난한 백두산지대 화전민들은 화로같은것조차 갖추고 살만한 형편이 못되기때문에 정주문옆에다 흙두구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불을 담아놓는데 그속에 감자를 묻어두기도 하오. 밖은 추운데다 변변히 입은것들도 없으니 온 식구가 흙두구리옆에 모여앉아 구운 감자나 먹으면서 한담이나 나누군 하오. 그게 다 가난이 빚어준 백두산지대생활풍속이요. 백두산지대 사람들이야말로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요. 내가 열한살때였던것 같은데 그때 생존해계시던 우리 부친을 따라 8도구부락에서 이삼십리쯤 떨어진곳에 있는 한 화전마을에 간적이 있소.…》 어느덧 장군님의 말씀에는 회억의 어조가 비껴들었다. 《그 마을에 심한 환자가 있어서 아버님이 왕진을 가시는데 나도 따라갔댔소. 가보니 식구가 여덟명이나 됐소. 그런데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는데도 그 집 아낙네와 큰 총각이 일어나 우리를 맞이하고는 병자인 주인과 다른 식구들은 헌 누데기이불속에서 눈들만 내놓고있었소. 나중에 알고보니 식구들마다 따로따로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어쩌다 바깥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옷 한벌을 가지고 돌려가며 입군 한다는게 아니겠소. 그때 가슴저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소. 지금도 백두산지대 깊은 산골에서 사는 가난한 화전민들가운데는 토스레 단벌옷 하나로 온 식구가 돌려가며 입고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오. 그러니 그 사람들이 겨울이면 흙두구리곁에 붙어살수밖에 없지. 모르긴 해도 아마 권동무네 식구들도 장백에 와서는 그렇게 지낼거요.》 권영벽은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그이의 말씀을 새겨듣기만 했다. 사위는 차츰 더 붉은 빛으로 짙어가는 석양속에 잠겼다. 세사람의 눈밟는 소리만 가락맞게 울렸다. 《그리구말이요…》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기시던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주의할점들에 대한 말씀을 잇대시였다. 《집에 들어갈 때에도 정주문으로 해서 방에 들어가오. 관습이 그렇게 되여있소. 식사도 역시 정주에 나가 앉아서 받아야 하오. 그것이 친근한 사람에 대한 성의있는 대접이라는걸 알고 막부득이한 때를 내놓고는 사양하거나 거북하게 여기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주민지에 내려가서 써야 할 말투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시였다. 어느덧 장군님께서는 소백수합수목근처에까지 나오시였다. 권영벽은 이제는 그만 들어가시라고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그냥 걸음을 옮기시였다. 《이왕 여기까지 나왔는데 바람을 쏘일겸 저기 전방차단소까지만 마저 갑시다. 내 마음이 내키는대로 다 갈수 있다면 사실 동무가 가는 걸음을 내가 떠나고싶소.》 권영벽은 뭉클하고 가슴속에 뜨거운것이 치받쳤다. 자기가 가게 되는 이번 걸음이 장군님께서 얼마나 공들여 마련해주신 걸음이라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권영벽은 장군님의 그 심정이 그대로 가슴에 마쳐왔던것이다. 전체 조선민족을 하나로 묶어세워 항일대전에 떨쳐나서게 하는것, 그것은 장군님께서 일찌기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날부터 뜻하여오신 최상의 전략적목표가 아니였던가! 바로 그것을 위하여 남호두에서 백두산기슭으로 나오시는 간고하고 험난한 원정의 로상에서도 조국광복회라고 이름지은 거족적인 민족통일전선조직을 창립하시였으며 바로 그것을 위하여 백두산에 나와 매일같이 피어린 싸움을 벌려오시면서도 짬시간의 휴식마저 뒤로 미루시고 정력적인 로고를 기울여오신 장군님이시였다. 남호두회의후 지난 여덟달동안 장군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지니시고 추진시켜오신 조국광복회운동, 이 거창하고 위대한 사업은 권영벽의 이번 걸음으로 압록강변에서 열매를 거두게 되고 또한 조국땅에서도 그 씨앗이 심어질 터전이 마련될수 있는것이다! 어디선가 문득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마른잎들이 채 떨어지지 않은채 달려있는 한그루의 커다란 쇠스래나무밑에 두사람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몸집이 거쿨지고 우람차보이는 사람과 키가 작달막하고 담차보이는 사람이였다. 석양을 등지고 선 장대한 사람의 어깨우에서는 비쭉 솟아오른 총구가 석양볕을 받아 눈부신 섬광을 반사했다. 마주 불어오기 시작한 가는 바람결에 귀에 익은 오중흡의 말소리가 실려왔다. 《…보초를 서기전에 볼일을 미리 봐두지 않았다가는 그게 뜻밖에 사달을 일으킬수도 있단 말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감시목표들을 잘 살펴봐야 할 때 그만 헛눈을 팔든가 미리 봤어야 할걸 늦어 보게 되든가 하는 통에 때로는 전체 부대를 위험에 빠뜨리는 엄중한 사고를 일으키거나 본인도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2련대가 편입되고 신대원들이 부쩍 늘어난 조건에서 얼마전에 부대에서는 재편성사업이 진행되였다. 그때에 중대정치지도원이였던 권영벽은 사령부선전과장의 중책을 맡았고 소대장이던 오중흡은 중대정치지도원의 책임을 졌다. 오중흡은 아마 자기의 새로운 책임을 수행하기에 열중하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절대로 헛눈을 파는 일이 없도록 미리 대책을 취해야 하구 일단 근무를 설 때는 헛눈을 팔지도 말구 졸지도 말구 똑바른 정신을 가지구 첫번째 감시목표와 두번째 감시목표사이에서는 무엇이 달라진것이 없는가…》 옆에 있는 키큰 대원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해주고있던 오중흡은 문득 자기 말을 중둥무이하고 이켠을 돌아보더니 몸을 바로잡으며 장군님께 인사를 드렸다. 《차단소 근무요?》 그가 미처 보고를 올리기전에 장군님께서 물으시였다. 《보충중대 1소대동무들의 근무훈련중입니다.》 《아, 마동희동무네를 데리고 나왔구만.》 장군님께서는 아직 몸에 배지 못한 거북스러운 차렷자세로 오중흡의 뒤쪽옆에 서있는 큰 체통에 안경을 쓴 마동희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시였다. 유격대안에서는 보기 드문 안경쟁이인데다가 국내의 첫 입대자이기도 한 마동희는 보충중대의 신입대원들가운데서는 유표한 존재였다. 《수고들하는구만. 어서 계속하시오.》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고 그들앞을 지나치시였다. 뒤따르는 권영벽이와 눈길이 마주친 오중흡은 묻듯이 그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덧저고리와 짚신감발, 괴나리보짐에서 그 무슨 낌새를 맡은듯 동실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뜻있는 눈인사를 보냈다. 한편 김운신을 알아본 마동희는 놀라움과 부러움을 안경밑에 감춰내지 못하였다. 자기와 한날한시에 입대한 우럭골내기가 조선바지저고리에 조끼차림을 하고 장군님과 사령부선전과장을 따라가며 의기양양해서 벌쭉거릴 때는 필경 자기와는 비교할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것이라고 생각는 모양이였다. 권영벽은 어제밤 늦도록 마동희를 만나서 그가 여직껏 살아온 갑산지방에 대한 료해를 진행하였다. 타고난 농사군이라 할만큼 우람차고 거쿨진 손발과 체통을 가진 마동희는 놀라울만치 아는것이 많고 사리정연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해낼줄 아는 청년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어제밤 자기와 진행한 담화와 오늘의 출발을 한선에 련결시켜 추리하게 되면 곽두섭이나 라명희조차 모르는 자기의 행처에 대해 쉽게 알아맞출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때는 모르는척하고 지나치는것이 좋다. 때가 되면 일부러 인사없이 떠나버린 이 걸음이 어째서 달리 될수 없었는가를 리해하게 될뿐아니라 자신들도 체험하게 되리라. 권영벽은 뒤덜미에 의혹이 잔뜩 실린 마동희의 지꿎은 시선을 감촉하면서도 한번 뒤돌아봄이 없이 장군님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짚었다. 숲머리에서 빨갛게 타고있던 저녁해는 숲속으로 꺼져들며 눈부시게 번쩍거렸다. 어찌보면 그것은 수만갈래로 얽힌 나무가지들과 나무잎들에 찢겨 부서지는듯도 하고 어찌보면 번쩍거리는 붉은 화염을 뿜어대여 그 가지들과 잎들을 황황 불태우는것 같기도 했다. 맑은 하늘에는 엷은 노을빛이 비끼기 시작했다. 《날씨는 래일도 좋을것 같구만.》 전방차단소앞을 지나 언덕길까지 내려오신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소백수가에 이르시자 걸음을 멈추시였다. 《같이 더 나가고싶어도 나가지 않겠소. 여기서 헤여지도록 합시다.》 장군님께서는 웃음어린 눈매로 권영벽을 다정히 더듬어보시고 목수건깃을 여며주시였다. 《이번 걸음에 지양개도 거치게 되겠는데 기회를 보아서 김정보로인에 대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지, 주민대중의 평판은 어떤지 하는데 대해서 겸사 알아가지고 오는걸 잊지 마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영벽은 조용히 아뢰며 털모자를 벗어들었다. 《이미 어제밤에 한 다른 이야기들은 되풀이하지 않겠소. 다만 한가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최고의 좌우명으로 여기고있는 그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하여 꼭 명심해달라는것을 다시한번 당부하고싶소. 만약 천리, 만리걸음을 해서 단 한사람이라도 우리의 지지자, 동정자를 더 얻을수 있다면 천리, 만리걸음도 서슴지 않는 그런 자세와 립장에 서서 모든것을 사고하고 행동하시오.》 권영벽의 손을 잡으시고 마감으로 일러주시는 장군님의 말씀이시였다. 그 말씀을 권영벽은 마디마디 가슴속에 그대로 새겨넣었다. 《동무의 가족들이 어디 와서 사는지 꼭 탐문해서 알아가지고 오오. 그리고 장백쪽에 있을것 같지는 않소만 곽두섭동무의 애인도 좀 연줄을 놔서 찾아볼수 있는대로 찾아보오. 내가 통신원을 통해 최현동무한테 특별히 부탁을 했소만 사처에서 찾노라면 어디서든 찾아내겠지.》 이미 권영벽이가 장군님앞을 떠나 저쯤 멀어졌을 때 그이께서는 서계시던 개울가둔덕우에서 두어걸음 내려서시며 간곡하게 당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권영벽이네가 숲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냥 그자리에 서계시였다. 겨울추위에도 얼줄 모르는 소백수물소리가 유정스러웠다.
림강현 마의하산간의 샘물골마을에서 보배샘이라고 이르는 샘물이 여름에는 이가 시리도록 아주 차겁지만 겨울에는 얼지 않고 온천수처럼 김을 물물 날린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였다. 두리의 바위츠렁이며 분비나무숲이며 나무등걸들이 우죽뿌죽하게 서있는 부대기밭들이며 그 밭가운데 듬성듬성 널려앉은 귀틀집들이며 돌담들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있지만 샘물이 솟아올라 아담한 소를 이룬 수면에서는 물안개같이 새뽀얀 김이 그물그물 피여오른다. 샘물속으로 들이뻗은 평평하고 넓주룩한 너럭바위언저리에서는 살찐 버들치들이 한여름인양 활개치며 돌아간다. 투박하고 육중한 참나무물동이(그것은 굵은 나무를 잘라 통채로 속을 파고 량옆의 나무옹이를 손잡이삼아 쓰게 만든 나무물동이였다.)를 샘물가에 내려놓고 마을사람들이 늘 샘물터에 놔두고 공동으로 어울러 쓰군 하는 나무물바가지로 물을 퍼담고있던 묘령의 처녀가 잠시 손을 멈추고 물속에서 드세차게 놀고있는 버들치에게 눈을 팔고 앉아있었다. 토스레치마저고리에 무명솜버선, 나무껍질로 삼아신은 초신, 댕기없이 수수하게 땋아늘인 약간 밤빛나는 외태머리… 여느 산골처녀들과 다름없는 행색의 조분옥이다. 《언니, 뭘하구 앉았어요?》 처음에는 버들치를 보고 앉았다가 다음에는 물속에 비쳐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속에 잠겨들었던 조분옥은 뒤에서 나는 목소리에 머리를 돌렸다. 윤로인네 이웃집의 곱단이였다. 《음, 버들치야.》 분옥은 혼자생각에서 깨여나며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곱단이는 그렇게 말하는 분옥이를 눈여겨보더니 피씩 웃었다. 《아이참, 언닌 뭐 여기서 노는 버들치를 첨 보는것 같네.》 그는 자기 물동이를 내려놓고 씽하고 바람이 일게 곁에 와앉더니 분옥의 손에 들려있던 바가지를 잽싸게 앗아들고 활활 물을 퍼담아 분옥이의 동이를 채웠다. 그리고는 물이 철철 넘치게 담긴 물동이손잡이를 잡으며 마치 명령조로 말했다. 《언니, 내가 이여다드릴게 따바리를 얹어줘요.》 《인줘. 나는 뭐 머리가 없나?》 분옥은 제머리에 똬리를 얹으며 정겹게 눈을 흘겼다. 《에그, 언니가 물동이를 이는건 애처로와 못보겠더라.》 곱단이는 두바가지나 물을 도로 덜어내고나서 동이를 넌떡 들고 일어나며 분옥이의 머리우에 얹어올렸다. 분옥은 바르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상기도 이렇게 힘을 세게 줄 때면 상했던 다리가 약간 시큰해지는 분옥이다. 《뭐가 그리 애처롭게?》 나이는 한살 아래여도 키는 반뽐이나 더 큰 곱단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분옥은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약한 몸에, 이는 모양도 서툴지, 그러니 왜 애처롭지 않겠어요? 그래도 언닌 참 용해, 그 개버들같은 허리에 어떻게 그걸 이여내는지.》 《넌 별소릴 다 하는구나.》 분옥은 그저 벌씬 웃고말았다. 《언니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 알아맞출가?》 별안간 곱단이는 눈을 새물거리며 능청을 부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시치미를 따지 말아요. 내가 뭐 언니가 유격대생각한걸 모를줄 알구?》 곱단이는 힐난조로 되알지게 내뱉고는 금시 으름장을 놓듯 덧붙였다. 《이번에 다시 갈 땐 혼자선 못가는줄 알아요. 날 안데리구 가면 못가게 할테야.》 《원 애두, 정말… 너하구 마주 서있다간 동이를 인채 해구멍을 막겠다.》 분옥은 곱단의 앞을 떴다. 더기우에 걸렸던 저녁해가 마지막 해살을 보내온다. 분옥이가 샘물골에 되돌아온 순간부터 그를 혼자 떠나보냈던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곱단이였다. 자기 중대를 찾아 마안산까지 갔던 분옥이가 샘물골로 되찾아왔을적에는 지난 초봄에 부상당하여 윤로인 등에 업혀 들어왔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험상궂고 처참한 몰골이였다. 온통 찢기고 터지고 형편없이 여위고 해지고 덞어진 그의 몸과 옷에서 성해있는 곳이란 이상하게 번뜩거리는 두눈과 탄갑속에 넣어 건사해가지고 온, 역시 그 눈처럼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자그마한 호주머니 놋단추 하나뿐이였다. 겨우 잃지 않고 메고왔다는 쓸모없는 총까지도 총가목이 부러지고 총탁판이 뻐개져있었다. 탄알은 한알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두알은 얼어죽지 않기 위하여 불을 만들어내는데 썼던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마안산에서 이해의 첫 눈속에 묻혀 얼어죽을번 했던 분옥이도 그 쓸모없을것 같던 총과 탄알이 있었기에 살아날 구멍수가 생겨났다. 탄환깍지속에서 쏟아낸 화약을 입고있는 헌 솜군복에서 뜯어낸 솜에 싸서 원시인들이 불을 얻어냈다는 방식을 따라 돌과 돌 사이에 놓고 비벼댄 그는 실로 기적같이 불을 얻어낼수 있었고 그것으로 하여 나무껍질로 발을 감싸고 나무열매와 풀뿌리를 캐여먹으면서도(총에 달려있는 총창은 칼로도 쇠꼬챙이로도 아주 쓸모가 많았다.) 끝끝내 얼어죽지 않은채 수백리 산길을 헤치고 다시 샘물골에 되돌아올 때까지 목숨을 이어올수가 있었던것이다. 이 샘물가에 와서 물을 마시고 그대로 쓰러진 분옥을 처음 발견하고 윤로인댁에 업어들여온 곱단이는 물론이고 윤로인도 역시 그를 혼자 떠나보냈던것을 더없이 후회하며 땅이 꺼져들게 한숨을 쉬였다. 분옥은 사경에 처해있었지만 총상을 받았을 때처럼 오래 누워있지는 않았다. 치명상이 없었던 그는 번개와도 같이 빠른 소생의 불꽃을 일으키는 청춘, 그것의 덕을 입어 불과 닷새가 안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며 열흘이 지나서는 찔리우고 긁히우고 터지고 이물고 부르텄던 얼굴과 손과 발의 모든 상처들이 깨끗이 아물어버렸다. 그리고 며칠전부터는 윤로인의 눈을 피하여 물동이도 이고 나무를 패기도 했다. 바로 그날부터 윤로인은 매일 사냥하러 산을 돌아다니며 하루종일 지내다가 돌아오군 하였다. 이 림강 마의하와 삼도하가 흘러드는 압록강기슭에 유격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기때문이다. 비둘기의 마음은 콩밭에 가있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윤로인이였다. 자기의 품으로 되돌아온 사랑하는 양딸 분옥이한테서 이번에야 비로소 감춤없이 털어내놓는 이야기를 통하여 유격대와 유격대안에 있는 곽두섭이라는 청년이 자기의 양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 윤로인은 유격대가 압록강변의 삼도구에 나타나 거기에 둥지를 틀고있던 적들을 몽땅 요정내고 놈들이 실어들였던 겨울군복을 새것대로 빼앗아입고 사라졌다는 소문과 마의하부락에 나타나 하루밤 묵고갔다는 소문을 듣자 사냥하러 간다는 구실로 유격대를 찾아내려 산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던것이다. 정녕 다시는 분옥을 자기곁에서 놓아주고싶지 않은 윤로인이였으나 분옥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마다치 않을 늙은이였다. 오늘도 윤로인은 점심까지 싸들고 복둥이를 앞세우며 집을 나선것이 이때껏 돌아오지 않았다. 분옥은 가마솥안에 감자를 썰어안치고 그우에 좁쌀을 두어줌 일어안쳤다. 작은 가마솥에는 무우시래기국을 안쳤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잉걸불을 퍼담아놓은 등디에는 곱돌장사기를 올려놓았다. 그에게 약을 달여주기 위해서 윤로인이 곱돌을 얻어다 손수 만들어쓰던 약탕관이였다. 이제는 약을 달여먹을 필요가 없어졌기때문에 분옥은 약탕관을 깨끗이 부셔내고 감자장사기로 쓰기 시작했다. 《원, 철없기두. 네 몸이 아직 채 추서지 못했는데 약탕관을 감자장사기로 써버리다니?》 언제인가 사냥갔다 돌아와서 자기의 밥상머리에 올려놓인 감자장사기로 변한 약탕관을 대한 윤로인은 어처구니없다는듯 혀를 끌끌 찼다. 《간을 한번 묻혔던 그릇에 약을 달이면 효험이 나지 않는 법이야. 곱돌을 얻어다 약탕관을 하나 새로 만들어야겠다.》 늙은이는 유격대를 찾고있으면서도 분옥이에게 계속 약을 달여줄 궁리를 하는 모양이였다. 유격대를 애써 찾아보긴 하나 찾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분옥이가 자기곁에 있는동안은 떠나보내는 시각까지 몸을 보해줄 마음때문인지? 그러면서도 역시 오늘도 유격대를 찾으러 간 늙은이다. 가마솥과 장사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고 구수한 감자장 지지개냄새가 집안에 가득 서리도록 늙은이는 돌아오는 기척이 없다. 집안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등디에 담긴 채 타지 못한 잉걸불에서 피여오른 매운 연기가 눈물을 짜낸다. 분옥은 부엌문을 열어놓고 닫기지 못하게 부지깽이를 아래귀퉁이와 문지방사이에 끼워놓았다. 문밖으로 내다보이는 더기의 앙상한 이깔나무숲속에서 가물거리던 연한 노을빛 하늘이 재빛 어스름속에 스러져간다. 《왜 오늘은 이리 늦어질가?》 분옥은 조심스럽게 어두워지는 하늘을 내다보며 부엌앞에 앉았다가 등디목옆의 귀틀벽에 붙어있는 광솔불받치개에서 광솔불을 담군하는 질그릇을 들어내려다가 불을 붙인 광솔을 주어담았다. 부엌문으로 쓸어드는 찬기운에 송진을 보질보질 끓이며 타기 시작한 광솔불이 금시 꺼져버릴것 같다. 분옥은 손으로 바깥에서 쓸어드는 찬바람을 막으며 광솔불그릇을 다시 받치개우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등디목에서 내려서려는데 가볍고 날렵한 눈밟는 소리가 마당안으로 달려들더니 어느새 흰 얼룩점이 박힌 늘씬한 허리를 얼찐거리며 복둥이가 부엌문안에 들어선다. 《오셨구나.》 분옥은 얼른 등디목에서 내려서며 초신발을 버선코에 걸고 통나무로 된 퇴지에 나섰다. 다져진 눈을 밟는 윤로인의 도로기신발소리는 이제야 마당가에 와닿는다. 분옥은 마주나가 인사를 올리며 윤로인의 어깨에서 사냥총과 갑삭한 망태를 벗겨들었다. 망태안에는 꽁꽁 언 까투리 한마리와 나무로 된 빈 점심곽을 싼 보자기가 들어있었다. 《마을엔 무슨 소식이 없었냐?》 가슴에 드리운 흰 수염같은 입김을 날리며 윤로인은 제먼저 묻기부터 했다. 오늘도 헛탕을 치고 맥풀려 하는 어조였다. 《없었어요. 날이 차졌는데 어서 들어가요.》 분옥은 굳이 유격대행처를 찾았는가 어쨌는가를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로인은 미안해서 묻고싶어도 묻지 못하는 분옥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오늘은 먹골에서 무송쪽으로 넘나드는 발구재일판을 종일 싸다녔는데 사람발자국 하나 못찾았구나…》 퇴지앞에서 늙은이는 눈투성이가 된 투박한 도로기신발을 탁탁 굴렀다. 《…복둥이놈도 까투리 한마리밖에 찾아내질 못했구나. 그놈이 령리해서 그 사람들 발자국이 눈에 띄기만 하면 영낙없이 찾아내겠는데.》 늙은이는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괜히 헛수골 그만 하시래두요. 랠부턴 정말 그만둬요.》 분옥은 부엌문을 활짝 열어드리며 진정으로 간청했다. 《저도 못찾은 사람들을 아버님이 어떻게 찾는다구…》 《산에서 사람을 찾아내는덴 너보단 나하구 저 복둥이가 열배나 나을게다. 걱정 말아라. 내가 산에 갔다가 얼어죽진 않을테니. 자, 어서 들어가자.》 …저녁을 물리고 아직 설겆이를 채 끝내지 못했는데 모래가 담긴 작은 모랭이를 옆구리에 껴안은 곱단이가 찾아들고 뒤이어 마을의 다른 처녀들과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분옥이가 샘물골에 되돌아온뒤 몸이 추서자부터 다시 열기 시작한 야학생부녀들이다. 곱단이는 들어오던 참 등디목에 모랭이를 내려놓고는 그냥 부엌바닥에 서서 분옥이가 하던 설겆이를 빼앗아 제가 마치고서야 구들에 올라앉았다. 《자, 이젠 뜨끈뜨끈하게 배속도 채우고 몸도 덥혔으니 예서 다들 헤여져갈 때까지 퇴지에 나가앉아 네 할 일이나 하거라.》 마을처녀, 아낙네들처럼 모래가 담긴 모랭이를 앞에 끼고앉아 모래에 손가락글자를 익히지는 않아도 역시 야학생이 되여 앉아있군 하는 윤로인은 등디목에 올라와앉은 복둥이를 쓸어주며 복둥이에게 일러주었다. 복둥이는 꼬리를 휘저으며 자기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늙은 주인의 손을 몇차례 핥고나서 그 주인이 몸을 일으키자 제꺽 눈치를 알아채고 부엌에 내려섰다. 그리고 늙은이가 부엌문을 열어주자 책임적으로 망을 서겠다는 결의라도 다지듯이 명민한 눈으로 늙은이를 경건하게 쳐다보고나서 바깥으로 슬며시 나갔다. 야학생이라야 예닐곱이다. 곱단이또래의 처녀 셋에 어린것 없는 새색시 한명 그리고 업은채 돌려안은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앉은 아낙네 하나… 돌이네 엄마는 돌이한테 감기기운이 있어 결석이다. 격식없는 야학이지만 출석회계는 없지 않다. 소식이래야 날데없는 마을이였으나 그나마 동네 일곱집에서 이 하루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잠시 나누다가 공부가 시작되였다. 《오늘은 〈압록강〉을 공부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분옥이만은 야학선생답게 남보다 넓은 모래함지를 앞에 놓고 야학생들의 복판에 앉아있었다. 교과서나 교수안이라는것은 있을수 없다. 삼도만과 처창즈에서 그자신이 야학에서 배워뒀던 학과를 머리속에 외워져있는대로 가르칠뿐이였다. 거기에 자기 말을 조금 보태주면 야학생들은 저들스스로 학과를 완성시켜주군 했다. 《압록강은 우리 나라 강이예요.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다섯개의 강가운데서 제일 큰 강이래요.…》 《자그만치 2천리야.》 곰방대를 물고 한옆에 나무등걸처럼 앉아있던 윤로인이 문득 끼여들어 분옥이의 말을 보태주었다. 《…우리 조선이 통채로 삼천리인데 압록강이 2천리나 되니 크기사 되우 큰 강이지.》. 분옥은 윤로인이 그렇게 자기 말을 보태주고 자기 생각을 튕겨주는것이 고마와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그래요. 2천리압록강이랬어요. 우리 나라에는 압록강 말고도 두만강, 대동강, 한강, 락동강 같은 큰 강들이 있구 청천강, 례성강, 림진강, 금강과 같은 그보다 좀 작은 강들두 있구 그보다도 더 작은 마의하만한 하천들두 많답니다. 산도 많고 강도 많은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아름답구 은금보화로 가득차서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압록강이라는 글자쓰기련습을 하기전에 벌려놓은 분옥이의 이야기를 모두 눈들이 초롱초롱해서 듣고앉았는데 별안간 문밖에서 잠잠하던 복둥이의 야단스럽게 짖어대는 소리가 울렸다. 낯익은 마을사람이면 한두번 콩콩거리다가 잠잠해지거나 응석을 부려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복둥이였다. 그러나 마당가에로 달려나가며 더욱더 자지러지게 짖어대는 꼴이 뭣인가 심상치 않은 낯선 사람이 접근하고있는 징조였다. 마을의 다른 개들도 앞다투어가며 고요한 산촌의 겨울밤정적을 깨쳤다. 분옥은 얼른 모랭이에 담긴 모래들을 자기의 함지에 모아담아서 부엌구석에 내려놓고 빈모랭이들은 시렁우에 얹어놓게 했다. 어느새 방바닥에 깔린 애기엄마의 포대기에는 화투목이 널렸다. 곱단이는 금방 화투놀이를 하던것 같이 몇장씩 나눠주었다. 마당안으로 뿌득뿌득 언눈을 밟아대는 몇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다가들었다. 복둥이는 부엌문앞에서 몸뚱이로 문을 문대는 소리를 내며 더욱 왁살스럽고 사납게 짖어댔다. 《웬 손님들이게 이렇게 소란하게 짖어대? 지개.》 장죽을 문채 일어난 윤로인은 부엌쪽에 내려서며 문을 열었다. 달빛이 환한 마당안에서 어깨에 총을 멘 사람 둘이 달빛에 총의 쇠붙이들을 번쩍이며 그앞으로 다가섰다. 《밤중에 아버님 실례합니다.》 한사람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웬일이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유격대원들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윤로인은 일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놀라지 말라고 손님이 미리 경고했지만 자기가 애써 찾고있던 사람들이 불의에 앞에 나타난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것이다. 그 공손한 인사와 어투, 행동거지들에 분옥이다운데가 있는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저희들은 우리 사람을 찾고있습니다. 올해 초봄무렵에 이 샘물골마을근처에서 잃은 녀성동무가 한동무 있었습니다. 조분옥이라고 한답니다. 혹시 아버님은 올해 초봄에 낯선 우리 유격대녀성동무를 보셨거나 무슨 말을 들으신적이 없습니까?》 그 말소리를 들은 조분옥은 금시 심장이 멎어버리는것만 같았다. 얼마나 그리며 애써 찾던 사람들이였던가! 간신히 구들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조분옥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귀틀벽을 옮겨짚으며 뭐라고 대답할지를 모른채 부엌문안에 서있는 윤로인옆에 내려섰다. 《누… 누구세요?》 분옥은 벌써부터 울먹거리는 소리로 낮게 부르짖듯 물었다. 《동무입니까? 동무가 조분옥동무입니까?》 달빛을 받으며 문앞에 서있던 한사람이 그를 눈여겨살피며 되물었다. 동무라는 그 말이 이 순간처럼 분옥이에게 정답게 들린적은 일찌기 없었다. 《그래요. 저예요. 어떻게?…》 《아, 됐구만. 좀 들어갈수 있습니까. 들어가 몸을 좀 녹입시다. 그동안 우리와 함께 떠날 차비를 하십시오.》 바깥에 있던 두사람은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약간 짜증기가 섞인듯 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며 무작정 부엌안에 들어서려 하였다. 《가다니, 어딜 간단 말이시오?》 조심성 많은 늙은이의 물음이였다. 《가보면 압니다. 우리 부대장이 찾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부대장이 누구예요?》 《그건 여기서 말할수 없습니다. 가서 만나보면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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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간쯤 지나서 아무리 떼말려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곱단이와 함께 두사람의 호송원을 따라선 조분옥은 밤이 꽤 늦어 밀림속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잠들을 자고있는 한 숙영지에 가닿았다. 여기에 와서야 그는 걸음을 잘못 걸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우등불곁에 나무가지들을 깔고 드러누운 사람들모두가 적의 《토벌대》복장이였던것이다. 누런 개털외투를 어깨에 걸친 장교가 잠이 채 깨지 않은 눈으로 우등불이 타고있는 천막속에서 분옥이와 곱단이를 흘겨보았다. 이마밑에 굵은 숯덩어리 한쌍을 붙여놓은것 같은 시꺼먼 눈섭이 가로 질리고 역시 그것처럼 시꺼먼 숱진 코수염이 있는 무섭게 생긴 《토벌대》대장이였다. 《동무가 조분옥동무요?》 그 대장 입에서 동무소리가 나오는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네.》 분옥은 내키지 않았으나 이제는 피할길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답했다. 《음, 이런 동무였구만. 됐소. 동무를 찾을래기 우리 숱한 애를 썼소. 장군님께서 동무를 꼭 찾아보라고 부탁을 하셨단 말이요. 됐소, 동무네가 여기 천막안에서 쉬오.》 분옥은 이튿날 아침에야 그가 적의 《토벌대장》군복으로 변복한 최현이라는것을 알았다.
권영벽이 장군님의 바래움을 받으면서 백두산밀영을 떠났던 그날밤은 밝은 달이 산과 골짜기들을 환하게 밝혀주어서 밤길을 걷기가 좋았다. 음력 9월의 때이른 초겨울추위속에서도 마냥 해사하게 웃기만 하는 보름달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길동무를 해주었다. 그덕에 선오산밀영을 거치고 압록강계곡을 지나 곰의골밀영까지 이르는 먼 산길을 날 밝기전에 가댈수 있었다. 곰의골에서 아침나절을 눈붙인 다음 권영벽은 김운신이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성미가 텁텁하면서도 눈썰미가 있는 김운신은 인적없는 산발을 타고 수십리길을 내려와 이제는 권영벽이 혼자서도 길을 헛들래야 헛들수 없을 배가골의 첫 인가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길안내를 해주고서야 밀영으로 돌아갔다. 권영벽은 두 늙은 내외가 호젓이 사는 배가골의 외딴집에서 그날밤을 쉬고 다음날 아침일찍 그 집을 나섰다. 여러해동안 험한 산발을 넘나들며 단련돼온 다리로 아침나절을 조금도 쉼없이 부지런히 걸은덕에 해가 19도구골안의 량쪽 산비탈을 엇비슷이 비치게 된 한낮무렵에 이르러서는 어느덧 19도구쪽에서 20도구등판마을들로 올라가는 지름길목까지 이어대였다. 이제는 아무리 늦잡아도 리제순이와 약속되여있는 래일아침시간까지 약속된 장소에 가대는것은 문제없겠다. 옹근 반나절하고도 역시 달이 대낮처럼 밝혀줄 하루밤시간이 남아있는것이다. 길을 헛들거나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정황에 부닥쳐 시간을 빼앗길 만약의 경우가 생기지 않는 한 오늘해가 떨어지기전이나 해질무렵에는 신흥촌부근의 숲변두리에 가댈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되면 달뜨기전에 그 숲속에서 능히 하루밤의 추위쯤 견디여낼만 한 잠자리를 마련할수 있을것이고 따라서 오늘밤은 비록 한지에서일망정 편히 잠잘수 있을것이다. 등판으로 밋밋하게 뻗어오르는 갈림길목에 접어든 권영벽은 여직껏 내내 바지가랭이에서 불이 일게 놀려오던 걸음발을 늦구며 잠시 다리를 쉬울겸 요기할만한 맞춤한 자리를 찾아 길옆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중충한 분비나무숲이 해볕을 가리워 짙은 그늘을 던지고있는 근처에는 해바라기를 하며 걸터앉을만한 변변한 자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걸음발을 늦궈버린 순간부터 아득히 높아보이는 등판우에 올라가기는 꽤 뻐근하겠지만 그래도 거기 올라가서 다리쉼을 하는 편이 옳을것 같았다. 생소한 이 고장의 물정에 밝아지고 이 고장사람들의 습성에 익숙될 때까지는 될수 있는껏 이 고장사람들의 눈을 끌지 않을 자리를 택하는게 현명한 처사일것이다. 권영벽은 지친 다리에 기운을 내여 길을 춰올랐다. 적막한 숲속길에는 반반히 다져진 발구자리를 따라 찍혀진지 오래지 않은듯 한 신자국이 있었다. 찍혀진 자리가 매끈하지 못한것으로 보아 권영벽이처럼 짚신을 신은 사람이 낸 자국이였다. 무심결에 그 발자국을 따라 가고있던 그는 숲그늘이 짙게 드리운 굽이를 돌아서 다시 창백한 볕이 비쳐드는데로 나서다가 자기가 따르던 짚신자국이 길을 벗어져나간것을 보았다. 숲이 성기여지며 반숭건숭한 공지를 이룬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권영벽은 묘지마냥 붕긋하게 솟아있는 커다란 눈무지앞에 한사람이 얼어죽은듯 누워있는것을 발견했다. 권영벽은 무작정 그 사람이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공지안으로 들어갔다. 무릎을 치는 눈을 헤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던 그는 주춤 멈춰섰다. 눈우에 번듯이 누워있는 그 사람의 코구멍에서 엷은 입김이 떠오르는것을 본것이다. 빨리 손쓰면 살려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권영벽은 성급히 걸음을 다우쳐 그 사람한테로 접근했다. 죽어가는 사람마냥 눈속에 자빠져있던 그 사람은 문득 눈을 뜨며 머리를 돌리더니 권영벽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흐릿하고 초점이 바로잡혀있는것 같지 않던 그 쌍까풀진 눈은 자기곁에 나타난 길손이 생판 낯모를 사람임을 알아봤던지 삽시에 또릿또릿해졌다. 권영벽이와 비슷한 나이의 키 크지 않은 젊은 사람이였다. 《당신은 대체 뉘기오다?》 유심히 권영벽을 살펴보던 그 사람의 입에서 불쑥 투박한 령북사투리가 새여나왔다. 벙글써하게 열린 아래웃입술 짬에서 금이발 두개가 해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웃이발 량쪽에 몹시 사이벌어진 이발짬을 메워버리기 위해서 눅거리금이발을 해박은듯싶었지만 어째선지 권영벽이에게는 그 금이발이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산골사람다운 그의 차림새에 그 금이발은 어울리지 않아보였기때문이다. 《지나가던 사람이오다.》 권영벽의 입에서도 역시 투박스러운 령북말투가 흘러나왔다. 김운신이한테서 익혀둔 말씨였다. 금이발쟁이는 뭉기적거리며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다시금 권영벽을 치떠보며 짜증 비슷한 석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인데는 어째서 그러는가말이오다?》 그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권영벽은 눈속에 비뚜름히 처박힌 새까만 오지술병과 뜯어먹다만 마른명태 반토막이 껍질과 함께 널려있는것을 보았다. 붕긋하게 솟아있는 묘앞에는 꾸덕꾸덕하게 마르고 언 강낭떡이 담긴, 그을음이 잔뜩 아래굽에 배인 군용밥통 하나와 술인지 맹물인지 알수 없는 뿌잇한 액체가 담긴 밥통뚜껑이 놓여있었다. 손칼로 다스려 만든 마른나무저가락이 누런 강낭떡우에 꽂혀있었다. 묘 저켠에는 뜨내기막벌이군들이 메고다니군 하는 멜빵 달린 허술한 빈망태가 던져져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틀림없이 뜨내기막벌이군이 어쩌다 찾지 않을래야 찾지 않을수 없는 산소에 들린 정상이였다. 애꿎은 금이발로 하여 권영벽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어느덧 련민의 정으로 바뀌였다. 《술을 마시고 눈우에서 잠들었다가 무슨 경을 치자고 그러오다? 일어나오다.》 권영벽은 진정으로 말하였다. 《차라리 그렇게나 됐으면 오죽이나 좋겠소다?》 체소해보이는 그 젊은 사람은 동실하고 곱살하게 생긴 얼굴에 서글프고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사는게 원쑤같은데 술에 취해 자빠져 얼어죽을수 있다면 원이 없겠소다. 그런데 당신은 뉘긴데 어데 가는 걸음이오다?》 그 눈정기있는 쌍까풀진 눈은 권영벽의 차림새를 다시한번 훑어보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자구 다니는 사람이오다. 당신같은 사람을 말이오다.》 웃음속에 한 권영벽의 그 대답이 대뜸 마음에 들었던지 상대자는 권영벽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당신도 나같은 뜨내기막벌이군 같은데 마침 잘 만났소다. 빌어먹을! 여기서 나하구 같이 술이나 나누기오다. 죽은 애보구 속타는 소리를 해봐야 어디 내 속타는줄 알기나 하겠소다? 자, 이걸 깔고앉소다.》 그는 빈망태를 주어다 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마침 아까부터 다리쉼을 할겸 요기도 하고갔으면 하는 생각이였던 권영벽은 사양없이 뜨내기막벌이군식으로 망태를 깔고 눈우에 들어앉았다. 《내 혼자서 마시던 술이 여기 있소다.》 그는 눈속에 처박혀있던 오지술병을 뽑아들고 흔들어보였다. 질그릇병안에서 철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속상한 김에 혼자서 병나발을 불다가 절반도 못하고 드러누워 한울님앞에 죽여주십사고 빌던 참이오다. 제길!》 그는 이발로 물어뽑은 나무병마개를 뱉어버리고 그냥 술병을 든채 이번에는 묘앞으로 가서 밥통뚜껑을 들고 그안에 담긴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먹다남은 마른명태토막까지 들고 다시 권영벽의 앞에 왔다. 《이거 상스럽게 대접한다고 섭섭해마우다. 자, 한잔…》 밥통뚜껑에 철철 넘치게 술을 부은 그는 술방울을 흘리며 권영벽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지 않는것은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될것이였다. 《무슨 술인지 알고나 마시기오다. 누구의 명복을 빌러 오셨소다?》 권영벽은 밥통뚜껑을 받아든채 그에게 물었다. 《그건 알아서 뭘 하겠소다. 길을 오며 꽤 얼었겠는데 날래 속이나 덥히오다.》 그는 눈살을 찌프리며 어서 마시라고 손시늉을 했다. 《누구의 명복을 빌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제주를 얻어마시는 사람도 있소?》 권영벽의 그 말에 상대방은 어쩔수 없었던지 한숨과 함께 실토했다. 《애비를 잘못 만나서 비명에 죽은 우리 계집애의 무덤이오다. 세상에 어린아이무덤을 이렇게 만들구 찾아오는 법이 있소다? 애들이 죽으면 봉분도 없이 묻어치우구 잊어버리는 법이지오다. 그렇지만 애비를 잘못 만나서 여기서 혼자서 굶어죽구 남의 손에 묻힌게 내 너무 가슴아파서 봉분도 올려주구 오늘은 이 애곁에 찾아왔지오다.》 남의 일같지 않은 이야기였다. 안해를 잃은지 얼마 안되여 권영벽이도 그같은 상실의 쓰라림을 체험했었다. 권영벽은 무덤속에 묻힌 아이의 명복을 빌며 자기 마음속에도 되살아오르는 쓰라림을 한모금의 술과 함께 삼켰다. 《집은 어딘데 애가 이 산속에 와서 굶어죽었소?》 권영벽은 자기가 비워버린 밥통뚜껑에 술을 채워 그에게 권하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밥통뚜껑을 받아들더니 물을 켜듯 단숨에 벌꺽벌꺽 들이켰다. 《그게 글쎄 변변치 못한 애비를 만난탓이라우다.》 그는 턱주가리에 흘러내린 술방울을 손바닥으로 훔치고나서 말을 이었다. 《아무렴 우리같은 뜨내기품팔이군눔의 새끼로 태여나지 않았으문사 저 불쌍한게 이런 외진데 와서 굶어죽었겠소다? 천벌을 받고 뒈져야 할놈이사 이놈이지오다. 이 얼간이같은 금이발쟁이란 말이오다. 낟알 몇되박도 마련해놓지 않구 배가 불러가는 녀편네와 애를 팽개쳐두고 집을 떠나가버리는 매정하고 부실한 이런놈팽이가 어디 있소다?》 그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쥐여박지르며 자기자신을 마구 저주하고 타매했다. 《내가 떠난 그날부터 집에서는 에미딸이 입안에 거미줄을 치게 됐는데 나는 식구들을 먹여살릴 벌이를 해볼가 해서 온 장백일판을 돌아다니다가 림강에까지 내려갔소다. 집에서 눈들이 새까매서 기다릴줄 알면서두 행여나 돈 몇푼이라두 쥐구 돌아갈가 하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닥치는대루 별별 짓을 다 했소다. 삯김도 매구 구들두 놓구 메질도 하구 구새두 세워보구 글귀모르는 사람한테 펜지도 써주구 무슨 짓인들 안해봤겠소다? 그렇게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구 뼈빠지게 일했지만서두 손에 쥐우는건 한푼도 없소다. 집걱정은 하면서도 빈손으로 돌아갈 일이 죽기보다 더 무서워서 하루하루 미뤄가는동안 반나마 굶다싶이 지내던 녀편네는 달도 채 차지 않은 애새끼를 낳다가 죽었다우다. 그런줄두 모르구 내사 상기 둬달지나야 그 일이 있을줄루 여기면서 그냥 객지에서 떠돌아다녔소다…》 그러는동안 혼자 남은 딸애가 산열매를 따고 이삭주이를 해서 근근히 연명할수 있었던 가을이 가고 눈이 덮였다. 이집저집 비럭질을 하며 돌아다니던 딸애는 마른풀뿌리와 산열매들을 찾아 산속을 헤매다가 이곳에서 숨지고말았다는것이다. 《두달후에 집이라는델 돌아와보니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소다? 그때 일을 생각하문 정말… 가슴이 찢기오다.》 그는 하던 이야기를 끊고 두눈을 슴벅였다. 쌍까풀진 눈가에 촉촉히 잔이슬방울들이 맺혔다. 잠시 그대로 앉아 마음을 얼마간 눅잦히고난 그는 후유 긴 한숨을 뿜으며 목갈린 소리로 한탄했다. 《이런 얘길 더해 뭘하겠소다? 술이나 날래 마즈 마시기우다.》 했지만 권영벽이 따라준 술을 받아 또 한잔 마시고나자 재삼 불우한 자기처지에 대하여 스스로 토설했다. 《세상에 불행이문 나같은 불행이 또 어디에 있구 일이 꾀이면 나같이 꾀이는 사람이 또 몇이나 되겠소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가오다. 이거 실루 별나지 않소다? 내가 무슨 크게 죄진 일이 있다구 세상사람들은 너나없이 이 리창선이란 사람한테만 못되게 굴구 훼방을 놀자구 드는지?…》 《뭘 그렇기야 하겠소.》 《모르는 말씀 마우다. 내 얘길 한가지만 들어두 그런 말을 두번다시 못할거우다. 저 무덤안에 누워있는 애가 내 말을 알아들으문 나를 나무랄지 모르겠소다만 지난 여름에 내께 두번째 혼처가 났소다. 색신즉 한번 출가했다가 나처럼 혼자난 안깐인데 그만하면 인물도 쑬쑬하구 맘씨도 곱구… 아마 내겐 과분할거외다. 그게 누가 나서서 주선을 했는지 알겠소다? 선덕님이오다. 김정보어른말이오다.…》 그는 권영벽이에게 김정보를 아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자기같이 장백일대를 떠돌아다니는 뜨내기품팔이군이고보면 김정보를 모를리 없으리라고 여긴 모양이였다. 《…그 선덕어른이 색시네하고랑 의논해서 날자랑 다 정해두고 잔치차비를 하기 시작했지오다. 그런데 어떻게 됐소다? 당신은 선덕어른이 유격대에 붙잡혀간줄 아시오다?》 권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은줄을 몰랐지오다. 나도 혼사날에 제 입을 입성이라두 장만하자구 리명수목재판에 가있었는데 그런 청천벽력같은 기별이 왔소다. 우리 도정님이 령북지대 종리원들을 돌아보러 조선에 나가면서 인편을 통해 내게 편지를 써보내기를… 자네 장인보다 더 크게 믿고 의지해야 할 지양개의 김정보어른이 여사여사한 일을 당하야 생사도 기약할수 없이 되였은즉 속히 와서 어른댁을 방문하여 여하히 되였는지 알아도 보고 차후 자네들의 일을 어찌할지도 결심함이 좋겠다 그랬더란 말이오다…》 《도정이라니 천도교령북도정 박선생말이요?》 《옳소다. 령북에야 도정이라군 그분밖에 더 있소다?》 《당신은 그분과 잘 아시오?》 《알아도 잘 알지오다. 풍산에 있을 때부터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이시오다.》 권영벽은 여기서 우연히 만난 이 청년이 장백땅에서 영향력있는 유지들인 김정보나 박인진도정과 연고가 있을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뻔하지 않소다? 신거리에 왔다가 오늘 이 애한테 올 일도 있고 해서 내 어제밤 지양개의 선덕님댁엘 와봤더니 상사난 집이문 어디 그런 집이 있겠소다?… 선덕어른이 안계시구 보면 혼사라는게 다 뭐겠소. 깨진 사발이지! 그러니 보시우다. 이거 정 공교롭지 않소다? 어쩌문 유격대라는데서까지 요렇게 신통히 나한테 헤살을 놓는가말이우다. 조선사람들의 공산군은 조선사람편이구 내편인줄 알았는데… 내편이 아니였더란 말이우다. 내 그래 세상이 하두 허무하기만 해서 저애곁에 와 술을 마셨소다. 술을 마시고 여기 누웠노라니 저절로 눈물이 나질 않겠소다?》 (조선인민혁명군을 누구보다 적극 지지해야 할 이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이 도리여 원쑤처럼 여기다니?!) 권영벽은 응당 옳바른 리해를 가지고있어야 할 이 가난한 사람이 자기들을 곡해하고있는것이 안타까왔다. 막무식이 아닌 이 젊은 사람의 그릇된 리해를 바로잡아놓지 않고서는, 그래서 응당 서야 할 립장에 돌려세워놓지 않고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것 같았다. 이대로 지나간다면 후에 사령부에 돌아가서 장군님께 보고를 드릴 때에도 역시 정치공작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말대루 당신은 참말 곡절이 많은 사람이구려.》 권영벽은 쉬이 뜨지 않을 잡도리를 하고 망태우에 아예 올방자를 틀고 앉았다. 《그런데 내가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하기에는 그 많은 불행한 곡절이 당신탓에 생겼다고 할만한것은 하나도 없소.》 리창선은 권영벽의 말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 량반이 술 한잔을 얻어자시더니 귀맛 좋은 소리를 한다.… 말해보오다. 듣기오다.》 그는 자기의 량쪽 무릎우에 두손을 나눠짚으며 착실하게 들어 볼 시늉을 해보였다. 《당신의 식구들이 앓거나 굶어돌아간것은 당신을 잘못 만난탓이 아니라 못된 세상을 만난탓이 아니겠소? 만약 당신이나 나같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주구 번것만큼 먹고살게 해주는 세상이였다면 당신은 식구들곁을 떠나 품팔이하러 돌아다니지도 않았을거구 당신네 식구들은 호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고생스럽지 않게 지냈을거요. 시래기를 줏는 일도 없었을거구 눈속에서 풀뿌리를 캐는 일두 없었을거구…》 《그런 세상이 있다문사 그랬겠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보자는 식으로 마주앉아있던 창선은 어느덧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서 주의를 집중시켰다. 권영벽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은 당신일에 대해서 세상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 훼방하구 꾀이게 하여 불행하게 만든다구 했는데 내가 들으면서 생각하기엔 그렇지 않소. 전혀 그렇지 않소. 사람들은 꼭 갈라봐야 하우. 좋은 사람들은 절대로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소. 우리 나라를 강탈하구 당신이나 나같은 사람들이 제 나라 제 땅에서 못살게 하는 왜놈들이나 부자놈들이 당신을 해하는거요. 지주, 자본가 그런놈들이 다 나쁜놈들이요. 물론 그중에는 애국적이고 량심적인 좋은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건 셈에 칠만한것이 못되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유격대는 좋은 사람들중에서도 제일 좋은 사람들이요. 당신은 유격대를 만나본 일이 있소?》 리창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김정보어른을 어째서 유격대에서 붙잡아갔는지 아오?》 《그 사람들이 내라는 물자와 돈을 안낸다구 붙잡아갔다오다.》 《내가 만나본 유격대도 그래서 잡아갔다구 말했소. 그러면 누가 옳소?》 《저들이 쓸 물자와 돈을 안낸다구 붙잡아가는 사람들이 옳다고 할수야 있소다?》 《그 사람들은 나라를 찾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싸움에 쓸 물자와 자금을 요구했다고 말했소. 그러면 그런 물자와 자금을 안내겠다구 버티는 사람이 옳다구 할수 있겠소?》 《그 유격대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그대루 믿겠소다?》 《그 사람들이 의로운 싸움을 하고있기때문에 그 사람들의 말을 나는 믿을수 있다고 보오. 생각해보시오. 당신이나 나같은 사람은 식구들을 먹여살릴 걱정이나 하면서 맘엔 없어도 왜놈들한테 더러 굽신거리기도 하고 그놈들의 시중도 들며 살아가고있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온 강토를 되찾구 온 겨레를 살려낼 걱정을 하면서 왜적들과 피흘리면서 싸우고있소. 그 사람들한테는 부모처자가 없겠소? 과연 어느쪽을 의롭고 떳떳하게 산다구 할수 있겠소? 나나 당신이나 선덕님같은 사람이요, 그 사람들이요?》 《나도 그 사람들처럼 총잡고 떳떳하게 살수 있구 싸울수 있소다!》 젊은이의 혈기와 자존심이 꿈틀거렸던지 리창선은 불쑥 큰소리로 성난듯 대꾸하며 오지병모가지를 꽉 틀어쥐였다. 《나도 무골충은 아니오다.》 《무골충은 아닌데 왜 싸우지 않소?》 《…》 그 물음에는 리창선이 대꾸할 말을 못찾았던지 눈만 디룩거렸다. 《싸울수 있구 싸우고싶으면 왜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내게도 총을 달라 하구 손을 내밀지 못하오? 그 사람들의 말이 숱한 청년들이 장백과 국내에서 자기들을 찾아왔다고 했소.》 리창선은 머리를 들었다. 의혹이 서린 서리발같은 눈길이 권영벽의 얼굴에 화살같이 와서 박혔다. 《당신은 어째 그 사람들을 쫓아가지 않았소다?》 권영벽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눈을 끔쩍했다. 《아마 운이 나빴던가보오. 이런게 있어야 그 사람들이 받아준다는 소리가 있던데 이게 요즘에야 내 손에 들어왔거던…》 그는 덧저고리안주머니에서 꺼낸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조선인민혁명 참군을 호소한 선전물을 리창선에게 보였다. 그것을 넌지시 받아든 리창선은 눈으로 글줄들을 더듬으며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거렸다. 한번 읽고 얼핏 권영벽을 곁눈질해보는 그의 눈에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였다. 거듭 읽고 다시 그에게로 향한 창선의 시선은 새삼스럽게 권영벽의 행색을 유심히 더듬었다. 《선생님은 뜨내기품팔이군이 아니지오다?》 마침내 그는 조용하고도 확신있는 석쉼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소다. 선생님, 이런걸 내게 뵈줘서 고맙소다. 제 술을 잡순 값으루 이걸 제게 주시오다.》 등사한 종이장을 접어 비위좋게 제 품속에 넣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 그의 부르튼 입술짬에서 한쌍의 금이발이 유난히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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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른아침, 조국산천이 마주 바라다보이는 육산지대의 끝머리에 올라앉은 신흥촌 뒤산 울창한 분비나무숲속에서 막대기로 나무통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청신한 아침대기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화답하여 마을쪽의 숲변두리에서 나무찍는 도끼질소리가 역시 꼭같이 세번씩 울렸다. 그에 뒤이어 산말랭이쪽에서는 뜨내기품팔이군차림의 젊은 사람이, 산기슭쪽에서는 빈지게들을 하나씩 메고 도끼들을 찬 나무군차림의 네 젊은이들이 나타나 서로 부둥켜안았다. 이날 이 산속 으슥한 골짜기에 있는 크지 않은 굴안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대표이며 정치공작원인 권영벽의 사회밑에 조국광복회 장백현 20도구 신흥촌지회를 뭇는 모임이 있었다. 이리하여 압록강기슭의 장백땅에 조국광복회의 첫 지방조직이 태여났다. 그 모임후 권영벽은 리제순이와 함께 치부동쪽으로 떠나갔다.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에서 조국광복회조직들이 련이어 생겨났다. 며칠동안 밤에 낮을 이어 압록강상류연안지대의 곳곳을 주름잡아다니며 여러개의 지하혁명조직들을 꾸려준 권영벽은 장군님께서 주신 다른 하나의 특별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11월초에 밤어둠을 타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으로 들어갔다. 이무렵, 곰의골밀영지에는 풍산땅에서부터 찾아들어왔다는 수상한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자신을 뜨내기품팔이군이라고 말한, 눈이 쌍까풀진 그 젊은이는 한때 풍산에서 천도교청년당에 관계한적 있다는 자기의 진술과 가난뱅이촌젊은이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한쌍의 금이발로 하여 보초근무를 선 신대원들의 의심을 사서 결박까지 당할번 하였다. 때마침 곰의골밀영에 와계시던 장군님께서는 그 수상쩍다는 금이발쟁이젊은이를 데려오게 하시고 그의 말을 들어보시였다. 그가 유격대를 찾아오게 된 사연을 세세히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길을 떠나간 권영벽이가 첫걸음부터 자신께서 기대하신대로 일을 잘해나가고있는데 대한 남모르는 기쁨속에 그 수상쩍다던 청년의 입대청원을 수락하시였다. 그날로 보충중대 대렬에 들어선 그 뜨내기품팔이군 신입대원에게는 《김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리창선이였다.
지양개에 김정보를 찾아갔다가 만나보지 못하고 그길로 돌아선 뒤에 스무날가까이 갑산, 풍산, 혜산 일대의 종리원들을 순회하며 교리도 깨우쳐주고 교세확장형편도 료해한 천도교도정 박인진은 장백신거리에 있는 자기 집에 와서 하루밤을 쉬고 이튿날 아침 17도구 왕가골에 자리잡고있는 장백 종리원으로 떠나려던 참에 잠간 좀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자기네 령사관으로 와달라는 현참사관 에구찌의 《면담초청》을 받았다. 왜놈과는 본시 얼굴을 마주 대하기조차 싫어하는 박인진은 여러날동안 객지에서 지내온탓으로 몸이 불편하고 피로하다는 구실을 붙여 거절했다. 그런데 되돌아갔던 령사관심부름군이 다시 그를 데리러 왔다. 몸이 좀 불편해하더라도 기어이 모셔오랬다는것이다. 심부름군은 면담요청자가 현참사관일뿐만아니라 현헌병대장이기도 하다는것을 귀띔해주었다. 가지 않을수 없었다. 면담요청이 아니라 호출인것이다. (장백쪽에 이사온 이후엔 덜 시끄럽게 구는것 같더니 또 무슨 지랄인가? 더구나 현헌병대장이란놈이 찾다니?) 언제나 멀리 에돌아다니군 하던, 보기만 해도 역겨운 일본령사관으로 들어가는 박인진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버지에게서 천도교 교리를 전수받던 어린 시절부터 박인진은 참다운 천도교인은 참다운 애국자여야 한다는 신념을 키워왔었다. 독실한 천도교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천도교의 최고목적이며 최고리념인 《지상천국》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먼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히 지내게 해야 한다고 깨우쳐주면서 천도교조들이 거의다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을 위해 몸바쳐 싸웠으며 또한 그것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지내다가 옥사당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갑오년 1월에 있었던 유명한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했던탓으로 함경도땅으로 쫓겨온 사람이였다. 박인진은 아버지가 옛말처럼 들려주군 했던 천도교조들의 애국적인 생애에서 자기의 인생행로를 찾았다. 그 역시 그러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봄, 기미년 3.l독립만세소요는 령북땅에도 메아리쳐왔다. 독립정신이 반도 3천리 방방곡곡에서 열화와 같이 타오르던 이해봄에 그는 자기의 영향력이 미치고있는 풍산에서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시위대렬의 맨앞장에서 천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원쑤놈들의 관청에 돌입하다가 왼쪽가슴과 왼손목에 적의 총탄을 받았다. 부상당한 몸으로 적들에게 체포된 그는 몇해동안이나 함흥형무소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자기가 숭상해온 천도교조들과 같은 옥중고초를 겪었다. 그 옥중고초도 그의 신앙과 리념을 꺾지 못하였다. 몇해후 서대문감옥에서 나온 그는 오봉산 까치령치기에 있는 가마풍구에 돈벌이를 간다는 소문을 돌리고 집을 떠났다. 당시 허천 오봉산에는 독립군들이 진을 잡고있었다. 그들과 손잡은 박인진은 3~4년동안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반일독립군운동을 후원했다. 그러나 풍찬로숙해가며 힘껏 떠밀어준 독립군운동이 보람없는것으로 되여버리자 그는 압록강을 건너 타국땅으로 쫓겨가는 독립군들을 눈물속에 바래주고 그들과 헤여졌다. 오봉산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왜놈들의 꼴을 덜 보고 살만한데를 찾아 풍산군 천남면의 깊은 산골인 슬리금산덕에 가족들과 함께 옮겨앉았다. 이곳에서 그는 전교실을 꾸리고 교리를 선전하는 한편 야학을 차려놓고 비밀리에 《보국안민》의 리념과 독립정신을 사람들속에 주입했다. 하지만 이 산골에서도 그는 늘 마음놓고 지낼수 없었다. 그를 《요시찰인》으로 주목하고있던 왜경들은 그의 집 처마밑에 순찰함을 만들어다 달아놓고 매주 한번씩 순찰했고 한달에 한번씩은 수석놈이 직접 순찰차로 찾아오군 했다. 이 반갑지 않은 정기적인 방문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재작년 겨울에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 신거리에 집을 옮기고말았다. 위만경찰은 왜놈경찰들모양으로 진절머리가 나게는 굴지 않았다. 집앞의 기둥에 순찰함을 갖다 달아놓지도 않았고 정기적인 순찰을 오지도 않았다. 다만 이따금 전교실 뒤구석에 슬그머니 와 서서 그의 교리선전에 잠간씩 귀를 기울여보군할뿐이였다. 그만해도 숨이 나오는듯 했다. 그는 이제는 놈들에게서 시끄러운 단련을 덜 받으며 그럭저럭 지내게 되는줄로 알아왔다. 그런데 문득 현헌병대장이 찾는다는 전혀 달갑지 않은 전갈을 받은것이다.… 《아, 오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어서.》 박인진이 령사관 심부름군이 열어주는 어느 한 방에 들어서자 나이 사십이 넘을가말가한 똥똥한 사복쟁이신사가 출입문가까이까지 나오며 마치 그를 부축이라도 해줄듯 한 친절한 기색을 보였다. 박인진은 첫대면부터 독사가 자기 몸을 휘감는것 같은 혐오감을 느꼈다. 《몸이 불편하시다는데 찾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놈은 겉발린 인사말을 앞세우고나서 자기를 소개했다. 《현참사관 에구찌 오도마쯔입니다.》 제 가슴에 얹은 그자의 손끝은 자기의 탈로 쓰고있는 외교관의 표적을 가리켜보이기나 하는것처럼 피둥피둥 살찐 목을 졸라매고있는 새까만 나비넥타이언저리에 닿아있었다. 웬일인지 그자는 자기가 현헌병대장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았다. 박인진을 놀래우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에구찌는 외교관다운 흉내를 내고있는 말이나 나비넥타이로써 자신의 진면모를 다 가리우지는 못하였다. 면도질한듯이 반들반들해서 마치 그자체가 하나의 철갑모처럼 보이는 빡 깎은 머리와 친절을 가장하는 능글맞은 웃음으로도 살기가 가리워지지 않는 뱁새눈, 오랜 군인다운 담차고 절도있는 걸음걸이 그리고 탄탄하게 살찐 그의 몸전체에서 풍기는 그 어떤 피비린내와도 같은 체취… 그자의 어디에서나 사람잡이 직업에 적어도 반생을 바쳐왔을것 같은 상습살인광다운 면모가 나타나있었다. 박인진은 그러한 에구찌를 보면서 이놈은 역시 신사복에 나비넥타이보다는 헌병제복에 피묻은 군도자루를 잡고있는것이 더 어울렸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에구찌는 박인진에게 옷걸개가 세워져있는 방안의 한구석을 손으로 가리켜보이고 또한 안락의자도 권했다. (이놈이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토록 친절을 베푼담? 무슨 꿍꿍이를 하는걸가?) 박인진은 두루마기를 벗지 않은채 앉았다. 중절모도 그놈이 권한 걸개에 걸지 않고 자기 무릎우에 놓았고 단장도 구석에 세워놓지 않고 그냥 손에 잡은채 앉아서 두손을 손잡이우에 걸얹었다. 자기의 권을 채 받아들이지 않는 박인진의 태도에 에구찌는 분명 언짢은 모양이였으나 그런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척하면서 그의 건강이며 날씨며 그밖의 몇가지 객적은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지도밑에 있는 8개종리원산하 교인구성과 교인들의 동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책상서랍속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여 박인진의 앞에 내밀었다. 《이 청년을 알아볼수 있습니까?》 이마에 총탄을 맞고 눈우에 쓰러져 죽은 청년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였다. 얼굴이 피자박이 되긴 하였으나 어디선가 본듯 한 모습이였다. 그러나 어디서 봤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디서 본것 같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 애매한 대답은 오히려 시끄러움만 사게 된다는것을 모르지 않는 박인진은 다시금 머리를 가로저으며 사진을 놓았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사진이 나하구 무슨 상관이라두 있습니까?》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있던 에구찌 역시 머리를 저었다. 《박선생, 당신이 모를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잘 살펴보고 솔직하게 말해주는것이 현명할것입니다.》 박인진은 마지못해 다시 사진을 들고 보았다. 《영 기억이 없는데요? 우리 천도교인인가요?》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천도교인입니다.》 《어디에 살던 사람입니까?》 《그것을 바로 박선생, 당신이 해명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입은 옷에는 당신이 입고있는 두루마기에 달려있는것과 같은 단추고리가 달려있었습니다. 단추 두개를 채우게 된 단추고리… 그런 단추고리를 비천도교인들이 달고다니는걸 박선생은 어디서 본적이 있습니까?》 에구찌는 다시 책상서랍에서 다른 사진 한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피살된 사람의 덧저고리를 헤쳐놓고 그안에 입은 한복저고리가슴을 찍은 사진이였다. 에구찌의 말대로 천도교인들만이 표적으로 달군하는 유표한 단추고리가 달려있는 저고리였다. 《죽은 사람이 나의 지도밑에 있는 청년이였다는 사실을 증명할만한 다른 근거도 있습니까?》 《당신의 관할구역에 속하는 이 장백땅에서 이 청년이 불행한 운명을 마쳤다면 당신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령북지대의 천도교인들이나 다른 지방의 천도교인들이나 다같은 단추고리를 달고다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줄 압니다. 어쨌든 나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 청년은 무엇때문에 이렇게 됐습니까?》 에구찌는 손마디를 꺾어 딱딱 소리를 냈다. 아마도 그에게는 외교관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고약한 버릇이 있는 모양이였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희생물로 된셈입니다. 압록강을 가만히 넘어오다가 천벌을 받았습니다. 국경경비대에 의해 사살당한 범인의 품속에는 참군을 호소한 〈공산군〉의 선전삐라와 최근에〈공산군〉이 널리 퍼뜨리고있는 그 무슨 〈10대강령〉이라는것이 들어있었습니다. 범인은 〈공산군〉에 가담할 목적으로 월경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는것이 명백합니다.》 (천도교인들속에 《공산군》에 가담하려던 사람들이 있다?) 박인진은 듣느니 금시초문이였다. 그 사실이 뜻밖이기도 했다. 그럴수 있는 천도교인은 없으리라고 믿는때문이였다. 지양개에서 무슨 불길한 일이 있었는지를 목전에 당해본 박인진자신이《공산군》들에 대하여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있지 않는것이다. 자기 세력밑에 있는 교인들을 자기자신처럼 믿고있는 박인진은 그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고있는 도정인 자기가 모르게 자기의 뜻과 어그러지는짓을 할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것을 또한 확신하고있었다. 《그럴수 없습니다. 나의 영향하에 있는 교인들속에는 그런 일이 있을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나의 영향권밖에 있는 교인일것입니다.》 《그건 지나친 장담이 아닙니까?》 《나는 내밑에 있는 교도들을 자신처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소, 박선생?》 에구찌는 뱁새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박인진에게 견주며 또다시 손가락마디들을 딱딱 소리나게 꺾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일것입니다. 혹은…》 박인진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의 영향하에 있지 않는 천도교인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우리 천도교인들도 여러파로 갈라져있다는것을 상기시키고싶습니다.》 《그러나 령북일대의 천도교인은 대부분이 당신의 세력하에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은 결코 전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구찌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소부분보다 전체에 가깝고 전체로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곧 전체를 대표할수 있는 사람이며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중요한건 이 사실입니다.》 에구찌는 두손으로 책상을 꽉 눌러짚으며 일어나더니 책상과 의자사이에서 빠져나와 뒤짐을 지고 방안을 초조히 거닐기 시작했다. 박인진은 이제 비로소 본론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예감대로였다. 잠시동안 뚜벅거리며 왔다갔다하던 에구찌는 박인진의 앞에 놓인 긴 탁상 맞은편에 와서 멈춰서며 탁상을 짚었다. 바위를 짚고서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마냥 박인진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쳐든 에구찌는 말마디들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박아가며 말하였다. 《당신에 의해 대표되는 령북권 천도교도들가운데서 《공비》를 동조한다거나 《공비단》에 가담하는 이단자가 나타난다는것은 누구보다 당신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당신에게 치욕을 안기는 이단자들이 나타나고있습니다. 공산군에 가담하려다가 사살당한 저 불행한 청년교인은 자기의 이단적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저자와 동행했던 다른 한자는 피흔적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자 역시 천도교인일것입니다. 실종된 그자가 우리 경찰들의 수색망에 걸려들지 않았다는것은 곧 장백지대의 당신네 교인들가운데 이미 공산군과 내통되여있거나 공산군을 보호, 협조하는자들이 존재할수 있다는 충분한 우려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런 우리의 심심한 우려에 대하여 우리는 당신에게 알려주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여기서 이야기를 끊어버린 에구찌는 허리를 펴며 긴 탁상을 짚었던 두손을 떼더니 창곁의 안락의자에 뒤걸음쳐가 앉았다. 안락의자팔걸이에 량손을 얹고 한다리를 다른 다리우에 얹은 에구찌는 말없이 박인진을 넘겨다보았다. (나를 위해서라고? 네놈들을 위해서가 아니구 나를 위해서 말해준다고? 네놈들은 조선을 강점하구있는것도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을 위한것이라구 떠벌이구있지. 자신들이 항상 도덕적으로 처사하는것처럼… 네놈들의 도덕이 어떠하다는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강도들만이 네놈들처럼 말할수 있다. 아마 강도들은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서도 강탈당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뻔뻔스럽게 말할수 있을지 모른다. 강도의 도덕…) 마치 자기를 생각해서인듯이 지껄인 에구찌의 위선적인 말은 박인진에게서 역겨움을 자아냈다. 악이 허울을 쓰고있으면 선으로 빗보일수 있다. 이런 때 정신을 차려 똑똑히 보지 못하면 온갖 선은 악의 롱락물로, 희생물로 되고만다. 박인진은 에구찌의 위선적인 태도에서 느낀 혐오감덕분에 그놈이 떠벌이는 이야기들을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지 않다간 자기가 그 어떤 악의 희생을 당할지 모른다는것을 륙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 보시오, 박도정.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에구찌는 잠시 끊었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 압록강연안일대에는 매우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고있습니다. 백두산록오지에 웅거하고 맹활약하는 〈공산군〉은 조선과 만주의 치안유지에 막대한 무질서와 혼란을 조성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최근에 조선과 만주의 행정, 치안, 군당국에서는 이 〈공산군〉을 근간중에 전면적으로 소멸할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결정적인 대책들이 지금 취해지고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당국을 협조할 대신 〈공산군〉들을 동조 또는 협조한다는것은 자타에 다 불미스러운 처사로 되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가 다 자기자신의 생명과 안정된 생활과 행복을 수호하고 치안을 도모하기 위하여 〈공산군〉을 색출하고 토벌하는데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그가운데서도 산만무질서한 비종교인들과 달리 자률적인 조직체계에 따라 결속되여있는 당신네 천도교도들이 적극적인 협력자세를 취한다면 치안확보에 상당한 기여를 할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박선생, 당신은 당신네 교인들의 생명재산과 안전을 적극 보호할 의무를 지니고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에구찌의 주제넘은 그 말에 박인진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보국안민〉은 우리 교의 중요리념의 하나입니다. 천도의 신앙자인 나는 우리 교인들뿐만아니라 백성들의 편안을 도모하는것을 자기의 의무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생각하고있는 나의 의무가 어떤것으로 구체화되겠는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 에구찌는 랭소를 띠였다. 《여기에 모를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당신들이 〈보국안민〉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치안을 위협하고 주민들의 안녕을 훼손하는 〈공산군〉들을 소멸하는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공산군〉활동에 대하여 장악해야 합니다. 당신은 천도교종리원들과 교인집단을 발동하여 〈공산군〉활동에 대하여 제때에 우리에게 탐지, 통보해주면 될것입니다.》 박인진은 에구찌의 속심을 비로소 꿰뚫어보았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쥐여짜면 한마디, 천도교단체를 저들을 위한 정보수집집단으로, 간첩집단으로 되게 해달라는 수작이였다. (더러운놈, 내가 아무리 헐값의 인간이 됐기로 네놈들의 끄나불이 돼달라는 소리를 함부로 한단 말인가?) 박인진은 갑자기 속이 메슥메슥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여 입을 막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 (나더러 네놈들의 고발쟁이가 되라구? 고자질쟁이두목이 돼달라구?) 박인진은 치받치는 모욕감을 누르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결코 《공산군》들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고있지는 않았으나 철천의 원쑤로 여기는 왜놈의 끄나불이 돼달라는 소리는 순편한 마음으로 드러낼수 없었던것이다. 《몸이 불편한게 아닌가요?》 창곁의 안락의자에 앉아 그를 건너다보고있던 에구찌는 등받이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일없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어서 마저 하시오.》 박인진은 손수건을 꿍져 두루마기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에구찌는 다시금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몸을 안락의자에 깊숙이 묻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도정인 당신이 자기 산하의 교도들로 하여금 오늘의 정세에 부합되게 당신들의 그 〈보국안민〉의 리념을 실행할수 있는 현실주의적인 노력을 하도록 인도해주기를 바라고싶습니다.》 《여보시오, 참사관선생,〈보국안민〉이란 나라를 보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한다는 말인데 당신은 지금 나에게 어떤 나라를 보호할데 대하여 말하는것입니까? 나더러〈만주국〉을 받들라고 말하는것입니까?》 에구찌의 눈살이 약간 꼿꼿해졌다. 《새삼스러운 질문입니다. 과연 당신은 내가 말하는 〈보국〉의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우리 천도교인들이 리념으로 삼고있는 〈보국안민〉은 어디까지나 모국과 모국인민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고있습니다.》 《나는 당신더러 굳이 〈만주국〉의 보전에 협력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국인 조선을 보전할데 대하여 말하고있습니다. 지금의 조선, 그것은 곧 일본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당신도 견해를 달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만일 당신이 지금도 여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있다면 아마 나는 당신의 협력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중떠보는듯한 에구찌의 뱁새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 박인진은 아무 대답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지켜보고있던 에구찌는 얄팍한 입술에 한줄기 야릇한 웃음을 띠웠다. 《박선생, 당신도 이제는 현실주의적인 립장을 취해야 합니다. 당신네 천도교인들의 최고지도자인 최린선생을 보시오. 그는 총독부중추원의 참의로서 당신네 천도교인들의 행복과 조선사람들의 안정된 장래생활을 위하여 헌신분투하고있지 않소? 당신자신이 잘 아는것처럼 최린선생은 3.l소요사건의 발기인의 한사람이였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최린선생은 비현실주의적인 몽상속에서 깨여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된 현실을 리해하고 미나미총독을 적극 협조하고있습니다.》 에구찌에게 언질을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고있던 박인진은 무릎우에 놓았던 중절모를 잡아쥐며 눈을 들었다. 《최린선생은 어떨지 모르겠소만 나는 정치와 무관한 사람이외다. 나는 한울님과 나밖엔 모르오. 나는 그저 내 한울님을 믿고 살아갈뿐이지요. 나는 당신네 정치인들과 아무 관계도 가지지 않고 한울님만 믿으며 조용히 살기를 바랄뿐이요.》 에구찌는 그가 이런 애매한 말로 자기의 《권고》를 회피하고있다는것을 눈치챘다. 기름이 번지르한 에구찌의 얼굴에서는 능글맞은 웃음이 지워졌다. 부아가 난 에구찌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여보시오, 박선생! 당신이 말하는 한울님, 그 한울님이 뭔지 나는 모르오. 나에게 명백한것은 천조대신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천황페하가 다스리는 하늘 하나밖에는 이 세상에 다른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이요. 당신은 아직도 천황페하의 적자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것이요?》 박인진은 자리에 앉은대로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말하였다. 《나는 천도교신자요. 그러므로 나에게 명백한것은 우리 천도교 원조인 수운대신사가 가르치신 한울님 하나뿐이요. 〈무극대도〉의 〈천도〉외에 다른 하늘의 도를 모르고 사는 우리 천도교인들의 신앙을 당신네는 합법적으로 승인했소. 이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요.》 박인진을 유심히 건너다보고있던 에구찌의 입가에 비양조의 차거운 웃음이 비꼈다. 《아니, 한가지 더 명백한것이 있소. 최린선생은 당신네의 신앙이 우리의 천조대신으로부터 시작된 천황페하가 다스리는 하늘을 믿는데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한것 같은데 당신은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것이요. 3.l 소요때 서울 인사동의 명월관지점에서 랑독된 소위〈독립선언서〉를 최남선에게 기초하도록 지시했던 최린선생은 개벽된 오늘의 조선에 대해서 현실주의적으로 대하고있지만 풍산산골의 만세고창에 앞장선데 불과했던 당신은 아직도 옛꿈에서 채 깨여나지 못하고있소.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17년전의 당신을 기억하고있소. 당시에 나는 풍산에서 있은 3.l만세소요사건의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호송할 때 한개 호송원에 지나지 않았소. 지금 나는 현참사관일뿐아니라 현헌병대장의 자격으로 당신에게 우리를 돕는것이 당신자신에게도 당신밑에 있는 여러 교인들에게도 나쁘지 않으리라는것을 말해주고싶소.》 에구찌는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내놓고 말했다. 이것은 벌써 로골적인 위협이였다. 《나는 당신이 17년전에 나를 호송한 경력을 가진 초면의 사람이 아닌줄은 몰랐소만 당신이 현헌병대장이란건 모르지 않았소. 나는 헌병대장앞에 지난날과 달리 정치엔 관여치 않는다는걸 말할뿐이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신앙속에 묻혀 조용히 살고싶소. 나를 찾은것이 그것때문이라면 나는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겠소. 나는 지금 앉아 견디기 어려울만치 몸이 불편하오.》 박인진은 중절모를 머리에 얹고 일어났다. 《돌아가서 다시 잘 생각해보오. 대답은 후에 주시오.》 박인진은 더는 아무 말없이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박인진의 얼굴은 쓴약을 먹고난 사람마냥 이지러져있었다. 한무리의 왜놈군인대렬이 군가를 부르며 십자길을 지나갔다. 돼지멱따는것 같은 소리들을 내지를 때마다 쩍 벌린 아가리들에서는 입김들이 날리고 징박은 소가죽군화들은 길바닥에 다져붙은 굳은 눈을 투닥투닥 찍어뿌렸다. 잔뜩 뽑아든 목줄띠에 피대들이 살아오르고 군용방한개털외투의 어깨우에서는 서리낀 총대들이 우줄거린다. 길이 막혀서 잠시 멈춰섰던 박인진은 대렬꼬리가 자기앞을 지나쳐버린 뒤에야 십자길을 넘어가 강안통로로 접어들었다. 압록강하류쪽으로 내려가는 강변길에는 인적이라군 거의나 없었다. 오늘따라 압록강얼음판우에는 얼음을 지치러 나온 조무래기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하늘은 음산하게 흐려있었다. (더러운놈.) 발구자리를 따라 걷다가 발을 헛짚어 생눈을 밟은 박인진은 발을 굴러 구두에 덮인 눈덩이들을 털어버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길바닥이 아니라 좀전에 만났던 현헌병대장놈의 능글맞은 상판을 보고있었던것이다. 곱새겨 생각할수록 정말 더러운놈이였다. 자기를 어떻게 보고 저들의 끄나불이 돼달라는 말을 함부로 할수 있단 말인가? (뭐 《보국안민》을 위해서 그런짓을 해야 한다구? 천도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그따위짓에 함부로 우리 동학의 리념을 마구 끌어다붙여? 내 나라를 빼앗구 내 민족을 유린한 날강도놈들의 시중군이 되는게 그래 내 나라를 보하구 내 나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성스러운 일이란 수작이여?) 박인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놓았다. 온몸이 떨려 술취한 사람마냥 자주 비칠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자기에게 욕된 말을 주저없이 하던 에구찌의 각이한 형상이 번갈아 떠올랐고 귀안에서는 그놈이 지껄이던 그 욕된 말마디들이 또한 번갈아 울리군 했다. (뭐 지금의 조선은 곧 일본이구 일본의 한부분이라구?) 그놈이 지껄여댄 말마디들을 되받아 외울적마다 박인진은 걸음을 멈칫거리기도 했다. 또한 눈앞에 보이는 에구찌놈을 상대로 발을 굴러대고 지팽이로 길바닥을 찔러대기도 했다. (에끼, 이 고현놈! 조선은 조선이고 일본은 일본이지 조선이 어찌 일본으루 되구 우리의 모국이 어찌 일본이란 말이냐?》 그는 에구찌의 방에서 그를 맞대놓고 하지 못했던 자기 마음의 말들을 저혼자 길을 걷고있는 지금에야 맘껏 토설하였다. 아무리 들어도 자기를 고자질하지 않을 땅과 길과 눈과 나무와 바위를 상대로 하여 울화를 터뜨렸다. (뭐 하늘도 저희네 천조대신으로부터 시작된 천황페하가 다스리는 하늘 하나뿐이라구? 천조대신은 무슨 천조대신이구 천황은 또 무슨 말라빠진 천황이냐? 《하늘의 황제》? 그 빌어먹을 저희네 《하늘의 황제》가 다스리는 하늘을 믿으라구?》 그의 입에서 뱉어져나간 가래는 눈앞에 떠오른 에구찌의 상판으로 날아갔다. 화김에 저도 모르게 두루마기자락에서 바람소리를 내며 씨엉씨엉 빠른 걸음을 옮겨놓고있던 박인진은 문득 길바닥에 멈춰섰다. (당신네 천도교인들의 최고지도자인 최린선생을 보시오.… 최린대도정은 당신네의 신앙이 우리의… 하늘을 믿는데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한것 같은데…) 에구찌의 그 말이 귀전에 다시 울리며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것이다. 에구찌가 쥐여친 여러 말들가운데서 이 한마디 말에는 일단의 진실이 있다는것을 그는 지금 문득 가슴아픈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다, 최린은 3.l독립만세사건때 《33발기인》중의 한사람이였고 《독립선언서》를 책임지고 준비시킨 주동인물이였다. 그는 천도교의 최고지도자의 직책으로 되는 대도정으로 있었으며 재작년 12월에 있은 천도교림시대회에서 대도정지위를 형식상 용퇴한후에도 여전히 최고지도자로서의 명예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 이러한 최린이 《총독부》중추원의 참의로 되여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의 한 주추돌노릇을 하고있다는것은 그를 믿고 떠받들어왔던 많지 않은 천도교도정중의 한사람인 박인진을 슬프게 하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오늘 그의 입에서 《보국안민》의 구호가 나올 때 그것을 독립적인 조선의 보호나 조선독립국의 보전으로 해석하고 접수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바로 그의 지시밑에 《독립선언서》초안을 작성했던 최남선은 지금에 와서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은 조상도 같고 근본도 같은 한혈통, 한민족이라고 줴치고있다. 조상이 같은 한혈통이기때문에 일본과 조선은 한나라, 한몸뚱이로 돼야 한다고 떠벌이고있다. 력사를 날조하면서까지 조선사람더러 조선사람되기를 그만두고 일본사람이 되여 일본천황과 일본의 하늘을 섬기며 살아가라는 소리다. 한때 우리 겨레를 향해 독립만세를 부를것을 고취하고 선동하던 사람들이 그런짓들을 하고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앞장에서 지도해줄것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세상 눈앞에서 일본의 개가 되고 우리 겨레모두가 일본놈들의 영원한 노복이 되여 살기를 설교하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랴?》 박인진은 길가운데 멈춰선채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을 향하여 얼굴을 들었다. (아, 한울님, 우리 겨레는 과연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하나이까? 어찌하여 우리 겨레에겐 나라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바른 인물 하나도 내려보내주지 않사옵니까? 과연 우리 겨레는 죽어가는 우리 겨레를 살려낼만한 큰인물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고 옳바르게 이끌어줄만한 영걸을 단 한사람도 가져보지 못한채 이대로 죽어가야 하나이까? 이미 강토를 잃은 우리 겨레가 이제 우리의 한울님까지 잃고 어찌 살아가겠나이까? 아, 한울님!) 하늘을 향하여 통탄하는 박인진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떨어져 두루마기자락을 적셨다. 그는 슬픔에 잠겨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한울님을 향하여 안타깝게 호소했다. (우리의 한울님이시여, 이제 우리 천도교도들은 당신까지도 믿지 못하고 저버려야 할 말세의 경각에 다달았소이다. 자기의 한울님조차 지켜낼수 없는 불쌍한 우리 동학도들과 우리 겨레를 구원해낼 길은 없나이까? 천도외에는 아무것도 믿어본적 없는 당신의 가장 충실한 이 적자에게 당신은 마지막으로 깨우쳐주실 말씀도 없나이까?》 박인진은 단장에 의지하여 그냥 그자리에 머물러선채 눈물에 젖은 눈을 감고 일찍 젊은 시절에 기천수련을 할 때처럼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울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러나 무극무궁, 광대무량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방금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이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와 길가의 앙상한 이깔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였다. (아, 어찌된 일인가? 한울님도 이제는 내 마음속을 떠나가신것인가?》 박인진은 눈을 뜨고 싸락눈이 내리는 음침한 재빛하늘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짚기 시작했다. … 그는 길을 얼마나 축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허무감에 사로잡힌채 그저 기계적으로 걸음을 내짚기만 했다. 《박도정님이 아니시우? 이거 참 오래간만에 뵙소이다.》 약수동 언덕길을 내려 마을앞을 지나던 박인진은 어느 집 마당안에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무아의 상태에서 깨여난 그는 손에 도끼를 든채 반기며 인사하는 낯익은 얼굴을 약간 뒤늦게야 알아보았다. 《아, 형님이시오? 이거 몰라보고 지나칠번 했습니다. 그새 집에서 다들 무고합니까?》 지난봄 언제인가 얼핏 들려본 뒤에 만나보지 못했던 박로인이였다. 그전날 풍산 슬리금산덕에서 살 때 이웃에서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다. 《네, 덕분에… 어디 가시는 걸음인지 바쁘지 않으시거든 들어와 몸이나 좀 녹이구 가시지.》 박로인은 삽짝문을 열어주며 언제나와 같이 친절하게 대했다. 그 권고를 받고나서인지 이제야 그는 자기가 오늘 점심을 번졌다는것과 신거리의 자기 집을 지나쳐 수십리길을 내처 걸어왔다는것을 문득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부터 오자고 작정했던 장백종리원쪽으로 곧장 향해온것이다. 갑작스럽게 다리맥이 풀리고 시린 발이 아파났다. 《왕가골 종리원에 가던 걸음인가보군?》 박로인의 짐작의 말에 도정은 어망결에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렇다면사 상기도 한참이나 가셔야 할텐데 들어와 담배라두 한대 태우며 몸을 녹이구 가시우.》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는지 싸락눈을 뿌리고있는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냥 종리원까지 걷고싶어도 다리가 매시근해서 좀 쉬여야 할것 같았다. 박도정은 늙은이가 권하는대로 삽짝문안으로 들어섰다. 《소는 어찌하고 외양간에 장작을 가려넣으셨소?》 외양간앞을 지나다가 휑하니 빈 외양간안에 방금 팬 장작가치들이 들이쌓인것을 본 박인진은 이상스럽게 여겼다. 지난 봄에 얼핏 들렸을 때 박로인이 황소 한마리를 장만했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이 구경시킨 소가 없어진것으로 보아 생활이 여전히 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디 보냈지오다.》 《도루 팔았습니까?》 《아니오다. 그저 어디에 좀…》 박로인은 그를 집안에 모셔들였다. 사이문너머에서 안로인과 식구들이 인사를 올리고 물러난 뒤에 잠시 담배를 태우며 오래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면서도 박인진에게는 텅 빈 외양간이 그냥 마음에 걸렸다. 날이 갈수록 쪼들려가는 이 집 살림도 남의 일같지 않았다. 박로인네나 자기네나 고국의 풍산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 땅에 넘어와 지내오는것도, 갈수록 살림이 펴일 대신 궁해지기만 하는것도 다 오늘 만난 그 더러운 족속들탓이라고 생각할 때 또다시 울화가 치받치는것을 금할길 없다. 어쩌다 생긴 이 집 소가 없어진것을 두고 박인진이 거듭 한탄하자 주인늙은이는 웃음지으며 귀속말로 실토했다. 《그런게 아니오다. 도정님만 알고계시우다. 실은 소를 오늘 유격대에 보냈지오다.》 박인진은 저윽 놀랐다. 《유격대라니? 〈공비〉들말이요?》 그의 말에 되려 주인이 더 놀랐다. 《〈공비〉라니요? 그건 무슨 소리요?》 《그 〈공산비적〉이라구들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게 아니요?》 《비적은 무슨 비적입니까? 그건 왜놈들이 유격대를 헐뜯느라고 하는 당치 않은 악담이웨다.》 박인진은 머리를 기웃했다. 《왜놈은 왜놈이구 비적이야 비적이지.》 《아니 도정님은 그 사람들을 만나보기나 하구 그런 말씀을 망탕 하시오다?》 《난 만나보진 못했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화를 당한 집에 갔던적이 있습니다.》 《그건 대체 어디서 겪은 일이오다?》 《지난달 중순께에 꼭 만나봐야 할 일이 있어 19도구 지양개에 있는 유지어른 한분을 찾아간적이 있는데 그 집에 들어서구보니 상가난 집 같지 않겠습니까. 내가 만나러 간 그 집 주인어른이 정체모를 사람들에게 붙잡혀갔다나요? 내인의 말에 의하면 모연금과 모연물자를 내라구 강박하다가 주인이 불응하니 잡아간 모양입디다.》 박로인은 짐작이 간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게 아마 인심잃은 악한 부자였던가보오다. 유격대가 함부로 어질고 맘좋은 사람을 붙잡아갈리 없소다.》 《아닙니다, 퍽 인심 후하고 인망있는 어른이랍니다.》 《그래요? 그렇다믄 잡혀갈만한 다른 까닭이 있겠지오다. 두고 보시오다. 유격대는 절대루 백성들의 생명재산을 해치는분들이 아니우다. 그 사람이 악하구 죄진 사람이 아니기만 하다믄 무사히 돌아올거우다. 내 말이 그르면 애들 말루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소다.》 《형님은 어떻게 그런 장담을 합니까? 형님은 그래 그 사람들을 만나보기나 했습니까?》 《만나보다마다 그분네가 아니였더면 왜놈들에게 잡혀가서 되게 졸경을 치를번 했소다. 지난 가을에 저 뒤골밭에 올라갔다가 내가 그만 산불을 잘못 놓질 않았겠소다? 일이 잘못될라니 산림경찰대놈들의 눈에 띄웠소다. 그놈들이 어디 늙은이를 알아나보오다. 그 자리에서 늙은 내 허리가 부러지게 걷어차구 손을 묶더니 개목을 잡아끌듯 하는데… 원참! 소까지 빼앗아끌구…》 그런데 때마침 어디서 나타났는지 괴나리보짐을 둘러멘 한 젊은이가 산림경찰대놈들 두놈을 제끼고 자기를 구원해주었을뿐아니라 소까지 도로 빼앗아줬는데 그 고마운 은인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공작원이였다는것이다. 《…그때 그 은공을 갚지 못한 일이 늘 마음에 걸려있던차에 마침 얼마전에 낯선 군대들이 우리 마을에 잠간 들리질 않았겠소. 그게 바루 유격대원들이였단 말이오다. 사람들이 얼마나 싹싹하구 인정있구 례절바른지… 아침에 일어나서는 마당을 쓴다, 장작을 패준다, 나는 세상에 그런 군대는 처음 보오다. 그때 소를 잡아 대접해야 하는건데 미처 그럴 생각을 못했소다. 오늘 마침 나하구 소를 어부러쓰는 우리 동네 사람들과 같이 장에 갔다오는데 바루 인민혁명군대원 두사람이서 눈덮인 채소밭을 뒤지며 무우시래기를 줏지 않겠소? 보시오다. 자실게 없어서 눈을 뚜지며 무우시래길 주으면서두 마을에 내려와 달라는 소릴 안하오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비적〉이란 말이오다? 그분네들보고 마을에 내려와 감자라두 가져가라구 권하니 어디 내려와야지. 정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내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구 그럼 소라두 가져가달랬소다. 못가져가겠다는걸 우리 여러 사람이 겨우 떠밀어보냈소다. 일인즉 그렇게 됐지오다.》 그리고보니 《공비》란 박로인한테는 은혜로운 사람들이였다. 김정보를 붙잡아간 유격대와 박로인이 말하는 유격대는 박인진에게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그는 유격대에 대하여 어떻게 견해를 가져야 할지 몰랐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박로인은 그들에게 스스로 소까지 바쳤을가? 어찌하여 왜놈들에게 사살된 그 천도교청년은 스스로 그 사람들을 찾아들어가 참군하려고 했을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김정보를 붙잡아갔을 때의 인상이 짙었으므로 박로인에게 조심하기를 권했다. 《난 아직 상대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란 한두번 봐서는 모릅니다. 우리 천도에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 이르고 한울을 믿는건 곧 사람을 믿는것이라 합니다만 믿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요. 왜놈들을 믿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직 너무나 많습니다. 함부로〈공산군〉을 믿구 도왔다가는 무슨 경을 치를지 모릅니다.》 주인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볼뿐 어이없는지 아무말도 안했다. 박인진이도 어쩐지 약간 어색해진 기분으로 말없이 피우고있던 담배를 마저 태우고는 자리를 일었다. 잠시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내린 싸락눈은 어느새 구두창을 넘게 쌓였다. 날도 퍼그나 어두워졌다. 그는 청수를 모실 시간전에 길을 가대자고 걸음을 재게 옮겼다. 맞받아 불어치기 시작한 눈보라에 시달리며 어두운 길을 부지런히 축내여 17도구 토점리의 산말랭이에 자리잡고있는 장백종리원장 리전화의 집에 들어선것은 벽시계가 반시간을 알리는 한점의 괘종소리를 울린 시각이였다. 여덟시반, 아직 청수를 모실 시간까지는 반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맨버선발로 마루에 달려나와 눈을 털어주며 반겨맞아들이는 종리원장의 어깨너머로 때마침 종을 울려주는 벽시계를 들여다본 박인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하루 한번씩 청수를 모시고 한울님앞에서 주문을 외워올리지 않으면 안되는 천도교도들의 례식시간을 어길가봐 숨차게 걸어왔던 그는 잠간 숨을 돌리고난 다음에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 하루는 류달리 마음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해져서 생각도 번거롭고 기분도 씨원치를 못했는데 오늘도 50년간 어느 하루 어기지 않고 지켜온 청수 모시는 시간을 용히 지킬수 있게 됐다는 장한 느낌때문인지 혹은 수십년간을 같은 천도의 세계에 넋을 바치며 지내온 종리원장을 대한때문인지 비로소 박인진은 기분이 펴이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한순간뿐, 그간에 종리원소식을 전하는 리전화의 입에서 창선이가 며칠전에 유격대를 찾아 백두산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박인진은 너무도 놀랍고 분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창선이가 《공산군》에 껴들자고 제발로 떠나가다니?! 그놈이 유격대공작원의 꾀임수에 빠져 풍산에 넘어가 제 동무까지 차고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다 봉변을 당했다면 그 왜놈 참사관이 아까 한 그 얘기가 창선이놈이 한짓이다. 그 못된놈이 내게두 알리지 않구 제멋대루 유격대에 가? 기둥같이 믿었던 천도교청년당원이라는 녀석이, 네놈은 내가 슬리금산덕야학에서 야학생반장을 시킬 때부터 점찍어둔놈인데 네놈이 어찌 나를 배반하구 달아나?》 청수를 모실 시각이 바투 다가든줄도 모르고 박인진은 눈굽이 척척해져 앉은채 창선이를 저주하고 또 그를 꾀여갔을 유격대를 저주했다. (그 사람들이 어제는 선덕어른을 붙잡아가더니 오늘은 내게서 십년세월 길러온 교제를 뺏어가? 그건 대체 무슨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여? 그 사람들이 백두산밑에 온 때부터 민심은 얼마나 소란해지구 내 마음은 또 얼마나 어수선해졌어?) 어길수 없는 교법대로 리전화가 청수를 떠다놓고 시간이 됐다고 알리자 청수앞에 돌아앉아 억지로 주문을 외우고난 박인진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물었다. (한울님이시여! 이 혼탁한 동란의 세월이 그 언제 평정을 이루고 우리 배달국에 독립과 평화로운 지상천국이 도래하겠나이까?)
반절구전투와 20도구전투, 이도강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을 련속 벌리면서 장백현방면에서의 군사정치활동을 적극화함에 따라서 기본전투부대들뿐만아니라 일부 사령부성원들까지 포함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거의 전체 사람들이 들어와 일시 머물러있게 된 이즈음 곰의골밀영에서는 먹는 문제가 큰 걱정거리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사령부와 주력부대의 본거지인 소백수골의 백두산밀영과는 달리 중간련락소나 다름없는 곰의골의 이 위성밀영에는 단꺼번에 쓸어든 그 숱한 《군식솔》들까지 다 치러댈만한 막대한 량의 식량을 비축해두고있지 못했던것이다. …밀영에서는 며칠째 다들 변변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만큼 무우시래기따위나 주어올줄 알았던 두 대원이 퉁방울소리를 울리는 살찐 검정황소 한마리를 끌고 나타난것은 김주현의 위임을 받고 먹는 문제해결때문에 골치를 앓던 곽두섭중대장에게 있어서 뜻밖의 큰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아니 어디서 이런 큰 횡재를 했소?》 눈을 걷어차며 두 대원에게로 마중나갔던 곽두섭은 소고삐를 받아들념조차 못하고 피둥피둥 살찐 황소를 넋없이 보며 좋아서 물었다. 《공짜루 벌어왔지오다.》 벙글거리며 앞에서 소고삐를 쥐고오던 대원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공짜라니? 임자없는 소를 얻어왔소?》 《아니오다.》 《그럼 놈들의걸 뺏어왔단 말요?》 《아니오다.》 《또 〈아니오다〉면 대체 어디서 났소?》 곽두섭은 두번째 대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떤 아바이가 주었습니다.》 《어떤 아바이가? 어떤 아바이요?》 《모르는분입니다. 아주 마음씨 좋은 아바인데 옆에 있는 농민들이 박로인이라구 합디다.》 《그런데 이건 누구네 손데 그 로인이 줍디까?》 《그 박로인네 소인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른 대원이 수정을 가했다. 《아니, 그 박로인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의논하는걸 보니 여러 사람이 어울러쓰던 소같아.…》 곽두섭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이 지워졌다. 무슨 갈래판인지 알수 없는 지금 무턱대고 기뻐만 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대한지 얼마 안되는 이 햇내기들이 어떻게 하고 이런 황소를 끌어왔는지 의문스러웠다. 곽두섭이가 림시로 맡은 보충중대(보충중대는 얼마전에 있은 주력부대의 재편성때 없어져버린 녀성중대대신 새로 생겨난 중대였다. 부대에 새로 많이 입대한 신입대원들을 집중적으로 교양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조직한 중대였다.)에서는 아직 싸움물계를 잘 모르는 신입대원들에게 학습과 훈련을 시키는외에 《검열임무》로서 무슨 련락을 시키거나 물자운반을 시키거나 땔나무를 해오게 하거나 부식물을 해결해오게 하는따위의 쉬운 과업을 주군 했다. 그와 같은 아주 초보적인 비전투적인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농사군티를 벗지 못한 이 신입대원들은 때때로 여러 사람을 골치아프게 하는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군 하였다. 《대체 어떻게 돼서 그 박로인이라는분이 동무들에게 이 황소를 주었는지 좀 차근차근 말하오.》 중대장의 기색이 좀 달라진것을 눈치챈 두 대원은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지나가다가 시래기를 줏는걸 보구 주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소?》 《중대장동지가 준 과업대루 무우시래기나 양배추떡잎들을 얻자고 가고 또 간게 약수동어방까지 내려갔지오다. 눈이 덮인 빈밭에서 이삭주이를 하자니 여러 밭을 헤매게 됐는데 배낭에 절반도 차지 않더란 말이오다. 그걸 가지구야 어디 한끼거리나 되겠소다? 거저 돌아올순 없구 해서 그냥 약수동 뒤골안밭들을 내려가며 뒤져봤소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소다. 돌아보니 장마당에 갔다오던 농민 몇사람이 우리가 유격대원들이란걸 알아봤던지 반색들을 하면서 달려왔소다. 수고한다고 인사하며 반가와 야단이였지오다. 그리군 다짜고짜루 마을에 내려가자구 잡아끌지오다. 눈속에서 언 시래기를 얻어보느라구 이 고생하지 말구 자기 마을에 가서 감자라두 가져가라는거우다.》 《그래 마을로 갔댔소?》 《마을에 갈수 있소다? 중대장동지가 우리를 내려보낼 때 마을에 내려가서 부식물을 마련해오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우리 맘대루 해서 되겠소다?》 자기들의 준비정도를 검열받고있는 기간이라는것을 잘 아는 두 신입대원은 곽두섭이한테서 과업을 받은 그대로 정확히 수행하려 하였다는것을 크게 뜬 눈과 온몸으로 강조하면서 소를 받아가지고 오지 않으면 안되였던 경위를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난 곽두섭의 얼굴에 다시금 한줄기 엷은 미소가 비꼈다. 그들과 같은 경우에 처한다면 자기 역시 달리 처신하기 어려웠을것이다. 생활엔 가끔 그런 일이 있기마련이다. 옳은지 그른지 확신성있게 판단할수 없는 경우에 처하는 일이… 두 신입대원의 이야기를 들은 이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여하튼 수고를 했소.》 두 신입대원에게 애매한 대답을 준 곽두섭은 뒤따라왔던 대원의 어깨에서 배낭을 벗겨들었다. 《시래기는 이게 다겠구만?》 《그것두 눈속에서 겨우 얻었지오다.》 《저녁준비들을 시작하는것 같던데 어서 올라가기요.》 곽두섭은 그들과 함께 귀틀집쪽으로 올라갔다. 부식물을 얻으러 나갔던 두 신입대원이 살찐 커다란 검정황소를 끌고오는것을 본 유격대원들은 다들 기뻐서 입들을 다물지 못했다. 곽두섭은 시래기가 든 배낭을 작식을 맡은 라명희에게 넘겨주고 귀틀집문앞으로 다가갔다. 문앞에서 잠간 망설이던 그는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출입문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집안에서 울려나오는 대답소리를 듣고 그는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저녁켠이여서 집안은 어둑시근한데다 눈덮인 바깥에서 갑자기 들어서니 집안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잘 가려볼수 없었다. 《아, 두섭동무요? 무슨 일이요?》 어두운 집안 한구석에서 우렁우렁하신 장군님의 음성이 울렸다. 《보고하고 처리해야 할 한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말하오.》 《부식물거리를 구하러 나갔던 신입대원들이 황소 한마리를 끌고왔습니다.》 《황소? 어디서?》 《약수동에 사는 마을사람들이 준 소라고 합니다.》 곽두섭은 그 소를 끌고오게 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무 말씀 없이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협의회를 잠간 미루고 어디 좀 나가봅시다.》 장군님께서는 밖으로 나오시였다. 집안에 있던 전투부대의 지휘성원들도 모두 뒤따라나왔다. 귀틀집에서 얼마간 떨어진 숲속의 좁은 공지에는 숱한 유격대원들이 검정황소를 둘러싸고 서서 구경하며 2련대사람들이 왜놈 목재소에서 로획한 소를 끌고 백두산밀영에 도착했던 날 저녁같은 푸짐한 식사에 대한 흥겨운 이야기판을 벌렸다. 벌써 어슬어슬해지기 시작한 숲속에는 구수한 소고기국냄새가 떠도는듯싶었다. 나무를 잔뜩 가려놓은 우등불은 기세좋게 타오르고 대야들에서는 물이 설설 끓었다. 한옆에 있는 청돌바위에서는 세 유격대원이 도끼와 식칼들을 갈고있었다. 여느때없이 희색이 만면해진 밀영책임자는 가벼운 휘파람을 불며 도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져보는 유격대원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 소곤거렸다. 그 대원은 알만하다는듯 여전히 휘파람을 그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소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장군님께서 그리로 오시는것을 보자 길을 틔여드리며 물러섰다. 검정황소 가까이 다가가신 그이께서는 벌써부터 얼이 친듯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서있는 소를 잠시 눈여겨 살피시였다. 웅성거리던 말소리도, 도끼와 식칼을 갈던 소리도, 휘파람소리도 모두 일시에 잦아들었다. 피둥피둥 살찐 황소의 등판을 쓸어보시고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겨주시고나신 장군님께서는 이번에는 소코뚜레와 굴레에 매달린 퉁방울과 엽전들을 유심히 뜯어보시였다. 삼실로 곱게 꽈서 만들고 그우에다 붉은 천오리를 모양있게 감은 소굴레 그리고 윤이 나게 닦은 퉁방울과 엽전… 그이께서는 퉁방울과 엽전들을 만져보시였다. 설설 끓는 물소리와 타오르는 우등불소리만 들리던 고요한 숲속에 맑은 퉁방울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 어떤 불안이 서렸다. 《저녁식사준비를 잠간 멈추오.》 그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드러운 말씀이였지만 그것은 명령이였다. 《소를 임자에게 돌려줍시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곽두섭은 고개를 숙였다. 소를 끌고왔던 두 대원 역시 그냥 얼굴을 든채 장군님을 쳐다볼 체면이 못된듯 눈길을 떨어뜨렸다. 희색이 만면했던 밀영책임자는 눈길을 허둥거리며 구원을 바라듯 이 사람 저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애원하듯 장군님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와 눈길을 마주치신 장군님께서는 마치 그를 타이르시듯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내가 소를 임자에게 돌려보내자는것은 인민의 지성을 몰라서 그러는것이 아니요. 이 소를 우리에게 기어이 보내고싶어한 약수동마을사람들의 간곡한 심정을 나는 충분히 리해하오. 그러나 우리는 인민들에게서 신세갚음을 받자고 인민을 위해 싸우는것이 아니요. 우리는 인민에게서 보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요. 인민을 위해 싸우는것은 우리의 본분이요. 내가 이 소를 임자에게 돌려주자고 생각하는것도 그렇게 하는것이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해 싸우는 우리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요.》 그이께서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죄지은듯 깊이 머리를 숙이고 서있는 두 신입대원에게 시선을 돌리시였다. 《저 동무들이 소를 끌고 온 심정도 충분히 알만하오. 만일 저 동무들이 끝까지 거절하고 끌고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식량사정을 안 이상 인민들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이 소를 우리에게 보내고야말았을것이요. 그런데 왜 내가 소를 돌려보내자고 하는가? 그것은 저 소에게 소임자의 끝없이 깊은 사랑이 깃들어있고 약수동인민들의 래일의 생활이 달려있기때문이요. 소의 임자가 자기 소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였는가는 동무들도 보면 잘 알것이요. 저 소에게 씌워진 굴레와 거기에 매단 퉁방울과 엽전을 보시오. 저 퉁방울은 아마도 그 집에서 몇대를 두고 귀중히 간직해내려오던것임이 틀림없소.》 유격대원들은 자기 할아버지들이 평생 제 소를 매고 농사를 지으려고 속태우면서도 끝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던 일과 자기 형제들의 대까지도 제대로 못먹고 등뼈가 휘도록 애써 일해도 제집 송아지 하나 매보지 못했던 지난 일들을 더듬었다. 자기네처럼 가난하게 산 마을농민들이 굶주리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쩌다 송아지 한마리라도 장만하게 되면 자기 집에서 귀중하게 대를 물려오며 간직했던 패물을 달아주고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모습들도 그들의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소를 돌려주어야 할 리유의 다른 하나는 저 소임자네와 함께 약수동농민들의 생활문제가 저 소에게 달려있기때문이요…》 장군님께서는 그 소가 박로인네와 이웃하고 지내는 몇집이 어울려서 장만해놓고 같이 쓰는 소일수도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이런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민들의 지성이라 하여 저 소를 잡아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래일부터 소임자는 물론 약수동농민들은 저 소가 해야 할 일을 인력으로 대신하게 될것이요. 그러면 농민들의 고생이 얼마나 더 커지겠소?》 머리를 무겁게 숙이고 서있던, 소를 끌고왔던 한 신입대원이 머리를 버쩍 쳐들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장군님, 저희들을 처벌해주시오다.》 자책에 저린 목소리였다. 잠시 그 대원을 지켜보시는 장군님의 시선은 더욱 부드러워지시였다. 《내가 소를 돌려보내자는것은 동무들의 잘못을 책망하자고 해서 그러는것이 아니요. 동무들은 인민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본분이란것을 알아야 하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떠한 불리한 조건에 처하더라도 항상, 자신들이 인민의 군대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되오. 적과 싸울 때는 물론이고 인민들을 도와주고 인민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도 모든것을 인민의 리익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활에 대하여 진심으로 도와주는 립장에 서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오. 우리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에우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원쑤들과 싸우는것도 인민을 위한것이고 우리가 굶으면서도 인민들에게 될수록 페를 안끼치려 하는것도 인민을 사랑하기때문이요. 이것을 알기때문에 인민들은 그렇게도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며 모든것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는것이요. 만일 우리가 인민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의 사랑을 받을수 없다는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오.》 그이를 우러러보며 그이의 말씀을 명심해 듣고있던 두 대원의 눈에서는 맑은 이슬방울들이 굴러떨어졌다. 《장군님!》 한 대원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나서 아뢰였다 《지금 당장 되돌아가서 소를 돌려주고 오겠습니다.》 《제가 저 동무들과 같이 가서 소를 임자에게 돌려주고 올것을 허락해주십시오.》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자책속에 서있던 곽두섭이 머리를 들고 장군님께 말씀을 드리였다. 장군님의 안색은 환히 밝아지시였다. 《동무들의 말이 옳소. 소는 곧 돌려주고 식사는 주어온 시래기로 준비하시오. 중대장동무가 두 동무와 같이 가서 돌려주도록 하시오.》 장군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직껏 눈만 꺼벅거리며 가만히 서있던 황소도 대가리를 주억거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왈랑절랑 구성진 퉁방울소리가 우등불빛이 저녁어스름을 태우고있는 숲속에 울려퍼졌다. 그 저녁으로 곽두섭중대장은 두 신입대원과 같이 소를 몰고 밀영에서 떠나갔다.
낟알을 약간 섞은 시래기죽으로 저녁을 설때리고난 보충중대원들은 이날밤 장군님께서 들려주시는 재미나는 이야기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이께서는 오래간만에 소고기맛을 볼줄 알았다가 주어온 시래기로 허술히 지내고만 이 밤에 아직 유격대생활에 익숙되지 못한 신입대원들이 마음 한구석으로 섭섭히 여길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여 일부러 시간을 내여 그들에게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신것이다. 고생끝에 락을 본다는 속담대로 비록 오늘은 시래기죽으로 끼니를 에우고 래일은 그보다 못한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지낼수도 있지만 혁명이 승리하고 조국이 광복되게 될 앞날에는 고생을 참아가며 투쟁한 보람을 느끼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그이께서는 일제놈들을 조국땅에서 몰아낸 다음에는 살기 좋은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리라는데 대하여 감명깊게 이야기해주시였다. 자꾸만 더 말씀해달라고 간청하는 신입대원들의 성화에 못이기시여 이야기는 꽤 오랜 시간을 끌었다. 림강방면에서 활동하고있는 최현부대에서 방금 통신원이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던들 더 오래 끌었을것이다. 장군님께서 최현부대의 통신원을 친히 만나보시러 가시고, 취침구령이 내리자 출입문곁의 등불을 내놓고는 다른 모든 등불들은 죄다 꺼졌지만 신입대원들은 그이의 이야기에서 받은 감명때문에 인차 잠들지 못했다. 밤이 퍽 깊어서야 병실안은 조용해졌다. 부시럭거리던 소리, 소곤거리던 귀속말들이 잦아들어버리고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만 높아졌다. 출입문곁에 홀로 남은 어스레한 불빛은 꿈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앞날, 살기 좋은 인민의 락원을 보고있는 대원들의 잠든 얼굴을 고요히 감싸주었다. 다들 잠들었다. 그러나 오직 한 신입대원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바재였다. 눈을 감고있었지만 눈까풀속에서 정신이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구을고있는것이 알렸다. 이따금 크게 내쉬는 한숨이 벌름거리고있는 코구멍으로부터 새여나왔다. 종내 잠들지 못한 그는 가슴에 덮었던 모포를 제끼며 화닥닥 일어나앉았다. 그리다가 다시 누웠다. 이번에는 모포를 얼굴에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역시 모포안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온몸은 진정되지 못하였다. 여전히 한숨소리가 모포밑에서 새여나왔고 가슴언저리에 덮여있는 모포자락이 눈에 뜨이게 부풀어올랐다가는 꺼져들군 했다. 얼마후 그는 다시 모포를 열어제치며 또 일어나 앉았다.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그의 눈은 열기에 떠있었고 온 얼굴에는 땀이 번질번질 했다. 출입문곁에서 잠든 대원들을 지키고 앉아있던 마동희가 슬며시 다가가 어째서 그러느냐고 입속말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없이 자기 머리맡에 벗어 개여놓았던 겉옷을 황황히 주어입기 시작했다. 몇번씩이나 팔소매에 팔을 헛꿰고 바지가랭이에 다리를 헛꿰였다. 그리고는 헤덤벼치며 자기 신발을 찾아신었다. 손발이 후들거려 신도 단번에 신지 못했다. 당직을 선 마동희에게 잔뜩 의혹만 남겨놓고 약간 비칠거리며 출입문께로 다가간 그는 잠든 다른 대원들을 깨울세라 조심하려고도 하지 않고 벌컥 소리를 내며 출입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는것도 잊어버렸다. 출입문곁의 벽에서 조을고있던 등불이 파들파들 떨고 얼굴에 선뜻하게 찬공기를 감촉한 대원들이 웬일인가싶어 눈들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바깥엔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보름을 갓 넘긴 둥그스름한 달이 하늘중천에서 엷은 구름사이로 비쳐내렸다. 방금전에 지양개골에서 얼마간의 식량을 해결해다놓고 그 정형을 장군님께 보고드리려고 사령부귀틀집으로 발길을 돌린 김주현은 누구인가 수상쩍은 사람이 술취했을 때 같은 약간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사령부귀틀집쪽으로 다가가고있는것을 보고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어 뒤쫓아갔다. 《누구요?》 갑작스런 그의 물음소리에 수상쩍은 그림자는 와뜰 놀라며 멈춰섰다. 얼마전에 있었던 두번째의 이도강전투때 전투장에서 철수하는 부대의 짐군속에 끼여 따라와서 기어코 입대시켜달라고 탄원하여 입대시킨 신입대원이였다. 달빛은 어슴푸레하게 비쳤지만 아직 이름도 익히지 못한 신입대원의 얼굴에서 이상스러운 열기를 뿜으며 산만하게 움직이고있는 두눈만은 똑똑히 보였다. 웬일인지 그 신입대원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자지 않고 웬일이요?》 말을 못하고 입술만 실룩거리던 신입대원은 갑자기 눈우에 풀썩 주저앉더니 김주현의 발부리에 엎드렸다. 《군수관동지, 내 죽을 죄를 졌소다!》 《무어요?》 너무 뜻밖의 일이여서 김주현은 얼떠름했다. 《죽을 죄를 진 저를 용서해주시오다. 아니 죽여도 좋소다.》 《이거 왜 이러오?》 김주현은 다리를 붙잡힌채 푸들푸들 떠는 그의 잔등을 의아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저는 유격대에 있을 자격이 없는 나쁜놈이오다. 죽여 마땅한 죄를 진놈이오다.》 그는 김주현의 두다리사이에 자기 대가리를 마구 틀어박았다. 《무슨 죄를 졌소?》 《죽을 죄를 졌습니다. 조선사람으루서 못할 죄를 졌습니다.》 《죽을 죄란 무슨 죄요? 이 다리를 놓고 일어서서 말하오.》 그는 다리를 놓았지만 그냥 엎드린채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님과 유격대앞에 죽을 죄를 졌소다.》 (장군님앞에?) 김주현은 장군님께서 계시는 귀틀집앞에서 이야기를 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데리고 저쯤 물러갔다. 그는 진대나무에 걸터 앉아 몇시간이라도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하고나서 무슨 죄인지 말해보라고 하였다. 죄를 졌다는 신입대원은 김주현이 권하는 옆자리에 앉지 않고 역시 눈우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그는 여전히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자기가 일본놈한테서 임무를 받고 들어온 밀정이라고 자백했다. 밀정이라는 말에 김주현은 대뜸 머리칼이 곤두서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밀정?! 무슨 임무를 받았소?》 《유격대에 입대하는척하구 유격대를 따라 들어가서 유격대의 비밀기지들이 어디어디 있는지 알아오라구…》 《그것뿐인가?》 《아니오다…》 《또 뭐요?》 《저… 그… 뭔가 하믄… 기회를 봐서… 해치라구…》 김주현의 눈에서 시퍼런 불이 일었다. 벼린 칼날에서 번쩍인듯 한 그 시퍼런 눈빛에 기겁한 밀정은 뒤로 몸을 제쳤다. 금시 자기의 목덜미에 칼날이 내려지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놀라지 말고 앉아서 침착하게 말하시오. 뭘 가지구 어떻게 해치라구 했소?》 《독약과 날이 선뜩선뜩한 조막도끼를 주었습니다.》 《독약과 조막도끼?!》 김주현은 부지중 몸서리를 쳤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고 이가 갈린다. 《그것들을 어쨌소?》 《독약은 여기 있습니다.》 밀정은 단추를 벗겨 옷자락을 열어헤치더니 안에 입은 옷 혼솔을 이발로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안에서 기름종이에 싼 독약봉지를 꺼내 두손으로 김주현앞으로 내밀었다. 김주현은 끔찍스러워 그것을 손에 받아쥐기조차 싫었다. 그러나 얼른 빼앗아들었다. 《독약은 이것뿐이요?》 《네, 그것만이오다.》 잔뜩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김주현의 눈길은 저절로 달빛에 번들거리는 자그마한 독약봉지에 다시금 미쳤다. 《이 독약을 어디에 썼어?》 《없습니다. 한번도 쓴 일이 없습니다.》 《조금두?》, 《네, 조금두 안썼습니다. 못썼습니다.》 《이놈, 거짓말 말아.》 《아니, 정말입니다. 봉지가 풀로 붙인대로 있는걸 보십시오.》 《그럼 도끼는?》 《저기 감춰두었습니다.》 《어디?》 《저기 변소뒤에…》 그는 사령부귀틀집 가까이에 있는 변소쪽을 가리켰다. 김주현은 그와 함께 변소쪽으로 갔다. 밀정은 변소뒤에 있는 애잣나무포기밑에서 눈과 락엽속에 파묻어 감추었던 조막도끼를 찾아냈다. 덧저고리밑에라도 품을수 있게 알맞춤히 만든것이였다. 시퍼렇게 벼린 도끼날이 달빛에 번쩍거렸다. 다시 진대나무 있는데로 온 김주현은 그 조막도끼를 깔고앉은채 심문을 계속했다. 《그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자고 했소?》 《독약과 도끼를 감춰놓고는 눈이 무서워 아무짓도 못했습니다.》 《밀영위치는 어떻게 알리기로 했소?》 《제가 도망쳐나가서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왜 도망치지 않았소?》 《도망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딱 지켜보는것 같아서…》 《그럼 아무짓도 하지는 못했소?》 《네.》 《누구한테서 임무를 받았소?》 《이도강에 있는 왜놈입니다. 조선서 넘어온 〈총독부〉경무국에 있는놈이라구 합니다.》 《어떻게 돼서 그런 너절한 밀정임무를 받았소?》 《우리 부친이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고개길에서 어떤 비적이 부친을 붙잡아세우고 나무를 판 돈이랑 빼앗으면서 자기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더라오다. 어머니가 앓아서 약이랑 사가지고 오던 걸음인데 우리 〈두령님〉에게 쓰겠으니 그 약도 내놓으라고 강박하더라오다. 나는 그게 정말이라구 믿었소다. 그 이튿날 주재소에서 부른다기에 찾아가니 어머니가 앓는데 쓰라고 약도 주고 또 돈도 약차하게 주었소다. 며칠후에 다시 찾아서 갔더니 조선서 넘어왔다는놈이 독약과 도끼를 주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면 어머니병도 다 떼여주고 부자가 되여 살게 해주겠다고 했소다. 그놈은 우리가 마음놓고 편안히 살자면 〈공산비적〉들을 다 없애치워야 한다고 하면서 〈공산비적〉은 저의 원쑤라고…》 《그런데 어떻게 돼서 자기가 밀정이란걸 자백할 생각을 했소?》 《왜놈들에게 머저리처럼 속았다는걸 알았기때문이오다. 여기 와서 정작 며칠 지내면서 보니 그놈들의 말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였소다. 왜놈들은 장군님에 대해서까지 입에 담지 못할 개소리를 쳤는데 알고보니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몸바쳐 싸우시는 아주 훌륭한분이시였소다. 저는 더구나 오늘 저녁 약수동사람들이 보내온 소를 되돌려보내시는걸 보구 장군님이 정말 얼마나 백성들의 하정을 손금보듯 잘 알고계시구 얼마나 백성들의 리익을 존중히 여기시는 훌륭한분이신가를 깨달았소다. 그리고 또 좀전까지 신입대원들을 앉혀놓고 왜놈들을 조선땅에서 몰아내고 살기 좋은 인민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가 정말 눈뜬 소경이 돼가지구 용서받지 못할 무서운 죄를 질번 했다는걸 느꼈소다. 그 개놈새끼들이 저를 이런 무서운 죄를 짓게 하자구 유격대가 그런것처럼 꾸며가지고 장마당에서 돌아오는 우리 아버지한테서 약도 빼앗고 돈도 빼앗아냈다는걸 오늘에야 짐작해냈소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구 죽을 죄를 졌소다. 저 개같은놈들한테 속아 이런 죄를 졌지오다…》 그는 꿇어엎드린채 제 가슴팍을 쾅쾅 두드렸다. 두눈에서는 굵다란 눈물방울이 흐릿한 달빛에 어룽거리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솔직한 고백 같았다. 김주현은 손등으로 이마에 돋아났던 진땀을 씻었다. 범행이 없었다는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였다. 이자가 만약 제잘못을 뉘우치지 못하여 적들에게서 임무받은대로 음식물에 독약을 치거나 조막도끼로 해하려들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번 하였겠는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뜩해진다. 원쑤놈들이 얼마나 간악한지는 알지만 이토록 악착하게 사령부를 해하려들줄을 김주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혁명은 준엄하고 정세는 각일각 긴장해지고있다. 한순간이나마 마음속의 탕개를 늦궈놓고 지낼 때가 아니다. 사령부의 측근에 또 어떤 나쁜놈이 숨어있는지 어이 알것인가? 김주현은 사령부의 안전을 위하여 사령부의 측근자들 특히 장군님의 신변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한 주목을 돌려 다시 검토해보고 조금이라도 께름직하거나 미심쩍게 여겨지는 사람은 그이의 신변가까이에 얼씬하지 못하게 대책을 강구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사령부 작식대원이나 전령병, 경위대원들가운데 약간이나마 께름직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자기자신부터 마음놓고 그에게 장군님을 모시는 일을 맡길수가 없을것이였다. 《이 사람을 감시하고있으시오.》 김주현은 자기앞에서 자백한 밀정을 보초에게 맡겨놓고나서 독약봉지와 조막도끼를 들고 장군님께서 계시는 귀틀집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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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각에 장군님께서는 최현부대에서 온 통신원을 만나시고계시였다. 시래기죽으로 저녁끼니를 에운 신입대원들에게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다가 최현부대의 통신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접하신 첫 순간에는 지난달에 왔던 통신원이 무사히 되돌아가지 못했기때문에 최현부대에서 같은 내용의 통신을 재차 보낸것이 아닌가고도 생각하신 장군님이시였다. 그러나 전령병에게서 전번에 사자봉밀영에 왔던 그 신아바이가 다시 왔더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고대하시던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을것 같은 예감이 드시였다. 과연 그러했다. 장군님께서 귀틀집안에 들어서시자 난로곁에서 언몸을 녹이고있던 최현부대의 낯익은 나많은 통신원 신아바이는 황황히 일어나며 인사를 올리는데 그 기색이 여간 밝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마치 범을 산채로 사로잡아온 포수처럼 희색이 만면했다. 《수고했습니다. 오면서 몹시 고생하진 않았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두손으로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앉히시며 반가운 웃음을 지으시였다. 《저는 지난번처럼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는 길이구 해서… 사자봉밀영까지 곧장 쉽게 가댔습니다. 그런데 여기와 계신다기에 이리로 왔지요.》 《고생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최현동무는 건강합디까?》 《네, 련대장동지는 아주 건강합니다. 전번에 여기 왔다 돌아가 보니 감기랑 다 떨어지구 기력이 왕성합디다. 부대에서 그새 적들의 수송대를 쳐서 동복도 다 해결해입었습니다.》 《그것 참 잘되였습니다. 이제는 올겨울을 춥지 않게 보내게 됐습니다.》 장군님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시였다. 《우리에게 왔다간지 오래지 않은데 무슨 통신을 가져왔습니까?》 장군님의 물으심에 신아바이는 부대가 무송쪽에서 림강쪽으로 진출한후 장군님께서 지난번에 주신 방침과 방향에 따라 활동을 개시한 그간의 정형보고를 가져왔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장군님께서 전번에 찾아보라고 말씀하시던 그 녀동무를 찾아냈습니다.》 통신원이 덧붙이는 이야기였다. 《그 녀동무라니?! 조분옥동무를 말입니까?》 뜻밖의 기쁜 소식을 접하신 장군님께서는 다우쳐물으시였다.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장군님께서 일러주신대로 마의하산간의 샘물골이라는 마을에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통신원은 싱글벙글하며 신이 나서 말하였다. 《제가 최현련대장동지한테 돌아가서 부대가 림강쪽에 나가 활동하는 기회에 마의하부근 산간마을들에서 조분옥이라는 녀동무를 찾아보라고, 장군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시더라는 이야기를 전하자 련대장동지는 마의하물을 낀 골짜기마다에 다 수색조를 내보냈습니다. 하늘밑에 가서라두 조분옥이란 녀동무를 꼭 찾아데려오라구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조가 파견돼나가서 골짜기마다 샅샅이 뒤지며 탐문해보았는데 바로 샘물골에서 나졌더랍니다…》 장군님께서는 최현에게 새삼스럽게 믿음이 가시였다. 멀리 떨어져있어도 장군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지체없이 대책을 취하여 꼭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사람을 찾아준 최현이가 정녕 고마우시였다. 그처럼 뜻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실로 하늘에서 별도 못따올리 없을것 같으시였다. 《그 동무를 이렇게 빨리 찾아내게 될줄은 몰랐소. 그래 그 조분옥동무는 어디 있소?》 《련대장동지는 그 녀동무를 찾게 되자 장군님께서 친히 찾으시는 사람인걸 봐서 어서 장군님 슬하에 보내올려야 할것 같다고 하면서 저더러 지체없이 조분옥동무를 주력부대에 데리고 가라는 지시를 주었습니다. 백두산쪽으로 오는 길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말입니다…》 범을 생포한 포수마냥 득의만면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분옥을 데리고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이 꿈같은 소식에 접하는 순간에 곽두섭이 체험할수 있는것보다 더한 심정이 되시여 그냥 자리에 앉아계실수 없으시였다. 《그래 지금 조분옥동무는 여기 와 있습니까?》 금시 분옥이를 만나보시러 출입문밖으로 나서실것 같으신 장군님이시였다. 《최현련대장동지의 지시대로 장군님앞에까지 데려다 올리자고 했댔는데 채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신아바이는 미안쩍어하는 기색을 띠우며 그렇게밖에 할수 없었던 사연을 설명해올렸다. 《그 동무가 워낙 다리를 상해서 대렬에서 떨어져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 같이 오면서두 또 발을 좀 상했습니다.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돌이 발등을 쳐서 잘 걷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횡산후방밀영지를 거치게 된 기회에 치료를 시키는 겸 분옥이와 곱단이를 병원에 떨궈두고 왔다는것이다. 《거기 데려다놨으면 사자봉밀영에 데려오기보다 더 잘됐습니다. 화가 복이 된 셈입니다. 횡산은 여기서 더 가깝습니다. 그래 그 동무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그간은 어떻게 지냈습디까? 아는대로 말해보시오.》 장군님께서는 조분옥이에 대하여 궁금스러웠던 일을 두고 여러가지로 알아보시였다. 조분옥이가 4중대대렬에서 떨어진 다음 겪어온 가지가지 고생스러운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거의 끝내가고있을무렵에 방금 밀정의 자백을 받고난 김주현이가 귀틀집문안에 들어섰다. 김주현의 심상치 않은 눈빛과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날이 시퍼런 도끼는 지금껏 집안에 서리고있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였다. 《무슨 일이요?》 《…》 김주현은 말씀드리기를 주저하며 흘끔 통신원을 곁눈질로 살폈다. 《무슨 일이 생긴게구만. 괜찮소. 말해보시오.》 장군님의 재촉을 받은 김주현은 그이앞에 독약봉지와 도끼를 내놓고 밀정의 자백을 정확히 상세하게 보고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이미부터 알고계시던 이야기를 듣기나 하시듯 별로 놀라지 않으시였다. 《적들이 우리에 대하여 그런 비렬한 음모를 꾸며낼수도 있으리란걸 나는 예견했소. 우리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며 해치지 못해 발악하는놈들이니 무슨짓인들 못하겠소?》 그이께서는 손끝으로 도끼날을 만져보시며 호방하게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허허, 이것 보오. 놈들이 우리를 해치자구 얼마나 극성스럽게 벼리구 갈았는지 면도를 해도 손색없을만치 날을 세웠소.》 장군님께서는 조막도끼를 김주현에게 돌려주시였다. 《이건 작식대에서 불쏘시개를 쪼개는데 쓰게 하든지 〈도끼목수〉에게 주든지 동무가 적당히 처리하오.》 김주현은 두눈을 흡떴다. 이 흉기를 두고 쓰게 하다니? 두고 쓰게 하기는 고사하고 잠시 손에 쥐는것조차 끔찍스러워 몸서리가 쳐졌던 도끼다. 김주현은 그 흉기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하시는 장군님의 담력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건 두번다시 보이지 않을만한데 갖다버리겠습니다.》 《…?!》. 장군님께서는 김주현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시였다. 《왜? 적의 무기도 빼앗아쓰는데 도끼쯤 못쓰겠소? 우리를 해하자던 흉기였기때문에 두고 쓰게 할 마음이 없단 말이지?》 《네.》 김주현은 단마디의 말로 솔직한 심정을 아룄다. 《정 쓰기 께름직하면 주현동무생각대로 도끼를 처리하오. 저 독약은 어디에 깊숙이 파묻어서 새나 짐승이 피해를 받지 않게 하시오.》 장군님께서는 독약봉지도 다시 돌려주시고 가볍게 손을 터시였다. 《놈들이 우리 밀영들을 알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소. 놈들이 우리가 곰의골에 있다는것을 냄새맡게 되면 곧 〈토벌대〉를 들이밀것이요. 밀영위치를 로출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적들의 있을수 있는 대대적인 〈토벌〉에 대처할 방책을 생각해야 하겠소. 그렇다고 해서 지레 놀랄 필요는 없소. 정신들을 바짝 차리고 여기서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장군님께서는 차근차근 타이르듯 말씀하시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밀정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아직은 우리의 밀영위치를 적들이 모르고있는것만큼 로출시킬 필요는 없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자백한 사람이니 당분간은 그냥 밀영에 두고 교양사업을 하시오. 백두산밀영이라면 두고 교양하는 문제도 고려하겠지만 여기서는 일없소. 후처리는 뒤에 따로 토론해봅시다.》 《알겠습니다. 그리구 한 사나흘분 될만한 식량을 해결해왔습니다.》 《그거 아주 잘됐구만. 수고했소.》 《돌아가도 좋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물러가려는 김주현을 멈춰세우시였다. 《좀 알아볼게 있소. 녀대원들이 입을 솜군복이 이 곰의골밀영에는 둬둔게 없소?》 밀정이나 도끼와는 전혀 무관계한 그 물으심에 김주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피복예비는 다 백두산밀영에 있고 이 근처 재봉소에는 제작중에 있는것들밖에 없다고 대답을 드렸다. 《제작중에 있는건 완성하자면 얼마나 걸리겠소? 우선 한 둬벌이면 되겠는데.》 《두벌이면 인차 될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래일중으로 되였으면 좋겠소.》 《여기에 재봉대동무가 몇이 와있는데 래일아침에 재봉소에 갑니다. 그 동무들에게 래일오전중으로 완성하게 하겠습니다. 웃옷은 단추구멍만 달리 뚫으면 남성용으로 만들던것을 녀성용으로 손쉽게 바꿀수 있고 치마는 선자리에서도 인차 할수 있습니다.》 《그럼 됐소.》 장군님께서는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부탁하시듯 말씀을 이으시였다. 《병원에 보내자고 준비해둔 약이 있었지? 그 약하구 속내의, 필수품들을 일식으로 두조를 갖추어 꾸려놓소.》 《이제말입니까?》 《될수 있는대로 이제라도 꾸려놔두는게 좋겠소.》 김주현은 여느때없이 매우 기분좋아하시는 장군님의 웃음어린 눈바래움을 받으면서 귀틀집에서 나갔다.
소임자에게 소를 되돌려주러 두 대원을 데리고 약수동 박로인댁에까지 내려갔던 곽두섭은 밤새 하늘에 걸려있던 달이 밝아오는 새벽빛에 채 희미해지기전에 곰의골로 돌아왔다. 아직 기상전시간이였다. 두 대원을 병실에 들여보내고 소를 되돌려주고 온 정형을 장군님께 보고드리기 위하여 장군님께서 계시는 귀틀집으로 곧장 올라온 곽두섭은 출입문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귀틀집뙤창과 출입문 창호지에는 벌써 불빛이 어려있었으나 새벽어스름조차 걷히지 않은 너무 이른 시각에 장군님께로 찾아들기가 주저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기름기가 반질반질한 발목털이 붙어있는 노루발쪽손잡이를 지켜보며 문앞에서 들어갈지 말지 마음을 질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곽두섭은 갑작스런 문소리에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깨에 솜군복저고리를 걸치시고 밖으로 나오시려던 장군님께서는 문앞에서 흠칫하며 물러서는 곽두섭을 알아보시고 멈춰서시였다. 《곽두섭동무로구만, 언제 돌아왔소?》 《지금 돌아오는 걸음입니다.》 《아니, 그 먼데를 벌써 갔다왔단 말이요? 정말 번개같소.》 왕복 150리나 200리걸음은 착실히 될 길을, 그것도 갈 때는 한정없이 늘어진 소를 몰고갔던 그가 벌써 돌아와있는것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놀라시였다. 《왔으면 어서 들어올게지 왜 추운데 여기 서있었소? 자, 어서 들어오오.》 장군님께서는 여느때보다 더 유별스럽게 반기시며 그를 제일 더운 자리에 앉혀주시였다. 《손이랑 형편없이 얼었구만. 보고는 언 입술이랑 녹은담에 하구 우선 몸이나 녹이오. 담배두 피우구.〈대통령감〉말이 얼었을 때 담배를 태우면 속이 한결 훈훈해진다면서?》 장군님께서는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재털이를 곽두섭의 앞에 옮겨다주시며 살틀히 권하시였다. 《어서 담배를 태우오. 나는 아직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권할 담배는 없고 이 재털이뿐인데 제 담배라두 피우오.》 장군님께서 그렇게 극진하게 권하시니 곽두섭은 도리여 황송스러웠다. 그는 담배생각이 간절했으나 머밀머밀하며 사양했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재털이를 참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곳 밀영을 꾸린 해산동무네 〈도끼목수〉가 만든 재털이요. 권영벽동무한테서 듣자니 곽동무는 싸움판에서두 담배를 붙여물지 않고는 총질을 못할만큼 담배에 인백혔다던데 어서 이 재털이에 재를 털어보오.》 곽두섭은 뒤더수기를 긁었다. 《뭐, 그런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허허,〈막담배〉중대장답지 못하구만. 내 다 들었소. 어려워 말구 어서 피우오. 그래야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될것 아니요?》 어쩔수 없이 곽두섭은 한대 붙여물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소를 되돌려받게 된 약수동 박로인과 마을사람들의 놀라움에 대하여, 자기들에게 소를 되돌려보내신 장군님께 올린 그들의 진정어린 감사의 인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이어 마을사람들이 자기들앞에 새롭게 표시해준 성의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아뢰였다. 《…소를 되돌려받은 박로인네와 마을사람들은 소를 정녕코 받아줄수 없다면 소대신 닭마리라두 가져가달라구 하면서 닭 다섯마리와 감자를 서너말 내놨습니다. 마을 집집에서 모은것 같은데 우리가 절대로 받아올수 없다고 하자 제발 받아가도록 하라고 간청하다못해 나중에는 박로인이랑 성까지 내며 어찌나 무섭게 구는지…》 황소를 되돌려받은 약수동마을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리라는것을 넉넉히 짐작하신듯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시였다. 《알만하오. 아마 그것조차 안받으면 너무 성의를 몰라준다구 노염을 살거요.》 《그랬습니다. 막 야단을 쳤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받아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참, 얼마나 훌륭한 인민이요!》 조용하나 격정에 넘치신 장군님의 말씀이시였다. 《그런 인민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정말 무엇인들 못바치겠소? 그런 훌륭한 인민의 사랑속에 살기때문에 우리는 고생을 겪어도 고생을 덜 느끼며 살거던.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곽두섭이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 닭이랑 감자랑 받아온건 잘했소. 마침 쓸데두 생겼는데 요긴하게 쓰게 됐소.》 곽두섭이 약수동에 다녀온것과 관련한 이야기를 그렇게 아퀴짓고나신 장군님께서는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그 먼곳에 밤사이 다녀오느라고 수고했지만 동무에게 맡겨야 할 한가지 긴급한 일이 제기되였소. 잠을 못자고서라도 해낼수 있겠소?》 자기에게 긴요한 과업을 주시련다는 그 말씀에 곽두섭은 좋아서 헤벌죽해졌다. 《일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얼마든지 할수 있습니다.》 2백여리 밤길을 다녀온 사람답지 않게 그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좀 쉬지 않고도 되겠소?》 《전 이래뵈두 잠은 워낙 많지 않습니다. 서너밤쯤 밝혀도 끄떡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을 좀 밑지더라도 수고를 해주오.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곧 여기서 떠나 재봉소를 거쳐 횡산밀영에 가야겠소. 어제 여기 왔던 재봉대원동무 몇이 오늘아침에 솜이랑 천이랑 가지구 재봉소로 돌아가는데 그 동무들과 같이 짐이랑 나눠메고 떠나가서 재봉소에서 완성해주는 녀성용솜군복 두벌을 받아가지고 횡산병원에 가오. 내가 김주현동무에게 일렀으니 제작중이던 군복을 인차 완성해줄거요. 만약 안됐으면 거기 지켜서서 동무의 손으로 도와서라도 속히 완성해야 하오.》 장군님께서는 집안의 한구석에 세워져있던 배불룩한 배낭을 손수 들어다가 곽두섭의 곁에 세워놓으시였다. 《그리구 이 배낭안에 병원에 보낼 약들과 생활필수품들이 있는데 약은 병원성원들에게 전하고 속내의와 필수품들은 재봉소에서 가져간 솜군복과 같이 거기 와있는 새사람들에게 전하면 되오.》 《그것뿐입니까?》 《그거요.》 곽두섭은 무슨 전투과업이든지 힘깨나 쓸만한 과업인줄 알았는데 녀자들이나 할 군복제작완성이거나 병원에 뭘 가져가라는 운반임무였다. 그는 우거지상이 되여 뒤더수기를 어루만졌다. 그런 곽두섭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웃음절반으로 물으시였다. 《왜? 자신없소?》 《재봉소에두 병원에두 뭘 날라가는건 제 혼자서두 문제없습니다. …저는 바느질은 영 형편없습니다. 사령관동지, 제 손을 보십시오. 어디 바늘을 쥐게 생겨먹었습니까?》 그러면서 앞으로 내들어보이는 그의 솥뚜껑같이 크고 뭉툭하고 투박한 손에는 총이나 삽자루도 작고 갑삭해서 잘 어울릴것 같지 않았다. 《허허, 그 손이 어떻다고 그러오? 그 손이면 못할 일이 없겠소. 일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한 손이구만.》 장군님께서는 장알이 박히고 손마디가 터갈라진 그의 손을 다정히 쓸어보시였다. 곽두섭은 점직해져 손을 슬며시 무릎밑에 내려놓았다. 《바느질은 오중흡동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동무는 뭐나 재간있게 잘합니다. 쌈을 해두 역바르게 하구 뭐나 알뜰하게 맵시있게 아주 잘합니다. 워낙 손도 재간있게 생겼습니다.》 《오중흡동무가 손재간이랑 좋다는건 나도 소왕청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있소. 그렇지만 이 일은 동무가 책임지고 해줘야겠소. 동무가 가서 직접 바느질을 하라는것이 아니니까. 이제 곧 조반을 먹고 인차 떠나도록 해야겠소. 병원에 가면 환자들만 있는데니 동무가 힘으로 도와줄 일이 얼마든지 있을거요. 동무의 임무는 지고간 물품들을 병원에 전하구 병원에서 한달동안 쓸 화목을 장만해주고 돌아오는거요. 병원에는 화목이 떨어져간다는데 힘깨나 쓸 사람이 없소. 그래서 더구나 동무를 보내오. 알겠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곽두섭은 어쩔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가서 우선 오늘과 래일은 어제밤에 한잠도 못잔 봉창을 해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푹 쉬시오. 그다음 모레부터 일에 착수하오. 한달치 화목이 다 마련되기전엔 돌아와서는 안되겠소.》 《책임적으로 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지금부터 차비했다가 아침식사를 하고는 인차 떠나오. 약수동에서 가져온 닭들을 잊지 말고 모두 병원에 가져가도록 하오. 감자도 동무가 질만큼 지고 가오. 수고하겠소.》 장군님께서는 작별인사로 손까지 잡아주시였다.
독약봉지와 조막도끼를 차고 밀영에 기여들었던 밀정의 자백사건이 있기 얼마전, 정확히 말하면 이해 10월 29일 오후, 조선의 동북단과 만주의 동남단을 련결하는 두만강철교우로 차창들에 호화로운 황미색카텐들을 드리운 특별렬차가 국경을 넘어서고있었다. 두달전에 갈려간 우가끼 가즈시게의 후임으로 제7대조선총독이 된 륙군대장 미나미 지로가 탄 특별렬차였다. 례년보다 일찍 들이닥친 겨울추위로 하여 이해에는 10월이 미처 물러갈새 없이 압록강도 두만강도 다 얼어붙어버렸다. 달리는 렬차밑에 내려다보이는 얼어붙은 두만강은 강의 량안에 펼쳐져있는 땅들과 다름없이 황토색의 먼지가 오른 흰눈에 덮여있었으므로 이것이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국경이라고 믿을만 한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게 국경개념을 주지 않는 바깥풍경이 렬차안에서 카텐을 젖히고 차창밖에 눈을 던지고있는 미나미 총독한테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조선이요, 만주요 하는 구별을 없애고 하나처럼 만들어버리고 말자, 이것이 바로 그의 야심이였고 그의 주장이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식민지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와 식민지만주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너무 구획지어놓는것은 일본이 지배하는 《대동아》세계를 실현하는데 많은 저애를 주는것이다. 통치형식은 어떻든 다같이 일본의 식민지들로서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될밖에 없는 조선과 만주는 지리적으로 린접해있을뿐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있었다. 그런데 두 지대에 대한 통치권한은 각기 한 지대에만 국한되여있는데다가 서로의 통치련계도 효과성있게 지어져있지 못하기때문에 호상 불편할뿐더러 결국은 《대동아공영권》을 지향하는 일본의 국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있었다. 이것은 비단 미나미대장뿐아니라 많은 군사정치가들이 느끼고 해결을 바라는 문제였다. 일찌기 일본륙군대신으로서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때부터 벌써《선만일여》를 꿈꾸어왔던 미나미는 식민지조선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자 곧 그것을 자기의 기본정책강령으로 내세웠다. 더우기 그것을 더는 뒤로 미룰수 없는 절박한것으로 자극한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국경지대진출이였다. 1936년 8월 5일에 총독으로 임명받은 미나미대장은 8월 26일에 서울로 날아왔다. 그런데 그의 비대한 몸이 총독의자에 익숙되기도전에 압록강대안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성이 울려왔다. 서울에 온지 한주일만에 대덕수전투소식이 날아든것이다. 그 이튿날에는 다시 소덕수의 총성이 울려왔다. 그것은 죽은줄 알았던 조선이 신임통치자로 군림한 자기에게 보내온 첫 《인사》였다. 비대한만큼 신경도 꽤 둔감한편인 미나미대장이였지만 자기가 총독자리에 앉자부터 거의 매일처럼 날아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경일대에서의 맹렬한 활동에 대한 보고를 접할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9월 한달을 지내보았지만 어느 하루도 국경에서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는 날이 없었다. 어째서 그 끊임없는 총소리를 쑥 잦아들어버리게 하지는 못하는가? 치안당국자들의 대답은 역시 무엇보다 먼저 치안분야에서 《선만일여》의 조속한 실현을 요망하는것이였다. 때마침 도꾜의 대본영에서도 조선과 만주에 대한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체계를 엄중히 위협하며 나아가서 가까운 앞날로 예견하고 추진중에 있는 대륙전쟁개시를 방해, 지연시키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전면적인 《토벌》과 치안확보를 위한 비상대책을 협의할데 대하여 미나미총독과 우에다사령관에게 촉구하였다. 대본영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중대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미나미는 며칠전에 북부조선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서울의 총독부를 떠났다. 미구의 대륙전쟁에 땅크와 대포를 제공할 유망한 철광후보지로 지목되고있는 청진과 무산을 비롯하여 라진, 웅기, 아오지 등지를 거친 미나미는 오늘 오후 다섯시 관동군사령관 우에다와 만나기로 약속되여있는 시각을 반시간 앞두고 두만강철교를 넘어서게 된것이다. 같은 시각에 만주쪽에서도 간도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만주국》의 《수도》신경(장춘)을 떠난 우에다사령관이 간도일대를 싸다니다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최북단인 남양과 마주앉은 만주의 국경도시 도문에 있는 일본령사관에 와닿았다. 예정대로 정각 오후 다섯시, 식민지조선의 최고통치자인 미나미총독과 식민지만주의 최고통치자인 우에다사령관은 도문령사분관에 마주앉았다. 미나미총독의 보좌관으로 회석한것은 총독부 미쯔바시경무국장, 아이가와외사과장, 당게보안과장, 고시마함북지사, 쯔즈이 경찰부장과 그밖에 네명의 수원뿐이였다. 우에다사령관쪽에서는 관동군헌병대사령관 도죠와 기와무라간도총령사외에 여섯명의 수행원이 참석했을따름이였다. 이 중대한 회견을 엄격한 비밀에 붙이기 위하여 협의석에 빠져서는 안될 관계관과 수행원외에는 차물을 날라들이는 심부름군이나 총독부 혹은 관동군사령부에 드나들 권리를 가지고있었던 어용기자들조차도 단 한명 얼씬 못하게 하였다. 기자들이란 워낙 사냥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데다 필요이상 수다스러워서 이런 자리에는 묻어다니지 않게 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것이 미나미와 우에다의 일치한 견해였다. 그래서 미나미는 먼 라남에 수행기자들을 떨궈버렸고 우에다는 애초에 신경에서부터 기자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했었다. 자못 뜻깊은 이 회석을 장식하고있는것은 미나미총독의 정책강령인 동시에 이 회담의 기본취지로 되고있는 《선만일여》대강을 써붙인 글발이였다. 조선과 만주, 두 식민지의 최고수뇌자가 꼭같은 의자에 꼭같은 자격으로 마주앉기는 하였으나 회견장을 장식하고있는 《선만일여》라는 글발로부터 시작하여 눈짓과 어투에 이르기까지 회담 전과정의 분위기는 미나미에 대한 우에다의 존대로 채색되여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에다는 이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한발 뒤늦게 미나미가 이미 걸었던 그 길, 이미 앉았던 그자리에 들어서군 했기때문이였다. 미나미보다 한해 늦게 태여난 우에다는 같은 륙군사관학교, 같은 륙군대학을 다녔어도 미나미의 후배로 다녔으며 군적에 몸을 던져도 그보다 늦게, 군사후비교육을 담당해도 그보다 늦게, 사단장을 해도 그보다 늦게, 륙군중장이 되고 륙군대장이 되여도 역시 항상 그보다 늦게 되군 했다. 우에다가 한단한단 톺아오르며 타고앉은 자리들은 대체로 다름아닌 미나미한테서 물려받은 자리들이였다. 지난 시기에 거친 지나주둔군사령관자리도 그러했고 조선군사령관자리도 그러했고 또 지금 차지하고있는 관동군사령관자리도 그러했다. 미나미는 금년초봄 우에다가 관동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바로 그날까지 그 자리를 타고있다가 그에게 물려주었던것이다. 항상 우에다보다 한발 앞서고 한급 높았던 미나미는 지금도 역시 식민지만주통치자의 지위보다는 한급 높은 식민지조선의 통치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같은 식민지통치자, 같은 륙군대장으로서 별차이가 없는듯 했지만 미나미는 우에다를 부하처럼, 우에다는 미나미를 상관처럼 대할수밖에 없는 미묘한 선후배관계에 있었다. 오늘의 도문회담을 선도한것도 역시 미나미였다. 《여의 주장인 〈선만일여〉정책은 군사지리적으로나 산업경제적으로나 기타 제반분야에서 상호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 제국의 두 식민지인 조선과 만주간의 련계를 가일층 긴밀강화하여 량지를 넘나들며 맹렬한 무장소란으로 량지의 치안을 심히 위협하고있는 공산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공동히 전개함으로써 그 군세를 완전억제소멸하고 량지의 치안을 튼튼히 보장하는것과 함께 장래의 대륙점령작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병참기지로 될 조선과 만주의 군수적동원가치를 급속도로 증대시킬수 있도록 산업경제의 의존도를 제고하자는데 그 중요한 목적이 있소. 당신자신도 충분히 인식하고있는바이지만 만주사변이후부터 이미 정세는 아주 변천되였소. 우리 제국이 만주를 손에 넣기전에는 압록강, 두만강이 제국의 국경선으로 되여있었으나 지금의 제국국경은 흑룡강, 우쑤리강, 두만강이요. 다시말해서 제국군인들이 쏘련방과 접하게 된곳만이 제국의 국경으로 된것이요. 이미 몇해전에 변천된 이러한 정세를 충분히 인식하고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실책을 면할수가 없소. 아직까지 우리는 종래의 개념에 지배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국의 국경처럼 생각하고 선만량지의 구별을 절대화하여왔기때문에 만주사변이래의 4, 5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효률적으로 리용하지 못하고 많은 실책을 범해왔소.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고수하려는것은 오직 김일성공산군뿐이요. 조선을 제국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키려고 우리와 대적하여 항전을 확대하고있는 그들에게는 그 어떤 다른 국경이란 있을수 없소…》 미나미는 과연 웅변가답게 (그는 륙해군대장들가운데서 손꼽힌다는 웅변가의 한사람으로 알려져있었다.) 저력있는 목소리로 단 한번도 말을 먹거나 끊는 일이 없이 류창하게 내리엮었다. 사실 무관들가운데서 미나미대장만큼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총독부에서 식사를 말할 때에도 지금까지 6대를 내려오면서 고정불변하게 해왔던 재래식의 총독봉서식과는 달리 원고없이 당당하게 서서 긴연설을 거침없이 하군 했다. 미나미대장처럼 말을 잘 할줄 모르는 우에다대장은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보다 그 거침없는 말주변에 새삼스럽게 경탄하여 경건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나미대장이 자기가 서울에 와서 총독자리에 앉자마자 압록강일대에서 불안한 총소리를 두달나마 계속 울리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불쾌감을 토설하였을 때에는 우에다자신도 그 말의 내용에 공감하여 더 크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렇게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달랐던것은 앞서의 끄덕임은 말주변에 대한 경탄으로 하여 강마른 그의 얼굴에 보기드문 엷은 미소가 비껴있었지만 이번의 끄덕임은 그 말에 대한 공감으로 인하여 환기되는 불쾌감때문에 얼굴빛에 그 어떤 쓰거운것이 비껴있는것이였다. 달콤한 느낌을 받을순 없었다.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하여 무송현성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우에다대장은 백주에 뺨을 얻어맞은것 같은 수치감을 느꼈던것이다. 그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주력부대를 단시일안에 괴멸시키라고 불호령을 내렸지만 괴멸은 고사하고 연방 된매를 받아안았던것이다. 그렇게 얻어맞은 일을 문득 상기한 우에다는 저도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여윈 주름살투성이의 기름기없는 볼을 쓸어보았다. 《…조선과 만주의 치안을 심히 훼손하고있는 김일성공산군의 날로 확대되는 군세와 방약무인한 맹활약을 우리가 지금처럼 방치상태에 둔다면 제국의 량 식민지는 미구에 그 존재를 마칠수도 있다는데 대해 나는 주의를 환기시키고싶소. 조선과 만주를 제국의 영원한 식민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선인들이나 만인들속에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재생에 대한 지향을 자극할수 있는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또 아무리 사소한것일지라도 그 싹부터 무질러버리고 남겨진 잔뿌리라도 다 뽑아버려야 하오. 조선을 영원히 죽여버리고 만주를 영영 죽여버리는것, 이것이 바로 제국의 영원한 식민지로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요.》 거침없이 말하던 미나미대장은 잠시 말을 끊고 손수건을 꺼내여 게거품이 묻은 입술을 닦았다. 볼을 쓸어보던 손으로 코밑의 흰 팔자수염을 비틀어올리며 미나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우에다는 미나미가 입술을 닦는 사이에 겨우 한마디 해볼 기회를 얻어 처음으로 입을 벌렸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미나미가 지당한 말을 이제도 많이, 그것도 자기보다 썩 잘할것이기때문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미나미는 우에다에게 더 말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자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조선이라는 존재를 영영 없애버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방도로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피의 결성을 타협시킬것을 생각하고있소. 조선민족을 없애고 우리 야마도민족에 완전히 동화시켜버리는데는 내지인과 선인의 피의 결성을 이룩해야 하오. 그러나 이 결성을 완전히 이룩하자면 몇세대가 지나야 하오. 그렇기때문에 지금 당장은 동조동근을 설득시키고 내선일체를 도모하는것을 급선무로 내세워야 하는것이요. 중요한것은 조선인의 넋을 죽이는것이요. 조선어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한다든가 조선력사와 지리교육을 페지시킨다든가 조선의 노래, 조선의 춤, 조선의 풍습, 조선의 문화재, 조선의 신앙… 조선의 모든것에서 모든 조선적인것을 거세하고 말살해버리기 위한 전면적인 공세를 벌리기 시작한것은 나의 재임기간에 내가 조선이 절대로 다시는 소생할수 없도록 죽여버리기로 결심했기때문이요.…》 미나미대장의 례찬자들은 너무 살이 쪄서 목이 없어진 돼지같은 이 거적눈의 무장을 한없이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온정의 호장군》으로서 일반국민들이 몹시 《따르는》사람이라고 분칠해주고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 미나미총독은 환갑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시절 버릇된 단호한 살상행위를 자기의 가장 뛰여난 소질로 간주하고있었다. 10대초의 소년시절에 오이다현의 사무라이상투쟁이한테서 무사도를 배운 어린 미나미는 자기를 보고 꼬리치며 반기는 개란 개는 모조리 단칼에 목을 베여버리고 대가리 없는 몸뚱이에서 솟구쳐나오는 피에 몸을 적시는것을 하나의 가장 즐기는 오락으로 삼았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대일본제국의 《무장중의 무장》이라고 일리우는 미나미대장은 6대를 거쳐온 력대 조선총독들가운데의 그 어느 총독보다 더 단호하고 결정적인 태세로 조선의 멱살을 눌러죽이는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고있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던 조선의 모든 저항세력은 이미 우리의 아귀센 손밑에서 발버둥질할 기력마저 잃고 늘어졌소. 오직 김일성공산군만이 조선을 살리겠다고 저항해나서고있소. 지금까지는 압록강건너편에서 그들이 총소리를 울리고있소.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지난날의 조국땅에서 저항의 총소리를 울리게 되면 그것은 죽어가고있던 조선에 소생의 희망을 안겨주는 재생의 예종으로 될것이요. 그러한 예종소리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예고하는 종소리로 될것인가는 벌써부터 우리모두가 예감하며 의식하고있소. 김일성군의 전멸을 목표로 우리가 전면적이고 집중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될 리유의 첫째는 여기에 있소. 둘째로는 김일성군대가 재래의 항일무장군력들과는 달리 단독저항을 하고있지 않다는데 있소. 지난날의 이른바 독립운동자들은 서민대중과 유리된 단독저항을 해왔기때문에 뿌리없는 나무토막처럼 용이하게 넘어뜨릴수 있었소. 그러나 김일성군은 서민대중을 계몽시키고 의식화하면서 그들을 조국광복회라고 하는 거족적인 반일통일전선조직에 묶어세우고있소. 이 공산군은 〈10대강령〉이라는 자기들의 정치적강령을 통하여 민중의 해방과 행복을 약속하며 그 실시를 위해 싸우고있다는것을 선언하고있는 정치적, 사상적 무장집단이라는것을 알아야 하오. 서민대중과의 긴밀한 련계는 그들의 생존방식이요. 그들은 서민대중과의 유리를 곧 죽음으로 간주하고있소. 극히 최근에 여기 앉아있는 우리 총독부 미쯔바시경무국장은 조선공산군사령관인 김일성이 자기의 부하들에게 좌우명처럼 강조하군 한다는 명구를 나에게 들려준바가 있소.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 김일성의 이 한마디 명언을 우리가 홀시한다면 군사로장들인 우리는 이 20대청년영웅앞에서 이때까지 당한 모멸보다 더한 모멸과 수치를 면할수 없을것이요. 그가 어떻게 민중을 우리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에 결합시키고 민중속에 뿌리를 뻗치고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있소. 그러나 김일성군이 광범한 반일력량을 조직화하리라는것만은 명백하오. 지금 국제적규모에서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쑈인민전선운동이라는것을 벌리고있소. 이 운동의 세계적추이가 서반아의 프랑꼬장군으로 하여금 아직까지 고전을 겪게 하고있으며 도이췰란드의 히틀러와 이딸리아의 무쏠리니에게 애를 먹이고있소. 만일 우리가 김일성의 군대를 하루바삐 전멸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수십, 수백, 아니 2천만 조선인민들속에 뿌리를 내리는 거목으로 자랄것이요. 그렇게 되면 벌써 군도를 아무리 휘둘러도 베버릴수 없소. 거목으로 되기전에 어린 나무를 단칼에 자르고 뿌리채 뽑아버려야 하오. 단칼에!》 옛 오이다현의 소년무사는 단칼에 개모가지를 잘라버리던 때를 방불케 하는 손칼질로 허공을 베였다. 마주앉아 여전히 한마디 께낌도 없이 듣고있던 우에다사령관은 그의 말에 완전한 동의를 표시하여 또다시 성큼하고 가는 목을 두세번 꺾었다. 그리하여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본 뚱뚱보 미나미총독과 말라꽹이 우에다사령관은 단칼에 조선인민혁명군을 멸살소탕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여러시간동안에 걸친 이 진지한 회담에서 조선과 만주의 두 늙은 최고통치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거세차게 벌리고있는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비상대책으로서 3대정책을 작성하였다. 첫째로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국경경비에 만전을 기하는것, 둘째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쌍방의 대규모적인 공동《토벌》작전을 속행하는것, 셋째로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과의 련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서간도일대에 집단부락을 설치하는것이였다. 이 3대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조치의 협의를 목적으로 관동군헌병대사령관 도죠와 총독부경무국장 미쯔바시 사이에는 세부토의가 진행되였고 쌍방간에 중요협정이 체결되였다. 협정에서 쌍방은 조선과 만주간에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밑에 금후의 경비문제에서 긴밀한 호상련락과 협력을 실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지금까지 쌍방의 중앙당국간에 호상련락과 호상협력이 거의나 없었던 페단을 없애버림으로써 국경경비를 물샐틈없이 강화하고 《토벌》작전을 효과성있게 진행하여 속한 시일안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전멸시키자는것이였다. 그 구체적인 실무조치로서 만주에 있는 경찰통제위원회에 총독부경무국측에서 반드시 출석하여 련락을 하게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부근 오지의 중요 각 지대에 경무국의 파견원을 상주시켜 정보활동을 하게 한다, 국경연안의 만주측 중요경찰서에서 경무국산하의 우수한 경관들을 다수 채용케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량 지역간에 여러개의 련락전화선을 가설하여 쌍방간에 무시로 긴밀한 련락과 통보를 진행한다… 등의 행정세칙들을 박았다. 미나미와 우에다사이의 회담에서 채택된 3대정책과 그에 따라 도죠와 미쯔바시사이에 협의체결된 국경경비문제 등에 대한 협정은 지체없이 실천에 옮겨졌다. 《도문회담》직후부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치치하루에 있던 관동군부대들이 백두산쪽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산하 부대들이 또한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밖에 일만경찰대들과 위만군 《토벌대》들도 이 지대에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나고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우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여졌다. 달구지 혹은 말파리들이나 겨우 다니던 백두산일대의 산간오지 좁은 길들에서는 대포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였고 원시림속에는 군마의 말발굽자국이 눈우에 찍혀지기 시작했다. 밀정들은 처처에 욱실거렸다. 신입대원으로 가장하고 곰의골밀영에까지 들어왔다가 자백한 밀정도 그런자들중의 하나였다. 이같이 엄혹하고 긴장된 정세속에서도 유격대원들의 생활은 자기의 드팀없는 곬을 따라 흘렀다.
조반을 치르자 곽두섭은 재봉소로 가는 재봉대원들과 함께 곰의골을 떠났다. 무기수리소로 가는 길에 곽두섭이에게 병원까지의 길안내를 해주라는 장군님의 특별지시를 받은 무기수리소에 있다는 젊은 남대원이 또한 그와 함께 떠났다. 길을 잘 걷는 곽두섭은 재봉대원들보다 세배나 더 무거운 짐을 짊어졌지만 줄창 맨앞에서 씨엉씨엉 걸었다. 다리가 길고 기력이 좋은 곽두섭은 스적스적 걸음발을 옮겨놓는것 같은데도 남보다 길을 빨리 축냈다. 하긴 2백리 가까운 밤길을 날새기전에 대여낼만큼 잘 걷는 곽두섭이다. 《아유 더워라. 땀이 다 나네.》 《아이참, 중대장동지는 별스레두 빨리 걸으시네. 숨이 차서 미처 따라가질 못하겠다니까.》 《좀 천천히, 천천히 걷자구요.》 뒤따라오는 김확실이네는 숨들이 차서 할딱거렸다. 《아, 그래? 그럼 천천히 가자구. 천천히 걷는다는게 내가 워낙 다리가 길어놔서…》 곽두섭은 걸음발을 늦추고 천천히 걷는다는것이 또다시 뒤사람들이 따라가기 바쁘게 빨라지군 했다. 그는 자꾸만 멈춰서서 기다려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동무넨 정말 못걷누만.》 그의 말에 김확실은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듯 눈을 빨았다. 《아이참, 우리가 못걷나요? 중대장동지는 워낙 다리가 긴데다 기운내 걸으니까 그렇지.》 곽두섭의 바로 뒤에 선 무기수리소의 남대원도 어지간히 급해 했다. 《재봉소까진 거의다 왔는데 천천히 갑시다. 녀동무들은 다리가 짧거던요.》 《동무두 다리가 길지 않구만.》 《길지 않지만 짧지두 않습니다.》 헛허허… 핫하하… 호호호… 즐거운 웃음들이 하늘에 날고 눈우에 딩군다. 숲속길에는 기막히게 정갈한 흰눈이 푸더분하게 쌓였다. 덮고잤으면 신방의 햇이불보다 더 폭신할것 같이 호함진 눈이다. 그쯘하게 늘어선 가문비나무우에서 이따금 수북이 쌓인 눈더미들이 무덕무덕 떨어져내리며 뽀얀 은가루를 날린다. 새하얀 겨울제복을 차려입은 백두의 수림은 곰의골에서부터 재봉소까지 긴긴 영접대형을 짓고 늘어서서 장엄한 백설의 꽃보라를 뿌려주는듯싶다. 하늘도 맑고 푸르다. 햇솜같이 하얀 구름송이들이 둥실 떠있다. 례장을 갖추는 새색시에게 이불솜으로 넣으라고 따다주고싶을만치 탐스런 흰구름이였다. 일행은 나무가 서있지 않는 공지에 나섰다. 《자, 이젠 정말 거의다 왔어요. 저 섬같은 숲에 들어가 처음 맞다들게 되는 귀틀집이 우리 재봉소예요.》 김확실이 곽두섭의 앞에 나서며 길을 꺾어들었다. 일행은 숲에 들어서서 다시 더 얼마쯤 걸어갔다. 마침내 김확실은 걸음을 멈추며 곽두섭에게 수림속 한곳을 손으로 가리켜보였다. 《바로 저거예요. 저기 저쪽에 뿌죽하게 솟은 지붕이 보여요?》 《보이오.》 동화그림책에 그려져있는 곰아저씨가 사는 집같이 아담하고 재롱스럽게 생긴 귀틀집이였다. 지붕우에는 눈이 반길이나 되게 높이 쌓이고 집옆에는 몽톡한 통나무굴뚝이 삐뚜름하게 내밀려있었다. 《조용하구 아늑하구… 여긴 정말 깊은 후방답구만. 이런 깊은 밀림속에 우리의 군복제작공장이 있을줄을 뉘 알겠소?》 《맘에 들어요?》 《맘에 드오.》 《그럼 우리 재봉소 견학을 하며 얼마동안만 다리쉼이나 하세요. 제꺽 완성해드릴테니.》 재봉대원들은 약속대로 한시간도 채 못되여 그가 병원에 가지고 가야 할 두벌의 솜군복을 제꺽 끝내주었다. 그대신 곽두섭은 무기수리소 사람과 함께 재봉소를 견학하고 난 뒤에 재봉대원들이 껍질을 벗겨서 흰 광목천에 군복색물감을 들이는데 쓰려고 찍어다놓은 참나무와 가둑나무, 횡경나무들을 다루기 좋게 잘라주고 껍질도 둬삼태기나 잘되게 벗겨주었다. 그덕에 후한 점심대접까지 받고 수리소 일군과 같이 다시 병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재봉소에서 병원까지는 과히 먼것 같지 않았으나 눈이 좀더 깊이 쌓인데다 중간에 가로놓인 산비탈이 가파로운 편이여서 걸음이 지체되였다. 때때로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에 묻힌 함정같은 깊은 웅뎅이들이 있었다. 나무들도 더 빽빽하게 들어찬 이곳의 밀림속은 해볕이 잘 스며들지 못하여 한결 침침했다. 앙상한 이깔나무들과 검푸른 가문비나무들이 엇섞인 릉선을 넘어 희끗희끗한 봇나무들이 두간두간 보이는 펑퍼짐한 골짜기에 내려서니 아름이 벌게 굵은 분비나무들이 꽉 들어찬 우중충한 수림속 저편에 재봉소만한 크기와 비슷한 모양새의 귀틀집 한채가 역시 아담한 자태를 드러냈다. 《에― 다 왔군. 바루 저게 병원입니다.》 곽두섭의 부식물배낭 하나를 메고 재봉소에서 여기까지 길을 안내해온 수리소사람이 후유 단김을 내뿜으며 그편으로 앞서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이라야 겉모양은 여느 귀틀집이나 별다름이 없었다. 컴컴한 숲천정의 뚫린 구멍사이로 해빛이 푸른 띠를 이루며 흘러내리고있는 귀틀집 한옆의 성글게 선 나무아래서 몇사람이 해바라기를 하며 담소를 하고있다가 이편으로 주의를 돌렸다. 나무등걸을 깔고 앉았던 한사람은 앞에 나무줄기가 가리워져있어 잘 보이지 않는지 일어나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먼눈으로 살폈다. 금방 그들속에 끼여 해바라기를 하다가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인듯 한 녀자 두사람 역시 귀틀집 문앞에 멈춰선채 이편에 눈길을 보냈다. 멀리서 회색빛으로 보이는것으로 미루어 두사람 다 토스레치마저고리를 입은것 같은데 가슴에 외태머리를 드리운 처녀의 어깨에 약간 몸을 기대고 선 자그마한 단발머리처녀의 웃몸에는 솜저고리같은것이 걸쳐져있었다. 곽두섭의 시선은 어째선지 바로 그 녀자에게로만 이끌리였다. 단발머리, 감실감실한 얼굴, 자그마한 몸매… 이러한 큰 표상만으로 그 누구를 가려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륙감의 눈은 밝기마련이다. 곽두섭은 자신의 륙감으로 표상이 아슴푸레한 그 미지의 녀자에게서 그동안 그렇게도 소식을 몰라 애태워오던 분옥이의 모습과 자태를 발견하고 숨이 콱 막혀버리는것 같은 숨가쁨을 느꼈다. (내가 잘못본것이 아닐가? 정말 저 녀자가 분옥이가 옳을가?) 곽두섭에게 있어서 조분옥은 눈부신 존재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쳐지지 않는 그 눈부신 빛을 온몸으로 감수한 곽두섭은 눈이 시여와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상한 현훈증이 겹쳐 디디고 선 땅이 흔들리는듯 한 착각이 일었다. 일순간 눈을 감고있다가 다시 뜬 그는 문앞에 서있던 그 두명의 녀자들이 귀틀집안으로 들어가는것을 보았다. 그의 눈을 부시게 했던 존재는 집안의 어둠속으로 꺼져들어가고 아무런 빛도 없는 육중한 통나무 널문이 그 자리를 메워버렸다. 곽두섭은 단꿈에서 깨여났을 때마냥 마음이 허전하여 망연히 서있었다. 과연 그것이 한순간의 꿈이였던가? 헛본데서 생겨난 환각이였던가? 자기가 가까이 가보고 확인할수 있도록 그 녀자가 좀 더 바깥에 그냥 서있어주지 않은것을 그는 아쉽게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몇분후이면 확인할수 있다. 병원안에 들어서면 저절로 알려질것이다. 그것이 만일 분옥이가 옳았다면? 아, 그 순간에는 가슴이 터질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가 아니라면?…) 분옥이가 아닐 경우 자기 가슴속으로 밀려들 견디기 어려울 쓰라림에 지레 겁이 난 곽두섭은 귀틀집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가기가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조바심이 나서 걸음을 다우치게도 되였다. 실로 지금의 한걸음한걸음은 기쁨이면 가장 큰 기쁨, 락망이면 가장 큰 락망을 가져다줄,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죄여주는 걸음걸음이였다. 《아니 이게 누구요? 꽤 알만한 동지로구만. 하― 이거 공기만 마셔두 병상에서 툭툭 털고들 일어난다는 이 벽촌의 신선한 대기가 담배진에 오염되게 됐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두팔을 쩍 벌렸다. 《…?》 그는 곽두섭의 손에 들려있던 솜군복을 싼 보자기를 앗아 눈우에 내려놓고 그의 량팔을 반갑게 잡아흔들었다. 《아니 〈막담배〉 중대장동무! 날 모르겠소? 〈애연동포〉를 몰라보겠소?》 새까만 코수염밑에서 담배진이 배인 누르끼레한 이발이 해빛에 반사되였다. 정신을 온통 병원귀틀집안에만 보내놓고있었던 곽두섭은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대통령감》이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알아는 보는구만. 아무렴 〈막담배〉가 〈대통〉을 몰라서야 되겠소? 워낙 막담배일수록 대통에 담아 피우게 돼있는게랑이. 그런데 대답이 어째 좀 어정쩡하다?》 곽두섭은 얼굴이 불깃해졌다. 《그럴리가 있습니까? 〈대통아바이〉를 여기 와서 만나게 될줄 몰랐습니다.》 《그럼 뭐 내가 백두산밀영이나 사자봉밀영에만 붙박혀있는 글뒤주인줄 알았소? 그새 내 좌골신경통이란놈이 못되게 굴어서 장군님의 강권에 못이겨 대탁밀영에 들어가서 온천치료를 받고 나왔당이.》 《그래요?! 그런데 이 병원엔?》 《여기 병원에는 나도 방금 취재하러 왔소.》 《취재요? 무얼 취재한다는겁니까?》 《무얼게 있소? 우리 선전물에 실어서 널리 소개선전할만 한 좋은 글감을 얻어보자는거지. 아직두 날 잘 모르는구만. 이렇게 허술해뵈두 내가 사령부 공보부장쯤 되는 사람이란걸. 허허…》 리동백은 눈을 끔쩍하고는 제 롱말에 스스로 즐거워 소리내여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비밀을 알려주듯 그의 귀가에 입을 대고 수군거렸다. 《알겠소? 이제 오래지 않아서 조국광복회기관지 〈3.l월간〉창간호를 발간하게 된단 말이요. 장군님께서 친히 기관지명을 〈3.l월간〉이라구 붙여주셨는데 그 창간호준비때문에 요즘은 나도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는판이요.》 보아하니 대탁에 가서 창간호 발간을 위한 글을 쓰고 내려오던김에 병원에 들린듯 했다. 《아, 그렇군요. 참 수골합니다.》 곽두섭은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눈은 자꾸만 귀틀집쪽으로 돌려졌다. 《내사 전투원도 아닌게 수고야 무슨 수고겠소. 그런데 중대장동무는 병원에 무슨 일로 왔다구? 뭐 나무군노릇을 하러 왔다구? 허허, 일선용사가 총을 놓구 도끼를 잡으러 왔다니 무슨 처벌이라도 받은게 아니요? 좌우간 반갑소. 이거 우리 〈애연동포〉끼리 마주서가지구 말반찬만 나누어서 되겠소? 주식이 있어야지.》 리동백은 호주머니에서 례의 그 애용대통과 권연곽을 꺼냈다. 《자, 한대 뽑소. 우리 애연가들이야 축배보다두 맞담배질이 제격이지.》 너무 고맙게 구는것이 이럴 때는 도리여 곽두섭이한테 성가스러웠지만 반갑지 않은 그 권을 물리치기도 난처했다. 《아, 아, 나한테두 있습니다.》 곽두섭은 바삐 자기 호주머니의 담배를 꺼냈다. 《그전엔 내가 얻어 피웠는데 오늘은 내걸 피워보십시오.》 《하, 역시 이제는 가랑잎도 없어하던 그전하구 처지가 달라졌군. 이왕 서로 꺼냈으니 그럼 어디 바꿔 피워볼가? 자, 이걸 한대 피우오. 그대신 나는 동무의 담배를 한대 태우기로 하구.》 《그… 그럽시다.》 곽두섭은 리동백의 권연을 한가치 받고 자기 권연을 대신 뽑아주었다. 리동백은 그것을 받아서 손바닥에 놓더니 권연종이를 테고 담배를 부스러뜨렸다. 《나는 파이프에 태우는데 습관돼서 권연두 이렇게 터뜨려가지구 담아피우군 하오. 파이프로 피우는데는 그저 막담배가 편리하지.》 그는 부스러뜨린 담배를 파이프에 쑤셔넣고 엄지손가락으로 꼭꼭 눌러다지면서도 줄창 이야기했다. 《이 담배라는게 요물은 요물이라니까. 글을 쓰다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이걸 척 피워물면 좋은 글귀가 금시 떠오르군 한단말요. 〈막담배〉동문 어떻소? 담배를 피워물고나면 무슨 일이건 더 잘되는것 같지 않소?》 《그렇지요. 옳습니다.》 《애연가들의 체험이야 동일하겠지. 그럴거요. 아마 싸움두 더 잘하게 될거요. 중대장동무는 련애를 해봤소?》 《모… 못해봤습니다.》 《이담에 체험해보오. 사랑하는 녀성앞에 서면 입도 얼어붙구 손발도 어디 건사해야 좋을지 모르게 거북하기만 한데 그럴 때 담배만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소? 나는 담배를 피울줄 모르는 사람이 애인앞에 서있는 모양을 그려보기만 해두 그 사람이 가련해지오.》 《허허 참…》 곽두섭은 허파 빈 소리를 냈다. 《웃을 일이 아니요. 이담에 체험하게 되면 내 말이 그르다구 안할거요. 그리구 담배라는게 속이 탈 땐 꽤 동무가 돼주질 않소? 그건 체험해봤소?》 《네 좀…》 분옥이가 자기 속을 태워줄 때 자기가 줄담배를 피우군했던것을 상기한 곽두섭은 선웃음을 지었다. 《여하튼 우리 애연가들끼리니 말이지만 담배라는게 별난 요물이란 말이요. 하긴 내 언젠가…》 (아, 이 령감이 정말 지루하게두 늘어놓는군. 제길, 아무 들을 멋두 없는 얘길 이렇게 길게 늘어놓다니. 그런데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무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재미있는척 하며 웃어주고 맞장구까지 쳐주고… 자기자신과 남을 속이면서 이대로 얼간이마냥 서있다니?) 곽두섭은 아무 맛없이 피우던 담배를 던졌다. 절반이 채 탈가말가했던 담배가치는 눈에 박히며 치지직하고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 《아바이, 내 좀 여기 전할거랑 전하고 해야 할 일이랑 알아봐야겠는데…》 곽두섭은 솜군복보따리를 집어들며 주저없이 《대통령감》의 말을 꺾고 량해를 구했다. 《그래야지. 어서 그러오. 방해되지 않는다면 나도 전투중대장이 병원에 와서 하는 일을 취재하는겸 구경하겠소. 화목이나 장만해주자구 중대장이 오진 않았을거란 말이요.》 그러며 리동백은 솜군복보따리를 자기가 들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아, 이 령감이 줄창 따라다닐셈인가? 이것참 우환거리를 만났군.) 《그러시지요. 뭐 방해될거 있습니까. 취재를 하겠다는데야 도와드려야지.》 곽두섭은 솜군복보따리를 제게 달라고 내민 리동백의 손을 못본척하고 단호하게 귀틀집쪽으로 돌아섰다. 《이거 먼길을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 저쪽에서부터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기나 한듯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나이 서른쯤 돼보이는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가 병원을 림시책임지구있는 사람입니다. 송동무라구 불러주시오.》 그는 자기 소개를 하며 곽두섭의 어깨에서 배낭을 벗겨내여 한어깨에 걸메고 솜군복보따리도 받아들었다. 《이거 무슨 짐이 이렇게 많습니까? 수리소동무가 감자도 한배낭 대신 지고 왔다던데.》 《사령부에서 다 병원에 보내온겁니다. 수리소동무가 메고 온 배낭속에 있는 감자와 닭은 부식물루 쓰구 그 배낭속에 들어있는 약품들은 치료에 쓰구… 그리구 여기 병원에 뭐 새로 온 녀동무 둘이 있다던데?…》 곽두섭의 눈은 또 저절로 귀틀집쪽을 흘끔 살폈다. 《예 있습니다. 어제 온 동무들이 있습니다.》 《보자기에 싼 솜군복하구 그 배낭안에 있는 내복, 세면도구랑은 그 동무들에게 주라더구만. 그런데 그게 어떤 동무들입니까?》 《4사부대에서 온 동무들입니다. 그제 4사부대 통신원하구 같이 왔다가 한 녀동무가 제대로 걷지 못해서 여기 떨어졌는데 원래는 사령부까지 통신원이 데리고 가자던 동무들이랍니다.…》 《내 얼핏 만나보니 꽤나 고생하구 곡절을 겪은 동무같더구만. 그 단발머리 녀동무말이요.…》 리동백이 끼여들었다. 《전에 독립련대 4중대엔가 있다가 중대에서 떨어져 지금껏 외딴데서 지내온 동무라누만. 하, 글쎄 〈민생단〉문서보따리가 불타버린줄두 얼마전에 최현동지네 부대를 만나서야 알았다질 않소? 그 동무에게 무슨 이야기거리가 많을것 같소. 그래 내 이제 품을 들여 그 동무에게서 취재를 할 작정이요. 좋은 글감이 있을것 같거던. 외따로 떨어져있으면서 유격대 입대대상으로 한사람 키워서 데려온것만 봐두 벌써 알조가 있지 않소? 참! 그 동무가 장철구아주머니랑 중대장동무랑 잘 알더구만. 나한테 중대장동무의 소식이랑 묻길래 〈막담배〉동무를 그러냐고 했더니 기뻐서 말두 못하구 머리만 이렇게 끄떡하던데 눈에는 눈물이 한함지나 담기질 않겠소! 만나보우. 만나보면 알만한 동물거요. 하기사 조선인민혁명군대원치구 〈막담배〉중대장을 모를 사람이사 있겠소? 이 〈대통령감〉은 몰라두말이요…》 곽두섭은 귀가 멍멍해져서 리동백의 이야기를 그 이상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더 받아듣지를 않았다. 그 이상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귀틀집문앞으로 곧추 성급하게 다가가는 그의 온몸에서 피가 마구 끓어번졌다. 세차게 풀떡거리는 심장이 흉벽을 잦은 가락으로 두드렸다. 저 문뒤에, 바로 저 투박한 통나무널문뒤에 방금 사라지던 그녀자가 과연 분옥이 옳았던것인가? 그렇게도 자기를 애타게 했던 분옥이가 과연 이 몇걸음앞에 와있다는것이 사실이라는 말인가? 가슴을 울렁거리며 문앞에 다가서서 손잡이를 잡으려던 곽두섭은 오른손을 엉거주춤 앞으로 내민채 문득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그가 열기전에 안쪽에서부터 먼저 열린 그 문안에 다름아닌 그 녀자가 서있는것을 보았던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 녀자였다. 조분옥이였다. 마안산에서 그리도 쓸쓸히 헤여진 뒤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또 이 겨울이 오도록 지금껏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던 분옥이가 살아서 자기 눈앞에 서있는것이다. 별안간 곽두섭을 대한 그 녀자 역시 소스라치게 놀란채 곽두섭을 넋없이 쳐다보았다. 놀라다 못해 아연해서 약간 흡뜬것 같이 보이는 그 녀자의 눈은 곽두섭의 얼굴에 향한채 움직거리지도 않았다. 잔뜩 부풀어오른 그 녀자의 어깨에는 아주 험상스럽게 낡았으나 마안산의 그 눈오던 날의 추억을 일시에 자아내는 눈에 익은 하나의 표상만은 고스란히 간직되여있는 솜옷이 걸쳐져있었다. 곽두섭의 군복저고리 가슴에서 바꿔가진 바로 그 단추가 달려있는 솜옷이였다. 나무가지에 긁혀 허물자리가 난 이마, 핼쑥하게 꺼져들어간 눈확, 여윈 뺨, 가늘어져 한결 성큼해보이는 목, 살갗이 터갈라진 손등, 피가 내배인 붕대를 감고 나무껍질신발을 발끝에 건 버선 없는 한쪽 발… 그냥 얼핏 한눈에 굽어보기에도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게 하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도 솜옷가슴에 달린 놋단추 하나만은 노상 닦았던지 눈물이 가득히 어리는 눈보다도 더 이채롭게 반짝인다. 문득 분옥의 어깨에서 솜옷이 스르시 흘러 떨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한동안 굳어진듯 까딱않고 서있던 분옥이가 맥없이 무릎을 꺾으며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곽두섭은 황급히 문안에 달려들며 까무라쳐 쓰러지는 분옥을 안았다. 때마침 분옥의 옆에 서있었던 곱단이가 쓰러지는 그의 팔을 잡아쥐였기때문에 분옥은 병원부엌바닥에 부딪치지 않은채 곽두섭의 날쌔고 억센 팔에 받들리울수 있었다. 배낭 하나의 무게도 안나갈만큼 갑삭한 분옥을 가슴에 안아든 곽두섭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당황한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일없습니다. 갑자기 낯익은 중대장동무를 대하는바람에 좀 너무 놀란것 같습니다. 불시에 심장이 충격을 받은탓이지요.》 곽두섭의 품에 안긴채 죽은듯 눈을 감고 입술이 새파래진 분옥의 손목을 쥐여 맥을 보고난 병원책임자는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일어서더니 호주머니에서 반질반질하게 손때 오른 침통을 꺼냈다. 《이거 중대장동무를 놀래워서 안됐습니다. 침 한대만 맞으면 일없습니다. 안심하고 불곁에 가서 언 몸이나 녹이십시오. 곱단동무가 붙잡소.》 아무것도 모르는 병원책임자는 곱단이더러 분옥이를 받아안으라고 일렀다. 곽두섭은 생뚱같은 곱단이에게 분옥이를 앗기우고 밀려날수밖에 없었다. × 곽두섭은 조분옥이와 따로 조용히 마주앉아 그간의 그리웠던 정과 회포를 나눌만한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였다. 평범한 사이였다면 그간 어디 있다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는가고 여러 사람들앞에서 아무 꺼리낌없이 물을수 있는 말도 그는 어쩐지 자기들사이의 남다른 비밀관계를 드러내게 되는것만 같아서 선뜻 묻지 못하고 적당한 구실이 생기기를 기다리면서 혼자속으로 랭가슴만 앓았다. 남만 못지 않은 용기를 가진 곽두섭이였으나 한편 매우 어질고 순박하기도 했던 그는 여러 사람앞에서 저절로 주눅이 들어버린것이다. 바깥에 나가서 남들이 안보는데서 만날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겠는데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를 않았다. 병원사람들은 치료성원이건, 환자건, 또 초면이건 구면이건 모두가 곽두섭이에게 어찌나 호감을 가지고들있는지 도무지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들 하지 않았다. 소식에 주린 이 벽지사람들은 들려줄만한 전투담을 비롯한 사령부와 부대의 소식이랑 많이 가지고 왔음직한 곽두섭이가 병원에 나타난것을 더없이 좋아들 하였다. 두말할것 없이 《대통령감》역시 《애연동포》로서 그를 좋아했다. 곁사람들은 자기들의 열렬한 호감과 지극한 호의가 얼마나 오래간만에 만난 비밀약혼한 애인들을 구속하며 괴롭히고있는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가운데서 제일 말이 없고 제일 곽두섭을 보지도 않고있는 조분옥의 덕분에 바로 이 젊은 중대장이 이 벽촌에 오게 되였다는것도 그리고 누구보다 분옥이를 위하여 사령부에서 닭고기와 귀한 입쌀을 비롯한 색다른 음식감을 보내주었다는것도 알지 못한채 무턱대고 웃으며 즐거워들 했다. 그날이 저물도록 종시 분옥이와 따로 조용히 마주앉아 여느 사람들이 있는데서는 나누고싶지 않은 소중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 곽두섭은 마침내 부대소식과 전투담을 더 들려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바깥에 나가 도끼를 잡았다. 병원책임자는 그러는 곽두섭에게서 도끼를 뺏으려들며 오늘은 길을 오느라 피곤도 했겠는데 쉬여달라고 권했다. 《동문 어서 들어가 환자치료나 하우. 나한테 상관 말구. 나는 여기서 몇달 두고 땔나무나 장만해주고 하루빨리 부대에 돌아가야겠소.》 그렇게 언명한 곽두섭은 아예 병원귀틀집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울기 오른 그는 눈이 시뻘개가지고 세괃게 도끼질을 해댔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부아가 돋고 번열이 나서 웃옷을 벗어던지고 홑내의바람으로 굵다란 강대나무토막을 단매에 쫙쫙 빠개군 했다. 서슬푸른 그의 도끼질에 뿌리운 장작가치들이 탕탕 소리를 내며 귀틀집벽도 들이받고 나무그루들도 들이쳤다. 어쩌다 잠간씩 바깥에 나왔던 병원사람들은 장작개비에 얻어맞을가봐 날아가는 포탄을 피하듯 했다. (아, 저 답답한건 집안에 들이배겨 무얼 하고있담? 한번 구실을 붙여 좀 나오기라두 할거지. 다들 한번씩은 나왔다 들어가는데 저 안타깨비는 두더지처럼 안에만 들어박혀있으니… 도대체 얼마나 큰 경난을 겪구 어쩌다 만났는데 저런담? 그저 늘 내 속만 태우는 애물이라니까. 내가 왜 애물한테 정들어가지구 이렇게 늘 속만 썩인담? 좀 씨원씨원한 사람에게 정들거지 하필 저같은 맹꽁이를 맘에 두다니? 게다가 눈치두 곰발바닥같은 사람을…) 곽두섭이 한창 장작감나무에 대고 화풀이를 하고있는데 문소리가 나더니 바로 그 《애물》이 물물 연기나는 숯다리미를 들고나왔다. 새로 받은 군복을 다릴 차비인것 같다. 부엌아궁에서 골라내여 다리미안에 담아넣은 잉걸불이 너무 연기를 내기때문에 바깥에 들고나온 모양이다. 일순간 분옥이와 눈길이 마주친 곽두섭은 귀틀집 뒤쪽으로 좀 돌아가라고 눈짓하며 허리를 폈다. 그러나 분옥은 용서를 비는듯 한 눈길을 잠간 보내고는 연기나는 다리미를 귀틀집앞의 납작한 돌우에 올려놓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아, 글쎄 저렇다니까. 어쩌다 나와가지구 그냥 들어가버리다니? 이거 정말 차라리 여기서 떠나가버리는게 낫지 않을가?) 닭쫓던 개모양으로 굳게 닫긴 귀틀집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서있는 곽두섭이에게는 분옥이에 대한 원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빌어먹을… 힝!》 그는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가 용을 쓰며 내리박았다. 옹이투성이의 참나무토막이 일격에 쩍 버그러졌다. 또다시 문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나무토막에 도끼를 안겼다. 나무에 박히는 도끼날옆에서 손바닥만한 도끼밥이 휙 날았다. 쟁강소리와 함께 《어마나!》하는 낮은 비명이 들렸다. 곽두섭은 그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소랭이를 끼고 귀틀집모퉁이를 돌아가던 녀대원이 멈칫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분옥이였다. (어디로 갈가?) 우물터로 통하는 길로 약간 한 다리를 살룩거리며 걸어갔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둔덕밑으로 내려가는 그 녀자의 뒤모습을 지켜보던 곽두섭은 나무옹이에 걸어놨던 군복저고리를 나꿔 채여 벗겨들고는 분옥이의 뒤를 바삐 따라갔다. 옷을 입으며 우물터에 이르렀을 때 분옥은 얼음덮인 박우물옆의 돌판우에 보리쌀과 바가지가 담긴 법랑소랭이를 내려놓고 앉아 바가지를 들고 눈속 웅뎅이안에서 차랑차랑하는 물을 푸려다가 그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주춤하며 일어나려했다. 곽두섭은 불쑥 지금껏 괘씸하게 군 그를 분풀이삼아 골려주고싶은 야릇한 생각이 떠올라 그가 뒤돌아보기전에 커다란 손으로 분옥이의 두눈을 뒤에서 감싸쥐였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가슴과 어깨를 휘감아잡고 자기의 앞가슴에 꽉 그러안았다. 그리웠던 정다운 사람의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히고 뼈가 맞히는 갑삭한 몸이 자기의 품에 안겨드는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무엇인가 뭉클한것이 치솟으며 코안이 찡하게 저려났다. 《아이참, 누가 보겠어요. 어린애처럼…》 그 녀자는 나긋나긋한 두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운 곽두섭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구태여 자기의 얼굴에서 그 손을 풀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뛰쳐나려고 헛되게 애쓰지도 않았다. 《그만… 그만해요. 정말이지…》 갑자기 목갈린 소리를 내는 조분옥이의 말마디는 토막토막 끊겼다. 곽두섭이가 감싸쥔 그 녀자의 눈에서 따뜻한것이 흘러나와 곽두섭이의 손바닥과 손가락들을 적셨다. 곽두섭은 자기 손으로 그 눈물을 씻어주며 분옥이를 풀어놓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두어깨를 잡아 자기쪽으로 돌려세웠다. 분옥은 한참이나 머리를 숙인채 눈물을 닦고 또 닦은끝에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이토록 가까운데서 마주보는 얼굴이였다. 눈두덩이 약간 부석부석해진 눈에 물기를 머금은채 그지없이 정답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여길 왔어요? 제가 여기 와있은줄 알고왔어요?》 분옥은 애틋한 한쪽뺨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었다. 《분옥이가 여기 와있을줄 알았을게 뭐요?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장군님께서 보내시기에 왔지. 그런데 분옥인 대체 어떻게 여기에 와있소? 아까 병원책임자랑 말하는걸 들으니 뭐 림강마의하쪽에 있었다면서?》 《네, 그곳 샘물골이란데서 여덟달동안 지냈어요…》 그 여덟달동안의 가지가지 일들이 일시에 되살아올라서인지 분옥은 뒤말을 잇지 못한다. 《여덟달동안이나!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생했겠소?》 《아니… 별 고생을 안했어요.》 분옥은 가벼이 머리를 흔들었다. 《큰 고생 없이 편히 지냈어요.》 그렇게 말하며 분옥은 또 눈물어린 눈에 웃음을 보인다. 이루 말할수 없을 고생을 겪었을터이지만 자기가 가슴아파할것 같아서 편안히 지낸듯이 말하는 분옥이였다. 곽두섭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그담엔?…》 《그러다가 최현동지부대를 만났어요. 어느날 초저녁에 난데없이 낯선 유격대원 두사람이 제가 있던 샘물골 윤로인댁에 찾아들어 제 이름을 대며 찾길래 나가보니 최현동지의 부대 사람들이였어요. 그분들을 따라 최현동지에게까지 가니 최현동지는 저를 보자 장군님께서… 장군님께서 동무를 애타게 찾고계시는데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느냐구… 저를 찾은게 기뻐서 그렇게 막 야단을 때리겠지요. 그리구 이튿날로 지체없이 통신원아바이와 같이 길을 떠나보내면서 장군님께서 동무를 몹시 기다리고계시겠는데 어서 장군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으로 가라고…》 토막토막 끊기며 간신히 이어지던 분옥이의 말마디들은 흐느낌속에 삼켜졌다. 곽두섭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기들의 이 기적같은 상봉이 어떻게 마련되고 이루어지게 됐는가를. 장군님께서는 먼 림강 마의하산골에 떨어져있던 분옥이를 찾으시여 여기에 데려다 놓으시고는 자기들이 어서 만나보도록 해주시기 위하여 지난밤 200여리 밤길을 다녀온 자기에게 일부러 과업을 만들어 이 병원까지 보내신것이다. 그는 장군님께서 어찌하여 곰의골에서 쉬지 말고 꼭 이곳에 와서 쉬라고 지시하시였는지, 어찌하여 반드시 재봉소에 들려 새 솜군복이랑 만들어가지고 오게 하시였으며 시래기국으로 끼니를 에운 신입대원들에게도 못주는 닭마리들을 기어이 이리로 들고오게 하시였는지, 또 어찌하여 남성들이 없지 않은 병원에 한달치의 화목을 장만해주고 오라고 하셨는지… 이 모든것이 무엇때문이였던지를 한순간에 다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그를 한시바삐 분옥이를 만나보게 하고 분옥이의 곁에 머물러있게 하기 위한것이였음을. 장군님의 그 깊으신 속내도 모르고 자기는 넙적넙적 다 받아메고 더없이 정세가 엄혹해진 이런 때에 애인을 만나러왔다. 《장군님!!》 곽두섭은 목메인 소리로 조용히 외이며 꽉 부둥켜안은 분옥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묻었다. 그들 두사람은 언제인가 마안산숲속 봇나무밑에서 비밀약속을 하던 때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없이 흐느껴울었다. 그러나 오늘의 눈물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눈물이였다. 그때엔 아무에게서도 축복받을수 없는 사랑을 맺은 애인들이 야속하고 랭혹한 인간들에게서 버림받고 외면당하는것이 서러워 흘린 눈물이였지만 지금은 자기들의 사랑을 가장 고귀하게 여겨주시고 꽃펴주시기 위해 애인들자신도 모르게 왼심쓰시고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위대하고 자애로운 사령관을 어버이로 모신 행복으로 하여 흘리는 눈물이였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버이장군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전사들의 고결한 눈물이였다.
곽두섭이 병원에 다녀온 그 며칠동안은 날이 좀 풀리는가싶더니 다시 추워졌다. 낮이면 물매급한 사령부귀틀집지붕우에 높이 쌓인 눈이 약간씩 녹으며 거의 땅바닥에까지 내려드리운 길고 실한 고드름끝에서 굵다란 물방울을 떨어뜨리군하더니 오늘은 한낮이 가까와지는데도 밖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없었다. 장군님께서 모이라고 하신 까닭을 알지 못한채 귀틀집안에 와앉은 군정간부들은 이따금 밭은 기침이나 할뿐 정숙을 지키며 서로 눈치들만 보았다. 《이젠 아마 다 왔지?》 타래치는 김을 앞세우며 출입문안에 들어서는 전령병에게 물으시는 장군님의 말씀이였다. 《다들 모였습니다.》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언 봉길이는 여무지게 대답하였다. 《그럼 시작해봅시다.》 그이의 말씀이 떨어지자 모두들 몸가짐을 바로했다. 《한가지 중요한 협의를 하자고 동무들을 모이라고 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책상앞에 앉으신채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동무들이 다 알고있는것처럼 얼마전에 우리 대렬에 끼여들었던 밀정이 김주현동무앞에 우리를 해하려고 품고 들어왔던 조막도끼와 독약봉지를 내놓고 자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적들의 우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의 첫 전조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예견한것이 정확했습니다. 요즘 사령부에 입수된 최근 신문자료들과 통보자료들은 적들의 움직임이 매우 심상치 않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동무들이 적지 않은것 같은데 우선 이 신문기사들부터 읽어들보시오.》 장군님께서는 책상우에 놓여있던 신문 몇장을 나눠주시였다. 11월초에 간행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들이였다. 《11월 3일 석간호 l, 2면 상단들에 실린 기사들을 주의깊이들 보시오.》 신문장을 펼치고 몇사람씩 머리를 맞대다싶이 한 군정간부들의 시선은 일제히 큼직큼직하게 밝힌 기사제목에부터 쏠렸다.
래북중의 미나미총독 우에다대사와 중요회담 도문령사분관에서 력사적회견 조만의존관계를 강화
조만량당국이… 협력토벌 관동군헌병대사령관과 미쯔바시경무국장 중요협정체결
조만일여정책구체화에 대한 중요협의
그 기사의 내용들보다는 그 기사제목들에 주의를 돌리도록 하시는 장군님의 말씀과 어조 그리고 그이의 표정에서 조성되고있는 정세의 엄중성을 감촉한 군정간부들은 시종 말없이 그 기사들을 눈으로만 읽었다. 기침소리는 물론 숨소리까지도 나지 않는 집안에는 신문장을 만지거나 번지는 종이소리만이 이따금 울리며 점점 짙어가는 좌중의 긴장감을 돋구어놓았다. 마침내 《도문회담》과 관련한 보도기사들을 다 읽은 군정간부들이 심중해진 얼굴들을 들고 다시 장군님께로 시선을 집중하자 장군님께서는 침착하고 여유있는 웃음을 보이시며 집안에 서린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시였다. 《동무들이 금방 본바와 같이 얼마전에 도문에서 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사이에 중요한 밀담이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 실린 기사들은 미나미가 회담을 마친 다음 라남에 나가서 기자들에게 몇마디 지껄인 이야기에 기초한것인만큼 회담의 진목적과 거기에서 토의결정된 중요한 내용들이 다 반영될수도 없었고 또 반영되지도 않은것들입니다. 동무들도 봤지만 거기에는 제놈들이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을 속한 시일안에 전면적으로 소멸하기 위해서 이번에 새로 세가지 중요한 정책을 작성했다는 사실조차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있습니다. 그저 량자간에 경제불가분관계문제니 치안협력문제니 이민문제니 하는것들이 토의되고 무슨 합의서가 작성되였다고 애매하게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나 미나미자신도 〈치안협력〉이라는 애매한 말속에 은페시킨 이번 밀담의 진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는 감추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놈은 지난 2일 아침에 서울에 돌아가서 우에다와의 회담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번 회담에서 자기의 주장인 〈선만일여정책〉의 구체화에 대해 토의하였다는것과 이 토의에서 〈산업경제 기타 불가분관계에 있는 량지를 일층 긴밀강화하여 국방치안보장, 토병에 대한 토벌행위를 공동히 하자는것에 의견이 완전히 일치〉 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놓았습니다. 문제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과 만주 량식민지통치의 최고우두머리들이 어째서 부랴부랴 도문에서 긴급회담을 벌렸는가? 그것은 우리를 시급히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동〈토벌〉작전을 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정간부들모두가 그이께로 시선을 집중한채 그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적들이 《도문회담》에서 채택한 《3대정책》과 그를 실행하기 위한 실무적조치들에 대하여 언급하신 장군님께서는 최근 적들의 준동에 대하여 알려주시였다. 《…입수된 정찰자료들과 지하혁명조직들의 통보에 의하면 지금 적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 〈토벌〉무력을 엄청나게 들이밀고있습니다. 다른 지방에 있던 관동군부대들이 백두산쪽으로 이동하고있으며 악질적인 〈정안군〉놈들을 비롯한 위만군부대들도 급격히 이 지대에 증파되고있습니다. 조선강점일본군19사단무력도 기동하고있습니다. 〈경찰토벌부대〉들도 마구 몰려들고있습니다. 〈도문회담〉이 있은 다음 적들은 국경일대에 일대경찰망을 형성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번 〈도문회담〉에서 우리의 유격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있는 간도와 동변도지방, 즉 간도성과 안동성을 조선의 연장과 같은 특수지대로 삼을데 대하여 합의하고 행정, 산업, 교육, 치안 각 분야에서 총독부가 직접적으로 관리할수 있는 길까지 틔워놓았습니다. 그에 따라서 각종 명목을 띤 정보원들과 밀정들이 이〈특수지대〉로 파견되여 들어오고있습니다. 지금 국경지대에 몰려들고있는 그 모든 군대, 경찰, 밀정들이 노리고있는것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주력부대를 선차적으로 진압해버리는것입니다. 적들은 이미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것을 대강 눈치를 챈것 같습니다. 엊저녁에 받은 통보에 의하면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강점 일본군의 라남19사단산하 함흥74련대에서 파견한 〈토벌대〉는 이도강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부대와 함께 곰의골방향으로 수색작전을 개시할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적들의 수색작전에서 특징적인것은 참빗으로 머리를 빗듯이 산릉선과 산중턱, 산골짜기를 동시에 타고나가면서 밀림을 샅샅이 훑는 새로운 수색전술을 쓰는것입니다. 적들자신이 이 새로운 전술을 〈참빗전술〉이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어떻게 하나 우리의 밀영들을 찾아내고 사령부와 주력부대를 타격할것을 작정한 적들은 백두산지구의 대원시림을 참빗으로 빗듯 모조리 훑을 잡도리입니다. 적들도 이번에는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우리가 어떠한 대응책을 세우고 적들을 계속 수세에 몰아넣으면서 적들의 대규모적인 〈동기토벌〉작전을 성과적으로 파탄시키겠는가 하는 문제가 절박하게 나서고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동무들과 같이 토의하자고 모이게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동무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말씀을 마치신 장군님께서는 군정간부들을 다시금 둘러보시였다. 좌중에는 긴장한 침묵이 서렸다. 어느 누구도 바스락소리하나 낼세라 조심하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이의 기대어린 시선을 받은 지휘원들은 생각에 잠겼다.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사색할 여유를 주시였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도록 얼어붙은것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격식없이 허심하게들 자기 의견들을 말해봅시다. 의견을 말하라니 심각해지고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한마디씩 말해도 좋습니다.》 침묵은 역시 깨뜨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머리를 수굿하고 여전히 생각에 잠긴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곽두섭동무가 운을 떼보지.》 정겹게 자기쪽을 돌아보시는 장군님의 지목을 받은 곽두섭은 잠시 주밋거리다가 시원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림시 보충중대를 맡았던 그는 병원에 다녀온 이후에 전투중대를 맡았다. 그이께서 자리에 앉은대로 이야기하라고 하셨으나 그는 그냥 일어선대로 두손을 앞으로 맞잡아쥐고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저는 적들의 주목이 백두산지구에 쏠리고 적의 〈토벌〉부대들이 이곳에 몰려들고있는 이런 때에 국내작전을 앞당겨실행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모두들 그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장군님께서도 저으기 놀라와하시였다. 《국내작전을 앞당겨실행한다?》 그의 말을 되뇌이신 장군님께서는 소리없는 웃음을 머금으시였다. 《아주 대담한 구상인데 동무가 생각한것을 좀더 전개해보시오.》 언제나 표정이 심각해보이는 곽두섭의 우둥퉁한 얼굴에서는 심각한 빛이 더 짙어졌다. 《적들은 북부조선에 주둔시키고있는 병력의 일부를 떼여 백두산지구에 들여보냈습니다. 경관부대들도 국경일대에 쏠리고있습니다. 그런만큼 적후방은 상대적으로 비여있고 그곳에 있는 경찰의 눈길도 이곳에만 미치고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적들의 배후에서 교란작전을 벌리기에 아주 유리한 정황을 조성해주고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국내인민들의 우리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있는것 같습니다. 정세가 유리한 때 저는 대담하게 조선안이 들썩하게 한번 꽝! 해보자는겝니다.》 군말을 싫어하는 곽두섭은 자기의 견해를 그이상 더 피력할 필요가 없다는듯 별다른 맺음말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뭇사람들이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국내작전에 대한 의욕을 불시에 강하게 자극해준 그의 이야기에 대부분의 군정간부들이 머리를 끄떡이며 이번 기회에 아예 그의 말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서로들 수군거렸다. 몇사람은 그렇게 하자고 장군님께 청을 드리기까지 했다. 흥분한 그들은 얼굴에 열기가 올라 다들 불깃불깃하였다. 아무 말씀없이 여전히 너그러운 웃음을 띠우시고 좌중을 둘러보시던 장군님께서는 긴 속눈섭을 깜박이며 자기 무릎우에 접어올려놓은 신문장의 어느 한점을 망연히 응시하고있는 리동학경위대장에게 시선을 멈추시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출입문 곁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경위대장동무의 의견은 어떻소?》 리동학은 무릎우에 있던 신문을 걷어쥐며 침착하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역시 매우 침착하고 꼼꼼하게 신문을 또 절반 꺾어 두손으로 잡아쥐고 곽두섭중대장쪽을 얼핏 돌아보았다. 《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있습니다.》 침착한 태도와는 달리 입안에서 흘러나온 말마디들은 처음부터 가려듣기 어려울만치 빨랐다. 역시 《보따지》였다. 그러나 그의 빠른 말을 가려듣는데 익숙된 뭇사람들은 아무런 난처한 기색이나 웃음기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겨울에는 기동이 불편합니다. 유격전을 하고있는 우리는 록음이 우거지는 여름철에 가야 쉽게 숨어다닐수 있지 겨울에는 우리가 다닌 자취를 죄다 감춰내기 어렵습니다. 더우기 적들이 우리를 찾자고 혈안이 되여있는 조건에서 수백 또는 수십명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적들속을 새여들어간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새여들어간다 해도 빠져나오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에 국내작전을 앞당겨 단행한다는것은 모험입니다. 우리 혁명의 주력부대를 그런 모험에로 떠밀어넣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적들의 눈을 피해 곰의골에서 다른데로 감쪽같이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만약 또 그곳으로 적들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다른곳으로 이동하고… 그렇게 기민하게 류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적들에 대한 배후타격을 배합하면 좋겠다고봅니다.》 기관총련발사격같이 쏟아져나오던 그의 말이 끝나자 사령부귀틀집안은 삽시에 조용해졌다. 《자, 서로 상반되는 의견이 제기되였는데 또 다른 의견들을 말해보시오. 완전히 반대되는것 같은 두 동무의 의견가운데 한가지 점에서는 일치하는것이 있습니다. 적에 대하여 배후타격을 하자는 점에서입니다. 그 배후타격을 국내에서 하는가 또는 장백지구에서 하는가 하는 지역선정에서 다를뿐입니다.》 이번에는 강세호련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두손을 맞잡은 그는 침착하고 여유있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리동학경위대장의 말소리가 기관총의 련발사격소리처럼 들렸다면 강세호련대장의 웅글고 느린 말소리는 멀리서 이따금 울려오군 하는 둔중한 대포소리같았다. 《지금과 같은 정황에서 국내작전을 앞당겨 실행한다는것은 모험일뿐아니라 시기상조이기도 하다는 경위대장동무의 견해에 나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곰의골밀영에서 자리를 옮기자는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무모한 공격으로 불필요한 손실을 봐서는 안되지만 자기를 먹으려는 적을 소극적으로 피하려 해서도 안될것입니다. 최상의 방어는 곧 공격이라는 원칙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출발하여 나는 전투력량을 크게 두대로 나누어 한대는 곰의골밀영을 방어하고 다른 한대는 적의 배후를 부단히 기습, 교란해서 적들이 우리 밀영에 대한 공격에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기합니다.》 《허허―》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장군님께서는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련대장동무는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옳은 말을 해놓고는 역시 절반은 방어를 해야 할것으로 생각는 모양이구만. 곰의골밀영에서 지금 자리를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나도 찬동하오.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 여기 틀고앉아 밀영을 방어할 작정을 할 필요가 있겠소?》 그이의 반문에 강세호는 멋적게 웃을뿐 아무 대답도 못했다. 《앉으시오. 론의의 초점을 맞추고 의견들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아무래도 내가 몇마디 해야 하겠구만.》 장군님께서는 책상앞에 바투 나앉으시며 량팔굽으로 책상을 짚으시였다. 《동무들이 협의에 참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을 고려해야 할것 같습니다. 우선 국내작전과 관련한 문제인데 현재 그것을 단행하는것이 왜 불합리한가 하는데 대해서는 경위대장동무와 7련대장동무가 대체로 언급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싶은것은 너무 주관적욕망만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건 때를 잘 골라야 합니다. 곡식을 키우고 꽃을 가꾸는것도 아무때나 하고싶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맞춤한 땅에 알맞는 곡식종자를 골라서 알맞는 때에 심어야 곡식이 제대로 싹이 돋고 자라며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기에 적작해야 한다고 농사군들이 말하는것입니다. 모든 동무들이 오래전부터 열망하고있는 우리의 국내작전도 때를 잘 골라야 합니다. 계절로 말하면 물론 겨울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 좋을것입니다. 그러나 겨울에도 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계절적조건보다는 국내작전을 단행할수 있는 군사적, 정치적 준비와 물질적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져있는가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국내작전에 대한 치밀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국내작전을 위한 사전정찰도 물론 조직하지 못했고 진군통로도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의 력사적인 국내작전을 성과적으로 도와주게 될 지하혁명조직들도 방금 꾸리는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무들이 총이나 들고 몸만 조국인민들앞에 내보여서 되는것도 아닙니다. 동무들모두가 인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커다란 인상을 줄수 있게 준비돼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말 한마디 해도 그렇고 인사 하나 해도 그렇고 옷차림 한가지 해도 그렇고 다 허술히 할수 없습니다. 적들의 봉쇄속에 든다든가 또는 다른 그 어떤 불리한 정황이 조성될 우려가 있다는것이 문제되는것이 아니라 우리자신들의 준비가 아직 국내작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할수 있을만큼 미치지 못했다는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국내작전을 주장해나서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시기상조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실망할것은 없습니다. 국내작전시기는 바야흐로 성숙되여가고있습니다…》 쥐죽은듯 고요하던 집안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피고 화기가 돌았다. 장군님께서는 이어 리동학경위대장이 내놓은 의견에서 제기된 밀영이동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다음으로 기피이동과 배후타격을 배합하자는 동학동무의 안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강동무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경위대장동무는 적들의 대대적인 〈토벌〉무력이 쓸어드는 조건을 고려해서 안전제일주의적인 길을 택하는게 상책이라고 여기는것 같은데 글쎄 싸움이란 정황을 봐서 맞서 때려야 할 때도 있고 피해 달아나야 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가 적들을 맞받아치구 자꾸 쳐서 놈들이 코피를 흘리구 머리를 싸쥐구 죽는 소리를 내는 꼴을 우리 인민들이 보고 가드라들었던 가슴들을 쭉 펴구 기운들을 내게 해야 할 때인만큼 적을 피할게 아니라 기회가 생기는대로 앞에서는 면상을 들입다 박아대고 뒤에서는 뒤통수를 줴박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곰의골에서 놈들을 맞받아싸우는것은 우리 혁명의 지휘처이며 심장부인 백두산밀영을 철저한 비밀속에 감추고 안전하게 위장하는데도 유리합니다. 놈들이 여기서 되게 면상을 얻어맞고나면 눈이 삐뚤어 사팔뜨기가 될수 있습니다. 눈이 일단 삐뚤어진 다음에야 그 삐뚤어진 사팔뜨기눈으로 별수없이 이 곰의골을 우리의 본거지인줄로 알고 여기만 흘끔흘끔 여겨볼게 아닙니까.…》 좌중에서 가벼운 웃음소리들이 났다. 계속하여 장군님께서 강세호가 내놓은 곰의골방어안에 대하여 말씀을 시작하시였을 때 조심스러우면서도 다급해하는 문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문옆에 앉아있던 리동학이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바깥에 나갔다가 오중흡정치지도원을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전방보초소에서 금방 우리 밀영을 찾아들어오는 밀정 두놈을 사로잡았습니다.》 오중흡의 보고에 집안의 공기는 삽시에 긴장해졌다. 밀영에 대한 적들의 《토벌》이 드디여 눈앞에 박두했다는 예감이 모든 사람의 머리속에 일시에 스며든것이다. 오중흡은 방금전에 밀정들을 사로잡던 경위와 그들에 대한 심문결과를 말씀드렸다. …몇몇 대원들을 데리고 전방보초소에 나가 경계근무를 서고있던 오중흡은 밀영에서 군정간부회의가 열리기때문에 전방보초소들에서 감시를 어느때보다 더 철저히 하도록 주의시켰다. 경각성있게 전방을 감시하던 마동희와 김운신은 농민옷차림을 한 사람 둘이 밀림속을 살금살금 헤치며 밀영지쪽으로 들어오는것을 발견하고 숨어기다렸다가 그들을 단속했다. 도끼사건이후 경각성을 높이고있었던 오중흡은 그들을 지체없이 심문했다. 단속된 두사람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기들은 자주 나무하러 이 근방에 오던 사람들이라고도 했고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부대를 찾아헤매던 길이라고도 했다. 《제가 좀 엄하게 따져묻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이것저것 주어섬기던 그들은 우리 밀영의 위치를 탐지하기 위해 들어온 밀정이라는것을 실토했습니다.》 《어떤자들이요?》 《한놈은 행상으로 가장한 간첩으로서 벌써 몇년동안이나 적들에게 복무해온놈입니다. 다른 한사람은 보기에도 순박한 농민같은데 놈들의 강박과 기만에 넘어가서 처음 그런 더러운 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어디서 들어왔소?》 《역시 이도강의 적들이 들여보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온 라남 19사관하 〈토벌대〉와 〈정안군〉놈들 500여명이 박격포까지 끌고 이도강을 출발하면서 그놈들을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밀정들을 멀리서 뒤따라오고있는 적들은 밀정들의 통보를 기다리고있는 모양입니다.》 《밀정들은 어떻게 했소?》 《붙잡은대로 묶어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다시 물으시였다. 《그 한사람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있소?》 《제가 보기엔 진심으로 뉘우치고있는것 같습니다.》 《다른놈은?》 《그놈은 눈이 돌아가는게 아주 쩌들어먹은 밀정입니다.》 귀틀벽의 나무옹이를 응시하시며 또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던 장군님께서는 한손으로 부혁을 거머잡으시며 오중흡에게 명령하시였다. 《악질밀정은 처단해버리고 자기의 죄과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순박한 농민은 돌려보내되 적들에게 가서 우리 인민혁명군이 삼개골에 많이 모여있더라고 말하게 하시오. 그리고 동무는 한개 소대쯤 데리고 삼개골에 내려가서 우리가 거기서 거접하고있는것처럼 흔적을 내고 돌아와 보고하시오.》 《알았습니다.》 오중흡이 복창하고 물러가자 장군님께서는 불시에 갈마든 전투의 예감으로 저으기 긴장해진 군정간부들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둘러보시였다. 《급한 정황이 생겨서 간단히 결속해야 하겠습니다. 적들의 이번 동기〈토벌〉에 대처한 대응책을 나는 이렇게 세웠습니다. 적들이 이른바 〈참빗전술〉로 우리를 〈소멸〉하려고 대수색전을 벌리고있는 정황에서 우리는 놈들을 밀영근처에 들여놓지 말고 앞질러나가서 족쳐버려야 하겠다는것입니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여러개의 소부대들이 계속 적통치구역의 곳곳에 나가 출몰하면서 적들을 부단히 위협하고 혼란시켜 적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게 해야 하겠다는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대부대는 은밀하게 류동하면서 적〈토벌부대〉의 큰 집단들과 적의 〈토벌〉거점들을 불의에 습격해서 놈들을 완전히 피동에 몰아넣고 소멸하자는것입니다. 이렇게 대부대들의 전투행동과 소부대들의 활동을 밀접하게 결합해서 적들이 도사리고있는 곳마다에서 큰 적도 치고 작은 적도 치며 동쪽도 치고 서쪽도 치는 방법으로 적을 부단히 타격하며 우세한 적을 분산약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려 각개격파하는것은 우리가 언제나 주도권을 쥘수 있게 하는 방도로 될것입니다. 공격하고 또 공격해야만 우리는 밀영들을 지켜낼수 있고 적의 이번 대규모적인 〈토벌〉공세도 짓부셔버릴수 있습니다. 군사에서나 정치에서나 생활에서나 나의 생활철학은 공격입니다. 공격해야 적을 타승할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적의 〈동기토벌〉에 대한 우리의 공세를 시작해봅시다. 우선 적을 맞받아 삼개골에 나가서 매복진을 쳐놓고 적을 족치는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가 봅니다. 이제 곧 헤쳐가서 전투준비들을 갖추도록 하시오.》 장군님께서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바깥에서는 굵다란 고드름이 떨어져 깨여지는 소리가 그 무슨 먼 폭음처럼 들려왔다.
삼개골은 백두산주변의 고원일대에 있는 골짜기들이 거의다 그렇듯이 펑퍼짐한 산더기속에 갑작스럽게 깊이 꺼져들어가있는 19도구의 한 계곡이다. 백리나마 된다는 19도구의 안쪽 깊이 자리잡고있는 좁고 긴 삼재골에서 더 깊은 오지인 곰의골로 들어가는 골어귀는 잘룩한 병 모가지마냥 묘하게 생겼다. 이 골어귀의 량쪽 비탈은 경사가 몹시 가파로운 벼랑을 이루고있다. 그러므로 먼 옛날부터 삼개골에서 곰의골로 드나들며 살아왔던 곰들조차도 내물이 흐르는 골바닥으로 길을 잡지 않고서는 삼개골에서 곰의골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것이다. 눈이 깊이 쌓여 곰들도 굴속에 들어박혀서 발바닥이나 이따금 핥으며 긴긴 잠을 자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겨울이 되면 이 좁은 골짜기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도 메아리치는 때가 드물다. 태고연한 정적이 깃든 이 깊고 좁은 골짜기에서 위세를 부리며 아름답지도 못한 거쉰 소리를 때때로 질러보는것은 갑작스럽게 좁아진 잘룩한 골짜기를 빠져나가기가 급해서 비명을 울리는 바람뿐이다. 곰의골밀영에서 군정간부회의가 있은 다음다음날인 11월 12일에는 이 잘룩한 골어귀에 바람마저도 불지 않아서 태고연한 정적을 깨치는것이라군 아무것도 없었다. 골바닥을 흐르는 개울물은 두터운 얼음과 그보다 더 두터운 눈밑에 묻혀버려서 기막히게 고요한 이런 아침에조차 변함없이 주절거리고있을 그 물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날이 밝기만 하면 재잘거리기부터 하는 수다쟁이메새들마저도 모질었던 간밤의 추위에 부리들이 죄다 얼어붙어버렸는지 꿈쩍하지 않았다. 태고적부터 물려오는 그 자연, 그 정적만 있는것 같은 이 좁은 골짜기의 서쪽벼랑중턱에서 문득 한점의 금빛섬광이 반짝였다. 섬광이 반짝인 그 어방에서 물씬물씬 흰 입김이 떠올랐다. (아이 깜짝이야. 2중대동무들이 바로 저 어방에 숨어있는걸 몰랐어! 아주 감쪽같이 매복했구나.) 맞은편 벼랑밑에 매복하여 2중대동무들이 어디쯤 있는지 몰라 궁금해있던 라명희는 총구에 부딪치며 섬광을 날리는 아침해살의 반사광에 비로소 그들이 어데 숨어있는지를 알고 혼자 소리없이 웃었다. 맵짜게 추운 아침이다. 숨을 들이킬적마다 코구멍안에 바늘이 솟아 점막을 쿡쿡 찔러대는것 같다. 손가락, 발가락은 자기 몸의 어느 부위에 필요없이 덧붙어있는 그 무슨 거치장스러운 부분품 같이 느껴지다가도 약간만 놀리려 들면 그 마디마디에서 온몸에 참기 어려운 동통을 보내준다. 거기로 통하는 피줄은 죄다 얼어버리고 심한 아픔을 전달하는 신경만 간신히 통해있는 모양이다. 온밤을 꽁꽁 얼며 눈속에 엎드려있는 그들이였다. 군정간부회의가 있은 뒤끝에 지체없이 여러개의 소부대들을 편성하시여 그들에게 적구의 곳곳에 나가 한바탕 분주탕을 피우며 돌아가라는 과업을 주어 떠나보내신 장군님께서는 그 이튿날인 어제아침에 친히 7련대의 두개 중대를 인솔하시고 곰의골밀영지를 떠나 여기 곰의골어귀로 나오시였다. 눈이 깊이 쌓여있어 밀영에서 곰의골어귀까지 나오는데 거의 어제 하루해를 다 바쳤다. 하긴 낮이 제일 짧아져가는 때인만큼 하루해라야 여름날의 한나절 맞잡이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무렵에 이곳에 이른 그들은 장군님의 명령에 따라 매복진을 펴놓고 이제껏 눈속에 엎드려있었던것이다. 긴긴 지난밤을 그들은 불 한번 못쬐보고 얼대로 얼었다. 여기에 매복해있다는것을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우등불을 피우는것도 큰소리로 말하는것도 금지시켰다. 우등불도 없이, 노래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이 얼어드는 몸을 꼼짝 움직이지 못하고 눈속에 엎드려지내야 했던 간밤은 참으로 지루했다. 추억의 갈피속에서 삼도만유격구로부터 옹구일대에 지하공작을 나온 권영벽을 처음 자기 집앞의 우물가에서 만나보던 그 잊을수 없는 여름날저녁도 들춰보고 그가 두번째로 자기집 웃방안에 와앉아있는것을 보았을 때 어째서인지 아버지가 들여오라던 물사발을 들고 방에 들어가다가 그만 문턱에 발을 걸채이며 물사발을 떨어뜨려 망신당했던 일도 돌이켜보고 그밖의 가지가지일도 추억해봤지만 그 하많은 생각들을 잇고 또 이어도 지독스럽게 지루한 매복의 하루밤보다는 어방없이 짧았다. 여름밤과 달리 겨울밤은 길기도 하다. 긴긴 지난밤엔 한순간의 어설픈 잠도 들수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잘못 눈을 붙였다가는 얼어죽고마는 혹한이였다. 라명희는 무서운 추위속에서 매복의 밤을 꽁꽁 얼며 밝혔다. 원쑤놈들을 잡기 위하여 고통을 참았다. 그러나 아직도 적들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직도 고통은 얼마나 더 끌는지 모른다. 라명희의 옆으로 주먹만한 눈덩어리가 데굴데굴 굴러내려왔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령부전령병 주봉길이가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날파람있게 눈속을 헤치며 내려와 명희의 옆자리에 엎드려있는 곽두섭에게로 다가갔다. 《중대장동지!》 곽두섭은 꽛꽛이 언 두손바닥으로 새파랗게 언 얼굴을 세괃게 문대고있다가 전령병을 맞이했다. 《매복진에서 떠나지들말고 그 자리에서 속히 아침식사들을 하라는 사령관동지의 지시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매복규률을 더 잘 지키라고 합니다. 특별히 주의들을 주라고 하시였습니다.》 전령병은 이발을 덜덜 맞쪼으며 뜨직뜨직 전하였다. 《매복진을 리탈하지 말고 아침식사들을 조직할것, 이제부터는 매복규률을 더잘 엄수할것, 제길, 볼째기가 얼어서 말두 제대로 못번지겠군, 그거요?》 《이상입니다.》 《알갔소.》 전령병은 관목가지들을 휘여잡으며 날쌔게 벼랑웃쪽으로 톺아올라갔다. 곽두섭은 라명희를 돌아보며 다음사람에게 매복진지를 뜨지 말고 그냥 그자리에서 아침식사를 하라는 지시를 전달하라고 일렀다. 그 지시는 매복진을 따라 다음사람, 또 그 다음사람에게 전해져갔다. 어제아침에 밀영에서 떠날 때 배낭속에 집어넣었던 주먹밥은 얼어서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언 배속에 언 보리조밥을 먹고 목이 말라 눈까지 핥고나니 몸은 더 떨렸다. 총의 쇠붙이에는 손이 떡떡 얼어붙었다. 이런 때에 적이 나타나면 야단이다. 총알을 재우고나면 격발기 손잡이에 손이 얼어붙고 한방 갈기고나면 또 방아쇠와 방아쇠호철에 손가락들이 얼어붙어버릴판이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니 명중해낼 재간도 없을것이다. 해살이 쫙 퍼지고 약간만이라도 언몸이 풀린 다음에 적이 나타나주기를 바라고있을 때 무심결에 골짜기아래쪽으로 눈길을 던진 라명희에게는 그 무엇인가 언뜻 나무사이로 지나간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시에 긴장해진 명희는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언뜻거렸던 그 분비나무숲사이를 눈여겨살폈다. 안타까울만치 좁은 틈바구니를 이룬 공간으로는 흰눈에 덮인 먼 골바닥이 약간만 보였다. 잠자지 못해서인지 눈이 시여서인지 또는 온몸이 너무 떨려서인지 눈이 아물아물해서 그 좁은 틈바구니로 내려다보이는 골바닥도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데 또 한번 언뜻 무엇인가 지나간듯 한 느낌이 들었다. 《중대장동지, 저길 좀 보세요.》 명희는 눈속에 엎드려 아직도 언 주먹밥을 깨물고있는 곽두섭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얼음같은 주먹밥을 아등아등 씹는 입안소리에 곽두섭은 명희의 낮은 말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였다. 명희는 살그머니 눈덩이를 쥐여던졌다. 눈덩이는 면바로 곽두섭의 앞에 있는 앙상한 오미자나무가지에 부딪치며 와시시 부서졌다. 털모자에 성에가 붙어 얼굴을 둘러싼 개털이 온통 새하얀 곽두섭은 그를 돌아보며 입안에서 씹던것을 꿀떡 삼키고 솜군복 소매굽으로 시퍼렇게 언 입술을 훔쳤다. 《매복규률을 엄수하라는데 롱질이요?》 곽두섭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며 눈을 부릅뜬다. 《저길 좀 내려다봐요.》 《응? 어데말이요?》 《저기 저 나무사이루… 저 아래골짜기바닥에 뭣이 언뜩거리는게 뵈지 않아요?》 곽두섭은 명희가 손으로 가리키는쪽을 기웃거리며 살펴보았다. 《여기선 아무것도 안뵈는데… 무어요?》 《짐승인지 사람인지 뭣인지 모르겠는데 뭣인가 얼른거린것 같았어요.》 곽두섭은 먹다남은 주먹밥을 통채로 입안에 쓸어넣고 우물거리며 목을 길게 빼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녀성중대의 소대장이였던 라명희는 녀성중대가 없어진 뒤에 곽두섭이가 새로 맡은 중대소속의 평대원이 되였다. 이 새로운 조치는 인차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남성들이란 저들끼리는 우둘렁거리고 우락부락하고 거칠은것 같지만 녀성에 대해서는 거의나 례외없이 다정하고 살뜰하게 대하는 법이다. 새 중대에 옮겨앉은 라명희는 녀성중대의 소대장지위에 있을 때보다 몇배나 더 떠받들리우며 지냈다. 그의 중대원들은 《부대의 꽃》인 라명희가 다름아닌 자기들의 중대에 있는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그야말로 공주모시듯 했다. 중대별 오락경쟁이나 문답식학습경연같은것이 벌어질 때면 자기 중대의 빛을 내기 위해서 언제나 라명희를 앞에 내세우군 했다. 전투할 때나 숙영할 때엔 그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제공하군 했다. 지금도 명희는 제일 안침지고 사격하기에 편리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우리 〈공주님〉이 눈이 밝긴밝군. 저어기 무스게 하나 나타났소.》 곽두섭중대장이 씹던 주먹밥을 입안에 잔뜩 문대로 혼자소리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보여요? 뭐예요?》 《음, 사람이요. 또 한사람 나타났소.》 명희의 눈에도 숲의 한쪽끝으로 나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마침내 비껴들었다. 흰 위장포를 둘러치고 총을 멘 사람이다. 바싹 긴장해지고보니 떨리던 온몸이 더구나 떨렸다. 《사격준비!》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곽두섭의 낮으나 힘찬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그 구령을 전달하는 말들이 량쪽에서 매복진을 따라 전체 중대원들에게로 옮아져갔다. 그에 뒤이어 탄알을 재워넣는 절컥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시계가 탁 트인 골바닥에 두번째 사람, 세번째 사람이 나타났다. 넷, 다섯, 여섯… 아홉사람이다. 골바닥 눈우에 난 한가닥의 발자국길을 따라 종대로 걷지 않고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마구 흩어져 생눈길을 내며 걸어들어왔다. 웬일인지 자주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들본다. 한참이나 지나도록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뒤쪽에서는 사격신호의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곽두섭은 권총에 절컥 안전장치를 하고는 부시럭거리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방금 언 주먹밥으로 조반을 치르고난 그는 식후에 피우지 않고는 못견딘다는 담배를 피워볼 차비였다. 그것을 본 명희는 놀라며 물었다. 《저건 적들이 아니예요?》 《아니요. 어제밤에 별빛을 밟으며 떠나갔던 우리 유인조동무들이요.》 곽두섭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종이에 막담배부스레기를 쥐여놓고 말기 시작했다. 《적을 홀려 끌어들이느라구 일부러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자리를 만들며 들어오지들 않소? 사령관동지께서 또 한수 쓰셨단 말요.》 곽두섭은 저아래를 보란듯 한눈을 찡긋거리며 담배를 만 종이의 한끝에 침을 발라붙였다. 많은 사람이 지나간것 같은 발자국자리를 내며 골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유인조성원들은 곰의골어귀 안쪽에 있는 산비탈로 오르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속에 혹시 영벽오빠도 끼여있는게 아닐가?) 문득 명희의 머리속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요즘 거의나 권영벽을 보지 못한채 지내오고있었다. 권영벽이가 백두밀영에 있는지 다른 밀영에 갔는지, 그가 요즘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명희는 그가 백두산밀영에 도착한 이래 두세번, 그것도 어쩌다 사령부에 드나드는것을 얼핏 보았을뿐이다. 그러므로 라명희는 유인조성원들을 보면서도 그가운데 혹시 적후에 무슨 일로 나갔을지 모를 권영벽이가 끼여있지나 않을가 하는 헛된 기대를 걸어보는것이다. 유인조성원들이 올라간 산비탈에서는 물씬 연기가 솟구쳤다. 《어마나, 저 연기!》 산비탈쪽을 올려다보고있던 라명희는 저절로 놀라 소리쳤다. 《저게 무슨 연길가요, 중대장동지?》 《괜히 놀랄것 없소.》 담배를 피우고있던 곽두섭은 알만하다는듯 히쭉 웃었다. 《놈들이 보란듯이 일부러 피우는 우등불 연기일거요. 이제 놈들이 이 골짜기안에 들어설 때쯤 되면 저기선 아마 떠들썩한 오락회가 벌어질걸.》 《저겐 누구누구들이 있어요?》 라명희는 저 사람들속에 권영벽이도 혹시 끼여있지 않는가고 묻고싶었지만 이렇게 에둘러 물었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왜놈들에게 왜말루 걸죽하게 쌍스러운 욕질두 잘하는 제일 유쾌하구 날파람있는 친구들이요.》 곽두섭은 또다시 담배를 한대 더 말아피웠다. 그가 그 담배를 다 태우도록 적막한 골바닥에는 아무러한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마침내 등어리에 해볕이 쬐여들었다. 총신에 돋아있던 서리들이 녹아 작은 물방울을 이루고 성에가 끼여 하얗던 눈속의 오미자나무가지들에서도 가는 김을 날리는 물이 흘러내렸다. 참으로 고마운 해볕이다. 차츰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한다. 견디기 한결 나아진 한낮에 매복진에서는 마지막 주먹밥을 그냥 언대로 녹여먹었다. 점심을 치르고난 곽두섭은 병원에 와있는 조분옥이가 만들어줬다고 소문난 그 고운 담배쌈지를 무릎우에 펴놓고 또 담배 한대를 두툼하게 말아피웠다. 그럴 때 사령부 전령병 주봉길이가 다시금 라명희의 뒤에서 다람쥐같이 굴러내려왔다. 그는 곽두섭옆에 이르자 황황히 일렀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담배를 즉시 끄라는 장군님의 명령이십니다.》 《뭐, 적이?! 어디?》 《빨리 입에 문 담배부터 버리십시오. 숲우로 담배연기가 떠오릅니다.》 곽두섭은 얼른 담배를 뱉고 그것을 눈속에 주먹으로 처박았다. 《미안하오.》 《미안이 뭡니까? 장밤 떨며 매복한게 그 담배연기때문에 헛수고로 되겠다고 장군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압니까? 언제나 삽삽하던 애어린 전령병은 담배따위 일로 급한 때에 자기를 여기까지 오게 한 곽두섭에게 되알지게 쏘아대고는 날파람있게 물러갔다. 이런 때엔 다람쥐가 아니라 고슴도치같았다. 라명희는 골바닥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낮의 겨울해볕이 눈우에서 평온하게 조을고있는 고요하고 적막한 골바닥에 처음에는 말그림자를 앞세우면서 밤빛말을 탄 기마병이, 다음에는 흰말, 그다음에는 회색 그리고 련이어 각양각색의 말들을 탄 기마병들이 눈앞을 가리워놓고있던 숲언저리에서 나타났다. 총신들과 군도들과 장화들이 해빛에 번쩍거렸다. 기마척후대는 병모가지마냥 잘룩해진 골짜기의 량옆에 바투 다가선 산비탈을 두릿두릿 살펴보며 아침에 유인조원들이 지나온 길을 따라 점점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라명희는 총구를 맨선두에 선 밤빛말의 기마병에게 겨눠놓고 그놈이 움직이는대로 서서히 총구를 움직였다. 그놈은 갑자기 말을 멈춰세우더니 뒤따라오는놈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골안쪽을 가리켰다. 뒤따르던 다른놈들도 련이어 말을 멈춰세우며 한데 몰켜 처음놈이 가리키는 골안을 넋잃은듯 쳐다보았다. 그 골안쪽에서는 여전히 우등불연기가 솟구쳐올랐다. 그리고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곽두섭의 말대로 유인조성원들이 우정 적들이 들으라고 오락회를 벌린 모양이였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서 골안쪽을 보며 쑥덕거리던 기마대놈들은 일시에 말머리를 돌려 저마끔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바로 라명희의 눈아래 정면 바위돌뒤에 와서 머물러섰다. (네놈들이 온걸 우리가 모를줄 알고? 이놈들, 바로 네놈들의 머리우에서 요렇게 내려다 보고있다.) 라명희는 자기의 매복처에서 훌쩍 뛰여내리면 그냥 그대로 기마병의 숨통을 눌러 자빠뜨리고 말안장을 빼앗아탈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덮쳐든다면 저 다리가 늘씬하고 털에 기름이 번질번질하는 검정말을 탄놈에게 면바로 뛰여내리리라. 그리하여 저 늘씬한 검정말을 빼앗아타고 장검을 휘둘러 저놈들의 목을 삼대베듯 하리라. 그렇게 장쾌한 랑만적인 생각을 하는데 불현듯 바로 그 말이 무리를 헤치고 골짜기 아래쪽으로 향하였다. 그에 뒤이어 다른 두필의 말이 또한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들이 사라진지 반시간쯤 지난 뒤에 드디여 다시 나타난 그 말들을 뒤따라 보병종대들이 꾸역꾸역 쓸어들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자기들의 머리우에서 수많은 총구가 겨누고있는줄은 알지 못하고 더 야단스럽게 연기가 피여오르고있는 곰의골어귀 안쪽치기에만 눈이 팔려있었다. 종대의 선두마다에 말을 타고 어깨에 만또를 둘러친 장교놈들이 긴 군도를 번쩍거리며 앞섰다. 그놈들의 팔소매끝에 붉은 띠가 없는것을 보고 라명희는 바로 이자들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라남19사단소속 함흥74련대의 일본군패거리들이라는것을 알아챘다.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토벌》행각이였다. 골안에 꽉 들어찬 적부대들의 뒤꼬리에는 기르마에 박격포들을 각을 뜯어 얹은 말행렬이 뒤따라왔다. 한눈에 이렇게 많은 놈들을 바로 눈아래 굽어보며 엎드려있기는 라명희도 처음이였다. (네놈들은 74련대, 우리는 7련대 4중대… 서로 칠, 사가 맞다들었는데 어디 누가 이기나 좀 겨뤄보자. 그런데 어째서 아직 사격신호를 올리지 않을가?) 라명희는 눈아래 욱실거리는 적들이 어디로 다 빠져달아나버릴것만 같아 초조했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서는 땀이 났다. 두번째 종대앞에서 말을 타고가는 장교놈을 겨냥하고 총구를 서서히 움직이고있던 그는 불현듯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치는듯 한 장군님의 사격신호 총성이 울리자 손가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장갑을 벗어들고 만또를 제치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를 문지르려던 장교놈은 들었던 손을 이마에 갖다대지 못한채 허공에 뻗치더니 먼저 그 손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어 꼿꼿이 폈던 허리를 굽히지도 못한채 그냥 나무등걸마냥 굴러떨어졌다. 일시에 몰방으로 터져나온 총소리에 놀란 말이 두앞다리를 버쩍 쳐들었다가 혼잡을 이룬 병졸들속으로 마구 돌진했다. 말우에서 떨어진 장교놈은 등자에서 발이 뽑히지 않아서 말이 뛰는대로 눈우에 끌리고 바위돌에 부딪치고 대가리를 나무밑둥아래에 처박은놈을 짓찧고, 도망치는놈이 던지는 총창에 찔려 눈우에 선지피를 시뻘겋게 물들이면서 거꾸로 끌리워갔다. 숱한 놈들이 어깨에서 미처 총도 내리워보지 못하고 첫탕에 나가너부러졌다. 혼비백산한놈들은 산지사방으로 들고뛰며 서로 박고 치고 꺼꾸러뜨리는가 하면 웅뎅이건 나무밑둥이건 바위돌이건 아무데나 머리를 틀어박기도 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들을 여기 몰아넣구 잡자구 우린 엊저녁부터 장창 눈속에서 얼며 기다렸다. 우릴 그쯤 얼게 했으니 어디 된맛 좀 봐라!) 매캐하게 떠돌기 시작한 화약내와 자욱히 서리기 시작한 화약연기에 더욱더 기운이 뻗쳐오른 라명희는 엎드려 쏘는것이 마음에 성차지 않아서 훌쩍 일어나 앉아 총을 쏴갈겼다. 총으로 갈겨대다간 수류탄을 던지고 수류탄을 뿌리다간 또 총을 쏘면서 갈팡질팡하는 놈들에게 된맛을 보이던 라명희는 사령부의 돌격나팔소리가 메아리쳐오자 곽두섭을 뒤따라 벼랑아래로 뛰여내려갔다. 와―와― 어울리는 만세의 함성이 좁은 골짜기에 진동했다. 총을 비껴든 유격대원들이 량쪽 벼랑중턱에서 백포자락을 날리며 공포에 질려 아우성치는 적들의 무리를 향하여 돌사태마냥 쏟아져내렸다.… 이날의 전투에서 라명희는 몇자루의 보총과 함께 작고 아담한 새 권총 한자루를 얻었다. 그날밤 장군님께서는 삼개골아래쪽으로 정찰조를 보내시여 낮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도망친 적들이 새로 증원되여온놈들과 함께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숙영할 차비를 하고있다는것을 확인하시고 적숙영지를 습격할 전투를 조직하시였다. 그 전투과업이 오중흡에게 차례졌다. 습격조를 인솔하고 적들이 숙영하고있는 곳으로 은밀히 접근한 오중흡은 우선 나무밑에서 졸고있는 보초병을 사로잡았다. 습격조는 그자에게서 압록강을 건너온 함흥74련대의 파견군과 혜산수비대의 《토벌군》은 숙영지의 복판에 자리잡고 그 두리에 《정안군》놈들이 보초망을 둘러치면서 자리잡았고 맨 바깥쪽에 짐을 지고 온 농민들이 잠자리를 정해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보초도 위만군들만 서고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군놈들은 우등불곁에 젖은 신발들을 벗어들어 말리우면서 곤하게 잠만 자고있다는것이였다. 습격조는 세명씩 나뉘여 순찰병으로 가장하고 숙영지복판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생포한 보초병에게서 알아낸 군호를 통해 보초선을 무난히 통과하여 일본군놈들이 자고있는 천막가까이에 이른 습격조들은 조단위로 천막을 맡아가지고 일시에 분담사격을 들이댔다. 자다가 된벼락을 맞은놈들은 신발도 못신고 마구 헤덤벼쳤다. 발칵 뒤집힌 숙영지안에서는 향방없이 마구 쏴갈기는 저들끼리의 총알에 맞아 숱한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너부러졌다. 이 무리죽음의 숙영지에서 다시금 간신히 살아도망쳤던놈들도 이날밤의 된추위속에서 거의다 얼어죽고말았다. 신발도 못신고 털외투도 못입은채 들고뛴놈들이 장백의 혹한을 견디여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이 여지없는 참패에 화가 난 함흥74련대의 《토벌》파견대장 요네즈와 혜산수비대 《토벌》대장 다네구찌는 저들과 같이 삼개골에《토벌》행차로 들어갔던 《정안군》대대 장교들을 이튿날 모조리 총살했다. 위만군의 배신적소행때문에 일본군인들만 거의다 녹아났다고 터무니없이 걸고들면서 악에 받쳐 행패질을 한것이다. 멋모르고 덤벼든 함흥74련대놈들과의 첫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유격대전투원들은 자기들을 친히 인솔하시고 전투를 지휘하신 장군님을 따라 유유히 곰의골밀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밤에 편안히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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